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과신책] 학자의  읽기

 

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엔도 슈사쿠 | 침묵의 소리 | 김승철 역 | 동연 | 2016

 

김영웅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의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침묵 가운데서도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침묵’은 ‘침묵의 소리’로 다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침묵’을 오독했던 독자 중 하나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침묵’을 ‘침묵’으로만 읽었던 많은 독자들 덕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묵의 소리’는 ‘침묵’에 해제를 붙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침묵’에 대한 오독이 엔도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독 덕분에 우리들은 엔도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좀 더 친밀하고 좀 더 친절하게 말이다. 나도 그랬다. ‘침묵의 소리’를 읽으며 ‘침묵’ 너머에 있는 엔도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침묵'을 읽을 때에는 못 느꼈던 것들이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엔도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사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침묵’을 집필하게 되었던 이유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인생과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전해지지 않았던 (침묵했던) 엔도가 내겐 비로소 전해졌다 (소리로 들려졌다).

 

 

그는 토종 일본인이면서도 서양에서 전해져 온 기독교 (가톨릭)를 받아들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스스로도, ‘어릴 적부터의 기독교는 자신이 믿지도 않은 세계에 자신의 몸이 내던져진 사람이 겪는 이문화 체험’이라고 고백한다. 엔도에게 기독교는 그만큼 이질적인 문화였고, 그 속에서 그는 혼란스러웠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자인 김승철 교수 역시 서문에서, 엔도에게는 어릴 적 자신이 받았던 세례에서부터 ‘기독교가 일본에서 자란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 늘 그를 따라다니던 물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엔도는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일본인인 자신의 몸에 맞는 신앙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결심이 마침내 소설가 엔도를 탄생시켰다고 역자는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실로 소설 ‘침묵’은 엔도의 삶 전체가 녹아 있는 책인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로부터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히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판 경우에는 아예 누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배교한 기리시단들을 한데 모여 살게 했던 기리시단 주거지에서 20년에 걸쳐 간수로 일했던 어느 하급 무사가 남긴 일기 형식의 문서이다. 엔도는 이 실제 문서를 약 10분의 1 정도로 줄이면서 발췌해서 고쳐 쓰는 방식으로 ‘관리인의 일기’를 작성하였고, 이를 ‘침묵’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게 해두었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 번역판을 읽은 나에게 ‘침묵’의 마지막은, 끝내 배교한 로드리고 신부와 이미 배교했던 페레이라 신부를 향하여, 그리고 끊임없이 간교함과 성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던 기치지로를 향하여 결코 좋지 못한 시선을 줄 수밖에 없게 해 주었었다. 이는 반대급부로, 끝가지 후미에를 밟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낌없이 버린 순교자들을 향한 시선을, 마음 아프지만, 옹호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침묵이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마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도 나는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샌가 배신이냐 죽음이냐의 문제가 신앙을 버리느냐 지키느냐의 문제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자 김승철 교수가 직접 해제 및 번역과 주해를 한, 이 책에 수록된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를 읽고 난 후, 난 비로소 의문이 해소될 수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강한 자들의 입장이 옹호되는 반면,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으며 배교하여 목숨을 건진 약한 자들의 입장이 멸시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나는 비로소 해방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기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하고 다른 이들에게 포교 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간교함을 얼굴에 써놓은 듯한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예전과는 달리 로드리고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일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의 회복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침묵의 소리'의 도입부에서 엔도는 나가사키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 안에서 동판에 새겨진 후미에를 만나고 그 나무틀에 남아있던 수많은 검은 발자국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믿는 것을 발로 밟았을 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약자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침묵'의 주인공으로서 담대하게 순교한 강자가 아닌 끝내 배교한 약자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침묵의 소리' 책 안에는 엔도의 다른 단편 소설들이 몇 개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아버지의 종교, 어머니의 종교'에서는 엔도는 가쿠레 기리시단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들의 시작은 순교가 아닌 배교였다. 그들의 신앙은 승리자의 신앙이 아니라 실패자의 신앙이었다. 그들 신앙의 출발점은 자신들이 배교자, 약자라는 자각이었으며, 그 어두운 출발점이 그들의 신앙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신앙이, '어머니 되시는 분'이란 단편 소설에서 말하듯이, 오랜 시간을 비밀리에 거쳐 오면서 불교나 다른 종교, 심지어는 토속적인 미신까지 뒤섞여 있는 종교로 변질되었지만, 그들의 아픔과 회한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단번에 이교도나 이단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엔도가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침묵'을 썼다는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다. 때문에 '침묵'을 읽고 난 후 느꼈던 찝찝함은 말끔히 해소가 되었다. 예수의 예언대로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엔도의 표현대로라면, 가쿠레 기리시단의 조상들처럼 후미에를 밟았던 셈이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그 세 번의 부인함으로 인해 예수께 질책을 당하거나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을 체험한 지도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 페레이라나 로드리고, 그리고 간교한 기치지로라고 해서 그들의 배교 행위 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며 그 영향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았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엔도는 말한다. 자신 역시 페레이라이고 로드리고이며, 또 기치지로라고. 자신 속의 여러 인격을 각각 독립시켜 그것을 작중 인물로 그려나갔던 것이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의 차이로 인해 다행히(?) 나는 고문과 죽음이 문턱에 와 있는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을 뿐, 일상 속에서는 밥 먹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매일 배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이다. 가쿠레 기리시단은 일 년에 한 번씩 후미에를 밟는 행위를 지속해야 했지만, 그 행위 이외에는 비밀리에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머리와 입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말하고 가끔은 마음까지 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이 관성에 의해 나만의 가치관에 의해 나를 움직인다. 마치 기계 돌리듯 말이다.

 

물론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겠지만,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통해, 약자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신앙 지키기는 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단지 신은 침묵한다는 메시지나, 침묵 속에서도 말한다는 메시지를 넘어서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종합해 볼 때, 아니 내가 만난 엔도를 느껴볼 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나 늘 잊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스스로 곱씹게 만들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결국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 가운데 침묵하시든지 침묵하지 않으시든지,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게 된 것이다. 엔도를 통해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약한 페레이라, 로드리고, 기치지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순간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분이 침묵하시든 침묵으로 말씀하시든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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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무국 소식 201912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과신대 사무국도 한 해 동안 정신없이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2019년에는 5번의 콜로퀴움을 진행했고

유관 단체들과 함께 '과학신학 심포지엄'도 진행했습니다.

 

변함없이 지역마다 북클럽도 진행하고

무엇보다 과신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몇 가지 실험적인 방송도 시도했습니다. 

 

 

최경환 실장과 이승용 간사가 함께 진행했던

'과학과 신앙 사이' 과신사도 9개의 영상을 찍었습니다.

한 달에 한 권씩 책 소개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12월에는 과신대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인

온라인 <기초과정I>을 50% 할인된 금액으로

수강할 수 있는 이벤트도 진행했습니다. 

혹시 아직도 <기초과정I>을 안 들은 분이 계신가요?

이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꼭 신청해서 들어보세요~

 

 

과신대와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가 함께 준비했던

야! 나두~ 과학포럼 행사도 잘 마쳤습니다.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김남호, 권영준, 최승언, 이문원 교수님께서

각각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앞으로는 과신대의 과학 프로그램으로

신학대학교 투어를 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

 

 

지난 12월 5일(목) 저녁에는 과신대 회원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평일 저녁이라 많은 분들이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꼭 오셔야 할 분들이 오셔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해 동안 과신대를 위해 수고하시고

헌신해주신 분들을 축하하고 서로 격려하는 훈훈한 시간이었습니다. 

 

 

매월 모이는 과신대 교사팀도 2019년을 마무리하면서

우종학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올해는 청소년 교재 집필을 마무리하고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청소년 교육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매월 교사 모임도 본격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내년에는 정말 해야 할 일이 참 많네요.

네, 정말 과신대가 할 일이 많습니다. 

 

과신대는 회원 여러분의 참여와 후원으로 운영됩니다.

정회원으로 가입하셔서 한국교회를 향한

과신대의 사역에 힘을 보태주시기 바랍니다.

 

> 입회신청서 : goo.gl/YYP76E
> CMS 후원 신청서 : https://bit.ly/2VLxHa6

 

 

마지막으로 과신대를 위해 잠시 기도해주세요.

 

1.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 모든 생명이 함께 어울려 살도록 이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욕심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이 세계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제는 더 이상 자연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않도록 우리들을 다스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생명으로 풍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을 맘껏 누리게 하시옵소서.

 

2. 사랑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약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혐오를 잠재워주시고 사랑으로 연합하여 서로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3. 한국교회와 기독교를 위해 기도합니다. 생명을 경시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한 지식을 꾸짖어 주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무엇보다 과학과 학문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하게 하시어 모든 이들이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과신대에 이 일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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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글_ 김남호 (울산대학교 철학과)

 

 

과학과 철학은 더 만나야 한다. 카오스 재단이나 EBS 프로그램 '통찰'의 멋진 과학 강연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철학자들은 과학을 잘 모르고, 과학자들은 철학을 잘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논문을 쓰는 철학자들의 경우 필요하면 과학적 지식을 잘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세계 철학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철학자들은 과학자였다. 이는 과학도 하고 철학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최고 정점에서 과학이 답할 수 있는 문제 영역의 한계를 나름대로 인식했고, 그 한계 인식에서 철학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흄, 라이프니츠, 파스칼, 칸트, 현대의 심리철학 전문가 등이 그런 예이다.

 

데카르트가 실체로서의 영혼을 증명하려 한 철학자로 오늘날 웃음거리가 되고 있지만, 데카르트는 그 당시 최첨단 과학인 생리학의 최전방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알 수 있었고 영혼 개념을 도입해서 보다 합리적인 인간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영혼 개념은 형이상학 내에서 그 설득력을 잃었지만, 그의 시도는 철학과 과학의 건전한 관계 맺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과학자들의 강연을 보면 우선 많은 경우 인문학과 철학을 구분하지 못한다. 소위 인문학 강연을 하는 사람들조차 이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하므로 과학자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철학philosophy과 인문학humanitas은 그 뿌리가 애초부터 다르다. 철학은 플라톤을, 인문학은 이소크라테스를 뿌리로 둔다. 전자는 주장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로고스를 특징으로, 후자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교양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철학과 인문학은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철학은 행정상의 이유로 인문학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두 분야는 여전히 다르며, 엄연히 다른 두 분야가 혼동되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철학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고전 작품이나 영화 등을 감상하고 그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나누는 정도의 활동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지만 철학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오직 과학만이 진리를 탐구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이는 명백히 오해이며, 이 오해는 과학과 철학의 이분화를 낳는 폐해의 근원이다.

 

철학은 그 출발부터 지금까지 객관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활동이다. 신화에서 왜 철학이 갈라져 나올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라! 비록 물리학, 화학, 사회학 등이 철학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여전히 철학은 이 개별 과학들이 일차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자유의지', '인격', '인과성' 같은 개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과학은 윤리적인 문제들을 일차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예로 들면, 이는 형이상학의 대표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곧 과학이 전혀 기여할 수 없는 문제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양자역학이나 신경과학은 철학자에게 실재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제공해주며, 이를 무시하고는 경쟁력 있는 형이상학 이론이 될 수 없다(베르그송의 앨랑 비탈 개념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비결정성에 대해 물리학자가 설명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비결정성이 곧 의지의 자유를 보장해주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유에 대한 개념 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행위 주체의 통제력이 자유로운 행위의 전제 조건이라고 한다면, '행위 주체', '통제력' 등이 규정되어야 한다. 왜? 과학은 '행위 주체'를 그 탐구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관찰되지 않는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따라서 '행위주체'라는 개념은 허구이다."라는 주장을 물리학자가 한다고 해도 이 주장의 진위 여부는 실험이나 기존의 물리 법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추론되는 명제가 아니다. 즉, 이 명제는 형이상학적인 명제(선험 명제)이지 과학적 명제가 아닌 것이다.

 

 

철학의 분과인 형이상학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추구한다. 어떻게 보면 과학에게 철학은 아버지인 셈이다. 로고스 혁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싫든 좋든 아버지를 닮을 수 밖에 없다. 철학과 과학, 이 둘은 같은 주제에 대해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문제는 각자가 맡을 수 있는 문제의 영역이 무엇인가,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영역 배분의 문제일 것이다. 과학자들은 가령, 벤야민 리벳 실험 같은 경우, 실험을 하지만, 그 실험의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개념들을 규정해야 하며, 개념들을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근거 역시 필요하다. 이런 작업은 철학자들이 맡고 있다. 리벳 실험의 결과가 곧 "우리에게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결론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 결론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 '자유의지가 있다' 등과 같은 개념 및 표현에 대한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신경과학자 가자니가가 "윤리적인 뇌"에서 '자유의지'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이 철학자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언급하는 부분을 눈여겨보라.

 

과학적 지식을 우리가 습득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혹은 다루지 않아도 되는 문제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 개념 규정, 객관적 기준의 문제(가령, 과학과 비과학의 기준, 동일성의 기준 등), 윤리적 문제, 추론의 타당성 검토 등이 그 영역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윤리학자이자 정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이 책은 단순한 인문학 도서가 아니다. 비록 입문서의 성격이 있지만, 도덕적 옳고 그름의 객관적 기준을 탐구하는 철학 도서이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문학과 철학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이 우리 현실이다.

 

철학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재 바로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과학이 맡을 수 없는 문제 영역을 철학이 감당하는 것이 옳고, 철학의 문제 영역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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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승현준 | 커넥톰, 뇌의 지도 | 신상규 역 | 김영사

 

글_ 최성일 (과신대 정회원)

 

 

5년 전 인간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이후, 항상 뇌에 대한 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이 책이 첫 책이었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의 역사를 시간 순서로 잘 설명했고, 현재 뇌과학의 상황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큰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큰 그림은 희망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쉽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희망적인 것은 뇌의 신비를 좀 더 알 수 있게 되고, 정신질환의 근본적 치료법이 열릴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쉬움은 커넥토믹스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는 것이었고(21세기 말이 되어야 뇌의 지도, 즉 커넥톰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커넥톰의 작용 메커니즘을 밝히는 커넥토믹스의 완성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염려가 되는 것은 이 미래의 기술을 믿고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신체를 냉동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은 케빈 켈리의 “통제 불능”을 읽은 후에 가졌던 느낌과 같았습니다. 또한 필자가 이야기 하는 오늘날 컴퓨터의 엄청난 연산능력으로 완성될 커넥토믹스는 19세기의 라플라스의 악마를 연상시켰습니다. 전자현미경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뉴런의 연결 지도가 완성되고, 뉴런들이 각기 어떻게 연결되어 기억, 이해, 감정(사랑) 등등을 일으키는가 하는 알고리즘이 커넥토믹스에 의해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기억을 마음대로 업로드/다운로드할 수 있고, 또 조작도 할 수 있고, 기능을 향상 시킬 수도 있을까요? 과연 사람의 생각, 또는 의식, 또는 영혼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과연 한 사람의 과거의 생각, 현재의 생각, 미래의 생각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의식 또는 영혼이라는 것은 물질에 종속된 것인가요?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2007년 한 사람의 유전자 지도(genome)가 완성이 된 후, 유전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크리스퍼 가위가 발명되어 유전자 조작이 꽤 자유로워져서 유전자 수준에서 질병을 미리 예방하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일반인들인 우리는 이런 과학기술들만으로도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게놈은 커넥톰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머리 밖에도 우주가 있고, 인간의 머리 안에도 그에 못지않은 광대한 우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1입방밀리미터의 뇌 지도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이미지 정보의 양은 1페타바이트(1015 바이트)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커넥톰 수준은 길이가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의 커넥톰을 완성한 정도입니다. 이것만으로도 12년 이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쥐와 고양이, 침팬지를 거쳐 인간의 커넥톰을 완성하려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저자는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 21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인간 커넥톰이 완성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직경 30센티 안에 천억 개의 뉴런(신경세포)으로 되어 있다... 길이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은 300개의 뉴런으로 고작 7000개의 신경계 연결망을 가지지만, 그 지도를 그리는데 12년 이상 걸렸다. 당신의 커넥톰은 1000억 배 이상 크며, 당신 게놈의 염기 수(뉴클레오티드 수)보다 100만 배 정도 많은 연결을 가지고 있다. 커넥톰(뇌의 지도)에 비하면 게놈(유전자 지도)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1입방밀리미터에는 10억 개의 시냅스가 밀집돼있다."(커넥톰, 뇌의 지도, 승현준, 김영사, 12, 22, 95쪽)

 

저자는 인간의 유전자 지도와 뇌의 지도는 또한 가소성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비록 조작을 할 수는 있지만, 유전자는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고, 뇌의 지도는 성장하면서 뉴런과 뉴런의 연결이 경험과 학습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뇌의 가소성을 기반으로 저자는 커넥토믹스가 완성되면 인간의 사고, 감정, 기억 등등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뇌의 가소성의 4가지 형식인 재가중(reweighting), 재연결(reconnection), 재배선(rewiring), 재생성(regeneration)을 정신 활동에 관여하는 뉴런과 시냅스들의 움직임이라고 설명합니다. 일단 커넥톰이 완성되면 이 네 가지 R을 바탕으로 뉴런들 간의 연결인 커넥토믹스를 파악하여 정신활동을 더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책의 내용이 워낙 전문적이고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세세한 내용 정리는 제 입장에서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까지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자를 21세기의 기계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세 가지 비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저자가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진술이 추측과 기대를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한 인간 커넥톰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하지만, 미래 기술에 대한 추측과 기대라는 불안한 기초 위에 “인체냉동술”, “업로딩” 등에 의한 영원한 젊음, 영생을 얻어서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마치 인류가 당연히 걷게 될 방향으로 단정하는 것 같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좁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 저자는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또 다른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끝내고 있습니다. 그 외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문학의 대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이야기한 인간의 정신의 활동이 뉴런과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와 화학신호들의 상호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 의식의 문제를 추적했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사고 과정에 관여하는 이러한 물리적 메커니즘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의식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모듈 – 예를 들면 할머니 모듈 – 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모듈의 존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통찰이라도 제시할까? 아니면 의식의 본질에 관해서 우리를 여전히 깜깜이 상태로 놓아둘 것인가? 뇌가 뉴런과 신경교(膠)로 구성되었다는 지식이 의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GEB, 471쪽)

 

수학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무의미한 형식체계로부터 창발하는 인간 자의식을 이해하려고 했던 호프스태터의 관점에서 보자면, 저자는 너무 컴퓨터의 기계적 연산능력을 과신하는 것 같습니다.

 

파스칼을 상당히 좋아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파스칼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기보다는 일부만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이용하는 것 같아 섭섭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학의 천재였던 파스칼이지만,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느끼며 여생을 살았었을 텐데, 그런 것까지 뇌 속의 전기신호와 화학신호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끝으로, 이 책은 커넥토믹스의 미래를 너무 핑크 빛으로만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활동의 신비에 대해서 더 많이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커넥톰과 커넥토믹스라는 개념을 알기 전에도,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하고,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하고, 책을 읽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의 메커니즘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정확히 나타낼 수 없는 지금도 우리는 아주 멋지게 그런 정신활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커넥톰과 커넥토믹스가 빨리 발전해야겠지만, 커넥토믹스가 없더라도 정신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너무 미래에 치우쳐서 현재의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신경학자로서 자신이 아끼는 분야의 미래를 극한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고 또 그래야 이 분야가 주목을 받고 활성화될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저 자신은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즐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종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하신 일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몰라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신비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신비한 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뇌피셜적 독후감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