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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북클럽 이야기

<인간의 타락과 진화>를 읽었습니다.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7. 3.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북클럽]

 

 

강서/구로 북클럽의 먹방 사진들이 무척 부러웠던 다음날 분당/판교 북클럽 6월 28일(금) 모임은 사실 🍻 비어 데이였습니다. 😁


안 그래도 평소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가는 모임인데 이 날은 3시간 30분 동안 긴 대화를 나눴더랬습니다. 🍺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양이 많지 않았습니다만 플라시보 효과는 충분했습니다. ^^

 

지난 주일 교회력에 따른 성서 본문은 누가복음 8:26 이하의 마귀 들린 사람 이야기였습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돼지떼가 떼죽음 당하는 이야기로 이어지죠.


인공지능, 빅뱅, 블랙홀, 양자역학을 충분히 이해하는 석학이 아니더라도 성서 속의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마귀를 내쫓는다는 이야기는 현 시대의 시각으로 보기에 좀 불편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에 들린 사람을 정신 질환이나 발작 증세를 앓았던 사람으로, 마귀를 쫓는 행위는 이를 치유하는 것이었다는 ‘세련된’ 해석에 귀가 솔깃하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해석은 유사과학이 창세기 앞 장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보며 해석하는 방식과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마귀 들림을 정신질환으로 치환하는 순간 예수님의 치유 행위도 일종의 (고도의) 의료행위처럼 보이죠. 제게는 저자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해석으로 보입니다.

 

 

인류 다지역 기원설과 인류 역사 30만년의 시간을 생각해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역사 속에 실존한 인물이었다 할지라도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후하게 쳐서 만 년 전의) 이 부부의 후손일 확률은 매우 희박해 보입니다. 이 희박한 연결성 안에서 전통적인 타락,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의) 원죄의 개념이 우리에게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생각은 충분히 개연성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언급한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에 대해서 마치 마귀 내쫓음을 신경정신과적으로 해석하듯이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그런 해석은 뭔가를 놓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교리 경찰을 배출하는 결과를 내는 한국의 배타적인 기독교 역사 속에서 우리는 “A는 B이다” 식의 깔끔한 명제를 요구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싶습니다. 그런데 삶이 그다지 만만치 않던데 혹시 어떠신가요? “내가 해봤는데 말이지~”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

 

* 과신대 분당/판교 북클럽 7월 모임에서는 피터 앤즈의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CLC) 책으로 토론 시간을 갖습니다. 정기/비정기적으로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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