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2018년 8월 29일 서울신학대학교 정문 앞 카페 '이유'에서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박영식 교수님(서울신대 조직신학)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창조의 신학』(동연)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그 책의 내용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이 많아 두 번에 나눠서 소개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박영식

사진/글 | 심기주




[과] 바벨론 포로 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흑암이 '이런  뜻하는 구나'라고 받아들였을지, 아니면 그냥 내러티브로 받아들였을지 궁금합니다.


[박] 개개인의 심리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고대 세계의 표현방식사고방식을 우리는 은유라고도 얘기하고 신화라고도 얘기하지만, 당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같아요당시 사람들에게는  표현이야말로 가장 자기들의 삶에 익숙한 표현이었다는 거죠실제로  세계를 혼돈의 세계흑암의 세계로 경험하는 거죠오늘날 우리는 홍수가 나면 여러 과학적인 관심을 갖고서 비가 몇 mm 왔는지, 어디가 침수지역이고, 어디가 안전한지 관찰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이거든요이거는 우리 지역은 홍수 나고  동네는 괜찮고가 아니고,  세상이 물에 덮인 거죠탈출구가 없는 거죠이게  아주 진정성 있는 표현보다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요우리가 흔히 창세기 1장이 바벨론 신화를 빌려왔다 어떻다 하지만,  바벨론 신화도 그 당시 현실 세계에 대한 반영이거든요그러니까 이게 그냥 문학 작품의 표현이 아니고 실제 경험 속에서 나오는 언어들이죠실제로 우리도 그런  있잖아요보통 때는 학문적인 이야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 속에서 나오는 언어들은 보다  1차적이고 근원적인 언어가 나오잖아요그런 언어들이라고  수가 있죠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성서의 언어들이 당시 사람들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언어지 오늘날 우리가 분석하듯이 2차적으로 은유인가 비유인가’ 이렇게 접근했던 언어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그들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세계를 표현한 거죠.


[과] 책에서 진화를 다뤘는데해외에서는 신학자가 진화를 다루거나 설명할   부담이 없는데 우리는 아니잖아요. 신학자로서 진화를 언급할 때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박] 맞아요. 예전에 제가 강남의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 어디 가셨다고 1부 예배부터 4부 예배까지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때 진화 얘기도 아니고 노아 홍수 이야기를 조금 하면서 '창조과학식으로 노아 홍수를 이해하는 것은  무리인  같다'라고 말했는데, 1부 예배가 끝나고 수석 부목사님이 올라오시더라고요. “목사님 그렇게 설교하시면 안됩니다앞으로 2, 3, 4부가 있는데 우리 교인들은 온누리교회 출신들이 많아요.” 그러셔서 알겠다고 했죠 있다가 다른 부목사님이 올라오신 거에요. “아휴 목사님 오늘 설교 너무 감사합니다이거 우리 청년들이 모두 들어야 할 설교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러는 거에요교회 내에서 관심사들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죠.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진화가 과학적으로 옳다 그르다' 그런  제가 주장해봤자 권위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고(말이죠). 그게 아니라 진화라는 틀을 우리가 수용한다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을성서를 충분히 이해할  있다이게 서로 대립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요소는 아니다.’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생물학자들마다 어디부터가 진화고 어디부터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제가   진화라는 단어가 주는 역동성이  속에  담겨있다고 봅니다.  역동성은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굉장히 필요한 관점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고 창조를 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는 진화가 주는 언어의 역동성을 우리가 충분히 수용할  있고 신학적으로 좀 더 생물학적인 의미와는 다른 빛깔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이건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앙의 선배들도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이어서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그분들이  창조론을 보면 창조를  가지로 나눴거든요. “태초의 창조(creatio originalis)”,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마지막 창조 또는  창조(creatio nova)”라고 해가지고 벌써  가지로 나눠놨어요이게 벌써 교리적으로 300~400  이야기인데, 우리는 창조할  태초의 창조 생각합니다그러나 이미 기독교 교리 속에 루터파 정통주의개혁파 정통주의 모두 계속되는 창조를 말해 왔거든요 계속되는 창조를 우리는 흔한 말로 '섭리'라고 하는데 섭리라는 말을 하면서 창조가 갖고 있는 풍성함이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아무 때나 섭리라고 써버리니까자기 뜻대로  건데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버리니까 말이죠그런데 사실 이게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주체는 하나님이잖아요내가 아니라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했고그리고 끝내버리는  아니라 계속 창조하고 계시고  창조를 완성하신다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처음과 끝, 그리고 지금도 창조활동 속에서 행하신다는 이야기가 돼죠그런 관점에서 봐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섭리보다 폭이 훨씬 넓고, 생물학적인 진화도 충분히 수용 가능합니다. 그런 패러다임이 이미 기독교 신학 안에 있는데 그걸 우리가 잊어버리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창조는 예전 얘기로 끝났고 우리는 지금 타락했고 그런데 이젠 구원받아야 하고그래서 중요한  구원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 창조라는 패러다임은 끊긴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는 창조 일어나고 있는 거죠저는  부분을 조금 강조하고 싶었던 거고요섭리라는 부분이 너무 우리 일상과 연관해서 자기 마음대로 작위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방지해야겠습니다그래서 계속되는 창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계속되는 창조라는  단순히 우리 일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라는 범위영역 전체를 포괄하는 창조라는 점에서 오늘날 환경문제 이런 것도 우리가 같이 고민할  있는 중요한 기틀이 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런 면에서 창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하나님은 계속 창조하시는 분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면은  틸리히 같은 사람은 창조를 "하나님의 창조적 힘이다!" 이렇게까지 말했죠여기에 몰트만 같은 사람은 약간 비판도 하지만  충분히 틸리히의 관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는 일어난다고 봅니다하나님의 섭리가 멈추지 않는다고 우리가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창조도 계속 일어나는 것이죠그런 면에서 창조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바로  곁에 있는 사건입니다사실  분이 저를 찾아온 것도 창조적인 사건인 거죠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지금 만나서 밥 먹는 것도 창조적인 사건이죠내가 생각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이런 창조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은 끊임 없이 우리 속에서 같이 동행하면서  표현으로 하면 끊임없이 가능성의 창들을 열어놓고 계신다.”  그렇게 보고요그런 표현들이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가서 무로부터의 창조, 혼돈으로부터의 창조처럼 우리에게 고난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거죠.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하나님은  섭리하지 않으시지? 하나님은 일하시는가?' 이게  창조에 대한 질문인데, 그럴 때도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것처럼  수면 위에 계신 거죠. 거기 계시면서 하나님은 창조의 문을 열어놓으신 겁니고난 당한 사람은 우리가 흔히 절망한다고 하잖아요절망한다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건데,   하나님은 새로운 문을 열어놓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세요 우리는 눈을 뜨고  길을  수도 있고 눈을 감을 수도 있고.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지금까지 없던 길들을 보도록 유도하시고 인도하시고저는 그런 면에서 창조라는 것이 아주 거대한 세상없던 기계를 새로 발명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도 자잘한 일들 속에서도 창조가 익숙한 개념이 되었으면 좋겠다그런 생각입니다.



[과] 가장 중요한 주제일 듯 한데요. 창조나 환경을 강조하며 일상에 주어진 것들을 누리고 감사하며 사는 삶은 세상에 대해 너무 낭만주의적인 시각이 아닐까요? 지금 세상은 굉장히 불의하고 고통받고 어그러진 세상이라고 본다면, 여기에 저항하고 치유해야 한다는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악과 고통하나님의 창조의 선함과 신비가 동시에 가잖아요 사이에서 대안을 설명해주실  있으실까요?


[박] 하나님은 새로운 질서를 계속 만들어내시는 분이지 정해놓은 질서에 우리를 붙잡아 두는 분이 아닙니다. 창조라는  옛날에 끝나버렸고, 만들어 놓은 틀에 맞춰서 돌아가야 하는게 아니죠.  하나님이 새로운 질서를 계속 만드신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질서라는 개념은 창조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과거로 회귀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 새롭게 나아가야 할 개념으로 봅니다. 우리가 흔히 던지는,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다는데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도 물론 사변적으로 여러가지 대답할  있겠지만우리가 서있는 현실에서  질문을 다시 곱씹어보면 거꾸로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이렇게 악과 고통이 있는데, 과연 여기에 새로운 질서의 세계가 만들어질  있는가과연 여기에 창조가 가능한가?' 이렇게 질문했을  성서의 대답은 가능하다라는 거죠우리가 경험하는 악과 고통이 있는 현실세계는 하나님이 만들어가실 창조세계와 대결국면에 있고, 혹은 그런 과정 속에 있다고 보는 거죠. 그러나 그 세계가 현실세계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현실에 순응하고 덮어두기보다는 우리가 이 땅을 극복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아름다운 것이 많아야 할텐데 악이 많은 이유는 뭘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모든 물리적 세게에도 자유가 있습니다. 실제 우리 세계는 인과율로 얽매여 있는 세계가 아니라 보다 우연적이고 자유로운 작용이 많은 세게입니다. 이런 자유로움이 많은 세계가 악이라는 예기치 못한 것의 근거가 될 수 있겠죠. 물론 선이 일어날 수 있는 근거도 될 수 있고요. 


우리의 물리세계는 마치 축구 경기와 같습니다. 축구경기를 볼 때, 감독이 직접 축구경기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축구경기가 감독의 영향 없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마치 하나님은 감독과 같습니다. 물리 세계에서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죠. 손흥민이 골을 넣었을 때, 골을 넣는 과정은 축구장 안에서의 상호과정만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거기에 감독의 작전과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나님 없이 물리 세계의 현상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자유가 있어야 하나님이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이 가능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고, 또 인간의 삶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신학적인 논의도 다 의미가 없죠. 이미 짜여진 것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유를 허용하고 그냥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창조 세계에 같이 참여하시면서 창조의 모험 속에 동참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과] 조직신학에 여러 주제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과학자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주제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를 연구할 수 있겠죠. 신학적으로 완전히 은유였다고 볼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그 당시 사람들이 부활을 보고 듣고 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신령한 몸'이라는 용어 자체가 짬뽕이죠. 영이라는 말과 몸이라는 말이 결합되어 '신령한 몸'이라고 했는데, 이게 보통 몸은 아니니깐요. 종말의 때에 변화된 몸일텐데 그건 대체 어떤 몸일까요? 


또 어떤 이들은 최근에는 과학자나 생태학자들이 환경에 대해서 고민이 많은데, 왜 신학자들은 고민하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이 부분도 연구해야 할 주제라고 봅니다. 또 하나님이 세상을 섭리하신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 물리 세계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말이죠. 갑자기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서 개입하나요? 아니면 물리 세계의 물리 법칙으로 섭리하나요? 같이 연구하면 재미있는 대화가 될 거 같군요.





이 글은 박영식 교수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영식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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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6 / 2018.09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