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음의 과학

  • 무신론자로 살기위해서는 상당한 신학적 지식이 있어야 가능한가봅니다.
    신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는 본능을 구별하고 그것을 억제하거나 인식하려고 한다니 영국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신학적 식견이 대체로 높은게 아닌가 보여질때도 있습니다.

    반기독교적인 사람으로 인해 오히려 기독교내의 부패가 보여지고 도려질 수 있다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서두였습니다!.

    한가지 의문점은 리처드 도킨스가 제시하는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신학에서 제시하는 자유의지라는 개념하고 상반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문명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아직 정립이 되지 않았습니다.

    증인 2020.01.09 00:00
    • 비꼼과 현학적 언어의 교란.

      궁금 합니다 2020.01.26 20:26 DEL
  • 1.고대인들에게 사실/역사/과학의 의미는 분명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만약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고대의 메시지를 사실/허구의 이분법으로 구분한다면 그 역시 시대착오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고대인은 사실,역사,과학을 인지하는데 어떻게 다른지요?

    그러므로 고대 메시지를 사실/허구로 구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맥락을 이해하란 의미로 들립니다만,

    도킨스가 주장하는 것은 고대의 메시지(추상적)를 사실/허구로 나누는 이분법이 아닌..
    고대의 사건을 사실과 허구로 구별한 것으로 이해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고대의 메시지와 고대사건의 사실관계는 정확히 다른 말입니다.

    역사를 인식하는 것도 사실을 근거로 이해 해야만 옳바른 인식이며 신뢰 할 만한 메세지를 얻는게 아닐까요?

    궁금 합니다 2020.01.25 10:16
  • 2.결국 무신론자도 결단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이 문구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궁금 합니다2 2020.01.25 10:19
  • 2. 결국 무신론자도 결단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무신론자의 신념과 결단은 팩트에 의한 신뢰를 의미하는데 종교인은 어떤 의미의 증명을 말하는 겁니까?

    이렇게 무신론자들의 글을 호도한다면 글쓴이의 8번째 글

    (만약 종교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다면, 어쩌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종교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신의 흔적이지 않을까? )

    위 님의 글을..
    유신론자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애처롭게 만들어 내려는 걸 증명한다고 한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궁금합니다 2 2020.01.25 12:24
  • 3. 이 판단의 근거가 인지부조화의 전형 같이 느껴집니다.
    객관적 사건을 다루지 않고 추상적 판단으로 넘아가는..
    특히 '부활'이란 사건입니까?
    아니면 비유 입니까?

    믿음이 신념이 된다..

    '믿음'이란 단어의 의미를 '인정'함이 아니라 '바램'의 의미로받아들인다면 증명할 필요도 없으며 신념이 되어서도 안되겠죠.

    궁금합니다 3 2020.01.25 12:29
  • 5. 종교의 해로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태도와 결정보다
    새로운 시대에는 합리적 공리성을 다루는 것이종교보다 인간에게 더 이로울 수 있지 않을까요?

    종교 지도자 분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정치적 판단까지도 하시겠지만..

    궁금합니다 5 2020.01.25 15:30
  • 6.물론 정확한 팩트 체크와 증거에 기반해서 신념 체계를 확립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신념이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팩트체크, 증거외에 구성되어지는 예는 직관의 정언명령에 따라 구성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인지요?
    그리고 증거주의 비판론과 성서의 사건 사실관계를 따져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인식 됩니다.

    궁금합니다 6 2020.01.25 15:43
  • 7.도킨스와 데닛은 과학은 전통적인 진리대응론에 상응하지만, 종교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킨스와 데닛은 지독한 근대적 합리주의 체계 속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현 세대들이 근대적 합리주의 체계의 사고를 갖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현대사회 아닌가요?

    궁금합니다 7 2020.01.25 16:01
  • 8.정부를 열렬히 비판하는 사람도 세금은 꼬박꼬박 내고...

    히친스 대담중에..
    잘못된 예시가 아닐까 합니다.

    비판은 하지만 우리가 정한 조세법을 지키는 것이 '인지 부조화'라니...

    그리고 종교란 진리인데 왜 종교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야 하는 건가요?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 아닌가요?

    글솜씨는 많은 교육에서 나올 수 있겠지만 글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흐트리는 방식은 옳은 글쓰기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글 쓰신 분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궁금합니다 8 2020.01.25 16:10

 

적을 통해 배우는 신앙

리처드 도킨스 외 | 신 없음의 과학 | 김영사 | 2019

 

글_ 최경환

 

 

이런 책을 읽을 때에는 마음을 열고 읽을 필요가 있다. 메롤드 웨스트팔이라는 기독교 철학자는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를 기독교를 위한 예언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기독교를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기독교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부패하고 썩은 것을 도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성서 안에도 예언자적 전통은 기존 야훼 신앙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무신론의 수호자 4명에게서 우리는 기독교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을 경청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네 명의 학자들은 자신의 책이 출간된 이후 다양한 토론과 논쟁의 자리에 참여했고, 그 이후 어느 정도 자신의 입장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결과물이다. 책 내용을 요약하기보다는 읽으면서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간단하게 소개하려 한다.  

 

  1. 의미가 중요하다는 변명

    저자들은 흔히 신학자들은 사실에 관심이 없고, 그 의미에 관심을 둔다고 말한다. 즉, 성서해석이나 교리를 해석할 때, 그들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그저 상징이나 의미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신학자들의 변명이다. 그러면서 일반 성도들에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믿으라고 강요한다.

    예를 들어, 연옥 교리를 말할 때, <가톨릭 백과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곧장 간다면 우리가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는 하늘나라로 곧장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연옥이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상으로 증명 끝” (46쪽)

    신학적 의미가 중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이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부활은 역사적/실증적/과학적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신학적 의미가 중요하다고 할 때, 그것은 기독교 교리나 진리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신학자들은 종종 기독교의 진리가 과학적 입증 방식에 따라 증명되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기독교는 원래 있지도 않은 사실 위에 온갖 화려한 건물은 지은 것인가? 

    하지만 일반적인 역사학에서도 근대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은 이미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고대인들에게 사실/역사/과학의 의미는 분명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만약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고대의 메시지를 사실/허구의 이분법으로 구분한다면 그 역시 시대착오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2. 무신론자도 믿음이 필요하다?

    도킨스는 무신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의 신념 역시 결단과 지적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창조주나 지적 설계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런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고 말한다. (57쪽)

    결국 무신론자도 결단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3. 신앙의 이중장부

    저자들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이중적으로 사고한다. 스스로 믿음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늘 기도한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행동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한다. 상당히 모순적이다.

    그러면서 믿음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활 사건이 대표적이다. 기독교인들은 부활이 완전히 객관적인 사실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믿음이고 신념이라고 말한다. 마치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4. 비겁한 신학자들

    “여기 있는 모든 분이 제리 폴웰 같은 쉬운 표적을 겨냥하고, 학식 높은 신학 교수들은 못 본 체한다는 비난을 받아왔어요. 다른 분들은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느끼는 점은 학식 높은 신학 교수들이 자기들끼리나 지식인에게 하는 말과 신도들에게 하는 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신도들에게는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106쪽)

    “네. 그런데 학식 있는 신학자들이 목사나 전도사에게 말하면, 목사들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겁니다.” (107쪽).

    이건 그냥 뼈 아프게 듣자!!

  5. 종교의 해로움

    네 명의 학자들이 동일하게 지적한 것은 “종교의 해로움”이다. 예를 들어, 점성술은 종교와 비슷하게 미신적 사고를 조장 하지만, 적어도 종교처럼 해롭지는 않기 때문에 폐기시킬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156쪽) 하지만 종교는 세속적 기준으로 봐도 해롭다.

    종교인들이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해롭지 않을 수도 있다. 신앙을 온전히 사적 영역에 가두고, 공적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세속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세상에 해로운 것이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인들을 그렇지 못하다. 자살 폭탄 테러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사회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는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만약 종교가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서 해롭지 않으면 되는 걸까? 반대로 종교가 세속적인 기준으로도 이롭고 유익하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종교가 해롭다는 이들의 주장은 그동안 종교가 공공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로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공공신학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공공선과 인간의 번영에 기여하는 종교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미로슬라브 볼프의 <인간의 번영>을 참고

    하지만 또 다시, 이들의 주장이 정확한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말 이들의 말처럼 종교는 인류 역사에서 해롭기만 했는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 역시 종교가 서구 역사에서 얼마나 잔인한 전쟁을 많이 일으켰으며 해로웠는지를 지적한다. 이에 대해 월터스토프는 과연 종교가 해롭기만 했냐고 반문한다. 30년 전쟁을 통해 관용과 배려의 정신을 서구 역사에 심어 놓은 것이 바로 기독교였고, 미국의 인권운동과 해방운동에도 기독교는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이(심지어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인민을 학살하고 폭력적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어쩌면 종교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거나 과도한 정치적 열망이 타자에게 강요될 때,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1990년 이후 비판이론가였던 하버마스가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세속 사회에 종교의 귀환을 요청한 이유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공론장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했던 하버마스는 왜 다시 종교를 소환한 것일까?

  6. 증거주의

    도킨스는 “자기가 어떤 것을 증거 없이 믿는다는 이유로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며 산다면 너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라고 말한다. (157쪽)

    증거주의(evidentialism)에 입각해서 지식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 같지만, 또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지식이 확보되지 않는다. 증거주의 인식론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비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개혁주의 인식론을 통해 증거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 나온 <그리스도인을 위한 서양 철학 이야기>를 참고하면 좋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대부분은 정확한 증거에 기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습관에 의해서, 누군가의 권위에 의해서, 혹은 막연히 ‘그냥’ 믿으며 살아간다. 물론 정확한 팩트 체크와 증거에 기반해서 신념 체계를 확립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신념이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7. 실용주의 진리관

    도킨스와 데닛은 모두 종교와 예술을 실용적인 가치 체계로 인정한다. 즉 그것이 실재 세계와 대응하는 진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관계나 어떤 기능을 수행하면 된다는 식이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환상적입니다.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이야기죠! 믿지 않아도 모든 대목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186쪽)

    이는 리처드 로티의 실용주의적 종교관과 유사해 보인다. 다만 로티와 다른 점은, 로티는 우리가 그동안 진리라고 여긴 모든 것들도 동일하게 실용적인 기능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과학이나 종교나 예술이나 모두 동일한 레벨이라고 말한다는 것이고, 도킨스와 데닛은 과학은 전통적인 진리대응론에 상응하지만, 종교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킨스와 데닛은 지독한 근대적 합리주의 체계 속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8. 결론

    궁극적으로 네 명의 학자가 종교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그것의 해악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똑 같이 나쁜 것이다. 종교의 해악성에 있어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사실의 차원에서는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정도의 차이는 없다. 모든 종교는 이성보다 믿음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성과 믿음이 늘 양립불가능한 것이지 물을 수 있다. 히친스도 인정하듯 모든 사람은 인지부조화 속에서 살아간다. 정부를 열렬히 비판하는 사람도 세금은 꼬박꼬박 내고, 자식은 공립학교에 보낸다. 말로는 자신이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따라 산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복잡하고 선명하지 못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헷갈려한다. 이것을 자아의 분열이라고 할 수도 있고, 복수적 자아라고 할 수도 있다. 이념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분열되고 다른 판단을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오랜 시간 인간은 신을 믿고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살아왔다. 어떤 철저한 근대인도 그 습속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우리의 몸속에는 종교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치 맹장을 떼낸 사람이라도 할지라도 그 상흔은 남아있는 것처럼. 서구 사회에서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근본주의 종교가 증가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저자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과학적 세계관이 증가하면 할수록 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자리를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게 자리를 지킬 것이다. 어떤 이는 종교가 최후의 발악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종교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다면, 어쩌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종교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신의 흔적이지 않을까?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부천/인천 북클럽] 공명: 창조, 섭리, 그리고 관계성

  • 과거 신학을 철학으로 하려던 토마스 아퀴나스 처럼 이제는 신학을 과학으로 하려는 시도들이 시도되고 있지는 않나 봅니다.

    증인 2020.01.08 23:38

 

모임 일시: 2019.12.9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박영식 교수 연구실
교재: 존 폴킹혼, <과학으로 신학하기> (모시는사람들)

 

 

2019년 마지막 모임을 박영식 교수님 연구실에서 가졌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존 폴킹혼의 <과학으로 신학하기>를 읽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서 다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5장부터 끝까지 읽고 이야기를 나누려 했는데, 실제로는 5장을 자세히 다루고 나머지는 간단하게 언급만 했습니다. 책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고 기억을 더듬어 토론 내용을 정리해봅니다. 

 

1. 폴킹혼의 과학과 신학의 역할, 목적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과학의 관심사는 과정에 있고, 신학의 관심사는 목적과 의미에 있다"(161쪽)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학과 신학은 상호 공명할 수 있고, 경쟁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와 '왜'는 별개의 대답들이지만, 이들이 답을 내는 형식들은 양립하면서 서로 맞아떨어져야 한다." (161쪽)

 

2. 창조론은 시간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기원을 밝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법칙과 규칙 그리고 이론이 가능하게 하는 창조자입니다. 양자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의 법칙을 만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 우주에 'Made in God'이라는 도장이 찍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우주를 관찰하고 연구해서 신의 흔적을 밝히려는 시도가 있다면 그것은 "과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하는 것"입니다.(164쪽) 

 

그러고 보면 신학은 과거에 학문의 여왕으로 자리매김을 했지만 이제는 과학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거 같습니다. 신학은 과학의 결과를 수용하면서 그 내용을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현실이 씁쓸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려는 과학이야말로 과거 신학의 역할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3. 폴킹혼은 많은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이야기하는 '인류학적 원리'를 통해 충분히 신학적인 설명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인류학적 원리를 통해 다중우주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폴킹혼이 보기에 이는 너무 과도한 존재론적 낭비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런 과학적 사변은 오히려 과학정신과 상반된다고 말합니다.(172쪽)

 

 

4. 과학에서 말하는 '우연과 필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폴킹혼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은 신의 섭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유전적 돌연변이가 없다면, 새로운 종들의 출현은 불가능할 것"이고,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실제 비율이 자연선택을 통해서 걸러지고 유지됨으로써 흥미로우리만치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들이 전개"된다고 합니다.(174쪽)

 

창조자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개입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서 피코크가 말한 것처럼 "창조의 역사는 영원 속에 미리 그려진 고정된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과 창조자 모두가 참여하여 조금씩 만들어가는 즉흥곡으로 봐야 한다."(175쪽)

 

그렇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뿐만 아니라 '연속 창조' 혹은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역시 같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발전에 반드시 신의 개입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발전은 "창조자가 창조에 부여하여 내재된 풍부한 결실성을 표출한 새로운 양태들로 이해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176쪽) 이미 완벽하게 만들어진 세계보다 진화하고 있는 세계가 더 멋진 세계일 수 있습니다. 

 

5.  진화론을 통해 창조를 이해하면 신정론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은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피조물의 세계가 지불해야 할 필연적 비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177쪽) 죽음과 탄생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라는 어쩌면 위험한 선물을 통해서 구현되듯이, 이 자연 세계 역시 고통과 기형이라는 피할 수 없는 대가를 통해 더 좋은 세계를 형성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free will defence는  free process defence와 함께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때 그동안에는 흔히 자연현상이라든가 법칙을 거스리는 방식으로 이해해왔는데, 오히려 자연을 완성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열린 성격을 갖도록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이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일단 "자연의 제정자인 신은 틀림없이 자연 과정의 개방적인 기질 안에서 일하시지 그 기질에 반해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184쪽) 초대교회의 교회 오리겐은 "더운 여름에 시원한 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습니다.(185쪽)

 

7. 양자이론이 가져온 새로운 세계 이해는 신학에도 여러 가지 통찰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양자이론은 "원자속 세계에 깊이 들어앉아 있는 관계성의 존재를 입증했다"라고 합니다.(188쪽) 이는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귐으로서의 존재'(being as communion)라는 진리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고 합니다. 사랑의 상호 소통이라 불리는 페리코레시스의 핵심은 상호적 관계성이기 때문입니다. 폴킹혼은 "물리 세계에 대한 과학의 묘사는 이 세계가 삼위일체 신의 창조물이라는 믿음과 눈에 띄게 공명한다"라고 말합니다.(190쪽)

 

8. 폴킹혼의 책을 읽으며 그동안 과신대에서 들었던 내용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다시 한번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되어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좋은 번역으로 새롭게 재탄생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View vol.31 (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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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



과신대의 소식을 전하는

과신대 VIEW - 31호

과신대 칼럼

 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김남호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과학과 철학은 더 만나야 한다. 카오스 재단이나 EBS 프로그램 '통찰'의 멋진 과학 강연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철학자들은 과학을 잘 모르고, 과학자들은 철학을 잘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논문을 쓰는 철학자들의 경우 필요하면 과학적 지식을 잘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세계 철학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철학자들은 과학자였다. 이는 과학도 하고 철학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최고 정점에서 과학이 답할 수 있는 문제 영역의 한계를 나름대로 인식했고, 그 한계 인식에서 철학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흄, 라이프니츠, 파스칼, 칸트, 현대의 심리철학 전문가 등이 그런 예이다. (더보기)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이불에 들어가서 잠시 있다 보면 점점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불 자체가 따뜻해서가 아니라 (이불 자체가 처음부터 온도가 높았던 것이 아니라) 이불을 덮고 있는 우리의 체온이 이불 안에 갇혀있는 공기를 데우는 것입니다. 이불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더 따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실가스도 이불의 원리와 같습니다. 대류권에서 만들어지는 적외선이 곧장 우주로 나간다면 온실효과가 없겠지만, 나가던 적외선이 온실가스와 반응하여 일부가 우주로 가지 못하고 대류권을 데우는 효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보기)

특집 기획
- 기후변화 제국의 프로테스탄트 -


 2. "이산화탄소" 
 도대체 누구냐, 넌?

김진수 박사
에딘버러대학교 지구과학부
박사후연구원

소소한 사무국 소식을
정회원 여러분에게 전달해 드립니다.


 과신대 사무국 이야기 

과신대 사무국에선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지난 달 과신대 사무국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페이스북이나 YouTube에 뭔가 올라오긴 하던데 그게 뭔지 궁금하다면?
사무국 직원들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면?
사무국의 소소한 소식들을 모아 정회원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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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람들]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로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오늘은 신도중앙교회 정삼희 목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인터뷰: 최경환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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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우종학 교수님이 답해주는 과학과 신학에 관한 궁금증 [과신Q]
교회에서 혹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과신Q]를 주목해 주세요.


(7)
인류원리: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무의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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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ing Soon]

Coming Soon!
[18회 콜로퀴움] 창조설을 넘어 창조론으로

* 날짜: 2019.12.23 (월) 오후 7:30-9:30
*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학 시대를 맞이해 자신의 신앙이 무너질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창조에 대한 다양한 입장 중에서 어느 것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부합하는 것일까?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최근 『창조론: 과학 시대 창조 신앙』(새물결플러스, 2019)을 출간한 김정형 교수님을 모시고 다양한 창조설을 넘어 성서의 본래적 메시지와 기독교 전통에 충실한 ‘창조론’을 소개받습니다. 

* 수강신청하러 가기

12월의 선물!
<기초과정 I>온라인 특별할인!


과신대의 핵심 프로그램인 <기초과정I>을 12월 한 달간 50%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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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개설!
과신대 x 그노비(Gnowbe) - <기초과정 I>온라인


과신대의 교육과정이 Gnowbe 글로벌 마이크로러닝 플랫폼을 통해 어디에서든 더 쉽게 만나고 더 재미있게 학습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온라인 기초과정은 Gnowbe(그노비)를 통해 언제든 과신대 홈페이지를 통해 수강 신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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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읽기]

김영웅 박사님의 서평을 연재합니다.
과학자가 읽은 신학책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침묵의 역설: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침묵의 소리 | 엔도 슈사쿠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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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로서,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현대과학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할까요?
번역: 김영웅 / 감수: 최승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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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이야기 - Story]
[17회 콜로퀴움 후기] 바울의 아담 해석, 어떻게 해야 할까?

'바울의 아담 해석'이라는 주제는 신약학, 그중에서도 바울신학에서는 그리 주목을 받은 주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주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고, 권연경 교수님 역시 이 주제를 피해 갈 수 없었다고 하네요. 1시간이 넘게 열강을 해주신 권연경 교수님의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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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과신대 회원의 밤] 

2019년 12월 5일 목요일 저녁.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에 있는 과신대 사무실에서 "2019 회원의 밤"이 열렸습니다. 벌써 3년째 과신대와 동행해주시는 회원에서부터 이제 갓 과신대의 일원이 되신 분들까지! 연말에 함께 모여 뜻깊은 마무리를 할 수 있어 참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2020년에도 과신대는 힘차게 달려가겠습니다! 회원 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을 기다립니다 :-) 

[과신대 Book Story - 신간 & 서평 소개]
[서평] 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글: 최성일, 과신대 정회원)

2007년 한 사람의 유전자 지도(genome)가 완성이 된 후, 유전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크리스퍼 가위가 발명되어 유전자 조작이 꽤 자유로워져서 유전자 수준에서 질병을 미리 예방하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일반인들인 우리는 이런 과학기술들만으로도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게놈은 커넥톰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머리 밖에도 우주가 있고, 인간의 머리 안에도 그에 못지않은 광대한 우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북클럽 소식 - Book Club]



과신대와 뜻을 함께 할 협력교회를 모집합니다. 

과신대는 과학주의 무신론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복음의 변증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위해 건강한 창조신학을 교육하고 연구합니다. 

과신대의 비전과 사역을 지지한다면 과신대와 함께하는 교회로 동참해 주세요. 

과신대는 앞으로도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기독교 교육 컨텐츠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보급하기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지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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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비전>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일반계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 잡힌 대화를 목표로 2가지 비전을 갖습니다.        

1
-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의 결과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내용을
함께 읽어가며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연구합니다.
이를 위해 과학 및 일반학문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2
-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바르게 배우도록 한국교회에 균형 있는
교육을 제공하며 이를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합니다.

<자문위원>

  강상훈 교수 | 베일러대학교 생물학
  권영준 교수 | 연세대학교 물리학
  김근주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김기석 교수 | 성공회대학교 총장
  김기현 목사 | 로고스서원 대표
  김요한 목사 | 새물결플러스 대표
  김익환 교수 |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김정형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근한 교수 | 유타대학교 기계공학부
  박영식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일준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박치욱 교수 | 퍼듀대학교 약학대학
  박화경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박희주 교수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신은철 교수 | 카이스트 경영공학부
  신희성 교수 | 인하대학교 수학과
  윤철호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이길연 교수 | 경희대학교 의대, 외과과장
  이문원 교수 | 강원대학교 과학교육학부 명예교수
  이상희 교수 | 캘리포니아대학교 인류학과
  이정모 관장 | 서울시립과학관
  이택환 목사 | 그소망교회
  임범진 교수 | 연세대학교 의대, 병리학교실
  장왕식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정대권 교수 | 항공대학교 항공전자정보공학
  정삼희 목사 | 신도중앙교회
  정  준  목사 | 더처치
  조성호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차정호 교수 | 대구대학교 화학교육
  최승언 교수 |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
  팽동국 교수 | 제주대 해양시스템공학
  허  균 교수 | 아주대 의과대학 신경과
  현요한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운영위원>

  우종학 | 대표

  장현일 | 총무이사
  정대경 | 연구팀장
  윤세진 | 교육팀장
  백우인 | 출판팀장
  강사은 | 북클럽팀장
 

  구형규 | 감사
  김성래 | 감사

  최경환 | 기획실장
  이진호 | 행정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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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겨울 수련회 과학 특강 강사 지원

  • 초등4~6학년생에게도 적당한 강의인가요? 문의드려요

    사이다 2019.12.10 23:09
    • 안녕하세요. 과신대 사무국입니다. 만약 초등학교 겨울성경학교 특강을 원하시면 초등부 교사를 소개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연락주세요~^^

 

겨울 수련회 특강 때문에 고민이신가요? 

학생들에게 과학과 신학을 조화롭게 가르쳐 주실 신뢰할만한 강사를 구하고 계신가요?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과 교회에서 가르치는 창조가 서로 달라 고민하고 계신가요?

 

현직 과학 선생님들로 구성된 과신대 교사팀에서 과학 특강을 해드립니다. 

겨울 수련회 기간 중 학생들에게 과학과 신앙을 함께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오랜 시간 숙련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신앙의 눈으로 과학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아래 신청서를 작성해 주시면 과신대 사무국에서 과신대 교사팀 강사를 파견해드립니다.

 

※ 겨울수련회 특강 신청: https://bit.ly/38nlfnU

 

◎ 특강 내용: 우주의 탄생과 하나님의 창조, 과학과 신학의 관계, 과학주의 무신론에 대한 대응

◎ 프로그램: 과신대 강사가 1시간 정도 특강을 하고, 학생들과 30분 정도 대화하는 시간으로 구성

◎ 강사비: 20만원 (강사비는 교회 형편에 따라 조율 가능, 과신대 협력 교회는 10만원)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년 과신대 기자단을 모집합니다

 

2020년에 과신대 기자단으로 활동하실 기자를 모집합니다. 

과신대 기자단은 아래와 같은 활동을 하게 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기자단 신청: https://forms.gle/Ey35caVWo7wdhGLi8

◈ 기자단 활동 기간: 2020.1.1~2020.12.31
모집 대상 : 과신대 사역을 깊이 공감하고 지지하는 분
모집 인원: 2~3명
활동 내용: 매월 한 개의 글을 과신대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인터뷰, 서평, 행사 후기, 기획 기사 등)

모집 마감 : 2019. 12. 29(일)
발표 : 2019. 12. 31(화) 개별 통보


혜택: 과신대 모든 행사 무료 참석, 두 달에 한 번씩 3만원 상당의 문화상품권 지급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과신책] 학자의  읽기

 

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엔도 슈사쿠 | 침묵의 소리 | 김승철 역 | 동연 | 2016

 

김영웅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의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침묵 가운데서도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침묵’은 ‘침묵의 소리’로 다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침묵’을 오독했던 독자 중 하나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침묵’을 ‘침묵’으로만 읽었던 많은 독자들 덕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묵의 소리’는 ‘침묵’에 해제를 붙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침묵’에 대한 오독이 엔도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독 덕분에 우리들은 엔도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좀 더 친밀하고 좀 더 친절하게 말이다. 나도 그랬다. ‘침묵의 소리’를 읽으며 ‘침묵’ 너머에 있는 엔도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침묵'을 읽을 때에는 못 느꼈던 것들이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엔도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사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침묵’을 집필하게 되었던 이유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인생과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전해지지 않았던 (침묵했던) 엔도가 내겐 비로소 전해졌다 (소리로 들려졌다).

 

 

그는 토종 일본인이면서도 서양에서 전해져 온 기독교 (가톨릭)를 받아들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스스로도, ‘어릴 적부터의 기독교는 자신이 믿지도 않은 세계에 자신의 몸이 내던져진 사람이 겪는 이문화 체험’이라고 고백한다. 엔도에게 기독교는 그만큼 이질적인 문화였고, 그 속에서 그는 혼란스러웠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자인 김승철 교수 역시 서문에서, 엔도에게는 어릴 적 자신이 받았던 세례에서부터 ‘기독교가 일본에서 자란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 늘 그를 따라다니던 물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엔도는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일본인인 자신의 몸에 맞는 신앙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결심이 마침내 소설가 엔도를 탄생시켰다고 역자는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실로 소설 ‘침묵’은 엔도의 삶 전체가 녹아 있는 책인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로부터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히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판 경우에는 아예 누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배교한 기리시단들을 한데 모여 살게 했던 기리시단 주거지에서 20년에 걸쳐 간수로 일했던 어느 하급 무사가 남긴 일기 형식의 문서이다. 엔도는 이 실제 문서를 약 10분의 1 정도로 줄이면서 발췌해서 고쳐 쓰는 방식으로 ‘관리인의 일기’를 작성하였고, 이를 ‘침묵’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게 해두었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 번역판을 읽은 나에게 ‘침묵’의 마지막은, 끝내 배교한 로드리고 신부와 이미 배교했던 페레이라 신부를 향하여, 그리고 끊임없이 간교함과 성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던 기치지로를 향하여 결코 좋지 못한 시선을 줄 수밖에 없게 해 주었었다. 이는 반대급부로, 끝가지 후미에를 밟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낌없이 버린 순교자들을 향한 시선을, 마음 아프지만, 옹호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침묵이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마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도 나는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샌가 배신이냐 죽음이냐의 문제가 신앙을 버리느냐 지키느냐의 문제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자 김승철 교수가 직접 해제 및 번역과 주해를 한, 이 책에 수록된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를 읽고 난 후, 난 비로소 의문이 해소될 수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강한 자들의 입장이 옹호되는 반면,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으며 배교하여 목숨을 건진 약한 자들의 입장이 멸시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나는 비로소 해방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기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하고 다른 이들에게 포교 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간교함을 얼굴에 써놓은 듯한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예전과는 달리 로드리고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일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의 회복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침묵의 소리'의 도입부에서 엔도는 나가사키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 안에서 동판에 새겨진 후미에를 만나고 그 나무틀에 남아있던 수많은 검은 발자국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믿는 것을 발로 밟았을 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약자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침묵'의 주인공으로서 담대하게 순교한 강자가 아닌 끝내 배교한 약자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침묵의 소리' 책 안에는 엔도의 다른 단편 소설들이 몇 개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아버지의 종교, 어머니의 종교'에서는 엔도는 가쿠레 기리시단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들의 시작은 순교가 아닌 배교였다. 그들의 신앙은 승리자의 신앙이 아니라 실패자의 신앙이었다. 그들 신앙의 출발점은 자신들이 배교자, 약자라는 자각이었으며, 그 어두운 출발점이 그들의 신앙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신앙이, '어머니 되시는 분'이란 단편 소설에서 말하듯이, 오랜 시간을 비밀리에 거쳐 오면서 불교나 다른 종교, 심지어는 토속적인 미신까지 뒤섞여 있는 종교로 변질되었지만, 그들의 아픔과 회한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단번에 이교도나 이단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엔도가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침묵'을 썼다는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다. 때문에 '침묵'을 읽고 난 후 느꼈던 찝찝함은 말끔히 해소가 되었다. 예수의 예언대로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엔도의 표현대로라면, 가쿠레 기리시단의 조상들처럼 후미에를 밟았던 셈이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그 세 번의 부인함으로 인해 예수께 질책을 당하거나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을 체험한 지도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 페레이라나 로드리고, 그리고 간교한 기치지로라고 해서 그들의 배교 행위 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며 그 영향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았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엔도는 말한다. 자신 역시 페레이라이고 로드리고이며, 또 기치지로라고. 자신 속의 여러 인격을 각각 독립시켜 그것을 작중 인물로 그려나갔던 것이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의 차이로 인해 다행히(?) 나는 고문과 죽음이 문턱에 와 있는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을 뿐, 일상 속에서는 밥 먹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매일 배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이다. 가쿠레 기리시단은 일 년에 한 번씩 후미에를 밟는 행위를 지속해야 했지만, 그 행위 이외에는 비밀리에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머리와 입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말하고 가끔은 마음까지 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이 관성에 의해 나만의 가치관에 의해 나를 움직인다. 마치 기계 돌리듯 말이다.

 

물론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겠지만,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통해, 약자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신앙 지키기는 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단지 신은 침묵한다는 메시지나, 침묵 속에서도 말한다는 메시지를 넘어서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종합해 볼 때, 아니 내가 만난 엔도를 느껴볼 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나 늘 잊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스스로 곱씹게 만들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결국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 가운데 침묵하시든지 침묵하지 않으시든지,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게 된 것이다. 엔도를 통해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약한 페레이라, 로드리고, 기치지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순간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분이 침묵하시든 침묵으로 말씀하시든 상관없이 말이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사무국 소식 201912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과신대 사무국도 한 해 동안 정신없이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2019년에는 5번의 콜로퀴움을 진행했고

유관 단체들과 함께 '과학신학 심포지엄'도 진행했습니다.

 

변함없이 지역마다 북클럽도 진행하고

무엇보다 과신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몇 가지 실험적인 방송도 시도했습니다. 

 

 

최경환 실장과 이승용 간사가 함께 진행했던

'과학과 신앙 사이' 과신사도 9개의 영상을 찍었습니다.

한 달에 한 권씩 책 소개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12월에는 과신대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인

온라인 <기초과정I>을 50% 할인된 금액으로

수강할 수 있는 이벤트도 진행했습니다. 

혹시 아직도 <기초과정I>을 안 들은 분이 계신가요?

이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꼭 신청해서 들어보세요~

 

안내:https://www.scitheo.org/455

 

 

과신대와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가 함께 준비했던

야! 나두~ 과학포럼 행사도 잘 마쳤습니다.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김남호, 권영준, 최승언, 이문원 교수님께서

각각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앞으로는 과신대의 과학 프로그램으로

신학대학교 투어를 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

 

 

지난 12월 5일(목) 저녁에는 과신대 회원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평일 저녁이라 많은 분들이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꼭 오셔야 할 분들이 오셔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해 동안 과신대를 위해 수고하시고

헌신해주신 분들을 축하하고 서로 격려하는 훈훈한 시간이었습니다. 

 

 

매월 모이는 과신대 교사팀도 2019년을 마무리하면서

우종학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올해는 청소년 교재 집필을 마무리하고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청소년 교육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매월 교사 모임도 본격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내년에는 정말 해야 할 일이 참 많네요.

네, 정말 과신대가 할 일이 많습니다. 

 

과신대는 회원 여러분의 참여와 후원으로 운영됩니다.

정회원으로 가입하셔서 한국교회를 향한

과신대의 사역에 힘을 보태주시기 바랍니다.

 

> 입회신청서 : goo.gl/YYP76E
> CMS 후원 신청서 : https://bit.ly/2VLxHa6

 

 

마지막으로 과신대를 위해 잠시 기도해주세요.

 

1.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 모든 생명이 함께 어울려 살도록 이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욕심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이 세계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제는 더 이상 자연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않도록 우리들을 다스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생명으로 풍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을 맘껏 누리게 하시옵소서.

 

2. 사랑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약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혐오를 잠재워주시고 사랑으로 연합하여 서로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3. 한국교회와 기독교를 위해 기도합니다. 생명을 경시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한 지식을 꾸짖어 주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무엇보다 과학과 학문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하게 하시어 모든 이들이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과신대에 이 일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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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글_ 김남호 (울산대학교 철학과)

 

 

과학과 철학은 더 만나야 한다. 카오스 재단이나 EBS 프로그램 '통찰'의 멋진 과학 강연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철학자들은 과학을 잘 모르고, 과학자들은 철학을 잘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논문을 쓰는 철학자들의 경우 필요하면 과학적 지식을 잘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세계 철학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철학자들은 과학자였다. 이는 과학도 하고 철학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최고 정점에서 과학이 답할 수 있는 문제 영역의 한계를 나름대로 인식했고, 그 한계 인식에서 철학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흄, 라이프니츠, 파스칼, 칸트, 현대의 심리철학 전문가 등이 그런 예이다.

 

데카르트가 실체로서의 영혼을 증명하려 한 철학자로 오늘날 웃음거리가 되고 있지만, 데카르트는 그 당시 최첨단 과학인 생리학의 최전방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알 수 있었고 영혼 개념을 도입해서 보다 합리적인 인간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영혼 개념은 형이상학 내에서 그 설득력을 잃었지만, 그의 시도는 철학과 과학의 건전한 관계 맺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과학자들의 강연을 보면 우선 많은 경우 인문학과 철학을 구분하지 못한다. 소위 인문학 강연을 하는 사람들조차 이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하므로 과학자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철학philosophy과 인문학humanitas은 그 뿌리가 애초부터 다르다. 철학은 플라톤을, 인문학은 이소크라테스를 뿌리로 둔다. 전자는 주장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로고스를 특징으로, 후자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교양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철학과 인문학은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철학은 행정상의 이유로 인문학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두 분야는 여전히 다르며, 엄연히 다른 두 분야가 혼동되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철학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고전 작품이나 영화 등을 감상하고 그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나누는 정도의 활동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지만 철학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오직 과학만이 진리를 탐구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이는 명백히 오해이며, 이 오해는 과학과 철학의 이분화를 낳는 폐해의 근원이다.

 

철학은 그 출발부터 지금까지 객관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활동이다. 신화에서 왜 철학이 갈라져 나올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라! 비록 물리학, 화학, 사회학 등이 철학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여전히 철학은 이 개별 과학들이 일차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자유의지', '인격', '인과성' 같은 개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과학은 윤리적인 문제들을 일차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예로 들면, 이는 형이상학의 대표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곧 과학이 전혀 기여할 수 없는 문제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양자역학이나 신경과학은 철학자에게 실재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제공해주며, 이를 무시하고는 경쟁력 있는 형이상학 이론이 될 수 없다(베르그송의 앨랑 비탈 개념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비결정성에 대해 물리학자가 설명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비결정성이 곧 의지의 자유를 보장해주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유에 대한 개념 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행위 주체의 통제력이 자유로운 행위의 전제 조건이라고 한다면, '행위 주체', '통제력' 등이 규정되어야 한다. 왜? 과학은 '행위 주체'를 그 탐구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관찰되지 않는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따라서 '행위주체'라는 개념은 허구이다."라는 주장을 물리학자가 한다고 해도 이 주장의 진위 여부는 실험이나 기존의 물리 법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추론되는 명제가 아니다. 즉, 이 명제는 형이상학적인 명제(선험 명제)이지 과학적 명제가 아닌 것이다.

 

 

철학의 분과인 형이상학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추구한다. 어떻게 보면 과학에게 철학은 아버지인 셈이다. 로고스 혁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싫든 좋든 아버지를 닮을 수 밖에 없다. 철학과 과학, 이 둘은 같은 주제에 대해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문제는 각자가 맡을 수 있는 문제의 영역이 무엇인가,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영역 배분의 문제일 것이다. 과학자들은 가령, 벤야민 리벳 실험 같은 경우, 실험을 하지만, 그 실험의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개념들을 규정해야 하며, 개념들을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근거 역시 필요하다. 이런 작업은 철학자들이 맡고 있다. 리벳 실험의 결과가 곧 "우리에게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결론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 결론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 '자유의지가 있다' 등과 같은 개념 및 표현에 대한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신경과학자 가자니가가 "윤리적인 뇌"에서 '자유의지'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이 철학자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언급하는 부분을 눈여겨보라.

 

과학적 지식을 우리가 습득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혹은 다루지 않아도 되는 문제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 개념 규정, 객관적 기준의 문제(가령, 과학과 비과학의 기준, 동일성의 기준 등), 윤리적 문제, 추론의 타당성 검토 등이 그 영역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윤리학자이자 정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이 책은 단순한 인문학 도서가 아니다. 비록 입문서의 성격이 있지만, 도덕적 옳고 그름의 객관적 기준을 탐구하는 철학 도서이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문학과 철학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이 우리 현실이다.

 

철학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재 바로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과학이 맡을 수 없는 문제 영역을 철학이 감당하는 것이 옳고, 철학의 문제 영역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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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승현준 | 커넥톰, 뇌의 지도 | 신상규 역 | 김영사

 

글_ 최성일 (과신대 정회원)

 

 

5년 전 인간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이후, 항상 뇌에 대한 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이 책이 첫 책이었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의 역사를 시간 순서로 잘 설명했고, 현재 뇌과학의 상황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큰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큰 그림은 희망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쉽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희망적인 것은 뇌의 신비를 좀 더 알 수 있게 되고, 정신질환의 근본적 치료법이 열릴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쉬움은 커넥토믹스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는 것이었고(21세기 말이 되어야 뇌의 지도, 즉 커넥톰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커넥톰의 작용 메커니즘을 밝히는 커넥토믹스의 완성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염려가 되는 것은 이 미래의 기술을 믿고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신체를 냉동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은 케빈 켈리의 “통제 불능”을 읽은 후에 가졌던 느낌과 같았습니다. 또한 필자가 이야기 하는 오늘날 컴퓨터의 엄청난 연산능력으로 완성될 커넥토믹스는 19세기의 라플라스의 악마를 연상시켰습니다. 전자현미경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뉴런의 연결 지도가 완성되고, 뉴런들이 각기 어떻게 연결되어 기억, 이해, 감정(사랑) 등등을 일으키는가 하는 알고리즘이 커넥토믹스에 의해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기억을 마음대로 업로드/다운로드할 수 있고, 또 조작도 할 수 있고, 기능을 향상 시킬 수도 있을까요? 과연 사람의 생각, 또는 의식, 또는 영혼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과연 한 사람의 과거의 생각, 현재의 생각, 미래의 생각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의식 또는 영혼이라는 것은 물질에 종속된 것인가요?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2007년 한 사람의 유전자 지도(genome)가 완성이 된 후, 유전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크리스퍼 가위가 발명되어 유전자 조작이 꽤 자유로워져서 유전자 수준에서 질병을 미리 예방하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일반인들인 우리는 이런 과학기술들만으로도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게놈은 커넥톰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머리 밖에도 우주가 있고, 인간의 머리 안에도 그에 못지않은 광대한 우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1입방밀리미터의 뇌 지도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이미지 정보의 양은 1페타바이트(1015 바이트)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커넥톰 수준은 길이가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의 커넥톰을 완성한 정도입니다. 이것만으로도 12년 이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쥐와 고양이, 침팬지를 거쳐 인간의 커넥톰을 완성하려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저자는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 21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인간 커넥톰이 완성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직경 30센티 안에 천억 개의 뉴런(신경세포)으로 되어 있다... 길이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은 300개의 뉴런으로 고작 7000개의 신경계 연결망을 가지지만, 그 지도를 그리는데 12년 이상 걸렸다. 당신의 커넥톰은 1000억 배 이상 크며, 당신 게놈의 염기 수(뉴클레오티드 수)보다 100만 배 정도 많은 연결을 가지고 있다. 커넥톰(뇌의 지도)에 비하면 게놈(유전자 지도)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1입방밀리미터에는 10억 개의 시냅스가 밀집돼있다."(커넥톰, 뇌의 지도, 승현준, 김영사, 12, 22, 95쪽)

 

저자는 인간의 유전자 지도와 뇌의 지도는 또한 가소성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비록 조작을 할 수는 있지만, 유전자는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고, 뇌의 지도는 성장하면서 뉴런과 뉴런의 연결이 경험과 학습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뇌의 가소성을 기반으로 저자는 커넥토믹스가 완성되면 인간의 사고, 감정, 기억 등등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뇌의 가소성의 4가지 형식인 재가중(reweighting), 재연결(reconnection), 재배선(rewiring), 재생성(regeneration)을 정신 활동에 관여하는 뉴런과 시냅스들의 움직임이라고 설명합니다. 일단 커넥톰이 완성되면 이 네 가지 R을 바탕으로 뉴런들 간의 연결인 커넥토믹스를 파악하여 정신활동을 더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책의 내용이 워낙 전문적이고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세세한 내용 정리는 제 입장에서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까지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자를 21세기의 기계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세 가지 비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저자가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진술이 추측과 기대를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한 인간 커넥톰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하지만, 미래 기술에 대한 추측과 기대라는 불안한 기초 위에 “인체냉동술”, “업로딩” 등에 의한 영원한 젊음, 영생을 얻어서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마치 인류가 당연히 걷게 될 방향으로 단정하는 것 같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좁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 저자는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또 다른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끝내고 있습니다. 그 외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문학의 대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이야기한 인간의 정신의 활동이 뉴런과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와 화학신호들의 상호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 의식의 문제를 추적했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사고 과정에 관여하는 이러한 물리적 메커니즘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의식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모듈 – 예를 들면 할머니 모듈 – 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모듈의 존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통찰이라도 제시할까? 아니면 의식의 본질에 관해서 우리를 여전히 깜깜이 상태로 놓아둘 것인가? 뇌가 뉴런과 신경교(膠)로 구성되었다는 지식이 의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GEB, 471쪽)

 

수학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무의미한 형식체계로부터 창발하는 인간 자의식을 이해하려고 했던 호프스태터의 관점에서 보자면, 저자는 너무 컴퓨터의 기계적 연산능력을 과신하는 것 같습니다.

 

파스칼을 상당히 좋아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파스칼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기보다는 일부만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이용하는 것 같아 섭섭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학의 천재였던 파스칼이지만,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느끼며 여생을 살았었을 텐데, 그런 것까지 뇌 속의 전기신호와 화학신호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끝으로, 이 책은 커넥토믹스의 미래를 너무 핑크 빛으로만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활동의 신비에 대해서 더 많이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커넥톰과 커넥토믹스라는 개념을 알기 전에도,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하고,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하고, 책을 읽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의 메커니즘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정확히 나타낼 수 없는 지금도 우리는 아주 멋지게 그런 정신활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커넥톰과 커넥토믹스가 빨리 발전해야겠지만, 커넥토믹스가 없더라도 정신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너무 미래에 치우쳐서 현재의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신경학자로서 자신이 아끼는 분야의 미래를 극한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고 또 그래야 이 분야가 주목을 받고 활성화될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저 자신은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즐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종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하신 일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몰라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신비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신비한 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뇌피셜적 독후감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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