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Q] 3. 창세기는 왜 쓰였을까요?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흔히 사람들은 창세기를 세계가 창조된 과정을 알려주는 책으로 오해합니다. 책의 이름도 한글로는 창세기이고 영어로는 ‘Genesis’이니, 이 책은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그 기원을 알려주면서 1, 2장을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닙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비그리스도인들도 창세기를 우주의 기원, 지구의 기원, 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책으로 오해합니다. 이 세상이 어떤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어떤 순서로, 그리고 얼마나 긴 기간 동안 만들어졌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자연사의 연대기나 우주의 형성과정, 혹은 지구의 나이나 생명체들의 창조과정을 설명하는 과학책도 아니고 자연사에 관한 과학적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창세기는 모세의 리더십 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를 출애굽 시킨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진 책입니다. (우리를 인도한 신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유대 땅으로 되돌아온 제2성전기에도 동일하게 던져집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는 창조물에 관한 책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에 관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궁창 안에 있었고 그 위에는 물층이 있었으며, 빛을 내지도 않는 달을 광명체로 기술하고, 태양이 넷째 날에 창조되기 전에 이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3일의 시간이 흘렀다고 표현되어 있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은 현대과학과 모순되는 부분이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창세기가 현대인에게 주어진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우리를 위한(for us) 책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not to us) 책이 아니라는 점은 성경을 바르게 읽는 첫 번째 중요한 기준입니다.

 

창세기 1, 2장은 고대 히브리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책이며 그가 모든 것을 만든 창조주임을 전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시대의 상식과 우주관을 반영하여 창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존 칼빈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세기는 그 당대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accommodate)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 1, 2장이 세계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님을 배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 2장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 답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이해하게 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깨닫습니다.

 

긴 세월동안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고대근동의 신화들에 익숙했습니다. 그 신화들에 따르면 태양과 달을 비롯한 자연은 신적 존재들입니다. 태양신이나 바다의 신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그 신들은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를 보면 신들의 세계에서 반란을 일으킨 마르둑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신들을 부역에서 해방하고 자유와 안식을 보장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는 신 중 하나였으며, 인간 위에 군림해서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그의 권력은 고대의 신화들에 의해 정당화되고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10가지 재앙을 통해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신적 존재로 여겼던 자연이 모세에게 부여된 힘에 의해 장난감처럼 이용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신으로 여겼던 자연을 통제하는 모세, 그리고 그 모세를 지도자로 보낸 여호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질문은 포로시대 이후에도 계속되며, 오늘날 우리가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장자, 즉 신의 아들이 죽임을 당한 날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도대체 우리를 인도하는 신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가지고 말입니다. 모세를 통해, 아마도 그 당시에는 구전으로 주어진, 창세기 1, 2장은 고대근동 신화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내용을 전해줍니다. 똑같은 질문이 포로시대 이후에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던져집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 앞에 모세의 전승이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문자화된 기록이 탄생합니다.

 

그 기록은 신이라 여겼던 태양과 달과 바다와 그 모든 자연의 대상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 창세기 1장은 심지어 태양과 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그 대신에 두 개의 광명체라고 표현합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창조물처럼 넷째 날이나 되어서야 창조된 것으로 기록됩니다. 신으로 여겼던 그 모든 자연은 피조물의 지위로 격하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인간을 마치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은 생물학적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고, 기적적으로 창조했다는 식으로 창조의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의미는 인간을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존재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언약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격적 존재로, 즉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로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27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 바로 다음 절인 28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혹은 대리해서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다스리라는 임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문화명령입니다. 고대근동에서 신적 존재로 여겼던 자연, 즉 태양과 달과 바다와 그 모든 대상들이 사실은 신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통치 아래 놓여있으며, 인간의 도움을 통해 보존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창세기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포함한 고대근동신화들은 자연이 곧 신들이고 인간은 그 신들의 노예로 기술하고 있다면, 창세기는 그와 대조적으로 자연은 피조물에 불과하고 인간은 신적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자연은 오히려 인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선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관계, 혹은 그 위상을 알려주는 것이 창세기 1, 2장의 목적입니다. 거기에는 이집트나 바벨로니아의 세계관, 즉 자연이 신이고 인간은 노예라는 그 지배적인 사고 아래 착취당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신과 같은 존재이며 오히려 자연을 다스리고 보존해야 한다는 놀라운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인도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주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 2장의 목적입니다.



창세기는 어떤 인과관계나 과정, 순서를 거쳐서 우주가 창조되었는지 설명해주는 책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우주나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닙니다. 창세기 저자는 그런 내용에 거의 무관심합니다. 과학적 질문을 다루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설명을 간절히 원할지는 모르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이 창세기를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포로시대 이후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알려주려는 내용이 아닙니다.

 

어떤 책을 읽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글로 기록된 모든 문서는 어떤 목적으로 쓰였는지,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주목해서 읽어야 합니다. 창세기도 그렇습니다. 창세기가 우리에게 주어진(to us) 책이라는 오해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for us) 것은 분명하지만 창세기는 1차적으로 출애굽을 거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에게 창세기가 계시되었을 때 과연 어떤 목적으로 쓰였는지 그리고 그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이지 주목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창조주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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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2. 과학자가 부활을 믿을 수 있나요?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과학자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데 부활을 믿는다면 과학자로서 지적성실성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럴까요? 과학자가 부활을 믿으면 안 된다는 태도 자체가 어찌 보면 상당히 종교적인 듯합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창조를 믿는 신앙, 그리고 예수의 성육신을 믿는 신앙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구성합니다. 물론 부활에 관해서 다양한 형태의 믿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니 복음서는 소설이다, 예수는 사실 죽은 게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다, 예수의 부활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제자 공동체가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등등 말입니다.

 

분명한 점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진술이 모든 세부사항에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세부적인 불일치의 경향은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빈 무덤과 그 공동체의 경험과 진술, 그리고 순교로 이어지는 부활의 믿음에 대한 헌신은 부활의 역사성을 매우 강하게 제시합니다.

 

이 글에서 부활의 증거를 제시하거나 과학적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논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으로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걸까요?



부활이 가능한지 과학으로 밝힐 수 없다는 점은 아마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물론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단한 사람이 깨어나서 의사들을 당황케 하는 일이 어쩌다 일어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건 일상적인 경험이고 과학적 결론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생물이 됩니다.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이 과학의 시각입니다. 생물은 무생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생물학의 결론입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던 전근대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발생성을 믿었습니다. 가령, 창문을 꼭꼭 닫아 둔 집안에서 초파리가 생기는 걸 보면 초파리는 자연적으로 생겨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바로,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연한다는 자연발생설입니다. 하지만 생명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연발생설은 폐기되었습니다. 초파리는 마구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생명체인 초파리가 알을 낳아야 그 알에서부터 초파리들이 생겨납니다. 돌들이 갑자기 생명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무생물에서부터 생명체가 만들어 질 수는 없다는 현대 생명과학의 결론은 자연발생성을 폐기시켰습니다.

 

그런데 같은 잣대를 지구 최초의 생명체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과연, 지구에서 첫 생명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지구 최초의 생명체는 자연발생설을 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46억 년 전 지구가 생성될 때는 생명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 억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생명체가 지구에 등장하고 그 이후 생명체들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그 시점은 대략 38억 년 즈음입니다. 무생물의 시대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한 이 과정을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오래 전 과거의 지구의 자연환경과 조건은 지금과는 매우 다르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점은 무생물의 시대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즉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현했다고 과학자들이 믿는다는 점입니다.


제가 왜 믿는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것은 최초의 생명체가 어떻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지 과학으로 엄밀히 밝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과서에도 언급되는 밀러의 실험으로 밝힌 내용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무생물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되려면 빅뱅이 서너 번은 일어나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생명과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생명체는 지구에서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계에서 유입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자연발생으로 생명체의 출현을 설명하기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외계유입설을 주장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구 밖 어느 우주, 어느 행성에서 생명체가 출현했다고 해도 그 생명체는 자연발생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생명체는 어떻게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했는지 여전히 과학으로 밝혀야 합니다. 외계유입설은 생명의 출현에 대해 밝혀야 할 숙제를 지구 밖으로 떠넘긴 셈입니다.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발생한 과정을 과학으로 밝힐 수 없으니 창조주가 기적적으로 만든 것이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견해는 간격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허망한 주장이 되기 쉽습니다. 저는 다만, 과학자들이 무생물에서 생명이 탄생했다고 믿는다는 점, 그리고 생명의 출현 과정을 과학으로 잘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역사에서 무생물과 생물의 시대를 나누고, 그 사이에 생명이 출현했다고 받아들인다는 점을 지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과학은 자연발생설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지구에서 첫 생명체가 탄생한 과정은 현대과학의 자연발생설과 배치된다는 점을 짚어내는 것입니다.

 


부활은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개념과 비슷합니다. 도대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는가를 묻는 우리는 동일하게, 도대체 어떻게 무생물 시대에 생물이 출현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최초의 생명체가 무생물에서 탄생했다고 과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부활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믿음 모두,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지만, 그리고 생명은 자연발생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결론에 위배되는 듯하지만, 여전히 과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 누구도 수십억 년 전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한 과정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그 전후의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서 무생물에서 생명이 생겨났다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전과 부활 이후의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부활은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과학으로 입증된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과학으로 입증되면 지식이 되어버리고 지식은 그저 이해하고 동의하면 됩니다. 우리는 과학으로 증명되어야만 진리라는 계몽주의의 산물인 증거주의에 깊이 매몰되어 있습니다.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건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많은 경험적 증거를 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거나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내의 사랑을 믿습니다. 사랑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건, 무생물이 된 죽은 몸이 다시 생명체가 될 수 있는가를 과학적으로 논쟁하고 탐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육신한 예수와 그의 대속과 부활을 믿는 건 바로 사랑때문입니다.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통치를 회복시키는 그 원대한 구속의 계획에 감격하고 거기에 참여하고 그 일부가 되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단지 과학적 혹은 철학적 논쟁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내어 걸고 예수가 걸어간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헌신과 희생을 끌어냅니다. 예수의 도, 그 고난과 희생의 길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 앞으로 매월 우종학 교수님께서 과학과 신학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골라서 [과신Q]라는 제목으로 연재해 주십니다. 교회에서 혹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과신Q]를 주목해 주세요. 시원하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창조기사처럼 부활도 비유로 읽어야 하나요?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창세기 1장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 중에는 창조기사를 과학 교과서처럼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창세기의 1차 독자였던 고대 근동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상식과 세계관에 맞게 기술된 것으로 읽으라는 칼빈의 견해가 건강합니다. 가령, 궁창 위에 물을 두었다는 표현은 하늘 위에 물층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당대의 상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성경은 대기권 어딘가에 물층이 있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건 바람직한 성경읽기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도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비유로 읽어야 되지 않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창조와 부활이라는 두 사건을 기술한 각각의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먼저 기억할 점은 창조기사의 다양한 표현들을 고대 근동의 상식이 반영된 것으로 읽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만물을 하나하나 창조했다는 가르침이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창조기사는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수준에 맞게 쓰였으니 그에 맞게 읽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창조기사와 부활에 대한 기록의 차이점을 살펴보며 이 질문에 답해볼까 합니다.


첫째, 목격자의 유무입니다. 부활 사건은, 여성들과 12제자를 비롯한 목격자들이 있고 그들의 경험이 복음서에 담겨있습니다. 반면 창조 사건은 목격자가 없습니다. 신이 창조하는 과정을 지켜본 누군가가 창세기 1장을 기록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영감을 통해 창세기의 저자가 기록했겠지만, 그 기록과 복음서가 같은 방식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둘째, 주인공의 차이점입니다. 창조 사건의 주체는 초월적 하나님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창조주와 시공간 안에 창조되는 창조물은 분명 대비됩니다. 창조의 과정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시공간과 만물을 창조하는 신의 행위는 말 그대로 인간의 인지 범위를 넘어서는 초월적 사건입니다.

반면, 부활 사건의 주체는 동일한 하나님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입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그분은 인간의 경험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부활 사건은 창조 사건처럼 초월적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인간이 보고 듣고 목격할 수 있는 경험적 시공간에서 발생했습니다.


셋째, 궁창과 같은 예로 대표되는 창조기사의 구체적 진술들은 고대 근동의 상식에 따라 기술되었지만, 부활사건은 신약시대의 상식에 어긋나게 기술되었다는 점입니다. 고대 근동인들은 신들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개념에 익숙했고 편평한 땅, 궁창, 그 위의 물층과 같은 세계의 구조에 대한 상식도 갖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을 읽는다면 그들은 흔히 알던 고대 근동의 신화들과 비슷하게 창세기는 여호와라는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전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당대의 상식을 넘어섭니다. 21세기의 우리처럼 신약시대의 그들에게도 죽은 사람의 부활은 상식에 위배됩니다. 부활 사건을 읽는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을 기록한 것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었기에 제사장들은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 갔다고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오늘날 우리가 배운 지구나 우주의 모습과는 다르게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차용해서 창조기사를 기술하고 있지만, 복음서는 신약시대 사람들이 부활을 상식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반영해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기사를 읽은 고대 근동인들은 뭔가 이상한 점도 발견했을 겁니다. 노예로 삼으려고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게 상식이었을 텐데, 창세기는 오히려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신과 같은 존재로 기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여호와라는 신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을 겁니다.


부활 사건의 기록에도 당대의 상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알려준 자가 천사였듯이, 예수의 무덤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맞이한 것도 천사로 기술됩니다. 천사에 대한 당대의 상식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은 당대의 상식에 어긋났지만 목격자들의 구체적인 진술은 그들의 상식과 세계관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서마다 세부적 차이가 나는 이유도 사건의 각기 다른 면들을 경험한 목격자들이 각자의 인지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식과 세계관을 반영한 언어로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메시지와 그 메시지가 담기는 그릇을 나누어 비교하면 좋습니다. 창조기사의 핵심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낸 그분이 누군지 묻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창조기사에 담겨있습니다. 그분은 자신들의 조상의 신일뿐만 아니라 바벨론이나 이집트의 신들과 다른 유일신이며 만물의 창조주였던 것입니다. 창조기사의 역사성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성은 고대 근동의 상식이라는 그릇에 담깁니다. 인간의 노동 주간에 비유하여 완전수인 7일의 구조로 창조의 주간이 유비됩니다. 고대 근동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땅과 궁창과 같은 세계의 구조가 하나하나 설명됩니다. 이런 구체적 내용은 역사성을 담기 위한 그릇에 해당됩니다. 궁창 위의 물층과 같은 표현에 역사성을 기대어서는 안됩니다.


반면, 부활사건의 핵심은 예수가 신이었다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은 부활을 통해 절정에 이릅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부활 사건의 역사성은 부활 자체에 있습니다. 당대의 상식과 달리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가 자신이 신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구체적 사건이었습니다.



창조기사에 관해서는 배꼽 탄생 비유가 도움이 됩니다. 친엄마가 맞는지 묻는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엄마는 내가 너를 배꼽에서 낳았다고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엄마가 이 아이를 낳았다는 역사성은 배꼽 탄생을 사실이 아니라 비유로 여긴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엄마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며 배꼽 탄생을 계속 주장하거나 반대로 배꼽에서 아이가 탄생할 수 없으니 엄마의 진술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일뿐입니다.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을지는 이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입니다. 어떻게 부활했는지, 누가 돌을 옮겼는지, 천사가 증언을 했는지, 부활한 몸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생화학적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한 기술과 표현들은 이 메시지를 담기 위한 그릇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기사의 역사성과 신학적 메시지는 인정하되, 고대 근동의 상식이 담긴 구체적인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 사건의 경우도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신학적 메시지는 받아들이되 목격자들의 기록의 세부적 차이점은 그들의 이해와 인지와 당대의 상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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