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힘을 보태주세요.

과신대 후원에 조금 더 힘을 보태주세요.

 

지난 3년간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한국교회의 시대적 요청과 과학과 관련된 기독교 학문의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해 왔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분의 관심과 사랑 속에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작년에는 종로 낙원상가로 사무국을 옮겨 편안하게 업무를 볼 수 있는 사무공간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아직 전임 간사를 채용하고, 중요한 사업을 진행하기에는 재정이 너무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앞으로 과신대는 과학과 신학에 대한 좋은 글들을 모아 '과신대뷰'에 올리고, 교회학교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청소년들을 위한 교재를 집필하고,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 다양한 사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사역을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사무국 간사를 고정적으로 채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월 100여만 원 정도의 재정이 추가로 더 필요한 상황입니다. 

 

과신대는 정회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입니다. 과신대를 지지하는 분들의 후원과 참여는 한국교회에 지성의 제자도를 확산시키고 올바른 신앙과 건강한 과학 지식을 전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정회원들의 후원 증액을 요청합니다.

 

지금까지 과신대가 다양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과신대를 지켜봐주시고 후원해주신 정회원들의 후원 덕분이었습니다. 이제 과신대가 2020년을 준비하며 더 열심히 한국교회 기독교를 향해 대안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정회원 여러분께서는 후원 증액으로 힘을 보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한 분이 5,000원씩만 후원을 증액해 주신다면 과신대에게 목표로 하는 금액을 충분히 모금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사회에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더 구체적으로 비추는 운동의 성과로 응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과신대 정회원 증액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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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 보내기 010-4333-4625 (최경환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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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전화 070-4320-2123 / 대표메일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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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은 이신론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창조과학은 이신론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글_임택규

 

제가 현재 근무하는 직장은 전력회사입니다. 캘리포니아에는 3개의 전력회사가 있는데, 제가 일하는 회사는 캘리포니아 중부에서 남부에 이르는 130,000 평방킬로미터의 광할한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의 넓이가 100,210 평방킬로미터이니까, 대한민국 국토보다 약간 더 넓은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캘리포니아주에 2개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샌디에고라는 도시의 바로 북쪽인 샌 오노프레라는 곳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는 몇 년 전에 폐쇄를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가동되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단 하나의 원전인 디아블로 캐년 발전소는 주정부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원전 가동 허가가 만료되는 2025년까지 완전히 폐쇄될 예정입니다.

 

강화된 환경규제에 맞춰서 태평양 해안가에 있는 많은 화력발전소들도 차례로 폐쇄되고 있고 그로 인한 전력 생산의 감소는 풍력이나 태양에너지같은 무공해 재생에너지를 통한 발전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저는 새로 개발되는 태양력 발전소에 송전시설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에 있는 모하비 사막은120,000 평방킬로미터를 넘어서는 광활한 면적에, 여름 최고 기온이 섭씨 54도에 달하며, 연간강수량은 250 밀리미터 미만입니다.  우리나라의 연평균 강수량이 약 1,250 밀리미터 정도이므로, 이렇듯 건조한 기후와 엄청난 일조량을 가지고 있는 모하비 사막은 정말 태양력 발전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태양력 발전소가 잘 찍혀 있습니다. 

 

 

사진 윗쪽 부분에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세 군데의 발전소는 태양광 발전소로 오해하기 쉽지만 태양열을 사용하는 발전소입니다. 거울이 반사시킨 태양빛을 집광타워에서 모아서 그 열로 물을 끓여서 터빈을 돌려서 전기를 생산합니다. 사진 아랫 부분 중앙에 크게 보이는 발전소는 햇빛을 잘 흡수하는 검은색을 띄기 때문에 태양열 발전소로 오해하기 쉬우나 저런 형태의 검은색 패널을 가진 발전소가 태양광을 이용하는 발전소입니다. 태양에서 복사된 빛 입자가 패널 표면에 닿으면 그 에너지를 흡수한 전자가 방출되는 현상을 이용해서 전력을 생산하는 형식입니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발표한 광전현상을 이용한 발전 형태입니다. 

  

이러한 발전소들은 당연히 송전시설을 필요로 합니다. 수십 마일 때로는 수백 마일에 달하는 송전시설 및 변전시설들 없으면 당연히 생산한 전력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지 이러한 발전소, 송전시설, 혹은 변전시설이 완공이 되면 그때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떠한 시설물(Asset)이 완공된다는 것은 그 시점부터 그 시설물은 공학적인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경제학적으로는 그 시점부터 재화를 창줄할 수 있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어떤 시설물의 건설을 완성한다는 것,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을 달성한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준공과 더불어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부정적인 현상도 있습니다. 바로 감가상각(Depreciation)이 시작된다는 것 입니다. 완공된 시설물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점 노후가 진행되고 잔존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보관하고 보수하며, 때로는 시설물의 이 부분 저 부분을 신품으로 교체해주지 않는다면 곧 그 시설물은 기능을 제대로 발현할 수가 없게 되버립니다.

 

 

근대과학이 태동하면서 이신론(Deism)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이신론적 신관은 과학적 결정론에 힘입어서 태동했습니다. 인류가 자연이 운행되는 법칙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면 인류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결정론이 발생했던 것 입니다. 이러한 결정론 속에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개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는 더 이상 요청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기적들은 우리의 정확한 계산을 틀리게 하는 귀찮은 변수에 불과하게 된 것이지요. 

 

자연을 기계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계의 구동원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기계가 미래의 어떤 시점에 어떻게 작동할 지를 충분히 계산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 기계가 우리 계산과 다르게 작동을 한다면 그러한 오작동은 자칫하면 대형 사고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설치하셨던 이 법적인 질서에 의해서 정교하게 작동하는 자연이라는 기계가 갑자기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확한 계산에 의한 예측을 빗나가게해서 끔찍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오작동의 변수일 뿐입니다. 이러듯 이신론적인 세계관 속에서는 하나님의 기적 혹은 능동적인 개입마저도 거부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신론은 근대적 의미에서 무신론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신론이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으로까지 연결되어 있지요. 이러한 이신론 혹은 무신론적 세계관은 현장에서 구조물을 축조하고 그것을 통해서 편익과 재화를 창출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엔지니어인 저에게는 굉장히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준공된 후에도 적절한 관리를 통해서만 시설물의 가치와 성능이 유지된다는 점을 매일매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회에서 진화론이 이신론적이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저에겐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이지요. 진화론은 물론 과학이론에 불과하지만 저는 그 속에 무한한 신적 개입(Divine Intervention)의 여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 개입하시고 피조물들을 보살피시며 사랑으로 다스리셔서 풍성케 하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섭리를 우리가 통찰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6천여년 전, 6일 창조 이후에 자연계에 아무런 개입이 없으셔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제겐 이신론적으로 느껴집니다. 만약 창조 이후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이 자연에 아무런 개입이 없으셨다면 이 자연은 과연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네 진입로를 재포장하고, 골목길에 설치된 가로등을 재정비하는 구청 토목과 직원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무로부터의 창조'와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는 모순이 아닙니다.

 

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에서 "과학이 본 자연, 신학이 말하는 자연"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시는 강태영 박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강태영 박사님과의 인터뷰는 2회에 걸쳐서 연재할 계획입니다.

 

일시: 2019.9.28 토요일 오후

인터뷰이: 강태영 박사

인터뷰어: 최경환 실장

 

Q: 안녕하세요. 과신대에서 처음 인사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A: 저는 대구가 고향이고 경북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창조신학을 공부한 강태영이라고 합니다. 석사 과정에는 기독론을 주로 공부했고, 박사 과정에서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신학과 과학은 서로 방법론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의 실재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신학과 과학의 대화는 창조의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Q: 창조신학은 구체적으로 신학의 어떤 분야에 속하나요?

 

A: 우선 저는 조직신학이 전공이고, 전통적인 분류로 따지자면, 창조론은 신론에 속하는 분야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묻기 때문에 창조론에 속하는 거죠. 그래서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으로 창조를 이야기하지만, 오늘날 창조신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 자연, 우주, 여러 용어로 부르더라도, 보편적인 하나의 실재를 창조라고 볼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됐다고 고백하고, 연구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행위야 말로 하나의 실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틀이 된다고 보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창조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학문에서는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학문들과 대화를 하면서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고백을 할 때, 사도신경의 첫 고백, 이것이 신앙의 영역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는데, 이 신앙고백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나는 믿음으로 고백하지만, 이것을 선포해야 하는데, 이 선포에서는 종교의 특수한 주장으로서는 의미가 없어지죠. 너무 주관적인 신앙의 고백이 되는 거죠. 그 점에서 끊임없이 다른 학문과 대화를 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는 거죠. 

 

신학사에서는 생태계의 위기가 창조신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소위 생태학적 창조론이라는 것이 일어났습니다. 이 창조세계는 그저 재료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는 물질세계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일 수도 없고, 인간의 삶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계는 인간과 함께 존재하는 공동의 피조물로서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이것 또한 하나님의 소중한 피조물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것이죠. 이런 인식을 통해 창조신학이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Q: 그렇다면 창조신학은 세속 사회에서의 학문의 결과를 수용하면서 신학을 적절하게 설명하려는 시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일반 학자들이 볼 때에는 창조, 창조주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학 쪽에서는 자신의 학문이 단순히 신앙고백의 차원이 아니라고 말하니 말이죠. 굉장히 어려운 작업인 것 같습니다. 

 

A: 각 시대 마다 신학은 늘 어려운 위기 혹은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푸스의 신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어떻게 다른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철학자들의 신과 대결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신이 단지 유대 종교의 신이 아니라 천지 만물의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 당시에도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어느 시대든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금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과학이 가장 어려운 대상이 된 것이죠. 

 

Q: 과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A: 저는 신을 논증하려는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과학이 경험적 학문이라고 한다면, 신학은 계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출발이 초월에서 시작하죠. 그래서 방향이 반대인 것 같지만, 신학도 종국적으로는 신자들의 경험에서 하나님을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로부터 신앙 교육을 받기도 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될 때는 신앙공동체에 속한 한 신자로서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의 경험이라는 것이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과학만 경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도 경험적 기초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은 수많은 실험과 검증의 과정이 있게 되지만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과학적인 검증은 아니지만 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공동적인 경험을 통해서 전승됩니다. 전승은 한 사람의 주관적인 망상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기능을 합니다. 

 

과학에서도 실증적으로만 그 성격을 규명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과학도 궁극적으로 사고실험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과학에서도 추론이 중요한 역할을 하죠. 직접적인 실험이 어려운 경우 모형을 통해서 하기도 합니다. 과학 안에서도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추상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학 역시 과학만큼이나 경험에 의존하고 있지만 계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죠. 또 계시라고 하는 것이 주관적인 것 같지만 종교 경험 전체에서 추론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이 시대에 창조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설계 논증'처럼 논증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이것은 논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합리적으로 선택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올 때, 합리성, 경험과의 조화, 이런 것들이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과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합성, 일관성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일단 자기 논리 안에서는 모순이 없어야 하죠. 이런 것들을 놓고 볼 때,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문학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연과학과 전혀 동 떨어진 특수한 지식은 아닙니다. 과학과 충분히 같이 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라고 부르고, 과학은 자연이라고 부르지만, 하나의 현실, 하나의 실재를 신학의 언어로 표현하고 진술할 때, 이 점에서 충분히 신학의 목소리를 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의 실재를 설명할 때, 자연과학의 설명만이 유일한 결론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의 실재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서로 보완할 여지가 있습니다.

 

 

Q: 예전에 제가 '혼돈으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글을 읽고 오히려 그것이 더 성서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러셀 교수님 같은 경우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어요? 

 

A: '무로부터의 창조'는 교리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성서에 직접 나오지는 않죠. 다만 성서 전체의 내용과 정합성의 관점에서 볼 때,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할 수 있죠. 교리라고 하는 것은 성서 해석의 결정체이지 않습니까. 교리는 성서의 어떤 특정 구절만을 가지고 만들면 안되죠. 적어도 4세기 이후에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나 자유를 해칠 수 있는 사상과 경쟁을 하는 상황이었죠. 전제 없는 우주.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걸 주장해야 했기 때문에 나온 교리입니다. 교리가 성서를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성서는 원천과 같습니다. 고갈되지 않는 원천이죠. 

 

무로부터의 창조, 혼돈으로부터의 창조,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서 해석상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고, 또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성서의 전승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두 개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모순을 일으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하나님을 진술하고 있는 부분에 있어서는 언어의 논리로 충돌하는 부분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순의 문제가 아니라 신성의 깊이를 우리가 온전히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이 세계의 우발성, 존재 자체의 우발성을 말해줍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유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창조, 세계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고, 하나님도 필연적으로 창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죠. 이 세계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피조물이라는 거죠.

 

또한 이 세계는 신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고대 우주 발생론에서는 신화 속의 신들이 투쟁해서 우주가 생겨납니다. 그럼 이 우주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고대 전쟁도 사람들이 싸우는 것 같지만, 신들의 전쟁의 그림자가 인간의 전쟁으로 생각했습니다. 신화적 세계상 속에서 이 세상은 두려움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무로부터의 창조는 이 세상에서 신성이라는 요소를 제거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 '모든 것을 다스리라.' 인간 이외의 모든 것들은 너희가 다스리라고 한 것이죠. 그 말은 인간은 그 무엇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지배되어서도 안 되는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것이죠. 

 

또 무로부터의 창조는 과학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세계가 신적인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이것을 관리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경험하고 관찰하고 연구하는 대상이 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은 '세계의 비악마화'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생태학적 신학에서는 그럼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정당화로 사용했다고 비판합니다. 이 비판은 정당합니다. 하지만 이 세계가 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겨주셨다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자연을 관리해야 합니다. 자연에 대한 책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중요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자연 탐구에 대한 해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점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는 신정론적인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폰 라트와 같은 신학자는 '보시기에 좋았다'를 합목적적으로 창조되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분에 보시기에 좋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이 세계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믿고 살아가는데, 우리의 경험 속에는 보기에 좋지 않는 악의 경험, 고난의 경험이 있습니다. 신정론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에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분의 백성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당신께서 보시기에는 좋은 세상인데,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악의 경험, 악인들이 잘 되는 경험들이라는 거죠. 마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경험이 많다는 거죠.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는 거죠. 

 

일단 성서는 질문을 하라고 합니다. 욥이 질문했던 것처럼 말이죠. 답 이전에 질문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가톨릭 신학자 학 같은 경우, 창조는 하나님께서 첫 번째 창조, 즉 무에서 무엇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셨고 이 창조가 완성이 되기까지 하나의 과정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처음의 창조, 계속적인 창조, 새 창조, 전체로서의 창조가 하나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체를 보시고 좋았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한 순간을 살아가기 때문에 이 전체를 볼 수 없으니깐,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 세계를 이야기할 수 없는 거죠. 종국적으로 이 과정 전체를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이 전체를 보면서 종말에 이르러 비로소 전체의 모습이 완성되는 거죠. 그리고 그 종국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완성되는 거죠. 우리는 그 과정의 한 지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죠. 인식론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종말의 그 과정을 앞 당겨서 볼 수 없는 거죠. 그 점에서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죠.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는 창세기 1:2에서 나오고, 그외에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빛만이 아니라 흑암도 창조하셨다고 나오죠. '너희들 가운데 재난을 보내겠다'라는 표현도 나오죠. 그래서 성서에는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라는 사상이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혜 문학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혼돈이라는 것의 개념과 해석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우선, 혼돈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태인가, 존재인가? 혼돈이 존재라고 한다면, 신들의 세계가 있는 거죠. 조로아스터교처럼 선과 악의 신이 있는 거죠. 그런데 성서는 혼돈을 상태로 묘사하지 어떤 신으로 묘사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존재와 싸워서 이겨야 창조가 완성된다고 보질 않습니다. 오히려 혼돈은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의 특성이나 속성 같은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혼돈으로부터 빛이 있으라 혹은 물과 땅이 나뉘어라, 이처럼 담수와 바닷물을 나누고, 분할시켜가는 과정, 이 과정이 창조하는 과정인데,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 행위는 나누는 행위입니다. 영역을 정하는 행위입니다. 젱어라는 구약학자는 이집트에서 이 혼돈이라는 개념은 나일강에 홍수가 일어나면, 나일강 하구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민물이 갑자기 밀려와서 바닷물에 염도가 떨어져서 물고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반면 해일이 일어나면 반대로 염도가 높아져서 물고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염병은 죽음의 사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땅은 산 자들의 땅인데 죽음의 사신들이 엄습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진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적군이 쳐들어와 침략할 때, 이런 것들을 혼돈으로 본 것입니다. 창조는 이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본 겁니다.

 

고대 왕은 1년에 한 번씩 맹수 사녕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데, 이것은 백성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 왕의 책무였습니다. 이것이 고대 세계에서는 왕이 이런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고 이 세계를 생명의 세계로 만들어야 하는 책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인간 전체가 이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땅을 정복하게 다스려라. 하나님께서는 이 혼돈을 끊임없이 생명의 세력을 바꾸어 가십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혼돈의 홍수를 길들여서 물이 자기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혼돈의 물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길들이고 제압하시는 것으로 나옵니다. 혼돈을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길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혼돈의 물이 샘물이 되어 솟아나고, 냇물이 되어 사슴들이 목을 축이고, 밭에 밀이 자라게 됩니다. 창조주는 끊임없이 이 피조 세계 안에서 엄습해오는 혼돈의 힘을 지금도 제압하는 신으로 나옵니다. 혼돈의 힘을 생명을 위한 힘으로, 생명을 섬기는 힘으로 바꾸십니다. 악을 선용하는 능력의 창조주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이 신정론적인 대답이었습니다. 

 

혼돈은 우리가 살아가는 창조 세계의 하나의 속성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 행위를 통해서 이 혼돈을 생명을 위해 봉사하도록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것을 위임하셔서 정의를 수립하고, 샬롬의 평화를 추구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모두 혼돈을 극복해가는 과정입니다. 그점에서 보면, 혼돈을 극복하는 행위는 구원 행위하고 직결됩니다. 죄와 악의 행위는 관계를 훼손하는 겁니다. 이웃의 권리를 침해한다든가, 인권을 짓밟는다든가, 항상 관계의 손상, 왜곡이 죄악이니깐요. 그래서 정의를 세우는 일은 혼돈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구원이냐, 창조냐, 이런 논쟁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불순종하고 타락을 했고, 하나님이 복구를 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을 하셨다, 소위 실락원과 복락원의 모델이었습니다. 지금 창조신학에서는 완벽한 창조, 완벽한 태초의 상태, 손상, 회복, 이런 도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는 처음부터 하나의 과정이었다. 과정이기 때문에 완전이냐 불완전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창조 안에 혼돈의 속성이 있는 것은 단순히 그 자체가 악의 문제라든가 창조의 불완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혼돈이라는 것도 선을 위해 사용하시기 때문이죠. 욥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악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활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심지어 악도 선용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죠.  

 

따라서 창조신학은 창조의 과정 전체를 구원의 과정으로 봐야 하고, 구원의 역사 전체를 창조로 봐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종말을 구원의 완성이라고도 보지만 새창조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마지막은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순서상으로는 창조가 먼저이지만 구원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처럼 설명을 했는데, 창조신학은 창조가 오히려 구원 전체를 포괄하는 틀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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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합리화인가, 순수함인가

 

[과신책] 학자의  읽기

 

합리화인가, 순수함인가
엔도 슈사쿠 | 침묵 | 홍성사 | 2003

 

김영웅

 

 

기적이 일어날 거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침묵’이라는 제목으로부터 이야기의 결론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긍정적일 수 없을 결론을 예측하며 난 책을 펼쳤다. 엔도 슈사쿠를 처음 만났다.

 

이 책에서의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을 의미한다. 고난과 역경 한가운데 놓인 하나님의 백성을 기적을 일으켜 구해주는, 영화나 소설 속의 슈퍼 히어로나 마법사 하나님이 아닌, 17세기 일본, 천주교의 박해 중심에서의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시고 묵인하시는 하나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자 죽음도 무릅쓰고 극심한 고통을 담대히 선택한 자신의 백성들 앞에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끝까지 침묵만을 지키셨다.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실화와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소설이다.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포르투갈 신부가 일본에서 박해를 받다가 결국 배교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줄 만큼 소설적인 요소보다는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잘 부각되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로드리고 신부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편지조차도, 덕지덕지 찢어지고 빛바랜 모습으로 어느 박물관엔가 보관되어 있을 법한 기분도 들게 만든다. 그만큼 이 책은 소설이지만 아주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글쓰기로 쓰인 이 책에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은 머리를 통하지 않고도 그저 공감이 된다. 때로는 의심으로,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적의에 가득 찬 채 하나님께 따지고 원망하며 화를 내 본 우리 자신들의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상기시키게 만든다. 이 책은 비록 지금으로부터 4세기나 차이나는 17 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일본이란 낯선 곳에서 벌어진 일을 그려내고 있지만, 21세기 현재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이 여전히 똑부러지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가슴이 한없이 답답해지는 이유는, 바로 시공간과 사건을 초월하여 동일한 결론을 모두 경험하고 그것이 마음속에서 끝내 대답되지 않은 채 치유되지 않은 상처처럼 뿌옇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침묵하심에서 하나님의 동일하심을 찾는 건 신자로서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이야기의 플롯은 예수의 수난 과정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여기엔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 개인적으로 나는 그 의도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의 죽으심 때에도 철저하게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이지 않겠냐는 추측에서 찾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침묵을, 여전히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더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드리고 신부를 예수에 대치시키고, 로드리고 신부를 돈을 받고 판 기치지로를 예수를 은 30냥에 판 유다에 대치시킨다. 또한 관리들에 의해 조롱당하는 장면이나, 감옥을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귀를 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취조당하는 과정에서 오늘 밤 반드시 배교할 것이라는 통역의 말에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키는 것까지도 모두 예수의 수난 과정 중에 있었던 여러 가지 장면들과 겹쳐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읽는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받으셨던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도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닮은 부분이 여럿 있다 하더라도 큰 차이점도 있다.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처럼 극심한 육체적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고, 최후의 죽음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는 끝내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자신의 발로 직접 밟고 배교했다. 마치 예수의 말 그대로 닭 울기 전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박하고도 극단적인 상황을 통하여 엔도 슈사쿠는 우리에게 묻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답은 책의 결말에도 주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열려져 있는 질문인 것이다. 통역이 계속해서 지껄였던 ‘형식적’으로만이라도 배교를 하라는 말이 귓전에 남아 있다. 단지 성화를 밟는 행위가 과연 신앙을 져 버리게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 수 있을까? 로드리고 신부는 기도를 하며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들에게 밟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신부가 들었던 그 음성이 내겐 끝내 소화되지 않을 음식처럼 목에 걸려있다.

 

갈릴레오가 자신이 주장해 온 지동설을 공식적으로는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자기 스스로 구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동설을 거론할 때면 모든 사람이 갈릴레오를 떠올리는 것처럼, 어쩌면 성화를 밟고 배교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여러 신도들의 목숨까지도 살린 로드리고 신부의 행위는 결국 예수 믿는 신앙을 져버린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실제적으로 일본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진 않았을까? 아니면, 신부가 만약 신도들의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과감하게 선택했었다면, 자신 앞을 먼저 간 배교의 스승, 페레이라 신부도 끝내 회개하고 다시 순교하며 신앙을 순수하게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이 책이 전달해 주는 우울함은 그 힘이 무척이나 강력하다. ‘합리화’하는 행위와 ‘순수한’ 신앙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재정의해보는 기회가 된 건 좋은데, 내 안에 남아 있는 이 찝찝함은 어쩐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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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을 다녀와서

 

2019년 9월 30일 선정릉역 근처에 위치한 강남새사람교회에서 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이 진행됐습니다.

 

이번 행사는 미래신학연구소, 과학과신학의대화, 이수포럼, 한신대학교종교와과학센터, 한국과학생명포럼이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였습니다. 

 

국내에서 과학신학을 연구하는 단체들이 힘을 합쳐서 진행한 행사였던 만큼 많은 학자들과 관심자들이 참여를 했습니다. 

 

 

2시부터 6시까지는 각각 신, 인간, 자연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6명의 학자들이 관련 주제로 발표를 하셨습니다.

 

먼저 세션 1 '신' 발표에서는 김정형 박사님께서 "자연의 역사와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라는 주제로 과학과 신학의 관계 및 최근 과학신학의 이슈와 주제들을 개괄적으로 소개해주셨습니다. 

 

이어서 정대경 박사님께서는 좀 더 심화된 주제로 들어가 Divine Action에 대한 최근 논의를 발표하셨습니다. 물리 세계 내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지를 소개하셨는데, 어려운 내용을 친절하게 잘 소개해주셨습니다. 

 

 

세션 2 '자연'에서는 강태영 박사님께서 과학에서 '자연'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설명해주시면서 자연 인식의 한계를 동시에 지적해주셨습니다. 과학 내에서도 '자연'을 해석하는 관점이 변화하고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신학과의 대화도 가능하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이성호 박사님께서는 최근 동물행동학의 연구 동향을 소개하면서 '동물 연구'(Animal Studies)라는 학제 간 연구를 소개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면서 동물의 도덕성, 사회성, 심리적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종교와 동물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세션 3 '인간'에서는 전철 박사님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능과 지성의 차이 그리고 영성이 과연 무엇인지 설명하셨습니다. 인간을 단순히 정보의 총합이라든가, 계산 가능한 능력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타자를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과 영성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장재호 박사님께서는 존 호트의 information 개념과 장자의 '기' 개념을 비교하면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은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했습니다. 오래된 지혜로부터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후 세션이 모두 끝나고 다같이 교회 카페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적당한 인원이 참석해서 심포지엄을 진행하기도 너무나 수월했습니다.

 

특별히 과신대 정회원분들이 자원봉사자로 섬겨주셔서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저녁 7시부터는 로버트 러셀(Robert J. Russell) 교수님의 특강이 진행됐습니다.

 

"신학과 과학의 경계에서의 다섯 가지 이슈들"이라는 제목으로 현대 과학과 신학이 만나는 지점을 핵심적으로 소개해주셨습니다. 오랜 시간 이 주제로 연구하신 러셀 교수님의 연륜과 깊이가 묻어나는 강의였습니다. 이형주 박사님의 통역도 너무나 재미있고 훌륭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행사를 공동 주최한 각 단체의 대표님들이 나와서 "한국에서의 과학과 신학"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진행했습니다. 과학신학의 불모지와 같았던 국내에 선구자와 같은 역할을 하셨던 원로 교수님들께서 나와서 현재 한국기독교와 교회에 과학에 대한 바른 이해성경해석, 창조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허균 교수님께서는 자본과 기술에 포섭된 과학이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최승언 교수님께서는 개인적인 신앙 체험과 기도가 과학자에게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며 개인적인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윤철호 교수님께서는 한국적 상황에 맞는 자연신학을 더욱 연구하고 학자들과 연대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해주셨고, 우종학 교수님께서는 앞으로 과학신학에서 다룰 문제와 주제가 미래지향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특별히 앞으로 과학신학 관련 단체들이 교회와 젊은 세대를 어떻게 가르치고 교육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인 청소년과 청년들이 잘못된 창조론 때문에 신앙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자는 다짐도 했습니다.  

 

 

이제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학술대회임에도 불구화고 80명이 넘는 분들이 참가하셨습니다. 참가 구성원도 다양했습니다. 신학생, 목회자, 다양한 전공의 학자들이 마지막까지 경청을 해주셨습니다. 질문도 뜨거웠습니다.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과학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뿐 아니라 교회 목회자, 학생,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갖고 동참해주신다면 한국교회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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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와 기독교의 기원 탐구

[분당/판교 북클럽 9월모임 후기]

 

박정수, <고대 유대교의 터·무늬> (새물결플러스, 2018)

시간/장소 : 9/29일 금요일 저녁 성공회분당교회

발제: 박철성 님

 

나는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에 공백, 느부갓레살의 예루살렘 패망 후,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났기에, 독립된 나라없는 백성들이 500년간을 유대교 라는 분리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종교를 자리매김해서 초대 기독교에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것이 늘 궁금했다.

 

책의 시작은 앗수르, 바빌론 등의 강압통치를 일삼은 제국의 몰락을 경험한 키루스(고레스)가 페르시아 속국들에게 종교와 관습을 허락하는 "문화정치"로 시작된다. 유대 예루살렘 성전, 바빌론의 마르둑과 이집트의 신들, 그리스의 아폴로 신전제사가 허락되었고 정복민들에게 마치 이전 왕조의 지배가 계속되고 있는 안정감을 주려는듯 그는 바빌론의 후계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강사은 님의 표현처럼 고레스 덕분에 유다가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의 연장선 상에서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귀환이 시작되었으나 이는 그땅에 남아있던 대다수 백성들에게는 또 하나의 갈등의 시작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마치 6.25때 서울이 북한군에게 3일 만에 점령되어 남아 있던 대다수 서울시민들이 서울 수복후 부역자로 몰린 것과 같은 상황이 떠올라 한동안 상심에 잠기었다.

 


초기 귀환 그룹 스룹바벨은 다윗 왕조의 부활을 꿈꾸며 이방인이 되어버린 남은 자들을 부정하다하여 성전 재건에 참여시키지 않았고 이에 반발한 사마리아 이방인(?)과 정치적 독립을 달가워하지 않는 페르시아에 의해 좌절되었다.


20년 후에 (기원전 538년 ~ 515년) 성전재건 목표 수정하여 성전 자치 공동체의 지위에 한정하며 이방인 혼합주의자/동화주의자들을 받아들인 후에 성전이 재건되었고, 에스라 7-10장 성전 완공 후 50년 후 458년 에스라가 종교특사로 파견되며 도시재건과 개혁,성벽건설까지 완성되었다. 


초막절 희생제사 - 에스라의 수문 앞 광장 율법 낭독에서 총회를 주관한 느혜미야 총독과 함께 이스라엘의 종교적 회복을 이루는 모습이 성경에서 정말 감동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치적인 공적인 영역은 제한되었고, 개인적인 종교적인 면의 성과에 머물러서 성전제사와 공통체의 제의적 정결에 집중되었다.

 


정훈재 님이 소개한 <시편 사색, 시편 한 권으로 읽기>처럼 시편 첫 권은 현실 왕조/왕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면 뒷 권으로 갈수록 왕이 없는 식민지 백성의 바램이 묵시적으로 변화한다. 오늘 현실의 시련 앞에서 먼미래에 경험하게 될 구원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표현하게 되고 성전 제사장 세력에서 제외된 에스겔 등에 의해서 교회에서 찬양할때 늘 부르던 "젊은이가 꿈을 꾸고 노인이 환상을 보는" 묵시문학의 태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300 영화로 익숙한 페르시아가 야만이 아닌 나름 관용적인 개방정책으로 헬레니즘 이전에 이미 그리스 문화가 에후드 지역에 가득했고 디아스포라와 함께 이러한 배경이 초대기독교가 널리 확장된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팔레스타인 지명은 로마 통치시절 잦은 유대 봉기를 괘씸하는 여긴 로마황제가 블레셋을 본따 rename 된 것으로 유대인들은 태생부터 싫어 할만한 단어라 하겠다.


모임 뒷 부분은 김자현님이 유엔 회의 중에 구술 문화권의 중동의 외교관들이 상당한 언변이 강하다고 설명을 들었고, 유대교의 미쉬나 완성과 성전 보조직에 한정되었던 레위인들을 사독 가문으로 대표되는 신정정치의 승리자(?) 제사장계급이 파트너로 연합함으로써, 서기관 계급이 태동하는 과정을 살려보았고 외경으로 접하는 마카비 혁명을 다음시간에 고대하며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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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신은 어찌 그러셨소~

분당 판교 북클럽 8월 모임 후기

 

 

바울! 어찌 이런 일을~

 

유사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이 과학을 엉뚱하게 변곡시킬지라도 성서 문자를 손대는 경우는 못본 것 같은데 바울은 (히브리) 성서 텍스트를 수정해서까지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키는군요. 음... 바울은 적어도 문자주의자는 아니라는?

 

시편 95편에서 40년 광야는 ‘징벌’이었던 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시편에는 없던 “그러므로”(3:10)를 삽입해 징벌이 광야 이후의 것이 되도록 변경해 인용했습니다.

 

——


(히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 3: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히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히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

 

왜? 바울의 유비에 있어 광야 40년은 쉽게 설명해 탄생-삶-죽음 중에서 ‘삶’에 해당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삶’ 자체가 징벌인 것으로 관계지을 수는 없는 노릇인거죠. 암요~

 

히브리서는 시편 95편처럼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나님의 진노로 정의하지 않는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이 “믿지 아니하는 악심”(히 3:12)을 버리지 않으면 임하는 것으로, 굳이 말하자면 40년의 기간이 지나 임하는 것이다. p. 200

 

한 때는 구약성서에도 없는 내용이 신약에서 발견되면 무척 신기해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역시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라 구약에서 밝히지 않았던 것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들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신약에서 그 비밀을 밝힌 것이겠거니.... 식의 생각이었죠.

 

유다서 9절의 모세 시체 쟁탈전이 그런 예입니다.
모세의 시체를 두고 천사와 사탄(?)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다? 아주 흥미롭죠. 뭔가 심오한 뜻이라도 있는 줄 알았었다는..... 저의 흑역사입니다. ㅜㅜ

 

요즘에 와서야 그저 고대인들의 공유하고 있던, 조금 과장해서 고대인의 상상력의 발현이겠거니 하게 됩니다만 이렇게 말하면 상처받으실 분도 있을테니 어떻게 포장을 해야 할까요. ㅠㅠ


(아~ 하지만 나는 루비콘 강을 건너 버렸어~. 아니지~ 성경’쩍’으로 요단강을 건너 버렸어~. 아! 요단강은 죽음을 의미하나? 그럼 다시 루비콘 강으로....)

 

 

피터 앤즈의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은 2가지 관점으로 사도들의 히브리 성서 해석 관점을 이해하자고 합니다. “1. 그리스도 목적적. 2. 교회 목적적” 차원에서 그들은 구약, 즉 히브리 성서를 이해했다는 것이죠. 비록 이것이 사도들의 해석 관점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아닐지라도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고대와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해석 관점을 사도들에게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덜 부자연스럽다고 말이죠. 사도들이 빅뱅, 블랙홀, 진화, 성소수자에 대한 현대 정신의학계의 연구 결과를 알 리가 없죠.


이 지점에서 우리가 속한 종교는 성경교가 아니고 그리스도교(기독교)라는 점을 기억해 봅니다. 적어도 바울의 해석관점이 문자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피터앤즈는 성서 해석이 과학의 산물이라기보다 예술적인 활동(문학적이기도)이고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 공동체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방어할 요새의 관점이 아니라

 

“나는 성경해석을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여정, 우리가 함께 하는 순례길로 보기 원한다. 여행의 길을 가면서 주변의 경치를 즐기다 보면, 보다 많은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럼으로 우리의 해석도 더욱 풍부하게 될 것이다.” p. 232

 

라고 말이죠.

 

분당/판교 북클럽 9월 선정 도서는 신구약 중간사를 다룬 “고대 유대교의 터·무늬”(박정수, 새물결플러스)입니다.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2부까지 읽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p.s. 구운 계란, 찐 고구마로 배불려 주신 김란희님께 감사드립니다. 급히 조문을 가시는 길이셨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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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제국의 프로테스탄트] 1. 삶에서의 회심, 기후변화와 맞서다

  • 자녀들에게 충분히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수 있게 끝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기대됩니다 ^^

    jam5 2019.09.25 17:45
  • 기후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글 감사합니다. 크리스천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겠습니다. 이후의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CoreaArt 2019.09.25 19:16
  • 고등학교때부터 한 길만을 걸어온 김박사의 건투를 빕니다

    라임오렌지 2019.09.25 23:14
  • 저도 기사로 스웨덴 소녀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는 했었는데요, 좋은 칼럼 등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챙겨보겠습니다^^

    2050 2019.09.26 07:55
  • 기후문제는 과학교육계에서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과학교육의 트랜드가 교과서에서 교실밖인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후 문제는 몇 사람의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동의와 행동 변화가 함꼐 동반되어야 하는 문제인 동시에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주는 직접적인 이슈입니다.

    현장 과학 선생님들이 이것에 대한 중요성은 알지만 학술적이고, 이론적 기반이 부족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참고가 될만한 좋은 내용 기대하겠습니다.

    준이네 2019.09.26 09:53

 

삶에서의 회심, 기후변화와 맞서다

 

김진수 (에딘버러대학교 지구과학부 박사후연구원)

 

 

1529년 슈파이어 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마틴 루터의 지지자들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루터파 제후들과 자유도시 대표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항의하는 문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제국회의와 황제에게 맞선 이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 혹은 저항하는 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르며 신교도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로 굳어졌습니다.

 

500여 년 전에 제국과 황제에 맞선 이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신앙을 물려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집단’이기도 하지만 한 ‘개인’이기도 한 그들은 살해 위협 등 신변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항의하며 개신교회를 세웠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담대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들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면죄부로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확신, 개혁이 필요하다는 확신, 자신이 그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는 확신 말입니다. 저는 이 확신이 필요한 영역이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기후변화에 대해서입니다.

 

 

안녕하세요? [기후변화 제국의 프로테스탄트]를 연재하게 된 김진수라고 합니다. 저는 지난 2월에 포항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딘버러 대학교로 옮겨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전 세계에서 ‘기후 파업 (climate strike)’ 운동이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 (Greta Thunberg)가 지난해 8월 ‘등교 거부’ 시위를 시작해 유럽 및 세계로 이 운동을 확산시켰습니다. 청소년들이 본인들의 미래를 위해서 학교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기후변화로 인하여 지구가 망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밝은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이 소녀는 환경 파괴에 침묵하고 기후변화 대응에 미온적인 주류 정치인들과 어른들에게 반항하는 의미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등교거부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작년 12월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는 기득권층을 겨냥한 연설에서 “당신들은 자녀를 사랑한다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녀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라고 발언하였고, 지난 9월 23일에는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 3분 연설에서 “생태계 전체가 무너지고 있는데 각국 정치지도자들은 영구적 경제성장과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다.”“당신들은 우리 젊은 세대를 실망시켰고, 우리는 당신들의 배신을 깨닫기 시작했다. 미래 세대의 눈이 당신들을 향해 있다. 만약 우리를 실망시키는 쪽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질타하였습니다.

 

이 소녀에게는 ‘확신’이 있어 보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미래’가 없다는 확신, 개혁이 필요하다는 확신 말입니다. 저는 기후변화 과학자이자 신앙인으로서 [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세기 1장)라고 하셨지 파괴하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분별한 개발과 무책임한 발전으로 더욱 강력해진 자연재해(사실상 인재 人災)를 연거푸 경험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 (로마서 6장)인 것처럼, 인류활동으로 인해 지구에는 사망의 그림자가 길게 늘여져 있다고 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피 값 주고 사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해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야고보서 2장)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이 땅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그의 청지기라면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응하여 어떤 믿음과 행동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확신’과 함께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레타가 경고한 것처럼, 이대로 문제를 방치했다가는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가 살았던 지구를 물려주기는커녕 지옥 같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인격적인 회심을 요구하실 때에, 우리가 당연시하고 살아왔던 삶의 패턴 하나하나까지도 ‘회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 청년처럼 고민하다가 망설일 수도 있고, 삭개오처럼 자발적으로 본인의 삶을 180도 바꾸는 결단과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기후변화 과학의 최신 연구 결과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드리고, 우리가 과연 어떤 행동들을 할 수 있는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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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에서 사제로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부천/인천 북클럽]

 

| 박정탁 (부천/인천 북클럽 회원)

 

 

영국의 물리학자 존 폴킹혼은 양자물리학을 끝까지 거부한 아인슈타인을 '최초의 현대인인 줄 알았으나 최후의 고대인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미시세계를 직접 연구하는 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의 고집을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배 물리학자를 향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고 미시세계를 꾸준히 연구한 폴킹혼. 그와 같은 현대 물리학자들 덕분에 우리는 북경에서 펄럭인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서 허리케인이 되어 나타나게 될 '확률'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과학 연구에서 앞선 연구는 '그런것이 있었다' 정도의 가치만이 용납된다고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폴킹혼의 이러한 태도는 지나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해봄직하다. 과학이 계속 발전하고 진보한다는 것은 앞선 과학의 연구가 모조리 폐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논리적으로 입증되고 납득된 과학의 공헌은 더 뛰어난 연구가 나올 때까지만 수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 또 다른 연구에 의해 비난받고 전복되는 것을 잠시 유예받았을 뿐인가? 그렇다면 폴킹혼을 비롯하여 과학자들은 무엇을 위하여 연구하는가?

 

폴킹혼은 이것을 '축적'이라는 온건한 용어를 사용하여 진보의 반대가 꼭 퇴보는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과학의 연구 또한 인문학처럼 축적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말로, 거인이 있어야 거인의 어깨도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그 유명한 '비판적 실재주의'라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실재는 오직 주관과 관념에서나 가능하다"는 염세적인 태도와 "보이는 것이 곧 실재 그 자체"라는 순박한 실재주의의 사이에서 중도를 걷는 이 방법론은 얼마나 유연한가.

 

분명하고 아름답게 존재하는 실재(real)에 대한 확신. 그리고 성실한 연구를 통해 그 실재에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믿음. 실재와 아주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그것이 실재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 겸손함. 그래서 나보다 더 실재에 가까이 간 학자의 연구를 기꺼이 수용하는 유연함. 폴킹혼의 방법론은 동료 과학자들의 진실한 노력을, '실재를 향한 숭고한 발자국'으로 존중하고 있는듯 하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는 선배요 거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을 차갑게 비판하기도 했었으나 학자들에게는 그런 순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로남불이 아니라 학문의 최전선에 서있는 학자들의 고단함이니, 큰 흠이 될 수는 없다.

 

어쨌든 우리 모두 잘 알듯이 이 위대한 물리학자는 캠브릿지 대학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사제가 되었다. 과학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그의 삶과 궤도를 오늘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어서 유익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기 전에 소탈하고 겸손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래서 사제가 되기로 선택한 그의 결정이 아주 비논리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천/인천 북클럽 모임 안내

 

  • 일시: 2019. 10. 1. (화) 7:00 pm.
  •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 804호 박영식 교수 연구실
  • 교재: 존 폴킹혼, <과학으로 신학하기> (모시는 사람들)
  • 문의: 010-사삼삼삼-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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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북클럽의 새로운 도약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미국 파사데나 북클럽]

 

| 김영웅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

 

 

정체된 분위기를 벗어나 한 단계 도약을 위해 모두들 귀한 시간 내주셔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네 가지 나무를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한 간략한 커리큘럼 개요를 발표하고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약 1년 반 정도의 미래의 방향을 논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하나의 나무가 너무도 컸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이 함께 탐험해 나가야 하는데, 기초적인 지식과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지식 사이의 간격을 측량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행착오 없이 한 번에 가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은다면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과정 자체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열의와 이 일의 당위성을 생각하며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침 우종학 교수님도 참석해 주셔서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집단지성의 힘과 다양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달에는 오늘 나눈 중요한 이야기들을 토대로 커리큘럼의 수정과 보완을 하여 다시 모이게 됩니다. 11월달부터는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모임이 있고 제가 그 자리에 있음이 참 감사합니다. 혹시 아나요. 파사데나 학파가 정말 형성되어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생각나실 때 응원 부탁드립니다. 오늘 특별히 참석해 주신 우종학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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