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 칼럼

인스턴트 유감?


권영준 교수

(연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 과신대 자문위원)




한 학기 수업을 하다보면 여러 번의 마무리가 필요하다. 우선 정규 강의를 모두 마치는 종강 시간이 있다. 그렇지만 종강이 끝은 아니다. 기말고사의 출제와 채점, 그리고 평가가 남아 있다. 그 다음엔 성적 평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는 과정이 있다. 물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수들은 성적 합산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 외에는 절대로 평가 결과에 대한 변경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끝은 아니다. 학생들이 작성한 강의평가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 수업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다. 


대학에 임용되어 20년이 훌쩍 지나간 지금도 매 학기 강의평가 내용을 확인하는 시간은 늘 설레고 즐거운 경험이다. 특히 서술식 평가문항들은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느낌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큰 도움이 된다. 그중에도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표현들은 진하게 기억에 남는다. 몇 년 전 잠시 맡았던, 이공계 학생을 제외한 전교생 대상 어느 교양과목의 평가문 중 “현대물리학의 기적적이고 감동적인 narrative를 살릴 수 있는 강의는 무엇일지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라는 내용은 분명 내 강의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니 내가 좀 더 노력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적적이고 감동적인 narrative’에 대해 공감해 주는 수강생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따뜻해 진다. 지난 학기에 나온 “한 학기 수업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라는 평가문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같다. 


나는 이력서에 취미를 적어야 하는 경우 ‘합창’이라고 적곤 한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 성가대원으로 참여하였고 미국에 거주하던 시절 학교 및 마을 합창단에 참여하다 보니 여러 좋은 지휘자님들을 통해 음악에 대해서, 합창에 대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중 어느 지휘자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음악의 조건은 지금도 무척 공감이 된다. 답을 직설적으로 주는 음악이 아니고 한 곡 전체를 통해 연주자와 청중이 함께 답을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업에서도 조금 긴 호흡으로 함께 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길 원하고 그렇게 되도록 준비한다. 


강의평가 내용 중 특별히 나를 당혹케 하는 평가문은 ‘강의의 요점을 좀 더 명확히 정리해 주면 좋겠다’라는 내용의 평가들이다. 이 평가를 작성한 학생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면 그 친구를 만나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이 평가문의 의도는 무엇일까? 내가 긴 호흡으로 전달하려 한 그 결론의 제시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긴 호흡을 떠받치는 논리의 전개가 취약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 나의 동료 교수 중 한분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분은 의외의 답을 주셨다. '아마도 고교시절까지 입시위주의 교육을 받다 보니 (시험에 나올만한 문제들의) 정답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제시해 주어야 만족스런 평가가 나올 것이라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효율성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입시 준비를 위한 교육에서는 긴 호흡의 이야기 전개를 함께 즐길만한 여유는 없다. 그저 가능한 짧은 시간에 가능한 많은 문제의 정답을 맞출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주기만을 바란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결혼생활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자녀가 없다. 그래서 우리 나라 중고생들이 어떤 종류의 교육과 평가를 받는 지에 관해 사실 아는 것이 거의 없기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늘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교사가 모든 것을 소화하기 좋게 다듬고 정리해서 제공해 주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게다가 효율성의 논리 아래 책에 있는 ‘정답’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하는 그런 인스턴트식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 과신대의 어느 모임에서 인스턴트 음식과 어머니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마련하신 음식과의 차이를 비유로 들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공부도 이와같은 것이 아닐까. 아주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한가지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공부하고 마침내 지금까지 아무도 찾지 못한 새로운 진리의 한 부분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중한 배움이고 깨달음이 될 것이다.  



어느새 올해도 10월이 되었다. 언제나처럼 10월초에는 각종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표된다. 수상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본인이 흥미를 느끼는 한가지 주제에 깊이 들어가 연구하다보니 나온 중요한 업적으로 인정받는 결과물들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벨상 소개 기사 옆에는 ‘우리 나라에서는 왜 아직도 과학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가’하는 기사들이 따라 나오곤 한다. 글쎄다. 효율과 경쟁의 깃발 아래 인스턴트식 맞춤형 공부, 맞춤형 연구의 틀을 벗어나 연구자 개개인의 학문적 관심과 흥미에 따라 깊이있는 긴 호흡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이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분위기가 무엇보다 우선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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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7 /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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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어거스틴을 쫓아내는 교회 : 과학


김기현 목사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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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지금으로 치자면 만물박사요 전방위적 지식인이다. 그의 주저인 신의 도성은 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종교와 문화, 정치와 경제 영역을 두루 아우른다. 당대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한 그의 탐욕스러운 지적 열정과 애정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그런 그에게 과학이라고 빠질 수 없다. 그는 과학에 관해서도 전문가이었다. 그는 그 이후로 기독교가 자연과학을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정표를 세웠다.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기독교 대신 마니교에 흠뻑 빠졌다가 더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성경에는 자연과학에 관한 말이 없었지만, 마니교는 점성술과도 관련이 있어서 요즘의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꽤나 차지했다. 그것이 어거스틴을 마니교로 이끌게 되었다. 실제로 어거스틴은 자연에 관한 앎의 일부가 그들을 통해 습득하였음을 인정할 정도다.


과학적이라고 추종했는데 마니교를 떠난 것은 한편으로는 종교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학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것부터 설명하자면, 그들이 가르치는 자연에 대한 가르침이 실제의 자연 현상과 달랐다. 동지와 하지, 춘하춘분에 관한 교설, 일식과 월식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자의 것을 본다면, 종교가 과학과 자연에 관한 생각이 틀릴 수 있고, 그것이 종교 본래의 진리와 무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무지이고 모독일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종교가 자신을 오류 없는 체계로 합리화하는 것은 위선이다. 종교의 본질과도 상관없는 것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과시하고픈 허세이다. 신앙은 본디 궁극과 절대에 관한 것인데, 궁극도 절대도 아닌 것을 절대적인 것인 양 가르치니 신앙의 전도요 우상숭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과학적 관심만이 아니라 악과 고통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의 영원한 대립과 갈등, 투쟁이라는 마니교의 원리를 따르면, 일월성신은 마구 부딪치며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워야 한다. 허나, 어거스틴이 바라본 별들은 조화와 질서를 따라 운행되고 있다. 그들의 종교 교리가 실재와 부합하지 않은 것이다. 해서, 어거스틴은 대놓고 요구한다. 실재와 부합하든지, 사실에 걸맞게 잘 설명을 하든지.





그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으로 비과학적인 교설을 떠들어대는 자들을 공박한다. 그의 신앙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지구를 비롯한 하늘과 별, 우주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성경을 해석한다면서도 비과학적인 주장을 펼친다면, 그것을 이교도가 알게 된다면 수치스럽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서의 권위를 손상시킨다. 비과학적 주장을 성경의 이름으로, 성경을 근거 삼아 외치는데, 과학자의 눈에 비친 성경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옛날이야기로 간주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독교 고유의 진리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게 한다. 어거스틴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이다. 말도 안 되는 반과학을 진리로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이교도이자 과학자들이 복음 중의 복음인 부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겠는가. 목욕물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린다는 말이 딱 이 경우이리라. 어거스틴의 말 이면에는 왜 그런 바보짓을 하느냐는 슬픔과 분노가 엿보인다.


나는 20년 전, 복음과 상황에서 진화 논쟁을 기억한다. 그 당시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장대익의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면 무엇이 과학이란 말입니까?’라는 글은 어거스틴의 그 감정과 결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비과학을 과학으로 우기는 신앙인들, 비전문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의 주장을 틀렸다고 용감하게 말하는 공학자들, 나이와 학력과 같은 비학문적 권위로 후배의 주장을 간단히 뭉개버리는 선배들 앞에서 장대익의 글은 논리정연한 반박과 함께 더는 대화와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슬픔과 분노가 엿보였다. 미루어 짐작건대, 그 사건 이후로 그는 기독교를 떠났다. 아니, 버렸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거다.


우종학 교수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생물학이나 물리학 등, 진화론과 직결된 분야를 전공하는 학부생들이나 연구자들 이야기를 본다. 그들은 신앙과 과학 사이에 갈등을 느끼지 못했는데, 창조과학으로 인해 혼란을 겪은 이들이 많다. 그러다가 우종학 교수와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그들과 달리, 다른 어느 곳에선가 이미 기독교에 체념하고 자신을 키운 신앙을 눈물을 머금고 떠난 이들이 많지 않을까? 기독교 안에 몸은 담고 있지만, 마음은 떠난 지성인들이 꽤 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결단할 시점이다. 그때는 마니교로 갔다가 기독교로 돌아왔는데, 지금은 기독교에서 무신론자가 되고 있다. 그때의 기독교가 될 것인가, 마니교가 될 것인가? 실재와 부합하고 현실에 걸맞은 설명 체계를 갖춘 합리적인 신앙이 될 건가, 실재와 동떨어진 종교적 독단에 빠질 것인가? 어거스틴과 같은 역할을 할 기독지성인들을 내쫓을 것인가, 미래의 어거스틴을 품는 교회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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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6 /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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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감정 배제하기?


박치욱 교수

(미국 퍼듀대학교 약학대학 /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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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감정이 개입된 판단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을 공부하든 신학을 공부하든 학자라면 당연히 이성적인 판단을 존중하고 감정의 영향을 배제해야 한다. 학문적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은 철저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만들어진 학문 결과는 우리의 감정과 무관한 것일까? 학자로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내린 연구의 결론이 근사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또 때론 왠지 궁색하거나 어색하기도 하다. 자신의 이론에 맞는 결과를 얻었을 때의 뿌듯함, 어긋나는 결과를 얻었을 때의 답답함, 이런 감정적인 반응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감정적인 반응이 절대 연구 결과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건 학자의 기본 소양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신학과 과학의 연구 결과를 접하는 대중은 어떨까? 그들이 학자들의 객관적인 연구 결과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으로 객관적인 연구 결과를 거부하는 경우도 본다. 주관적인 감정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도록 훈련받고, 객관적인 논리와 증거에 의해서만 결론을 내리려 노력하는 학자들에게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감정적인 반응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 아닐는지 싶기도 하다. 학자들도 자신의 연구 결과가 아름답다거나 궁색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일반인들이 그런 감정적인 반응이 없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관을 갖고 산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누구나 우선은 자신의 세계관에 맞는지 어긋나는지부터 살피게 된다.


세계관에 맞으면 통쾌하고 아름답고, 어긋나면 짜증나고 의심스럽다. 통괘하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마다 자신의 세계관은 반복해서 강화된다. 한 마디로 세상의 이치가 보이는 듯하다. 이런 자신의 세계관을 신념으로, 교리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원리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안타깝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이 그렇다. 사람이기에 그렇다.


신학과 과학을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것, 어쩌면 필연적으로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객관적인 결론에 대한 주관적 반응, 심지어는 자신의 세계관에 따른 취사선택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건조한 감정을 배제한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자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대중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천체의 움직임이 물리 법칙으로 다 설명되는 그 아름다움, 생명의 다양성이 진화로 다 설명되는 그 아름다움, 생명 현상이 분자들의 반응성으로 다 설명되는 그 아름다움. 어쩌면 이런 감정적인 요소까지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지식의 전달은 파편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예전에 들은 어느 환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환자는 사고로 감정 중추에 이상이 생겼다. 그런데 특이한 증상을 보인다.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도 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가짜라고 의심한다. 감정에 이상이 생겼는데, 어머니를 어머니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시각정보 청각정보는 어머니가 맞는데 어머니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신학과 과학의 지식이란 어쩌면 이 환자의 어머니와 같은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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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5 /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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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굳이, 어렵고 힘든


한은애
(
전문상담사과신대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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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고 작은 종류의외상 연구하고, 그것을 치료하고 싶은 상담사로서, 지난 년간 외상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받게 것에 상반된 감정들을 느꼈습니다. 관심 분야가 유명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많은 분들이 외상, 상처에 관심이 생기는 것을 긍정적으로만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명한 외상 연구가 주디스 허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심리적 외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세계 안에 놓인 인간의 취약성과 인간 본성 안에 놓인 악의 가능성을 직면하는 것이다.”


 
저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찬양하고, 그분이 삶을 인도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세계의 악함과 인간의 약함을 바라보면 힘이 듭니다. 우리가 고통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단순해 보이지 않고, 심지어 답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괴롭기까지 합니다. 당연히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고통을 느끼면, 고통을 유발한 폭력을 생각에서 몰아내고 싶어하고, 원인을 단순화시켜 통제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통제는 자칫 잘못하면 고통의 피해자인 자신을, 혹은 타인을 비난하게 됩니다. “내가 그때 자리에 가지 않았어야 했는데라는 자기 비난은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 사람이 입었던 옷과 애매한 행동이 문제라는 타인 비난은 피해자를 고립시킵니다. 마치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것을 없애기만 한다면 일이 이상 반복되지 않고, 안전한 천국으로 돌아갈 있을 것처럼요. 이렇게 폭력의 피해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지워지고, 피해자 연대와 연구자들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의심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끔찍한 사건들을 잊고 싶어 하지만 남영호 침몰사고, 대한항공기 피격사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대구시 지하철 방화 사건 충격적인 사건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발생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재난 사건에 대한 시각 자료들과 구체적인 내용이 불특정 다수에게 빠르게 확산 되는 시대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직접 외상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간접 외상을 통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이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동물임을 생각할 , 우리 사회 일부분에서 발생하는 재난과 폭력, 부패의 문제는 그대로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 만연해진 간접 외상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며 인상 깊었던 점이 있습니다. 부조리한 사건에 노출된 대중들의 정서에서분노라는 감정이 눈에 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사회적 재난으로 인한 간접 외상에서 나타나는 분노는, 단순한이기 보다는 도덕 감정에 가까웠습니다. 도덕 감정으로서의 화는 결과적으로 친사회적 행동과 이타적인 태도를 이끌어내고, 이러한 변화는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건, 사고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요구하는 , 그리고 재난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피해자들을 위한 치료와 연대에 힘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만큼 가치 있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바로 길이라 믿습니다.

 
과신대가 걸어온 또한 아마 쉽고 편한 길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보이는 대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성경과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방대한 가지 재료를 조화시켜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굳이 복잡한 길을 택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겠지요. 길을 걷는 이들은 작금의 현실에 분노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어렵고 힘든 길은 우리 자신과 다음 세대의 건강한 신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고민하고 변화를 위해 힘쓰는 것이 가끔은 지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욱 모이고 위로하며 자리를 지켜주시는 모든 과신대 동역자분들의 노고에 오늘도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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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4 / 20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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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가르치는 자의 기쁨


강상훈
(
베일러대학 생물학과 교수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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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학기를 마무리하는 기말고사 기간의 캠퍼스는 묘한 긴장감과 강제로 공기가 순환되는 건물임에도 밤을 지새우는 학생들의 기운으로 왠지 눅눅한 기분이 들기 마련입니다. 매년 봄학기에 “Microbial Evolution"라는 제목으로 진행하는 학부 대상의 세미나 수업도 마지막 에세이를 읽는 것으로 학기를 마무리했습니다. 텍사스 침례회와 연계된 사립대학에 소속된 관계로, 미국의 일반 대학에서 기독교적인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에서 자유하고, 대신 학문의 영역에서의 진화와 그것을 비문명적으로 소비하는 창조론과 창조과학에 대해서 언급하고 비판적으로 논의할 있는 것이 수업의 기쁨 내지는 보람 중의 하나입니다. 10여명 남짓의 학교내 생물학, 물리학, 철학, 신학, 역사학 등을 전공하는 교수들과 함께하나님과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모임에서 유럽 출신의 식물학 교수가 창조과학의 문제가 예민한 현상을 낯설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상이 가장 공고한 미국과 한국에서 연관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는 관계로, 젊은 청년들과 이런 기회를 가지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단순히 진화과학의 입장에서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방향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제까지의 가정과 교회에서 가져왔던 진화과학에 대한 근원적인 거부감 내지는 의도적인 무관심에 대해서 얘기하고, 과학과 하나님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미나 수업인만큼, 매년 논의의 방향과 정도는 흥미롭게 다양합니다.
 
가령 이번 학기에는, 그래왔던 처럼 켈러 목사의 BioLogos 기고문인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 읽고 진행한 번째 시간은 난데없이 상당히 개인적인 차원의 고백들이 나와서 토론을 진행하면서 수위를 어떻게 조절해야 것인가를 조금 걱정하기도 했었습니다. 와중에 올해 수강하는 학생들은 아주 보수적인 개신교 배경, 카톨릭, 불가지론자, 무신론자, 무슬림까지 다양한 믿음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모두 차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조심하면서 때로는 조금 아슬아슬하게 학기를 보냈습니다. 덕분인지 이번 학기의 수업은 어느 해보다 활발하고 실제 논문에서 읽는 연구의 내용과 함의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논의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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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에 가을학기에는 1학년 1학기에 필수로 듣는 기초생물학을 가르칩니다. 세미나 수업과는 달리 100여명의 학생들이 대부분 의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신청하는데, 사용하는 교재가 서문에서 강조하고, 특별한 수업의 시간에 생물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본 얼개로서의 진화론에 대한 논의로 학기를 시작합니다. 며칠 이내에 매번 최소 정도 부모나 손윗형제의 항의성, 내지는 우려성 이메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정도는 연구실을 찾아와서 얘기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걱정은, 90명이 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다수의 학생들입니다. 수업 시수가 많지 않기에 4년을 지나면서 수업을 통해서 여러번 만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지만, 4학년 전공 과목과 세미나 수업 등을 통해서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을 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4학년 2학기에 1학점을 조금은 수월하게 채우기 위해서 세미나 수업을 듣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시험이 없고, 열심히 논문과 에세이 읽고 토론에 참여하고 가지 짧은 글만 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주를 마치고, 그리고 마지막에 수업이 가져다준예기치 못한 기쁨' 대해 얘기하곤 합니다. 성적을 결정하는 교수의 주관적인 판단이 많이 작용한다는 사실이 평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부분을 차지하겠지만, 그중에 그래도 작은 진심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대학이 직업 교육의 장이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와 설립이념을 막론한 전지구적 현상이지만, 세미나 수업은 어떤 면에서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자에게 기쁨을 주곤 합니다. 과신대에 돕는 자로 이름만 걸어놓고는 실제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지만, 미국 텍사스의 시골에 있는 작은 학교에서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는 , 그래서 부르심에 이번 학기도, 다가올 학기들도 기대함으로 준비하고 섬기기로 합니다. 이번 학기를 마치면서 개인적으로 선생인 저에게 격려가 되었던 학생의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In reflection, I believe this class has both strengthened my faith and my passion for the field of bi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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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3 / 2018.06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정말 지켜야 것이 무엇인가?

김근주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구약학 교수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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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예고하는 주님을 켠으로 데려간 베드로가 주님을 꾸짖었을 ( 8:32),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8:33) 다시 꾸짖으셨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강력한 꾸짖으심은사탄이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여기서사탄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영적인 어떤 존재같은 것으로 여길 없다. 사탄이 의미하는 것은 베드로의 가치관, 베드로의 세계관이다. 그리스도라면 그런 끔찍한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영광스럽게 임하고 모든 원수들을 박멸하는 승리의 , 영광의 주라야 한다는 가치관, 그것이 베드로의 생각이고, 그것을 향해 주님은 사탄이라 단번에 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사탄 가치관이며, 세계관이라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서의 사탄의 존재를 전혀 확인할 없는 반면, 신약 요한계시록의 경우 사탄과의 싸움이 세상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궁극적 싸움이다. 이를 보면, 사탄의 존재 자체는 구약과 신약의 시대마다 달리 표현되었음을 짐작할 있다. 구약과 신약에 공통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부르시는 삶과 그를 떠나 영광과 승리, 번영을 추구하며 욕망을 극대화하려는 삶의 대조라 있다. 그렇다면, 사탄이라는 영적 존재의 여부를 믿는가 믿는가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가라고 있다. 사탄과 같은 외부의 대적 세력에 대한 믿음 여부는 시대의 인식과 정보, 과학과 문화의 진전과 결부되어 있다.

문화와 과학은 시대마다 바뀐다. 영원한 복음은 시대마다 바뀌는 문화와 과학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킬 것은, 신구약 성경의 배경이 되던 고대 시대의 우주관, 사회 문화의 형태, 가정의 모습, 결혼 제도,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해 같은 내용이지 않을 것이다. 어느 시대이건 우리가 굳게 간직하고 지켜야 복음의 핵심적인 가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어 아들을 주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임이 분명하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7:12), ‘ 이웃을 몸처럼 사랑하라’( 13:8-10; 5:14) 가르침은 점을 명확히 표현한다.

그러나 한때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지동설로 대표되는 과학을 거부하고 맞섰으며, 한때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노예제도를 지지하며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하였다. 성경에서 활용된 시대의 배경을 지켜야 영원한 가치로 착각한 데에서 비롯된 교회의 오류라 있다. 지동설을 입증한 과학의 연구 성과와 노예 제도 폐지, 여성 참정권 확대라는 사회 문화의 진보는 이제까지 교회의 해석이 잘못 되었음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사례는 무수하다. 정말 지켜야 가치가 무엇인지 놓쳐 버렸을 , 교회가 세상의 빛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교회의 빛이 되었다고 말해야 같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동성애를 반대하는 일에 앞장선다. 아마도 상황 역시 성경이나 신학으로 해결된다기보다, 동성애에 대한 의학 분야 연구 성과와 사회 문화의 변화를 통해 해결될 가능성이 보인다. 천동설, 가부장제, 노예 제도, 여성 참정권 반대 등과 같은, 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지지한 비진리 목록은 앞으로도 더욱 쌓여만 같다. 지켜야 것이 무엇인지를 놓쳐 버린 교회, 배워야 것이 무엇인지 잃어 버린 교회, 그러면서 과학에 대한 신앙의 우위, 세속 문화에 대한 기독교 문화의 우위와 같은 구호를 내세우는 교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속한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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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2 / 2018.05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성당과 시장

강사은
(
과신대 홍보/미디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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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의 끝이 일주일 정도 남은 시점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먼저 찾아 보고, 출퇴근 시간에 집중해 묵상하며, 긴장 속에서 회의할 정리정돈하는 편안함을 제공하며, 낯선 곳을 찾아갈 인도자의 역할을 하는 스마트폰을 우리는 항상 옆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마치 공기와 같이, 없어서는 안될 것만 같은 존재가 기기가 우리 가까이 있게 데에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오픈소스의 영향이 컸습니다. (오픈소스는 소프트웨어 혹은 하드웨어의 제작자의 권리를 지키면서 원시 코드를 누구나 열람할 있도록 소프트웨어 혹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에 준하는 모든 통칭을 일컫는다;위키수십 장의 3.5인치 디스켓을 갈아 끼워가며 PC 설치했던 제게는 대단한 과거 경험의 대상인 오픈소스 머신을 이제는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현대인의 대부분이 손에, 주머니 속에, 핸드백과 백팩에, 손목 시계 형태로 갖고 다니는 시대가 것입니다.

'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오픈 소스 운동을 경험자 입장에서 분석한 에릭 레이먼드(Eric Steven Raymond) 주요 글을 모은 제목입니다(온라인 서점에서 이북을 무료로 구할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언제든 읽을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성당' 폐쇄형 공유 모델을, '시장' 개방형 공유 모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개념을 글에서 사용하고자 합니다.

대표적 오픈소스인 리눅스(Linux) 0.11 버전 시절 독일에 있는 사람의 요청에 귀기울인 리누스 토발즈(Linus B.Torvalds) 메모리 양이 부족한 요청자의 환경을 위해 특별한 기능(디스크 페이징) 만듭니다. 날은 재미있게도 1991 12 성탄절이었고 말하자면 예수가 태어난 날에 다른 OS와의 본격적인 비교가 시작된 리눅스 0.12 버전이 완성된 것입니다. 0.12 버전 이후로 리눅스 사용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고 2018 현재 서버 시장의 강자는 리눅스라고 만큼 입지는 커졌습니다지금의 스마트폰을 포함한 모바일 환경도 사실은 리눅스와 오픈소스 세상입니다.

과신대 운동은 리눅스(Linux) 탄생과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리누스 토발즈의 헌신(그는 재미로 했다고 합니다만) 우종학 교수의 헌신, 인터넷 상의 공개와 SNS 상의 공유, 아마추어 개발자의 참여와 평신도의 참여, 싱글 태스킹 위주의 PC 환경을 멀티 태스킹의 세계로 이끈 점과 젊은지구론에 경도되었던 국내 개신교계에 창조기사와 과학에 대한 다양하고 정통한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점을 있겠습니다

과학과 종교를 서로 원수로 상정하는 대중매체와 대중적 논쟁 수준(“창조인가? 진화인가?” 식의) 머물러 있는 성당 모델의 과학 인식 환경에서 반지성적인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아예 신앙을 거부하는 사태로 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은 과학자의 열정에서 시작한 과신대는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상보적이며 서로에게 유용할 있다는, 열린 대화의 장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과학은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종교를 정화할 있으며, 종교는 맹목적 숭배와 잘못된 절대성으로부터 과학을 정화시킬 있다. 과학과 종교는 각각 서로가 번영할 있는 넓은 세계로 서로를 끌어당길 있다 표현과 같이  넓은 세계로 연결하는 통로이며 서로 다르나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대화하는 광장입니다성서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창조의 과학적 방식은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영역의 과학자들을 통해 연구되고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자연스럽고 조화로우며 놀라운 공명의 하모니를 우리는 과신대에서 경험합니다.

마치 견고해 보이나 좁디 좁은 성당 모델 안에서는 창조과학이 기독교 과학 인식의 유일한 대안인듯 보일 있으나 막상 넓은 시장으로 나와 보면 천주교, 그리스 정교,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세계 기독교의 주요 교단들은 진화학을 포함한 과학과의 갈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있습니다(성공회는 2008, 천주교는 2009년에 찰스 다윈에게 공식 사과한 적도 있지요). 과신대의 위치도 창조과학과 같은 좁은 입지의 유사과학을 극복하려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잡힌 대화를 추구하되 특별히 과학주의,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 것이라는 과도한 믿음뒤에 숨은 무신론의 도전에 응답하기 위한 좌표에 있으며 더불어 유신론을 지향하는 하지만 젊은지구론이 아니면 성서 기록은 마치 거짓이 되기라도 하는듯 오히려 무신론적 인식을 내포하고 있는 창조과학의 위험성도 알리고자 뿐입니다. 물론 창조기사에 관한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열린 태도의 젊은지구론자라면 존중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발랄함, 흥정하는 긴장감, 음식이 익는 냄새, 술잔 부딪히며 왁자지껄한 시장에서 일반계시의 해석자인 과학은 자유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습니다 날갯짓과 공명하는, 특별계시의 해석자인 신학과의 대화를 우리는 성당이 아닌 시장에서 만들고 있습니다좁디 좁은 문자적 해석의 가두리 안에 과학을 우겨 넣어 창조주조차 틈새의 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성당 모델에서는 경험할 없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덤입니다. 138억년의 우주와 지구 46억년의 과거에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 있게 모든 존재들을 격려하며 지지하는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까지 모든 피조물을 관통해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우리는 매순간 숨쉬고 만지며 보고 들으며 먹고 마시며 묵상하고 깨닫습니다굳이 그랜드 캐니언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운 영월에서 지구 연대의 증거를 있으니 돈도 굳었습니다.

초등학생 아들은 오늘도 리눅스 노트북을 열어 마인크래프트를 즐기며 파이썬 코드의 도움으로 캐릭터가 다니는 바닥을 온통 황금블록으로 빠르게 도배하고 있습니다일명 '황금발' 프로그램입니다과학은 생활 곳곳에서 안전하고 윤택한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는 도우미이고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발견하게 하는 좋은 수단이기도 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이 과신대가 좋은 길라잡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넓은 세상으로 나와 과신대와 함께 시장을 누비기를 청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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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1 / 2018.04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삶에 적용하며 좌충우돌하는  

서광
(
과신대 대의원 / 기독대안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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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비오는 봄날 저녁에 서울대입구역 근처 교회에서 남부 북클럽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임은 내가 속한 교육현장에 적용점을 찾는 설계도와 같았다답을 찾아 참여한 발걸음은 내게 도전을 만나게 했다 도전은 자연에 영원한 근사인 과학이 스펙트럼 의견을 포용하는 마음을 요구한 것이다명확해야 하고 이해가능해야 과학이 손에 잡힐 있는 생각들을 이제 살며시 놓고 다양성을 이해하고 차이를 구별하는 능력을 요구했다그래서 나의 호기심은 많은 장소로 이끌었다콜로퀴움포럼기초과정 등을 참여하면서 과학과 신학을 연결하는 사고의 지평은 넓어지고 균형을 이룰 있었다.


창조기사 논쟁 가지고 기초과정과 북클럽에서 연이어 나눔을 하면서 기독과학교사에서도 ‘과학교사창조를 말하다라는 모임으로 창조에 대한 다른 시각들을 서로 이해하고 나누는 상상을 해보았다자연스럽게 다른 과학교사들에게도 ‘창조 고민해 보고픈 마음이었다그러나 올해 번에 걸쳐 시도하였으나 여러 가지 이후로 아직 모임을 진행하지 못했다상상 현실의 간격을 맛보았다그러면서 ‘창조기사 논쟁이라는 책이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고 많은 노력과 시간이 있었음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가지 도전은 교육현장에 적용하는 것이었다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적어도 나처럼 헤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자 하는 마음이었다한편으로는 기독대안학교에 근무하면서 이제까지 과학지식만 가르친 것에 대한 회개이기도 했다그렇다고 과학지식도 제대로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나의 이런 의욕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오개념을 갖게 하고 신앙을 방해하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으로 ‘일단’ 시작했다약간의 완벽주의자인 나에게는 시도인 셈이었다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제작하고 있는 ‘101가지 질문 시리즈’ 영상과 ‘오리진 기본교재로 하여 의욕적으로 시작한 교육은 원대한 마음을 흡족하지 못하게 했다준비 부족아이들의 관심주변 교사의 오해 등은 다음을 준비하는 내게 업그레이드를 요구했다올해 1 교재제작TFT 시작모임에 참여하면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교재를 만들어 교육을 준비하고 아이들의 관심을 높이는데 실마리를 찾고 있다더불어 ‘과학의 이용하여 학교 선생님들에게 창조를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접근해 보고자 한다.


오늘도 좌충우돌하는 徐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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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0 / 2018.03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신학도가 바라본 '과학과 신학의 대화' 난점과 희망

최현진
(
하늘. 성경 아카데미 대표 / 과신대 홍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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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2017 10 25) 장신대에서장신신학, 한국교회에 걸다!”라는 제하에 학술세미나가 열렸다장신대에서는 신학이 ‘시대적 문제들에 대해 시의적절한 답변을 찾아가는 과제 포함한다는 점을 인식하여 매년 현안과 쟁점과 필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듣고, 묻고,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해왔는데 이번 세미나 첫째 번째 영역의 주제가 바로과학과 신학의 대화였다. 명의 교수가 각각과학적 무신론의 도전 앞에 기독교 창조신앙’, ‘인간지능에 대한 이해’, ‘4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가져올 새로운 선교의 기회라는 제목의 발표를 하였고 의미 있는 대화들이 오고갔다. 특히 장신대 김정형 교수(장신대 조직신학) 담당했던 [소위과학적 무신론 도전 앞에 기독교 창조 신앙] 필자에게 인상 깊었다.

 
김정형 교수는 발제를 통해과학적 무신론 도전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창조신앙을 바르게 증언하기 위한  가지 과제를 제시했는데, 첫째는과학적 창조론(혹은창조과학’)’ 잘못된 접근 방법을 반성하고 극복하는 것이고, 번째는 성서학적 과제로서 과학시대를 위해 창세기를 새롭게 읽는 것이고, 번째는 조직신학의 분야인 과학시대를 위해 기독교 창조 신학 교의학적 창조론을 새롭게 쓰는 것이다

 
그는 과학혁명 이후 근대 과학이 전제한 세계관을자연주의적(naturalistic) 세계관이라 언급하였고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형이상학적 자연주의(metaphysical naturalism)’ 구분하여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정하는 유신론과 양립불가능한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인 후자를 무신론적 세계관을 내포하지 않으며 무신론과 유신론 모두에 중립적인 전자로부터 구분하여 신학은방법론적 자연주의 연계하여과학적 무신론 도전을 넘어설 디딤돌을 발견할 있다고 강조하였다. 필자가 보기에방법론적 자연주의형이상학적 자연주의 구분은 우종학 교수가 평소 강조한 진화론진화주의 구분한 점과 크게 공명을 이룬다. ‘방법적 자연주의진화론 같은 맥락이고형이상학적 자연주의진화주의 같은 궤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 그동안 우종학교수가 강조한 내용이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동일하게 지지되고 있음을 있다.

 
또한 김정형 교수는과학적 무신론 도전 앞에서과학적 창조론(혹은창조과학’)’으로 응대하는 것은 가장 나쁜 전략이라는 견해도 피력했다. ‘과학적 창조론(혹은창조과학’)’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한계 안에서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근대 과학과 자연 세계의 궁극적 근원과 목적으로서 초월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를 추구하는 창조교리를 동일한 지평에 혼합하는 자기모순과 범주 혼동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과학시대에 창세기를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에 근대과학 이전의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반영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월튼의 견해를 소개하였다. 이어과학적 창조론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 외에 다른 무엇이 담겨 있다는 거부감을 따라 창조신앙의 진리와 성경에 내포된 고대근동의 세계관을 혼동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라 주장하면, 결국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서학적 진리 주장마저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있음을 경고하였다. 오히려 성경기자가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서 당대의과학적지식을 통합하는 방식을 신중하게 살펴신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통합시켜주는 바른 방법 배워야 함을 여러 신학자들의 글을 빌어 설득력 있게 진술하였다.
 
 
필자는 김정형 교수의 발제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제목에서 밝힌 주장을 따라 조금 나아가면과학과 신학의 대화 행함에 있어 겪게 되는 신학 내부의 난점을 만나게 된다

 
필자의 장신대 신학과 재학시절의 일화이다. 당시 신학교들은 각각의 신학적 입장에 심각한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술제와 체육대회 다양한 노력들을 전개했었는데, 모임이 이어질수록 소위보수진보 차이와 차이로 말미암아 발생한흉한 도랑만을 절감하고 말았다. 당시 중도적 입장에서 극단의 신학적 견해를 조화시켜 보기 위해 필자를 포함한 모교 장신대의 신학생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도대체 장신대의 신학은 뭐냐? 너희들은 박쥐냐? 너희들조차 견해가 서로 다른 무슨 일치냐?’라는 정당한(?) 비아냥을 받아야 만했다.

  20
년도 지난 과거의 이야기지만, 신학도의 입장에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절박한 과제인 ‘과학과 신학의 대화 있어서  난점은 여전히 심각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없다. 우종학 교수의 견해와 장신대의 견해가 공명을 이룬다는 것은 우종학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신학적 학풍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의 반증이 있다.

 
어쩌면 지점이과신대 몸담고 있는 여러 교단의 목회자와 신학도들이 심각하게 인식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과학과 신학의 대화 바르고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대화하기 위해 여러 신학적 학풍의 다양성의 풍성함을 유지하면서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찬미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한 신학도들의 유의미한 대화의 문법과 방법론 찾기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20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난점 당황하면서도 각기 다양한 관점과 방법들의 대화와 공명을 통해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하게 찬양하고자 하는 포기할 없는 사명을 인식했을 때의 떨림을 중년이 넘어 다시금 경험하는 것은 기쁨이며 부담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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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7 / 2017.12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칼럼

기독교 대안 학교의 신학의 부재

정승화
(
수정 비전 학교 과학교사, 과신대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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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대안 학교의 현장은 다양한 방면으로 결핍에 허덕인다. 『교육 기본 법』과 『초·중등 교육 법』은 의무 교육을 의무 취학으로만 규정하고 있어, 공교육에 취학한 학생들만 학교를 통해 정부로부터 오는 지원을 받고 있다. 반면 미인가 형태의 대안학교는 정부의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정부의 지원을 의지하여 운영되는 일반 학교들과는 달리 미인가 대안학교는 항상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고, 교육 시설도 열악하여 학생들이 배움의 현장에서 누려야 하는 것들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결핍의 문제가 있다. 학교들이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 대안적 가치의 결핍이다. 학교가 지향하는 가치 철학은 대안 학교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학교의 모든 시스템, 커리큘럼, 학생 인재상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탁월하고 단단할 경우 열악한 시설 등은 극복 가능한 문제가 된다. 또한 자신들이 기치로 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고 애쓰는 것은 대안학교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다. 여러 어려움 앞에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이를 다물며 쓰는 말로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가오 바로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이다. 개별 학교가 대안으로 제시한 기독교적 대안이라는 것은 각자의 신학과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때문에 내세우는 가치들이 교단에 따라 혹은 세세하게 따지면 개인에 따라서도 조금씩 다를 있다. 그러니 각기 다른 대안을 내세우는 다양한 양태의 기독교 대안 학교들이 존재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할 있다. 자신들이 내세우는 기독교적 가치가 올바르지 않거나 결핍된 학교는 앞서 말한 재정적 결핍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을 야기시킨다. 건강한 신학이나 기독교적 가치가 결핍 되었을 , 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번 살펴보자.

 
기독교 학교에서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가 윤리나 행동 방침을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학생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학교가 차별화로 내세우는 것으로는 연애 금지, 일반 학교 보다 훨씬 엄격한 교칙, 징벌적 징계, 동성애 혐오 분위기, 미디어에 대한 죄악시 등이며,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름 성경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올바른 신학 안에서 정립된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하나님에 대한 편중된 생각을 가지게 되며,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자아를 가지게 된다. 이런 류의 문제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학교의 시스템 커리큘럼이학생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부모나 교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학생들을 착한 아이, 순종적인 아이, 부지런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복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의 하나로 전락시켜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와 결합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필요조건이라 인식하게 만들어버린다. “에이, 그건 당연히 가장 중요한 거고, 다른 것도 생각해야지라고 하는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다.
 
 
학습 내용을 성경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하여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긍정적인 시도도 많이 이루어진다. 교사들이 모여 회의하고, 교재를 재구성하기 위해 힘을 쏟는다. 과정에서 다른 교과목 교사들에게도 각자의 고충이 있겠지만 보수적인 기독교 환경 속에서 과학 교사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도전을 받는다.  많은 학교들이 채용 면접에서부터창조 과학을 가르칠 있겠느냐.’, ‘성경에서 나타난 사건을 과학적으로 풀어줄 있겠느냐.’ 라고 질문한다. 기독교 대안학교에서는 관점은 그들이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갈 있는 유일한 신학적 해석의 틀에 속하기 때문이다. 진화와 창조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프레임을 짜고, 진화를 거부하는 것은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에 대한 합리적인 설득에도 실눈을 뜨고 노려본다. 필자가 근무하는 기독교 대안학교에서도 중학교 3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진화론의 내용이나 나름 전문 분야인 우주론 등을 역사적 방법, 기독교적 세계관과 함께 해서 가르친 날이면 어김없이 학부모에게서 연락이 온다. ‘선생님 그렇게 안봤는데…’ 시작하는 자격 논란, 이단 시비는 이제는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여겨진다. 학부모에게서만 연락이 오면 다행이다. 교장, 동료 교사들 일부도 이런 내용을 가르치는 나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의 과학적 소양 부족이기도 하지만, 성서를 문자 그대로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해 발생한 신학의 부재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학습 내용의 재구성에도 올바른 신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