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amans: 180만 년 전부터 준비된 사랑의 능력자

 

Homo amans ㅡ  180만 년 전부터 준비된 사랑의 능력자 



터키 북동쪽,  조지아 드마니시에서 180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가 다 빠진 채로 살다 죽은 흔적이 보이고 머리뼈의 봉합 상태로 추정했을 때 노인이라고 한다.  빙하기였고 먹을 것이 부족했을 환경에서 노인이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보통의 젊은이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데 노인이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의 흔적을 보는 것이다. 180만 년 전부터 우리 인류는 나 아닌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남을 위해 손해를 보거나 목숨을 거는사람들 이야기,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이야기를 간혹 접한다. 내가 아닌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이기심의 발로일까? 자발적인 이타심에 의한 것일까?  어떻게 가능하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개미와 벌과 같은 동물 사회에서 찾았는데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미는 하나의 여왕개미가 공동체의 생식을 책임진다. 개미와 벌은 모두 암컷인  여왕개미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유전자가 똑같은 클론 clone이기 때문에  개체들  사이에 구분이 없다. 수많은  '나' 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것이다. 

그 공동체들의 삶은  오로지  여왕 개미가 낳은 아기를 양육하기 위해 살신성인한다. 개체 하나가 죽어도 그 유전자는 계속 내동료들 안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유전자의 입장에서 나의 희생은 억울하지 않다.  

개체를 무시하고 오로지 유전자만 고려한다면 개미의  살신성인과 같은 협동 생활은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이다. 사회 생물학자인 윌슨이 말하려는 것은 이타심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윌리엄 해밀턴은 이타적인 행위가 사실은 자신에게 유익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해밀턴 법칙으로 설명해 냈다.


rB > C 
(B;수혜자가 받는이익/r; 수여자와  수혜자 간의 촌수/   이것을  곱한 값이,  C;수여자가 치르는 대가) 


수여자보다  수혜자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촌수의  곱이 더 클 때 이타적인  행위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식이다.

이 공식을 보면 확률적으로 형제는 나와 유전자가 50% 일치하고 사촌은 12.5% 일치한다. 그러므로  같은 값의 대가와 이익이 기대된다면 두 명의 형제와 여덟 명의 사촌이 맞먹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내가 죽는 대신 형제 두명 혹은 사촌 여덟 명을 살릴 수 있다면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같은 양의 유전자가 살아남으니까 결코 손해 보는  죽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공식을 보면서 도킨스와 같은 사람들은, 개인은 유전자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유전자 제일주의다.  성인 남자가 가족의 일원이 되고 가정을 보살피고 보호하고 돕는 것 등의 행동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의 복지, 즉  남자 자신의 유전자를 위해서일 뿐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면 모르는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 행위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유전자 제일주의만 말하는 그들은  단지  기나긴 세월동안 친족 사회에서 살아온 인류가 습관적으로 해 오던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협동이 그렇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인간 개인이 마치 개미처럼 클론도 아니고 혈연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인류가  다  유전자로만  맺어져 있는 관계인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관계들을 보면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가족처럼 여기고 남과 맺은 관계 속에서 누나, 형님, 동생,  이모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가족은 혈연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가지 각색의 사회관계,  즉 모두 가족의 틀 안에서 오랫동안 형성하고 만들어 온 사회관계이며  핏줄로 연결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거대하다. 

그러면  인류는  어떻게 해서 서로 돕게 됐을까? 남에게 이타성을 드러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류가  작고 약하다는 점을 이유로 꼽는다. 

그들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빙하기를 겪는 동안 빙하기가 똑같은 기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기도 하고 건조하기도 하고 비가 계속 쏟아지기도 했다. 따라서 변덕스러운 기후에 맞춰 동식물들과 환경도 변하고 지형들도  변했다. 

변덕스럽게 달라지는 환경에 적응하기위해 인류는 강해지는 대신 정보력에 의존해 살아남는  유연한 전략을 택했다. 예컨대 인류는  환경을 잘 살피며 과거의 경험에서 정보와 지혜를 얻어 그것에  의존해 살아남는 전략을 발전시켰고 진화시켰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노인들은 이런 정보력의 원천이었고 그들을 존중하고 도왔을 것이고 그러다가 좀 더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협력과 이타심을 갖게 되는 놀라운 능력이 생겼다. 남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모르는 남과 나누고 남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과 연대하며 그들과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되었다.  

이타적인 삶을 살 수있는 사랑 유전자가 창발된 것일까?  어쨌든 인류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과 섬김과 사랑을 베풀 능력이 180만 년 전부터 생겼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대와 나는 자연과 환경도 그곳에 함께 살고 있는 나무도 새도 풀 한 포기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대와 나는 180만 년 전부터 이런 사랑을 하는  능력자, 곧 호모 아망스 Homo amans이다.

 

글_ 백우인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파사데나 북클럽] 성서신학으로 본 과학과 신학의 대화 (구약편 1)

 

장소: 490 E. Walnut St. Pasadena. 풀러신학교 2층 컨퍼런스룸.
시간: 2020년 1월 22일 수요일 저녁 6시 30분 - 9시 30분.
참석자: 신웅길 (leading), 이선주, 전계도, 신폴, 임택규, 박찬민, 이재석, 김영웅, 이상 7명.

 

 

교재 1: Ernst Troeltsch 저, "Religion in History" 중 Chapter1. Historical and Dogmatic Method in Thelology (1898) (신웅길)
교재 2: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Prologue, Introduction, and Chapter 1-5 (Chapter 1-2: 전계도, Chapter 3: 이선주, Chapter 5: 임택규, 나머지: 김영웅)
교재 3: James K. Hoffmeier and Dennis R. Magary, "Do Historical Matters Matter to Faith,?" Chapter 4. These Things Happened: Why a Historical Exodus is Essential for Theology (이동우)

 

 

2018년 여름 첫 모임을 가진 이래 2019년 가을까지 한 달에 한 번씩 '파사데나 장로교회'에서 모인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은 '과학과 신학 (신앙)의 대화'라는 주제로 현재까지 논의된 것들의 기본적인 전체 숲을 훑는 과정이었다. 다른 북클럽보다 뒤늦게 시작한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은 한국 과신대의 흐름과 상황을 파악하고 발을 맞추고자 한국 과신대에서 선정한 필독 도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창조과학의 기원과 역사, 문제점과 한계점 등을 공감하고, 동시에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의견을 나누며 '과학과 신학의 대화 (hereafter, 과신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1년이 지난 2019년 여름까지 매달 성실하게 모임을 지속해왔지만, 참석인원 모두는 그즈음 마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었다. 그동안 모임에서 우리는 각개전투에서 벌어지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창조과학과의 마찰로부터 한숨 쉬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느끼기도 하며, 모두가 같은 페이지에 있다는 공감을 충분히 받아왔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는 창조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치 기독교 신앙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끼는, 즉 주로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의중을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방법만이 아닌 정서적이고 심리학적인 방법으로도 통찰해 보려고 노력했었다. 창조과학의 객관적인 문제점과 한계점을 알려주었을 때의 그들의 상태와 반응을 '의도적 거절'인 것 같다는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내며 활발한 토론이 지속되었지만, 그 활발했던 기간도 1년 남짓의 시간이 지나니 어딘가 모르게 정체의 기미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모임을 지속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속이 그다지 의미가 없을 거라는 암묵적인 결론에도 다다랐었다. 우리에겐 동기부여가 될만한 뭔가 새로운 도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과신대'라는 기초적인 숲을 충분히 관찰했다고 판단했다. 다음 여정은 그 숲 안으로 들어가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고 알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우린 가장 먼저 참석 인원의 전공을 살펴보았다. 성서신학, 조직신학, 생물학, 컴퓨터공학, 주로 이렇게 네 분야였다. 물론 궁금한 타 분야의 외부강사를 초청하는 방법도 가능했지만, 그러기에 앞서 우리 내부의 전공분야를 '과신대'라는 숲 안의 나무로 삼고 살펴보는 게 우선순위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각 분야 당 4개월 안팎에 걸쳐 조금은 깊게 공부해나가자는 의견에 마음이 모아졌다. 그 시작이 2020년 1월이었고, 성서신학이 첫 타자였다.

 

성서신학이라는 나무를 공부하는 여정은 성서의 역사성 문제를 살펴보는 일로 정해졌다. 1월 22일에 있었던 첫 모임에서는 구약성서, 그중에서도 족장시대부터 출애굽, 가나안 정착, 이스라엘 왕조의 황금기,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신앙을 형성하는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부분의 역사성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이 글은 모임 전체를 녹음한 뒤, 그 녹음 파일을 다시 들으며 김영웅이 요약 및 정리한 것이다. 모임은 세 가지 교재 요약을 담당한 각자의 능동적인 참여로 이루어졌으며, 교재 요약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토론도 같이 이루어졌다. 약 3시간가량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되었던 진지하고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교재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 성서신학 여정의 길잡이인 신웅길 교수가 전체 여정을 간략히 소개하며 각 교재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앞으로 4-6개월에 걸쳐 매달 모일 성서신학의 눈으로 본 과신대는 성서 해석에 있어서의 역사성 문제를 다룰 것이다. 첫 모임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재를 다루는데, 첫 번째 교재는 성서해석의 두 가지 방법론 (역사비평적 방법과 교리적 방법)을 비교한다. 저자는 근대 이후로 가장 중요한 성서해석 방법론으로 대두된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이 방법론은 기존 교회에서 사용해온 방법론과 많이 상치된다. 역사성을 따질 성서본문이 많지만, 두 번째 교재를 택한 이유는 가장 먼저 구약에서 족장시대부터 출애굽, 가나안 정착, 왕조, 즉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신앙을 형성하는 사건들에 대한 부분을 다루기 위해서다. 저자는 고고학적인 방법을 기본으로 하여 이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입장이다. 세 번째 교재의 저자는 비록 고고학자이지만, 고고학적인 반박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이 사건들의 역사성이 왜 중요한지 주장한다. 두 번째 교재가 성서의 역사성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이라면, 세 번째 교재는 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며 긍정적인 입장에서 써진 책이다.

 

 

Ernst Troeltsch, Religion in History, Chapter 1. Historical and Dogmatic Method in Thelology (1898) 요약 및 정리.


저자의 기본적인 주장은 성서 해석의 새로운 방법론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교리적 방법을 오래된 방법, 역사비평적 방법을 새로운 방법으로 구분한다. 역사비평적 방법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저자는 교리적 방법론의 단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교리적 방법론은 계시에 대한 강력한 권위를 부여하여 모든 해석의 시작점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역사비평적 방법론이 가져야 할 세 가지 특징적인 원리를 주장한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방법이다.

 

첫 번째, Criticism의 원리: 성서의 "모든" 사건을 "예외 없이" 의심하고, 그 가능성의 정도로써 역사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두 번째, Analogy의 원리: 과거-현재-미래 상관없이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들이 똑같은 원칙과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원리이다. 특수성과 예외는 용납하지 않는다. 세 번째, Correlation의 원리: 모든 종교현상을 포함해서 모든 사건들은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원리이다. 인과관계를 초월하는 사건이나 인물은 용납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세 가지 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신학을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앙의 대상이 사실적 (역사적) 대상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 분리가 옳은지, 두 대상이 하나인지, 아니면 대립되는 것인지, 혹은 양립 가능한 것인지는 토론 대상이 되겠지만, 저자는 둘을 일단 분리한다. 이렇게 분리하여 나타나는 신학 양상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라 볼 수 있다. 기독교 특유한 신학이 아닌 종교로서의 신학을 말한다.

 

저자는 세 가지 원리에 입각하여 교리적 방법론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한다. 성서해석의 시작점이 의심이 아닌 명료한 계시라는 점은 역사비평적 방법론으로 볼 땐 검증 불가능한 시작점일 뿐이다. 이를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작점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의심 없이 100% 명료한 시작점을 전제하기 때문에 첫 번째 원리인 Criticism과 상치된다. 또한 기독교의 독특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두 번째 원리인 Analogy에 상치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인과관계를 초월하는 분이라고 상정하기에 세 번째 원리인 Correlation에도 상치된다. 그러므로 교리적 방법론은 문제가 많고,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성서 해석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학계의 주류는 역사비평적 방법 쪽, 교회는 상대적으로 교리적 방법 쪽에 치우쳐왔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비평적 방법 또한 힘을 많이 잃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방법론 안에서도 여러 가지 수많은 상충된 주장들이 나와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를 정도로 혼돈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학계는 교회의 신앙에 기반해서 연구를 수행하지 않으며, 교회는 학계의 주류 연구 방향을 따르지 않는다. 저자는 앞서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무신론자의 입장인데, 그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계시를 부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서신학 안에서는 교리적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자는 신앙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신앙고백과 상관없이 연구하는 조직신학은 SDL 학회, 신앙고백을 전제로 연구하는 조직신학은 ETS 학회, 현재 이렇게 두 학회로 크게 나눠져 있다. 재미난 것은 똑같은 성서본문을 가지고서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이렇게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는 학문이 아닌 신앙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Prologue: In the Days of King Josiah.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이야기는 기적적인 계시가 아니라 인간 상상력의 뛰어난 결과 (epic saga)다. 성서는 역사기록이 아니라 문학작품으로 읽어야 한다. 모세오경은 유대 요시야 왕의 종교 정화운동 때 쓰였다. 이 책은 고고학적인 입장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성서의 탄생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전설에서 역사를 분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역사'란 고고학적인 검증 결과로만 판정된 결과물로 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파괴가 아닌 탈구축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역사가 무엇인가?" 일지도 모른다. 과연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결과물만이 역사인가, 아니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인가 하는 점이다.

 

실제 사건은 크든 작든 어떻게 해석되든 상관없이, 어쨌거나 사실로써 있긴 있어야 하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그 이후의 해석은 과장, 축소 등등의 수정이 가해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예를 들어, 최소한 예수라는 인간은 실제로 존재했어야 하지 않을까. 물 위로 걷든 기적적으로 치유하든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래야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그래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만약 예수 자체가 허구적 인물이라면 기독교 신앙도 모두 무너져 내리고 허구일 뿐이지 않을까.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Introduction: Archaeology and the Bible.


고고학적인 발굴은 성서의 내러티브가 구체적으로 모두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다. 반대로, 성서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어떤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방법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몇몇 유명한 사건들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고고학은 성서의 역사 재구성에 도움을 준다.

 

고고학적인 발굴의 초기 목적은 창조과학의 초기 목적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내러티브를 기본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고고학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들을 찾기만 하면 될 거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성서의 핵은 이스라엘의 기원과 그들과 하나님과의 지속된 관계를 묘사하는 거대서사에 있다. 다른 고대 근동 신화와는 달리 땅에서의 역사에 굳게 기반을 두며,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주인공이며, 세계의 운명도 그들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게 아니라, J (Yahwist), E (Elohist), D (Deuteronomy), P (Priestly source) 등의 자료들이 합쳐져서 오랜 시간에 걸쳐 편집된 모음집이며, 기원전 7세기 말 요시야 왕 종교개혁 운동 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원과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역사적 환경 아래 써진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성서의 유명한 내러티브들의 역사성이 없다 하더라도 고대 이스라엘이 진실한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다만, 고고학 증거들을 기반으로 하여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여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모세오경 기록 시기를 요시아 왕 때로 보지만, 다른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 귀환 직후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더 늦게, 헬라 왕국 시기로 보기도 한다. 다양한 입장들이 있다. 신구약 중간기, 헬라 왕국 때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신명기적 역사관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 이스라엘의 회복과정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성서의 기록 시기를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Chapter 1: Searching for the Patriarchs.


창세기 팩트 체크 같은 본문이다. 족장들의 긴 수명이나 아브라함의 이동에 대한 고고학적 흔적이 없다. 또한 아람 종족이나 에돔 족속의 존재 증거도 고고학적으로 모호하다. 여러 고고학적 증거와 성서에 기록된 시기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Chapter 2: Did the Exodus Happen?


출애굽기 팩트 체크 같은 본문이다. 이집트 기록과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시기가 상충된다. 여러 고고학적 증거들에 의거하면 출애굽기가 이집트 26 왕조, 기원전 7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오히려 요시야 왕 때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고고학적 증거는 전체의 아주 일부분일 뿐, 전체가 아니기에, 확대 과장된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다시 말해, 저자가 말하는 고고학적 증거라는 것도 결국은 저자가 가지고 있거나 바라는 관점이 투영된 해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만 보면 저자의 필력에 압도되는 면이 있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거의 모든 항목들을 반박하는 책이 있다. Kenneth Kitchen의 책, "On the Reliability of the Old Testament"이다. 즉, 부분적인 자료들로 전체를 해석하는 건 정합성의 문제로 언제나 한계가 있으며, 그 때문에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케 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해석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는 객관적일 수가 없다. 허구와 신학적 의도의 분별은 언제나, 어쩌면 영원히 어려운 일이다.

 

교리적 방법론에서는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나와도 여전히 믿음이라는 이유로 그 객관적인 증거들을 무시하거나 축소시키는데, 증거들이 계속 많이 나오게 되면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궁금하다. 혹시 그래도 계속 믿음이라며,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자료에 무관하게 근본주의적으로 문자에만 의존하여 성서의 역사성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과연 이들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교리적 방법론을 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교리가 과연 완전무결한 것인지, 완벽해서 변경이나 수정이 불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혹이 남는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Chapter 3: The Conquest of Canaan.


가나안 정복에 대한 여호수아서의 내러티브가 고고학적 증거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보여주는 단원이다. 여러 신뢰도가 높은 이집트 자료에 의거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존재가 있기는 있었다. 여리고-아이성-네 개 부족 연합-가나안 정복의 순서가 성서에서 기록하는 순서와 일치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이유는 올브라이트의 해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반대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기원전 1550-1150년의 후기 청동기 시대의 이집트의 자료를 비롯하여, 가장 강력한 증거인 Tell el Amarna letters 점토판은 확실하게 가나안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으며, 가나안 국가들이 이스라엘로부터 침략받았다는 증거가 없다. 가나안 자체는 요새화 될 필요가 없었고, 실제로 병약한 곳들이었으며, 성벽도 없었다. 제국 이집트가 관리하고 있는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복설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가나안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나라가 이집트였다는 점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앞장서서 정복한 가나안이라는 국가들의 배후에는 강대국 이집트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가나안을 치면 이집트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고학적 불일치를 이유로 여호수아서를 새롭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적 변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텍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컨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서는 이스라엘 땅을 중점적으로 기술하지만, 고고학적으로 후기 청동기 시대를 보려면 가나안 경계에서 지중해 동부까지 넓게 봐야 한다. 당시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두 제국이 있었으며, 키프로스나 미케네 같은 강대국들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는 이러한 번영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몰락과 폭동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대격변의 이유 중 하나를 학계에서는 해양 민족이라는 존재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해양민족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가설은 있지만, 아직도 가설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가나안 정복에 대한 하나님의 폭력성을 이해하는 부분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의 해석이 존재한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을 때에도 늘 걸리는 문제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린아이까지 몰살해버리라는 명령이 과연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분과 동일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의혹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약 고고학적인, 비록 파편적인 증거들이지만, 자료들이 옳다면, 가나안 정복은 허구인 셈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늘 고민했던 가나안 정복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폭력성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저자의 단점은 고고학적인 부분적 단서만으로 확대 해석하여 자기가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즉, 저자가 주장하는 역사성은 고고학적인 증거들에 기반한 실제 역사가 아니라, 어쩌면 저자가 원하는 대로 써진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Chapter 4: Who were the Israelites?


앞의 1-3 단원에서는 족장 시대부터 가나안 정복, 즉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역사성을 따져봤다면, 이번 단원에서는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묻고 따져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에 이르는 거대 내러티브에서 찾지만, 과연 그게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을 부인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족이 아니라 원래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일 거라는 가설을 주장한다. 만약 여호수아서의 내러티브가 역사성을 가진다면, 여호수아가 이끌고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농경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광야 2세대들인데, 가나안에 들어와 농경 생활하던 가나안 민족들을 모두 몰살해버리고 난 이후 어떻게 농경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합리적인 질문이 가능해진다.

 

저자는 가나안의 경제적인 불균형 때문에 일부 소수의 반역 소작농들이 산악지대로 옮겨가 평등사회를 만든 게 바로 이스라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대로 경제적으로 착취당한 자나 반역소작농들이 이스라엘의 시작이라면 현재 유대인들은 굉장히 불쾌할 거라 예상된다.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가 흔들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모세와 여호수아에 인도 하에 홍해도 건너고 요단강도 건너고 여리고성도 무너뜨리며 우상을 섬기던 가나안 토착민들을 몰살해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예배하는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어야만 하는데, 그게 아니라 반역 소작농들과 같은 가나안 토착민 중의 일부가 그들의 시작이라고 하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감히 상상도 안 갈 지경이다.

 

농경-유목 생활의 패턴 변화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자료들과 광범위한 산악지대 발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주된 어려움은 타 종족과의 전쟁이 아닌 지형과 환경, 즉 먹고사는 문제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미 외부 유입으로 말미암은 가나안 정복을 허구라고 보는 저자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전쟁이나 정복 따위가 아닌 그야말로 굶주림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문제였다는 주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말을 다시 하면, 초기 이스라엘의 생성은 가나안 문화의 붕괴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고학적인 증거는 가나안 정복이라고 알려진 시기에 산악지대 인구의 갑작스러운 증가를 알려주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모르는 상태다. 그들이 사용하는 토기나 도자기 등의 문양의 차이는 곧 물질문명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들의 분석으로 미루어 보아 그 증가된 인구 집단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지역의 그것들과 다른 문양을 사용했던 증거도 있기 때문에, 어쨌거나 알 수 없는 새로운 집단이 산악지대에 존재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집단이 새로 유입된 사람들인지 원래 가나안에 있던 일부의 사람들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저자는 후자를 주장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전자를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는 돼지 뼈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나름 구별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된다. 코펜하겐 학파를 위주로 한 학자들은 '이스라엘은 없다'라는 주장까지 한다고 한다. 그들은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난 것 한 가지는 비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원을 왈가왈부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도 사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통일되게 알고 있지 않지만, 타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기원과 정체성을 가지고 여러 가설을 세우고 서로 논쟁하는 모습은 어찌 보면 참 기가 막힌 노릇일지도 모른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Chapter 5: Memories of a Golden Age?


이 단원에는 다윗과 솔로몬 왕의 황금시대가 실재했는지 고고학적인 증거들로 추정하며 그 역사성을 다시 재검토해보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성서 미니멀리스트들의 입장은 다윗이 아더왕보다 덜 역사적 인물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그만큼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황금시대라고 할만한 화려함과 강성함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특히 솔로몬이 지은 성전 등의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다고 한다. 물론 합리적인 반박은 가능할 것이다. 로마시대 때 전부 파괴되었기 때문에 없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윗 왕국의 실존성을 'House of David'라고 써진 비문을 Tel Dan에서 발굴해서 확인되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뿐 아니라 모압 왕 메샤의 비문에서도 다윗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적어도 다윗이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산악지대에 살고 강대국도 아닌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집트의 속국이었던 가나안 도시들을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었을까? 만에 하나 그랬다 하더라도 왜 기록이 없는 걸까?" 여기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은 후미지고 낙후된 고지대 유목 마을일 뿐이지만, 성서에서처럼 황금시대로 기록된 것은 신명기적 역사관의 반영이며, 신학적인 희망이 담긴 허구라고 말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우린 너무 확신해서 믿어도 안 된다. 언제나 파편적이라 불충분한 자료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거기엔 해석의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처럼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소설을 성서이라고 믿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증거로 추정한 것들을 가설의 합리적 가능성 제시 정도로 끝내야지 그것만이 옳다고 우기면 안 된다.

 

 

James K. Hoffmeier and Dennis R. Magary, Do Historical Matters Matter to Faith? Chapter 4. These Things Happened: Why a Historical Exodus is Essential for Theology  요약 및 정리.


저자는 고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인 방법이 아닌 신학적인 방법으로 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교재 2가 성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다면, 교재 3은 옹호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만약 출애굽의 역사성이 허구라면, 그 이후 기독교 신앙 형성에 중요한 많고 많은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역으로 출애굽의 역사성이 거짓일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허구에 불과한 출애굽으로부터 기인했겠냐고 되물으며 그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출애굽이라는 사건 하나만으로도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여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데, 어찌 그 출애굽 기사가 다 허구일 수 있겠냐고 신학적으로 따지면서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신앙은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은혜로 받았다는 믿음이란 그 실체가 무엇일까. 성서의 역사성이 기반이 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역사성을 인정해야 하고, 또 어디부터는 허구여도 되는 것일까. 성서가 역사책도 아니고 과학책도 아니며 신학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책이라는 합리적인 입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만약 그 신학적 메시지가 순수한 허구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뿌리 채 뽑히진 않을까. 아니면 그런 것들이 아무래도 좋으니 변함없이 굳건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신앙의 근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한 번쯤은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이다.

 

다음 모임은 2월 19일 수요일 저녁 6시 30분에 풀러 신학교 2층 컨퍼런스 룸에서 동일하게 모인다. 주제는 "예수의 역사성"이다. 교재는 새물결플러스 스펙트럼 시리즈 1인 "역사적 예수 논쟁"과 Luke Timothy Johnson 저, "The Real Jesus", 이렇게 두 권이다. 진지하게 관심 있으신 분은 언제든 먼저 연락하시고 참관하셔도 된다.

 

글_ 김영웅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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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연대기>를 읽고

“얘들아, 지구 연대를 따져보면 6 천 년밖에 안 된대!”, “사람이랑 공룡이랑 같이 살았었대!” 나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다. 과학으로 성경을 증명할 수 있다니, 진짜 신기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창조과학 특별집회가 열렸다. 설레어서 가슴이 너무 떨렸다. 열심히 강의를 듣는 도중, 한 가지 생각에 꽂혀서 나머지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이 틀렸다고, 그래서 지구 나이는 46억 년이라고 측정한 게 틀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과학적으로’ 증명한다고 한다. 과학이 틀렸다는 걸 과학으로 증명한다고?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김민석 | 창조론 연대기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 375쪽

 

 

김민석 작가는 예전에 <마가복음 뒷조사>를 읽어서 알고 있었다. 참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또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던 차에 남편이 이 책을 권해주었다. 반가운 마음에 첫 장을 펼쳤는데,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사실, 그때는 정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서 한 번에 쭉 읽었는데, 기억나는 건 딱 한 마디였다.

 

“봐봐 ... 저기 저 별들에서 나오는 빛이 우리 눈에 보이려면 ... 그러니까, 10억 광년 떨어진 별이 보인다는 건 ... 그 별빛이 우리 눈에 오기까지 10억 년이 걸린 거잖아.” (p70-71)

 

주인공 중 한 명인 수영이의 대사다.

 

책을 다 읽고 내려놓았는데, 이 대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요즘 웬만한 사람들은 ‘광년’의 개념이 뭔지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간단한 개념이 이상하게도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삭제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다. 그냥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은 것이다. 나는 수영의 대사 때문에 그동안 뇌 한구석에 잠재워 두었던 콩 알만한 과학 지식들을 단편적으로 끌어내게 되었다. 그랬더니 성경이 다시 보였다. 끊임없이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교회에서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는 자매’로 찍히게 되었다.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기도를 더 많이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여기서 더 나가면, ‘진짜 하나님 믿냐?’라는 질문을 받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아무도 풀어주지 못했다.

 

<창조론 연대기>에는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한 수영이 있었고, 유준이 있었다.

 

 

이번에 서평을 쓰려고 다시 책을 찬찬히 읽으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첫째, 신앙과 과학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나도 예전에는 과학자는 모두 무신론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은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둘째, 창조론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6일 천지창조를 믿을 것이다. 하루는 24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나도 처음에는 여기에 의문을 가졌지만, 교회를 다니다 보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계속하면 안 된다고 여겨서 그냥 24시간*6일=144시간에 걸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믿기로 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어느 창조론을 믿든, 다른 사람이 믿는 창조론에 대해서 ‘나만 옳다’라고 여기는 독단적인 태도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걸 주장하는 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셋째, 문자 그대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평소에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내가 읽고 있는 성경의 문자대로만 읽으면 됐지, ‘원래 문자 그대로’가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하나님도 내 처지 다 아시는데라는 생각에 안일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질문하는 나’를 삶에서 지워버리게 되었다. 

 

넷째, 과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였다. 나는 과학과 복음이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여러 가지 질문으로 괴로워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과학적 질문들 때문에 괴로워하며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물리학자가 꿈이었던 온유가 과학과 신앙이 대립된다고 생각해서 꿈을 버린 부분에서 무척 마음이 아팠다.

 

 

유준, 김수영, 박온유, 박건호, 고민희, 박사무엘.

 

이 등장인물들은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갈등하고 있는 사람이다.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슬며시 이 책을 선물해주면 어떨까? 진지한 물음과 더불어 고등학생들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한 가지 팁! 나처럼 안면 기억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등장인물을 한 번에 구분하기 어려우니, 앞 페이지에 나오는 인물소개를 꼼꼼히 읽고 들어가는 걸 권한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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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모임] "창조와 영성"(조성호 교수) 특강 후기

 

"창조와 영성"

 

2020년 2월 22일 과신대 교사모임

강사: 조성호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영성학 교수)

 

 

작년에 청소년 과신대 캠프를 진행하면서 태동하였다가 2020년에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모이는 과신대 교사팀에서 올해 두 번째 모임으로 서울신학대학교 조성호 교수님을 모시고 지하철 4호선 사당역 근처의 더드림교회 4층에서 조촐하게 “창조와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개최하였습니다. 교사팀 자문위원이신 이문원 교수님(강원대 명예교수)과 정승화 선생님, 정종명 선생님, 백우인 선생님, 전희경 선생님 그리고 이준봉 님(서울신대 신학과), 멀리 남반구 호주 시드니에서 비행기를 타고 찾아주신 김태준 선생님, 과신대 최경환 사무국장님께서 10시 반부터 1시 05분까지 작지만, 모닥불 같이 뜨거운 강의와 Q&A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성호 교수님은 구약에서부터 21세기까지의 영성 개념의 발전에 대해서 최대한 어렵지 않게 자세히 하나님의 창조와 영성의 관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강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구약의 창조와 영성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다른 시기에 쓰인 문서로 창조의 방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각각 바벨론 포로기와 이스라엘 남 왕국 후반기에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쓰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유대인의 세계관은 통전적 세계관으로, 영과 육을 나누지 않고, 창조 이야기에 나온 하나님의 창조행위에서 자신들의 삶을 이해하면서 수립되었습니다. 영성이라는 말은 삼위일체라는 개념처럼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개념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말하고 교수님 개인적으로는 “관계 형성을 위한 건축학 개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영성이라는 개념이 주목받은 것은 가톨릭의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이 영성에 집중하고, WCC에서 영성을 “사회참여”로 집중하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주목할 만한 영성학 학자들과 그들의 영성에 대한 주요 개념들은 먼저, 미국 가톨릭 영성가 샌드라 쉬나이더스가 말하는 영성으로, 궁극적 가치, 자기 초월, 의식과 삶의 통합, 지속적 과정이 있고, 얼반 홈즈의 내적 지향성, 브레들리 홀트의 4가지 사랑의 관계로서의 영성 즉, 하나님과 나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 나와 자연과의 관계, 나와 나 자신의 관계, 팀 켈러의 일과 영성,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이 말하는 유대적 영성이 있습니다.

 

특히, “안식”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영성에 대해서 창조와 관련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는데, 개인적으로 아주 좋았습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영성 개념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노동과 안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포수기(바벨론 포로기) 시대의 지배 민족들의 창조신화는 신들이 노예로 부리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고, 왕족들은 신의 자손이므로, 당연히 모든 인간은 왕족을 위해 노동해야 한다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여호와 창조 이야기는 창조주가 먼저 노동을 하였고, 그다음에 안식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도 노동한 이후에 안식을 누리는 존재로 설명되며, 하나님은 피지배자, 낮고 천한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헤셀은 토지소유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공간의 안식”에서 “시간의 안식”으로 영성의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공간의 안식은 땅을 차지한 지배자들의 개념이지만, 시간의 안식은 땅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에는 특히 중요한 개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잃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신앙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고, 지배자들이 변경할 수 없는 하루 24시간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영성)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는 예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신념으로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설립하여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시간을 가장 거룩하게 여기며, 삶의 총체적 시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공간의 안식 중심의 한국교회는 “시간의 안식” 개념으로 가야 하지 않는가 하는 제안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구약의 창조 이야기 속에서 설명되는 노동과 안식의 하나님, 사회적 약자들의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 좋았고, 이것이 창조의 영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30여 분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서 오간 이야기들로는 '영성이 건축학 개론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신선했다', '자신도 유대인들처럼 하루하루가 예배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과 일상에서 큰 변화를 경험했었고, 변하는 인생살이에서도 “여상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묵상하는 것이 좋겠다', '21세기 세속화된 과학시대에서 영성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창조의 경이, 하나님의 은혜, 초월, 신비 등등을 맛볼 수 있을까', '에코 페미니즘과 환경운동가 중에서 활동하는 영성가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수적 근본주의적 기성교회 내에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서도 어울려 사는 법은 어떤 것이 있는가' 등등이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시간도 잊고 강의와 대화에 빠져 있다가 퍼뜩 1시가 지난 것을 깨닫고 자리를 정리하고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하면서 2020년 두 번째 과신대 교사 모임을 마치었습니다.(점심을 쏘신 김태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 것은 과신대의 사명 중 하나가 차세대 교육이기 때문에 과신대 교사 모임이 정말 중요하고, 이것을 위해서 교회와 학교에서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의 모임이 정말 중요하며, 먼 곳에서 과신대 교사팀 모임을 가지려고 매번 모이시는 일선 중고등학교 선생님들 한 분 한 분이 아주 소중한 분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사팀 초기 멤버로 섬기시는 한 분 한 분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도울 일이 있으면 온 힘을 다해서 도와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최성일 기자 (ultracha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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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핵심과정 장학금 지원 안내

 

2020년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과신대 핵심과정에서 #대학생#신학대학원생#파트타임목회자#미자립교회목회자#구직자 및 #일정한수입이없는분 에게 장학금을 지원해드립니다. 아래 신청서를 클릭해서 작성해주시면 사무국에서 연락을 드립니다.

 

* 핵심과정 장학금 신청: https://bit.ly/2SWtWyJ
* 장학금: 5만원 (과신대가 5만원 지원, 중복 혜택 없음)
* 등록비 납부: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핵심과정 안내 🔶🔶

 

◎ 일시: 20202.3.2~5.11까지 저녁 7:00-9:30
◎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관악구 쑥고개로 122)
◎ 수강자격: 과신대 <기초과정I> 수강자

 

◎ 프로그램
1강(3/2) 창세기는 어떤 책인가? (김근주 교수)
2강(3/9) 창세기 1, 2장 해석 (김근주 교수)
3강(3/16) 창조에 대한 신학적 이해 (김정형 교수)
4강(3/23) 과학을 품는 창조신앙 (김정형 교수)
5강(3/30) 과학으로 보는 창조의 역사 (이정모 관장)
6강(4/6) 과학에 대한 이해 (오원근 교수)
7강(4/20) 다양한 창조의 관점들 (우종학 교수)
8강(4/27) 무신론에 대한 이해 (박영식 교수)
9강(5/11) 과학기술 시대의 윤리 (박일준 교수)

 

🔶 <기초과정I>을 듣지 않은 분은 아래 링크로 수강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기초과정I> 수강신청: https://bit.ly/33XU9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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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살리는 기독교 페미니즘 (백소영)

 

오늘(2월 8일) 분당성공회 교회에서 백소영 교수님 특강이 있었습니다.

 

여성운동의 녹두장군처럼 녹두색을 멋지게 입고 가뿐히 날아오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신앙과 과학처럼 신앙과 페미니즘도 대화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오늘 우리의 북콘서트는 막을 올렸습니다.


“왜 지금 우리는 페미니즘에 눈을 크게 뜨고 있는가?” 지금은 페미니즘 re-boot 시대! 신앙과 과학이 상보적 관계에 있는 것처럼 페미니즘도 신앙과 상보적 관계에 있어 대화를 나눌수록 ‘살고 살리는’ 아름다운 공동체성을 살려낼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강의는 뜨거워졌습니다.

 

 

페미니즘은 우리 공동체의 Text와 Context에 그 동안 배제되었던 여성의 경험, 시각, 의미, 해석을 포함시키는 ‘이념’이고 ‘운동’이라는 강사님의 포문에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명예남성”이 되어 자신도 오천 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소수 지배권력 집단들에 의해 면면하게 형성돼온 ‘가부장제’의 희생물임에도 그 자각이 없이 동일하게 지배 권력에 편승 또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향해 억압의 채찍을 휘두르는 여성에 대한 고찰과 남성의 지배구조에 힘을 보태고 있는 ‘거세된 여성’에 관한 담론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여성을 약자로 보았을 때 자신도 그와 같이 약자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남성 페미니스트, 상황화를 위한 ‘여자되기’의 남성 페미니스트 주제로 페미니즘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래디컬 페미니즘의 경계를 훑어보는 것도 첨예한 주제로 유익했고, 다시 한번 강조되는 교수님의 성경 독법인 ‘경줄’과 ‘위줄’의 개념도 신선한 미드라쉬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보편성’과 ‘초월성’이 담보되는 ‘경줄’입니다. 그러나 잠자는 남성의 갈비뼈로 여성을 만드셨다는 것은 ‘위줄’로 해석을 다시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히브리어는 ‘아담’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것은 바로 남자가 아닌 ‘사람’ 임으로 ‘남성’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셔 ‘여성’을 만드신 것이니, 여성은 ‘남성’의 한 부분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는 해석입니다. 사람을 만드신 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여 만드셨다는 것이 더 정확성은 높은 해석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동안 너는 나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니라’ 그 달콤했던 사랑의 고백이 오류에서 기인했던 것이군요.

 

 

끝나지 않는 질문과 교수님의 열정적인 답변으로 분당 교회는 펄펄 끓는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참석하신 분들 대부분이 젊은 분들, 그것도 남자 청년들이 많은 것을 보고 좀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여성들과의 대화에 그만큼 진지하고자 하는 것이니까요.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저의 훨씬 선배가 되는 딸아이가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하니 감사하고, 이제 딸과 조금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저 개인적으로는 어제 독서모임에 이어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긴긴 질문 끝에 단체 사진을 찍어 오신 분들을 다 담지 못해 좀 아쉬웠습니다ㅠㅠ

 

저희들의 유익함을 위해서는 언제나 문을 열어주시는 분당 성공회 교회에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글_ 김란희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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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판교 북클럽]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진정한 페미니스트 선언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선포하는 것과 같다. 모두가 존귀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에서의 페미니즘은 여성주의 시각으로 성경을 ‘의심하고, 비판하고 재구성하기’가 뜨거운 이슈다. 사회주의 기독교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만큼이나 기존의 페미니즘을 해체의 대상으로 본다. 저자는 ‘재해석 이상의 해석학’의 입장에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저자가 聖經(성경)의 “경”자인 ‘세로실’을 단서로 성경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 경줄 사이사이 사람의 손을 의미하는 ‘위줄’이 가로로 들어가 단단하게 직조된 옷감으로 표현한 것이 매우 흥미롭다. 그렇기 때문에 ‘위줄’의 재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경줄’로서의 메시지는 이어받겠지만 여성 억압적인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전통을 세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시한 읽기이다.

 

페미니즘 시각으로의 성경 읽기는 낯선 것이 아니다. 행간을 풍성하게 채워있는 ‘미드라쉬’의 한 가지인 것이다. 초기 교회 언니 나혜석은 창세기의 창조 명령을 "살아라"라는 존재 명령, 최용신은 "살려라"라는 구원 명령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모임의 구성원들인 남성들은 중산층 시각에서 페미니즘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이 다수였고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몸으로 살아내는 다양한 계층의 워커들이었다. ‘워커’라고 다소 애매한 표현을 쓴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에 따라 일하는 내용도 여성으로 체감되는 ‘억압’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통분모는 ‘직업인’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들 간에도 논의의 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지점이다.

 

‘경줄’과 ‘위줄’로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와 ‘페미니즘으로 성경 읽기’라고 해서 성경의 중요 서사는 달라질 것이 없고 ‘성경 안에서의 여성 리더 찾기’와 같은 것은 관점을 달리 한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읽기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20대 청년세대에서 10% 내외의 우수한 여성들에게 90%의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불편한 시각을 갖는 것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의 필요성이 역설되는 것이 아니냐는 토론과 아무리 가열 차게 독립된 주체로서의 ‘삶’을 주장하던 여성들도 결혼만 하면 ‘남성 중심의 문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리 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어느 쪽이든 불편해지면 또 부당한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 ‘남녀’가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동반의 관계가 서로의 행복을 담보해 주고, 그것이 인류 전체로 확산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행위나 선택의 결과가 아닌 주어진 조건만으로 차별되거나 배제 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곳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숙대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 젠더 여성과 제발 여군에 전입시켜 달라며 눈물을 흘렸던 그 여성 분의 애절함이 오늘 모인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만이라도 ‘존재형태’로 누군가 우리의 공동체에서 배제된다면 충분히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7시 30분에 만나 11까지 담소와 논쟁과 토론과 수다가 섞여 아쉬운 ‘페미니즘 읽기’ 시간을 보냈다. 창가에 핀 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달달한 포도주와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의 옳은 삶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우리 서로는 행복해했다.

 

글_ 김란희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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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기사연 공동포럼] 후기: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바란다

 

2020년 1월 28일 (화) 과신대와 기사연이 공동 주관한 포럼에 다녀왔다. 이 포럼에서 김현준 연구원은 “한국 개신교는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졌는가?”라는 발제문을 통해 세 가지 의미 있는 분석을 제공했다. 

 

첫 번째로 창조과학을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김현준 연구원은 오히려 한국 기독교 지성 운동이 창조과학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기독교 지성운동이라 호명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주도했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뼈 때리는’ 분석으로 들릴 대목이다. 초록은 동색이다. 복음주의자라는 이름을 원했던 이들은 끊임없이 근본주의자들의 반지성주 태도와 거리를 두며 유연한 태도와 입장을 지닌 복음주의를 꿈꿔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 지성운동은 근본주의 신앙이 세워 놓은 경계 안에서 전개되었다. 이 경계와의 싸움, 혹은 주어진 경계 안에서 과학과 신앙의 대화는 기독교 지성의 역할, 과학과 신학의 대화와 같은 질문으로 깊어지기 보다는 문화전쟁이라는 근본주의자들의 거대 공포 서사 안에서 유사과학의 권위로 자리 잡게 된다.

 

두 번째로 국가주도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원과 양성과정을 창조과학 부흥의 외적 요인으로 분석한 것 역시 흥미롭다.

 

70년대 기초학문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관심과 지원보다는 빨리 써먹을 수 있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이루어졌다. 과학 자체에 대한 성찰과 의미에 대해 묻는 질문은 과학기술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은 그 의미에 대한 답을 신앙의 영역에서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사회학 혹은 과학철학의 관찰과 분석이 반가운 지점이다. 창조과학회 회원들 가운데 공학자들이 많다는 점이나, 이들의 회심의 이야기와 창조과학으로의 헌신이 잘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 분석을 지지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80년대 뿐 아니라 지금도 기초학문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관심과 투자보다는 여전히 ‘당장 가져다 쓸 수 있는’ 과학기술에 대한 강조와 지원은 여전하다는 것과, ‘과학의 철학적, 사회적, 공공적 이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저 멀리 있다는 점에서 과학의 외적 요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니버의 유형론을 떠올린다면, “과학을 과학의 자리에 두고 겸손하게 세상과 삶의 모순까지도 신비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왜, 정통신앙의 한 표현과 입장으로 고려되지 못했을까? 신앙의 언어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강박이 그 시대의 교회를 붙들고 있던 것은 아닌가?”와 같은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세 번째로 ‘담론의 동맹-이해관계의 번역’이라는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했다.

 

첫 번째로 지목했던 기독교 지성 운동이 한국 개신교의 지형도 안의 다양한 이해의 주체들과 동맹 (e.g., 창조과학-기독교 지성운동-지역교회)을 형성했고 이러한 담론의 동맹을 통해 창조과학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의 연결망은 종교적 교의를 과학적 진리로 변환시킨다.”

 

어쩌면 이러한 분석은 그 반대 방향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창조과학에서 주장하는 진리’는 (목회자의 설교와 다양한 창조과학 세미나를 통해-) ‘종교적 교의’로 가르쳐지고, 교회안의 (자녀 교육을 생각하는-) 신실한 신자들에게는 받아들여야 하는 유일한 선택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담론의 동맹-이해관계의 번역’이라는 분석이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 동맹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공동의 이해관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 개신교는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졌는가?”라는 질문에서 ‘어떻게’라는 부분은 세 가지 분석을 통해 설득력 있는 답을 주고 있지만, 여전히 ‘왜’라는 부분은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이 답을 하려면 ‘이 담론의 동맹을 통해 (이들이-) 얻으려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자신의 신앙과 학문을 통합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이해관계는 그리 커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초기 창조과학회는 권력이 아니라 많은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미답지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동맹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내적-외적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고 본다. 변증의 차원에서 시작된 이 질문은 먼저 과학자 자신에게는 의미의 질문으로 다가왔고, 전도와 선교를 수행하려는 교회와 단체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합리적이며,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변증의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도와 성장이라는 강력한 공통의 이해관계는 창조과학에게 거대한 무대를 제공했다. 하나님과 신앙을 과학과 이성의 권위 아래로 가져가는 이 근대성의 논리는 꽤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을 형성했고 지금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창조과학은 이 시대정신의 열매다. 

 

 

결론

 

나는 이 세 가지 분석과 함께 다른 분석의 질문으로, ‘교회와 세상의 관계’ 혹은 ‘선교학적인 관찰과 접근’을 제안하고 싶다. 창조과학은 그 자체로 변형되고 확장되는 문화(현상)로 봐야 옳을 것 같다. 크라우치가 지적하듯이 문화는 ‘세계관’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문화를 세계관으로 축소시킬 때의 위험성은, 문화 재화가 자기만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문화의 가장 고유한 특징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과학이 세계관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분석은 정확하지만 이 분석은 이 세계관이 작동하고 있는 방식 (문화)를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세계관’적이다. 

 

또한 창조과학이 문화전쟁이라는 ‘교회와 세상의 적대적 관계’에서 유사과학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는 모습, 사람들이 묻지 않는 질문에 답하며 열심히 가르치려는 모습은 앞으로의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향할 방향을 반증/지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 교양 강좌가 아니라면, 창조과학이 교회와 세상의 관계 맺음에서 취했던 입장과는 무엇이 다른지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할 것이다. 좋은 신학은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김현준 연구원도 말했듯이-)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기독교 변증에 머물러있지 않기 바란다. 21세기의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오늘의 질문과 관심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기후위기가 일상으로 다가온 지금 창조세계의 보존을 위해 과학과 신학은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유사과학이 다시 등장하는 오늘, 과학과 신학은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 군산복합체 (military-industry complex)의 지원 없이는 연구가 어려운 환경에서 과학과 신학은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계속 되어야 할 것이고, 그 대화는 지금 우리가 만나고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한 진지하고 겸손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를 희망해 본다.

 

글_ 김성한 (MCC Peace Educ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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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과신대 대의원 총회 소식

 

 

지난 2월 10일에는 2020년 과신대 대의원 총회가 있었습니다. 총회라고 하면 다소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이번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하고 유쾌했습니다. 사무국에서는 장소 섭외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전화위복이 되어 총회가 파티로 변하는 놀라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대의원 총회는 2019년 사역을 평가하고 2020년 사업계획을 검토하는 자리이지만, 다들 과신대 발전을 위해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너무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총회 시간에 나온 이야기들을 몇 가지 적어봅니다. 

 

  • 정회원 참여를 이끌어 낼 방법을 고민해 보자 (북클럽 활성화 / 정회원 인터뷰 / 페이스북)

  • 동영상 기반의 활동을 더욱 활성화하자 (영상 보고 토론하는 북클럽 콘셉트 등)

  • 페이스북 미사용자를 위한 채널 필요: 카카오톡 오픈채팅 정회원방 / 네이버 밴드 등

  • 애써서 가야하는 방식보다 전송해주는 방식이 필요 (카톡, 밴드)

  • 중간단계 플랫폼도 기획해 보자: 블로그 등

 

앞으로 과신대가 나아갈 방향과 정회원들에게 어떻게 소속감을 주고, 함께 사역의 주체로 이끌어 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들 열정적으로 의견을 내주시고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제시해 주셨습니다.

 

과신대는 정회원들이 함께 만들고 운영하는 단체입니다. 단순히 후원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참여하시면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매월 정기적으로 모이는 지역 북클럽에 참여하실 수도 있고, 교사팀 모임이나 기자단으로 활동하실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분이 과신대 사역에 동참해주시고 함께 이 사역을 이끌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20년에도 과신대가 열심히 뛸 수 있도록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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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33 (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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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



과신대의 소식을 전하는

과신대 VIEW - 33호


과신대 칼럼

 다양성 가운데 일치

강사은
과신대 실행위원장

안녕하세요. 과신대뷰 회원 여러분. 2020년에 과신대 운영위원장으로 섬기게 된 강사은입니다. 2017년 가을에 우종학 교수님의 강의와 과도기(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북콘서트를 매개로 과신대와의 만남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전히 새내기 같은 제게 주어진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었습니다. 지면을 통해 과신대뷰 회원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더보기)


혹시 과신대 사무국에 오신 적 있으세요?
멋진 바와 소셜공간 그리고 근사한 사무실,
사진과 함께 사무국 이야기를 구경해보세요 : )

▶︎▶︎ 사무국 소식 보러가기

소소한 사무국 소식을
정회원 여러분에게 전달해 드립니다.


 과신대 사무국 이야기 

과신대 사무국에선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과신대람들]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로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오늘은 과신대 정회원이신
이혜련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글보기)

 

[Coming Soon]
 

<2020 과신대 핵심과정> 안내

성경과 신학, 과학, 그리고 윤리를 포함한 주요 내용을 배울 수 있는 새로운 교육과정이 2020년 3월에 열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해주세요. (더보기)

핵심과정으로 가는 첫걸음!
<기초과정 I>온라인 특별할인 기간연장


과신대의 주요 프로그램인 <기초과정I>을 2월 한 달간 50%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해주세요.

(더보기)

[ 2020 과신대 교사 모임 후기 ] 
 
과신대 과학 선생님들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그동안 과신대 교사 모임에서는 청소년 캠프와 교재 개발을 위해 매월 한 번씩 모여서 열심히 회의하고 준비를 해왔습니다.
 
2020년에는 좀 더 내부 역량을 강화하고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올해는 자문위원 교수님 두 분이 함께 해주시기로 해서 더욱 기대가 됩니다.
 

[과]
[서평] 메리 그리빈 & 존 그리빈의 "세상을 바꾼 위대한 실험 100"
(글: 윤세진, 과신대 교사팀)

이 책은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는 실험 중에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실험을 100개 선정하여 그 실험의 간략한 내용과 과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더보기)

 

[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로서,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과학지식의 틈이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일까요?
번역: 김영웅 / 감수: 강상훈

(글보기)

 

[과신대 이야기 - Story]
[과신대 기사연 공동포럼 후기] 
우리의 진짜 적은 무지이다
글 : 최성일 기자

이번 공동포럼으로 인해, 고등학교 교단에서 이전보다는 좀 더 쉽고 친절하게 진화론과 창조과학, 공산주의, 동성애, 이슬람이라는 시대적 이념과 과제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점이 유익했는지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더보기)

[북클럽 이야기]
[1 제곱 밀리미터, 1페타바이트] 

분당/ 판교 북클럽 모임 

승현준 교수의 ‘커넥톰’ 후반부에서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과학 이론(혹은 가설)과 기술” 이것은 마치 2개의 수레바퀴와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역사의 한 축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더보기)
 
 

[북클럽 소식 - Book Club]
 



과신대와 뜻을 함께 할 협력교회를 모집합니다. 

과신대는 과학주의 무신론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복음의 변증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위해 건강한 창조신학을 교육하고 연구합니다. 

과신대의 비전과 사역을 지지한다면 과신대와 함께하는 교회로 동참해 주세요. 

과신대는 앞으로도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기독교 교육 컨텐츠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보급하기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지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더보기)

 
 

 

<과.신.대 비전>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일반계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 잡힌 대화를 목표로 2가지 비전을 갖습니다.        

1
-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의 결과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내용을
함께 읽어가며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연구합니다.
이를 위해 과학 및 일반학문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2
-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바르게 배우도록 한국교회에 균형 있는
교육을 제공하며 이를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합니다.

 
<자문위원>

  강상훈 교수 | 베일러대학교 생물학
  권영준 교수 | 연세대학교 물리학
  김근주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김기석 교수 | 성공회대학교 총장
  김기현 목사 | 로고스서원 대표
  김요한 목사 | 새물결플러스 대표
  김익환 교수 |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김정형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근한 교수 | 유타대학교 기계공학부
  박영식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일준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박치욱 교수 | 퍼듀대학교 약학대학
  박화경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박희주 교수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박희규 교수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백경민 교수 | 숭실대학교 정보사회학과
  송수진 교수 | 고려대학교 글로벌경영학과
  신은철 교수 | 카이스트 경영공학부
  신희성 교수 | 인하대학교 수학과
  오세조 목사 | 팔복루터교회
  우종학 교수 | 서울대학교 천체물리학과
  윤철호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이길연 교수 | 경희대학교 의대, 외과과장
  이문원 교수 | 강원대학교 과학교육학부 명예교수
  이상희 교수 | 캘리포니아대학교 인류학과
  이상은 교수 | 서울장신대학교 조직신학
  이정모 관장 | 서울시립과학관
  이현식 목사 | 강남중앙교회
  이택환 목사 | 그소망교회
  임범진 교수 | 연세대학교 의대, 병리학교실
  장왕식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정대권 교수 | 항공대학교 항공전자정보공학
  정삼희 목사 | 신도중앙교회
  정  준  목사 | 더처치
  조성호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차정호 교수 | 대구대학교 화학교육
  최승언 교수 |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
  팽동국 교수 | 제주대 해양시스템공학
  허  균 교수 | 아주대 의과대학 신경과
  현요한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황소현 교수 | 차의과학대학교 병리과/의생명과학과
<운영위원>

  우종학 | 대표

  장현일 | 총무이사
  정대경 | 연구팀장
  윤세진 | 교육팀장
  백우인 | 출판팀장
  강사은 | 북클럽팀장
 

  구형규 | 감사
  김성래 | 감사

  최경환 | 기획실장
  장민혁 | 행정간사
  이슬기 | 미디어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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