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과신책] 학자의  읽기

 

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엔도 슈사쿠 | 침묵의 소리 | 김승철 역 | 동연 | 2016

 

김영웅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의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침묵 가운데서도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침묵’은 ‘침묵의 소리’로 다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침묵’을 오독했던 독자 중 하나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침묵’을 ‘침묵’으로만 읽었던 많은 독자들 덕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묵의 소리’는 ‘침묵’에 해제를 붙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침묵’에 대한 오독이 엔도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독 덕분에 우리들은 엔도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좀 더 친밀하고 좀 더 친절하게 말이다. 나도 그랬다. ‘침묵의 소리’를 읽으며 ‘침묵’ 너머에 있는 엔도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침묵'을 읽을 때에는 못 느꼈던 것들이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엔도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사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침묵’을 집필하게 되었던 이유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인생과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전해지지 않았던 (침묵했던) 엔도가 내겐 비로소 전해졌다 (소리로 들려졌다).

 

 

그는 토종 일본인이면서도 서양에서 전해져 온 기독교 (가톨릭)를 받아들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스스로도, ‘어릴 적부터의 기독교는 자신이 믿지도 않은 세계에 자신의 몸이 내던져진 사람이 겪는 이문화 체험’이라고 고백한다. 엔도에게 기독교는 그만큼 이질적인 문화였고, 그 속에서 그는 혼란스러웠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자인 김승철 교수 역시 서문에서, 엔도에게는 어릴 적 자신이 받았던 세례에서부터 ‘기독교가 일본에서 자란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 늘 그를 따라다니던 물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엔도는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일본인인 자신의 몸에 맞는 신앙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결심이 마침내 소설가 엔도를 탄생시켰다고 역자는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실로 소설 ‘침묵’은 엔도의 삶 전체가 녹아 있는 책인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로부터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히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판 경우에는 아예 누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배교한 기리시단들을 한데 모여 살게 했던 기리시단 주거지에서 20년에 걸쳐 간수로 일했던 어느 하급 무사가 남긴 일기 형식의 문서이다. 엔도는 이 실제 문서를 약 10분의 1 정도로 줄이면서 발췌해서 고쳐 쓰는 방식으로 ‘관리인의 일기’를 작성하였고, 이를 ‘침묵’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게 해두었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 번역판을 읽은 나에게 ‘침묵’의 마지막은, 끝내 배교한 로드리고 신부와 이미 배교했던 페레이라 신부를 향하여, 그리고 끊임없이 간교함과 성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던 기치지로를 향하여 결코 좋지 못한 시선을 줄 수밖에 없게 해 주었었다. 이는 반대급부로, 끝가지 후미에를 밟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낌없이 버린 순교자들을 향한 시선을, 마음 아프지만, 옹호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침묵이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마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도 나는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샌가 배신이냐 죽음이냐의 문제가 신앙을 버리느냐 지키느냐의 문제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자 김승철 교수가 직접 해제 및 번역과 주해를 한, 이 책에 수록된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를 읽고 난 후, 난 비로소 의문이 해소될 수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강한 자들의 입장이 옹호되는 반면,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으며 배교하여 목숨을 건진 약한 자들의 입장이 멸시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나는 비로소 해방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기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하고 다른 이들에게 포교 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간교함을 얼굴에 써놓은 듯한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예전과는 달리 로드리고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일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의 회복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침묵의 소리'의 도입부에서 엔도는 나가사키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 안에서 동판에 새겨진 후미에를 만나고 그 나무틀에 남아있던 수많은 검은 발자국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믿는 것을 발로 밟았을 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약자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침묵'의 주인공으로서 담대하게 순교한 강자가 아닌 끝내 배교한 약자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침묵의 소리' 책 안에는 엔도의 다른 단편 소설들이 몇 개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아버지의 종교, 어머니의 종교'에서는 엔도는 가쿠레 기리시단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들의 시작은 순교가 아닌 배교였다. 그들의 신앙은 승리자의 신앙이 아니라 실패자의 신앙이었다. 그들 신앙의 출발점은 자신들이 배교자, 약자라는 자각이었으며, 그 어두운 출발점이 그들의 신앙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신앙이, '어머니 되시는 분'이란 단편 소설에서 말하듯이, 오랜 시간을 비밀리에 거쳐 오면서 불교나 다른 종교, 심지어는 토속적인 미신까지 뒤섞여 있는 종교로 변질되었지만, 그들의 아픔과 회한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단번에 이교도나 이단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엔도가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침묵'을 썼다는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다. 때문에 '침묵'을 읽고 난 후 느꼈던 찝찝함은 말끔히 해소가 되었다. 예수의 예언대로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엔도의 표현대로라면, 가쿠레 기리시단의 조상들처럼 후미에를 밟았던 셈이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그 세 번의 부인함으로 인해 예수께 질책을 당하거나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을 체험한 지도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 페레이라나 로드리고, 그리고 간교한 기치지로라고 해서 그들의 배교 행위 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며 그 영향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았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엔도는 말한다. 자신 역시 페레이라이고 로드리고이며, 또 기치지로라고. 자신 속의 여러 인격을 각각 독립시켜 그것을 작중 인물로 그려나갔던 것이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의 차이로 인해 다행히(?) 나는 고문과 죽음이 문턱에 와 있는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을 뿐, 일상 속에서는 밥 먹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매일 배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이다. 가쿠레 기리시단은 일 년에 한 번씩 후미에를 밟는 행위를 지속해야 했지만, 그 행위 이외에는 비밀리에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머리와 입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말하고 가끔은 마음까지 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이 관성에 의해 나만의 가치관에 의해 나를 움직인다. 마치 기계 돌리듯 말이다.

 

물론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겠지만,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통해, 약자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신앙 지키기는 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단지 신은 침묵한다는 메시지나, 침묵 속에서도 말한다는 메시지를 넘어서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종합해 볼 때, 아니 내가 만난 엔도를 느껴볼 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나 늘 잊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스스로 곱씹게 만들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결국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 가운데 침묵하시든지 침묵하지 않으시든지,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게 된 것이다. 엔도를 통해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약한 페레이라, 로드리고, 기치지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순간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분이 침묵하시든 침묵으로 말씀하시든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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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무국 소식 201912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과신대 사무국도 한 해 동안 정신없이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2019년에는 5번의 콜로퀴움을 진행했고

유관 단체들과 함께 '과학신학 심포지엄'도 진행했습니다.

 

변함없이 지역마다 북클럽도 진행하고

무엇보다 과신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몇 가지 실험적인 방송도 시도했습니다. 

 

 

최경환 실장과 이승용 간사가 함께 진행했던

'과학과 신앙 사이' 과신사도 9개의 영상을 찍었습니다.

한 달에 한 권씩 책 소개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12월에는 과신대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인

온라인 <기초과정I>을 50% 할인된 금액으로

수강할 수 있는 이벤트도 진행했습니다. 

혹시 아직도 <기초과정I>을 안 들은 분이 계신가요?

이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꼭 신청해서 들어보세요~

 

 

과신대와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가 함께 준비했던

야! 나두~ 과학포럼 행사도 잘 마쳤습니다.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김남호, 권영준, 최승언, 이문원 교수님께서

각각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앞으로는 과신대의 과학 프로그램으로

신학대학교 투어를 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

 

 

지난 12월 5일(목) 저녁에는 과신대 회원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평일 저녁이라 많은 분들이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꼭 오셔야 할 분들이 오셔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해 동안 과신대를 위해 수고하시고

헌신해주신 분들을 축하하고 서로 격려하는 훈훈한 시간이었습니다. 

 

 

매월 모이는 과신대 교사팀도 2019년을 마무리하면서

우종학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올해는 청소년 교재 집필을 마무리하고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청소년 교육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매월 교사 모임도 본격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내년에는 정말 해야 할 일이 참 많네요.

네, 정말 과신대가 할 일이 많습니다. 

 

과신대는 회원 여러분의 참여와 후원으로 운영됩니다.

정회원으로 가입하셔서 한국교회를 향한

과신대의 사역에 힘을 보태주시기 바랍니다.

 

> 입회신청서 : goo.gl/YYP76E
> CMS 후원 신청서 : https://bit.ly/2VLxHa6

 

 

마지막으로 과신대를 위해 잠시 기도해주세요.

 

1.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 모든 생명이 함께 어울려 살도록 이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욕심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이 세계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제는 더 이상 자연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않도록 우리들을 다스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생명으로 풍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을 맘껏 누리게 하시옵소서.

 

2. 사랑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약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혐오를 잠재워주시고 사랑으로 연합하여 서로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3. 한국교회와 기독교를 위해 기도합니다. 생명을 경시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한 지식을 꾸짖어 주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무엇보다 과학과 학문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하게 하시어 모든 이들이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과신대에 이 일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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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글_ 김남호 (울산대학교 철학과)

 

 

과학과 철학은 더 만나야 한다. 카오스 재단이나 EBS 프로그램 '통찰'의 멋진 과학 강연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철학자들은 과학을 잘 모르고, 과학자들은 철학을 잘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논문을 쓰는 철학자들의 경우 필요하면 과학적 지식을 잘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세계 철학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철학자들은 과학자였다. 이는 과학도 하고 철학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최고 정점에서 과학이 답할 수 있는 문제 영역의 한계를 나름대로 인식했고, 그 한계 인식에서 철학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흄, 라이프니츠, 파스칼, 칸트, 현대의 심리철학 전문가 등이 그런 예이다.

 

데카르트가 실체로서의 영혼을 증명하려 한 철학자로 오늘날 웃음거리가 되고 있지만, 데카르트는 그 당시 최첨단 과학인 생리학의 최전방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알 수 있었고 영혼 개념을 도입해서 보다 합리적인 인간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영혼 개념은 형이상학 내에서 그 설득력을 잃었지만, 그의 시도는 철학과 과학의 건전한 관계 맺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과학자들의 강연을 보면 우선 많은 경우 인문학과 철학을 구분하지 못한다. 소위 인문학 강연을 하는 사람들조차 이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하므로 과학자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철학philosophy과 인문학humanitas은 그 뿌리가 애초부터 다르다. 철학은 플라톤을, 인문학은 이소크라테스를 뿌리로 둔다. 전자는 주장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로고스를 특징으로, 후자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교양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철학과 인문학은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철학은 행정상의 이유로 인문학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두 분야는 여전히 다르며, 엄연히 다른 두 분야가 혼동되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철학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고전 작품이나 영화 등을 감상하고 그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나누는 정도의 활동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지만 철학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오직 과학만이 진리를 탐구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이는 명백히 오해이며, 이 오해는 과학과 철학의 이분화를 낳는 폐해의 근원이다.

 

철학은 그 출발부터 지금까지 객관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활동이다. 신화에서 왜 철학이 갈라져 나올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라! 비록 물리학, 화학, 사회학 등이 철학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여전히 철학은 이 개별 과학들이 일차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자유의지', '인격', '인과성' 같은 개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과학은 윤리적인 문제들을 일차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예로 들면, 이는 형이상학의 대표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곧 과학이 전혀 기여할 수 없는 문제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양자역학이나 신경과학은 철학자에게 실재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제공해주며, 이를 무시하고는 경쟁력 있는 형이상학 이론이 될 수 없다(베르그송의 앨랑 비탈 개념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비결정성에 대해 물리학자가 설명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비결정성이 곧 의지의 자유를 보장해주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유에 대한 개념 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행위 주체의 통제력이 자유로운 행위의 전제 조건이라고 한다면, '행위 주체', '통제력' 등이 규정되어야 한다. 왜? 과학은 '행위 주체'를 그 탐구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관찰되지 않는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따라서 '행위주체'라는 개념은 허구이다."라는 주장을 물리학자가 한다고 해도 이 주장의 진위 여부는 실험이나 기존의 물리 법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추론되는 명제가 아니다. 즉, 이 명제는 형이상학적인 명제(선험 명제)이지 과학적 명제가 아닌 것이다.

 

 

철학의 분과인 형이상학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추구한다. 어떻게 보면 과학에게 철학은 아버지인 셈이다. 로고스 혁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싫든 좋든 아버지를 닮을 수 밖에 없다. 철학과 과학, 이 둘은 같은 주제에 대해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문제는 각자가 맡을 수 있는 문제의 영역이 무엇인가,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영역 배분의 문제일 것이다. 과학자들은 가령, 벤야민 리벳 실험 같은 경우, 실험을 하지만, 그 실험의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개념들을 규정해야 하며, 개념들을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근거 역시 필요하다. 이런 작업은 철학자들이 맡고 있다. 리벳 실험의 결과가 곧 "우리에게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결론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 결론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 '자유의지가 있다' 등과 같은 개념 및 표현에 대한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신경과학자 가자니가가 "윤리적인 뇌"에서 '자유의지'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이 철학자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언급하는 부분을 눈여겨보라.

 

과학적 지식을 우리가 습득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혹은 다루지 않아도 되는 문제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 개념 규정, 객관적 기준의 문제(가령, 과학과 비과학의 기준, 동일성의 기준 등), 윤리적 문제, 추론의 타당성 검토 등이 그 영역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윤리학자이자 정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이 책은 단순한 인문학 도서가 아니다. 비록 입문서의 성격이 있지만, 도덕적 옳고 그름의 객관적 기준을 탐구하는 철학 도서이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문학과 철학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이 우리 현실이다.

 

철학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재 바로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과학이 맡을 수 없는 문제 영역을 철학이 감당하는 것이 옳고, 철학의 문제 영역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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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승현준 | 커넥톰, 뇌의 지도 | 신상규 역 | 김영사

 

글_ 최성일 (과신대 정회원)

 

 

5년 전 인간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이후, 항상 뇌에 대한 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이 책이 첫 책이었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의 역사를 시간 순서로 잘 설명했고, 현재 뇌과학의 상황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큰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큰 그림은 희망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쉽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희망적인 것은 뇌의 신비를 좀 더 알 수 있게 되고, 정신질환의 근본적 치료법이 열릴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쉬움은 커넥토믹스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는 것이었고(21세기 말이 되어야 뇌의 지도, 즉 커넥톰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커넥톰의 작용 메커니즘을 밝히는 커넥토믹스의 완성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염려가 되는 것은 이 미래의 기술을 믿고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신체를 냉동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은 케빈 켈리의 “통제 불능”을 읽은 후에 가졌던 느낌과 같았습니다. 또한 필자가 이야기 하는 오늘날 컴퓨터의 엄청난 연산능력으로 완성될 커넥토믹스는 19세기의 라플라스의 악마를 연상시켰습니다. 전자현미경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뉴런의 연결 지도가 완성되고, 뉴런들이 각기 어떻게 연결되어 기억, 이해, 감정(사랑) 등등을 일으키는가 하는 알고리즘이 커넥토믹스에 의해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기억을 마음대로 업로드/다운로드할 수 있고, 또 조작도 할 수 있고, 기능을 향상 시킬 수도 있을까요? 과연 사람의 생각, 또는 의식, 또는 영혼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과연 한 사람의 과거의 생각, 현재의 생각, 미래의 생각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의식 또는 영혼이라는 것은 물질에 종속된 것인가요?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2007년 한 사람의 유전자 지도(genome)가 완성이 된 후, 유전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크리스퍼 가위가 발명되어 유전자 조작이 꽤 자유로워져서 유전자 수준에서 질병을 미리 예방하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일반인들인 우리는 이런 과학기술들만으로도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게놈은 커넥톰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머리 밖에도 우주가 있고, 인간의 머리 안에도 그에 못지않은 광대한 우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1입방밀리미터의 뇌 지도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이미지 정보의 양은 1페타바이트(1015 바이트)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커넥톰 수준은 길이가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의 커넥톰을 완성한 정도입니다. 이것만으로도 12년 이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쥐와 고양이, 침팬지를 거쳐 인간의 커넥톰을 완성하려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저자는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 21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인간 커넥톰이 완성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직경 30센티 안에 천억 개의 뉴런(신경세포)으로 되어 있다... 길이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은 300개의 뉴런으로 고작 7000개의 신경계 연결망을 가지지만, 그 지도를 그리는데 12년 이상 걸렸다. 당신의 커넥톰은 1000억 배 이상 크며, 당신 게놈의 염기 수(뉴클레오티드 수)보다 100만 배 정도 많은 연결을 가지고 있다. 커넥톰(뇌의 지도)에 비하면 게놈(유전자 지도)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1입방밀리미터에는 10억 개의 시냅스가 밀집돼있다."(커넥톰, 뇌의 지도, 승현준, 김영사, 12, 22, 95쪽)

 

저자는 인간의 유전자 지도와 뇌의 지도는 또한 가소성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비록 조작을 할 수는 있지만, 유전자는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고, 뇌의 지도는 성장하면서 뉴런과 뉴런의 연결이 경험과 학습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뇌의 가소성을 기반으로 저자는 커넥토믹스가 완성되면 인간의 사고, 감정, 기억 등등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뇌의 가소성의 4가지 형식인 재가중(reweighting), 재연결(reconnection), 재배선(rewiring), 재생성(regeneration)을 정신 활동에 관여하는 뉴런과 시냅스들의 움직임이라고 설명합니다. 일단 커넥톰이 완성되면 이 네 가지 R을 바탕으로 뉴런들 간의 연결인 커넥토믹스를 파악하여 정신활동을 더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책의 내용이 워낙 전문적이고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세세한 내용 정리는 제 입장에서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까지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자를 21세기의 기계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세 가지 비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저자가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진술이 추측과 기대를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한 인간 커넥톰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하지만, 미래 기술에 대한 추측과 기대라는 불안한 기초 위에 “인체냉동술”, “업로딩” 등에 의한 영원한 젊음, 영생을 얻어서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마치 인류가 당연히 걷게 될 방향으로 단정하는 것 같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좁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 저자는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또 다른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끝내고 있습니다. 그 외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문학의 대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이야기한 인간의 정신의 활동이 뉴런과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와 화학신호들의 상호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 의식의 문제를 추적했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사고 과정에 관여하는 이러한 물리적 메커니즘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의식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모듈 – 예를 들면 할머니 모듈 – 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모듈의 존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통찰이라도 제시할까? 아니면 의식의 본질에 관해서 우리를 여전히 깜깜이 상태로 놓아둘 것인가? 뇌가 뉴런과 신경교(膠)로 구성되었다는 지식이 의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GEB, 471쪽)

 

수학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무의미한 형식체계로부터 창발하는 인간 자의식을 이해하려고 했던 호프스태터의 관점에서 보자면, 저자는 너무 컴퓨터의 기계적 연산능력을 과신하는 것 같습니다.

 

파스칼을 상당히 좋아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파스칼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기보다는 일부만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이용하는 것 같아 섭섭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학의 천재였던 파스칼이지만,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느끼며 여생을 살았었을 텐데, 그런 것까지 뇌 속의 전기신호와 화학신호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끝으로, 이 책은 커넥토믹스의 미래를 너무 핑크 빛으로만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활동의 신비에 대해서 더 많이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커넥톰과 커넥토믹스라는 개념을 알기 전에도,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하고,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하고, 책을 읽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의 메커니즘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정확히 나타낼 수 없는 지금도 우리는 아주 멋지게 그런 정신활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커넥톰과 커넥토믹스가 빨리 발전해야겠지만, 커넥토믹스가 없더라도 정신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너무 미래에 치우쳐서 현재의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신경학자로서 자신이 아끼는 분야의 미래를 극한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고 또 그래야 이 분야가 주목을 받고 활성화될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저 자신은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즐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종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하신 일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몰라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신비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신비한 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뇌피셜적 독후감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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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6. 진화는 "위기에 처한 이론"입니까?

 

진화는 "위기에 처한 이론"입니까?
Is evolution a "theory in crisis"?



진화를 반대하는 이들은 종종 진화를 위기에 처한 이론이라 칭하지만, 이는 좋게 말해서 오해일 뿐입니다. 

 

 

서론

 

진화 과학의 반대자들은 종종 진화를 "위기에 처한 이론"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일반적인 교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는데, 그들 중 39 퍼센트는 과학자들이 인류는 시간에 따라 진화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반대한다고 믿습니다. 응답자들이 백인 복음주의자들에 한정될 때, 그 숫자는 49 퍼센트까지 올라갑니다. 하지만 믿음은 실제로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과학자들 스스로가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땐, 그들 중 99 퍼센트는 인류는 시간에 따라 진화해오고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진화이론의 핵심 사항인 공통조상 (인간 포함)에 대한 논쟁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생물학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안정된 배경을 제공해줍니다.

 

그러나 물론 논쟁이 되고 있는 현대 진화이론의 요소들이 있습니다(이것이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이지요). 그러한 논쟁의 한 좋은 예는 2014년 Nature 지에 실린 저명한 논문 "진화이론은 재고를 필요로 합니까?"입니다. 이 논문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심하는 저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시간에 따른 진화적 변화의 복잡하고 다양한 방법들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만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기독교 교파 간의 의견 충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핵심적인 프레임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도 사람들은 세부적인 어떤 부분에 대해 의견을 달리할 수도 있고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내부 논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몇 진화 "분파"를 분류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다윈주의(Neo-Darwinism)

 

진화 이론 내부에서 불일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용어들이 다양한 그룹에서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과 그것들이 종종 부주의하게 정의된다는 점입니다. "신다윈주의"라는 용어는 100년이 넘도록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이 용어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사용되는 것인지, 혹은 일부 과학자들이 오늘날 변호하는 특정한 포지션을 명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인지 항상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벌써 이 용어를 폐기했습니다. 

 

현재 "신다윈주의"가 사용될 때는 보통 "환원주의적" 혹은 "유전자 중심적" 진화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소소한 적응에서부터 새로운 종의 발달에 이르는 모든 진화적 변화는 단순히 어떤 개체의 DNA 변화로써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에 따른 대립 유전자 빈도 변화"로 표현되곤 합니다 (대립 유전자는 한 유전자의 서로 다른 버전이고, 유전자는 DNA의 특정한 부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대진화는 더 오랜 시간에 걸친 소진화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의 가장 저명한 지지자는 리처드 도킨스인데,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확장된 진화적 종합(Extended Evolutionary Synthesis) vs. 근대적 종합(Modern Synthesis)

 

오늘날 일부 과학자들은 확장된 진화적 종합(EES)이라 불리며 근래에 지지세를 넓히고 있는 이론을 지지합니다. 그들은 변이가 유전자의 돌연변이로부터 전적으로 비롯되고, 선택은 단지 유전자 빈도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유전자 중심의 발상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대신 어떻게 개체가 환경과 함께 공동 구성과 공동 진화를 거치는지를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유전자 단위가 아닌 개체 단위가 진화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관점에서도 무작위적인 유전자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은 진화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계속해서 하게 되지만, 그 외에 다른 요소들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다른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발생 편향: 개체의 배아 발생은 그들의 형태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방식을 어떻게 편향시키는가.

  2. 표현형의 가소성: 개체의 모양과 기능에 유연성을 초래하는 생리학적 다양성

  3. 적합한 환경 구성: 개체가 그들의 환경과 분리되어 살지 않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적합한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생존 기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4. 유전자 외적인 유전: 유전의 일부 측면은 DNA 구성 요소의 수준에서 작용하지 않으며, 예를 들어 DNA packaging에 관여하는 단백질들을 수정하거나 심지어 문화적 진화를 통해 사회적 행동을 전달할 수 있다.

 

EES 생물학자들은 진화 이론에 대한 이러한 추가가 그 이론 자체의 명칭을 수정할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다른 진화 과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윈 이후 진화 이론에서 일어난 이러한 발전을 포함한 다른 발전들을 포괄하여 광범위하게 “근대적 종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를 선호합니다. 이 명칭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지만, 오늘날 그것을 사용하는 과학자들에게 진화는 단순히 변이와 선택의 일반적인 범주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명칭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 이론에 대한 "확장"보다는 이 명칭 아래에서 이러한 추가적인 요소에 대한 특정 메커니즘에 대해 연구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그룹들 중 어떤 그룹도 공통조상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중대한 변화가 진화 이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조금 바꾸는 데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일반 대중과 더불어 특히 기독교인들이 진화 과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오도되어 온 것 같아 우려하고 있습니다. 진화(공통조상 포함)가 일어났는지 의심하는 생물학 박사 출신의 과학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오도와 오해가 (때때로 선한 의도를 가진) 기독교 지도자들이 수사적 효과를 위해 남용하기 때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진리에 충실해야 하며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야만 합니다. 진화과학은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것이 발견되어지고 있으며, 세부적인 것들에서는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위기에 처한 이론은 아닙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강상훈 교수 (미국 베일러대학교 생물학과, 과신대 자문위원)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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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5. 현대 과학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할까요?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현대 과학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할까요?

Does modern science make miracles impossible?

 

 

하나님은 자연세계에서 한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물리적 세계에서 규칙적인 패턴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 패턴을 벗어나는 방식으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규칙적인 패턴을 과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이나 과정(중력이나 광합성과 같은)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패턴을 벗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통 기적(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이라고 부릅니다.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기적을 믿으며,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기적뿐만 아니라 창조 질서의 규칙적인 패턴에도 관여하신다고 믿습니다.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기적, 표적, 이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 사건은 예언자와 사도들에 의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일어났습니다. 성경의 기적은 단순히 구경꾼의 놀라움만을 위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목적을 위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기적은 신학적인 맥락 안에서 항상 발생합니다.

 

일부 무신론자들은 불합리한 생각과 기적과 같은 해로운 미신으로부터 사회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과학 자체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기적이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법칙은 불변의 확고한 경험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사실 자체의 본성에서 볼 때, 기적을 반대하는 증거는 경험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가능한 것처럼 도처에 널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무신론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근대 유신론자들 중 일부도 과학은 기적을 반증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를 "비신화화"하려는 시도로 유명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ph Bultmann)은 1961년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전등과 무선을 사용하고 근대 의학과 외과적 발견을 사용하면서, 그와 동시에 신약성서의 영과 기적의 세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기적의 이야기를 제거해버림으로써 불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기독교가 더욱 현대사회의 구미에 부합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흄과 불트만이 옳을까요? "자연법칙"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주류 과학을 수용한다면, 반드시 성경의 기적을 거부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하신 역사

 

기적은 자연현상이 일상적으로 기능하는 배경에 반하여 발생합니다. 성경은 자연계에서 직접적이고 일상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4:10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그는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신다." 이 구절의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가리키고, 두 번째 부분은 물이 그 자체의 자연적 성질을 통해 흘러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시편 전체의 관점은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것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 사이에서 유동적으로 변합니다. 그러한 이중적인 묘사는 구약성경 전체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패턴을 계승하고 있으며,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보존되고 있음을 명백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히 1:3), 그리고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의 강력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을 묘사할 때, 성경은 자연현상의 규칙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인지에 따라 쉽게 관점을 전환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연적 사건과 초자연적 사건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현대적인 구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자연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Nature is what God does)

 

중세 시대 기독교 사상가들은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질문들로 씨름을 해오면서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가 생겨났습니다. 자연의 규칙성이 하나님의 보존하심을 나타내는 경우, '변덕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신뢰할만하고 일관적'이라고 기대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의 규칙적인 움직임은 "창조주의 습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자연법칙"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한 신학적인 깨달음은 현대과학이 부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규칙적인 패턴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외에도, 현재 과학의 관점을 무시하는 듯한 기적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다.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에 썩어짐을 당할 과정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예수님이 어떠한 자연적인 방법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가능성은 적어집니다. 오히려 과학은 예수님이 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 그 사건은 하나님의 평범한 섭리와 상관없이 일어났음이 틀림없거나, 그 섭리를 넘어서는 것이었거나, 아니면 그 섭리에 반하는 것이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기적과 진화적 창조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의 진화 생물학자인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Simon Conway Mo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에 놀라지 않지만, 그 기적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에 놀랍니다.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을 찾아온다면 당신은 기적 말고 달리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기원 문제에서 만큼은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기적을 행하셨는지에 따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입장을 달리합니다. 젊은지구론자들은 하나님이 일련의 기적을 통해서 6일 동안 지구와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봅니다. 오랜지구론자들은 주류 과학에서 말하는 창조의 긴 역사를 수용합니다. 그러나 자연세계의 특징적인 부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 긴 역사에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개입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지적설계의 지지자들은 자연법칙은 생명의 발달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성경 속 하나님과 같은 외부의 지적 존재가 개입했다고 호소합니다.

 

반면,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하나님이 과학적으로 기록될 수 있는 규칙적인 패턴을 이용하여 역사를 통해 창조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기적의 개념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이 우리들의 지식의 틈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채울 수 있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설명은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하나님을 "잘 해명할" 위험이 없습니다. 또한,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맥락이 기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수 백만 년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의 신학적인 목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종합하면, 성경적 증거와 과학적 증거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든 규칙적인 인과관계를 사용하도록 선택하신 하나님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자연법칙은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제한할 수 없습니다.

 

자연법칙은 단지 인간이 묘사한 자연에서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물리법칙의 창조자요 보존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실 때 그 법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분명히 갖고 계십니다. 기적은 단지 하나님이 평소와 다른 패턴으로 역사하기를 선택하신 경우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기적은 항상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놀랍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이오로고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나라를 증거 하는 기적뿐 아니라, 창조를 보존하기 위한 규칙적인 패턴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가리키는 주류 과학을 모두 수용합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최승언 교수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과 명예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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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중앙교회 정삼희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이번 과신대 정회원 인터뷰에서는 과신대 자문위원이자 신도중앙교회를 맡아서 목회하시는 정삼희 목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이야기부터 교회를 위한 과신대 사역 아이디어까지 많은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일시: 2019. 11.6

장소: 신도중앙교회

 

 

Q: 과신대 회원에게 목사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제 이름은 정삼희입니다. 은평 뉴타운에 있는 신도중앙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한 지 6개월 됐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는 분당 만나교회에서 부담임 목사로 사역했었습니다. 본래 저는 수의학과 출신입니다. 수의학과 4학년 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아서 감리교신학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할 기회도 있었고요. 제 관심 분야는 기독교 영성훈련입니다. 소위 '관상기도'라고 하는 영성훈련으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교회 사역을 하면서는 주로 청년 사역을 많이 했습니다. 아주 최근까지 교구 사역보다는 청년 사역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주로 했던 사역은 또 선교 사역이었습니다. 주로 해외선교 중심으로 사역을 했고, 그러다가 선교적 교회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과학을 전공했는데 그동안 창조과학을 통해 자료를 접하다가 청년들에게 강의를 해왔습니다.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이 전부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선택했던 거죠. 그런데 늘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죠. 하지만 현장 목회자이니 혼자서 자료를 찾아보는 것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회가 주어지면 창조과학에서 제시하는 몇 가지 모델을 가지고 교회에서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잘 듣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해오다가 우종학 교수님의 '무크따'를 읽고 나서, '아, 이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현장 목회자가 사용할 수 있겠다 싶었죠. 이 책에 근거해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우종학 교수님께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일을 해 주길 원했는데, 먼저 이런 작업을 해주셔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크리스천 과학자가 용기 있게 창조과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 주니깐 너무 좋았죠. 그렇게 페이스북 메시지 하나로 지금까지 관계가 이어져왔습니다. 그렇게 과신대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우종학 교수님께서 목회자들도 과신대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면 교회들에게 도움이 될테니 함께 해 달라고 부탁하셔서 이렇게 자문위원으로 섬길수 있게 됐습니다. 

 

 

Q: 과신대가 앞으로 교회를 위한 사역, 교회와 함께 하는 사역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과신대가 좋은 파트너를 만나면 좋겠습니다. 전략적으로 다양한 교회와 접촉을 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만나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인터서브라는 단체와 만나교회 선교부가 Life as Mission School이라는 커리큘럼을 하나 개발했어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라는 책을 가지고 선교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8주 간 강의와 토론을 통해 교회 성도들에게 교육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성경을 기반으로 선교적 해석학을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만나교회에서 파일럿으로 해봤는데 선교에 관심이 있는 장로들에게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선교단체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과신대에서도 교회를 위해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가서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죠. 예를 들면, 우종학 교수님의 강의 영상과 교재를 가지고 교회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요즘은 다양한 콘텐츠와 자료들이 있으니 지역 교회에서 이런 자료를 활용해서 교육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습니다. 

 

 

Q: 저는 과신대의 훌륭한 콘텐츠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가려면 결국 성경을 바르게 읽고 이해하는 작업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과학의 내용을 함께 이야기하는 거죠.

 

A: 네, 맞습니다. 교회에서는 과학 이야기보다는 성경해석 이야기를 해야 더 좋습니다. 창조과학적 성경해석에 대한 대안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우종학 교수님을 매 번 모실 수 없으니 대안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야겠죠. 과신대에 와서 배우려는 분들은 충분히 열정이 있는 분들이니 이분들에게 교회에서 워크숍을 이끌 수 있도록 지도해주면 어떨까 합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것도 좋습니다. 교회마다 교회학교 자료에 관심이 많으니 도전해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창조과학 특강에 관심이 많은 건 PPT나 동영상 때문입니다. 학생들에게 창조과학의 진정성이나 팩트 체크는 별 관심이 없고,  '공룡 이빨에서 뭐가 나왔는데, 그걸 분석하니깐, 이런 거더라' 이런 자료화면이 나오면 다 그냥 믿어버리는 거죠. 그렇다면 과신대에서는 어떤 미디어와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접근할 거냐가 중요합니다. 사실 아이디어만 나오면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있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게 연결만 잘해주면 됩니다.^^

 

페이스북만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많이 보는 언론에도 과신대의 소식을 전하면 좋습니다. 다양한 시도를 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일잘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단 언론지도 있고 인터넷 신문사도 있으니 목사님을 통해 소식을 알리는 것도 좋습니다. 의외로 사람들이 과신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잘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과신대는 제 속도로 잘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한 단계 더 점프를 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말씀드립니다. 목회자 자문위원들은 교회의 공감대를 얻고 일반 성도들에게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과학 정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과학 기사가 종교란에 나오는 것은 보지 말라고 말합니다. 영역을 잘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 위해서죠. 목회자들을 위한 기초 과학 이야기도 좋고요. 

 

 

Q: 처음 드렸어야 할 질문인데 이제야 드리네요. 목사님의 목회 철학이라든가 목회의 방향성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세요. 

 

A: 저희 교회 표어가 "일상에서 예수 따라 사는 사람들, 마을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개인으로서의 교회와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표어에서 말한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모두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잡았습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일상에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가지고 살자." 저희 교회는 빚이 많이 있는데, 그럼에도 지역에 있는 어린이 센터에 선교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이 교회가 사라질 때, 동네에서 누가 아쉬워할까?' 아쉬워하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교회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 점에서 공공신학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교인들에게 제가 진보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최대한 성경 본문을 통해 풀어내려고 해요. 그러면서 저는 아주 오래된 콘셉트이지만, '신학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교회의 개혁은 신학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특히 교회론과 구원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 개혁은 윤리적 개혁이 아니라고 봐요. 중세 교회의 면죄부가 그렇게 타락의 상징이라고 말하는데, 면죄부는 윤리적인 타락이 아닙니다. 면죄부를 지지하는 신학 구조가 있었던 거죠. 연옥이라는 시스템이 있었고, 행동중심의 구원론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한국교회를 자꾸 목회자와 공동체의 타락이라는 관점으로 보고, 윤리적 갱신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 우리는 그런 구조를 갖게 되었는지를 봐야죠. 신학의 쇄신이 없이는 윤리적 쇄신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어떤 분은 제가 할머니, 할아버지들 앞에서 너무 어려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양심을 걸고 정말 성경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에도 계속 성경은 영혼뿐 아니라 몸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고 설교합니다. 목회를 해보니깐 이런 이야기는 한 3년은 반복해야 성도들이 이해하더라고요. 이제 목회자는 정직하게 성경을 읽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죠. 그래서 교인들이 정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시대적 눈으로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한국교회를 개혁해야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속한 한 교회를 잘 목회하면 그게 한국교회를 개혁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와 같이 작은 교회들이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하고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누면 그것이 교회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세요. 요즘 젊은 세대가 교회를 많이 빠져나간다고 하는데, 교회가 어떻게 준비하고 대비하면 좋을까요? 

 

저희 교회에 찬양 인도를 하는 집사님이 계세요. 그분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여기에 계신 분들에게만 초점을 맞춰서 찬양을 선곡하지 말고, 앞으로 여기에 올 분들을 상상하면서 선곡을 해주세요." 저도 힘들기는 하지만, 여기에 계신 분들에게만 설교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이 자리에 와서 앉아야 할 사람들을 위해 설교를 해야 실제로 그런 분들이 오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감각이 선교적 감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욕도 많이 먹어요.^^  

 

저희 교회는 빚이 많아요. 그런데 또 요즘 젊은이들은 헌금을 잘 안 하려고 합니다. 저도 고민이 많고 겁이 나죠. 그런데 나중에 제가 저를 돌아봤을 때, 어떤 것 때문에 후회를 할까, 생각해 봤어요. 제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목회를 하다가 실패를 했을 때, 그럴 때 오히려 후회가 적겠죠? 타협하느라 제가 하고자 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저는 소명대로도 못 살고, 교회는 교회대로 망가질 거라고 봐요. 소명대로 살아야 나중에 망하더라도 교인들도 자신의 소명대로 살지 않을까요? 

 

저는 후회 안 하며 목회 하고 싶어요. 실패하더라도 소신껏 목회하고 싶어요. 물론 지혜롭게 목회합니다. 점심 이후에는 교회 원로들과 늘 같이 차를 마십니다. 다 아버지 어머니 같은 분들이니깐요. 하지만 방향은 분명하게 고수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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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회원의 밤

 

2019 과신대 회원의 밤에 초대합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그동안 과신대를 후원해주시고 응원해주신

정회원 여러분을 모시고

함께 격려하고 감사를 고백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오셔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 따뜻한 시간을 함께 만들어 주세요.

 

일시: 2019.12.5(목) 7-9 pm.

장소: NPOpia 500호 (낙원상가 5층)

(오시는 길: https://www.scitheo.org/257)

 

회비: 1만원 (특별 후원금 환영 ^^)

입금 계좌: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프로그램: 맛있는 샌드위치와 함께 하는 다과, 2019년 사역 나눔, 선물 추첨 이벤트 등

 

* 참가 신청: https://bit.ly/2CArS7A

(원활한 진행을 위해 11월 30일까지 회신 부탁드립니다.)

 

문의: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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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무국 소식 201911

 

10월에도 과신대 행사가 풍성했습니다.

과학신학을 연구하는 국내 단체들이 연합해

'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을 진행했고

 

과신대 <기초과정II> 5기 과정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번 기초과정은 멀리 대구, 경산, 대전에서 올라오신 분들이 계셔서 더욱 특별한 수료식이었습니다.

 

10월 22일에는 제16회 콜로퀴움이 있었습니다. 

백소영 교수님께서 과신대를 위한 페미니즘 특강을 해주셨는데,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앞으로 과신대에서도 여성분의 활약과 참여를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지난 10월 17일에는 과신대 교사 팀장으로 섬기시는 윤세진 선생님께서

신일고등학교에서 "성경과 과학에 대한 색다른 관점"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진행해주셨습니다.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집중해서 강의를 들었다고 하네요.

앞으로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자리가 자주 마련되면 좋겠네요. 

 

 

  심왕찬 선생님의 유가족을 위한 주택자금 모금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많은 분이 참여해주셔서 도움의 손길을 보태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목표액 3,000만원이 멀게만 보였는데

현재까지 2,700만원이 모였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정성을 유가족에게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모금 계좌는 계속 열어두겠습니다.
모금 안내: https://www.scitheo.org/425

 

어쩌다 보니 계속 돈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연말이 다가오니 사무국에서도 내년 예산안과 행사 기획안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분이 후원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후원이 넉넉치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 기존 정회원분들에게

후원금 증액 요청을 드렸습니다. 

기존 후원금에 5,000원씩만 증액해주신다면

내년 과신대 사역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작은 정성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 증액 안내: https://www.scitheo.org/438  

 

사무국에서 2020년에 함께 일할 사무 간사(파트타임)를 모집합니다.

기본적인 행정 업무를 맡아주실 분이면 됩니다.

(혹시라도... 영상 편집이 가능하다면... 너무 좋겠습니다...^^)

 

 

과신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1. 자비하신 하나님, 인간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지구를 위해 기도합니다. 기후변화로 인하여 다양한 생명 종이 사라지고 빙하가 녹으면서 생태계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간의 자리까지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자연세계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힘을 내고 관심을 갖게 해 주십시오.

 

2. 은혜의 하나님, 기술과 과학이 발달할수록 생명과 공동체의 소중을 알게 하시어, 우리 주변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없는지 돌아보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이 땅에 베푸시어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선한 능력에 휩싸여 어두운 시대에 밝은 등불이 되게 해 주십시오.

 

3. 지혜의 영이신 하나님, 한국교회과 기독교가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고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하셔서 주님이 온 우주의 주인이며 통치자이심을 선포하게 하옵소서. 반쪽짜리 믿음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과 영성으로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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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왕식 교수 인터뷰] 자연주의 철학과 종교의 관계

 

*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 장왕식 교수님께서 과신대에 자문위원으로 함께 활동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과신대 기자단이 장왕식 교수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인터뷰이: 장왕식 교수

인터뷰어: 백우인 팀장

 


과신대(과):  얼마전 교대에서 교수님께서 참여하신 학회가  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최근 연구동향과 관심분야에 대해 듣고싶습니다.

장왕식(장):   저의 최근의 관심 분야는 “자연주의 철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철학과 종교에 관한 한, 최근 세계의 주류는 자연주의(naturalism)입니다. 여기서 자연주의란 인간의 문제와 그에 대한 해답을 자연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자연주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종교와 관련해 그 대표는 셋입니다. 도가의 “무위자연설”과 스피노자의 “실체로서의 자연”, 그리고 서구의 근대주의에서 발달된 “과학적 유물론”입니다. 이중 과학적 유물론은 유전자 환원주의, 혹은 신경중심주의로 불리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전자 환원주의나 신경과학주의는 하나의 과학으로서는 그럴싸한 설명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들은 인간의 의지와 자유, 그리고 인간의 자기의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치명적 한계를 지닙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보다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해야 하는 하나의 종합 학문으로서는 부적절합니다. 저는 자연과학과 연계된 자연주의의 이런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철학적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을 앞으로도 지속할 예정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화이트헤드, 스피노자, 들뢰즈, 동아시아의 종교철학 등을 계속 연구하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동시에 신학적으로는 이런 다양한 학문적 입장들이 어떻게 기독교의 신론에 어떻게 부드럽게 조화될 수 있는지의 과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과: 신경중심주의 혹은 과학주의가 종교에 위협이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운데 신학생을 위한 과학콘서트를 개최하셨습니다. 기획의도나 이유를 여쭙니다.

장: 훌륭한 신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인문학도가 되어야 하며, 훌륭한 인문학도는 좋은 자연과학도가 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평소 생각입니다. 우선 최근 신학생들 가운데 세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자연과학 운동에 무지한 학생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물론 일부 신학생들은 4차 산업 혁명과 AI의 발전 그리고 그것에 의해 비롯될 사회의 급진적 변화 및 거기서 비롯될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그런 도전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몰라서 매우 당황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학생들이 접하는 정보는 너무  폭이 넓기에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적인 한계를 경험하고는 아예 대안 마련을 포기한 채 그저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생각에 신학생들은 우선 다양한 학문을 접하면서 인문학적 폭을 넓혀가야 하는데, 이는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다양한 자연과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인문학과 과학은 상호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학생들은 위한 과학콘서트를 열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과: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시는 교수님이 계셔서  학생들에게 유익한 장이 되리라 기대됩니다.  과정사상이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장: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관련해 가장 적절한 학문적 방법론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난 수 십 년 동안 가장 이상적인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 중의 하나가 과정사상입니다. 특히 하버드의 철학 교수였던 화이트헤드에게서 시작되었던 과정철학은 일부 기독교 지성인들에 의해서 과정신학으로 재탄생하였는데, 그 신학은 본래 수학자이자 자연과학도였던 화이트헤드에게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신학이었기에 종교와 과학을 대화시키는데서 가장 적합한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과정신학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여타 인문학을 접목시키는데 있어서도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과정철학이 하나의 종합적인 학문으로서 일종의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과정신학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기초한 우주론과 양자역학에 기초한 새로운 시-공간 이론, 그리고 여러 형태의 첨단 과학이론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면서 오늘의 세속적 사유에 종교적 대안을 제공하려는 시도를 계속해 왔습니다. 특히 그것이 주장하는 신에 관한 주장들은 기독교의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동아시아 사상과도 대화할 수 있고 나아가 최근의 과학적 유물론이나 환원주의가 보여주는 여러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들을 지니고 있어서 매우 이상적인 신학의 하나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과: 말씀을 들으니 오늘날 과학시대에 꼭 필요한 사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신대가 점점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고 있는데 과신대 사역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드립니다.

장:  과신대가 창립된 이래, 최근까지 과신대가 보여 온 학문적 방향과 그 성과에 대해 먼저 찬사를 보냅니다. 과학과 신학이 항상 갈등할 필요 없이 얼마든지 부드럽게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평범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과신대는 우선 이런 무지를 깨우치는 데서 일차적으로 공헌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과신대의 사역이 앞으로도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확장을 지속해 나가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과신대가 다양한 학문들과도 대화하는 목표를 지향했으면 합니다. 과학이란 본래 자연과학이라는 협의의 뜻에 국한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물과 인간 그리고 그가 경험하는 사건을 모두 분석해 보려는 학문적 야심을 지닐 때 더욱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학문적 관심사만이 자연과학과 신학이 지닌 좁은 안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과신대 사역이 더욱 활성화되어 한국 교회의 변혁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