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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이야기/과신대 소식

두 언어 익히기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8. 11. 19.




박정탁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3학년)



전도사님 빅뱅은요? 

선생님 인간은 원숭이에서 시작한 거 아니에요?


교회학교를 담당하는 사역자, 교사 중에 이런 질문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부모님 손을 잡고 교회에 온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오는 교회보다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 교육에 더 익숙한 것 같다. 창세기보다는 과학 교과서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다. 이것은 별로 놀라울 일은 아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서 비행기가 날아다녔고, ‘우주와 다름없는 스마트폰(물론 사과도 있겠지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세상에 태어났다. 아이들이 태어난 세상은 고대인들이 꿈도 꾸지 못했을 세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이뤄낸 세상이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매주 교회에 와서 어른 예배가 끝날 때까지 교회학교에 와있는 아이들에게 창세기와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떻게 다를까.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외로움에 사무치는 밤을 모를 것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 의지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는 어떤 의미일까. 풍요의 시대, 아이들에게 식사 감사 기도는 어떤 의미일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은 아닐까. 목사가 되신 선배님들은 매주 교회에서 어른들을 마주하겠지만 나와 연배가 비슷한 나의 동료들은 주로 아이들을 마주한다. 


똑똑하고 세련된 아이들 사이에서, 우리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다!’라는 선포는 종종 한 청년의 고백이 되어버릴 때가 있다. 그래도 아이들은 즉시 반박하거나 도전하지는 않는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을지라도, 예의 바른 아이들은 잘 참고 들어준다. 그리고 어른 예배가 끝나면, 부모님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에 간다.


  
신학과 학생회와 과신대가 공동으로 주최한 세미나 <창조, 어떻게? ? 무엇?>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동료들의 관심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과신대 자문위원이자 본교 신학과 소속 조성호 교수님의 인사말로 시작된 세미나는 박영식 교수님과 우종학 교수님의 강의로 구성된 1부와 질문과 대담으로 이루어진 2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신학자가 말하는 창조는 무엇을’, 그리고 에 대한 대답과 함께 오늘도 계속되는 창조에 대한 강조가 돋보였다. 그리고 과학자가 말하는 창조는 어떻게에 대한 대답으로써 과학이 우주의 형성 과정에 대해 밝혀낸 것을 빠르게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과학과 신학이라는 두 언어(Lingual)’의 강연과 대화를 실제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언어의 대화를 강조하는 이론과 책은 무수히 많지만, 실제로 대화하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는 두 언어의 모습을 기대하고 그 자리에 온 친구들도 있었다. 


사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두 언어의 모습은 대화보다는 대립이다. 그러나 그날은 그렇지 않았고,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본 것 자체가 매우 자극이 되었다. 각자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강연을 경청하는 모습. 서로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학문적인 월권(越權)을 각별히 조심하려는 두 강연자의 모습은 과신대 그 자체였고, 신학을 공부하는 후학으로서 앞으로의 공부에 귀감이 될 것 같다. 



또 한 가지 감동적이었던 것은, 우종학 교수님의 강의 슬라이드가 넘어가는 화면 옆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보는 것이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을 원망하지만 과학(혹은 과학주의)이 신학을 못살게 구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현대 무신론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과학을 통제하고, 감금하고, 재판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갈릴레오가 있을 것이다. 눈이 멀 때까지 우주를 관측하던 천재 과학자가 10년 동안 자택에 감금된 채 여생을 보내야 했던 이유는 교회 권위에 도전하는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과학의 상식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천동의 광기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거대 종교의 이름으로 과학에게 무력을 행사한 교회가 선포한 ‘천동은 과거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눈으로는 십자가 보고, 귀로는 빅뱅이론 강의를 듣는 이 날의 경험은 나에게 대단히 큰 감동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천동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날 밤 십자가는 포용과 사랑의 증거로 우리와 함께했다고 믿는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영감으로 감동되어 기록하였을 것이고, 우리는 그 말씀을 읽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믿는 것과는 그 믿음을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하나님의 창조와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선 언어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과학과 신학은 오늘도 일하시는 하나님(요 5:17)이시며,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로 세상을 이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주신 두 언어가 아닐까. 성경의 말씀이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서로 언어가 맞지 아니한 이런 까닭으로 창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창조의 하나님이 이것을 가엽게 여겨 새로 과학과 신학이라는 언어를 만들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우리들이 할 일은 분명해 보인다. 두 언어를 부지런히 익혀 날로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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