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이런 휴가지 어떠세요?

 

올해 이런 휴가지 어떠세요?

 

글_ 정준 (더처치 담임목사, 과신대 자문위원)

 

 

올해는 코로나 여파로 휴가 기분이 덜 나지만, 그래도 일상을 벗어나고픈 열망을 안고 휴가 계획을 잡아보는 것은 그 자체로 설렘을 준다.

 

올해 휴가 계획을 세우는 과신대 회원들에게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휴가지를 제안해보고자 한다. 물론 코로나19 상황에서 안전한 야외 공간으로.

 

한탄강 (출처: https://100mountain.tistory.com/445)

 

최근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에 등재된 곳이 있다. 포천 한탄강 일대이다. 세계 지질공원은 유네스코가 미적, 고고학적, 역사문화적, 지질학적 가치를 지닌 곳을 보전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지정하는 구역이다. 세계유산, 생물권 보전지역과 함께 유네스코의 3대 보호제도 중 하나이다.

 

포천 한탄강 일대는 우리나라 4번째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난 7월 7일 최종 승인을 받은 곳이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에서 순서대로 제주도(2010년), 경북 청송 주왕상 일원(2017년), 광주·전남 무등산 일대(2018년) 등 3곳이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어 있다.

 

포천 한탄강은 국내 유일의 현무암 협곡 하천이다. 신생대 4기 현무암질 용암이 분출하면서 만들어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생대 제4기는 인류 역사가 시작하기 전인 약 258만 여전부터 약 1만 년 전 선사시대까지를 의미한다. 이 중에서 한탄강의 협곡은 5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 북한 오리산에서 분출한 용암과 침식작용에 의한 주상절리와 용암지대와 더불어 U자형 용암 협곡으로 유명하다. 이런 복잡한 지질의 연대와 역사가 머리 아프다면, 이 곳에 가서 그냥 아름다운 경치와 계곡을 즐기면 된다. 철원의 용암대지와 직탕폭포, 송대소, 고석정, 경기도의 화적연, 비둘기낭 폭포, 아우라지베개용암, 재인폭포 등 볼거리도 풍성하다. 한탄강을 따라 도보 트레킹 길도 여러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걷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강변을 따라 다양한 지질의 역사를 음미하며 걸으셔도 된다.

 

고석정 (출처: https://bit.ly/2EyIalD)

 

여행이란 무엇일까, 단순 관광, 순례, 방랑? 휴가지를 선정하면서 여행자가 어떤 개념과 가치를 부여하고 길을 나서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여행에 대한 정의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지구의 역사가 담겨있는 다양한 지질을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즐기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흔적과 숨결을 느껴보는 여정이라면 순례 여행이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별 계시인 성경과 함께 일반 계시인 자연을 누리는 세계 지질공원 탐사 순례 여행을 이번 여름휴가에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이스라엘, 요르단, 터키, 그리스의 성지만 순례길이 아니요, 야고보의 길로 알려진 산티아고 순례만 순례길이 아니다. 이 땅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창조섭리와 질서가 신비하고 오묘하고 특별하게 지질의 역사 속에 담겨있기에 이 또한 그러한 마음으로 걷는다면 순례길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우라지베개용암 (출처: http://blog.daum.net/kimyou3/9414273)

 

창조과학회에서 그랜드캐년으로 창조과학탐사여행을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국 서부를 향해 비행기를 타야 하는 일정이라 400여만 원이 든다고 알고 있다. 그에 비해, 그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우리나라 이 땅의 지질의 역사를 공부하고, 과신대 기초과정을 이수한 소양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 지질공원 4곳 중 하나라도 걸어본다면 올여름 휴가지로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싶다.

 

나는 제주도와 광주 무등산 일대, 한탄강 유역을 돌아봤다. 청송 주왕산은 현재 계획 중이다. 4곳이 전국 동서남북 사방에 한 곳씩 골고루 흩어져 있어서 자신이 사는 곳 인근으로 떠나기도 좋다. 지금까지 가 보았던 모든 곳이 다 좋았다.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할 만한 곳들이었다. 그 마음을 느끼니 더 좋았다. 좋은 것은 나눠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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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sensibilisㅡ"untact "

 

Homo sensibilisㅡ"untact "
그대에게 접속 contact 하는 눈을 보았다. 



그대는 눈으로 존재한다.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은 눈만 보여준다.
미소 짓던 그대 입은 미치도록 보고 싶은 그리움이다. 솜털이 삐죽 서도록 달콤하게 속삭이던 그대 입술은 기억에 없다. 기억마저 깎아내 버린 천 개의 바람만 불뿐이다. 입은 얼굴에서 가려져야 한다. 

머리카락에 바짝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맡던 코는 퇴화되어간다. 코는 더 이상 그대가 스칠 때 맡아지던 향기에 빠져들 수 없다. 봄바람에 실려온 그대의 샴푸 향기는 아련하기만 하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코는 불안하다. 코는 없어져야 한다.  

눈, 코, 입이 있는 얼굴은 위험하다. 코와 입이 가려진 얼굴이라야 그대도 나도 서로에게 안전하다. 코와 입이 가려진 얼굴에서 안전한 것은 눈이다. 안전하게 남겨진 눈은 코되기와 입되기를 요청받는다. 얼굴에 있는 구멍들 중에 다른 구멍은 위협적이고 폭력적이다. 오직 안전한 구멍은 눈이다. 망막의 신경들은 세상과 접속하는 유일한 코드다. 

그대의 손은 위험한 신체다. 그대가 손으로 만지는 것들은 하나같이 꺼려지고 위험한 것들이 되어버린다. 만지는 손은 불안을 생성하고 안전을 소멸시킨다. 그대에게 내밀던 따뜻한 손은 환대와 환영이 아니라 거절하고 멈칫거리게 하는 손이다. 어깨를 도닥이는 손은 혐오다. 그 손은 거세되어야 마땅하다.

그대 얼굴에서 코를 지우고 입을 지운다. 그대의 몸에서 손을 지운다. 얼굴의 구멍들이 사라지다보면 기관을 만들기 전의 세포까지 내려간다. 세포 덩어리들. 그대는 온통  덩어리다. 그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내 하루엔 그대는 없고 덩어리만 있다. 나부끼는 추억까지도 삼켜지고 오직 덩어리만 남았다.  

 


덩어리는 인간이 아니다. 덩어리는 동물이다. 인간은 동물되기를 한다. 덩어리는 푸줏간에 놓인다. 덩어리는 퇴행한다. 덩어리는 부화 중인 달걀이다. 덩어리는 미분화다. 덩어리는 원점이다.

그대의 얼굴은 해체되고 남겨진 눈은 더듬이가 된다. 그대의 얼굴은 눈이고 눈은 더듬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머리는 더듬이로 존재한다. 눈은 그대의 손도 대신한다. 눈은 만지는 눈, 더듬는 눈이 된다. 그대의 몸은 눈이다. 눈은 더듬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몸은 더듬이다. 드디어 그대는 눈만 남았고 눈은 그대의 몸이자 더듬이다. 그대는 더듬이다.

지워진 얼굴의 자리에는 인간적이지 않은 머리만 있다. 온갖 감각을 수용하는 더듬이 머리다. 그대의 몸은 덩어리이고 더듬이다. 그러나 새롭고 낯선 것을 생성해내는 덩어리다. 덩어리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의 영역이다. 덩어리 되기는 창조적인 뒷걸음이다. 

코와 입을 가리는 마스크는 덩어리로 만든다.  가려진 얼굴은 덩어리다. 우리는 인간되기 전으로  뒷걸음질 친다. 덩어리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영역이다. 인간은 몸이고 몸은 덩어리다. 고통받는 인간은 동물 같다. 고통받는 동물은 인간 같다. 

고통의 비명은 눈으로 지른다. 고통으로 눈이 일그러진다. 눈은 벽을 손톱으로 긁으며 몸부림치는 고통을 느낀다. 그대를 부르는 것도 눈이다. 원망스러움과 야속함을 말하는 것도 눈이다. 눈은 불안과 두려움을 맛본다. 눈은 고통으로 불덩이가 된 체온을 잰다. 모든  감각은 오직 눈으로만 접속한다. 

비 오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지하철에 탄 사람들, 일정 거리만큼 떨어져 앉은 연인들, 갤러리를 찾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눈으로만 세계와 접속한다. 나는 눈으로 세계와  접속하는 그대를 보았다.  

 

 


 

그대가 그립다 / 함한식


바람이 불 때면 그대가 그립다
바람결에 날리는 머리카락에 나던
그대 내음이 맡고 싶어진다

눈이 내리는 날엔 그대가 그립다
하얀 눈을 맞으며 좋아라 뛰던
그대의 청순함이 보고 싶다

비가 오는 날엔 그대가 그립다
어깨동무로 우산을 쓸 때 전해지던
그대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

구름 낀 날엔 그대가 그립다
여러 가지 모양의 구름들 속에
그대 닮은 구름을 찾을 수 있으니까

햇빛이 따사로운 날엔 그대가 그립다
꾸밈과 숨김이 없는
그대의 맑은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금방 만나고
금방 헤어져도
또다시 그대가 그립다

 

 

글_ 백우인 (bwooin@naver.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온라인 베리타스포럼 2020을 보고

 

온라인 베리타스 포럼 2020을 보고

 

 

1992년 하버드대에서 시작된 베리타스 포럼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가다가 국내에는 고려대가 중심대학이 되어 2018년 1회를 시작하였고, 올해 3회째가 되었습니다. 1회에서는 오스 기니스 교수를 주강사로 모시고, 강영안 교수, 우종학 교수가 과학자와 철학자의 기독교적 사유라는 주제로 대담을 했고, 2회에서는 제임스 스미스 교수를 주 강사로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올해는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과 명예교수이신 존 레녹스(John Lennox) 교수를 모시고 “코로나바이러스 세상,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라는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존 레녹스 교수는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에 관심을 가지고 무신론자들과의 논쟁에 대해 알아본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들었을 법한 분입니다. 저도 레녹스 교수가 리차드 도킨스와의 논쟁에서 논리적으로 무력화시켰다는 말을 여러 번 읽고, 들었었는데, 영상으로나마 모습과 육성을 보고 들으니 감회가 무척 남달랐습니다.

 

1부 영상 대담을 진행하신 김익환 교수는 “최초의 7일” 과신대 북토크에서 존 레녹스 교수에 대해 “C. S. Lewis 이래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라고 소개하셨었는데, 제가 이번에 더 감명 깊게 느낀 것은 레녹스 교수의 논리 정연한 변증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순수한 신앙심이었습니다. C. S. 루이스의 글을 읽을 때에 느꼈던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 그리고 하나님을 거짓 없이 믿는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표현들과 확신 같은 것을 이번 온라인 베리타스 포럼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익환 교수는 미리 선별한 여섯 가지의 질문을 차례로 존 레녹스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코로나바이러스 세상,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Where is God in a Coronavirus World?)”라는 책을 쓴 이유와 주요 논점은?
(2)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는?
(3) 무신론적 세계관으로는 재앙과 고통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이유는?
(4) 코로나 희생자들을 돕고,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무신론에는 선이나 도덕이 나오기 어렵다는 의견은 너무 편협한 것은 아닌가? 인간의 도덕의 기원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설명을 해 주신다면?
(5)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기독교의 희망은 무엇이며, 다른 종교에는 그런 희망이 없는 것인가?
(6) 부활에 대한 소망과 영원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강조하셨는데, 한국 교회 내의 내세를 강조하는 신앙이 현실 세계를 부정하게 된다는 우려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레녹스 교수는 이 여섯 가지 질문 중 (4)번 '인간의 도덕의 기원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설명'이 왜 잘 못 되었는지를 가장 길고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마치 리처드 도킨스와 논쟁할 때처럼 먼저 사회생물학자들의 핵심 주장들을 자세히 설명한 다음, 왜 그것이 자체 모순인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설명 중 문외한인 제 귀에 쏙 들어온 것은 다음과 같은 결론이었습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우리는 그저 유전자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유전자의 힘을 거스를 수 있다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유전자를 거스를 수 있는 힘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타종교와의 관계를 묻는 다섯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귀에 쏙 들어온 것은 결혼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레녹스 교수는 타 종교와 기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한 후 차이점을 결혼을 비유로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 타종교와의 공통점: 수많은 윤리적 가치들

- 타종교와의 차이점: 신과의 관계. 타종교들은 “공로 종교(merit religion)”이지만, 기독교는 신과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구원은 선물이다.

 

레녹스 교수가 든 결혼 비유는 간단히 다음과 같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청혼한 뒤, 선물로 그녀에게 온갖 규칙과 법칙들로 가득한 요리책을 주면서 앞으로 4~50년간 이 요리책대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내 아내가 될 수 있다고 조건을 내거는 것은 결혼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들으면 웃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생활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 내에 문제가 되고 있는 내세 중심의 신앙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그는 부활 신앙과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다고 하면서 현실에 대해 무관심한 신앙 행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일갈하였습니다.

 

샤머니즘적 세계관의 유물과는 아주 다르게 기독교는 전적으로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영원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정말 놀랍고도 거대한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이 스토리의 일부가 될 수 있고, 바로 이점이 제게는 가장 흥분되는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세상을 등한시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2부 Q&A 시간은 갈릴리침례교회 앤디 박 목사께서 통역과 진행을 맡았습니다. 약 40분간 6명의 참여자가 온라인으로 다양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중 기독교 변증학의 효과와 무신론자들의 반응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수학자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무신론자들과 논쟁을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해온 이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알려진 존 레녹스 교수이지만, 그는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이라는 말 대신에 “설득력 있는 복음주의 Persuasive Evangelism”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합니다. 레녹스 교수는 베드로전서 3장 15절(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의 말씀을 근거로 고백하셨는데, 저도 “설득력 있는 복음주의”라는 말이 변증학보다는 더 좋게 들렸습니다.

 

답변 속에 레녹스 교수의 무신론자들에 대한 열린 마음이 느껴져서 더욱 좋았습니다. 포이에르바흐는 현실을 부정하는 종교인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칼 맑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 문제를 도외시한 종교, 특히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뼈 때리는 지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기독교회가 여러 면에서 잘못한 것이 많아서 방어적인 복음주의가 되어버렸지만, 레녹스 교수처럼 복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무신론자들이나 다른 종교인들과 공통의 윤리적 가치를 위해서 함께 일한다면,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에 대한 세상의 질문에 조금이라도 설득력 있는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C . S. 루이스 연구 모임을 하고 있는 분이었는데, 1962년 루이스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존 레녹스 교수가 직접 들었을 때의 소감이 어떠했는지 질문하였습니다. 루이스는 1963년에 소천하셔서 1962년의 강의가 꽤 뜻깊은 강의였을 것 같은데, 그 마지막 강의를 옥스퍼드에서 레녹스 교수께서 직접 들었다고 하니 어떤 소감이었을까 매우 궁금했습니다. 레녹스 교수는 루이스 교수께서 존 돈(John Donne)에 대해 강의를 하셨다고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루이스 교수가 지금 살아있다면 무슨 말을 하셨을까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아마 “고통의 역할(function of pain)”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거라고 하면서,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게 소리치시는 메가폰이다라고 요약하며 대담을 마치었습니다.

 

3부는 소그룹 별 토론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1, 2부를 유투브 영상을 통해 시청했습니다. 시청 후 소감은 유럽과 미국의 과학자나 수학자들이 이렇게 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힘 있게 전하며, 부드럽게 과격한 무신론의 예봉을 무디게 하는 모습이 참 너무 부러웠습니다. 지금은 과학시대이기 때문에 테야르 드 샤르뎅, 프랜시스 콜린스, 러셀, 존 폴킹혼 등등 과학분야의 전문가들이 증언하는 신앙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신대를 통해서 이런 분들의 목소리가 국내에도 많이 소개되어 다음 세대 중에서도 과학과 신학(신앙)의 두 날개로 훨훨 날으시는 분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글_ 최성일 (ultracharm@naver.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자연신학자의 소명: 리처드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

 

최근에 영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 1934~)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스윈번은 그동안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을 활용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해 왔다.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그 내용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6년에 <Is There a God>이라는 얇은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이 이번에 복있는사람 출판사에서 <신은 존재하는가 - 세계와 우리 존재의 기원과 과정과 목적을 논증하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독교 철학자 책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어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사연이 담긴 책이라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2007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리처드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졸업 논문을 썼는데,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몇몇 종교철학 개론서에서 리처드 스윈번이라는 이름을 접하기는 했지만, 그의 전체적인 사상을 접할 수 없어 어렵게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추억 속에 묻혀 있던 이름이 한참의 시간이 지나 다시 등장하니, 책장 깊숙한 곳에 꽂아 둔 졸업 논문도 오랜만에 찾아서 읽어 보고, 혼자서 히쭉거리며 이불킥도 날렸다.

리처드 스윈번은 이제 85세가 넘은 노학자지만 지금까지도 연구와 집필을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학문적 업적을 쌓고 있는 열정의 철학자다. 1972년부터 교편을 잡았고, 1985년부터 2002년까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기독교 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아마존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니 16권의 책이 나온다.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당대 철학으로 엄밀하게 논증하고 증명한 학술서라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책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나온 <신은 존재하는가>는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좋은 입문서이자 해설서가 될 것이다.

 

처음 스윈번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케이스 M. 파슨스(Keith M. Parsons, 1952~)이 쓴 <God and the Burden of Proof>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철학자 두 명을 소개하고 이들의 변증 방법론을 비교한다.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노터데임대학교의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 1932~)는 '개혁파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기존의 토대주의 인식론과 증거주의를 논파한다. 근대 인식론의 허점과 논리적 결함을 반박하면서 종교적 믿음도 나름의 방식으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논증한다.

반면 리처드 스윈번은 자연신학의 방식, 즉 특별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을 통해 신앙의 합리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연신학은 계몽주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와 기독교 철학자들이 지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종교적 믿음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정합적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어떤 방식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데 더 좋은 전략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있다. 다만 스윈번의 길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오랜 시간 기독교에서 사용한 방식이고, 특히 자연신학 전통이 깊이 남아 있는 영국에서는 여전히 인기 있는 방식이다.

자연신학을 통한 신 존재 증명은 철학사에서 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논리실증주의가 철학계를 뒤흔들면서 기독교 신앙은 옳고 그름을 떠나 아예 '무의미'(nonsense)한 명제로 공격을 받는다. 한동안 기독교 신앙은 지적 토대를 상실하게 되고 자신의 신앙을 변증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스윈번은 1960년대 이후 언어분석철학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구축하기 위해 힘쓴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된 언어분석철학을 활용해 반대로 기독교를 옹호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영미권 여러 기독교 철학자에 의해 시도되었고,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윈번은 유신론의 가정이 과학적 가정과 비슷한 것이라 여기며 개연성(probability)에 근거한 귀납 논증을 활용해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설이 제기될 때, 그 가운데 배경 지식이 확실하고 누적된 증거가 충분한 가설이 가장 좋은 설명이 될 수 있다는 논증이다.

보통 과학철학에서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라고 알려진 방식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 중에서 가장 좋은 설명을 제시하는 이론을 선택하여 진리로 믿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윈번은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는 다양한 논증들, 즉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도덕적 논증이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증거를 수반할 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개연적 명제로 만든다고 말한다. 유신론의 설명력이 다양한 논증이 누적되면서 점점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증거들에 의해 잘 지지되는 가설도 나중에 거짓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또 이렇게 확률이나 개연성에 근거해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게 과연 정당한 것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은 전부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아예 전부를 포기하든지 하는 어떤 절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선택을 강조하는 입장도 때로는 중요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갖게 될 때, 그것이 100% 확실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신뢰성의 정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인가? 스윈번은 자연신학의 후예답게 여러 증거와 증명을 통해 믿음의 신뢰도는 점차 높이는 방식으로 우리 신앙을 만들어 가자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유신론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다른 방식(예를 들면, 유물론이나 인간주의)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물리학과 화학에서 사용하는 공식과 용어를 살펴보면 우주가 굉장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복잡한 방법으로 움직이고 인간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칙은 근사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근사치를 높게 가지고 있어 세상이 어느 정도 규칙성으로 움직인다는 신념 때문이다. 규칙성을 통해 외부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그 규칙성이 인간이 이해하기에 충분히 단순해야만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대상 속에 자연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경향성을 집어넣어 그 자연법칙이 작동하도록 하신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이 대상에게 이런 경향성을 갖고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유신론의 단순성은 합리적 개연성의 정도를 모든 현상에 기대하게끔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존재 사실이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좀 더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이 세상이 꼭 그렇게 존재해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논리적 법칙과 원리를 제공한다. 문제는 과학은 사물의 존재 이유와 인간 존재의 이유를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결국 과학은 어느 지점에 가서 설명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이는 과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설명의 한계 때문이다. 스윈번은 과학이 우주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해 준다 하더라도 우주의 본질과 존재의 이유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인격적 설명이 필요한데 유신론이 바로 이런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유신론은 과학적 설명에 더해 인격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고, 이것이 설명의 힘을 한껏 올려 준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을 소개했다. 스윈번의 논증을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그의 기독교 철학 3부작(<The Coherence of Theism>, <The Existence of God>, <Faith and Reason>)을 봐야 할 것이다. 독특한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한 스윈번의 작업은 많은 이들에게 호감 혹은 반감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오늘날 귀납 논증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려 한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이런 논증이 이성의 영역에 신앙을 어정쩡하게 배치해 이 둘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었다고 논박한다.

그는 <Faith and Reason>에서 "신앙은 증거의 충분성에 비례하고 그 안에서 힘을 얻는다"고 말한 바 있다. 스윈번에 따르면 신앙은 결국 증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신념의 정도는 증거의 정도에 의존한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 신앙이 증거에 비례해야만 하는지를 한번 고려해 볼 문제다. 신앙의 신비를 굳이 과학적 증거와 확률로 모두 치환해야만 신앙의 근거가 마련되는 건 아니다. 별 이유 없이 그냥 믿고 싶어서 믿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이 남긴 업적과 공헌을 몇 가지 언급하고 싶다. 먼저 그는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들)이 자연철학과 과학과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고 은근슬쩍 다른 길로 도망치는 태도에 철퇴를 날린다. 스윈번은 증거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증명의 부담을 기꺼이 떠안으면서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그는 기독교의 합리성을 신앙의 영역으로 환원시키거나 증거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합리성의 기준과 다른 것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그들과 정면 승부를 하면서 기독교의 합리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철학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공정한 법칙과 규칙을 사용해 신앙을 합리적으로 변증할 방법과 길을 닦아 주었다. 또한 그는 어떠한 신념이나 이론도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소박한 실재론의 오류를 피해 간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전적인 신뢰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와 한계 내에서 조금씩 믿음의 개연성을 높여 갈 뿐이다. 때로는 의심하고 때로는 확신하면서 주어진 신념을 성실하게 쌓아 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는 신앙은 맹목적 헌신과 추종으로 이어져 오히려 신앙에 해로울 수 있다. 찬찬히 하나씩 따져 가며 기초를 다지는 신앙이 오히려 흔들리지 않고 오래갈 수 있다. 스윈번에게 배울 수 있는 기독교 철학이란 이런 성실함이다.

 

 

글_ 최경환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장)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출처: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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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7일

 

존 C 레녹스 | 최초의 7일
노동래 역 |
새물결플러스 | 2016

 

 

벌써 과신대 추천도서 10권 중 7번째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 의도는 나처럼 과.포.자(과학을 포기한 자)나, 일반 주부들도 과신대 추천도서를 읽으면 변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면, 과학 때문에 괜히 주눅 들어있던, 숨어있는 정회원들의 활동을 독려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추천도서 앞쪽 5권은 가벼운 접근에서 천천히 전체적인 모양을 다룬다면, 나머지 다섯 권은 (아마도) 깊이 있는 내용들을 다루는 것 같다는 느낌이 앞의 책 ‘오리진’을 읽으며 강하게 들었었고, ‘최초의 7일’을 읽으며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두루뭉술하게 다루었던 창세기 1, 2장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읽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보통 + 사람 + 주부로서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앞의 책들에서 계속 이야기되어온, 과학과 신학은 대립관계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또 앞의 책들에서 잠깐 언급된 갈릴레오의 에피소드를 자세히 밝히고 있어 흥미로웠다. 특이한 점은 책의 1/3 정도가 부록인데, 개인적으로는 부록을 먼저 읽고 난 다음 본문을 읽는 것이 이해에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동유럽의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고려해보기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한국에는 교회가 굉장히 많고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교회에 대한 자잘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본 것이지, 타문화권에서 살았다면 기독교를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해서 고려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독교가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좀 충격적이었다.

 

저자는 총 5장을 할애해서 최초의 7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란 부분은 현대에 지동설이 상식인 것처럼 과거에는 천동설이 상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동설을 믿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 전혀 불편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왜, 과학과 신학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지구가 오래되었다거나 천동설과 지동설의 주장과 믿음이 무슨 관계였다던가 최초의 인류는 어디서 어떻게 발생했다던가 하는 질문들보다 더 위에 있는 질문들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방법을 쓰든, 결국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류를 1초만에 지으셨든, 하루 24시간 x 6일에 걸쳐지으셨든, 하나님은 인류를 지으시고 아름답다 하시며 평안을 누리셨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물론 위의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인 레녹스는 우리의 시점을 과학과 신학의 대결에서 벗어나 우리가 왜 과학과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저명한 천체 물리학자와 창세기의 창조 내러티브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성서를 믿는 것이 원시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견해의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생겨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참으로 원시적인 발상이군요. 설마 그 구절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중략)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시적인 것은 당신이군요.” p.28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레녹스가 참 위트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7일에 관한 의견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텍스트를 비유로 또는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믿는 자신만의 관점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레녹스가 조금 비겁한 사람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7일에 대한 비밀을 알아가며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존중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예전에 젊은지구론 신봉자였고,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은 다 무시했다. 그 다음에는 진화적창조를 믿었고,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을 다 무시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과연 무엇이 중요한가. 나는 왜 책을 읽고 있는가. 하나님이 최초의 7일 동안 창조를 하시며 우리 인간에게 원하신 것은 무엇일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자신의 의견만이 진리인 양 뻣뻣하게 굴지 않고, 오직 우리 주 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만 떳떳하게 서로 마주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의 난이도가 점점 상승해 이 짧은 책을 읽는 데도 많이 힘들었지만, 계속 반복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 날 안개와 같던 것이 걷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다음에 읽을 책을 기대해본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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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온라인 기초과정 특별 할인

 

 

과신대의 핵심 프로그램인 <기초과정>을 8월 한달 간 50%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합니다.

 

✓ 영상 시청 방법: 온라인 <기초과정> 특별 할인 수업은 구글 클래스룸으로 진행됩니다. 수강신청자에게는 클래스룸 접속 코드를 보내드립니다. 구글 클래스룸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구글 계정(이메일)이 필요합니다. 계정이 없는 분은 미리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등록 신청: bit.ly/2ZMKcH6

 

✓ 일시 : 2020.8.1~8.21 (영상은 3주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 강사: 
우종학 교수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과신대 대표)

✓ 강의 내용
[1부 과학의 도전] 1강. 과학이란 무엇인가? 2강. 과학의 특성과 한계
[2부 성경 해석] 3강. 창조기사를 어떻게 읽을까? 4강. 성경과 과학 함께 읽기
[3부 무신론의 도전] 5강. 무신론의 도전 6강. 과학과 무신론의 차이
[4부 창조의 스펙트럼] 7강. 창조론의 스펙트럼 8강. 창조론에 대한 바른 시각


※ 기초과정을 수료하신 분은 <핵심과정>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핵심과정은 9월에 개강할 예정입니다. 


■ 수강료 : 30,000원  15,000원 (중고등학교 및 대학생: 10,000원)

■ 신청 : 온라인 신청 → 송금 → 신청완료

■ 계좌 :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등록비 납부가 확인되어야 수강신청이 완료됩니다. 등록비 납부가 끝나면 사무국에서 안내 문자를 발송해드립니다. 안내에 따라 구글 클래스룸에 들어오시면 수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 궁금한 사항은 언제든지 과신대 사무국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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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8월 온라인 북클럽 "코로나19와 하나님"

 

2020년 8월! 특별한 북클럽을 시작합니다!

 

과신대 회원들의 자발적인 모임이었던 지역 북클럽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주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온라인 북클럽 모임을 준비했습니다. 박영식 교수님과 함께 "코로나19와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2회에 걸쳐 온라인 북클럽을 진행합니다. 각자 집에서 책을 읽고 온라인으로 정해진 시간에 만나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으로 준비했습니다. 책은 혼자서 읽지만, 생각은 함께 나눌수 있습니다. 따로 또 같이, 과신대 온라인 북클럽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참가신청: bit.ly/2WzgXWk

 

과신대 온라인 북클럽 "코로나와 하나님"

2020년 8월! 특별한 북클럽을 시작합니다! 박영식 교수님과 함께 "코로나와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2회에 걸쳐 온라인 북클럽을 진행합니다. 각자 집에서 책을 읽고 온라인으로 정해진 시간에 만나

docs.google.com

 

** 온라인 북클럽은 화상회의 프로그램 ZOOM으로 진행합니다. **

 

  • 일시: 2020. 8. 19(수), 8. 26(수) 저녁 8시 (2회)

  • 튜터: 박영식 교수(서울신학대학교, 과신대 자문위원)

  • 참가비: 1만원(과신대 정회원 5천원), 선착순 50명 모집

  • 교재
    8월 19일(수) : 톰 라이트의 <하나님과 팬데믹>(비아토르, 2020)
    8월 26일(수) : 월터 브루그만의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IVP, 2020)

 

* 저녁 8시부터 약 30분 간 튜터가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발표해 줍니다. 

* 튜터의 내용 발제 이후에 약 1시간 가량 참가자들과 토론 및 질의응답 시간을 갖습니다. 

* 책을 미리 읽어오시면 좋지만, 읽지 않고 참여해도 괜찮습니다. 

* 참가비를 납부한 수강자에게는 이메일과 문자를 통해 화상회의 ZOOM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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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온라인 과.신.톡!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과학은 기독교의 적이 아닙니다. 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상호 적대시하거나 배제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 설정을 잘 못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종학 교수님의 대표적인 저서 <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은 과학과 기독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책입니다. 이번 온라인 과신톡은 저자에게 직접 책 내용을 소개받습니다. 누구든지 참여하실 수 있고 저자에게 직접 궁금한 점을 물어보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자에게는 이메일로 참여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수강신청 : bit.ly/3h1XDbQ

 이번 과신톡 행사는 화상 회의 프로그램 ZOOM으로 진행합니다. 

 

* 일시_ 2020년 7월 27일(월) 저녁 8-9시
* 대상_ 누구나 (무료 행사)

 

* 진행 순서
8:00-8:10 강사 소개 및 인사
8:10-9:00 강사와 자유로운 대담

* 우종학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새물결플러스)를 읽고 참여하시면 논의를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 책 소개(알라딘): bit.ly/3h9kaUd

 

 

* 강사 소개_ 우종학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 거대 블랙홀과 은하 진화를 연구하는 천문학자. 연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산타바버라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UCLA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미 항공우주국(NASA) 허블 펠로십(Hubble Fellowship), 한국천문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천체물리학 저널〉 등 국제 학술지에 약 100여 편의 논문을 게재했고, 연구 이외에도 과학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강연과 저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며 연구하고 교육하는 단체인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으며, 블로그 ‘별아저씨의 집'을 운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블랙홀 교향곡》을 비롯하여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대화》 (공저) 《기원》 (공저)이 있고, 《현대과학과 기독교의 논쟁》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우주의 본질》 (공역)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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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11. 무슨 근거로 기독교의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무슨 근거로 기독교의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On what grounds can one claim that the Christian God is the creator?

 

 

진화과학은 많은 종교는 물론 무신론과도 일치합니다. 과학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미세조정(fine-tuning) 같은 몇몇 과학적 증거는 창조주를 가리키지만, 이것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에 비해 더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대략적으로 양립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비합리적이진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역사, 철학 및 다른 이들의 간증에서 비롯된 다양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궁극적으로 성령은 각 사람의 삶에서 예수님과의 관계 안으로 그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역사합니다.

 

 

일치

 

기독교 교리는 우리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대략적으로 양립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우리에게 빅뱅 이론을 상기시키는 방법으로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빅뱅 이론이 창세기 기자가 가졌던 세계관의 일부는 분명히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전능하심, 사랑하심 및 완전하심과 같은 기독교 하나님의 특징 중 많은 것들을 반영하는 우주를 보여줍니다.[1] 예를 들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완전하심은 자연법칙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이 성장하도록 정교하게 조정되고 있습니다. 과학적 관점에서 우주의 이러한 특징은 놀라운 것이며, 더 자세한 설명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생명에 상응하는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기독교의 내러티브에 비추어 볼 때, 우주의 미세조정은 말이 됩니다. 성경은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2]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의미 있는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존재와 일치합니다. 그리고 급진적 이타주의는 진화론적 설명에는 도전이 되지만, 기독교에는 아주 잘 어울립니다. 예를 들어, 왜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그녀의 인생을 보냈을까요? 왜 군인들은 그들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생명을 희생할까요? 이러한 예들은 자신의 창조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와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들어맞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영원한 미스터리는 세상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3] 우리가 과학적인 발견을 하고 그것을 시험할 수 있는 지능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기에 우리가 우리 주변 세상에 대해 과학적 감각을 가질 수 있고 열망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알리스터 맥그라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현실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은 우리가 자연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며, 기독교인이 제공해야만 하는 더 큰 그림과 일치하는 미세조정 같이,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수수께끼이거나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4]

 

유일신 전통의 근본적인 주제 중 다수가 공유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선과 정의는 많은 신앙에서 가치를 지닙니다. 기독교와 다른 신앙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그의 부활에 대한 진리입니다. 진화과학과 예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독교 삼위일체 같은 핵심교리가 충돌할 일은 없습니다.

 

 

합리성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비합리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역사, 철학 및 다른 사람들의 간증에서 비롯된 다양한 비과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궁극적으로 성령께서는 각 사람의 삶에서 예수님과의 관계 안으로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 역사하십니다.

 

 

[1]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성경으로는 시 139:1-18, 사 40:10-31, 욥 40을 보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경으로는 요1 4:16, 시 145:8-9을 보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해서는 삼하 22: 31을 보라. 기독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목록은 성경 전체에 발견되고 많은 구절이 이런 특징을 직접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열거한 구절들은 결코 포괄적인 것이 아니다.

[2] 창 1:26-27.

[3] Albert Einstein, “Physics and Reality,” Journal of the Franklin Institute 221 (1936): 351, quoted in Alister E. McGrath, A Fine-Tuned Universe: The Quest for God in Science and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105.

[4] McGrath, A Fine-Tuned Universe,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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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해롤드 쿠쉬너 |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 김하범 | 창

 

이신형 (과신대 실행위원)

 

 

내가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과신대에서 과정신학에 관한 콜로퀴움이 있었는데, 강사로 나오신 장왕식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이다. 절판되어서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ebook으로는 계속 판매가 되고 있었다. 그냥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박원순 시장의 사망으로 인해 마음이 많이 흔들렸고 그래서 읽고 있던 책을 놓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아들이 조로증에 걸려 15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깊이 묵상한다. 그리고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고 또한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우리의 잘못이거나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다른 이유로 허락하였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이는 고통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하나님의 뜻에 자꾸 끼워 맞추게 한다. 이는 욥기의 세 친구처럼 고통받은 이를 정죄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착한 사람에게 닥쳐온 고통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은 분, 또는 하나님 당신의 뜻을 위해 우리에게 고통을 야기시키는-심지어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잔인한 분으로 만든다. 위로하는 이는 좋은 목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슬픔과 고통 가운데 그 이야기를 듣는 이는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자책하고 원망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하나님에 대해 전능성을 내려놓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신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꺽고 우리를 인도하지 아니하신다. 다만 우리와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법칙을 깨뜨리지 아니하신다. 다만 그 자연법칙으로 인해 생기는 재앙이 가져오는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꺾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신다. 아니 거스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막을 능력이 있지만 막지 않으시는 잔인한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통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거둬달라는 기도가 의미 없음을 안다. 암 검사를 받고서 좋은 결과가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는 의미가 없다. 이미 검사 결과는 검사하는 순간 정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병을 기적으로 낫게 해 달라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 게 정상이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해서, 정성이 부족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기도한다. 우리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아픔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 고통에 우리도 참여한다. 그리고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준다. 기도가 그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그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고통을 이기고 슬픔을 극복할 능력을 얻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신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박원순 시장의 사망은 나의 마음을 매우 크게 흔들어놓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허락하신 것은 아니라는 통찰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도록 한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막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막지 못하시는 것이 바로 케노시스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신비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보다 더 크게 아파하시고 고통을 더 크게 함께하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기도가 더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한국 기독교는 차별금지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교회가 탄압받는다고 걱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심으로써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신다. 교회는 그런 주님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가? 지금의 교회는 고통을 함께하시는, 고통을 온몸으로 짊어지신 예수님을 머리 삼고 있는가? 교회는 고통을 받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차별받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하시는데, 교회는 교회가 받을 고통을 두려워하며 외면하지 않는가? 아니 오히려 차별을 더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회가 많다. 그리고 코로나 19 감염의 주된 경로로 지목되면서 사역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우리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이 방해받는 모습을 불평하고 탄압받는다고 성토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 19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어려움과 함께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 교회의 예배와 교육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보다 낫다.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실천하는 것이 예배보다 중요하다.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