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2. "이산화탄소" 도대체 누구냐, 넌?

  • 지구온난화가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고 저도 처음 접했을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게 벌써 20년도 더 된 기억인데 그 이후 우리가 얼마만큼 노력하고 인지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요즘 작은 실천이지만 플라스틱 줄이기 운동의 하니인 텀블러나 개인컵 사용은 많이 보급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며 계속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좋은글 응원합니다~

    김현호 2019.10.28 23:05
    • 댓글 감사합니다. 저희 과신대에서도 소소하지만 의미있는 실천을 하나씩 만들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산화탄소" 도대체 누구냐, 넌?

 

김진수 (에딘버러대학교 지구과학부 박사 후 연구원)

 

 

이산화탄소.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많이들 들어보셨겠지만, 막상 어떠한 원리로 어떻게 지구온난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번 순서에서는 이산화탄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0.04% 이산화탄소

 

이산화탄소(CO2)는 용어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탄소 원자(C) 하나에 산소 원자 2개 (O2)가 결합한 화학물질입니다. 전 지구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평균 농도는 약 400ppm인데, ppm(parts per million)은 전체 양 중 100만 분의 몇을 차지하는가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위입니다. 즉, 100만 분의 400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에게 익숙한 %로 표현하자면 0.04%입니다. 전체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0.04%. 매우 작은 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양을 무게로 환산해보면 약 850기가톤 (기가톤 = 10억 톤)이나 됩니다.

 

 

비닐하우스와 이불의 원리

 

0.04%의 이산화탄소가 도대체 공기 중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이산화탄소는 대표적인 온실가스 (greenhouse gas)라고 알려졌습니다. 온실 또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비닐하우스에서는 별다른 장치 없이 투명한 비닐 막 하나로 내부 온도를 효과적으로 올려서 각종 채소를 재배할 수 있습니다. 비닐은 태양 빛(가시광선)을 투과시켜 내부까지 잘 들어오게 해 주지만, 실온에서 모든 물건이 내는 적외선 영역에서는 불투명해서 나가는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잡아주게 됩니다. 즉 들어오는 에너지에 비해 나가는 에너지는 적어서 내부 온도를 높이게 해줍니다. 온실가스는 이러한 원리로 지구 대류권 대기의 온도를 높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이불에 들어가서 잠시 있다 보면 점점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불 자체가 따뜻해서가 아니라 (이불 자체가 처음부터 온도가 높았던 것이 아니라) 이불을 덮고 있는 우리의 체온이 이불 안에 갇혀있는 공기를 데우는 것입니다. 이불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더 따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실가스도 이불의 원리와 같습니다. 대류권에서 만들어지는 적외선이 곧장 우주로 나간다면 온실효과가 없겠지만, 나가던 적외선이 온실가스와 반응하여 일부가 우주로 가지 못하고 대류권을 데우는 효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18세기 산업혁명 이전에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280ppm이었는데, 현재는 400ppm이니까 약 43% 늘어났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매년 2ppm (43억 톤)씩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추세는 인류활동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화석연료(석유, 석탄) 사용과 토지사용 변화(숲을 농업 또는 다른 용도로 변환)가 대표적인 원인입니다.

 

 

위의 그래프는 지난 80만 년의 이산화탄소 기록입니다. 남극에 매년 눈이 쌓일 때 그 당시의 공기를 머금고 쌓이게 되는데, 80만 년 동안 눈이 쌓인 곳을 찾아서 얼음 기둥을 시추하여 분석한 결과입니다. 80만 년 동안 가장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았던 시기의 기록은 300ppm 정도인데, 현재는 400ppm이 넘었습니다. 물론 자연적인 변동으로 적게는 200ppm, 많게는 300ppm 구간을 오르락내리락하였지만, 최근 관측된 400ppm이라는 숫자는 자연적인 변동으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해 보입니다. 즉, 인류 활동에 의한 이산화탄소 방출 때문에 최근 급격한 이산화탄소 농도 상승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1958년부터 최근까지 정확하게 관측한 이산화탄소 그래프입니다. 단 한 번도 감소한 적 없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월간 이산화탄소 농도를 나타내는 빨간 점들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변동하는 것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매년 5월경에 가장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고 9월경에 가장 낮은 계절적 변동이 매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북반구에 자리하고 있는 숲들이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배출하는 양의 일부는 흡수하고 있지만, 이산화탄소 농도의 뚜렷한 추세를 억제할 정도는 아니므로 여전히 매년 이산화탄소 농도는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류가 화석연료 사용과 토지사용 변화로 방출하고 있는 이산화탄소는 최근 10년 기준 매년 5ppm 이상입니다. 나머지 3ppm 정도는 해양과 육상의 식생(주로 숲)이 흡수하여 대기 중에는 약 2ppm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해양과 식생이 매년 3ppm 정도를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 극심한 지구온난화에 시달렸을지도 모릅니다.

 

기후 파업 등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인류는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전기 사용 및 난방 (25%), 토지사용 변화 (24%), 산업 (21%), 교통 (14%), 건축 (6%) 등에서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 칼을 대어 빨리 줄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편의를 포기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또는 경제적인 손해를 보면서까지 줄여야 한다는 데에 사람들이 동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는 느리기만 합니다.

 

계속 증가할 이산화탄소

 

특별한 제제가 없는 한 이산화탄소 배출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총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전 세계 7위, 인구당 배출량은 3위를 차지하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개인이 텀블러를 사용하고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사회 전반적인 구조적 변화 없이는 당장에 이산화탄소 배출을 혁신적으로 줄이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활동 때문에 43% 늘어난 이산화탄소와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지구의 기후가 변해왔지만 앞으로가 더 큰 문제입니다. 매년 2ppm씩 쌓이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언제까지나 해양과 식생이 3ppm씩 흡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연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해양과 식생이 어느 정도 저장고 역할을 하고 있지만, 기후변화 때문에 이산화탄소 흡수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과학자들은 양의 되먹임 (피드백) 작용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지구온난화 – 흡수 능력 상실 –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더 쌓임 – 더 쌓인 이산화탄소가 추가적인 지구온난화 야기> 이러한 형태로 결과가 다시 원인에 영향을 미쳐서 더 급진적인 지구온난화가 야기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산화탄소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편의를 제공합니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있습니다. 현재의 편의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기후변화나 수십 년 뒤에 일어날 지구온난화에 대한 위험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현재의 편의를 위해 고의적으로 망각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오늘날 예수님께 드린다면 어떤 대답을 듣게 될지 상상해봅니다. 자기 이기심과 욕망을 뛰어넘는 신앙과 이 세상 질서와는 매우 다른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것이 요구될 때, 지구온난화를 줄이기 위한 우리의 고민도 더욱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욕적으로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편의가 가져올 대가를 인지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대해서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창조과학은 이신론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 음.. 제 생각에 너무 멀리가신 것 같습니다만..
    창조과학회에서도 해가 멈춘 것 뒤로간 것, 바다가 잠잠케된것, 홍해가 갈라진 것,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자연에 변화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을 알고 계실겁니다(참고로 저는 창조과학회와 관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만드시고 운영하시는 것은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알고 믿고있는 내용일겁니다 ^^; 이런 전지전능하신 분이 우리를 한 점으로 창조 하실 수도 있으셨다면 우리를 지금의 모습으로도 창조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창조고학회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혹 하는 마음이 들엇지만 이내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구요 하나님을 과학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1리터 비이커로 바닷물을 측정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다고 생각했거든요 ^^& 1리터의 비이커는 과학입니다 그 비이커로 하나님을... ㅎㅎ
    왜 창조과학회를 비판적으로 생각하시는지... 물론 창조과학회가 비과학적인 부분으로 이야기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세상사람들이 보면 같은편끼리 열심히 싸우는 것처럼 보일까봐 조심스럽습니다...ㅠㅠ 하나님이 주신 비이커로 열심히 바닷울을 해이면서 하나님의 광대하심, 위대하심, 전지전능하심을 느끼는 것은 정말 기쁜일이지만 그 비이커로 너네가 맞는이 내가 맞는니 하는 것은 좀.....^^;
    짧은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

    여호수아유석 2019.10.29 09:25

 

창조과학은 이신론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글_임택규

 

제가 현재 근무하는 직장은 전력회사입니다. 캘리포니아에는 3개의 전력회사가 있는데, 제가 일하는 회사는 캘리포니아 중부에서 남부에 이르는 130,000 평방킬로미터의 광할한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의 넓이가 100,210 평방킬로미터이니까, 대한민국 국토보다 약간 더 넓은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캘리포니아주에 2개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샌디에고라는 도시의 바로 북쪽인 샌 오노프레라는 곳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는 몇 년 전에 폐쇄를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가동되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단 하나의 원전인 디아블로 캐년 발전소는 주정부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원전 가동 허가가 만료되는 2025년까지 완전히 폐쇄될 예정입니다.

 

강화된 환경규제에 맞춰서 태평양 해안가에 있는 많은 화력발전소들도 차례로 폐쇄되고 있고 그로 인한 전력 생산의 감소는 풍력이나 태양에너지같은 무공해 재생에너지를 통한 발전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저는 새로 개발되는 태양력 발전소에 송전시설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에 있는 모하비 사막은120,000 평방킬로미터를 넘어서는 광활한 면적에, 여름 최고 기온이 섭씨 54도에 달하며, 연간강수량은 250 밀리미터 미만입니다.  우리나라의 연평균 강수량이 약 1,250 밀리미터 정도이므로, 이렇듯 건조한 기후와 엄청난 일조량을 가지고 있는 모하비 사막은 정말 태양력 발전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태양력 발전소가 잘 찍혀 있습니다. 

 

 

사진 윗쪽 부분에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세 군데의 발전소는 태양광 발전소로 오해하기 쉽지만 태양열을 사용하는 발전소입니다. 거울이 반사시킨 태양빛을 집광타워에서 모아서 그 열로 물을 끓여서 터빈을 돌려서 전기를 생산합니다. 사진 아랫 부분 중앙에 크게 보이는 발전소는 햇빛을 잘 흡수하는 검은색을 띄기 때문에 태양열 발전소로 오해하기 쉬우나 저런 형태의 검은색 패널을 가진 발전소가 태양광을 이용하는 발전소입니다. 태양에서 복사된 빛 입자가 패널 표면에 닿으면 그 에너지를 흡수한 전자가 방출되는 현상을 이용해서 전력을 생산하는 형식입니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발표한 광전현상을 이용한 발전 형태입니다. 

  

이러한 발전소들은 당연히 송전시설을 필요로 합니다. 수십 마일 때로는 수백 마일에 달하는 송전시설 및 변전시설들 없으면 당연히 생산한 전력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지 이러한 발전소, 송전시설, 혹은 변전시설이 완공이 되면 그때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떠한 시설물(Asset)이 완공된다는 것은 그 시점부터 그 시설물은 공학적인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경제학적으로는 그 시점부터 재화를 창줄할 수 있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어떤 시설물의 건설을 완성한다는 것,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을 달성한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준공과 더불어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부정적인 현상도 있습니다. 바로 감가상각(Depreciation)이 시작된다는 것 입니다. 완공된 시설물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점 노후가 진행되고 잔존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보관하고 보수하며, 때로는 시설물의 이 부분 저 부분을 신품으로 교체해주지 않는다면 곧 그 시설물은 기능을 제대로 발현할 수가 없게 되버립니다.

 

 

근대과학이 태동하면서 이신론(Deism)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이신론적 신관은 과학적 결정론에 힘입어서 태동했습니다. 인류가 자연이 운행되는 법칙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면 인류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결정론이 발생했던 것 입니다. 이러한 결정론 속에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개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는 더 이상 요청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기적들은 우리의 정확한 계산을 틀리게 하는 귀찮은 변수에 불과하게 된 것이지요. 

 

자연을 기계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계의 구동원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기계가 미래의 어떤 시점에 어떻게 작동할 지를 충분히 계산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 기계가 우리 계산과 다르게 작동을 한다면 그러한 오작동은 자칫하면 대형 사고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설치하셨던 이 법적인 질서에 의해서 정교하게 작동하는 자연이라는 기계가 갑자기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확한 계산에 의한 예측을 빗나가게해서 끔찍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오작동의 변수일 뿐입니다. 이러듯 이신론적인 세계관 속에서는 하나님의 기적 혹은 능동적인 개입마저도 거부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신론은 근대적 의미에서 무신론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신론이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으로까지 연결되어 있지요. 이러한 이신론 혹은 무신론적 세계관은 현장에서 구조물을 축조하고 그것을 통해서 편익과 재화를 창출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엔지니어인 저에게는 굉장히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준공된 후에도 적절한 관리를 통해서만 시설물의 가치와 성능이 유지된다는 점을 매일매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회에서 진화론이 이신론적이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저에겐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이지요. 진화론은 물론 과학이론에 불과하지만 저는 그 속에 무한한 신적 개입(Divine Intervention)의 여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 개입하시고 피조물들을 보살피시며 사랑으로 다스리셔서 풍성케 하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섭리를 우리가 통찰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6천여년 전, 6일 창조 이후에 자연계에 아무런 개입이 없으셔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제겐 이신론적으로 느껴집니다. 만약 창조 이후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이 자연에 아무런 개입이 없으셨다면 이 자연은 과연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네 진입로를 재포장하고, 골목길에 설치된 가로등을 재정비하는 구청 토목과 직원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기후변화 제국의 프로테스탄트] 1. 삶에서의 회심, 기후변화와 맞서다

  • 자녀들에게 충분히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수 있게 끝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기대됩니다 ^^

    jam5 2019.09.25 17:45
  • 기후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글 감사합니다. 크리스천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겠습니다. 이후의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CoreaArt 2019.09.25 19:16
  • 고등학교때부터 한 길만을 걸어온 김박사의 건투를 빕니다

    라임오렌지 2019.09.25 23:14
  • 저도 기사로 스웨덴 소녀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는 했었는데요, 좋은 칼럼 등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챙겨보겠습니다^^

    2050 2019.09.26 07:55
  • 기후문제는 과학교육계에서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과학교육의 트랜드가 교과서에서 교실밖인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후 문제는 몇 사람의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동의와 행동 변화가 함꼐 동반되어야 하는 문제인 동시에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주는 직접적인 이슈입니다.

    현장 과학 선생님들이 이것에 대한 중요성은 알지만 학술적이고, 이론적 기반이 부족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참고가 될만한 좋은 내용 기대하겠습니다.

    준이네 2019.09.26 09:53

 

삶에서의 회심, 기후변화와 맞서다

 

김진수 (에딘버러대학교 지구과학부 박사후연구원)

 

 

1529년 슈파이어 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마틴 루터의 지지자들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루터파 제후들과 자유도시 대표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항의하는 문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제국회의와 황제에게 맞선 이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 혹은 저항하는 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르며 신교도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로 굳어졌습니다.

 

500여 년 전에 제국과 황제에 맞선 이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신앙을 물려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집단’이기도 하지만 한 ‘개인’이기도 한 그들은 살해 위협 등 신변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항의하며 개신교회를 세웠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담대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들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면죄부로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확신, 개혁이 필요하다는 확신, 자신이 그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는 확신 말입니다. 저는 이 확신이 필요한 영역이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기후변화에 대해서입니다.

 

 

안녕하세요? [기후변화 제국의 프로테스탄트]를 연재하게 된 김진수라고 합니다. 저는 지난 2월에 포항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딘버러 대학교로 옮겨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전 세계에서 ‘기후 파업 (climate strike)’ 운동이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 (Greta Thunberg)가 지난해 8월 ‘등교 거부’ 시위를 시작해 유럽 및 세계로 이 운동을 확산시켰습니다. 청소년들이 본인들의 미래를 위해서 학교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기후변화로 인하여 지구가 망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밝은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이 소녀는 환경 파괴에 침묵하고 기후변화 대응에 미온적인 주류 정치인들과 어른들에게 반항하는 의미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등교거부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작년 12월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는 기득권층을 겨냥한 연설에서 “당신들은 자녀를 사랑한다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녀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라고 발언하였고, 지난 9월 23일에는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 3분 연설에서 “생태계 전체가 무너지고 있는데 각국 정치지도자들은 영구적 경제성장과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다.”“당신들은 우리 젊은 세대를 실망시켰고, 우리는 당신들의 배신을 깨닫기 시작했다. 미래 세대의 눈이 당신들을 향해 있다. 만약 우리를 실망시키는 쪽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질타하였습니다.

 

이 소녀에게는 ‘확신’이 있어 보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미래’가 없다는 확신, 개혁이 필요하다는 확신 말입니다. 저는 기후변화 과학자이자 신앙인으로서 [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세기 1장)라고 하셨지 파괴하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분별한 개발과 무책임한 발전으로 더욱 강력해진 자연재해(사실상 인재 人災)를 연거푸 경험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 (로마서 6장)인 것처럼, 인류활동으로 인해 지구에는 사망의 그림자가 길게 늘여져 있다고 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피 값 주고 사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해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야고보서 2장)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이 땅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그의 청지기라면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응하여 어떤 믿음과 행동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확신’과 함께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레타가 경고한 것처럼, 이대로 문제를 방치했다가는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가 살았던 지구를 물려주기는커녕 지옥 같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인격적인 회심을 요구하실 때에, 우리가 당연시하고 살아왔던 삶의 패턴 하나하나까지도 ‘회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 청년처럼 고민하다가 망설일 수도 있고, 삭개오처럼 자발적으로 본인의 삶을 180도 바꾸는 결단과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기후변화 과학의 최신 연구 결과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드리고, 우리가 과연 어떤 행동들을 할 수 있는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창조설(creationism) 논쟁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

 

창조설(creationism) 논쟁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

 

김정형 (장로회신학대학교)

 

 

한국교회의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은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을 창조설(creationism)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창조 세계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주장으로서 창조설은 창조자 하나님에 관한 교리로서 창조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이다. 영어의 ‘creationism’을 ‘창조론’으로 번역하면서 오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creationism’을 ‘창조론’ 대신 ‘창조설’로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창조론’이란 용어는 창조자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미 아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는 한국교회의 창조 신앙이 다양한 창조설 사이의 논쟁을 넘어 성서와 기독교 전통의 창조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창조설은 창조자 하나님의 성품이나 계획보다 창조 세계의 기원과 역사와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창조 신앙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사상사 속에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창조설이 존재했다.

 

• 평평한 지구 창조설 (flat earth creationism)

  • 지구 중심 창조설 (geocentric creationism)

    • 젊은 지구 창조설 (young-earth creationism)

      • 간극 창조설 (gap creationism)

        • 날-시대 창조설 (day-age creationism)

          • 점진적 창조설 (progressive creationism)

            • 진화적 창조설 (evolutionary creationism)

 

이 스펙트럼에서 위로 갈수록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에 더 충실하고, 아래로 갈수록 현대 과학 이론에 더 수용적이다. 한편 이 스펙트럼 상의 다양한 창조설 입장은 모두 창조자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지만, 창조론의 핵심 내용에 해당하는 창조자 하나님의 성품이나 계획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다만 창조 세계의 기원과 역사와 모습에 관해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말하자면, 다양한 창조설 사이의 논쟁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창조론의 핵심 진리를 비껴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창조설 논쟁을 넘어서 성서와 기독교 전통의 창조론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창조 세계의 기원과 역사와 모습에 관한 한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신 아버지, 유일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과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자’(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대한 보편교회의 신앙고백에 동참하고 있다.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이 신앙고백은 세상과 인간의 궁극적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을 뿐 아니라, 세상과 인간의 궁극적 운명 역시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온 세상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다. 이것이 참된 의미에서 기독교 창조 신앙의 핵심 진리이며, 신학적 의미에서 참된 창조론의 중심 내용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궁극적 기원이 되시며 궁극적 운명이 되신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우주와 인간의 시간적 기원을 추적하는 역사적 · 과학적 연구와 상당히 다른 차원에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과 땅에서 펼쳐지는 우주와 생명의 역사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로 차원이 다른 두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다니엘 밀리오리(Daniel L. Migliore)의 다음 진술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기간과 단계와 과정에 대해 우리의 과거의 가정이 아무리 광범위하게 수정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중심적 주장에는 본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기술이 발전할수록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구체화된다

 

강응섭 (예명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정신분석학-리더십학 교수)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계통발생적 측면에서나 개체발생적 측면에서 줄곧 제기되어 왔다. 인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역사 이전 시기에는 그림, 건축 등 비언어적 형태로, 역사 시기에는 언어적 형태로 기록을 남겼다. 비언어적 형태는 언어적 형태 속에 스며들어 그 흔적을 공유해 왔다.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그 흔적을 본다. 자연의 초기 모습, 이미지로 그려지는 역사 이전 시기의 그 모습은 역사 시기의 산물인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실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언어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언어는 역사 이전 시기의 모습을 역사 시기에 전하려고 도입한 고난도의 기술(Technic)이다. 그 기술을 터득한 이래로 인간은 계속해서 그 기술을 정교하게 만들어 왔고, 그것을 이용해 기록 문화를 남겨 왔다.


철기시대의 산물인 ‘쟁기’로부터 ‘정보화 기술’과 ‘디지털 기술’이 대두되기까지 우리는 지금, 네 번에 걸친 산업혁명의 산물들과 공존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이어져 있다. 창세기 2장은 그 질문에 근거하여 서술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다”(5절)는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6절)와 대조를 이룬다. 6절은 1장 2절의 ‘깊음(테홈)’에서 시작되는 물의 오름과 연관된다. 즉, 5절과 6절의 대비는 물의 내림과 물의 오름의 대비, 물의 없음과 물의 있음의 대비를 보여 준다.


우리는 보통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말하는데, 창세기 2장에서는 물이 아래서 위로 올라온다고 말한다. 물이 아래서 위로 올라오는 모습은 안개 낀 새벽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지면을 적실 정도로 충분한 안개가 올라왔다. 대류 현상의 물기로 인해 충분한 수분을 머금은 흙은 하나님이 사람을 짓는 재료가 된다. 그리고 바람은 지어진 사람을 말린다. 그래서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기록한다. 기록 문자가 없던 시기의 모습을 기록 문자로 정리함으로 인간의 기원을 담고 있는 5~7절은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이에게 큰 실마리를 제공한다.

 

바울은 이 구절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다루었다. 그러면서 ‘생령’(산 영)과 ‘살려 주는 영’을 대비한다. ‘산 영’(a living soul, ψυχη, psyche)은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nephesh)의 번역이다. 기독교에서 보통 ‘영혼’이라고 말하는 ‘프시케’는 심리학(Psychology), 정신분석학(Psychanalysis)의 어근이 된다. 히브리어 ‘네페쉬’는 목구멍을 지칭하는 해부학적 용어이자 ‘갈증’이란 의미를 지닌 정동적 용어이다. ‘네페쉬’는 살기 위해 마시고 먹고 호흡하는 통로인 목구멍이자, 자신의 갈급함을 표현하는 말을 전달하는 통로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최초 이름(명사)은 ‘네페쉬’였다. 그 ‘네페쉬’가 곧 ‘프시케’다. 살려 주는 마지막 아담인 예수로만 부활을 맞이하는 자가 ‘산 영’이다.

 


인문학의 역사는 ‘프시케’에 관계된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인문철학자들에 의해 ‘프시케’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다. 이런 세계관은 산업혁명의 배경이자 후경이 된다. 산업혁명은 인간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지만 그에 따른 역효과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프시케’는 이전보다 더, 새로운 형태의 고뇌를 하게 되었고, 고뇌하는 인간의 ‘프시케’에 관한 연구가 데카르트, 칸트, 헤겔에 의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인간 고뇌에 대한 탐구와 산업혁명의 진전 시기는 서로 겹친다. 프로이트(1856~1939)는 이 둘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접점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ps(psi, 프사이)-system을 구상하면서 몸 밖과 몸 안의 관계를 정립하고자 그 과정과 진행을 도면으로 그렸다. 물론 프로이트의 도면은, 여러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 중,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도면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제2차 산업혁명이 한창 여물어 가던 시기에, 곳곳에서 나타난 폐단의 인과관계를 연구했던 신경학자였다. 그는 그 문제를 진단하고자 몸 밖과 몸 안을 대조시키면서 ‘감각-기억-무의식-의식’이라는 가교 장치를 마련한다. ‘무의식’은 몸 밖과 몸 안을 잇는 하나의 장치다. 프로이트는 이걸 ‘비계’(飛階)라고 불렀다. 건물을 짓기 위해 세우는 장치에 비유한 것이다. 비계를 통해 작업하다 보면, 도면에 그려진 것이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하나님이 흙으로 빚고, 그것에 생기를 불어 넣어 아담이라는 생령이 되었듯이.


하나님의 이런 일하심은 네페쉬, 프시케로서의 인간을 만들었다. 창세기 3장은 이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자연과 사귀는지를 보여 준다. 에덴에서의 삶 기록은 기록 이전의 역사를 잘 나타낸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릴 자(1장 26절)로서 네페쉬인 아담을 만들었다. 그 일을 할 공간인 에덴에 아담을 데려다가 다스리는 일을 수행하게 했고, 그 일을 도울 하와도 주었다. 다스리는 일은 각 실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스리는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무엇이며, 염두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담에게 규율을 주었고, 아담은 그것을 준수하는 가운데 실재와 소통하면서 다스림을 수행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제시한 규율은 아담과 하와에 의해 파괴되었다.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인 네페쉬로서의 아담과 하와, 이 둘은 하나님의 규율을 이뤄내지 못했다. 왜일까? 뱀이 등장하여 소통을 방해했기 때문이고, 뱀의 제안을 듣고 방황이 부족했던 탓이다. 하나님의 제안을 염두에 두었다면 더 방황했어야 했다. 속는 자는 방황하지 않지만, 속지 않는 자는 방황한다.


왜 방황이 어려운가? 하나님이 그렇게 지어서인가? 인간이 속임수를 피할 능력을 개발하지 못해서인가? 다시 말해, 속임 구조로 만들어져서인가, 인간이 속임에 안주해서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은 수렴되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양날의 주장처럼 이어져 왔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전자는 방황 없는 ‘믿음의 시대’를 대변하고, 후자는 방황하는 ‘이성의 시대’를 대변한다. 의심은 근대를 출범하게 했다. 의심은 속지 않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에서 비롯되었다. 속지 않으려는 인간의 무기는 의심이다. 그것은 곧 이성에 대한 신뢰였다. 


그런데 이 신뢰 역시 속임임을 밝힌 연구가 제시되었다. ps(psi, 프사이)-system을 정립한 프로이트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뒤엎었다. 믿음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이어져 온 서양사회는 또 다른 형태의 속임 구조를 밝힌 프로이트로 인해 적잖이 불편해했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주장이 무신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대한 교리에서 비롯된다. 정말 속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누구의 의심이 믿음에 근거한 것인지를 깊이 상고해 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하나님이 지은 인간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는지? 기록 문자가 없던 시기의 일을 기록 문자로 남긴 창세기 도입부로 돌아가 논의를 다시 시작하면 프로이트의 작업이 의미 있지 않을까? 


과학 기술 발전에 따른 인간에 관한 견해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지금까지 주장되던 이론은 새로운 질문을 받게 된다. 이런 질문을 통해 이전에 내렸던 주장을 새롭게 생각해 보는 기회가 주어졌다. 과학이나 기술이 발전한다는 것은, 새로운 과학 이론이나 기술이 제기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심, 하나님이 갖고 있던 도면을 밝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 환경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속고 있는가’, 이 질문이 아닐까?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다중우주론이 지닌 신학적 함의

  • 고린도후서 4 장 18 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히브리서 11 장 3 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다중우주론을 통해서 과학계가 믿고 있었던 물질계가 흔들린다는 말씀이군요. 유물론도 흔들리고요. 사실 우리가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평소 제 생각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거듭나서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이 엄청 많으실 것 같습니다. 복음을 섬기기 위해 지혜를 구하면 필요한 만큼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휘페르테스 2019.06.04 13:24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 9:6)

 

박혁순 (조직신학, 한일장신대 겸임교수)

 

 

현재 다중우주론(또는 평행우주론)이 직면한 문제는, ‘과연 그것이 과학인가? 정작 형이상학 또는 추리소설이 아닌가?’ 하는 비판과 반론이다. 이것은 대개 우리 우주의 유일성을 지지하는 실험물리학자들에 사이에서 특히 그러하다. 다중우주론이 실험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또는 입증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같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혹독한 평가를 받는다.

 

다른 한편, 대중적으로 다중우주론을 소개하고 있는 이론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과 미치오 카쿠는 그것이 공허한 사변이 아니라 기존의 천체물리학 및 미시물리학이 심화되면서 얻어진 결과라는 입장에 서있다. 브라이언 그린은 이렇게 말한다. “과학의 고속도로 중 통행량이 가장 많은 길들을 골라 서서히 주행하다 보면 다양한 다중우주 후보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들은 찾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리고 “물리학이 잡고 있던 자동차의 운전대를 수학에게 넘겨주면 어김없이 다중세계로 접어든다”라고! 이렇게 해당 연구자들은 다중우주론이 수학적 모순이 없는 수준까지 지향하기 때문에 억측과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중우주는 어떠한 양태로 존재한다고 설명될까? 몇가지 모형을 상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거품의 모양처럼 존재할 수도 있고, 잘려진 식빵처럼 우리 우주와 무한히 겹쳐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중우주 또는 평행우주의 규모는 어떠할까? 가쿠와 그린은 “우주에는 매 10^10^122m 마다 우리와 완전히 똑같은 복사본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다. 그러니 우리 우주 역시 “단순한 평행우주가 아니라 ‘평행우주 속의 평행우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내가 다중우주론을 통해 신학적 사유실험이 촉진되는 이유는 바로 물질에 대한 우리의 전이해가 수정되어야 할 지점에 있다. 가령 인류의 역사 이래 현재까지 우리는 물질 또는 물질성을 가장 신뢰할만한 근거로 여겨왔다. 특히 “물질 개념의 명확성과 단순성(강경한 실재론)은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녀왔고 “그것은 그들의 지식과 존재의 기초가 될 견고하고 이해 가능한 토대를 향한 종교적 열망을 만족 시”켰다.” 특히 근대 유물론자들에게 있어서 물질이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자 물적 조건이 인간의 정신과 사회체제를 규정하는 유일한 근거라고 확신하는 편에 섰다. 비록 그리스도교 신학이 ‘하나님’을 물질에 앞서는 존재의 근원 혹은 제1원인으로 상정해왔다 하더라도, 대개 물질이란 우리 눈앞에 드러나 감각될 수 있기에 ‘최소한도로’ 정신과 관념에 대비되는 분명한 실재로 믿어져 왔다. 더구나 근대과학의 발전에 의해 하나의 강한 신념의 형태로 ‘과학주의’가 등장하면서는 정신, 영혼, 사후세계, 신 등은 증명될 수 없는 의혹의 영역으로, 반대로 물질만이 반복적 실험과 증명이 가능한 신뢰의 영역으로 고착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다중우주론의 등장은 우리의 세계, 아니 우리 우주에 있어서 ‘분명한 것’, ‘실재하는 것’으로서 분명한 기준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물질적 영역, 즉 우리 우주의 물리적 실제가 임의적·우발적·상대적이라는 문제를 함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수많은 평형우주 가운데 “어떤 곳은 우리와 똑같고, 또 어떤 곳은 조금 다르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완전히 딴판”이라는 추정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주마다 다른 상수값을 지니고 있고, 그런 우주는 대략 10^124개 또는 10^500로 추산된다.

 

 

더 나아가 물질 또는 물질성은 그저 수학식(수학식), 즉 비물질의 관념이나 추상일 뿐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이론에 대한 좋은 유비는 주로 청소년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즐기는 3D 게임이다. 그 게임 안에는 이른바 ‘물리엔진’이라는 것이 있어서 가상공간에서 포탄이 날아가는 속도가 정확히 구현되어 있고 포탄과 차량의 충돌에 따른 결과도 실제 공간에서처럼 나타난다. 만약에 그 가상공간에 사는 인지적 존재가 있다면 그는 그 세계가 실재하는 세계라고 믿을 것이다. 이렇듯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나 수식(數式)으로 짜인 우주의 구조 속에서 인지적 존재들은 정작 비물질의 것들을 ‘물질로서’ 느끼게 설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다른 우주들과 무한히 겹친 상태로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간에 그 물질적 실제를 감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거나 실험하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가 간주해온 그 물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흙, 공기, 물, 불, 쇠, 나무 등과 같은 것들이 저편의 우주에서는 도무지 현상되지도 인식되지도 못한다면 물질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임의적일까? 이렇듯 우리가 물질이라고 확정한 것, 물질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기준이라고 단정한 것이 여타의 우주에서는 비물질 또는 일종의 ‘관념’일 수 있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 이 모든 우주들은 ‘무’(無) 또는 ‘공’(空)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혹이다. 사실 이렇게 우주를 바라보았던 이론이 불교 형이상학이었으며, 흔히들 알고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하는 구절의 내용이다. 흥미롭게도 붓다는 이와 관련해 “모래알 같이 수많은 중생에, 모래알 같이 수많은 세계가 있는데, 그 모두가 개별적 실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 환상도 아니”라고 했다.

 

다른 한편,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플라톤의 ‘이데아-현상계’ 구도의 이원론이 기독교 신학에 뿌리 깊게 내려 있는 문제로 하여 근대기 이후 수많은 방식의 비판과 반성이 이루어져 왔는데, 다중우주론의 도전으로 이것을 극복하기가 다시 요원해질 것 같은 우려가 든다. 왜냐하면 참으로 있는 세계, 영속적으로 있는 실제가 우리 우주가 아니라고 하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 기우일까?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신앙은 애매함과 모호함의 연속

  • 모호함 속에 우리의 신앙이 있고, 꿈이 있고, 사랑이 있지요.

    하나님도 자신을 숨기거나 다 밝히시지 못하시는 것은 그 까닭이 아닌가 해요.

    통찰화 상상력이 돋보이는 글, 귀하게 읽고 갑니다

    봄날의책방 2019.06.20 12:56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과정, 과신대 출판팀장)

새물결 플러스에서 튜터로 활동 중인 나는 기독교가 말하는  창조 이야기와  과학이 자연을 탐구하여 밝혀낸 물질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해 오고 있다. 올 해 함께한 책은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를 시작으로  「창조기사논쟁」, 「인간의 타락과 진화」  그리고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이고 5월은 「케노시스 창조이론」을 준비 중이다.

우리의 독서 여정을 돌아보면, 거센 파도를 만난 듯 우리의 기존의 생각들이 거세게 흔들려 불안해 했다. 도저히 양보 할 수없는 교리적인 부분, 예컨대 원죄와 타락과 구속과 같은 양보할 수 없는 교리적 프레임을 두고서 성서가 우리가 믿어 온 대로 그것을 말하고 있느냐는 도전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리둥절 하기도 했다.

 

과학의 발견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와해시키고 결국에는 하나님도 부정하게 만드는 것 같아 두려웠다. 두려운 마음에 아예 귀를 막고 회피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과학의 불완전함을 들어 과학적 발견들에 대해  팔짱끼고 유보하는 자세를 넘어 회의하는 눈초리로 맞서기도 했다.

다윈의 진화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기독교와 과학이 갈등이라는 프레임이 과대 광고처럼 부풀려진 것이었으며 이미 정치적인 맥락에서 기독교의 교리적 개념이 퇴락되고 있었음을 보기도 했다. 빅뱅 우주론과 현재의 우주를 존재케 하는 많은 우주 상수들을보면서 미세조정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들을 지나 미세조정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반대하기위해 평행우주며 다중우주를 말하지만(윌리엄 크레이그의 지적)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존재의 망각일 뿐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기도 했다.

창조와 기원에 관한 수 많은 담론들은 실제의 파생태들에 불과하지만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파생되고 추상된 것들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제서야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것, 확고 부동한 것에서 부터 출발하여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잘못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이다. 예건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명제로 사랑이 다 가능하게 했다고 시작을 해버리면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럴 경우에 악의 문제라는 암초에 걸려 넘어진다. 

사랑이라는 보자기로 다 덮어 버릴 것이 아니라 우주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혁명적인 발견과 인생사의 질곡이라는 형상들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로소 그 형상들 기저에 흐르고 있는, 그 형상들이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그 원천이 다름 아닌 자기비움, 곧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좀더 명료하게 형상과 실체를 말해야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령 일곱 사람이 그들의 몸으로 한 마리의 고양이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고양이의 형체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고양이를 이루는 실체들만 있고 실체들에 의한 부대 효과로 나타난 고양이 형상일 뿐이다. 양자장론에서 바라본 세상은 마치 전기장에서 하나의 효과처럼 전자라는 결과물이 나타나듯이. 우리는 물질 자체의 실체를 보는것이 아니라 기저에 있는 장의 일부, 즉  형상의 결과물을 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진화라는 토대 위에서 발전한 생물학과  유전적 증거로  공통의 조상및 생명의 다양성이 설명 되고, 화석상의  증거와 방사성 원소의 반감기를  통해 지구의 나이를 가늠하며  빅뱅우주론을 통해 우주의 시작과 우연성으로 시작된 생명의 고리들이  드러나는 모든 형상들의 기저에는  잠잠하고 온유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물이  있음을 고백한다. 

우리 책모임에는 과학과 성경에 대해 확실한 하나의 결론을 기대하고 그 결론을 하나의 원리삼아 신앙 생활을 할 수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로 참여한 분도 있었을 것이고, 현대 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대화하려는지 궁금해서, 혹은 과학 내용이 어려워서 책 모임에 함께한 분들, 막연하게 들어 온 진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동참한 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 분들과 열심히 책 나눔을 한 후, 책을 덮고서 나온 그 분들의 첫마디는 "다시  제자리네! 속 ,시원하게 다 말해주는 줄 알았더니..."였다. 린 마굴리스가 생명이란 물질들이 모여 비척걸음으로 도약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듯이 우리의 과학과 신학에 대한 의식과 감수성도 그렇게 비척거리며 도약하지 않을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우리의 신앙도 흔들리며 꽃을 피워내지 않을까?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반복되는 모호함의 자리에 서 있는것 같지만 우리의 반복은 헐벗은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 내는 반복이다. 단순한 원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만드는 나선형인 원의 반복이다. 그 차이는 사고의 도약이며 인식 영역의 확장이다. 딱 떨어지는 하나의 속 시원한 결론 처럼 위험한 독선이 어디 있을까? 그 결론은 또 하나의 도그마이고 우상이다. 

우리 책 모임에 참여한 분들은 현대 과학 기술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외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가진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외쳐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처럼 시대의 징표들을 읽어 내고 부조리한 사회와 권력 구조들을 전복시키는 그러한 역동적인 예언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독교가 말하는 창조와 현대 과학이 말하는 기원 사이에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와 마음을 열고 들어 보자는 것이고, 우리가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오해는 없었는지, 잘 못 끼워진 첫 단추는 없었는지, 그동안 우리가 들어왔던 교리적인 것들에 대해 전거로써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외치자는 것이다.  

굳어진 신앙관과 한 가지의 성경 해석,그리고 과학 주의의 흐름에 역류하여, 하나님의  충만하고 풍성한 사랑의 손길 안에서 자유하길 원하며  우리의 책모임에서는 계속 흔들릴 작정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이면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이다. 카바노프는 양자역학적 사고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인식 너머에 실재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신학적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적 상상력과 함께 5월에는 「케노시스창조이론」에서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길 원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  매력을 함께  향유하길 희망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유일한 천체 - 지구행성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 : 31)

 

이문원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성경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 태양, 지구, 달 등 천지들을 만드신 후, 그곳에서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지구환경을 마련하시고 매우 만족해하셨다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태양계를 비롯해서 우주에서 생명현상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주의 지구를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생명체의 존재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지구가 생명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천체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 오직 지구행성에만 인간을 비롯해서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인류의 삶터인 지구가 어떻게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를 지질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지구 크기와 위치의 절묘함

 

우주의 천체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데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의 존재 여부이다. 지구는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액체상태의 물이 풍부한 행성이다. 그래서 지구는 수구(水球)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합할 때도 있다. 지구가 많은 물을 갖게 된 것은 물의 특성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구의 크기와 지구의 위치 등 두 요소이다. 만약 태양계에서 지구 크기 및 위치 중, 어느 하나라도 지금과 다르게 되었다면, 지구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며, 당연히 다양한 생물이 존재할 수 없는 행성이 되었을 것이다.

 

지구의 위치와 크기는 지구가 태양에너지와 지구 내부 에너지를 받으면서 긴 지구 역사를 거쳐 오늘의 모습으로 바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태양계가 형성될 때, 지구가 그 크기와 위치로 정해진 것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절묘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부가 뜨거운 지구 행성

 

지구의 크기는 지구내부에너지 양을 정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태양계의 지구형 행성인 수성, 금성, 지구, 화성중에서 지구는 가장 크다. 지구의 핵 부분은 태양표면 온도 정도로 높으며, 중간 부분인 맨틀은 암석물질이 녹을 정도이다. 뜨거운 지구내부에서 에너지가 지표로 나올 때, 단단한 껍질인 지각판이 움직이면서 지진, 화산, 그리고 속도가 매우 느리지만 높은 산맥과 깊은 해구의 형성과 같은 자연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지구 활동은 생명체들에게는 위협적인 사건이지만,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지구환경이 만들어지는 데 절대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지구에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은 지각판의 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태양계의 여러 행성 중, 지진, 화산 및 조산운동 등과 같은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행성은 지구뿐이다. 지구가 오늘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긴 지구역사 동안 단단한 지구 껍질인 지각판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바다와 육지의 분포를 바꾸고, 그에 따라 해류가 바뀌고, 지역의 기후도 바뀌면서 다양한 생물종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해 왔다.

 

한편 지구내부 에너지는 풍부한 원소와 광물질을 운반할 수 있는 마그마를 만들고 운반하여, 인류에게 산업에 필요한 다양한 광물질을 제공하고 있다. 인류는 마그마가 운반해 온 자원을 이용하여 문명을 발전시켜왔으며, 앞으로도 그 자원을 계속 이용할 것이다. 또한 지각판의 이동은 지구 껍질을 바다와 육지로 나누고, 대륙 위에서 토양의 생성을 돕는다. 토양은 많은 생명체에게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하며, 지구행성에만 있는 물질이다.

 

 

 

생명체를 보호하는 몇 겹의 막

 

지구 생명체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막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 인간은 어떤 막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우리 몸은 피부로 싸여 있으며, 피부는 옷이 덮고 있고, 집이라는 막 속에서 여러 보호를 받고 있다. 집을 나온 인간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 오존층, 자기장 등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막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러한 여러 막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의 생명은 심하게 위협을 받을 것이며, 아마 지구에서 계속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지구 밖에서는 달과 목성과 같은 천체가 지구와 충돌할 수 있는 천체를 막아주는 보호막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지구에 생명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은 지구의 크기와 위치가 정해진 후, 지구가 긴 역사를 거치면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다. 지구는 태양계가 형성될 때, 다른 행성들과 함께 만들어질 때 초기 모습은 오늘날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지구 초기에는 오늘날과 같이 대기, 바다도 그 구성성분이 달랐고, 대륙의 위치와 모양도 달랐다. 물론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지구행성이 태양에너지와 지구 내부 에너지를 받으면서, 긴 시간을 지나며 오늘처럼 지권, 수권, 기권 및 생물권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행성으로 변화해 왔다. 초기 생성이 오늘의 지구 모습으로 변화하는 속도는 일정하지 않았으며, 여러 번의 급변적인 변화가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구에 생명체가 등장하는 시기를 지나면서 지구는 다양한 생명체가 번성할 수 있는 오늘의 모습으로 바뀌며, 가장 후반에 인류가 등장하는 천체로 바뀌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행성의 환경을 이해하는 데는 지구의 크기, 위치 그리고 시간 등의 요소가 서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세 요소는 지구환경을 변화시키는데 서로 영향을 주어 왔기 때문이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진드기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


진드기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
과학주의 시대의 무신론과 기독교

왕식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최근 과학적 무신론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오늘날 장안에서 조금 팔린다 하는 책들은 대부분 종교에 비판적이며, 특히 자연과학과 관련된 저작들은 다수가 종교에 적대적입니다. 이에 따라 최근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무신론, 유물론, 세속주의 등이 당연하게 선택되어야만 할 옵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에 기초한 윤리와 도덕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현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생성과 변화의 철학들이 유행하게 되면서, 고정된 실체나 그것에 근거한 진리가 모두 와해된 것에 있기도 합니다. 자아, 질서, 주체를 포함해, 신(God) 등의 개념들이 생성 변화라는 큰 바다에서 모두 용해되어 버렸다고 현대인들은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생성과 변화의 철학의 배경에는 바로 자연과학이 새롭게 발견한 탄탄한 이론들의 뒷받침이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전혀 과학적 무신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은 그 무게와 비중에 있어 과거에 발견되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파괴력이 막강합니다. 종교적 지식인과 신학자들이 대응하기에는 그 파급력과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과연 이런 과학적 무신론의 대세를 넘어서 종교가 미래에도 생존할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우려합니다. 정말 종교는 과학의 시대를 넘어서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기 위해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는 첨예한 지점 중 하나인 경험적 지식에 대한 얘기를 다뤄볼까 합니다.

잘 알다시피, 과학은 경험 세계를 다루기에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는 반면 종교는 초경험 세계를 다루기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허구의 지식을 제공한다고 지적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경험 세계만이 확실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루는 대상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입증할 수도 없고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이 과학의 편을 들고 점점 무신론적 경향으로 흐르는 이유에는 경험 세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과학적 발견들과 성과들, 특히 뇌 과학으로 대변되는 과학적 유물론과 환원주의는 오늘날 신(God)이나 영혼, 영성 등과 같은 종교적 개념들을 도저히 긍정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데, 이도 바로 뇌 과학에서 보여주는 경험적 세계가 가장 진실한 세계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 세계란 도대체 어떤 세계이며, 과학과 종교는 이와 관련해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를 살펴보는 것부터 시도해야 합니다. 20세기 말 최고의 철학자라 칭송을 받는 들뢰즈는 인간의 경험 세계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진드기 얘기를 사용하면서 인간과 진드기를 비교한 바 있는데, 그 사례를 인용하면서 논의를 풀어가 봅시다.

들뢰즈에 따르면, 진드기에게는 세상이 세 개의 요소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단지 세 가지로 경험됩니다. 진드기에게 첫째로 경험되는 세계는 빛이며, 두 번째는 포유류의 냄새이며, 세 번째는 포유류의 체온입니다. 포유류의 피를 먹어야 생존하는 진드기는 이 세 개의 세계만이 그의 삶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기에, 그가 가진 몸의 구조는 바로 이 세 개의 대상을 다루기 위한 촉수를 발전시키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빛을 따라 나뭇가지 위로 오르고, 나무 위에 하루 종일 있다가 포유류의 냄새를 맡는 순간 나뭇가지 밑으로 내려와 지나가던 동물 위로 낙하합니다. 마지막으로 해당 동물의 피부 중에서 털이 없고 열이 더 높은 부위를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곳에 피가 많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포유류의 체온이 진드기에게 경험되는 또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드기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는 바로 이 세 개가 전부입니다. 그에겐 하늘의 별도, 꽃의 향기와 꿀을 비롯해 그 어떤 세계도 필요 없고 그의 경험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진드기에 비해 인간은 물론 훨씬 다양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보다 복잡하고 폭넓은 세계로 전개됩니다. 진드기에게는 하늘의 별과 꽃의 아름다움이 대상 세계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중요한 세계가 됩니다. 인간에게는 진드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촉수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진드기를 포함해 다른 그 어떤 생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를 폭넓고 깊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세계가 그저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세계는 우주가 됩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세계가 우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 우리의 논의를 인간 내의 그룹 안으로 들여와 봅시다.



인간의 그룹 중에서 자연 과학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세계는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과학자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보통 인간들이 경험하는 세계 보다 훨씬 다양하고 구체적입니다. 특히 관찰과 실험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만을 참으로 옳다고 믿는 과학자들의 세계는 일부 종교인들의 세계보다는 훨씬 생산적일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 과학자들은 종교인들의 세계 경험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종교인들은 근거도 없고 어쩌면 전혀 존재하지도 않을지 모르는 ‘신,’ ‘영혼,’ ‘정신,’ ‘자유’ 등의 허구적인 개념을 믿으면서 삶을 허송하고 있다고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드기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의 존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넓이는 하나의 존재가 지닌 촉수에 비례합니다. 하나의 존재가 경험하는 세 개는 그의 촉수의 개수, 딱 그만큼입니다. 과학자는 관찰과 실험이라는 촉수를 통해서 그 어떤 다른 인간의 그룹보다 폭넓고 다양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의 촉수로서의 관찰과 실험이 가져다주는 세계, 바로 그만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너무 한정되어 있어서 그가 경험하는 세계가 과연 우주의 진리에 어느 만큼이나 가까이 갈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드기의 비유를 사용한 것은 과학이 다룬 다는 경험 세계의 실상에 대해 얘기하고 그것과 종교의 세계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자가 다루는 세계와 종교가 다루는 세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러 방식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저는 여기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연과학자의 하나로 손꼽히는 아인슈타인의 명구를 사용해 이 문제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종교 없는 과학이 절름발이라면,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학문적 추세가 종교 쪽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런 추세는 뇌 과학의 발달에서 촉진된 면이 많습니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들은 모든 종교 현상들이 뇌신경의 작용으로 낱낱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뇌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대로 과학과 종교는 세계를 경험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식이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 둘은 서로를 보조하며 함께 문명을 건설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과학과 종교 양자는 모두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에서 한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드기가 경험하는 세계의 비유에서 보듯이, 뇌 과학이든 그것보다 더욱 정확한 실험과 관찰에 기초한 과학이든 그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분에 한정될 뿐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지각은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구축한 믿음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은 자신이 지닌 개인적, 사회적 틀이라는 촉수를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로 인해서 뇌신경 안에서 처리되는 모든 과정의 각 단계마다 발생하는 수많은 감정, 지각 그리고 인지된 내용이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과학도 또 하나의 믿음과 신앙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 이상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과학이 경험하는 세계는 종교보다는 때로는 더욱 정교하고 구체적인 진리의 세계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다루는 세계가 제한적이라는 것은 과학마저도 독단의 수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많은 과학자들은 진리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고의 과학자 중의 하나인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말하고, 최고의 수학자 중의 하나인 괴델이 불완전성의 원리를 외친 것은 바로 이런 것과 연관된다고 보겠습니다.

과학적 무신론의 세계란 분명히 인류가 발견한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세계 안에서 인간이 경험한 지극히 제한된 경험에 불과합니다. 물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세계도 인류가 발견한 몇 가지 세계로서 우주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발견하지 못한 우주의 중요한 면을 해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과학의 동반자입니다.

문제는 과학은 변하고 발전하는데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는 멈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은 종교의 진정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종교가 단지 과학이 보지 못하는 진리의 세계의 촉수를 가지고 있다는 자만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면서, 지금처럼 스스로를 변혁시키는 일에 게으르게 되면 종교는 어느 날 인류에게 그저 하나의 시시한 관점, “별 볼 일 없는 미약한 관점”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오늘과 같이 빠르게 진화하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스스로를 변혁해 나가야만 하는 이유라 할 것입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성서비평을 수용하는 창조 신앙



성서비평을 수용하는 창조 신앙[각주:1]


김정형[각주:2]



신앙 교육 내용에 있어 많은 한국 교회는 여전히 16-17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세계관, 언어, 성경 해석, 신학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사실 지난 수 세기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전문 성서학자들과 교의학자들이 과학 혁명 이후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직면하여 신실한 기도와 학문적 열정 가운데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보다 폭 넓고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해 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현장 교육 담당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난 세기 성경 이해 및 신학적 이해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에 대해 거의 아무런 지식이 없다. 오히려 과거 종교개혁 시대 혹은 이후 정통주의 시대의 성경 해석과 교리 전통을 불변하는 진리로 인식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성경 해석과 신학 전통을 정죄하는 일부 신학자들의 영향 아래,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 경직된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과 근본주의적 교리 전통을 고수하며 그것을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혹자는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평신도 교사가 신학교에서나 배우는 성경 주석 방법이나 신학 이론을 배울 여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생각이 매우 안일하고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다음세대 청소년들은 이미 학교에서 최근 과학 이론을 교육 받고 있다. 과학 교사들은 자신들이 학창 시절 배운 과학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과학 이론을 스스로 배워서 가르친다. 그런데 교회 교사들은 어린 시절 배웠던 그 내용을 거의 그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말하자면, 교사들은 물론 교역자들에게서도 최근 성경 해석과 최근 신학 이론에 대해서 배우려는 의지도 노력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 교육과 신앙 교육 사이의 시간적 불균형이 더욱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교육 내용에 있어서조차 둘 사이에 질적 차이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신앙 교육의 내용과 관련한 이 같은 수구적 태도는 마치 자라나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다 자란 성인에게도 유아기적 사고방식을 계속해서 강요하는 태도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지성은 대체로 이미 상당한 정도로 성숙했지만, 성경 해석 및 신앙 이해에 있어서만큼은 많은 경우 아직까지 유아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 과거에 배운 과학 이론은 대부분 잊어버렸다고 할지라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만은 그 사람의 삶 전반에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한국 교회의 신앙 교육에서는 성경의 문자적 진리나 교리의 명제적 진리를 주입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해석학적 사고 훈련이나 신학적 사고 훈련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성세대와 다음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변화하는 세계관과 변화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성경을 시의 적절하게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서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명제적, 문자적 진리를 고집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필자가 볼 때 바로 이와 같은 신학적 미숙함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 시대의 창조 신앙은 신앙 교육의 내용 면에서 축자영감설에 기초한 문자주의적 성경해석과 근본주의적 교리 신학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 대안으로 신앙 교육은 성서 비평을 포함하여 최근 성서학 연구 결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그것을 넘어서 스스로 또한 공동체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신앙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최근까지의 성서학 연구가 반영된 해설 성경이나 최근 성서신학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단행본을 소개하고 함께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한성서공회에서 편찬한 관주 해설 성경은 성경 각 책, 각 단락에 대한 역사비평, 문학비평, 신학비평의 연구 결과들을 엄선하여 담고 있으며,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을 극복하는 한편 신학적 사고를 결여하고 있는 단순한 역사적 연구를 넘어서는 데도 도움을 준다. 교육목회를 담당하는 교역자는 물론이고 교회학교의 교사와 기독교가정의 부모까지 최근 성서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통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듣는 일을 대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지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교만한 일이지만, 성경에 대한 엄밀하고 정직한 지적 탐구 결과를 무시하고서 성경의 진정한 메시지를 읽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지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태만한 일이다.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 교육에 헌신하는 모든 지도자는 성경이 형성된 과정, 성경의 기본적인 줄거리, 성경 각 권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 성경에 기록된 글의 다양한 문학 장르, 때로는 공명하지만 때로는 상충하는 다양한 신학적 관점 등 성경의 문자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기본적인 지식을 함께 배우며 쌓아갈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성경 본문의 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이면을 관통하고 있는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성경의 문자를 관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필요하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 교육은 이미 주어진 정답을 암기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관통해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훈련시키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첫째, 신앙은 과학보다 더 심오한 진리를 다룬다. 둘째,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과학적 진리보다 더 심오한 진리에 접근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은 과학적 진리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일보다 더 깊은 차원을 요구한다. 신앙의 진리는 단순히 머리로 암기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으로만 소화될 수 있는 성질의 명제적 진리가 아니다. 물리적, 자연적 원인을 다루는 자연과학의 진리와 달리 신앙의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과 계획을 다룬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그 신앙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비단 전문 신학자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모든 목회자, 기독교교육 지도자, 교회학교 교사, 기독교가정의 부모, 자라나는 다음세대 아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진력하는 신학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서 신학은 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모든 신자의 책무이다. 이를 위해 유아기나 아동기의 아이들에게는 성경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 필요하고 또한 유익하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교육의 수준에 걸맞게 성경 교육과 신학 교육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1. 이 글은 김정형 교수가 '문화선교연구원'에 기고한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원문보기 https://www.cricum.org/1418) [본문으로]
  2. 장로회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과신대 자문위원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