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신학의 탐구>를 읽고

 

<민중신학의 탐구>를 읽고

 

 

서남동 교수의 <민중신학의 탐구>를 읽었습니다. 1983년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37년이나 된 오래된 책이고, 요즘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민중신학에 대한 책입니다. 하지만 촛불혁명과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로 인해서 우리 사회의 공론의 장에서 혹독하게 매를 맞고 있는 개신교 교회들과 그 지도자들을 볼 때, 답답한 마음에 다시금 찾게 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남동 교수의 호는 죽재(竹齋)로 스승인 김재준 선생께서 다음과 같은 뜻으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의 용모와 뜻이 맑고 깨끗하며, 그의 지조와 마음은 곧고 비어 있다. 그의 학문은 넓고 사귐은 공경할 만하다. 고난을 받되 태연하고, 안정하여 학문에 힘쓰니 널리 그의 풍문이 들리는구나. 이에 그의 덕을 기리며 84세의 장공이 호를 지어 들어내노니 ‘竹齋’라.”

 

서남동 교수는 일본 동지사 대학에서 기독교 신학을 배우고, 1941년 3월 24살의 청년으로 귀국 후, 10년 간 목회를 하다가 35세에 한신대 교수로 발탁됩니다. 그리고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캐나다 토론토 빅토리아대학교의 임마누엘 대학에서 대학원을 마쳤고, 1961년 9월부터는 연세대 신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15년간 가르쳤고 1975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해직이 됩니다. 해직된 이유는 1973년 5월 20일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주도하였고, 1974년 11월 27일 “민주회복국민선언” 참가, 1975년 3월 “기독교정의구현전국성직자단”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계속적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다가 1976년 3월 1일 “3.1 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에 서명함으로써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안병무, 문동환, 이우정 등과 함께 투옥되어 1977년 12월 31일까지 수형생활을 합니다.

 

 

이 책은 총 4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 민중의 한타령

2부: 새 시대를 갈망하여

3부: 계시의 하부구조

4부: 생은 비극인가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전통적인 보수적인 교회 환경에서 자랐고, 특히 신학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민중신학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인간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답답한 마음에 작금의 민폐를 끼치는 개신교회에 대한 대안을 찾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떼야르 드 샤르뎅에 대한 책을 읽다가 검색을 통해서 서남동 교수에 관해 알게 된 것이고요. 서남동 교수는 자신이 만약 캠퍼스로 돌아간다면, 과학신학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절절하게 느꼈으며, 이 마음을 가지고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계속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과신대에서 창조에 대해 공부하면서 구원 중심의 기독교 교리가 창조 중심의 기독교 교리로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창조 중심의 기독교 신앙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매우 소중한 존재이며, 더 나아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생명의 잔치를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명의 잔치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 그래서 하나님의 눈길이 항상 집중되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심판의 기준도 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현실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느냐, 병을 고쳐 주었느냐, 억울함을 풀어주고 위로하였느냐임을 생각해볼 때 창조 신앙은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신앙으로 21세기에 강조되어야 하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의 내용은 개인적으로 울림이 있었던 구절들을 인용하였고, 간혹 개인적 생각을 짧게 제목으로 적어봤습니다. 

 

 

서남동 교수의 신학의 핵심 성경구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누가복음 4장 18~21절)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

 

"예수는 일찌기 가난한 자, 눌린 자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바 있다. 가난한 자의 내일 먹을 것을 주시라고, 또 눌린 자에게 불의한 자를 그 눌린 자가 용서할 테니 눌린 자의 죄를 하느님이 용서해주시라는 기도다. 그런데 항상 먹을 것이 풍부한 부자가 이런 기도를 흉내내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짓이다. 권력자, 누르는 자가 다른 사람을 누르고 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종교의식은 하느님을 우롱하는 짓이다. 부자와 권력자는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이 없게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다. 크리스찬 부자들이 권력자, 장관들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베풀고 또 그들로부터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국민에게 듣게 하는 것은 기독교도 아니고, 그 하느님은 하느님도 아니다. 아니 그 하느님은 부자와 권력자만을 위해서 있는 다른 하느님이다. 가나한 자, 눌린 자를 찾아온 하느님은 따로 있다. 그가 예수다. 마태복음서 25장의 병든 자가 전염병 환자라면, 옥에 갇힌 자가 정치범이라면, 거기 굶주리고 헐벗은 자가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여직공이라면, 그들의 해방의 전략은 어떠한 것일까? 그 해방은 사회적, 정치적 행동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12~13쪽)

 

마틴 루터 종교개혁의 아쉬운 점

 

"루터는 '법과 질서'를 표방하고 가난한 자, 눌린 자, '암하레쯔'의 권익을 관권으로 억압하도록 했고, 종교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을 분리시켜서 '종교의 개혁' 만을 시도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고작해서 군후의 종교로부터 부르조아의 종교가 되었고, '암하레쯔(유대의 가난한 서민 대중)'의 종교는 되지 못하고 말았다...그래서 후기 18세기, 19세기의 역사적 추세에서 민중을 위한 혁명은 번번이 바로 기독교회를 대적으로 맞서는 혁명운동이었다는 점은 오늘의 기독교가 제일로 크게 깊이 반성해야 할 점이 된다."(민중신학의 탐구, 17~18쪽)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편협한 교조주의가 아니고 실천의 굳은 의지를 말한 것이다."(민중신학의 탐구, 41쪽)

 

민중에 대한 창세기적 개념

 

"민중은 태초부터 하느님의 계약의 상대자이며 (지배자가 계약 상대자가 아니라), 그렇기에 땅을 정복하고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온 실질적 주체이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 억압되어 천민, 죄인으로 전락했다. 이제 민중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리고 하나님의 공의 회복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서 그로써 구원을 성취하도록 되었다는 것이다."(46쪽)

 

왜 교리 중심, 피안 중심의 비정치적 기독교가 되었는가

 

"성경의 역사적 핵과 후속된 교단의 거리는 '비정치화' 과정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이 비정치화 과정을 가능하게 한 두 가지 문화적, 역사적 계기를 지적할 수 있다. ...  하나는 일반적으로 논의해 온 히브리 문화의 역사적, 종말론적 지평으로부터 헬라 문화의 우주적, 형이상학적 지평으로 사고의 환경이 바뀐 사실이다. 종말론적 지평에서는 지금의 부정의가 없어지는 미래의 그날 '야훼의 날'을 기다리는데, 형이상학적 지평에서는 감각적 현상계의 그릇된 인식을 청산하고 순수한 본질을 찾고 있다. 원래의 '오실 메시아' 영상(고난받는 민중을 구원할 메시아)이 비정치화되어서 천상의 그리스도 영상(지상의 지배질서를 보장하는 자)으로 바뀌었다. 메시아가 그리스도로 비정치화되면서 정치적 차원의 십자가형은 종교적 차원의 십자가 상징으로 비정치화되었다. ...  둘째 계기는 AD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하자 그때부터 기독교는 눌린 자들의 지하의 종교였던 지위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누르는 자, 지배자들의 종교, 왕권종교가 된 것이다. 이로써 눌리 자의 탄식이며 항거였던 신앙, 따라서 묵시문학적이고 혁명적인 잠세력을 가졌던 종교는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화하고, 그 종교가 가졌던 본래의 핵 곧 눌린 자의 해방과 정의의 질서에 대한 민중의 갈망은 역사의 미래와는 상관없는 천상의 세계, 초원의 차원에 투사되어 역사의 피안에 있는 무시간적인 영원한 천국이 되었다"(55~56쪽)

 

한풀이, 그리스도의 발견

 

"이런 대목(이청준의 서편제 마지막 부분)에서 오라비 자신의 한의 삶이 잘 묘사되었고 또 누이의 한과 한풀이가 처절하게 그려졌다. 나아가서 깊은 한을 품고 있는 그 오라비의 모습에서 소설 가운데 화자가 찾고 있었던 다도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발견이라고 하겠다."(93쪽)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한 자는 누구인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사제, 레위 사람, 사마리아인, 강도들, 강도 만난 사람, 여관주인 등인데 우리는 그중에 누가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했느냐고 묻는다. 전통적인 해석대로 하자면 그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해서 사경에 빠진 인간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한 자는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강도를 만나서 얻어맞고, 빼앗기고, 사경에 처해서 도움을 부르짖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신음소리(한)가 바로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름인 것이다. 그 사람에게 대한 태도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다. 그 신음소리에 대한 각자의 응답과 행동에서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인간성이 실현되기도 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질식되어버리기도 한다. 거기에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있다."(107쪽)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의하면, 메시아는 고난받는 이웃으로 화신해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이 메시아입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이웃의 아픔을 내가 의식한다 할까요. 그렇게 해서 새 시대의 문이 열리도록 돼 있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고난받는 사람이 새 역사, 새 사회를 건설할 주역이 된다고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217쪽)

 

서남동 교수의 신학적 방법론

 

"나의 신학적 방법론은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우선 실존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학사논문을 쓸 때만 해도 방법론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 후로는 상당히 오랫동안 현대 과학사상을 가지고 성서 특히 신학을 재해석, 재구성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에 대해서나 세계에 대해서 더욱 그랬었지요. 과학적 관심은 처음부터 내게 대단했습니다.....내가 과학을 신학의 틀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신의 죽음의 신학, 희망의 신학, 세속화 신학 등을 거친 후였습니다. ...  이 시기가 지나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방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나는 나의 신학의 방법론을 넓게는 사회과학적으로 좁게는 사회경제사적으로 세우려 했습니다."(164쪽)

 

민중신학은 균형을 잡기위한 노력임

 

"그런데 나는 현 시대에서 체제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 시점에서 전통적 교회의 주장이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전부인 양 강조하니까, 실천적인 면에서 민중신학이 사회에서의 구조적 개혁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체제변화는 당연히 강조되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이 절대라고 도그마화시킬 수는 없는 거죠. 민중의 신학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지금 시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에 관심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 적은 월급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들의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는 따위가 서민대중의 걱정인데,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까를 민중신학은 일차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회전체의 구조개혁에 뛰어드는 것만이 진정으로 민중을 위하는 것인가 하는 것도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 그것은 현실을 무시하고 이론만을 단순화한 것이지요.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체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체제를 바꾼다는 것으로 인류의 목표가 그대로 달성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는 실패의 역사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을 통해 개선된 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에 어떤 변화나 시정이 있었느냐고 한 번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적 억압은 오히려 전보다 더 심했던 경우도 있지 않았습니까? ... (체제 개혁을) 갑자기 한다는 것에는 몇 사람의 의견으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가 횡포화할 가능성이 있고, 점진적으로 한다는 것에는 다수의 교육과 계몽이 요청되고 어쨌든 우리 인류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꾸준히 밀고 나가는 노력만은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196~197쪽)

 

죽음과 죽임

 

"죽음이란 건 전진과 새로움을 위한 하느님의 축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이 있고 지배자의 논리가 또 그것을 자꾸 부채질하고 조장하기도 합니다. 해결이 가능한 '죽임'의 문제에는 눈을 딱 감고, '죽음'의 문제만 가지고 그거 해결하자고 머리 싸매고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이 인간들의 형편입니다."(247쪽)

 

"금관의 예수"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적적한 이 시멘트 감옥 속에, 나는 너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또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느니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감옥에서, 이 신전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날을, 해방되어 너희들 속에, 너희들의 불행 속에 내가 다시금 불꽃으로 살아 타오를 날을, 그런데, 네가 왔다. 네가 가까이 와 내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구원을 받았느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은 외로운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귀를 막고, 그리고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명예와 권세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스스로를 예수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은 나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 못하도록 자기만의 신전에 가두었느니라. ... 그런데 네가 내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하리라. ... 그런데 네가 지금 내 입을 열게 했듯이 이제는 내 몸을 자유롭게 해다오. 이 시멘트를 벗겨라.... 용기를 내라, 자 어서어서 이 시멘트를 벗겨줘. 답답하고 갑갑해서 못살겠구나. 어서 빨리 훌훌 벗어나 민중들 속으로 가고 싶다. 이제 어서 시멘트를 벗겨라, 어서!"(292쪽)

 

종교는 왜 아편이 되었나?

 

"인간구원이 사회적 해방으로 실현되지 아니하면 신체(실체)를 떠난 혼같이 유령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유령은 다시 신체를 마취, 마비시키는 보복을 한다. 그래서 사회적 차원을 상실한 종교는 아편의 역할을 하게 된다."(309쪽)

 

서남동 교수의 인간론

 

"사람은 무엇이냐? 사람은 하나의 관계요, 사람은 하나의 의지요, 사람은 하나의 질문이다." (434~435쪽)

 

인간생명의 파라독스

 

마태복음 16장 2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사람은 누구나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합니다. ... 사람은 단순히 생의 무의식적인 본능으로서만 아니고 나아가서 의식과 성찰로써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합니다. 죽음의 운명을 알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찾게 되고 죄악의 속박을 양심의 가책으로 느끼기 때문에 자유와 구원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이미 그 어떤 교리라고 할까, 철학이라고 할까 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한다는 데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겠다는 교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실인즉 생의 본능에서부터 시작해서 깊이 반성해서 된 철학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교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에는 이런 주장과는 다른 하나의 파라독스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참 생명 -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는 길이기 때문에 - 한 생명을 얻으려면 자기부정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잃게 되는 것이 인간생명의 파라독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근대의 휴머니즘, 그리고 신학사상에서 말하는 자유주의의 그리스도, 또 그러한 것들을 기조로 한 자본주의 내지 민주주의 식의 해석이 있습니다. ... 그리스도교는 공산주의의 반신론, 과학주의의 무신론, 실존철학의 사신론과도 싸워야하겠지만 자유주의 그리스도교에서 하는 복음의 그릇된 해석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는 말은 앞을 더 잘 내다본다는 영리한 사람들의 처세술이 아니라 아가페적 사랑입니다."(409~410쪽)

 

물 위를 걸어가야 하는 인간존재

 

마태복음 14장 28-29절 "도대체 인간존재란 물 위로 걸어가야 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지성의 판단과 의지의 결심이 물결치는 감성의 바다에 자주 빠지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감관의 파도치는 물결, 육체의 불타오르는 욕망, 본능과 무의식의 밑도 없고, 끝도 없는 바다와 같은 깊이, 그리로만 기울어지는 경향성 - 이것이 숨김없는 인간성이다. 인간존재는 이러한 바다 위에, 물 위에 걸어가는 존재다."(424)

 

비극적 인생에 대한 서남동 교수의 마지막 조언

 

"인생은 비극일까요? 생은 한갓 비극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삶은 '인격적인 결단'입니다. 이러한 힘이 부족할 경우에는 '생명의 경의'를 느껴보십시오. 만일 삶의 신비마저 상실되거든 '존재의 용기'를 가지고 버티는 것입니다. ...  백척간두에 진일보해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우리더러 각각 '이웃사람'(사회적인 삶)이 되라고 말씀하신 그이는 사실인 즉 비극에 처해 있는 인생에게 오신 '이웃 사람'입니다. 여리고 길에서 강도를 만나 사경에 빠져 있는 이웃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삶의 비극은 그의 십자가에 삼키웠습니다. 그리해서 우리의 삶은 그의 안에 믿음(faith in Christ)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을 넘어선 그리스도 신앙입니다."(465쪽)

 

 

최성일 과신대 기자 (ultracha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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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알아가는 재미: <창조론자들>을 읽고

 

로널드 L. 넘버스 | 창조론자들 | 신준호 옮김

새물결플러스 | 2016. 5. 25 | 940쪽 | 50,000원

 

 

과신대 추천도서를 순서대로 읽고 서평을 한다는 기획을 처음 생각했을 때, 맨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는 <창조론자들>이라는 책을 내가 과연 읽어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한편으로 이 책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길래 이렇게 두꺼운가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때는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책들처럼 창조과학을 비판하거나 진화적 창조를 옹호하는 단순한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단순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로널드 L. 넘버스는 이 책을 위한 자료조사를 몇 년이나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자료조차 모으려 애를 썼다는 것이 책의 전반을 통해 드러난다. 책은 총 18장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장마다 마지막에 친절하게도 요약과 복습을 위한 장이 들어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정통역사서가 아닌 야사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은 창조론자들의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고 있다. 저자는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유쾌하나 신랄한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내게 지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창조론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사이비 과학자’라는 것과 그 세력이 매우 크다는 것 정도였다. 최근에는 ‘홍수지질학’이라는 것이 소위 창조과학자들의 논리를 뒷받침해준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 결과, 놀랍게도 ‘홍수지질학’은 창조과학의 거의 모든 것 같다. 그런 반면 이 큰 세력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홍수지질학자인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의 의견이 창조론자들에게조차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웠다.

 

나는 과학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고, 학교 다닐 때 받은 과학수업도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런데 창조론자들의 역사를 따라가보면, 미국에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학교에서 같이 가르치느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계속 있어왔고, 그것은 정치적으로도 꽤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에서 과학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고 해서 그것이 지역 정치 문제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창조론자들은 그 세력을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북미, 아프리카 그리고 한국에까지 확장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창조론자들에 대해 아주 일부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신앙의 세계가 무척 좁은 곳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을 읽으며 많은 과학자, 신학자들이 단순히 ‘나만 옳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 어떤 사유를 통해 결론에 다다르며, 때로는 힘겹게 도달한 결론에서 반대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았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진리를 계속 탐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책을 읽어오면서 ‘창조과학은 무조건 틀렸어.’, ‘날-시대 이론은 구식이야.’, ‘점진적 창조가 맞는 건 아닐까?’ 하면서 뭔가 하나의 결론을 내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진리에는 계속 물음표가 붙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했던 ‘창조론자들’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이 책을 읽으며 거부감이 들기보다는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을 집필한 작가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나도 모르게 흑백논리로 몰고 가던 생각이 조금은 바뀌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한다.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진리이며, 그 진리가 무얼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인생의 모든 것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내용은 분명히 내 기준에서 ‘악하다’ 편에 속한 것들에 대한 것인데, 속사정을 알고 나니 선하거나 악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재미가 있다. 이것은 진리를 알아가는 재미이며, 견문이 넓어지는 것에 대한 재미인 것 같다.

 

비록 많이 두껍기는 하지만 이 책을 나와 같은 주부나 청소년, 또 진리에 관한 궁금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분명 나와 같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이혜련 과신대 기자 (1221hannah@hanmail.net)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창조기사논쟁

 

빅터 P. 해밀턴 외 | 창조기사논쟁 | 최정호 옮김

새물결플러스 | 2016. 3. 20 | 510쪽 | 23,000원

 

 

다가오는 시간에도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인 우리가 당신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더욱 잘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끄실 것이라고 믿기에, 나는 이 대화가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 p. 493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또 창조 논쟁이야? 과학과 신학 얘기는 창조 빼면 할 얘기가 없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의 생각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었는지를 알게 되어 부끄러웠다. 이 책은 창조만 다룬 책이 아니며, 설사 창조만 다룬 책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내가 창조에 대해서는 더 알 것이 없다는 듯이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창피했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5명의 신학자들-리처드 E. 에이버 백, 토드 S. 비일, C. 존 콜린스, 트렘퍼 롱맨, 존 H. 월튼-이 ‘창세기 1-2장을 해석하는 5가지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1부의 특별한 점은 한 저자의 글에 대해 나머지 4명이 논평을 하는 방식으로 엮어졌다는 것이다. 5명은 각각 ‘문학적으로 본 “날”, 상호텍스트성과 배경’, ‘문자적 해석’, ‘문맥에 따른 해석:유비적 “날들”’, ‘창세기 1-2장이 주는 교훈(혹은 교훈이 아닌 것)’, ‘고대 우주론을 반영하는 창세기 1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들은 창세기 1-2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해당 본문만을 사용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 전반을 아울러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논평을 하는 사람들은 흑백논리식의 무조건 찬성이나 무조건 반대를 하지 않는다. 어떤 부분에 대해 왜 동의하고, 어떤 부분은 왜 동의하지 않는지 근거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건전한 논평을 읽으며, 나는 그동안 얼마나 흑백논리에 갇혀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새로운 것 하나를 알게 되면, 과거에 알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될 때마다 혼란에 빠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 학자들을 보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부에서는 오늘날의 창세기 읽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 ‘기독교 대학에서 창세기 1장 가르치기’, ‘풀리지 않는 주요 질문들 : 복음주의자들과 창세기 1-2장’이라는 제목으로 두 명의 저자가 각 챕터를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창세기 1-2장에 대한 논쟁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여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다. 케네스 J. 터너는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약 학생이 누군가와 사귀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거죠? 그와 헤어질 건가요? 만약 학생이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이 다른 견해를 보인다면 어떻게 하죠? 교회를 떠날 건가요? 칠판에 적힌 이런 견해 중에서 어느 지점까지 허용할 건가요? 이를 테면 이렇게 말하는 거죠. ‘만약 당신이 이 선을 넘는다면, 나는 성서에 대한 네 판단이나 충실성에 의문을 제기할 거야. 아니면 네 구원까지도 의심할 테야!’ 어떻게 생각해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창조기사논쟁]은 단순히 창세기의 해석에 관한 논쟁이 아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겸손한 자세를 배우게 된다. 성서를 대하는 자세를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용어들이 많이 나와 읽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이런 책은 전문가들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이런 노력 하나하나가 나를 바꾸고 내 주변을 바꾼다고 믿는다.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그동안 ‘문자적으로 읽기’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자적’이라는 말 하나를 가지고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분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을 통하여 다시 한번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단어 하나하나를 허투루 넘기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은 어려운 책이지만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에 모두들 한 발자국씩 가까워지지 않을까.

 

 

글_ 이혜련 (1221hannah@hanmail.net)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책] 파란하늘 빨간지구

 

조천호 | 파란하늘 빨간지구 | 동아시아

 

글_ 윤세진 (구일고등학교 과학교사)

 

 

2004년에 개봉된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는 재난영화 중에서도 상당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제작된 영화이다. 급격한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북극의 해수 밀도가 낮아지고, 그 때문에 전 세계의 해류 순환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표층수가 심층수로 하강하는 작용이 멈추게 된다. 이로 인해 해류 순환이 중단되면서 적도와 극 사이의 에너지 교환이 중단되고 결국은 전 세계가 급격하게 빙하기로 접어든다는 줄거리이다.

 

그림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hermohaline_circulation (책 100쪽 참고)

 

영화가 개봉될 당시에 사람들에게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를 주기도 했지만, 영화니까 좀 과장된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만일 이 영화가 과장된 거 아니냐는 의견이 있는 사람들은 조천호 교수의 책 “파란하늘 빨간지구“를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조천호 교수는 국립기상과학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기후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에 접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기후위기에 대한 많은 기고 활동을 하였으며 그 결과를 모아 이번 책을 썼다. 그 결과로 이 책은 기후 위기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지구의 탄생으로부터 인간의 탄생까지의 간략한 지구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인간이 지구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지구의 일부분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결국 인간의 활동은 지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하자는 저자의 생각을 볼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역사가 기후 변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을 통해 기후가 역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현대는 지질학적으로 신생대의 홀로세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활동에 의한 인류세(Anthropocene)의 도래를 다루어 지구의 기후 변화와 인류 역사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류세는 인간 활동이 특히 생태계와 기후에 중대한 환경적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20 세기 중반 이후 현재까지를 말한다.

 

<인류세에 대한 참고자료>

1. https://www.sciencetimes.co.kr/news/홀로세-가고-인류세-올까/

2. https://ko.wikipedia.org/wiki/인류세

3. 인류세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들에 대한 연구 논문: 김지성, 남욱현, 임현수(2016)가 정리한 “인류세(Anthropocene)의 시점과 의미”(http://jgsk.or.kr/xml/06438/06438.pdf)

 

 

그다음으로는 인류에 의해 증가된 온실 가스에 의해 발생하는 극한 날씨(폭설과 폭염, 태풍의 증가 등)의 일상화를 다룬다. 특히 현재 발생하고 있는 온난화에 의한 이상 기후 현상은 이미 30-40년 전에 대기 중에 발생한 온실 가스에 의한 것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는 현재 기후 위기 현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함과 아울러, 지금 이에 대한 대책을 “실행“하지 않으면, 미래세대는 현재보다 더한 기후 위기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다.

 

다음으로 다루는 것은 기후 문제는 다양한 문제들과 연동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후 위기와 관련된 것으로 인구 증가 문제, 물 부족 문제, 식량문제, 생태계 파괴 문제, 급작스런 기후 변화 문제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이 문제들은 각자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에 놓여있다. 따라서 기후 변화에 대한 해결책도 단순한 대중적 요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 다양한 관점에서 기후 위기 문제를 바라보고 그 해결책을 찾아야 비로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것은 기후 변화 또는 기후 위기를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학적 소양이 필요함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기후 위기에 대한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수행하는 정당한 비판은 과학의 특성상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기후 위기에 대한 부정론자들이 과학적인 근거가 없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과학적인 활동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일상에서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로, 내가 모르는 과학과 관련된 의견을 청취할 경우에는 그 근거가 과학적인지를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반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이름만 따라갈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과학적인 사고와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과학은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부단히 다양한 증거를 찾고 그 증거들이 보여주는 일관성을 바탕으로 과학이 이루어짐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자주 언급하는 것이 이산화탄소를 필두로 하는 온실 가스로 인한 지구의 온난화이다. 산업혁명 이래로 꾸준하게 증가하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아주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특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러 자연재해들(폭염, 폭설, 태풍, 기근 등)의 발생 빈도와 발생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 것이 결국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때문이라는 경고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림출처: https://bit.ly/2RqyqNJ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기후 위기를 초래하는 여러 요소들을 발생시킨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이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에 의한 피해는 선진국이 받는 것이 아니라 저개발국가에서 받게 되는 모순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기후 위기에 대한 책임을 선진국이 나서서 해결하려는 자세를 촉구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기후 위기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 조차 부족한 상황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온도 상승의 경우에는 지구 평균 기온을 웃돌고 있는 상황이다.

 

기후 변화 혹은 기후 위기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논의되기 때문에,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이 기후 위기는 이미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1980년대 대기 중에 방출된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실화 효과가 쌓여 현재 기후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저자의 경고는 아주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기후 변화로 인한 물 부족과 식량부족 문제가 정치적인 지형을 바꾼 여러 사례를 통해 기후 변화가 우리 일상의 문제에 실제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2도 이내로 안정시키자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 이후 기후 변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2018년 IPCC에서는 2도도 위험하니 1.5도로 제한해야 극단적인 기후 변화를 피할 수 있다고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2040년 경에 지구 평균 온도는 1.5도 상승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온도가 이 한계를 넘어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상태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전방위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래 그림은 지구의 현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두 개의 미래를 나타낸 것이다. 만일 현재 지구 상태에서 온실 가스가 계속 방출된다면, 지구는 빠져나올 수 없는 “찜통 계곡”에 빠지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온실 가스 배출을 줄여 안정된 지구로 가야 한다. 이에 대한 책임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그림 출처 : https://www.pnas.org/content/115/33/8252 (책 121쪽 참고)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미움 받을 용기와 인간이해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와 아들러의 “인간 이해”를 읽고

 

 

모든 것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겨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나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재림하시고, 심판하시는 모든 것들이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학과 신학의 대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우리가 다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조직신학에서의 마지막 연구 분야가 “인간론”이라는 말을 언뜻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론”은 개인적으로 현재 가장 관심이 많이 가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엄청난 의미로 다가오고 있고, 그래서 인간을 본연의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사로서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성서학자인 우찌무라 간조 선생께서 “한 사람을 알려면, 전 인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했을 때,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큰 부담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의 스승은 단 한 분 하나님이다”는 성경 구절을 통해 “인간은 인간을 가르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이 교사가 할 일이겠구나”라는 나름대로의 교육(개똥)철학을 갖게 되어, 여전히 무지 가운데 있지만,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맛보며,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 맛을 공유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과신대에 발을 들인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였습니다. 그동안 과학과 신학의 훌륭한 전문가들로부터 양질의 강의를 들어서 많이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학교 현장에서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과 자주 상담하면서 심리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 첫 책이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이었고, 두 번째 책이 아들러의 “인간 이해”였습니다.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는 1956년 교토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부터 철학에 뜻을 두고, 교토대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1989년부터는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아들러 심리학에 관해 왕성한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한 학자이며, 현재 일본 아들러 심리학회가 인정한 카운슬러이자 고문입니다. 이 책의 공저자인 고가 후미타케는 20세 말에 아들러 심리학의 상식을 뒤엎는 사상에 큰 충격을 받고, 기시미 이치로 선생을 끈질기게 찾아가 문답식으로 아들러 심리학을 배운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점이 바로 철학자와 청년 간의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런 논쟁을 읽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의 각 현안별로 이런 대화 문화가 꽃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 이해”의 저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1870년 2월 오스트리아 빈 근교에서 태어나 1937년에 작고한 빈 정신분석학의 거장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어 알려진 프로이트, 그리고, 칼 융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위의 “미움받을 용기”가 출간된 2014년부터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학자입니다. 저는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대해서는 주워들은 것만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프로이트, 융, 아들러를 비교해서 연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만, 아들러의 심리학이 가장 인간적이고 제게 큰 도움이 된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들러가 학교 교육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22개의 아동 병원을 운영하면서 아동 교육과 치료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아들러가 겸손과 실천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이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직접 그런 상황을 겪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러는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형이 매우 명민했던 반면, 자신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허약 체질이었고, 밑의 남동생이 어려서 죽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안팎의 고통을 잘 이겨낸 아들러가 인간 이해의 최고 적임자는 “참회하는 죄인”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이와 같은 철저한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라는 말이 있어서, 개인적인 느낌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보다, 이 두 권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아래와 같이 초서하여 보았습니다. 괄호는 쪽수입니다.

 

“미움받을 용기”의 키워드

 

  • 프로이트의 트라우마를 부정하는 아들러의 목적론(37)

  • 현재의 불행한 상태는 자신의 선택의 결과이다(54-57)

  • 용기의 심리학: 자유를 선택하여 미움받을 용기, 변화하겠다는 용기(63)

  •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105-106)

  • 나는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된다(120-123)

  • 아들러 개인심리학의 행동 목표: 자립할 것, 사회와 조화를 이룰 것(126)

  • 아들러 개인심리학의 심리적 목표: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126)

  • 과제 분리,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163)

  •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177)

  • 인정받기를 바라지 말라(177)

  • 자유란 미움을 받는 것이다(186-187)

  • 공동체 의식/감각을 가져라(217-218)

  • 인간관계는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이다. 남을 칭찬하려고도, 남에게 칭찬받으려고도 하지 말라(227-228)

  •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가라(251)

  •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여 자기를 수용하라(261)

  • 인간의 최대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287)

  • 인생은 선이 아니라 점의 연속이다.(300-301)

  •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319)

 

아들러의 “인간 이해” 키워드

 

  • 인간 이해의 근본적 문제들은 지나친 교만과 자만심을 가지고 접근하면 안 된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인간 이해는 겸손하게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15)

  •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인지도 모른다.(25)

  • 열악한 오늘날의 교육 현실에서 진정한 인간 이해는 오직 “참회하는 죄인”에게만 가능하다.(26-28)

  • 생명이 없는 자연의 움직임과 인간의 정신활동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를 둘러싼 쟁점이 등장한다. ‘인간 공동생활의 논리’라든가 ‘절대적 진리’라는 우리의 개념은 부분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개념들과 일치한다.(42-43)

  • (인간은 물질적 존재 상태를 부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가족을 넘어 그의 동료, 민족, 인류, 동물이나 식물, 생명이 없는 존재들, 온 우주에 이르기까지 확대될 수도 있다.(62)

  • 리가 마치 다른 사람인 듯 행동하고 느끼는 이 능력의 원천은 우리에게 내재된 공동체 의식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우주적 감정이며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전 우주와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특성이다.(83)

  • 누군가에게 최대한의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된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권위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격)(85)

  • 태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주의력 결핍이나 관심 부족 상황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주의력 결핍은 동료 인간에 대한 관심 부족이 원인이다.(126)

  • 우리는 오로지 경험적 사실에 의한 확증된 길을 걸을 뿐이며 우리가 꿈을 통해 발견한 사실들이 다른 관찰 결과에서도 입증되고 확인될 때만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140)

  • 여성의 열등함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181)

  • 모든 행동과 표현 양식은 공통의 한 점을 향해 모아진 것이며, 그가 어느 지점에서 움직이든 간에 그의 목표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인식할 수 있다.(203)

  • 인간의 성격은 우리에게 있어서 도덕적인 판단 근거가 될 수 없고, 그 사람이 자신의 주위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또 어떤 연관성 속에 처해 있는가 하는 사회적 인식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232)

  • 삶의 기쁨이란 삶의 진정한 조건을 긍정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254)

  • 이렇게 해서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인류가 이미 섬뜩하리만큼 확실하게 예감했던 관점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성경책에도 나와 있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도다”라는 구절이다.(256)

  • 단지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종교적 욕구의 만족을 그릇된 방법으로 추구하는 현상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신과 닮으려는 노력의 흔적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다.(263)

  •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면 누구나 동등하다는 법칙(Gesetz der Gleichheit alles dessen, was Menschenantlitz tragt)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274)

  • 개개인을 공동체와 연결시켜 주는 연대감을 통해서만 사람들의 불안은 제거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불안 없이 생을 통과해 갈 수 있다.(291)

  • 인간 이해를 위한 세 가지 삶의 과제: 사회적 과제(나와 너의 관계의 문제), 직업의 문제, 사랑과 결혼의 문제. 한 사람이 이 세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그 방법과 그가 저지르는 과오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로부터 우리는 그의 개성, 인격, 삶의 방식에 관한 결론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우리의 인간 이해에 대한 자료를 얻고 활용하게 될 것이다.(294)

  •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타인과 완전히 똑같이, 평등하게 느끼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진보를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를 도와 심각한 오류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320)

  • 권위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인가...... 그 밖에도 저절로 인정받을 수 있는 권위가 아니라면 권위는 강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교는 모든 아이가 자신의 정신적 발달 단계에서 만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학교는 아이들에게 유리한 정신적 발달의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어떤 학교를 좋은 학교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학교는 정신기관의 발달 조건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학교만이 비로소 “사회적 학교”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356)

  • 이렇게 유아기 때부터 시작된 열등감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우월감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것들은 사소한 형태로는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형제들 간의 경쟁이나 학교에서 벌어지는 점수 경쟁으로 나타나지만, 범위를 넓혀 보면 인간 삶의 크고 작은 모든 권력관계 속에 나타난다. 심지어 가장 평등해야 할 친구나 연인 관계, 부부 간에도 우위(권력)를 차지하고자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기 때문에 인간은 따뜻한 동지애를 잃어버리고 서로에게 높은 담을 둘러치며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마음의 병을 앓게 된다. 그로부터 연유한 갈등과 고통은 좀처럼 극복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그것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그것과 씨름하게 된다.(367, 역자 홍혜경 님의 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두 등불, 공공신학과 개인심리학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에 나오는 키워드들이 다 아들러의 “인간 이해”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시미 이치로는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들과 철학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여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심리철학을 아주 잘게 부수고 잘 소화시켜서, 세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독자의 입술에 조금씩 흘려서 먹이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는 상식에 반대되는 충격적인 주장들이 있어서 가끔 싸리에 걸리기도 했었지만, 저의 경우는 잘 삼켜서 정신발달에 큰 영양분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러의 심리철학을 이 책을 통해서 쭉 들으면서, 저는 이상하게 이분이 성경 강해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항상 받았습니다. 아들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네 가지 키워드는 공동체 의식, 열등감, 우월(인정)욕구, 허영심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공동체 의식은 우주적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어서, 마침 공부하고 있던 삐에르 떼야르 드 샤르댕(1881~1955)과 아는 사이였나 라고 반문했을 정도였습니다.

 

포스트 코로나는 이전과 절대 같을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바일 것입니다. 때마침 공공신학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공공신학과 함께 인류 사회에 큰 등불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것이 제 소견이자 바람입니다. 인간이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수 있는 존재가 된 인류세에 우리가 우주적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인간과 우주를 잘 보전하고 가꾸어 나가면 참 좋겠습니다. 아들러가 강조한 “참회하는 죄인”으로서, 우리 마음속의 열등감이라는 지옥의 불꽃을 잘 제어하고, 허영심이라는 악덕의 바람을 최대한 빼고, 삶과의 현실적인 연대감을 회복하여서, 진실로 “남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고, 남들에게 주는 것이 남들로부터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 매일매일의 삶의 원리가 되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어 봅니다. 

 

 

글_ 최성일 기자 (ultracha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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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간단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영적 진실이라는 순수한 물이 인간이라 불리는 녹슨 그릇에 담기는 탓에 때로는 종교의 근간이 심각하게 왜곡된다 해도 그리 놀랄 건 없다. 인간 개개인의 행동이나 종교 단체의 행동을 보고 신앙을 평가하지 말라. 그보다는 신앙이 제시하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적 진실을 보고 신앙을 평가하라. - ‘과학자들을 향한 간곡한 부탁’ 중에서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창신 옮김 [신의 언어]

김영사 | 2018. 8. 20 | 1판 11쇄 발행 | 323쪽 | 14,000원

 

 

처음 이 책을 마주했을 때, 너무 어려운 책으로 보여서(과신대 추천도서 뒤쪽에 있으므로)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까 경직된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 그러나 내 걱정이 무색하게 콜린스는 자신의 경험으로 편안하게 책을 시작한다.

콜린스는 대학 시절에는 열렬한 무신론자였으나, 유전학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달은 후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부터 종교적 신념의 진정한 힘을 주목하게 되었다. 최첨단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인 동시에 하나님과 성경을 믿는 독실한 신앙인인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총지휘하여, 10년 만인 2003년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31억 개의 유전자 서열을 모두 밝히는 게놈 지도를 완성했다. (책날개 참고)

 

이 책은 그의 삶과 함께 유전자 서열이 어떻게 밝혀지는지, 그가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는지 함께 줄거리를 갖고 펼쳐지기 때문에 마치 소설을 읽듯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구성은 크게 1. 과학과 신앙의 간극, 2. 인간 존재에 관한 심오한 질문들, 3. 과학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믿음,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늘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실까?’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교회에서 흔히 듣는 대답은 기도하면 성경으로, 환경으로, 자연스럽게 알려주신다는 거였다. 성경을 읽어도 모르겠어서 항상 기드온처럼 증거를 요구하는 기도를 많이 했다. 그런데 콜린스는 DNA가 바로 ‘신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부분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되었다.

 

2장에서 빅뱅부터 시작해 게놈해석까지 마치 지구의 역사를 풀어내듯 이야기하며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다. 과학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으로 이어지는 이 장을 읽으며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글자를 붙여놓으면 자연스럽게 대립구도를 떠올리게 되는 게 현재 우리나라의 기독교 실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DNA를 통하여 어떻게 인간에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콜린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종교와 과학은 대립구도가 아닌, 협력구도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친절하게도 3장은 그동안 과신대 추천도서를 읽으면서도 헷갈려왔던 많은 것들을 정리할 수 있게 안내를 해주고 있다. ‘불가지론’이라는 말의 유래, (이 장에서는 ‘불가지론자는 그럴 듯해 보이는 무신론자일 뿐이고, 무신론자는 공격적으로 보이는 불가지론자일 뿐입니다’라는 말이 매우 재미있었다.), ‘창조론자’라는 단어에 대한 견해, 지적설계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등이 그것이다. 특히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단어가 늘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 책을 읽으며 자세히 알게 되었다. 또,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지적설계론이 결국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영역에 초자연적 존재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상정하는 일종의 ‘빈틈을 메우는 신’ 이론이라는 것이다. 앞서 과신대 추천도서를 쭉 읽어온 사람이라면 이 ‘틈새의 신’ 이론이 결국은 몰락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지적설계가 신으로 채우려 했던 진화의 빈틈을 신이 아닌 과학의 진보가 채웠다. 신의 역할을 이처럼 제한적이고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지적 설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앙에 심각한 해를 입히고 있다 (p.197)

 

콜린스는 마지막으로 ‘바이오로고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바이오로고스를 단지 어떤 단체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콜린스는 ‘유신론적 진화에 바이오로고스라는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하고 말하고 있다. 또, ‘지적설계와 달리 바이오로고스는 스스로를 과학적 이론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진실은 단지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영적인 논리로만 증명될 뿐이다(p.206)’라고 말한다.

 

이 책을 쭉 읽으며 내가 깨달은 것은 콜린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 서로 사랑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며 경이로움에 빠져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면 겸허해지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의 희망사항도 그렇다. 현재 전세계가 코로나19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신의 언어’를 읽으며 바로 지금, 여기, 나,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해본다.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걸까? 아마도 ‘서로 사랑하라’가 아닐까? 이 책에서 배운 대로, 진리는 간단하다. 오컴의 면도날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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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쉽게 쓴 후성유전학

  • 전성유전학과 후성유전학을 아주 명확하게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볼드윈효과도 후성유전학에 속하는 것이겠지요?

    휘페르테스 2020.09.10 10:11

 

러처드 C. 프랜시스 | 쉽게 쓴 후성유전학 | 김명남 옮김 | 시공사

 

글_ 윤세진 (구일고등학교 과학교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천년에 대한 다양한 기대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여러 분야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것이라는 전망들이 많았었다. 그중에서도 과학 분야는 당연하게 기대를 받는 많은 분야들이 포함되었다. 20세기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중심이 된 물리학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유전자나 유전공학으로 대변되는 생명과학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1)

 

20세기 중반에 왓슨과 크릭에 의한 DNA 구조가 밝혀진 이래로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 생명공학 기술 등이 발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준 것이 사실이다. 유전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수사(修士)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이 완두를 이용한 실험에서 출발하였다. 토마스 모건(Thomas Hunt Morgan)에 의해 염색체 위에 유전자가 존재함이 밝혀졌고, 왓슨과 크릭의 연구 이래로 분자 유전학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였다. 생명공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혜택들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한 윤리적인 문제들도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가타카’나 ‘아일랜드’ 같은 영화는 이런 문제점들을 생각하게 한다.

 

 

대체로 생명공학 기술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유전자와 많이 연관이 되어 있다. 흔히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발표되곤 하는데,2) 이런 발표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전자가 사람의 여러 형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3) 실제로 유전자는 사람이나 다른 생물체의 형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전자는 DNA에 존재하며, 필요한 단백질을 만드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 유전자가 단백질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단백질은 생물체 내에서 다양한 형질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이 그림은 DNA가 단백질을 만드는 주인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기본적으로 이 생각은 옳은 것이다.

 

이렇게 유전자가 생물체의 모든 형질을 결정하는 주인 역할을 한다는 생각은 현대에 부활한 전성설이다.4) 전성설은 19세기까지 번성하다가 후성설이 등장하면서 19세기 중후반부터 쇠퇴하였다. 그러나 DNA에 의해 단백질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전성설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생명공학적인 기법들(최근에 논란이 되는 크리스퍼 기법도 결국은 이런 전제하에서 발전되는 기법이라고 생각한다)은 대체로 전성설의 입장이라고 본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지금까지 후성유전학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 이제부터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후성유전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5) 후성유전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독일이 네덜란드에서 실시했던 식량 봉쇄정책으로 인한 네덜란드 대기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산모의 영양상태가 태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연구하였는데, 태아일 때 기근을 경험하고 태어난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성인이 되었을 때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출처: http://www.p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21

 

후성 유전 현상은 환경이 세포의 변화를 일으키고, 세포라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유전자의 활동을 조정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세포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후성 유전적 조절을 받은 유전자의 특징은 유전자에 메틸기(CH3)가 붙는 것이다. 이런 유전자를 메틸화된 유전자라고 부르며, 이런 유전자는 활동성이 낮아져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세포마다 다르거나 개체마다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유전자가 형질 발현의 중심이 되는 것을 ‘유전자 감독 가설’이라 부르고, 후성 유전적인 형질 발현을 ‘세포 감독 가설’이라고 부른다. 유전자 감독 가설에서는 세포를 조절하는 정보를 유전자가 가지고 있으며, 유전자가 단백질 합성 단계를 통제하여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어 세포 활동을 통제한다. 반면, 세포 감독 가설에서는 유전자는 생화학 분자들로 이루어진 구성원들의 한 구성원이며, 이들의 상호작용을 세포로 본다. 따라서 단백질 합성 단계를 안내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세포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후성 유전적 영향을 미치는 것에는 앞에서 언급한 메틸화 이외에 DNA와 결합하고 있는 히스톤 단백질 변형에 의한 영향, 그리고 RNA에 의한 영향의 세가지를 제시한다. 이런 후성 유전적 현상은 당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후성유전적 영향을 받은 유전자가 자손에게 계속 전달되어 동일한 형질 발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비만 문제, 호르몬 관련 문제, 게놈 각인 문제, X염색체와 관련된 색맹과 관련된 문제, 암과 관련된 문제 등이 후성유전적인 현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후성유전 현상뿐 아니라 다른 동물과 식물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도 설명하고 있다.

 

출처: http://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464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몇가지 있다. 첫째로, 후성유전학에서 강조를 두어야 할 점은 “후성”유전학이라는 점이다. 기존과 같은 유전자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책에서 많은 유전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유전자들은 모두 환경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둘째는, 유전자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대의 전성설이나 근대의 전성설이 모두 후성 유전적 현상에 의해서 잘못된 것이 판명되었지만, DNA구조가 밝혀지면서 다시 전성설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본문 10장 참고). 이는 인간의 직관적인 이해가 전성설에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상과 친숙한 비유들을 제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후성유전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면, 후성유전이 훨씬 설명력이 크고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라마르크가 제시했던(아마도 라마르크 추종자들이 주장했을 수도 있다) 획득형질의 유전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라마르크는 유전자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였으므로 후성유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후성유전이 환경에 의한 유전자에의 영향이라고 볼 때, 살아가는 환경에 의해 변화된 유전자가 자손에게 전달되는 것은 큰 틀에서 라마르크의 언급 또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넷째는, 도킨스는 자신의 유명한 책인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기체는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제시했다.6) 이는 유전자 중심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전자가 중심이기보다는 세포가 중심이고 더 나아가서는 유기체가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유전자는 세포의 환경이나 유기체가 처해 있는 환경에 의해 얼마든지 후성유전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체의 유전 현상을 바라볼 때, 직관적으로는 유전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환경의 영향을 받아 유전자의 발현이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러한 후성유전적 현상은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나올 것이다. 유전자들이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연구와 동시에 유전자에 미치는 후성유전적인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함께 수행한다면 비로소 생물체내에서 일어나는 유전자에 대한 이해가 완성되지 않을까.

 


 

1) 임경순, "과학기술연재1-21세기 과학기술의 전망"  bit.ly/2PKQ0er

2) 비만유전자 bit.ly/3kz4f42, 신경질환의 유전자  bit.ly/2Fcbq1Q,  장수유전자 bit.ly/3kzu6sN, 범죄유전자 bit.ly/2XTLNcA

3) 형질: 대개 생명과학에서 형질이라 하면 유전적 형질을 말하며, 이는 생명체가 지닌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최근에는 형질을 규정하는 요건들이 다양화되어 생김새나 색깔, 크기뿐만 아니라 생리적 특징이나 행동양식의 특징 등도 중요하게 거론된다. bit.ly/3iwjI2U

4) 고전적인 의미에서 전성설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세오.  bit.ly/2DUqyAq

5) 후성 유전학 개념의 시작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세요. bit.ly/3amR01z

6)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이상임 옮김(2006).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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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자의 소명: 리처드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

 

최근에 영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 1934~)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스윈번은 그동안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을 활용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해 왔다.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그 내용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6년에 <Is There a God>이라는 얇은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이 이번에 복있는사람 출판사에서 <신은 존재하는가 - 세계와 우리 존재의 기원과 과정과 목적을 논증하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독교 철학자 책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어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사연이 담긴 책이라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2007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리처드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졸업 논문을 썼는데,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몇몇 종교철학 개론서에서 리처드 스윈번이라는 이름을 접하기는 했지만, 그의 전체적인 사상을 접할 수 없어 어렵게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추억 속에 묻혀 있던 이름이 한참의 시간이 지나 다시 등장하니, 책장 깊숙한 곳에 꽂아 둔 졸업 논문도 오랜만에 찾아서 읽어 보고, 혼자서 히쭉거리며 이불킥도 날렸다.

리처드 스윈번은 이제 85세가 넘은 노학자지만 지금까지도 연구와 집필을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학문적 업적을 쌓고 있는 열정의 철학자다. 1972년부터 교편을 잡았고, 1985년부터 2002년까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기독교 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아마존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니 16권의 책이 나온다.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당대 철학으로 엄밀하게 논증하고 증명한 학술서라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책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나온 <신은 존재하는가>는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좋은 입문서이자 해설서가 될 것이다.

 

처음 스윈번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케이스 M. 파슨스(Keith M. Parsons, 1952~)이 쓴 <God and the Burden of Proof>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철학자 두 명을 소개하고 이들의 변증 방법론을 비교한다.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노터데임대학교의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 1932~)는 '개혁파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기존의 토대주의 인식론과 증거주의를 논파한다. 근대 인식론의 허점과 논리적 결함을 반박하면서 종교적 믿음도 나름의 방식으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논증한다.

반면 리처드 스윈번은 자연신학의 방식, 즉 특별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을 통해 신앙의 합리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연신학은 계몽주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와 기독교 철학자들이 지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종교적 믿음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정합적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어떤 방식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데 더 좋은 전략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있다. 다만 스윈번의 길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오랜 시간 기독교에서 사용한 방식이고, 특히 자연신학 전통이 깊이 남아 있는 영국에서는 여전히 인기 있는 방식이다.

자연신학을 통한 신 존재 증명은 철학사에서 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논리실증주의가 철학계를 뒤흔들면서 기독교 신앙은 옳고 그름을 떠나 아예 '무의미'(nonsense)한 명제로 공격을 받는다. 한동안 기독교 신앙은 지적 토대를 상실하게 되고 자신의 신앙을 변증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스윈번은 1960년대 이후 언어분석철학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구축하기 위해 힘쓴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된 언어분석철학을 활용해 반대로 기독교를 옹호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영미권 여러 기독교 철학자에 의해 시도되었고,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윈번은 유신론의 가정이 과학적 가정과 비슷한 것이라 여기며 개연성(probability)에 근거한 귀납 논증을 활용해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설이 제기될 때, 그 가운데 배경 지식이 확실하고 누적된 증거가 충분한 가설이 가장 좋은 설명이 될 수 있다는 논증이다.

보통 과학철학에서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라고 알려진 방식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 중에서 가장 좋은 설명을 제시하는 이론을 선택하여 진리로 믿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윈번은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는 다양한 논증들, 즉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도덕적 논증이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증거를 수반할 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개연적 명제로 만든다고 말한다. 유신론의 설명력이 다양한 논증이 누적되면서 점점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증거들에 의해 잘 지지되는 가설도 나중에 거짓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또 이렇게 확률이나 개연성에 근거해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게 과연 정당한 것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은 전부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아예 전부를 포기하든지 하는 어떤 절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선택을 강조하는 입장도 때로는 중요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갖게 될 때, 그것이 100% 확실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신뢰성의 정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인가? 스윈번은 자연신학의 후예답게 여러 증거와 증명을 통해 믿음의 신뢰도는 점차 높이는 방식으로 우리 신앙을 만들어 가자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유신론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다른 방식(예를 들면, 유물론이나 인간주의)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물리학과 화학에서 사용하는 공식과 용어를 살펴보면 우주가 굉장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복잡한 방법으로 움직이고 인간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칙은 근사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근사치를 높게 가지고 있어 세상이 어느 정도 규칙성으로 움직인다는 신념 때문이다. 규칙성을 통해 외부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그 규칙성이 인간이 이해하기에 충분히 단순해야만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대상 속에 자연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경향성을 집어넣어 그 자연법칙이 작동하도록 하신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이 대상에게 이런 경향성을 갖고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유신론의 단순성은 합리적 개연성의 정도를 모든 현상에 기대하게끔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존재 사실이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좀 더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이 세상이 꼭 그렇게 존재해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논리적 법칙과 원리를 제공한다. 문제는 과학은 사물의 존재 이유와 인간 존재의 이유를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결국 과학은 어느 지점에 가서 설명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이는 과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설명의 한계 때문이다. 스윈번은 과학이 우주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해 준다 하더라도 우주의 본질과 존재의 이유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인격적 설명이 필요한데 유신론이 바로 이런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유신론은 과학적 설명에 더해 인격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고, 이것이 설명의 힘을 한껏 올려 준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을 소개했다. 스윈번의 논증을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그의 기독교 철학 3부작(<The Coherence of Theism>, <The Existence of God>, <Faith and Reason>)을 봐야 할 것이다. 독특한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한 스윈번의 작업은 많은 이들에게 호감 혹은 반감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오늘날 귀납 논증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려 한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이런 논증이 이성의 영역에 신앙을 어정쩡하게 배치해 이 둘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었다고 논박한다.

그는 <Faith and Reason>에서 "신앙은 증거의 충분성에 비례하고 그 안에서 힘을 얻는다"고 말한 바 있다. 스윈번에 따르면 신앙은 결국 증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신념의 정도는 증거의 정도에 의존한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 신앙이 증거에 비례해야만 하는지를 한번 고려해 볼 문제다. 신앙의 신비를 굳이 과학적 증거와 확률로 모두 치환해야만 신앙의 근거가 마련되는 건 아니다. 별 이유 없이 그냥 믿고 싶어서 믿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이 남긴 업적과 공헌을 몇 가지 언급하고 싶다. 먼저 그는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들)이 자연철학과 과학과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고 은근슬쩍 다른 길로 도망치는 태도에 철퇴를 날린다. 스윈번은 증거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증명의 부담을 기꺼이 떠안으면서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그는 기독교의 합리성을 신앙의 영역으로 환원시키거나 증거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합리성의 기준과 다른 것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그들과 정면 승부를 하면서 기독교의 합리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철학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공정한 법칙과 규칙을 사용해 신앙을 합리적으로 변증할 방법과 길을 닦아 주었다. 또한 그는 어떠한 신념이나 이론도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소박한 실재론의 오류를 피해 간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전적인 신뢰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와 한계 내에서 조금씩 믿음의 개연성을 높여 갈 뿐이다. 때로는 의심하고 때로는 확신하면서 주어진 신념을 성실하게 쌓아 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는 신앙은 맹목적 헌신과 추종으로 이어져 오히려 신앙에 해로울 수 있다. 찬찬히 하나씩 따져 가며 기초를 다지는 신앙이 오히려 흔들리지 않고 오래갈 수 있다. 스윈번에게 배울 수 있는 기독교 철학이란 이런 성실함이다.

 

 

글_ 최경환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장)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출처: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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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7일

 

존 C 레녹스 | 최초의 7일
노동래 역 |
새물결플러스 | 2016

 

 

벌써 과신대 추천도서 10권 중 7번째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 의도는 나처럼 과.포.자(과학을 포기한 자)나, 일반 주부들도 과신대 추천도서를 읽으면 변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면, 과학 때문에 괜히 주눅 들어있던, 숨어있는 정회원들의 활동을 독려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추천도서 앞쪽 5권은 가벼운 접근에서 천천히 전체적인 모양을 다룬다면, 나머지 다섯 권은 (아마도) 깊이 있는 내용들을 다루는 것 같다는 느낌이 앞의 책 ‘오리진’을 읽으며 강하게 들었었고, ‘최초의 7일’을 읽으며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두루뭉술하게 다루었던 창세기 1, 2장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읽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보통 + 사람 + 주부로서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앞의 책들에서 계속 이야기되어온, 과학과 신학은 대립관계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또 앞의 책들에서 잠깐 언급된 갈릴레오의 에피소드를 자세히 밝히고 있어 흥미로웠다. 특이한 점은 책의 1/3 정도가 부록인데, 개인적으로는 부록을 먼저 읽고 난 다음 본문을 읽는 것이 이해에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동유럽의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고려해보기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한국에는 교회가 굉장히 많고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교회에 대한 자잘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본 것이지, 타문화권에서 살았다면 기독교를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해서 고려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독교가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좀 충격적이었다.

 

저자는 총 5장을 할애해서 최초의 7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란 부분은 현대에 지동설이 상식인 것처럼 과거에는 천동설이 상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동설을 믿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 전혀 불편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왜, 과학과 신학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지구가 오래되었다거나 천동설과 지동설의 주장과 믿음이 무슨 관계였다던가 최초의 인류는 어디서 어떻게 발생했다던가 하는 질문들보다 더 위에 있는 질문들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방법을 쓰든, 결국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류를 1초만에 지으셨든, 하루 24시간 x 6일에 걸쳐지으셨든, 하나님은 인류를 지으시고 아름답다 하시며 평안을 누리셨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물론 위의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인 레녹스는 우리의 시점을 과학과 신학의 대결에서 벗어나 우리가 왜 과학과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저명한 천체 물리학자와 창세기의 창조 내러티브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성서를 믿는 것이 원시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견해의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생겨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참으로 원시적인 발상이군요. 설마 그 구절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중략)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시적인 것은 당신이군요.” p.28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레녹스가 참 위트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7일에 관한 의견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텍스트를 비유로 또는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믿는 자신만의 관점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레녹스가 조금 비겁한 사람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7일에 대한 비밀을 알아가며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존중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예전에 젊은지구론 신봉자였고,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은 다 무시했다. 그 다음에는 진화적창조를 믿었고,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을 다 무시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과연 무엇이 중요한가. 나는 왜 책을 읽고 있는가. 하나님이 최초의 7일 동안 창조를 하시며 우리 인간에게 원하신 것은 무엇일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자신의 의견만이 진리인 양 뻣뻣하게 굴지 않고, 오직 우리 주 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만 떳떳하게 서로 마주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의 난이도가 점점 상승해 이 짧은 책을 읽는 데도 많이 힘들었지만, 계속 반복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 날 안개와 같던 것이 걷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다음에 읽을 책을 기대해본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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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해롤드 쿠쉬너 |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 김하범 | 창

 

이신형 (과신대 실행위원)

 

 

내가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과신대에서 과정신학에 관한 콜로퀴움이 있었는데, 강사로 나오신 장왕식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이다. 절판되어서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ebook으로는 계속 판매가 되고 있었다. 그냥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박원순 시장의 사망으로 인해 마음이 많이 흔들렸고 그래서 읽고 있던 책을 놓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아들이 조로증에 걸려 15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깊이 묵상한다. 그리고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고 또한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우리의 잘못이거나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다른 이유로 허락하였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이는 고통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하나님의 뜻에 자꾸 끼워 맞추게 한다. 이는 욥기의 세 친구처럼 고통받은 이를 정죄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착한 사람에게 닥쳐온 고통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은 분, 또는 하나님 당신의 뜻을 위해 우리에게 고통을 야기시키는-심지어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잔인한 분으로 만든다. 위로하는 이는 좋은 목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슬픔과 고통 가운데 그 이야기를 듣는 이는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자책하고 원망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하나님에 대해 전능성을 내려놓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신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꺽고 우리를 인도하지 아니하신다. 다만 우리와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법칙을 깨뜨리지 아니하신다. 다만 그 자연법칙으로 인해 생기는 재앙이 가져오는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꺾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신다. 아니 거스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막을 능력이 있지만 막지 않으시는 잔인한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통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거둬달라는 기도가 의미 없음을 안다. 암 검사를 받고서 좋은 결과가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는 의미가 없다. 이미 검사 결과는 검사하는 순간 정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병을 기적으로 낫게 해 달라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 게 정상이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해서, 정성이 부족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기도한다. 우리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아픔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 고통에 우리도 참여한다. 그리고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준다. 기도가 그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그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고통을 이기고 슬픔을 극복할 능력을 얻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신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박원순 시장의 사망은 나의 마음을 매우 크게 흔들어놓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허락하신 것은 아니라는 통찰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도록 한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막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막지 못하시는 것이 바로 케노시스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신비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보다 더 크게 아파하시고 고통을 더 크게 함께하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기도가 더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한국 기독교는 차별금지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교회가 탄압받는다고 걱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심으로써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신다. 교회는 그런 주님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가? 지금의 교회는 고통을 함께하시는, 고통을 온몸으로 짊어지신 예수님을 머리 삼고 있는가? 교회는 고통을 받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차별받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하시는데, 교회는 교회가 받을 고통을 두려워하며 외면하지 않는가? 아니 오히려 차별을 더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회가 많다. 그리고 코로나 19 감염의 주된 경로로 지목되면서 사역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우리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이 방해받는 모습을 불평하고 탄압받는다고 성토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 19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어려움과 함께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 교회의 예배와 교육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보다 낫다.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실천하는 것이 예배보다 중요하다.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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