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콜로퀴움]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 과정신학적 관점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
과정신학적 관점

 

근대 세계는 기독교 신앙에 심각한 도전과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과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과학적’이 됐으며, 그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은 더욱 근본주의로 치닫고 있다. 이 깊은 골을 매우기 위해서는 과학적 자연주의에 대한 성찰과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과정신학은 과학과 신학이 서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종합을 제안한다.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오랜 시간 과정신학을 연구해 온 장왕식 교수를 통해 자연주의 철학과 기독교 창조론이 어떻게 서로 만나고 화해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  이번 강연은 온라인으로만 진행됩니다. 수강신청을 해주시면 이메일을 통해 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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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20년 7월 6일(월) 낮 12시 (시청기간: 7월 17일 낮 12시까지)

* 등록비: 5,000원 (과신대 정회원, 청소년은 무료)
   등록비 입금 계좌: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강연 순서

1부 강연(약 90분) :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 과정신학적 관점" (장왕식 교수)
2부 대담(약 30분) : 장왕식 교수, 최경환 사무국장 

 

* 강사 소개

장왕식 교수현재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면서 종교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대종교철학연구소 소장직을 겸하고 있다.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교환교수로 가르친 바 있으며, 한국 화이트헤드학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종교철학을 공부한 후,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화이트헤드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역서로 『화이트헤드 풀어 읽기』, 『과정형이상학과 화이트헤드』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생성과 과정의 철학에서 종교철학의 문제를 다룬 책인 『동양과 서양, 종교철학에서 만나다』와 과정신학의 입장에서 다윈주의의 문제를 다룬 『종교적 상대주의를 넘어서』가 있다.

 

** 정회원 가입을 원하실 경우 입회신청서와 후원약정서를 제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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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콜로퀴움] 케노시스 창조론: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사랑의 창조

 

케노시스 창조론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사랑의 창조

 

 

케노시스(kenosis) 개념은 20세기 신학계의 지형도를 뒤흔든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케노시스는 빌립보서 2:7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비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입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창조란 하나님의 자기 비움 행위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케노시스 개념이 창조와 연결되면서 철학과 과학과 신학을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살펴봅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창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대 과학과 어떻게 공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  이번 강연은 온라인으로만 진행됩니다. 수강신청을 해주시면 이메일을 통해 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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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20년 6월 8일(월) 낮 12시 (시청기간: 6월 19일 낮 12시까지)

* 등록비: 5,000원 (과신대 정회원, 청소년은 무료)
   등록비 입금 계좌: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강연 순서

1부 강연(약 90분) : "케노시스 창조론: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사랑의 창조" (강태영 박사)
2부 대담(약 30분) : 강태영 박사, 최경환 국장 

 

* 강사 소개

강태영 박사_ 경북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창조신학을 전공해 신학 박사(Dr. theol.) 학위를 받았다. 석사 과정에서는 기독론을 주로 공부했고, 박사 과정에서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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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콜로퀴움] 뇌과학과 기독교 신앙

 

뇌과학과 기독교 신앙

 

2020년 첫 번째 콜로퀴움 주제는 '뇌과학과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번 강연에서는 젊은 뇌과학 연구자로 주목을 받고 있는 기초과학연구원의 김성신 박사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듣습니다. 본 강연은 뇌과학의 연구 대상과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뇌과학에 대한 오해들을 점검해봅니다. 이어서 뇌과학을 소재로 한 흥미로운 영화들을 소개하고 이와 관련된 윤리적, 철학적 문제를 다뤄 볼 계획입니다.  

또한 강연자의 주된 관심 분야인 기억과 학습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역사를 살펴본 다음, 뇌의 활동을 관찰하고 조절하는 최신기술과 성과들을 소개하며 뇌과학의 향후 발전 전망에 대해서도 소개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과학자로서 뇌과학 분야의 연구에 대한 생각과 고민들을 나눠볼 것입니다. 

최근 뇌과학의 동향과 연구를 소개받을 수 있는 귀한 강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신비하고 놀라운 뇌과학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시면 어떨까요?

 

*  이번 강연은 온라인으로만 진행됩니다. 수강신청을 해주시면 이메일을 통해 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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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20년 5월 5일(화) 낮 12시 (시청기간: 5월 15일 낮 12시까지)

* 등록비: 5,000원 (과신대 정회원, 청소년은 무료)
   등록비 입금 계좌: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강연 순서

1부 강연(약 50분) : "뇌과학과 기독교 신앙" (발표: 김성신 박사)
2부 대담(약 50분) : 김성신 박사, 최경환 국장 

 

* 강사 소개

 

김성신 박사 (기초과학연구원 뇌과학이미징 연구단) 

서울대에서 화학공학과·전기컴퓨터공학과를 복수전공했다. 이후 2013년 미국 남가주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7년부터 IBS에서 선정한 영사이언티스트 펠로우로 선정돼 성균관대학교 뇌과학이미징 연구단에서 뇌과학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세상의빛교회'를 섬기고 있다. 그의 연구실 홈페이지는 http://clmnlab.co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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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 교수의 <창조설 논쟁(creationism)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를 듣고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곱셈과 나눗셈이 수학에서 암묵적으로 먼저 계산하는데에 동의하는것처럼

    창세기도 암묵적동의로 넘어가주는 것인가 싶습니다.

    그래도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서 여성목회자 안수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어서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 없다고 봅니다.

    증인 2020.01.08 23:52

 

김정형 교수의 <창조설 논쟁(creationism)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을 듣고

 

2019.12.23 제18회 과신대 콜로퀴움

요약 정리: 송윤강 

 

 

김정형 교수님의 이 강연은 현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창조론 또는 창조과학과 진화론 사이의 논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창조론’이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창조설(creationism)이다. 김 교수는 창조에 대한 신학적 교리를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이라 불리어야 맞다고 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핵심 질문이 다르다. 창조설은 창조자 하나님을 기본 전제로 한다. 그래서 하나님에서 대하여 질문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이 세계의 역사에 대해 질문하고, 세계가 운행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질문한다. 그래서 질문은 When과 How이고 과거지향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더 나아가 우주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질문하고 있다.

 

반면에 창조론의 핵심 질문은 누가(Who) 왜(Why)이다. '어떤 분이,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만들었느냐'이다. 미래 지향적이고, 이 땅이 아니라 위에 계신 분, 영원하신 하나님이 관심의 대상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같은 ‘론’이라는 접미어를 쓰고 있지만 관점이 전혀 다르다. 진화론의 ‘론’은 Theory다. 과학의 논리를 따른다. 반면에 창조론의 ‘론’은 doctrine이다. 신앙의 논리를 따르는 교리(신조)다. 서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교리의 문법과 과학의 문법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창조론과 진화론을 대립시키면서 같은 범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왜 섞이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창조론, 즉 창조설(creationism) 주장 때문이다. 창조설에서는 ‘창조자 하나님을 믿습니다’를 전제로 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관심 영역이 과학의 영역과 중첩된다. 과학자가 관심이 있는 영역은 이 세상, 지구의 과거 역사와 우주와 생명의 기원과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창조설에서도 이러한 과학의 영역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창조신앙과 과학이 섞이는 혼동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설의 역사는 매우 짧다. 특히 창조과학의 역사는 100년 정도이며 본격적으로는 1960년대에 시작했다. 그러나 창조론의 역사는 2000년이 넘는다. 구약시대까지 포함하면 3000년이 넘는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창조론을 믿는다. 그러나 창조설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가능하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고 이 수정란으로부터 한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은 매우 신비롭다. 수정란의 세포는 단 하나이다. 그런데 이 단 하나의 세포가 서로 기능이 다른 세포로 분화되어 팔, 다리, 목, 귀, 코, 눈, 뇌가 된다. 그런데 그 신비로운 과정을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의 발전을 긍정하면서도 이 아기는 하나님의 작품임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 이 아기를 만드셨는가? 창조는 한 순간이라면 수정할 때인가? 그러면 하나님은 특별한 기능을 가진 단 하나의 세포만 창조하시고 나머지는 그 메커니즘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설계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건강한 한 아기가 태어날 수 있도록 열 달 동안 일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놀라운 지혜로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셨고 그 일부를 과학자들이 밝힌 것이다.

 

우리는 과학의 발전을 긍정하면서 얼마든지 아기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믿을 수 있다. 이처럼 과학과 창조론은 서로 차원이 다르다. 서로 섞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과학의 발견을 통하여 창조 신앙을 깊고 넓게 확장하여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과학혁명 시대가 아니라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혁명 시대(16~17세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과학혁명의 시대는 기존의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이 충돌하던 시대다. 전문가는 어느 것이 옳은 지 판단할 수 있지만 비전문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비전문가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때는 보수적 입장을 취해도 용납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혁명이 끝났다. 이제는 과학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다. 서로 논쟁을 하다 가도 누군가 과학적 사실을 언급하면 거기서 논쟁이 종결된다.

 

현대과학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빅뱅을 탐구하고 있고, 지구의 탄생, 자연선택, 복잡한 생명체 탄생, 인류의 탄생, 인류의 문명과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제는 자연 과학을 넘어 일반 역사를 포괄하는 ‘빅 히스토리 Big History’를 말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많은 한국 교회에서는 여전히 과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창조설을 가르치려 하고 있다.

 

창조 이야기와 관련된 창세기 1장의 해석은 이미 1600년전 성 어거스틴이 살아 있을 때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때도 과학이 있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과학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창세기의 주석을 다섯 번이나 고쳐 썼다. 그만큼 창세기는 어거스틴에게도 해석이 분분하고 어려운 책이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다섯 번째 고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통상적으로 비그리스도인도 땅과 하늘 이 세상의 다른 요소들, 별의 운동과 궤도, 별의 크기와 상대적 위치, 일식과 월식의 예측, 해와 계절의 순환, 동물과 나무와 돌들에 관해서 얼마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이 지식이 이성과 경험으로부터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혹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서의 의미를 제시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어떤 불신자가 듣게 된다면 그것은 부끄럽고 위험한 일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고 무식하다 무지하다 고 조롱하고 경멸하는 그와 같은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에 관해서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 중에서.

 

그런데 4세기경 성 어거스틴이 문제 의식을 가졌던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어거스틴의 조언에 따라 이러한 당혹스러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것인가?

 

 

위 그림은 창세기 1장을 문자적 표현에 충실하게 재현한 그림이다. 평편한 지구, 땅 밑에 땅을 받치는 기둥(욥기 38장, 시편 104편)이 있고, 궁창이 있다. 궁창 위에 물이 있다(노아의 방주 때 사라졌다고 한다). 궁창에 창문이 있어 물이 쏟아진다. 해와 달과 별은 궁창 위를 다닌다(궁창 너머가 아니다). 하나님의 위치도 나온다(시 104편). 궁창 위 하늘에 계신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그리면 이런 그림이 나온다.

 

이것을 지금 받아들일 수 있는가? 지금의 상식으로는 창세기의 이러한 그림을 매우 당혹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가 쓰일 당시에는 이러한 세계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 시대 사람들의 과학상식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지 말고, 그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면 이해하면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는 그 시대의 상식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시대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준 것이다.

 

유치원 수준의 아이에게 탄생을 말해줄 때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어 나왔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엄마 배꼽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설명이지만 아이는 믿는다. 아이는 배꼽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 품에서 엄마의 사랑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이야기하는 사실이 아니라 진리를 포착한 것이다. 이것이 눈높이 교육의 통찰이다.

 

하나님도 동일한 방식으로 과학의 발전 전에 그 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하나님의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주인공은 이러한 그림이 아니다. 주인공은 하나님이다. 세계 모습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주인공을 읽어야 한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함으로써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했다.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신다. 즉 인간의 지성과 마음의 능력에 적응하신다. 좋은 웅변가는 청중의 한계를 잘 알고 거기에 적응한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으로 오시기 위해 몸을 굽히셨다. 하나님은 때로 입, 눈, 손, 발을 소유하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이해하면 과학적 세계관과 성경의 문자적 내용이 다름에 대하여 그렇게 당혹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창세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의 장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이 장르이다. 장르에 따라 읽기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를 읽으면서 마음 안에 물이 얼마나 있고, 물고기가 얼마나 있느냐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창세기는 역사책 과학책이 아니다. 시스타인 성당 천정에 그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이 하얀 긴 수염 기른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모습을 가진 분이신가? 하나님은 어떤 형상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그러면 그러한 묘사는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한다. 그 그림은 사진이나 사실화가 아니라는 것일 알기 때문이다. 그 그림은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고유한 신학적 해석을 전달하는 예술작품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사실로 보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창조설은 기원론의 한 형태이다. 과학과 비슷하게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과학은 세상의 기원에 대하여 하나님 없이 설명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창조설은 하나님을 전제하고 세상의 기원을 설명한다.

 

과학이 하나님 없이 자연계를 설명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과학이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고 자연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개입시키면 과학은 발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진이 일어나는 이유를 하나님이 화가 나서 일어난다는 식으로 설명하면 지층의 문제를 더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과학은 하나님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그런 과정을 통하여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런데 창조설은 하나님을 전제로 하고 세계를 설명하려다 보니 과학적 결과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과거에는 평편한 지구, 천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도 지구의 나이는 6000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젊은 지구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와 2장의 창조 이야기 사이에는 긴 간극이 있다고 ‘간극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창세기의 하루를 나타내는 히브리 원어 ‘욤’이 24시간이 아니라 긴 시대로 보는 ‘날 시대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창세기가 과학임을 포기하고 진화론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해석도 있다. ‘점진적 창조설’은 종 내부의 진화는 인정하지만 종 간의 대진화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진화적 창조설’은 대진화까지 인정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젊은 지구 창조설과 진화적 창조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다. 물론 창조과학의 유익이 있다. 과학을 잘 모르면서 문자주의 신앙을 가진 분에게 신앙을 공고히 해준다. 그러나 과학을 아는 사람에게는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복음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창조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창조신앙을 가질 수 있다. 창조설 논쟁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창조신앙의 핵심 진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시고, 왜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 이다.

 

그 대답은 사도신경에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더 많은 교파들이 공통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한 분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늘과 땅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자임을 믿습니다.”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세 가지를 뽑을 수 있다.

1)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하나님: 세속주의와 모든 우상에 맞서는 유일하신 신으로 인정한다.

2)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는다

3) 천지의 창조자: 자연은 하나님이 소중하게 만드신 작품이다.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이것이 창조신앙이다. 영혼 구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세 가지는 창조설 입장이 달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적인 신학의 토대다. 창조설 논쟁에 빠져서 이 중요한 진리를 간과하면 안 된다. 이것이 창조설을 넘어서는 신앙이다.

 

 

과학을 받아들여도 창조신앙이 위협받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의 발견이 믿음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과학자가 밝히는 과학의 규칙을 받아들이면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발견(입자, 행성, 별, 생명…)을 통하여 우주를 만들고 역사에 관여하면서 매일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우주의 모습을 탐구하면서 그 속에서 드러나면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과학과 신학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이 생명의 의미나 인생의 목적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 무신론은 우연이고, 목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신론의 입장에서는 모든 자연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또 과학을 품으면 더 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지구를 넘어서는 하나님, 160억년 우주보다 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의 탐구를 통하여 생명의 경이에 감탄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한 없는 깊이를 느낀다. 과학이 발전한다고 신비가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지식을 통하여 더 많은 더 큰 새로운 신비가 느껴진다.

 

한국 기독교가 인간의 진화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 입장이다. 진화론이 무신론을 함축한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생명의 역사 생명의 메커니즘에서 결코 하나님이 배제되지 않는다. 진화론은 무신론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논리적 필연 관계가 없다. 도킨스 같은 사람은 진화론이 무신론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 없이 연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것이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와 다른 것이며 진화론은 종교적으로는 중립이다. 진화론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 탐구를 알고 배우고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이다.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까지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며 결코 과학으로 밝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면 진화론에서 인간의 출현과 인간의 탄생에 대한 창세기의 이야기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도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기독교인 뿐 아니라 일반인도 반발했다. 일반인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종을 하나하나 특별하게 순간적으로 독립적으로 완성된 형태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랜 시간을 걸려서 간접 창조도 하신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이 직접 식물을 하나하나 따로따로 만들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땅 보고 내라고 명령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과정을 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가 창조신앙의 핵심이 아니다. ‘왜 나를 만드셨는가’가 핵심 질문이다. 과학자는 진화의 과정을 통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지 않는다.

 

창세기 언어를 다큐멘터리의 언어로 이해하면 안 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과정을 보면 하나님이 토기장이처럼 묘사되고 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는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묘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창세기의 이야기를 절대 과학적 언어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과학과 같이 언급되는 순간 그 의미가 왜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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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콜로퀴움 "창조설을 넘어 창조론으로"

 

창조설(creationism)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학 시대를 맞이해 자신의 신앙이 무너질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창조에 대한 다양한 입장 중에서 어느 것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부합하는 것일까? 이런 걱정과 고민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최근 『창조론: 과학 시대 창조 신앙』(새물결플러스, 2019)을 출간한 김정형 교수님을 모시고 다양한 창조설을 넘어 성서의 본래적 메시지와 기독교 전통에 충실한 ‘창조론’을 소개받습니다.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영상 링크는 12월 24일 오후에 이메일을 통해 보내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12월 23일(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등록비: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5,000원 (청소년은 무료)
* 과신대 정회원은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모두 무료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창조설을 넘어 창조론으로" (김정형 교수)

     휴식(8:20-8:30)  
2부 대담(8:30-9:30) 패널: 김정형 교수, 우종학 교수

 

 

강사 소개

 

김정형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M.Div.), 미국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Ph.D.). 2010년 국제과학종교학회(ISSR)에서 주최한 존 폴킹혼 80세 기념 국제논문대회에서 공동대상을 수상했으며, 이 논문을 토대로 이듬해 기독교 종말론과 과학적 우주론 간의 대화를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했다. 지금은 장로회신학대학교 연구지원처 조교수로 일하면서, 여러 대학과 교회 및 기관의 초청으로 하나님 나라 신학, 창조론, 신학과 과학 등을 강의해오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분단 한국을 위한 평화의 신학』(나눔사, 2015), 『예수님의 눈물』(복있는사람, 출간 예정) 등이 있고, 공역서로는 『몰트만의 신학』(크리스천헤럴드, 2008), 『하나님과 진화를 동시에 믿을 수 있는가』(동연, 2015) 등이 있으며, 현재 블로그 ‘온돌왕자의 God-Talk’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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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담 해석, 어떻게 해야 할까?

 

제17회 과신대 콜로퀴움 "바울의 아담 해석"을 듣고

 

요약정리: 최경환

 

 

'바울의 아담 해석'이라는 주제는 신약학, 그중에서도 바울신학에서는 그리 주목을 받은 주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주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고, 권연경 교수님 역시 이 주제를 피해 갈 수 없었다고 하네요. 1시간이 넘게 열강을 해주신 권연경 교수님의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겠습니다. 

 

지금 이 주제가 다시 부각되는 이유는 오늘날 과학에서 말하는 인류의 기원과 아담의 역사성 문제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바울이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해서 언급한 부분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고, 만약 아담의 역사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신자의 구원도 흔들리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최종적 보루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아담 해석'이라는 주제는 신약학, 그중에서도 바울신학에서는 그리 주목을 받은 주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주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고, 권연경 교수님 역시 이 주제를 피해 갈 수 없었다고 하네요. 1시간이 넘게 열강을 해주신 권연경 교수님의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겠습니다. 

 

 

지금 이 주제가 다시 부각되는 이유는 오늘날 과학에서 말하는 인류의 기원과 아담의 역사성 문제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바울이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해서 언급한 부분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고, 만약 아담의 역사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신자의 구원도 흔들리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최종적 보루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와 죽음의 기원이 허구라면, 이를 해결하는 그리스도의 복음 역시 허구로 전락할 위험에 처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명이 진실이라면 오늘날 진화론적인 설명은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의 설명이 맞든지 아니면 바울의 설명이 맞든지.

 

이 두 설명 체계의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울의 아담 해석은 유연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역사적 아담을 포기해도 바울의 그리스도 복음은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바울의 아담 해석을 그 당시의 문화적 한계이자 시대적 한계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담의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죄와 죽음의 실존을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요? 

 

피터 엔즈는 <아담의 진화>(CLC, 2014)에서 바울의 복음은 역사적 아담 없이도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결국 논의의 쟁점은 바울의 설명을 부분적으로라도 부정하는 성경 해석이 타당한가로 좁혀집니다. 바울이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끌어온 아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역시 늘 논의되는 이야기로 어디까지가 성경의 권위이고 어디까지가 문화적 상대성이냐는 물음과도 연관됩니다. 

 

권연경 교수님은 바울이 아담을 언급하지 않고서 죄와 죽음을 언급하는 본문들을 살펴보면서, 아담과 죽음이 반드시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죄는 율법과 연결되고, 로마서 1장이나 에베소서 2장의 경우도 죄와 죄책을 언급하는 본문에서 아담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해 아담이 반드시 동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대속적인 설명 부분에서도 성경에서 그것을 아담의 죄와 연결하는 부분은 없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본문으로는 고전 11:1-16과 딤전 2:12-15이 있는데, 두 본문 모두 바울은 창세기를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자기만의 주장을 펼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 대한 바울의 주장을 그저 오늘날에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로 무시합니다. 이 두 본문은 바울의 명시적 권고였는대도 말이죠. 그렇다면 바울이 아담을 언급한 부분은 복음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일까요? 아니면 문화적 산물일까요? 

 

바울의 아담 해석은 고전 15장과 롬 5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고전 15장에서는 아담의 몸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대조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첫 사람 아담의 몸과 둘째 사람 그리스도의 몸이 대조를 이루면서 그려집니다. 롬 5장에서는 "한 사람"의 비극적인 행위가 어떻게 "모든 사람"의 죽음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담의 행위와 죄와 죽음의 관계가 구체적인 인과관계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과 "모든 사람"이라는 대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개인의 행위가 전 세계적인 파장을 가져왔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결국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권연경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1. 바울은 역사적 아담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다.

2. 바울은 다양한 목적으로 아담(하와)을 언급한다.

3. 바울은 아담과 죄와 죽음을, 혹은 아담과 죽음을 연결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죄와 죽음을 해결하신다고 말한다.

4. 하지만 죽음이 항상 죄의 결과로 제시되는 아니다. 죄 이야기 없이 죽음과 부활이 대조되기도 하고, 죽음이 피조적 존재 자체의 본질인 것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5. 아담/그리스도의 대조는 한 행동의 전 세계적 파장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6. 아담이 죄와 죽음의 원인이지만, 아담이나 모든 사람의 “죄책”이 바울의 관심은 아니다.

7. 바울은 아담이 야기한 죄의 통치와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준 은혜의 통치를 대조한다.

8. 바울의 당면 관심은 이 통치 개념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해명하는 데 있다.

9. 바울에게서 복음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역사적 아담이라는 살점 한 파운드를 잘라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보다 구체적인 탐구와 치밀한 사색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바울 외, 다른 신약 저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을 숙고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2부 대담 시간에는 민경구 교수님과 함께 구약과 신약에서 아담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으며, 원죄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민감한 주제여서 그런지 약간의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정직하고 진솔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풀어가려는 진지한 태도가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성서학과 신학은 철학이나 사회학 혹은 종교학과 같은 인접 인문학과의 대화 혹은 대응을 통해 그 내용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면, 앞으로는 과학이 더욱 중요한 대화의 파트너가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현대 과학은 발전과 도전은 신학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기존의 교리와 가치에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역사성 논쟁뿐 아니라 인간론, 기독론, 종말론 등 다양한 기독교 교리가 이제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이 도전이 두려워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정직하게 직면하고 어떻게 우리의 전통과 신학을 해석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앞으로 과신대도 성서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성서를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해석 공동체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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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콜로퀴움] 바울의 아담 해석: 죄의 기원에 대한 신약의 목소리

 

바울의 아담 해석

: 죄의 기원에 대한 신약의 목소리

 

아담의 역사성 논쟁에서 빠짐없이 제기되는 질문은 바로 신약성서에서는 아담을 역사적인 인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죄가 들어왔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온인류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만약 아담의 역사성이 부인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도 무너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논쟁점은 과역 바울이 이해한 아담의 죄는 무엇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과연 무엇이었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신약성서가 말하는 죄의 기원과 기독교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직접 콜로퀴움 현장에 오실 수 없는 분들, 지방이나 해외에 계신 분들은 생방송으로 콜로퀴움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 전에 미리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11월 11일(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등록비: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5,000원 (청소년은 무료)
* 과신대 정회원은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모두 무료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바울의 아담 해석" (권연경 교수)

     휴식(8:20-8:30)  
2부 대담(8:30-9:30) 패널: 권연경 교수, 우종학 교수

 

 

강사 소개

 

권연경 교수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풀러 신학교(M.Div.)와 예일 대학교 신학부(S.T.M.)를 거쳐 런던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이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 : 「로마서 산책」(복있는사람), 「행위 없는 구원」(SFC출판부),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SFC출판부),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선교회),「일상,부활을 살다」(복있는사람), 「로마서 13장 다시읽기」(뉴스앤조이),「갈라디아서 산책」(복있는 사람), 「위선」(IVP), 공저 :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새물결플러스), 공역 : 「IVP 성경신학사전」(IVP), 「예수의 정치학」(IVP), 역서 : 「기독교와 문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 「고린도전서」(SFC출판부)

 

 

패널 소개

 

우종학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 거대 블랙홀과 은하 진화를 연구하는 천문학자. 연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산타바버라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UCLA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미 항공우주국(NASA) 허블 펠로십(Hubble Fellowship), 한국천문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천체물리학 저널〉 등 국제 학술지에 약 100여 편의 논문을 게재했고, 연구 이외에도 과학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강연과 저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며 연구하고 교육하는 단체인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블랙홀 교향곡》을 비롯하여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대화》 (공저) 《기원》 (공저)이 있고, 《현대과학과 기독교의 논쟁》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우주의 본질》 (공역)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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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콜로퀴움] 신앙의 경줄과 위줄 찾기: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신앙의 경줄과 위줄 찾기
: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한국사회는 최근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도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기독교는 여전히 페미니즘을 두렵고 무서운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전혀 상관이 없고, 더 나아가 완전히 이질적인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와 어떻게 만나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과학과 기독교가 만나는 지점에 대해서도 좋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신대와 페미니즘의 콜라보! 과신대에서 듣는 페미니즘 특강! 기대해주세요~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직접 콜로퀴움 현장에 오실 수 없는 분들, 지방이나 해외에 계신 분들은 생방송으로 콜로퀴움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 전에 미리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10월 22일(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등록비: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5,000원 (청소년은 무료)
* 과신대 정회원은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모두 무료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신앙의 경줄과 위줄 찾기" (백소영 교수)

     휴식(8:20-8:30)  
2부 대담(8:30-9:30) 패널: 백소영, 송수진 교수, 사회: 우종학 교수

 

 

강사 소개

 

백소영 교수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이화여자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기독교학/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B.A., M.A.)했고, 미국 보스턴대학교 신과대학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비교신학으로 박사학위(Th.D.)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2007-13),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2016)를 거쳐 현재는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의 사랑이 義롭기 위하여』(2005), 『엄마 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2009), 개정판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2013,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콘텐츠 전자책 제작지원 도서), 『드라마틱: 예수와 함께 보는 드라마』(2010), 『잉여의 시선에서 본 공공성의 인문학』(책임저자, 2011), 『인터뷰 on 예수』(2011),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2013,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교회를 교회되게』(2014), 『사회적 영성: 세월호 이후에도 ‘삶’은 가능한가』(공저, 2014), 『왜 눈떠야 할까: 신앙을 축제로 이끄는 열여섯 마당』(공저, 2015), 『삶, 그 은총의 바다』(2016), 『버리지 마라, 생명이다』(2017), 『드라마 속 윤, 리』(2017),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2018, 세종우수교양도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대학 강단만이 아니라 교회 및 시민단체 대중특강, 그리고 〈CBS 크리스천 나우〉, 〈C스토리〉, 〈CBS 성경사랑방〉, 〈CBS 아카데미, 숲〉, 〈CGN 크리스천의 문화 읽기〉 등 매체를 통해 기독교적 세계관과 공동체 윤리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패널 소개

 

송수진 교수 (고려대학교 글로벌경영학)

 

P&G에서 마케터로 활동하다가 경영학을 공부하고, 미국 University of Rhode Island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현재는 고려대학교 글로벌경영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세 자녀의 엄마이자 전문 지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각각의 소명을 모두 지켜내고 싶은 대한민국의 흔한 엄마이자 사회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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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기원과 인류의 타락' 강의 요약

  • 창세기가 쓰여진 당시 이스라엘 상황이 바벨론 포로기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요셉 2019.07.08 13:46
    • 창세기의 저작 연대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전통적으로는 오경의 모세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오랜 연대를 잡기도 하지만, 최근 많은 구약학자들은 구약성서의 최종 편집 연대를 포로기 시대로 잡고 있고, 창세기 역시 당시 바벨론 창조 신화에 대한 대안으로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부분에 대한 해석은 최근에 나온 구약개론 책들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7월 1일 과신대 콜로퀴엄에서 김구원 교수님께서 강연하신 내용을 과신대 정회원이신 송윤강님께서 정리해주셨습니다. 그 내용을 공유합니다. (* 출처: 페이스북 '과학과 신학의 대화')

 

 

송윤강 (과신대 정회원)

1. 원죄 교리의 구약적 배경


원죄 교리란 인류의 최초 조상인 아담이 지은 죄가 후손인 인류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죄의 전가 이론’이라 한다. 장로교 신조 6항은 다음과 같이 원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시조(始祖)가 선악간 택할 자유능(自由能)이 있었는데 시험을 받아 하나님께 범죄한지라 아담으로부터 보통 생육법(生育法)에 의하여 출생하는 모든 인종들이 그의 안에서 그의 범죄에 동참하여 타락하였으니, 사람의 원죄(原罪)와 및 부패한 성품 밖에 범죄할 능(能)이 있는 자가 일부러 짓는 죄도 있은즉 모든 사람이 금세와 내세에 하나님의 공평한 진노와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원죄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원죄가 언급된 창세기가 쓰여진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구약 성경이 완성된 때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다. 아담의 죄의 전가 이론은 포로기의 묵상에서 비롯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포로기 고통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했던 민족이 멸망했다는 것은 죽음 이상의 큰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통의 원인은 죄 때문이라 생각하고 이에 대하여 세 가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입장은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상 중에서 특히 므낫세 왕의 죄를 언급하고 있다.(열왕기 21:10-15, 24:10-15)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의 고통이 조상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애 5:7)

 

‘그들의 죄악을’에 해당하는 ‘아오노테헴’의 원형 ‘아온’은 ‘죄의 형벌’이라는 의미도 있다(욥 13:26). 이처럼 조상 탓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주권, 선하심 조차도 의심하고 있었다.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시편 89:49)

 

그래서 구약의 저자들은 이스라엘이 고통 받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실패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방신을 섬기는 바벨론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이방신이 하나님께 대적하여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다. 여전히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시고, 그의 선하심은 변함이 없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 조상 대대로 쌓인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조상 탓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신앙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입장은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상 탓 할 것 없다. 바로 네가 지은 죄 때문에 벌 받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에스겔 18:2-4). 이렇게 보는 입장 이면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선한 의지, 즉 회개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이 이와 같은 입장을 보인 것은 그가 속했던 닙프르 공동체의 영향이 컸다. 닙프르는 그발 강가 있는 유대인 공동체이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에 유배되어 이 곳에 정착했다(에스겔 1:1). 이 공동체는 바벨론 포로 공동체와 달랐다. 바벨론 포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닙프르 공동체의 이런 상태로는 다시는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역대서에도 찾을 수 있다. 므낫세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므낫세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통틀어 가장 오래 집권한 왕이다. 그리고 므낫세는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야기도 언급되어 있다(대하 33:12-13).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므낫세가 회개하자 다시 왕위에 복귀시켜 주신 것이다.

 

열왕기하 36:12-20을 보면 오히려 형벌 원인을 마지막 왕 시드기야와 당시 종교 지도자와 백성들의 죄에서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 때 이스라엘의 멸망을 명백히 죄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심판보다는 고통을 극복하고 회복하는 비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스겔서 2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의 원인을 더 먼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찾고 있다. 출애굽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에스겔 20:18-23).

 

이처럼 어떤 원인을 좀더 먼 근원으로까지 올라가 찾는 것을 ‘회귀적 결정주의’라 한다. 죄에 대한 책임을 세대 전가의 차원을 넘어 역사의 원점(태고적)까지 올리려는 경향을 말한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역사의 원점이 출애굽이었던 것이다. 아담의 원죄의 후손 전가 사상은 이런 회귀적 결정주의의 영향이다. 에덴과 출애굽 광야 생활을 비교하면 여러 면에서 짝을 이룬다.


에덴에서 선악과 금지명령을 주신 것과 광야에서 율법 준수 명령을 주신 것, 선악과 금지 명령을 어김으로써 에덴에서 추방된 것과 출애굽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40년간의 광야 유배 생활을 한 것 등이다. 이스라엘이 고통의 원인으로 죄의 기원을 광야 시대까지 소급한 이유는 조상들의 죄가 오랫동안 너무나 많이 쌓여서 지금 그들의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극복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에스겔은 인간의 선한 자유의지의 발현은 본인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영이 부어질 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그런데 에스겔은 18장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겔 18:31)


이렇게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스스로 새롭게 하라’고 권하는 것은 이미 쌓인 조상의 죄 때문에 그들 스스로는 어떻게 하든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야 된다고 말한 것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의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원인을 조상의 원죄에서 찾든, 자범죄에서 찾든 공통점은 회복, 즉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즉 구약은 고통의 원인을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에스겔의 입장이 18장에서와 20장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입장은 누구의 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야 예언 본문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포로 생활 중 이스라엘이 받는 고통이 이방 민족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고통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마치 고통받는 의인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이방 땅에 흩뜨려지고 구속 역사에서 사라졌다. 반면에 남 유다는 죄를 짓는 가운데에도 신앙을 지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았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은 포로 생활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그렇게 이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유대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에스겔의 입장을 받아 들이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죄악에 대한 구약의 입장은 ‘판단 유보’라 볼 수 있다.

 

 

2. 죄악의 기원에 대한 창세기의 입장

 

창세기 1장과 2-3장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의견이 병치되고 있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은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있다고 보고 있다.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로 알려져 있지만 성서비평학에서는 1장(제사장 문서; P문서라 부른다)과 2-3장(여호와 문서; J 문서라 부른다)은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하여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체, 신학, 창조 기사의 서술이 다르기 때문이다. P문서에 따르면 악은 창조 이전이전부터 존재한 것처럼 보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1-2)


히브리 문법에서는 1절이 독립 문장이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처럼 2절에 대한 종속절로 해석될 수 있고, 흑암은 악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완벽한 것이었다. 창조 행위 여러 곳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언급이 있고, 7이라는 숫자를 이를 상징한다. 그러나 악의 선재설 주장은 창조자의 주권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J문서에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창조행위는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만족하지 않으신 것 같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8)

 

P문서에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된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창 1:27),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순차적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남자만 창조하시고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의 상징으로 뱀이 등장한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불완전한 창조를 하시고, 악까지 허락하셨는가? 이는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선하시지 않으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악을 ‘선의 결여’나 ‘위장된 선(진짜는 선이다)’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럴 경우 악은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문제점이 있다. 먼저 ‘선의 결여’의 입장에서 3장을 해석하면 선악과 사건은 타락과 죄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율법(선한 것)이 결여된(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과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위장된 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선악과는 인간의 성장을 위한 도구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고 성숙한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러면 뱀도 악의 화신이 아니라 인간의 성숙을 도와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선악과를 도덕적 판단능력과 관련된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 도덕적 판단능력은 왕의 특징이다.

 

P문서에는 인간은 처음부터 왕의 이미지(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로 만들어 진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J문서에서는 불순종으로 왕의 지위를 얻은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성경이 고대 근동신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을 왕적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선악과 금지 명령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도는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도 시험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순종)을 시험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순종했다. 불순종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정의에 반하는 명령에 대하여 반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아담과 이브에게 불순종으로 인하여 주어진 형벌도 따지고 보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닐 수 있다.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을,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주셨지만 이 두 가지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류 번성의 비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이 죄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것이다.

 

구약에는 악의 기원에 대한 상이한 입장이 존재한다. 구약은 어느 한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판단 유보’다.이러한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다양한 견해 성경 속에 나타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이 인생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악에 대한 판단보다는 악에 대한 대응이 구약의 초점이다. 악을 무엇으로 보느냐 에 따라 대응이 달라진다. 악을 주권적 역사로 본다면 악에 대하여 적극적이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그러나 악이 성장 도구라 본다면 고통에 대한 인내, 희생이 필요하다. 또 악이 선의 결여라고 한다면, 순종하는 삶을 살면 고통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이는 신앙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 싸울 때가 있는가 하면, 참을 때가 있고, 순종할 때가 있는 것이다.

 

3. 아담의 죄 전가 이론과 복음의 순전성

 

아담의 원죄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도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교리가 유효한 것인가? 아담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 구속이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고,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십자가의 구속적 효력의 논리적 귀결을 가져오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사실 바울은 유대교 교리에 밝은 유대인 출신으로서 당시 제2성전기 유대인의 성경해석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이 성경해석의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역사적, 문법적 의미보다는 현재 시점 적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사적, 문법적 의미와 현재적 적용의 의미가 서로 일치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만일 일치하지 않으면 현재적 적용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이는 쿰란 공동체의 성경 해석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쿰란 공동체의 성경 해석의 전통은 성경 본문보다는 본문 밖, 즉 성경을 생활에 적용하는 공동체에서 찾았는 것이다. 바울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성경 해석의 목적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지는 사죄의 효력을 밝히기 위한 것에 두었다. 바울은 이 목적을 위해 전통적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과 다른 방법을 적용했다.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죄의 기원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립된 출애굽 광야 시대에 두고 성경을 해석했지만, 이방 선교에 관심 있는 바울은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좀 더 넓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가져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복음의 목적을 달성하기 이하여 당시로서는 창조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유비(analogy)는 성령의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의 성서학자 피터 엔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주장했는데, 이는 성령이 주신 확신이었다.”

 

바울의 유비(아담의 원죄의 후손 전가 교리)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장로교 신조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는 구원의 칭의 개념 설명에 유효하다. 마치 하나님이 법정에서 재판장이 형벌을 사면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기 위해서는 아담의 원죄도 전가되어야 한다. 죄인이 형을 사면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사법적 판결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칭의 개념이 일반적 정의 개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아담의 죄가 내 죄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항의에 대하여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그러나 의의 전가에 대하여는 항의할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다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칭의보다 더 큰 개념이다. 전가(Imputation) 교리의 확립을 위해서 필요한 아담의 역사성에 대하여 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하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아담과 이브가 현생 인류의 조상인가? 인류가 최초 인류 아담 부부에서 비롯되지 않고 진화된 것이라면 죄의 전가 이론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담의 역사성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아담은 최초 인류의 그룹에서 하나님이 주권적인 섭리로 선택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에서도 ‘아담’이라는 명칭이 처음부터 고유명사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4:1까지 보면 ‘아담’ 그 사람’ ‘사람’ 등 여러 가지 표현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 ‘아담’이란 표현이 고유 명사로 확립된 것은 역대서와 누가복음의 족보 언급에서였다. 그런데 이 족보는 출생 기준을 작성된 것이 아니라 선택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다(택한 백성). 이처럼 아담의 대표성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된 것도 이스라엘 민족이 무슨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진화와 아담의 역사성도 함께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장로교 신조에는 ‘아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있는 소위 에큐메니칼 신조인 ‘사도신경’에는 ‘아담’에 대한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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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기원과 인류의 타락

 

죄의 기원과 인류의 타락

 

고인류학, 진화생물학, 유전학 등의 발전은 성서해석과 전통적인 교리에 큰 도전을 주었다. 만약 인간이 진화했다면, 성서에서 말하는 인간의 죄와 타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대근동학과 구약학을 전공한 김구원 교수에게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서부터 타락의 의미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 들어본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의 기원은 무엇이며, 타락에 숨겨진 성서적,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직접 콜로퀴움 현장에 오실 수 없는 분들, 지방이나 해외에 계신 분들은 생방송으로 콜로퀴움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 전에 미리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7월 1일(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죄의 기원과 타락" (김구원 교수)

     휴식(8:20-8:30) 책 증정 이벤트 
2부 대담(8:30-9:30) 과학자와 신학자의 대화 (김구원 교수, 오세조 목사, 최경환 실장)

 

 

강사 소개

김구원 교수 (개신대학교대학원 구약학)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시카고 대학교 고대근동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우가릿 문헌과 사무엘상 본문을 비교문학적으로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이 브릴 출판사의 세계적인 구약 연구 시리즈인 의 145번째 책으로 출판됨으로써 한국인 최초로 이 시리즈의 저자가 되었다. 현재는 서양고대문화사학회 연구이사이며, 개신대학원대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궁금해? 김구원 교수의 구약 꿀팁>, <사무엘상(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등이 있다. 

 

패널 소개

오세조 목사 (팔복루터교회, 루터대학교 강사)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미국 House Research Institute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하다가 귀국해서 루터대학교에서 목회자 과정을 마쳤으며, 목사 안수를 받았다.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에서 박사과정(구약전공)을 수료했으며, 현재 용인에 위치한 팔복루터교회를 담임하며, 루터대학교에서 '신학과 과학', '자연과학의 이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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