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중앙교회 정삼희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이번 과신대 정회원 인터뷰에서는 과신대 자문위원이자 신도중앙교회를 맡아서 목회하시는 정삼희 목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이야기부터 교회를 위한 과신대 사역 아이디어까지 많은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일시: 2019. 11.6

장소: 신도중앙교회

 

 

Q: 과신대 회원에게 목사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제 이름은 정삼희입니다. 은평 뉴타운에 있는 신도중앙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한 지 6개월 됐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는 분당 만나교회에서 부담임 목사로 사역했었습니다. 본래 저는 수의학과 출신입니다. 수의학과 4학년 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아서 감리교신학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할 기회도 있었고요. 제 관심 분야는 기독교 영성훈련입니다. 소위 '관상기도'라고 하는 영성훈련으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교회 사역을 하면서는 주로 청년 사역을 많이 했습니다. 아주 최근까지 교구 사역보다는 청년 사역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주로 했던 사역은 또 선교 사역이었습니다. 주로 해외선교 중심으로 사역을 했고, 그러다가 선교적 교회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과학을 전공했는데 그동안 창조과학을 통해 자료를 접하다가 청년들에게 강의를 해왔습니다.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이 전부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선택했던 거죠. 그런데 늘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죠. 하지만 현장 목회자이니 혼자서 자료를 찾아보는 것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회가 주어지면 창조과학에서 제시하는 몇 가지 모델을 가지고 교회에서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잘 듣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해오다가 우종학 교수님의 '무크따'를 읽고 나서, '아, 이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현장 목회자가 사용할 수 있겠다 싶었죠. 이 책에 근거해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우종학 교수님께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일을 해 주길 원했는데, 먼저 이런 작업을 해주셔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크리스천 과학자가 용기 있게 창조과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 주니깐 너무 좋았죠. 그렇게 페이스북 메시지 하나로 지금까지 관계가 이어져왔습니다. 그렇게 과신대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우종학 교수님께서 목회자들도 과신대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면 교회들에게 도움이 될테니 함께 해 달라고 부탁하셔서 이렇게 자문위원으로 섬길수 있게 됐습니다. 

 

 

Q: 과신대가 앞으로 교회를 위한 사역, 교회와 함께 하는 사역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과신대가 좋은 파트너를 만나면 좋겠습니다. 전략적으로 다양한 교회와 접촉을 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만나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인터서브라는 단체와 만나교회 선교부가 Life as Mission School이라는 커리큘럼을 하나 개발했어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라는 책을 가지고 선교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8주 간 강의와 토론을 통해 교회 성도들에게 교육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성경을 기반으로 선교적 해석학을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만나교회에서 파일럿으로 해봤는데 선교에 관심이 있는 장로들에게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선교단체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과신대에서도 교회를 위해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가서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죠. 예를 들면, 우종학 교수님의 강의 영상과 교재를 가지고 교회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요즘은 다양한 콘텐츠와 자료들이 있으니 지역 교회에서 이런 자료를 활용해서 교육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습니다. 

 

 

Q: 저는 과신대의 훌륭한 콘텐츠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가려면 결국 성경을 바르게 읽고 이해하는 작업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과학의 내용을 함께 이야기하는 거죠.

 

A: 네, 맞습니다. 교회에서는 과학 이야기보다는 성경해석 이야기를 해야 더 좋습니다. 창조과학적 성경해석에 대한 대안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우종학 교수님을 매 번 모실 수 없으니 대안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야겠죠. 과신대에 와서 배우려는 분들은 충분히 열정이 있는 분들이니 이분들에게 교회에서 워크숍을 이끌 수 있도록 지도해주면 어떨까 합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것도 좋습니다. 교회마다 교회학교 자료에 관심이 많으니 도전해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창조과학 특강에 관심이 많은 건 PPT나 동영상 때문입니다. 학생들에게 창조과학의 진정성이나 팩트 체크는 별 관심이 없고,  '공룡 이빨에서 뭐가 나왔는데, 그걸 분석하니깐, 이런 거더라' 이런 자료화면이 나오면 다 그냥 믿어버리는 거죠. 그렇다면 과신대에서는 어떤 미디어와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접근할 거냐가 중요합니다. 사실 아이디어만 나오면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있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게 연결만 잘해주면 됩니다.^^

 

페이스북만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많이 보는 언론에도 과신대의 소식을 전하면 좋습니다. 다양한 시도를 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일잘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단 언론지도 있고 인터넷 신문사도 있으니 목사님을 통해 소식을 알리는 것도 좋습니다. 의외로 사람들이 과신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잘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과신대는 제 속도로 잘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한 단계 더 점프를 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말씀드립니다. 목회자 자문위원들은 교회의 공감대를 얻고 일반 성도들에게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과학 정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과학 기사가 종교란에 나오는 것은 보지 말라고 말합니다. 영역을 잘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 위해서죠. 목회자들을 위한 기초 과학 이야기도 좋고요. 

 

 

Q: 처음 드렸어야 할 질문인데 이제야 드리네요. 목사님의 목회 철학이라든가 목회의 방향성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세요. 

 

A: 저희 교회 표어가 "일상에서 예수 따라 사는 사람들, 마을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개인으로서의 교회와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표어에서 말한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모두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잡았습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일상에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가지고 살자." 저희 교회는 빚이 많이 있는데, 그럼에도 지역에 있는 어린이 센터에 선교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이 교회가 사라질 때, 동네에서 누가 아쉬워할까?' 아쉬워하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교회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 점에서 공공신학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교인들에게 제가 진보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최대한 성경 본문을 통해 풀어내려고 해요. 그러면서 저는 아주 오래된 콘셉트이지만, '신학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교회의 개혁은 신학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특히 교회론과 구원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 개혁은 윤리적 개혁이 아니라고 봐요. 중세 교회의 면죄부가 그렇게 타락의 상징이라고 말하는데, 면죄부는 윤리적인 타락이 아닙니다. 면죄부를 지지하는 신학 구조가 있었던 거죠. 연옥이라는 시스템이 있었고, 행동중심의 구원론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한국교회를 자꾸 목회자와 공동체의 타락이라는 관점으로 보고, 윤리적 갱신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 우리는 그런 구조를 갖게 되었는지를 봐야죠. 신학의 쇄신이 없이는 윤리적 쇄신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어떤 분은 제가 할머니, 할아버지들 앞에서 너무 어려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양심을 걸고 정말 성경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에도 계속 성경은 영혼뿐 아니라 몸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고 설교합니다. 목회를 해보니깐 이런 이야기는 한 3년은 반복해야 성도들이 이해하더라고요. 이제 목회자는 정직하게 성경을 읽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죠. 그래서 교인들이 정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시대적 눈으로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한국교회를 개혁해야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속한 한 교회를 잘 목회하면 그게 한국교회를 개혁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와 같이 작은 교회들이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하고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누면 그것이 교회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세요. 요즘 젊은 세대가 교회를 많이 빠져나간다고 하는데, 교회가 어떻게 준비하고 대비하면 좋을까요? 

 

저희 교회에 찬양 인도를 하는 집사님이 계세요. 그분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여기에 계신 분들에게만 초점을 맞춰서 찬양을 선곡하지 말고, 앞으로 여기에 올 분들을 상상하면서 선곡을 해주세요." 저도 힘들기는 하지만, 여기에 계신 분들에게만 설교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이 자리에 와서 앉아야 할 사람들을 위해 설교를 해야 실제로 그런 분들이 오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감각이 선교적 감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욕도 많이 먹어요.^^  

 

저희 교회는 빚이 많아요. 그런데 또 요즘 젊은이들은 헌금을 잘 안 하려고 합니다. 저도 고민이 많고 겁이 나죠. 그런데 나중에 제가 저를 돌아봤을 때, 어떤 것 때문에 후회를 할까, 생각해 봤어요. 제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목회를 하다가 실패를 했을 때, 그럴 때 오히려 후회가 적겠죠? 타협하느라 제가 하고자 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저는 소명대로도 못 살고, 교회는 교회대로 망가질 거라고 봐요. 소명대로 살아야 나중에 망하더라도 교인들도 자신의 소명대로 살지 않을까요? 

 

저는 후회 안 하며 목회 하고 싶어요. 실패하더라도 소신껏 목회하고 싶어요. 물론 지혜롭게 목회합니다. 점심 이후에는 교회 원로들과 늘 같이 차를 마십니다. 다 아버지 어머니 같은 분들이니깐요. 하지만 방향은 분명하게 고수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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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왕식 교수 인터뷰] 자연주의 철학과 종교의 관계

 

*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 장왕식 교수님께서 과신대에 자문위원으로 함께 활동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과신대 기자단이 장왕식 교수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인터뷰이: 장왕식 교수

인터뷰어: 백우인 팀장

 


과신대(과):  얼마전 교대에서 교수님께서 참여하신 학회가  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최근 연구동향과 관심분야에 대해 듣고싶습니다.

장왕식(장):   저의 최근의 관심 분야는 “자연주의 철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철학과 종교에 관한 한, 최근 세계의 주류는 자연주의(naturalism)입니다. 여기서 자연주의란 인간의 문제와 그에 대한 해답을 자연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자연주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종교와 관련해 그 대표는 셋입니다. 도가의 “무위자연설”과 스피노자의 “실체로서의 자연”, 그리고 서구의 근대주의에서 발달된 “과학적 유물론”입니다. 이중 과학적 유물론은 유전자 환원주의, 혹은 신경중심주의로 불리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전자 환원주의나 신경과학주의는 하나의 과학으로서는 그럴싸한 설명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들은 인간의 의지와 자유, 그리고 인간의 자기의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치명적 한계를 지닙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보다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해야 하는 하나의 종합 학문으로서는 부적절합니다. 저는 자연과학과 연계된 자연주의의 이런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철학적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을 앞으로도 지속할 예정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화이트헤드, 스피노자, 들뢰즈, 동아시아의 종교철학 등을 계속 연구하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동시에 신학적으로는 이런 다양한 학문적 입장들이 어떻게 기독교의 신론에 어떻게 부드럽게 조화될 수 있는지의 과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과: 신경중심주의 혹은 과학주의가 종교에 위협이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운데 신학생을 위한 과학콘서트를 개최하셨습니다. 기획의도나 이유를 여쭙니다.

장: 훌륭한 신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인문학도가 되어야 하며, 훌륭한 인문학도는 좋은 자연과학도가 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평소 생각입니다. 우선 최근 신학생들 가운데 세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자연과학 운동에 무지한 학생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물론 일부 신학생들은 4차 산업 혁명과 AI의 발전 그리고 그것에 의해 비롯될 사회의 급진적 변화 및 거기서 비롯될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그런 도전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몰라서 매우 당황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학생들이 접하는 정보는 너무  폭이 넓기에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적인 한계를 경험하고는 아예 대안 마련을 포기한 채 그저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생각에 신학생들은 우선 다양한 학문을 접하면서 인문학적 폭을 넓혀가야 하는데, 이는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다양한 자연과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인문학과 과학은 상호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학생들은 위한 과학콘서트를 열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과: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시는 교수님이 계셔서  학생들에게 유익한 장이 되리라 기대됩니다.  과정사상이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장: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관련해 가장 적절한 학문적 방법론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난 수 십 년 동안 가장 이상적인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 중의 하나가 과정사상입니다. 특히 하버드의 철학 교수였던 화이트헤드에게서 시작되었던 과정철학은 일부 기독교 지성인들에 의해서 과정신학으로 재탄생하였는데, 그 신학은 본래 수학자이자 자연과학도였던 화이트헤드에게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신학이었기에 종교와 과학을 대화시키는데서 가장 적합한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과정신학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여타 인문학을 접목시키는데 있어서도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과정철학이 하나의 종합적인 학문으로서 일종의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과정신학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기초한 우주론과 양자역학에 기초한 새로운 시-공간 이론, 그리고 여러 형태의 첨단 과학이론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면서 오늘의 세속적 사유에 종교적 대안을 제공하려는 시도를 계속해 왔습니다. 특히 그것이 주장하는 신에 관한 주장들은 기독교의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동아시아 사상과도 대화할 수 있고 나아가 최근의 과학적 유물론이나 환원주의가 보여주는 여러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들을 지니고 있어서 매우 이상적인 신학의 하나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과: 말씀을 들으니 오늘날 과학시대에 꼭 필요한 사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신대가 점점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고 있는데 과신대 사역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드립니다.

장:  과신대가 창립된 이래, 최근까지 과신대가 보여 온 학문적 방향과 그 성과에 대해 먼저 찬사를 보냅니다. 과학과 신학이 항상 갈등할 필요 없이 얼마든지 부드럽게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평범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과신대는 우선 이런 무지를 깨우치는 데서 일차적으로 공헌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과신대의 사역이 앞으로도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확장을 지속해 나가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과신대가 다양한 학문들과도 대화하는 목표를 지향했으면 합니다. 과학이란 본래 자연과학이라는 협의의 뜻에 국한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물과 인간 그리고 그가 경험하는 사건을 모두 분석해 보려는 학문적 야심을 지닐 때 더욱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학문적 관심사만이 자연과학과 신학이 지닌 좁은 안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과신대 사역이 더욱 활성화되어 한국 교회의 변혁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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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영 박사 인터뷰] 2. 하나님의 자기제한과 창조

 

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에서 "과학이 본 자연, 신학이 말하는 자연"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시는 강태영 박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강태영 박사님과의 인터뷰를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일시: 2019.9.28 토요일 오후

인터뷰이: 강태영 박사

인터뷰어: 최경환 실장

 

 

Q: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창조를 하나님의 필연성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훨씬 더 창조 세계의 보존과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몸으로 생각하니깐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필연으로서의 창조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창조의 가치를 높일 수는 있겠지만, 사랑은 필연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깐요. 사랑은 자발성이지 않습니까. 여성신학이나 과정신학의 한계는 그 지점인 것 같습니다. 환경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창조 이야기가 끌려들어 올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카오스든 무로부터의 창조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평행하는 영원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말하니깐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은 상대화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는 대부분 다신론적인 국가들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Q: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부가 세상이다"라는 말은 어떨까요? 범재신론이라든가 몰트만은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지 않나요? 

 

A: 네, 그런 설명은 유대인 사상가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침춤'(Zimzum)이라는 사상에서 나온 겁니다. 원래는 이 사상이 성전신학에서 나왔습니다. 신학의 이론만이 아니라 신학의 생성과정을 알아야 하는데요. 모든 신학에는 이력이 있습니다. 성전신학에서는 '무한하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 지은 공간에 들어와 계실까?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다면, 밖에는 안 계실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이죠. 어찌 보면 장난스러운 질문일 텐데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죠. 솔로몬 성전은 하나님께서 다윗 시대에 허락하지 않고 솔로몬 시대에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이 이 성전에 정말 임재해 계셔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가 거기서 기도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만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여기 어떻게 들어와 계신다는 말이냐?'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옷자락을 성전에 걸쳐 놓은 것이 아니고, 즉 성전은 하나님의 부분 집합이 아니고, 하나님이 여기에 임재해 주셔야 하는데, 그 방법은 하나님이 자신을 제한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본 것이죠. 자신을 수축하셔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셔서 이곳에서 우리는 만나주시는 방법 밖에 없다고 봤습니다. 우리가 보통 왕을 알현하다고 하잖아요. 성전에 들어가면 지성소 안에 법궤가 있지 않습니까. 그 법궤는 원래 왕이 앉는 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법궤 모퉁이에 스랍들이 시중드는 모양이 있습니다. 스랍이 내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거죠. 하나님이 법궤라는 의자에 앉아계시고, 제사장을 통해서 재물을 받으시고, 백성을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재단은 사실 식탁이었습니다. 번제나 속죄제 빼고는 재물을 다 나눠 먹었죠. 그래서 여기에서의 희생 개념은 죽음이 아니고 식탁의 개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이 작은 공간에서 임재함으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스스로 자기를 제한해서 여기 임재해 계시는 거죠. 하나님의 무소부재와 하나님의 임재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스라엘이 이동하면 회막도 같이 이동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임재하셔야 하기 때문에 백성이 이동하면 하나님도 이동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이미지이지만 분명한 것은 신이라고 하는 관념적인 이미지가 있고 우리가 그분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죠.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방식이 바로 자기제한인 것이죠. 여기서 '케노시스'도 나오는 거죠. 

 

'그렇다면 바벨론 포로기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 성전이 없어져 버렸는데.' 물을 수 있죠. 그런데 상관이 없는 게, 원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데,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주려고 성전에 임재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전이 있건 없건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시죠. 포로기 문서들을 보면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끌려가고 있다는 표현이 나와요.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죠. 

 

이삭 루리아는 이런 생각에 상상을 더해서 창조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실 때, 공간이 어디 있었겠느냐. 하나님이 무소부재하기 때문에 공간이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 안에 공간을 만들어 버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부가 되어버리죠. 그러면 세계도 신성을 지녀야 하죠. 그래서 루리아는 어떤 상상을 하냐면, 하나님이 자신을 수축하셔서 공간을 빈 공간을 만드셨다는 거죠. 하나님 없는 공간을. 즉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없는 공간이죠. 왜냐하면 이 공간이 하나님 밖에 있으면, 그 자체가 또 하나님처럼 영원해야 하기 때문이죠. 하나님 안에 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거두어들인 거죠. 상당히 변증법적인 논리죠. 거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거죠. 그래서 영원하신 분이었는데 하나님 없는 이 공간에서는 창조와 더불어 시간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영원한 시간이죠. 종말은 반대입니다. 종말은 자기를 제한했던 하나님이 그것을 풀어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지니깐 피조물이 신성에 참여하게 되는 거죠. 시간은 영원으로 바뀌죠. 이것이 이삭 루리아의 생각이고 이것을 몰트만이 받아들입니다. 

 

 

몰트만 신학의 큰 장점은 교리에 대한 새로운 통찰입니다. 몰트만은 유대인 사상가와 대화를 하면서 이런 신화적 틀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깐 신약에 오기 전부터 케노시스가 있었다는 거죠.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는데,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는 거죠.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 하나님은 자유롭기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할 수 있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신 거죠. 

 

그래서 카오스로부터의 창조든 무로부터의 창조든 성서가 이 둘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둘 다 중요합니다. 이것을 양자택일 하라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겁니다. 이 둘을 모두 이야기해야 균형 잡힌 창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저는 에코 페미니즘에 대해서 다른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지혜 문학에 보면,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연이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심어주신 지혜이기 때문이죠. 그게 발전해서 로고스가 만물의 씨앗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고, 하나님은 이 만물 안에 로고스를 심어놓으셨죠. 지혜들이 천지 만물에 숨어 있어서 자기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탐구할 수 있도록 자연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 지혜를 하나님이 숨겨 놓으셨는데, 이 지혜에 완전하게 이르는 길을 인간은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거죠. 그냥 탐구만 하면 과학이지만, 성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죠. 이 세상의 작은 미물이라도 그 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가 숨겨져 있는 거죠. 과학은 그것을 탐구하는 거죠. 

 

천지만물을 다스리라고 할 때, 베스터만은 그것을 제한적인 지배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가갈 수 있지만, 그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알기 때문이죠. 우리가 탐구해서 그것을 파악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 숨겨져 있는 지혜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거기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죠. 그래서 저는 과학을 통해 놀라운 발견을 하고 통찰을 얻는 것은 지혜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표현이 방정식으로 되었든 신앙의 언어로 되었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일어난 진실은 하나입니다. 

 

 

Q: 선생님, 진짜 책을 한 권 쓰셔야 할 거 같아요. 너무 많이 배웠습니다. 이런 내용을 글로 읽고 싶은데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종말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 기후위기에 대한 논의가 많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뭐, 저희가 답을 알고 있으면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건데, 우리는 늘 모색해 보는 거죠.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죠.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한 것을 많이 오해했는데, 베이컨 식으로 자연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이 명령을 잘못 이해한 것이죠. 반대로 이것을 비판하면서 과대하고 비판한 것도 있습니다.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성서적 전통은 아닙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모든 피조물이 공동 피조물이라면, 내가 이웃에서 행한 것은 곧 나에게 행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상대화시킬 수 있으니깐요.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중요하죠.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보통 관계를 늘 인격적인 관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생물과의 관계도 중요하죠. 인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계명이 철저한 이유는 이웃에게 행한 것은 곧 나에게 행한 것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런 것은 관계 자체를 붕괴시키는 거죠. 이건 공동체 전체를 붕괴시키는 행위죠. 파멸이죠. 이것이 혼돈의 힘이죠. 그래서 정의가 중요하죠. 지금 이웃과의 관계라고 할 때, 윤리적으로는 내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지라도, 생태 문제로 들어가면 그것을 넘어서는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동안 자연이라는 이웃에게 테러를 행한 거죠. 욕망추구라는 이유 때문에 말이죠. 인간은 그동안 좀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고, 좀 더 많은 소비를 해야 했죠. 그 결과 자연을 마구 쓸 수 있는 재료로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사람에게 이렇게 했다면 상대방이 저항을 했겠죠. 그러면 어느 선에서는 멈출 수 있었겠죠. 그런데 말 못 하는 자연이니깐, 자연은 침묵하고 있으니깐, 자연을 재료로 삼은 것이죠. 그런데 입을 갖지 못한 이웃에 대해서도 우리가 존중해줘야죠. 더불어 살아가려면 공간을 내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아기가 태어나면 물리적으로도 공간이 필요하고, 가족 속에서도 특별한 배려의 공간이 필요하죠.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 인간이 아닌 다른 이웃에게도 공간을 내어주어야죠. 그런데 우리는 계속 공간을 점령하기만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가해를 했고 이웃의 공간을 박탈했기 때문에 이제는 회복해야죠.

 

이제는 이웃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자기를 제한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죠. 우리가 행동을 달리 하면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지구 온난화 문제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대신 살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이죠. 지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죠. 

 

이런 문제는 이론 몇 개 내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실천을 달리 할수 밖에 없습니다. 삶의 태도,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욕망의 문제라 할 수 있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죠. 이 문제는 누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죠.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강태영 박사 인터뷰] 1. '무로부터의 창조'와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는 모순이 아닙니다.

 

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에서 "과학이 본 자연, 신학이 말하는 자연"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시는 강태영 박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강태영 박사님과의 인터뷰는 2회에 걸쳐서 연재할 계획입니다.

 

일시: 2019.9.28 토요일 오후

인터뷰이: 강태영 박사

인터뷰어: 최경환 실장

 

Q: 안녕하세요. 과신대에서 처음 인사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A: 저는 대구가 고향이고 경북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창조신학을 공부한 강태영이라고 합니다. 석사 과정에는 기독론을 주로 공부했고, 박사 과정에서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신학과 과학은 서로 방법론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의 실재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신학과 과학의 대화는 창조의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Q: 창조신학은 구체적으로 신학의 어떤 분야에 속하나요?

 

A: 우선 저는 조직신학이 전공이고, 전통적인 분류로 따지자면, 창조론은 신론에 속하는 분야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묻기 때문에 창조론에 속하는 거죠. 그래서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으로 창조를 이야기하지만, 오늘날 창조신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 자연, 우주, 여러 용어로 부르더라도, 보편적인 하나의 실재를 창조라고 볼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됐다고 고백하고, 연구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행위야 말로 하나의 실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틀이 된다고 보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창조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학문에서는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학문들과 대화를 하면서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고백을 할 때, 사도신경의 첫 고백, 이것이 신앙의 영역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는데, 이 신앙고백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나는 믿음으로 고백하지만, 이것을 선포해야 하는데, 이 선포에서는 종교의 특수한 주장으로서는 의미가 없어지죠. 너무 주관적인 신앙의 고백이 되는 거죠. 그 점에서 끊임없이 다른 학문과 대화를 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는 거죠. 

 

신학사에서는 생태계의 위기가 창조신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소위 생태학적 창조론이라는 것이 일어났습니다. 이 창조세계는 그저 재료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는 물질세계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일 수도 없고, 인간의 삶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계는 인간과 함께 존재하는 공동의 피조물로서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이것 또한 하나님의 소중한 피조물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것이죠. 이런 인식을 통해 창조신학이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Q: 그렇다면 창조신학은 세속 사회에서의 학문의 결과를 수용하면서 신학을 적절하게 설명하려는 시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일반 학자들이 볼 때에는 창조, 창조주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학 쪽에서는 자신의 학문이 단순히 신앙고백의 차원이 아니라고 말하니 말이죠. 굉장히 어려운 작업인 것 같습니다. 

 

A: 각 시대 마다 신학은 늘 어려운 위기 혹은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푸스의 신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어떻게 다른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철학자들의 신과 대결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신이 단지 유대 종교의 신이 아니라 천지 만물의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 당시에도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어느 시대든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금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과학이 가장 어려운 대상이 된 것이죠. 

 

Q: 과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A: 저는 신을 논증하려는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과학이 경험적 학문이라고 한다면, 신학은 계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출발이 초월에서 시작하죠. 그래서 방향이 반대인 것 같지만, 신학도 종국적으로는 신자들의 경험에서 하나님을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로부터 신앙 교육을 받기도 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될 때는 신앙공동체에 속한 한 신자로서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의 경험이라는 것이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과학만 경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도 경험적 기초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은 수많은 실험과 검증의 과정이 있게 되지만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과학적인 검증은 아니지만 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공동적인 경험을 통해서 전승됩니다. 전승은 한 사람의 주관적인 망상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기능을 합니다. 

 

과학에서도 실증적으로만 그 성격을 규명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과학도 궁극적으로 사고실험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과학에서도 추론이 중요한 역할을 하죠. 직접적인 실험이 어려운 경우 모형을 통해서 하기도 합니다. 과학 안에서도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추상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학 역시 과학만큼이나 경험에 의존하고 있지만 계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죠. 또 계시라고 하는 것이 주관적인 것 같지만 종교 경험 전체에서 추론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이 시대에 창조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설계 논증'처럼 논증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이것은 논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합리적으로 선택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올 때, 합리성, 경험과의 조화, 이런 것들이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과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합성, 일관성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일단 자기 논리 안에서는 모순이 없어야 하죠. 이런 것들을 놓고 볼 때,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문학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연과학과 전혀 동 떨어진 특수한 지식은 아닙니다. 과학과 충분히 같이 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라고 부르고, 과학은 자연이라고 부르지만, 하나의 현실, 하나의 실재를 신학의 언어로 표현하고 진술할 때, 이 점에서 충분히 신학의 목소리를 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의 실재를 설명할 때, 자연과학의 설명만이 유일한 결론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의 실재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서로 보완할 여지가 있습니다.

 

 

Q: 예전에 제가 '혼돈으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글을 읽고 오히려 그것이 더 성서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러셀 교수님 같은 경우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어요? 

 

A: '무로부터의 창조'는 교리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성서에 직접 나오지는 않죠. 다만 성서 전체의 내용과 정합성의 관점에서 볼 때,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할 수 있죠. 교리라고 하는 것은 성서 해석의 결정체이지 않습니까. 교리는 성서의 어떤 특정 구절만을 가지고 만들면 안되죠. 적어도 4세기 이후에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나 자유를 해칠 수 있는 사상과 경쟁을 하는 상황이었죠. 전제 없는 우주.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걸 주장해야 했기 때문에 나온 교리입니다. 교리가 성서를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성서는 원천과 같습니다. 고갈되지 않는 원천이죠. 

 

무로부터의 창조, 혼돈으로부터의 창조,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서 해석상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고, 또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성서의 전승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두 개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모순을 일으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하나님을 진술하고 있는 부분에 있어서는 언어의 논리로 충돌하는 부분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순의 문제가 아니라 신성의 깊이를 우리가 온전히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이 세계의 우발성, 존재 자체의 우발성을 말해줍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유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창조, 세계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고, 하나님도 필연적으로 창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죠. 이 세계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피조물이라는 거죠.

 

또한 이 세계는 신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고대 우주 발생론에서는 신화 속의 신들이 투쟁해서 우주가 생겨납니다. 그럼 이 우주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고대 전쟁도 사람들이 싸우는 것 같지만, 신들의 전쟁의 그림자가 인간의 전쟁으로 생각했습니다. 신화적 세계상 속에서 이 세상은 두려움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무로부터의 창조는 이 세상에서 신성이라는 요소를 제거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 '모든 것을 다스리라.' 인간 이외의 모든 것들은 너희가 다스리라고 한 것이죠. 그 말은 인간은 그 무엇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지배되어서도 안 되는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것이죠. 

 

또 무로부터의 창조는 과학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세계가 신적인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이것을 관리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경험하고 관찰하고 연구하는 대상이 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은 '세계의 비악마화'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생태학적 신학에서는 그럼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정당화로 사용했다고 비판합니다. 이 비판은 정당합니다. 하지만 이 세계가 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겨주셨다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자연을 관리해야 합니다. 자연에 대한 책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중요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자연 탐구에 대한 해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점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는 신정론적인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폰 라트와 같은 신학자는 '보시기에 좋았다'를 합목적적으로 창조되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분에 보시기에 좋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이 세계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믿고 살아가는데, 우리의 경험 속에는 보기에 좋지 않는 악의 경험, 고난의 경험이 있습니다. 신정론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에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분의 백성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당신께서 보시기에는 좋은 세상인데,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악의 경험, 악인들이 잘 되는 경험들이라는 거죠. 마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경험이 많다는 거죠.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는 거죠. 

 

일단 성서는 질문을 하라고 합니다. 욥이 질문했던 것처럼 말이죠. 답 이전에 질문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가톨릭 신학자 학 같은 경우, 창조는 하나님께서 첫 번째 창조, 즉 무에서 무엇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셨고 이 창조가 완성이 되기까지 하나의 과정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처음의 창조, 계속적인 창조, 새 창조, 전체로서의 창조가 하나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체를 보시고 좋았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한 순간을 살아가기 때문에 이 전체를 볼 수 없으니깐,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 세계를 이야기할 수 없는 거죠. 종국적으로 이 과정 전체를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이 전체를 보면서 종말에 이르러 비로소 전체의 모습이 완성되는 거죠. 그리고 그 종국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완성되는 거죠. 우리는 그 과정의 한 지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죠. 인식론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종말의 그 과정을 앞 당겨서 볼 수 없는 거죠. 그 점에서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죠.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는 창세기 1:2에서 나오고, 그외에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빛만이 아니라 흑암도 창조하셨다고 나오죠. '너희들 가운데 재난을 보내겠다'라는 표현도 나오죠. 그래서 성서에는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라는 사상이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혜 문학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혼돈이라는 것의 개념과 해석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우선, 혼돈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태인가, 존재인가? 혼돈이 존재라고 한다면, 신들의 세계가 있는 거죠. 조로아스터교처럼 선과 악의 신이 있는 거죠. 그런데 성서는 혼돈을 상태로 묘사하지 어떤 신으로 묘사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존재와 싸워서 이겨야 창조가 완성된다고 보질 않습니다. 오히려 혼돈은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의 특성이나 속성 같은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혼돈으로부터 빛이 있으라 혹은 물과 땅이 나뉘어라, 이처럼 담수와 바닷물을 나누고, 분할시켜가는 과정, 이 과정이 창조하는 과정인데,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 행위는 나누는 행위입니다. 영역을 정하는 행위입니다. 젱어라는 구약학자는 이집트에서 이 혼돈이라는 개념은 나일강에 홍수가 일어나면, 나일강 하구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민물이 갑자기 밀려와서 바닷물에 염도가 떨어져서 물고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반면 해일이 일어나면 반대로 염도가 높아져서 물고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염병은 죽음의 사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땅은 산 자들의 땅인데 죽음의 사신들이 엄습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진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적군이 쳐들어와 침략할 때, 이런 것들을 혼돈으로 본 것입니다. 창조는 이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본 겁니다.

 

고대 왕은 1년에 한 번씩 맹수 사녕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데, 이것은 백성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 왕의 책무였습니다. 이것이 고대 세계에서는 왕이 이런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고 이 세계를 생명의 세계로 만들어야 하는 책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인간 전체가 이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땅을 정복하게 다스려라. 하나님께서는 이 혼돈을 끊임없이 생명의 세력을 바꾸어 가십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혼돈의 홍수를 길들여서 물이 자기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혼돈의 물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길들이고 제압하시는 것으로 나옵니다. 혼돈을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길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혼돈의 물이 샘물이 되어 솟아나고, 냇물이 되어 사슴들이 목을 축이고, 밭에 밀이 자라게 됩니다. 창조주는 끊임없이 이 피조 세계 안에서 엄습해오는 혼돈의 힘을 지금도 제압하는 신으로 나옵니다. 혼돈의 힘을 생명을 위한 힘으로, 생명을 섬기는 힘으로 바꾸십니다. 악을 선용하는 능력의 창조주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이 신정론적인 대답이었습니다. 

 

혼돈은 우리가 살아가는 창조 세계의 하나의 속성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 행위를 통해서 이 혼돈을 생명을 위해 봉사하도록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것을 위임하셔서 정의를 수립하고, 샬롬의 평화를 추구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모두 혼돈을 극복해가는 과정입니다. 그점에서 보면, 혼돈을 극복하는 행위는 구원 행위하고 직결됩니다. 죄와 악의 행위는 관계를 훼손하는 겁니다. 이웃의 권리를 침해한다든가, 인권을 짓밟는다든가, 항상 관계의 손상, 왜곡이 죄악이니깐요. 그래서 정의를 세우는 일은 혼돈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구원이냐, 창조냐, 이런 논쟁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불순종하고 타락을 했고, 하나님이 복구를 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을 하셨다, 소위 실락원과 복락원의 모델이었습니다. 지금 창조신학에서는 완벽한 창조, 완벽한 태초의 상태, 손상, 회복, 이런 도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는 처음부터 하나의 과정이었다. 과정이기 때문에 완전이냐 불완전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창조 안에 혼돈의 속성이 있는 것은 단순히 그 자체가 악의 문제라든가 창조의 불완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혼돈이라는 것도 선을 위해 사용하시기 때문이죠. 욥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악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활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심지어 악도 선용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죠.  

 

따라서 창조신학은 창조의 과정 전체를 구원의 과정으로 봐야 하고, 구원의 역사 전체를 창조로 봐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종말을 구원의 완성이라고도 보지만 새창조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마지막은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순서상으로는 창조가 먼저이지만 구원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처럼 설명을 했는데, 창조신학은 창조가 오히려 구원 전체를 포괄하는 틀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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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원과의 만남] 대구대학교 차정호 교수님

 

과신대 초창기부터 정회원으로 함께 해 주신 대구대학교 과학교육학부 차정호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번에 진행하고 있는 <기초과정II>에 참여하셔서 세미나 전에 미리 만났습니다. 매주 대구에서 KTX를 타고 올라오시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인터뷰 진행: 최경환 실장, 사진 촬영: 이진호 간사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저는 대구대학교 차정호 교수입니다. 화학교육과에서 나중에 과학 선생님이 될 예비 교사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희 과신대에 화학 선생님은 처음인 거 같습니다.^^ 

 

- 학부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학위는 교육학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화학을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하고, 교육학 전공이라고 말합니다. ㅎ 

 

저희 과신대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 어느날 페이스북에서 알게 된 거 같아요. 이 주제는 굉장히 오랜 전부터 고민했던 거고, 꽤 오래전부터 양승훈 교수님의 책을 읽어왔습니다. 그리고 우종학 교수님을 알게 됐고, 두 분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렇게 하다가 과신대라는 단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가입하게 됐습니다. 

 

지난번 <기초과정II> 첫 시간에 자기소개를 인상 깊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 까기 오게 된 스토리를 이야기해주시겠어요?

 

- 대학원 때 아내 덕에 신앙을 가지게 됐습니다. 꽤 오래 저항하다가 항복을 했죠. 아버지도 상당히 반대가 심했고요. 저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걸렸기 때문에 누가 전도하러 와도 아예 듣지를 않았죠. 그랬는데, 어쨌든 아내가 먼저 신앙생활을 했고, 저를 집요하게 괴롭혔고, 아내가 저에게 책을 권해줬습니다. 그때 기독교 변증에 대한 책을 주로 읽었는데, 부활에 대한 논증에 매료됐습니다. 부활을 인정하게 되니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신앙을 갖게 됐습니다. 

 

아주 작은 개척교회에서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도에 대구대학교에 임용되면서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쯤에 창조과학을 알게 됐습니다. 완전히 매료됐죠. 이건 애들한테 알려줘야겠다는 사명감에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했죠. 학교에서 교양강좌도 열어서 2학기 정도 '성경의 과학적 이해'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습니다. 저의 흑역사죠. 

 

교회에서도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굉장히 열심히 했죠. 그때도 찜찜한 것이 있었는데, '과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이렇게 깡그리 무시해도 되나?' 이 부분은 항상 걸렸어요. 그래서 지구 연대 문제만큼은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얼버무리고 넘어갔어요. 그 이후에 양승훈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넓어졌고, 지금은 과신대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독서를 하면서 생각이 넓어지고 신앙도 깊어졌습니다. 어쨌든 좀 더 깊이 알아야 가르칠 수 있으니깐 이번 <기초과정II>도 신청하게 된 겁니다. 제가 제일 멀리서 온 줄 알았는데, 경산에서 오신 분이 계셔서 놀랐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이런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고, 한국교회의 이야기인 거 같습니다. 

 

- 사실 저는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머리속이 상당히 넓어졌습니다.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창조과학의 늪에서 벗어서나 다양한 책을 읽는데 너무나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거죠. 이번 과정에 신청하게 된 이유가 나의 포지션을 정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한 소개를 할 수 있겠지만, 제 입장에 대한 고민은 안 할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하나하나 공부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창조기사 논쟁>을 읽고 있는데, 너무 신학적이어서 '내가 이거까지 알아야 하나?' 싶었습니다. 제가 어느 깊이까지 알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내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희 과신대에 문의를 주시는 분들 대부분은 청소년들 교육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창조신앙을 가르치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몰라 고민하십니다. 

 

-  요새 제가 하는 고민 중 하나는 생각이 점점 깨지면서 보수적인 신앙으로부터 나오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제가 말을 못 하겠어요. 자기 검열에 들어가게 되더라고요. 질문이 생기고 물어보고 싶은 순간이 생기는데, 이걸 받아주질 않아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를 못하겠어요. 내가 관계에 깨어질지언정 질문을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깐 괴로운 거죠. 

 

그래서 10년 전 제가 했던 창조과학 AS를 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AS 강의를 하려고요. 

 

그래서 전략이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조과학이 교회에서 먹히는 이유는 은혜롭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저희도 은혜롭게 전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나라의 과학교육에 대해서도 한말씀 해 주세요. 

 

저의 주요 관심은 우리 제자들을 어떻게 더 많이 임용시키냐입니다.^^ 예전에는 임용고시에 많이 합격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제는 어떤 교사가 되게 하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교사가 되더라도 어떤 교사가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교사가 과학을 어떻게 가르치고, 그 이전에 학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거죠. 과학을 가르치는 것은 둘째 문제고, 이 험한 세상에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냐가 더 중요한 거 같아요. 

 

초등학교 때는 과학자가 꿈인 친구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서 입시라는 벽에 부딪치면, 그리고 졸업 이후를 생각하면, 그렇게 좋아하던 과학을 이용하려고만 해요. 그런데 그 꿈을 다시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교수님은 앞으로 어떤 소명을 갖고 계신가요?

 

일단 제가 교회에서 AS 강의를 하는 것이 목표고요. 대학에서는 일반 학생들도 들을 수 있는 입소문 난 교양과학을 하나 맡아서 하는 겁니다. 성경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과목을 하나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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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관장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지난 5월 17일(금)에 수원남부북클럽 회원 6명이 이정모 관장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시립과학관에 다녀왔습니다. 6월 8일(토)에 있을 북토크 전에 사전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말이죠. 약속 시간 전인데도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인터뷰이: 이정모 관장
인터뷰어: 오세조 회원
사진: 심왕찬 팀장

 

 

Q: 한때는 ‘과학의 대중화’가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과학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대중의 과학화’로 슬로건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과학 커뮤티케이터’라는 직업이 나왔는데 관장님께서는 이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역할과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제 생각에는 ‘과학의 대중화’와 ‘대중의 과학화’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시민들은 과학을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과학은 어렵습니다.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일반 시민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과학자들의 스펙트럼과 시민의 스펙트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둘이 만나는 접점이 필요합니다.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이 접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저는 이 ‘과학 커뮤티케이터’의 역할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런 이름조차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오니 ‘과학의 대중화’ 또는 ‘대중의 과학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과학 커뮤니케이터’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이름이 있어야 정체성도 생깁니다. 그리고 정체성이 생겨야 전략이 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학 커뮤니케이터’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공간이 꼭 필요합니다.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지요. 제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더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는 것은 제가 그만두어야 다른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을 한 거지요. 물론 마침 서울시립관장 자리가 나서 저는 이곳에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 곳에서 서로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다른 나라에서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연대에 좋은 예가 있습니까?

 

A: 다른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좋은 예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 경험으로는 다른 나라의 경우에 협력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지역에 있는 과학관과 지역학교와의 긴밀한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방학 때면 교사의 월급이 지급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은 생계를 위해 방학동안에는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교사들은 방학 때도 월급이 나옵니다. 안정성 면에 있어서 좋은 것이지요. 또한 우리나라 과학교사들은 방학 때도 과학 활동을 아주 많이 합니다. 과학의 홍보화 또는 특별활동들을 아주 많이 합니다. 저는 이렇게 활동적인 사람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에너지가 넘치는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Q: 과학자이시면 신앙인이신데, 힘든 점은 없으셨습니까?

 

A: 사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교회에 다닌다는 것 때문에 지도교수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과학도인데 어떻게 교회에 다닐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교회 내에서도 과학을 하는데 신앙이 있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신앙인으로서 과학 활동을 하는데 개인적인 어려움을 별로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는 언제나 양쪽 모두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Q: 이번에 출판한 책은 서평을 모으신 것인데,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이 몇 권이냐 되십니까? 또한 과학 작가들은 서로 친한 것 같은데, 친한 이유가 특별히 따로 있습니까?

 

A: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이 모두 69권입니다. 사실 요즈음은 서평을 옛날만큼 쓰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문학가들은 모르겠는데, 과학 작가들은 서로 친한 편입니다. 책이 나오면, 서로 홍보도 해주고,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현상은 과학자들의 겸손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과학은 진리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최대 설명이죠,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과학자들은 겸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겸손’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 시작됩니다. 기존 지식이 틀렸다면, 과감히 그것을 인정하고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겸손해지기 어렵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교회에도 많다는 것이지요.

 

 

이번 6월 8일(토)에 하는 수원남부북클럽 과신톡의 주제인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결’이 이런 과학의 겸손함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주제입니다.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6월 8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글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잘못임을 밝힙니다. 관장님이 말씀을 하도 재미있게 하셔서 인터뷰하는 것을 놓친 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결’이 왜 과학의 겸손함을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6월 8일(토)에 오시면 알 수 있습니다.

 

* 이정모 관장님과 함께 하는 '과신톡' 안내

 

💫 일시: 6월 8일(토) 오후 2시
💫 장소: 성공회 제자교회(경기도 오산시 세남로14번길 25, 1호선 세마역 5분 거리)
💫 대상: 누구나 (무료)
💫 수강신청: https://bit.ly/2Yr12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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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기도, 그리고 유신론적 진화

* 과신대 연구팀장을 맡고 계시는 정대경 박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정대경 박사님은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과학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홍대 근처 카페 '산책'에서 짧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터뷰이 | 정대경 박사
인터뷰어 | 최경환, 이진호 

 

 

1. 어떻게 과학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얼마 전에 이정모 관장님도 오셨더라고요. 저도 어려서부터 공룡을 좋아했는데, 보통 이런 관심이 유년기에 그치는데, 중고등학교 때까지도 그 관심이 가더라고요. 한 번은 중학교 때, 저희 교회에서도 창조과학에 대한 강의가 있었는데, 공룡에 대한 질문이 많았던 거죠. 그때 조목조목 질문을 했었는데, 대답이 시원치 않았어요. 아직도 기억나는 답은 “공룡들이 노아의 방주에 탔을 거다. 그 많은 종이. 탔다가 내린 이후에 아마 활동을 하다가 절벽에 떨어져 죽지 않았을까?”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더라고요. 어린 나이에도 그게 납득이 안 되더라고요. 그때는 신앙도 별로 없었고, 그냥 그런가 보다, 묻어 놨다가, 고등학교 때 회심 체험을 하면서 진로를 고민하게 결국 신학대학교까지 가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석사 과정을 하면서 신학적인 고민을 진지하게 했습니다.

 

석사 과정에서 논문을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 중에 테드 피터스(Ted Peters) 교수님이 썼던 Evolution from Creation to New Creation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을 쉽게 풀어서 쓴 책이 『하나님과 진화를 동시에 믿을 수 있는가』(동연, 2015)로 번역됐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신학이 자연과학과 양립 가능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후에 석사 마치고 박사 들어가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2. 이후에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셨나요?

 

저의 신학적 고민은 오래전부터 신정론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사촌 형도 루게릭 비슷한 병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친구도 중학교 때 당뇨 합병으로 죽게 되면서 신정론적인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죠. 그러다가 신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 질문을 연결시켰던 거죠.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립은 잘 안 됩니다.(ㅎㅎ) 여전히 왔다 갔다 합니다. 때로는 이신론으로 갔다가, 몰트만처럼 케노시스로 갔다가, 판넨베르크처럼 결정하는 주체로 갔다가, 어떤 때는 또 결정론으로 확 갔다가 합니다.

 

3. 예전에 저희 과신대 콜로퀴움에서도 강의를 하셨잖아요. 그때 어떤 강의를 하셨는지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제 논문 주제 자체가 ‘생명의 기원과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유기화학 이론에서 무생물에서 생물로 넘어가는 이론을 2장에서 다루고, 이런 자연과학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다룹니다. 자연현상만으로도 생명체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입장이 주류 과학계의 입장인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논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행위(Divine Action)에 대한 이론으로 가장 유명했던 학자들, 예를 들면 폴킹혼, 피콕, 러셀의 하나님의 행위 이론을 다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의 행위 이론으로 생명의 현상을 다루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들의 이론을 생명의 현상에 적용해 보고, 그 한계는 무엇인지 집어 봤습니다.

 

1세대 하나님의 행위 이론가들의 한계는 이 사람들이 너무 물리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지적을 했습니다. 어쩌면 의미나 가치라는 것이 실제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명체가 처음 출현을 할 때부터 인식 작용이라는 것이 같이 출현했다는 입장도 상당히 많거든요. 예를 들면, 훔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나 프란시스코 바레라(Francisco Varela)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의 출현과 함께 인식 행위 그리고 기호현상이라는 것도 같이 출현했다는 것을 고민해 본 논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정리해서 콜로퀴움 때 전달하려고 했는데, 너무 욕심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4. 박사님을 만나면 드리고 싶었던 질문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기적과 기도입니다. 과학신학자로서 기적과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간단하게 대중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기도에 대해서 기독교 전통 내에 두 가지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토미스트 전통인데,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미 결정된 거죠.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두 번째 전통에서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도에 맞춰서 리액션을 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고 사건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설명해 본다면, (기적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일단 대중적인 이해에 따라 소위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행위가 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러한 방식은 없을 거라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자연법칙 내에서, 자연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에서 확률적으로 상당히 불가능한 일들, 예를 들면 사람이 질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사건들이 있잖아요. 생리학적인 설명은 가능한 거니깐요. 그런 방식의 사건은 일어날 수 있다고 봐요. 다만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 자체가 신의 존재나 신이 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직접 데이터로 사용될 수는 없는 거죠. 왜냐하면 여전히 해석이 개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철학적이고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순수하게 우연적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있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실상 기적적인 사건이 우리의 신앙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는 없는 거죠. 다만 그러한 기적들은 가능하다고 결론지으면 될까요?^^

 

 

5. 두 번째 질문은 요즘 국내에서 말도 많고 오해도 많은 유신론적 진화에 대한 것입니다. 역시 알기 쉽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연 과정을 통해서 창조하신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것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입니다. 그런데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진화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 오해되어 왔기 때문인 거 같아요. 진화 과정 자체가 마치 하나님의 행위를 배제하는 것처럼 여겨진 거죠. 그런데 이미 대중적으로 관련 서적들이 많이 나왔듯이, 유신론적 진화라는 것은 진화를 믿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자들이 생명체의 출현이나 자연발생에 대한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데, ‘그 모든 과정의 이면에 하나님이 행위를 하셨다’ 혹은 ‘그 자연 과정을 매개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신론적 진화론입니다.

 

그리고 저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전통신학과도 부합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바질이나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은 그 당시의 자연철학 이론인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을 완전히 받아들인 상태에서 성서를 해석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자연과학을 받아들이는 입장, 이 입장이 전통신학의 한 방법론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전통신학과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고 봅니다.

 

 

6. 과신대 연구모임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연구모임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2017년 4월쯤 본격적으로 모임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때 수학자, 생물학자, 천체물리학자, 신학자, 철학자, 과학신학자, 과학철학자, 이런 식으로 모여서 시작했습니다. 매달 한 번씩 모여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선정해 읽으면서 토론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독서 모임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옥스퍼드, 캠브리지, 시카고, GTU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과학과 신학 연구소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연구소들은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고 그것을 연구한 뒤에 그 결과물로 대중강연을 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는 세속주의와 관련된 연구를 한다거나 생태 환경과 관련된 연구를 하기도 합니다. 3월부터 새로운 커리큘럼을 가지고 과신대 연구모임이 새롭게 시작하는데, 1년 동안은 기존 방식을 벗어나서 연구자들이 과학신학이라는 분야가 어떤 토픽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지 개론적인 수준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을 다룹니다. 과학과 신학의 방법론이라든가, 신학이 실재를 반영할 수 있는 학문인가, 하나님의 행위 이론,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과학과 신학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트랜스휴먼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이런 어젠다 중심으로 1년 정도 다루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내년 중후반부터는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서 그 주제에 대한 심화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학술대회나 포럼 차원에서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대중 형식의 포럼으로 연결하려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신학계에도 기여할 수 있고, 과학철학이나 자연과학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화 파트너는 단순히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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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는 분입니다.

과신대 사람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이용주 교수님


* 이번 달에는 3월 콜로퀴움에서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에 대해 강의해주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삼위일체론과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에 대해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이 | 이용주 교수
인터뷰어 | 우인, 심기주
사진 | 심왕찬
글 | 심기주


Q: 먼저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여러 설명을 하는데,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A이건 판넨베르크의 설명은 아니고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될 때 다 나왔던 질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 이게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신념인데 교회 안에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은 ‘아들은 아버지의 첫 번째 피조물이지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그 후대 분들이 논쟁 과정에서 정리를 이렇게 했어요‘시간 안에서 아버지(성부)가 아들(성자)을 낳으신 게 아니다. 영원 가운데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고백인 거죠. 이 때  ‘영원은 인간이 생각하는 유한한 시간의 선후관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무시간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더 나올 수 있는 것이 “어떻게 성부가 성자를 낳았지?라는 것이죠. 이 의미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요. 아버지는 아들 없이 계시지 않고 아들은 아버지 없이 계시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야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낳아야 아들이 있죠. 그래서 상호의존적입니다. 여기에 성령까지 해서 세 인격들의 작용과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단일한 신성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틀거리입니다.

 


Q: 하나님이 영원 속에 계시다는 게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신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영원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 더 알려주세요.

A하나님의 영원을 시간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현재(presence)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하신다는 거죠. 과거 안에도 현재로 계시고, 현재에도 현재로 계시고, 미래에도 현재로 계시는, 영원히 현재하시는 분인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시간 양태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고, 시공간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설명에 패러데이의 장이론을 매개체로 사용하는데, 흘러가는 시간구조 안에 하나님이 영원으로 내재하신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충족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현재 가운데 계신다면, 이 세계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인과율적 법칙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오는 뭔가 새로움의 장으로서 현재가 존재할 수 있지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 역시 새로움이 밀려 들어 오고 있는 장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이 세계에 새로움이 출연하는 통로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며 성령이신 하나님이 세계 안에 계시면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작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과거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원인과 결과들만으로는 포섭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사건들이 역사 안에 출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Q: 판넨베르크가 패러데이의 장이론을 이용해서 성령의 일하심을 설명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장이론이 조직신학에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적용돼요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입니다우선 페러데이 장이론에 대해 판넨베르크가 설명하는 것을 제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기존 고전물리학에서는 물체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말합니다예를 들어해가 없어도 지구는 존재한다는 것이죠그런데 장이론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물이 에너지 장 위에 있다고 말합니다그리고 에너지가 어떤 특정한 조건 하에 구체화되면 그것이 사물로 나타난다고 말하죠

이것을 삼위일체론에 적용하면 장점이 있는데요우리는 보통 삼위일체론에서 세 인격들이 실체론적으로마치 당구공 세 개가 따로 있듯이세 인격도 각각 따로 있는 것처럼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세 인격이 하나인지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요그런데 장이론을 가지고 보면 세 인격들은 하나의 단일한 신성이 구체화되어 나타내는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패러데이의 장이론은 “성령이 어떻게 피조세계 가운데서 내재해서 일하시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피조세계에 내재해 있으면서 특히 생명의 근원으로서 생명을 촉발시키는 존재죠이 때영이 피조세계에 계시면서 어떻게 창조자로 활동하시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마치 패러데이의 장이 모든 사물들의 근원인 것처럼 하나님의 영도 모든 피조물의 근저에서 기본적으로 작용하신다는 것으로 설명을 해요그래서 ‘그 영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내재하시면서 존재의 근원으로 활동하신다그리고 그 영의 작용을 통해서낮은 수준의 피조물(무기체)로부터 유기체의 진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이 전체 창조의 과정이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으로 가도록하나님이 직접 창조자로 계속 활동하고 계시다’라고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패러데이의 장이론이 쓰인다고 할 수 있죠.

 

 

Q: 많은 성도들이 현대 과학의 성과와 성서의 내용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고 인지부조화 상태에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신학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신학의 문제일 수도 있고, 목회자의 문제이기도 해요가장 큰 문제는 신학과 교회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거기에는 신학자의 나태함이 분명 있을 수 있지만, 목회자의 불성실함도 있다고 봐요. 목회자들이 지적 활동에 대한 고민이 많이 있나요?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 설교강단에서 성도들과 얼마나 공유하고, 교회신앙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어요. 노력은 하시겠지만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에요. 또 다른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자면, 목사후보생들이 쓸데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한다는 거예요. ppt 만들고, 컴퓨터 하고, 노래도 잘해야 하고, 운전도 잘해야 하죠.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생계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무언가 일들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이런 것들을 강요해온 시스템이에요. 따라서 목사후보생들이 신학적 고민, 학문적인 고민을 할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인을 탓하자는 게 아니고, 어느 교단이나 큰 교회들이 후속세대를 기르는데 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개교회 차원에서는 투자를 하지만 전체교회 차원에서 하지 않습니다. 크게 보자면 이런 것들이 먼저 개선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목사후보생들이 좀 더 진지한 신학적 질문을 해서 이것이 책에만 갇혀있지 않고 교회현장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이것이 잘 되지 않아요.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문제입니다. “다들 그렇게 가르쳐서 그런 줄 알았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한국 평신도들이 그렇게 수준이 낮지 않습니다. 전문직인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교회에서 터무니 없는 소리가 오갈 때 이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그냥 입닫고 있어요. 쉽게 말하자면, 창조과학 같은 것을 교사대학에서 한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걸 다 받아들이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만히 있어요. 왜 그럴까요? 담임목사님을 존경해서 그럴 수도 있고, 교회 안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혹은 이야기함으로써 얻는 불편함보다 침묵하면서 얻는 이익이 더 커서일 수도 있고,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에 대해서, 교회 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좀 공론화해서 얘기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많아지면 그런 점도 자연스럽게 개선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오늘날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A: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고, 그 아들의 행위는 성령의 활동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로써 아들과 성령이 함께 아버지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함께 세 인격이 일하시며, 그래서 하나의 단일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구현되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계의 창조주시라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자칫 잘못하면 과학의 최신 성과들을 신학화하는 데에 급급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정작 신학적 내용을 상실할 우려도 있는데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잘 맞추면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현대적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 판넨베르크를 통해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또 과학이 실제 세계에 대한 유일한 해명 방식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적어도 세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 층위, 하나는 생물학적 층위, 하나는 인격적 층위인데 자연과학은 물리적 층위에 대해서 말할 뿐, 나머지 두 층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진화과학 같은 경우는 생물학적 층위에 관심이 있겠으나, 이들도 역시 자칫하면 인격적인 것, 인간의 도덕성, 사회성, 종교성 등(인격적 층위)을 생물학적 층위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근본적으로 강하죠. 따라서 “너무 이 이야기에만 집중 하다보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얘기인 ‘인격체로서 인간이 함께 더불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 낼까’하는 관심을 놓쳐버리고, ‘창조과학을 비판하거나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 것이 마치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제대로 구현하는 듯한 그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지금 그러고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성경은 ‘다윈이 왜 틀렸는지 혹은 아닌지’에 별로 큰 관심이 없어요하나님은 자유롭게 사랑하는 분이고, 관계 안에서 사랑하는 분이 우리를 자기와의 관계 안에 놔 주셨고, 우리를 상호 간의 관계 가운데(인간 간의 관계,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가운데) 서로를 자유롭게 사랑하는 그 사랑의 사귐이 충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고 거기에 부합하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가장 큰 과제일 것 같습니다. 신학의 가장 큰 과제도 그것일 것 같고요


* 정말 친절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인터뷰에 적극 참여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콜로퀴움에서 뵙겠습니다.


* 제13회 과신대 콜로퀴움 안내_ https://www.scitheo.org/317


posted by 과신대 기자단

과학과 신학에도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과신대 사람들: 서울시립과학관 이정모 관장님



* 지난 1월 14일 미세먼지를 뚫고 최경환 실장과 이진호 간사가 이정모 관장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시립과학관으로 출동했습니다. 서울시립과학관이 월요일에는 정기 휴관일인지도 모르고 말이죠.^^;; 조심스럽게 사무실에 들어가 이정모 관장님과 즐거운 대담을 나누고 왔습니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민주주의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길게 나눈 것 같네요.


인터뷰이 | 이정모 관장

인터뷰어 | 최경환, 이진호

사진 | 이진호



Q: 오늘 여기로 오면서 이정모 관장님과 인터뷰를 하기 전에 말문을 트기 위한 질문을 몇 가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키워드는 유튜브입니다. 젊은 세대부터 매체의 변화 속도가 너무나 빠르잖아요. 관장님은 유튜브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A: 네, 사실 과학관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미 작년에 65세 이상과 14세 이하의 인구 구성이 엇갈렸습니다. 65세 이상은 점점 늘어나고, 14세 이하는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65세 이상이 더 많아졌습니다. 앞으로 5~10년 사이에 대학에서는 큰 물갈이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30대 초반에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이죠. 그런데 열심히 준비해야 할 30대는 별 생각이 없고, 오히려 기회가 별로 없는 40대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걸 봅니다. 공무원 세계에서도 30대에게는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저도 요즘 강의를 많이 나가는데, 젊은 사람들이 정말 없어요. 나이 많은 분들이 많아요. 젊은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는 또 다른 익숙한 매체가 있는 거죠. 제 딸도 돈도 별로 없을 텐데 본인은 유튜브 프리미엄을 본다고 하더군요. 제 딸은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다고 하더군요. 훨씬 편하게 느끼는 거죠. 저도 작년에는 딱 한 번 극장에 갔더라고요. 넷플릭스로 각자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는 거죠.  


예배도 마찬가지죠. 요즘에는 굳이 교회에 가야 해?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죠. 세상은 바뀌고 있고, 다양한 디바이스가 있고, 거기에 적응해 가는 거죠. 과학관도 예전에는 보러 오는 것이었잖아요. 이제는 조금 바뀌어서 가르치는 곳이 되었죠. 강의도 하는 거죠. 우리나라에는 과학관이 137개가 있습니다. 저희 과학관을 만들 때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여러 과학관 중 하나가 아니라 특이한 것을 하자. 일단 지금까지 대부분의 과학관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운영됩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과학관이 아니어도 갈 곳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중고생부터 성인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관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중고생들이 과학관에 오겠냐고 하지만, 해보니깐 중고생들이 많이 와요.


두 번째, 컨셉은 보고 강의 듣는 과학관이 아니라 직접 뭔가를 하는 과학관으로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실험을 직접 해 보는 겁니다. 이런 과학관은 해외 선진 사례도 없습니다. 정작 저희 과학관에서 이렇게 하니깐 소문이 나서 런던의 사이언스 갤러리에서도 오고, 샌프란시스코의 과학관에서도 두 번이나 방문을 했습니다. 장비를 갖춰 나가고 교사들과 협력을 하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해외 과학관 직원들은 상당히 관료적인데 우리나라 교사들은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조적입니다.




Q: 요즘 기성세대가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유튜브를 통해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거나 유사과학과 같은 것이 보급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정보라도 과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게 좋은지, 아니면 과학을 바르게 알리는 것이 좋은지, 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A: 일단 저는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입장입니다. 과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보다는 유사과학이라도 관심이 있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그나마 그런 쪽에 관심이라도 있으면 이야기하고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있기 때문이죠. 교회에 전혀 관심이 없는 친구보다 교회가 싫은 친구가 차라리 나을 수 있어요. 관심이 아예 없는 친구는 어려워요. 뭐라도 하려는 친구는 관심이 계속 바뀌더라도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생각도 안 하고 몸도 안 움직이는 친구는 오히려 더 힘들어요. 유사과학이라도 그 친구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창조와 진화에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보다는 창조과학에 빠져있는 친구들이 차라리 낫다고 봅니다.    


한편 과학자들도 적절하게 타협을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는 욕을 좀 먹어가면서 일을 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약간 순결주의에 빠져있기도 합니다.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Q: 요즘은 정말 사회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 힘든 거 같습니다. 특별히 과학이 가져다주는 삶의 변화는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고민과 걱정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A: 최근에 택시 카풀을 한다고 말이 많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게 반대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세상은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자동차의 90%는 서 있습니다. 대부분의 차는 주차장에 있고 10%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원들이 낭비되고 있습니까? 만약 지금 있는 자동차의 1/5만 있다면, 사람들이 자기가 필요한 시간에 앱으로 차를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을 태워서 가다가 또 다른 사람을 태우고, 그렇게 자기가 간 거리만큼의 요금을 지불한다면요? 그러면 되잖아요? 그럼 지금 택시 기사들의 생존권은 어떻게 할까요? 보조금을 줘야죠. 점점 택시를 줄여가면서 다음 직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죠. 자율 자동차도 순식간에 올 거 같습니다. 자율 자동차의 사고를 걱정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자동차 사고를 내는걸요. 자율 자동차의 책임은 법적으로 정하면 됩니다. 이런 것은 기술적인 문제입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해야죠.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복지입니다. 우린 지금 너무 일을 많이 합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하루에 3시간만 일하면 먹고살았습니다. 신석기 사람부터 아프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또 얼마나 일을 많이 합니까? 우리는 시간을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거죠. 저는 앞으로 인공지능과 로봇이 발전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민주주의가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넓고 깊은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기술에 종속될 수 있기 때문이죠.




Q: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풀어야 할 숙제 아닌가요?


A: 네, 좋은 질문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너무나 아픈 거죠. 제도는 정착되지 않았는데,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많아지는 거죠. 그래서 순서가 바뀌어야 하는 거죠. 플랫폼이 바뀌기 전에 복지가 먼저입니다. 오늘 아침에 경향신문에서 장하준 교수 인터뷰가 나오던데, 더 왼쪽으로 가서, 더 많은 복지를 하라는 거잖아요. 전 그게 옳다고 봅니다. 일단 안심이 돼야 합니다. 안전한 사람이 더 대담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직장을 그만둬도 우리 집이 여전하고, 내가 아파도 치료받을 수 있고, 다시 일자리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왜 우리가 지금 일자리에 얽매이겠어요. 얼마든지 다른 길로 갈 수 있죠. 어차피 사양사업이라면 없어질 직업에 매달리지 않고 하루라도 일찍 다른 길로 갈 수 있겠죠. 이런 것을 정치로 해결해야죠.


이런 부분에서 교회가 선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봐요. 예전에 제가 어릴 때,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회장 선거가 있었어요. 학급회의를 인도하는 회장을 우리가 선출한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 회장 제도가 없어졌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저희들은 교회에 가서 투표를 해 봤어요. 교회 중등부, 고등부 회장 선거, 임원 선거를 해 본 거죠. 교회에는 민주적인 제도가 남아 있었어요. 목사를 위임할 때도, 장로를 선출할 때도 투표를 했어요. 그 당시 민주주의 훈련을 교회에서만큼은 꾸준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교회가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었죠. 요즘은 가장 보수적인 곳이 교회죠. 가장 많은 가짜 뉴스의 생산지죠.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교회가 한 20년만 쉬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교회가 개혁될 수 있는 틈이 없어요. 일단 문 닫고 세대를 바꾸고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한 세대가 지나간 다음에 우리가 마치 처음 선교를 받듯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겠어요.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 욕하는 게 이해가 돼요. 사람들이 교회에게는 더 높은 희생, 더 높은 이상을 기대하잖아요. 이제는 그냥 평균만이라도 해라.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역행을 하고 있으니까, 이럴 바에는 차라리 새 출발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Q: 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저희 과신대도 지금까지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뤘습니다. 앞으로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A: 네, 맞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의 이야기잖아요. 지금의 사람들은 과학과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인공지능, 자율 자동차, 여섯 번째 대 멸종, 환경의 문제들 같은 것을 고민해야죠. 우리가 옛날 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E. H. 카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옛날 일을 통해서 지금을 비춰보고, 옛날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지금을 보기 위한 것이죠. 지금 우리 시대의 과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단순히 답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일이면 답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의 과학은 답이 없으니까, 더 토론하고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거죠.


Q: 관장님께서 많이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 시대에는 전문 연구가와 대중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커뮤니케이터가 필요한 거 같습니다.


A: 저는 과학계에서도 대학에서 나와 밖에서 활동하고, 신학교나 교회에서도 밖으로 나온 신학자가 필요하다고 봐요. 대학이나 교회라는 플랫폼이 이제는 옛날 플랫폼이에요. 누군가는 새롭게 도전할 필요가 있어요. 플랫폼은 계속 바뀝니다. 우리가 그 플랫폼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대학과 교회는 비용만 많이 들고 소통도 잘 안되고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플랫폼입니다. 새로운 플랫폼이 뭔지는 모르지만 계속 고민을 해야죠. 연습하고 적용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야죠.


Q: 저희 과신대가 앞으로 어떤 주제들을 다루면 좋을지 조언 부탁합니다.


A: 실제로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창조와 과학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이슈가 아닙니다. 결국 과신대도 지금 과학의 이슈를 다뤄야죠.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테죠. 사실 세상을 바꾸는 건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술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예를 들어 카풀이라는 앱 제도, 이런 문제를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고민을 해야 할까? 우리는 누구를 위로해야 하는가? 자신들의 역할을 찾아가야죠. 유전자 편집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건 하나님의 역사에 어긋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 그럼, 간 이식은? 각막 이식은? 그런 건 하나님의 역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럼, 항생제는?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가 어디까지를 고민해야 하는지 계속 묻는 거죠. 미숙아가 태어나면 우리는 인큐베이터를 통해서 억지로 살려내잖아요. 이거 우리가 해도 되는 거야? 사람들은 당연히 해도 된다고 말하겠죠. 그럼 편집된 아기들은?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성도들과 이야기를 나눠야겠죠. 이런 것이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아닐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조냐, 진화냐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기독교인들이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만을 믿는다고 해보죠. 뭐가 문젠가요? 세상에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갖고,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진짜 큰 문제죠. 진화를 안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창조만을 믿을 경우, 사람들에게 조롱은 당할지언정, 이 세상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작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조와 진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 정도 논의하고 적당한 매뉴얼을 만드는 것으로 종결을 지으면 좋겠습니다. 1년에 한 번 정도 그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내용을 업데이트하는 걸로 끝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귀국해서 지금까지 계속 이런 문제로 질문을 받으면 그냥 우종학 교수님의 <무크따> 읽어 보라고 보내줘요. 그게 제일 좋아요. 저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 항상 그런 질문을 해서 그냥 <무크따> 보내주고 말아요.


*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 저희 과신대에 훌륭한 과학자들을 많이 소개해 주세요. 장시간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화의 기본은 겸손함과 열린 자세입니다.


* 늦가을 국립중앙도서관 근처 카페에서 김흡영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김흡영 교수님은 강남대학교에서 오랜 시간 종교 간의 대화,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 국내 1세대 과학신학자입니다. 꾸준히 해외 저널과 저서에 글을 기고하시고 최근에는 트랜스휴머니즘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다고 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실장

인터뷰이 | 김흡영 교수

사진/글 | 최경환 실장



1. 교수님은 언제부터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요?
  
본래 저는 서울대학교 공대를 나왔고, 과학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고 싶었죠. 나중에는 우주에 못 가지만, 영적인 우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신학을 공부하게 됐고,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 가서 과학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학교에 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라는 연구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Robert John Russell과 Ted Peters을 만났습니다. 이분들이 저의 스승이자 친구입니다. 이분들과 함께 저는 아시아 지역을 맡아서 한국에서는 4개 대학(장신대, 한신대, 서울여대, 강남대)에 ‘종교와 과학’ 정규 과목을 개설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동안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주로 서구 신학을 기반으로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서구적인 맥락에서는 신학과 과학이 분리가 안 됩니다. 둘 다 서구적인 학문입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도 결국 과학적인 사고입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한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초자연과 자연이라는 이원론을 극복한 동양적 사고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둘의 간극을 극복한 것이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도교와 유교였고, 이 두 전통은 자연 안에 이미 초월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월적 내재를 말하고 있죠. 서구 신학에서는 이 둘이 같이 가기 어렵죠. 그래서 저는 동양신학, 특히 한국신학적인 입장에서 서양신학이 가지 못하는 새로운 모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서구의 학자들이 종교와 과학의 대화나 생태신학에 대한 논의가 나오면 지속적으로 저한테 원고를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꾸준하게 1년에 2-3개씩 글 요청이 들어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신학과 과학이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요? 평소 교수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신학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것입니다. 비기독교적인 토양 속에서 혹은 기독교적인 토양 속에서 과거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또 현재의 신학,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모두 연결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신학은 과거를 잘 배우지도 않고, 미래를 이끌어 가는 과학도 잘 배우질 않습니다. 서양의 신학만을 번역하고 공부하기 바쁘죠. 
  
무엇보다 대화가 중요합니다. 대화의 기본은 자기 입장을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서로 열린 입장에서 담을 허물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대화에 들어가면, 전도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단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듣는 자세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나 과학주의자들과도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문자주의나 교리주의로는 대화가 힘들겠죠.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도 다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이 중요하죠. 나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를 열어놓고, 이웃을 품는 자세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정죄하는 자세로 대화를 하면 안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가슴에 품고, 상대방의 입장을 들으면서, 서로 소통을 하는 것이 대화의 방법입니다. 나의 신학을 과학과 대화하면서 폭넓게 지평을 넓히는 겁니다. 과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신학적인 지평을 넓히는 것이죠.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2차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고 나서 자신만의 새로운 신학을 구성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정도 규범적인 틀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사용될 신학입니다. 교회 밖에서 사용할 용도가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이걸 주장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설교 밖에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치열하게 새로운 신학을 위해 고민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3. 그렇다면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중요한 주제는 트랜스휴머니즘이나 인공지능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는 과학의 시대, 특별히 기술의 시대입니다. 생명과학과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의 발달은 지금 실험실에서 이뤄지고 있고, 현재 우리의 삶을 이끌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들도 핸드폰에 끌려가고 있잖아요. 과학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 창조와 진화 논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쩌면 당장 급한 것은 인공지능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따져봐야 합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이 나타나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어떻게 되는지 고민해 봐야죠. 그러니 우리는 현대의 과학자들과 공학자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근대주의가 인간중심주의로 흘러가니깐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트랜스휴머니즘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다음이 트랜스휴머니즘입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 과학을 알아야 합니다.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신문이 아니라,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과학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고, 실험실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체크해야 합니다. 지금 벌써 사이버 교회가 나오고, 인공지능이 설교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도 준비를 해야죠. 
 


4. 새로운 과학의 발전과 도전 앞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기독교는 항상 새로운 도전 앞에서 정화가 됐습니다. 이제 가짜 설교, 가짜 목사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영적인 교류를 통해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진짜 목사가 나와야 합니다. 진짜 목사, 진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죠. 인공지능은 신학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미래의 트랜스휴머니즘은 기독교에 하나의 도전을 줍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진짜냐? 기독교가 말하는 참 인간은 무엇이냐? 신론에도 도전을 줍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인공지능이 다 하는걸요.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무엇인가? 그래서 저는 십자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넘어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종말론에도 충격을 주죠. 그동안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는 나라를 소망했는데, 이제 과학이 그것을 해 주겠다고 하잖아요. 그럼 기독교는 뭐가 다른 거죠? 그러니 신학이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기존의 틀로는 안 됩니다.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칼 바르트는 신문을 보고 기도를 한 신학자입니다. 어쩌면 나치에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이 기도에서 나온 겁니다. 이제는 최첨단의 과학 소식을 접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은 겸손하게 공부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미 은퇴를 했습니다. 이제 후배들이 이어받아야죠. 새로운 주제들이 계속 쏟아지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과신대는 열정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이 분야에 공헌을 해 주길 바랍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