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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콜로퀴움

인간은 '창조'할 자격이 있을까?

by 면으로만 2019. 5. 3.

제14회 과신대 콜로퀴움 요약 및 후기

"유전자 가위가 오려낸 과학과 신앙"

 

글_심기주 기자

사진_심왕찬 팀장

 

이번 제14회 콜로퀴움은 "유전자 가위가 오려낸 과학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지난 4월 29일에 더처치 교회비전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1부 강연 순서에서 발표자는 연세대 생화학과의 송기원 교수님이셨고, 2부 대담 순서에서 대담자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의 방연상 교수님, 사회자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의 우종학 교수님이셨다. 이날 있었던 콜로퀴움을 듣고 1부 강연 요약과 2부 대담의 후기를 써보았다.

 

 

1부 강연 요약

 

 

우리 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에 그 원리가 들어있다. 콩은 콩의 정보를 가지고 있고 팥은 팥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우리 몸의 유전자에는 우리 몸의 정보가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유전자의 정보로 몸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생명체를 3d 프린터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유전자가 담겨 있는 DNA(유전자는 DNA 조각이다.)의 이중나선 구조는 굉장히 안정된 구조이다. 그래서 아마도 진화과정 중에 유전정보 저장을 이중나선 구조로 하기로 채택된 게 아닌가 한다.

 

1990년에 인간 유전체에 있는 약 32억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염기쌍의 서열을 밝히는 목적의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2001년에 인간 유전체 정보 초판을 발표했다. 이때 발표된 내용 중 흥미로운 것은 32억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염기쌍의 서열이 단 2만 3천 여개의 유전자에 담겨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전자 개수는 별로 안되는데 80% 이상이 굉장히 정교하게 스위치 되어 있었다. 

 

여기서, 염기서열을 순서대로 밝히는 것이 한글을 깨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염기서열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 활동을 일으키는지를 밝히는 것은 책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을 깨친 것이랑 책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 순서대로 염기서열을 읽어냈는데 어떤 방식으로 유전 활동을 일으키는지 아직 대부분 밝혀내지 못했다. 전체의 2% 정도 이해했다고 보면 된다.


1970년대에 제한효소가 발견되었다. 제한효소는 DNA 이중나선 분자의 4~6개의 특정 염기서열을 인식하여 그 부분을 절단하는데 이 제한효소를 통해 DNA 재조합 기술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를 인간의 30억 개의 염기서열에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제한효소가 인식하는 6개의 염기서열이 30억 개의 염기서열에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70만 번은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이 제한효소를 인간의 염기서열에 적용하면, 실제로 절단하고 싶은 표적 부위 외에도 70만 번은 더 염기서열을 절단하기 때문에 결국 염기서열을 산산조각 낸다는 말이다.

 

 

합성생물학의 혁신을 일으킨 CRISPR

이후, 제한효소보다 더 정교하게 표적 부위의 염기서열을 인식하는 유전자 가위들이 등장했고, 마침내 2013년, CRISPR라는 유전자 가위가 등장했다. CRISPR는 Cas9 단백질을 이용한 유전자가위인데 21개의 염기서열을 인식해서 유전자의 표적 부위를 절단한다. CRISPR는 기존의 유전자가위보다 월등히 정확하고, 값싸고, 간편했기 때문에 합성생물학의 발전을 급격하게 이루었다.

 

합성생물학은 쉽게 말해서 생명체를 디자인하는 공학이다. 합성생물학은 생명체를 dna라는 소프트웨어가 담긴 기계로 인식한다. 

 

합성생물학과 관련해서 흥미로웠던 것은 화학공정 대신 세균으로 물건을 만드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옷감은 식물에서 온다. 그런데 세균이 섬유를 만들 수 있게 유전자 회로를 디자인해서 섬유를 만들어내고 폰의 겉껍질을 만들어내고, 기존 화학공정에서 만들어냈던 모든 것들을 합성생물학으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2020년까지 chemical industry(화학공정)의 15~10%를 대체하겠다고 예측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특정한 유전자 부분을 편집해서 원하는 형질을 레고처럼 발현하게 하는 biobricks와 같은 것도 실제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2018년 11월 중국 과학자에 의해서 CRISPR가위를 이용한 쌍둥이 여아가 탄생했다. HIV감염을 막기 위해서 CRISPR가위를 썼다고는 하지만 CRISPR가위를 굳이 사용했을 필요가 없었고 충분히 다른 더 검증되고 안전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CRISPR가위가 정확하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CRISPR가위의 인식 오류 가능성, 부작용으로 인한 위험성이 높고, 원하는 곳을 잘라냈을 때 복구하는 시스템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RISPR에 대한 논문이 매주 올라오고 있다.

 

송기원 교수님은 기술의 허용여부를 논하기에는 이미 기술이 인간 배아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기술 적용의 화살이 시위를 떠난 이후에는 다시 돌이킨 과학의 역사가 없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기술의 허용 유무를 따지기보다는 앞으로 이 기술을 어떻게 다룰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 뿐만 아니라 합성생물학은 또한 여러 가지 이슈를 가지고 있다.

 

먼저, 인간에게는 좋게 사용되고 있지만 생태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둘째, 유전자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과연 특정 유전자는 가치 있고, 또 다른 유전자는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셋째, 어디까지가 질환인가? 어떤 유전자 발현까지를 질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과학기술은 공공재이다. 한 나라에서 규제하면 다른 나라로 넘어가서 연구를 하기 때문에 한 나라에서 규제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 과학은 국경을 넘는다.

 

넷째,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생명체를 가지고 마음대로 디자인하고 구현해도 되는 존재인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인간까지 해도 되는 건가? 다른 존재까지도 해야 하는가? 효용이 중요한가, 가치가 중요한가?

 

"생명체에 대해 갖고 있는 경외심 - 종교계는 이렇게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생명과학 기술이 의한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부 대담

 

 

2부 대담에서는 주로 이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본래 과학 연구에서 윤리와 종교적 이슈는 항상 마지막에 뒷북을 쳤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껴서 송기원 교수님의 연구 프로젝트에는 처음부터 방연상 교수님이 함께 참여를 해서 처음부터 연구의 방향성을 신학자와 과학자가 같이 논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 교수님은 생명과학 연구에서 획일화와 계급화의 위험성이 있다면서 윤리성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신학자와 목회자가 처음부터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이 문제에 참여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두 번째는 방연상 교수님의 신학에 대한 견해였다. "신학은 내가 아는 것을 증명하는 것(proof)보다 하나님에 대한 앎을 찾아나가는 것(proving)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과거로 돌아가서 개념화하려고 한다. 우리는 과거의 론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담론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과학은 우리가 과거의 론에 머물러 있는 것을 불편하게 만든다. "

 

 


방 교수님은 다음을 강조하셨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질문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묻기도 전에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과학은 하나님의 수많은 미스터리를 밝힐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가정을 좀 내려놓고 순수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기독교 신앙은 proof가 아니라 proving이다. 우리의 신앙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생물학에서 종의 정의 및 경계를 물어보는 질문에 대해 송 교수님은 "종간 경계가 문제가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고민해야할 때이다. 이제는 배아 상태로 냉동되어 있는 것도 입양하는 시대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종간의 경계도 불분명해지는 것은 물론 이제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까지도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문득 기독교는 여기에 이미 대답을 가지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신앙의 조상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요즘, 이전에 정립해둔 교리로는 설명하기 힘든 질문들이 나올 때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답해야 할까?

 

하나님의 생명 창조와 합성생물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묻는 질문에 대해 방 교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까지도 불러주신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하셨다. "기독교 신앙은 '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애매모호한 것에서 불편한 것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을 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 교수님의 마무리 멘트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 번 중독되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과학은 답을 찾으면 더 많은 질문을 찾게 된다. 항상 질문하는 삶 속에서 살아가기 위하길 바란다. 과학에 대해서도 신앙에 대해서도!"

 

기독교 신앙은 이 신앙과 과학의 문제에 대해서 이미 교리적 대답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다시금 정립해야 할 때가 된 것일까? '기독교는 사회의 문제에 먼저 답을 주고 선도해가야하는데 오히려 사회보다 뒤쳐졌다. 이웃과 겨레는 물론 인류가 겪고 있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지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상상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라는 김형석 교수님의 지적이 나지막히 떠오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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