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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북클럽 이야기

파사데나 북클럽 이야기 (18-10)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8. 10. 26.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파사데나 북클럽]




벽을 넘어서 | 김영웅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



과거엔 많은 것들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들을 밝힐만한 지식과 기술이 부재했다. 문명의 발달은 이를 가능케 해주었다. 그로 인해 인간의 호기심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미신적인 믿음 또한 점차 사라져갔다. 과학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많은 것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치며, 과거의 몇몇 천재들이 착상해낸 가설이 시대를 앞선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기도 하고, 이와 반대로 여러 관측과 실험을 통하여 그 가설이 그저 상상력의 발현으로만 남게된 경우도 있다. 많은 천재들의 직관도 시대를 뛰어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는 이유는 전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검증과정이 수도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한 이론이 정립되기까지는 이렇듯 끝없는 자정과정이 수반된다. 그리고 이는 과학의 숨은 힘이자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런 과학적인 증명과 검증과정은 고대 근동 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세계관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성경이 씌여졌다고 믿는 건 결코 성령이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썼다고 보는 축자영감설을 의미하진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다. 많은 것들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것들을 밝힐만한 지식과 기술이 부재했던 그 시대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텍스트 안에도 문명의 발달로 인해 과학적인 사실로 밝혀진 많은 것들에 의해서 재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오류라고도 할 수 없는 (의도적이 아니라 한계였기 때문에) 오류를 찾아낸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버리거나 성경이 거짓신의 장난으로 둔갑하지는 않는다. 믿음과 신앙이라는 것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이미 믿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런 세세한 오류들을 다 솎아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앙은 이해를 동반하지만, 이해했다고 해서 믿음과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그야말로 신비다. 믿는 자들은 이를 은혜라고 표현한다.



방식은 의미를 대체할 수 없다. 의미를 방식 안에 가둘 때 오류와 갈등이 생겨나는 건 피할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을 문자 안에 가두는 행위를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 칭했던 행위에 비유한, ‘아론의 송아지’의 저자, 임택규 (Taeck Kyu Yim) 선생님의 저자직강이 어제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에서 있었다. 12명이 참석했던 어제 저녁, 모임 자리를 흔쾌히 내주신 파사데나 장로교회의 담임 이동우 (Dongwoo Lee) 목사님의 배려로 진지하고 깊은 대화가 2시간이 넘도록 오갔다. 1시간 가량 진행된 임택규 선생님의 몰입할 수밖에 없는 강의는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적인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는 알다시피 유사과학을 넌지시 배격하기 위함이었다. 힉스 입자에 대한 장황한 설명조차 과학자인 나에게도 과학적 방법과 과정에 대한 경이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반대급부로 유사과학이 더욱 터무니없는 장난으로 자연스럽게 여겨졌음은 당연한 결론이었다. 강의는 과학자인 나같은 참석자보단 과학을 업으로 하지 않는 참석자들에게 더 큰 유익이 있었던 명강이었다 (임택규 선생님은 진짜 가르치는 선생 역할이 너무 잘 어울리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모임엔 창조과학이란 이름을 스스로 사용하는 유사과학자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이 말은 모두가 유신 진화론자라는 걸 의미하지도 않는다. 편을 가르고 적을 배격하는 방식은 이 모임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지향점은 결국 모두가 불필요한 다툼없이 서로의 관점을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인정하고 함께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좀 더 풍성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창조과학자들의 비합리성을 부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비합리성을 부수다가 인간을 부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합리성은 그들의 내면 깊숙한 어딘가에 뿌리내려 결코 칼로 말끔히 그곳만을 도려낼 수 없다. 끈끈히 연결되어있다. 만약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인간을 부수게 된다면 배는 산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 대화 역시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벽’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의도적 거절’이란 용어와 연결되었다. 창조과학자들의 숨은 입장을 잘 대변해주는 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한계를 좀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난 이 부분에 좀 더 많은 토의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자들과의 대화가 어느 선에서 멈춰버려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그것은 그들이 더 이상 합리적인 논리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그들 스스로 본능적으로 쳐버린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 너머의 세계는 절대 외부로부터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는 무너뜨릴 수가 없다. 오히려 개인적인 신앙의 이면과 숨겨졌거나 감춘 과거의 경험과 연결이 되어 있다. 이 영역은 다분히 감정적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 영역에서 영육간의 유익을 얻어왔고 자신이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붕괴될 수 있는 어떤 선을 지나치는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과학적인 방식을 넘어서 이러한 영역까지도 다룰 수 있는 어떤 해결안이 모색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창조과학자들이 아무런 과학적 근거없이 유신진화론자들이 내놓은 과학적 사실에 흠집을 내곤 하는데, 그것에 반하여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에 그친다면 결국 대화는 공격 무기밖엔 되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단순한 창조과학 해체가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한 바른 성경해석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즉 많은 것들이 기존에 믿어왔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 (이를테면 어떤 성경의 사건이 허구라고 밝혀지던지...) 우리의 목적이 있지 않다. 중요한 건, 그런 오류를 발견해내고 사실을 밝혀내어 미신적인 믿음을 깨부수고 난 이후, 그럼 과연 어떻게 그 부분의 성경을 하나님의 경륜에 어긋나지 않게 해석해야하느냐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어찌보면 후반으로 갈수록 과학자들보단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주어지리란 예측을 할 수 있겠다.


기독교를 변호하고 수호하려는 창조과학자들의 초기 의도와는 달리 그들이 결국 이뤄낸 것은 과학과 신학 사이의 큰 간극이다. 안타깝지만 이미 그건 역사가 되었다. 그들이 벌려놓은 간극을 메우기 위하여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이 움직임 가운데 우리 모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다시 한 번 임택규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모인 참석자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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