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 9:6)

 

박혁순 (조직신학, 한일장신대 겸임교수)

 

 

현재 다중우주론(또는 평행우주론)이 직면한 문제는, ‘과연 그것이 과학인가? 정작 형이상학 또는 추리소설이 아닌가?’ 하는 비판과 반론이다. 이것은 대개 우리 우주의 유일성을 지지하는 실험물리학자들에 사이에서 특히 그러하다. 다중우주론이 실험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또는 입증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같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혹독한 평가를 받는다.

 

다른 한편, 대중적으로 다중우주론을 소개하고 있는 이론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과 미치오 카쿠는 그것이 공허한 사변이 아니라 기존의 천체물리학 및 미시물리학이 심화되면서 얻어진 결과라는 입장에 서있다. 브라이언 그린은 이렇게 말한다. “과학의 고속도로 중 통행량이 가장 많은 길들을 골라 서서히 주행하다 보면 다양한 다중우주 후보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들은 찾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리고 “물리학이 잡고 있던 자동차의 운전대를 수학에게 넘겨주면 어김없이 다중세계로 접어든다”라고! 이렇게 해당 연구자들은 다중우주론이 수학적 모순이 없는 수준까지 지향하기 때문에 억측과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중우주는 어떠한 양태로 존재한다고 설명될까? 몇가지 모형을 상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거품의 모양처럼 존재할 수도 있고, 잘려진 식빵처럼 우리 우주와 무한히 겹쳐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중우주 또는 평행우주의 규모는 어떠할까? 가쿠와 그린은 “우주에는 매 10^10^122m 마다 우리와 완전히 똑같은 복사본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다. 그러니 우리 우주 역시 “단순한 평행우주가 아니라 ‘평행우주 속의 평행우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내가 다중우주론을 통해 신학적 사유실험이 촉진되는 이유는 바로 물질에 대한 우리의 전이해가 수정되어야 할 지점에 있다. 가령 인류의 역사 이래 현재까지 우리는 물질 또는 물질성을 가장 신뢰할만한 근거로 여겨왔다. 특히 “물질 개념의 명확성과 단순성(강경한 실재론)은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녀왔고 “그것은 그들의 지식과 존재의 기초가 될 견고하고 이해 가능한 토대를 향한 종교적 열망을 만족 시”켰다.” 특히 근대 유물론자들에게 있어서 물질이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자 물적 조건이 인간의 정신과 사회체제를 규정하는 유일한 근거라고 확신하는 편에 섰다. 비록 그리스도교 신학이 ‘하나님’을 물질에 앞서는 존재의 근원 혹은 제1원인으로 상정해왔다 하더라도, 대개 물질이란 우리 눈앞에 드러나 감각될 수 있기에 ‘최소한도로’ 정신과 관념에 대비되는 분명한 실재로 믿어져 왔다. 더구나 근대과학의 발전에 의해 하나의 강한 신념의 형태로 ‘과학주의’가 등장하면서는 정신, 영혼, 사후세계, 신 등은 증명될 수 없는 의혹의 영역으로, 반대로 물질만이 반복적 실험과 증명이 가능한 신뢰의 영역으로 고착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다중우주론의 등장은 우리의 세계, 아니 우리 우주에 있어서 ‘분명한 것’, ‘실재하는 것’으로서 분명한 기준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물질적 영역, 즉 우리 우주의 물리적 실제가 임의적·우발적·상대적이라는 문제를 함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수많은 평형우주 가운데 “어떤 곳은 우리와 똑같고, 또 어떤 곳은 조금 다르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완전히 딴판”이라는 추정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주마다 다른 상수값을 지니고 있고, 그런 우주는 대략 10^124개 또는 10^500로 추산된다.

 

 

더 나아가 물질 또는 물질성은 그저 수학식(수학식), 즉 비물질의 관념이나 추상일 뿐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이론에 대한 좋은 유비는 주로 청소년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즐기는 3D 게임이다. 그 게임 안에는 이른바 ‘물리엔진’이라는 것이 있어서 가상공간에서 포탄이 날아가는 속도가 정확히 구현되어 있고 포탄과 차량의 충돌에 따른 결과도 실제 공간에서처럼 나타난다. 만약에 그 가상공간에 사는 인지적 존재가 있다면 그는 그 세계가 실재하는 세계라고 믿을 것이다. 이렇듯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나 수식(數式)으로 짜인 우주의 구조 속에서 인지적 존재들은 정작 비물질의 것들을 ‘물질로서’ 느끼게 설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다른 우주들과 무한히 겹친 상태로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간에 그 물질적 실제를 감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거나 실험하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가 간주해온 그 물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흙, 공기, 물, 불, 쇠, 나무 등과 같은 것들이 저편의 우주에서는 도무지 현상되지도 인식되지도 못한다면 물질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임의적일까? 이렇듯 우리가 물질이라고 확정한 것, 물질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기준이라고 단정한 것이 여타의 우주에서는 비물질 또는 일종의 ‘관념’일 수 있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 이 모든 우주들은 ‘무’(無) 또는 ‘공’(空)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혹이다. 사실 이렇게 우주를 바라보았던 이론이 불교 형이상학이었으며, 흔히들 알고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하는 구절의 내용이다. 흥미롭게도 붓다는 이와 관련해 “모래알 같이 수많은 중생에, 모래알 같이 수많은 세계가 있는데, 그 모두가 개별적 실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 환상도 아니”라고 했다.

 

다른 한편,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플라톤의 ‘이데아-현상계’ 구도의 이원론이 기독교 신학에 뿌리 깊게 내려 있는 문제로 하여 근대기 이후 수많은 방식의 비판과 반성이 이루어져 왔는데, 다중우주론의 도전으로 이것을 극복하기가 다시 요원해질 것 같은 우려가 든다. 왜냐하면 참으로 있는 세계, 영속적으로 있는 실제가 우리 우주가 아니라고 하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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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과정, 과신대 출판팀장)

새물결 플러스에서 튜터로 활동 중인 나는 기독교가 말하는  창조 이야기와  과학이 자연을 탐구하여 밝혀낸 물질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해 오고 있다. 올 해 함께한 책은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를 시작으로  「창조기사논쟁」, 「인간의 타락과 진화」  그리고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이고 5월은 「케노시스 창조이론」을 준비 중이다.

우리의 독서 여정을 돌아보면, 거센 파도를 만난 듯 우리의 기존의 생각들이 거세게 흔들려 불안해 했다. 도저히 양보 할 수없는 교리적인 부분, 예컨대 원죄와 타락과 구속과 같은 양보할 수 없는 교리적 프레임을 두고서 성서가 우리가 믿어 온 대로 그것을 말하고 있느냐는 도전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리둥절 하기도 했다.

 

과학의 발견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와해시키고 결국에는 하나님도 부정하게 만드는 것 같아 두려웠다. 두려운 마음에 아예 귀를 막고 회피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과학의 불완전함을 들어 과학적 발견들에 대해  팔짱끼고 유보하는 자세를 넘어 회의하는 눈초리로 맞서기도 했다.

다윈의 진화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기독교와 과학이 갈등이라는 프레임이 과대 광고처럼 부풀려진 것이었으며 이미 정치적인 맥락에서 기독교의 교리적 개념이 퇴락되고 있었음을 보기도 했다. 빅뱅 우주론과 현재의 우주를 존재케 하는 많은 우주 상수들을보면서 미세조정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들을 지나 미세조정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반대하기위해 평행우주며 다중우주를 말하지만(윌리엄 크레이그의 지적)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존재의 망각일 뿐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기도 했다.

창조와 기원에 관한 수 많은 담론들은 실제의 파생태들에 불과하지만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파생되고 추상된 것들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제서야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것, 확고 부동한 것에서 부터 출발하여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잘못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이다. 예건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명제로 사랑이 다 가능하게 했다고 시작을 해버리면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럴 경우에 악의 문제라는 암초에 걸려 넘어진다. 

사랑이라는 보자기로 다 덮어 버릴 것이 아니라 우주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혁명적인 발견과 인생사의 질곡이라는 형상들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로소 그 형상들 기저에 흐르고 있는, 그 형상들이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그 원천이 다름 아닌 자기비움, 곧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좀더 명료하게 형상과 실체를 말해야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령 일곱 사람이 그들의 몸으로 한 마리의 고양이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고양이의 형체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고양이를 이루는 실체들만 있고 실체들에 의한 부대 효과로 나타난 고양이 형상일 뿐이다. 양자장론에서 바라본 세상은 마치 전기장에서 하나의 효과처럼 전자라는 결과물이 나타나듯이. 우리는 물질 자체의 실체를 보는것이 아니라 기저에 있는 장의 일부, 즉  형상의 결과물을 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진화라는 토대 위에서 발전한 생물학과  유전적 증거로  공통의 조상및 생명의 다양성이 설명 되고, 화석상의  증거와 방사성 원소의 반감기를  통해 지구의 나이를 가늠하며  빅뱅우주론을 통해 우주의 시작과 우연성으로 시작된 생명의 고리들이  드러나는 모든 형상들의 기저에는  잠잠하고 온유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물이  있음을 고백한다. 

우리 책모임에는 과학과 성경에 대해 확실한 하나의 결론을 기대하고 그 결론을 하나의 원리삼아 신앙 생활을 할 수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로 참여한 분도 있었을 것이고, 현대 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대화하려는지 궁금해서, 혹은 과학 내용이 어려워서 책 모임에 함께한 분들, 막연하게 들어 온 진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동참한 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 분들과 열심히 책 나눔을 한 후, 책을 덮고서 나온 그 분들의 첫마디는 "다시  제자리네! 속 ,시원하게 다 말해주는 줄 알았더니..."였다. 린 마굴리스가 생명이란 물질들이 모여 비척걸음으로 도약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듯이 우리의 과학과 신학에 대한 의식과 감수성도 그렇게 비척거리며 도약하지 않을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우리의 신앙도 흔들리며 꽃을 피워내지 않을까?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반복되는 모호함의 자리에 서 있는것 같지만 우리의 반복은 헐벗은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 내는 반복이다. 단순한 원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만드는 나선형인 원의 반복이다. 그 차이는 사고의 도약이며 인식 영역의 확장이다. 딱 떨어지는 하나의 속 시원한 결론 처럼 위험한 독선이 어디 있을까? 그 결론은 또 하나의 도그마이고 우상이다. 

우리 책 모임에 참여한 분들은 현대 과학 기술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외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가진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외쳐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처럼 시대의 징표들을 읽어 내고 부조리한 사회와 권력 구조들을 전복시키는 그러한 역동적인 예언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독교가 말하는 창조와 현대 과학이 말하는 기원 사이에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와 마음을 열고 들어 보자는 것이고, 우리가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오해는 없었는지, 잘 못 끼워진 첫 단추는 없었는지, 그동안 우리가 들어왔던 교리적인 것들에 대해 전거로써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외치자는 것이다.  

굳어진 신앙관과 한 가지의 성경 해석,그리고 과학 주의의 흐름에 역류하여, 하나님의  충만하고 풍성한 사랑의 손길 안에서 자유하길 원하며  우리의 책모임에서는 계속 흔들릴 작정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이면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이다. 카바노프는 양자역학적 사고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인식 너머에 실재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신학적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적 상상력과 함께 5월에는 「케노시스창조이론」에서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길 원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  매력을 함께  향유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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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 : 31)

 

이문원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성경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 태양, 지구, 달 등 천지들을 만드신 후, 그곳에서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지구환경을 마련하시고 매우 만족해하셨다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태양계를 비롯해서 우주에서 생명현상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주의 지구를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생명체의 존재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지구가 생명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천체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 오직 지구행성에만 인간을 비롯해서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인류의 삶터인 지구가 어떻게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를 지질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지구 크기와 위치의 절묘함

 

우주의 천체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데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의 존재 여부이다. 지구는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액체상태의 물이 풍부한 행성이다. 그래서 지구는 수구(水球)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합할 때도 있다. 지구가 많은 물을 갖게 된 것은 물의 특성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구의 크기와 지구의 위치 등 두 요소이다. 만약 태양계에서 지구 크기 및 위치 중, 어느 하나라도 지금과 다르게 되었다면, 지구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며, 당연히 다양한 생물이 존재할 수 없는 행성이 되었을 것이다.

 

지구의 위치와 크기는 지구가 태양에너지와 지구 내부 에너지를 받으면서 긴 지구 역사를 거쳐 오늘의 모습으로 바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태양계가 형성될 때, 지구가 그 크기와 위치로 정해진 것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절묘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부가 뜨거운 지구 행성

 

지구의 크기는 지구내부에너지 양을 정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태양계의 지구형 행성인 수성, 금성, 지구, 화성중에서 지구는 가장 크다. 지구의 핵 부분은 태양표면 온도 정도로 높으며, 중간 부분인 맨틀은 암석물질이 녹을 정도이다. 뜨거운 지구내부에서 에너지가 지표로 나올 때, 단단한 껍질인 지각판이 움직이면서 지진, 화산, 그리고 속도가 매우 느리지만 높은 산맥과 깊은 해구의 형성과 같은 자연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지구 활동은 생명체들에게는 위협적인 사건이지만,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지구환경이 만들어지는 데 절대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지구에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은 지각판의 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태양계의 여러 행성 중, 지진, 화산 및 조산운동 등과 같은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행성은 지구뿐이다. 지구가 오늘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긴 지구역사 동안 단단한 지구 껍질인 지각판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바다와 육지의 분포를 바꾸고, 그에 따라 해류가 바뀌고, 지역의 기후도 바뀌면서 다양한 생물종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해 왔다.

 

한편 지구내부 에너지는 풍부한 원소와 광물질을 운반할 수 있는 마그마를 만들고 운반하여, 인류에게 산업에 필요한 다양한 광물질을 제공하고 있다. 인류는 마그마가 운반해 온 자원을 이용하여 문명을 발전시켜왔으며, 앞으로도 그 자원을 계속 이용할 것이다. 또한 지각판의 이동은 지구 껍질을 바다와 육지로 나누고, 대륙 위에서 토양의 생성을 돕는다. 토양은 많은 생명체에게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하며, 지구행성에만 있는 물질이다.

 

 

 

생명체를 보호하는 몇 겹의 막

 

지구 생명체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막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 인간은 어떤 막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우리 몸은 피부로 싸여 있으며, 피부는 옷이 덮고 있고, 집이라는 막 속에서 여러 보호를 받고 있다. 집을 나온 인간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 오존층, 자기장 등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막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러한 여러 막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의 생명은 심하게 위협을 받을 것이며, 아마 지구에서 계속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지구 밖에서는 달과 목성과 같은 천체가 지구와 충돌할 수 있는 천체를 막아주는 보호막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지구에 생명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은 지구의 크기와 위치가 정해진 후, 지구가 긴 역사를 거치면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다. 지구는 태양계가 형성될 때, 다른 행성들과 함께 만들어질 때 초기 모습은 오늘날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지구 초기에는 오늘날과 같이 대기, 바다도 그 구성성분이 달랐고, 대륙의 위치와 모양도 달랐다. 물론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지구행성이 태양에너지와 지구 내부 에너지를 받으면서, 긴 시간을 지나며 오늘처럼 지권, 수권, 기권 및 생물권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행성으로 변화해 왔다. 초기 생성이 오늘의 지구 모습으로 변화하는 속도는 일정하지 않았으며, 여러 번의 급변적인 변화가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구에 생명체가 등장하는 시기를 지나면서 지구는 다양한 생명체가 번성할 수 있는 오늘의 모습으로 바뀌며, 가장 후반에 인류가 등장하는 천체로 바뀌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행성의 환경을 이해하는 데는 지구의 크기, 위치 그리고 시간 등의 요소가 서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세 요소는 지구환경을 변화시키는데 서로 영향을 주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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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드기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
과학주의 시대의 무신론과 기독교

왕식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최근 과학적 무신론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오늘날 장안에서 조금 팔린다 하는 책들은 대부분 종교에 비판적이며, 특히 자연과학과 관련된 저작들은 다수가 종교에 적대적입니다. 이에 따라 최근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무신론, 유물론, 세속주의 등이 당연하게 선택되어야만 할 옵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에 기초한 윤리와 도덕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현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생성과 변화의 철학들이 유행하게 되면서, 고정된 실체나 그것에 근거한 진리가 모두 와해된 것에 있기도 합니다. 자아, 질서, 주체를 포함해, 신(God) 등의 개념들이 생성 변화라는 큰 바다에서 모두 용해되어 버렸다고 현대인들은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생성과 변화의 철학의 배경에는 바로 자연과학이 새롭게 발견한 탄탄한 이론들의 뒷받침이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전혀 과학적 무신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은 그 무게와 비중에 있어 과거에 발견되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파괴력이 막강합니다. 종교적 지식인과 신학자들이 대응하기에는 그 파급력과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과연 이런 과학적 무신론의 대세를 넘어서 종교가 미래에도 생존할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우려합니다. 정말 종교는 과학의 시대를 넘어서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기 위해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는 첨예한 지점 중 하나인 경험적 지식에 대한 얘기를 다뤄볼까 합니다.

잘 알다시피, 과학은 경험 세계를 다루기에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는 반면 종교는 초경험 세계를 다루기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허구의 지식을 제공한다고 지적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경험 세계만이 확실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루는 대상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입증할 수도 없고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이 과학의 편을 들고 점점 무신론적 경향으로 흐르는 이유에는 경험 세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과학적 발견들과 성과들, 특히 뇌 과학으로 대변되는 과학적 유물론과 환원주의는 오늘날 신(God)이나 영혼, 영성 등과 같은 종교적 개념들을 도저히 긍정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데, 이도 바로 뇌 과학에서 보여주는 경험적 세계가 가장 진실한 세계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 세계란 도대체 어떤 세계이며, 과학과 종교는 이와 관련해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를 살펴보는 것부터 시도해야 합니다. 20세기 말 최고의 철학자라 칭송을 받는 들뢰즈는 인간의 경험 세계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진드기 얘기를 사용하면서 인간과 진드기를 비교한 바 있는데, 그 사례를 인용하면서 논의를 풀어가 봅시다.

들뢰즈에 따르면, 진드기에게는 세상이 세 개의 요소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단지 세 가지로 경험됩니다. 진드기에게 첫째로 경험되는 세계는 빛이며, 두 번째는 포유류의 냄새이며, 세 번째는 포유류의 체온입니다. 포유류의 피를 먹어야 생존하는 진드기는 이 세 개의 세계만이 그의 삶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기에, 그가 가진 몸의 구조는 바로 이 세 개의 대상을 다루기 위한 촉수를 발전시키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빛을 따라 나뭇가지 위로 오르고, 나무 위에 하루 종일 있다가 포유류의 냄새를 맡는 순간 나뭇가지 밑으로 내려와 지나가던 동물 위로 낙하합니다. 마지막으로 해당 동물의 피부 중에서 털이 없고 열이 더 높은 부위를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곳에 피가 많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포유류의 체온이 진드기에게 경험되는 또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드기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는 바로 이 세 개가 전부입니다. 그에겐 하늘의 별도, 꽃의 향기와 꿀을 비롯해 그 어떤 세계도 필요 없고 그의 경험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진드기에 비해 인간은 물론 훨씬 다양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보다 복잡하고 폭넓은 세계로 전개됩니다. 진드기에게는 하늘의 별과 꽃의 아름다움이 대상 세계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중요한 세계가 됩니다. 인간에게는 진드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촉수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진드기를 포함해 다른 그 어떤 생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를 폭넓고 깊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세계가 그저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세계는 우주가 됩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세계가 우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 우리의 논의를 인간 내의 그룹 안으로 들여와 봅시다.



인간의 그룹 중에서 자연 과학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세계는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과학자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보통 인간들이 경험하는 세계 보다 훨씬 다양하고 구체적입니다. 특히 관찰과 실험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만을 참으로 옳다고 믿는 과학자들의 세계는 일부 종교인들의 세계보다는 훨씬 생산적일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 과학자들은 종교인들의 세계 경험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종교인들은 근거도 없고 어쩌면 전혀 존재하지도 않을지 모르는 ‘신,’ ‘영혼,’ ‘정신,’ ‘자유’ 등의 허구적인 개념을 믿으면서 삶을 허송하고 있다고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드기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의 존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넓이는 하나의 존재가 지닌 촉수에 비례합니다. 하나의 존재가 경험하는 세 개는 그의 촉수의 개수, 딱 그만큼입니다. 과학자는 관찰과 실험이라는 촉수를 통해서 그 어떤 다른 인간의 그룹보다 폭넓고 다양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의 촉수로서의 관찰과 실험이 가져다주는 세계, 바로 그만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너무 한정되어 있어서 그가 경험하는 세계가 과연 우주의 진리에 어느 만큼이나 가까이 갈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드기의 비유를 사용한 것은 과학이 다룬 다는 경험 세계의 실상에 대해 얘기하고 그것과 종교의 세계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자가 다루는 세계와 종교가 다루는 세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러 방식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저는 여기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연과학자의 하나로 손꼽히는 아인슈타인의 명구를 사용해 이 문제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종교 없는 과학이 절름발이라면,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학문적 추세가 종교 쪽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런 추세는 뇌 과학의 발달에서 촉진된 면이 많습니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들은 모든 종교 현상들이 뇌신경의 작용으로 낱낱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뇌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대로 과학과 종교는 세계를 경험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식이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 둘은 서로를 보조하며 함께 문명을 건설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과학과 종교 양자는 모두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에서 한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드기가 경험하는 세계의 비유에서 보듯이, 뇌 과학이든 그것보다 더욱 정확한 실험과 관찰에 기초한 과학이든 그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분에 한정될 뿐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지각은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구축한 믿음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은 자신이 지닌 개인적, 사회적 틀이라는 촉수를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로 인해서 뇌신경 안에서 처리되는 모든 과정의 각 단계마다 발생하는 수많은 감정, 지각 그리고 인지된 내용이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과학도 또 하나의 믿음과 신앙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 이상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과학이 경험하는 세계는 종교보다는 때로는 더욱 정교하고 구체적인 진리의 세계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다루는 세계가 제한적이라는 것은 과학마저도 독단의 수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많은 과학자들은 진리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고의 과학자 중의 하나인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말하고, 최고의 수학자 중의 하나인 괴델이 불완전성의 원리를 외친 것은 바로 이런 것과 연관된다고 보겠습니다.

과학적 무신론의 세계란 분명히 인류가 발견한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세계 안에서 인간이 경험한 지극히 제한된 경험에 불과합니다. 물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세계도 인류가 발견한 몇 가지 세계로서 우주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발견하지 못한 우주의 중요한 면을 해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과학의 동반자입니다.

문제는 과학은 변하고 발전하는데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는 멈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은 종교의 진정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종교가 단지 과학이 보지 못하는 진리의 세계의 촉수를 가지고 있다는 자만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면서, 지금처럼 스스로를 변혁시키는 일에 게으르게 되면 종교는 어느 날 인류에게 그저 하나의 시시한 관점, “별 볼 일 없는 미약한 관점”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오늘과 같이 빠르게 진화하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스스로를 변혁해 나가야만 하는 이유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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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비평을 수용하는 창조 신앙[각주:1]


김정형[각주:2]



신앙 교육 내용에 있어 많은 한국 교회는 여전히 16-17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세계관, 언어, 성경 해석, 신학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사실 지난 수 세기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전문 성서학자들과 교의학자들이 과학 혁명 이후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직면하여 신실한 기도와 학문적 열정 가운데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보다 폭 넓고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해 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현장 교육 담당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난 세기 성경 이해 및 신학적 이해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에 대해 거의 아무런 지식이 없다. 오히려 과거 종교개혁 시대 혹은 이후 정통주의 시대의 성경 해석과 교리 전통을 불변하는 진리로 인식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성경 해석과 신학 전통을 정죄하는 일부 신학자들의 영향 아래,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 경직된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과 근본주의적 교리 전통을 고수하며 그것을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혹자는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평신도 교사가 신학교에서나 배우는 성경 주석 방법이나 신학 이론을 배울 여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생각이 매우 안일하고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다음세대 청소년들은 이미 학교에서 최근 과학 이론을 교육 받고 있다. 과학 교사들은 자신들이 학창 시절 배운 과학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과학 이론을 스스로 배워서 가르친다. 그런데 교회 교사들은 어린 시절 배웠던 그 내용을 거의 그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말하자면, 교사들은 물론 교역자들에게서도 최근 성경 해석과 최근 신학 이론에 대해서 배우려는 의지도 노력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 교육과 신앙 교육 사이의 시간적 불균형이 더욱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교육 내용에 있어서조차 둘 사이에 질적 차이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신앙 교육의 내용과 관련한 이 같은 수구적 태도는 마치 자라나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다 자란 성인에게도 유아기적 사고방식을 계속해서 강요하는 태도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지성은 대체로 이미 상당한 정도로 성숙했지만, 성경 해석 및 신앙 이해에 있어서만큼은 많은 경우 아직까지 유아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 과거에 배운 과학 이론은 대부분 잊어버렸다고 할지라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만은 그 사람의 삶 전반에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한국 교회의 신앙 교육에서는 성경의 문자적 진리나 교리의 명제적 진리를 주입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해석학적 사고 훈련이나 신학적 사고 훈련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성세대와 다음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변화하는 세계관과 변화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성경을 시의 적절하게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서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명제적, 문자적 진리를 고집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필자가 볼 때 바로 이와 같은 신학적 미숙함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 시대의 창조 신앙은 신앙 교육의 내용 면에서 축자영감설에 기초한 문자주의적 성경해석과 근본주의적 교리 신학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 대안으로 신앙 교육은 성서 비평을 포함하여 최근 성서학 연구 결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그것을 넘어서 스스로 또한 공동체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신앙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최근까지의 성서학 연구가 반영된 해설 성경이나 최근 성서신학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단행본을 소개하고 함께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한성서공회에서 편찬한 관주 해설 성경은 성경 각 책, 각 단락에 대한 역사비평, 문학비평, 신학비평의 연구 결과들을 엄선하여 담고 있으며,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을 극복하는 한편 신학적 사고를 결여하고 있는 단순한 역사적 연구를 넘어서는 데도 도움을 준다. 교육목회를 담당하는 교역자는 물론이고 교회학교의 교사와 기독교가정의 부모까지 최근 성서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통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듣는 일을 대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지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교만한 일이지만, 성경에 대한 엄밀하고 정직한 지적 탐구 결과를 무시하고서 성경의 진정한 메시지를 읽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지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태만한 일이다.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 교육에 헌신하는 모든 지도자는 성경이 형성된 과정, 성경의 기본적인 줄거리, 성경 각 권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 성경에 기록된 글의 다양한 문학 장르, 때로는 공명하지만 때로는 상충하는 다양한 신학적 관점 등 성경의 문자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기본적인 지식을 함께 배우며 쌓아갈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성경 본문의 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이면을 관통하고 있는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성경의 문자를 관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필요하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 교육은 이미 주어진 정답을 암기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관통해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훈련시키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첫째, 신앙은 과학보다 더 심오한 진리를 다룬다. 둘째,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과학적 진리보다 더 심오한 진리에 접근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은 과학적 진리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일보다 더 깊은 차원을 요구한다. 신앙의 진리는 단순히 머리로 암기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으로만 소화될 수 있는 성질의 명제적 진리가 아니다. 물리적, 자연적 원인을 다루는 자연과학의 진리와 달리 신앙의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과 계획을 다룬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그 신앙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비단 전문 신학자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모든 목회자, 기독교교육 지도자, 교회학교 교사, 기독교가정의 부모, 자라나는 다음세대 아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진력하는 신학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서 신학은 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모든 신자의 책무이다. 이를 위해 유아기나 아동기의 아이들에게는 성경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 필요하고 또한 유익하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교육의 수준에 걸맞게 성경 교육과 신학 교육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1. 이 글은 김정형 교수가 '문화선교연구원'에 기고한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원문보기 https://www.cricum.org/1418) [본문으로]
  2. 장로회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과신대 자문위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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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교육으로서의 과학적 소양

  

최승언(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에 대하여 누구나 한 마디씩 할 수 있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정치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져 왔다. 더구나 우리 학생들은 이렇게 바뀌는 교육정책에 따라서 움직여 왔다. 교육정책의 대부분은 대학입시와 맞물려 있으면서 학생들의 학습량과 사교육 경감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생은 바뀐 교육정책에 대하여 혼란을 거듭했고, 이에 따른 사교육 시장은 팽창하기만 했다. 교육부나 시도 교육청이 아무리 좋은 교육정책 아이디어를 가지고 실현해 보려 해도, 공교육은 무시당하기 일 수였고, 많은 학생들은 오히려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평준화 교육을 보완하기 위한 영재교육, 세계 과학 인재들의 만남의 장인 올림피아드가 오히려 그 본연의 목적을 잃은 채 특목고를 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은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교육은 정시모집을 위해서는 수능에 맞추어져 있고, 수시모집을 위해서는 방과 후 활동 혹은 학교 밖 활동을 포함하여 학생종합생활기록부에 좋은 기록을 위하여 학교 안에서의 모든 시험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교육으로 내몰린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정말 전인적인 인간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강한 시민으로서 성장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못하더라도 대학교에 진학하여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학문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있는 수학 능력 혹은 역량이라도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하여 부정적인 답을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 역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기우였으면 좋겠다. 



교육 현장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보통 학교에서 과학실험을 한다고 하자. 과학교사는 학생들이 과학실험을 잘 수행하기 위해 과학실로 학생들을 오게 한다. 학생들은 모두 실험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4, 5명이 한 실험대에 앉아서 교사의 지도 하에 과학실험을 수행한다. 물론 교사는 이 과학 실험을 왜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결과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모두 알려 준다. 학생들 앞에는 실험보고서 양식이 주어져 있어 실험 결과와 그래프를 양식에 주어진 대로 기록하면 된다. 양식이 제공하는 질문에 대하여 실험 결과를 보고 답하면 되는데, 대부분 실험하기도 전에 교과서의 내용을 보고 적거나 선행학습이 되어 있기에 정답 적기에 여념이 없다. 실험 결과도 이웃 실험대의 결과와 다르면 교과서를 보고 자료를 베끼기 일 수다. 이것이 교육 현장의 모습이다. 교사의 주도와 학생의 주도를 각각 어떻게 바꾸어야 이러한 과학 실험 교육이 참과학 교육이 될까? 위에 제시한 과학 실험은 대학 입시를 위한 과학 수험 준비를 위해서도, 과학과 관련된 역량을 위해서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사교육 기관에서는 어떻게 할까? 잘은 모르지만 매우 잘 정리된, 시험을 잘 볼 수 있게 준비된 그 무엇을 제공하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형태의 제공은 공교육 기관에서도 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인가?


사람의 마음은 아주 간단히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열린 마음은 발산적 사고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발산적 사고를 통해 창의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 긍정적이다. 닫힌 마음은 수렴적 사고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수렴적 사고를 통해 비판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비판적이기에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는 합리적인 사고와 연결되어 있다. 합리적인 사고 질서를 만들어 내지만, 창의적인 사고는 우발적이고, 무질서한 면이 있다. 그런데 교수/학습에서도 교사가 주도하는 학습이 있는가 하면, 학생이 주도하는 학습이 있다. 현재의 교수/학습 경향은 교사 주도에서 학생 주도로 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학생의 배움과 관련된 학습에 대하여 교사 주도와 학생 주도 수업 모두 다 장단점이 있다. 공부를 위해서도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에 모두에 의해 발해지는 모든 사고 역량이 다 필요하다. 우리는 긍정은 수용하면서도 부정은 수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긍정과 부정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이 하나의 무엇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교육에서도 이 모두가 모이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육에 대하여 어떤 세계관을 가지면 건강할까? 건강하다는 표현은 바람직하다는 표현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표현이라 생각된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이에 대한 실천이 행동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변의 상황이 대학입시에만 집중되어 있어도,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행동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이는 학생본인 뿐만 아니라 학부형들도 가져야할 세계관인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모두 복잡계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예를 들어 한글의 자음, 모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자음과 모음이 글자를 만들어 소리를 나타내고, 글자가 모여 단어를 만들어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어 중요한 뜻을 만들고, 문장들이 모여 시, 수필, 소설, 과학 논문 등이 써져 어떤 중요한 기록물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이 기록물은 글자와 소리와의 연결이 임계가 되어 단어와 문장의 창발에 의한 소산물일 것이다. 이러한 복잡계의 개념은 여러 분야에 응용되어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을, 최무영 교수는 온문화를, 김명용 전 총장은 온신학을, 나는 온교육을 교육에서 창발될 건강한 세계관으로 주장한다. 



온교육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면, 교육에서 회자되는 여러 교육 정책들에서 써지는 가장 낮은 교육 개념들을 낱교육이라 칭하고, 이러한 낱교육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합쳐져 조금 더 큰 열교육을 이루고, 이렇게 이루어지는 열교육은 낱교육들이 가지고 있는 각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합일 뿐만 아니라 합을 뛰어 넘는 새로운 교육적 의미를 창발하게 된다. 이러한 열교육은 각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포텐샬 혹은 자본 그리고 학습 내용에 따라 모두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열교육들이 각 학생들에게 customizing 되어져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열교육들이 모여 창발된 온교육을 이룰 것이다. 어쩌면 이 온교육은 국가 교육과정과는 다른 미국에 제시한 교육표준에 해당할 지도 모른다. 온교육으로 실천되는 교육 현장은 어쩌면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철학, 심리, 사회, 문화, 역사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마다 다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온교육은 매우 추상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이 세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 대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온교육과 관련된 과학교육 중의 하나는 합리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를 모두 할 수 있는, 교사 주도와 학생 주도가 함께하는, 학생 개인 학습과 학생 간의 협업 학습이 모두 이루어지는, 과학 지식과 탐구 활동, 이와 서로 연결되는 과학적 태도 및 과학의 본성이 모두 다루어지는, 그리고 과학 글쓰기와 말하기, 듣기와 읽기가 동반되는, 이러한 모든 것과 함께하여 개인적인 과학 이슈 혹은 사회적인 과학 이슈에 대한 의사 결정 및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 실천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과학적 소양을 이루는 교육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적 소양을 이루는 과학 교육은 아마도 현재 개신교 교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창조과학의 문제를 해결해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 교육이 미래를 살아 내게 하는 역량들을 가지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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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했습니다.

과신대 VIEW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복된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장현일 (과신대 운영위원장)


생각해보면 우리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믿음입니다. 과학과 신앙이 대화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기독교 신앙의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내용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창조주시라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의 주인 역시 창조주 하나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사람이 되어 창조세계의 한 가운데 오신 분이시라면, 우리는 더욱 창조 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직면한 두 가지 도전은 문자주의와 과학주의일 것입니다. 문자주의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과학적 진리를 무시한다면, 과학주의는 과학을 무신론적 증거로 내세워 신앙적 진리를 무시합니다. 우리는 이런 두 가지 도전을 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하며 또 극복해야 합니다. 과학주의 무신론이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라면 문자주의는 내부에 뿌리박혀 있는 도전입니다. 과학주의 무신론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문자주의입니다. 문자주의는 과학적 진리를 부정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에 대한 진리를 부정하고 세상과 담을 쌓는 일은 기독교의 근본 신앙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도전을 극복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풍요롭고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이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거나 회피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메마르고 무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부터 과신대 기초과정 교육이 온라인으로 제공됩니다. 그동안 지방에 계시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과신대 기초과정 공부를 할 수 없었던 분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또 한 가지 올해 새롭게 청소년 캠프가 시작됩니다. 우선 과신대 정회원들의 자녀를 대상으로 소규모로 시작합니다. 과학시대의 한 가운데를 살고 있는 우리 자녀들에게 과학과 신앙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좋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청소년 캠프를 통해 과신대가 청소년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지역 교회들과 협력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난해에는 과신대 북클럽도 활성화된 시기였습니다. 과신대 북클럽은 과학과 신앙의 대화와 관련된 책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모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3년 전 서울 관악 북클럽으로 시작하여 이제는 분당(판교), 부천, 안양, 수원남부, 장신대, 제주, 전주 등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과학과 신앙의 진지한 대화가 막혀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 답답해하고 갈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신대 북클럽은 해방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과신대 북클럽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결성되어 활발하게 모이는 그날을 기대합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우리를 인도하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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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도전과 기독교 교육[각주:1]


김정형 교수[각주:2]



과학 시대의 도전


오늘날 우리는 21세기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 21세기 과학 시대는 17-18세기 과학 혁명 시대에 큰 빚을 지고 있지만 과거와는 많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 혁명의 시대는 근대 과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근대 이전의 세계관을 대체하기 시작한 시기였다면, 오늘날 과학 시대는 과학적 세계관이 사회문화 전반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기이다. 과학 혁명의 시대에는 여전히 전통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면, 과학 시대에는 전통적 세계관이 아직까지 완전하게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 세계관과 경쟁할 만큼의 영향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오늘날 우리의 삶은 스마트폰을 상징으로 하는 과학기술이 가져온 문명의 이기를 빼놓고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21세기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한편, 과학 시대는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다. 과학 시대의 도전은 크게 세계관, 인간관, 무신론의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변화하는 세계관. 과학 혁명 이후 지난 수백 년 간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는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최근에는 구글의 빌 게이츠 재단이 지원하는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가 최근까지의 과학의 발전을 집대성하여 그린 하나의 큰 그림(세계관)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https://school.bighistoryproject.com/bhplive). 적어도 상당수의 다음세대가 빅 히스토리를 ‘표준적인’ 세계관으로 배우며 성장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세계관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패러다임 전환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과는 직접적으로 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학적 세계관의 내용 중 일부는 전통적 기독교 세계관과 충돌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반대로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더욱 풍성해지는 경우도 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이 세계관의 문제로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빛을 던져줄 수 있는 기회도 있다.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라는 현실 앞에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2) 변화하는 인간관. 과학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두 번째 도전은 인간관의 문제와 관계된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밝혀진 바,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 인간이 다른 모든 생물들과 같이 공통 조상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 등은 인간의 자기 이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나 오늘날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인간이 기계와 공존하는 시대를 넘어 인간 문명이 기계 문명에 의해 대체되는 어두운 미래를 전망하게 할 때도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관의 변화는 앞서 언급한 세계관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현대인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질문을 두고 씨름하고 있는 현대인들과 함께 고민하고 대하며 그들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관, 가치관의 변화 가운데 일부는 전통적인 기독교 인간관에 큰 도전을 안긴다. 예를 들어, 인간의 기원과 본성에 관한 최근 과학 이론들은 인간의 특별 창조, 아담과 하와 및 타락의 역사성, 원죄의 유전, 영혼과 육체의 관계, 기독교의 고유성과 절대성,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의 이슈들에 있어 전통적인 견해를 재고하게 만들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치관이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3) 과학적 무신론. 마지막으로, 과학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세 번째 도전은 세속주의 혹은 무신론의 도전이다. 과학의 발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요청하지 않고도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역사가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고, 기술의 발전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이 땅의 역사를 결정하는 주권자라는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어 보이는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역사 속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으로 알려진 이들은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이 누리고 있는 권위에 호소하여 자신들의 세속주의적, 유물론적,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논리에는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무신론의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혼동하는 큰 맹점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 적대적인 한국의 사회문화 속에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하게 우려할 사항이다. 과학적 무신론의 득세는 한편으로 오늘날 과학이 누리는 권위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과학적 무신론에는 거부감을 갖지만 현대 과학 기술이 누리는 권위에는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학의 권위에 기댄 무신론자들, 유물론자들, 세속주의자들의 주장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물리적인 세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 나아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자” 곧 사랑과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과학 신앙을 품은 신앙 교육


먼저 기억할 것은 한국 교회 안에서 신앙 교육을 담당하는 교역자나 교사들 중에 현대 과학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과학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힘들어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교회 안이나 밖에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대 과학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 자체는 신앙 교육과 관련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적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이 현대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신앙에 걸림돌이 되거나 신앙을 위협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 과학에 무관심하거나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한국 교회 내 신앙 교육은 청소년들이 학교나 미디어를 통해서 배우는 과학 이론을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언급하면서, 대체로 과학 교육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하지만 진화론을 포함하여 과학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갖고 있는 현대 과학 이론을 맹목적으로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신앙 교육은 불가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교육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아울러 과학 교육과 신앙 교육이 함께 갈 수 없다는 암묵적인 전제는 과학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큰 짐이 된다.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가 과학 교육에 대해 가진 부정적 인식과 태도는 신앙을 가진 다음세대 아이들이 과학 교육을 중심으로 한 학교 교육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거나 반대로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 다음세대 아이들이 현대 과학 이론뿐 아니라 현대 과학의 괄목할 만한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과학적 사고방식마저도 거부하고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다면, 그 아이들의 전인적 성장은 심각하게 왜곡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또래들과 상식에 근거한 합리적인 소통에 장애가 발생함으로 인해서 장차 교회 밖 공공 영역에서 리더십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결정적인 한계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 교육 안에 과학 교육을 품을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예로, 미국에서는 지난 2004년부터 일군의 기독교 성직자들이 창조과학과 지적설계 운동에 반대하여 진화 이론을 최상의 과학으로 인정하는 ‘성직자 서한 프로젝트’(The Clergy Letter Project)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 기독교 성직자들의 편지 내용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비롯하여 논쟁과 갈등의 영역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신앙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 권위 있는 문서로 받아들이지만, 그 중에 상당한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문자적으로 읽지는 않는다. 창조,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등 성경에 기록된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창조주와 창조세계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관한 무시간적인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종교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와 그 성격이 다르다. 종교적 진리의 목적은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있다. 여기에 서명한 우리들은 다양한 전통에 속한 기독교 성직자들로서 성경의 무시간적 진리와 근대과학의 발견들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진화 이론이 엄격한 검증을 거친 기초적인 과학적 진리로서 그 위에 인간의 많은 지식과 업적이 기초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진리를 거부하거나 이것을 단순히 “다양한 이론들 가운데 하나의 이론”으로 취급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과학적 무지를 받아들이고 그러한 무지를 우리의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은사들 가운데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또한 포함되며 따라서 이러한 은사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믿는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하나님이 주신 이성능력의 충분한 활용을 배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교만한 행위에 해당한다. 우리는 학교 이사진들이 진화 이론을 인간 지식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가르치는 일을 지지함으로써 과학 교과과정의 순수성을 보전하길 요청한다. 우리는 과학은 과학으로, 종교는 종교로, 서로 구별되지만 동시에 서로를 보완하는 진리 형태로 남기를 원한다.




과학 혁명 이후 현대 과학의 발전이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충돌하고, 전통적 세계관의 붕괴를 초래하고, 무신론이 등장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가져온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과연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 곧 기독교의 핵심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오히려 현대 과학이 절제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지식을 가져다줌으로써 기존의 잘못되고 편협한 생각을 교정하고 보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가 기독교의 핵심 진리와는 무관한 고대의 세계관을 고수하기 위해서 현대 과학의 발전에 맞서는 바람에 오히려 과학적 무신론이 득세할 근거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이제서라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과학 교육을 긍정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과학적 무신론의 존재 근거를 뿌리부터 제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요컨대,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 교육은 과학 시대의 상식을 가르치는 과학 교육을 적극적으로 품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교회와 믿음의 가정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와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빅 히스토리를 함께 가르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신앙 교육 현장에서는 낯선 풍경이지만, 신앙 교육이 과학 교육을 품고 있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이와 같은 연출은 그 자체만으로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현대 과학이 신앙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준다. 문자주의적 해석을 고집하는 일부 창조론자들의 우려와 달리, 신앙 교육의 현장에서 과학 교육을 병행하는 이 같은 시도는 과학의 언어와 달리 성경의 언어를 포함한 종교 언어가 시적, 은유적, 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1. 1. 이 글은 김정형 교수가 '문화선교연구원'에 기고한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원문보기 http://www.cricum.org/1391?category=643369) [본문으로]
  2. 2. 예수님을 사랑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평화의 나라를 소망하고, 교회의 미래를 고민하며,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신학자. 우주의 종말에 관한 신학과 과학의 대화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 작성, <분단 한국을 위한 평화의 신학>의 저자,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조교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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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스킨십, 소통, 그리스도



김영웅 박사[각주:1] 



사랑하는 아내와 키스를 하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아들의 방으로 향한다.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천사 같은 아들을 꼬옥 안아주며 볼에 뽀뽀를 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스킨십을 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임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 그렇다. 우린 인간이다. 몸을 가진 인간이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린 자칫 인간의 육신을 생각할 때면 제한받고 통제받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를 제한과 통제보다는 오히려 자유함에서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있고, 그 만짐으로 인해 사랑을 느끼고 비로소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육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이는 곧 자유함이기 때문이다. 창조된 우리의 육체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어쩌면 천사가 흠모하는 인간의 본질은, 그들은 가지지 못했으나 인간만이 가질 수 있었던, 바로 우리 육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자로서 나는 생명체를 연구하며 그 신비함에 깊이 경탄할 때가 많다. 특히,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정교하고도 완벽하게 디자인된 생명체의 신비를 하나님의 창조라고 믿는 내가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창조자 앞에서 전적으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생명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비밀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러한 신비가 가능한지 그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과학자로서 일상의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연구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새로운 비밀을 많이 밝히고 안다 하더라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오히려 더 알고 싶고 또 알고 싶을 뿐이다. 무한한 생명의 비밀 앞에서 과학자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칼 세이건의 제안에 따라 보이저 1호가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포착한, 희미한 푸른 점(Pale Blue Dot)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생명의말씀사, 2016)


폴 브랜드를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정형외과 의사였을 뿐 아니라, 선교사적인 사명을 자신의 소명이라 여기고 한 평생을 보낸 평신도 선교사였다. 그런데 그의 선교지는 어떤 특정한 지역이기보다는 한센병과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


문둥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은 자멸하는 병이다. 사지가 서서히 절단되고 코가 문드러지는 육신의 처참함을 동반하는 병이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한센병은 주로 신경 세포를 공격하여 감각을 차단시켜 버린다. 이것은 어느 날 손가락 하나가 잘려도, 그들의 비극은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이기보다는 그 아픔을 전혀 못 느낀다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폴 브랜드는 어느 날 그의 한센병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한센병의 무서운 결과는 환자들이 고통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이후 그는 한센병이 조직의 부패 없이도, 통증의 감각을 상실시킨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외과의사로서 한센병 환자들의 외과적 수술과 재활에 현격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로 그 분야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재활 공동체를 운영하며 평생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하는 사랑을 실천한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어느 날 필립 얀시가 아내의 벽장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한 편의 에세이를 읽고 난 후,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그 에세이의 저자였던 폴 브랜드를 직접 찾아가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느덧 기독교 작가로서 탄탄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필립 얀시이지만, 폴 브랜드를 만날 때만 해도 그는 이십 대의 젊은 저널리스트였다. 폴 브랜드와의 만남은 필립 얀시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폴 브랜드가 죽고 나서 그는 회고한다. 폴 브랜드를 통해서 이론으로만 들었던 기독교적 삶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확신뿐 아니라, 겸손함을 잃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면서도 얼마든지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는 그런 확신이 미약해질 때면 항상 폴 브랜드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린다고도 고백한다. 폴 브랜드는 필립 얀시에게 있어서 실로 거인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서 출발하여 (1부), 이 책은, 골격을 유지해 주는 힘이 되는 '뼈' (2부), 다른 생명과 소통하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 (3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들의 몸을 움직이는 신비한 메커니즘인 '동작'에 이르기까지 (4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들의 몸을 비유로 하여 실로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메시지를 담담히 선포한다. 바울 역시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인간의 몸과 각 기관을 비유했음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바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하나의 지체인 것이다. 폴 브랜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의 세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 우리들 각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라는 것이다.


세포가 가장 세포다울 때는 하나의 세포가 주위의 세포와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이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충성하여 전체 몸이 정상적인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때다(이것이 책의 목차가 1부 ‘세포’에서 시작하여 4부 ‘동작’으로 마치는 의미이다). 세포다움은 세포의 dependence에 있기보단 inter-dependence에 있는 것이다. 작은 하나의 완벽함보다는 연약한 하나일지라도 조화롭게 모여 큰 하나를 이루는 것에 바로 세포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의 본질이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에 비유한다면,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 우리들이 자본주의적이고 성공지향적이며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에 묶인 채 개인의 번영과 안녕에만,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유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세포들이 모여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될는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포 중에서도 어떤 세포는 자신의 생명에만 연연하여 주위의 세포들과 전혀 소통하지도 않고, 자신이 전체 몸의 일부인 것을 망각한 채 몸에 충성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독립적으로 사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세포를 우린 암세포라고 부른다. 암세포는 자기중심의 원죄를 짊어진 인간의 이기적인 본질과도 너무나 닮았다.



필립 얀시를 통하여 폴 브랜드는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이지만, 똑같은 기능을 가진 클론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세포로 분화되어 있으면서도, 그래서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러므로 서로 연합하고 봉사하고 헌신하여 건강한 공동체 (교회)를 이루는 임무를 맡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을 둘러보면, 교회만큼 상이한 사람들이 모인 기관도 없다. 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치체계나 기준으로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의 집합으로 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머리로 삼고 있는 존재라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연합함의 비밀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가 연합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유사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성에서부터 시작된다.


연합의 근거와 시작이 되어주는 다양성은 또한 우리들이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만남을 가질 때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람이라면, 함께 한 몸을 이루는 세포요, 서로 공동체를 이뤄야 하는 존재임을 간파하며 결속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이유가 된다. 처음 보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이기에 금세 한 가족이 될 수 있다. 서로가 다른 기관을 이루는 세포이지만, 그래서 피부색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루는 일부인 것처럼,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부다. 우리는 형제, 자매요, 가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게 남겨진 사명이요,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만족함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의 환희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랑이다.



책을 덮고 글을 쓰니 어두워졌다. 나는 곧 잠자리에 들어가 잠을 청할 테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다시 사랑스러운 아내의 키스와 사랑하는 아들의 포옹으로 내일을 시작할 테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건강한 세포가 우리 몸을 이루고 있으며, 골격을 유지해 주는 튼튼한 뼈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가 내게 있음은, 그저 나 자신의 건강이나 내가 속한 가족 안에서의 소통만을 위한 것이 더 이상 아님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야만 하고 충성해야만 하며, 나와 가족을 넘어선 모든 하나님 백성들과의 연합을 생각해야 한다고 나의 온몸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하나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좀 더 머리로부터 오는 시그널에 민감해져야 하고, 그 시그널에 우선순위를 두고 삶의 패턴과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지경이 더 넓혀질 시간표다.



  1.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미국 City of Hope에서 Staff Scientist로 일하고, 과신대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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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나는 뇌가 아니다


김남호 박사

(울산대학교 철학과 / 과신대 연구이사 / 철학자가 된 셜록 홈즈』의 저자)


 


 

마흔도 채 되지 않는 독일 본 대학의 젊은 철학교수 마쿠스 가브리엘의 신작 <나는 뇌가 아니다>를 읽고 있다. 내가 본 대학 박사과정에 있을 때 가브리엘 교수를 학술회장에서 보곤 했다. 늘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는 학술회장에서 그는 영감어린 물음들을 던지곤 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학술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인정 받은 보기 드문 철학자로 주목 받고 있다. 학술적으로 그가 앞으로 어떤 업적을 남길지 나도 궁금하다. 책을 읽고 있자니 그 특유의 속사포같은 말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뇌가 아니다>는 가브리엘 교수의 심리철학 입문서이다. 그러나 입문서라기 보다는 '나는 나의 뇌이다'라고 주장하는 신경중심주의 혹은 환원주의를 맹공격하고 정신의 실재성을 옹호하려는 철학 변론서에 가깝다. 그는 신경과학이 머지않아 인간의 정신을 물질로 모조리 설명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선동이 아닌 논증으로 보여준다. 특히 신경중심주의, 자연주의, 환원주의의 특성과 출현을 철학사적으로 파헤치는 가브리엘의 날카로움은 그의 높은 철학적 역량을 그대로 보여준다.



철학 입문서나 철학 입문 강의는 학계에서 학술적인 검증을 받은 전문 학자가 맡아야 한다. 그 이유는 적어도 (1) '철학적 기본기' (2) '깊이' 때문이다. 모든 운동,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철학에도 기본기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많은 개념들, 입장들이 있다. 심지어 개념 하나하나에도 개념의 역사, 즉 개념사가 있다. 이 개념사를 잘 알아야 한 개념을 잘 구사할 수 있게 된다. '깊이'는 철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입장들에 대한 올바르고 섬세한 이해를 뜻한다. 비전문가 중에 특정 철학자의 해석을 통해서 곧바로 철학에 입문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해석 이전에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영역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독일 대학에서 학부 1, 2학년 정도에서는 철학 기본기가 중요하지 않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것이 강조된다. 그 이외에 (3) '자신만의 입장 혹은 시각'이 추가될 수 있다. 철학 입문서에 굳이 (3)이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변론서 성격이 강한 입문서(가령, 러셀의 철학입문서의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물론 (3)(1)(2)를 탄탄하게 갖춰야만 도달할 수 있다.


가브리엘 교수의 <나는 뇌가 아니다>는 이 세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그는 화려한 글발로 대중을 선동하는 그런 대중 저술가가 아니다. 2천년 철학의 역사를 궤뚫는 통찰, 개념 하나하나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이해, 설득력 높은 근거제시, 논리력 등을 기본적으로 갖춘 상태에서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는 보기 드문 학자이다. (이런 점은 까다로운 개념들을 먼저 규정하거나 학술서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 철학자들의 아이디어를 적시적소에 비판적으로 끌어들이는 솜씨 등을 통해 드러난다)



한국 사회에 철학은 아직 낯설다. 그러나 그만큼 철학이 필요한 사회이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과학만 발전하면 철학자들이 묻는 물음에 답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착각이다. 가령, 생물학자들이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에 대해 알아낸 사실들을 병렬적으로 늘어 놓는다고 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 놓을 수 없다. 이는 마치 사건들을 늘어 놓는다고 해서 그로부터 역사관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간의 뇌에 대해 지금까지 알아냈고, 앞으로 알아낼 모든 확인된 사실들을 단지 늘어 놓는다고 해서 곧 우리 존재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제공해주는 실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들을 너머서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형이상학, 논리학 등과 같은 철학 분과의 도움이 필요하다. 칸트, 니체, 하이데거와 같은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자들이 활동했음에도, 위의 사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지금까지 크게 변함이 없다는 점을 20세기 심리철학의 발전이 잘 보여주고 있다.


거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정신이 물질로 모조리 설명된다는 환원주의를 거부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당신의 뇌가 아니며, 서로 교제 나누는 대상은, 구원 받는 대상은 뇌가 아니며, 예수가 살려낸 대상은 나사로이지 나사로의 뇌가 아니며, 예수를 배반한 대상은 가롯 유다이지 그의 뇌가 아니다. 그러나 이 상식적인 믿음에 객관적인 근거가 요구된다. 바로 철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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