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는 실험노트와 같다.

[부천/인천 북클럽 10월 모임]

 

 

일시: 2019.10.15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박영식 교수 연구실
교재: 존 폴킹혼, <과학으로 신학하기> (모시는사람들)

 

2019년 하반기에 부천 북클럽에서는 존 폴킹혼의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읽을 책은 <과학으로 신학하기>라는 책입니다. 지난 모임에서는 1장 "맥락신학"을 읽고 이야기했습니다.

 

  1. 폴킹혼은 "성서는 이러한 계시를 수반하는 토대적인 만남들에 대한 설명이 기록된 실험노트"라고 말합니다. "계시 자체는 명제적이라기보다 실험적"이라고 말합니다. 계시가 명제가 아니라 실험노트와 같다는 말에 대해서 논의를 길게 했습니다. (39쪽)

  2. 19세기 오므리 무어는 다윈의 진화론이 오히려 신의 섭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진화론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신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창조자로 남아 있지 않고 피조물들이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자연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로 결정하였다"고 생각한 거죠. (42쪽)

  3. 폴킹혼은 판넨베르크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판넨베르크는 "과거와 현재보다 미래가 우선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53쪽), 폴킹혼은 이런 입장을 납득하기 어려웠나 봅니다.

  4. 그러면서 폴킹혼은 아서 피코크의 비유를 빌려, 우주의 역사는 "창조자와 피조물들이 함께 연주하는 멋진 즉흥연주 푸가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54쪽)

  5.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기적을 물리 세계 내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셨던 로버트 러셀 교수님의 의견도 첨언해서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부천 북클럽 모임은 언제나 먹을 것이 넘칩니다. 박영식 교수님께서 늘 간식을 풍성하게 챙겨주시네요~^^

관심 있는 분들은 누구든지 환영입니다.

 

 

  • 다음 모임 시간: 10월 29일(화) 저녁 7시 박영식 교수님 연구실

  • 다음에 나눌 내용: 2장 담론, 3장 시간과 공간, 4장 인격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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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와 기독교의 기원 탐구

[분당/판교 북클럽 9월모임 후기]

 

박정수, <고대 유대교의 터·무늬> (새물결플러스, 2018)

시간/장소 : 9/29일 금요일 저녁 성공회분당교회

발제: 박철성 님

 

나는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에 공백, 느부갓레살의 예루살렘 패망 후,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났기에, 독립된 나라없는 백성들이 500년간을 유대교 라는 분리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종교를 자리매김해서 초대 기독교에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것이 늘 궁금했다.

 

책의 시작은 앗수르, 바빌론 등의 강압통치를 일삼은 제국의 몰락을 경험한 키루스(고레스)가 페르시아 속국들에게 종교와 관습을 허락하는 "문화정치"로 시작된다. 유대 예루살렘 성전, 바빌론의 마르둑과 이집트의 신들, 그리스의 아폴로 신전제사가 허락되었고 정복민들에게 마치 이전 왕조의 지배가 계속되고 있는 안정감을 주려는듯 그는 바빌론의 후계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강사은 님의 표현처럼 고레스 덕분에 유다가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의 연장선 상에서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귀환이 시작되었으나 이는 그땅에 남아있던 대다수 백성들에게는 또 하나의 갈등의 시작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마치 6.25때 서울이 북한군에게 3일 만에 점령되어 남아 있던 대다수 서울시민들이 서울 수복후 부역자로 몰린 것과 같은 상황이 떠올라 한동안 상심에 잠기었다.

 


초기 귀환 그룹 스룹바벨은 다윗 왕조의 부활을 꿈꾸며 이방인이 되어버린 남은 자들을 부정하다하여 성전 재건에 참여시키지 않았고 이에 반발한 사마리아 이방인(?)과 정치적 독립을 달가워하지 않는 페르시아에 의해 좌절되었다.


20년 후에 (기원전 538년 ~ 515년) 성전재건 목표 수정하여 성전 자치 공동체의 지위에 한정하며 이방인 혼합주의자/동화주의자들을 받아들인 후에 성전이 재건되었고, 에스라 7-10장 성전 완공 후 50년 후 458년 에스라가 종교특사로 파견되며 도시재건과 개혁,성벽건설까지 완성되었다. 


초막절 희생제사 - 에스라의 수문 앞 광장 율법 낭독에서 총회를 주관한 느혜미야 총독과 함께 이스라엘의 종교적 회복을 이루는 모습이 성경에서 정말 감동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치적인 공적인 영역은 제한되었고, 개인적인 종교적인 면의 성과에 머물러서 성전제사와 공통체의 제의적 정결에 집중되었다.

 


정훈재 님이 소개한 <시편 사색, 시편 한 권으로 읽기>처럼 시편 첫 권은 현실 왕조/왕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면 뒷 권으로 갈수록 왕이 없는 식민지 백성의 바램이 묵시적으로 변화한다. 오늘 현실의 시련 앞에서 먼미래에 경험하게 될 구원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표현하게 되고 성전 제사장 세력에서 제외된 에스겔 등에 의해서 교회에서 찬양할때 늘 부르던 "젊은이가 꿈을 꾸고 노인이 환상을 보는" 묵시문학의 태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300 영화로 익숙한 페르시아가 야만이 아닌 나름 관용적인 개방정책으로 헬레니즘 이전에 이미 그리스 문화가 에후드 지역에 가득했고 디아스포라와 함께 이러한 배경이 초대기독교가 널리 확장된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팔레스타인 지명은 로마 통치시절 잦은 유대 봉기를 괘씸하는 여긴 로마황제가 블레셋을 본따 rename 된 것으로 유대인들은 태생부터 싫어 할만한 단어라 하겠다.


모임 뒷 부분은 김자현님이 유엔 회의 중에 구술 문화권의 중동의 외교관들이 상당한 언변이 강하다고 설명을 들었고, 유대교의 미쉬나 완성과 성전 보조직에 한정되었던 레위인들을 사독 가문으로 대표되는 신정정치의 승리자(?) 제사장계급이 파트너로 연합함으로써, 서기관 계급이 태동하는 과정을 살려보았고 외경으로 접하는 마카비 혁명을 다음시간에 고대하며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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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신은 어찌 그러셨소~

분당 판교 북클럽 8월 모임 후기

 

 

바울! 어찌 이런 일을~

 

유사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이 과학을 엉뚱하게 변곡시킬지라도 성서 문자를 손대는 경우는 못본 것 같은데 바울은 (히브리) 성서 텍스트를 수정해서까지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키는군요. 음... 바울은 적어도 문자주의자는 아니라는?

 

시편 95편에서 40년 광야는 ‘징벌’이었던 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시편에는 없던 “그러므로”(3:10)를 삽입해 징벌이 광야 이후의 것이 되도록 변경해 인용했습니다.

 

——


(히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 3: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히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히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

 

왜? 바울의 유비에 있어 광야 40년은 쉽게 설명해 탄생-삶-죽음 중에서 ‘삶’에 해당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삶’ 자체가 징벌인 것으로 관계지을 수는 없는 노릇인거죠. 암요~

 

히브리서는 시편 95편처럼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나님의 진노로 정의하지 않는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이 “믿지 아니하는 악심”(히 3:12)을 버리지 않으면 임하는 것으로, 굳이 말하자면 40년의 기간이 지나 임하는 것이다. p. 200

 

한 때는 구약성서에도 없는 내용이 신약에서 발견되면 무척 신기해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역시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라 구약에서 밝히지 않았던 것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들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신약에서 그 비밀을 밝힌 것이겠거니.... 식의 생각이었죠.

 

유다서 9절의 모세 시체 쟁탈전이 그런 예입니다.
모세의 시체를 두고 천사와 사탄(?)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다? 아주 흥미롭죠. 뭔가 심오한 뜻이라도 있는 줄 알았었다는..... 저의 흑역사입니다. ㅜㅜ

 

요즘에 와서야 그저 고대인들의 공유하고 있던, 조금 과장해서 고대인의 상상력의 발현이겠거니 하게 됩니다만 이렇게 말하면 상처받으실 분도 있을테니 어떻게 포장을 해야 할까요. ㅠㅠ


(아~ 하지만 나는 루비콘 강을 건너 버렸어~. 아니지~ 성경’쩍’으로 요단강을 건너 버렸어~. 아! 요단강은 죽음을 의미하나? 그럼 다시 루비콘 강으로....)

 

 

피터 앤즈의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은 2가지 관점으로 사도들의 히브리 성서 해석 관점을 이해하자고 합니다. “1. 그리스도 목적적. 2. 교회 목적적” 차원에서 그들은 구약, 즉 히브리 성서를 이해했다는 것이죠. 비록 이것이 사도들의 해석 관점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아닐지라도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고대와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해석 관점을 사도들에게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덜 부자연스럽다고 말이죠. 사도들이 빅뱅, 블랙홀, 진화, 성소수자에 대한 현대 정신의학계의 연구 결과를 알 리가 없죠.


이 지점에서 우리가 속한 종교는 성경교가 아니고 그리스도교(기독교)라는 점을 기억해 봅니다. 적어도 바울의 해석관점이 문자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피터앤즈는 성서 해석이 과학의 산물이라기보다 예술적인 활동(문학적이기도)이고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 공동체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방어할 요새의 관점이 아니라

 

“나는 성경해석을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여정, 우리가 함께 하는 순례길로 보기 원한다. 여행의 길을 가면서 주변의 경치를 즐기다 보면, 보다 많은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럼으로 우리의 해석도 더욱 풍부하게 될 것이다.” p. 232

 

라고 말이죠.

 

분당/판교 북클럽 9월 선정 도서는 신구약 중간사를 다룬 “고대 유대교의 터·무늬”(박정수, 새물결플러스)입니다.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2부까지 읽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p.s. 구운 계란, 찐 고구마로 배불려 주신 김란희님께 감사드립니다. 급히 조문을 가시는 길이셨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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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에서 사제로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부천/인천 북클럽]

 

| 박정탁 (부천/인천 북클럽 회원)

 

 

영국의 물리학자 존 폴킹혼은 양자물리학을 끝까지 거부한 아인슈타인을 '최초의 현대인인 줄 알았으나 최후의 고대인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미시세계를 직접 연구하는 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의 고집을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배 물리학자를 향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고 미시세계를 꾸준히 연구한 폴킹혼. 그와 같은 현대 물리학자들 덕분에 우리는 북경에서 펄럭인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서 허리케인이 되어 나타나게 될 '확률'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과학 연구에서 앞선 연구는 '그런것이 있었다' 정도의 가치만이 용납된다고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폴킹혼의 이러한 태도는 지나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해봄직하다. 과학이 계속 발전하고 진보한다는 것은 앞선 과학의 연구가 모조리 폐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논리적으로 입증되고 납득된 과학의 공헌은 더 뛰어난 연구가 나올 때까지만 수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 또 다른 연구에 의해 비난받고 전복되는 것을 잠시 유예받았을 뿐인가? 그렇다면 폴킹혼을 비롯하여 과학자들은 무엇을 위하여 연구하는가?

 

폴킹혼은 이것을 '축적'이라는 온건한 용어를 사용하여 진보의 반대가 꼭 퇴보는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과학의 연구 또한 인문학처럼 축적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말로, 거인이 있어야 거인의 어깨도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그 유명한 '비판적 실재주의'라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실재는 오직 주관과 관념에서나 가능하다"는 염세적인 태도와 "보이는 것이 곧 실재 그 자체"라는 순박한 실재주의의 사이에서 중도를 걷는 이 방법론은 얼마나 유연한가.

 

분명하고 아름답게 존재하는 실재(real)에 대한 확신. 그리고 성실한 연구를 통해 그 실재에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믿음. 실재와 아주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그것이 실재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 겸손함. 그래서 나보다 더 실재에 가까이 간 학자의 연구를 기꺼이 수용하는 유연함. 폴킹혼의 방법론은 동료 과학자들의 진실한 노력을, '실재를 향한 숭고한 발자국'으로 존중하고 있는듯 하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는 선배요 거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을 차갑게 비판하기도 했었으나 학자들에게는 그런 순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로남불이 아니라 학문의 최전선에 서있는 학자들의 고단함이니, 큰 흠이 될 수는 없다.

 

어쨌든 우리 모두 잘 알듯이 이 위대한 물리학자는 캠브릿지 대학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사제가 되었다. 과학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그의 삶과 궤도를 오늘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어서 유익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기 전에 소탈하고 겸손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래서 사제가 되기로 선택한 그의 결정이 아주 비논리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천/인천 북클럽 모임 안내

 

  • 일시: 2019. 10. 1. (화) 7:00 pm.
  •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 804호 박영식 교수 연구실
  • 교재: 존 폴킹혼, <과학으로 신학하기> (모시는 사람들)
  • 문의: 010-사삼삼삼-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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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북클럽의 새로운 도약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미국 파사데나 북클럽]

 

| 김영웅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

 

 

정체된 분위기를 벗어나 한 단계 도약을 위해 모두들 귀한 시간 내주셔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네 가지 나무를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한 간략한 커리큘럼 개요를 발표하고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약 1년 반 정도의 미래의 방향을 논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하나의 나무가 너무도 컸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이 함께 탐험해 나가야 하는데, 기초적인 지식과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지식 사이의 간격을 측량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행착오 없이 한 번에 가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은다면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과정 자체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열의와 이 일의 당위성을 생각하며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침 우종학 교수님도 참석해 주셔서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집단지성의 힘과 다양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달에는 오늘 나눈 중요한 이야기들을 토대로 커리큘럼의 수정과 보완을 하여 다시 모이게 됩니다. 11월달부터는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모임이 있고 제가 그 자리에 있음이 참 감사합니다. 혹시 아나요. 파사데나 학파가 정말 형성되어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생각나실 때 응원 부탁드립니다. 오늘 특별히 참석해 주신 우종학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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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판교 북클럽 7월 모임 후기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북클럽]

 

| 강사은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일시 : 2019년 7월 19일(금) 오후 7시
장소 : 성공회 분당교회(https://www.skhbundang.or.kr/)
책 : 피터앤즈의 ‘성경 영감설’

 

 

— 굽먹이냐 삶먹이냐.

 

부먹/찍먹보다 더 유서 깊은 논쟁이 성서 번역에서의 굽먹/삶먹 논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유월절에 관한 율법에서 (히브리어 원문 상)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는 ‘구워’ 먹을 것을, 신명기, 역대하에서는 ‘삶아’ 먹을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런 다양성이 NIV에서 ‘구워’ 먹는 것으로 통일된 것은 그 나름의 ‘번역철학’에 기인한 것이었군요.

 

“출 12:12-13(“...그 고기를….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와 신 16:5-7(“... 그 고기를 구워먹고…”)에서 출애굽기의 강조점은 아주 분명하지만 신명기의 경우 히브리어 원문에서 ‘삶아서[베잇-쉰-라멛] 먹고’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NIV 신명기의 구절이 ‘삶다’의 의미가 아니라 ‘굽다’의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르지만 NIV가 이렇게 다룬 이유는 동일한 법이 서로 모순되게 진술되었을 리가 없다는 성경관에 근거한 ‘번역철학’을 반영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언어적 사실을 숨겨서는 안된다. 대하 35:13절도 ‘삶아’인데 NIV는 ‘굽고’로 번역되었다.”(pp. 127-128 요약)

 

뭐 그렇다고 저자 피터앤즈가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강조를 하지는 않습니다. 원어를 공부하면 뭐하겠습니까? 번역을 하겠지요. “번역은 반역이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저는 이 말 보다는 “번역은 창작이다”를 더 좋아하긴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된 인간의 책 성서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66권 정경이 완성된 것은 약 4세기경입니다. 확정된 성서 목록은 367년 아타나시우스 서간에 처음으로 등장하죠. 성서가 ‘하나님의 책’이라고 강조되었던 비중에 비해 ‘인간의 책’이라는 점은 거의 강조되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요. 지난 150년간 고대 근동 문헌들의 발견은 성서를 새로 보게 합니다. 저자는 “성서는 역사적 산물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둘은 한쪽만 선택할 수 있거나 충돌되는 사실이 아니며 이에 대한 성육신 유비를 통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은 정경 형성사에서 보듯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인정한 전통을 따르기 때문이죠. 성서는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전 인류에게도 가치있는 고전이겠습니다.

 

— 오늘날 우리에게 구약은, 성서는

 

다신교적 환경에서 이스라엘을 이끈 신은 제국의 신이 아닌 사회적 약자인 노예들의 신이었습니다. 인간을 노예가 아닌 존귀한 자로,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여긴 것은 당시 사회상에서는 아주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성서가 쓰여진 시대의 메시지가 그러할진대 노예 제도의 정당성 제공을 위해, 여성 인권 차별의 근거와 성소수자를 배제하기 위한 용도로 성서가 이용되는 것을 정경 66권이 이미 완성되고 인쇄술과 휴대용 전자기기의 발달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시대에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구약성경의 권위 혹은 규범성에 대해 숙고할 때 성경의 성육신적 차원을 떼어놓아서는 안된다. 구약성경은 우리가 따라야 할 규칙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성경의 성육신적 요소는 오늘까지 지속된다. 각 세대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 세대가 살고 있는 세계와 복음이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고민하면서 복음의 메시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 ‘무대 뒤의 하나님’

 

구약성서 안의 제각기 다른 하나님에 대한 묘사들은 다양한 색깔과 질감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초상화를 이루는 것과도 같은데요. 한편, 인간의 책이기도 한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과 ‘무대 뒤의 하나님’ 즉 실재의 하나님에 대한 구분된 이해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 성서를 가까이 하는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교만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겠습니다.

 

— 작은 소회

 

이번 모임에서 어떤 분은 삶은 옥수수로 입맛을 돋궈 주셔서, 어떤 분은 미국 출장 후 집에 짐만 풀어 놓고 바로 참석해 주셔서 감동이었습니다. 먹거리를 장만하고 챙기는 것, 출장으로 피곤한 몸으로 참석하는 것 모두 만만치 않은 일인데 말이죠. ^^

 

— 다음 모임 안내

 

다음 모임은 8월 23일(금) 저녁 7:30분에 피터 앤즈의 ‘성서 영감설’ 4장~끝까지 함께 읽고 토론하게 됩니다.
분당/판교 지역에서 정기/비정기적으로 참석하실 분을 언제든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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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되고 역동적인 우주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수원 남부 북클럽]

 

 

일시 : 2019년 7월 6일(토) 오전 10:30분
장소 : 성공회 제자교회(http://www.agnes.or.kr)

 

어색한 상황에서 ‘날씨 이야기’로 먼저 대화를 시작해 보는 것은 고전적이지만 참 좋은 방법입니다. 아이 엄지 손가락에 생긴 습진 이야기나 언제 ios 새 버전이 나올지와 같은 개인적인 관심사보다 훨씬 공감을 얻을 확률도 높고 어색함도 쉽게 풀리기 마련이지요.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 가나안 성도가 모인 7월 모임에서는 날씨보다 공감대를 형성하기 더 쉬운 ‘아주 오래되고 역동적인 우주’ 이야기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래층 이웃에게 “우리 우주가 참 오래되고 역동적이죠?” 또는 “얼마 전 지구를 위협할 수 있는 소행성을 한국 천문학자들이 찾았다지요?”라고 했다가는 아마 ‘이것은 뭥미~?’ 하는 무안함을 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우주는 하늘보다 더 크고 외계인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당연히 관심을 가질 것 같지만 이런 주제는 북클럽이니까 가능한 것이겠습니다.

 

 

우주는 이런 질문을 갖게 합니다.

 

1. 광대한 우주는 꼭 존재해야 하는가? 물질은 어디서 기원했는가? 우주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2. 우주는 왜 수학적인가? 자연법칙은 어떻게 기원했는가?
3. 우주의 우발성은 어떻게 지성을 탄생시켰나?
4. 인간은 어떻게 우주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나? 우주의 수학성과 인간의 이성은 어떻게 연결되었나?
5. 우주는 왜 인간이 탄생하기에 적합한 역사를 가졌나?
/ 대화(강영안, 우종학)

 

우주 만큼이나 동식물 진화의 역사도 여러 질문과 신학적 쟁점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합니다. ‘기적적인 창조’와 ‘자연적 방법’은 대립되는 것일까요? ‘기적적인 창조’로 인간이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신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일까요? 진화를 통해 현생 인류로 이어지는 호모 사피엔스가 나왔다는 것은 인간을 그저 하등한 동물로 취급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야 할까요?

 

우스갯소리로 먹고 사는 고민 없이 과학 연구를 하려면 찰스다윈처럼 결혼을 잘하든지, 멘델처럼 수도원 수사가 되든지 해야 하지 않겠냐며 한바탕 웃기도 했습니다. 재정 확보를 위해 정부 연구 과제를 따내야 하는 한국 과학자들의 어려움이 생각나서이기도 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교회 옆 사제관에서 놀고 있는 딸아이를 기다리던 중에 북클럽 멤버인 박상용 성공회 부제님으로부터 몇 권의 책을 소개받았습니다. 대니얼 데닛의 책을 좋아한다고 하시는데요. ‘오리진’이 끝나고 어떤 책이 다음 도서로 선정될지 기대됩니다.

 

 

수원남부 북클럽은 8월은 쉬고 9월 7일(토)에 ‘오리진’(IVP) 11장~끝까지를 대상으로 모입니다. 정기/비정기적으로 참가하실 분들을 늘 환영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인간, Great Mystery> 두 번째 시간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강서/구로 북클럽]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강서/구로 북클럽

네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먹북클럽 답게 백우인 선생님이

평소보다 더 신경써서 준비하신 맛있고 건강한 샌드위치와

샐러드로 즐거운 식사를 하고

책 나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인간, Great Mystery' 두번째 시간이었는데,

아쉽게 못오신 분들도 계셨지만

장현일 이사님과 김고운님이 함께 해주셔서

더 풍성한 나눔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주욱 함께 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

 

 

* 다음 모임은 7월 25일(목)에 가질 예정입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댓글이나 메시지로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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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타락과 진화>를 읽었습니다.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북클럽]

 

 

강서/구로 북클럽의 먹방 사진들이 무척 부러웠던 다음날 분당/판교 북클럽 6월 28일(금) 모임은 사실 🍻 비어 데이였습니다. 😁


안 그래도 평소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가는 모임인데 이 날은 3시간 30분 동안 긴 대화를 나눴더랬습니다. 🍺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양이 많지 않았습니다만 플라시보 효과는 충분했습니다. ^^

 

지난 주일 교회력에 따른 성서 본문은 누가복음 8:26 이하의 마귀 들린 사람 이야기였습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돼지떼가 떼죽음 당하는 이야기로 이어지죠.


인공지능, 빅뱅, 블랙홀, 양자역학을 충분히 이해하는 석학이 아니더라도 성서 속의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마귀를 내쫓는다는 이야기는 현 시대의 시각으로 보기에 좀 불편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에 들린 사람을 정신 질환이나 발작 증세를 앓았던 사람으로, 마귀를 쫓는 행위는 이를 치유하는 것이었다는 ‘세련된’ 해석에 귀가 솔깃하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해석은 유사과학이 창세기 앞 장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보며 해석하는 방식과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마귀 들림을 정신질환으로 치환하는 순간 예수님의 치유 행위도 일종의 (고도의) 의료행위처럼 보이죠. 제게는 저자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해석으로 보입니다.

 

 

인류 다지역 기원설과 인류 역사 30만년의 시간을 생각해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역사 속에 실존한 인물이었다 할지라도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후하게 쳐서 만 년 전의) 이 부부의 후손일 확률은 매우 희박해 보입니다. 이 희박한 연결성 안에서 전통적인 타락,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의) 원죄의 개념이 우리에게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생각은 충분히 개연성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언급한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에 대해서 마치 마귀 내쫓음을 신경정신과적으로 해석하듯이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그런 해석은 뭔가를 놓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교리 경찰을 배출하는 결과를 내는 한국의 배타적인 기독교 역사 속에서 우리는 “A는 B이다” 식의 깔끔한 명제를 요구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싶습니다. 그런데 삶이 그다지 만만치 않던데 혹시 어떠신가요? “내가 해봤는데 말이지~”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

 

* 과신대 분당/판교 북클럽 7월 모임에서는 피터 앤즈의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CLC) 책으로 토론 시간을 갖습니다. 정기/비정기적으로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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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수원 남부 북클럽]

 

 

글_ 오세조

 


여행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좋은 안내서는 필수이다. 물론 사전 정보 없이 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 경험적으로 보면 여행을 통해 얻는 것이 별로 없다. 이런 현상은 책도 마찬가지이다. 출판시장에 나오는 책들은 엄청나지만, 독자로서 과연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많다. 책의 사전 정보 없이 출판사의 화려한 홍보에 책을 구입하면, 낭패를 볼 때가 많다. 이런 이유로 대중들은 일단 유명 저자들의 책은 믿고 사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유명 저자라고 해도 다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유명 저자의 책에 대해 각 분야 전문가들의 평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책은 재미가 없고, 너무 어렵다. 이처럼 책의 독자로서는 전문가들에게도 인정받으며, 쉬운 책을 고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특별히 과학책의 경우는 더욱더 심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정모 관장의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은 가뭄 속의 단비와 같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이정모 관장 스스로가 밝혀 듯이 2007년부터 그동안 쓴 서평들을 모은 책이다. 물론 출판을 위해 새로 손질은 했다. 과신대 회원으로서 반가웠던 점은 과신대의 대표인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교향곡』의 서평과, 과신대 자문위원인 이상희 교수의 『인류의 기원』의 서평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모든 책들을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의미도 없다. 대신 머리말에 등장하는 이정모 관장의 대학교 선배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정모 관장에 따르면, 그 대학선배는 노트를 4등분한 후, 두 번째와 세 번째 칸을 합하고는 이곳에 ‘책에서 얻은 정보’를 파란색 볼펜으로 쓴 후, 첫 번째 칸에는 관련 있는 ‘다른 책의 정보’를 빨간색 볼펜으로 적고, 네 번째 칸에는 검은색 볼펜으로 ‘독후감’을 썼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약 200권 정도를 정리했다고 한다. 물론 이정모 관장도 따라 했지만, 볼펜을 자주 잊어버려서 곧 포기했다고 한다. 하긴 이정모 관장이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컴퓨터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라, 볼펜이 필수였다.

 

하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급화 된 현대에 이런 형식의 자신만의 책 노트를 볼펜이 없다고 못한다는 것은 핑계인 것 같다. 충분히 한 번 시도해볼만한 좋은 방법이다. 인터뷰를 기회로 이정모 관장과 페이스북 친구 된 지금, 한 가지 부러운 점은 이정모 관장이 다른 과학작가들과 매우 친하다는 것이다. 하긴 이런 이정모 관장의 성격 때문인지 그의 글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게 읽힌다. 그러나 신뢰가 간다.

 

요즈음에 ‘뇌호흡’ 등의 사이비과학이 점점 더 극성이다. 캐나다 오타와 대학의 김우재 교수가 이를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이런 시대에 신뢰할만한 책을 추천하는 이정모 관장의 이 책은 올바른 과학지식을 얻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여행안내서가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장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단점. 바로 이정모 관장이 추천한 책을 사기 위해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정모 관장의 말대로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구입한 책 가운데 읽게 되는 것이다. 이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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