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7일(금)에 수원남부북클럽 회원 6명이 이정모 관장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시립과학관에 다녀왔습니다. 6월 8일(토)에 있을 북토크 전에 사전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말이죠. 약속 시간 전인데도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인터뷰이: 이정모 관장
인터뷰어: 오세조 회원
사진: 심왕찬 팀장

 

 

Q: 한때는 ‘과학의 대중화’가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과학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대중의 과학화’로 슬로건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과학 커뮤티케이터’라는 직업이 나왔는데 관장님께서는 이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역할과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제 생각에는 ‘과학의 대중화’와 ‘대중의 과학화’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시민들은 과학을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과학은 어렵습니다.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일반 시민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과학자들의 스펙트럼과 시민의 스펙트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둘이 만나는 접점이 필요합니다.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이 접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저는 이 ‘과학 커뮤티케이터’의 역할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런 이름조차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오니 ‘과학의 대중화’ 또는 ‘대중의 과학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과학 커뮤니케이터’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이름이 있어야 정체성도 생깁니다. 그리고 정체성이 생겨야 전략이 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학 커뮤니케이터’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공간이 꼭 필요합니다.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지요. 제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더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는 것은 제가 그만두어야 다른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을 한 거지요. 물론 마침 서울시립관장 자리가 나서 저는 이곳에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 곳에서 서로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다른 나라에서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연대에 좋은 예가 있습니까?

 

A: 다른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좋은 예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 경험으로는 다른 나라의 경우에 협력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지역에 있는 과학관과 지역학교와의 긴밀한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방학 때면 교사의 월급이 지급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은 생계를 위해 방학동안에는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교사들은 방학 때도 월급이 나옵니다. 안정성 면에 있어서 좋은 것이지요. 또한 우리나라 과학교사들은 방학 때도 과학 활동을 아주 많이 합니다. 과학의 홍보화 또는 특별활동들을 아주 많이 합니다. 저는 이렇게 활동적인 사람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에너지가 넘치는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Q: 과학자이시면 신앙인이신데, 힘든 점은 없으셨습니까?

 

A: 사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교회에 다닌다는 것 때문에 지도교수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과학도인데 어떻게 교회에 다닐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교회 내에서도 과학을 하는데 신앙이 있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신앙인으로서 과학 활동을 하는데 개인적인 어려움을 별로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는 언제나 양쪽 모두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Q: 이번에 출판한 책은 서평을 모으신 것인데,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이 몇 권이냐 되십니까? 또한 과학 작가들은 서로 친한 것 같은데, 친한 이유가 특별히 따로 있습니까?

 

A: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이 모두 69권입니다. 사실 요즈음은 서평을 옛날만큼 쓰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문학가들은 모르겠는데, 과학 작가들은 서로 친한 편입니다. 책이 나오면, 서로 홍보도 해주고,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현상은 과학자들의 겸손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과학은 진리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최대 설명이죠,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과학자들은 겸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겸손’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 시작됩니다. 기존 지식이 틀렸다면, 과감히 그것을 인정하고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겸손해지기 어렵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교회에도 많다는 것이지요.

 

 

이번 6월 8일(토)에 하는 수원남부북클럽 과신톡의 주제인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결’이 이런 과학의 겸손함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주제입니다.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6월 8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글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잘못임을 밝힙니다. 관장님이 말씀을 하도 재미있게 하셔서 인터뷰하는 것을 놓친 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결’이 왜 과학의 겸손함을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6월 8일(토)에 오시면 알 수 있습니다.

 

* 이정모 관장님과 함께 하는 '과신톡' 안내

 

💫 일시: 6월 8일(토) 오후 2시
💫 장소: 성공회 제자교회(경기도 오산시 세남로14번길 25, 1호선 세마역 5분 거리)
💫 대상: 누구나 (무료)
💫 수강신청: https://bit.ly/2Yr12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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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신대 연구팀장을 맡고 계시는 정대경 박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정대경 박사님은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과학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홍대 근처 카페 '산책'에서 짧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터뷰이 | 정대경 박사
인터뷰어 | 최경환, 이진호 

 

 

1. 어떻게 과학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얼마 전에 이정모 관장님도 오셨더라고요. 저도 어려서부터 공룡을 좋아했는데, 보통 이런 관심이 유년기에 그치는데, 중고등학교 때까지도 그 관심이 가더라고요. 한 번은 중학교 때, 저희 교회에서도 창조과학에 대한 강의가 있었는데, 공룡에 대한 질문이 많았던 거죠. 그때 조목조목 질문을 했었는데, 대답이 시원치 않았어요. 아직도 기억나는 답은 “공룡들이 노아의 방주에 탔을 거다. 그 많은 종이. 탔다가 내린 이후에 아마 활동을 하다가 절벽에 떨어져 죽지 않았을까?”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더라고요. 어린 나이에도 그게 납득이 안 되더라고요. 그때는 신앙도 별로 없었고, 그냥 그런가 보다, 묻어 놨다가, 고등학교 때 회심 체험을 하면서 진로를 고민하게 결국 신학대학교까지 가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석사 과정을 하면서 신학적인 고민을 진지하게 했습니다.

 

석사 과정에서 논문을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 중에 테드 피터스(Ted Peters) 교수님이 썼던 Evolution from Creation to New Creation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을 쉽게 풀어서 쓴 책이 『하나님과 진화를 동시에 믿을 수 있는가』(동연, 2015)로 번역됐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신학이 자연과학과 양립 가능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후에 석사 마치고 박사 들어가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2. 이후에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셨나요?

 

저의 신학적 고민은 오래전부터 신정론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사촌 형도 루게릭 비슷한 병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친구도 중학교 때 당뇨 합병으로 죽게 되면서 신정론적인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죠. 그러다가 신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 질문을 연결시켰던 거죠.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립은 잘 안 됩니다.(ㅎㅎ) 여전히 왔다 갔다 합니다. 때로는 이신론으로 갔다가, 몰트만처럼 케노시스로 갔다가, 판넨베르크처럼 결정하는 주체로 갔다가, 어떤 때는 또 결정론으로 확 갔다가 합니다.

 

3. 예전에 저희 과신대 콜로퀴움에서도 강의를 하셨잖아요. 그때 어떤 강의를 하셨는지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제 논문 주제 자체가 ‘생명의 기원과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유기화학 이론에서 무생물에서 생물로 넘어가는 이론을 2장에서 다루고, 이런 자연과학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다룹니다. 자연현상만으로도 생명체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입장이 주류 과학계의 입장인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논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행위(Divine Action)에 대한 이론으로 가장 유명했던 학자들, 예를 들면 폴킹혼, 피콕, 러셀의 하나님의 행위 이론을 다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의 행위 이론으로 생명의 현상을 다루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들의 이론을 생명의 현상에 적용해 보고, 그 한계는 무엇인지 집어 봤습니다.

 

1세대 하나님의 행위 이론가들의 한계는 이 사람들이 너무 물리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지적을 했습니다. 어쩌면 의미나 가치라는 것이 실제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명체가 처음 출현을 할 때부터 인식 작용이라는 것이 같이 출현했다는 입장도 상당히 많거든요. 예를 들면, 훔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나 프란시스코 바레라(Francisco Varela)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의 출현과 함께 인식 행위 그리고 기호현상이라는 것도 같이 출현했다는 것을 고민해 본 논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정리해서 콜로퀴움 때 전달하려고 했는데, 너무 욕심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4. 박사님을 만나면 드리고 싶었던 질문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기적과 기도입니다. 과학신학자로서 기적과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간단하게 대중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기도에 대해서 기독교 전통 내에 두 가지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토미스트 전통인데,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미 결정된 거죠.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두 번째 전통에서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도에 맞춰서 리액션을 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고 사건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설명해 본다면, (기적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일단 대중적인 이해에 따라 소위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행위가 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러한 방식은 없을 거라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자연법칙 내에서, 자연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에서 확률적으로 상당히 불가능한 일들, 예를 들면 사람이 질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사건들이 있잖아요. 생리학적인 설명은 가능한 거니깐요. 그런 방식의 사건은 일어날 수 있다고 봐요. 다만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 자체가 신의 존재나 신이 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직접 데이터로 사용될 수는 없는 거죠. 왜냐하면 여전히 해석이 개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철학적이고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순수하게 우연적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있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실상 기적적인 사건이 우리의 신앙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는 없는 거죠. 다만 그러한 기적들은 가능하다고 결론지으면 될까요?^^

 

 

5. 두 번째 질문은 요즘 국내에서 말도 많고 오해도 많은 유신론적 진화에 대한 것입니다. 역시 알기 쉽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연 과정을 통해서 창조하신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것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입니다. 그런데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진화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 오해되어 왔기 때문인 거 같아요. 진화 과정 자체가 마치 하나님의 행위를 배제하는 것처럼 여겨진 거죠. 그런데 이미 대중적으로 관련 서적들이 많이 나왔듯이, 유신론적 진화라는 것은 진화를 믿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자들이 생명체의 출현이나 자연발생에 대한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데, ‘그 모든 과정의 이면에 하나님이 행위를 하셨다’ 혹은 ‘그 자연 과정을 매개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신론적 진화론입니다.

 

그리고 저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전통신학과도 부합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바질이나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은 그 당시의 자연철학 이론인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을 완전히 받아들인 상태에서 성서를 해석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자연과학을 받아들이는 입장, 이 입장이 전통신학의 한 방법론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전통신학과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고 봅니다.

 

 

6. 과신대 연구모임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연구모임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2017년 4월쯤 본격적으로 모임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때 수학자, 생물학자, 천체물리학자, 신학자, 철학자, 과학신학자, 과학철학자, 이런 식으로 모여서 시작했습니다. 매달 한 번씩 모여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선정해 읽으면서 토론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독서 모임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옥스퍼드, 캠브리지, 시카고, GTU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과학과 신학 연구소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연구소들은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고 그것을 연구한 뒤에 그 결과물로 대중강연을 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는 세속주의와 관련된 연구를 한다거나 생태 환경과 관련된 연구를 하기도 합니다. 3월부터 새로운 커리큘럼을 가지고 과신대 연구모임이 새롭게 시작하는데, 1년 동안은 기존 방식을 벗어나서 연구자들이 과학신학이라는 분야가 어떤 토픽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지 개론적인 수준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을 다룹니다. 과학과 신학의 방법론이라든가, 신학이 실재를 반영할 수 있는 학문인가, 하나님의 행위 이론,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과학과 신학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트랜스휴먼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이런 어젠다 중심으로 1년 정도 다루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내년 중후반부터는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서 그 주제에 대한 심화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학술대회나 포럼 차원에서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대중 형식의 포럼으로 연결하려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신학계에도 기여할 수 있고, 과학철학이나 자연과학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화 파트너는 단순히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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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람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이용주 교수님


* 이번 달에는 3월 콜로퀴움에서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에 대해 강의해주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삼위일체론과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에 대해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이 | 이용주 교수
인터뷰어 | 우인, 심기주
사진 | 심왕찬
글 | 심기주


Q: 먼저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여러 설명을 하는데,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A이건 판넨베르크의 설명은 아니고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될 때 다 나왔던 질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 이게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신념인데 교회 안에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은 ‘아들은 아버지의 첫 번째 피조물이지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그 후대 분들이 논쟁 과정에서 정리를 이렇게 했어요‘시간 안에서 아버지(성부)가 아들(성자)을 낳으신 게 아니다. 영원 가운데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고백인 거죠. 이 때  ‘영원은 인간이 생각하는 유한한 시간의 선후관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무시간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더 나올 수 있는 것이 “어떻게 성부가 성자를 낳았지?라는 것이죠. 이 의미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요. 아버지는 아들 없이 계시지 않고 아들은 아버지 없이 계시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야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낳아야 아들이 있죠. 그래서 상호의존적입니다. 여기에 성령까지 해서 세 인격들의 작용과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단일한 신성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틀거리입니다.

 


Q: 하나님이 영원 속에 계시다는 게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신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영원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 더 알려주세요.

A하나님의 영원을 시간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현재(presence)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하신다는 거죠. 과거 안에도 현재로 계시고, 현재에도 현재로 계시고, 미래에도 현재로 계시는, 영원히 현재하시는 분인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시간 양태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고, 시공간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설명에 패러데이의 장이론을 매개체로 사용하는데, 흘러가는 시간구조 안에 하나님이 영원으로 내재하신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충족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현재 가운데 계신다면, 이 세계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인과율적 법칙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오는 뭔가 새로움의 장으로서 현재가 존재할 수 있지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 역시 새로움이 밀려 들어 오고 있는 장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이 세계에 새로움이 출연하는 통로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며 성령이신 하나님이 세계 안에 계시면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작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과거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원인과 결과들만으로는 포섭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사건들이 역사 안에 출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Q: 판넨베르크가 패러데이의 장이론을 이용해서 성령의 일하심을 설명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장이론이 조직신학에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적용돼요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입니다우선 페러데이 장이론에 대해 판넨베르크가 설명하는 것을 제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기존 고전물리학에서는 물체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말합니다예를 들어해가 없어도 지구는 존재한다는 것이죠그런데 장이론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물이 에너지 장 위에 있다고 말합니다그리고 에너지가 어떤 특정한 조건 하에 구체화되면 그것이 사물로 나타난다고 말하죠

이것을 삼위일체론에 적용하면 장점이 있는데요우리는 보통 삼위일체론에서 세 인격들이 실체론적으로마치 당구공 세 개가 따로 있듯이세 인격도 각각 따로 있는 것처럼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세 인격이 하나인지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요그런데 장이론을 가지고 보면 세 인격들은 하나의 단일한 신성이 구체화되어 나타내는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패러데이의 장이론은 “성령이 어떻게 피조세계 가운데서 내재해서 일하시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피조세계에 내재해 있으면서 특히 생명의 근원으로서 생명을 촉발시키는 존재죠이 때영이 피조세계에 계시면서 어떻게 창조자로 활동하시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마치 패러데이의 장이 모든 사물들의 근원인 것처럼 하나님의 영도 모든 피조물의 근저에서 기본적으로 작용하신다는 것으로 설명을 해요그래서 ‘그 영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내재하시면서 존재의 근원으로 활동하신다그리고 그 영의 작용을 통해서낮은 수준의 피조물(무기체)로부터 유기체의 진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이 전체 창조의 과정이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으로 가도록하나님이 직접 창조자로 계속 활동하고 계시다’라고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패러데이의 장이론이 쓰인다고 할 수 있죠.

 

 

Q: 많은 성도들이 현대 과학의 성과와 성서의 내용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고 인지부조화 상태에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신학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신학의 문제일 수도 있고, 목회자의 문제이기도 해요가장 큰 문제는 신학과 교회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거기에는 신학자의 나태함이 분명 있을 수 있지만, 목회자의 불성실함도 있다고 봐요. 목회자들이 지적 활동에 대한 고민이 많이 있나요?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 설교강단에서 성도들과 얼마나 공유하고, 교회신앙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어요. 노력은 하시겠지만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에요. 또 다른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자면, 목사후보생들이 쓸데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한다는 거예요. ppt 만들고, 컴퓨터 하고, 노래도 잘해야 하고, 운전도 잘해야 하죠.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생계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무언가 일들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이런 것들을 강요해온 시스템이에요. 따라서 목사후보생들이 신학적 고민, 학문적인 고민을 할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인을 탓하자는 게 아니고, 어느 교단이나 큰 교회들이 후속세대를 기르는데 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개교회 차원에서는 투자를 하지만 전체교회 차원에서 하지 않습니다. 크게 보자면 이런 것들이 먼저 개선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목사후보생들이 좀 더 진지한 신학적 질문을 해서 이것이 책에만 갇혀있지 않고 교회현장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이것이 잘 되지 않아요.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문제입니다. “다들 그렇게 가르쳐서 그런 줄 알았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한국 평신도들이 그렇게 수준이 낮지 않습니다. 전문직인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교회에서 터무니 없는 소리가 오갈 때 이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그냥 입닫고 있어요. 쉽게 말하자면, 창조과학 같은 것을 교사대학에서 한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걸 다 받아들이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만히 있어요. 왜 그럴까요? 담임목사님을 존경해서 그럴 수도 있고, 교회 안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혹은 이야기함으로써 얻는 불편함보다 침묵하면서 얻는 이익이 더 커서일 수도 있고,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에 대해서, 교회 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좀 공론화해서 얘기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많아지면 그런 점도 자연스럽게 개선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오늘날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A: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고, 그 아들의 행위는 성령의 활동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로써 아들과 성령이 함께 아버지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함께 세 인격이 일하시며, 그래서 하나의 단일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구현되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계의 창조주시라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자칫 잘못하면 과학의 최신 성과들을 신학화하는 데에 급급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정작 신학적 내용을 상실할 우려도 있는데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잘 맞추면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현대적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 판넨베르크를 통해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또 과학이 실제 세계에 대한 유일한 해명 방식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적어도 세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 층위, 하나는 생물학적 층위, 하나는 인격적 층위인데 자연과학은 물리적 층위에 대해서 말할 뿐, 나머지 두 층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진화과학 같은 경우는 생물학적 층위에 관심이 있겠으나, 이들도 역시 자칫하면 인격적인 것, 인간의 도덕성, 사회성, 종교성 등(인격적 층위)을 생물학적 층위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근본적으로 강하죠. 따라서 “너무 이 이야기에만 집중 하다보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얘기인 ‘인격체로서 인간이 함께 더불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 낼까’하는 관심을 놓쳐버리고, ‘창조과학을 비판하거나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 것이 마치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제대로 구현하는 듯한 그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지금 그러고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성경은 ‘다윈이 왜 틀렸는지 혹은 아닌지’에 별로 큰 관심이 없어요하나님은 자유롭게 사랑하는 분이고, 관계 안에서 사랑하는 분이 우리를 자기와의 관계 안에 놔 주셨고, 우리를 상호 간의 관계 가운데(인간 간의 관계,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가운데) 서로를 자유롭게 사랑하는 그 사랑의 사귐이 충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고 거기에 부합하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가장 큰 과제일 것 같습니다. 신학의 가장 큰 과제도 그것일 것 같고요


* 정말 친절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인터뷰에 적극 참여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콜로퀴움에서 뵙겠습니다.


* 제13회 과신대 콜로퀴움 안내_ https://www.scitheo.org/317


posted by 과신대 기자단

과신대 사람들: 서울시립과학관 이정모 관장님



* 지난 1월 14일 미세먼지를 뚫고 최경환 실장과 이진호 간사가 이정모 관장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시립과학관으로 출동했습니다. 서울시립과학관이 월요일에는 정기 휴관일인지도 모르고 말이죠.^^;; 조심스럽게 사무실에 들어가 이정모 관장님과 즐거운 대담을 나누고 왔습니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민주주의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길게 나눈 것 같네요.


인터뷰이 | 이정모 관장

인터뷰어 | 최경환, 이진호

사진 | 이진호



Q: 오늘 여기로 오면서 이정모 관장님과 인터뷰를 하기 전에 말문을 트기 위한 질문을 몇 가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키워드는 유튜브입니다. 젊은 세대부터 매체의 변화 속도가 너무나 빠르잖아요. 관장님은 유튜브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A: 네, 사실 과학관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미 작년에 65세 이상과 14세 이하의 인구 구성이 엇갈렸습니다. 65세 이상은 점점 늘어나고, 14세 이하는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65세 이상이 더 많아졌습니다. 앞으로 5~10년 사이에 대학에서는 큰 물갈이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30대 초반에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이죠. 그런데 열심히 준비해야 할 30대는 별 생각이 없고, 오히려 기회가 별로 없는 40대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걸 봅니다. 공무원 세계에서도 30대에게는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저도 요즘 강의를 많이 나가는데, 젊은 사람들이 정말 없어요. 나이 많은 분들이 많아요. 젊은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는 또 다른 익숙한 매체가 있는 거죠. 제 딸도 돈도 별로 없을 텐데 본인은 유튜브 프리미엄을 본다고 하더군요. 제 딸은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다고 하더군요. 훨씬 편하게 느끼는 거죠. 저도 작년에는 딱 한 번 극장에 갔더라고요. 넷플릭스로 각자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는 거죠.  


예배도 마찬가지죠. 요즘에는 굳이 교회에 가야 해?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죠. 세상은 바뀌고 있고, 다양한 디바이스가 있고, 거기에 적응해 가는 거죠. 과학관도 예전에는 보러 오는 것이었잖아요. 이제는 조금 바뀌어서 가르치는 곳이 되었죠. 강의도 하는 거죠. 우리나라에는 과학관이 137개가 있습니다. 저희 과학관을 만들 때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여러 과학관 중 하나가 아니라 특이한 것을 하자. 일단 지금까지 대부분의 과학관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운영됩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과학관이 아니어도 갈 곳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중고생부터 성인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관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중고생들이 과학관에 오겠냐고 하지만, 해보니깐 중고생들이 많이 와요.


두 번째, 컨셉은 보고 강의 듣는 과학관이 아니라 직접 뭔가를 하는 과학관으로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실험을 직접 해 보는 겁니다. 이런 과학관은 해외 선진 사례도 없습니다. 정작 저희 과학관에서 이렇게 하니깐 소문이 나서 런던의 사이언스 갤러리에서도 오고, 샌프란시스코의 과학관에서도 두 번이나 방문을 했습니다. 장비를 갖춰 나가고 교사들과 협력을 하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해외 과학관 직원들은 상당히 관료적인데 우리나라 교사들은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조적입니다.




Q: 요즘 기성세대가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유튜브를 통해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거나 유사과학과 같은 것이 보급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정보라도 과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게 좋은지, 아니면 과학을 바르게 알리는 것이 좋은지, 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A: 일단 저는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입장입니다. 과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보다는 유사과학이라도 관심이 있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그나마 그런 쪽에 관심이라도 있으면 이야기하고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있기 때문이죠. 교회에 전혀 관심이 없는 친구보다 교회가 싫은 친구가 차라리 나을 수 있어요. 관심이 아예 없는 친구는 어려워요. 뭐라도 하려는 친구는 관심이 계속 바뀌더라도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생각도 안 하고 몸도 안 움직이는 친구는 오히려 더 힘들어요. 유사과학이라도 그 친구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창조와 진화에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보다는 창조과학에 빠져있는 친구들이 차라리 낫다고 봅니다.    


한편 과학자들도 적절하게 타협을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는 욕을 좀 먹어가면서 일을 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약간 순결주의에 빠져있기도 합니다.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Q: 요즘은 정말 사회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 힘든 거 같습니다. 특별히 과학이 가져다주는 삶의 변화는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고민과 걱정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A: 최근에 택시 카풀을 한다고 말이 많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게 반대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세상은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자동차의 90%는 서 있습니다. 대부분의 차는 주차장에 있고 10%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원들이 낭비되고 있습니까? 만약 지금 있는 자동차의 1/5만 있다면, 사람들이 자기가 필요한 시간에 앱으로 차를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을 태워서 가다가 또 다른 사람을 태우고, 그렇게 자기가 간 거리만큼의 요금을 지불한다면요? 그러면 되잖아요? 그럼 지금 택시 기사들의 생존권은 어떻게 할까요? 보조금을 줘야죠. 점점 택시를 줄여가면서 다음 직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죠. 자율 자동차도 순식간에 올 거 같습니다. 자율 자동차의 사고를 걱정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자동차 사고를 내는걸요. 자율 자동차의 책임은 법적으로 정하면 됩니다. 이런 것은 기술적인 문제입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해야죠.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복지입니다. 우린 지금 너무 일을 많이 합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하루에 3시간만 일하면 먹고살았습니다. 신석기 사람부터 아프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또 얼마나 일을 많이 합니까? 우리는 시간을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거죠. 저는 앞으로 인공지능과 로봇이 발전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민주주의가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넓고 깊은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기술에 종속될 수 있기 때문이죠.




Q: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풀어야 할 숙제 아닌가요?


A: 네, 좋은 질문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너무나 아픈 거죠. 제도는 정착되지 않았는데,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많아지는 거죠. 그래서 순서가 바뀌어야 하는 거죠. 플랫폼이 바뀌기 전에 복지가 먼저입니다. 오늘 아침에 경향신문에서 장하준 교수 인터뷰가 나오던데, 더 왼쪽으로 가서, 더 많은 복지를 하라는 거잖아요. 전 그게 옳다고 봅니다. 일단 안심이 돼야 합니다. 안전한 사람이 더 대담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직장을 그만둬도 우리 집이 여전하고, 내가 아파도 치료받을 수 있고, 다시 일자리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왜 우리가 지금 일자리에 얽매이겠어요. 얼마든지 다른 길로 갈 수 있죠. 어차피 사양사업이라면 없어질 직업에 매달리지 않고 하루라도 일찍 다른 길로 갈 수 있겠죠. 이런 것을 정치로 해결해야죠.


이런 부분에서 교회가 선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봐요. 예전에 제가 어릴 때,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회장 선거가 있었어요. 학급회의를 인도하는 회장을 우리가 선출한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 회장 제도가 없어졌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저희들은 교회에 가서 투표를 해 봤어요. 교회 중등부, 고등부 회장 선거, 임원 선거를 해 본 거죠. 교회에는 민주적인 제도가 남아 있었어요. 목사를 위임할 때도, 장로를 선출할 때도 투표를 했어요. 그 당시 민주주의 훈련을 교회에서만큼은 꾸준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교회가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었죠. 요즘은 가장 보수적인 곳이 교회죠. 가장 많은 가짜 뉴스의 생산지죠.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교회가 한 20년만 쉬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교회가 개혁될 수 있는 틈이 없어요. 일단 문 닫고 세대를 바꾸고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한 세대가 지나간 다음에 우리가 마치 처음 선교를 받듯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겠어요.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 욕하는 게 이해가 돼요. 사람들이 교회에게는 더 높은 희생, 더 높은 이상을 기대하잖아요. 이제는 그냥 평균만이라도 해라.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역행을 하고 있으니까, 이럴 바에는 차라리 새 출발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Q: 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저희 과신대도 지금까지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뤘습니다. 앞으로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A: 네, 맞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의 이야기잖아요. 지금의 사람들은 과학과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인공지능, 자율 자동차, 여섯 번째 대 멸종, 환경의 문제들 같은 것을 고민해야죠. 우리가 옛날 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E. H. 카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옛날 일을 통해서 지금을 비춰보고, 옛날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지금을 보기 위한 것이죠. 지금 우리 시대의 과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단순히 답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일이면 답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의 과학은 답이 없으니까, 더 토론하고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거죠.


Q: 관장님께서 많이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 시대에는 전문 연구가와 대중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커뮤니케이터가 필요한 거 같습니다.


A: 저는 과학계에서도 대학에서 나와 밖에서 활동하고, 신학교나 교회에서도 밖으로 나온 신학자가 필요하다고 봐요. 대학이나 교회라는 플랫폼이 이제는 옛날 플랫폼이에요. 누군가는 새롭게 도전할 필요가 있어요. 플랫폼은 계속 바뀝니다. 우리가 그 플랫폼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대학과 교회는 비용만 많이 들고 소통도 잘 안되고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플랫폼입니다. 새로운 플랫폼이 뭔지는 모르지만 계속 고민을 해야죠. 연습하고 적용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야죠.


Q: 저희 과신대가 앞으로 어떤 주제들을 다루면 좋을지 조언 부탁합니다.


A: 실제로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창조와 과학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이슈가 아닙니다. 결국 과신대도 지금 과학의 이슈를 다뤄야죠.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테죠. 사실 세상을 바꾸는 건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술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예를 들어 카풀이라는 앱 제도, 이런 문제를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고민을 해야 할까? 우리는 누구를 위로해야 하는가? 자신들의 역할을 찾아가야죠. 유전자 편집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건 하나님의 역사에 어긋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 그럼, 간 이식은? 각막 이식은? 그런 건 하나님의 역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럼, 항생제는?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가 어디까지를 고민해야 하는지 계속 묻는 거죠. 미숙아가 태어나면 우리는 인큐베이터를 통해서 억지로 살려내잖아요. 이거 우리가 해도 되는 거야? 사람들은 당연히 해도 된다고 말하겠죠. 그럼 편집된 아기들은?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성도들과 이야기를 나눠야겠죠. 이런 것이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아닐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조냐, 진화냐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기독교인들이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만을 믿는다고 해보죠. 뭐가 문젠가요? 세상에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갖고,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진짜 큰 문제죠. 진화를 안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창조만을 믿을 경우, 사람들에게 조롱은 당할지언정, 이 세상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작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조와 진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 정도 논의하고 적당한 매뉴얼을 만드는 것으로 종결을 지으면 좋겠습니다. 1년에 한 번 정도 그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내용을 업데이트하는 걸로 끝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귀국해서 지금까지 계속 이런 문제로 질문을 받으면 그냥 우종학 교수님의 <무크따> 읽어 보라고 보내줘요. 그게 제일 좋아요. 저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 항상 그런 질문을 해서 그냥 <무크따> 보내주고 말아요.


*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 저희 과신대에 훌륭한 과학자들을 많이 소개해 주세요. 장시간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 늦가을 국립중앙도서관 근처 카페에서 김흡영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김흡영 교수님은 강남대학교에서 오랜 시간 종교 간의 대화,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 국내 1세대 과학신학자입니다. 꾸준히 해외 저널과 저서에 글을 기고하시고 최근에는 트랜스휴머니즘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다고 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실장

인터뷰이 | 김흡영 교수

사진/글 | 최경환 실장



1. 교수님은 언제부터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요?
  
본래 저는 서울대학교 공대를 나왔고, 과학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고 싶었죠. 나중에는 우주에 못 가지만, 영적인 우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신학을 공부하게 됐고,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 가서 과학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학교에 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라는 연구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Robert John Russell과 Ted Peters을 만났습니다. 이분들이 저의 스승이자 친구입니다. 이분들과 함께 저는 아시아 지역을 맡아서 한국에서는 4개 대학(장신대, 한신대, 서울여대, 강남대)에 ‘종교와 과학’ 정규 과목을 개설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동안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주로 서구 신학을 기반으로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서구적인 맥락에서는 신학과 과학이 분리가 안 됩니다. 둘 다 서구적인 학문입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도 결국 과학적인 사고입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한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초자연과 자연이라는 이원론을 극복한 동양적 사고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둘의 간극을 극복한 것이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도교와 유교였고, 이 두 전통은 자연 안에 이미 초월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월적 내재를 말하고 있죠. 서구 신학에서는 이 둘이 같이 가기 어렵죠. 그래서 저는 동양신학, 특히 한국신학적인 입장에서 서양신학이 가지 못하는 새로운 모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서구의 학자들이 종교와 과학의 대화나 생태신학에 대한 논의가 나오면 지속적으로 저한테 원고를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꾸준하게 1년에 2-3개씩 글 요청이 들어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신학과 과학이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요? 평소 교수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신학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것입니다. 비기독교적인 토양 속에서 혹은 기독교적인 토양 속에서 과거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또 현재의 신학,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모두 연결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신학은 과거를 잘 배우지도 않고, 미래를 이끌어 가는 과학도 잘 배우질 않습니다. 서양의 신학만을 번역하고 공부하기 바쁘죠. 
  
무엇보다 대화가 중요합니다. 대화의 기본은 자기 입장을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서로 열린 입장에서 담을 허물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대화에 들어가면, 전도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단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듣는 자세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나 과학주의자들과도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문자주의나 교리주의로는 대화가 힘들겠죠.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도 다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이 중요하죠. 나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를 열어놓고, 이웃을 품는 자세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정죄하는 자세로 대화를 하면 안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가슴에 품고, 상대방의 입장을 들으면서, 서로 소통을 하는 것이 대화의 방법입니다. 나의 신학을 과학과 대화하면서 폭넓게 지평을 넓히는 겁니다. 과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신학적인 지평을 넓히는 것이죠.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2차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고 나서 자신만의 새로운 신학을 구성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정도 규범적인 틀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사용될 신학입니다. 교회 밖에서 사용할 용도가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이걸 주장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설교 밖에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치열하게 새로운 신학을 위해 고민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3. 그렇다면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중요한 주제는 트랜스휴머니즘이나 인공지능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는 과학의 시대, 특별히 기술의 시대입니다. 생명과학과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의 발달은 지금 실험실에서 이뤄지고 있고, 현재 우리의 삶을 이끌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들도 핸드폰에 끌려가고 있잖아요. 과학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 창조와 진화 논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쩌면 당장 급한 것은 인공지능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따져봐야 합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이 나타나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어떻게 되는지 고민해 봐야죠. 그러니 우리는 현대의 과학자들과 공학자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근대주의가 인간중심주의로 흘러가니깐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트랜스휴머니즘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다음이 트랜스휴머니즘입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 과학을 알아야 합니다.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신문이 아니라,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과학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고, 실험실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체크해야 합니다. 지금 벌써 사이버 교회가 나오고, 인공지능이 설교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도 준비를 해야죠. 
 


4. 새로운 과학의 발전과 도전 앞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기독교는 항상 새로운 도전 앞에서 정화가 됐습니다. 이제 가짜 설교, 가짜 목사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영적인 교류를 통해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진짜 목사가 나와야 합니다. 진짜 목사, 진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죠. 인공지능은 신학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미래의 트랜스휴머니즘은 기독교에 하나의 도전을 줍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진짜냐? 기독교가 말하는 참 인간은 무엇이냐? 신론에도 도전을 줍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인공지능이 다 하는걸요.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무엇인가? 그래서 저는 십자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넘어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종말론에도 충격을 주죠. 그동안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는 나라를 소망했는데, 이제 과학이 그것을 해 주겠다고 하잖아요. 그럼 기독교는 뭐가 다른 거죠? 그러니 신학이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기존의 틀로는 안 됩니다.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칼 바르트는 신문을 보고 기도를 한 신학자입니다. 어쩌면 나치에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이 기도에서 나온 겁니다. 이제는 최첨단의 과학 소식을 접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은 겸손하게 공부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미 은퇴를 했습니다. 이제 후배들이 이어받아야죠. 새로운 주제들이 계속 쏟아지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과신대는 열정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이 분야에 공헌을 해 주길 바랍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이번 달에는 제3회 과신대 포럼에서 강의를 해 주신 감신대학교의 박일준 교수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저희 과신대 자문위원으로 섬겨주시기로 했습니다. 평소 과학과 신학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학제간 연구에 관심이 많으신 교수님을 만나뵙고 최근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다음 기회에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또 있겠죠~ 


인터뷰어 | 백우인, 심기주 기자

인터뷰이 | 박일준 교수

사진/글 | 심기주 기자



Q: 교수님이 번역하신 자연주의적 성서해석학과 기호학: 해석자들의 공동체에서 해석자들의 공동체가 바울 공동체를 뜻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요즘 바울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정의에 대한 해석도 새롭게 해석하고 있고요. 교수님도 정의에 대한 책을 내셨는데 거기서는 정의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A: 시중에 나와 있는 바울에 대한 책은 바울에 대한 것이지 바울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죠. 바울 공동체와 바울이 같은 것은 아니예요. 초대교회를 얘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초대교회가 공동체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공동체끼리 모여서 존재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공유하기 시작하죠. 그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라고 말했던 아이디어는 지금의 아이디어와는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여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이러는 게 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러운데, 그 당시에 여자는 존재가 아니니까 같이 모여서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어요. 그것이 기존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그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건 당시의 체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죠.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것과 정반대인지도 몰라요. 자기가 믿고 생각하는 바를 향해서 운명을 기투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잖아요. 한국인들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그 속에는 기도의 본래적인 목적, 하나님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남편의 승진, 가족의 건강, 뭐 이런 것, 아마 기도 제목을 간추려보면 대여섯 가지 카테고리 안에 다 들어가 있을 거예요

 

우리는 오랫동안 친해져서 서로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어울려 살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공동체가 아닐 수도 있어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철학자 김영민의 책에 나와 있는 구별을 따르자면) 동무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같이 사는 사람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지 눈감아주는 것, 그리고 그 관계가 상할까 봐 침묵하고 못 본 척 외면하는 것. 친구라는 것이 오랫동안 익숙해진 얼굴이잖아요? 그런 관계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지만, 그 공동체는 굉장히 이기적이라고 할까요? 동무는 그와 달리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길을 가는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라는 것은 서로가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그런 관계에요. 그게 없다면 공동체는 아무 기능을 하지 않아요. 그냥 속된 말로 이익을 공유하는 깡패들의 공동체죠. 그걸 위해 이익집단을 형성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거죠. 해석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세상을 보고, 생각하고 그런 것을 어떻게 지향해 나가는지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석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죠. 정의(justice)는 하나의 샘플이겠죠. 정의라는 것은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정의라는 게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가 정의 꿈꾸는 게 아닙니다. 정의가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초대교회가 대표적인 샘플이 될 수 있죠. 그들은 정의를 부르짖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공의를 얘기할 때는 있어도 정의를 부르짖은 게 아니죠. 그들은 그저 함께 모여서 예배하면서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모임 자체가 그 시대 사람들이 꿈꾸지 않았던 것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공동체가 그런 차원을 갖고 있느냐? 그건 참 어려운 질문이죠. 그걸 갖고 있어야만 기독교 공동체라고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교회의 중요한 정의(definition) 중 하나임에는 분명해 보여요. ‘남들이 꿈꾸지 않는 어떤 것을 꿈꿀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을 향해 함께 달려나가는 공동체’.

 


Q: 그러니까 말하자면 현재의 상황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정의를 말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A: 현재가 정의롭지 않다는 자각 자체가 많은 경우 기존의 우리들의 판단일 수 있어요. 초대교회의 기준을 얘기했던 이유가 그런 거예요. ‘현재 이런 잘못이 있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이미 선과 악의 기준이 거기에 투사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를 들면 초대교회의 여자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가 전혀 아니에요. 그 시대 사람들은 동등하게 만나서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어요. 예를 들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놓고 유대인들이 묻잖아요?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요. 법에 쓰여 있잖아요? 그리고 그게 상식이고. 율법에 돌로 치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그냥 법대로 하라고 그러면 돼요. 법대로 해야 하거든요. 답이 정해져 있어요. 옳고 그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법대로 하라고 안 했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론 대답이 황당하고 엉뚱했죠. 그 뒤의 얘기는 우리가 다 알죠. 죄 없는 사람들이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니까 다 도망갔다고. 거기서 도망친 사람들이 비겁해 보이긴 하지만 도망갈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용기인지도 몰라요.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거기서 현실이 부정의하다는 인식으로부터 생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얘기 때문에 뒤로 물러서면서 정의를 말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대략적으로는 말씀하신 것이 맞기는 해요. 그런데 중요한 맥락에서 혼동될 수 있어요.

 

 


Q: 학제간 연구 혹은 융합학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이런 것이 학문 하는 데 있어서 어떤 필요성이 있을까요?

 

A: 굉장히 단순한 이유죠. 가장 기본적으로는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해야 해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녀 간에도 그렇잖아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한 언어나 어투나 마음가짐 등이 익숙해질 필요가 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그게 안 통한다 그러면 시작조차 못하겠죠. 그래서 아마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현재 연구재단 등에서 하는 융복합이라는 말과 학제간이라는 말과는 다른 측면이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 시대의 안락사, 낙태, 동성애 문제를 얘기할 때, 신학자가 아니면 윤리학자가 앉아서 자기의 지식만으로 결정할 수가 없어요. 삶의 문제는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 체계는 한쪽으로만 전문화되어 있잖아요? 이게 100년 전부터 제기된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의 문제거든요. 예를 들어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안락사의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정치적인 성향을 섞어서 얘기한다고 할 때 생기는 문제는 지식인을 가장한 사이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걸 할 때 자기의 한정된 지식에 근거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이 문제를 다른 측면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만나서 서로 뭔가를 같이 결론 없이생각해보는 거죠


현재 연구재단 등에서 얘기하는 융복합(fusion)이라는 것은 제 생각에는 가능할지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서 안락사 문제나 동성애, 낙태 문제를 얘기할 때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결혼과 비슷한 것 같아요. 결혼할 때 둘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주례사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 건 가장 잘못된 주례사 중 하나에요. 둘이 하나가 되면 하나의 목소리가 억눌리는 게 대부분인 거 아닌가요? 누구의 목소리가 억눌리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의 정치학에 달려있어요. 하나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를 대변하고 다른 한 목소리는 억압되고. 그러니까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제국이나 인간 조직에서 가부장적인 질서체계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고, 실질적으로 결혼 생활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둘이 둘이 되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야 해요. 융복합이라는 말이 복합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면 괜찮겠지만, 대부분 우리가 쓰는 의미는 여러 학문이 모여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그것들이 모여서 또 상위의 것을 만드는 그런 개념이면 곤란합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것들이 모이면 그것 자체가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주거든요.

 

보스턴 대학의 신학 교수 웨슬리 와일드먼(Wesley J. Wildman)Inter라는 말을 이제 쓰면 안 된다고 했어요. 예를 들어 안락사 문제를 얘기할 때, Inter라는 말은 둘 사이라는 말이거든요. 예를 들어, 과학과 신학 사이라는 건데 과학도 하나가 아니거든요. 여러 분야가 있고, 신학도 여러 분야가 있는데. 그래서 Inter라는 말 대신에 multi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래서 multidisciplinary studies라고 얘기할 때는 여러 개를 그냥 짬뽕시킨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태를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이죠. 90년대부터 사태를 획일적으로 보기보다는 중층적으로 까다롭게 보자는 생각들이 지식인들 사이에는 있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은 단순하고 쉽고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서 설명하는 것을 자꾸 찾죠. 거기에 시대적인 괴리감이 좀 있어요. 아직도 학제간의 대화라는 말을 쓰긴 하는데 이건 마치 둘이 하나라는 말처럼 사실 잘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Q: 아까도 잠깐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를 하셨고, 저번에 장신대에서 캐서린 켈러(Catherine E. Keller) 교수도 오셨을 때, “신학과 페미니즘의 대화라는 주제로 열린 강좌에서 교수님의 강연을 들었었는데요. 페미니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A: 특별한 계기는 없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풍조가 그런 것 같아요. 초대교회 때 비존재로 간주되던 이들을 기독교는 말하자면 형제와 자매로 불렀던 거잖아요. 아무도 그들이 서로 동등한 인격이라고 말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귀족으로 태어났는데 내가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든 것도 아니고 더 착취한 것도 아니야.’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하대하고 노예처럼 대해도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비존재로 간주되는 사람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간주한다.’ 거기에 이제 말하자면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출발점이 있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페미니즘과 신학적으로 비존재에 대한 관심이 좀 다른 건, 페미니즘은 여성이 이제까지 무시당했던 당연히 찾아야 할 인권에 관심이 많다면, 신학적으로 여성이나 비존재를 다룰 때는 모든 사람의 인권의 관점이 아니고, 나와 동등한, 혹은 나와 반대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예요


예를 들어 귀족이 노예를 이해할 수 없죠? 우리가 지금 인권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저 사람이 나와 동등한 인권을 가졌어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에 훨씬 가깝지 않을까요? 내가 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사실은 우리들 마음속에 사랑을 한다고 하면, 리차드 도킨스의 이론을 적용하면 유전자가 나로 하여금 어떤 대상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도록 하는 것뿐이잖아요? 그래서 본능에 의해서 기계화된 과정속에 사랑한다는 생각이 생긴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설명인데요.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기계화된 과정에서 생겨난 잉여인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사랑한다고 얘기하지만 모두가 다 알 듯이, 모든 것이 다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측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서 유전자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이러이러한 타입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화학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어야 해그런데 모든 사람과 그런 게 다 발동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구체적으로 내가 왜 이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되었을까라고 하는 것에는 물론 생물학적인 토대도 있지만 그 위에서 전혀 변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내가 생물학적 남자니까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기본적으로 기계적인 생물학적인 과정으로 성욕이 발동을 해서 사랑이라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왜 모든 이들이 아니라 하필 너인 거지?’라고 물어봤을 때 그건 모른다는 것이에요. 상대방에 대한 인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거죠. 나와 다른 존재인데 그 존재를 안다고 했을 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안다고 하는데 그건 내 생각이지 상대방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죠.

 

우리 시대 기준으로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잖아요.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 ‘To be’. 우리 시대 사람으로 말한다면 예를 들어, 명문대생이고, 소위 말하는 대기업 다니고 통장 잔고에 얼마가 있고. “있는 사람들이죠. ‘존재하는 사람들이죠. ‘타메온테하나님은 없는 사람을 선택한다고 했지 있는 사람을 선택한다고 하지 않았거든요. 없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Those who are not. 존재하지 않는 거에요.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죠. 이게 묘하게 자본주의의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 아니겠어요?

 

인권이라는 것도 기존의 어떤 도덕적인 판단을 전제로 하잖아요?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자들을 인식한다는 건 기존에 없던 상상력이어야 하죠. 그래서 우리가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전제하는 이야기가 기존에 우리가 판단하는 있고 없음, 기존의 도덕적 윤리적인 시스템과 맞물려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 페미니즘이 진짜 페미니즘일 수 있으려면 도너 해러웨이나 로지 브라이도티 등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동물들, 식량으로 쓰이기 위해 닭장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 이제껏 듣지 못한 환경의 소리 등 이 시대에 비존재로 간주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남자는 특권층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서 비존재들을 볼 수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남자는 인구의 절반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정점에 있는 한 남자에요. 그래서 정점에 있는 남자의 특권이 맨 아래에 있는 남자가 갖고 있지는 않거든요. 페미니즘의 기본은 가부장제를 극복하는 거지, 가부장제를 예속해서 그 사람들을 파문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존재한다고 믿지만, 한 번도 존재한 적은 없죠. 다만 이게 아닌데하는 걸 우리가 현실에서 보면 이건 아닐 것 같다는 느낌, 감정그런 건 있죠. 이것이 도덕이나 윤리와 다른 점이죠. 도덕이나 윤리는 기존에 우리가 가치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요. 그런데 비존재는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을 가지고 가면 파악이 안 됩니다. 기존의 판단 기준이 없는 것을 가지고 가서 정의이나 사랑 평화 등을 판단하려면 거기에 모든 이 가치 판단의 기준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의 소리가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요즘의 철학이 신학으로 귀환하는 중이에요. 자크 데리다도 말년에 환대라든지 선물이라든지 굉장히 신학적이었거든요. 타자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환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선물이라든지. 데리다가 원래 해체로 유명한데 말년에는 굉장히 신학적인 시각을 많이 보여줬어요.

 

  

Q: 이번에 과신대 자문위원이 되셨잖아요? 과신대가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 일도 하고 있거든요. 혹시 사역이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과학과 신학이라는 주체의 만남을 얘기한 것은 꽤 오래되었어요. 하지만 이 모임이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어요. 신학자들이 과학에 무식한 경우가 많고, 과학자들은 신학에 무식한 경우가 많아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이슈인 동성애 문제가 나오면, 자꾸 교리나 성경을 찾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반박하는가, 침묵하는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변질이 되거든요. 그래서 사실 과학과 신학이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임이 정말 긴급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좀 더 진척을 시킨다면 신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과의 담론의 틀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 중에 이렇게 우종학 교수님처럼 평신도인데 이런 모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게 신선했어요. 사실 종교개혁이 평신도들의 참여로 가능했거든요. 앞으로 한국 사회, 한국 기독교에 큰 역할을 하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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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과신대 <기초과정I>을 수료하고, 이어서 <기초과정II>에 참여하고 계시는 오세조 목사님(팔복루터교회 담임)을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생물학과 진화과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신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독특한 이력이 궁금해서 직접 만나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오세조

사진/글 | 최경환



Q: 목사님 간단한 소개 부탁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석사 과정에서는 분자유전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박사에서는 의과대학에서 면역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포닥 과정을 하다가 그곳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2013년에 루터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2017년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준목을 하다가 갑자기 목사님이 사임하셔서 올해 7월에 안수를 받고 담임목회를 하게 됐습니다. 박사과정에서는 음식물 알러지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Q: 어쩌다 신학을 하시게 됐나요?


저의 신앙적 배경은 성결교입니다. 어려서부터 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생물을 전공하고, 석사에서도 ‘양서류의 종 분화’에 대한 것을 연구했습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진화론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어색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포닥을 할 때,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 가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가 다 돌아가셨는데, 그때 의학이 별로 도움이 안 되더군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10년 넘게 공부한 내용이 인간의 삶과 죽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목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저의 결정이 일시적인 것이지 주님의 소명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Q: 그런데 왜 하필 루터교회였나요?


저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신 분이 계신데, 그분이 루터교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때 제가 성경에 눈을 떴습니다. 저는 루터신학을 공부한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낯설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기존교회에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믿음이 저하고는 잘 안 맞더라고요. 너무 율법적이고 목사님을 너무 높이 보는 것이 싫었습니다. 루터신학을 공부하면서 저의 고민을 풀고, 같은 고민을 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루터교를 선교한 것은 미국의 미조리 시노드(Lutheran Church–Missouri Synod)였습니다. 굉장히 근본적인 시노드였고, 아마 젊은지구 창조론을 지지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학교에는 신학적으로 열려 있는 분들이 많이 있으세요. 물론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도 많이 계시고요. 어느 신학교나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루터교가 국내 선교를 한 것은 1958년이고, 국내에는 50여개의 교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희는 기존 교회를 섬긴다는 마음으로 문서선교와 방송선교를 주로 했습니다. 베델성경연구가 유명하죠. 그러다가 교회를 늦게 시작했습니다. 총회에서 교회를 관리해서 개척을 지원해 줍니다.




Q: 과신대 기초과정 강의는 어떠셨나요?


사실 제가 기초과정을 두 번 들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4기 두번째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수업을 안 들었기 때문에 5기 수업을 다시 들었죠. 수업 내용은 좋았습니다. 교회에서 할 수 없는 얘기들을 듣고, 같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어요.


기억에 남는 것은 강의가 끝나고 어떤 친구가 했던 질문이 생각나요. 그 친구가 강의를 듣고 너무 좋았나 봐요. 그래서 이걸 교회에 가서 알려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되냐? 질문 하더라고요. 그때 우종학 교수님께서 대답을 어떻게 해 주셨냐면, 질문으로 다시 바꾸셔서, ‘왜 굳이 이것을 교회에서 말하려고 하냐?’ 하셨어요. ‘기존 교인들과 이 문제로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라.’ 이렇게 조언을 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 저건 목회자 마음인데’ 했죠. 굳이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거죠. 다만 우리는 교회에서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제 기억에 남아요.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가르쳐라. 대신 아이들의 상상력을 막지 말라.’ 이런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교리가 중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교리가 화석화되면 안됩니다. 교리와 믿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교리화된 믿음이 조금 답답합니다.


제가 요즘 수원남부 북클럽 준비를 위해 분당 북클럽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진행하는지 배우러요. 그런데 모임에 참석하면서 ‘목회자들이 공부 안 하면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평신도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목사들 큰 일났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옛날처럼 목회자가 권위만을 내세우면 안 되겠더군요. 평신도들의 신학 수준이 상당합니다. 평신도들이 보다 근원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궁금해 합니다. 옛날 신학 가지고는 안 됩니다.


Q: 과신대에 기대하는 바를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 과신대가 이런 사역을 하면 좋겠다.’ 조언 한 말씀 해주세요.


과신대가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혹은 반대로 신학적인 관점에서 과학을 연구하는, 이 양쪽의 접근법을 모두 잘 소개해 주면 좋겠습니다. 또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더 튼튼해지려면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성경관, 성경해석이 중요합니다. 너무 민감한 주제에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기초적인 성경공부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 과학에 대한 공부를 진지하게 더 해야 합니다. 진화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양쪽 공부를 모두 해야 합니다. 어쩌면 과신대는 신학쪽 책들을 많이 읽는데, 북클럽에서 과학책을 더 읽으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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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2018년 8월 29일 서울신학대학교 정문 앞 카페 '이유'에서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박영식 교수님(서울신대 조직신학)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창조의 신학』(동연)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그 책의 내용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이 많아 두 번에 나눠서 소개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박영식

사진/글 | 심기주




[과] 바벨론 포로 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흑암이 '이런  뜻하는 구나'라고 받아들였을지, 아니면 그냥 내러티브로 받아들였을지 궁금합니다.


[박] 개개인의 심리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고대 세계의 표현방식사고방식을 우리는 은유라고도 얘기하고 신화라고도 얘기하지만, 당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같아요당시 사람들에게는  표현이야말로 가장 자기들의 삶에 익숙한 표현이었다는 거죠실제로  세계를 혼돈의 세계흑암의 세계로 경험하는 거죠오늘날 우리는 홍수가 나면 여러 과학적인 관심을 갖고서 비가 몇 mm 왔는지, 어디가 침수지역이고, 어디가 안전한지 관찰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이거든요이거는 우리 지역은 홍수 나고  동네는 괜찮고가 아니고,  세상이 물에 덮인 거죠탈출구가 없는 거죠이게  아주 진정성 있는 표현보다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요우리가 흔히 창세기 1장이 바벨론 신화를 빌려왔다 어떻다 하지만,  바벨론 신화도 그 당시 현실 세계에 대한 반영이거든요그러니까 이게 그냥 문학 작품의 표현이 아니고 실제 경험 속에서 나오는 언어들이죠실제로 우리도 그런  있잖아요보통 때는 학문적인 이야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 속에서 나오는 언어들은 보다  1차적이고 근원적인 언어가 나오잖아요그런 언어들이라고  수가 있죠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성서의 언어들이 당시 사람들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언어지 오늘날 우리가 분석하듯이 2차적으로 은유인가 비유인가’ 이렇게 접근했던 언어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그들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세계를 표현한 거죠.


[과] 책에서 진화를 다뤘는데해외에서는 신학자가 진화를 다루거나 설명할   부담이 없는데 우리는 아니잖아요. 신학자로서 진화를 언급할 때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박] 맞아요. 예전에 제가 강남의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 어디 가셨다고 1부 예배부터 4부 예배까지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때 진화 얘기도 아니고 노아 홍수 이야기를 조금 하면서 '창조과학식으로 노아 홍수를 이해하는 것은  무리인  같다'라고 말했는데, 1부 예배가 끝나고 수석 부목사님이 올라오시더라고요. “목사님 그렇게 설교하시면 안됩니다앞으로 2, 3, 4부가 있는데 우리 교인들은 온누리교회 출신들이 많아요.” 그러셔서 알겠다고 했죠 있다가 다른 부목사님이 올라오신 거에요. “아휴 목사님 오늘 설교 너무 감사합니다이거 우리 청년들이 모두 들어야 할 설교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러는 거에요교회 내에서 관심사들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죠.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진화가 과학적으로 옳다 그르다' 그런  제가 주장해봤자 권위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고(말이죠). 그게 아니라 진화라는 틀을 우리가 수용한다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을성서를 충분히 이해할  있다이게 서로 대립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요소는 아니다.’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생물학자들마다 어디부터가 진화고 어디부터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제가   진화라는 단어가 주는 역동성이  속에  담겨있다고 봅니다.  역동성은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굉장히 필요한 관점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고 창조를 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는 진화가 주는 언어의 역동성을 우리가 충분히 수용할  있고 신학적으로 좀 더 생물학적인 의미와는 다른 빛깔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이건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앙의 선배들도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이어서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그분들이  창조론을 보면 창조를  가지로 나눴거든요. “태초의 창조(creatio originalis)”,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마지막 창조 또는  창조(creatio nova)”라고 해가지고 벌써  가지로 나눠놨어요이게 벌써 교리적으로 300~400  이야기인데, 우리는 창조할  태초의 창조 생각합니다그러나 이미 기독교 교리 속에 루터파 정통주의개혁파 정통주의 모두 계속되는 창조를 말해 왔거든요 계속되는 창조를 우리는 흔한 말로 '섭리'라고 하는데 섭리라는 말을 하면서 창조가 갖고 있는 풍성함이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아무 때나 섭리라고 써버리니까자기 뜻대로  건데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버리니까 말이죠그런데 사실 이게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주체는 하나님이잖아요내가 아니라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했고그리고 끝내버리는  아니라 계속 창조하고 계시고  창조를 완성하신다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처음과 끝, 그리고 지금도 창조활동 속에서 행하신다는 이야기가 돼죠그런 관점에서 봐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섭리보다 폭이 훨씬 넓고, 생물학적인 진화도 충분히 수용 가능합니다. 그런 패러다임이 이미 기독교 신학 안에 있는데 그걸 우리가 잊어버리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창조는 예전 얘기로 끝났고 우리는 지금 타락했고 그런데 이젠 구원받아야 하고그래서 중요한  구원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 창조라는 패러다임은 끊긴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는 창조 일어나고 있는 거죠저는  부분을 조금 강조하고 싶었던 거고요섭리라는 부분이 너무 우리 일상과 연관해서 자기 마음대로 작위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방지해야겠습니다그래서 계속되는 창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계속되는 창조라는  단순히 우리 일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라는 범위영역 전체를 포괄하는 창조라는 점에서 오늘날 환경문제 이런 것도 우리가 같이 고민할  있는 중요한 기틀이 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런 면에서 창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하나님은 계속 창조하시는 분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면은  틸리히 같은 사람은 창조를 "하나님의 창조적 힘이다!" 이렇게까지 말했죠여기에 몰트만 같은 사람은 약간 비판도 하지만  충분히 틸리히의 관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는 일어난다고 봅니다하나님의 섭리가 멈추지 않는다고 우리가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창조도 계속 일어나는 것이죠그런 면에서 창조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바로  곁에 있는 사건입니다사실  분이 저를 찾아온 것도 창조적인 사건인 거죠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지금 만나서 밥 먹는 것도 창조적인 사건이죠내가 생각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이런 창조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은 끊임 없이 우리 속에서 같이 동행하면서  표현으로 하면 끊임없이 가능성의 창들을 열어놓고 계신다.”  그렇게 보고요그런 표현들이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가서 무로부터의 창조, 혼돈으로부터의 창조처럼 우리에게 고난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거죠.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하나님은  섭리하지 않으시지? 하나님은 일하시는가?' 이게  창조에 대한 질문인데, 그럴 때도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것처럼  수면 위에 계신 거죠. 거기 계시면서 하나님은 창조의 문을 열어놓으신 겁니고난 당한 사람은 우리가 흔히 절망한다고 하잖아요절망한다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건데,   하나님은 새로운 문을 열어놓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세요 우리는 눈을 뜨고  길을  수도 있고 눈을 감을 수도 있고.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지금까지 없던 길들을 보도록 유도하시고 인도하시고저는 그런 면에서 창조라는 것이 아주 거대한 세상없던 기계를 새로 발명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도 자잘한 일들 속에서도 창조가 익숙한 개념이 되었으면 좋겠다그런 생각입니다.



[과] 가장 중요한 주제일 듯 한데요. 창조나 환경을 강조하며 일상에 주어진 것들을 누리고 감사하며 사는 삶은 세상에 대해 너무 낭만주의적인 시각이 아닐까요? 지금 세상은 굉장히 불의하고 고통받고 어그러진 세상이라고 본다면, 여기에 저항하고 치유해야 한다는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악과 고통하나님의 창조의 선함과 신비가 동시에 가잖아요 사이에서 대안을 설명해주실  있으실까요?


[박] 하나님은 새로운 질서를 계속 만들어내시는 분이지 정해놓은 질서에 우리를 붙잡아 두는 분이 아닙니다. 창조라는  옛날에 끝나버렸고, 만들어 놓은 틀에 맞춰서 돌아가야 하는게 아니죠.  하나님이 새로운 질서를 계속 만드신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질서라는 개념은 창조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과거로 회귀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 새롭게 나아가야 할 개념으로 봅니다. 우리가 흔히 던지는,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다는데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도 물론 사변적으로 여러가지 대답할  있겠지만우리가 서있는 현실에서  질문을 다시 곱씹어보면 거꾸로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이렇게 악과 고통이 있는데, 과연 여기에 새로운 질서의 세계가 만들어질  있는가과연 여기에 창조가 가능한가?' 이렇게 질문했을  성서의 대답은 가능하다라는 거죠우리가 경험하는 악과 고통이 있는 현실세계는 하나님이 만들어가실 창조세계와 대결국면에 있고, 혹은 그런 과정 속에 있다고 보는 거죠. 그러나 그 세계가 현실세계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현실에 순응하고 덮어두기보다는 우리가 이 땅을 극복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아름다운 것이 많아야 할텐데 악이 많은 이유는 뭘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모든 물리적 세게에도 자유가 있습니다. 실제 우리 세계는 인과율로 얽매여 있는 세계가 아니라 보다 우연적이고 자유로운 작용이 많은 세게입니다. 이런 자유로움이 많은 세계가 악이라는 예기치 못한 것의 근거가 될 수 있겠죠. 물론 선이 일어날 수 있는 근거도 될 수 있고요. 


우리의 물리세계는 마치 축구 경기와 같습니다. 축구경기를 볼 때, 감독이 직접 축구경기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축구경기가 감독의 영향 없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마치 하나님은 감독과 같습니다. 물리 세계에서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죠. 손흥민이 골을 넣었을 때, 골을 넣는 과정은 축구장 안에서의 상호과정만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거기에 감독의 작전과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나님 없이 물리 세계의 현상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자유가 있어야 하나님이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이 가능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고, 또 인간의 삶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신학적인 논의도 다 의미가 없죠. 이미 짜여진 것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유를 허용하고 그냥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창조 세계에 같이 참여하시면서 창조의 모험 속에 동참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과] 조직신학에 여러 주제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과학자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주제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를 연구할 수 있겠죠. 신학적으로 완전히 은유였다고 볼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그 당시 사람들이 부활을 보고 듣고 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신령한 몸'이라는 용어 자체가 짬뽕이죠. 영이라는 말과 몸이라는 말이 결합되어 '신령한 몸'이라고 했는데, 이게 보통 몸은 아니니깐요. 종말의 때에 변화된 몸일텐데 그건 대체 어떤 몸일까요? 


또 어떤 이들은 최근에는 과학자나 생태학자들이 환경에 대해서 고민이 많은데, 왜 신학자들은 고민하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이 부분도 연구해야 할 주제라고 봅니다. 또 하나님이 세상을 섭리하신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 물리 세계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말이죠. 갑자기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서 개입하나요? 아니면 물리 세계의 물리 법칙으로 섭리하나요? 같이 연구하면 재미있는 대화가 될 거 같군요.





이 글은 박영식 교수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영식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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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6 / 2018.09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2018년 8월 29일 서울신학대학교 정문 앞 카페 '이유'에서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박영식 교수님(서울신대 조직신학)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창조의 신학』(동연)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그 책의 내용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이 많아 두 번에 나눠서 소개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박영식
사진/글 | 심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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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안녕하세요, 박영식 교수님.


[박영식 교수 (이하 박)]
안녕하세요.


[과] 직신학의 주제가 여러가지인데, 그중에서도 창조에 원래 관심이 있으셨나요?


[박] 창조에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해도 거짓말인  같은데... 모르겠어요. 제가 이전에 야후 블로그를 운영했는데 그때도 제목이 창조, 생명이었거든요. 창조라고 하는 것이 저에겐 이상하게 중요한 주제였고, 독일에서 공부하면서도 창조라는 주제가 막연하게 성서 안에 있는 내용, 옛날 내용이기보다는 실생활에 가깝게 생각되었던 같아요.


[과] (이번에 새로 내신)  앞부분에 그런 부분이 나오더라고요. '성경을 읽거나 기독교 신학을 구성할 구원이나 구속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창조는 오히려 굉장히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도 창세기 1-2장에만 잠깐 반짝이는데, 사실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런 얘기를 하셨던 같아요. 부분을 조금만 설명해주실 있나요?


[박] 저도 항상 우리 한국교회와 관련해서 질문하는 것들이 "타종교는 구원받느냐, 구원은 무엇인가"이고, 설교도 구원에 초점을 놓고 하지 창조를 갖고 설교하는 경우는 이상하게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의외로 성경에 창세기 1-2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요한 주제가 창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성경은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게 되는 책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끝나거든요. 창조의 시작과 창조의 완성이랄까요. ‘창조의 거대한 구도 속에서 성경이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더라도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는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개신교 전통에서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창조를 거의 설교하지 않으니 그런 살리는 필요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봤을 때, 창조를 단지 옛날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고, 마치 우리 책의 서문 같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문이 있고, 1, 2 전개가 때, 서문이 다른 모든 부분을 커버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물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성경 그런 구성에서 읽어볼 있지 않을까,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가장 첫 단계, 출애굽기가 다음 단계, 이렇게 읽어나갈 것이 아니라, 사실 1 안에 성경 전체 하나님의 스토리와 히스토리가 포괄된 구조로 봐도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죠.


실제로 제가 어디가서 창조 설교를 하면 낯설다고 해. 간혹 규모 있는 교회에 가서 창세기 놓고 설교를 하면 이렇게도 설교하시네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고, 많이 낯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그냥 경험상으로도 창조 자체가 구원 이런 것보다 한국 교계에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과신대나 이렇게 과학 대화할 조금 관심이 있지 신학 전반적인 주제로서 관심사는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과]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일단 우리가 창세기부터 시간순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우리의 관심이 온통 그럼 처음에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처음에 뭐가 있었어?” 이런 거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우린 자꾸 실증주의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보니까 뭔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거랑 핀트가 맞는 거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아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뭔가요?


[박]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서 풀어야 하는데, 흔히 말하는 창세기 1 이쪽 배경은 바벨론 포로 시기라고 보고, 나라를 잃고 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질문을 던졌을 겁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도 여러 자료들을 활용하잖아요. 영화, 소설 . 마찬가지로 저는 성경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경험 세계 속에서 알고 있던 자료들, 바벨론 창조신화라든지, 이런 것들을 갖고 거죠.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의 없던 창조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고, 성서신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미 이스라엘의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었으나 고백할 있는 폼을 거기서 갖고 오되, 똑같이 갖고 오는 것이 아니라 비틀어서 자기들의 신앙을 거기에 담아서 표현했다는 거에요. 마치 목사님들이 설교할 드라마를 갖고 오면 드라마를 전달해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설교에 이용해서 설교 내용을 전달하는 것처럼 말이죠


창세기 1장이 그런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역사적 상황에서는 우리의 관심사처럼 옛날 옛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바벨론의 포로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질문이 중요한 것이죠.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나오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것이 바로 포로 상황에 있는 자신들의 상황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은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여기서 물이라는 위험을 뜻하는 상징인데, 고대 근동에서, 노아 홍수도 그렇고, 예수님도 위를 걸으셨고, 계시록에 보면 새창조 바다가 사라져버려요.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항상 위험요소였는데, 바로 그런 수면 위에 하나님은 운행하신다는 겁니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활동하고 계신다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이 어둠 가운데서 빛을 비추신다. 이게 인간의 어떤 실존적인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 가운데서 아무것도 전망이 없는, 한치 앞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해 내시고 어둠을 가르시고. 다음에 아무 것도 디딜 없는 실존의 공허함 속에서 디딜 땅을 허락해주시고. 바다를 걷어내고. 디딜 땅을 주시고. 그리고 각각의 삶의 공간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생명을 안에 집어넣잖아요. 이런 역동적인 그림들을 그리면서 우리는 "지금은 이런 어둠 속에 혼돈 속에 공허 속에 있지만 하나님이 결국 새로운 삶의 공간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런 명령까지 주신다"는 것을 있습니다. 삶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창세기 1장의 메시지라는 겁니다 메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성서의 창조의 이야기는 이러한 관점에서 반복되죠. 마치 출애굽의 이야기가 구약에서 계속 출애굽을 회상하면서 '기억하라' 하면서 출애굽의 동기가 반복되듯이 창조의 동기도 구약에 계속 반복됩니다. 시편에도 나오고, 이사야서에도 나오고. 이렇게 창조에 대한 동기를 계속 반복하는 창조와 구원의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하는 겁니다. (지금 한국 교계에서는 )우리는 구원만 얘기하고 창조는 조금 내려놨는데 창조라는 패러다임 속에 사실 구원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으시고 새로운 공간을 열어놓으시고, 그런 관점에서 읽어야 된다고 보고요. 그런 관점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타당하다고 봅니다


성서의 창조의 얘기는 창조의 과거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미래를 지시하는 것이에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미래가 2천년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제 앞으로 펼쳐질 미래라는 거죠. 바로 지금 하나님 때문에 새롭게 열릴, 창조될 미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자꾸 고고학적인 질문 등을 하는데, 그런 쪽으로 가는 성서의 원래적인 의도와는 다르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냐,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냐'의 문제인데요. 어거스틴 이후로 교회 전통에서 무로부터의 창조가 정립되었는데, 또 오늘날 성서학자들이 성서를 보니깐, '땅이 혼돈하고' 등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걸 양자택일 구도로 보는데, 사실 같은 거라고 본거에요. 삶의 관점에서 보면 극심한 혼돈 속에서는 무를 경험하거든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거에요. 자기한테 이상 디딜 땅이 없는 거에요. 자기 존재도 사실 무화가 되고. 자기 존재도 한없이 가엾고 의미 없는 존재로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실존적인 해석이죠. 무에요. 그러나 동시에 혼돈. 혼돈과 무로부터의 창조. 서로 양자택일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 속에서 동일한 체험이고. 어쨌든 성서는 교리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나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중요한 아니라 하나님은 거기서 창조하신다는 거죠. 그런 메시지가 로마서로 가면 죽은 자를 살린다. 없는 있게끔 한다. 그런 역동성과도 연관이 되죠.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연관이 있고,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미래와도 연관이 되는 거죠. 이렇게 사실 창조의 모티브는 과거에 갇혀 있는 아니라 끊임 없이 생동하고 실제론 우리의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로 읽을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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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람들 (12) 박영식 교수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