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과신대 청소년 캠프 "신과 함께" season 2

!! 참가 신청 방법 !!

 

 

      ① 아래에 첨부된 '2019 과신대 청소년 캠프 참가신청서'를 다운로드 받으세요.

 

      ② 다운로드 받은 신청서 파일을 열고 양식에 맞게 작성해서 scitheo.off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③ 캠프 등록비를 아래 계좌로 입금해주시면 캠프 신청 완료!

 

     ■ 등록비 납부 계좌 ☞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입금자명은 반드시 교회이름으로 입금 바랍니다.)

     ■ 캠프 문의 ☞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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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제2회 과신대 청소년 캠프

 

"신과 함께 II"

(앙과 학이 함께)

 

현직 과학 교사들이 오랜시간 기획하고 

공을 들여 준비한

제2회 과신대 청소년 캠프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_ 2019년 7월 20일 9:30-15:30

장소_ NPOpia (종로구 낙원상가 5층 500호)

대상_ 중고등부 학생 및 교사

 

등록비_ 2만원 (형제 등록시 1만원 할인)

등록계좌_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신과함께_프로그램_안내

 

09:30-09:45 등록 및 접수
09:45-10:00 개회예배 (말씀: 김정형 교수)

10:00-11:50 1교시 “갈릴레오, 다시 법정에 서다”

12:00-13:00 점심식사

13:00-13:30 도전! 과학 골든벨

13:30~15:00 2교시 “잃어버린 화석을 찾아서”

(교사 특강: 김정형 교수님과 함께 나누는 창조 이야기)

15:00~15:30 3교시 “신과 함께: 창조와 진화”

15:30~15:40 단체 사진 촬영 및 쫑파티

 

강사 소개

정승화(수정비전학교 과학 교사)
김예지(삼목초 교사)

구형규(하늘초 교사)

서광(밀알두레학교 과학 교사)

백우인(예수와 교회 목사, Science Communicator)

정종명(소명고 과학 교사)

 

교사 특강 강사

김정형(장신대 교수, 조직신학 전공)

 

[수강신청 바로가기]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수원 남부 북클럽]

 

 

글_ 오세조

 


여행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좋은 안내서는 필수이다. 물론 사전 정보 없이 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 경험적으로 보면 여행을 통해 얻는 것이 별로 없다. 이런 현상은 책도 마찬가지이다. 출판시장에 나오는 책들은 엄청나지만, 독자로서 과연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많다. 책의 사전 정보 없이 출판사의 화려한 홍보에 책을 구입하면, 낭패를 볼 때가 많다. 이런 이유로 대중들은 일단 유명 저자들의 책은 믿고 사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유명 저자라고 해도 다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유명 저자의 책에 대해 각 분야 전문가들의 평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책은 재미가 없고, 너무 어렵다. 이처럼 책의 독자로서는 전문가들에게도 인정받으며, 쉬운 책을 고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특별히 과학책의 경우는 더욱더 심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정모 관장의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은 가뭄 속의 단비와 같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이정모 관장 스스로가 밝혀 듯이 2007년부터 그동안 쓴 서평들을 모은 책이다. 물론 출판을 위해 새로 손질은 했다. 과신대 회원으로서 반가웠던 점은 과신대의 대표인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교향곡』의 서평과, 과신대 자문위원인 이상희 교수의 『인류의 기원』의 서평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모든 책들을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의미도 없다. 대신 머리말에 등장하는 이정모 관장의 대학교 선배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정모 관장에 따르면, 그 대학선배는 노트를 4등분한 후, 두 번째와 세 번째 칸을 합하고는 이곳에 ‘책에서 얻은 정보’를 파란색 볼펜으로 쓴 후, 첫 번째 칸에는 관련 있는 ‘다른 책의 정보’를 빨간색 볼펜으로 적고, 네 번째 칸에는 검은색 볼펜으로 ‘독후감’을 썼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약 200권 정도를 정리했다고 한다. 물론 이정모 관장도 따라 했지만, 볼펜을 자주 잊어버려서 곧 포기했다고 한다. 하긴 이정모 관장이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컴퓨터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라, 볼펜이 필수였다.

 

하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급화 된 현대에 이런 형식의 자신만의 책 노트를 볼펜이 없다고 못한다는 것은 핑계인 것 같다. 충분히 한 번 시도해볼만한 좋은 방법이다. 인터뷰를 기회로 이정모 관장과 페이스북 친구 된 지금, 한 가지 부러운 점은 이정모 관장이 다른 과학작가들과 매우 친하다는 것이다. 하긴 이런 이정모 관장의 성격 때문인지 그의 글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게 읽힌다. 그러나 신뢰가 간다.

 

요즈음에 ‘뇌호흡’ 등의 사이비과학이 점점 더 극성이다. 캐나다 오타와 대학의 김우재 교수가 이를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이런 시대에 신뢰할만한 책을 추천하는 이정모 관장의 이 책은 올바른 과학지식을 얻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여행안내서가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장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단점. 바로 이정모 관장이 추천한 책을 사기 위해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정모 관장의 말대로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구입한 책 가운데 읽게 되는 것이다. 이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 9:6)

 

박혁순 (조직신학, 한일장신대 겸임교수)

 

 

현재 다중우주론(또는 평행우주론)이 직면한 문제는, ‘과연 그것이 과학인가? 정작 형이상학 또는 추리소설이 아닌가?’ 하는 비판과 반론이다. 이것은 대개 우리 우주의 유일성을 지지하는 실험물리학자들에 사이에서 특히 그러하다. 다중우주론이 실험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또는 입증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같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혹독한 평가를 받는다.

 

다른 한편, 대중적으로 다중우주론을 소개하고 있는 이론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과 미치오 카쿠는 그것이 공허한 사변이 아니라 기존의 천체물리학 및 미시물리학이 심화되면서 얻어진 결과라는 입장에 서있다. 브라이언 그린은 이렇게 말한다. “과학의 고속도로 중 통행량이 가장 많은 길들을 골라 서서히 주행하다 보면 다양한 다중우주 후보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들은 찾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리고 “물리학이 잡고 있던 자동차의 운전대를 수학에게 넘겨주면 어김없이 다중세계로 접어든다”라고! 이렇게 해당 연구자들은 다중우주론이 수학적 모순이 없는 수준까지 지향하기 때문에 억측과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중우주는 어떠한 양태로 존재한다고 설명될까? 몇가지 모형을 상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거품의 모양처럼 존재할 수도 있고, 잘려진 식빵처럼 우리 우주와 무한히 겹쳐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중우주 또는 평행우주의 규모는 어떠할까? 가쿠와 그린은 “우주에는 매 10^10^122m 마다 우리와 완전히 똑같은 복사본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다. 그러니 우리 우주 역시 “단순한 평행우주가 아니라 ‘평행우주 속의 평행우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내가 다중우주론을 통해 신학적 사유실험이 촉진되는 이유는 바로 물질에 대한 우리의 전이해가 수정되어야 할 지점에 있다. 가령 인류의 역사 이래 현재까지 우리는 물질 또는 물질성을 가장 신뢰할만한 근거로 여겨왔다. 특히 “물질 개념의 명확성과 단순성(강경한 실재론)은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녀왔고 “그것은 그들의 지식과 존재의 기초가 될 견고하고 이해 가능한 토대를 향한 종교적 열망을 만족 시”켰다.” 특히 근대 유물론자들에게 있어서 물질이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자 물적 조건이 인간의 정신과 사회체제를 규정하는 유일한 근거라고 확신하는 편에 섰다. 비록 그리스도교 신학이 ‘하나님’을 물질에 앞서는 존재의 근원 혹은 제1원인으로 상정해왔다 하더라도, 대개 물질이란 우리 눈앞에 드러나 감각될 수 있기에 ‘최소한도로’ 정신과 관념에 대비되는 분명한 실재로 믿어져 왔다. 더구나 근대과학의 발전에 의해 하나의 강한 신념의 형태로 ‘과학주의’가 등장하면서는 정신, 영혼, 사후세계, 신 등은 증명될 수 없는 의혹의 영역으로, 반대로 물질만이 반복적 실험과 증명이 가능한 신뢰의 영역으로 고착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다중우주론의 등장은 우리의 세계, 아니 우리 우주에 있어서 ‘분명한 것’, ‘실재하는 것’으로서 분명한 기준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물질적 영역, 즉 우리 우주의 물리적 실제가 임의적·우발적·상대적이라는 문제를 함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수많은 평형우주 가운데 “어떤 곳은 우리와 똑같고, 또 어떤 곳은 조금 다르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완전히 딴판”이라는 추정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주마다 다른 상수값을 지니고 있고, 그런 우주는 대략 10^124개 또는 10^500로 추산된다.

 

 

더 나아가 물질 또는 물질성은 그저 수학식(수학식), 즉 비물질의 관념이나 추상일 뿐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이론에 대한 좋은 유비는 주로 청소년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즐기는 3D 게임이다. 그 게임 안에는 이른바 ‘물리엔진’이라는 것이 있어서 가상공간에서 포탄이 날아가는 속도가 정확히 구현되어 있고 포탄과 차량의 충돌에 따른 결과도 실제 공간에서처럼 나타난다. 만약에 그 가상공간에 사는 인지적 존재가 있다면 그는 그 세계가 실재하는 세계라고 믿을 것이다. 이렇듯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나 수식(數式)으로 짜인 우주의 구조 속에서 인지적 존재들은 정작 비물질의 것들을 ‘물질로서’ 느끼게 설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다른 우주들과 무한히 겹친 상태로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간에 그 물질적 실제를 감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거나 실험하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가 간주해온 그 물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흙, 공기, 물, 불, 쇠, 나무 등과 같은 것들이 저편의 우주에서는 도무지 현상되지도 인식되지도 못한다면 물질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임의적일까? 이렇듯 우리가 물질이라고 확정한 것, 물질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기준이라고 단정한 것이 여타의 우주에서는 비물질 또는 일종의 ‘관념’일 수 있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 이 모든 우주들은 ‘무’(無) 또는 ‘공’(空)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혹이다. 사실 이렇게 우주를 바라보았던 이론이 불교 형이상학이었으며, 흔히들 알고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하는 구절의 내용이다. 흥미롭게도 붓다는 이와 관련해 “모래알 같이 수많은 중생에, 모래알 같이 수많은 세계가 있는데, 그 모두가 개별적 실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 환상도 아니”라고 했다.

 

다른 한편,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플라톤의 ‘이데아-현상계’ 구도의 이원론이 기독교 신학에 뿌리 깊게 내려 있는 문제로 하여 근대기 이후 수많은 방식의 비판과 반성이 이루어져 왔는데, 다중우주론의 도전으로 이것을 극복하기가 다시 요원해질 것 같은 우려가 든다. 왜냐하면 참으로 있는 세계, 영속적으로 있는 실제가 우리 우주가 아니라고 하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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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심왕찬

 

어제는 서울 강서/구로 북클럽 세 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먹기 위해 모이는 북클럽으로, 책 나눔은 2순위입니다.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

 

어제는 백우인 선생님의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샌드위치 대신 북클럽 지기가 요리한 닭볶음탕으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가끔 이렇게 주 메뉴인 샌드위치 말고 다른 요리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식사를 맛있게 하고,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인간, Great Mystery' 1-7장을 읽고 나누었습니다.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은 어떤 이해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나누는 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자 1장씩 발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느 한 사람에 부담이 집중되지 않고, 각자 준비해온 발제를 듣고 나누게 되니 더 유익하고 풍성한 것 같습니다. 어제는 박용덕 목사님과 서종원 선생님이 처음으로 참석해주셔서 어느덧 회원이 8명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만남과 나눔이 이어지길 소망합니다.

 

 

6월에는 마지막 목요일인 27일 저녁에 모여서 '인간, Great Mystery' 나머지 부분을 나눌 예정입니다. 가장 중요한 저녁 메뉴는 이변이 없는 한 샌드위치입니다. ^^ 관심 있으신 분들은 댓글이나 메시지로 문의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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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저희 과신대 YouTube 채널 구독자가
1,000명이 넘었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제 YouTube를 통해 실시간 라이브 방송을

할수 있게 됐습니다. ♬

 

사실 저희 같은 소규모 단체가 영상을 제작하는 건

쉽지가 않은데 이진호 간사님께서

수고를 많이 해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좋은 컨텐츠와 영상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과신대의 모든 행사는

핸드폰으로 촬영을 했는데

역시 음향이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네요.

 

그래서 그냥 바람도 쐴 겸 낙원상가 2층을 서성였습니다.

그냥 보기만 했습니다.^^

 

100만원 정도만 있으면 저희에게

꼭 필요한 캠코더와 마이크를 구입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혹시 마음이 동하신 분이 계시다면

저희 사무국으로 연락주세요.^^

 

 

 

앞으로 과신대의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기초과정 I>이 온라인 강좌로 대체됩니다.

온라인 <기초과정 I>은 우종학 교수님께서

4시간 동안 강의한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영상 강좌 플랫폼 “그노비Gnowbe”의 도움으로

새롭게 선보일 온라인 <기초과정>을 기대해 주세요.

특별히 이번에는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에게

특별할인 혜택을 드립니다.^^

 

자세한 소식은 https://www.scitheo.org/382

 

 

과신대가 준비한 여름 프로그램을 소개합니다.

 

 

  • 제15회 콜로퀴움 "죄의 기원과 타락"
    일시: 7월 1일(월) 7:30 pm.
    강사: 김구원 교수(개신대 구약학)
    패널: 오세조 목사(팔복교회)

  • 온라인 과신톡 "자유의지"
    일시: 7월 10일(수) 오후 3시 (날짜는 변동될 수 있습니다.)
    강사: 김남호 박사 (울산대학교 철학과)
    *유튜브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됩니다.

  • 제2회 청소년캠프 “신과 함께”
    일시: 7월 20일(토) 10:00-15:00
    강사: 과신대 교사팀
    장소: 낙원상가 NPOpia 500호

 

 

마지막으로 저희 과신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1분만 시간을 내서 아래 기도문으로 함께 기도해요.

 

1. 자비로운 하나님, 과신대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단체가 되게 해주십시오.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닿을 수 있는 깊고 튼튼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창조의 신비를 맛보게 하시고 우리에게 허락한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2. 보이는 세계만을 보는 눈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주시고, 지금은 비록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볼 수 있게 하시옵소서. 과신대가 한국교회와 다음세대에 새로운 소망과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쓰임받게 하시옵소서. 

 

3. 과신대가 창조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역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과신대의 프로그램을 통해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건전하고 바른 신학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소서. 특별히 한국교회의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지혜와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단숨에 읽는 바울
존 M. G. 바클레이 | 새물결플러스 | 2018

 

김영웅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사탕을 준다고 해서 교회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네 식구였던 우리 집은 전세에 단칸방이었다. 사탕 같은 간식은 내겐 아주 귀했다.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난 그 교회를 계속해서 다니게 되었다(그런데 친구는 얼마 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대로 교회 다니는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가문에서 처음으로 소위 '예수쟁이'가 탄생한 것이었다. 동시에 내겐, 이젠 30년이 넘는, 하나님을 향한 굴곡진 여정의 시작이었다. 사탕 하나로 이 기나긴 여정이 시작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내가 다니던 교회(예장 합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선 성경 퀴즈대회를 자주 했었다. 학교에선 주관식 수학 문제의 답이 대개 '0' 아니면 '1'이었듯, 교회에서 치러진 주관식 성경퀴즈의 답은 십중팔구 '하나님' 아니면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그 범접할 수 없는 이름에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올렸던 이름이 있었으니, 구약에선 '다윗', 신약에선 단연 '바울'이었다.

 

어릴 적 내가 알던 바울에 대한 지식은 아주 단편적이었다. 신약에서 편지를 가장 많이 쓴 사람, 사도행전의 주인공(?),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사울'에서 이름이 바뀌었던(?) 사람. 이제는 이런저런 공부로 인해 이러한 지식이 부정확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땐 혼자 따로 공부하지 않고 그저 교회에서 주워들은 지식이 전부였던 터라, 나의 성경 지식은 그 당시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들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내가 알던 바울은 그 정도가 다였다. 정확하지도 않을뿐더러 단편적이기만 했던 지식의 파편들. 이성적인 이해를 거치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시도하면 불경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냥 무턱대고 믿으라고 강요받았고, 오히려 그것이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라고 배웠던 그 시절. 이는 아마 그 당시 한국 기독교 신앙의 단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씁쓸함이 남는다.

 

바울을 더 정확하고 더 깊게 알고 싶었던 건 솔직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믿었던 나의 기독교 신앙은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서른 후반 즈음에서야 힘겹게 맞이한 가치관의 변화 시기에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어 나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다. 그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를 지나오며 난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순 없겠지만, 이러한 방법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충분히 인생을 다시 보게 만들고 제대로 살아내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성의 영역이 인간이란 존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것은 그 빙산의 일각이라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회개나 거듭남, 그리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하여 마침내 얻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역시 이 빙산의 일각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정확한 지식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을 더욱 풍성히 알고 전할 수 있는 중요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제목부터가 맘에 쏙 들었다. '단숨에 읽는 바울'. 그렇잖아도 이철규 원장님이 작년 엘에이 방문하시며 쓱 건네주셨던 '하나님의 비밀'(그레고리 K. 비일, 벤저민 L. 글래드 공저, 새물결플러스 출판)도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고, 예전에 큰맘 먹고 구매했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저, IVP 출판)도 마찬가지 상태라, 난 이 두 책을 책장에서 볼 때마다 뭔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약 150 페이지의 짧은 이 책으로 이제 겨우 그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두 책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처럼 신학적인 전문지식이 전무한 사람에게 이 책은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바울을 감히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이 책에서 바울의 '역사'와 바울의 '유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울을 읽어나간다. 1부 '역사'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의 바울의 위치와 의미를 읽어낸 뒤, 바울의 편지들과 그것들이 가지는 역사적 정황들을 살펴본다. 이어서 자신을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으로 소개하는 바울과, 유대 전통에 비친 그의 모습을 읽어낸 이후,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 로마 제국에서 가졌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묘사한 이미지와 사람들에게 인식된 이미지들을 비교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바울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는지에 달려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울이 유대인이었고 지성인이었으며, 돈을 버는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니다가 다메섹에서 그가 계시라고 부르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되었고, 예수가 정말 주님이라는 확신을 얻은 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으며, 그 사건을 통해 바울은 그의 삶과 그의 충성심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뀌는 삶의 대전환을 경험했다는 것도 난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바울이 남긴 유산의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남긴 유산은 무수히 다양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장들을 낳았다는 사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만이 아니라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를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아는 바였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이러한 단편적인 바울에 대한 지식은 표면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신학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바울 신학의 다양한 해석이었다. 작년 권연경 교수님께서 참석해주셨던 독서모임에서 '로마서 산책'과 '행위 없는 구원?'을 함께 읽고 직접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끝내 말끔히 풀리지 않았던 부분은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학 문제처럼 문제가 하나 있으면 하나의 답이 존재할 거라는, 다분히 단순 무식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기독교 신학을 무분별하게 접하고 있던 시기라, 내게 있어 '해석'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또 하나의 낯선 세상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2부 '유산'에서 저자는 비록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 바울의 편지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연구했던 여러 신학자들의 해석으로부터 바울의 유산을 찾아낸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서구 교회,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와 칼뱅의 사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 그리고 니체를 비롯한 다수의 철학자들과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왔는지 저자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준다.

 

 

책을 읽고, 바울처럼 파다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쟁을 몰고 다닐 인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사실 바울이 직접 썼다고 인정되는 일곱 편의 서신(더 많은 서신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 이상 일곱 편의 편지를 통해서만 바울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에서도 그는 상반되거나 모호한, 어쩌면 이중적일지도 모르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게다가 바울이 쓴 것은 신학 전문서적이 아니라 어떤 특정 상황에서 어떤 특정 대상을 향해 쓴 편지이기에, 이 편지만을 가지고 바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바울 서신의 저작설에 관한 다툼도 꾸준히 있어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강조하듯, 신학의 문외한인 내게도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고 익히 알려졌던 바울의 사상을 확고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고 그것을 찾으려는 방식보단, 각 시대와 정황에 흐르는 맥락에 합당하게 본문과 꾸준히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가능성을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탐색하는 방식이 더 올바를 것이다. 바울이 끼친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지만, 바울 역시 예수의 복음을 해석한 사람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 사람이기에, 그의 사상이 성경을 읽는 하나의 눈을 열어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복음이거나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늘 염두해야 할 것이다.

 

다시금 바울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혈통적으로 유대인도 아닐뿐더러,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율법을 다 알지도 못하는, 일개 이방인에 불과한 나에게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역할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를 박해했던 그도 부르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인간의 자격이나 가치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이 왜 비유대인들의 세계로 퍼져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여전히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바울이지만, 그의 소명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야훼의 종의 사명처럼 분명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열방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열방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어지는 거대한 선상에 나의 작은 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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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김찬영

 

이번 모임에서는 <신 인간 과학>의 챕터 3에 해당하는 ‘정신’을 주제로 모임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정신, 의식, 영혼에 대해서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특히, 영어에서의 마음을 가리키는 표현과 한국어에서의 마음을 가리키는 표현이 다름을 지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을 가리키는 영단어 ‘Mind’는 ‘심리철학(Mind of Philosophy)’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에서 가슴이나 감정으로 이해되는 'Heart'가 아니라 머리나 이성으로 이해되는 ‘Mind’입니다. 즉, 서양권에서의 'Mind'는 마음의 이성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우리가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표현은 이성적인 능력보다는 감정적인 능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차이로 인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최경환 실장님이 심신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셨고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는 책에 나왔던 이야기 중 하나인데 라디오에 비유하면서,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주파수와 연결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심리가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와 관련하여 틸리히 신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박영식 교수님께서 설명하시기도 하고 또 다른 신학 이야기로 나갔는데 맥락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박영식 교수님께서 흥미로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인격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신이 인격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과 관계하는 데에 있어서 인격적이기 때문에 인격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는 아마도 신의 자체적 속성으로서의 인격성이 아니라 인간과 신의 관계 속에서의 인격성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과학보다는 신학적인 이야기가 많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도 자유로이 오가는 분위기에서 다과를 즐기면서 즐겁게 논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에는 1학기 종강 모임으로 모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참여해 주세요.

 

  • 다음 모임: 6월 25일 낮 12시
  •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100주년기념관 8층 박영식 교수 연구실
  • 읽을 책: <신 인간 과학> 4부 새로운 세계관을 향하여
  • 문의: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글_ 정대경 박사 (과신대 연구 팀장)

 

5월 과신대 연구모임은 백우인 목사님이 계시는 카페 “거기”에서 모였습니다. 계속해서 해리슨의 <The Territories of Science and Religion>을 읽으면서 모입니다. 드디어 다음 모임이 해리슨 책 마무리하는 모임입니다.

 

요즘 쓰고 있는 논문의 큰 줄기와 해리슨의 주장이 잘 맞아떨어집니다. 논문은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일으키는데 일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시작했습니다.

 

형이상학적 자연주의 안에서 인간 삶이 추구하는 가치와 의미는 물리적인 것 혹은 신체적인 것으로 축소됩니다. 생명연장, 의료복지 등 막대한 비용과 투자가 이 분야에 이뤄지는 것이 큰 흐름 안에서 인간실존의 궁극적 가치가 신체적-물리적인 것으로 축소되면서 일어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해리슨도 마찬가지로 근세 이후 르네상스, 종교개혁, 새로운 자연철학의 출현 등에 의해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기존 시각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신적-도덕적 층위가 물리적 층위로 환원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내적인 덕목을 지식을 통해 실현하는 종교적-자기성찰적 개념들이었던 scientia와 religio 같은 개념들이 외재적 개념들, 곧 기독 종교의 핵심 교리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체계들로 개념적 전환이 일어났다 주장합니다.

 

이와 발맞추어 종교 내 궁극적 가치였던 caritas(charity), 곧 하나님과 합일적 사랑, 이웃과 합일적 사랑은 전자가 후자로 축소되며 합쳐짐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의 외적인 표현인 공리, 유용성, 복지 등을 실현하는 것으로 강조점이 옮겨갑니다. 이후 인간과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신적 실재가 불필요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 자연스레 종교적인 동기로부터 시작되었던 charity는 인간적인 차원만 남게 되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는 듯 보입니다.

 

큰 틀에서 해리슨의 주장, 실재에 대한 다차원적-다층적 이해가 물리적-문자적 차원으로 축소되면서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가치와 의미도 같이 축소되었다는 이해가 그럴듯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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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정대경 박사 (과신대 연구 팀장)

 

4월 연구모임에서는 종교와 과학 학제 간 연구 관련 서적 중 고전 격인 이안 바버의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챕터 1과 계속해서 함께 보고 있는 피터 해리슨의 <The Territories of Science and Religion> 챕터 3을 읽고 모였습니다. 바버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과학에서 논의되는 “데이터” 개념이 신학 연구에 있어서 사용될 수 있는가에 관련된 논의였습니다. 바버는 신학이론이 구성되는 데 사용되는 자료들을 데이터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고, 과학 연구 방법과 신학 연구 방법 사이 유사성을 토대로 과학과 종교 학제 간 연구 가능성을 제안했습니다. 신학 연구에서 데이터라는 것은 보통 theological sources라고 불리는 성서, 전통, 이성, 경험 등을 보통 의미하는데, 토론 중에 신학적 “데이터”라는 것이 과연 과학적 “데이터” 개념과 유사한 것일 수 있겠는가가 쟁점이었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서로 다른 전공의 학자들, 전문과학, 과학철학, 과학사를 전공하신 선생님들과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도전을 줍니다. 예상치 못했던 부분들을 생각하게 되고, 과학이나 과학철학적 이해에 있어 브로드하고 추상적으로 이해했던 부분들을 조금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과신대 연구모임이 가지는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체계화되고,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방식으로 연구모임이 잘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리슨 책의 챕터 3도 참 흥미로웠습니다. 챕터 3의 주요 요지는 고대와 중세까지는 자연적 존재자들(natural objects or beings)에는 물리적 층위뿐만 아니라, 소위 도덕적-정신적 층위가 존재한다는 것에 크게 이견이 없었는데, 르네상스 이후 시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자연스레 존재자들 내 도덕적-정신적 층위가 사라지거나, 물리적 층위로 환원되기 시작했다는 지적입니다. 이러한 사유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 자연적 존재자들의 행위와 더불어 일어나는 것(i.e. double-agency)이 모순적이거나,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없다가(이미 자연적 존재자들 안에 물리적 층위와 더불어 비물리적 층위가 있기 때문에), 물리적 층위에 대한 강조가 일어나게 되면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을 물리적 층위에 국한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입니다.

 

이 맥락에서 자연 내 일어나는 사건의 원인을 자연적 존재자들로만 국한해서 생각하거나, 기회원인론 같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신적 존재의 행위 결과로만 보는 "either or”의 사유방식이 자연을 이해하는데 대두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유가 역사 안에서 점차 자연주의와 결탁하게 되면서 신적 행위라는 것이 자연계 내 사건들을 설명하는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전락하게 되는 의도치 않은 결과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해리슨의 이러한 지적이 일리 있게 들립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