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왜 자꾸만 과학이 되고 싶어 하는 할까요?

우종학,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IVP, 2014)


강사은


왜 신앙은 자꾸만 과학이 되고 싶어 하는 걸까요? 
그것은 어쩌면 신앙은 사람들에게 
'반지성적인' 것으로 취급받고 
과학은 '신적 대우'를 받는 시대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의 영역에 두어도 될 것을 굳이 과학으로 연결하거나 
과학의 영역에 두어도 될 것을 굳이 신앙의 영역으로 귀속시키려는 것은 
엄연히 범주의 오류에 속하겠습니다.

지적설계를 두고 한 말입니다.


지난 16일 수원 남부 북클럽에서는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9장. 지적설계비판
10장. 창조기사 이해하기
11장. 진화 창조론 이해하기을 읽었습니다.


아쉽게도 북클럽 최연소 멤버(초등 6학년)는
집안 일로 참석을 못했습니다.
날카로운 질문 세례에 발제자가 땀 흘리는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보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


무크따의 마지막 2장은 개정판에서 추가된 내용입니다.
우종학 교수님이 긴 시간 강연을 다니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을 모은 장입니다.
북클럽에서 앞으로 토론할 주제이기도 하겠습니다.


과신대나 북클럽은 대화를 꽤나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각자의 입장, 전통이 다르겠습니다만
함께 만나서 좋은 책과 함께 건강한 토론을 하면
서로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조금 앞선 이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진에서 두 사람이나 빠졌습니다.
역시 북클럽에서 사진은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합니다. ^^

다음 모임에 새로 참여하실 분들을 환영합니다.


[수원남부 북클럽 모임]

일시 : 3월 16일 오전 10:30분
장소 : 성공회 제자교회(http://agnes.or.kr)
책 : 오리진(IVP)
독서 분량 : 1장~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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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파사데나 과신대 북클럽 모임 후기

아주 명쾌한 진화론 수업 | 장수철, 이재성 | 휴머니스트 | 2018


김영웅 박사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창조세계, 즉 인간을 포함한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것도 응당 포함된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할 때, 성경이라는 책과 자연이라는 책을 각각 신학과 과학이라는 언어로 풀어낸 인간이 두 책 모두의 저자인, 한 분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은 반드시 모순이 없고 조화로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사가 증명하듯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일부 신학자를 포함한 지식인들은 과학의 발달이 기독교 신앙을 위협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하나님을 보호하고자 (어찌 인간이 하나님을?!) 자명한 과학적 사실까지 부인하기에 이르렀고, 자칭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실은 과학이라 부를 수도 없는 유사과학 (창조과학)을 내놓아 그들의 문자적인 성경 해석을 옹호하고 고수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의 기원과 인류의 기원, 그리고 우주의 탄생 등을 설명하려는, 여러 분야에서 독립적으로 연구된 순수한 과학 결과와 정립된 이론을 ‘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서 마치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처럼 누명을 씌웠다. 과학을 이용해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하여 자신들의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고집하려고 했으나, 정작 그들이 잡았던 것은 과학이 아닌, 맹목적인 믿음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거짓 정치였다. 합리적인 논리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증거가 전무한, 그저 ‘거룩한’ 말들의 장난으로 위장한 가짜 과학이었다. 그들은 자칭 순수했던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이 타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심각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 의해 결국엔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이 옳다고 증명되었을 때도 그들이 두려워하던 일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지동설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에 반하는듯한 성경본문을 문학적으로 읽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문자적 해석에 갇히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거나 대적하는 행태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런 일련의 수정된 성경해석이 더 이상 불경스럽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이런 시대에 창조과학을 위시한 문자적 성경해석을 또 다시 들고나와 논쟁거리로 삼는 일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거나 우린 이런 웃픈 현실을 마주하고 있으며, 이런 오래된 갈등을 해결해야만 하는 일은 시대적 사명이 되었고, 누군가는 이러한 숙명을 앞장서서 짊어져야 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대화가 단지 학문적인 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개인의 기독교 신앙과 주류 성경해석의 수정 등이 모두 관련된 문제임을 이해할 때, 이 대화의 중요성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제는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장수철과 이재성이 함께 쓴 '아주 명쾌한 진화론 수업'이라는 책으로 두 달 만에 모였다. 작년 늦여름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주로 유사과학인 창조과학의 역사와 문제점을 이해하고 함께 관련 서적을 읽으며 토론하는 방식으로 이어져왔다.



진화에 대한 오해가 난무한 보수기독교 상황을 감안할 때, 제대로 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선 진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 같은 생물학자에게는 학부 때나 대학원생 시절에 배웠던 것을 간추린 내용에 불과했지만, 현직 신학자와 목회자에게는 의미가 달랐을 것이다. 비록 디엔에이의 변이 메커니즘 같은 구체적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진화의 정의와 성질을 이해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다. 적어도 진화에 대한 오해에선 해방되었으리라 믿는다.


먼저 책을 잘 정리해주신 문순옥 박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어제 토론 시간에 나왔던 내용들이 몇 있는데, 중요한 것 하나는 우리 모임의 방향에 대한 부분이었다. 창조과학자들의 오류와 문제점을 밝히고 대항하는 차원에 머물지 말고, 진영을 가리지 않고 과학을 사실로 인정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모두가 관심을 가질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을 더 깊고 넓게 이야기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인간이 흙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단순한 구조를 가진 단세포 동물부터 시작해서 오랜 시간 동안 유전자 변이와 환경의 변화에도 적응하여 살아남으며 진화를 거듭해온 결과 중 하나라는 진화론의 설명을 받아들일 때, 과연 아담의 기원과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원죄라 불리는 사건의 의미, 그것에 대한 바울의 해석 등등의 재해석은 필히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엔 성경해석 문제로 수렴된다고 보기에 신학자들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의 부인할 수 없는 결과들을 가지고 어떻게 기본적인 기독교의 진리와 가르침을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하나님 말씀이라 믿는 성경을 다시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과신대의 최종지향점이 될 것이다.


과신대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창조과학자들이 아니다. 변화하는 (주로 과학 덕분에) 시대에 대응하여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변하지 않는 성경을 통해 어떡하면 바로 알아가느냐 하는 고민이다. 하나님도 성경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바뀔 수 있는 부분은 ‘해석’일 것이다. 좀 더 치열하게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깊어지고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 달 모임은 이상희 교수님의 ‘인류의 기원’을 함께 읽고 나누기로 했다. 마침 흔쾌히 초대에 응해주신 이상희 교수님의 배려로 이 모임은 저자직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2월 21일 목요일 저녁 7시 파사데나 장로교회 2층 도서실에서 모일 예정이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환영한다. 드디어 인간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아마 보수쪽에선 가장 마지노선에 있는 이슈가 아닌가 한다. 참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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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부천 북클럽]



인류의 진화와 인간의 성장

박영식, <창조의 신학>(동연, 2018)


최경환



12월 11일 2018년 과신대 부천 북클럽 마지막 모임을 가졌습니다. 부천 북클럽은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모이는데, 대부분 서울신대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마 가장 젊은 북클럽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2018년 마지막 모임이라 1시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앞 분식집 '응급실'에서 굉장히 고급스러운 떡볶이를 먹었습니다.


내년에는 어떤 책으로 어떤 내용을 다룰지 기대가 됩니다. 새롭게 북클럽지기로 섬겨주는 박정탁군에게도 감사드리고, 모임을 이끌어주신 박영식 교수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모임에 나온 이야기를 간략하게 적어 봤습니다.


1. 그동안 조직신학에서는 ‘섭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 사실 교회의 전통 속에서는 그보다 ‘계속적인 창조’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이미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이 사용한 용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존하신다. 협동하신다.’ 이런 개념들이 있었다. 항상 피조물들과 함께 연동해서 일하신다는 개념이다.


2. 인간 외에 다른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는가? 반대로 질문해 보자. 인간에게는 과연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 있는가? 생각하는 기능? 이렇게 되면 서양에서는 이를 신적인 기능이라고 봤다.


3. 인류의 진화를 한 인간의 탄생과 성장의 과정으로 설명해 보자. 이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세포분열을 하고 성장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어머니가 뱃속에서 아이를 품고 있듯이. 그 아이가 성장해서 나중에 '나는 누구인지, 아버지는 누구인지' 묻게 되는데, 그런 질문을 하는 순간을 우리는 정확하게 언제인지 모른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추상적인 질문을 하게 되고 우리는 그 순간을 영혼의 발생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4.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창조와 자연악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했다. 하나님이 만든 창조 세계에 왜 쓰나미와 지진이 일어나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했다. 자유의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원인과 근거를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근거이지만 이 세상의 악의 원인은 아니다. 마치 부부가 서로 사랑해서 낳은 아이가 나중에 병에 걸렸다고 해서, 그 부모에게 병의 원인을 돌릴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병의 근거는 될 수 있다. 자연악은 피조 세계의 자율성과 자유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가 아프면 부모가 전혀 모른 척 하지 않는다. 함께 아파하고 그 고통에 동참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자연악의 관계도 이와 같다.


문의 scitheo.office@gmail.com / 070-4320-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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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북클럽]



십자가와 와인 한 잔

김근주, <복음의 공공성> (비아토르, 2017)


강사은


지난 1년간 교회 설교를 통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쩨다카'와 '미슈파트', 

즉 '공의와 정의'를 김근주 교수님의 '복음의 공공성'을 

통해 보게 됩니다. 

'왕'으로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자(벧전 2:9)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이것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틀인 

재판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한 마디로 권력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이방인, 고아, 과부 같은 힘없는 

이들을 보호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말이죠.



창세기는 처음부터 

신학적 의도가 담긴 책이지 

우주와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사람과 동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는 글에서는 구약학자의 힘이 느껴집니다. 

굳이 과학과 연결시키지 않아도 

성서로 하여금 성서가 되게 하는 힘 말이죠.

2018년 마지막 모임의 아쉬움을 

한 잔의 와인에 담아 정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와인잔을 들고 기념 촬영부터 해요" / 찰칵!

"아! 이왕이면 십자가가 보이는 배경으로 찍을까요?" / 찰칵!

"셀카 모드로도 찍죠. 요즘 그렇게들 하던데..." / 찰칵!

"초도 불어야 겠네요~" / 후~

2018년에 함께 하지 못하셨더라도 걱정 마시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1월을 주신다네요. 오우 예~ ^^


문의 scitheo.office@gmail.com / 070-4320-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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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수원남부 북클럽]





'커피파'와 '라면파'

우종학,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IVP, 2014)


강사은


요즘 유행하는 ‘찍먹파’와 ‘부먹파’ 논쟁을 아시는지요?


본래 탕수육은 규정상 부어 먹는 요리라고 되어 있으나 배달문화와 겹치면서 눅눅해짐을 방지하기 위해 따로 포장하게 된 것이 이 논란의 발단이라고 합니다. 배달 과정에서 면이 불게 되는 것이 싫어서 왠만해서는 배달시키지 않는 저에게 둘 모두 일리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탕수육을 둘러싼 이 철학적 논쟁에 못지 않는 ‘커피파’와 ‘라면파’ 이야기가 무크따에도 있습니다. 주전자에 담긴 물이 끓고 있는 것을 보면서 두가지 관점의 설명이 가능한데요.


첫번째는 '과학적 설명으로 열이 가해져서 물 분자가 활발히 활동하기 때문에 물이 끓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엄마가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물을 끓이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문제는 이 두가지 관점의 설명을 굳이 결합시키려고 할 때 생깁니다. 바로 "물의 온도가 100도가 된다는 것은 곧 엄마가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연결시켜서 진리라고 믿어 버리는 것이죠.


여기에서 '커피파'와 '라면파'의 논쟁도 나오겠습니다. 사실은 엄마가 커피가 아니라 라면을 먹고 싶어서 끓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라면파'가 등장하는 것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교파의 차이는 아마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물의 끓는 점이 100도가 아니라 120도인 것으로 과학의 내용이 바뀌면 어떻게 될까요?


과학적 방법 관점에서 120도로 변경되는 것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겠습니다. 과학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하지만, 커피를 먹기 위한 것이냐 라면을 먹기 위한 것이냐에 대한 논쟁은 변할 수 있는 과학적 사실과 강하게 연결시켰던 것으로 인해 그 믿음 체계에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노래 가사에는 소금에 절여진 고등어를 발견한 소녀(소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가사를 보면서 저는 궁금했습니다. '저 고등어는 과연 아침 반찬으로 올라갔을까?' 그 소녀(소년)의 이성적이고 경험적인 바램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제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수원 남부 북클럽 모임에는 중학생과 초등 5학년 학생이 당당한 일원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냥 따라온 것이 아니라 책 내용과 발제 내용을 이해하고 토론하고 질문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습니다. 무크따를 이해하는 최소 연령으로 초등학생이 확인된 날이고 북클럽 참가자들의 평균 연령을 확~ 낮춰준 날이기도 합니다. 우종학 교수님~ 무크따는 초등학생도 이해하는 명서입니다. ^^


수원 남부 북크럽의 다음 모임은 아래와 같고 장소와 간식까지 준비해 주신 김진세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모임 일정>

일시 : 2019년 1월 19일(셋째주 토요일) 오전 10:30분

장소 : 성공회 제자교회(http://www.agnes.or.kr)

독서분량 : 무크따(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9장~끝.

문의scitheo.office@gmail.com / 070-4320-2123


* 커피파와 라면파에 대한 이야기는 무크따 pp.120~121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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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서울 남부 북클럽]




진화는 왜 사실인가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을유문화사, 2011)


우종학 (과신대 대표)


* 이 글은 우종학 교수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가져왔습니다. 


세 분이 새로 오셔서 활기가 더해졌습니다. 북클럽 카톡방에는 30명이 넘는 분들이 있는데 거쳐가신 분들도 있고 꾸준히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끝날 때 한 분이 이야기하길, 3년 넘게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점점 겸손하게 된다고 합니다.


제리 코인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의 전반부 1-4장을 읽고 나누었습니다. 다들 과학책이 너무 재미있답니다. 쉽게 논리적으로 쓴 저자의 글솜씨도 있겠지만 진화에 관한 내용들을 따라 읽는 과정이 사실 흥미롭습니다.



1장은 진화란 무엇인가를 다룹니다. 6개의 키워드가 나옵니다. 1) 진화 2) 점진주의 3) 종의 분화 4) 공통조상 5) 자연선택 6) 자연선택이 아닌 다른 진화의 기작. 이 개념들을 각각 설명하는 책의 도입부입니다.


진화는 유전자 변이를 통해 긴 시간 동안 종이 변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것이 매우 길게 점진적으로 쌓이면 공통조상에서 종이 분화합니다. 그렇게 분화시키는 힘이 자연선택을 비롯한 몇 가지 메커니즘입니다.


2,3,4장은 진화의 증거를 다룹니다. 화석의 증거, 흔적기관과 배아, 그리고 생물지리학의 내용이 각각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던 시절에는 화석의 기록이 변변치 않았고 주로 생물지리학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 화석의 증거는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들이 중고 시절에 생물학을 배웠을 때와도 다르게 전이 화석들도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어류와 양서류의 출현시기 사이에 해당하는 지층을 뒤져서 찾은 전이 화석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시간에 따라 종의 변화를 보여주는 화석의 기록을 보면 바로 지울 수 없는 흔적이라는 책 제목이 연상됩니다.


흔적기관들과 배아도 강력한 증거입니다. 인간도 뱃속에서 열 달을 지내는 동안 어류, 양서류, 파충류의 배아의 모습을 거쳐갑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진화는 새로운 것을 뚝딱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옛것을 고쳐서 새롭게 만드는 일이니 우리 몸의 DNA는 옛 조상의 정보들을 상당히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인간의 배아의 모습이 그동안 거쳐간 진화 과정을 거치며 변하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왜 그런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창조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신이 일부러 보여주는 계시일지도 모릅니다. ^^



생물지리학은 참으로 강력한 증거입니다. 하와이나 갈라파고스 같은 대양 섬들에는 대륙에 사는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들이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대양 섬에 존재하는 동식물은 주로 가까운 대륙 연안에 분포하는 동식물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대양 섬에서 격리된 채로 진화가 일어났음을 잘 보여줍니다. 다윈이 영감을 얻은 것도 바로 이 점이었지요.


화석의 증거, 흔적기관, 생물지리학 이렇게 3가지로 증거를 제시하지만 아쉬운 점은 유전자 정보를 다루지 않았다는 겁니다. 종과 종의 유사성과 분화 과정을 정량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인 유전자 유사성의 증거가 책에는 별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2009년에 출판되었고 그때는 겨우 인간 게놈의 지도가 완성되던 시절입니다. 물론 지금은 맞춤형으로 한 개인의 유전지도를 분석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비용이 백만 원이고 미국에서는 몇십 불짜리 키트도 있다죠. 10년 동안 게놈 분석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말입니다. 동물들도 유전자 분석을 통해 진화 과정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10년 전에는 그런 정보가 별로 없었을 테니 이 책에는 그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아쉬운 점입니다.


전반부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자는 창조론이 틀렸다며 계속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창조론은 즉각적 창조론입니다. 생물들을 따로따로 설계해서 즉각적으로 만들었다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의 입장을 깝니다.



왜 많은 교인들이 즉각적 창조와 진화적 창조 중에서 즉각적 창조를 선호할까라는 질문에 몇 가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1. 우선 성경이 즉각적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경해석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진화적 창조를 배제하거나 즉각적 창조만이 옳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2. 성경은 오히려 즉각적으로 일하시기 보다 긴 과정을 거쳐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을 200만 명으로 즉각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내도록 400년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협력하여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3.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다양한 생물종들을 즉각적으로 만드는 대신에 긴 과정을 거쳐서 필연과 우연을 거치면서 유전자 변이와 종의 분화가 일어나도록 자연에 자율성을 줍니다. 하나님은 자연과 협력하여 창조 과정을 섭리합니다.


4. 하지만 우리 인간은 즉각적인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시험을 잘 보게 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을 원합니다. 내 욕망과 욕심을 채워주시는 그런 기적적인 하나님을 선호합니다.


5. 그러니 즉각적 창조를 진화적 창조보다 더 선호합니다.



6. 물론 이는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우리가 만들어 낸 하나님의 모습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은 그렇게 알라딘 램프의 지니처럼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즉각적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7. 더군다나 진화적 창조는 왠지 인간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인간을 창조해야 인간이 특별해질 듯합니다. 참 이상한 심리이지요. 인류가 기적적으로 창조되었더라도 나는 기적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닌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아담은 모르겠지만 나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통해 세포분열 과정을 통해 창조되었으니까요. 내가 그런 방법으로 창조되었다고 해서 존엄하지 못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8. 즉각적 창조는 하나님이 뭔가 일하시는 것 같지만 진화적 창조는 약간 이신론 같다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자연이 스스로 진화를 시켜낸다는 그런 오해 말입니다.


9. 하지만 근대과학 이후에 이런 이신론적 느낌은 계속 있어왔습니다. 물리학에서는 뉴턴이 중력으로 천체들의 운동을 설명했고 마치 하나님 없이 별과 행성들이 운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물리학은 다 받아들입니다. 물리학은 이미 포기했으니 생물학이라도 붙들자는 말일까요?


10. 사실 진화가 일어나는 과정, 그 우연의 과정을 통해 우리 인간이 출현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을 만큼놀라운 일입니다. 유전자 변이가 무작위적으로 일어나고 진화가 방향성 없이 흘러온 것 같지만 그 모든 과정은 신의 역사요 섭리요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11. 즉각적 창조가 맞나 진화적 창조가 맞나 하는 문제는 물론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적 창조를 받아들이면 많은 것이 변합니다.


11.1 우선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바뀝니다. 천지를 뚝딱 창조한 분이 아니라 오래 참음과 자기를 비움으로 그리고 자연에 자율성을 부여하여 공들여 창조한 분입니다. 마치 10달 동안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를 태교하며 마침내 출산을 통해 아기를 낳는 어머니처럼 하나님은 천지를 그렇게 보듬어 창조하셨습니다.


11.2 인간에 대한 시각도 바뀝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지만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특별한 존재로 삼으셨고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촘촘하게 미리 짜두신 계획을 어떻게든 알아내어야 하는, 마치 미로찾기 임무가 주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껏 창조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존재입니다.


11.3 자연에 대한 시각도 바뀝니다. 인간은 만물을 파괴할 권리를 가진 폭군이 아니라 창조계의 한 구성원으로 함께 지음 받은 가족입니다.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지킬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11.4 성경에 대한 시각도 바뀝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의 표현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기보다는 나의 성경해석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가게 됩니다. 도그마적인 태도를 버리고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크심과 놀라우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도 공부하고 성경도 공부하고 신학도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과신대 북클럽에도 참석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숙하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한국교회가 성숙하려면 바로 내가 성숙해져야 합니다.



12월 모임 안내

* 모임 일시: 12월 11일(화) 저녁 7시
* 모임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6층 세미나실 (서울 관악구 쑥고개로 122)
* 읽어 올 내용: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5~9장
* 문의: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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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수원 북클럽]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드디어 오늘 수원남부 북클럽이 시작되었습니다. ^^
환영 안내지를 미리 준비해 주신 성공회 제자교회 김진세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감동했습니다. 별 것 아닌데 왜 이리 고마운지.... ㅎ~


첫 모임이니 만큼 각자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목사님이 있는 곳에 다녔으나 세월호 사고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실망한 나머지 가나안 신자가 된 분도 오셨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2017년 4월 16일은 게다가 부활주일이었는데 그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예배 내용에 실망했던 저의 기억도 소환되었습니다.



무크따(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1~4장을 통해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과학과 신앙에 대해 갖고 있던 오해들을 하나 하나 해체하고 정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에 의존하는 신앙은 과학주의에 기반한 무신론의 공격에 취약합니다. 신앙인 스스로 하나님의 영역(전염병, 낙뢰, 태풍 같은)을 축소하여 버린 결과죠.


아이가 파란 하늘을 가리키며 저 하늘에 천사가 있고 하나님도 계시냐고 묻는다면 오늘의 정상적인 기독교인 신자라면 누구도 하나님이 저 구름 너머 혹은 안드로메다 은하 너머 어딘가에 있다고 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비행기가 날고 구름이 떠 있는 '하늘'과 신앙의 '하늘'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어려워하는 진화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화, 진화론, 진화주의' 이 3가지를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우리 모임에는 진화학 석사와 면역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루터교 오세조 목사님(팔복 루터교회)이 함께 하십니다. 진화는 지금도 관찰되는 자연 현상이며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진화론, 생명과학이겠고 이런 과학이론에 기반해 무신론적 해석을 하는 태도를 진화주의라 하겠습니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통합론의 관점으로 보는 창조과학과 무신론자들이 상정한 신은 '틈새의 신'에 지나지 않고 이 신을 놓고 벌이는 줄다리기는 아무리 봐도 과학으로 무장한 무신론자의 승리로 결론이 날 것 같습니다. 유사과학으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비록 실재의 한 파편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을 엉뚱하게 이해하고 이웃에게 그릇 행하는 과오는 피하고 싶습니다. 과신대 북클럽이 그런 면에서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늦지 않게 수원 남부 북클럽에 합류하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누구든 오실 수 있습니다.



* 모임 장소: 성공회 제자 교회(http://agnes.or.kr경기도 오산시 세남로14번길 25, 대한성공회 오산 세마대 제자교회
* 다음 북클럽 일정: 2018년 12월 15일(토)
* 문의: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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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북클럽]




김근주,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성서유니온, 2017)


조중식



후기의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새로 합류하신 최윤희 선생님의 인사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뜨게 되어 무척 죄송했습니다. 변명 같지만 이래서 환영 인사 및 자기소개는 모임 초반에 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장장 11페이지에 걸쳐 발제문을 써 오신 정훈재 선생님의 노고에 합당한 대우를 해 드리기 위해 멤버들 마음이 다들 급했나 봅니다. 앞으로는 발제문 분량을 최대 5페이지로 제한하고, 이를 초과할 시 모임에서 강퇴시키는 규정을 만듭시다(썰렁했다면 죄송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하지 않으면, 진
리를 전달하는 매개를 진리 자체와 혼동해 버리기 쉽고
그때 마다 교회는 세상의 빛은 커녕
세상의 화근으로 전락하곤 했다.”


성경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읽기 방식(그런 것을 나름 정리해서 ‘내 읽기 방식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이 부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선 성경을 많이 안 읽었고(꾸준히 읽으려고 시도를 안 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여전히 성경에 대해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죠. 그런데 김근주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한국 교회는 오히려 성경을 지나치게 많이,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암기 하듯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무슨 책이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간단히 ‘하느님의 말씀’ 이라고 답할 테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느냐고 재차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듣게 될까요?


솔직히 저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대답이랍시고 불필요한 말들을 지루하게 늘어놓았을 테지요. 하지만 이제는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말 할 수 있어 기분이 매우 상쾌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책이다.”


책 제대로 안 읽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불법 복제 수준의 발제문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성경읽기의 목적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의 글이다’, ‘비판적으로 읽기’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써머리를 제공하며 질주하다가, ‘성경 본문을 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캐며 잠시 거친 숨을 골랐습니다. ‘공동체적 읽기’란 무엇인가?


제 기억에 최윤희 선생님께서 대강 “당신들 교회에서는 공동체적 성경읽기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셨던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의 ‘공동체적 읽기’는 분명 자신이 속한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성경 공부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범위의 ‘공동체적 읽기’가 ‘개인적 읽기’에 잠재된 위험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기 어려울 때도 있으며, 이는 결국 ‘공동체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확장하느냐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발언이 이어졌습니다(누가 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많은 분들께서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유익한 말씀을 주셨습니다(자세한 기억은 없습니다). 저도 김란희 선생님처럼 속기사 수준의 현장 메모를 했다면 꼼꼼하게 다 적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쉽네요.




여하튼 다시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발제문은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대목에 이르러 온누리교회 문창극 장로를 소환합니다. “일제 강점기는 바빌론 유수가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이었나?” 이 물음 안에는 꽤 많은 지뢰, 부비트랩,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대충 정리하고 논의의 초점을 모으는데 제법 긴 시간을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장로님 욕보셨습니다.


이어 신통방통한 발제문은 ‘성경 본문의 역사 : 본문의 배열과 편집이 본문 이해에 주는 의미’를 더듬고,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2회로 나누어 집중 고찰한 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기 위해 막판 스퍼트를 했는데, 이때부터 집에서 오는 긴급 호출 전화에 신경이 쓰여 솔직히 발제문 보다 시계를 더 많이 보았습니다. 후기 마무리가 김빠진 사이다처럼 된 건 순전히 제 불찰입니다.


심현준 선생님. 볼펜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주실까 잠시 궁금했지만 귀찮아서 묻지 않았습니다. 석기병 선생님. 마지막까지 궁금하신 것이 많으신 듯 보였는데, 제가 본의 아니게 흐름을 끊은 것 아닌가 싶어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짜증 안 나셨죠? 이미선 선생님. 지난번 모임 때 교회에 아이를 데려와 놀려도 되냐고 물으시더니 이번에도 혼자 오셨네요. 박철성 선생님. “사진 잘 봤습니다. 분위기도 훈훈해보이고...” 라니요? 어제 오신 분은 쌍둥이 형제분이신가요? 김자현 선생님. 저는 비록 일찍 자리를 떠 듣지 못했지만, 모임 말미에 깊이 있는 한 말씀 저희에게 들려주시고 가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강사무엘님. 끝까지 뒷정리를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여간 일복은 진짜 타고나신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란시스님... 땡큐.



12월부터는 김근주 교수님의 『복음의 공공성』으로 3개월 간 모임을 진행합니다. 


<분당/판교 북클럽 12월 모임 안내>
일시 : 12월 11일(화) 저녁 7:30
장소 : 성공회 분당교회
책 : 복음의 공공성(김근주)
북클럽지기 : 강사은(overfro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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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인천/부천 북클럽]




10월 16일(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인천/부천 과신대 북클럽 모임을 가졌습니다. 

지난 달에 이어서

이번에도 박영식 교수님의

<창조의 신학>으로 진행했습니다. 


각자 2장, 4장, 6장을 읽어오고

질문을 3개씩 만들어 오도록 했는데,

정작 2장에 대한 토론이 길어져서

4장, 6장은 시작도 못했습니다. 



북클럽에 참석하신 분들이

모두 책을 열심히 읽어와서 그런지

질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과

죽음 이후의 몸의 부활에 대한

토론이 활발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들었던 내용도 아니고

상당히 낯설고 새로운 내용이라 그런지

모두들 충격을 받은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박영식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질문을 잘 경청해 주시고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셔서

은혜롭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



매주 교수님께서 각각 종류대로

맛있는 간식도 준비해 주시고

학생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앞으로의 모임도 기대가 됩니다. 


다음달 모임은 서울신대 신학과 학생회와

과신대가 콜라보로 진행하는

과신톡으로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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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와 과학자의 유쾌한 대화로 풀어가는 과신톡]

http://scitheo.tistory.com/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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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파사데나 북클럽]




벽을 넘어서 | 김영웅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



과거엔 많은 것들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들을 밝힐만한 지식과 기술이 부재했다. 문명의 발달은 이를 가능케 해주었다. 그로 인해 인간의 호기심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미신적인 믿음 또한 점차 사라져갔다. 과학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많은 것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치며, 과거의 몇몇 천재들이 착상해낸 가설이 시대를 앞선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기도 하고, 이와 반대로 여러 관측과 실험을 통하여 그 가설이 그저 상상력의 발현으로만 남게된 경우도 있다. 많은 천재들의 직관도 시대를 뛰어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는 이유는 전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검증과정이 수도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한 이론이 정립되기까지는 이렇듯 끝없는 자정과정이 수반된다. 그리고 이는 과학의 숨은 힘이자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런 과학적인 증명과 검증과정은 고대 근동 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세계관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성경이 씌여졌다고 믿는 건 결코 성령이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썼다고 보는 축자영감설을 의미하진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다. 많은 것들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것들을 밝힐만한 지식과 기술이 부재했던 그 시대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텍스트 안에도 문명의 발달로 인해 과학적인 사실로 밝혀진 많은 것들에 의해서 재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오류라고도 할 수 없는 (의도적이 아니라 한계였기 때문에) 오류를 찾아낸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버리거나 성경이 거짓신의 장난으로 둔갑하지는 않는다. 믿음과 신앙이라는 것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이미 믿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런 세세한 오류들을 다 솎아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앙은 이해를 동반하지만, 이해했다고 해서 믿음과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그야말로 신비다. 믿는 자들은 이를 은혜라고 표현한다.



방식은 의미를 대체할 수 없다. 의미를 방식 안에 가둘 때 오류와 갈등이 생겨나는 건 피할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을 문자 안에 가두는 행위를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 칭했던 행위에 비유한, ‘아론의 송아지’의 저자, 임택규 (Taeck Kyu Yim) 선생님의 저자직강이 어제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에서 있었다. 12명이 참석했던 어제 저녁, 모임 자리를 흔쾌히 내주신 파사데나 장로교회의 담임 이동우 (Dongwoo Lee) 목사님의 배려로 진지하고 깊은 대화가 2시간이 넘도록 오갔다. 1시간 가량 진행된 임택규 선생님의 몰입할 수밖에 없는 강의는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적인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는 알다시피 유사과학을 넌지시 배격하기 위함이었다. 힉스 입자에 대한 장황한 설명조차 과학자인 나에게도 과학적 방법과 과정에 대한 경이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반대급부로 유사과학이 더욱 터무니없는 장난으로 자연스럽게 여겨졌음은 당연한 결론이었다. 강의는 과학자인 나같은 참석자보단 과학을 업으로 하지 않는 참석자들에게 더 큰 유익이 있었던 명강이었다 (임택규 선생님은 진짜 가르치는 선생 역할이 너무 잘 어울리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모임엔 창조과학이란 이름을 스스로 사용하는 유사과학자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이 말은 모두가 유신 진화론자라는 걸 의미하지도 않는다. 편을 가르고 적을 배격하는 방식은 이 모임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지향점은 결국 모두가 불필요한 다툼없이 서로의 관점을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인정하고 함께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좀 더 풍성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창조과학자들의 비합리성을 부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비합리성을 부수다가 인간을 부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합리성은 그들의 내면 깊숙한 어딘가에 뿌리내려 결코 칼로 말끔히 그곳만을 도려낼 수 없다. 끈끈히 연결되어있다. 만약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인간을 부수게 된다면 배는 산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 대화 역시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벽’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의도적 거절’이란 용어와 연결되었다. 창조과학자들의 숨은 입장을 잘 대변해주는 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한계를 좀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난 이 부분에 좀 더 많은 토의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자들과의 대화가 어느 선에서 멈춰버려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그것은 그들이 더 이상 합리적인 논리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그들 스스로 본능적으로 쳐버린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 너머의 세계는 절대 외부로부터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는 무너뜨릴 수가 없다. 오히려 개인적인 신앙의 이면과 숨겨졌거나 감춘 과거의 경험과 연결이 되어 있다. 이 영역은 다분히 감정적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 영역에서 영육간의 유익을 얻어왔고 자신이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붕괴될 수 있는 어떤 선을 지나치는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과학적인 방식을 넘어서 이러한 영역까지도 다룰 수 있는 어떤 해결안이 모색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창조과학자들이 아무런 과학적 근거없이 유신진화론자들이 내놓은 과학적 사실에 흠집을 내곤 하는데, 그것에 반하여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에 그친다면 결국 대화는 공격 무기밖엔 되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단순한 창조과학 해체가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한 바른 성경해석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즉 많은 것들이 기존에 믿어왔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 (이를테면 어떤 성경의 사건이 허구라고 밝혀지던지...) 우리의 목적이 있지 않다. 중요한 건, 그런 오류를 발견해내고 사실을 밝혀내어 미신적인 믿음을 깨부수고 난 이후, 그럼 과연 어떻게 그 부분의 성경을 하나님의 경륜에 어긋나지 않게 해석해야하느냐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어찌보면 후반으로 갈수록 과학자들보단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주어지리란 예측을 할 수 있겠다.


기독교를 변호하고 수호하려는 창조과학자들의 초기 의도와는 달리 그들이 결국 이뤄낸 것은 과학과 신학 사이의 큰 간극이다. 안타깝지만 이미 그건 역사가 되었다. 그들이 벌려놓은 간극을 메우기 위하여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이 움직임 가운데 우리 모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다시 한 번 임택규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모인 참석자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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