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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이야기/과신대 사람들

과신대 사람들 (14) 박일준 교수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8. 11. 6.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이번 달에는 제3회 과신대 포럼에서 강의를 해 주신 감신대학교의 박일준 교수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저희 과신대 자문위원으로 섬겨주시기로 했습니다. 평소 과학과 신학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학제간 연구에 관심이 많으신 교수님을 만나뵙고 최근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다음 기회에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또 있겠죠~ 


인터뷰어 | 백우인, 심기주 기자

인터뷰이 | 박일준 교수

사진/글 | 심기주 기자



Q: 교수님이 번역하신 자연주의적 성서해석학과 기호학: 해석자들의 공동체에서 해석자들의 공동체가 바울 공동체를 뜻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요즘 바울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정의에 대한 해석도 새롭게 해석하고 있고요. 교수님도 정의에 대한 책을 내셨는데 거기서는 정의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A: 시중에 나와 있는 바울에 대한 책은 바울에 대한 것이지 바울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죠. 바울 공동체와 바울이 같은 것은 아니예요. 초대교회를 얘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초대교회가 공동체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공동체끼리 모여서 존재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공유하기 시작하죠. 그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라고 말했던 아이디어는 지금의 아이디어와는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여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이러는 게 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러운데, 그 당시에 여자는 존재가 아니니까 같이 모여서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어요. 그것이 기존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그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건 당시의 체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죠.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것과 정반대인지도 몰라요. 자기가 믿고 생각하는 바를 향해서 운명을 기투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잖아요. 한국인들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그 속에는 기도의 본래적인 목적, 하나님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남편의 승진, 가족의 건강, 뭐 이런 것, 아마 기도 제목을 간추려보면 대여섯 가지 카테고리 안에 다 들어가 있을 거예요

 

우리는 오랫동안 친해져서 서로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어울려 살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공동체가 아닐 수도 있어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철학자 김영민의 책에 나와 있는 구별을 따르자면) 동무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같이 사는 사람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지 눈감아주는 것, 그리고 그 관계가 상할까 봐 침묵하고 못 본 척 외면하는 것. 친구라는 것이 오랫동안 익숙해진 얼굴이잖아요? 그런 관계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지만, 그 공동체는 굉장히 이기적이라고 할까요? 동무는 그와 달리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길을 가는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라는 것은 서로가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그런 관계에요. 그게 없다면 공동체는 아무 기능을 하지 않아요. 그냥 속된 말로 이익을 공유하는 깡패들의 공동체죠. 그걸 위해 이익집단을 형성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거죠. 해석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세상을 보고, 생각하고 그런 것을 어떻게 지향해 나가는지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석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죠. 정의(justice)는 하나의 샘플이겠죠. 정의라는 것은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정의라는 게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가 정의 꿈꾸는 게 아닙니다. 정의가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초대교회가 대표적인 샘플이 될 수 있죠. 그들은 정의를 부르짖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공의를 얘기할 때는 있어도 정의를 부르짖은 게 아니죠. 그들은 그저 함께 모여서 예배하면서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모임 자체가 그 시대 사람들이 꿈꾸지 않았던 것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공동체가 그런 차원을 갖고 있느냐? 그건 참 어려운 질문이죠. 그걸 갖고 있어야만 기독교 공동체라고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교회의 중요한 정의(definition) 중 하나임에는 분명해 보여요. ‘남들이 꿈꾸지 않는 어떤 것을 꿈꿀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을 향해 함께 달려나가는 공동체’.

 


Q: 그러니까 말하자면 현재의 상황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정의를 말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A: 현재가 정의롭지 않다는 자각 자체가 많은 경우 기존의 우리들의 판단일 수 있어요. 초대교회의 기준을 얘기했던 이유가 그런 거예요. ‘현재 이런 잘못이 있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미 선과 악의 기준이 거기에 투사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를 들면 초대교회의 여자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가 전혀 아니에요. 그 시대 사람들은 동등하게 만나서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어요. 예를 들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놓고 유대인들이 묻잖아요?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요. 법에 쓰여 있잖아요? 그리고 그게 상식이고. 율법에 돌로 치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그냥 법대로 하라고 그러면 돼요. 법대로 해야 하거든요. 답이 정해져 있어요. 옳고 그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법대로 하라고 안 했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론 대답이 황당하고 엉뚱했죠. 그 뒤의 얘기는 우리가 다 알죠. 죄 없는 사람들이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니까 다 도망갔다고. 거기서 도망친 사람들이 비겁해 보이긴 하지만 도망갈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용기인지도 몰라요.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거기서 현실이 부정의하다는 인식으로부터 생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얘기 때문에 뒤로 물러서면서 정의를 말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대략적으로는 말씀하신 것이 맞기는 해요. 그런데 중요한 맥락에서 혼동될 수 있어요.

 

 


Q: 학제간 연구 혹은 융합학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이런 것이 학문 하는 데 있어서 어떤 필요성이 있을까요?

 

A: 굉장히 단순한 이유죠. 가장 기본적으로는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해야 해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녀 간에도 그렇잖아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한 언어나 어투나 마음가짐 등이 익숙해질 필요가 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그게 안 통한다 그러면 시작조차 못하겠죠. 그래서 아마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현재 연구재단 등에서 하는 융복합이라는 말과 학제간이라는 말과는 다른 측면이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 시대의 안락사, 낙태, 동성애 문제를 얘기할 때, 신학자가 아니면 윤리학자가 앉아서 자기의 지식만으로 결정할 수가 없어요. 삶의 문제는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 체계는 한쪽으로만 전문화되어 있잖아요? 이게 100년 전부터 제기된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의 문제거든요. 예를 들어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안락사의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정치적인 성향을 섞어서 얘기한다고 할 때 생기는 문제는 지식인을 가장한 사이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걸 할 때 자기의 한정된 지식에 근거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이 문제를 다른 측면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만나서 서로 뭔가를 같이 결론 없이생각해보는 거죠


현재 연구재단 등에서 얘기하는 융복합(fusion)이라는 것은 제 생각에는 가능할지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서 안락사 문제나 동성애, 낙태 문제를 얘기할 때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결혼과 비슷한 것 같아요. 결혼할 때 둘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주례사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 건 가장 잘못된 주례사 중 하나에요. 둘이 하나가 되면 하나의 목소리가 억눌리는 게 대부분인 거 아닌가요? 누구의 목소리가 억눌리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의 정치학에 달려있어요. 하나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를 대변하고 다른 한 목소리는 억압되고. 그러니까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제국이나 인간 조직에서 가부장적인 질서체계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고, 실질적으로 결혼 생활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둘이 둘이 되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야 해요. 융복합이라는 말이 복합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면 괜찮겠지만, 대부분 우리가 쓰는 의미는 여러 학문이 모여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그것들이 모여서 또 상위의 것을 만드는 그런 개념이면 곤란합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것들이 모이면 그것 자체가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주거든요.

 

보스턴 대학의 신학 교수 웨슬리 와일드먼(Wesley J. Wildman)Inter라는 말을 이제 쓰면 안 된다고 했어요. 예를 들어 안락사 문제를 얘기할 때, Inter라는 말은 둘 사이라는 말이거든요. 예를 들어, 과학과 신학 사이라는 건데 과학도 하나가 아니거든요. 여러 분야가 있고, 신학도 여러 분야가 있는데. 그래서 Inter라는 말 대신에 multi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래서 multidisciplinary studies라고 얘기할 때는 여러 개를 그냥 짬뽕시킨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태를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이죠. 90년대부터 사태를 획일적으로 보기보다는 중층적으로 까다롭게 보자는 생각들이 지식인들 사이에는 있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은 단순하고 쉽고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서 설명하는 것을 자꾸 찾죠. 거기에 시대적인 괴리감이 좀 있어요. 아직도 학제간의 대화라는 말을 쓰긴 하는데 이건 마치 둘이 하나라는 말처럼 사실 잘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Q: 아까도 잠깐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를 하셨고, 저번에 장신대에서 캐서린 켈러(Catherine E. Keller) 교수도 오셨을 때, “신학과 페미니즘의 대화라는 주제로 열린 강좌에서 교수님의 강연을 들었었는데요. 페미니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A: 특별한 계기는 없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풍조가 그런 것 같아요. 초대교회 때 비존재로 간주되던 이들을 기독교는 말하자면 형제와 자매로 불렀던 거잖아요. 아무도 그들이 서로 동등한 인격이라고 말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귀족으로 태어났는데 내가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든 것도 아니고 더 착취한 것도 아니야.’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하대하고 노예처럼 대해도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비존재로 간주되는 사람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간주한다.’ 거기에 이제 말하자면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출발점이 있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페미니즘과 신학적으로 비존재에 대한 관심이 좀 다른 건, 페미니즘은 여성이 이제까지 무시당했던 당연히 찾아야 할 인권에 관심이 많다면, 신학적으로 여성이나 비존재를 다룰 때는 모든 사람의 인권의 관점이 아니고, 나와 동등한, 혹은 나와 반대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예요


예를 들어 귀족이 노예를 이해할 수 없죠? 우리가 지금 인권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저 사람이 나와 동등한 인권을 가졌어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에 훨씬 가깝지 않을까요? 내가 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사실은 우리들 마음속에 사랑을 한다고 하면, 리차드 도킨스의 이론을 적용하면 유전자가 나로 하여금 어떤 대상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도록 하는 것뿐이잖아요? 그래서 본능에 의해서 기계화된 과정속에 사랑한다는 생각이 생긴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설명인데요.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기계화된 과정에서 생겨난 잉여인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사랑한다고 얘기하지만 모두가 다 알 듯이, 모든 것이 다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측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서 유전자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이러이러한 타입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화학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어야 해그런데 모든 사람과 그런 게 다 발동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구체적으로 내가 왜 이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되었을까라고 하는 것에는 물론 생물학적인 토대도 있지만 그 위에서 전혀 변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내가 생물학적 남자니까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기본적으로 기계적인 생물학적인 과정으로 성욕이 발동을 해서 사랑이라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왜 모든 이들이 아니라 하필 너인 거지?’라고 물어봤을 때 그건 모른다는 것이에요. 상대방에 대한 인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거죠. 나와 다른 존재인데 그 존재를 안다고 했을 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안다고 하는데 그건 내 생각이지 상대방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죠.

 

우리 시대 기준으로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잖아요.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 ‘To be’. 우리 시대 사람으로 말한다면 예를 들어, 명문대생이고, 소위 말하는 대기업 다니고 통장 잔고에 얼마가 있고. “있는 사람들이죠. ‘존재하는 사람들이죠. ‘타메온테하나님은 없는 사람을 선택한다고 했지 있는 사람을 선택한다고 하지 않았거든요. 없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Those who are not. 존재하지 않는 거에요.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죠. 이게 묘하게 자본주의의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 아니겠어요?

 

인권이라는 것도 기존의 어떤 도덕적인 판단을 전제로 하잖아요?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자들을 인식한다는 건 기존에 없던 상상력이어야 하죠. 그래서 우리가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전제하는 이야기가 기존에 우리가 판단하는 있고 없음, 기존의 도덕적 윤리적인 시스템과 맞물려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 페미니즘이 진짜 페미니즘일 수 있으려면 도너 해러웨이나 로지 브라이도티 등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동물들, 식량으로 쓰이기 위해 닭장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 이제껏 듣지 못한 환경의 소리 등 이 시대에 비존재로 간주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남자는 특권층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서 비존재들을 볼 수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남자는 인구의 절반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정점에 있는 한 남자에요. 그래서 정점에 있는 남자의 특권이 맨 아래에 있는 남자가 갖고 있지는 않거든요. 페미니즘의 기본은 가부장제를 극복하는 거지, 가부장제를 예속해서 그 사람들을 파문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존재한다고 믿지만, 한 번도 존재한 적은 없죠. 다만 이게 아닌데하는 걸 우리가 현실에서 보면 이건 아닐 것 같다는 느낌, 감정그런 건 있죠. 이것이 도덕이나 윤리와 다른 점이죠. 도덕이나 윤리는 기존에 우리가 가치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요. 그런데 비존재는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을 가지고 가면 파악이 안 됩니다. 기존의 판단 기준이 없는 것을 가지고 가서 정의이나 사랑 평화 등을 판단하려면 거기에 모든 이 가치 판단의 기준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의 소리가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요즘의 철학이 신학으로 귀환하는 중이에요. 자크 데리다도 말년에 환대라든지 선물이라든지 굉장히 신학적이었거든요. 타자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환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선물이라든지. 데리다가 원래 해체로 유명한데 말년에는 굉장히 신학적인 시각을 많이 보여줬어요.

 

  

Q: 이번에 과신대 자문위원이 되셨잖아요? 과신대가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 일도 하고 있거든요. 혹시 사역이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과학과 신학이라는 주체의 만남을 얘기한 것은 꽤 오래되었어요. 하지만 이 모임이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어요. 신학자들이 과학에 무식한 경우가 많고, 과학자들은 신학에 무식한 경우가 많아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이슈인 동성애 문제가 나오면, 자꾸 교리나 성경을 찾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반박하는가, 침묵하는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변질이 되거든요. 그래서 사실 과학과 신학이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임이 정말 긴급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좀 더 진척을 시킨다면 신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과의 담론의 틀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 중에 이렇게 우종학 교수님처럼 평신도인데 이런 모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게 신선했어요. 사실 종교개혁이 평신도들의 참여로 가능했거든요. 앞으로 한국 사회, 한국 기독교에 큰 역할을 하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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