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 사무국 소식 201907

과신대 청소년 캠프를 준비 중인 교사팀

 

 

1. 지역 번개 모임 

 

과신대 실행위원회 회의 때마다 과신대 정회원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사무국에서도 여러 가지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과신대 지역 번개 모임입니다. 서울 중심으로 과신대 행사가 진행되다 보니 지역에 계신 분들에게 늘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지역 번개 모임을 기획해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교통편의 제약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가까운 지역부터 모임을 추진해보려고 합니다. 지역 번개 모임을 통해 북클럽도 조직하고,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언젠가는 제주도에서도 지역 번개 모임을 추진해보겠습니다. 그땐 같이 가시죠~^^

 

 

2. 마이크로런닝 플랫폼 그노비(Gnowbe)

 

이번에 개설한 온라인 <기초과정I> 3기 과정은 모바일을 기반으로 운영하는 마이크로런닝 플랫폼 그노비(Gnowbe)를 통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진행했던 것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학습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앞으로 온라인 기초과정은 그노비를 통해 상시 수강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 과신대 홈페이지를 통해 수강 신청할 수 있습니다. 

 

 

 

3. 제2회 청소년 캠프 '신과 함께' (7월 20일)

 

지난 2월, 설레는 마음으로 제1회 과신대 청소년 캠프를 진행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과신대 정회원들을 중심으로 학생 30명, 학부모 20명이 함께 참석했었죠. 이번 여름에는 범위를 넓혀서 교회, 개인, 단체, 교사, 교역자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지난번 진행했던 "신과 함께" 프로그램을 더욱 강화해서 알차고 재미있게 준비했습니다.

 

엄청 더웠던 7월 6일(토), 하루 종일 선생님들이 프로그램을 정비하고 어떤 내용을 전달할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선생님들의 열정과 헌신이 학생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 청소년 캠프 신청: https://www.scitheo.org/385

 

 

 

4. 카페 '거기'를 소개합니다.

 

그동안 과신대 독서모임이나 실행위원회 모임 때마다 근사한 샌드위치 사진에 압도당한 적 있으시죠?^^ '도대체 저기가 어디야?' 하신 분들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바로 과신대 백우인 출판 팀장님께서 운영하시는 '카페 거기'라는 곳입니다. 사전 예약제로 공간 대여가 가능하니 혹시 모임, 세미나 공간이 필요한 분들은 연락 주세요.

 

 주소: 벽산디지털밸리3차 604호 (서울 구로구 디지털로 271)

 연락: 백우인 bwooin@naver.com

 

 

 

5. 방송 장비 구입이 시급해요. 

 

올해부터 과신대 콜로퀴움을 진행하면서 온라인 수강신청도 함께 받았습니다. 핸드폰으로 현장 강의를 촬영해서 유튜브를 통해 수강자들에게 전송하는 방식입니다. 여러 번 실행착오를 겪으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쉽지는 않네요. 무엇보다 음성이 깔끔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현재 저희 과신대 형편으로는 고가의 캠코더와 음성 장비를 구입하기가 쉽지 않지만, 하나씩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지속적으로 과신대의 후원자가 늘어나도록 기도해 주시고 관심도 많이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6. 성공회 스튜디오 사용

 

과신대에서 유뷰트로 방송하고 있는 '과신대TV' '과학과 신앙 사이' 잘 보시고 계신가요? 그동안 조용한 카페를 찾아다니며 촬영을 했는데, 쉽지 않더군요. 그러다 우연히 서울 성공회에서 새롭게 스튜디오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 흔쾌히 승낙을 하셔서 앞으로는 그곳에서 촬영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스튜디오가 너무 아담하고 이뻐서 한눈에 반했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과신대 유튜브 채널도 많이 알려주시고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과신대TV: https://bit.ly/2NDnHjH

 

 

7. 과신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1) 자비의 하나님,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지혜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모두 알 수 없으니 늘 겸손하고 낮은 자의 마음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삶의 주인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늘 찬양하며 살게 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늘 묵상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2) 지혜의 하나님, 과신대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널리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귀한 통로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연구하고 소개하는 단체가 되게 하셔서 많은 이들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복음의 사역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3) 은혜의 하나님, 과신대가 준비한 청소년 캠프와 다양한 모임을 통해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게 하시옵소서. 이제는 더 이상 상식이 통하지 않는 교회 때문에 상처를 받고, 합리적인 사고를 무시하는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시험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셔서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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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논리를 넘어서는 은혜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예기치 못한 기쁨
C. S. 루이스 | 홍성사 | 2018

 

김영웅

 

 

기독교 변증가로 잘 알려진 C. S. Lewis의 삶이 온통 기독교적인 색채들, 이를테면 말씀 듣고 읽고 묵상하고 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행위들로 가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허다한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의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그이지만, 실상 그는 목사나 신학자도 아닐 뿐더러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릴 적부터 신앙심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태어나는 시대와 장소를 선택할 수 없었기에 북아일랜드의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을 뿐, 머리가 조금씩 크면서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1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대학으로 복귀한 몇 년 후 그는 유신론자가 되었고, 얼마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회심 이후 그는 끝까지 성공회 신자였다). 루이스가 57세가 되던 해에 (생을 마치기 6년 전) 출판된 이 자서전과도 같은 책은 이러한 그의 신앙의 여정을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들려주는 책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년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약 300페이지 안에 모두 담으려면 많은 내용을 빼야만 한다. 그러는 와중에 중요하다 생각되는 사건들은 강조도 해야 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한 형식으로 잘 짜여있다. 논리정연하면서도 문학적이고 위트가 넘치는 그의 필체는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예기치 못한 기쁨을 선사해 줄 것이다.

 

 

학창 시절의 그는 마치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결코 무난하거나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에 푹 빠져 살아왔는데 (그는 북유럽 신화들을 비롯해 많은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기질은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것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인간이 모인 아무리 작은 집단이라도 거기엔 계급 의식이 물들어있는 법이며, 일반적으로 그 안에선 진실을 은폐하거나 교묘하게 위장하는 방법을 통해 충분히 사교적이면서도 철저히 이기적인 속성을 겸비한 인간들이 지배층으로 군림하기 마련이다. 루이스가 다닌 학교의 분위기가 이 책에선 꽤 자세히 강조되어 있는데, 나에게는 그가 그 시절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는 그 당시 계급적인 학교 체제에 적응하지 못했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진 아버지의 스승이셨던 분에게서 개인지도를 받으며 비로소 안정적으로 학문적 성장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책에서도 여러 번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를 사용하는 것을 봐도 그의 독특한 (이기적으로 보이면서도 남에게 해는 끼치지 않는, 즉 다분히 개인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학습 받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저 그렇게 주어진 모습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게끔 지어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 그는 운동과 수학에 젬병이었으며, 오로지 앉아서 혼자 글을 읽고 쓰고 상상하고, 시간에 맞추어 적당한 산책을 즐기고 일찍 잠드는, 고독한 일상을 좋아했던, 천성적인 학자이자 작가였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종종 그를 예기치 않게 찾아왔고 스스로 ‘기쁨’이라 불렀던 순간을 어른이 되어서도 늘 갈망하곤 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이후에 그는 그 ‘기쁨’을 어떤 하나의 마음 상태로 여기게 된다. 그 ‘기쁨’은 무언가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갈망 비슷한 것이었는데, 모태신앙으로 자라다가 염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무신론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고, 다시 어떤 절대적이며 정신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게 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 ‘기쁨’은 그 자체가 참 기쁨이나 목적이 아니라는 것과, 진정한 가치는 오히려 그 ‘기쁨’이 바라고 가리키고 또 그 ‘기쁨’의 근원이기도 한 대상에 있다는 것을 그는 간파하게 된다. 참 기쁨은 우리 인간을 흥분, 고조시키며 환희로 다가오는 어떠한 감정이나 마음 상태에 있지 않다. 비록 그것이 평상시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경험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의 실체는 참 기쁨의 흔적이며 껍데기일 뿐이다.

 

 

사실 난 논리와 변증에 능한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무척 궁금했다. 그 과정 또한 논리정연하고, 누가 들어도 납득이 될 만한 이유와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기대는 책의 말미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루이스 스스로 자기도 잘 설명할 수 없고 잘 모른다고 써놓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부분에서 실망감을 느꼈었지만 (사실 300 페이지 분량의, 그것도 나와 별 상관없는 개인사를 읽어나가는 건 마냥 흥미진진하진 않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가장 큰 이유는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금 후 난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무신론자에서 시작해 교회만 다니는 유신론자였다가 철이 좀 들어서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고, 그 과정을 지금까지 납득이 될 만하게 설명한 사람은 간증 사기꾼 빼고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론 그동안에도 많이 생각해봤다), 그건 논리적이지 않았다고 말해야 가장 솔직한 고백이 아닌가 한다. 은혜는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정의했던 ‘기쁨’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파도처럼 우리를 덮쳐오는 감정으로도 나타나고, 어떠한 지적인 깨달음을 얻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로도 나타나며, 아주 가끔씩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들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적과도 같아서 그 일련의 순간들과 사건들은 한결같이 모두 어떤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 바로 절대적인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되어주신 그 존재, 그리고 모든 열방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바로 그 존재,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인 것이다.

 

루이스 덕분에 나도 예기치 못한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이 기쁨에 국한되지 않고 난 내 일상에 일어나는 소소한 기쁨들의 근원을 더욱 앙망한다. 루이스라는 거장 덕분에 불필요한 곁길 하나를 걷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흡족하다. 그의 진솔한 회심기 덕분에 오히려 일방적이면서도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가 별 볼일 없는 내 삶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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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기원과 인류의 타락' 강의 요약

  • 창세기가 쓰여진 당시 이스라엘 상황이 바벨론 포로기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요셉 2019.07.08 13:46
    • 창세기의 저작 연대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전통적으로는 오경의 모세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오랜 연대를 잡기도 하지만, 최근 많은 구약학자들은 구약성서의 최종 편집 연대를 포로기 시대로 잡고 있고, 창세기 역시 당시 바벨론 창조 신화에 대한 대안으로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부분에 대한 해석은 최근에 나온 구약개론 책들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7월 1일 과신대 콜로퀴엄에서 김구원 교수님께서 강연하신 내용을 과신대 정회원이신 송윤강님께서 정리해주셨습니다. 그 내용을 공유합니다. (* 출처: 페이스북 '과학과 신학의 대화')

 

 

송윤강 (과신대 정회원)

1. 원죄 교리의 구약적 배경


원죄 교리란 인류의 최초 조상인 아담이 지은 죄가 후손인 인류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죄의 전가 이론’이라 한다. 장로교 신조 6항은 다음과 같이 원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시조(始祖)가 선악간 택할 자유능(自由能)이 있었는데 시험을 받아 하나님께 범죄한지라 아담으로부터 보통 생육법(生育法)에 의하여 출생하는 모든 인종들이 그의 안에서 그의 범죄에 동참하여 타락하였으니, 사람의 원죄(原罪)와 및 부패한 성품 밖에 범죄할 능(能)이 있는 자가 일부러 짓는 죄도 있은즉 모든 사람이 금세와 내세에 하나님의 공평한 진노와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원죄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원죄가 언급된 창세기가 쓰여진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구약 성경이 완성된 때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다. 아담의 죄의 전가 이론은 포로기의 묵상에서 비롯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포로기 고통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했던 민족이 멸망했다는 것은 죽음 이상의 큰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통의 원인은 죄 때문이라 생각하고 이에 대하여 세 가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입장은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상 중에서 특히 므낫세 왕의 죄를 언급하고 있다.(열왕기 21:10-15, 24:10-15)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의 고통이 조상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애 5:7)

 

‘그들의 죄악을’에 해당하는 ‘아오노테헴’의 원형 ‘아온’은 ‘죄의 형벌’이라는 의미도 있다(욥 13:26). 이처럼 조상 탓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주권, 선하심 조차도 의심하고 있었다.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시편 89:49)

 

그래서 구약의 저자들은 이스라엘이 고통 받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실패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방신을 섬기는 바벨론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이방신이 하나님께 대적하여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다. 여전히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시고, 그의 선하심은 변함이 없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 조상 대대로 쌓인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조상 탓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신앙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입장은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상 탓 할 것 없다. 바로 네가 지은 죄 때문에 벌 받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에스겔 18:2-4). 이렇게 보는 입장 이면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선한 의지, 즉 회개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이 이와 같은 입장을 보인 것은 그가 속했던 닙프르 공동체의 영향이 컸다. 닙프르는 그발 강가 있는 유대인 공동체이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에 유배되어 이 곳에 정착했다(에스겔 1:1). 이 공동체는 바벨론 포로 공동체와 달랐다. 바벨론 포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닙프르 공동체의 이런 상태로는 다시는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역대서에도 찾을 수 있다. 므낫세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므낫세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통틀어 가장 오래 집권한 왕이다. 그리고 므낫세는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야기도 언급되어 있다(대하 33:12-13).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므낫세가 회개하자 다시 왕위에 복귀시켜 주신 것이다.

 

열왕기하 36:12-20을 보면 오히려 형벌 원인을 마지막 왕 시드기야와 당시 종교 지도자와 백성들의 죄에서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 때 이스라엘의 멸망을 명백히 죄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심판보다는 고통을 극복하고 회복하는 비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스겔서 2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의 원인을 더 먼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찾고 있다. 출애굽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에스겔 20:18-23).

 

이처럼 어떤 원인을 좀더 먼 근원으로까지 올라가 찾는 것을 ‘회귀적 결정주의’라 한다. 죄에 대한 책임을 세대 전가의 차원을 넘어 역사의 원점(태고적)까지 올리려는 경향을 말한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역사의 원점이 출애굽이었던 것이다. 아담의 원죄의 후손 전가 사상은 이런 회귀적 결정주의의 영향이다. 에덴과 출애굽 광야 생활을 비교하면 여러 면에서 짝을 이룬다.


에덴에서 선악과 금지명령을 주신 것과 광야에서 율법 준수 명령을 주신 것, 선악과 금지 명령을 어김으로써 에덴에서 추방된 것과 출애굽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40년간의 광야 유배 생활을 한 것 등이다. 이스라엘이 고통의 원인으로 죄의 기원을 광야 시대까지 소급한 이유는 조상들의 죄가 오랫동안 너무나 많이 쌓여서 지금 그들의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극복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에스겔은 인간의 선한 자유의지의 발현은 본인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영이 부어질 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그런데 에스겔은 18장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겔 18:31)


이렇게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스스로 새롭게 하라’고 권하는 것은 이미 쌓인 조상의 죄 때문에 그들 스스로는 어떻게 하든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야 된다고 말한 것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의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원인을 조상의 원죄에서 찾든, 자범죄에서 찾든 공통점은 회복, 즉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즉 구약은 고통의 원인을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에스겔의 입장이 18장에서와 20장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입장은 누구의 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야 예언 본문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포로 생활 중 이스라엘이 받는 고통이 이방 민족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고통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마치 고통받는 의인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이방 땅에 흩뜨려지고 구속 역사에서 사라졌다. 반면에 남 유다는 죄를 짓는 가운데에도 신앙을 지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았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은 포로 생활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그렇게 이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유대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에스겔의 입장을 받아 들이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죄악에 대한 구약의 입장은 ‘판단 유보’라 볼 수 있다.

 

 

2. 죄악의 기원에 대한 창세기의 입장

 

창세기 1장과 2-3장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의견이 병치되고 있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은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있다고 보고 있다.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로 알려져 있지만 성서비평학에서는 1장(제사장 문서; P문서라 부른다)과 2-3장(여호와 문서; J 문서라 부른다)은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하여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체, 신학, 창조 기사의 서술이 다르기 때문이다. P문서에 따르면 악은 창조 이전이전부터 존재한 것처럼 보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1-2)


히브리 문법에서는 1절이 독립 문장이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처럼 2절에 대한 종속절로 해석될 수 있고, 흑암은 악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완벽한 것이었다. 창조 행위 여러 곳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언급이 있고, 7이라는 숫자를 이를 상징한다. 그러나 악의 선재설 주장은 창조자의 주권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J문서에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창조행위는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만족하지 않으신 것 같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8)

 

P문서에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된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창 1:27),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순차적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남자만 창조하시고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의 상징으로 뱀이 등장한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불완전한 창조를 하시고, 악까지 허락하셨는가? 이는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선하시지 않으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악을 ‘선의 결여’나 ‘위장된 선(진짜는 선이다)’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럴 경우 악은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문제점이 있다. 먼저 ‘선의 결여’의 입장에서 3장을 해석하면 선악과 사건은 타락과 죄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율법(선한 것)이 결여된(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과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위장된 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선악과는 인간의 성장을 위한 도구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고 성숙한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러면 뱀도 악의 화신이 아니라 인간의 성숙을 도와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선악과를 도덕적 판단능력과 관련된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 도덕적 판단능력은 왕의 특징이다.

 

P문서에는 인간은 처음부터 왕의 이미지(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로 만들어 진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J문서에서는 불순종으로 왕의 지위를 얻은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성경이 고대 근동신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을 왕적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선악과 금지 명령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도는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도 시험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순종)을 시험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순종했다. 불순종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정의에 반하는 명령에 대하여 반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아담과 이브에게 불순종으로 인하여 주어진 형벌도 따지고 보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닐 수 있다.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을,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주셨지만 이 두 가지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류 번성의 비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이 죄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것이다.

 

구약에는 악의 기원에 대한 상이한 입장이 존재한다. 구약은 어느 한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판단 유보’다.이러한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다양한 견해 성경 속에 나타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이 인생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악에 대한 판단보다는 악에 대한 대응이 구약의 초점이다. 악을 무엇으로 보느냐 에 따라 대응이 달라진다. 악을 주권적 역사로 본다면 악에 대하여 적극적이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그러나 악이 성장 도구라 본다면 고통에 대한 인내, 희생이 필요하다. 또 악이 선의 결여라고 한다면, 순종하는 삶을 살면 고통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이는 신앙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 싸울 때가 있는가 하면, 참을 때가 있고, 순종할 때가 있는 것이다.

 

3. 아담의 죄 전가 이론과 복음의 순전성

 

아담의 원죄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도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교리가 유효한 것인가? 아담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 구속이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고,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십자가의 구속적 효력의 논리적 귀결을 가져오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사실 바울은 유대교 교리에 밝은 유대인 출신으로서 당시 제2성전기 유대인의 성경해석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이 성경해석의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역사적, 문법적 의미보다는 현재 시점 적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사적, 문법적 의미와 현재적 적용의 의미가 서로 일치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만일 일치하지 않으면 현재적 적용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이는 쿰란 공동체의 성경 해석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쿰란 공동체의 성경 해석의 전통은 성경 본문보다는 본문 밖, 즉 성경을 생활에 적용하는 공동체에서 찾았는 것이다. 바울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성경 해석의 목적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지는 사죄의 효력을 밝히기 위한 것에 두었다. 바울은 이 목적을 위해 전통적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과 다른 방법을 적용했다.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죄의 기원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립된 출애굽 광야 시대에 두고 성경을 해석했지만, 이방 선교에 관심 있는 바울은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좀 더 넓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가져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복음의 목적을 달성하기 이하여 당시로서는 창조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유비(analogy)는 성령의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의 성서학자 피터 엔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주장했는데, 이는 성령이 주신 확신이었다.”

 

바울의 유비(아담의 원죄의 후손 전가 교리)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장로교 신조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는 구원의 칭의 개념 설명에 유효하다. 마치 하나님이 법정에서 재판장이 형벌을 사면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기 위해서는 아담의 원죄도 전가되어야 한다. 죄인이 형을 사면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사법적 판결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칭의 개념이 일반적 정의 개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아담의 죄가 내 죄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항의에 대하여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그러나 의의 전가에 대하여는 항의할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다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칭의보다 더 큰 개념이다. 전가(Imputation) 교리의 확립을 위해서 필요한 아담의 역사성에 대하여 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하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아담과 이브가 현생 인류의 조상인가? 인류가 최초 인류 아담 부부에서 비롯되지 않고 진화된 것이라면 죄의 전가 이론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담의 역사성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아담은 최초 인류의 그룹에서 하나님이 주권적인 섭리로 선택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에서도 ‘아담’이라는 명칭이 처음부터 고유명사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4:1까지 보면 ‘아담’ 그 사람’ ‘사람’ 등 여러 가지 표현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 ‘아담’이란 표현이 고유 명사로 확립된 것은 역대서와 누가복음의 족보 언급에서였다. 그런데 이 족보는 출생 기준을 작성된 것이 아니라 선택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다(택한 백성). 이처럼 아담의 대표성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된 것도 이스라엘 민족이 무슨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진화와 아담의 역사성도 함께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장로교 신조에는 ‘아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있는 소위 에큐메니칼 신조인 ‘사도신경’에는 ‘아담’에 대한 언급이 없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