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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어거스틴을 쫓아내는 교회 : 과학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8. 8. 24.



과신대 칼럼

어거스틴을 쫓아내는 교회 : 과학


김기현 목사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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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지금으로 치자면 만물박사요 전방위적 지식인이다. 그의 주저인 신의 도성은 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종교와 문화, 정치와 경제 영역을 두루 아우른다. 당대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한 그의 탐욕스러운 지적 열정과 애정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그런 그에게 과학이라고 빠질 수 없다. 그는 과학에 관해서도 전문가이었다. 그는 그 이후로 기독교가 자연과학을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정표를 세웠다.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기독교 대신 마니교에 흠뻑 빠졌다가 더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성경에는 자연과학에 관한 말이 없었지만, 마니교는 점성술과도 관련이 있어서 요즘의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꽤나 차지했다. 그것이 어거스틴을 마니교로 이끌게 되었다. 실제로 어거스틴은 자연에 관한 앎의 일부가 그들을 통해 습득하였음을 인정할 정도다.


과학적이라고 추종했는데 마니교를 떠난 것은 한편으로는 종교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학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것부터 설명하자면, 그들이 가르치는 자연에 대한 가르침이 실제의 자연 현상과 달랐다. 동지와 하지, 춘하춘분에 관한 교설, 일식과 월식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자의 것을 본다면, 종교가 과학과 자연에 관한 생각이 틀릴 수 있고, 그것이 종교 본래의 진리와 무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무지이고 모독일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종교가 자신을 오류 없는 체계로 합리화하는 것은 위선이다. 종교의 본질과도 상관없는 것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과시하고픈 허세이다. 신앙은 본디 궁극과 절대에 관한 것인데, 궁극도 절대도 아닌 것을 절대적인 것인 양 가르치니 신앙의 전도요 우상숭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과학적 관심만이 아니라 악과 고통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의 영원한 대립과 갈등, 투쟁이라는 마니교의 원리를 따르면, 일월성신은 마구 부딪치며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워야 한다. 허나, 어거스틴이 바라본 별들은 조화와 질서를 따라 운행되고 있다. 그들의 종교 교리가 실재와 부합하지 않은 것이다. 해서, 어거스틴은 대놓고 요구한다. 실재와 부합하든지, 사실에 걸맞게 잘 설명을 하든지.





그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으로 비과학적인 교설을 떠들어대는 자들을 공박한다. 그의 신앙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지구를 비롯한 하늘과 별, 우주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성경을 해석한다면서도 비과학적인 주장을 펼친다면, 그것을 이교도가 알게 된다면 수치스럽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서의 권위를 손상시킨다. 비과학적 주장을 성경의 이름으로, 성경을 근거 삼아 외치는데, 과학자의 눈에 비친 성경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옛날이야기로 간주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독교 고유의 진리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게 한다. 어거스틴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이다. 말도 안 되는 반과학을 진리로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이교도이자 과학자들이 복음 중의 복음인 부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겠는가. 목욕물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린다는 말이 딱 이 경우이리라. 어거스틴의 말 이면에는 왜 그런 바보짓을 하느냐는 슬픔과 분노가 엿보인다.


나는 20년 전, 복음과 상황에서 진화 논쟁을 기억한다. 그 당시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장대익의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면 무엇이 과학이란 말입니까?’라는 글은 어거스틴의 그 감정과 결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비과학을 과학으로 우기는 신앙인들, 비전문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의 주장을 틀렸다고 용감하게 말하는 공학자들, 나이와 학력과 같은 비학문적 권위로 후배의 주장을 간단히 뭉개버리는 선배들 앞에서 장대익의 글은 논리정연한 반박과 함께 더는 대화와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슬픔과 분노가 엿보였다. 미루어 짐작건대, 그 사건 이후로 그는 기독교를 떠났다. 아니, 버렸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거다.


우종학 교수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생물학이나 물리학 등, 진화론과 직결된 분야를 전공하는 학부생들이나 연구자들 이야기를 본다. 그들은 신앙과 과학 사이에 갈등을 느끼지 못했는데, 창조과학으로 인해 혼란을 겪은 이들이 많다. 그러다가 우종학 교수와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그들과 달리, 다른 어느 곳에선가 이미 기독교에 체념하고 자신을 키운 신앙을 눈물을 머금고 떠난 이들이 많지 않을까? 기독교 안에 몸은 담고 있지만, 마음은 떠난 지성인들이 꽤 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결단할 시점이다. 그때는 마니교로 갔다가 기독교로 돌아왔는데, 지금은 기독교에서 무신론자가 되고 있다. 그때의 기독교가 될 것인가, 마니교가 될 것인가? 실재와 부합하고 현실에 걸맞은 설명 체계를 갖춘 합리적인 신앙이 될 건가, 실재와 동떨어진 종교적 독단에 빠질 것인가? 어거스틴과 같은 역할을 할 기독지성인들을 내쫓을 것인가, 미래의 어거스틴을 품는 교회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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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6 /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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