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교육으로서의 과학적 소양

  

최승언(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에 대하여 누구나 한 마디씩 할 수 있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정치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져 왔다. 더구나 우리 학생들은 이렇게 바뀌는 교육정책에 따라서 움직여 왔다. 교육정책의 대부분은 대학입시와 맞물려 있으면서 학생들의 학습량과 사교육 경감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생은 바뀐 교육정책에 대하여 혼란을 거듭했고, 이에 따른 사교육 시장은 팽창하기만 했다. 교육부나 시도 교육청이 아무리 좋은 교육정책 아이디어를 가지고 실현해 보려 해도, 공교육은 무시당하기 일 수였고, 많은 학생들은 오히려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평준화 교육을 보완하기 위한 영재교육, 세계 과학 인재들의 만남의 장인 올림피아드가 오히려 그 본연의 목적을 잃은 채 특목고를 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은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교육은 정시모집을 위해서는 수능에 맞추어져 있고, 수시모집을 위해서는 방과 후 활동 혹은 학교 밖 활동을 포함하여 학생종합생활기록부에 좋은 기록을 위하여 학교 안에서의 모든 시험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교육으로 내몰린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정말 전인적인 인간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강한 시민으로서 성장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못하더라도 대학교에 진학하여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학문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있는 수학 능력 혹은 역량이라도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하여 부정적인 답을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 역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기우였으면 좋겠다. 



교육 현장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보통 학교에서 과학실험을 한다고 하자. 과학교사는 학생들이 과학실험을 잘 수행하기 위해 과학실로 학생들을 오게 한다. 학생들은 모두 실험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4, 5명이 한 실험대에 앉아서 교사의 지도 하에 과학실험을 수행한다. 물론 교사는 이 과학 실험을 왜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결과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모두 알려 준다. 학생들 앞에는 실험보고서 양식이 주어져 있어 실험 결과와 그래프를 양식에 주어진 대로 기록하면 된다. 양식이 제공하는 질문에 대하여 실험 결과를 보고 답하면 되는데, 대부분 실험하기도 전에 교과서의 내용을 보고 적거나 선행학습이 되어 있기에 정답 적기에 여념이 없다. 실험 결과도 이웃 실험대의 결과와 다르면 교과서를 보고 자료를 베끼기 일 수다. 이것이 교육 현장의 모습이다. 교사의 주도와 학생의 주도를 각각 어떻게 바꾸어야 이러한 과학 실험 교육이 참과학 교육이 될까? 위에 제시한 과학 실험은 대학 입시를 위한 과학 수험 준비를 위해서도, 과학과 관련된 역량을 위해서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사교육 기관에서는 어떻게 할까? 잘은 모르지만 매우 잘 정리된, 시험을 잘 볼 수 있게 준비된 그 무엇을 제공하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형태의 제공은 공교육 기관에서도 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인가?


사람의 마음은 아주 간단히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열린 마음은 발산적 사고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발산적 사고를 통해 창의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 긍정적이다. 닫힌 마음은 수렴적 사고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수렴적 사고를 통해 비판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비판적이기에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는 합리적인 사고와 연결되어 있다. 합리적인 사고 질서를 만들어 내지만, 창의적인 사고는 우발적이고, 무질서한 면이 있다. 그런데 교수/학습에서도 교사가 주도하는 학습이 있는가 하면, 학생이 주도하는 학습이 있다. 현재의 교수/학습 경향은 교사 주도에서 학생 주도로 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학생의 배움과 관련된 학습에 대하여 교사 주도와 학생 주도 수업 모두 다 장단점이 있다. 공부를 위해서도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에 모두에 의해 발해지는 모든 사고 역량이 다 필요하다. 우리는 긍정은 수용하면서도 부정은 수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긍정과 부정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이 하나의 무엇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교육에서도 이 모두가 모이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육에 대하여 어떤 세계관을 가지면 건강할까? 건강하다는 표현은 바람직하다는 표현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표현이라 생각된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이에 대한 실천이 행동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변의 상황이 대학입시에만 집중되어 있어도,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행동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이는 학생본인 뿐만 아니라 학부형들도 가져야할 세계관인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모두 복잡계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예를 들어 한글의 자음, 모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자음과 모음이 글자를 만들어 소리를 나타내고, 글자가 모여 단어를 만들어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어 중요한 뜻을 만들고, 문장들이 모여 시, 수필, 소설, 과학 논문 등이 써져 어떤 중요한 기록물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이 기록물은 글자와 소리와의 연결이 임계가 되어 단어와 문장의 창발에 의한 소산물일 것이다. 이러한 복잡계의 개념은 여러 분야에 응용되어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을, 최무영 교수는 온문화를, 김명용 전 총장은 온신학을, 나는 온교육을 교육에서 창발될 건강한 세계관으로 주장한다. 



온교육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면, 교육에서 회자되는 여러 교육 정책들에서 써지는 가장 낮은 교육 개념들을 낱교육이라 칭하고, 이러한 낱교육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합쳐져 조금 더 큰 열교육을 이루고, 이렇게 이루어지는 열교육은 낱교육들이 가지고 있는 각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합일 뿐만 아니라 합을 뛰어 넘는 새로운 교육적 의미를 창발하게 된다. 이러한 열교육은 각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포텐샬 혹은 자본 그리고 학습 내용에 따라 모두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열교육들이 각 학생들에게 customizing 되어져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열교육들이 모여 창발된 온교육을 이룰 것이다. 어쩌면 이 온교육은 국가 교육과정과는 다른 미국에 제시한 교육표준에 해당할 지도 모른다. 온교육으로 실천되는 교육 현장은 어쩌면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철학, 심리, 사회, 문화, 역사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마다 다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온교육은 매우 추상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이 세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 대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온교육과 관련된 과학교육 중의 하나는 합리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를 모두 할 수 있는, 교사 주도와 학생 주도가 함께하는, 학생 개인 학습과 학생 간의 협업 학습이 모두 이루어지는, 과학 지식과 탐구 활동, 이와 서로 연결되는 과학적 태도 및 과학의 본성이 모두 다루어지는, 그리고 과학 글쓰기와 말하기, 듣기와 읽기가 동반되는, 이러한 모든 것과 함께하여 개인적인 과학 이슈 혹은 사회적인 과학 이슈에 대한 의사 결정 및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 실천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과학적 소양을 이루는 교육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적 소양을 이루는 과학 교육은 아마도 현재 개신교 교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창조과학의 문제를 해결해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 교육이 미래를 살아 내게 하는 역량들을 가지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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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했습니다.

과신대 VIEW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복된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장현일 (과신대 운영위원장)


생각해보면 우리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믿음입니다. 과학과 신앙이 대화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기독교 신앙의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내용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창조주시라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의 주인 역시 창조주 하나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사람이 되어 창조세계의 한 가운데 오신 분이시라면, 우리는 더욱 창조 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직면한 두 가지 도전은 문자주의와 과학주의일 것입니다. 문자주의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과학적 진리를 무시한다면, 과학주의는 과학을 무신론적 증거로 내세워 신앙적 진리를 무시합니다. 우리는 이런 두 가지 도전을 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하며 또 극복해야 합니다. 과학주의 무신론이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라면 문자주의는 내부에 뿌리박혀 있는 도전입니다. 과학주의 무신론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문자주의입니다. 문자주의는 과학적 진리를 부정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에 대한 진리를 부정하고 세상과 담을 쌓는 일은 기독교의 근본 신앙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도전을 극복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풍요롭고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이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거나 회피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메마르고 무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부터 과신대 기초과정 교육이 온라인으로 제공됩니다. 그동안 지방에 계시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과신대 기초과정 공부를 할 수 없었던 분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또 한 가지 올해 새롭게 청소년 캠프가 시작됩니다. 우선 과신대 정회원들의 자녀를 대상으로 소규모로 시작합니다. 과학시대의 한 가운데를 살고 있는 우리 자녀들에게 과학과 신앙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좋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청소년 캠프를 통해 과신대가 청소년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지역 교회들과 협력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난해에는 과신대 북클럽도 활성화된 시기였습니다. 과신대 북클럽은 과학과 신앙의 대화와 관련된 책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모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3년 전 서울 관악 북클럽으로 시작하여 이제는 분당(판교), 부천, 안양, 수원남부, 장신대, 제주, 전주 등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과학과 신앙의 진지한 대화가 막혀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 답답해하고 갈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신대 북클럽은 해방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과신대 북클럽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결성되어 활발하게 모이는 그날을 기대합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우리를 인도하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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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도전과 기독교 교육(I)[각주:1]


김정형 교수[각주:2]



과학 시대의 도전


오늘날 우리는 21세기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 21세기 과학 시대는 17-18세기 과학 혁명 시대에 큰 빚을 지고 있지만 과거와는 많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 혁명의 시대는 근대 과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근대 이전의 세계관을 대체하기 시작한 시기였다면, 오늘날 과학 시대는 과학적 세계관이 사회문화 전반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기이다. 과학 혁명의 시대에는 여전히 전통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면, 과학 시대에는 전통적 세계관이 아직까지 완전하게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 세계관과 경쟁할 만큼의 영향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오늘날 우리의 삶은 스마트폰을 상징으로 하는 과학기술이 가져온 문명의 이기를 빼놓고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21세기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한편, 과학 시대는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다. 과학 시대의 도전은 크게 세계관, 인간관, 무신론의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변화하는 세계관. 과학 혁명 이후 지난 수백 년 간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는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최근에는 구글의 빌 게이츠 재단이 지원하는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가 최근까지의 과학의 발전을 집대성하여 그린 하나의 큰 그림(세계관)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https://school.bighistoryproject.com/bhplive). 적어도 상당수의 다음세대가 빅 히스토리를 ‘표준적인’ 세계관으로 배우며 성장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세계관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패러다임 전환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과는 직접적으로 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학적 세계관의 내용 중 일부는 전통적 기독교 세계관과 충돌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반대로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더욱 풍성해지는 경우도 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이 세계관의 문제로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빛을 던져줄 수 있는 기회도 있다.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라는 현실 앞에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2) 변화하는 인간관. 과학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두 번째 도전은 인간관의 문제와 관계된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밝혀진 바,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 인간이 다른 모든 생물들과 같이 공통 조상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 등은 인간의 자기 이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나 오늘날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인간이 기계와 공존하는 시대를 넘어 인간 문명이 기계 문명에 의해 대체되는 어두운 미래를 전망하게 할 때도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관의 변화는 앞서 언급한 세계관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현대인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질문을 두고 씨름하고 있는 현대인들과 함께 고민하고 대하며 그들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관, 가치관의 변화 가운데 일부는 전통적인 기독교 인간관에 큰 도전을 안긴다. 예를 들어, 인간의 기원과 본성에 관한 최근 과학 이론들은 인간의 특별 창조, 아담과 하와 및 타락의 역사성, 원죄의 유전, 영혼과 육체의 관계, 기독교의 고유성과 절대성,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의 이슈들에 있어 전통적인 견해를 재고하게 만들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치관이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3) 과학적 무신론. 마지막으로, 과학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세 번째 도전은 세속주의 혹은 무신론의 도전이다. 과학의 발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요청하지 않고도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역사가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고, 기술의 발전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이 땅의 역사를 결정하는 주권자라는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어 보이는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역사 속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으로 알려진 이들은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이 누리고 있는 권위에 호소하여 자신들의 세속주의적, 유물론적,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논리에는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무신론의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혼동하는 큰 맹점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 적대적인 한국의 사회문화 속에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하게 우려할 사항이다. 과학적 무신론의 득세는 한편으로 오늘날 과학이 누리는 권위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과학적 무신론에는 거부감을 갖지만 현대 과학 기술이 누리는 권위에는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학의 권위에 기댄 무신론자들, 유물론자들, 세속주의자들의 주장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물리적인 세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 나아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자” 곧 사랑과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과학 신앙을 품은 신앙 교육


먼저 기억할 것은 한국 교회 안에서 신앙 교육을 담당하는 교역자나 교사들 중에 현대 과학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과학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힘들어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교회 안이나 밖에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대 과학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 자체는 신앙 교육과 관련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적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이 현대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신앙에 걸림돌이 되거나 신앙을 위협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 과학에 무관심하거나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한국 교회 내 신앙 교육은 청소년들이 학교나 미디어를 통해서 배우는 과학 이론을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언급하면서, 대체로 과학 교육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하지만 진화론을 포함하여 과학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갖고 있는 현대 과학 이론을 맹목적으로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신앙 교육은 불가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교육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아울러 과학 교육과 신앙 교육이 함께 갈 수 없다는 암묵적인 전제는 과학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큰 짐이 된다.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가 과학 교육에 대해 가진 부정적 인식과 태도는 신앙을 가진 다음세대 아이들이 과학 교육을 중심으로 한 학교 교육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거나 반대로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 다음세대 아이들이 현대 과학 이론뿐 아니라 현대 과학의 괄목할 만한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과학적 사고방식마저도 거부하고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다면, 그 아이들의 전인적 성장은 심각하게 왜곡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또래들과 상식에 근거한 합리적인 소통에 장애가 발생함으로 인해서 장차 교회 밖 공공 영역에서 리더십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결정적인 한계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 교육 안에 과학 교육을 품을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예로, 미국에서는 지난 2004년부터 일군의 기독교 성직자들이 창조과학과 지적설계 운동에 반대하여 진화 이론을 최상의 과학으로 인정하는 ‘성직자 서한 프로젝트’(The Clergy Letter Project)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 기독교 성직자들의 편지 내용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비롯하여 논쟁과 갈등의 영역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신앙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 권위 있는 문서로 받아들이지만, 그 중에 상당한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문자적으로 읽지는 않는다. 창조,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등 성경에 기록된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창조주와 창조세계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관한 무시간적인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종교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와 그 성격이 다르다. 종교적 진리의 목적은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있다. 여기에 서명한 우리들은 다양한 전통에 속한 기독교 성직자들로서 성경의 무시간적 진리와 근대과학의 발견들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진화 이론이 엄격한 검증을 거친 기초적인 과학적 진리로서 그 위에 인간의 많은 지식과 업적이 기초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진리를 거부하거나 이것을 단순히 “다양한 이론들 가운데 하나의 이론”으로 취급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과학적 무지를 받아들이고 그러한 무지를 우리의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은사들 가운데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또한 포함되며 따라서 이러한 은사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믿는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하나님이 주신 이성능력의 충분한 활용을 배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교만한 행위에 해당한다. 우리는 학교 이사진들이 진화 이론을 인간 지식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가르치는 일을 지지함으로써 과학 교과과정의 순수성을 보전하길 요청한다. 우리는 과학은 과학으로, 종교는 종교로, 서로 구별되지만 동시에 서로를 보완하는 진리 형태로 남기를 원한다.




과학 혁명 이후 현대 과학의 발전이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충돌하고, 전통적 세계관의 붕괴를 초래하고, 무신론이 등장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가져온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과연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 곧 기독교의 핵심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오히려 현대 과학이 절제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지식을 가져다줌으로써 기존의 잘못되고 편협한 생각을 교정하고 보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가 기독교의 핵심 진리와는 무관한 고대의 세계관을 고수하기 위해서 현대 과학의 발전에 맞서는 바람에 오히려 과학적 무신론이 득세할 근거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이제서라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과학 교육을 긍정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과학적 무신론의 존재 근거를 뿌리부터 제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요컨대,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 교육은 과학 시대의 상식을 가르치는 과학 교육을 적극적으로 품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교회와 믿음의 가정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와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빅 히스토리를 함께 가르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신앙 교육 현장에서는 낯선 풍경이지만, 신앙 교육이 과학 교육을 품고 있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이와 같은 연출은 그 자체만으로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현대 과학이 신앙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준다. 문자주의적 해석을 고집하는 일부 창조론자들의 우려와 달리, 신앙 교육의 현장에서 과학 교육을 병행하는 이 같은 시도는 과학의 언어와 달리 성경의 언어를 포함한 종교 언어가 시적, 은유적, 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1. 1. 이 글은 김정형 교수가 '문화선교연구원'에 기고한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원문보기 http://www.cricum.org/1391?category=643369) [본문으로]
  2. 2. 예수님을 사랑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평화의 나라를 소망하고, 교회의 미래를 고민하며,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신학자. 우주의 종말에 관한 신학과 과학의 대화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 작성, <분단 한국을 위한 평화의 신학>의 저자,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조교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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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스킨십, 소통, 그리스도



김영웅 박사[각주:1] 



사랑하는 아내와 키스를 하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아들의 방으로 향한다.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천사 같은 아들을 꼬옥 안아주며 볼에 뽀뽀를 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스킨십을 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임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 그렇다. 우린 인간이다. 몸을 가진 인간이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린 자칫 인간의 육신을 생각할 때면 제한받고 통제받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를 제한과 통제보다는 오히려 자유함에서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있고, 그 만짐으로 인해 사랑을 느끼고 비로소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육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이는 곧 자유함이기 때문이다. 창조된 우리의 육체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어쩌면 천사가 흠모하는 인간의 본질은, 그들은 가지지 못했으나 인간만이 가질 수 있었던, 바로 우리 육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자로서 나는 생명체를 연구하며 그 신비함에 깊이 경탄할 때가 많다. 특히,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정교하고도 완벽하게 디자인된 생명체의 신비를 하나님의 창조라고 믿는 내가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창조자 앞에서 전적으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생명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비밀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러한 신비가 가능한지 그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과학자로서 일상의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연구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새로운 비밀을 많이 밝히고 안다 하더라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오히려 더 알고 싶고 또 알고 싶을 뿐이다. 무한한 생명의 비밀 앞에서 과학자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칼 세이건의 제안에 따라 보이저 1호가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포착한, 희미한 푸른 점(Pale Blue Dot)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생명의말씀사, 2016)


폴 브랜드를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정형외과 의사였을 뿐 아니라, 선교사적인 사명을 자신의 소명이라 여기고 한 평생을 보낸 평신도 선교사였다. 그런데 그의 선교지는 어떤 특정한 지역이기보다는 한센병과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


문둥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은 자멸하는 병이다. 사지가 서서히 절단되고 코가 문드러지는 육신의 처참함을 동반하는 병이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한센병은 주로 신경 세포를 공격하여 감각을 차단시켜 버린다. 이것은 어느 날 손가락 하나가 잘려도, 그들의 비극은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이기보다는 그 아픔을 전혀 못 느낀다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폴 브랜드는 어느 날 그의 한센병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한센병의 무서운 결과는 환자들이 고통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이후 그는 한센병이 조직의 부패 없이도, 통증의 감각을 상실시킨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외과의사로서 한센병 환자들의 외과적 수술과 재활에 현격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로 그 분야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재활 공동체를 운영하며 평생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하는 사랑을 실천한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어느 날 필립 얀시가 아내의 벽장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한 편의 에세이를 읽고 난 후,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그 에세이의 저자였던 폴 브랜드를 직접 찾아가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느덧 기독교 작가로서 탄탄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필립 얀시이지만, 폴 브랜드를 만날 때만 해도 그는 이십 대의 젊은 저널리스트였다. 폴 브랜드와의 만남은 필립 얀시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폴 브랜드가 죽고 나서 그는 회고한다. 폴 브랜드를 통해서 이론으로만 들었던 기독교적 삶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확신뿐 아니라, 겸손함을 잃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면서도 얼마든지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는 그런 확신이 미약해질 때면 항상 폴 브랜드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린다고도 고백한다. 폴 브랜드는 필립 얀시에게 있어서 실로 거인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서 출발하여 (1부), 이 책은, 골격을 유지해 주는 힘이 되는 '뼈' (2부), 다른 생명과 소통하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 (3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들의 몸을 움직이는 신비한 메커니즘인 '동작'에 이르기까지 (4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들의 몸을 비유로 하여 실로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메시지를 담담히 선포한다. 바울 역시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인간의 몸과 각 기관을 비유했음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바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하나의 지체인 것이다. 폴 브랜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의 세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 우리들 각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라는 것이다.


세포가 가장 세포다울 때는 하나의 세포가 주위의 세포와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이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충성하여 전체 몸이 정상적인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때다(이것이 책의 목차가 1부 ‘세포’에서 시작하여 4부 ‘동작’으로 마치는 의미이다). 세포다움은 세포의 dependence에 있기보단 inter-dependence에 있는 것이다. 작은 하나의 완벽함보다는 연약한 하나일지라도 조화롭게 모여 큰 하나를 이루는 것에 바로 세포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의 본질이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에 비유한다면,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 우리들이 자본주의적이고 성공지향적이며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에 묶인 채 개인의 번영과 안녕에만,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유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세포들이 모여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될는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포 중에서도 어떤 세포는 자신의 생명에만 연연하여 주위의 세포들과 전혀 소통하지도 않고, 자신이 전체 몸의 일부인 것을 망각한 채 몸에 충성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독립적으로 사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세포를 우린 암세포라고 부른다. 암세포는 자기중심의 원죄를 짊어진 인간의 이기적인 본질과도 너무나 닮았다.



필립 얀시를 통하여 폴 브랜드는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이지만, 똑같은 기능을 가진 클론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세포로 분화되어 있으면서도, 그래서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러므로 서로 연합하고 봉사하고 헌신하여 건강한 공동체 (교회)를 이루는 임무를 맡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을 둘러보면, 교회만큼 상이한 사람들이 모인 기관도 없다. 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치체계나 기준으로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의 집합으로 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머리로 삼고 있는 존재라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연합함의 비밀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가 연합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유사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성에서부터 시작된다.


연합의 근거와 시작이 되어주는 다양성은 또한 우리들이 새로운 장소에서 낯선 만남을 가질 때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람이라면, 함께 한 몸을 이루는 세포요, 서로 공동체를 이뤄야 하는 존재임을 간파하며 결속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이유가 된다. 처음 보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포이기에 금세 한 가족이 될 수 있다. 서로가 다른 기관을 이루는 세포이지만, 그래서 피부색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루는 일부인 것처럼,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부다. 우리는 형제, 자매요, 가족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게 남겨진 사명이요,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다운 만족함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의 환희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랑이다.



책을 덮고 글을 쓰니 어두워졌다. 나는 곧 잠자리에 들어가 잠을 청할 테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다시 사랑스러운 아내의 키스와 사랑하는 아들의 포옹으로 내일을 시작할 테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건강한 세포가 우리 몸을 이루고 있으며, 골격을 유지해 주는 튼튼한 뼈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는 피부가 내게 있음은, 그저 나 자신의 건강이나 내가 속한 가족 안에서의 소통만을 위한 것이 더 이상 아님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야만 하고 충성해야만 하며, 나와 가족을 넘어선 모든 하나님 백성들과의 연합을 생각해야 한다고 나의 온몸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하나의 몸을 생각해야 한다. 좀 더 머리로부터 오는 시그널에 민감해져야 하고, 그 시그널에 우선순위를 두고 삶의 패턴과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지경이 더 넓혀질 시간표다.



  1.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미국 City of Hope에서 Staff Scientist로 일하고, 과신대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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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나는 뇌가 아니다


김남호 박사

(울산대학교 철학과 / 과신대 연구이사 / 철학자가 된 셜록 홈즈』의 저자)


 


 

마흔도 채 되지 않는 독일 본 대학의 젊은 철학교수 마쿠스 가브리엘의 신작 <나는 뇌가 아니다>를 읽고 있다. 내가 본 대학 박사과정에 있을 때 가브리엘 교수를 학술회장에서 보곤 했다. 늘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는 학술회장에서 그는 영감어린 물음들을 던지곤 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학술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인정 받은 보기 드문 철학자로 주목 받고 있다. 학술적으로 그가 앞으로 어떤 업적을 남길지 나도 궁금하다. 책을 읽고 있자니 그 특유의 속사포같은 말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뇌가 아니다>는 가브리엘 교수의 심리철학 입문서이다. 그러나 입문서라기 보다는 '나는 나의 뇌이다'라고 주장하는 신경중심주의 혹은 환원주의를 맹공격하고 정신의 실재성을 옹호하려는 철학 변론서에 가깝다. 그는 신경과학이 머지않아 인간의 정신을 물질로 모조리 설명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선동이 아닌 논증으로 보여준다. 특히 신경중심주의, 자연주의, 환원주의의 특성과 출현을 철학사적으로 파헤치는 가브리엘의 날카로움은 그의 높은 철학적 역량을 그대로 보여준다.



철학 입문서나 철학 입문 강의는 학계에서 학술적인 검증을 받은 전문 학자가 맡아야 한다. 그 이유는 적어도 (1) '철학적 기본기' (2) '깊이' 때문이다. 모든 운동,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철학에도 기본기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많은 개념들, 입장들이 있다. 심지어 개념 하나하나에도 개념의 역사, 즉 개념사가 있다. 이 개념사를 잘 알아야 한 개념을 잘 구사할 수 있게 된다. '깊이'는 철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입장들에 대한 올바르고 섬세한 이해를 뜻한다. 비전문가 중에 특정 철학자의 해석을 통해서 곧바로 철학에 입문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해석 이전에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영역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독일 대학에서 학부 1, 2학년 정도에서는 철학 기본기가 중요하지 않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것이 강조된다. 그 이외에 (3) '자신만의 입장 혹은 시각'이 추가될 수 있다. 철학 입문서에 굳이 (3)이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변론서 성격이 강한 입문서(가령, 러셀의 철학입문서의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물론 (3)(1)(2)를 탄탄하게 갖춰야만 도달할 수 있다.


가브리엘 교수의 <나는 뇌가 아니다>는 이 세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그는 화려한 글발로 대중을 선동하는 그런 대중 저술가가 아니다. 2천년 철학의 역사를 궤뚫는 통찰, 개념 하나하나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이해, 설득력 높은 근거제시, 논리력 등을 기본적으로 갖춘 상태에서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는 보기 드문 학자이다. (이런 점은 까다로운 개념들을 먼저 규정하거나 학술서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 철학자들의 아이디어를 적시적소에 비판적으로 끌어들이는 솜씨 등을 통해 드러난다)



한국 사회에 철학은 아직 낯설다. 그러나 그만큼 철학이 필요한 사회이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과학만 발전하면 철학자들이 묻는 물음에 답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착각이다. 가령, 생물학자들이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에 대해 알아낸 사실들을 병렬적으로 늘어 놓는다고 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 놓을 수 없다. 이는 마치 사건들을 늘어 놓는다고 해서 그로부터 역사관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간의 뇌에 대해 지금까지 알아냈고, 앞으로 알아낼 모든 확인된 사실들을 단지 늘어 놓는다고 해서 곧 우리 존재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제공해주는 실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들을 너머서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형이상학, 논리학 등과 같은 철학 분과의 도움이 필요하다. 칸트, 니체, 하이데거와 같은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자들이 활동했음에도, 위의 사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지금까지 크게 변함이 없다는 점을 20세기 심리철학의 발전이 잘 보여주고 있다.


거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정신이 물질로 모조리 설명된다는 환원주의를 거부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당신의 뇌가 아니며, 서로 교제 나누는 대상은, 구원 받는 대상은 뇌가 아니며, 예수가 살려낸 대상은 나사로이지 나사로의 뇌가 아니며, 예수를 배반한 대상은 가롯 유다이지 그의 뇌가 아니다. 그러나 이 상식적인 믿음에 객관적인 근거가 요구된다. 바로 철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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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인스턴트 유감?


권영준 교수

(연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 과신대 자문위원)




한 학기 수업을 하다보면 여러 번의 마무리가 필요하다. 우선 정규 강의를 모두 마치는 종강 시간이 있다. 그렇지만 종강이 끝은 아니다. 기말고사의 출제와 채점, 그리고 평가가 남아 있다. 그 다음엔 성적 평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는 과정이 있다. 물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수들은 성적 합산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 외에는 절대로 평가 결과에 대한 변경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끝은 아니다. 학생들이 작성한 강의평가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 수업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다. 


대학에 임용되어 20년이 훌쩍 지나간 지금도 매 학기 강의평가 내용을 확인하는 시간은 늘 설레고 즐거운 경험이다. 특히 서술식 평가문항들은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느낌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큰 도움이 된다. 그중에도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표현들은 진하게 기억에 남는다. 몇 년 전 잠시 맡았던, 이공계 학생을 제외한 전교생 대상 어느 교양과목의 평가문 중 “현대물리학의 기적적이고 감동적인 narrative를 살릴 수 있는 강의는 무엇일지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라는 내용은 분명 내 강의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니 내가 좀 더 노력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적적이고 감동적인 narrative’에 대해 공감해 주는 수강생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따뜻해 진다. 지난 학기에 나온 “한 학기 수업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라는 평가문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같다. 


나는 이력서에 취미를 적어야 하는 경우 ‘합창’이라고 적곤 한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 성가대원으로 참여하였고 미국에 거주하던 시절 학교 및 마을 합창단에 참여하다 보니 여러 좋은 지휘자님들을 통해 음악에 대해서, 합창에 대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중 어느 지휘자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음악의 조건은 지금도 무척 공감이 된다. 답을 직설적으로 주는 음악이 아니고 한 곡 전체를 통해 연주자와 청중이 함께 답을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업에서도 조금 긴 호흡으로 함께 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길 원하고 그렇게 되도록 준비한다. 


강의평가 내용 중 특별히 나를 당혹케 하는 평가문은 ‘강의의 요점을 좀 더 명확히 정리해 주면 좋겠다’라는 내용의 평가들이다. 이 평가를 작성한 학생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면 그 친구를 만나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이 평가문의 의도는 무엇일까? 내가 긴 호흡으로 전달하려 한 그 결론의 제시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긴 호흡을 떠받치는 논리의 전개가 취약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 나의 동료 교수 중 한분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분은 의외의 답을 주셨다. '아마도 고교시절까지 입시위주의 교육을 받다 보니 (시험에 나올만한 문제들의) 정답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제시해 주어야 만족스런 평가가 나올 것이라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효율성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입시 준비를 위한 교육에서는 긴 호흡의 이야기 전개를 함께 즐길만한 여유는 없다. 그저 가능한 짧은 시간에 가능한 많은 문제의 정답을 맞출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주기만을 바란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결혼생활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자녀가 없다. 그래서 우리 나라 중고생들이 어떤 종류의 교육과 평가를 받는 지에 관해 사실 아는 것이 거의 없기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늘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교사가 모든 것을 소화하기 좋게 다듬고 정리해서 제공해 주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게다가 효율성의 논리 아래 책에 있는 ‘정답’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하는 그런 인스턴트식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 과신대의 어느 모임에서 인스턴트 음식과 어머니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마련하신 음식과의 차이를 비유로 들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공부도 이와같은 것이 아닐까. 아주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한가지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공부하고 마침내 지금까지 아무도 찾지 못한 새로운 진리의 한 부분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중한 배움이고 깨달음이 될 것이다.  



어느새 올해도 10월이 되었다. 언제나처럼 10월초에는 각종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표된다. 수상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본인이 흥미를 느끼는 한가지 주제에 깊이 들어가 연구하다보니 나온 중요한 업적으로 인정받는 결과물들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벨상 소개 기사 옆에는 ‘우리 나라에서는 왜 아직도 과학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가’하는 기사들이 따라 나오곤 한다. 글쎄다. 효율과 경쟁의 깃발 아래 인스턴트식 맞춤형 공부, 맞춤형 연구의 틀을 벗어나 연구자 개개인의 학문적 관심과 흥미에 따라 깊이있는 긴 호흡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이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분위기가 무엇보다 우선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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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7 /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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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어거스틴을 쫓아내는 교회 : 과학


김기현 목사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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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지금으로 치자면 만물박사요 전방위적 지식인이다. 그의 주저인 신의 도성은 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종교와 문화, 정치와 경제 영역을 두루 아우른다. 당대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한 그의 탐욕스러운 지적 열정과 애정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그런 그에게 과학이라고 빠질 수 없다. 그는 과학에 관해서도 전문가이었다. 그는 그 이후로 기독교가 자연과학을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정표를 세웠다.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기독교 대신 마니교에 흠뻑 빠졌다가 더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성경에는 자연과학에 관한 말이 없었지만, 마니교는 점성술과도 관련이 있어서 요즘의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꽤나 차지했다. 그것이 어거스틴을 마니교로 이끌게 되었다. 실제로 어거스틴은 자연에 관한 앎의 일부가 그들을 통해 습득하였음을 인정할 정도다.


과학적이라고 추종했는데 마니교를 떠난 것은 한편으로는 종교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학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것부터 설명하자면, 그들이 가르치는 자연에 대한 가르침이 실제의 자연 현상과 달랐다. 동지와 하지, 춘하춘분에 관한 교설, 일식과 월식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자의 것을 본다면, 종교가 과학과 자연에 관한 생각이 틀릴 수 있고, 그것이 종교 본래의 진리와 무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무지이고 모독일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종교가 자신을 오류 없는 체계로 합리화하는 것은 위선이다. 종교의 본질과도 상관없는 것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과시하고픈 허세이다. 신앙은 본디 궁극과 절대에 관한 것인데, 궁극도 절대도 아닌 것을 절대적인 것인 양 가르치니 신앙의 전도요 우상숭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과학적 관심만이 아니라 악과 고통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의 영원한 대립과 갈등, 투쟁이라는 마니교의 원리를 따르면, 일월성신은 마구 부딪치며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워야 한다. 허나, 어거스틴이 바라본 별들은 조화와 질서를 따라 운행되고 있다. 그들의 종교 교리가 실재와 부합하지 않은 것이다. 해서, 어거스틴은 대놓고 요구한다. 실재와 부합하든지, 사실에 걸맞게 잘 설명을 하든지.





그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으로 비과학적인 교설을 떠들어대는 자들을 공박한다. 그의 신앙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지구를 비롯한 하늘과 별, 우주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성경을 해석한다면서도 비과학적인 주장을 펼친다면, 그것을 이교도가 알게 된다면 수치스럽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서의 권위를 손상시킨다. 비과학적 주장을 성경의 이름으로, 성경을 근거 삼아 외치는데, 과학자의 눈에 비친 성경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옛날이야기로 간주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독교 고유의 진리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게 한다. 어거스틴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이다. 말도 안 되는 반과학을 진리로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이교도이자 과학자들이 복음 중의 복음인 부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겠는가. 목욕물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린다는 말이 딱 이 경우이리라. 어거스틴의 말 이면에는 왜 그런 바보짓을 하느냐는 슬픔과 분노가 엿보인다.


나는 20년 전, 복음과 상황에서 진화 논쟁을 기억한다. 그 당시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장대익의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면 무엇이 과학이란 말입니까?’라는 글은 어거스틴의 그 감정과 결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비과학을 과학으로 우기는 신앙인들, 비전문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의 주장을 틀렸다고 용감하게 말하는 공학자들, 나이와 학력과 같은 비학문적 권위로 후배의 주장을 간단히 뭉개버리는 선배들 앞에서 장대익의 글은 논리정연한 반박과 함께 더는 대화와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슬픔과 분노가 엿보였다. 미루어 짐작건대, 그 사건 이후로 그는 기독교를 떠났다. 아니, 버렸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거다.


우종학 교수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생물학이나 물리학 등, 진화론과 직결된 분야를 전공하는 학부생들이나 연구자들 이야기를 본다. 그들은 신앙과 과학 사이에 갈등을 느끼지 못했는데, 창조과학으로 인해 혼란을 겪은 이들이 많다. 그러다가 우종학 교수와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그들과 달리, 다른 어느 곳에선가 이미 기독교에 체념하고 자신을 키운 신앙을 눈물을 머금고 떠난 이들이 많지 않을까? 기독교 안에 몸은 담고 있지만, 마음은 떠난 지성인들이 꽤 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결단할 시점이다. 그때는 마니교로 갔다가 기독교로 돌아왔는데, 지금은 기독교에서 무신론자가 되고 있다. 그때의 기독교가 될 것인가, 마니교가 될 것인가? 실재와 부합하고 현실에 걸맞은 설명 체계를 갖춘 합리적인 신앙이 될 건가, 실재와 동떨어진 종교적 독단에 빠질 것인가? 어거스틴과 같은 역할을 할 기독지성인들을 내쫓을 것인가, 미래의 어거스틴을 품는 교회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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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6 /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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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감정 배제하기?


박치욱 교수

(미국 퍼듀대학교 약학대학 /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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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감정이 개입된 판단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을 공부하든 신학을 공부하든 학자라면 당연히 이성적인 판단을 존중하고 감정의 영향을 배제해야 한다. 학문적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은 철저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만들어진 학문 결과는 우리의 감정과 무관한 것일까? 학자로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내린 연구의 결론이 근사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또 때론 왠지 궁색하거나 어색하기도 하다. 자신의 이론에 맞는 결과를 얻었을 때의 뿌듯함, 어긋나는 결과를 얻었을 때의 답답함, 이런 감정적인 반응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감정적인 반응이 절대 연구 결과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건 학자의 기본 소양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신학과 과학의 연구 결과를 접하는 대중은 어떨까? 그들이 학자들의 객관적인 연구 결과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으로 객관적인 연구 결과를 거부하는 경우도 본다. 주관적인 감정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도록 훈련받고, 객관적인 논리와 증거에 의해서만 결론을 내리려 노력하는 학자들에게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감정적인 반응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 아닐는지 싶기도 하다. 학자들도 자신의 연구 결과가 아름답다거나 궁색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일반인들이 그런 감정적인 반응이 없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관을 갖고 산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누구나 우선은 자신의 세계관에 맞는지 어긋나는지부터 살피게 된다.


세계관에 맞으면 통쾌하고 아름답고, 어긋나면 짜증나고 의심스럽다. 통괘하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마다 자신의 세계관은 반복해서 강화된다. 한 마디로 세상의 이치가 보이는 듯하다. 이런 자신의 세계관을 신념으로, 교리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원리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안타깝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이 그렇다. 사람이기에 그렇다.


신학과 과학을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것, 어쩌면 필연적으로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객관적인 결론에 대한 주관적 반응, 심지어는 자신의 세계관에 따른 취사선택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건조한 감정을 배제한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자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대중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천체의 움직임이 물리 법칙으로 다 설명되는 그 아름다움, 생명의 다양성이 진화로 다 설명되는 그 아름다움, 생명 현상이 분자들의 반응성으로 다 설명되는 그 아름다움. 어쩌면 이런 감정적인 요소까지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지식의 전달은 파편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예전에 들은 어느 환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환자는 사고로 감정 중추에 이상이 생겼다. 그런데 특이한 증상을 보인다.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도 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가짜라고 의심한다. 감정에 이상이 생겼는데, 어머니를 어머니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시각정보 청각정보는 어머니가 맞는데 어머니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신학과 과학의 지식이란 어쩌면 이 환자의 어머니와 같은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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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5 /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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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굳이, 어렵고 힘든


한은애
(
전문상담사과신대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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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고 작은 종류의외상 연구하고, 그것을 치료하고 싶은 상담사로서, 지난 년간 외상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받게 것에 상반된 감정들을 느꼈습니다. 관심 분야가 유명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많은 분들이 외상, 상처에 관심이 생기는 것을 긍정적으로만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명한 외상 연구가 주디스 허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심리적 외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세계 안에 놓인 인간의 취약성과 인간 본성 안에 놓인 악의 가능성을 직면하는 것이다.”


 
저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찬양하고, 그분이 삶을 인도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세계의 악함과 인간의 약함을 바라보면 힘이 듭니다. 우리가 고통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단순해 보이지 않고, 심지어 답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괴롭기까지 합니다. 당연히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고통을 느끼면, 고통을 유발한 폭력을 생각에서 몰아내고 싶어하고, 원인을 단순화시켜 통제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통제는 자칫 잘못하면 고통의 피해자인 자신을, 혹은 타인을 비난하게 됩니다. “내가 그때 자리에 가지 않았어야 했는데라는 자기 비난은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 사람이 입었던 옷과 애매한 행동이 문제라는 타인 비난은 피해자를 고립시킵니다. 마치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것을 없애기만 한다면 일이 이상 반복되지 않고, 안전한 천국으로 돌아갈 있을 것처럼요. 이렇게 폭력의 피해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지워지고, 피해자 연대와 연구자들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의심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끔찍한 사건들을 잊고 싶어 하지만 남영호 침몰사고, 대한항공기 피격사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대구시 지하철 방화 사건 충격적인 사건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발생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재난 사건에 대한 시각 자료들과 구체적인 내용이 불특정 다수에게 빠르게 확산 되는 시대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직접 외상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간접 외상을 통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이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동물임을 생각할 , 우리 사회 일부분에서 발생하는 재난과 폭력, 부패의 문제는 그대로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 만연해진 간접 외상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며 인상 깊었던 점이 있습니다. 부조리한 사건에 노출된 대중들의 정서에서분노라는 감정이 눈에 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사회적 재난으로 인한 간접 외상에서 나타나는 분노는, 단순한이기 보다는 도덕 감정에 가까웠습니다. 도덕 감정으로서의 화는 결과적으로 친사회적 행동과 이타적인 태도를 이끌어내고, 이러한 변화는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건, 사고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요구하는 , 그리고 재난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피해자들을 위한 치료와 연대에 힘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만큼 가치 있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바로 길이라 믿습니다.

 
과신대가 걸어온 또한 아마 쉽고 편한 길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보이는 대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성경과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방대한 가지 재료를 조화시켜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굳이 복잡한 길을 택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겠지요. 길을 걷는 이들은 작금의 현실에 분노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어렵고 힘든 길은 우리 자신과 다음 세대의 건강한 신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고민하고 변화를 위해 힘쓰는 것이 가끔은 지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욱 모이고 위로하며 자리를 지켜주시는 모든 과신대 동역자분들의 노고에 오늘도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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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4 / 20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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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칼럼

가르치는 자의 기쁨


강상훈
(
베일러대학 생물학과 교수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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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학기를 마무리하는 기말고사 기간의 캠퍼스는 묘한 긴장감과 강제로 공기가 순환되는 건물임에도 밤을 지새우는 학생들의 기운으로 왠지 눅눅한 기분이 들기 마련입니다. 매년 봄학기에 “Microbial Evolution"라는 제목으로 진행하는 학부 대상의 세미나 수업도 마지막 에세이를 읽는 것으로 학기를 마무리했습니다. 텍사스 침례회와 연계된 사립대학에 소속된 관계로, 미국의 일반 대학에서 기독교적인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에서 자유하고, 대신 학문의 영역에서의 진화와 그것을 비문명적으로 소비하는 창조론과 창조과학에 대해서 언급하고 비판적으로 논의할 있는 것이 수업의 기쁨 내지는 보람 중의 하나입니다. 10여명 남짓의 학교내 생물학, 물리학, 철학, 신학, 역사학 등을 전공하는 교수들과 함께하나님과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모임에서 유럽 출신의 식물학 교수가 창조과학의 문제가 예민한 현상을 낯설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상이 가장 공고한 미국과 한국에서 연관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는 관계로, 젊은 청년들과 이런 기회를 가지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단순히 진화과학의 입장에서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방향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제까지의 가정과 교회에서 가져왔던 진화과학에 대한 근원적인 거부감 내지는 의도적인 무관심에 대해서 얘기하고, 과학과 하나님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미나 수업인만큼, 매년 논의의 방향과 정도는 흥미롭게 다양합니다.
 
가령 이번 학기에는, 그래왔던 처럼 켈러 목사의 BioLogos 기고문인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 읽고 진행한 번째 시간은 난데없이 상당히 개인적인 차원의 고백들이 나와서 토론을 진행하면서 수위를 어떻게 조절해야 것인가를 조금 걱정하기도 했었습니다. 와중에 올해 수강하는 학생들은 아주 보수적인 개신교 배경, 카톨릭, 불가지론자, 무신론자, 무슬림까지 다양한 믿음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모두 차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조심하면서 때로는 조금 아슬아슬하게 학기를 보냈습니다. 덕분인지 이번 학기의 수업은 어느 해보다 활발하고 실제 논문에서 읽는 연구의 내용과 함의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논의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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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에 가을학기에는 1학년 1학기에 필수로 듣는 기초생물학을 가르칩니다. 세미나 수업과는 달리 100여명의 학생들이 대부분 의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신청하는데, 사용하는 교재가 서문에서 강조하고, 특별한 수업의 시간에 생물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본 얼개로서의 진화론에 대한 논의로 학기를 시작합니다. 며칠 이내에 매번 최소 정도 부모나 손윗형제의 항의성, 내지는 우려성 이메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정도는 연구실을 찾아와서 얘기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걱정은, 90명이 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다수의 학생들입니다. 수업 시수가 많지 않기에 4년을 지나면서 수업을 통해서 여러번 만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지만, 4학년 전공 과목과 세미나 수업 등을 통해서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을 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4학년 2학기에 1학점을 조금은 수월하게 채우기 위해서 세미나 수업을 듣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시험이 없고, 열심히 논문과 에세이 읽고 토론에 참여하고 가지 짧은 글만 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주를 마치고, 그리고 마지막에 수업이 가져다준예기치 못한 기쁨' 대해 얘기하곤 합니다. 성적을 결정하는 교수의 주관적인 판단이 많이 작용한다는 사실이 평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부분을 차지하겠지만, 그중에 그래도 작은 진심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대학이 직업 교육의 장이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와 설립이념을 막론한 전지구적 현상이지만, 세미나 수업은 어떤 면에서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자에게 기쁨을 주곤 합니다. 과신대에 돕는 자로 이름만 걸어놓고는 실제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지만, 미국 텍사스의 시골에 있는 작은 학교에서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는 , 그래서 부르심에 이번 학기도, 다가올 학기들도 기대함으로 준비하고 섬기기로 합니다. 이번 학기를 마치면서 개인적으로 선생인 저에게 격려가 되었던 학생의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In reflection, I believe this class has both strengthened my faith and my passion for the field of bi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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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13 / 2018.06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