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정대경 박사 (과신대 연구 팀장)

 

5월 과신대 연구모임은 백우인 목사님이 계시는 카페 “거기”에서 모였습니다. 계속해서 해리슨의 <The Territories of Science and Religion>을 읽으면서 모입니다. 드디어 다음 모임이 해리슨 책 마무리하는 모임입니다.

 

요즘 쓰고 있는 논문의 큰 줄기와 해리슨의 주장이 잘 맞아떨어집니다. 논문은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일으키는데 일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시작했습니다.

 

형이상학적 자연주의 안에서 인간 삶이 추구하는 가치와 의미는 물리적인 것 혹은 신체적인 것으로 축소됩니다. 생명연장, 의료복지 등 막대한 비용과 투자가 이 분야에 이뤄지는 것이 큰 흐름 안에서 인간실존의 궁극적 가치가 신체적-물리적인 것으로 축소되면서 일어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해리슨도 마찬가지로 근세 이후 르네상스, 종교개혁, 새로운 자연철학의 출현 등에 의해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기존 시각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신적-도덕적 층위가 물리적 층위로 환원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내적인 덕목을 지식을 통해 실현하는 종교적-자기성찰적 개념들이었던 scientia와 religio 같은 개념들이 외재적 개념들, 곧 기독 종교의 핵심 교리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체계들로 개념적 전환이 일어났다 주장합니다.

 

이와 발맞추어 종교 내 궁극적 가치였던 caritas(charity), 곧 하나님과 합일적 사랑, 이웃과 합일적 사랑은 전자가 후자로 축소되며 합쳐짐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의 외적인 표현인 공리, 유용성, 복지 등을 실현하는 것으로 강조점이 옮겨갑니다. 이후 인간과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신적 실재가 불필요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 자연스레 종교적인 동기로부터 시작되었던 charity는 인간적인 차원만 남게 되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는 듯 보입니다.

 

큰 틀에서 해리슨의 주장, 실재에 대한 다차원적-다층적 이해가 물리적-문자적 차원으로 축소되면서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가치와 의미도 같이 축소되었다는 이해가 그럴듯해 보입니다 🙂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글_ 정대경 박사 (과신대 연구 팀장)

 

4월 연구모임에서는 종교와 과학 학제 간 연구 관련 서적 중 고전 격인 이안 바버의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챕터 1과 계속해서 함께 보고 있는 피터 해리슨의 <The Territories of Science and Religion> 챕터 3을 읽고 모였습니다. 바버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과학에서 논의되는 “데이터” 개념이 신학 연구에 있어서 사용될 수 있는가에 관련된 논의였습니다. 바버는 신학이론이 구성되는 데 사용되는 자료들을 데이터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고, 과학 연구 방법과 신학 연구 방법 사이 유사성을 토대로 과학과 종교 학제 간 연구 가능성을 제안했습니다. 신학 연구에서 데이터라는 것은 보통 theological sources라고 불리는 성서, 전통, 이성, 경험 등을 보통 의미하는데, 토론 중에 신학적 “데이터”라는 것이 과연 과학적 “데이터” 개념과 유사한 것일 수 있겠는가가 쟁점이었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서로 다른 전공의 학자들, 전문과학, 과학철학, 과학사를 전공하신 선생님들과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도전을 줍니다. 예상치 못했던 부분들을 생각하게 되고, 과학이나 과학철학적 이해에 있어 브로드하고 추상적으로 이해했던 부분들을 조금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과신대 연구모임이 가지는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체계화되고,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방식으로 연구모임이 잘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리슨 책의 챕터 3도 참 흥미로웠습니다. 챕터 3의 주요 요지는 고대와 중세까지는 자연적 존재자들(natural objects or beings)에는 물리적 층위뿐만 아니라, 소위 도덕적-정신적 층위가 존재한다는 것에 크게 이견이 없었는데, 르네상스 이후 시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자연스레 존재자들 내 도덕적-정신적 층위가 사라지거나, 물리적 층위로 환원되기 시작했다는 지적입니다. 이러한 사유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 자연적 존재자들의 행위와 더불어 일어나는 것(i.e. double-agency)이 모순적이거나,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없다가(이미 자연적 존재자들 안에 물리적 층위와 더불어 비물리적 층위가 있기 때문에), 물리적 층위에 대한 강조가 일어나게 되면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을 물리적 층위에 국한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입니다.

 

이 맥락에서 자연 내 일어나는 사건의 원인을 자연적 존재자들로만 국한해서 생각하거나, 기회원인론 같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신적 존재의 행위 결과로만 보는 "either or”의 사유방식이 자연을 이해하는데 대두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유가 역사 안에서 점차 자연주의와 결탁하게 되면서 신적 행위라는 것이 자연계 내 사건들을 설명하는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전락하게 되는 의도치 않은 결과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해리슨의 이러한 지적이 일리 있게 들립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지난 5월 13일(월) 열매나눔재단 지하 강단에서 제1회 과신대 목회자 살롱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특별히 이번 행사는 '바른교회아카데미'와 함께 콜라보로 진행된 행사로 많은 목회자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셨습니다. 과신대 목회자 살롱은 평소 과학과 신학에 대해 관심과 궁금증이 많이 있지만 정작 배움의 기회가 많지 않아 고민을 하는 목회자들을 위해 준비한 행사입니다. 목회자들만을 위한 행사이다 보니 질문도 상당히 깊이 있고 신학적인 대화가 많이 오고 갔습니다. 

 

1부에서는 이한일 목사님(송학대교회 청년부 담당)의 사회로 김근주, 김정형, 우종학 교수님께서 패널로 참여해 사전에 준비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관련 키워드를 준비해 한분씩 이야기 주제를 풀어가도록 했는데, 결국에는 시간이 부족해 몇 가지 주제로만 진행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전에 미리 준비한 질문은 이렇습니다. 먼저 김근주 교수님께는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1. 창세기 1-11장까지 내용 중, 어디까지 상징이나 비유로 읽어야 하고, 무엇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하나요? 그렇다면 부활은 상징인가요 사실인가요?

  2. 창세기 혹은 성경의 다양한 사건과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은 불필요한 건가요? 노아 홍수와 방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닌가요?

  3. 창세기가 고대 근동의 신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성경의 권위가 떨어지나요?

  4. 요즘 역사적 아담 논의를 많이 하는데, 그 문제가 신학적으로 왜 중요하고,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김정형 교수님께는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1. 진화심리학, 진화사회학,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런 개념들이 기독교 신학과 양립 가능한가요?

  2. 과학의 발전에 따라 성경해석이나 신학의 내용이 변해야 하나요? 신학은 과학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가요?

  3. 과학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올바른 태도인가요? 장점과 단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4. 유신진화론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론인가요?

  5.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창세기/창조론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룰 점은 무엇일까요? 혹은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우종학 교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나요? ‘말씀’으로 말고요.^^ 인간의 조상은 아담인가요, 원숭이인가요? 만약 진화가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진화 과정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셨나요?

  2. 진화, 그리스도인들은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요? 대진화가 가능한가요?

  3. ‘창조 vs 진화’라는 프레임을 어떻게 깨트리고 넘어설 수 있을까요?

  4. 오랜 지구론을 인정하면서 진화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요?

 

 

대부분의 질문이 쉽지 않은 내용이지만 교수님께서 정말 친절하게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만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습니다.

 

2부는 과신대 최경환 실장님의 진행으로 현장에서 즉석으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단체 카톡방을 열어서 그곳으로 질문을 받았는데, 정말 많은 분들께서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이렇게 활발하게 질의응답이 진행된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모든 질문에 일일이 다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한 분 한 분의 질문이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은 귀한 말씀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마지막에 우종학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질문 중에는 교회에서 과신대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면 기성 성도들이 시험에 빠지고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염려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종학 교수님은 한 번 반대로 생각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기성 성도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창조과학이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신앙을 버리거나 교회를 떠나지는 않습니다. 심각한 고민에 빠지거나 신학적으로 혼란스러울 수는 있겠죠. 하지만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젊은지구 창조론 때문에 신앙을 버리거나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99마리 양보다 우리를 떠난 1마리 양에 신경을 더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더 이상 젊은이들이 과학과 신앙의 갈등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일이 없게 만들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과신대과 목회자들이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벌써 제2회 목회자 살롱이 기대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글_ 최경환

 

박영식 교수님 연구실에서 <신 인간 과학> 2부 “생명”을 함께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맘 편히 이야기하며 질문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함께 나눈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올립니다.

 

1. 신학은 항상 '성서 적합성'과 '현실 적합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과 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명’을 같은 수준에서 생각해야 하는가? 부활은 생물학적 죽음의 극복인가? 예수는 생명을 주러 왔다고 했을 때, 그건 생물학적 생명을 말하는 건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건 또 뭔가?

 

3. 우리는 흔히 창조라고 하면,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있는 것 중에서 뭔가를 나누기도 하고, 분류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둠'을 만드셨는가? 하나님이 '물'을 만드셨는가? 아니다. 있는 것 중에서 가르고, 나누고, 모으시면서 창조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해해야 하나님의 창조를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있은 것 중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막고, 보호하는 것도 창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창조에 대해서 은연중에 어떤 선입견을 갖기고 있는 것 같다.

 

4. 즉각적 섭리가 아니라 시간적이고 매개적인 섭리로 이해해야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초등학생에게 엄청난 지식을 집어 넣을 때, 그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질병을 갑자기(순식간에) 치료한다고 했을 때, 과연 몸에 어떤 무리가 생기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오랜 역사를 통해서 진화를 일으키시고 느리게 창조하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 우주의 진화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담아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신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치유 활동을 하시는데, 우리 생각으로는 뭔가 빨리 진행되면 좋겠지만, 오히려 그게 병일 수도 있다.

 

5. '하나님에게는 우연이 없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늘날 물리 세계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다. 어쩌면 우연이야말로 실재고, 우리는 그걸로 필연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자연법칙이라는 것도 결국 우연의 사건이다. 우연 속에서 리듬을 만든 것이다. 사건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든 것이다. 자연의 습관이 자연법칙이다.

 

6. 신학적 의미에서 '죄'를 자연과학적으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폭력'이지 않을까? 하나님의 자유는 나의 자유가 아니라 상대방을 자유케 하는 자유이지 않을까?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은 상대방에서 힘을 주는 전능이다.

 

 

부천 북클럽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참여해 주세요.

 

  • 다음 모임: 5월 28일 저녁 7시
  •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100주년기념관 8층 박영식 교수 연구실
  • 읽을 책: <신 인간 과학> 3부 인간
  • 문의: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글_ 우종학 

 

과신대 관악북클럽 모임 장소를 이번 한 번만 바꾸어 모이게 되어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내렸습니다. 이 동네에 마지막으로 온 것이 20년도 넘은 듯한데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변해서. ^^

 

어제 북클럽 모임에서 지구의 태고성에 관해 주로 과학적 관점의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데이비스 영의 두꺼운 책을 마지막으로 다루는 날이었고, 구형규 선생님의 발제로 지층, 화석, 시간 측정, 변성암 화성암 들을 다루는 챕터들을 훑으며 공부했고, 저는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 중에서 아이소크론법에 대해 주로 발제를 했습니다.

 

다양한 책들을 공부하지만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그리고 책의 내용이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창조과학자들의 주장과 지질학자들의 주장을 비교해서 다루는 내용이 많이 나왔습니다.

 

 

처음 오신 분들도 있었는데, 반창조과학 모임 같은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오늘은 주제가 그래서 어쩔 수 없었지요. 과신대는 무신론의 도전과 과학시대에 건전한 창조신학을 세우려는 목표를 갖고 있는 단체입니다.

 

카페 '거기'를 처음 가보았습니다. 백우인 목사님이 카페를 시작한 지 꽤 되었는데 많이 늦었네요. 건강식 그리고 맛도 최고인 샌드위치와 커피가 먼저 몸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리곤 오랜만에 보는 분들의 수다로 워밍업을 하다가 책의 내용으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저에게는 과학자가 아닌 분들, 평범하게 교회 다니는 분들이 신앙과 과학의 문제, 그리고 전반적인 신앙과 교회, 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종종 바쁠 때는 북클럽 모임에 가는 게 힘들 때도 있지만 오가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만 쏟지 않는다면 항상 모임을 통해서 재충전이 됩니다.

 

이 두꺼운 책을 끝냈고 6월에는 얇은 책으로 모입니다. 바로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입니다. 과학적이고 신학적인 내용보다는 15명의 저자들의 경험담과 스토리가 담겨있는 책이라 쑤욱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함께 하시면 좋습니다.

 

 

  • 6월 관악북클럽 모임
  • 책: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 (IVP, 2019)
  • 날짜: 6월 14일 금 저녁 7시
  • 장소: 서울대입구역 더처치
  • 문의: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타락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든지, 자연을 연구해 보면 그것이 원자와 분자, 암석과 별이 움직이는 자연법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리진’(IVP) 3장에 나오는 이 짧은 문장이 11장 이후 인간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질문에 대해서 열쇠가 되어줍니다.

 

처음부터 불사의 존재로 지어진 존재가 인간인 것도 아니며(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자연 역시 이전에 없었던 가시와 엉겅퀴를 어느 순간 갑자기 내기 시작한 것도 아니겠습니다.

 

성서는 참 어려운 책입니다. 특히 창세기 앞장은 고대 근동 문화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라도 있어야 이해 가능합니다. 과학의 도움이 없으면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처럼 이해되기도 합니다.

 

지성이라는 훈련된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어른이라면 독서를 하고 토론에 참가하며 시행착오를 견뎌내어서 성서와 과학의 간극을 메꿔내겠습니다만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학교 시절에 진화론 문제에 정답을 쓰면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껴서 일부러 틀린 답안을 선택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저로서는 자녀 세대에게조차 그런 인지부조화의 상황을 죄책감까지 안고 맞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창조과학을 가르치거나 앞뒤 가리지 않고 진화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면 소리소문없이 고민하는 자녀의 입장을 헤아리실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오리진’ 13장에는 자녀 연령에 따라 이 주제를 어떻게 어떤 수준에서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가 있습니다.

 

 

발제를 준비한 최윤희 님이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면 하나님을 배신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걸 포기할 수 없었다'라는 것은 자유의지가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이겠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성서를 통해서든 과학을 통해서든 스스로 판단하고 이해할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5.18 때 왜 사람들이 가족과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며 자유를 위해 싸웠는지가, 절절히 깨달아지는 순간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부여한 자유 의지라는 것을요” / 박철성 님)

 

 

다음 모임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과학, 전통, 신학, 성경에 대한 보다 창의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인간의 타락과 진화’(새물결플러스)를 읽고 토론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지난 5월 17일(금)에 수원남부북클럽 회원 6명이 이정모 관장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시립과학관에 다녀왔습니다. 6월 8일(토)에 있을 북토크 전에 사전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말이죠. 약속 시간 전인데도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인터뷰이: 이정모 관장
인터뷰어: 오세조 회원
사진: 심왕찬 팀장

 

 

Q: 한때는 ‘과학의 대중화’가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과학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대중의 과학화’로 슬로건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과학 커뮤티케이터’라는 직업이 나왔는데 관장님께서는 이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역할과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제 생각에는 ‘과학의 대중화’와 ‘대중의 과학화’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시민들은 과학을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과학은 어렵습니다.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일반 시민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과학자들의 스펙트럼과 시민의 스펙트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둘이 만나는 접점이 필요합니다.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이 접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저는 이 ‘과학 커뮤티케이터’의 역할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런 이름조차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오니 ‘과학의 대중화’ 또는 ‘대중의 과학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과학 커뮤니케이터’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이름이 있어야 정체성도 생깁니다. 그리고 정체성이 생겨야 전략이 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학 커뮤니케이터’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공간이 꼭 필요합니다.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지요. 제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더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는 것은 제가 그만두어야 다른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을 한 거지요. 물론 마침 서울시립관장 자리가 나서 저는 이곳에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 곳에서 서로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다른 나라에서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연대에 좋은 예가 있습니까?

 

A: 다른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좋은 예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 경험으로는 다른 나라의 경우에 협력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지역에 있는 과학관과 지역학교와의 긴밀한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방학 때면 교사의 월급이 지급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은 생계를 위해 방학동안에는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교사들은 방학 때도 월급이 나옵니다. 안정성 면에 있어서 좋은 것이지요. 또한 우리나라 과학교사들은 방학 때도 과학 활동을 아주 많이 합니다. 과학의 홍보화 또는 특별활동들을 아주 많이 합니다. 저는 이렇게 활동적인 사람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에너지가 넘치는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Q: 과학자이시면 신앙인이신데, 힘든 점은 없으셨습니까?

 

A: 사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교회에 다닌다는 것 때문에 지도교수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과학도인데 어떻게 교회에 다닐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교회 내에서도 과학을 하는데 신앙이 있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신앙인으로서 과학 활동을 하는데 개인적인 어려움을 별로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는 언제나 양쪽 모두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Q: 이번에 출판한 책은 서평을 모으신 것인데,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이 몇 권이냐 되십니까? 또한 과학 작가들은 서로 친한 것 같은데, 친한 이유가 특별히 따로 있습니까?

 

A: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이 모두 69권입니다. 사실 요즈음은 서평을 옛날만큼 쓰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문학가들은 모르겠는데, 과학 작가들은 서로 친한 편입니다. 책이 나오면, 서로 홍보도 해주고,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현상은 과학자들의 겸손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과학은 진리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최대 설명이죠,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과학자들은 겸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겸손’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 시작됩니다. 기존 지식이 틀렸다면, 과감히 그것을 인정하고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겸손해지기 어렵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교회에도 많다는 것이지요.

 

 

이번 6월 8일(토)에 하는 수원남부북클럽 과신톡의 주제인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결’이 이런 과학의 겸손함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주제입니다.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6월 8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글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잘못임을 밝힙니다. 관장님이 말씀을 하도 재미있게 하셔서 인터뷰하는 것을 놓친 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결’이 왜 과학의 겸손함을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6월 8일(토)에 오시면 알 수 있습니다.

 

* 이정모 관장님과 함께 하는 '과신톡' 안내

 

💫 일시: 6월 8일(토) 오후 2시
💫 장소: 성공회 제자교회(경기도 오산시 세남로14번길 25, 1호선 세마역 5분 거리)
💫 대상: 누구나 (무료)
💫 수강신청: https://bit.ly/2Yr12aY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지난 5월 6일 제주 북클럽 모임에서는 가족 바베큐 파티가 있었습니다. 함께 읽은 책은 존 월튼의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였습니다. 명제 7~12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제 맛난 바베큐 스테이크와 포도주와 직접 볶으신 커피 모두 일품이었습니다. 나무 가득한 정원도 좋았구요. 그리고 이번 책은 우리가 성경을 어떤 시각과 관점으로 읽고 공부해야 할 지 커다란 혜안을 준 것 같아요. 저자의 관점에서 또는 당시 역사적 상황과 독자들의 상황에서 읽혀져야 한다고 배워왔지만... 우리는 그동안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또는 수동적으로 배우고 받아들였단 생각이 들어요."

 

※ 제주 북클럽 문의: paeng@jejunu.ac.kr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의 수원남부 북클럽에서 서울시립과학관

이정모 관장님을 모시고 <과신톡>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이정모 관장님께서 그동안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신

에세이를 엮어서 출판한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1, 2>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주십니다.

 

특별히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결"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과학과 종교의 갈등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을 통해

또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주실지 벌써 기대가 됩니다.

누구든지 참여하실 수 있으니

주위에 계신 분들은 꼭 참석해 주세요.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6월 8일(토) 오후 2시

 

장소: 성공회 제자교회

(경기도 오산시 세남로14번길 25, 1호선 세마역 도보 5분 거리)

http://naver.me/56e38OzO

 

강사: 이정모 관장 (서울시립과학관, 과신대 자문위원)

 

대상: 누구나 (무료 행사)

 

문의: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Q] 5.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하나님은 뭘 하셨나요?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창조와 진화를 대립 개념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즉각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야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진화가 창조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어도 진화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과학과 신학 분야 교수님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제가 자주 받는 질문을 꺼내 놓았습니다.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하나님은 뭘 하셨나요?” 그랬더니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뭘 하긴 뭘해요. 진화를 사용하셨지요.”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무신론), 신이 존재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주장 (이신론) , 신이 진화를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 (창조과학)과 다르게 기독교 유신론은 신의 창조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진화에 관한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입니다. 첫째, 신이 직접 만들어야 진짜 창조라는 신학적 오해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닌 듯 느껴지는 심리적 장벽 때문입니다.

 

신의 창조 방법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에서 유로 만들어야 신의 창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제빵사가 오븐에 구워 빵을 만들었습니다. 오븐이 빵을 만든 걸까요? 아니면 제빵사가 빵을 만든 걸까요? 오븐은 도구일 뿐입니다. 제빵사가 오븐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주장도 지나칩니다. 오븐을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야 진정한 빵 만들기가 되는 걸까요? 심지어 밀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무에서 유로 빵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창조도 비슷합니다. 인간이 진화되었다는 과학적 발견은 인간의 출현 과정을 밝힐 뿐입니다. 진화를 신이 사용했는지 아닌지 여부는 과학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에게 진화는 오븐같은 도구일 뿐입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이 밝혀졌으니 창조된 게 아니라고 주장하면, 빵이 오븐에서 구워지는 과정이 밝혀졌으니 제빵사는 필요없다는 주장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진화는 무신론의 근거도 아니고, 반대로 인간이 뚝딱 만들어져야만 신의 창조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무에서 유로의 창조나 즉각적 창조처럼 창조의 방법이 특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없다고 오해합니다. 뭔가 신비하고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방법으로 창조되어야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오해는 많은 경우 심리적 거부감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같게 되거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특별한 지위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방법이 창조물의 지위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뚝딱 창조되면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되고 진화의 과정을 거쳐 창조되면 존엄성을 가질 수 없을까요? 오븐에서 구워진 빵은 밀가루가 순식간에 변해서 기적으로 만들어진 빵에 비해 열등한 빵일까요? 오븐에 구운 빵은 정말 맛있습니다. 기적으로 빵을 만든다면 오븐에 구운 빵처럼 맛있게 만들겠지요. 인간의 존엄성은 창조의 방법이 무엇이었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인간을 기적적으로 창조해야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갖지 못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즉각적으로 완성된 형태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븐에 구워 빵을 만들듯, 우리는 자궁에서 난자와 정자가 수정하고 단세포가 세포분열을 하는 자연적 과정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진화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은, 빵이 오븐에 구워졌다면 진정한 빵이 아니라는 주장이나,  자궁에서 세포분열을 거쳐 만들어진 사람은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오븐에서 화학적 과정을 거쳤든, 자궁에서 세포분열을 거쳤든, 자연선택과 유전자 변이로 진화과정을 거쳤든, 창조의 방법에 따라 창조물의 영적 지위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창조의 방법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담은 진화되지 않았고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창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기적적인 방법으로 창조된 아담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되고, 단세포에서 세포분열을 거쳐 창조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갖지 못한 존재가 됩니다. 일단 아담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창조되면 그 후손인 우리는 기적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연적인 과정을 거쳐 창조되어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있다는 걸까요? 그렇다면 아담과 우리에게 서로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셈입니다. 아니면, 아담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유전자를 우리가 물려 받았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 주장할까요? 그런 생물학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유전된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혹은,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셨다고 봐야 할까요? 그렇다면 아담을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하신 후에 영적이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삼으셨다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창조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이 결정된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제한하는 셈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인간이 진화했다면, 언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걸까요? 긴 시간의 진화과정으로 인간이 출현했다면 언제부터 인간이 된 걸까요? 이 질문들에 대해서도 역시 우리 자신이 창조된 과정을 보면 힌트가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로부터 나온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어  단세포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DNA 정보에 따라 단세포가 2개, 4개, 8개, 16개, 32개로 점점 분열합니다. 심장과 허파가 만들어지고 팔다리가 생기고, 10달 가량 지나면 우렁차게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로 태어납니다. 이 과정 중에 도대체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신 걸까요? 여러분은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었나요?  정자가 난자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아니면 수정되는 순간일까요?, 아니면 착상 후 2주 일까요? 그도 아니면 심장이 형성되어 뛰기 시작한 시점일까요? 혹은 아기로 태어나는 출생의 시점일까요? 오븐에서 구워지는 빵은 언제부터 빵의 지위를 갖게 되는 걸까요?

 

답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생명이며 언제부터 인간인가라는 질문은 피임, 인공수정, 배아 실험, 낙태 등 다양한 이슈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뚜렷하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언제부터 인간이었는지 혹은 언제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었는지 답할 수 없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내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수정에서 출산까지 그 모든 과정을 과학으로 면밀히 들여다 봐도 하나님의 형상이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지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생물학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말은 생물학적으로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뜻이 아니라, 신 앞에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은, 언제 하나님의 형상이 부여되었는지 답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류의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십만 년 전에 진화해서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는 인류가 창조된 생물학적 과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생물학적 사건을 넘어서는 신의 창조는 여전히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인간이었는지, 어느 시점에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된 것인지 답하기 어렵듯이, 진화로 창조된 인류가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었는지 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때문에 잘 알고 있는 내용까지 함께 폐기처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화의 과정에 관해 과학으로 답하지 못한 질문들과 신학으로 답하지 못한 질문들이 남아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 알려진 진화의 역사를 통째로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제빵사가 오븐에 구워 빵을 만들듯, 하나님은 단세포에서 복잡한 생명체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생명으로 만드셨고, 수십 억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오븐이 빵을 만든 것이 아니듯, 세포분열이 우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며, 진화가 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오븐이나 세포분열이나 진화는 모두 창조주의 도구일 뿐입니다. 오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도 오븐에 구운 빵은 가장 맛있는 빵이 되었고, 단세포에서 아기가 되는 과정 중에 언제 하나님의 형상이 부여되었는지 모르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인류의 진화 과정을 구구단처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진화를 사용하여 인류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을 대리해서 모든 창조물을 보존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에 대한 믿음입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