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순 교수 인터뷰]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다문화 인문학

 

"역동적인 공존을 말하다."

 

인하대에는 다문화융합연구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다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소를 설립한 곳입니다. 다문화 융합연구소는 다문화 연구 관련 학과를 만들고, 타 학교와 연계해 공동 연구를 하면서 다문화의 감수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학교의 담장을 너머 일반 시민사회 속으로까지  다문화인지 코드를 확산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는 곳입니다. 

다문화융합연구소는 7월 7일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다문화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콜로퀴움을 개최했고, 7월 17일에는 <다문화사회와  다종교 교육포럼>이 개최되었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과학과 신학만의 대화에만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관계와 대화의 장은 사회 전반의 주도적인 이슈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며, 다양한 분야가 서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과신대 백우인 팀장님이 다문화 융합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계신 김영순 교수님을 인터뷰하게 되었습니다. 아래 글은 교수님과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백우인(이하 백팀장):  다문화라는 말에는 휴머니티의 울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문화 안에는 어쩐지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 크게 다가오는데요. 어떤가요 교수님? 

김영순 교수(이하 김교수): 혹시  어린왕자 읽어보셨어요? 앙트완 드 생텍쥐베리는 휴머니스트입니다. 그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민족과 인종을 이어줄 수는 없을까? 고민했고 누구라도 공감하는 따뜻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인종, 종교, 언어, 사회적 환경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의 가슴의 온도까지 다르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의 책 어린왕자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어린왕자는 실제로, 너무나 다른 그 수많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잖아요. 남녀노소를 가리지도 않습니다.

백팀장: 어린왕자는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서로 친구가 되어 공존하게 하며 같은 진동수로 공명하게 한다는 말씀인 거죠?

김교수: 네 맞습니다. 사실 이상적인 다문화사회의 키워드는 공존입니다. 함께하는 것이 공존이며 공존은 공감으로 나아갑니다.

백팀장: 공존의 중요성은 알지만 우리 피부에 와 닿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협적이라고 느껴지고, 꺼려지고, 배타적인 마음이 앞서잖아요. 이번 코로나의 근원지인 중국을 혐오하는 정서도 그런 예가 되지 않나요? 또 종교 간의 갈등은 각 종교의 신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고요. 

김교수: 물론 공존이 잔잔한 물결 같은 평화로운 상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를 생각해 봅시다. 바람에 물결이 일렁이고 커다란 파도가 치고, 밀물과 썰물이 있듯이 그러한 모든 변화를 함께 겪습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경쟁도 있고, 갈등도 있는 공존인 것이죠. 협동도 하고 교환도 하는 공존, 다시 말해 꿈틀꿈틀 하는 역동적인  공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백팀장: 자연의 본래 모습은 다채로움, 다양성이니까, 자연은 다양성들의 조화를 지향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존의 대상 혹은 주체, 혹은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김교수: 좋은 질문입니다. 공존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라는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양성은 창조적이고 지속적이며 균형 잡힌 관계를 만들 수 있게 합니다. 다양성은 창의적인 새로움을 창발해냅니다. 공존의 공동체는 자연의 본성이며, 따라서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당연히  공존체적입니다. 

백팀장: 인류의 기원을 보면, 인간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가 옆에서 돕지 않으면 온전한 생명의 탄생은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생명의 탄생은 늘 누군가의 손길과 눈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교수님! 다종교 교육 관련 포럼에서 연구소 일원 중 한 분 가정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있었죠? 모두들 박수를 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김교수: 생명의 탄생에 대한 기쁨은 모든 민족과 인종과 나라의 경계를 허물고 긴장과 분열, 갈등을 녹여버립니다. 생명의 탄생만큼 하나 된 마음으로 온전히 기뻐하는 것은 없을 겁니다. 누구나 심장은 뜨겁고 생명을 갈구하며 조화를 희망하니까요.

 


백팀장: <포스트코로나시대의 다문화 인문학>콜로키움에서는 인류세와 자본세로 인한 전 지구적인 위기에 대해 미래를 조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언컨택트 시대에  뉴노멀에 대한 논의도 있었고요. 긍정적인 전망과 비관적인 전망이 엇갈렸는데, 공존이라는 키워드에서 바라본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교수: 어느 한 나라의 위기나 아픔 혹은 고통은 이제 그 나라 혼자만의 것일 수 없습니다. 예컨대 어느 나라의 경제적인 파산은 세계 경제에 영향력을 미치며, 어느 나라의  테러사건이나 스트라이크는 전 세계적인 시민들의 정서에 영향을 줍니다. 이것은 지독한 얽힘이죠. 촘촘한 그물망으로 엮어진 전 지구적 시민의식, 즉 세계시민이라는 의식이 저절로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문화, 다종교, 다민족, 다인종, 다국가를 하나의 원자화된 개체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관점의 지평을 거시적으로 넓혀야 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응답해야 합니다. 

백팀장: 세계시민 의식의 함양이 중요시된다는 말씀인데요. 그것은 실천의 문제와 직결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교수: 맞습니다. 실천의 문제죠. 이러한 세계시민의식과 공존체라는 인식은 하루아침에 자연스럽게 체화되지 않습니다. 연습과 훈련이 요청된다는 의미죠. 일차적으로는 나와 타자 사이에서 타자를 이해하고 경청하고 배려하며 양보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때 타자의 범위는 내 이웃, 내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 그리고 국가, 다문화에 속한 이들, 다민족, 다국가 등이 될 것이며, 결국은 전 세계가 하나의 커뮤니티로 연결될 것입니다. 
 
전 지구적인 세계시민으로 공존하는 세상, 나는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희망합니다. 

 


** 분주한 일정 가운데에도 시간을 내주신 김영순 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책] 쉽게 쓴 후성유전학

 

러처드 C. 프랜시스 | 쉽게 쓴 후성유전학 | 김명남 옮김 | 시공사

 

글_ 윤세진 (구일고등학교 과학교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천년에 대한 다양한 기대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여러 분야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것이라는 전망들이 많았었다. 그중에서도 과학 분야는 당연하게 기대를 받는 많은 분야들이 포함되었다. 20세기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중심이 된 물리학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유전자나 유전공학으로 대변되는 생명과학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1)

 

20세기 중반에 왓슨과 크릭에 의한 DNA 구조가 밝혀진 이래로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 생명공학 기술 등이 발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준 것이 사실이다. 유전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수사(修士)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이 완두를 이용한 실험에서 출발하였다. 토마스 모건(Thomas Hunt Morgan)에 의해 염색체 위에 유전자가 존재함이 밝혀졌고, 왓슨과 크릭의 연구 이래로 분자 유전학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였다. 생명공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혜택들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한 윤리적인 문제들도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가타카’나 ‘아일랜드’ 같은 영화는 이런 문제점들을 생각하게 한다.

 

 

대체로 생명공학 기술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유전자와 많이 연관이 되어 있다. 흔히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발표되곤 하는데,2) 이런 발표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전자가 사람의 여러 형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3) 실제로 유전자는 사람이나 다른 생물체의 형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전자는 DNA에 존재하며, 필요한 단백질을 만드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 유전자가 단백질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단백질은 생물체 내에서 다양한 형질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이 그림은 DNA가 단백질을 만드는 주인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기본적으로 이 생각은 옳은 것이다.

 

이렇게 유전자가 생물체의 모든 형질을 결정하는 주인 역할을 한다는 생각은 현대에 부활한 전성설이다.4) 전성설은 19세기까지 번성하다가 후성설이 등장하면서 19세기 중후반부터 쇠퇴하였다. 그러나 DNA에 의해 단백질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전성설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생명공학적인 기법들(최근에 논란이 되는 크리스퍼 기법도 결국은 이런 전제하에서 발전되는 기법이라고 생각한다)은 대체로 전성설의 입장이라고 본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지금까지 후성유전학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 이제부터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후성유전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5) 후성유전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독일이 네덜란드에서 실시했던 식량 봉쇄정책으로 인한 네덜란드 대기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산모의 영양상태가 태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연구하였는데, 태아일 때 기근을 경험하고 태어난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성인이 되었을 때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출처: http://www.p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21

 

후성 유전 현상은 환경이 세포의 변화를 일으키고, 세포라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유전자의 활동을 조정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세포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후성 유전적 조절을 받은 유전자의 특징은 유전자에 메틸기(CH3)가 붙는 것이다. 이런 유전자를 메틸화된 유전자라고 부르며, 이런 유전자는 활동성이 낮아져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세포마다 다르거나 개체마다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유전자가 형질 발현의 중심이 되는 것을 ‘유전자 감독 가설’이라 부르고, 후성 유전적인 형질 발현을 ‘세포 감독 가설’이라고 부른다. 유전자 감독 가설에서는 세포를 조절하는 정보를 유전자가 가지고 있으며, 유전자가 단백질 합성 단계를 통제하여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어 세포 활동을 통제한다. 반면, 세포 감독 가설에서는 유전자는 생화학 분자들로 이루어진 구성원들의 한 구성원이며, 이들의 상호작용을 세포로 본다. 따라서 단백질 합성 단계를 안내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세포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후성 유전적 영향을 미치는 것에는 앞에서 언급한 메틸화 이외에 DNA와 결합하고 있는 히스톤 단백질 변형에 의한 영향, 그리고 RNA에 의한 영향의 세가지를 제시한다. 이런 후성 유전적 현상은 당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후성유전적 영향을 받은 유전자가 자손에게 계속 전달되어 동일한 형질 발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비만 문제, 호르몬 관련 문제, 게놈 각인 문제, X염색체와 관련된 색맹과 관련된 문제, 암과 관련된 문제 등이 후성유전적인 현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후성유전 현상뿐 아니라 다른 동물과 식물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도 설명하고 있다.

 

출처: http://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464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몇가지 있다. 첫째로, 후성유전학에서 강조를 두어야 할 점은 “후성”유전학이라는 점이다. 기존과 같은 유전자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책에서 많은 유전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유전자들은 모두 환경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둘째는, 유전자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대의 전성설이나 근대의 전성설이 모두 후성 유전적 현상에 의해서 잘못된 것이 판명되었지만, DNA구조가 밝혀지면서 다시 전성설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본문 10장 참고). 이는 인간의 직관적인 이해가 전성설에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상과 친숙한 비유들을 제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후성유전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면, 후성유전이 훨씬 설명력이 크고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라마르크가 제시했던(아마도 라마르크 추종자들이 주장했을 수도 있다) 획득형질의 유전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라마르크는 유전자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였으므로 후성유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후성유전이 환경에 의한 유전자에의 영향이라고 볼 때, 살아가는 환경에 의해 변화된 유전자가 자손에게 전달되는 것은 큰 틀에서 라마르크의 언급 또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넷째는, 도킨스는 자신의 유명한 책인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기체는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제시했다.6) 이는 유전자 중심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전자가 중심이기보다는 세포가 중심이고 더 나아가서는 유기체가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유전자는 세포의 환경이나 유기체가 처해 있는 환경에 의해 얼마든지 후성유전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체의 유전 현상을 바라볼 때, 직관적으로는 유전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환경의 영향을 받아 유전자의 발현이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러한 후성유전적 현상은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나올 것이다. 유전자들이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연구와 동시에 유전자에 미치는 후성유전적인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함께 수행한다면 비로소 생물체내에서 일어나는 유전자에 대한 이해가 완성되지 않을까.

 


 

1) 임경순, "과학기술연재1-21세기 과학기술의 전망"  bit.ly/2PKQ0er

2) 비만유전자 bit.ly/3kz4f42, 신경질환의 유전자  bit.ly/2Fcbq1Q,  장수유전자 bit.ly/3kzu6sN, 범죄유전자 bit.ly/2XTLNcA

3) 형질: 대개 생명과학에서 형질이라 하면 유전적 형질을 말하며, 이는 생명체가 지닌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최근에는 형질을 규정하는 요건들이 다양화되어 생김새나 색깔, 크기뿐만 아니라 생리적 특징이나 행동양식의 특징 등도 중요하게 거론된다. bit.ly/3iwjI2U

4) 고전적인 의미에서 전성설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세오.  bit.ly/2DUqyAq

5) 후성 유전학 개념의 시작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세요. bit.ly/3amR01z

6)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이상임 옮김(2006).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13장.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제22회 콜로퀴움] 신경과학 시대에 인간을 다시 묻다

 

신경과학 시대에 인간을 다시 묻다.

 

오늘날 생물학, 유전학, 고인류학, 심리학, 인지과학, 신경과학 분야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는 눈부신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연구 결과만으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ㆍ신경과학적 사실들을 나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간에 대한 설명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리철학자 김남호 박사님은 '구성적 인격 이론'을 통해 오랜 시간 철학자들이 물었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 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뭔가 다른 능력을 갖고 있고, 제한적이지만 의지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심리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자아에 대한 탐구, 아울러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를 다룰 예정입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  이번 강연은 온라인으로만 진행됩니다. 
수강신청을 해주시면 이메일을 통해 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 일시: 2020년 8월 28일(금) 낮 12시

(수강신청 기간: 2020년 9월 4일, 영상시청 기간: 2020년 9월 11일)  

 

* 등록비: 5,000원 (과신대 정회원, 청소년은 무료)
   등록비 입금 계좌: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강사 소개

김남호 박사_ 2004년 울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B.A.)한 뒤에, 2010년 독일 브레멘(Bremen) 대학에서 철학 학사(BA)와 예술학 학사(BA) 학위를, 2017년 독일 본(Bonn) 대학에서 철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2016년부터 울산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전문 분야는 철학적 인간학, 형이상학, 윤리학이며, 주요 논문으로는 “인격, 인간인격, 그리고 인격 동일성”(2017) 외 다수가 있다. 저서로는 『철학자가 된 셜록 홈즈: 현대 심리철학으로의 모험』(새물결플러스, 2018)이 있으며, 역서로는『철학의 모든 것』(요나스 피스터 저, 손영식 외 공역, 북코리아, 2019)이 있다.

 

 

** 정회원 가입을 원하실 경우 입회신청서와 후원약정서를 제출해주세요.

> 정회원 입회 신청서 : bit.ly/2ZfJd2q
> 정기 후원 신청서 : https://bit.ly/2VLxHa6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짚신벌레도 주체적 경험을 즐긴다.

  • 저는 "전자도 주체적 삶을 즐긴다"에 공감했었습니다.

    "우주의 끝에 있는 전자 하나도 하나님께서는 이끄십니다."라는 C.S. Lewis의 말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ㅎ

    휘페르테스 2020.08.08 14:43
    • 우주의 끝에 있는 전자 하나도 하나님께서는 이끄십니다 라는 C.S 루이스의 말 너무 좋네요. 메모해놓고 저도 인용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완식 2020.08.14 13:55 DEL

 

짚신벌레도 주체적 경험을 즐긴다.

- 21회 콜로퀴움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에 대한 소감 -

 

글_ 과신대 김완식 기자 (comebyhere@daum.net)

 

 

故 신영복 선생은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글을 쓰기 위해 떠난 여행은 편한 것이 아니었으며 좋은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런 부담감 없이 다시 떠나보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어딘가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여행지가 너무 좋았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청산유수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할 법 한데,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할지 저런 이야기를 할지를 생각하며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의 참 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21회 콜로퀴움 강의를 들으면서 그 분의 마음이 딱 제 마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강의 내용에 빠져들다 보면 강의가 끝나고 나서 이 얘기 저 얘기할 말이 참 많을 터인데 강의 처음부터 어떻게 소감문을 써야 할지 무슨 내용을 넣어야 할지를 생각하며 듣다 보니 강의 듣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콜로퀴움 주제가 철학과 관련된 내용이다 보니 철알못(철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저로서는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이라는 강의 제목부터가 사뭇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강의였으며 나름 느끼고 생각할 게 많았습니다. 다음은 개인적으로 느낀 소감들을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21회 콜로퀴움은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장왕식 교수님께서 강의를 맡아주셨습니다. 강의 주제는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입니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과정신학적 관점에서 본’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자연주의는 결국 허무주위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자연주의를 과정신학 입장에서 보면 우주를 우연으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자연주의 철학 또는 과학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허무주의로 인도하고 있는지를 살펴본 후에 그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써의 과정신학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Science is truth >

"과학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 미국의 대통령 자문 위원, Fouci 박사 -

 

이번 콜로퀴움 강의를 들으면서 제가 가장 깜짝 놀란 말이 ‘Science is truth’, 즉 ‘과학이 진리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번역하는 사람의 의도나 가치관에 따라 ‘진리’라고도 할 수 있고 ‘진실’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실질적으로는 진리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로 생각해왔던 기독교 신앙적 입장과는 상반되는 것이라 다소 당황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우리 삶을 그리고 우리 가치관을 이렇게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하나님을 배제한 자연주의를 말하는 과학이요, 허무주의로 향하는 과학을 말하는 것입니다.

 

 

< 자연은 스스로 목적이다? >

 

‘자연은 스스로 목적이다’라는 말은 자연주의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가 목적이기 때문에 외부의 어떤 개입이나 도움도 사실 필요치 않게 되는 것이죠. 즉, 자연주의는 우리의 삶에 어떠한 목적이나 의미 부여를 하지 않습니다. 경희대 물리학과 김상욱 교수가 쓴 <울림과 떨림>이란 책을 예전에 참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단순히 물리학적인 내용을 넘어서 인문학까지 가미한 흔적이 보여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유익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책의 끝부분에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력의 산물이고 우주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의미는 없다’라고 언급했는데 이 말은 저에게 매우 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저는 현재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로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다니는 자녀 2명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교회에서 배우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과 교회에서나 집에서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직까지는 저에게 왜 다르냐고 심각하게 물어오는 학생은 없었지만 간혹 어떤 학생들은 이러한 차이로 인한 갈등에 힘겨워 하다가 결국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스스로가 목적이 되어 존재하고 있는 우주와 자연이 선택하여 진화하게 된 사람과 동물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가르치는 교육적 환경에서 결국 무신론과 유물론자들이 되어가는 학생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 옴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기계적 결정론으로부터 또는 이기적 유전자가 지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교육 환경으로부터 학생들뿐만 아니라 허무주의에 치닫고 목적의식 없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 짚신벌레도 주체적 경험을 즐긴다 >

풀잎 하나가 생성할 때도 인간 이성은 그것을

기계적 원인들을 통해 이해해서는 안 된다.

- 칸트, 판단력 비판 -

 

앞서 ‘과학이 진리다’라는 말에서 좌절감을 느꼈다면 위의 칸트의 말은 저를 다시 일으켜 주고 산소를 공급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칸트의 말은 바로 목적론적인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며, 과정신학을 만든 화이트 헤드 또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과정신학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자연주의의 기계적 결정론에 의한 무신론과 유물론이 만든 허무주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짚신벌레도 빛이 있다면 빛을 향해 움직이고, 아메바도 설탕가루를 향해 움직인다고 합니다. 비록 미물일지라도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심지어 양자역학에서는 전자마저도 주체적인 경험을 즐긴다고 합니다.

 

“양자 얽힘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어떤 조건에서 아원자 입자들은 ‘자유롭게’ 그 어떤 물리적 사건들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은 채 반응한다. 그들도 체험하고 결단한다.”

_ 존 H. 콘웨이, 사이먼 코헨

 

콘웨이와 코헨의 말은 주체적 경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진화의 역사에서 소수의 선구적 물고기들이 과감히 땅 위로 진출해 양서류, 포유류가 되었다고 하는 볼드윈 효과 또한 진화에서 있어서도 능동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짚신벌레도 주체적 경험을 즐긴다는 말이 참 재미있게도 들렸지만 한편으로는 하물며 미물도 그러한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정신학은 곧 유기체의 철학을 바탕으로 우연과 필연, 기계와 목적, 진화와 창조를 함께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혹자는 이 말을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입장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우연과 기계와 진화만을 주장하는 자연주의는 결국 허무주의로 귀결됩니다. 필연과 목적과 창조만 주장하는 신앙은 근본주의로 나아가게 됩니다.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도 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을 통해 접한 강의에서 과정신학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으나 자연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서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설명한 과정신학은 목적성을 가지고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를 준 좋은 강의였다고 생각합니다.

 

 

서두에 언급한 故 신영복 선생의 <나무야, 나무야>에 나온 글을 인용하여 짧은 소감문을 마칠까 합니다. 그 분의 글이 우연과 필연, 기계와 목적, 진화와 창조를 함께 생각하는 과정신학의 개념과 맥을 같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빛은 어두움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지혜는 당신의 말처럼 ‘결합의 방법’입니다. 선량하나 나약하지 않고 냉철하나 비정하지 않고 치열하나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결합의 지혜’, ‘결합의 용기’라고 생각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6. 지구공학 기술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출처: Christina Animashaun/Vox

 

글_ 김진수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지난 글에서 기후변화의 요단강, 즉 돌이킬 수 없는 연쇄적 반응이 일어나는 ‘티핑 포인트’를 소개했습니다. 기후 시스템 안에 여러 피드백 과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인류 활동으로 시작된 지구온난화 현상이 증폭될 가능성을 설명했는데요. 지금 당장 이산화탄소 등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연쇄반응을 막을 수 있겠지만, 경제적 피해가 따르기에 전 세계 국가가 난감해하는 상황입니다.

 


국제사회의 노력, 교토의정서와 파리협정


물론 모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엔기후변화협약은 1994년 3월 21일 발효되었고 거의 모든 국가(197개국)가 당사국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협약의 목표는 ‘인간이 기후체계에 위험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준으로 대기 중의 온실가스 농도를 안정화’하는 데 있습니다. 1997년 일본 교토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구체적인 감축 의무를 담은 ‘교토의정서’가 채택되어 2005년 2월 16일 발효되었으며, 우리나라는 2002년 11월 8일에 의정서를 비준한 바 있습니다. 교토의정서는 미국, 일본, EU 등 선진국에 대해 제1차 의무 이행 기간(2008-2012년) 동안 구체적인 감축 의무(1990년 대비 평균 5.2%)를 규정했습니다.

해당 기간 동안 일부 국가들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평균 22.6% 감축해서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교토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은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일본, 러시아, 뉴질랜드 등은 제2차 의무 이행 기간(2013-2020년)에 불참했습니다. 특히 미국은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는데도,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해 2001년 3월 협약에서 탈퇴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급성장을 하며 온실가스를 다량 배출한 중국, 인도 등이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어 감축 의무가 명시되지 않아 그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이에 따라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가 요구됐고, 2015년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신(新)기후체제의 기반이 되는 ‘파리협정’이 채택되었습니다. 교토의정서처럼 감축 의무를 하향식(top-down, 상부에서 결정된 내용을 개별 국가에 일괄 적용)으로 결정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국가 간 의견 대립이 심해 감축 수준 합의가 어렵기에, 파리협정에서는 더 많은 국가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기후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한 상향식(bottom-up)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개별 국가가 자국 상황을 고려하여 자발적 목표를 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5년마다 각 국가가 제출한 목표가 부합하는지 이행 점검을 하여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진행합니다.

 

   
국제 사회가 법으로 강제하지는 못해도 국가별 상황에 맞춰 노력을 해나가던 중, 돌연 2017년 6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합니다. 이렇듯 여러 정치적·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당장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발전과 운송 부분에서 화석 연료 사용이 감소하고 석유가 넘쳐나 보관할 곳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여전히 막대한 양의 화석 연료가 태워지고 있고 이산화탄소 농도는 2020년 5월 기준 417.1ppm을 기록하며 지난해(414.7ppm)보다 2.4ppm 증가했습니다.

 


지구공학 기법으로 온난화를 막을 수 있을까?


이에 일부 과학자들은 지구공학(geoengineering) 기법을 개발해서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이전 글에서 얘기했듯이, 온실가스는 지표면에서 나오는 적외선을 흡수하여 다시 지표면으로 방출함으로써 지표면의 온도를 높입니다. 그런데 온실가스보다 태양에서 전달되는 햇빛이 원천적으로 많은 양의 에너지를 쉬지 않고 발산하여 지구를 데우고 있기 때문에, 이 햇빛을 차단하면 지구 온도를 낮출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아이디어입니다.

이를테면 직사광선을 막아주는 나무 그늘에 있거나 양산을 쓰면 시원해지듯이, 성층권에 햇빛을 반사할 수 있는 화학물질을 비행기로 주입한다거나 바다에 대형 가습기를 띄워서 구름을 많이 만들거나, 지구와 태양 사이 우주 공간에 빛을 반사하는 거울을 가진 우주정거장을 띄우자는 등 많은 아이디어가 공론화되었습니다. 실제로 화산 활동으로 인해 화산재가 햇빛을 차단하기도 하는데, 화산 분출 시 방출되는 이산화황(SO2)이 성층권에 도달하면 산화과정을 거쳐 황산 에어로졸이 되어 햇빛을 차단하여 성층권 온도는 높이고 지표면의 온도는 낮추는 효과를 낳습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가장 큰 화산 폭발은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라는 곳에서 발생했는데, 당시 이산화황이 지표에서 44km 높이까지 도달했고 성층권에서 지구 전체로 퍼졌습니다. 대류권에서는 쉽게 침강되거나 비가 오면 쓸려 내려갈 수 있지만 성층권은 날씨 변화가 거의 없어서 화산재가 수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당시 세계 연평균 기온이 5도 정도 하강하고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 여러 지역에서는 낮은 기온과 폭우로 인한 기근 발생 기록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에서 발생한 화산이 이례적이었는데, 약 2천만 톤의 이산화황이 성층권에 올라갔고 1~3년간 지표에 도달하는 햇빛을 10% 감소시켜 지구 평균 기온을 0.2~0.5℃ 떨어뜨렸습니다.

 

출처: https://www.spp-climate-engineering.de/focus-program.html


이처럼 화산 폭발이 지표 온도에 순간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산 폭발로 인한 온도 하강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지속적인 온도 하강을 위해서는 많은 에어로졸을 성층권에 꾸준히 투여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오존층 파괴 및 환경오염을 일으키거나, 가뭄이나 기후 교란으로 식량 생산에 차질을 불러올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비록 햇빛을 차단하여 온도를 떨어뜨린다 하더라도,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계속 존재하기 때문에 바다에서 지속적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해양 산성화가 일어나는 등 온실가스 증가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기후변화의 비가역성


지난 글에서 이산화탄소의 수명이 길기 때문에 배출을 멈추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래프를 소개했습니다. 당래 많은 공학자들의 연구 끝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이산화탄소 농도를 산업혁명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지구의 기후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연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바로 기후변화의 비가역성 때문입니다. 비가역(非可逆)의 사전적 의미는 ‘변화를 일으킨 물질이 본디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길바닥에 물을 엎질렀을 때 쏟은 물을 다시 모아 컵에 담더라도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기후변화의 비가역성에 대해 해수면 상승, 산불 등의 예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 출처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