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 정회원이자 실행위원으로 함께 하셨던 故 심왕찬 선생님을 기억하며 장학금을 모금하고자 합니다.

 

이미 부조하신 분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성의를 표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장학금을 모금해서 故 심선생님의 뜻이 4명의 자녀들의 삶을 통해서 이어질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보고자 합니다.

 

함께 마음을 모아주실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기간: 8/14 (수) ~ 8/23 (금) 자정까지


* 모금 방법: 계좌이체 (신한은행 100-032-022282 과학과신학의대화)
- '보내는 이' 이름에 장학금 표기 (예. 김성명장학금) 또는 입금 후 사무국으로 연락(scitheo.office@gmail.com 혹은 facebook 메세지)


* 장학금 모금액은 기부자의 이름을 별도로 표기하지 않고 과신대 이름으로 전달할 예정입니다.


* 원활한 모금액 전달을 위해 기간 내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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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X과신대]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 북토크

 

거대 블랙홀과 우주 진화를 연구해 온
우종학 교수님의 블랙홀 특강!

 

블랙홀의 탄생에서부터 최근 연구 성과에 이르기까지
블랙홀을 통해 우주의 신비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강의_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과신대 대표)

사회_ 박현철 연구원(청어람ARMC)

 

일시_ 2019.8.22(목) 7:30 pm.

장소_ 낙원상가 5층 청어람홀
(오시는 길: https://www.scitheo.org/257)

 

 등록신청_ https://bit.ly/2ZyM0AV

 

※ 본 행사는 무료 행사입니다. 현장에서 우종학 교수님의 책을 판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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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How should we interpret the Bible?



서론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성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는지,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했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는지, 어떻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부서지고 죄 많은 백성을 은혜로 구속하시고 양자 삼아주셨는지,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침입하여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는지를 말이죠.

 

성령께서는 기독교 신자들의 마음과 가슴 속에 있는 성경의 "큰 이야기" 속 진리를 증거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해 죄의 확신과 회개 및 믿음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손에 든 모든 사람은 누구나 문화와 교육 수준과 관계없이 성경을 유익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성령께서는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명백한 해석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을 해석해야만 합니다. 해석은 단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지, 어려운 구절을 위한 어떤 특별한 기술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은 우리의 기준과 문화적 기대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가끔 이것들은 성경의 저자가 의도한 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의 기원과 말씀의 전반적인 목적이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조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저자의 의도, 문학적 양식과 관습, 언어 및 원청중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성경의 기원

 

개신교 성경의 66권은 다양한 종류의 문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수 세기 동안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서 세 가지의 다른 언어(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로 쓰였습니다. 구약성경은 약 10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쓰였고 통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약 100년에 걸쳐 쓰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과 신약의 첫 번째 책 사이에는 수백 년의 기간이 존재합니다.

 

많은 글이 1세기경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권위를 가진다고 이해되었지만, 초대교회가 그리스도교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문서들을 분류하고 오늘날의 성경을 구성하는 권위 있는 저서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사용 가능한 성경의 여러 버전과 번역본은 수 세기 동안 다양한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의 연구와 공동작업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

 

성경은 도덕 지침서나 믿어야 할 명제들의 모음집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6-17). (바울은 여기서 구약성경을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신약성경에도 적용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무엇보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15절).

 

 

성경의 저자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요? 그들은 무슨 문학 양식과 관습을 사용했나요?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맨 먼저 우리는 저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가끔 저자들은 무슨 일이 생겼다거나 앞으로 생길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어하고, 가끔은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묘사하고 싶어하기도 하며, 가끔은 또 어떤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지침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가끔 그들은 훈계하거나 명령을 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언어와 문화에는 이러한 종류의 의도를 소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는 이러한 의도를 각기 다른 문학적 양식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문학적 양식들은 특정한 관습이나 규칙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그 문화와 시대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특정하게 깨닫고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또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하면서 문학적 양식과 그 양식에 내재된 관습 모두 우리가 기대하거나 쉽게 깨닫는 것들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 시편, 15세기 일본의 하이쿠, 18세기 영국의 소네트 및 21세기 미국의 랩과 연관된 문학적 양식과 관습은 비록 모두 시로 분류될 수 있지만, 매우 다릅니다.

 

묵시문학처럼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한 일부 문학적 양식은 다른 어떠한 문화권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행시의 구조 같이 성경에 나오는 일부 언어 관습이나 언어유희와 말장난은 번역 과정에서 모호해지거나 손실될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일부 문학적인 관습은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서사시(작은 단위)로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강조를 위해 이중 따옴표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성경을 손에 들고 익숙하지 않은 문학적 양식을 완벽하게 해석하거나 전체의 의미에 기여하는, 익숙하지 않거나 모호한 관습의 중요성을 즉시 깨달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문화와 언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학자와 번역자의 전문성을 따지게 됩니다. 그들은 문학적 양식과 관습에 대한 우리만의 문화적인 기대가 성경 해석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부분을 확인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역사를 분명히 기록하지만, 성경이 사용하는 문학적 양식과 관습은 우리 자신이 언어, 문화 및 시대로부터 역사를 읽어오면서 기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종류의 언어가 사용됩니까?

 

저자의 목적을 파악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문학 양식과 관습을 아는 것 이외에도, 해석 일부는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사소통 중 일부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의사소통은 그저 단어를 정의하는 것만으로는 명시되지 않는 추론을 이끌어내는 청중에게 달려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언어 사용의 많은 부분은 어떤 면에서 비유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수업으로 돌아가서 직설법, 은유법, 과장법, 완곡어법, 제유법, 완서법 및 관용적 표현 등을 배워야 했던 모든 어휘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이러한 모든 종류의 비유법의 많은 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복잡하게 만들어 볼까요? 단어 자체는 비유적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poimen의 주된 의미는 목자, "양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비유적 의미는 "교회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요한복음 10:14에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백성을 위한 그의 사랑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씀하는 은유로써 목자의 첫 번째 의미("문자적" 의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11에서 바울은 목자(두 번째 비유적 의미, "목사")를 포함하는 교회 안에서의 역할들을 열거하지만,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그건 그저 매우 단순한 열거일 뿐입니다).

 

비유적 언어는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문학적 형식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시도 매우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역사도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단순히 어떤 텍스트의 문학 양식에 기초하지 않고 사용되는지에 대해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해석 과정은 복잡하고 다층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청중의 문화적 배경은 어떠했나요?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저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썼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for us) 쓰였지, 우리에게(to us) 쓰인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 규범, 상징 및 성경에 대한 청중의 친숙함은 모두 성경이 쓰이고 이해되는 방식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족장들의 긴 수명은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더 큰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나이는 모두 5의 배수이며, 가끔 7이나 14가 추가되어 수사학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문화적 중요성은 그 예로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문맥을 무시하고 그 우화를 직설적으로 그대로 읽으면, 우리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문화적 틀 안에서 고려될 때,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학자 케네스 베일리에 따르면, 그 유대인의 아들은 유업을 요구하며 수치스럽게 행동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탕진하면서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의 행동은 'kezazah'라고 하는, 단절의 의식을 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마을의 거절과 아버지의 분노 섞인 반대를 동반했을 것입니다. 또한, 탕자는 다음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구걸해야만 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냉대 대신, 사랑과 자비의 환영이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그를 만나기 위해 뛰어나갔습니다. 그 아버지 나이의 남자들, 그리고 중동 문화 속에서 구별된 남자들은 언제나 천천히 위엄 있게 걸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의미심장한 세부묘사인 셈입니다. 뛰어감으로써 아버지는 탕자 덕분에 수치와 굴욕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입 맞추고, 최고의 옷을 입히고, 잔치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래 이 이야기를 중동 청중에게 들려주셨을 때, 그들은 아마도 현대 독자들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원청중과 그 문화에 대한 인식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 그 부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훨씬 더 증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를 어떻게 해석할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의 앞 장들을 읽는 방법에서 강경하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21세기의 아이디어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이오로고스 커뮤니티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앞 장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이러한 다양한 생각을 드러내는 많은 글을 웹사이트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창세기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원청중이 이해했을 것들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창세기의 해석 방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이오로고스는 창세기 앞 장들을 비유적인 언어를 통해 실제 사건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다른 고대 근동의 문헌들이 사건을 묘사했던 방식과 일치합니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창세기가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비록 그 목적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이나 역사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계획을 계시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지만 말이지요.

 

 

결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권위 있게 쓰였음을 믿습니다. 성경이 단순한 문학 작품은 아니지만, 믿음의 독자들에게는 살아 역사하는 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성경 읽기를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한 고급 훈련은 없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우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성경 구절을 가장 잘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크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지식을 얻는 것에 달리지 않다는 사실에서 우린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는 것이지, 성경의 완벽한 해석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성경을 깊게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안에 거하며 창조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과 목적을 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김근주 연구위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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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그리스도인은 왜 진화적 창조를 고려해야 할까요?

Why should Christians consider evolutionary creation?

 

번역: 김영웅 / 감수: 박희주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 눅 10:27


진화는 성경적 믿음에 비추어 고려해야 할 도전적인 주제입니다. 그래서 종종 그 주제에 대한 의미 있는 토론을 하기보다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편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진화적 창조가 창조주와 우리의 관계 그리고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포함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유익을 준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모든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진화를 공부해야 합니다. 진화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공부입니다. 창조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전달하신 것에 대한 보완적인 계시이며, 하나님은 창조된 질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생명체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그의 영광과 존귀로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자연에서의 규칙적인 패턴은 하나님의 규칙적이고 신실하신 통치하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종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과학적으로 창조과정을 묘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중력법칙이 행성의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진화의 과학적 모델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둘째, 진화적 창조를 고려하는 것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믿음 안에서 제자화하는 것을 포함해 교회와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됩니다. 반진화적 태도는 과학을 추구하거나 믿음을 고수하는 것 사이에서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복음주의 교회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신뢰를 잃어버리는 주요 원인은 사실상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한 모든 증거와 모순되는 반진화적 창조 모델의 주장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진화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복음전도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피전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에 진화 과학을 거절해야만 한다고 듣게 된다면 말이지요. 반면 진화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과정으로 여기고 공부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이 무신론적 세계관을 낳는다는 주장에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화 과학이 하나님이 일하신 과정을 묘사한 것이고 (무신론을 증명하는) 어떤 하나의 세계관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적 진화 과학)을 과학의 일부가 아닌 세속적인 철학으로 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문화는 최신 의사소통 수단을 밝혀낸 새로운 생물의학적인 진보에서부터 기본입자에 대한 발견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기술로 가득 차 있기에,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과학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진화 과학은 현대 생물학에 필수적이기에 교회가 공적 영역에서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진화의 증거와 그것이 지닌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씨름해야만 합니다. 기독교가 이런 논의를 잘 알고 있다면, 줄기세포에 대한 논의라든가 태아, 노인, 장애인을 돌볼 때 DNA 정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이슈와 같은 생명윤리적 토론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최첨단 연구에 전폭적으로 참여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괴롭히기보다는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과학을 지지함으로서, 우리가 창조 질서 속 하나님의 역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통해 창조 질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일을 통해 창조주를 증거하고 창조주를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토요일 하루 종일 중고등학생들을 모아서

캠프를 진행하겠다는 무모한 도전!

 

그 도전을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30여 명의 청소년들과 함께
즐겁게 캠프를 진행했습니다. 

 

두 번째 캠프라서 그런지 조금 여유가 생겼네요.

무엇보다 찬양인도를 최경환 실장에서

이진호 간사로 바꾼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 청소년 캠프 후기: https://www.scitheo.org/396

 

 

우종학 교수님의 새로운 책,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가 나왔습니다.

그동안 과학과 신앙에 대한 대중강연을 많이 해 오셨는데

사실 우종학 교수님의 전공은 천체물리학

그중에서도 블랙홀이라는 사실, 아셨나요?

 

저희 사무국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겠죠?

8월 22일(목) 저녁에 청어람ARMC와 함께

우종학 교수님께 블랙홀 특강을 듣는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곧 홍보물이 나갈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책을 썼다고 하니

자녀들을 데리고 오셔도 좋은 거 같습니다. 

(그나저나 자리가 좁으면 어쩌죠?^^;;)

 

 

과신대 포럼을 기억하시나요? 

지난 2017년 11월에 "포스트휴먼과 기독교 신앙"이라는

주제로 제3회 포럼을 개최하고

그 이후로 진행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꼭 개최하려고 하는데요.

 

감사하게도 9월에 버클리연합신학교에 과학신학을 가르치시는 로버트 J. 러셀 교수님께서 한국에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 과신대와 유관 단체들이 함께 힘을 모아 "과학신학 심포지엄"을 준비했습니다. 

 

심포지엄 주제는 "신, 인간, 자연"입니다. 

세 가지 주제를 나눠서 각각 전문가가 발표를 하고

마지막으로 러셀 교수님의 강의와

국내 과학신학 전문가들의 패널 토론도 준비 중입니다.

 

역시 자세한 일정과 소식은 추후에 저희 홈페이지를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마 국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열리는 과학신학 학술 행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혹시 "바이오로고스"Biologos라고 아시나요?

 

과신대처럼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관으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 총책임자이자 <신의 언어>로 유명한 프랜시스 콜린스가 세운 단체입니다. 사실 과신대의 롤모델이기도 하죠.

 

바이오로고스 홈페이지에 가면 Common Questions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과학과 신학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평소에 궁금했던 내용을 잘 정리해서 올린 칼럼입니다. 

 

과신대 정회원이자 [과신책] 코너를 통해 꾸준하게 서평을 써 주신 김영웅 박사님께서 바이오로고스의 허락을 받고 이 칼럼을 번역해주셨습니다. 앞으로 과신대 홈페이지를 통해 하나씩 글 보따리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유익한 내용이 정말 많습니다.  

 

[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바이오로고스는 진화주의, 지적설계, 창조론과 어떻게 다른가요?https://www.scitheo.org/397

 

 

마지막으로 과신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1. 자비의 하나님, 과신대가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시하는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널리 전하는 단체로 쓰임받게 해주십시오.

 

2. 과신대를 섬기고 후원하는 교회와 후원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함께 꿈꾸고 지성의 제자도를 위해 헌신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시옵소서. 과신대가 정직하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저희를 말씀으로 늘 인도해주십시오.

 

3.  모든 영역과 삶의 현장에서 주인되신 하나님, 한국교회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과 사회 속에서도 주님의 빛을 드러내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로 해주십시오. 학문의 영역에서 특별히 과학을 통해서도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하시고, 주님의 주권이 드러나게 하시옵소서.

 

4. 주님, 과신대가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사역 위에 함께 해주십시오. 가장 치열한 학문의 영역에서 과학과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고자 애쓰는 교사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과학신학 심포지엄과 콜로퀴움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기회가 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강응섭 (예명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정신분석학-리더십학 교수)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계통발생적 측면에서나 개체발생적 측면에서 줄곧 제기되어 왔다. 인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역사 이전 시기에는 그림, 건축 등 비언어적 형태로, 역사 시기에는 언어적 형태로 기록을 남겼다. 비언어적 형태는 언어적 형태 속에 스며들어 그 흔적을 공유해 왔다.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그 흔적을 본다. 자연의 초기 모습, 이미지로 그려지는 역사 이전 시기의 그 모습은 역사 시기의 산물인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실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언어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언어는 역사 이전 시기의 모습을 역사 시기에 전하려고 도입한 고난도의 기술(Technic)이다. 그 기술을 터득한 이래로 인간은 계속해서 그 기술을 정교하게 만들어 왔고, 그것을 이용해 기록 문화를 남겨 왔다.


철기시대의 산물인 ‘쟁기’로부터 ‘정보화 기술’과 ‘디지털 기술’이 대두되기까지 우리는 지금, 네 번에 걸친 산업혁명의 산물들과 공존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이어져 있다. 창세기 2장은 그 질문에 근거하여 서술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다”(5절)는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6절)와 대조를 이룬다. 6절은 1장 2절의 ‘깊음(테홈)’에서 시작되는 물의 오름과 연관된다. 즉, 5절과 6절의 대비는 물의 내림과 물의 오름의 대비, 물의 없음과 물의 있음의 대비를 보여 준다.


우리는 보통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말하는데, 창세기 2장에서는 물이 아래서 위로 올라온다고 말한다. 물이 아래서 위로 올라오는 모습은 안개 낀 새벽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지면을 적실 정도로 충분한 안개가 올라왔다. 대류 현상의 물기로 인해 충분한 수분을 머금은 흙은 하나님이 사람을 짓는 재료가 된다. 그리고 바람은 지어진 사람을 말린다. 그래서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기록한다. 기록 문자가 없던 시기의 모습을 기록 문자로 정리함으로 인간의 기원을 담고 있는 5~7절은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이에게 큰 실마리를 제공한다.

 

바울은 이 구절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다루었다. 그러면서 ‘생령’(산 영)과 ‘살려 주는 영’을 대비한다. ‘산 영’(a living soul, ψυχη, psyche)은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nephesh)의 번역이다. 기독교에서 보통 ‘영혼’이라고 말하는 ‘프시케’는 심리학(Psychology), 정신분석학(Psychanalysis)의 어근이 된다. 히브리어 ‘네페쉬’는 목구멍을 지칭하는 해부학적 용어이자 ‘갈증’이란 의미를 지닌 정동적 용어이다. ‘네페쉬’는 살기 위해 마시고 먹고 호흡하는 통로인 목구멍이자, 자신의 갈급함을 표현하는 말을 전달하는 통로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최초 이름(명사)은 ‘네페쉬’였다. 그 ‘네페쉬’가 곧 ‘프시케’다. 살려 주는 마지막 아담인 예수로만 부활을 맞이하는 자가 ‘산 영’이다.

 


인문학의 역사는 ‘프시케’에 관계된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인문철학자들에 의해 ‘프시케’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다. 이런 세계관은 산업혁명의 배경이자 후경이 된다. 산업혁명은 인간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지만 그에 따른 역효과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프시케’는 이전보다 더, 새로운 형태의 고뇌를 하게 되었고, 고뇌하는 인간의 ‘프시케’에 관한 연구가 데카르트, 칸트, 헤겔에 의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인간 고뇌에 대한 탐구와 산업혁명의 진전 시기는 서로 겹친다. 프로이트(1856~1939)는 이 둘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접점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ps(psi, 프사이)-system을 구상하면서 몸 밖과 몸 안의 관계를 정립하고자 그 과정과 진행을 도면으로 그렸다. 물론 프로이트의 도면은, 여러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 중,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도면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제2차 산업혁명이 한창 여물어 가던 시기에, 곳곳에서 나타난 폐단의 인과관계를 연구했던 신경학자였다. 그는 그 문제를 진단하고자 몸 밖과 몸 안을 대조시키면서 ‘감각-기억-무의식-의식’이라는 가교 장치를 마련한다. ‘무의식’은 몸 밖과 몸 안을 잇는 하나의 장치다. 프로이트는 이걸 ‘비계’(飛階)라고 불렀다. 건물을 짓기 위해 세우는 장치에 비유한 것이다. 비계를 통해 작업하다 보면, 도면에 그려진 것이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하나님이 흙으로 빚고, 그것에 생기를 불어 넣어 아담이라는 생령이 되었듯이.


하나님의 이런 일하심은 네페쉬, 프시케로서의 인간을 만들었다. 창세기 3장은 이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자연과 사귀는지를 보여 준다. 에덴에서의 삶 기록은 기록 이전의 역사를 잘 나타낸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릴 자(1장 26절)로서 네페쉬인 아담을 만들었다. 그 일을 할 공간인 에덴에 아담을 데려다가 다스리는 일을 수행하게 했고, 그 일을 도울 하와도 주었다. 다스리는 일은 각 실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스리는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무엇이며, 염두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담에게 규율을 주었고, 아담은 그것을 준수하는 가운데 실재와 소통하면서 다스림을 수행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제시한 규율은 아담과 하와에 의해 파괴되었다.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인 네페쉬로서의 아담과 하와, 이 둘은 하나님의 규율을 이뤄내지 못했다. 왜일까? 뱀이 등장하여 소통을 방해했기 때문이고, 뱀의 제안을 듣고 방황이 부족했던 탓이다. 하나님의 제안을 염두에 두었다면 더 방황했어야 했다. 속는 자는 방황하지 않지만, 속지 않는 자는 방황한다.


왜 방황이 어려운가? 하나님이 그렇게 지어서인가? 인간이 속임수를 피할 능력을 개발하지 못해서인가? 다시 말해, 속임 구조로 만들어져서인가, 인간이 속임에 안주해서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은 수렴되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양날의 주장처럼 이어져 왔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전자는 방황 없는 ‘믿음의 시대’를 대변하고, 후자는 방황하는 ‘이성의 시대’를 대변한다. 의심은 근대를 출범하게 했다. 의심은 속지 않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에서 비롯되었다. 속지 않으려는 인간의 무기는 의심이다. 그것은 곧 이성에 대한 신뢰였다. 


그런데 이 신뢰 역시 속임임을 밝힌 연구가 제시되었다. ps(psi, 프사이)-system을 정립한 프로이트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뒤엎었다. 믿음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이어져 온 서양사회는 또 다른 형태의 속임 구조를 밝힌 프로이트로 인해 적잖이 불편해했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주장이 무신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대한 교리에서 비롯된다. 정말 속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누구의 의심이 믿음에 근거한 것인지를 깊이 상고해 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하나님이 지은 인간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는지? 기록 문자가 없던 시기의 일을 기록 문자로 남긴 창세기 도입부로 돌아가 논의를 다시 시작하면 프로이트의 작업이 의미 있지 않을까? 


과학 기술 발전에 따른 인간에 관한 견해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지금까지 주장되던 이론은 새로운 질문을 받게 된다. 이런 질문을 통해 이전에 내렸던 주장을 새롭게 생각해 보는 기회가 주어졌다. 과학이나 기술이 발전한다는 것은, 새로운 과학 이론이나 기술이 제기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심, 하나님이 갖고 있던 도면을 밝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 환경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속고 있는가’, 이 질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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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에서 “신, 인간, 자연”과 관련된 학제 간 연구를 발표할 연구자들을 모집합니다.

 

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은 “신, 인간, 자연”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신학, 철학, 과학 학제 간 연구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과 연구자들을 초대합니다. 이번 심포지엄은 종교와 과학 학제 간 연구를 선도해온 버클리연합 신학대학원(GTU & CTNS)의 로버트 J. 러셀 교수의 초청강연과 과학신학의 주요 주제들에 대한 리뷰 및 국내 학자들의 연구를 소개하고 네트워크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발표 주제는 신, 자연, 인간과 관련된 과학, 철학, 신학 사이 다양한 학제 간 연구입니다. 구체적인 연구 주제로는 아래와 같습니다. 

 

- 과학과 철학, 신학 학제 간 연구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연구방법론
- 신학에서 논의되는 궁극적 실재인 신 개념과 철
학적 자연주의 등에서 다루는 자연 개념 사이의 비교
- 우주, 생명, 인간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빅뱅
우주론, 진화론과 신학적 창조론 사이의 양립가능성
- 인간에 대한 환원론적-물리주의적 이해와 신학적 이

- 생물의 진화역사 내 멸종과 죽음, 먹이사슬 등 자연악과 신정론
- 유전자 편집기술, 트랜스휴머니즘, 인공
지능과 기독교
- 종교의 기원에 대한 고인류학적 이해와 신학적 이해 사이 양립가능성
- 몸-마음 문제에 관한
과학적, 철학적, 신학적 이해와 인간의 영혼 이해
- 양자역학의 비결정성, 카오스 이론과 신의 섭리
- 자연법칙
과 기적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이해
- 인류가 초래하고 직면한 환경위기와 기독교 등을 포함합니다.


발표를 원하시는 연구자께서는 250자 내외의 초록을 과학신학 심포지엄 조직위원회 (sym.scitheo@gmail.com)로 8월 30일까지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선정된 연구자는 7페이지 분량의 최종 원고와 발표에 사용할 PPT를 심포지움 2주 전에 제출해야 합니다.


관련 연구자와 선생님들께서는 많은 참여와 홍보 부탁드립니다.

 

* 문의 및 연락: 070-4320-2123

* 과학신학 심포지엄 프로그램 안내: https://www.scitheo.org/403

 

과학신학 심포지엄 안내

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은 “신, 인간, 자연”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신학, 철학, 과학 학제 간 연구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과 연구자들을 초대합니다. 이번 심포지엄은 종교와 과학 학제 간 연구를 선도..

www.scithe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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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은 “신, 인간, 자연”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신학, 철학, 과학 학제 간 연구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과 연구자들을 초대합니다. 이번 심포지엄은 종교와 과학 학제 간 연구를 선도해온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 & CTNS)의 로버트 J. 러셀(Robert J. Russell) 교수의 초청강연과 과학신학의 주요 주제들에 대한 리뷰 및 국내 학자들의 연구를 소개하고 네트워크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주제: 신, 인간, 자연 God, Human, Nature

 

일시: 2019년 9월 30일 오후 2:00 - 9:00
장소: 강남새사람 교회(선정릉역)

 

프로그램

 

세션1 (God, 신)
2:20 - 2:50 - 세션1 주제 관련 리뷰톡, 장로회신학대학교 김정형 교수
2:50 - 3:10 - 세션1 주제 관련 심화톡
3:10 - 3:30 - 질의응답 및 토론


세션2 (Nature, 자연)
3:30 - 4:00 - 세션2 주제 관련 리뷰톡, 미래신학연구소 강태영 교수
4:00 - 4:20 - 세션2 주제 관련 심화톡
4:20 - 4:40 - 질의응답 및 토론


세션3 (Human, 인간)
4:50 - 5:20 - 세션3 주제 관련 리뷰톡, 한신대학교 전철 교수
5:20 - 5:40 - 세션3 주제 관련 심화톡
5:40 - 6:00 - 질의응답 및 토론
6:00 - 7:00 - 저녁식사 및 국외-국내 과학신학 단체들 소개


세션4 (과학과 신학 학제 간 연구)
7:00 - 8:00 - “Five Issues at the Frontier of Theology and Science” (GTU & CTNS, Robert J. Russell 교수)
8:00 - 9:00 - “한국에서의 과학과 신학”
                        부산대학교 김유신 교수
                        서울대학교 우종학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윤철호 교수
                        서울대학교 최승언 교수
                        아주대학교 허 균 교수


공동주관: 과학과신학의대화, 미래신학연구소, 이수포럼, 한국과학생명포럼, 한신대종교와과학센터

공동후원: 강남새사람교회, 과학과신학의대화, 미래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문의 및 연락: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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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학자의 읽기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 이레서원 | 2017

 

김영웅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를 향한 신뢰,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자칫하다간 자신의 신앙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이 자신의 고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느껴지고, 자신만 숨 막히는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난과 훈련의 유익함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는 '욥기'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 가운데, 왜 욥이 고난 받게 되는지를, 욥기의 시작부터 우리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작 불가항력적인 고난을 실제로 받았던 욥은 그 고난이 끝난 이후에도 그 이유를 몰랐다. 다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욥은,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 영적 교만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을 마침내 대면하고 이를 회개하게 된다. 이후 욥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께선 욥에게 고난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다. 

고난을 겪고 나서, 그 고난이 왜 자신에게 임했는지 정확히 알게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정말 그 직접적인 이유를 우린 알 수 있기나 한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지나고 나서야 그 고난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비로소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극심한 고난 중에서는, 절망 가운데 깊이 빠져 있다가도 간헐적으로 온전한 분별력을 되찾기도 하고, 이내 다시 끔찍한 고통 속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사이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고난됨은 어쩌면 이러한 반복적이고 비생산적인 크고 작은 감정과 고통의 요동과, 그 때문에 늘 정체되어 수렁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우,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이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한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전보다 오히려 더욱더 힘든 내면세계의 혼돈과 붕괴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는 그의 책,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에서, 욥기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로 빚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들 생각의 저변에 깔린 인과응보적인 논리를 물리치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대답만을 하신 사건에서도, 우린 죄와 고난의 인과적인 관계가 항상 성립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난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답답하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모른다"거나 "context-dependent"하다는 것이 가장 '성경적'일지도 모르겠다. 

고난의 원인(Why)을 밝혀내는 것보다는, 어쩌면 그 고난으로부터 무엇을(What) 얻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의 목적은 Why보다는 What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욥의 친구들은 모두 욥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Why)에 중점을 두고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그들은 모두, 순종은 복으로, 죄는 심판으로 인도한다는, 기계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었고, 그 방정식에 하나님을 대입하여 기계적으로 얻은 해와 욥의 상황이 일치하지 않음을 간파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그 친구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What)이 지닌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곧 하나님은 종종 예기치 못한 방식,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신다는 점(What)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해법을 욥의 특수한 사례에 적용하려 했다. 마치 하나님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음일 뿐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방정식에 갇혀 그 규칙대로 움직이는 존재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들은 하나님(What)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목적은 욥이 그분을 알게 되는 데에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것도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닌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말이다. 저자 역시 Why가 아닌 What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광대하고 다양하며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그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쉽게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불가사의한 모든 것까지도 통제하시는 분이시다. 불가사의는 우리의 이해를 넘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광대하고 경이로운 계획 가운데서는, 부당한 일들까지도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하나님은 그 일들까지 사용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심지어는 이전보다 더 낫게 만드시기도 한다. 욥은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런 상황까지도 그분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고난도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과정의 일환일 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한 진리이겠지만, 인간은 불완전하고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창조주인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는다면, 고난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하는 왜(Why)의 질문 대신, 그 고난으로 인해 깨닫게 될 무엇(What)에 좀 더 초점을 둘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하며 과거지향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와 미래까지도 스스로 파괴해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그 고난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그를 향한 신뢰와 소망을 가지고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솔직히 드러내어 귀를 기울여 보자. 적어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욥의 친구들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을 순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또 맞이하게 될 고난에 대한 면역이나 근력도 생겨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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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북클럽]

 

| 강사은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일시 : 2019년 7월 19일(금) 오후 7시
장소 : 성공회 분당교회(https://www.skhbundang.or.kr/)
책 : 피터앤즈의 ‘성경 영감설’

 

 

— 굽먹이냐 삶먹이냐.

 

부먹/찍먹보다 더 유서 깊은 논쟁이 성서 번역에서의 굽먹/삶먹 논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유월절에 관한 율법에서 (히브리어 원문 상)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는 ‘구워’ 먹을 것을, 신명기, 역대하에서는 ‘삶아’ 먹을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런 다양성이 NIV에서 ‘구워’ 먹는 것으로 통일된 것은 그 나름의 ‘번역철학’에 기인한 것이었군요.

 

“출 12:12-13(“...그 고기를….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와 신 16:5-7(“... 그 고기를 구워먹고…”)에서 출애굽기의 강조점은 아주 분명하지만 신명기의 경우 히브리어 원문에서 ‘삶아서[베잇-쉰-라멛] 먹고’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NIV 신명기의 구절이 ‘삶다’의 의미가 아니라 ‘굽다’의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르지만 NIV가 이렇게 다룬 이유는 동일한 법이 서로 모순되게 진술되었을 리가 없다는 성경관에 근거한 ‘번역철학’을 반영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언어적 사실을 숨겨서는 안된다. 대하 35:13절도 ‘삶아’인데 NIV는 ‘굽고’로 번역되었다.”(pp. 127-128 요약)

 

뭐 그렇다고 저자 피터앤즈가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강조를 하지는 않습니다. 원어를 공부하면 뭐하겠습니까? 번역을 하겠지요. “번역은 반역이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저는 이 말 보다는 “번역은 창작이다”를 더 좋아하긴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된 인간의 책 성서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66권 정경이 완성된 것은 약 4세기경입니다. 확정된 성서 목록은 367년 아타나시우스 서간에 처음으로 등장하죠. 성서가 ‘하나님의 책’이라고 강조되었던 비중에 비해 ‘인간의 책’이라는 점은 거의 강조되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요. 지난 150년간 고대 근동 문헌들의 발견은 성서를 새로 보게 합니다. 저자는 “성서는 역사적 산물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둘은 한쪽만 선택할 수 있거나 충돌되는 사실이 아니며 이에 대한 성육신 유비를 통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은 정경 형성사에서 보듯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인정한 전통을 따르기 때문이죠. 성서는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전 인류에게도 가치있는 고전이겠습니다.

 

— 오늘날 우리에게 구약은, 성서는

 

다신교적 환경에서 이스라엘을 이끈 신은 제국의 신이 아닌 사회적 약자인 노예들의 신이었습니다. 인간을 노예가 아닌 존귀한 자로,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여긴 것은 당시 사회상에서는 아주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성서가 쓰여진 시대의 메시지가 그러할진대 노예 제도의 정당성 제공을 위해, 여성 인권 차별의 근거와 성소수자를 배제하기 위한 용도로 성서가 이용되는 것을 정경 66권이 이미 완성되고 인쇄술과 휴대용 전자기기의 발달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시대에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구약성경의 권위 혹은 규범성에 대해 숙고할 때 성경의 성육신적 차원을 떼어놓아서는 안된다. 구약성경은 우리가 따라야 할 규칙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성경의 성육신적 요소는 오늘까지 지속된다. 각 세대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 세대가 살고 있는 세계와 복음이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고민하면서 복음의 메시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 ‘무대 뒤의 하나님’

 

구약성서 안의 제각기 다른 하나님에 대한 묘사들은 다양한 색깔과 질감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초상화를 이루는 것과도 같은데요. 한편, 인간의 책이기도 한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과 ‘무대 뒤의 하나님’ 즉 실재의 하나님에 대한 구분된 이해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 성서를 가까이 하는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교만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겠습니다.

 

— 작은 소회

 

이번 모임에서 어떤 분은 삶은 옥수수로 입맛을 돋궈 주셔서, 어떤 분은 미국 출장 후 집에 짐만 풀어 놓고 바로 참석해 주셔서 감동이었습니다. 먹거리를 장만하고 챙기는 것, 출장으로 피곤한 몸으로 참석하는 것 모두 만만치 않은 일인데 말이죠. ^^

 

— 다음 모임 안내

 

다음 모임은 8월 23일(금) 저녁 7:30분에 피터 앤즈의 ‘성서 영감설’ 4장~끝까지 함께 읽고 토론하게 됩니다.
분당/판교 지역에서 정기/비정기적으로 참석하실 분을 언제든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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