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sensibilisㅡ"스푸마토Sfumato"

 

모호한 경계에서 경건한 생각을 보았다.(60)

 


안개 낀 날엔 세상의 표정을 붙잡을 수가 없다. 옅은 안개가 만드는 광경은 오랜 공백 끝에 나타난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지 시큰둥해하는지  알 수 없던 그대 얼굴 표정이고 시야가 흐릿해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새벽시간이다. 

먹구름이 짙은 하늘은 장마 때 널어 놓은 빨래의 감촉이다. 첼로의 낮은 선율이 스며들어 있는 공기가 스쳐 지나가면  세상은 마법에 걸려, 또렷했던 사물들의 경계와 경계가 서서히 섞이고 합쳐지면서 뭉개져  흐릿하고 자욱해져서는 결국엔 사라진다. 

앞산과 뒷산이, 건물과 건물이, 도로와 자동차가, 하늘과 지평선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모호해진다. 서로 이질스럽다거나 혹은 생경하진 않더라도 머쓱하고 떠듬거리느라 서로의 곁을 내어주지 못하던 사물들이 서로의 전부를 쥐어준다. 페라스peras, 즉 나와 너,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라는 선을 그어 경계 짓던 것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곳엔 공존만이 머문다. 

수묵화 같은 세상이 펼쳐지는 비 오는 날의 풍경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묵화 속의 세상은  모호해진  사물들이  다양한 색채로만 있으면서  보는 이를 점점 가까이 잡아당겨  그 앞에 세우고 낮은 목소리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 오는 날 세상은 신비의 베일을 두르고서 사물들을  전혀 새롭게 보도록 상상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그곳에서는 딱딱하고 날카로운 것들은 견디지 못하며 분명하고 선명한 것들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습기 머문 날은  쨍쨍하고 선명하고 똑바른 빛들을 대기 중의 수분이나 먼지 입자들이 가차 없이 마구 사방으로 흩어버려서 사물들은 자연스럽게 연기가 공기 중으로 사라지거나 안개에 싸인 듯이 부드러워진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사물에게 있던 색채들의 명료함은 낮아지고 대신에 섬세하고 부드럽게 그러데이션 된다. 그리하여 앞에 있는 것에서 뒤로 갈수록 밝은 톤에서 어두운 톤으로 보이면서 사물들은 경계가 희미해져  아스라한 여운으로 밀려나 보인다.

사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회화에 응용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의미로 스푸마토sfumato기법이라고 불렀다. 레오나르도는 사물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기법을 사용했는데, 흐릿한 윤곽과 그윽한 색상을 통해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와 합쳐지게 하면서 보는 이의  상상력을 꿈틀거리게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자와 빛은 공기중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선이나 경계가 없이 부드럽게 섞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반투명한 유약을 겹겹이 겹쳐 올리는 방식으로 스푸마토 기법을 표현하여 입가와 눈가 같은 특정부위에 서른 차례의 붓질을 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얼굴의 표정은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있다는 것을 관찰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기에  눈과 입의 가장자리를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표현해 놓았다. 

그래서인지 모나리자는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고 꼭 나를 쳐다보고 있는것있는 것 같아 섬뜩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물화에서는 영혼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화가들에게  강조했던 대로  모나리자는 영혼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며  볼 때마다 매번 다르게 보인다.  어느 때는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미소가 슬프게 스며들고 또 그런가 하면 평온하고 신비한 매력이 전해져 온다.

이것일까 저것일까 모호한 것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면서 확실한 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누구라도 이것이 진실이야 혹은 이것만이 진리야. 이것은 확고부동해. 이것은 정확해라고 선포해주기를, 그래서 애매한 것으로부터 놓여나길 바란다. 우리는 O, X 로 선택하는 데에 익숙하고,  맞다 틀리다의 이분법적이고 흑백처럼 선명한 판결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유전형질인가 싶을 정도다.

내가 옳기 때문에 너는 틀려야 하고, 하나가 진실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것이 선이면 저것은 악이다.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를 돌아볼 때에 대립되는 것이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을 초과해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불확정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세계 본연의 모습이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다만 확률적으로만 입자들의 상태를 말할 수 있을 뿐 처음부터 사물을 이루는 기본물질을  우린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물질이 어디에 어떤 빠르기로 어떻게 위치하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도 없다. 선긋기 식의  '확실함'은 사라져야 할 유령이다. 그 유령은 그대와 나를 가파른 비탈길 위에 세워둔다.  

우리들의 이분법은 스푸마토로 희미해지고 사라져야 할 때이다. 사물들의 경계가 사라지듯이, 다양한 주장들의 경계와 입장들의 윤곽선이 확고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은 메마르고 딱딱하지 않을 수 있다. 나와 너의 경계가 없어지는 지점이 두카Dukha 에서 벗어나는 지점이라 했다.

그대와 내가, 너와 내가 뒤섞여들어가듯 흐릿한 경계는 무한한 상상력의 지대가 열리며  마주 보는 시선과 시선이 부드러워진다. 그곳은 비무장지대, 즉 대화의 장이다. 관념의 모험이 시작되는 곳, 'and'가 있는 곳, 우리들의 사유가 중첩되는 곳이다. 우리의 사고에도 스푸마토가 필요하다. 날 선 경계인 변경 말고 뭉개져서 부드럽게 이어지는 섞임과 내어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독선과 편협은 야만의 칼날이 되어 사람과 사람을, 공동체와 공동체를 난도질하며 상처를 입힌다. 그 상태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과도 같아서 내가 이기면 무엇이라도 빼앗을 수 있고 함부로 할 수 있으며 전유할 수 있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확실한'과 '확실함'이  주는 속임수는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우리는 확실함 대신에 모호함 속에서 무언가 추측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고 그리하여 스스로 사물과 사태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고민할 수 있는 것,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 확실함을 얻어 교만에 빠지고 융통성 없는 편협함의 독에 빠지는 것보다 복되고 경건하다고 할 수 있겠다.

모나리자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부드럽게 섞이면서 모호해진 경계선에 있음을 기억에 새겨본다. 나는 모호한 경계에서 경건한 생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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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밤의 끝에서는 

박준

까닭 없이 손끝이
상하는 날이 이어졌다

책장을 넘기다 
손에 베인 미인은
아픈데 가렵다고 말했고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고 말했다

여름빛에 소홀했으므로 
우리들의 얼굴이 검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새벽이 오면
내어주지 않던  서로의 곁을 비집고 들어가
쪽잠에 들기도 했다.

 

 

글_ 백우인 (bwooin@naver.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와 과학의 미래

출처: https://www.economist.com/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와 과학의 미래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올해 2월부터 지난 5개월간 코로나19는 이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이 바이러스가 그 어원의 뜻 그대로 ‘왕관’을 쓰고 지금도 기세 등등 정체를 숨긴 채 종횡무진하게 암약하고 있다. 6월 30일 현재 시각 보도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확진자 수는 1천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50만 8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며 세계 최강국을 자랑하던 미국에서 12만 8천여 명이 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어 세계 사망자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K방역이라고 자랑하며 잠시 우쭐했었는데 우리나라 상황도 2차 팬데믹을 예상할 정도로 작은 규모의 집단감염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지속되고 있고, 지금 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폭풍 가운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감염되지 않기 위해 다들 전전긍긍하고 있다. 과학의 일선에 선 전문가들은 국가의 절박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신속하게 백신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효용성에 대한 의심의 시선도 만만치 않다. 이 바이러스가 돌연변이에 능한 RNA 유형이고 이미 변이 된 코로나가 여기저기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게다가 그 백신의 구매비용이 엄청나서 일반 서민이 이것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불안한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20세기 이후 과학이 미세한 바이러스에 이토록 무기력한 적이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황망한 지경에 처해 있다.

 

 

그러면 종교는 어떠한가. 특히 모든 재난을 신적 섭리의 결과로 치부하는 기독교의 경우는 그 사정이 어떠한가. 맨 처음 중국 우한에서 이 바이러스 소식이 ‘우한폐렴’이란 말과 함께 퍼지기 시작할 때 국내의 한 유명 목사는 성급하게 중국 선교를 핍박하던 교회 철거 단장이 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1호 사망자라며 성급한 심판론을 확산시켰다. 이후에 대구 경북 중심으로 신천지 세력이 숙주가 되어 팬데믹의 확산을 주도할 즈음 그 심판의 대상은 신천지 이단종파로 옮겨가는 듯했다. 일부 극단적인 이념주의자들은 문재인 좌파정권에 대한 심판까지 읊조리며 SNS 공간을 달구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방역이 비교적 성공적인 결과로 드러나고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 감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어가면서부터 심판론이 쏙 들어갔다. 논리적으로 추론하면 이들이 지난 역사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적 침략의 오만한 행태에 대한 신적 심판을 얼마든지 떠들 만한 엄청난 사태였음에도 그저 잠잠했다. 일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내에 친일파 기독교인들이 꽤 많을 텐데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일본의 무기력한 대응을 두고 심판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후 신천지 감염 사태가 잦아들면서 일부 교회를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확산되니 신천지 이단종파나 기성 기독교 교회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즈음 수도권 집단감염 사태도 몇몇 교회들이 종종 그 현장으로 언급되면서 신천지 세력과의 비교 우위를 내세우기가 다소 멀쑥해졌다. 이처럼 코로나19의 위용은 과학과 종교의 텃밭을 휘저으며 이단과 정통을 가리지 않고 곳곳을 쑤셔대고 있다. 신실하고 경건한 자와 불경한 불신자의 경계도 의식하지 않고 마치 성령의 포즈를 흉내 내듯 불고 싶은 대로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이 바이러스는 인간의 모사와 모략을 비웃는 기세로 우리 삶의 일상을 집적거리며 침투하고 있다.

 

교회의 공예배가 위험한 감염 현장이 된 이래, 두어 달간 다수의 교회들이 예배를 온라인 화상 예배나 가정예배로 대체했다. 오프라인 예배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생존의 위기의식이 더욱 고조되었다. 뉴 노멀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각종 예언들이 난무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코로나19의 제왕적 패권 기간이 한없이 길어지면 앞으로 교회와 기독교의 미래, 종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한 논의와 대안이 자주 제기되곤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매일 감염자가 속출하면서 죽어가는 현실의 한 복판에서 별스런 위안과 평온을 담보하지 못한다. 맥 놓고 있으면 불안하니까 그냥 이런 얘기 저런 가능성을 떠벌이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부득이한 아우성이라고나 할까.

 

 

태초의 세계종교는 ‘교통 공간’에서 경계가 없었다. 마치 광야나 대양처럼 사위로 열려 있었고, 익명의 타자들이 서로 삼투하고 거래하면서, 또 번역하고 변용하면서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한 담대한 모험과 참신한 탈주의 동력만이 그 에너지로 활기찼다. 그러나 교리의 틀을 갖춰 제도화되면서 종교는 이질적 타자들이 서로 끊어 붙이며 생동하는 존재론적 연금술의 활력을 잃고 자기동일성의 포로로 전락했다. 그 결과 오늘날 종교는 재난을 빌미로 불안을 주입하거나 그 불안을 역이용하여 사람들의 내면을 묶어두는 체제 보전의 메커니즘으로 쇄말화되어간 측면이 없지 않다.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무한과 영원의 세계로 열린 과학적 지성을 억압하고 협소한 교리 체계에 인간의 상상력을 가두려고 한 시도였다. 교회가 그 중세적 오류를 시정하고 회개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는데, 이 땅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그 고렷적 퇴물을 다시 끄집어내 동일한 패턴의 오류를 되풀이하려는 증상을 곧잘 드러낸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종교의 미래는 여전히 희미한 불확실성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인류 종말의 시점이 단축되어 도래할 수도 있고, 단기간에 상황이 타개되어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희미한 안개의 지구촌에 불확실성과 위험의 변수는 더 많아졌고 그 수위도 높아졌다. 코로나 사태로 가려진 지구촌의 더 극심한 재앙에도 눈떠야 한다. 최근 한 보도에 의하면 올해 5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사상 최고치에 도달했다. 동토 시베리아가 펄펄 끓고 있고, 인도양 주변 대륙에 살인적인 메뚜기떼가 창궐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으며, ‘고질라’ 먼지구름이 북중미를 강타하고 있고, 아마존 열대우림은 활활 타오르며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다. 모두 가속화되는 지구온난화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재난이다.

 

종교와 과학은 이러한 전 지구적 재난에 공동보조를 취하며 공동 대응해야 할 때다. 상생의 기치는 늘 옳고 공존의 목표는 늘 희망적이다. 우리는 수백만 년간 이 지구를 지배해온 공룡의 멸종 앞에 겸손해야 한다. 고작 수만 년 역사 속에 숱한 시행착오를 딛고 간신히 문명을 일구어온 것이 우발성에 따라 제공된 자연의 선물, 신적 은총의 선물임을 너무 자주 잊는 건 아닌지 발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코로나19는 그 전위대로 우리에게 경고하러 파견된 하늘의 전령일지 누가 아는가. 점쟁이 노릇하듯, 종교를 일천하게 이용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섣부르게 입에 담지 말자. 금세 망령된 일로 드러난다. 대신 미래로부터 오시는 미지의 하나님을 향해 허름한 가슴, 진지한 지성을 회복하는 쪽으로 가는 게 좋겠다. 애당초 우리는 하나님이 이 만물 가운데 하시는 일의 시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컴컴한 존재 아니었던가.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