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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콜로퀴움

"삼위일체 창조자와 그의 피조세계로서의 세계" 강의 후기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4. 1.

이번 13회 콜로퀴움은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라는 주제로 더처치 교회비전센터에서 지난 3월 18일에 진행되었다. 발표자는 숭실대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였고, 대담자는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의 최승언 교수, 사회자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의 우종학 교수였다. 이 날 발표자 이용주 교수는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Ⅱ(새물결플러스/2018) 중 창조론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 세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활동으로 존재하게 된 피조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과학적 진술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강의했다. 1부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봤다. 

 

 

글_ 심기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자연의 사물들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가 직접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야 우리가 알 수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알려주시는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방식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흘러가고 이 세상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려주신 방식에 집중할 때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할 때만 기독교적 신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기독론적 집중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믿는 유일신과 유대교, 이슬람에서 믿는 유일신론은 좀 다르다. 한 하나님이 그냥 하나가 아니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하나님 한 분 안에서 하나의 신성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알려주셨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 세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것이 조직신학이 다루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관계 맺으면서도, 자신과는 구분 짓는 그 독특함에 굉장히 주목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두려운 주님이나 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빠’라고 굉장히 친밀하게 칭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이 아니야(요18장)’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구분 지으셨다. 즉, 나사렛 예수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 꼭 성령이 함께 하신다. 잉태하실 때도 그렇고, 세례 받으실 때도 그렇고 항상 함께 하셨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다 보면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사건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 세 인격들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심층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세 인격들은 하나님의 인격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들이다.”

 

초대교회 혹은 고대 교회 때부터 삼위일체 신앙이 교회 안에 고백되고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는 무슨 뜻인가? Trinity라는 것은 tri + unity이다. 세 분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다는 뜻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힘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관계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인격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라는 신성이 구성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한 분 안에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있어서, 이 인격들이 서로 다른 행동들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안 하시는 분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에 익숙하다 보니 보좌에 앉으시고 높으신 왕의 이미지에 익숙하다. 마치 ‘착한 타노스’의 느낌이다. 앉아서 멀리 계신 느낌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서로서로가 존재하게 해주는 상호의존적인 활동을 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아들이 아닌 인격체가 되고, 아들은 ‘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아버지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하는 활동을 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 가운데 띠로써 연합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사랑의 띠다.’라고 교회는 오래전부터 얘기해왔다.

 

따라서 ‘일체’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사랑의 활동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삼위’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서로서로 구분되는 독립적인 자유로운 활동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상 ‘나와 다른 존재(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활동을 하는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고, 이를 기독교적 용어로는 ‘사랑’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존재와의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관계 가운데 자유롭게 일하신다. 이 자유는 나를 위한 자유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자유다. 따라서 아들은 이 자유를 아버지를 위해 씀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여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한다. 즉, 아들은 자신의 사랑 활동을 아버지를 위해 하고, 아버지도 역시 아들을 위해 이 자유를 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즉, 관계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는 분’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창조해야만 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체로 관계 가운데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셨고, 그 관계는 완벽한 관계였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반드시 만드셔야 했던 것이 아니고, 무한한 자유 속에서 만들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발성을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함”이라고 정의하면, 이 세계의 우발성은 곧 세계를 창조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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