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과신대 교사팀 모임 안내

 

2020년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과신대 교사팀 모임을 소개합니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오전에 모이는

과신대 교사 모임은

백우인 선생님께서 운영하시는

카페 '거기'에서 모입니다.

 

2020년부터는 선생님들께서 자신의 전공 과목을

중심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교수법을 발표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성경적인 창조론을

가르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면서 이야기 꽃을 피울 예정입니다.

자문위원 교수님들도 함께 할 예정입니다.

 

모임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날짜

주제

발표자

1월 18일

창조에 대한 다양한 견해 분석

서광 선생님

2월 22일

(특강) 교회학교 교육을 위한 제안 

조성호 교수님

3월 21일

과학과 신앙의 관계

구형규 선생님

4월 18일

우주의 기원

정종명 선생님

5월 16일

진화와 창조

윤세진 선생님

6월 20일

(특강) 인류의 삶 터인 지구

이문원 교수님

7월 18일

과학이란 무엇일까?

서광 선생님

9월 19일

창세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백우인 선생님

10월 17일

창조론 성경공부 교재 연구

전희경 선생님

11월 21일

초등학생을 위한 창조론 교수법

김예지 선생님

12월 19일

송년 모임

전체 교사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은

언제든지 모임에 함께 참여할 수 있으니

저희 사무국으로 연락 주세요.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갈 길을 가 보자!

  • 와우 저도 이같은 고민을 하고 이곳에 찾아왔는데
    좋은 정보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창조가 단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닌 창조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으로 보고있네요. 혹은 재창조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싶습니다.
    저에게도 희망이 생깁니다.

    증인 2020.01.08 23:24

 

김정형 | 창조론-과학시대 창조신앙 | 새물결플러스 | 2019

 

전희경 (과신대 교사팀)

 

 

창조론에 대하여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서 밴쿠버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에서 3년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과학자와 신학자의 자리가 아니라 과학 교사의 자리에서 저의 역할을 잘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올해 8월 한국에 귀국했습니다. 한국의 학교와 교회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과학교육과 교회교육을 하겠다는 사명을 안고 말이죠.


3년 만에 귀국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모습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양극단으로 심하게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교회 역시 양극단으로 나뉜 채, 말씀 안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세상과 담을 쌓고, 교회만을 위한 사역을 강화하는 전략을 취하는 듯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름 생존하려고 저항과 평안을 오가며 균형을 잡으려고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내 몸과 맘이 유학생활 때와는 또 다른 힘듦으로 고생을 하고 있구나… 이것은 한국 생활 재적응 중이겠지… 인생은 늘 적응이구나…’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교회의 선배, 후배, 친구들이 한 사람씩 저에게 찾아와 물어봅니다. 공부하고 온 것이 무엇이며,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과학교육을 해야 하는지, 교회에서 궁금하고 답답했던 것, 교회의 문제점도 주저리 이야기합니다. 다들 나름 훌륭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인데, 순수하면서도 묵직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3년 만에 만난 우리의 교회는 너무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변함없음’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더군요. 그리고 교회의 주일학교와 사역자님들의 ‘창조론’에 대한 이분법적인 프레임과 ‘타락-구속’의 강조는 여전했으며, 그 벽의 두께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두껍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 아자 아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갈 길을 가 보자.’

 

2020년에는 교회에서 중등부 교사와 교육위원회로 봉사하기로 했습니다. 중등부 담당 목사님과 선생님들이 ‘창조론’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물어도 보고 도움도 요청하셨습니다. 전 뭐가 신이 나는지 블라블라 저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괜스레 조심스러워도 합니다. 교회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걸까요? 이런 변화의 바람을 기대하면서도 의심스러워할 때 김정형 교수님의 <창조론-과학시대 창조신앙>을 알게 되었고, 읽게 됐습니다.

 

 

먼저 이 책의 저자가 한국인 신학자라서 좋았습니다. 북미와 유럽의 유명한 신학자의 책이 아닌 한국인 신학자의 책이라서 반가웠습니다. 한국교회의 문화를 알고 한국 신학적 시각에서 풀어내는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책의 저자 김정형 교수는 <창조론- 과학시대 창조신앙>에서 창조론에 대한 용어들을 먼저 정리하고, 자신이 창조론에 대해 풀어나갈 이야기가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출발함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 책은 ‘창조-진화의 논쟁’이나 ‘창조의 기원과 시기’를 말하는 창조론이 아님을 말하였다. ‘창조론’을 ‘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 표현하고, 이는 조직신학의 한 범주라고 말합니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견해라든가 창조의 기원과 방식에 관한 창조론은 ‘창조설(Creation)’이라 명명하고, 이를 신학 교리인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과 구분합니다. 창조론은 엄연한 신학이기에 창조론과 창조설은 논하는 범주가 다름을 강조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창조론이라고 하면 창조설, 특히 창조과학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오해를 지적하고, 창조론의 신학적 의미가 축소되거나 생략되고 있는 교회 현실을 안타까워합니다.


“창조론은 창조-계속 창조-새 창조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창조론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과거에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셨고, 현재도 살아계셔서 다스리고 계시며,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상을 새 하늘 새 땅으로 새 창조 하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과거에 한 번에 이룬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역사하시고 미래에도 역사하시고 완성될 큰 프로젝트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과학혁명의 시대를 거치고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교회는 고대 근동의 과학관을 가지고 성서를 해석하는 창조설을 붙잡기보다 기독교 정통주의 창조 신학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현대과학이론은 포용하고 현대과학주의는 비판하면서 기독교 창조신학을 더 풍성하게 정립해 나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는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말하는 ‘창조-타락-약속-십자가-미션-심판-새 창조’라는 7막의 드라마 성경 이야기와 김홍전 목사님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 통합의 깨달음이 저는 기뻤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시대를 따라, 시대를 거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드러나게 하시고, 풍성하게 알게 하신다는 것 말이죠. 창조론을 창조 프로젝트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으로 그려낸 김정형 교수님의 신학적 통찰이 놀라웠으며 큰 울림을 줬습니다. 


이 책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부분은 과학이론, 진화이론, 생물과학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과학 이론을 신학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과학책을 과학적 사고로 읽어 내려가듯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이론에 대하여, 진화이론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무관심하지 말고 제대로 보자는 것이죠. 이 과학이론들의 내용이 무엇이며, 과연 이 이론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반하는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생물학 책을 만났고,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말하는 진화이론을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도 현대 과학이론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화이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반대하는 것도,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화이론은 생명의 적응과 변화, 그리고 다양성을 말하는 과학이론일 뿐입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창조론에 대한 통찰과 재미에 빠져 있다가도 머리 한 구석으로는 계속 한국교회 현실을 생각했습니다. 창조 신학은커녕 창조연대와 창조 방식에 집착하는 교회, 창조설(창조과학)이 전부이고 다른 의견은 위험한 견해로 보고 있는 현실 말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에서 그동안 창조과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현대 과학에 무관심해진 것이 결국 창조론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의 창조론 교육은 눈높이 교육이 필요합니다. 창조론에 대한 오해와 이해의 측면에서 교회 내의 세대 간 특징에 맞게 눈높이 교육이 실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략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창조설을 주장하기보다는 다양한 창조설이 있다는 것을 알기고, 진화 이론과 진화주의 구분하고, 과학과 신학에 관심 갖기 정도의 학습목표를 잡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시간은 오래 걸린다는 것을 미리 각오하고 말이죠. 그래도 천천히 그리고 재미있게 해보려고 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 소식 202001

연말연초는 헤어짐과 만남의 시간입니다.

2020년 새해를 시작하며 과신대 사무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저희 과신대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이진호 간사님이 퇴사를 했습니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이고 졸업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끝까지 잘 마무리하길 바랍니다.

퇴사 선물(?)로 최경환 간사가 누스바움의 <인간성 수업>이라는 책을 선물했습니다.^^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는 거겠죠.

새롭게 과신대를 섬겨주실 두 분의 간사님을 소개합니다. 

장민혁 행정간사님과 이슬기 미디어간사님입니다.

두 분의 간사님께서 2020년에 사무국에서 함께 일하게 됐습니다.

 

최경환 실장님은 사무국장으로 직책을 바꿔

사무국을 더욱 안정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여러분의 많은 응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장민혁 행정간사님
이슬기 미디어 간사님

 

교사팀에서도 2019년 모임을 마무리하고

2020년 모임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2020년 교사 모임은 선생님들께서 자신의 전공을 학생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한 전략과 방안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관심 있는 과학 선생님들은 주저하지 마시고

꼭 참석해주세요.

조만간 구체적인 안내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교사팀에서 이번 방학부터

교회학교 어린이부와 청소년부를 위한 과학 특강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교회에서 겨울성경학교나 수련회를 진행할 때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특강을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저희 과신대 사무국으로 연락 주세요.

과신대 교사팀에서 교회 상황에 맞게 특강을 해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s://www.scitheo.org/466

 

 

지난 1년 동안 과신대 기자단으로 활동해 주신

백우인, 손민아, 심기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매월 과신대뷰 발행을 위해 애써주셔서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2020년에는 새로운 기자단이 활동을 합니다.

이번에는 6명이 기자단으로 활동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기자님의 활약과 활동을 기대합니다.

 

 

지난 몇 달간 저희 과신대에서 고 심왕찬 선생님 유가족을 위한

주택자금을 모금했는데,

많은 분이 동참해주셔서 애초에 예상했던 금액을 거의 모았습니다.

지금까지 198명이 동참해 주셔서

총 29,710,604원이 모금됐습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후원금을

유가족에게 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과신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1. 2020년 한 해도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과신대 사역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사무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과신대를 도와줄 도움의 손길도 많이 보내주시길 기도해주세요.

 

2. 한국교회가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는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나도록 기도해주세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과 그분의 창조 세계를 탐구하고 알아가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주세요.

 

3. 과신대를 섬기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과신대 교사팀으로, 기자단으로, 연구팀으로, 북클럽지기로 섬기는 분들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봉사하고 많은 이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기초과정> 기간연장 특별할인!

  • 신청하고 입금 완료했습니다. 언제 부터 볼 수 있을까요?

    이상한샘 2020.01.22 20:07
    • 혹시 과신대 사무국 연락을 받으셨나요? 연락을 받지 않으셨다면 사무국으로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 070-4320-2123

  • 지금이라도 수강신청하고 싶은데.. 수강할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있나요? 급하게 들을 수 없을 거 같아 여쭤봅니다.

    happypen 2020.02.14 13:08
    • 아, 월요일 근무시간 되면 사무국 간사님들이 안내해 주실듯 해요. 온라인 수강 가능합니다.

      대표 2020.02.17 00:36 DEL
  • 영상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 겁니까?

    정은석 2020.02.24 15:52

 

과신대의 핵심 프로그램인 <기초과정>을 2월 한 달간 50%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합니다.

 

✓ 영상 시청 방법: 스마트폰에서 Gnowbe 어플을 다운로드(Android Google play store / Apple AppStore) 하신 뒤 회원가입을 하시고, 회원가입한 계정(이메일 주소)을 수강신청할 때 적어주시면 과신대 콘텐츠에 접속할 수 있도록 권한을 드립니다. 

 

※ 등록 신청: https://bit.ly/33XU9Be

 

✓ 강사 : 우종학 교수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과신대 대표) 
✓ 일시 : 2020.2.6 ~ 2020.2.29 (한 번 신청하시면 영상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보실 수 있습니다.)

■ 수강료 : 30,000원  15,000원 

■ 신청 : 온라인 신청 → 송금 → 신청완료

■ 계좌 :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문의 : 070-4320-2123

 

※ 기초과정을 수료하신 분은 <핵심과정>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핵심과정 안내: https://bit.ly/36T3t9V)

 

✓ 과신대 <기초과정> 강좌 구성 


[1부. 과학의 도전] 1강. 도입 / 2강. 과학이란 무엇인가? / 3강. 과학에 대한 건강한 시각 
[2부 성경해석] 4강. 창조기사를 어떻게 읽을까? / 5강. 성경과 과학 함께 읽기 
[3부. 무신론의 도전] 6강. 무신론의 도전 / 7강. 과학주의 무신론 / 8강. 과학과 무신론의 차이 / 9강. 기적적 창조와 자연적 창조 
[4부. 창조론의 스펙트럼] 10강. 다양한 창조 / 11강. 진화와 진화주의 / 12강. 창조론에 대한 바른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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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 교수의 <창조설 논쟁(creationism)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를 듣고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곱셈과 나눗셈이 수학에서 암묵적으로 먼저 계산하는데에 동의하는것처럼

    창세기도 암묵적동의로 넘어가주는 것인가 싶습니다.

    그래도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서 여성목회자 안수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어서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 없다고 봅니다.

    증인 2020.01.08 23:52

 

김정형 교수의 <창조설 논쟁(creationism)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을 듣고

 

2019.12.23 제18회 과신대 콜로퀴움

요약 정리: 송윤강 

 

 

김정형 교수님의 이 강연은 현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창조론 또는 창조과학과 진화론 사이의 논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창조론’이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창조설(creationism)이다. 김 교수는 창조에 대한 신학적 교리를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이라 불리어야 맞다고 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핵심 질문이 다르다. 창조설은 창조자 하나님을 기본 전제로 한다. 그래서 하나님에서 대하여 질문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이 세계의 역사에 대해 질문하고, 세계가 운행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질문한다. 그래서 질문은 When과 How이고 과거지향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더 나아가 우주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질문하고 있다.

 

반면에 창조론의 핵심 질문은 누가(Who) 왜(Why)이다. '어떤 분이,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만들었느냐'이다. 미래 지향적이고, 이 땅이 아니라 위에 계신 분, 영원하신 하나님이 관심의 대상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같은 ‘론’이라는 접미어를 쓰고 있지만 관점이 전혀 다르다. 진화론의 ‘론’은 Theory다. 과학의 논리를 따른다. 반면에 창조론의 ‘론’은 doctrine이다. 신앙의 논리를 따르는 교리(신조)다. 서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교리의 문법과 과학의 문법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창조론과 진화론을 대립시키면서 같은 범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왜 섞이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창조론, 즉 창조설(creationism) 주장 때문이다. 창조설에서는 ‘창조자 하나님을 믿습니다’를 전제로 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관심 영역이 과학의 영역과 중첩된다. 과학자가 관심이 있는 영역은 이 세상, 지구의 과거 역사와 우주와 생명의 기원과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창조설에서도 이러한 과학의 영역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창조신앙과 과학이 섞이는 혼동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설의 역사는 매우 짧다. 특히 창조과학의 역사는 100년 정도이며 본격적으로는 1960년대에 시작했다. 그러나 창조론의 역사는 2000년이 넘는다. 구약시대까지 포함하면 3000년이 넘는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창조론을 믿는다. 그러나 창조설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가능하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고 이 수정란으로부터 한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은 매우 신비롭다. 수정란의 세포는 단 하나이다. 그런데 이 단 하나의 세포가 서로 기능이 다른 세포로 분화되어 팔, 다리, 목, 귀, 코, 눈, 뇌가 된다. 그런데 그 신비로운 과정을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의 발전을 긍정하면서도 이 아기는 하나님의 작품임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 이 아기를 만드셨는가? 창조는 한 순간이라면 수정할 때인가? 그러면 하나님은 특별한 기능을 가진 단 하나의 세포만 창조하시고 나머지는 그 메커니즘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설계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건강한 한 아기가 태어날 수 있도록 열 달 동안 일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놀라운 지혜로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셨고 그 일부를 과학자들이 밝힌 것이다.

 

우리는 과학의 발전을 긍정하면서 얼마든지 아기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믿을 수 있다. 이처럼 과학과 창조론은 서로 차원이 다르다. 서로 섞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과학의 발견을 통하여 창조 신앙을 깊고 넓게 확장하여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과학혁명 시대가 아니라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혁명 시대(16~17세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과학혁명의 시대는 기존의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이 충돌하던 시대다. 전문가는 어느 것이 옳은 지 판단할 수 있지만 비전문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비전문가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때는 보수적 입장을 취해도 용납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혁명이 끝났다. 이제는 과학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다. 서로 논쟁을 하다 가도 누군가 과학적 사실을 언급하면 거기서 논쟁이 종결된다.

 

현대과학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빅뱅을 탐구하고 있고, 지구의 탄생, 자연선택, 복잡한 생명체 탄생, 인류의 탄생, 인류의 문명과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제는 자연 과학을 넘어 일반 역사를 포괄하는 ‘빅 히스토리 Big History’를 말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많은 한국 교회에서는 여전히 과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창조설을 가르치려 하고 있다.

 

창조 이야기와 관련된 창세기 1장의 해석은 이미 1600년전 성 어거스틴이 살아 있을 때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때도 과학이 있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과학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창세기의 주석을 다섯 번이나 고쳐 썼다. 그만큼 창세기는 어거스틴에게도 해석이 분분하고 어려운 책이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다섯 번째 고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통상적으로 비그리스도인도 땅과 하늘 이 세상의 다른 요소들, 별의 운동과 궤도, 별의 크기와 상대적 위치, 일식과 월식의 예측, 해와 계절의 순환, 동물과 나무와 돌들에 관해서 얼마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이 지식이 이성과 경험으로부터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혹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서의 의미를 제시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어떤 불신자가 듣게 된다면 그것은 부끄럽고 위험한 일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고 무식하다 무지하다 고 조롱하고 경멸하는 그와 같은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에 관해서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 중에서.

 

그런데 4세기경 성 어거스틴이 문제 의식을 가졌던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어거스틴의 조언에 따라 이러한 당혹스러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것인가?

 

 

위 그림은 창세기 1장을 문자적 표현에 충실하게 재현한 그림이다. 평편한 지구, 땅 밑에 땅을 받치는 기둥(욥기 38장, 시편 104편)이 있고, 궁창이 있다. 궁창 위에 물이 있다(노아의 방주 때 사라졌다고 한다). 궁창에 창문이 있어 물이 쏟아진다. 해와 달과 별은 궁창 위를 다닌다(궁창 너머가 아니다). 하나님의 위치도 나온다(시 104편). 궁창 위 하늘에 계신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그리면 이런 그림이 나온다.

 

이것을 지금 받아들일 수 있는가? 지금의 상식으로는 창세기의 이러한 그림을 매우 당혹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가 쓰일 당시에는 이러한 세계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 시대 사람들의 과학상식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지 말고, 그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면 이해하면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는 그 시대의 상식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시대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준 것이다.

 

유치원 수준의 아이에게 탄생을 말해줄 때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어 나왔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엄마 배꼽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설명이지만 아이는 믿는다. 아이는 배꼽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 품에서 엄마의 사랑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이야기하는 사실이 아니라 진리를 포착한 것이다. 이것이 눈높이 교육의 통찰이다.

 

하나님도 동일한 방식으로 과학의 발전 전에 그 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하나님의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주인공은 이러한 그림이 아니다. 주인공은 하나님이다. 세계 모습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주인공을 읽어야 한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함으로써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했다.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신다. 즉 인간의 지성과 마음의 능력에 적응하신다. 좋은 웅변가는 청중의 한계를 잘 알고 거기에 적응한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으로 오시기 위해 몸을 굽히셨다. 하나님은 때로 입, 눈, 손, 발을 소유하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이해하면 과학적 세계관과 성경의 문자적 내용이 다름에 대하여 그렇게 당혹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창세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의 장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이 장르이다. 장르에 따라 읽기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를 읽으면서 마음 안에 물이 얼마나 있고, 물고기가 얼마나 있느냐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창세기는 역사책 과학책이 아니다. 시스타인 성당 천정에 그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이 하얀 긴 수염 기른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모습을 가진 분이신가? 하나님은 어떤 형상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그러면 그러한 묘사는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한다. 그 그림은 사진이나 사실화가 아니라는 것일 알기 때문이다. 그 그림은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고유한 신학적 해석을 전달하는 예술작품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사실로 보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창조설은 기원론의 한 형태이다. 과학과 비슷하게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과학은 세상의 기원에 대하여 하나님 없이 설명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창조설은 하나님을 전제하고 세상의 기원을 설명한다.

 

과학이 하나님 없이 자연계를 설명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과학이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고 자연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개입시키면 과학은 발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진이 일어나는 이유를 하나님이 화가 나서 일어난다는 식으로 설명하면 지층의 문제를 더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과학은 하나님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그런 과정을 통하여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런데 창조설은 하나님을 전제로 하고 세계를 설명하려다 보니 과학적 결과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과거에는 평편한 지구, 천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도 지구의 나이는 6000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젊은 지구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 이야기 사이에는 긴 간극이 있다고 ‘간극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창세기의 하루를 나타내는 히브리 원어 ‘욤’이 24시간이 아니라 긴 시대로 보는 ‘날 시대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창세기가 과학임을 포기하고 진화론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해석도 있다. ‘점진적 창조설’은 종 내부의 진화는 인정하지만 종 간의 대진화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진화적 창조설’은 대진화까지 인정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젊은 지구 창조설과 진화적 창조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다. 물론 창조과학의 유익이 있다. 과학을 잘 모르면서 문자주의 신앙을 가진 분에게 신앙을 공고히 해준다. 그러나 과학을 아는 사람에게는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복음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창조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창조신앙을 가질 수 있다. 창조설 논쟁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창조신앙의 핵심 진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시고, 왜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 이다.

 

그 대답은 사도신경에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더 많은 교파들이 공통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한 분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늘과 땅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자임을 믿습니다.”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세 가지를 뽑을 수 있다.

1)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하나님: 세속주의와 모든 우상에 맞서는 유일하신 신으로 인정한다.

2)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는다

3) 천지의 창조자: 자연은 하나님이 소중하게 만드신 작품이다.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이것이 창조신앙이다. 영혼 구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세 가지는 창조설 입장이 달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적인 신학의 토대다. 창조설 논쟁에 빠져서 이 중요한 진리를 간과하면 안 된다. 이것이 창조설을 넘어서는 신앙이다.

 

 

과학을 받아들여도 창조신앙이 위협받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의 발견이 믿음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과학자가 밝히는 과학의 규칙을 받아들이면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발견(입자, 행성, 별, 생명…)을 통하여 우주를 만들고 역사에 관여하면서 매일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우주의 모습을 탐구하면서 그 속에서 드러나면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과학과 신학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이 생명의 의미나 인생의 목적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 무신론은 우연이고, 목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신론의 입장에서는 모든 자연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또 과학을 품으면 더 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지구를 넘어서는 하나님, 160억년 우주보다 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의 탐구를 통하여 생명의 경이에 감탄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한 없는 깊이를 느낀다. 과학이 발전한다고 신비가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지식을 통하여 더 많은 더 큰 새로운 신비가 느껴진다.

 

한국 기독교가 인간의 진화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 입장이다. 진화론이 무신론을 함축한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생명의 역사 생명의 메커니즘에서 결코 하나님이 배제되지 않는다. 진화론은 무신론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논리적 필연 관계가 없다. 도킨스 같은 사람은 진화론이 무신론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 없이 연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것이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와 다른 것이며 진화론은 종교적으로는 중립이다. 진화론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 탐구를 알고 배우고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이다.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까지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며 결코 과학으로 밝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면 진화론에서 인간의 출현과 인간의 탄생에 대한 창세기의 이야기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도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기독교인 뿐 아니라 일반인도 반발했다. 일반인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종을 하나하나 특별하게 순간적으로 독립적으로 완성된 형태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랜 시간을 걸려서 간접 창조도 하신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이 직접 식물을 하나하나 따로따로 만들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땅 보고 내라고 명령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과정을 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가 창조신앙의 핵심이 아니다. ‘왜 나를 만드셨는가’가 핵심 질문이다. 과학자는 진화의 과정을 통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지 않는다.

 

창세기 언어를 다큐멘터리의 언어로 이해하면 안 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과정을 보면 하나님이 토기장이처럼 묘사되고 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는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묘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창세기의 이야기를 절대 과학적 언어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과학과 같이 언급되는 순간 그 의미가 왜곡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