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콜로퀴움]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 과정신학적 관점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
과정신학적 관점

 

근대 세계는 기독교 신앙에 심각한 도전과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과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과학적’이 됐으며, 그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은 더욱 근본주의로 치닫고 있다. 이 깊은 골을 매우기 위해서는 과학적 자연주의에 대한 성찰과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과정신학은 과학과 신학이 서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종합을 제안한다.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오랜 시간 과정신학을 연구해 온 장왕식 교수를 통해 자연주의 철학과 기독교 창조론이 어떻게 서로 만나고 화해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  이번 강연은 온라인으로만 진행됩니다. 수강신청을 해주시면 이메일을 통해 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 일시: 2020년 7월 6일(월) 낮 12시 (시청기간: 7월 17일 낮 12시까지)

* 등록비: 5,000원 (과신대 정회원, 청소년은 무료)
   등록비 입금 계좌: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강연 순서

1부 강연(약 90분) :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 과정신학적 관점" (장왕식 교수)
2부 대담(약 30분) : 장왕식 교수, 최경환 사무국장 

 

* 강사 소개

장왕식 교수현재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면서 종교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대종교철학연구소 소장직을 겸하고 있다.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교환교수로 가르친 바 있으며, 한국 화이트헤드학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종교철학을 공부한 후,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화이트헤드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역서로 『화이트헤드 풀어 읽기』, 『과정형이상학과 화이트헤드』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생성과 과정의 철학에서 종교철학의 문제를 다룬 책인 『동양과 서양, 종교철학에서 만나다』와 과정신학의 입장에서 다윈주의의 문제를 다룬 『종교적 상대주의를 넘어서』가 있다.

 

** 정회원 가입을 원하실 경우 입회신청서와 후원약정서를 제출해주세요.

> 정회원 입회 신청서 : bit.ly/2ZfJd2q
> 정기 후원 신청서 : https://bit.ly/2VLxHa6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제20회 콜로퀴움] 케노시스 창조론: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사랑의 창조

 

케노시스 창조론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사랑의 창조

 

 

케노시스(kenosis) 개념은 20세기 신학계의 지형도를 뒤흔든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케노시스는 빌립보서 2:7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비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입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창조란 하나님의 자기 비움 행위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케노시스 개념이 창조와 연결되면서 철학과 과학과 신학을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살펴봅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창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대 과학과 어떻게 공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  이번 강연은 온라인으로만 진행됩니다. 수강신청을 해주시면 이메일을 통해 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 일시: 2020년 6월 8일(월) 낮 12시 (시청기간: 6월 19일 낮 12시까지)

* 등록비: 5,000원 (과신대 정회원, 청소년은 무료)
   등록비 입금 계좌: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강연 순서

1부 강연(약 90분) : "케노시스 창조론: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사랑의 창조" (강태영 박사)
2부 대담(약 30분) : 강태영 박사, 최경환 국장 

 

* 강사 소개

강태영 박사_ 경북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창조신학을 전공해 신학 박사(Dr. theol.) 학위를 받았다. 석사 과정에서는 기독론을 주로 공부했고, 박사 과정에서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했다. 

 

 

** 정회원 가입을 원하실 경우 입회신청서와 후원약정서를 제출해주세요.

> 정회원 입회 신청서 : bit.ly/2ZfJd2q
> 정기 후원 신청서 : https://bit.ly/2VLxHa6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제19회 콜로퀴움] 뇌과학과 기독교 신앙

 

뇌과학과 기독교 신앙

 

2020년 첫 번째 콜로퀴움 주제는 '뇌과학과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번 강연에서는 젊은 뇌과학 연구자로 주목을 받고 있는 기초과학연구원의 김성신 박사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듣습니다. 본 강연은 뇌과학의 연구 대상과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뇌과학에 대한 오해들을 점검해봅니다. 이어서 뇌과학을 소재로 한 흥미로운 영화들을 소개하고 이와 관련된 윤리적, 철학적 문제를 다뤄 볼 계획입니다.  

또한 강연자의 주된 관심 분야인 기억과 학습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역사를 살펴본 다음, 뇌의 활동을 관찰하고 조절하는 최신기술과 성과들을 소개하며 뇌과학의 향후 발전 전망에 대해서도 소개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과학자로서 뇌과학 분야의 연구에 대한 생각과 고민들을 나눠볼 것입니다. 

최근 뇌과학의 동향과 연구를 소개받을 수 있는 귀한 강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신비하고 놀라운 뇌과학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시면 어떨까요?

 

*  이번 강연은 온라인으로만 진행됩니다. 수강신청을 해주시면 이메일을 통해 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 일시: 2020년 5월 5일(화) 낮 12시 (시청기간: 5월 15일 낮 12시까지)

* 등록비: 5,000원 (과신대 정회원, 청소년은 무료)
   등록비 입금 계좌: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강연 순서

1부 강연(약 50분) : "뇌과학과 기독교 신앙" (발표: 김성신 박사)
2부 대담(약 50분) : 김성신 박사, 최경환 국장 

 

* 강사 소개

 

김성신 박사 (기초과학연구원 뇌과학이미징 연구단) 

서울대에서 화학공학과·전기컴퓨터공학과를 복수전공했다. 이후 2013년 미국 남가주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7년부터 IBS에서 선정한 영사이언티스트 펠로우로 선정돼 성균관대학교 뇌과학이미징 연구단에서 뇌과학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세상의빛교회'를 섬기고 있다. 그의 연구실 홈페이지는 http://clmnlab.com 이다.

 

 

** 정회원 가입을 원하실 경우 입회신청서와 후원약정서를 제출해주세요.

> 정회원 입회 신청서 : goo.gl/YYP76E
> 정기 후원 신청서 : https://bit.ly/2VLxHa6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기사연 공동포럼] 후기: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바란다

 

2020년 1월 28일 (화) 과신대와 기사연이 공동 주관한 포럼에 다녀왔다. 이 포럼에서 김현준 연구원은 “한국 개신교는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졌는가?”라는 발제문을 통해 세 가지 의미 있는 분석을 제공했다. 

 

첫 번째로 창조과학을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김현준 연구원은 오히려 한국 기독교 지성 운동이 창조과학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기독교 지성운동이라 호명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주도했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뼈 때리는’ 분석으로 들릴 대목이다. 초록은 동색이다. 복음주의자라는 이름을 원했던 이들은 끊임없이 근본주의자들의 반지성주 태도와 거리를 두며 유연한 태도와 입장을 지닌 복음주의를 꿈꿔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 지성운동은 근본주의 신앙이 세워 놓은 경계 안에서 전개되었다. 이 경계와의 싸움, 혹은 주어진 경계 안에서 과학과 신앙의 대화는 기독교 지성의 역할, 과학과 신학의 대화와 같은 질문으로 깊어지기 보다는 문화전쟁이라는 근본주의자들의 거대 공포 서사 안에서 유사과학의 권위로 자리 잡게 된다.

 

두 번째로 국가주도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원과 양성과정을 창조과학 부흥의 외적 요인으로 분석한 것 역시 흥미롭다.

 

70년대 기초학문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관심과 지원보다는 빨리 써먹을 수 있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이루어졌다. 과학 자체에 대한 성찰과 의미에 대해 묻는 질문은 과학기술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은 그 의미에 대한 답을 신앙의 영역에서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사회학 혹은 과학철학의 관찰과 분석이 반가운 지점이다. 창조과학회 회원들 가운데 공학자들이 많다는 점이나, 이들의 회심의 이야기와 창조과학으로의 헌신이 잘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 분석을 지지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80년대 뿐 아니라 지금도 기초학문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관심과 투자보다는 여전히 ‘당장 가져다 쓸 수 있는’ 과학기술에 대한 강조와 지원은 여전하다는 것과, ‘과학의 철학적, 사회적, 공공적 이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저 멀리 있다는 점에서 과학의 외적 요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니버의 유형론을 떠올린다면, “과학을 과학의 자리에 두고 겸손하게 세상과 삶의 모순까지도 신비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왜, 정통신앙의 한 표현과 입장으로 고려되지 못했을까? 신앙의 언어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강박이 그 시대의 교회를 붙들고 있던 것은 아닌가?”와 같은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세 번째로 ‘담론의 동맹-이해관계의 번역’이라는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했다.

 

첫 번째로 지목했던 기독교 지성 운동이 한국 개신교의 지형도 안의 다양한 이해의 주체들과 동맹 (e.g., 창조과학-기독교 지성운동-지역교회)을 형성했고 이러한 담론의 동맹을 통해 창조과학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의 연결망은 종교적 교의를 과학적 진리로 변환시킨다.”

 

어쩌면 이러한 분석은 그 반대 방향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창조과학에서 주장하는 진리’는 (목회자의 설교와 다양한 창조과학 세미나를 통해-) ‘종교적 교의’로 가르쳐지고, 교회안의 (자녀 교육을 생각하는-) 신실한 신자들에게는 받아들여야 하는 유일한 선택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담론의 동맹-이해관계의 번역’이라는 분석이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 동맹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공동의 이해관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 개신교는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졌는가?”라는 질문에서 ‘어떻게’라는 부분은 세 가지 분석을 통해 설득력 있는 답을 주고 있지만, 여전히 ‘왜’라는 부분은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이 답을 하려면 ‘이 담론의 동맹을 통해 (이들이-) 얻으려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자신의 신앙과 학문을 통합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이해관계는 그리 커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초기 창조과학회는 권력이 아니라 많은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미답지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동맹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내적-외적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고 본다. 변증의 차원에서 시작된 이 질문은 먼저 과학자 자신에게는 의미의 질문으로 다가왔고, 전도와 선교를 수행하려는 교회와 단체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합리적이며,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변증의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도와 성장이라는 강력한 공통의 이해관계는 창조과학에게 거대한 무대를 제공했다. 하나님과 신앙을 과학과 이성의 권위 아래로 가져가는 이 근대성의 논리는 꽤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을 형성했고 지금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창조과학은 이 시대정신의 열매다. 

 

 

결론

 

나는 이 세 가지 분석과 함께 다른 분석의 질문으로, ‘교회와 세상의 관계’ 혹은 ‘선교학적인 관찰과 접근’을 제안하고 싶다. 창조과학은 그 자체로 변형되고 확장되는 문화(현상)로 봐야 옳을 것 같다. 크라우치가 지적하듯이 문화는 ‘세계관’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문화를 세계관으로 축소시킬 때의 위험성은, 문화 재화가 자기만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문화의 가장 고유한 특징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과학이 세계관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분석은 정확하지만 이 분석은 이 세계관이 작동하고 있는 방식 (문화)를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세계관’적이다. 

 

또한 창조과학이 문화전쟁이라는 ‘교회와 세상의 적대적 관계’에서 유사과학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는 모습, 사람들이 묻지 않는 질문에 답하며 열심히 가르치려는 모습은 앞으로의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향할 방향을 반증/지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 교양 강좌가 아니라면, 창조과학이 교회와 세상의 관계 맺음에서 취했던 입장과는 무엇이 다른지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할 것이다. 좋은 신학은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김현준 연구원도 말했듯이-)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기독교 변증에 머물러있지 않기 바란다. 21세기의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오늘의 질문과 관심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기후위기가 일상으로 다가온 지금 창조세계의 보존을 위해 과학과 신학은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유사과학이 다시 등장하는 오늘, 과학과 신학은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 군산복합체 (military-industry complex)의 지원 없이는 연구가 어려운 환경에서 과학과 신학은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계속 되어야 할 것이고, 그 대화는 지금 우리가 만나고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한 진지하고 겸손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를 희망해 본다.

 

글_ 김성한 (MCC Peace Educator)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과신대 포럼 발표자료2] 한국 개신교는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졌는가 (김현준 연구원)

 

* 이 글은 2020년 과신대 포럼 "개신교 근본주의가 반진화론과 창조과학에 빠진 이유"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이 글은 필요시 인용을 하여도 무방하나, 초고(draft)이므로 추후 공식출간(published) 될 시, 해당 논문을 인용바랍니다.

 

 

한국 개신교는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졌는가?

: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 ANT의 통약가능한 접근법을 경유하여

 

김현준 (서교인문학연구실 연구원)

 

 

2009년 EBS 여론조사(다큐프라임 2010)에 따르면, 한국인의 62%가 진화론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63%의 사람 들이 진화론과 창조론을 모두 가르쳐야 한다고 응답했다. 넘버스(2017)도 창조론이 세계화되고 있으며, 한국이 “창조론의 수도”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한 기독교철학자에 따르면, 한국의 창조과학은,

 

기독교 평신도들을 대중적으로 설득하는데 성공했으며, 특히 물질주의와 과학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가 비합리적 종교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했다 ... 자연과학적 이성과 증명 앞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많은 신앙인들이 창조과학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기독교 신앙이 비합리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이경직 2006:126).

 

이러한 진술은 (의도치 않게) 창조과학의 핵심이 (과학적 성취가 아니라) 신앙적 동기임을 드러내어 준다. 창조과 학은 현대사회 속에서 겪는 신앙적 위기에 대한 변증적 성격을 지니는 종교적 담론인 것이다. 과학철학자 라카토 스 식으로 말하자면, 창조과학의 중핵은 과학이론이 아니라 신학이론이 아닐까. 다시 말해 창조과학이 ‘창조과학 적’(?) 연구활동을 통해 보존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독자적인 과학이론이라기보다는 창세기에 대한 문자주의 적 해석(신학)이나 특정한 개신교파의 신앙적 에토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창조과학자들의 ‘유사과학종교’ 활동은 과학 자체에 헌신되어 있다기보다는 신앙의 변증에 헌신되어 있다. 이러한 변증적 성격이 과학을 잘 알지 못해도 과학을 논하면서 신앙심을 고양시키는 신자들의 이해관심에 부합한다. 즉 이것이 창조과학의 행위자-연결 망의 확장을 이해하는 열쇠다.

 

창조과학은 어떻게 결과적으로 보수 개신교 내부에서 지적인 헤게모니를 얻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과학철학/사회학자 라투르가 말한 ‘이해관계의 번역(translation of interest)’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창조과학자들은 (신자들의) 신앙적 관심을 (창조과학자들의) 과학적 관심인양 치환하는데 (보수개신교 장 내에서 제한적으로) 성공했으며, 그럼으로써 보수 개신교의 신학적, 지적 행위자들(actants)과 동맹을 구축해왔다. 그리고 창조과학 담론은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가 말한 것처럼 그들 신앙공동체의 ‘정서적 에너지’와 ‘유대감(solidarity)’을 증진시키는 기능을 했다. 교회 내 과학교육이나 창조과학자들의 강연은 지식 자체의 전달보다는 종교적 집합흥분을 통해 보수신앙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의례’로서 그 기능이 예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창조과학자들의 이러한 ‘이해관계 번역’ 행위와 창조과학 정당화 작업은 종교적 감정서사를 통해서 두텁게 읽어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창조 과학이 확산될 수 있었던 요인들을 크게 네 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1. 문화/종교적 환경

 

1-1. 세속화 및 과학발전(과학주의)에 대한 불안과 그에 대한 문화적 방어(문화전쟁)

 

극우주의적 정치이념들처럼 근본주의적 종교들과 창조과학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 추세에 대한민국(창 조과학회와 보수개신교)이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넘버스는 한국이 창조과학을 세계에 전파하는 “수도”가 되었다고 서술했다. 창조과학은 과학에 대한 불확실성(그에 따른 불안과 공포)과 신앙적 진리를 향한 진정성있는 열정을 자 양분 삼아 확산된다.

 

이러한 흐름은 기본적으로 세속화라는 본류를 거스르는 글로벌 차원의 탈세속화(재신비화)로 설명된다. 글로벌

차원에서 종교, 영적인 것, 성스러움의 귀환은 모더니티가 애초부터 품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던 유동성의 발현 이거나 모더니티의 부작용이다. 하버마스, 찰스 테일러와 같은 사회철학자들이나 또 호세 카사노바와 같은 종교사 회학자들은 이러한 현대사회를 “포스트세속사회”라고 개념화한 바 있다. 사람들은 점증하는 근대사회의 불안과 정체성의 위협을 경험하고 있다. 이 세속사회 속에서 지배적인 (행위의) 규칙과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게 되었으며 종교적인 규칙이나 정체성도 중요한 자원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극우주의적 정치이념이나 테러리즘도 지배적 ‘모더니티’나 ‘합리성’이라는 정치종교적 표상에 반대하는 진정한 진리를 향한 열광적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정치철학자이나 사회학자인 토스카노는 이렇게 진리를 향한 열광적 행동주의적 추구를 “광신”이라는 정치신학적 개념으로 포착했다. 하지만 사실상 탈개신교화에 대한 개신교 신앙의 저항이자 잃어버린 주도권에 대한 향수다. 창조과학도 근본주의적 신앙과 더불어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택적 친화성’(역사적 우연성들 간의 공명)을 가진 창조과학과 근본주의적 신앙은 종교적 가치나 세계관, 또는 정체성 위협에 대한 “수세적 반격”(류대영 2004)이나 “문화적 방어”라고 할 수 있다(김현준 2017). 과학사가 로널드 넘버스(2010:703)에 의하면 근본주의 적 개신교인들은  “문자적 창조를 포기한다면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같은 중심적 문제들’을 재고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즉 창조과학과 근본주의적 신앙의 확산은 (소위 ‘자유주의 신학’으로  통칭되는)  모더니티와 과학주의(실증주의), 역사비평학(고등비평)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이 신앙의 소유자들은 모더니티 전체를 이해하고 대응하기보다는 근본주의 - 더 정확히는 축자영감설에 기초한 세대주의 - 신학의 특정한 해석틀에 의존해서 과학을 비롯한 현대사상과 학문들을 이해했다. 선 : 악 = 유신론 : 유물론(무신론)의 명확한 이항대립 속에서 과학은 진화론에 포획되었고, 진화론은 유물론이며 유물론은 맑스주의 및 사회진화론과 동일시되었다. 이른바 ‘영적 전쟁’론이다. 이를 제임스 헌터(1991)는 ‘문화전쟁(culture war)’이라고 정의했다. 필자는 이것을 보수개신교인들의 ‘거대공포서사’라고 부른다. 보수개신교인들은 사랑이나 ‘창조-타락-구속’과 같은 개신교의 거대서사(만)를 만들었다기보다는 거대한 ‘공포서사’를 만들어냈다. 이 공포서사는 영적(문화)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제로 작용한다. 두려움 없이는 구원이 없다. 이러한 영적 전쟁, 문화 전쟁 프레임은 복음주의 지식인들의 기독교 세계관 학문담론에 의해서 ‘세계관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한국의 우익개신교세력은 이 프레임을 혐오선동과 극우정치 국면을 전개하며 영적 전쟁의 적을 동성애, 페미니즘, 젠더퀴어이론 등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인권이론들과 인권운동들을 네오맑시즘의 개신교 말살과 공산화 전략으로 호도하고 있다.

 

1-2. 과학의 문제점과 문화지체

 

그렇다면 창조과학의 발흥은 단지 근본주의 개신교인들만의 탓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과학주의에 대한 반발은 전반적으로 과학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과학자들의 과학 수행이 학문 내적 발전뿐만 아니 라, 과학 외적인 사회적 신뢰와 정당성을 확보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과학은 근대사회의 지배규칙, 합리성의 표상이 되었고, 과학자는 모더니티의 ‘히어로’나 ‘사제’가 되었기 때문이다(히어로는 항상 빌런을 부른다). 황우석 신화나 핵발전산업을 생각해보라. 물론 과학기술의 합리적 발전은 동시에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높이기 때문에 완벽한 통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자들 이 과학만능주의라는 신화와 부작용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과학실천에 대한 세심한 태도를 취했더라면 어땠을까. 과학의 성과는 과학 그 자체만의 성과가 아니다. 과학적 성과는 경제적 발전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발전들과 상호 교환(피드백)됨으로써 그 빛을 발한다. 이런 맥락에서 과학주의에 대한 반발은 과학기술과 과학문화(또는 윤리)의 불일치, 즉 과학기술의 발전에 부합(또는 적응)하는 과학문화 교육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국가의 과학기술정책 및 과학교육정치의 부실이 주요인이거나 적어도 그 물적 조건을 이루는 매개요인이다. 이렇게 문화적 요인들은 제도적, 정책적 요인들과 연결된다.

  

 

2. 국가적, 제도적, 교육정책적 환경

 

2-1. 과학기술자 양성 국가정책

 

한국의 경우, 과학(방법론)과 기술이 통합적으로 발전했다기 보다는, 기초과학과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무관심 속 에 70년대 국가 경제발전의 도구이자 기술로서의 과학에 대한 강조가 과학교양을 약화시키고 비과학적 태도 확산의 토대로 작용한 것일 수 있다. 김근배(2017)에 따르면 당시 권위주의 정권의 과학기술정책은 과학보다는 기술, 연구보다는 개발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즉 과학은 발전주의의 부속품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정책기조 하에서  당 시 미국 유학을 떠났던 김영길을 시작으로 이공계 학자들은 개신교로 회심했고 창조과학을 접하고 돌아와 서울대와 카이스트 등에 자리를 잡으며 한국에 창조과학운동을 시작했다(신재식 2010 참조). 창조과학회 회원의 다수가 미국 유학파 공학/기술자인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형욱(2018)은 창조과학이 “기술전문가들를  위한 새로운 종교”라고 평가했다.

 

2-2. 국가차원에서 과학정신의 상대적 결핍; 과학교육의 부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

 

넘버스(2016) 역시 창조과학의 전세계적 확산추세의 원인에 각국 과학교육에 대한 과학자들의 무관심이나 방심 을 지적한 바 있다. 생물교사가 개신교인인 경우, 대부분 근본주의적 창조론자이다. 이것은 유럽과는 매우 다른 한 국적 상황을 보여준다(Seo & Clément 2014). 이러한 상황은 창조과학회의 초중고 과학교사연수 프로그램을 통한 창조과학교사들을 재생산 기제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등학교 과학교사들은 생물학 교과과정과 교과서가 부실하고 그에 따라 교육현장에서 창조론을 비롯한 유사과학에 대한 대처의 난점, 학생 교육의 난점을 호소하고 있다(Lee & Lee 2008). 이런 의미에서 생물학 교사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다(Clément 2015).

 

과학에 대한 철학적, 사회적, 공공적 이해가 결여된 채로 (산업)기술로서의 과학이라는 도구주의적이고 실용주의 적인 유용성만을 강조하는 과학정책과 과학교육은 과학의 공적, 대중적 상식과 신뢰의 토대를 침식할 수 있다. 그 결과, 대중과 과학/기술/공학자들의 창조과학으로의 ‘회심’은 과학/기술이 그것의 (사회적이고 공적인) 가치와 의 미에 대한 충분한 해명을 제공하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합리적인(reasonable) 재조정의 과정으로서 그 행위의 의미를 이해해 볼 수 있다. 즉 근대성(과학)이 의미의 문제를 주변화(세속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오늘날 의미를 담는 그릇인 종교적인 것의 귀환(재주술화)을 불러왔듯이, 과학지식, 과학교육, 과학공동체의 부실은 과학지식으로부터 과학자 자신의 소외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종교/과학에 대한 아노미와 유사과학의 확산을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이해관계/인식관심 번역(translation of interest) 실천의 행위자-연결망, 동맹의 결성

 

3-1. 기독교세계관 학문운동의 창조과학 지지

 

창조과학은 칼뱅주의-복음주의 지성운동과 그것의 일환인 기독교세계관 네트워크를 통해서 확산되었다. 이는 반지성주의와는 다소간 결을 달리한다. 그 시작에 있어서는 반지성주의가 아니지만 유통과 확산에 있어서는 지역 교회/비전문가/평신도대중의 반지성주의를 필요로 한다. 창조과학-복음주의 지성운동 ANT를 통해서 창조과학 자들은 비전문가 신자들의 ‘신앙적 헌신’의 인식관심을 전문적 과학실천에 대한 가상적 참여로 번역해내었다. 즉 종교적 교의가 과학적 진리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 결과 독실한 개신교인들은 신앙의 실천 - ‘하나님의 영광’ - 을 위해서 창조과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담론(지식)의 힘은 연결망의 규모에 상응한다. 창조과학은 기독교 세계관 학문운동의 이론적 지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담론 및 운동은 개신교 학계와 교육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령 “기독교 세계관 입장 에서 본 진화론”,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창조과학교육”,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대안” 등의 연구들이 생산되고 있다.

 

창조과학은 “기독교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이경직, 2006:108). 즉 “참된 성경말씀에 기초해서 기존 과학계보다 더 정합적이고 훌륭한 이론을 만들어내”어야 한다(이경직, 2006:128). 그리고 “기존의 과학계가 공유하는 자연주의라는 전제를 그대로 인정하기보다 그 전제의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창조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여 기존 과학계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이경직, 2006:127). “기독교 세계관에서 나온 기본 믿음들에 비추어 과학의 각 분야들의 성과들을 평가하고 변혁시켜나가는 일이 바로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이 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이경직, 2006:130). 여기에서 기독교 또는 성경의 원리는 무신론적 세속과학을 기독교적 과학으로 바꾸는 이론적, 방법론적 원천인 것이다.

 

또한 기독교세계관은 과학지식에 대한 상대화 전략을 사용했다. 진화과학을 비롯한 과학지식이 상대화될 수 있 는 까닭은 모든 지식이 종교성을 가지며 과학의 본질도 신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지지하는 개신교 지식 인들은 과학지식 역시 개신교 신앙교리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선택과 결단의 문제로 환원했다. 정당화된 믿음이나 종교적 가치가 구성되는 역사적/사회적 조건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지 않고 모든 지식의 성격과 토대를 궁극적인 종교적 신앙의 문제로 환원하는 이러한 태도는 근대의 각 학문분야가 역사적/사회적으로 구축해 놓은 자율적인 합리적 기준과 절차에 관한 토론을 무화하고 종결시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작용한다. 즉 모든 지식에 대한 선택을 신앙적 결정과 결단의 문제로 단순화시킴으로써 정당화된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가 기반하는 ‘삶의 양식’과 사 회적 관계에 대한 질문을 차단하여 논쟁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즉 기독교세계관론과 창조과학은 자연주의를 적으로 삼는다는 점과 통속적 ‘신앙주의(fideism)’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공명한다.

 

결국 자연주의 세계관과의 투쟁을 통해 일반 세속학문 속에서 기독교적 - 반자연주의적 - 방법론의 특권을 구축

하고자 하는 점에서 창조과학 역시 기독교세계관 프로젝트의 일환, 즉 과학분야의 기독교세계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창조과학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방법론적 원리 - 반자연주의 - 에 입각한 ‘기독교적 과학’이 되었다.

 

3-2. 동맹의 역사적 근원

 

한국에서 근본주의와 창조과학 간의 역사적 우연(선택적 친화성)을 이론적-신앙적 필연성으로 만든 역사를 논하 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인물로 최소 세 명 정도를 꼽을 수 있을듯 싶다. 박형룡, 김준곤, 김영길이다. 그 중 박형 룡은 근본주의 중에서도 축자영감설에 입각한 세대주의 칼뱅주의 신학자였다. 세대주의는 안식교와 헨리 모리스 와 더불어 미국 원조(?) 창조과학 탄생의 초기 기원 중 하나이다. 옥성득(2019)에 따르면 박형룡은 반진화론자였 지만 창조과학자는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창세기를 현재 “과학적 진화적 방법에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옥성득은 현대 창조과학론자들이 박형룡이 비판했던 창세기 1-2장에 대한 과학적 읽기를 수용하면서 1930년대 근본주의적 장로회 신학보다 “후퇴”했다고 비판한다. 또 최태연(2004)에 따르면 박형룡을 포함하여1920-30년대 한국개신교는 유신진화론에 대해 포용적 태도가 주류였으나 70년대 이후 근본주의 신학과 창조과학회의 영향으로 개신교 주류 입장이 변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박형룡의 근본주의 신학과 반진화론이 예장 합동, 고신, 대신, 백석, 합신 등 보수 개혁주의 장로교파 대다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보수 칼뱅주의 신학은 신칼뱅주의 기독교세계관 학문운동으로 계승되었다.

 

3-3. 동맹 확장 전략 

 

창조과학(및 지적설계론)을 교육, 전파하는 여러 단체, 기관들의 존재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교진추, 창조과학회 지부가 있는 한동대, 카이스트, 명지대 등 대학 및 대학 내 동아리, 사랑의교회, 소망교회, 남서울은혜교회, 온누리교회 등 복음주의 대형교회들 및 지역교회들, CCC 등 선교단체, 두란노, 생명의 말씀사, IVP 등 출판사와 CGNTV 등 개신교 언론. 창조과학회는 답사 또는 여행 프로그램, 전시회 개최, 박물관 건립 등을 통해 대중적 저변 을 확장해 오고 있다.

 

또 교과서 개정 추진운동도 창조과학자들과 지적설계론자들의 공통된 실천전략이다. 1988-89년에 창조론을 삽 입한 생물교과서 검정에서 탈락한 이후, 2016년 8차 청원까지 했음에도 별다른 소득은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사)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2009년)는 노골적인 창조과학 대신 지적설계론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킴으로써 “논쟁을 가르치라”는 미국 창조론/지적설계론자들의 전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교진추의 전신인 한국진화론실상연구회 회장 김기환에 따르면 이들은 창조과학의 “종교적인 색깔을 전혀 배제”하고자 노력했다(김진수, 2016:38 재인용). 그리고 교과서를 분석하고 학교교육과 대중교육을 통해 진화론의 ‘폐해’를 알리는 데에도 집중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진화론은 “나쁜 인류 역사의 기초 사상”을 제공한다.

 

인간을 지능이 발달한 영혼 없는 동물의 하나로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아무 의미도 없는 우연의 결과로 바라보게 만드는 유물론적 세계관은 결국은 종교, 도덕, 윤리가 아닌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을 근본으로 일등 주의, 쾌락주의, 이기주의, 생명 경시 현상을 유발하여 마약, 동성애, 패륜 범죄, 학교폭력, 왕따, 성폭행, 자 살, 낙태, 인육 섭취 등에 대해 죄의식을 사라지게 만들어 사회를 점차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http:// www.str.or.kr).

 

“약자에 대한 폭력”, “일등주의”, “양육 강식, 적자 생존 논리를 통해 강대국의 약소국을 지배를 정당화한 제국주의 전쟁”, “공산주의”, “히틀러”, “마르크스”, “2천만명을 학살한 스탈린”, “우생학을 통한 인종차별”, 홀로코스트 등 사회의 모든 병폐를 “진화론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창조과학회원 허정윤(2014)은 ‘창조론오픈포럼’ 논문 에서 공산주의 유물사관과 진화론이 결합하여 과학적 무신론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윈주의, 유물론, 맑스주의, 무신론을 동일시하면서 이들의 사상은 “인간적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도덕성”과 “윤리를 부정” 한다는 보수신학의 전형적인 수사를 반복하면서, 맑스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을 “적자생존을 향한 생존경쟁만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역사에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온 공산주의가 정치적 실체로서는 비록 약화되었지만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아니 얼굴은 쇠약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몸체는 진화론과 하나로 결합되어 과학적 무신론이 라는 괴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몸체에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뉴스(Janus) 같은 괴물로 오히려 힘이 강화된 셈이다(2016:59).

 

진화론, 과학적 무신론은 공산주의가 얼굴을 바꾼 것뿐이다. 진화론에 대한 반대는 사실상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이며 창조과학은 반공주의 논리의 확장인 셈이다. “공산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달리 그 자체 이념이 매우 종 교적”이기 때문이다(김영길, 조덕영, https://bit.ly/3846Tbu). 기독교인으로서 ‘반공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자’라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창조론 뿐이다. 주장 자체의 논거 도 문제지만, 이러한 공포에 기반한 “창조과학” 운동은 대중의 공포에 영합함으로써 세력을 확장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퇴행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예컨대 동성애 권리 주장이 “진화론에 근거”한다며, ‘창조과학 세미나’, ‘청소년 을 위한 창조과학 비전캠프’에서 반동성애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등(이재만, https://bit.ly/2vcfHgE), 창조과학 지지자들이 기독교 세계관과 창조과학에 근거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극우정치와 보수신학(기독교세계관, 창조과학)의 결합 문제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필립 키처는 <과학적 사기: 창조론자들은 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서 제리 폴월의 ‘도덕적 다수’와 창조과학자들의 동맹을 설명했다. 키처에 따르면, 미국의 ‘과학적 창조론 자’들은 도덕적 다수 운동과 함께 미국 사회를 보수적으로 바꾸는 운동을 시작했다.

 

3-4. 동맹 확장 전략 2

 

창조과학의 기독대중 확산에는 창조론자들의 전략 수정도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지적설계론이 창조과학의 계승이냐 아니냐는 논쟁적이지만,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창조론자들이 지적설계론의 논변과 학문적/사회적 전략을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것이 창조과학의 논지 강화와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윌리엄 뎀스키의 <지적 설계>(IVP)를 번역한 집단은 ‘서울대 창조과학연구회’였으며, 필립 존슨의 <다윈주의 허물기>(IVP)는 ‘과기원 창조론 연구회’에서 번역했다. 또한 창조과학회의 홈페이지에서도 지적 설계론 관련 문건들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지적설계론은 유신론/무신론 프레임을 설계자/자연주의철학으로 바꾸었고, 이에 고무된 창조론자들이나 기독교인 지적설계론자들은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을 무신론에 대한 싸움이자 기독교에 대한 변증으로 인식하였다. 다시 말해 창조과학 지지자들에게 지적설계론은 자연주의라는 이름의 무신론을 공격하고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는 변증적 도구이다. “지적 설계는 자연주의에 대한 최신의 가장 명확한 논 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뎀스키 <지적설계>, 서울대 창조과학연구회 역자후기 422쪽). 지적설계론자 이승엽 교수도 필립 존슨의 <심판대의 다윈> 역자 후기(326쪽)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필립 존슨은 지적 설계 운동이 단 순한 과학 패러다임 논쟁에서 벗어나 사회 전반의 무신론적 자연주의 학문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으로 확대되기를 원했”다. 창조과학 지지자들의 지적설계론 학습과 옹호는 일반 세속학문 영역에서 다윈주의나 자연주의와 싸워서 이길 수 있고, 또 자신들의 신앙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서울대 창조과학연구회는 뎀스키의 <지적 설계> 역자 후기(421-422 쪽)에서 지적설계론에 대한 (사실여부를 떠나) 낙관적인 전망을 드러내었다.

 

 

4. 창조과학자들의 내적 동기와 자기 서사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의 논리에 스스로 설득되어 가는지, 그들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있을까. 그 들에게 과학과 신앙, 진화론 등은 어떤 의미로 표상되고 있을까.

 

사람들은 과학이 인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과학의 신 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 인간의 존재이유나 도덕적 문제 등엔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과학적으로 보려는 시각 자체가 큰 무리입니다 ... 그러므로 과학은 하나님의 질서와 법칙 속의 한 과목일 뿐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김영길 1998: 28- 29).

 

진화론에 대한 배척과 창조과학에 대한 이들의 확신은 과학의 예측 실패와 우주자연 질서의 경이에 대한 신비적 경험에 근거한다. 과학지식에 대한 한계의 인식은 곧바로 신앙적 논리의 무한한 긍정으로 비약한다. “바로 1초뒤의 일도 예측 못하는 것이 과학”(김영길 1998: 18)이다. 반면 성경을 읽으면서 이들은 “그 오래전에 오늘날 되어질 일을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까”(김영길 1998: 18)하며 경탄한다. 김영길은 창조론 서적을 읽으며 진화론의 “비 과학적인 요소”(28)를 깨닫는 동시에 성경의 무오에 감탄한다.

 

창조과학은 과학활동 자체보다는 성서무오설과 근본주의 신앙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진다. 성경의 “창조론을 연 구할수록 창조과학의 신비와 과학적인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1998:28). “과학의 힘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 는 벽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이다”(김정한 1998:175)

 

이들은 공통적으로 풀리지 않았던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경험을 통해 그 영감의 원천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심영기 1998:151). 그리고는 과학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깨닫는다. “과학을 우상으로 모셔 과학만이 진 리이고 과학이 인간의 모든 고민을 결국 해결해줄 것으로 맹신”하지만 “과학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알수가 없”(김정욱 1998:79)다. 과학의 한계를 경험하는 일은 과학에 대한 숭배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로서 이해된다.

 

과학의 한계와 창조세계(질서의 정교함)에 대한 경탄은 과학적 논리를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창조과학을 수 용하고 실천하는 동기로서 작용한다. “수백만종의 동식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한치의 오차없이 정확하게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창조의 세계’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김영길 1998:34). 가령 전자현미경을  보면서 “그 놀라운 질서와 정밀성에 감탄”(신현길 1998:43)하고 “재료 구조의 아름답고 질서정연함 속에서 남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 솜씨가 오묘함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상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셨고 창조된 모든 다른 생물들과 구별하셨음을 깊이 실감”(김철중 1998:242)하게 된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엄청나게 복잡한” “근육 수축의 기작과 자극의 전달 과정”(신현길 1998:43)이나 “미생물조차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가를 안 후에는”(김준 1998:140) “우리가 무척이나 제한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이 모든 세계와 사물 그리고 그 운용법칙 들이 신비로우리만큼 규칙적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강신후 1998:233)는 것이다. 결국, 과학이라는 산에 올라가면 “더 넓고 무한한 질서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신현길 1998:44)이 있고, “논리의 범주도 뛰어넘는 것이었고 물질계의 자연 법칙과 연계되는 그러나 독립적인 원리들이 실존하는 것으로 조금씩 깨달아”(김해리 1998:135)짐으로써 창조과학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개신교로 회심 후“내 앞에 펼쳐진 모든 세계는 이전의 세계가 아니었다.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세계였다”(임번삼 1998:112)고 고백한다. “거창한 우주만물을 보고 감탄하면서 만드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요 태도”(김해리 1998:135)인 것이다. 종교적 신념이 있는 과학자들이 종종 자신들이 “밝혀낸 메커니즘의 아름다움과 우아함 속에서 믿음의 증거를 발견”(브루크 2010:244)하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지만, 창조과학자에게서 창조를 믿는 신앙(창조신앙)이 필연적으로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내적 증거로 활용되는 것은 보다 해석학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일이다. 창조과학자 자신들은 우주자연에 대한 낭만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로 재현되는 반면, 진화론자나  세속적 과학자 들은 “무미건조”한 사람들로 재현된다. 자연과학 세계는 “진화론으로 오염”되었고 “오늘날 진화론에 오염된 학문과 갖가지 인본주의 사상이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불행한 인생을 살게 하고 있다”(임번삼 1998:120). 창조과 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서사는 창조과학을 알기 전엔 “과학을 맹신”, “교만”(김정욱 1998:73)하고 “이성적”, “논리적”이며 “무미건조”한 사람이었던 것이 신앙을 갖고 창조과학을 알게되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고백이다.

 

[과신대 포럼 발표문] 한국 개신교는 왜 창조과학에 빠졌는가 (김현준).pdf
0.29MB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과신대 포럼 발표자료1] 한국 개신교인의 근본주의 신앙관에 관한 인식 조사 (신익상 교수)

 

* 이 글은 2020년 과신대 포럼 "개신교 근본주의가 반진화론과 창조과학에 빠진 이유"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이 글은 신익상, “개신교인의 신앙관과 생태위기에 관한 인식,” 「기독교사상」 731 (2019.11), 9-17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이 글의 내용을 인용할 경우 원전을 인용하기 바랍니다. 

 

 

2019년, 한국 개신교인의 근본주의 신앙관에 관한 인식 조사

 

신익상(성공회대학교 교수, 연세대학교 겸임교수)

 

 

이 글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진행한 “2019년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 조사” 중 신앙관에 관한 설문조사의 1차 통계자료를 중심으로 중요한 함의를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신앙관에 있어서 2019년의 한국 개신교인들은 여전히 근본주의적 신앙관을 대체할 다른 대안을 찾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개신교인이라고 하면서도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거나 미온적으로 출석하고 있다고 응답한 신자들의 특성으로 인해 새로운 정체성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제 이러한 조사 결과를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I. 신앙관: 지금, 한국 개신교는 내용 없는 근본주의를 지닌 채 동시대와 싸우고 있다.

 

1. 신앙관에 대한 설문통계조사의 개요

 

한국 개신교인의 신앙관과 관련된 통계분석은 총 10문항의 설문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한다. 11문항 중에서 4문항은 종교문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화 현상에 대한 배타성의 정도를, 3문항은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의 정도를, 나머지 3문항은 자기 신앙에 대한 교리적 확신의 정도를 측정하였다. 이 중 일부 문항은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제기된 근본주의적 교리를 바탕으로 한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는 용어 자체의 탄생과 관련되기도 한 근본주의적 교리는 성서무오설, 비기독교인의 멸망, 신성을 지닌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그리고 심판을 위한 재림, 예수를 믿는 자들과 천국에서의 영생 등을 배타적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교리를 배타적으로 확인하고 강조하는 일은 공동체의 정체성이 외부의 어떤 요인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하는 위기감에서 비롯되는 법인데, 당시 미국 기독교인들이 정체성 위기의 외적 요인이라고 지목한 것은 진화론과 공산주의였다. 특히 성서무오설은 성공적인 시대정신인 진화과학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성서문자주의를 내적 확신의 근거와 수단으로 삼았기에 본 통계분석은 이를 반영하였다.

 

하지만 21세기 초의 한국 기독교인에게는 진화론과 공산주의 외에도 다종교 상황이 문화적 자연스러움으로 정착해 있고, 최근 몇 년 동안은 동성애와 이슬람이 기독교 내부에서 이슈화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본 통계분석에서는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 태도와 더불어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연구 대상에 포함하였다.

 

2. 신앙관의 통계분석에 대한 중요 결과 두 가지

 

신앙관에 대한 1차 통계분석 자료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결과 중 두 가지를 요약해서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2019년의 한국 개신교인은 무엇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해내고 있는가의 문제다. 두 번째로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제도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는 않거나, 출석하더라도 한 달에 3회 이하로만 출석하는 개신교인의 신앙 양태가 무엇을 보여주는가의 문제다. 이 두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1) 기독교의 정체성은 무엇을 통해서 표현되는가?

 

2019년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구원의 능력을 빼고는 다른 종교에 상당히 관대한 점수를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래의 그림1이 보여주듯 58.7%의 개신교인들이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으며 58.4%가 다른 종교도 선하다고 응답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보는 개신교인들의 비율은 33.1%로 상대적으로 낮았으나, 개신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48.9%로 절반에 약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상관관계 분석 결과 이 세 질문 간에는 서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엘런 레이스(Alan Race)의 분류에 따르면 2019년의 한국 개신교인들은 포괄주의라고 부를 만한 입장에서 다른 종교를 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림1] 다른 종교에 대한 의견 (개신교인 대상)

 

이러한 사실은 59.8%의 개신교인이 성서무오설을 지지하고 55.0%는 성서문자주의를 지지한다고 응답하였다는 사실(그림2 참조)과 맞물려 근본주의적 신앙관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얼마나 스며들어 있는가를 가늠하도록 돕는다. 물론 이러한 통계는 1982년의 통계와 비교하면 고무적이긴 하다. 1982년에는 축자영감설을 물었을 때 평신도의 92.3%, 목회자의 84.9%가 축자영감설을 지지했었다. 그러함에도, 아직도 성서에 오류가 없다거나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응답한 개신교인들의 비율은 과반이 넘는다.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근본주의의 전략은 보통 두 방향에서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교리의 확립을 통해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외부의 적을 배격하는 것이다. 전자를 내적 긍정, 후자를 외적 부정이라고 잠정적으로 이름 붙일 때, 그림1은 대체로 외적 부정의 정도를, 그림2는 대체로 내적 긍정의 정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지표는 시대정신을 충분히 따라잡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완화된 근본주의를 지속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의 자화상을 보여주는데, 외적 부정의 또 다른 대상으로서의 진화론, 공산주의, 동성애, 이슬람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태도는 이 어정쩡한 완화의 의미를 확인하도록 한다(그림3 참조).

 

[그림2] 근본주의적 교리에 대한 의견 (개신교인 대상)
[그림3] 시대적 이념과 과제에 대한 반대(‘그렇다’ 비율)

 

진화론과 공산주의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태동할 때부터 이 근본주의의 배격 대상이었지만,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진화론에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반면,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개신교인이나 비개신교인이나 할 것 없이 부정적이다. 특히 개신교인은 71.2%나 공산주의를 반대하여 54.3%인 비개신교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보여준다. 이는 한반도가 처한 정치적이고 지정학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할 수 있다. 어쨌든 개신교인들은 비개신교인들과 비교하면 진화론, 공산주의, 동성애, 이슬람 전 항목에 걸쳐서 더 배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근래 들어 갑자기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한 동성애나 이슬람에 대한 반대(동성애: 62.3%, 이슬람: 68.4%)는 진화론의 경우(45.9%)를 월등하게 뛰어넘는다. 더욱이 4가지 시대적 이념과 과제 모두에 있어서 개신교인 본인의 입장이 비개신교인이 보는 개신교의 입장보다 더 반대하는 비율이 높다. 시대적 이념과 사건에 대해 개신교인은 비개신교인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배타적인 셈이다.

 

정리하자면, 시대적 이념과 과제에 대한 배타성은 진화론의 경우를 제외하곤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보다 강하고, 내적 긍정 항목들과 비교하면 더 높은 비율로 강하다. 따라서 2019년 한국의 개신교는 전반적으로 내적 긍정보다는 외적 부정의 요소들을 토대로 하는 근본주의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는 38년 전의 한국 개신교인들보다 근본주의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유력하게 지닌 채 있는 셈이다. 2019년에도 근본주의가 한국 개신교의 유력한 대안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이 근본주의의 성격이다. 이 근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내적인 신앙의 확신이 아니라 외부의 적이기 때문이다. 교리적 확신이 약화하고 있는 근본주의가 고개를 돌린 것은 외부의 적이다. 그런데 이 외부의 적은 다른 종교가 아니다. 다름 아닌 시대적 상황 자체다. 2019년 한국의 개신교는 내적 확신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근본주의를 지닌 채 다른 종교들의 존재감을 의식하면서 동시대와 싸우고 있다.

 

2) 기독교의 미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여전히 근본주의를 가장 큰 대안으로 지닌 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 개신교의 미래는 개신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제도교회에 출석하고 있지 않거나 출석하더라도 그 횟수가 매우 적다고 응답한 신자들의 성격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우선 그림4에서 확인할 수 있듯,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 않은 개신교인은 개신교인 전체 평균과 비교할 때 성서무오설이나 성서문자주의 등을 긍정하는 비율이 현격히 낮다. 교회에 드문드문 출석하는 신자의 경우에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는 개신교인보다는 높은 비율로 근본주의적 교리를 긍정하고는 있으나, 이들의 긍정률 또한 개신교 전체의 긍정률과 비교할 때 유의미하게 낮음을 알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개신교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제도교회에 출석하고 있지 않은 신자들과 교회에 드문드문 출석하는 신자들은 거의 모든 지표에 있어서 개신교 전체 평균과 반대의 길을 향하고 있음을 그림5와 그림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다른 종교나 가르침의 진리성과 도덕성에 대한 긍정은 물론이고 심지어 구원 가능성에 대한 긍정도 과반이 넘을 정도로 다른 종교를 우호적으로 생각함으로써 다원주의적 태도에 접근해 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 않은 개신교인들의 행보는 더욱 과감하다. 이들은 진화론을 대하는 태도를 제외하면 거의 전적으로 비개신교인의 평균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대적 이념과 과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비개신교인에 근접해 있다(그림6 참조).

 

[그림4] 근본주의적 교리에 대한 긍정 (‘그렇다’ 비율)(Base=전체, N=차례로 1000명, 226명, 97명, %, 긍정률 기준)
[그림5] 다른 종교에 대한 긍정 (‘그렇다’ 비율) (Base=전체, N=차례로 1000명, 226명, 97명, %, 긍정률 기준)
[그림6] 시대적 이념과 과제에 대한 반대(‘그렇다’ 비율)(Base=전체, N=차례로 1000명, 1000명, 226명, 97명, %, 긍정률 기준)
[그림7] 연령별 교회 출석 양상(열심히 출석하지 않는 신자 중심) (Base=전체, N=차례로 160명, 208명, 251명, 230명, 151명, %, 긍정률 기준)

 

제도교회에 포섭되지 않은 채 개신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 그리고 제도교회에 포섭되어 있기는 하나 드문드문 출석하고 있는 이들은 제도교회가 제공하는 근본주의적 대안에서 이미 멀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림7은 교회에 잘 나가고 있지 않은 개신교인이 연령대별로 얼마나 분포하고 있는지를 나타낸다. 이에 의하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 않은 개신교인의 비율은 20대가 압도적이며(15.0%로 7.2%인 60대의 2배),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그 비율이 증가한다. 여기에 드문드문 출석하는 신자들의 비율을 합하면 20대 신자의 42.2%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연령대별 분포의 추이는 이러한 양상이 젊을수록 급격하게 심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로부터의 이탈을 주도하고 있는 신자들은 젊은이들인 것이다.

 

따라서 확인되는 것은 20대를 중심으로 하는 젊은 층에서 근본주의적 제도교회로부터 이탈하여 동시대의 시대정신에 따르려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제도교회가 근본주의적 대안에서 벗어나 시대정신과의 교감 속에서 새로운 대안적 기독교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제도교회로부터 이탈하는 개신교 젊은이들이 점증할 것으로 보인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개신교인들이야말로 한국 개신교의 미래를 보여주는 시금석인 것이다.

 

[과신대 포럼 발표문] 2019년 한국 개신교인의 근본주의 신앙관에 관한 인식 조사 (신익상).pdf
0.25MB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우리의 진짜 적은 무지다.

  • 최성일 선생님, 너무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특히,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과학책을 들자는 말씀에 적극 찬성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완식 2020.02.05 11:48
    • 김선생님, 감사합니다^^

      휘페르테스 2020.02.12 08:19 DEL

 

2020년 첫 행사부터 제게는 아주 좋은 공부였습니다. 공동포럼의 내용은 이미 뉴스엔조이 기사를 통해서 잘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저는 기독교 고등학교의 교사로서 이번 행사를 통해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기독교 학교에서 영어교사로 30년 넘게 근무하고 있는데, 영어 교과서에 나오는 진화론과 관련된 과학 지문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되는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처음 접한 것이 헨리 모리스의 <현대 과학의 성서적 기초>였습니다. 그 책만으로도 분명 행복한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창조과학자들과 근본주의 개신교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포럼에서 다룬 그대로, 대부분의 보수교단이 가르치는 창조신앙은 자연스럽게 창조과학으로 연결되었고, 저도 그 조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창조과학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 가령, 구소련 붕괴와 자본주의의 확장으로 인한 무한 경쟁 문제,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 기독신앙이 있는 사회 지도자들의 부정, 종교 간의 대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들어오는 이슬람 문화, 동성애 담론 등등의 각종 사회 문화적 현상들을 소화하고 이해하기에는 “창조과학과 근본주의 개신교 신학”은 너무 편협하여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는 이런 시대적 모습들이 부분적이지만 모두 들어있었습니만, 그 다양성들을 어떻게 소화해서 가르쳐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었습니다. 그렇다고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은 재미도 없고 비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 색다른 보충수업을 항상 모색하고 있습니다. 4년 전에 “청소년 소명아카데미”라는 여름방학 방과후 수업을 마련하여 아이들에게 직업과 비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교육하고자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육과정 중 문화에 대한 토론 시간에,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짧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다들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라 당연히 반대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2학년 학생 중 한명이 찬성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도 충격을 좀 받았었습니다. 고등학생 중에서도 동성애에 대해서 탈교회적 생각을 하는 학생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당시에는 잘 알지 못해서 그 수업에서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공동포럼으로 인해, 고등학교 교단에서 이전보다는 좀 더 쉽고 친절하게 진화론과 창조과학, 공산주의, 동성애, 이슬람이라는 시대적 이념과 과제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점이 유익했는지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발제1 – 2019년, 한국 개신교인의 근본주의 신앙관에 관한 인식 조사(신익상 교수, 성공회대, 연세대)

 

신교수님께서는 2019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2019년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 조사” 자료를 자세히 분석해 주셔서 유익했습니다. 요약하자면, 2019년 한국 개신교인들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근본주의적 신앙관에 어정쩡하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신교수님의 분석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한국 개신교 관련 어휘는 “정체성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배타성”이었습니다. 나날이 복잡성을 더 해가는 21세기에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개신교는 정체성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근본주의 개신교는 첫째, 교리 확립을 통해 자기 확신을 강화하고, 둘째,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에 위협이 되는 외부의 적을 배격하게 되었지만, 후자의 방법에 치우쳐있다고 요약하셨는데, 매우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제가 느낀 대로 결합해 보자면, 21세기의 한국 개신교는 “내적인 빈곤을 외부의 적과의 싸움으로 가리고 있거나, 아니면, 내적인 빈곤 때문에 외부의 적과 더 가열찬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교수님의 분석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면서, 저는 두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한국 개신교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기 위해 내적 빈곤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들이 내적으로 빈곤하다는 정직한 고백이 필요하다.

 

둘째, 진화론, 공산주의, 동성애, 이슬람 등의 시대적 거대 담론을 다 외부의 적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 각각에 대해 기독교적 기준만을 적용하려고 하지 말고, 과학적인 탐구를 과감히 늘려나가야 한다.

 

적고 나니, 간단히 말해서 둘 다 “공부합시다”라는 말이 되네요. 하나님께 내적 빈곤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도와주심을 바라며 “새로운 성경 읽기”를 통해 신학을 재정립하여 내적 풍요를 다시 찾고, 그 힘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허심탄회하게 경청하고 공부함으로써 공통분모나 또는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신교수님이 마지막으로 덧붙이신, “우리의 진짜 적은 무지다. 우리는 정신의 알맹이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위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2. 발제2-한국 개신교는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졌는가?: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 ANT접근(김현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이신 김현준 교수님은 주전공인 지식사회학을 기반으로하여, 한국개신교가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크게 네 가지, 자세히는 9가지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목만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문화/종교적 환경
1-1. 세속화 및 과학발전(과학주의)에 대한 불안과 그에 대한 문화적 방어(문화전쟁)
1-2. 과학의 문제점과 문화지체
2. 국가적, 제도적, 교육정책적 환경
2-1. 과학기술자 양성(위주) 국가정책
2-2. 국가차원에서 과학정신의 상대적 결핍; 과학교육의 부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
3. 이해관계 번역(translation of interest) 실천의 행위자-연결망, 동맹의 결성
3-1. 기독교세계관 학문운동의 창조과학지지
3-2. 동맹의 역사적 근원
3-3. 동맹 확장 전략1
3-4. 동맹 확장 전략2
4. 창조과학자들의 내적 동기와 자기 서사

 

김교수님이 이러한 요인들을 설명하면서 공통적으로 가장 강조한 것은 “창조과학의 핵심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의 위기에 대한 변증적 성격을 지니는 종교적 담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창조과학이 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를 설명한다고 했습니다. 신교수님도 지적한바와 같이 한국 개신교 창조과학의 뿌리는 미국인데, 김교수님은 미국의 세대주의, 안식교, 헨리 모리스에 뿌리를 둔 창조과학이 박형룡, 김준곤, 김영길을 통해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창조과학자들이 지적설계론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적설계론도 1987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도버 카운티 교육위원회가 활용하기 시작했고, 현재 꽤 호응을 얻고 있지만, 지적설계론이 종교적 세계관과 세속적 세계관을 소통시키고 상호 학습효과를 가져오는 ‘공통의 언어’일 수 있을지는 재고해야한다고 발제문 각주에서 비평하였습니다.

 

김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미국과 한국의 창조과학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으며, 도날드 넘버스의 “한국이 창조론의 수도가 되었다”는 말을 통해, 한국 개신교의 창조과학 문제가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창조과학은 시작에 있어서 반지성적이지는 않았지만, 유통과 확산에 있어서는 지역교회/비전문가/평신도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필요로 했다는 분석에서, 다시금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성적인 탐구가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한국의 열심있는 개신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과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에는 ‘자연과학 연구도 신앙의 실천일 수 있음’을 강조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게놈프로젝트를 완성한 프랜시스 콜린스를 비롯한 분명한 예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문의 모든 영역을 기독교적으로 만들려 하는 창조과학의 시도가 있고, 그 결과 창조과학은 ‘기독교적 과학’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 점은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신학과 과학은 다루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혼합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박형룡 박사도 이 점을 처음에는 주장했지만, 1970년대 이후의 근본주의 신학과 창조과학의 급류에 의해 사라지고, 근본주의 신학과 반진화론이 한국의 보수 개신교단들의 주류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이 세력이 강하여 세계 기독교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를 공론의 장으로 이끌고 나오기 위해서는 참으로 오래고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는 칼 바르트의 말을 패러디하여,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과학책을 들자”는 운동을 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신을 알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문제는 하나님이 무한하신 분이시고, 또 알고 보면 우리 자신도 알쏭달쏭한 구석이 매우 많으므로, 짧은 인생, 서로 싸우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두 권의 책인 성경과 우주를 함께 공부하며 그 즐거움을 누리면 참 좋겠습니다. 2020년 과신대 활동을 통해 즐거운 소식들이 널리 퍼지고 그 소식을 따라 많은 분들이 누림과 나눔에 참여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84편 1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장 18절)

 

최성일 기자 (ultracharm@naver.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기사연 공동포럼] 개신교 근본주의가 반진화론과 창조과학에 빠진 이유

 

최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진화론에 대한 한국 개신교인들의 인식은 동성애, 이슬람, 공산주의과 비교해 일반인들과 가장 큰 견해 차이를 보였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한국 개신교인들의 반진화론적 견해는 반동성애, 반이슬람, 반공산주의라는 정치 프레임과 함께 연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가 진화론을 반대하는 이유를 신학적으로 반성하고, 더불어 종교사회학을 통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과신대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함께 특별 포럼을 준비했다.

 

◎ 일시_ 2020.1. 28. (화) 저녁 7시 00분 - 9시 00분
◎ 장소_ 새물결아카데미 대강의실
(서울특별시 마포구 굴레방로1길 25 (아현동, 애오개아이파크) 215호)

◎ 프로그램
7:00-7:30 발제1: “개신교 근본주의의 반진화론-반동성애-반이슬람-반공산주의 연대” _ 신익상 교수 (성공회대학교)
7:30-8:00 발제2: “한국 개신교는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졌는가?” _ 김현준 연구원 (서교인문사회연구실)
8:00-8:10 휴식
8:10-9:00 패널 토론 (신익상, 김현준, 김상덕, 최경환)

 

◎ 강사 및 패널 소개 

신익상_ 성공회대학교 열림교양대학 조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철학박사
김현준_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사회학 연구자,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김상덕_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영국 에딘버러대학교 철학박사 
최경환_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장,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저자

 

** 수강신청_ https://bit.ly/35AfDEd **

 

* 참가비: 5,000원 (온라인, 오프라인 신청 가능)
* 온라인 신청자는 1월 30일(목)에 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를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영상은 24시간 동안 보실 수 있습니다.

* 등록비 납부: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Paypal 납부: paypal.me/scitheo

** 입금할 때 입금자명에 본인 성명을 적어주세요.
** 등록비 납부가 확인되면 등록 완료 안내를 문자메세지로 보내드립니다.
** 등록 취소 및 등록비 환불은 강좌 7일 전까지만 가능하며 모든 환불은 거래수수료를 제외한 80% 금액만 환불해드립니다. 

 

◎ 공동주관_ 과학과신학의대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 후원_ 새물결플러스&새물결아카데미 
◎ 문의 및 연락_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김정형 교수의 <창조설 논쟁(creationism)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를 듣고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곱셈과 나눗셈이 수학에서 암묵적으로 먼저 계산하는데에 동의하는것처럼

    창세기도 암묵적동의로 넘어가주는 것인가 싶습니다.

    그래도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서 여성목회자 안수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어서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 없다고 봅니다.

    증인 2020.01.08 23:52

 

김정형 교수의 <창조설 논쟁(creationism)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을 듣고

 

2019.12.23 제18회 과신대 콜로퀴움

요약 정리: 송윤강 

 

 

김정형 교수님의 이 강연은 현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창조론 또는 창조과학과 진화론 사이의 논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창조론’이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창조설(creationism)이다. 김 교수는 창조에 대한 신학적 교리를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이라 불리어야 맞다고 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핵심 질문이 다르다. 창조설은 창조자 하나님을 기본 전제로 한다. 그래서 하나님에서 대하여 질문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이 세계의 역사에 대해 질문하고, 세계가 운행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질문한다. 그래서 질문은 When과 How이고 과거지향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더 나아가 우주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질문하고 있다.

 

반면에 창조론의 핵심 질문은 누가(Who) 왜(Why)이다. '어떤 분이,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만들었느냐'이다. 미래 지향적이고, 이 땅이 아니라 위에 계신 분, 영원하신 하나님이 관심의 대상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같은 ‘론’이라는 접미어를 쓰고 있지만 관점이 전혀 다르다. 진화론의 ‘론’은 Theory다. 과학의 논리를 따른다. 반면에 창조론의 ‘론’은 doctrine이다. 신앙의 논리를 따르는 교리(신조)다. 서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교리의 문법과 과학의 문법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창조론과 진화론을 대립시키면서 같은 범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왜 섞이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창조론, 즉 창조설(creationism) 주장 때문이다. 창조설에서는 ‘창조자 하나님을 믿습니다’를 전제로 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관심 영역이 과학의 영역과 중첩된다. 과학자가 관심이 있는 영역은 이 세상, 지구의 과거 역사와 우주와 생명의 기원과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창조설에서도 이러한 과학의 영역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창조신앙과 과학이 섞이는 혼동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설의 역사는 매우 짧다. 특히 창조과학의 역사는 100년 정도이며 본격적으로는 1960년대에 시작했다. 그러나 창조론의 역사는 2000년이 넘는다. 구약시대까지 포함하면 3000년이 넘는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창조론을 믿는다. 그러나 창조설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가능하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고 이 수정란으로부터 한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은 매우 신비롭다. 수정란의 세포는 단 하나이다. 그런데 이 단 하나의 세포가 서로 기능이 다른 세포로 분화되어 팔, 다리, 목, 귀, 코, 눈, 뇌가 된다. 그런데 그 신비로운 과정을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의 발전을 긍정하면서도 이 아기는 하나님의 작품임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 이 아기를 만드셨는가? 창조는 한 순간이라면 수정할 때인가? 그러면 하나님은 특별한 기능을 가진 단 하나의 세포만 창조하시고 나머지는 그 메커니즘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설계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건강한 한 아기가 태어날 수 있도록 열 달 동안 일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놀라운 지혜로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셨고 그 일부를 과학자들이 밝힌 것이다.

 

우리는 과학의 발전을 긍정하면서 얼마든지 아기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믿을 수 있다. 이처럼 과학과 창조론은 서로 차원이 다르다. 서로 섞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과학의 발견을 통하여 창조 신앙을 깊고 넓게 확장하여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과학혁명 시대가 아니라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혁명 시대(16~17세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과학혁명의 시대는 기존의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이 충돌하던 시대다. 전문가는 어느 것이 옳은 지 판단할 수 있지만 비전문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비전문가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때는 보수적 입장을 취해도 용납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혁명이 끝났다. 이제는 과학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다. 서로 논쟁을 하다 가도 누군가 과학적 사실을 언급하면 거기서 논쟁이 종결된다.

 

현대과학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빅뱅을 탐구하고 있고, 지구의 탄생, 자연선택, 복잡한 생명체 탄생, 인류의 탄생, 인류의 문명과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제는 자연 과학을 넘어 일반 역사를 포괄하는 ‘빅 히스토리 Big History’를 말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많은 한국 교회에서는 여전히 과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창조설을 가르치려 하고 있다.

 

창조 이야기와 관련된 창세기 1장의 해석은 이미 1600년전 성 어거스틴이 살아 있을 때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때도 과학이 있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과학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창세기의 주석을 다섯 번이나 고쳐 썼다. 그만큼 창세기는 어거스틴에게도 해석이 분분하고 어려운 책이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다섯 번째 고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통상적으로 비그리스도인도 땅과 하늘 이 세상의 다른 요소들, 별의 운동과 궤도, 별의 크기와 상대적 위치, 일식과 월식의 예측, 해와 계절의 순환, 동물과 나무와 돌들에 관해서 얼마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이 지식이 이성과 경험으로부터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혹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서의 의미를 제시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어떤 불신자가 듣게 된다면 그것은 부끄럽고 위험한 일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고 무식하다 무지하다 고 조롱하고 경멸하는 그와 같은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에 관해서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 중에서.

 

그런데 4세기경 성 어거스틴이 문제 의식을 가졌던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어거스틴의 조언에 따라 이러한 당혹스러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것인가?

 

 

위 그림은 창세기 1장을 문자적 표현에 충실하게 재현한 그림이다. 평편한 지구, 땅 밑에 땅을 받치는 기둥(욥기 38장, 시편 104편)이 있고, 궁창이 있다. 궁창 위에 물이 있다(노아의 방주 때 사라졌다고 한다). 궁창에 창문이 있어 물이 쏟아진다. 해와 달과 별은 궁창 위를 다닌다(궁창 너머가 아니다). 하나님의 위치도 나온다(시 104편). 궁창 위 하늘에 계신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그리면 이런 그림이 나온다.

 

이것을 지금 받아들일 수 있는가? 지금의 상식으로는 창세기의 이러한 그림을 매우 당혹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가 쓰일 당시에는 이러한 세계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 시대 사람들의 과학상식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지 말고, 그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면 이해하면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는 그 시대의 상식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시대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준 것이다.

 

유치원 수준의 아이에게 탄생을 말해줄 때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어 나왔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엄마 배꼽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설명이지만 아이는 믿는다. 아이는 배꼽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 품에서 엄마의 사랑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이야기하는 사실이 아니라 진리를 포착한 것이다. 이것이 눈높이 교육의 통찰이다.

 

하나님도 동일한 방식으로 과학의 발전 전에 그 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하나님의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주인공은 이러한 그림이 아니다. 주인공은 하나님이다. 세계 모습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주인공을 읽어야 한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함으로써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했다.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신다. 즉 인간의 지성과 마음의 능력에 적응하신다. 좋은 웅변가는 청중의 한계를 잘 알고 거기에 적응한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으로 오시기 위해 몸을 굽히셨다. 하나님은 때로 입, 눈, 손, 발을 소유하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이해하면 과학적 세계관과 성경의 문자적 내용이 다름에 대하여 그렇게 당혹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창세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의 장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이 장르이다. 장르에 따라 읽기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를 읽으면서 마음 안에 물이 얼마나 있고, 물고기가 얼마나 있느냐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창세기는 역사책 과학책이 아니다. 시스타인 성당 천정에 그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이 하얀 긴 수염 기른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모습을 가진 분이신가? 하나님은 어떤 형상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그러면 그러한 묘사는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한다. 그 그림은 사진이나 사실화가 아니라는 것일 알기 때문이다. 그 그림은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고유한 신학적 해석을 전달하는 예술작품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사실로 보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창조설은 기원론의 한 형태이다. 과학과 비슷하게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과학은 세상의 기원에 대하여 하나님 없이 설명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창조설은 하나님을 전제하고 세상의 기원을 설명한다.

 

과학이 하나님 없이 자연계를 설명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과학이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고 자연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개입시키면 과학은 발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진이 일어나는 이유를 하나님이 화가 나서 일어난다는 식으로 설명하면 지층의 문제를 더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과학은 하나님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그런 과정을 통하여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런데 창조설은 하나님을 전제로 하고 세계를 설명하려다 보니 과학적 결과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과거에는 평편한 지구, 천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도 지구의 나이는 6000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젊은 지구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 이야기 사이에는 긴 간극이 있다고 ‘간극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창세기의 하루를 나타내는 히브리 원어 ‘욤’이 24시간이 아니라 긴 시대로 보는 ‘날 시대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창세기가 과학임을 포기하고 진화론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해석도 있다. ‘점진적 창조설’은 종 내부의 진화는 인정하지만 종 간의 대진화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진화적 창조설’은 대진화까지 인정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젊은 지구 창조설과 진화적 창조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다. 물론 창조과학의 유익이 있다. 과학을 잘 모르면서 문자주의 신앙을 가진 분에게 신앙을 공고히 해준다. 그러나 과학을 아는 사람에게는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복음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창조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창조신앙을 가질 수 있다. 창조설 논쟁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창조신앙의 핵심 진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시고, 왜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 이다.

 

그 대답은 사도신경에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더 많은 교파들이 공통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한 분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늘과 땅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자임을 믿습니다.”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세 가지를 뽑을 수 있다.

1)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하나님: 세속주의와 모든 우상에 맞서는 유일하신 신으로 인정한다.

2)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는다

3) 천지의 창조자: 자연은 하나님이 소중하게 만드신 작품이다.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이것이 창조신앙이다. 영혼 구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세 가지는 창조설 입장이 달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적인 신학의 토대다. 창조설 논쟁에 빠져서 이 중요한 진리를 간과하면 안 된다. 이것이 창조설을 넘어서는 신앙이다.

 

 

과학을 받아들여도 창조신앙이 위협받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의 발견이 믿음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과학자가 밝히는 과학의 규칙을 받아들이면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발견(입자, 행성, 별, 생명…)을 통하여 우주를 만들고 역사에 관여하면서 매일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우주의 모습을 탐구하면서 그 속에서 드러나면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과학과 신학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이 생명의 의미나 인생의 목적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 무신론은 우연이고, 목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신론의 입장에서는 모든 자연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또 과학을 품으면 더 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지구를 넘어서는 하나님, 160억년 우주보다 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의 탐구를 통하여 생명의 경이에 감탄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한 없는 깊이를 느낀다. 과학이 발전한다고 신비가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지식을 통하여 더 많은 더 큰 새로운 신비가 느껴진다.

 

한국 기독교가 인간의 진화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 입장이다. 진화론이 무신론을 함축한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생명의 역사 생명의 메커니즘에서 결코 하나님이 배제되지 않는다. 진화론은 무신론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논리적 필연 관계가 없다. 도킨스 같은 사람은 진화론이 무신론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 없이 연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것이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와 다른 것이며 진화론은 종교적으로는 중립이다. 진화론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 탐구를 알고 배우고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이다.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까지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며 결코 과학으로 밝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면 진화론에서 인간의 출현과 인간의 탄생에 대한 창세기의 이야기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도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기독교인 뿐 아니라 일반인도 반발했다. 일반인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종을 하나하나 특별하게 순간적으로 독립적으로 완성된 형태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랜 시간을 걸려서 간접 창조도 하신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이 직접 식물을 하나하나 따로따로 만들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땅 보고 내라고 명령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과정을 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가 창조신앙의 핵심이 아니다. ‘왜 나를 만드셨는가’가 핵심 질문이다. 과학자는 진화의 과정을 통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지 않는다.

 

창세기 언어를 다큐멘터리의 언어로 이해하면 안 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과정을 보면 하나님이 토기장이처럼 묘사되고 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는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묘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창세기의 이야기를 절대 과학적 언어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과학과 같이 언급되는 순간 그 의미가 왜곡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제18회 콜로퀴움 "창조설을 넘어 창조론으로"

 

창조설(creationism)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학 시대를 맞이해 자신의 신앙이 무너질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창조에 대한 다양한 입장 중에서 어느 것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부합하는 것일까? 이런 걱정과 고민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최근 『창조론: 과학 시대 창조 신앙』(새물결플러스, 2019)을 출간한 김정형 교수님을 모시고 다양한 창조설을 넘어 성서의 본래적 메시지와 기독교 전통에 충실한 ‘창조론’을 소개받습니다.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영상 링크는 12월 24일 오후에 이메일을 통해 보내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12월 23일(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등록비: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5,000원 (청소년은 무료)
* 과신대 정회원은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모두 무료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창조설을 넘어 창조론으로" (김정형 교수)

     휴식(8:20-8:30)  
2부 대담(8:30-9:30) 패널: 김정형 교수, 우종학 교수

 

 

강사 소개

 

김정형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M.Div.), 미국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Ph.D.). 2010년 국제과학종교학회(ISSR)에서 주최한 존 폴킹혼 80세 기념 국제논문대회에서 공동대상을 수상했으며, 이 논문을 토대로 이듬해 기독교 종말론과 과학적 우주론 간의 대화를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했다. 지금은 장로회신학대학교 연구지원처 조교수로 일하면서, 여러 대학과 교회 및 기관의 초청으로 하나님 나라 신학, 창조론, 신학과 과학 등을 강의해오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분단 한국을 위한 평화의 신학』(나눔사, 2015), 『예수님의 눈물』(복있는사람, 출간 예정) 등이 있고, 공역서로는 『몰트만의 신학』(크리스천헤럴드, 2008), 『하나님과 진화를 동시에 믿을 수 있는가』(동연, 2015) 등이 있으며, 현재 블로그 ‘온돌왕자의 God-Talk’를 운영 중이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