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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12. 6.

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글_ 김남호 (울산대학교 철학과)

 

 

과학과 철학은 더 만나야 한다. 카오스 재단이나 EBS 프로그램 '통찰'의 멋진 과학 강연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철학자들은 과학을 잘 모르고, 과학자들은 철학을 잘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논문을 쓰는 철학자들의 경우 필요하면 과학적 지식을 잘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세계 철학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철학자들은 과학자였다. 이는 과학도 하고 철학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최고 정점에서 과학이 답할 수 있는 문제 영역의 한계를 나름대로 인식했고, 그 한계 인식에서 철학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흄, 라이프니츠, 파스칼, 칸트, 현대의 심리철학 전문가 등이 그런 예이다.

 

데카르트가 실체로서의 영혼을 증명하려 한 철학자로 오늘날 웃음거리가 되고 있지만, 데카르트는 그 당시 최첨단 과학인 생리학의 최전방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알 수 있었고 영혼 개념을 도입해서 보다 합리적인 인간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영혼 개념은 형이상학 내에서 그 설득력을 잃었지만, 그의 시도는 철학과 과학의 건전한 관계 맺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과학자들의 강연을 보면 우선 많은 경우 인문학과 철학을 구분하지 못한다. 소위 인문학 강연을 하는 사람들조차 이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하므로 과학자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철학philosophy과 인문학humanitas은 그 뿌리가 애초부터 다르다. 철학은 플라톤을, 인문학은 이소크라테스를 뿌리로 둔다. 전자는 주장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로고스를 특징으로, 후자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교양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철학과 인문학은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철학은 행정상의 이유로 인문학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두 분야는 여전히 다르며, 엄연히 다른 두 분야가 혼동되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철학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고전 작품이나 영화 등을 감상하고 그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나누는 정도의 활동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지만 철학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오직 과학만이 진리를 탐구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이는 명백히 오해이며, 이 오해는 과학과 철학의 이분화를 낳는 폐해의 근원이다.

 

철학은 그 출발부터 지금까지 객관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활동이다. 신화에서 왜 철학이 갈라져 나올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라! 비록 물리학, 화학, 사회학 등이 철학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여전히 철학은 이 개별 과학들이 일차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자유의지', '인격', '인과성' 같은 개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과학은 윤리적인 문제들을 일차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예로 들면, 이는 형이상학의 대표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곧 과학이 전혀 기여할 수 없는 문제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양자역학이나 신경과학은 철학자에게 실재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제공해주며, 이를 무시하고는 경쟁력 있는 형이상학 이론이 될 수 없다(베르그송의 앨랑 비탈 개념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비결정성에 대해 물리학자가 설명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비결정성이 곧 의지의 자유를 보장해주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유에 대한 개념 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행위 주체의 통제력이 자유로운 행위의 전제 조건이라고 한다면, '행위 주체', '통제력' 등이 규정되어야 한다. 왜? 과학은 '행위 주체'를 그 탐구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관찰되지 않는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따라서 '행위주체'라는 개념은 허구이다."라는 주장을 물리학자가 한다고 해도 이 주장의 진위 여부는 실험이나 기존의 물리 법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추론되는 명제가 아니다. 즉, 이 명제는 형이상학적인 명제(선험 명제)이지 과학적 명제가 아닌 것이다.

 

 

철학의 분과인 형이상학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추구한다. 어떻게 보면 과학에게 철학은 아버지인 셈이다. 로고스 혁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싫든 좋든 아버지를 닮을 수 밖에 없다. 철학과 과학, 이 둘은 같은 주제에 대해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문제는 각자가 맡을 수 있는 문제의 영역이 무엇인가,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영역 배분의 문제일 것이다. 과학자들은 가령, 벤야민 리벳 실험 같은 경우, 실험을 하지만, 그 실험의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개념들을 규정해야 하며, 개념들을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근거 역시 필요하다. 이런 작업은 철학자들이 맡고 있다. 리벳 실험의 결과가 곧 "우리에게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결론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 결론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 '자유의지가 있다' 등과 같은 개념 및 표현에 대한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신경과학자 가자니가가 "윤리적인 뇌"에서 '자유의지'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이 철학자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언급하는 부분을 눈여겨보라.

 

과학적 지식을 우리가 습득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혹은 다루지 않아도 되는 문제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 개념 규정, 객관적 기준의 문제(가령, 과학과 비과학의 기준, 동일성의 기준 등), 윤리적 문제, 추론의 타당성 검토 등이 그 영역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윤리학자이자 정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이 책은 단순한 인문학 도서가 아니다. 비록 입문서의 성격이 있지만, 도덕적 옳고 그름의 객관적 기준을 탐구하는 철학 도서이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문학과 철학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이 우리 현실이다.

 

철학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재 바로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과학이 맡을 수 없는 문제 영역을 철학이 감당하는 것이 옳고, 철학의 문제 영역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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