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심왕찬

 

어제는 서울 강서/구로 북클럽 세 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먹기 위해 모이는 북클럽으로, 책 나눔은 2순위입니다.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

 

어제는 백우인 선생님의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샌드위치 대신 북클럽 지기가 요리한 닭볶음탕으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가끔 이렇게 주 메뉴인 샌드위치 말고 다른 요리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식사를 맛있게 하고,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인간, Great Mystery' 1-7장을 읽고 나누었습니다.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은 어떤 이해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나누는 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자 1장씩 발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느 한 사람에 부담이 집중되지 않고, 각자 준비해온 발제를 듣고 나누게 되니 더 유익하고 풍성한 것 같습니다. 어제는 박용덕 목사님과 서종원 선생님이 처음으로 참석해주셔서 어느덧 회원이 8명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만남과 나눔이 이어지길 소망합니다.

 

 

6월에는 마지막 목요일인 27일 저녁에 모여서 '인간, Great Mystery' 나머지 부분을 나눌 예정입니다. 가장 중요한 저녁 메뉴는 이변이 없는 한 샌드위치입니다. ^^ 관심 있으신 분들은 댓글이나 메시지로 문의주세요.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먼저 저희 과신대 YouTube 채널 구독자가
1,000명이 넘었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제 YouTube를 통해 실시간 라이브 방송을

할수 있게 됐습니다. ♬

 

사실 저희 같은 소규모 단체가 영상을 제작하는 건

쉽지가 않은데 이진호 간사님께서

수고를 많이 해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좋은 컨텐츠와 영상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과신대의 모든 행사는

핸드폰으로 촬영을 했는데

역시 음향이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네요.

 

그래서 그냥 바람도 쐴 겸 낙원상가 2층을 서성였습니다.

그냥 보기만 했습니다.^^

 

100만원 정도만 있으면 저희에게

꼭 필요한 캠코더와 마이크를 구입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혹시 마음이 동하신 분이 계시다면

저희 사무국으로 연락주세요.^^

 

 

 

앞으로 과신대의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기초과정 I>이 온라인 강좌로 대체됩니다.

온라인 <기초과정 I>은 우종학 교수님께서

4시간 동안 강의한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영상 강좌 플랫폼 “그노비Gnowbe”의 도움으로

새롭게 선보일 온라인 <기초과정>을 기대해 주세요.

특별히 이번에는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에게

특별할인 혜택을 드립니다.^^

 

자세한 소식은 https://www.scitheo.org/382

 

 

과신대가 준비한 여름 프로그램을 소개합니다.

 

 

  • 제15회 콜로퀴움 "죄의 기원과 타락"
    일시: 7월 1일(월) 7:30 pm.
    강사: 김구원 교수(개신대 구약학)
    패널: 오세조 목사(팔복교회)

  • 온라인 과신톡 "자유의지"
    일시: 7월 10일(수) 오후 3시 (날짜는 변동될 수 있습니다.)
    강사: 김남호 박사 (울산대학교 철학과)
    *유튜브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됩니다.

  • 제2회 청소년캠프 “신과 함께”
    일시: 7월 20일(토) 10:00-15:00
    강사: 과신대 교사팀
    장소: 낙원상가 NPOpia 500호

 

 

마지막으로 저희 과신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1분만 시간을 내서 아래 기도문으로 함께 기도해요.

 

1. 자비로운 하나님, 과신대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단체가 되게 해주십시오.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닿을 수 있는 깊고 튼튼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창조의 신비를 맛보게 하시고 우리에게 허락한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2. 보이는 세계만을 보는 눈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주시고, 지금은 비록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볼 수 있게 하시옵소서. 과신대가 한국교회와 다음세대에 새로운 소망과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쓰임받게 하시옵소서. 

 

3. 과신대가 창조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역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과신대의 프로그램을 통해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건전하고 바른 신학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소서. 특별히 한국교회의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지혜와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단숨에 읽는 바울
존 M. G. 바클레이 | 새물결플러스 | 2018

 

김영웅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사탕을 준다고 해서 교회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네 식구였던 우리 집은 전세에 단칸방이었다. 사탕 같은 간식은 내겐 아주 귀했다.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난 그 교회를 계속해서 다니게 되었다(그런데 친구는 얼마 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대로 교회 다니는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가문에서 처음으로 소위 '예수쟁이'가 탄생한 것이었다. 동시에 내겐, 이젠 30년이 넘는, 하나님을 향한 굴곡진 여정의 시작이었다. 사탕 하나로 이 기나긴 여정이 시작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내가 다니던 교회(예장 합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선 성경 퀴즈대회를 자주 했었다. 학교에선 주관식 수학 문제의 답이 대개 '0' 아니면 '1'이었듯, 교회에서 치러진 주관식 성경퀴즈의 답은 십중팔구 '하나님' 아니면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그 범접할 수 없는 이름에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올렸던 이름이 있었으니, 구약에선 '다윗', 신약에선 단연 '바울'이었다.

 

어릴 적 내가 알던 바울에 대한 지식은 아주 단편적이었다. 신약에서 편지를 가장 많이 쓴 사람, 사도행전의 주인공(?),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사울'에서 이름이 바뀌었던(?) 사람. 이제는 이런저런 공부로 인해 이러한 지식이 부정확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땐 혼자 따로 공부하지 않고 그저 교회에서 주워들은 지식이 전부였던 터라, 나의 성경 지식은 그 당시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들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내가 알던 바울은 그 정도가 다였다. 정확하지도 않을뿐더러 단편적이기만 했던 지식의 파편들. 이성적인 이해를 거치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시도하면 불경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냥 무턱대고 믿으라고 강요받았고, 오히려 그것이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라고 배웠던 그 시절. 이는 아마 그 당시 한국 기독교 신앙의 단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씁쓸함이 남는다.

 

바울을 더 정확하고 더 깊게 알고 싶었던 건 솔직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믿었던 나의 기독교 신앙은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서른 후반 즈음에서야 힘겹게 맞이한 가치관의 변화 시기에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어 나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다. 그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를 지나오며 난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순 없겠지만, 이러한 방법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충분히 인생을 다시 보게 만들고 제대로 살아내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성의 영역이 인간이란 존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것은 그 빙산의 일각이라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회개나 거듭남, 그리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하여 마침내 얻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역시 이 빙산의 일각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정확한 지식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을 더욱 풍성히 알고 전할 수 있는 중요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제목부터가 맘에 쏙 들었다. '단숨에 읽는 바울'. 그렇잖아도 이철규 원장님이 작년 엘에이 방문하시며 쓱 건네주셨던 '하나님의 비밀'(그레고리 K. 비일, 벤저민 L. 글래드 공저, 새물결플러스 출판)도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고, 예전에 큰맘 먹고 구매했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저, IVP 출판)도 마찬가지 상태라, 난 이 두 책을 책장에서 볼 때마다 뭔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약 150 페이지의 짧은 이 책으로 이제 겨우 그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두 책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처럼 신학적인 전문지식이 전무한 사람에게 이 책은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바울을 감히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이 책에서 바울의 '역사'와 바울의 '유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울을 읽어나간다. 1부 '역사'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의 바울의 위치와 의미를 읽어낸 뒤, 바울의 편지들과 그것들이 가지는 역사적 정황들을 살펴본다. 이어서 자신을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으로 소개하는 바울과, 유대 전통에 비친 그의 모습을 읽어낸 이후,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 로마 제국에서 가졌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묘사한 이미지와 사람들에게 인식된 이미지들을 비교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바울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는지에 달려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울이 유대인이었고 지성인이었으며, 돈을 버는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니다가 다메섹에서 그가 계시라고 부르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되었고, 예수가 정말 주님이라는 확신을 얻은 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으며, 그 사건을 통해 바울은 그의 삶과 그의 충성심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뀌는 삶의 대전환을 경험했다는 것도 난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바울이 남긴 유산의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남긴 유산은 무수히 다양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장들을 낳았다는 사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만이 아니라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를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아는 바였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이러한 단편적인 바울에 대한 지식은 표면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신학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바울 신학의 다양한 해석이었다. 작년 권연경 교수님께서 참석해주셨던 독서모임에서 '로마서 산책'과 '행위 없는 구원?'을 함께 읽고 직접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끝내 말끔히 풀리지 않았던 부분은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학 문제처럼 문제가 하나 있으면 하나의 답이 존재할 거라는, 다분히 단순 무식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기독교 신학을 무분별하게 접하고 있던 시기라, 내게 있어 '해석'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또 하나의 낯선 세상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2부 '유산'에서 저자는 비록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 바울의 편지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연구했던 여러 신학자들의 해석으로부터 바울의 유산을 찾아낸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서구 교회,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와 칼뱅의 사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 그리고 니체를 비롯한 다수의 철학자들과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왔는지 저자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준다.

 

 

책을 읽고, 바울처럼 파다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쟁을 몰고 다닐 인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사실 바울이 직접 썼다고 인정되는 일곱 편의 서신(더 많은 서신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 이상 일곱 편의 편지를 통해서만 바울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에서도 그는 상반되거나 모호한, 어쩌면 이중적일지도 모르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게다가 바울이 쓴 것은 신학 전문서적이 아니라 어떤 특정 상황에서 어떤 특정 대상을 향해 쓴 편지이기에, 이 편지만을 가지고 바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바울 서신의 저작설에 관한 다툼도 꾸준히 있어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강조하듯, 신학의 문외한인 내게도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고 익히 알려졌던 바울의 사상을 확고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고 그것을 찾으려는 방식보단, 각 시대와 정황에 흐르는 맥락에 합당하게 본문과 꾸준히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가능성을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탐색하는 방식이 더 올바를 것이다. 바울이 끼친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지만, 바울 역시 예수의 복음을 해석한 사람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 사람이기에, 그의 사상이 성경을 읽는 하나의 눈을 열어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복음이거나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늘 염두해야 할 것이다.

 

다시금 바울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혈통적으로 유대인도 아닐뿐더러,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율법을 다 알지도 못하는, 일개 이방인에 불과한 나에게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역할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를 박해했던 그도 부르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인간의 자격이나 가치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이 왜 비유대인들의 세계로 퍼져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여전히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바울이지만, 그의 소명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야훼의 종의 사명처럼 분명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열방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열방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어지는 거대한 선상에 나의 작은 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감사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글_ 김찬영

 

이번 모임에서는 <신 인간 과학>의 챕터 3에 해당하는 ‘정신’을 주제로 모임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정신, 의식, 영혼에 대해서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특히, 영어에서의 마음을 가리키는 표현과 한국어에서의 마음을 가리키는 표현이 다름을 지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을 가리키는 영단어 ‘Mind’는 ‘심리철학(Mind of Philosophy)’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에서 가슴이나 감정으로 이해되는 'Heart'가 아니라 머리나 이성으로 이해되는 ‘Mind’입니다. 즉, 서양권에서의 'Mind'는 마음의 이성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우리가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표현은 이성적인 능력보다는 감정적인 능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차이로 인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최경환 실장님이 심신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셨고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는 책에 나왔던 이야기 중 하나인데 라디오에 비유하면서,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주파수와 연결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심리가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와 관련하여 틸리히 신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박영식 교수님께서 설명하시기도 하고 또 다른 신학 이야기로 나갔는데 맥락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박영식 교수님께서 흥미로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인격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신이 인격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과 관계하는 데에 있어서 인격적이기 때문에 인격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는 아마도 신의 자체적 속성으로서의 인격성이 아니라 인간과 신의 관계 속에서의 인격성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과학보다는 신학적인 이야기가 많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도 자유로이 오가는 분위기에서 다과를 즐기면서 즐겁게 논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에는 1학기 종강 모임으로 모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참여해 주세요.

 

  • 다음 모임: 6월 25일 낮 12시
  •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100주년기념관 8층 박영식 교수 연구실
  • 읽을 책: <신 인간 과학> 4부 새로운 세계관을 향하여
  • 문의: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글_ 정대경 박사 (과신대 연구 팀장)

 

5월 과신대 연구모임은 백우인 목사님이 계시는 카페 “거기”에서 모였습니다. 계속해서 해리슨의 <The Territories of Science and Religion>을 읽으면서 모입니다. 드디어 다음 모임이 해리슨 책 마무리하는 모임입니다.

 

요즘 쓰고 있는 논문의 큰 줄기와 해리슨의 주장이 잘 맞아떨어집니다. 논문은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일으키는데 일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시작했습니다.

 

형이상학적 자연주의 안에서 인간 삶이 추구하는 가치와 의미는 물리적인 것 혹은 신체적인 것으로 축소됩니다. 생명연장, 의료복지 등 막대한 비용과 투자가 이 분야에 이뤄지는 것이 큰 흐름 안에서 인간실존의 궁극적 가치가 신체적-물리적인 것으로 축소되면서 일어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해리슨도 마찬가지로 근세 이후 르네상스, 종교개혁, 새로운 자연철학의 출현 등에 의해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기존 시각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신적-도덕적 층위가 물리적 층위로 환원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내적인 덕목을 지식을 통해 실현하는 종교적-자기성찰적 개념들이었던 scientia와 religio 같은 개념들이 외재적 개념들, 곧 기독 종교의 핵심 교리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체계들로 개념적 전환이 일어났다 주장합니다.

 

이와 발맞추어 종교 내 궁극적 가치였던 caritas(charity), 곧 하나님과 합일적 사랑, 이웃과 합일적 사랑은 전자가 후자로 축소되며 합쳐짐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의 외적인 표현인 공리, 유용성, 복지 등을 실현하는 것으로 강조점이 옮겨갑니다. 이후 인간과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신적 실재가 불필요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 자연스레 종교적인 동기로부터 시작되었던 charity는 인간적인 차원만 남게 되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는 듯 보입니다.

 

큰 틀에서 해리슨의 주장, 실재에 대한 다차원적-다층적 이해가 물리적-문자적 차원으로 축소되면서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가치와 의미도 같이 축소되었다는 이해가 그럴듯해 보입니다 🙂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글_ 정대경 박사 (과신대 연구 팀장)

 

4월 연구모임에서는 종교와 과학 학제 간 연구 관련 서적 중 고전 격인 이안 바버의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챕터 1과 계속해서 함께 보고 있는 피터 해리슨의 <The Territories of Science and Religion> 챕터 3을 읽고 모였습니다. 바버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과학에서 논의되는 “데이터” 개념이 신학 연구에 있어서 사용될 수 있는가에 관련된 논의였습니다. 바버는 신학이론이 구성되는 데 사용되는 자료들을 데이터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고, 과학 연구 방법과 신학 연구 방법 사이 유사성을 토대로 과학과 종교 학제 간 연구 가능성을 제안했습니다. 신학 연구에서 데이터라는 것은 보통 theological sources라고 불리는 성서, 전통, 이성, 경험 등을 보통 의미하는데, 토론 중에 신학적 “데이터”라는 것이 과연 과학적 “데이터” 개념과 유사한 것일 수 있겠는가가 쟁점이었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서로 다른 전공의 학자들, 전문과학, 과학철학, 과학사를 전공하신 선생님들과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도전을 줍니다. 예상치 못했던 부분들을 생각하게 되고, 과학이나 과학철학적 이해에 있어 브로드하고 추상적으로 이해했던 부분들을 조금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과신대 연구모임이 가지는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체계화되고,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방식으로 연구모임이 잘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리슨 책의 챕터 3도 참 흥미로웠습니다. 챕터 3의 주요 요지는 고대와 중세까지는 자연적 존재자들(natural objects or beings)에는 물리적 층위뿐만 아니라, 소위 도덕적-정신적 층위가 존재한다는 것에 크게 이견이 없었는데, 르네상스 이후 시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자연스레 존재자들 내 도덕적-정신적 층위가 사라지거나, 물리적 층위로 환원되기 시작했다는 지적입니다. 이러한 사유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 자연적 존재자들의 행위와 더불어 일어나는 것(i.e. double-agency)이 모순적이거나,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없다가(이미 자연적 존재자들 안에 물리적 층위와 더불어 비물리적 층위가 있기 때문에), 물리적 층위에 대한 강조가 일어나게 되면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을 물리적 층위에 국한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입니다.

 

이 맥락에서 자연 내 일어나는 사건의 원인을 자연적 존재자들로만 국한해서 생각하거나, 기회원인론 같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신적 존재의 행위 결과로만 보는 "either or”의 사유방식이 자연을 이해하는데 대두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유가 역사 안에서 점차 자연주의와 결탁하게 되면서 신적 행위라는 것이 자연계 내 사건들을 설명하는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전락하게 되는 의도치 않은 결과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해리슨의 이러한 지적이 일리 있게 들립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지난 5월 13일(월) 열매나눔재단 지하 강단에서 제1회 과신대 목회자 살롱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특별히 이번 행사는 '바른교회아카데미'와 함께 콜라보로 진행된 행사로 많은 목회자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셨습니다. 과신대 목회자 살롱은 평소 과학과 신학에 대해 관심과 궁금증이 많이 있지만 정작 배움의 기회가 많지 않아 고민을 하는 목회자들을 위해 준비한 행사입니다. 목회자들만을 위한 행사이다 보니 질문도 상당히 깊이 있고 신학적인 대화가 많이 오고 갔습니다. 

 

1부에서는 이한일 목사님(송학대교회 청년부 담당)의 사회로 김근주, 김정형, 우종학 교수님께서 패널로 참여해 사전에 준비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관련 키워드를 준비해 한분씩 이야기 주제를 풀어가도록 했는데, 결국에는 시간이 부족해 몇 가지 주제로만 진행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전에 미리 준비한 질문은 이렇습니다. 먼저 김근주 교수님께는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1. 창세기 1-11장까지 내용 중, 어디까지 상징이나 비유로 읽어야 하고, 무엇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하나요? 그렇다면 부활은 상징인가요 사실인가요?

  2. 창세기 혹은 성경의 다양한 사건과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은 불필요한 건가요? 노아 홍수와 방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닌가요?

  3. 창세기가 고대 근동의 신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성경의 권위가 떨어지나요?

  4. 요즘 역사적 아담 논의를 많이 하는데, 그 문제가 신학적으로 왜 중요하고,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김정형 교수님께는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1. 진화심리학, 진화사회학,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런 개념들이 기독교 신학과 양립 가능한가요?

  2. 과학의 발전에 따라 성경해석이나 신학의 내용이 변해야 하나요? 신학은 과학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가요?

  3. 과학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올바른 태도인가요? 장점과 단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4. 유신진화론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론인가요?

  5.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창세기/창조론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룰 점은 무엇일까요? 혹은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우종학 교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나요? ‘말씀’으로 말고요.^^ 인간의 조상은 아담인가요, 원숭이인가요? 만약 진화가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진화 과정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셨나요?

  2. 진화, 그리스도인들은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요? 대진화가 가능한가요?

  3. ‘창조 vs 진화’라는 프레임을 어떻게 깨트리고 넘어설 수 있을까요?

  4. 오랜 지구론을 인정하면서 진화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요?

 

 

대부분의 질문이 쉽지 않은 내용이지만 교수님께서 정말 친절하게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만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습니다.

 

2부는 과신대 최경환 실장님의 진행으로 현장에서 즉석으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단체 카톡방을 열어서 그곳으로 질문을 받았는데, 정말 많은 분들께서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이렇게 활발하게 질의응답이 진행된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모든 질문에 일일이 다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한 분 한 분의 질문이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은 귀한 말씀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마지막에 우종학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질문 중에는 교회에서 과신대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면 기성 성도들이 시험에 빠지고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염려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종학 교수님은 한 번 반대로 생각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기성 성도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창조과학이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신앙을 버리거나 교회를 떠나지는 않습니다. 심각한 고민에 빠지거나 신학적으로 혼란스러울 수는 있겠죠. 하지만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젊은지구 창조론 때문에 신앙을 버리거나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99마리 양보다 우리를 떠난 1마리 양에 신경을 더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더 이상 젊은이들이 과학과 신앙의 갈등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일이 없게 만들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과신대과 목회자들이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벌써 제2회 목회자 살롱이 기대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글_ 최경환

 

박영식 교수님 연구실에서 <신 인간 과학> 2부 “생명”을 함께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맘 편히 이야기하며 질문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함께 나눈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올립니다.

 

1. 신학은 항상 '성서 적합성'과 '현실 적합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과 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명’을 같은 수준에서 생각해야 하는가? 부활은 생물학적 죽음의 극복인가? 예수는 생명을 주러 왔다고 했을 때, 그건 생물학적 생명을 말하는 건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건 또 뭔가?

 

3. 우리는 흔히 창조라고 하면,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있는 것 중에서 뭔가를 나누기도 하고, 분류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둠'을 만드셨는가? 하나님이 '물'을 만드셨는가? 아니다. 있는 것 중에서 가르고, 나누고, 모으시면서 창조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해해야 하나님의 창조를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있은 것 중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막고, 보호하는 것도 창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창조에 대해서 은연중에 어떤 선입견을 갖기고 있는 것 같다.

 

4. 즉각적 섭리가 아니라 시간적이고 매개적인 섭리로 이해해야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초등학생에게 엄청난 지식을 집어 넣을 때, 그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질병을 갑자기(순식간에) 치료한다고 했을 때, 과연 몸에 어떤 무리가 생기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오랜 역사를 통해서 진화를 일으키시고 느리게 창조하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 우주의 진화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담아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신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치유 활동을 하시는데, 우리 생각으로는 뭔가 빨리 진행되면 좋겠지만, 오히려 그게 병일 수도 있다.

 

5. '하나님에게는 우연이 없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늘날 물리 세계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다. 어쩌면 우연이야말로 실재고, 우리는 그걸로 필연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자연법칙이라는 것도 결국 우연의 사건이다. 우연 속에서 리듬을 만든 것이다. 사건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든 것이다. 자연의 습관이 자연법칙이다.

 

6. 신학적 의미에서 '죄'를 자연과학적으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폭력'이지 않을까? 하나님의 자유는 나의 자유가 아니라 상대방을 자유케 하는 자유이지 않을까?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은 상대방에서 힘을 주는 전능이다.

 

 

부천 북클럽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참여해 주세요.

 

  • 다음 모임: 5월 28일 저녁 7시
  •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100주년기념관 8층 박영식 교수 연구실
  • 읽을 책: <신 인간 과학> 3부 인간
  • 문의: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글_ 우종학 

 

과신대 관악북클럽 모임 장소를 이번 한 번만 바꾸어 모이게 되어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내렸습니다. 이 동네에 마지막으로 온 것이 20년도 넘은 듯한데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변해서. ^^

 

어제 북클럽 모임에서 지구의 태고성에 관해 주로 과학적 관점의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데이비스 영의 두꺼운 책을 마지막으로 다루는 날이었고, 구형규 선생님의 발제로 지층, 화석, 시간 측정, 변성암 화성암 들을 다루는 챕터들을 훑으며 공부했고, 저는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 중에서 아이소크론법에 대해 주로 발제를 했습니다.

 

다양한 책들을 공부하지만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그리고 책의 내용이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창조과학자들의 주장과 지질학자들의 주장을 비교해서 다루는 내용이 많이 나왔습니다.

 

 

처음 오신 분들도 있었는데, 반창조과학 모임 같은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오늘은 주제가 그래서 어쩔 수 없었지요. 과신대는 무신론의 도전과 과학시대에 건전한 창조신학을 세우려는 목표를 갖고 있는 단체입니다.

 

카페 '거기'를 처음 가보았습니다. 백우인 목사님이 카페를 시작한 지 꽤 되었는데 많이 늦었네요. 건강식 그리고 맛도 최고인 샌드위치와 커피가 먼저 몸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리곤 오랜만에 보는 분들의 수다로 워밍업을 하다가 책의 내용으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저에게는 과학자가 아닌 분들, 평범하게 교회 다니는 분들이 신앙과 과학의 문제, 그리고 전반적인 신앙과 교회, 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종종 바쁠 때는 북클럽 모임에 가는 게 힘들 때도 있지만 오가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만 쏟지 않는다면 항상 모임을 통해서 재충전이 됩니다.

 

이 두꺼운 책을 끝냈고 6월에는 얇은 책으로 모입니다. 바로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입니다. 과학적이고 신학적인 내용보다는 15명의 저자들의 경험담과 스토리가 담겨있는 책이라 쑤욱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함께 하시면 좋습니다.

 

 

  • 6월 관악북클럽 모임
  • 책: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 (IVP, 2019)
  • 날짜: 6월 14일 금 저녁 7시
  • 장소: 서울대입구역 더처치
  • 문의: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타락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든지, 자연을 연구해 보면 그것이 원자와 분자, 암석과 별이 움직이는 자연법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리진’(IVP) 3장에 나오는 이 짧은 문장이 11장 이후 인간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질문에 대해서 열쇠가 되어줍니다.

 

처음부터 불사의 존재로 지어진 존재가 인간인 것도 아니며(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자연 역시 이전에 없었던 가시와 엉겅퀴를 어느 순간 갑자기 내기 시작한 것도 아니겠습니다.

 

성서는 참 어려운 책입니다. 특히 창세기 앞장은 고대 근동 문화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라도 있어야 이해 가능합니다. 과학의 도움이 없으면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처럼 이해되기도 합니다.

 

지성이라는 훈련된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어른이라면 독서를 하고 토론에 참가하며 시행착오를 견뎌내어서 성서와 과학의 간극을 메꿔내겠습니다만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학교 시절에 진화론 문제에 정답을 쓰면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껴서 일부러 틀린 답안을 선택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저로서는 자녀 세대에게조차 그런 인지부조화의 상황을 죄책감까지 안고 맞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창조과학을 가르치거나 앞뒤 가리지 않고 진화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면 소리소문없이 고민하는 자녀의 입장을 헤아리실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오리진’ 13장에는 자녀 연령에 따라 이 주제를 어떻게 어떤 수준에서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가 있습니다.

 

 

발제를 준비한 최윤희 님이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면 하나님을 배신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걸 포기할 수 없었다'라는 것은 자유의지가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이겠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성서를 통해서든 과학을 통해서든 스스로 판단하고 이해할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5.18 때 왜 사람들이 가족과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며 자유를 위해 싸웠는지가, 절절히 깨달아지는 순간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부여한 자유 의지라는 것을요” / 박철성 님)

 

 

다음 모임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과학, 전통, 신학, 성경에 대한 보다 창의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인간의 타락과 진화’(새물결플러스)를 읽고 토론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