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의 신을 넘어서

 

과학과 종교 | 토머스 딕슨 | 교유서가 | 2017

 

 

최경환 (과신대 기획실장)

 

상식적인 과학, 비상식적인 종교?

 

우리는 흔히 과학은 직관적으로 경험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전제를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다. 반면 종교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진화생물학과 양자역학은 사실 일반적인 상식과 정반대다. 인간은 토끼뿐 아니라 당근과도 조상을 공유한다.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는 파동이면서 입자다. “과학은 우리의 감각이 우리를 속이며 기본적인 직관이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우리가 밤하늘을 별을 보면서 거창한 과학 이론을 떠올리거나 과학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감탄과 경이의 언어는 어느 정도 종교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22-23쪽). 과연 어떤 것이 상식적이고 직관적인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토머스 딕슨이 쓴 <과학과 종교>는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기획한 “A Very Short Introduction” 중 하나로 출간됐다. 딕슨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지성사의 맥락 속에서 짧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잘 담아서 저술했다. 과학자나 신학자와 달리 역사학자가 쓴 책이어서 그런지 과학과 종교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관점이 가득하다. 예를 들어,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조장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과연 이 둘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요인들일까? 딕슨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근대국가가 탄생하면서 정치적인 요인이 이 둘을 매개로 갈등을 조장하는 것일 수 있다. 최소한 1920년대 미국의 상황에서는 그랬다. 당시 진화론자들은 기독교와 창조론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불공정하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창조론이 위기에 처했다고 종교집단은 이야기한다(25쪽). 교육에 대한 결정권은 누가 가져야 하며, 어떻게 사회적 영향력, 유권자의 표를 얻을 수 있는지로 논의가 이어지기도 한다. 

 

저자가 과학적 실재론과 반실재론, 신학적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설명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실재론과 반실재론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신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반실재론을 신학에 적용해 보면, 성서의 문자나 우리들의 신앙경험은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신에 대한 모든 명제는 그저 인간의 경험이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들의 언어와 이미지가 불완전한 것이고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므로 그것으로 하나님을 가둬서는 안 된다는 뜻이고, 이것은 기독교 전통 내에서 부정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져 오고 있다. 신의 불가해성과 인간의 인식 한계를 강조하는 견해다. 그런데 이런 입장의 약점은 만약 인간이 신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신의 존재 자체도 의심에 부쳐진다는 것이다(65쪽). 결국, 부정신학과 무신론은 한 끗 차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이런 부정신학을 지지하거나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런 내용이 있다고 소개할 뿐이다.

 

 

틈새의 신을 넘어서

 

특별히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스코틀랜드 복음주의 신학자였던 헨리 드러먼드(Henry Drummond)가 1893년에 보스턴에서 강연한 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이 강연에서 그는 당시 복음주의자들에게 진화를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기적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79쪽). 오히려 진화의 과정 자체가 바로 기적이라고 말한다. 지속적이고, 천천히,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연이 진화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기적이고, 그 결과 사랑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것이 가장 큰 기적이다. 이어서 드러먼드는 틈새의 신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다. 틈새의 신은 자연 현상 가운데 과학이 설명하고 해명할 수 없는 영역을 신앙이나 신의 활동으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에서 신을 찾아야 한다.” 만약 신이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 특별한 개입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고 평범한 자연세계 속에서는 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이란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이 세계에 없다는 말이 된다”(79쪽). 결국, 틈새의 신은 신의 권능과 자리를 계속 축소할 수 밖에 없다. 과학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비록 지금은 틈새가 보인다 할지라도 앞으로는 점점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신의 영역 역시 계속 줄어들 것이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 속에 신의 활동을 가두면 신은 최종적으로 이 세상에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드러먼드는 이렇게 말한다. “이따금씩 기적을 일으키는 오래된 신학의 신보다는 모든 곳에 편재하는 신, 즉 진화의 신이 훨씬 더 대단하다”(80쪽). 신을 인간이 모르는 영역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알고 있는 영역, 즉 과학의 성과와 발견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과학과 종교가 제로섬 게임을 하는 순간 종교는 점점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빼앗길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종교가의 영역과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과학의 어깨 위에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고유한 자리와 역할을 고민하는 것이 신학의 역할일 것이다. 

 

딕슨은 비슷한 맥락에서 근대 과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신의 자리를 고민하게 만든다(81쪽). 뉴턴은 행성과 항성 사이의 거리와 중력을 설명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는 하나님이 이 별들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그런 신은 무능력하거나 불완전한 신에 불과했다. 신이라면 애초에 제대로 작동하는 우주를 만들어야지, 왜 굳이 나중에 신이 개입해야만 제대로 작동하는 우주를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시계를 가끔 수리하고 고치는 시계공은 실력이 별로라는 것이다. 자주 고칠수록 자신의 무능력을 더 드러낼 뿐이다. 기적도 마찬가지다. 신이 이 세상에 개입할수록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근대과학의 선구자들은 모두 신의 권능과 능력을 신뢰했다. 자연이 수학 법칙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신의 권능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들은 신을 기적을 일으키는 변칙자가 아니라 설계자나 법률가로 봤다. 과학이 자연의 현상을 모두 빠짐없이 설명할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신이 자연에서 행동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인가? 적어도 근대과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83쪽).

 

 

 

정치적 속셈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건이 바로 1925년 미국 테네시 주에서 있었던 ‘스코프스 재판’이다. 딕슨은 이 재판에서 문자적인 해석을 옹호하는 창조론 진영 사람들도 일관적으로 문자적 해석을 옹호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믿으면서도 태양이 멈춘 사건은 지구가 자전을 멈춘 것이라고 해석을 하고, 창조의 1일은 24시간으로 보지 않았다. 오랜 지구론을 주장한 것이다. 딕슨은 이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추론한다(149-153쪽). 첫째, 기독교인들조차 창세기를 해석하는 입장이 다양하고 중구난방이다. 통일된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창조론자들은 과학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스코프스 재판에서 창조론자였던 브라이언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지구의 역사가 6000년보다 더 많다고 주장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근거는 과학이었다. 그런데 왜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고 진화론은 수용하지 않은 것일까? 결국 핵심은 인간의 진화에 대한 부분이었다. 인간이 동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과학에 적대적인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학을 상당히 흠모한다. 자기들이 젊은지구론을 옹호하는 근거는 모두 과학의 성과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젊은지구 창조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결과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과학적 증거는 기존 학계나 과학자들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 자료나 근거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당대의 과학 이론을 증오하면서도 그것을 모방하려 했을까? 어쩌면 이 지점은 그들의 정치적 과욕이 개입한 것일 수 있다. 딕슨은 당시 창조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대안적인 과학으로 포장해서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고 말한다(152쪽). 근본주의 계열의 학교에서는 이런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한국에서도 대안학교의 중요한 설립 목적이기도 했다. 



자신의 자리 지키기

 

마지막으로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종교도 과학도 모두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종교는 그렇다고 쳐도 과학도 그래야만 할까? 흔히 사람들은 편견을 조장하는 종교와는 달리 과학은 자연법칙에 근거해 공평한 목소리를 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편견 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까지 동성애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 두 남성 사이의 섹스는 죄악일 뿐만 아니라 사형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면 동성애 남성들의 심리를 연구해 이는 자연적인 행위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런 과학적 접근 방식이 종교와 전통에 얽매이던 구태의연한 관습으로부터 합리적인 진보를 이룬 것일까? 동성애를 도덕의 영역에서 의학의 영역으로 옮겨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더 억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제는 의학적인 기준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 된 것이다. 성은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로운 표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인간의 본성처럼 여겨진다. 이는 동성애가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떤 입장이든 과학의 결과에 기대어 동성애를 설명하려는 태도는 사람의 선택과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 

 

과학이든 종교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정치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을 이를 빌미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도 하고,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지금의 삶에서 돌이키라고 경고하기도 하고, 우리를 깨우치고 격려하기도 한다. 반면, 우리를 혼돈에 빠뜨리고 억압하기도 한다. 과학이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규정하거나 설명하기도 어렵거니와 종교가 과학적 사실관계를 해명하거나 설명하기도 어렵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사회의 공공선과 진보를 위해 노력하고 애쓰면 좋겠지만, 과연 이 둘은 겸손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쩌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다른 영역을 침범하려는 과욕이 이들의 본래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