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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기초과정

새로운 무신론에 대한 이해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3. 29.

 

박영식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지난 월요일 서울대 입구역 근처에 있는 더처치 교회에서 과신대 <기초과정 II> 네 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함께 모인 분들과 ‘새로운 무신론’의 입장들을 살펴보면서 기독교 신앙은 이에 대해 어떻게 답변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지요. 연령층과 사회적 배경이 서로 다른 분들이 함께 모여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제겐 그 모임 자체가 주는 도전이 매우 크게 다가왔습니다. 배고픈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존 교회 안에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이런 모임을 통해 충족해 나가는 이 분들은 참으로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로 우리는 리처드 도킨스의 새로운 무신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최종적으로 우리가 신앙과 신학에 대해 ‘비판적이고 까칠한’ 친구로 그를 환대할 수 있어야만 참된 그리스도교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성서적 신앙은 종교비판적이고 무신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상금지 명령이야말로 고대 종교 사회에 가장 강력한 종교 비판일 수 있으며, 실제로 초기 기독교는 무신론으로 낙인찍히기도 했으니깐요.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한한 인간 실존을 우상화하려는 종교적 광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도킨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교가 폭력적이고 반이성적이며 반과학적이어서는 안 됩니다만, 도킨스의 눈에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비춰졌고, 그의 주장이 또한 많은 이에게 환영받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신학)을 재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거창한 웅변과 변증이 겉으로는 진리 자체를 변호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신의 진리 주장을 변호하는 것에 급급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반성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임에서 저는 그리스도인의 진리관에 대해 몇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진리주장 사이의 거리두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 둘째 우리의 진리 주장은 임시적이며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 셋째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진리는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시기 전까지 우리의 진리 주장은 유예 기간에 놓여 있다는 점을 말했습니다.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니, 이러한 제 생각은 판넨베르크의 진리 이해에서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더군요.


아무튼 우리의 진리주장은 독단과 방임,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우상화와 세속화의 양극단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사랑 안에 놓여 있는 자유와 인내로 결실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그 분과 그분의 진리는 독점될 수도, 독단적으로 주장되어서도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우리를 모든 독단과 독선에서 자유케 하여 사랑으로 이끕니다. 


새로운 무신론에 대해 논의하면서 정작 우리는 밖이 아니라 안으로, 점점 더 우리 자신의 신앙의 깊이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죠. 무신론의 도전에 대한 신앙의 변증이 아니라 신앙에 대한 성찰의 문제로 옮겨가게 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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