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How should we interpret the Bible?



서론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성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는지,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했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는지, 어떻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부서지고 죄 많은 백성을 은혜로 구속하시고 양자 삼아주셨는지,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침입하여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는지를 말이죠.

 

성령께서는 기독교 신자들의 마음과 가슴 속에 있는 성경의 "큰 이야기" 속 진리를 증거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해 죄의 확신과 회개 및 믿음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손에 든 모든 사람은 누구나 문화와 교육 수준과 관계없이 성경을 유익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성령께서는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명백한 해석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을 해석해야만 합니다. 해석은 단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지, 어려운 구절을 위한 어떤 특별한 기술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은 우리의 기준과 문화적 기대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가끔 이것들은 성경의 저자가 의도한 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의 기원과 말씀의 전반적인 목적이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조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저자의 의도, 문학적 양식과 관습, 언어 및 원청중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성경의 기원

 

개신교 성경의 66권은 다양한 종류의 문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수 세기 동안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서 세 가지의 다른 언어(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로 쓰였습니다. 구약성경은 약 10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쓰였고 통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약 100년에 걸쳐 쓰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과 신약의 첫 번째 책 사이에는 수백 년의 기간이 존재합니다.

 

많은 글이 1세기경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권위를 가진다고 이해되었지만, 초대교회가 그리스도교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문서들을 분류하고 오늘날의 성경을 구성하는 권위 있는 저서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사용 가능한 성경의 여러 버전과 번역본은 수 세기 동안 다양한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의 연구와 공동작업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

 

성경은 도덕 지침서나 믿어야 할 명제들의 모음집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6-17). (바울은 여기서 구약성경을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신약성경에도 적용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무엇보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15절).

 

 

성경의 저자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요? 그들은 무슨 문학 양식과 관습을 사용했나요?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맨 먼저 우리는 저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가끔 저자들은 무슨 일이 생겼다거나 앞으로 생길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어하고, 가끔은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묘사하고 싶어하기도 하며, 가끔은 또 어떤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지침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가끔 그들은 훈계하거나 명령을 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언어와 문화에는 이러한 종류의 의도를 소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는 이러한 의도를 각기 다른 문학적 양식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문학적 양식들은 특정한 관습이나 규칙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그 문화와 시대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특정하게 깨닫고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또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하면서 문학적 양식과 그 양식에 내재된 관습 모두 우리가 기대하거나 쉽게 깨닫는 것들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 시편, 15세기 일본의 하이쿠, 18세기 영국의 소네트 및 21세기 미국의 랩과 연관된 문학적 양식과 관습은 비록 모두 시로 분류될 수 있지만, 매우 다릅니다.

 

묵시문학처럼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한 일부 문학적 양식은 다른 어떠한 문화권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행시의 구조 같이 성경에 나오는 일부 언어 관습이나 언어유희와 말장난은 번역 과정에서 모호해지거나 손실될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일부 문학적인 관습은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서사시(작은 단위)로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강조를 위해 이중 따옴표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성경을 손에 들고 익숙하지 않은 문학적 양식을 완벽하게 해석하거나 전체의 의미에 기여하는, 익숙하지 않거나 모호한 관습의 중요성을 즉시 깨달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문화와 언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학자와 번역자의 전문성을 따지게 됩니다. 그들은 문학적 양식과 관습에 대한 우리만의 문화적인 기대가 성경 해석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부분을 확인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역사를 분명히 기록하지만, 성경이 사용하는 문학적 양식과 관습은 우리 자신이 언어, 문화 및 시대로부터 역사를 읽어오면서 기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종류의 언어가 사용됩니까?

 

저자의 목적을 파악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문학 양식과 관습을 아는 것 이외에도, 해석 일부는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사소통 중 일부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의사소통은 그저 단어를 정의하는 것만으로는 명시되지 않는 추론을 이끌어내는 청중에게 달려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언어 사용의 많은 부분은 어떤 면에서 비유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수업으로 돌아가서 직설법, 은유법, 과장법, 완곡어법, 제유법, 완서법 및 관용적 표현 등을 배워야 했던 모든 어휘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이러한 모든 종류의 비유법의 많은 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복잡하게 만들어 볼까요? 단어 자체는 비유적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poimen의 주된 의미는 목자, "양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비유적 의미는 "교회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요한복음 10:14에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백성을 위한 그의 사랑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씀하는 은유로써 목자의 첫 번째 의미("문자적" 의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11에서 바울은 목자(두 번째 비유적 의미, "목사")를 포함하는 교회 안에서의 역할들을 열거하지만,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그건 그저 매우 단순한 열거일 뿐입니다).

 

비유적 언어는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문학적 형식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시도 매우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역사도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단순히 어떤 텍스트의 문학 양식에 기초하지 않고 사용되는지에 대해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해석 과정은 복잡하고 다층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청중의 문화적 배경은 어떠했나요?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저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썼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for us) 쓰였지, 우리에게(to us) 쓰인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 규범, 상징 및 성경에 대한 청중의 친숙함은 모두 성경이 쓰이고 이해되는 방식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족장들의 긴 수명은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더 큰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나이는 모두 5의 배수이며, 가끔 7이나 14가 추가되어 수사학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문화적 중요성은 그 예로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문맥을 무시하고 그 우화를 직설적으로 그대로 읽으면, 우리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문화적 틀 안에서 고려될 때,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학자 케네스 베일리에 따르면, 그 유대인의 아들은 유업을 요구하며 수치스럽게 행동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탕진하면서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의 행동은 'kezazah'라고 하는, 단절의 의식을 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마을의 거절과 아버지의 분노 섞인 반대를 동반했을 것입니다. 또한, 탕자는 다음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구걸해야만 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냉대 대신, 사랑과 자비의 환영이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그를 만나기 위해 뛰어나갔습니다. 그 아버지 나이의 남자들, 그리고 중동 문화 속에서 구별된 남자들은 언제나 천천히 위엄 있게 걸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의미심장한 세부묘사인 셈입니다. 뛰어감으로써 아버지는 탕자 덕분에 수치와 굴욕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입 맞추고, 최고의 옷을 입히고, 잔치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래 이 이야기를 중동 청중에게 들려주셨을 때, 그들은 아마도 현대 독자들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원청중과 그 문화에 대한 인식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 그 부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훨씬 더 증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를 어떻게 해석할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의 앞 장들을 읽는 방법에서 강경하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21세기의 아이디어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이오로고스 커뮤니티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앞 장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이러한 다양한 생각을 드러내는 많은 글을 웹사이트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창세기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원청중이 이해했을 것들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창세기의 해석 방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이오로고스는 창세기 앞 장들을 비유적인 언어를 통해 실제 사건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다른 고대 근동의 문헌들이 사건을 묘사했던 방식과 일치합니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창세기가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비록 그 목적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이나 역사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계획을 계시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지만 말이지요.

 

 

결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권위 있게 쓰였음을 믿습니다. 성경이 단순한 문학 작품은 아니지만, 믿음의 독자들에게는 살아 역사하는 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성경 읽기를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한 고급 훈련은 없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우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성경 구절을 가장 잘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크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지식을 얻는 것에 달리지 않다는 사실에서 우린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는 것이지, 성경의 완벽한 해석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성경을 깊게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안에 거하며 창조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과 목적을 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김근주 연구위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과신대 자문위원)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