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가을 국립중앙도서관 근처 카페에서 김흡영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김흡영 교수님은 강남대학교에서 오랜 시간 종교 간의 대화,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 국내 1세대 과학신학자입니다. 꾸준히 해외 저널과 저서에 글을 기고하시고 최근에는 트랜스휴머니즘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다고 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실장

인터뷰이 | 김흡영 교수

사진/글 | 최경환 실장



1. 교수님은 언제부터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요?
  
본래 저는 서울대학교 공대를 나왔고, 과학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고 싶었죠. 나중에는 우주에 못 가지만, 영적인 우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신학을 공부하게 됐고,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 가서 과학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학교에 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라는 연구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Robert John Russell과 Ted Peters을 만났습니다. 이분들이 저의 스승이자 친구입니다. 이분들과 함께 전 세계 대학에 종교와 과학에 대한 과목을 개설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시아 지부를 맡아서 한국의 4개 대학(장신대, 한신대, 서울신대, 호신대) 종교와 과학 정규 과목을 개설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동안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주로 서구 신학을 기반으로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서구적인 맥락에서는 신학과 과학이 분리가 안 됩니다. 둘 다 서구적인 학문입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도 결국 과학적인 사고입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한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초자연과 자연이라는 이원론을 극복한 동양적 사고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둘의 간극을 극복한 것이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도교와 유교였고, 이 두 전통은 자연 안에 이미 초월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월적 내재를 말하고 있죠. 서구 신학에서는 이 둘이 같이 가기 어렵죠. 그래서 저는 동양신학, 특히 한국신학적인 입장에서 서양신학이 가지 못하는 새로운 모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서구의 학자들이 종교와 과학의 대화나 생태신학에 대한 논의가 나오면 지속적으로 저한테 원고를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꾸준하게 1년에 2-3개씩 글 요청이 들어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신학과 과학이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요? 평소 교수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신학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것입니다. 비기독교적인 토양 속에서 혹은 기독교적인 토양 속에서 과거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또 현재의 신학,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모두 연결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신학은 과거를 잘 배우지도 않고, 미래를 이끌어 가는 과학도 잘 배우질 않습니다. 서양의 신학만을 번역하고 공부하기 바쁘죠. 
  
무엇보다 대화가 중요합니다. 대화의 기본은 자기 입장을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서로 열린 입장에서 담을 허물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대화에 들어가면, 전도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단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듣는 자세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나 과학주의자들과도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문자주의나 교리주의로는 대화가 힘들겠죠.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도 다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이 중요하죠. 나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를 열어놓고, 이웃을 품는 자세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정죄하는 자세로 대화를 하면 안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가슴에 품고, 상대방의 입장을 들으면서, 서로 소통을 하는 것이 대화의 방법입니다. 나의 신학을 과학과 대화하면서 폭넓게 지평을 넓히는 겁니다. 과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신학적인 지평을 넓히는 것이죠.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2차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고 나서 자신만의 새로운 신학을 구성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정도 규범적인 틀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사용될 신학입니다. 교회 밖에서 사용할 용도가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이걸 주장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설교 밖에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치열하게 새로운 신학을 위해 고민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3. 그렇다면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중요한 주제는 트랜스휴머니즘이나 인공지능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는 과학의 시대, 특별히 기술의 시대입니다. 생명과학과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의 발달은 지금 실험실에서 이뤄지고 있고, 현재 우리의 삶을 이끌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들도 핸드폰에 끌려가고 있잖아요. 과학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 창조와 진화 논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쩌면 당장 급한 것은 인공지능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따져봐야 합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이 나타나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어떻게 되는지 고민해 봐야죠. 그러니 우리는 현대의 과학자들과 공학자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근대주의가 인간중심주의로 흘러가니깐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트랜스휴머니즘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다음이 트랜스휴머니즘입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 과학을 알아야 합니다.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신문이 아니라,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과학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고, 실험실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체크해야 합니다. 지금 벌써 사이버 교회가 나오고, 인공지능이 설교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도 준비를 해야죠. 
 


4. 새로운 과학의 발전과 도전 앞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기독교는 항상 새로운 도전 앞에서 정화가 됐습니다. 이제 가짜 설교, 가짜 목사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영적인 교류를 통해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진짜 목사가 나와야 합니다. 진짜 목사, 진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죠. 인공지능은 신학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미래의 트랜스휴머니즘은 기독교에 하나의 도전을 줍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진짜냐? 기독교가 말하는 참 인간은 무엇이냐? 신론에도 도전을 줍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인공지능이 다 하는걸요.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무엇인가? 그래서 저는 십자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넘어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종말론에도 충격을 주죠. 그동안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는 나라를 소망했는데, 이제 과학이 그것을 해 주겠다고 하잖아요. 그럼 기독교는 뭐가 다른 거죠? 그러니 신학이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기존의 틀로는 안 됩니다.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칼 바르트는 신문을 보고 기도를 한 신학자입니다. 어쩌면 나치에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이 기도에서 나온 겁니다. 이제는 최첨단의 과학 소식을 접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은 겸손하게 공부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미 은퇴를 했습니다. 이제 후배들이 이어받아야죠. 새로운 주제들이 계속 쏟아지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과신대는 열정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이 분야에 공헌을 해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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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이번 달에는 제3회 과신대 포럼에서 강의를 해 주신 감신대학교의 박일준 교수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저희 과신대 자문위원으로 섬겨주시기로 했습니다. 평소 과학과 신학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학제간 연구에 관심이 많으신 교수님을 만나뵙고 최근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다음 기회에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또 있겠죠~ 


인터뷰어 | 백우인, 심기주 기자

인터뷰이 | 박일준 교수

사진/글 | 심기주 기자



Q: 교수님이 번역하신 자연주의적 성서해석학과 기호학: 해석자들의 공동체에서 해석자들의 공동체가 바울 공동체를 뜻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요즘 바울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정의에 대한 해석도 새롭게 해석하고 있고요. 교수님도 정의에 대한 책을 내셨는데 거기서는 정의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A: 시중에 나와 있는 바울에 대한 책은 바울에 대한 것이지 바울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죠. 바울 공동체와 바울이 같은 것은 아니예요. 초대교회를 얘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초대교회가 공동체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공동체끼리 모여서 존재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공유하기 시작하죠. 그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라고 말했던 아이디어는 지금의 아이디어와는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여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이러는 게 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러운데, 그 당시에 여자는 존재가 아니니까 같이 모여서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어요. 그것이 기존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그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건 당시의 체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죠.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것과 정반대인지도 몰라요. 자기가 믿고 생각하는 바를 향해서 운명을 기투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잖아요. 한국인들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그 속에는 기도의 본래적인 목적, 하나님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남편의 승진, 가족의 건강, 뭐 이런 것, 아마 기도 제목을 간추려보면 대여섯 가지 카테고리 안에 다 들어가 있을 거예요

 

우리는 오랫동안 친해져서 서로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어울려 살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공동체가 아닐 수도 있어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철학자 김영민의 책에 나와 있는 구별을 따르자면) 동무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같이 사는 사람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지 눈감아주는 것, 그리고 그 관계가 상할까 봐 침묵하고 못 본 척 외면하는 것. 친구라는 것이 오랫동안 익숙해진 얼굴이잖아요? 그런 관계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지만, 그 공동체는 굉장히 이기적이라고 할까요? 동무는 그와 달리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길을 가는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라는 것은 서로가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그런 관계에요. 그게 없다면 공동체는 아무 기능을 하지 않아요. 그냥 속된 말로 이익을 공유하는 깡패들의 공동체죠. 그걸 위해 이익집단을 형성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거죠. 해석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세상을 보고, 생각하고 그런 것을 어떻게 지향해 나가는지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석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죠. 정의(justice)는 하나의 샘플이겠죠. 정의라는 것은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정의라는 게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가 정의 꿈꾸는 게 아닙니다. 정의가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초대교회가 대표적인 샘플이 될 수 있죠. 그들은 정의를 부르짖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공의를 얘기할 때는 있어도 정의를 부르짖은 게 아니죠. 그들은 그저 함께 모여서 예배하면서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모임 자체가 그 시대 사람들이 꿈꾸지 않았던 것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공동체가 그런 차원을 갖고 있느냐? 그건 참 어려운 질문이죠. 그걸 갖고 있어야만 기독교 공동체라고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교회의 중요한 정의(definition) 중 하나임에는 분명해 보여요. ‘남들이 꿈꾸지 않는 어떤 것을 꿈꿀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을 향해 함께 달려나가는 공동체’.

 


Q: 그러니까 말하자면 현재의 상황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정의를 말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A: 현재가 정의롭지 않다는 자각 자체가 많은 경우 기존의 우리들의 판단일 수 있어요. 초대교회의 기준을 얘기했던 이유가 그런 거예요. ‘현재 이런 잘못이 있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미 선과 악의 기준이 거기에 투사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를 들면 초대교회의 여자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가 전혀 아니에요. 그 시대 사람들은 동등하게 만나서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어요. 예를 들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놓고 유대인들이 묻잖아요?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요. 법에 쓰여 있잖아요? 그리고 그게 상식이고. 율법에 돌로 치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그냥 법대로 하라고 그러면 돼요. 법대로 해야 하거든요. 답이 정해져 있어요. 옳고 그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법대로 하라고 안 했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론 대답이 황당하고 엉뚱했죠. 그 뒤의 얘기는 우리가 다 알죠. 죄 없는 사람들이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니까 다 도망갔다고. 거기서 도망친 사람들이 비겁해 보이긴 하지만 도망갈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용기인지도 몰라요.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거기서 현실이 부정의하다는 인식으로부터 생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얘기 때문에 뒤로 물러서면서 정의를 말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대략적으로는 말씀하신 것이 맞기는 해요. 그런데 중요한 맥락에서 혼동될 수 있어요.

 

 


Q: 학제간 연구 혹은 융합학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이런 것이 학문 하는 데 있어서 어떤 필요성이 있을까요?

 

A: 굉장히 단순한 이유죠. 가장 기본적으로는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해야 해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녀 간에도 그렇잖아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한 언어나 어투나 마음가짐 등이 익숙해질 필요가 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그게 안 통한다 그러면 시작조차 못하겠죠. 그래서 아마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현재 연구재단 등에서 하는 융복합이라는 말과 학제간이라는 말과는 다른 측면이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 시대의 안락사, 낙태, 동성애 문제를 얘기할 때, 신학자가 아니면 윤리학자가 앉아서 자기의 지식만으로 결정할 수가 없어요. 삶의 문제는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 체계는 한쪽으로만 전문화되어 있잖아요? 이게 100년 전부터 제기된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의 문제거든요. 예를 들어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안락사의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정치적인 성향을 섞어서 얘기한다고 할 때 생기는 문제는 지식인을 가장한 사이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걸 할 때 자기의 한정된 지식에 근거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이 문제를 다른 측면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만나서 서로 뭔가를 같이 결론 없이생각해보는 거죠


현재 연구재단 등에서 얘기하는 융복합(fusion)이라는 것은 제 생각에는 가능할지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서 안락사 문제나 동성애, 낙태 문제를 얘기할 때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결혼과 비슷한 것 같아요. 결혼할 때 둘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주례사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 건 가장 잘못된 주례사 중 하나에요. 둘이 하나가 되면 하나의 목소리가 억눌리는 게 대부분인 거 아닌가요? 누구의 목소리가 억눌리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의 정치학에 달려있어요. 하나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를 대변하고 다른 한 목소리는 억압되고. 그러니까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제국이나 인간 조직에서 가부장적인 질서체계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고, 실질적으로 결혼 생활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둘이 둘이 되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야 해요. 융복합이라는 말이 복합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면 괜찮겠지만, 대부분 우리가 쓰는 의미는 여러 학문이 모여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그것들이 모여서 또 상위의 것을 만드는 그런 개념이면 곤란합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것들이 모이면 그것 자체가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주거든요.

 

보스턴 대학의 신학 교수 웨슬리 와일드먼(Wesley J. Wildman)Inter라는 말을 이제 쓰면 안 된다고 했어요. 예를 들어 안락사 문제를 얘기할 때, Inter라는 말은 둘 사이라는 말이거든요. 예를 들어, 과학과 신학 사이라는 건데 과학도 하나가 아니거든요. 여러 분야가 있고, 신학도 여러 분야가 있는데. 그래서 Inter라는 말 대신에 multi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래서 multidisciplinary studies라고 얘기할 때는 여러 개를 그냥 짬뽕시킨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태를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이죠. 90년대부터 사태를 획일적으로 보기보다는 중층적으로 까다롭게 보자는 생각들이 지식인들 사이에는 있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은 단순하고 쉽고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서 설명하는 것을 자꾸 찾죠. 거기에 시대적인 괴리감이 좀 있어요. 아직도 학제간의 대화라는 말을 쓰긴 하는데 이건 마치 둘이 하나라는 말처럼 사실 잘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Q: 아까도 잠깐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를 하셨고, 저번에 장신대에서 캐서린 켈러(Catherine E. Keller) 교수도 오셨을 때, “신학과 페미니즘의 대화라는 주제로 열린 강좌에서 교수님의 강연을 들었었는데요. 페미니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A: 특별한 계기는 없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풍조가 그런 것 같아요. 초대교회 때 비존재로 간주되던 이들을 기독교는 말하자면 형제와 자매로 불렀던 거잖아요. 아무도 그들이 서로 동등한 인격이라고 말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귀족으로 태어났는데 내가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든 것도 아니고 더 착취한 것도 아니야.’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하대하고 노예처럼 대해도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비존재로 간주되는 사람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간주한다.’ 거기에 이제 말하자면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출발점이 있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페미니즘과 신학적으로 비존재에 대한 관심이 좀 다른 건, 페미니즘은 여성이 이제까지 무시당했던 당연히 찾아야 할 인권에 관심이 많다면, 신학적으로 여성이나 비존재를 다룰 때는 모든 사람의 인권의 관점이 아니고, 나와 동등한, 혹은 나와 반대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예요


예를 들어 귀족이 노예를 이해할 수 없죠? 우리가 지금 인권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저 사람이 나와 동등한 인권을 가졌어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에 훨씬 가깝지 않을까요? 내가 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사실은 우리들 마음속에 사랑을 한다고 하면, 리차드 도킨스의 이론을 적용하면 유전자가 나로 하여금 어떤 대상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도록 하는 것뿐이잖아요? 그래서 본능에 의해서 기계화된 과정속에 사랑한다는 생각이 생긴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설명인데요.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기계화된 과정에서 생겨난 잉여인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사랑한다고 얘기하지만 모두가 다 알 듯이, 모든 것이 다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측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서 유전자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이러이러한 타입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화학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어야 해그런데 모든 사람과 그런 게 다 발동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구체적으로 내가 왜 이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되었을까라고 하는 것에는 물론 생물학적인 토대도 있지만 그 위에서 전혀 변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내가 생물학적 남자니까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기본적으로 기계적인 생물학적인 과정으로 성욕이 발동을 해서 사랑이라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왜 모든 이들이 아니라 하필 너인 거지?’라고 물어봤을 때 그건 모른다는 것이에요. 상대방에 대한 인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거죠. 나와 다른 존재인데 그 존재를 안다고 했을 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안다고 하는데 그건 내 생각이지 상대방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죠.

 

우리 시대 기준으로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잖아요.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 ‘To be’. 우리 시대 사람으로 말한다면 예를 들어, 명문대생이고, 소위 말하는 대기업 다니고 통장 잔고에 얼마가 있고. “있는 사람들이죠. ‘존재하는 사람들이죠. ‘타메온테하나님은 없는 사람을 선택한다고 했지 있는 사람을 선택한다고 하지 않았거든요. 없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Those who are not. 존재하지 않는 거에요.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죠. 이게 묘하게 자본주의의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 아니겠어요?

 

인권이라는 것도 기존의 어떤 도덕적인 판단을 전제로 하잖아요?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자들을 인식한다는 건 기존에 없던 상상력이어야 하죠. 그래서 우리가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전제하는 이야기가 기존에 우리가 판단하는 있고 없음, 기존의 도덕적 윤리적인 시스템과 맞물려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 페미니즘이 진짜 페미니즘일 수 있으려면 도너 해러웨이나 로지 브라이도티 등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동물들, 식량으로 쓰이기 위해 닭장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 이제껏 듣지 못한 환경의 소리 등 이 시대에 비존재로 간주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남자는 특권층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서 비존재들을 볼 수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남자는 인구의 절반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정점에 있는 한 남자에요. 그래서 정점에 있는 남자의 특권이 맨 아래에 있는 남자가 갖고 있지는 않거든요. 페미니즘의 기본은 가부장제를 극복하는 거지, 가부장제를 예속해서 그 사람들을 파문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존재한다고 믿지만, 한 번도 존재한 적은 없죠. 다만 이게 아닌데하는 걸 우리가 현실에서 보면 이건 아닐 것 같다는 느낌, 감정그런 건 있죠. 이것이 도덕이나 윤리와 다른 점이죠. 도덕이나 윤리는 기존에 우리가 가치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요. 그런데 비존재는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을 가지고 가면 파악이 안 됩니다. 기존의 판단 기준이 없는 것을 가지고 가서 정의이나 사랑 평화 등을 판단하려면 거기에 모든 이 가치 판단의 기준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의 소리가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요즘의 철학이 신학으로 귀환하는 중이에요. 자크 데리다도 말년에 환대라든지 선물이라든지 굉장히 신학적이었거든요. 타자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환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선물이라든지. 데리다가 원래 해체로 유명한데 말년에는 굉장히 신학적인 시각을 많이 보여줬어요.

 

  

Q: 이번에 과신대 자문위원이 되셨잖아요? 과신대가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 일도 하고 있거든요. 혹시 사역이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과학과 신학이라는 주체의 만남을 얘기한 것은 꽤 오래되었어요. 하지만 이 모임이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어요. 신학자들이 과학에 무식한 경우가 많고, 과학자들은 신학에 무식한 경우가 많아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이슈인 동성애 문제가 나오면, 자꾸 교리나 성경을 찾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반박하는가, 침묵하는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변질이 되거든요. 그래서 사실 과학과 신학이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임이 정말 긴급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좀 더 진척을 시킨다면 신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과의 담론의 틀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 중에 이렇게 우종학 교수님처럼 평신도인데 이런 모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게 신선했어요. 사실 종교개혁이 평신도들의 참여로 가능했거든요. 앞으로 한국 사회, 한국 기독교에 큰 역할을 하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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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과신대 <기초과정I>을 수료하고, 이어서 <기초과정II>에 참여하고 계시는 오세조 목사님(팔복루터교회 담임)을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생물학과 진화과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신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독특한 이력이 궁금해서 직접 만나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오세조

사진/글 | 최경환



Q: 목사님 간단한 소개 부탁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석사 과정에서는 분자유전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박사에서는 의과대학에서 면역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포닥 과정을 하다가 그곳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2013년에 루터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2017년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준목을 하다가 갑자기 목사님이 사임하셔서 올해 7월에 안수를 받고 담임목회를 하게 됐습니다. 박사과정에서는 음식물 알러지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Q: 어쩌다 신학을 하시게 됐나요?


저의 신앙적 배경은 성결교입니다. 어려서부터 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생물을 전공하고, 석사에서도 ‘양서류의 종 분화’에 대한 것을 연구했습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진화론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어색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포닥을 할 때,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 가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가 다 돌아가셨는데, 그때 의학이 별로 도움이 안 되더군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10년 넘게 공부한 내용이 인간의 삶과 죽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목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저의 결정이 일시적인 것이지 주님의 소명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Q: 그런데 왜 하필 루터교회였나요?


저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신 분이 계신데, 그분이 루터교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때 제가 성경에 눈을 떴습니다. 저는 루터신학을 공부한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낯설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기존교회에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믿음이 저하고는 잘 안 맞더라고요. 너무 율법적이고 목사님을 너무 높이 보는 것이 싫었습니다. 루터신학을 공부하면서 저의 고민을 풀고, 같은 고민을 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루터교를 선교한 것은 미국의 미조리 시노드(Lutheran Church–Missouri Synod)였습니다. 굉장히 근본적인 시노드였고, 아마 젊은지구 창조론을 지지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학교에는 신학적으로 열려 있는 분들이 많이 있으세요. 물론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도 많이 계시고요. 어느 신학교나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루터교가 국내 선교를 한 것은 1958년이고, 국내에는 50여개의 교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희는 기존 교회를 섬긴다는 마음으로 문서선교와 방송선교를 주로 했습니다. 베델성경연구가 유명하죠. 그러다가 교회를 늦게 시작했습니다. 총회에서 교회를 관리해서 개척을 지원해 줍니다.




Q: 과신대 기초과정 강의는 어떠셨나요?


사실 제가 기초과정을 두 번 들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4기 두번째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수업을 안 들었기 때문에 5기 수업을 다시 들었죠. 수업 내용은 좋았습니다. 교회에서 할 수 없는 얘기들을 듣고, 같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어요.


기억에 남는 것은 강의가 끝나고 어떤 친구가 했던 질문이 생각나요. 그 친구가 강의를 듣고 너무 좋았나 봐요. 그래서 이걸 교회에 가서 알려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되냐? 질문 하더라고요. 그때 우종학 교수님께서 대답을 어떻게 해 주셨냐면, 질문으로 다시 바꾸셔서, ‘왜 굳이 이것을 교회에서 말하려고 하냐?’ 하셨어요. ‘기존 교인들과 이 문제로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라.’ 이렇게 조언을 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 저건 목회자 마음인데’ 했죠. 굳이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거죠. 다만 우리는 교회에서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제 기억에 남아요.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가르쳐라. 대신 아이들의 상상력을 막지 말라.’ 이런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교리가 중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교리가 화석화되면 안됩니다. 교리와 믿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교리화된 믿음이 조금 답답합니다.


제가 요즘 수원남부 북클럽 준비를 위해 분당 북클럽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진행하는지 배우러요. 그런데 모임에 참석하면서 ‘목회자들이 공부 안 하면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평신도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목사들 큰 일났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옛날처럼 목회자가 권위만을 내세우면 안 되겠더군요. 평신도들의 신학 수준이 상당합니다. 평신도들이 보다 근원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궁금해 합니다. 옛날 신학 가지고는 안 됩니다.


Q: 과신대에 기대하는 바를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 과신대가 이런 사역을 하면 좋겠다.’ 조언 한 말씀 해주세요.


과신대가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혹은 반대로 신학적인 관점에서 과학을 연구하는, 이 양쪽의 접근법을 모두 잘 소개해 주면 좋겠습니다. 또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더 튼튼해지려면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성경관, 성경해석이 중요합니다. 너무 민감한 주제에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기초적인 성경공부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 과학에 대한 공부를 진지하게 더 해야 합니다. 진화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양쪽 공부를 모두 해야 합니다. 어쩌면 과신대는 신학쪽 책들을 많이 읽는데, 북클럽에서 과학책을 더 읽으면 어떨까 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2018년 8월 29일 서울신학대학교 정문 앞 카페 '이유'에서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박영식 교수님(서울신대 조직신학)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창조의 신학』(동연)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그 책의 내용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이 많아 두 번에 나눠서 소개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박영식

사진/글 | 심기주




[과] 바벨론 포로 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흑암이 '이런  뜻하는 구나'라고 받아들였을지, 아니면 그냥 내러티브로 받아들였을지 궁금합니다.


[박] 개개인의 심리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고대 세계의 표현방식사고방식을 우리는 은유라고도 얘기하고 신화라고도 얘기하지만, 당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같아요당시 사람들에게는  표현이야말로 가장 자기들의 삶에 익숙한 표현이었다는 거죠실제로  세계를 혼돈의 세계흑암의 세계로 경험하는 거죠오늘날 우리는 홍수가 나면 여러 과학적인 관심을 갖고서 비가 몇 mm 왔는지, 어디가 침수지역이고, 어디가 안전한지 관찰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이거든요이거는 우리 지역은 홍수 나고  동네는 괜찮고가 아니고,  세상이 물에 덮인 거죠탈출구가 없는 거죠이게  아주 진정성 있는 표현보다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요우리가 흔히 창세기 1장이 바벨론 신화를 빌려왔다 어떻다 하지만,  바벨론 신화도 그 당시 현실 세계에 대한 반영이거든요그러니까 이게 그냥 문학 작품의 표현이 아니고 실제 경험 속에서 나오는 언어들이죠실제로 우리도 그런  있잖아요보통 때는 학문적인 이야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 속에서 나오는 언어들은 보다  1차적이고 근원적인 언어가 나오잖아요그런 언어들이라고  수가 있죠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성서의 언어들이 당시 사람들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언어지 오늘날 우리가 분석하듯이 2차적으로 은유인가 비유인가’ 이렇게 접근했던 언어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그들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세계를 표현한 거죠.


[과] 책에서 진화를 다뤘는데해외에서는 신학자가 진화를 다루거나 설명할   부담이 없는데 우리는 아니잖아요. 신학자로서 진화를 언급할 때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박] 맞아요. 예전에 제가 강남의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 어디 가셨다고 1부 예배부터 4부 예배까지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때 진화 얘기도 아니고 노아 홍수 이야기를 조금 하면서 '창조과학식으로 노아 홍수를 이해하는 것은  무리인  같다'라고 말했는데, 1부 예배가 끝나고 수석 부목사님이 올라오시더라고요. “목사님 그렇게 설교하시면 안됩니다앞으로 2, 3, 4부가 있는데 우리 교인들은 온누리교회 출신들이 많아요.” 그러셔서 알겠다고 했죠 있다가 다른 부목사님이 올라오신 거에요. “아휴 목사님 오늘 설교 너무 감사합니다이거 우리 청년들이 모두 들어야 할 설교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러는 거에요교회 내에서 관심사들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죠.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진화가 과학적으로 옳다 그르다' 그런  제가 주장해봤자 권위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고(말이죠). 그게 아니라 진화라는 틀을 우리가 수용한다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을성서를 충분히 이해할  있다이게 서로 대립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요소는 아니다.’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생물학자들마다 어디부터가 진화고 어디부터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제가   진화라는 단어가 주는 역동성이  속에  담겨있다고 봅니다.  역동성은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굉장히 필요한 관점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고 창조를 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는 진화가 주는 언어의 역동성을 우리가 충분히 수용할  있고 신학적으로 좀 더 생물학적인 의미와는 다른 빛깔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이건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앙의 선배들도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이어서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그분들이  창조론을 보면 창조를  가지로 나눴거든요. “태초의 창조(creatio originalis)”,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마지막 창조 또는  창조(creatio nova)”라고 해가지고 벌써  가지로 나눠놨어요이게 벌써 교리적으로 300~400  이야기인데, 우리는 창조할  태초의 창조 생각합니다그러나 이미 기독교 교리 속에 루터파 정통주의개혁파 정통주의 모두 계속되는 창조를 말해 왔거든요 계속되는 창조를 우리는 흔한 말로 '섭리'라고 하는데 섭리라는 말을 하면서 창조가 갖고 있는 풍성함이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아무 때나 섭리라고 써버리니까자기 뜻대로  건데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버리니까 말이죠그런데 사실 이게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주체는 하나님이잖아요내가 아니라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했고그리고 끝내버리는  아니라 계속 창조하고 계시고  창조를 완성하신다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처음과 끝, 그리고 지금도 창조활동 속에서 행하신다는 이야기가 돼죠그런 관점에서 봐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섭리보다 폭이 훨씬 넓고, 생물학적인 진화도 충분히 수용 가능합니다. 그런 패러다임이 이미 기독교 신학 안에 있는데 그걸 우리가 잊어버리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창조는 예전 얘기로 끝났고 우리는 지금 타락했고 그런데 이젠 구원받아야 하고그래서 중요한  구원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 창조라는 패러다임은 끊긴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는 창조 일어나고 있는 거죠저는  부분을 조금 강조하고 싶었던 거고요섭리라는 부분이 너무 우리 일상과 연관해서 자기 마음대로 작위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방지해야겠습니다그래서 계속되는 창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계속되는 창조라는  단순히 우리 일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라는 범위영역 전체를 포괄하는 창조라는 점에서 오늘날 환경문제 이런 것도 우리가 같이 고민할  있는 중요한 기틀이 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런 면에서 창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하나님은 계속 창조하시는 분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면은  틸리히 같은 사람은 창조를 "하나님의 창조적 힘이다!" 이렇게까지 말했죠여기에 몰트만 같은 사람은 약간 비판도 하지만  충분히 틸리히의 관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는 일어난다고 봅니다하나님의 섭리가 멈추지 않는다고 우리가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창조도 계속 일어나는 것이죠그런 면에서 창조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바로  곁에 있는 사건입니다사실  분이 저를 찾아온 것도 창조적인 사건인 거죠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지금 만나서 밥 먹는 것도 창조적인 사건이죠내가 생각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이런 창조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은 끊임 없이 우리 속에서 같이 동행하면서  표현으로 하면 끊임없이 가능성의 창들을 열어놓고 계신다.”  그렇게 보고요그런 표현들이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가서 무로부터의 창조, 혼돈으로부터의 창조처럼 우리에게 고난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거죠.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하나님은  섭리하지 않으시지? 하나님은 일하시는가?' 이게  창조에 대한 질문인데, 그럴 때도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것처럼  수면 위에 계신 거죠. 거기 계시면서 하나님은 창조의 문을 열어놓으신 겁니고난 당한 사람은 우리가 흔히 절망한다고 하잖아요절망한다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건데,   하나님은 새로운 문을 열어놓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세요 우리는 눈을 뜨고  길을  수도 있고 눈을 감을 수도 있고.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지금까지 없던 길들을 보도록 유도하시고 인도하시고저는 그런 면에서 창조라는 것이 아주 거대한 세상없던 기계를 새로 발명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도 자잘한 일들 속에서도 창조가 익숙한 개념이 되었으면 좋겠다그런 생각입니다.



[과] 가장 중요한 주제일 듯 한데요. 창조나 환경을 강조하며 일상에 주어진 것들을 누리고 감사하며 사는 삶은 세상에 대해 너무 낭만주의적인 시각이 아닐까요? 지금 세상은 굉장히 불의하고 고통받고 어그러진 세상이라고 본다면, 여기에 저항하고 치유해야 한다는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악과 고통하나님의 창조의 선함과 신비가 동시에 가잖아요 사이에서 대안을 설명해주실  있으실까요?


[박] 하나님은 새로운 질서를 계속 만들어내시는 분이지 정해놓은 질서에 우리를 붙잡아 두는 분이 아닙니다. 창조라는  옛날에 끝나버렸고, 만들어 놓은 틀에 맞춰서 돌아가야 하는게 아니죠.  하나님이 새로운 질서를 계속 만드신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질서라는 개념은 창조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과거로 회귀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 새롭게 나아가야 할 개념으로 봅니다. 우리가 흔히 던지는,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다는데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도 물론 사변적으로 여러가지 대답할  있겠지만우리가 서있는 현실에서  질문을 다시 곱씹어보면 거꾸로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이렇게 악과 고통이 있는데, 과연 여기에 새로운 질서의 세계가 만들어질  있는가과연 여기에 창조가 가능한가?' 이렇게 질문했을  성서의 대답은 가능하다라는 거죠우리가 경험하는 악과 고통이 있는 현실세계는 하나님이 만들어가실 창조세계와 대결국면에 있고, 혹은 그런 과정 속에 있다고 보는 거죠. 그러나 그 세계가 현실세계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현실에 순응하고 덮어두기보다는 우리가 이 땅을 극복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아름다운 것이 많아야 할텐데 악이 많은 이유는 뭘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모든 물리적 세게에도 자유가 있습니다. 실제 우리 세계는 인과율로 얽매여 있는 세계가 아니라 보다 우연적이고 자유로운 작용이 많은 세게입니다. 이런 자유로움이 많은 세계가 악이라는 예기치 못한 것의 근거가 될 수 있겠죠. 물론 선이 일어날 수 있는 근거도 될 수 있고요. 


우리의 물리세계는 마치 축구 경기와 같습니다. 축구경기를 볼 때, 감독이 직접 축구경기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축구경기가 감독의 영향 없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마치 하나님은 감독과 같습니다. 물리 세계에서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죠. 손흥민이 골을 넣었을 때, 골을 넣는 과정은 축구장 안에서의 상호과정만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거기에 감독의 작전과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나님 없이 물리 세계의 현상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자유가 있어야 하나님이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이 가능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고, 또 인간의 삶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신학적인 논의도 다 의미가 없죠. 이미 짜여진 것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유를 허용하고 그냥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창조 세계에 같이 참여하시면서 창조의 모험 속에 동참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과] 조직신학에 여러 주제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과학자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주제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를 연구할 수 있겠죠. 신학적으로 완전히 은유였다고 볼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그 당시 사람들이 부활을 보고 듣고 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신령한 몸'이라는 용어 자체가 짬뽕이죠. 영이라는 말과 몸이라는 말이 결합되어 '신령한 몸'이라고 했는데, 이게 보통 몸은 아니니깐요. 종말의 때에 변화된 몸일텐데 그건 대체 어떤 몸일까요? 


또 어떤 이들은 최근에는 과학자나 생태학자들이 환경에 대해서 고민이 많은데, 왜 신학자들은 고민하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이 부분도 연구해야 할 주제라고 봅니다. 또 하나님이 세상을 섭리하신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 물리 세계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말이죠. 갑자기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서 개입하나요? 아니면 물리 세계의 물리 법칙으로 섭리하나요? 같이 연구하면 재미있는 대화가 될 거 같군요.





이 글은 박영식 교수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영식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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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6 / 2018.09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2018년 8월 29일 서울신학대학교 정문 앞 카페 '이유'에서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박영식 교수님(서울신대 조직신학)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창조의 신학』(동연)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그 책의 내용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이 많아 두 번에 나눠서 소개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박영식
사진/글 | 심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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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안녕하세요, 박영식 교수님.


[박영식 교수 (이하 박)]
안녕하세요.


[과] 직신학의 주제가 여러가지인데, 그중에서도 창조에 원래 관심이 있으셨나요?


[박] 창조에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해도 거짓말인  같은데... 모르겠어요. 제가 이전에 야후 블로그를 운영했는데 그때도 제목이 창조, 생명이었거든요. 창조라고 하는 것이 저에겐 이상하게 중요한 주제였고, 독일에서 공부하면서도 창조라는 주제가 막연하게 성서 안에 있는 내용, 옛날 내용이기보다는 실생활에 가깝게 생각되었던 같아요.


[과] (이번에 새로 내신)  앞부분에 그런 부분이 나오더라고요. '성경을 읽거나 기독교 신학을 구성할 구원이나 구속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창조는 오히려 굉장히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도 창세기 1-2장에만 잠깐 반짝이는데, 사실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런 얘기를 하셨던 같아요. 부분을 조금만 설명해주실 있나요?


[박] 저도 항상 우리 한국교회와 관련해서 질문하는 것들이 "타종교는 구원받느냐, 구원은 무엇인가"이고, 설교도 구원에 초점을 놓고 하지 창조를 갖고 설교하는 경우는 이상하게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의외로 성경에 창세기 1-2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요한 주제가 창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성경은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게 되는 책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끝나거든요. 창조의 시작과 창조의 완성이랄까요. ‘창조의 거대한 구도 속에서 성경이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더라도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는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개신교 전통에서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창조를 거의 설교하지 않으니 그런 살리는 필요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봤을 때, 창조를 단지 옛날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고, 마치 우리 책의 서문 같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문이 있고, 1, 2 전개가 때, 서문이 다른 모든 부분을 커버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물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성경 그런 구성에서 읽어볼 있지 않을까,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가장 첫 단계, 출애굽기가 다음 단계, 이렇게 읽어나갈 것이 아니라, 사실 1 안에 성경 전체 하나님의 스토리와 히스토리가 포괄된 구조로 봐도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죠.


실제로 제가 어디가서 창조 설교를 하면 낯설다고 해. 간혹 규모 있는 교회에 가서 창세기 놓고 설교를 하면 이렇게도 설교하시네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고, 많이 낯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그냥 경험상으로도 창조 자체가 구원 이런 것보다 한국 교계에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과신대나 이렇게 과학 대화할 조금 관심이 있지 신학 전반적인 주제로서 관심사는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과]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일단 우리가 창세기부터 시간순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우리의 관심이 온통 그럼 처음에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처음에 뭐가 있었어?” 이런 거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우린 자꾸 실증주의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보니까 뭔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거랑 핀트가 맞는 거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아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뭔가요?


[박]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서 풀어야 하는데, 흔히 말하는 창세기 1 이쪽 배경은 바벨론 포로 시기라고 보고, 나라를 잃고 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질문을 던졌을 겁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도 여러 자료들을 활용하잖아요. 영화, 소설 . 마찬가지로 저는 성경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경험 세계 속에서 알고 있던 자료들, 바벨론 창조신화라든지, 이런 것들을 갖고 거죠.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의 없던 창조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고, 성서신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미 이스라엘의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었으나 고백할 있는 폼을 거기서 갖고 오되, 똑같이 갖고 오는 것이 아니라 비틀어서 자기들의 신앙을 거기에 담아서 표현했다는 거에요. 마치 목사님들이 설교할 드라마를 갖고 오면 드라마를 전달해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설교에 이용해서 설교 내용을 전달하는 것처럼 말이죠


창세기 1장이 그런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역사적 상황에서는 우리의 관심사처럼 옛날 옛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바벨론의 포로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질문이 중요한 것이죠.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나오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것이 바로 포로 상황에 있는 자신들의 상황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은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여기서 물이라는 위험을 뜻하는 상징인데, 고대 근동에서, 노아 홍수도 그렇고, 예수님도 위를 걸으셨고, 계시록에 보면 새창조 바다가 사라져버려요.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항상 위험요소였는데, 바로 그런 수면 위에 하나님은 운행하신다는 겁니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활동하고 계신다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이 어둠 가운데서 빛을 비추신다. 이게 인간의 어떤 실존적인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 가운데서 아무것도 전망이 없는, 한치 앞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해 내시고 어둠을 가르시고. 다음에 아무 것도 디딜 없는 실존의 공허함 속에서 디딜 땅을 허락해주시고. 바다를 걷어내고. 디딜 땅을 주시고. 그리고 각각의 삶의 공간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생명을 안에 집어넣잖아요. 이런 역동적인 그림들을 그리면서 우리는 "지금은 이런 어둠 속에 혼돈 속에 공허 속에 있지만 하나님이 결국 새로운 삶의 공간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런 명령까지 주신다"는 것을 있습니다. 삶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창세기 1장의 메시지라는 겁니다 메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성서의 창조의 이야기는 이러한 관점에서 반복되죠. 마치 출애굽의 이야기가 구약에서 계속 출애굽을 회상하면서 '기억하라' 하면서 출애굽의 동기가 반복되듯이 창조의 동기도 구약에 계속 반복됩니다. 시편에도 나오고, 이사야서에도 나오고. 이렇게 창조에 대한 동기를 계속 반복하는 창조와 구원의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하는 겁니다. (지금 한국 교계에서는 )우리는 구원만 얘기하고 창조는 조금 내려놨는데 창조라는 패러다임 속에 사실 구원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으시고 새로운 공간을 열어놓으시고, 그런 관점에서 읽어야 된다고 보고요. 그런 관점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타당하다고 봅니다


성서의 창조의 얘기는 창조의 과거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미래를 지시하는 것이에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미래가 2천년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제 앞으로 펼쳐질 미래라는 거죠. 바로 지금 하나님 때문에 새롭게 열릴, 창조될 미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자꾸 고고학적인 질문 등을 하는데, 그런 쪽으로 가는 성서의 원래적인 의도와는 다르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냐,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냐'의 문제인데요. 어거스틴 이후로 교회 전통에서 무로부터의 창조가 정립되었는데, 또 오늘날 성서학자들이 성서를 보니깐, '땅이 혼돈하고' 등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걸 양자택일 구도로 보는데, 사실 같은 거라고 본거에요. 삶의 관점에서 보면 극심한 혼돈 속에서는 무를 경험하거든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거에요. 자기한테 이상 디딜 땅이 없는 거에요. 자기 존재도 사실 무화가 되고. 자기 존재도 한없이 가엾고 의미 없는 존재로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실존적인 해석이죠. 무에요. 그러나 동시에 혼돈. 혼돈과 무로부터의 창조. 서로 양자택일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 속에서 동일한 체험이고. 어쨌든 성서는 교리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나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중요한 아니라 하나님은 거기서 창조하신다는 거죠. 그런 메시지가 로마서로 가면 죽은 자를 살린다. 없는 있게끔 한다. 그런 역동성과도 연관이 되죠.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연관이 있고,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미래와도 연관이 되는 거죠. 이렇게 사실 창조의 모티브는 과거에 갇혀 있는 아니라 끊임 없이 생동하고 실제론 우리의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로 읽을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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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람들 (12) 박영식 교수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