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Q] 7. 인류원리: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무의미한가?

 

[과신Q] 7. 인류원리: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무의미한가?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얼마 전에 과학자들과 대담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우주와 생명, 그리고 지성의 기원을 논하는 자리였는데,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인류원리는 우주의 역사를 보면 마치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한 특별한 조건을 갖추도록 우주가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는 특성들을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강연을 듣던 대중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인류원리가 인류의 존재에 관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고, 반면 인류원리는 의미 없는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의 반응도 흥미롭습니다. 인류원리는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해석일 뿐만 아니라 일고의 가치가 없는 짜증 나는 주장이라는 약간 과격해 보이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이 인류원리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지적설계론자들의 주장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류원리를 지적설계자(intelligent designer, 신을 지칭합니다)가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탐지해 낸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지적설계론자들은 신의 창조활동을 과학으로 탐지 가능하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는 무리한 주장 때문에 신학적인 면과 과학적인 면, 둘 다 심각한 오류를 범합니다. 신의 창조 행위를 과학이 탐지하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오류가 첫 번째이고, 과학이 밝힌 인과적 관계는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과학을 변증에 사용하는 오류가 두 번째입니다. 이미 많은 비판이 있기 때문에 더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무신론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9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은 반대 방향에서 지적설계와 같은 오류를 범합니다. 신의 행위는 과학으로 탐구 가능한데 과학적 증거는 신을 명백히 보여주지 않으니, 신의 창조는 반증되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방식입니다. 결론은 반대지만 같은 오류입니다. 신의 창조 행위를 과학으로 탐지 가능하다는 전제부터 문제가 심각한 것이지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류원리는 과학이 아닙니다. 인류가 존재하기에 적합한 매우 특별한 조건을 우주가 갖추고 있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입니다. 우주 초기의 물리적 조건이 조금만 바뀌었더라면,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탄소나 산소 같은 원자들은 우주에 생성되지 않고 우주는 (우리가 아는 생화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보면)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로 그 역사가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특별해 보이는, 정교하게 조율된 듯한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과학을 넘어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과학이 발견한 사실들을 종합하고 이해하려는 지성적 작업의 결과가 인류원리입니다. 지적설계론자들과 다르게, 인류원리를 처음 제시한 그 어느 과학자도 인류원리를 과학이라고 부르거나 과학의 영역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존재할 특별한 조건을 우주가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은 과학적 결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이상학적 해석은 무의미할까요? 과학을 넘어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은 쓸데없는 일일까요? 형이상학은 그저 주관적이고 확실하지 않은 분야에 불과하니, 과학적 설명에만 만족하고 거기서 멈춰야 할까요?

 

물론 그렇게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흔히 과학 아래 다른 학문들을 통합시키려고 하는 용감한 주장이 그렇습니다. 글쎄요. 그런 방식의 통섭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이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제한되어 있고 과학적으로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들도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일인가? 불의 앞에서 희생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추구할 가치는 무엇인가? 이런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과학이 명료한 답을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그저 자연세계의 작동원리와 인과관계를 설명해 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과학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우주의 원리를 하나하나 파악해 가려는 지적 노력이지만 우주를 밝히는 일 그 자체가 우리가 과학을 하는 목적의 전부는 아닙니다. 과학은 인간이 하는 지적 노력이며 과학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과학이 밝힌 결과에 대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해석하는 일은 인류가 추구해야 할 당연한 지성적 작업입니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혹은 이번에 취업시험에 떨어졌다면 혹은 아이가 아프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가 매일 겪는 사건은 과학적 설명이 가능합니다. 사고가 났다면 과속이 원인이었는지 혹은 부주의가 원인이었는지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떨어졌다면 준비를 게을리했는지 혹은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묻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아프면 면역력이 약해진 건지 다른 원인이 있는지 당연히 묻고 파악하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우리 사고의 일차적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밝혀지고 과학적 설명이 제시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지적 작업이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발생한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게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삶을 돌아보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묻게 됩니다. 교통사고의 어떤 인과관계로 발생했겠만 우리는 그 사건의 의미를 묻습니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누가 아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이 그날 거기서 발생한 과학적 설명을 넘어서 우리는 이 사건이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묻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시공간의 인과관계에 따라 의미 없이 움직이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그 일이 발생한 과정을 과학이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일이 발생한 의미를 묻습니다.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일이 바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지성적 작업입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문학은 우주의 변화과정을 밝혀주고 우주론은 초기 우주의 물리적 조건을 알려줍니다. 과학으로 파악되는 그 우주에서 생명이 탄생했고 지성이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성은 수천 년의 지성사를 거치며 과학을 발전시켰고 우주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우리는 어떻게 우리 인류가 우주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과학은 우주가 인류를 출현시키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우주의 역사가 흘러왔다고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 과학적 설명을 넘어 그렇다면 이 우주에서 인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습니다. 그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과학이 발견한 내용의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일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지적 작업입니다.

 

종종 과학자들 중에는 과학을 모든 학문의 제왕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학이 보여준 눈부신 성공은 당연히 인정하고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더더욱 과학에 힘을 써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넘어서 과학이 제시하는 결과를 종합하고 이해하려는 작업은 훨씬 포괄적이고 형이상학적입니다. 오히려 과학적 설명을 넘어 그 내용이 우리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묻고 해석하는 지적 사유가 훨씬 더 중요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인류원리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과학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해석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보는 견해는 과학주의라고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과학의 결과들을 놓고 깊이 사유하며 이것이 인류에게 주는 의미들을 고찰해야 하고 어느 방향으로 우리의 역사를 밀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는 지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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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6. 지구 6천 년설을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과신Q] 6. 지구 6천 년설을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회 내에서 지구 6천 년설을 신봉하는 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분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과학을 수용하는 저를 신앙이 없고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합니다.

 

이런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진리라고 믿는 점은 동일하지만, 창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시간이나 방법, 그리고 과정에 대한 ‘창조의 그림’을 서로 다르게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함께 공존합니다. 어떤 태도가 지혜로울까요?

 

지구의 연대가 수십억 년이 되었다는 건 과학적으로 잘 알려진 상식입니다. 지구가 6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젊은지구론은 극단적 문자주의 입장을 제외하면 신학적으로도 비판받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에는 창조과학의 지구 6천 년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학교에서 지구 나이를 46억 년으로 배우는 청소년들이 교회에서 지구 나이를 6천 년으로 배우면 심각한 신앙적 갈등이 생깁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많은 분들이 염려합니다. 지구 6천 년설을 믿는 사람들이 문자주의와 창조과학에서 벗어나서 더 이상 잘못된 정보 때문에 기독교를 반과학적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화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젊은지구론을 믿지 않는 일이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1-3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그 당시 교회는 고기를 먹는 사람과 채소만 먹는 사람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채소만 먹는 사람들은 제사에 사용되었을지도 모르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상에게 드리는 제사에 사용된 음식은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제사에 사용된 음식이라고 해도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두 그룹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채소만 먹는 사람들을 업신여겼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로마서 14장은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의 권면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안 되는가의 문제에 관해서 바울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고기를 먹는 것이 잘못이라면 바울도 고기를 먹는 자들을 정죄했을 것입니다.

 

지구의 연대가 46억 년인가 아니면 6천 년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분명합니다. 지구 나이가 46억 년임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자연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잘 드러냅니다.

 

둘째,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점은 신학적으로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채소만 먹는 자들을 품어줍니다. 채소만 먹는 자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여전히 유대교 전통에 사로잡혀서 이방신들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는 일이 부정하다고 생각한 교인들을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로 여겼습니다.

 

창조-진화 문제에도 같은 적용이 가능합니다. 지구 6천 년설만이 옳다고 믿으며, 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해서 창조하실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여전히 고대의 창조론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즉각적이고 기적적으로 만들어야만 진정한 창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처럼 믿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진화를 포함한 어떤 방법으로도 창조하실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고 지구를 자연적 방법을 통해 46억 년 전에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구 6천 년설을 신봉하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품어야 합니다.

 

셋째, 바울은 채소만 먹는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유대교 전통에 사로잡혀서 제사음식을 부정하다고 보는 어리석은 자들로 취급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을 열등하다고 깔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채우라고 말합니다. 15장 1절을 보면,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은 기독교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모든 음식이 선한데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는 부정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유대교의 율법에 얽매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훼손하는 결과를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연약한 자로 여기고 믿음이 강한 자들이 그들의 약점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지구 6천 년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고대의 창조론에 얽매여 지구 연대를 6천 년이라고 주장하는 근본주의 입장을 깔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처럼 우리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돕고 그들의 약점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6일이라는 시간에 제한하거나 현대 과학의 결과를 부정하는 일은 오히려 기독교의 창조론을 훼손합니다. 성경과 과학이 모순된다고 보는 그들의 관점은 오히려 기독교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창조에 관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품고 그들이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넷째, 바울은 채소만 먹는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 권고는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한 권고와는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채식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신앙을 버리고 율법을 범한 자들로 정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판단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고기를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다며 바울은 양쪽의 입장은 모두 선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지구 6천 년설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권고가 가능할 것입니다. 지구 나이가 46억 년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성경을 버린 사람들이라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지구 6천 년설을 믿거나 지구 연대가 46억 년이라고 믿거나 모두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자들입니다. 과학을 수용하는 사람들을 창조를 믿지 않는다며 정죄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구 연대에 대한 견해가 다르고 창조의 그림이 서로 다르더라도 그 그림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섯째,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바울의 권고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고기를 먹는 자와 채소만 먹는 자의 입장을 바울이 공평하게 인정한 듯하지만, 채소만 먹는 자를 믿음이 약한 자로 표현한 점을 보면, 그리고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언한 점을 보면 바울의 신학적 입장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실천사항을 내놓습니다. 21절을 보면 믿음이 약한 형제가 보고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고기를 삼가라고까지 충고합니다.

 

물론 이 충고는 고기를 먹는 일이 죄라고 인정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고기를 안 먹는 듯 위선적으로 행동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시험에 들고 실족할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지구 6천 년설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구의 연대가 46억 년 되었다거나 진화의 방법으로 지구를 창조하셨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과학 상식도 모르는 미개하고 반지성적인 사람들로 업신여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한 신앙을 나름대로 존중하고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도와주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물론 지구 6천 년설이 맞다고 인정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도 지구 6천 년설을 믿는다며 위선적으로 행동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게 오히려 그들의 창조신앙이 더 커질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이해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더 위대합니다. 창조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일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는 일은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매우 다른 과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에 대해 더 깊이 알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과학으로 밝혀진 사실들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더 풍성하게 이해하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의 신앙이 성장하고 그리고 공동체의 믿음이 자라는 데에 있습니다.

 

창조에 관한 나의 믿음이 강하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를 폭넓게 이해하고 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창조하실 수 있다는 큰 믿음이 있다면, 믿음이 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6천 년 전에 우주와 지구와 생명체들을 뚝딱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그리고 창조과학만이 기독교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업신여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이 실족할 위험이 있다면 심지어 창조의 다양한 그림들을 아예 꺼내지 않은 채 창조라는 진리만 함께 누리는 단계에 머무르는 참을성과 이해심과 성숙함을 가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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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5.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하나님은 뭘 하셨나요?

 

[과신Q] 5.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하나님은 뭘 하셨나요?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창조와 진화를 대립 개념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즉각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야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진화가 창조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어도 진화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과학과 신학 분야 교수님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제가 자주 받는 질문을 꺼내 놓았습니다.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하나님은 뭘 하셨나요?” 그랬더니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뭘 하긴 뭘해요. 진화를 사용하셨지요.”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무신론), 신이 존재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주장 (이신론) , 신이 진화를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 (창조과학)과 다르게 기독교 유신론은 신의 창조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진화에 관한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입니다. 첫째, 신이 직접 만들어야 진짜 창조라는 신학적 오해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닌 듯 느껴지는 심리적 장벽 때문입니다.

 

신의 창조 방법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에서 유로 만들어야 신의 창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제빵사가 오븐에 구워 빵을 만들었습니다. 오븐이 빵을 만든 걸까요? 아니면 제빵사가 빵을 만든 걸까요? 오븐은 도구일 뿐입니다. 제빵사가 오븐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주장도 지나칩니다. 오븐을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야 진정한 빵 만들기가 되는 걸까요? 심지어 밀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무에서 유로 빵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창조도 비슷합니다. 인간이 진화되었다는 과학적 발견은 인간의 출현 과정을 밝힐 뿐입니다. 진화를 신이 사용했는지 아닌지 여부는 과학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에게 진화는 오븐같은 도구일 뿐입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이 밝혀졌으니 창조된 게 아니라고 주장하면, 빵이 오븐에서 구워지는 과정이 밝혀졌으니 제빵사는 필요없다는 주장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진화는 무신론의 근거도 아니고, 반대로 인간이 뚝딱 만들어져야만 신의 창조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무에서 유로의 창조나 즉각적 창조처럼 창조의 방법이 특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없다고 오해합니다. 뭔가 신비하고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방법으로 창조되어야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오해는 많은 경우 심리적 거부감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같게 되거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특별한 지위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방법이 창조물의 지위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뚝딱 창조되면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되고 진화의 과정을 거쳐 창조되면 존엄성을 가질 수 없을까요? 오븐에서 구워진 빵은 밀가루가 순식간에 변해서 기적으로 만들어진 빵에 비해 열등한 빵일까요? 오븐에 구운 빵은 정말 맛있습니다. 기적으로 빵을 만든다면 오븐에 구운 빵처럼 맛있게 만들겠지요. 인간의 존엄성은 창조의 방법이 무엇이었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인간을 기적적으로 창조해야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갖지 못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즉각적으로 완성된 형태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븐에 구워 빵을 만들듯, 우리는 자궁에서 난자와 정자가 수정하고 단세포가 세포분열을 하는 자연적 과정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진화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은, 빵이 오븐에 구워졌다면 진정한 빵이 아니라는 주장이나,  자궁에서 세포분열을 거쳐 만들어진 사람은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오븐에서 화학적 과정을 거쳤든, 자궁에서 세포분열을 거쳤든, 자연선택과 유전자 변이로 진화과정을 거쳤든, 창조의 방법에 따라 창조물의 영적 지위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창조의 방법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담은 진화되지 않았고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창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기적적인 방법으로 창조된 아담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되고, 단세포에서 세포분열을 거쳐 창조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갖지 못한 존재가 됩니다. 일단 아담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창조되면 그 후손인 우리는 기적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연적인 과정을 거쳐 창조되어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있다는 걸까요? 그렇다면 아담과 우리에게 서로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셈입니다. 아니면, 아담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유전자를 우리가 물려 받았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 주장할까요? 그런 생물학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유전된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혹은,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셨다고 봐야 할까요? 그렇다면 아담을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하신 후에 영적이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삼으셨다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창조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이 결정된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제한하는 셈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인간이 진화했다면, 언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걸까요? 긴 시간의 진화과정으로 인간이 출현했다면 언제부터 인간이 된 걸까요? 이 질문들에 대해서도 역시 우리 자신이 창조된 과정을 보면 힌트가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로부터 나온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어  단세포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DNA 정보에 따라 단세포가 2개, 4개, 8개, 16개, 32개로 점점 분열합니다. 심장과 허파가 만들어지고 팔다리가 생기고, 10달 가량 지나면 우렁차게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로 태어납니다. 이 과정 중에 도대체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신 걸까요? 여러분은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었나요?  정자가 난자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아니면 수정되는 순간일까요?, 아니면 착상 후 2주 일까요? 그도 아니면 심장이 형성되어 뛰기 시작한 시점일까요? 혹은 아기로 태어나는 출생의 시점일까요? 오븐에서 구워지는 빵은 언제부터 빵의 지위를 갖게 되는 걸까요?

 

답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생명이며 언제부터 인간인가라는 질문은 피임, 인공수정, 배아 실험, 낙태 등 다양한 이슈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뚜렷하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언제부터 인간이었는지 혹은 언제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었는지 답할 수 없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내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수정에서 출산까지 그 모든 과정을 과학으로 면밀히 들여다 봐도 하나님의 형상이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지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생물학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말은 생물학적으로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뜻이 아니라, 신 앞에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은, 언제 하나님의 형상이 부여되었는지 답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류의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십만 년 전에 진화해서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는 인류가 창조된 생물학적 과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생물학적 사건을 넘어서는 신의 창조는 여전히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인간이었는지, 어느 시점에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된 것인지 답하기 어렵듯이, 진화로 창조된 인류가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었는지 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때문에 잘 알고 있는 내용까지 함께 폐기처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화의 과정에 관해 과학으로 답하지 못한 질문들과 신학으로 답하지 못한 질문들이 남아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 알려진 진화의 역사를 통째로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제빵사가 오븐에 구워 빵을 만들듯, 하나님은 단세포에서 복잡한 생명체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생명으로 만드셨고, 수십 억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오븐이 빵을 만든 것이 아니듯, 세포분열이 우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며, 진화가 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오븐이나 세포분열이나 진화는 모두 창조주의 도구일 뿐입니다. 오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도 오븐에 구운 빵은 가장 맛있는 빵이 되었고, 단세포에서 아기가 되는 과정 중에 언제 하나님의 형상이 부여되었는지 모르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인류의 진화 과정을 구구단처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진화를 사용하여 인류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을 대리해서 모든 창조물을 보존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에 대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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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4. 창세기 1장을 비유로 읽으면 소설이 되는 거 아닌가요?

[과신Q] 4. 창세기 1장을 비유로 읽으면 소설이 되는 거 아닌가요?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며 높은 권위를 부여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막상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하거나 배운 적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을 읽는다는 건 하나님이 우리 귀에 대고 속삭여 주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문자로 기록된 글이며 모든 글은 나름대로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문학적 표현들이 들어 있고 고대 근동의 상식과 세계관이 담겨있습니다. 편평하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지구, 해와 달과 별들이 들어있는 궁창, 궁창 위에 물층, 그리고 그 위에 신의 자리가 있다는 당대의 상식은 창세기 1장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런 고대의 우주관은 성경이 가르치려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 내용들은 단지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을 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창세기 1장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지 말라는 구약학자들의 조언을 들려주면, ‘그럼 창세기 1장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책이 아니고 단지 소설에 불과한가?’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비유나 과장법, 혹은 문학적 표현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오래전에 폐기 처분한 고대 근동의 상식과 우주관도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를 그저 소설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린다면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성경을 소설이나 허구로 읽는 것도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비유는 사실을 허구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화를 들어볼까요? 옆집 친구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온 다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와 대화를 나눕니다.

 

“누가 그러는데 엄마는 내 친엄마가 아니래. 엄마가 나를 낳은 거 맞아?”

“그럼, 친엄마 맞지. 내가 너를 낳았지.”

“진짜로 낳은 거 맞지? 어떻게 낳았어?”

 

잠시 고민하던 엄마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너를 배꼽에서 낳았지. 친엄마 맞단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의심을 거둡니다.

 

도킨스와 창조과학자가 이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도킨스가 먼저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아기는 배꼽에서 나올 수가 없단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이 여인은 너의 친엄마가 아님이 분명하다.” 창조과학자도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도킨스의 말에 흔들리면 안 된단다. 엄마가 너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니? 배꼽으로 너를 낳았다는 말이 믿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엄마를 신뢰하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아기를 낳는 방법일까요? 배꼽의 중요성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는, 내가 너의 친엄마라는 사실입니다.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수준에 맞게 배꼽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썼을 뿐입니다. 배꼽으로 아기를 낳았다는 표현이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해서, 엄마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의심해야 할까요? 반대로 배꼽으로 낳았다는 말을 비유로 이해하면 친엄마라는 사실도 허구로 전락하게 되는 걸까요?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서, 아기가 배꼽에서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친엄마가 맞다는 엄마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고 폐기 처분해야 할까요?

 

창세기 1장이 그렇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히브리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창세기 1장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하였고 그들에게 익숙한 상식과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를 이해하듯,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임을 알려주는 것이 창세기 1장의 목적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우주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고대 근동의 히브리인들에게 누가 창조주이며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비유를 비롯한 다양한 문학적 표현과 더불어 현대 과학과는 맞지 않는 고대 근동의 상식과 세계관이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과 맞지 않는 표현들이 담겨 있다고 해서, 창세기 1장을 허구라고 판단한다면 배꼽 때문에 생모를 버리는 격입니다.

 

비유와 같은 문학적 장치나 고대 근동의 상식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서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과연 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제한된 세계관과 이해를 가진 고대 근동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알려주는 책이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비유 때문에 사실을 버리거나, 혹은 비유를 사실로 여기는 두 가지 실수를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비유는 사실을 허구로 만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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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3. 창세기는 왜 쓰였을까요?

  • 역시 우교수님의 깔끔한 정리 눈에 속속 들어옵니다. 감사합니다.

    시애틀 2019.03.23 23:32


[과신Q] 3. 창세기는 왜 쓰였을까요?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흔히 사람들은 창세기를 세계가 창조된 과정을 알려주는 책으로 오해합니다. 책의 이름도 한글로는 창세기이고 영어로는 ‘Genesis’이니, 이 책은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그 기원을 알려주면서 1, 2장을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닙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비그리스도인들도 창세기를 우주의 기원, 지구의 기원, 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책으로 오해합니다. 이 세상이 어떤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어떤 순서로, 그리고 얼마나 긴 기간 동안 만들어졌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자연사의 연대기나 우주의 형성과정, 혹은 지구의 나이나 생명체들의 창조과정을 설명하는 과학책도 아니고 자연사에 관한 과학적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창세기는 모세의 리더십 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를 출애굽 시킨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진 책입니다. (우리를 인도한 신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유대 땅으로 되돌아온 제2성전기에도 동일하게 던져집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는 창조물에 관한 책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에 관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궁창 안에 있었고 그 위에는 물층이 있었으며, 빛을 내지도 않는 달을 광명체로 기술하고, 태양이 넷째 날에 창조되기 전에 이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3일의 시간이 흘렀다고 표현되어 있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은 현대과학과 모순되는 부분이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창세기가 현대인에게 주어진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우리를 위한(for us) 책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not to us) 책이 아니라는 점은 성경을 바르게 읽는 첫 번째 중요한 기준입니다.

 

창세기 1, 2장은 고대 히브리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책이며 그가 모든 것을 만든 창조주임을 전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시대의 상식과 우주관을 반영하여 창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존 칼빈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세기는 그 당대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accommodate)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 1, 2장이 세계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님을 배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 2장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 답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이해하게 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깨닫습니다.

 

긴 세월동안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고대근동의 신화들에 익숙했습니다. 그 신화들에 따르면 태양과 달을 비롯한 자연은 신적 존재들입니다. 태양신이나 바다의 신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그 신들은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를 보면 신들의 세계에서 반란을 일으킨 마르둑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신들을 부역에서 해방하고 자유와 안식을 보장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는 신 중 하나였으며, 인간 위에 군림해서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그의 권력은 고대의 신화들에 의해 정당화되고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10가지 재앙을 통해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신적 존재로 여겼던 자연이 모세에게 부여된 힘에 의해 장난감처럼 이용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신으로 여겼던 자연을 통제하는 모세, 그리고 그 모세를 지도자로 보낸 여호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질문은 포로시대 이후에도 계속되며, 오늘날 우리가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장자, 즉 신의 아들이 죽임을 당한 날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도대체 우리를 인도하는 신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가지고 말입니다. 모세를 통해, 아마도 그 당시에는 구전으로 주어진, 창세기 1, 2장은 고대근동 신화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내용을 전해줍니다. 똑같은 질문이 포로시대 이후에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던져집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 앞에 모세의 전승이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문자화된 기록이 탄생합니다.

 

그 기록은 신이라 여겼던 태양과 달과 바다와 그 모든 자연의 대상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 창세기 1장은 심지어 태양과 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그 대신에 두 개의 광명체라고 표현합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창조물처럼 넷째 날이나 되어서야 창조된 것으로 기록됩니다. 신으로 여겼던 그 모든 자연은 피조물의 지위로 격하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인간을 마치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은 생물학적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고, 기적적으로 창조했다는 식으로 창조의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의미는 인간을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존재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언약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격적 존재로, 즉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로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27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 바로 다음 절인 28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혹은 대리해서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다스리라는 임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문화명령입니다. 고대근동에서 신적 존재로 여겼던 자연, 즉 태양과 달과 바다와 그 모든 대상들이 사실은 신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통치 아래 놓여있으며, 인간의 도움을 통해 보존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창세기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포함한 고대근동신화들은 자연이 곧 신들이고 인간은 그 신들의 노예로 기술하고 있다면, 창세기는 그와 대조적으로 자연은 피조물에 불과하고 인간은 신적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자연은 오히려 인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선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관계, 혹은 그 위상을 알려주는 것이 창세기 1, 2장의 목적입니다. 거기에는 이집트나 바벨로니아의 세계관, 즉 자연이 신이고 인간은 노예라는 그 지배적인 사고 아래 착취당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신과 같은 존재이며 오히려 자연을 다스리고 보존해야 한다는 놀라운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인도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주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 2장의 목적입니다.



창세기는 어떤 인과관계나 과정, 순서를 거쳐서 우주가 창조되었는지 설명해주는 책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우주나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닙니다. 창세기 저자는 그런 내용에 거의 무관심합니다. 과학적 질문을 다루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설명을 간절히 원할지는 모르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이 창세기를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포로시대 이후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알려주려는 내용이 아닙니다.

 

어떤 책을 읽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글로 기록된 모든 문서는 어떤 목적으로 쓰였는지,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주목해서 읽어야 합니다. 창세기도 그렇습니다. 창세기가 우리에게 주어진(to us) 책이라는 오해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for us) 것은 분명하지만 창세기는 1차적으로 출애굽을 거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에게 창세기가 계시되었을 때 과연 어떤 목적으로 쓰였는지 그리고 그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이지 주목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창조주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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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2. 과학자가 부활을 믿을 수 있나요?



[과신Q] 2. 과학자가 부활을 믿을 수 있나요?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과학자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데 부활을 믿는다면 과학자로서 지적성실성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럴까요? 과학자가 부활을 믿으면 안 된다는 태도 자체가 어찌 보면 상당히 종교적인 듯합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창조를 믿는 신앙, 그리고 예수의 성육신을 믿는 신앙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구성합니다. 물론 부활에 관해서 다양한 형태의 믿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니 복음서는 소설이다, 예수는 사실 죽은 게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다, 예수의 부활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제자 공동체가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등등 말입니다.

 

분명한 점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진술이 모든 세부사항에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세부적인 불일치의 경향은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빈 무덤과 그 공동체의 경험과 진술, 그리고 순교로 이어지는 부활의 믿음에 대한 헌신은 부활의 역사성을 매우 강하게 제시합니다.

 

이 글에서 부활의 증거를 제시하거나 과학적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논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으로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걸까요?



부활이 가능한지 과학으로 밝힐 수 없다는 점은 아마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물론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단한 사람이 깨어나서 의사들을 당황케 하는 일이 어쩌다 일어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건 일상적인 경험이고 과학적 결론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생물이 됩니다.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이 과학의 시각입니다. 생물은 무생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생물학의 결론입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던 전근대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발생성을 믿었습니다. 가령, 창문을 꼭꼭 닫아 둔 집안에서 초파리가 생기는 걸 보면 초파리는 자연적으로 생겨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바로,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연한다는 자연발생설입니다. 하지만 생명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연발생설은 폐기되었습니다. 초파리는 마구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생명체인 초파리가 알을 낳아야 그 알에서부터 초파리들이 생겨납니다. 돌들이 갑자기 생명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무생물에서부터 생명체가 만들어 질 수는 없다는 현대 생명과학의 결론은 자연발생성을 폐기시켰습니다.

 

그런데 같은 잣대를 지구 최초의 생명체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과연, 지구에서 첫 생명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지구 최초의 생명체는 자연발생설을 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46억 년 전 지구가 생성될 때는 생명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 억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생명체가 지구에 등장하고 그 이후 생명체들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그 시점은 대략 38억 년 즈음입니다. 무생물의 시대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한 이 과정을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오래 전 과거의 지구의 자연환경과 조건은 지금과는 매우 다르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점은 무생물의 시대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즉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현했다고 과학자들이 믿는다는 점입니다.


제가 왜 믿는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것은 최초의 생명체가 어떻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지 과학으로 엄밀히 밝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과서에도 언급되는 밀러의 실험으로 밝힌 내용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무생물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되려면 빅뱅이 서너 번은 일어나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생명과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생명체는 지구에서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계에서 유입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자연발생으로 생명체의 출현을 설명하기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외계유입설을 주장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구 밖 어느 우주, 어느 행성에서 생명체가 출현했다고 해도 그 생명체는 자연발생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생명체는 어떻게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했는지 여전히 과학으로 밝혀야 합니다. 외계유입설은 생명의 출현에 대해 밝혀야 할 숙제를 지구 밖으로 떠넘긴 셈입니다.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발생한 과정을 과학으로 밝힐 수 없으니 창조주가 기적적으로 만든 것이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견해는 간격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허망한 주장이 되기 쉽습니다. 저는 다만, 과학자들이 무생물에서 생명이 탄생했다고 믿는다는 점, 그리고 생명의 출현 과정을 과학으로 잘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역사에서 무생물과 생물의 시대를 나누고, 그 사이에 생명이 출현했다고 받아들인다는 점을 지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과학은 자연발생설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지구에서 첫 생명체가 탄생한 과정은 현대과학의 자연발생설과 배치된다는 점을 짚어내는 것입니다.

 


부활은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개념과 비슷합니다. 도대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는가를 묻는 우리는 동일하게, 도대체 어떻게 무생물 시대에 생물이 출현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최초의 생명체가 무생물에서 탄생했다고 과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부활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믿음 모두,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지만, 그리고 생명은 자연발생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결론에 위배되는 듯하지만, 여전히 과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 누구도 수십억 년 전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한 과정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그 전후의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서 무생물에서 생명이 생겨났다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전과 부활 이후의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부활은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과학으로 입증된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과학으로 입증되면 지식이 되어버리고 지식은 그저 이해하고 동의하면 됩니다. 우리는 과학으로 증명되어야만 진리라는 계몽주의의 산물인 증거주의에 깊이 매몰되어 있습니다.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건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많은 경험적 증거를 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거나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내의 사랑을 믿습니다. 사랑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건, 무생물이 된 죽은 몸이 다시 생명체가 될 수 있는가를 과학적으로 논쟁하고 탐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육신한 예수와 그의 대속과 부활을 믿는 건 바로 사랑때문입니다.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통치를 회복시키는 그 원대한 구속의 계획에 감격하고 거기에 참여하고 그 일부가 되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단지 과학적 혹은 철학적 논쟁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내어 걸고 예수가 걸어간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헌신과 희생을 끌어냅니다. 예수의 도, 그 고난과 희생의 길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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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1. 창조기사처럼 부활도 비유로 읽어야 하나요?


* 앞으로 매월 우종학 교수님께서 과학과 신학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골라서 [과신Q]라는 제목으로 연재해 주십니다. 교회에서 혹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과신Q]를 주목해 주세요. 시원하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창조기사처럼 부활도 비유로 읽어야 하나요?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창세기 1장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 중에는 창조기사를 과학 교과서처럼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창세기의 1차 독자였던 고대 근동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상식과 세계관에 맞게 기술된 것으로 읽으라는 칼빈의 견해가 건강합니다. 가령, 궁창 위에 물을 두었다는 표현은 하늘 위에 물층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당대의 상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성경은 대기권 어딘가에 물층이 있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건 바람직한 성경읽기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도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비유로 읽어야 되지 않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창조와 부활이라는 두 사건을 기술한 각각의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먼저 기억할 점은 창조기사의 다양한 표현들을 고대 근동의 상식이 반영된 것으로 읽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만물을 하나하나 창조했다는 가르침이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창조기사는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수준에 맞게 쓰였으니 그에 맞게 읽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창조기사와 부활에 대한 기록의 차이점을 살펴보며 이 질문에 답해볼까 합니다.


첫째, 목격자의 유무입니다. 부활 사건은, 여성들과 12제자를 비롯한 목격자들이 있고 그들의 경험이 복음서에 담겨있습니다. 반면 창조 사건은 목격자가 없습니다. 신이 창조하는 과정을 지켜본 누군가가 창세기 1장을 기록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영감을 통해 창세기의 저자가 기록했겠지만, 그 기록과 복음서가 같은 방식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둘째, 주인공의 차이점입니다. 창조 사건의 주체는 초월적 하나님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창조주와 시공간 안에 창조되는 창조물은 분명 대비됩니다. 창조의 과정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시공간과 만물을 창조하는 신의 행위는 말 그대로 인간의 인지 범위를 넘어서는 초월적 사건입니다.

반면, 부활 사건의 주체는 동일한 하나님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입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그분은 인간의 경험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부활 사건은 창조 사건처럼 초월적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인간이 보고 듣고 목격할 수 있는 경험적 시공간에서 발생했습니다.


셋째, 궁창과 같은 예로 대표되는 창조기사의 구체적 진술들은 고대 근동의 상식에 따라 기술되었지만, 부활사건은 신약시대의 상식에 어긋나게 기술되었다는 점입니다. 고대 근동인들은 신들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개념에 익숙했고 편평한 땅, 궁창, 그 위의 물층과 같은 세계의 구조에 대한 상식도 갖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을 읽는다면 그들은 흔히 알던 고대 근동의 신화들과 비슷하게 창세기는 여호와라는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전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당대의 상식을 넘어섭니다. 21세기의 우리처럼 신약시대의 그들에게도 죽은 사람의 부활은 상식에 위배됩니다. 부활 사건을 읽는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을 기록한 것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었기에 제사장들은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 갔다고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오늘날 우리가 배운 지구나 우주의 모습과는 다르게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차용해서 창조기사를 기술하고 있지만, 복음서는 신약시대 사람들이 부활을 상식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반영해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기사를 읽은 고대 근동인들은 뭔가 이상한 점도 발견했을 겁니다. 노예로 삼으려고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게 상식이었을 텐데, 창세기는 오히려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신과 같은 존재로 기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여호와라는 신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을 겁니다.


부활 사건의 기록에도 당대의 상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알려준 자가 천사였듯이, 예수의 무덤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맞이한 것도 천사로 기술됩니다. 천사에 대한 당대의 상식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은 당대의 상식에 어긋났지만 목격자들의 구체적인 진술은 그들의 상식과 세계관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서마다 세부적 차이가 나는 이유도 사건의 각기 다른 면들을 경험한 목격자들이 각자의 인지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식과 세계관을 반영한 언어로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메시지와 그 메시지가 담기는 그릇을 나누어 비교하면 좋습니다. 창조기사의 핵심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낸 그분이 누군지 묻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창조기사에 담겨있습니다. 그분은 자신들의 조상의 신일뿐만 아니라 바벨론이나 이집트의 신들과 다른 유일신이며 만물의 창조주였던 것입니다. 창조기사의 역사성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성은 고대 근동의 상식이라는 그릇에 담깁니다. 인간의 노동 주간에 비유하여 완전수인 7일의 구조로 창조의 주간이 유비됩니다. 고대 근동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땅과 궁창과 같은 세계의 구조가 하나하나 설명됩니다. 이런 구체적 내용은 역사성을 담기 위한 그릇에 해당됩니다. 궁창 위의 물층과 같은 표현에 역사성을 기대어서는 안됩니다.


반면, 부활사건의 핵심은 예수가 신이었다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은 부활을 통해 절정에 이릅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부활 사건의 역사성은 부활 자체에 있습니다. 당대의 상식과 달리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가 자신이 신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구체적 사건이었습니다.



창조기사에 관해서는 배꼽 탄생 비유가 도움이 됩니다. 친엄마가 맞는지 묻는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엄마는 내가 너를 배꼽에서 낳았다고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엄마가 이 아이를 낳았다는 역사성은 배꼽 탄생을 사실이 아니라 비유로 여긴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엄마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며 배꼽 탄생을 계속 주장하거나 반대로 배꼽에서 아이가 탄생할 수 없으니 엄마의 진술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일뿐입니다.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을지는 이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입니다. 어떻게 부활했는지, 누가 돌을 옮겼는지, 천사가 증언을 했는지, 부활한 몸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생화학적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한 기술과 표현들은 이 메시지를 담기 위한 그릇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기사의 역사성과 신학적 메시지는 인정하되, 고대 근동의 상식이 담긴 구체적인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 사건의 경우도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신학적 메시지는 받아들이되 목격자들의 기록의 세부적 차이점은 그들의 이해와 인지와 당대의 상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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