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은 과학적 합리성을 부정할까?”

성경, 바위, 시간 | 데이비스 영, 랠프 스티얼리 | IVP | 2018


박종범



이번 서평을 준비하며 올해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직면한 학문적 결핍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난 4년간의 신학대학교 재학 중, 나는 성서의 창조를 믿으면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라는 수업을 통해 알게 된 브라이언 그린을 통해 쿼크나 힉스, 초끈 이론이나 M 이론 등의 양자역학의 영역에 조그마한 관심을 가져왔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학문적 관심은 아니었다. 합리적인 신학도이자 신앙인으로 보이기 위해서 양자역학자들의 이론을 우주론에 대입해보기도 하고, 알리스터 맥그래스 같은 저명한 신학자의 저서를 쌓아두고 읽으며 그들의 신학적 작업이 나와 동일하다는 것처럼 포장하기도 했다.


서평의 첫 단락부터 자기반성을 하는 이유는, 나의 신학적 무지함으로 인해 젊은 지구 창조론은 성서를 절대 무오로 믿는 이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라는 그동안의 오만함을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나는 창조에 관해 이렇게 생각해왔다. “창조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믿으며, 창조에 대한 탐구는 합리적으로 열려있다.” 이 말은 스스로에게 창조 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안정감을 갖게 했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던 젊은 지구 창조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합리적 신학도의 이미지를 굳히기 위한 것이었고, 나의 성서 이해는 현대의 과학적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일말의 우월의식이었다. 이 자리를 통해 성서를 하나님의 무류한 말씀이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사과를 드리고 싶다.


특별히 나는 이번 신간 속 보수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두 저자, ‘데이비스 영랠프 스티얼리박사가 진실한 신앙 위에서 창조를 위한 지구 연대 논쟁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이후 논의될 내용을 제하더라도, “보수적인 신앙이 곧 창조과학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이지만 신학적 편견에 의해 쉽게 무시되던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을 통해 변화된 스스로의 소감은 이 정도로 하고, 지금부터는 <성경 바위 시간> 속 살펴볼 만한 포인트들을 각 장마다 간략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1부는 역사적 관점을 통해 보는 지구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 위해 각 시기별로 지질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논쟁이 함께 담겨있다. 특별히 현대 지질학이 출현한 이후 지질학과 성서(성경) 사이의 간극은 더욱 분명해져갔다. 이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두 세기 전부터 영미-유럽권 교회들에서 논의되던 내용이었음을 확인하면서 배우는 점이 크다. 오늘 우리가 치열하게 젊은 지구 창조론의 망령과 논증하는 것이 이전부터도 이어졌다는 사실은 지긋지긋함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를 바로 이해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으로 본다면 우리 세대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을 기대하게 된다.


따라오는 2부는 성경적 관점을 통해 보는 지구의 태고성이다. 1부의 마지막 소제목이 지구의 태고성이었고, 그 내용이 20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연구인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2부에서 지구의 태고성을 성경, 성서적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질학의 역사성에 비춰서 상호 비교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성서 해석은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성서의 본연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성서 해석이 모든 부분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비는 과학과 문화적으로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이번 장의 마지막과 함께 독자의 머릿속에는 분명히 떠오를 것 같다. 그 생각은 보수적 신앙의 그리스도인이나 성서 해석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나 동일할 것으로 판단된다.


성서와 역사 속에서 잠시 잊힌 부분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들은 지질학 박사이자 교수라는 점이다. 3부의 목차를 읽자마자 이전까지는 개론이고, 이제부터 본격 강의 시작인가?”하고 스스로 묻게 되었다. 쉽게 말해, 지구과학 이후에는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정보를 얻던 지질학의 소재들과 용어들이 이번 장에는 즐비하게 등장한다. 이번 장의 마지막 부분이 방사성 연대 측정에 관한 이야기들이기에 이번 장이 흥미와 당혹감을 오가는 기분을 독자들에게 선사해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지질학이나 인접 학문을 연구하거나 관련직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을 제외한) 우리가 이 기회가 아니면 창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들 가운데 지질학이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을 따로 찾기에는 제한 사항이 있다. 이번 장이 책에서 가장 두꺼운 부분을 차지하며 다소 생소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창조에 대한 관심이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로만 구성된다면 이것 또한 창조를 이해하는 시선을 가둬버리는 제약이 될 것이다. 지질학을 이해하는 쉬운 길은 이 책을 읽었지만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 다만 쉬운 길은 모르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지질학자들이 미시간 분지와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통해 지구의 역사를 탐구하고 탐험하는 이 이야기들이 다른 대륙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생각의 여지와 즐거움을 주는 것은 참 특별한 경험이다. (책에 있는 이 지역들의 사진을 보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서 모 포털 사이트를 통해서 찾아보았는데, 컬러로 보니 자연의 광대함과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이가 다른 곳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4철학적 관점이다. 사실 지구의 태고성을 탐구하는 일에 철학적 개념이 사용된다는 것에 놀라움이 있었다. 사실 역사적-성경적-지질학적 관점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기본적인 이해는 있었기에 저자들이 주는 정보들을 습득해서 나의 지식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4부에서 이야기하는 철학적 관점은 들어봤지만 이 개념이 이렇게 적용될 수 있어?”라고 스스로 되 물으며 쉽사리 책장을 넘기지 못한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철학은 어렵다라는 스스로의 성급한 결론이 다양한 분야에서 철학의 개념이 이미 적용되고 있음을 놓친 것 같다. 비록 철학적 관점에 대한 오해로 4부의 시작을 열었지만, 읽어가면서 이번 장이 왜 마지막에 위치하였는지 깨달으며 마치게 되었다. 이 책의 곳곳에서 이미 젊은 지구 창조론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4부에서는 이를 보다 분명히 지적하면서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 가능한 지질학적 증거의 총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 책의 주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지질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입문서로 쓰기에 적절하다. 뻔한 말일 수 있지만, 이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될 독자들은 단순히 지질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만 이 책을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창조에 대한 이해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과학과 멀리 있지 않음을 알고 싶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가까이하고자 하는 노력들 가운데 이 책을 집게 된 이들에게 해답은 아니더라도 해답으로 향하게 하는 성서와 더불어읽을 만한 책으로 적극 추천한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에는 양승훈 교수의 해설이 담겨 있는데, 이 책을 정독하기 전 예습을 위해서나, 읽고서도 여전히 남는 의문들을 정리할 때, 핵심적인 부분들을 다시 생각하고자 할 때도 참 유익하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에 대한 고민이 양승훈 교수에게도 동일하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해설 속에서 묘한 동질감과 더불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지혜 또한 얻어 갈 수 있다.


성서를 해석하는 시선과 신앙이 다르듯 창조를 이해하는 견해들이 다름을 더욱 분명히 깨닫는 오늘날이다. 분명한 점은 이 책을 읽고서 하나님의 창조가, 그리고 이 지구가 우리의 단순한 셈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드는 분들에게나, 앞서 말한 눈가리개를 여전히 벗길 거부하는 분들에게나 이 땅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 이 땅은 하나님의 창조의 땅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들이 창조의 땅을 설명하고자 자신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신앙하는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왔던 과학, 특별히 지질학의 발견을 무시하거나 하대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은 신학을 전공하는 나에게나 신앙 안의 지체들에게는 어려운 부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의 어떠함을 떠나 성서 고유의 가치와 전통을 존중함이 훼손될 것을 항상 염려하고 경계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염원을 가지고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고 이 신앙을 후대에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우리의 이 마음과 이 태도는 충분히 존중받고 앞으로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인도하고 계신다는 신앙처럼,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창조의 세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성서뿐만 아니라 창조의 세계,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또한 이 땅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의 수고는 성서 해석을 위해, 그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힘쓰는 우리의 최선만큼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단순히 젊은 지구 창조론의 카운트 어택(반격) 정도로 그치지 않길 바란다. 창조하신 이를 알기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 창조하신 이가 만드신 땅에 대해 무지하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성경 바위 시간>을 통해 이 땅에 있는 모든 현상, 특별히 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최선이 하나님을 열망하는 우리의 신앙만큼 자라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도한다.


창조의 땅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낯섦'을 환대하며 하나님 알아가기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김동문 | 선율 | 2018


김영웅



성경은 모든 답을 알려주는 마법 책이 아닐 뿐더러, 인간의 성공과 번영을 위한 참고서도, 또 자기계발서도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 사이에 생긴 관계의 단절, 그 단절로 인한 결과, 그리고 그 불가항력적인 결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 회복의 메시지가 담긴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목적은, 김근주 교수의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에서도 강조되듯,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가 참이라면,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도 참이다.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안위와 유익만을 위해 보험이나 부적 같은 용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무늬만)도 이 세상엔 적지 않지만, 만약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은혜 아닌가!),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하나 생기게 된다. '어떡해야 성경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가?'

 

성경 읽는 방법에 대한 책과 강연은 이미 넘치도록 많다. 그러나 여기, '성경을 낯설게 읽어보기'를 권하는 특이한 책이 있다. 책의 부제라고 할 수 있는 '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이 책은 벌써 내 주의를 충분히 끌었지만, 책을 열어 프롤로그에 쓰인 '낯설게 만나는 성경'이라는 제목을 읽었을 땐, 이미 내 마음은 이 책에 대한 기대로 충만해졌다. 어제 밤, 아니 오늘 새벽,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될 만큼 또렷한 정신으로 난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림과 글이 절묘하게 어울려,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었고, 읽는 이에게 지루함을 줄 틈도 제공하지 않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으며, 가능한 천천히 읽으려 해도 자꾸만 책장이 넘어갈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한 흡입력을 가진 책이었다. 높은 곳에 서서 함부로 결론을 지은 뒤 낮은 곳에 위치한 독자에게 교훈이나 지침을 던져주려 하지 않았으며,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 볼 수 있도록 독자의 자리로 내려와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책이었다. 책의 부제에 포함된 '낮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미 저자가 책을 구성한 의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저자와 독자가 함께 읽는 책. 아마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는 누구라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오랜 기간 중동 선교사로서 그들의 낮은 자리의 삶을 직접 함께 하며 살아낸 저자의 일상의 호흡이 배여 있는 책이다. 낯설게 성경을 읽어보자는 그의 바람은 성경이 주어졌던 '그때 그곳'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자는 의미를 내포한다. 성경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성경은 '그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쓰였던 책이기에, 현재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관점은 성경이 처음 주어졌던 독자들이 이해했던 관점과 똑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오류가 없을 거라는 논리의 비약으로 이루어진 오류로부터도 벗어나야 하며, 한낱 개인의 위로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용도로 성경을 읽는 사적인 복음의 관점으로부터도 벗어나야만 한다. '그때 그곳'의 관점에 대한 이해는 시간과 공간과 문화가 다른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런 낯섦을 거부하지 않고 환대할 때, 우리의 성경 이해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인 김동문 선교사의 겸손한 도움으로 이러한 여정에 뒤늦게나마 발을 내디딜 수 있어 난 참 다행이다. 선교사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 만화책을 이루고 있는 총 18개 짧은 꼭지의 공통분모는 '낮은 자의 하나님'이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낮은 자의 하나님'을 이해해 보며 '낯설게 성경을 읽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다. 교회에서 익숙하게 수없이 많이 들어왔던 성경 본문만이 아니라 그다지 설교 본문으로 많이 사용되지 않은 부분까지 고루 담겨 있는데, 때로는 허를 찔린 듯한 기분으로, 때로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으로 난 감탄과 함께 각 꼭지를 읽어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인간은 고대 근동 신화에서 소개되는 것처럼 신을 대신하여 일하도록 지음 받은 노예 같은 존재가 아닌,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져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임무를 부여 받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 난 이 사실 덕분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할 수 있었고, 기독교의 구별됨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아브라함과 소돔고모라의 나그네를 대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환대 vs. 천대)을 대비하는 부분에서 난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배제와 혐오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방법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신앙의 완전체 이미지로 알려진 이삭 이면에 있는 아픔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아픔도 아브라함 입장이나 설교자 입장이 아닌 이삭과 하나님의 입장에서 신선하게(낯설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생활에서 새로운 거룩함을 알려주신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성막의 실체(민낯)와 그 안에서 마치 3D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낮은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겼던 제사장의 고군분투했던 삶도 저자가 제공하는 그때 그곳의 현실적인 해설 덕분에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외에도 짧지만 많은 이야기들이 재치 있는(때론 폭소를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림과 함께 책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마도 책을 책장에 꽂아놓지 않고 나처럼 책상 위에 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또 읽고 싶어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말한다. 독자들이 "무엇보다 하나님은 힘 있고 권세 있고 풍족한 이들보다 나그네, 이방인, 여성, 노동자, 마이너리티, 상처 받은 사람, 연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 등 낮은 자에게 온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이 책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고 말이다. 저자의 바람은 적어도 나에겐 성취되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낯설게 읽는 성경 읽기 방법이 이 책을 통해 시작되어, 몰랐거나 희미하게 알았던 하나님을 밝고 선명하게 알아가는 또 다른 시작이 되었음을 믿는다. 신약편이 기다려진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김응빈 외 지음 | 송기원 엮음 | 동아시아 | 2017


정훈재 박사 (LG전자 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2010년 5월 미국의 저명한 생물학자 크레이그 벤터(Craig Ven ter)는 ‘화학적 합성 유전체에 의해 제어되는 세균 세포의 창조’라는 제목의 논문을 <사이언스>에 발표합니다. 이 논문은 합성된 유전체 정보에 의해 유지되는 생명체를 새롭게 만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대상은 '미코플라스마 미코이데스'라고 하는 동물의 장 속에 기생하는 세균이었습니다. 이 세균은 가장 적은 수의 유전자 수 (약 530개 정도)를 가지고 있고, 100만 쌍의 DNA를 유전 정보로 갖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생명체라고 합니다. 크레이그 벤터의 연구팀은 유전자 데이터 베이스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 세균의 모든 유전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한 뒤 다른 종의 세균에 이식시킵니다. 그 종이 갖고 있던 원래의 유전체는 미리 제거된 상태였습니다. 이 다른 종의 세균 세포는 인간이 합성한 유전체만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 세균은 자기 복제에 의한 재생산과 대사 등 정상적인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크레이그 벤터는 이를 Syn 1.0이라 호칭하고, 자신들이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했다고 선언합니다. 이어서 2016년 3월 크레이그 벤터의 연구팀은 Syn 1.0 유전체의 크기를 반으로 줄이고 유전자를 채 500개도 갖지 않은 생명체 Syn 2.0을 만들었다고 <사이언스>에 발표합니다. 즉 이 생명체는 지구상에 생존하고 있는 생명체 중 유전자 수가 가장 적은 생명체로 자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이끈 크레이그 벤터 박사는 2003년도에 종료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생물학자로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이란 새로운 개념을 처음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인공 유전체를 합성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유전체 조작이 가능해진 것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에 의해 유전체를 조작하는 것이 정확하고 빠르면서 비용도 저렴해졌기 때문이라 합니다.


과학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세분화되면서 많은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합성생물학도 아직 뚜렷하게 정립된 개념은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 생명윤리 연구자문위원회에서 정의한 합성생물학이란 ‘기존 생명체를 모방하거나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 생명체를 제작 및 합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의 제작 및 합성의 개념을 생명체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분야의 기술은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크레이그 벤터 박사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세균 세포의 창조’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동안 종교의 영역이었던 ‘생명의 창조’라는 개념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고 온 셈입니다. 그의 세균 세포 합성을 ‘창조’라 호칭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의 연구가 보여준 것은 이전에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아닐지라도 ‘점진적인 창조’도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대상도 세균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점차 복잡한 생명체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멸종 동물을 재생하거나 인간 유전체를 합성해 작동 방식을 실험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기존의 생명체에서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이 새로운 생명체를 설계하고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 보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명과학 발전은 우리의 삶과 사회기반 및 가치관 자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혁명에 가까운 변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어 보입니다. 정부는 연구를 장려하면서도 그와 수반되는 시스템 구축에는 매우 취약한 방식을 선택했다 합니다. NGO들은 과학적 내용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 없이 반대하는 입장을 택했으며, 연구 결과에 수반되는 좀 더 근본적인 사회 변화 등은 등한시한 채 주로 ‘먹어서 안전한가’ 등 단순하고 소모적 문제에 머물러 있습니다. 종교계는 생명 과학의 발전에 관심이 없으며, 변화의 내용과 속도를 불감한 채 마치 중세와 비슷하게 여전히 과학과의 담쌓기가 종교를 지켜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이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변화하고 있는 생명과학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중에게 전달하고 지켜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시작합니다.



이 책은 다섯 명의 저자의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공학을 공부한 두 명의 과학자와 정책을 공부한 사회과학자, 철학과 윤리학을 공부한 두 명의 신학자가 모여 2015년부터 ‘합성 생물학’과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에 대해서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을 모집해서 공부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연세대의 교수/연구원이며 연세대 과학기술정책전공 소속이기도 합니다.


저자들은 각각의 과학적 내용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공부하면서 다른 전공 기반의 다른 시각에서 느꼈던 문제의식을 정리하여 이 책에 담았습니다. 저자들은 이 책에 ‘과학적인 내용의 설명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일반 과학 서적과 달리, 과학 지식에 이어 거버넌스 시스템이나 이런 과학적 변화를 수용하는 가치관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합성생물학에 대해서 우연히 알게 되었고, 찾아보다 보니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이 나온 건 2017년 4월로 벌써 1년 반이나 지났습니다. 책 표지 하단에 ‘질주하는 생명과학의 혁명을 99%의 사람들은 눈치조차 못 채고 있다!’고 쓰여있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생명과학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전공 때문인지, 실제로 저도 이러한 책이 나온 지 1년 반이 되도록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이슈를 던지는 책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이 책은 전혀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설계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시장 자본주의의 힘은 이 새로운 과학기술을 극한까지 밀어붙일 가능성이 큽니다. 적절한 정책적 대응이 전체 사회의 컨센서스에 기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 끝에 도달할 모습에 대해 얼마나 낙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제기하는 이슈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좀 더 경청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책] 그동안 페이스북을 통해 다양한 서평을 써온 김영웅 박사님의 글을 연재합니다. 과학자가 읽은 신학책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심을 환대하기

확신의 죄 | 피터 엔즈 | 이지혜 역 | 비아토르 | 2018


김영웅[각주:1]



007에게 살인면허가 있다면, 과학자에겐 '의심면허'가 있다. 과학자들에겐 의심하는 행위가 공식적으로 허락된다. 과학자는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하며, 그 의심에 묻고 답을 해야만 하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다. 호기심이라는 멋쩍은 단어로 과학자를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자연 현상 이면에 놓인,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들을 하나씩 밝혀내는 과학자들에게 의심은 호기심과 맞먹을 정도로, 아니 어쩌면 호기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호기심은 의심으로 치열하게 진화할 때만이 그 빛을 발한다.


의심은 예고도 없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도 찾아간다. 사소하고 우연한 일상의 조각들도 모두 의심의 통로가 될 수 있기에, 우린 달갑지 않은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이 손님의 방문을 결코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과학자이면서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의심은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인 셈이다.


의심의 방문에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권 밖에 없다. 하나는, 주무시지도 않고 성실하신 의심'님'의 공격을 혼신의 힘을 다해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외부로부터의 모든 공급이 차단된 채 안에서 곪거나 굶어서 자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불청객을 오히려 환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의 단점은 무너지는 것이 결국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버티는 동안은 자신이 견고하게 쌓아왔던 믿음의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전사로서 명예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끝은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처절한 인지부조화와 복합적인 합리화로 가득 찬 위선적인 자기기만, 그리고 파멸이다. 이 결말은 이 책의 저자, 피터 엔즈가 정의하는 '확신의 죄'의 열매가 아닐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오늘날 많은 목사들의 진공 포장된 설교와는 너무도 다른 현실세계를 경험하면서 의심의 순간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반석과도 같았던 안전지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크레바스 바로 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의심의 씨가 우리 마음 밭에 싹을 틔우고 속수무책으로 자라나면서 그 동안 믿어왔고 확신해왔던 세계는 소리 없이 은밀히 함몰하기 시작하고, 이는 곧 내면세계의 비가역적 붕괴를 가져온다. 이 부분에서 피터 엔즈는 말한다. 퓨즈가 끊어지고 믿음이 멈추는, 이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실상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이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순간들을 통과하도록 묵묵히 인도하신다고. 아멘. 그렇다. 과학자에게 자양분이기도 한 의심은 신앙생활에서도 적이 아니라 주요 요소이며, 의심과 신뢰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우린 비로소 예수를 닮는 삶을 현실에서 일상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믿음과 의심, 그리고 알고자 하지 않는 지혜로움에 대한 책이다." 그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의 시작이요 과정이자 끝"이라고 한다. 그는 확신을 추구하고 고수하는 신앙생활의 위험을 간파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믿음은 올바른 생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역설하는데, 그는 이를 '확신의 죄'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태도가 '죄'인 이유는, 우리가 확신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실재이신 하나님을 지적인 영역에만 가두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우상 숭배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는지에 대해선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불청객, 의심을 환대하면서 말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부분이라 쓰고 '모든'이라 읽는다)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신앙을 가지게 된 건 사실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직관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이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어 회심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단 하나라도 존재했었다면, 그 많은 전도와 선교 프로그램들은 모두 퇴색되어 버렸을 것이다. 믿음이 생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며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연습을 하는 우리들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신비’ 이외에 적당한 단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신비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자 예수를 닮는 삶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내는 과정 또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뢰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이성이 우리를 배신해도 그대로 남아있는 신뢰. 그것은 결코 의심하지 않고 확신에만 가득 찬 믿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확신에 찬 신앙, 과학처럼 앞뒤가 딱딱 떨어지는 깔끔한 신앙,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은 우리 자아에게 모든 통제권을 재부여해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역했던 죄인의 옛 자아가 적절히 타협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타인들에게 가치를 두지 않는 나르시시즘으로 살아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유 있고 인자하며 친절한, 모든 일상이 그저 아름다운 동화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신앙인들은 스스로 회심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비겁하거나 정의롭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가 책에서 예로 드는 것처럼, 시편과 전도서, 그리고 욥기에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어쩌면 당돌하고 불경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 구약 기자들의 솔직한 고백들이 많이 담겨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무사안일, 안빈낙도는 기도제목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구약 기자들이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나서도 결국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으로 돌아간 것을 볼 때,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피터 엔즈가 말한 것처럼 “어쨌거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신뢰하는 삶이란 흔들리지 않는 독단적 확신을 넘어, 우리 삶에 지속되는 신비와 불확실성을 정상적인 신앙의 일부로 포용하여, 확신이 사라졌을 때에도 확실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만끽하며, 우리의 이성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함으로 우리의 통제권을 일체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한 신뢰는 우리의 지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길들일 것이고, 의심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은 하나님이 보내신 신성한 손님이 될 것이다.


과학에서 의심하듯, 신앙생활에서도 마음껏 의심하자. 의심하길 두려워하지 말자.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듯, 먼저 배운 지식에 갇혀 하나님을 그 지식에만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용기 내어 의심하고 묻고 답을 해나가자. 이 모든 과정이 곧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아름다운 여정이 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더욱 커질 것이다.



  1.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미국 City of Hope에서 Staff Scientist로 일하고, 과신대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그럼, 빨리 크세요!"

뒤에 올 여성들에게 | 마이라 스트로버 | 제현주 역 | 동녘 | 2018


문성실[각주:1]



처음 재미 여성과학자 모임을 갔을 때였다. 연사로 오신 분께 인사를 드리는데, 앞으로 이 모임을 위해서 힘써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전 아직 어려서요’ 그때는 어렸다. 한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포닥을 온 지 막 1년이 넘을 때였다. 미국 사정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어리다는 말뿐이였다.


그럼, 빨리 크세요!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그 한마디가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마음에 남아있다. 종종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자책의 순간이나 슬럼프의 문턱에서 꺼내 보는 말이 되었다. 평생을 노동의 관점에서 싸워온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마이라 스트로버의 회고록 <뒤에 올 여성들에게>는 희미한 의미로 내 마음에 남아있던 “빨리 크세요”라는 말의 의미를 선명한 의미로 확신시켜 주었다.


1970년 버클리대 강사 시절, 교수 임용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탈락되었던 날, 그는 샌프란시스코 베이브리지 위에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날의 분노와 각성이 내 나머지 인생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터였다. 그 분노와 각성이 나를 이끌었고, 덕분에 새로운 학문 분야를 만들고, 성차별을 연구하고, 그에 대항해 싸우는 새로운 조직을 세우는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학자로서 부당한 성차별을 받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연구’를 택했다. 새로운 분노를 품고 도서관에 앉아 ‘여성’의 이야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150년 전의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의 <감성 선언서 Declaration of Sentiments>를 찾았을 때, 그는 스탠턴을 멘토로 받아들이며, “언니”로 삼는다. 여성의 대부분이 교수가 아닌 강사로 일하던 버클리의 “언니들”이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이라는 그때를 “자매애가 싹텄다”라고 회고한다. 그리고, 버클리에서 처음으로 “여성과 노동”이라는 강의를 개설한다. 자유주의적인 페미니스트의 편에 섰던 마이라는 이 강의를 통해 만난 ‘언니들’을 통해 “여성이 일터에서 평등을 누리려면 사회 전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급진주의의 편에 서게 된다. 그가 걸어온 페미니스트의 길은 경제 학내에서만 여성을 다룬 것이 아닌, 가정과 노동조직, 정부 측면에서 어떤 새로운 정책이 필요한지 파악하는 다학문적 여정을 통해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1970년대 경제학 분야의 언니들은 대단했다. American Economic Association (AEA) 연례 회의에서 그들은 ‘여성을 위한 경제적 평등에 필요한 것’이라는 세션을 열었으며, 많은 여성 경제학자와 젊은 대학원생(여성과 남성)이 참여하였고, 그 후 AEA 사업 회의에서 캐럴린 쇼 벨은 “경제학 관련 직종에 여성의 비율이 낮은 상황을 바로잡을 것”, “경제학자들 사이의 성차별을 제거하기 위한 적극적 프로그램을 도입할 것”과 연례 회의에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보육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AEA에 요청했다. 현재에도 여러 학회에서 생각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은 일들이 무려 40년 전에 경제학 분야에서는 일어났었다.


그는 스탠퍼드 내의 여성 교수가 적은 급여를 받는 문제를 제기하고, 스트로버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성은 급여 분포 하위 1/5을 과대 대표했고, 상위 1/5을 과소 대표했다. 그는 이 보고서를 통해 교무처장이 여성 교수의 급여 수준을 지속적으로 조사하도록 요구했고, 여성 교수가 적은 학과는 여성 교수진을 늘리기 위한 채용 계획을 수립하도록 요청했으며, 성희롱에 대한 인식을 교육하고 섬세하게 만들기 위한 지속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이 스트로버 보고서는 현재의 ‘다양성 보고서’의 시초가 아닐까 한다.


자네는 정상인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거라면 경제학 박사 학위는 왜 따려고 하나?

매일 아침 보스턴에서 케임브리지로 차를 몰고 오면서,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중얼거렸다. 그곳은 남성 천지였고, 임신은 본질적으로 남성의 일이 아니었다. 임신 사실을 말하며 그들이 내 명예 남성 지위를 빼앗을 것 같았다.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나는 샘의 커리어가 내 커리어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완전히 빠진 채였다.

샘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아내에게 원하는 것은 조력자이지 ‘남자의 게임’을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버드 박사과정 면접에서 그가 들었던 말, 

임신 사실을 언제 알릴지 몰라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며 보냈던 시간들, 

자신의 커리어보다 남편의 커리어를 늘 우선에 두고, 

박 육아를 감당해야 했던 그의 삶의 회고는 

40년이 지난 현재의 여성들이 동일하게 겪고 있고 듣고 있는 말과 생각이다. 


그가 ‘언니들’과 함께 세웠던 Center for Research on Women (CROW) (현 클라이먼 젠더 연구원) 35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35년이 지났어도 ‘젠더 혁명’은 교착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남성 수입 대비 여성의 수입은 늘지 않는다. 어머니인 여성은 엄마 벌금을 문다. 여성이 가장인 가족은 어느 때보다 빈곤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이공계 여성의 비율은 여전히 매우 낮고, 대기업 내 여성 리더나 기업 이사회 내 여성 이사는 아직 당황스러우리만치 부족하다.


‘젠더 혁명’은 오랜 시간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에 비해 부단히 경제적이지 못한 모순에 직면해있다. 그는 “나는 이제 처음 시작한 때보다 내가 추구하는 변화가 심원하고 어려운 것임을, 내 삶에서는 원했던 결과를 볼 수 없을 것임을 이해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의 마이라 스트로버의 40년 세월의 회고는 ‘마이라’라는 여성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닌 세대와 시대를 초월한 여성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인 일이다. 그는 ‘나처럼 하면 성공할 수 있다’나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잘 된다’라는 전형적인 성공의 롤모델을 보여주지 않는다. 늘 힘들게 걸어왔고, 늘 일과 가정의 장애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힘들고 장애물이 혼재한 그의 삶을 그는 결코 혼자 걸어오지 않았다. 그는 언니들의 ‘자매애’와 남성들의 지지를 통해 지금까지 걸어왔다. 나도 그 길을 걷고 있다. 비록 나는 그보다 40년이란 시간 뒤를 걷고 있지만, 마이라와 나는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럼, 빨리 크세요!”의 의미는 내게는 내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앞장서서 걸어가야 하는, 그래서 좀 더 외치고, 좀 더 글로 남기고, 좀 더 몸부림쳐야 하는 그런 것이다.


내 뒤에 올 여성들을 위해서…


  1. 바이러스 백신 연구을 하는 "평범한 여성 과학자". 아이들과 과학놀이는 즐기는 "랩순이맘". 소명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텐트메이커". 브릭 [논문 밖 과학읽기]와 [과학협주곡]에 글을 연재. [본문으로]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책] 그동안 페이스북을 통해 다양한 서평을 써온 김영웅 박사님의 글을 연재합니다. 과학자가 읽은 신학책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지만 겸손한 내러티브들의 향연

세계관 수업 | 양희송 | 복있는사람 | 2018


김영웅[각주:1]



자신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오면서 심각한 모순이나 갈등에 부딪혔던 경험이 있다는 증거다. 세계관은 의식세계 이면에 존재하기에, 무엇이든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차원적인 세상에선 그 존재를 자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우린 숙명처럼 낯설고 불편한 세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동안 별문제 없었던 ‘나’만의 작은 세상에서 드디어 ‘너’와 ‘우리’, '그들'로 이루어진 큰 세상을 만나게 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위계질서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뉜 채, 섞이지 않는 혼합물처럼 어쨌거나 다수와 함께 살아간다.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한 이 '다양성'이라는 무시 못 할 변수를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 우린 비로소 ‘세계관’이란 실체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이러한 불가피한 충돌은 때론 한 사람의 인생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지금까지의 모든 기준이 무너져 내리는,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가 되고, 또 누군가에겐 아주 오래된 숙제가 마침내 풀리는 해방과 자유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자아인식'이 '나'가 아닌 타자를 만날 때에야 비로소 진행되는 것처럼, 세계관의 자각은 두 세계관의 충돌로 말미암아 시작되며, 그 충돌은 누군가에겐 두 번째 인생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의 사활은 새로운 세계를 과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더불어 옛 세계를 기꺼이 파괴할 수 있는 용기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듯,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하며, 저자도 간파했듯, 낯선 세계와의 조우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머리가 아닌 가슴, 즉 지식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길을 알려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은행의 위치를 기준으로 알려줄 수도 있고, 커피숍이나 편의점, 관공서, 아니면 특별히 크거나 화려하여 주변 건물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잘 띄는 건물 위주로 길을 알려줄 수도 있다. 똑같은 길이라도 알려주는 사람 머릿속에 존재하는 지도 위에 어떤 건물이 표기되어 있는지에 따라 길은 다르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지금 눈을 감고 어떤 길 위에 놓인 건물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 주위의 건물도 함께 떠 올려보자. 모든 건물이 아닌 어떤 특정한 건물 몇 개만이 주로 기억이 날 것이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었음에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을 발견할 때를 우린 종종 경험하지 않는가). 이러한 차이는 곧 세계관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동일한 세상을 바라보아도, 우린 모두 다른 눈으로 그것들을 인식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세계관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세상과 '나', '나'와 '너'의 관계가 형성되며, 나아가 '나'의 정체성 또한 확립되기 때문이다.


우린 누구나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지금 21세기는 근대라는 시기를 지나 메타내러티브(거대담론)가 해체되고 작은 내러티브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와 다양성을 이루고 있는 포스트모던(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 시대다. 나는 세계관의 의미가 적어도 기독교인에게는 남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그저 많은 신 중 하나를 택하여 섬기며 나름대로의 구원을 찾는 여러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저 인간의 생활수칙이나 윤리규범 정도에 그친다면, 기독교의 유일성은, 이미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천천히 확산되고 있듯, 결국엔 퇴색되고 말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의미는 그것보단 더 크고 더 깊은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보는데, 난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때마침 '세속성자'의 저자이자 '청어람'의 대표, 양희송의 신간, '세계관 수업'을 만났다. 이 책에는 약 20년간 쌓여온,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저자의 연구가 차곡히 담겨있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세계관이라는 주제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기본적인 개념에서부터 국내외 최근 연구결과까지 반영하여 정리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 한 권을 통하여 우린 저자의 인생이 담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통찰의 물을 마실 수 있다. 특히 나처럼 성공지향적인 가치관 (혹은 세계관)으로부터 하나님나라 중심의 가치관으로의 변화를 경험하며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위로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관의 개념과 이론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1부 '세계관', 세계관이라는 각도에서 성경 본문의 내러티브를 해석해보는 2부 '성경', 세상살이에 상응하는 기독교 신앙의 재조정과 방향을 제안하는 3부 '현대'로 구성된 이 책은 순서에서부터 저자의 의도(혹은 바람)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단지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개론서나 성경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안하는 방법서에 그치지 않는다. 대신, 현재 우리가 맞이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이 어떤 방식으로 인식되고 전개되어야 하는지, 실제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저자의 살아있는 호흡과 정성이 묻어있는 책이다. 어떤 철학적인 개념이나 방법을 넘어, 기독교 세계관은 실제 살아있어 기독교인과 함께 숨 쉬며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는 기독교인의 눈이 되어주는 것이다.


1부에서 저자는 세계관의 개념과 이론을 간단하게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다양한 세계관을 낳는 "삶의 다양성을 대면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원초적인 태도는 겸손함"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은 이런 의미에서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자기 확신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겸손과 경청의 자세로 드러나는 관점이라고 덧붙인다. 이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자세를 가르쳐주는 듯하다. 기독교의 '원죄' 개념을 '자기애' 또는 '교만'으로 해석하고 그에 따른 '겸손'이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은 결코 진리를 수호하고 퍼드린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교만'이 아닌,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겸손'의 관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의 최전선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맞닥 뜨린 삶의 현장, 일상이라고 난 생각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은 '작지만 겸손한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내러티브적 접근' 방법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논한다. 이야기 형태로 세계관이 유지, 공유, 확산된다고 보는 '내러티브적 접근'은 네 가지 간단한 질문 -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야기를 통해 해나감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 예로 이 책의 2부는, 구약에선 창세기 1장 창조 이야기, 신약에선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이야기를 톰 라이트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읽고 해석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신화냐 아니냐를 떠나 창세기가 쓰였던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 팽배했던 세계관과의 충돌로 (특히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 해석할 수 있으며, 역사적 예수의 행적 또한 유대-팔레스타인의 지배적 세계관과의 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우리의 삶 또한 내러티브의 장 위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우리 자신이 속한 이야기를 제대로 갖지 못한다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경고한다. 또한 우린 삶의 내러티브를 어디서 구할지 묻는 것이 가장 절실한 시대적 질문이며, 이런 점에서 교회의 비극은 성경 내러티브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죽은 말씀으로 여겨지고 있을 때라고 말한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기독교가 개독교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교회가 성경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수용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성경 읽기와 가르침으로써 기독교인을 대량생산하듯 양산해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저자는 '성육신적 성경 읽기'를 제안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를 통하여 육신이 되었듯, 우리가 자신의 몸에 성경의 이야기를 새겨 넣고, 그것을 현장에서 살아내고자 고투하는 가운데 자기 몸에 체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간파한 대로, 성경의 말씀이 살아서 성도들의 삶에 실제로 적용되는 것을 보기 전까지 결코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 삶의 내러티브를 일차적으로 성경에서 구하고, 각자의 독창성과 고유성을 간직한 채 각자의 내러티브의 창의적 재현과 변형과 복귀로 표현되는 삶을 지향할 때 기독교 세계관은 비로소 그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기독교 세계관은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합 가능할까? 3부에서는 이러한 부분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비를 통하여 장단점을 살펴보며 기독교 세계관의 위치와 방향을 논한다. 저자는 개성이 강조되는 작은 내러티브들이 들려지는 이 시대에 필요한 기독교 세계관 논의는 새로운 문법과 언어로 예수의 이야기를 써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옛 관점과 해석에 갇히지 말고 성경을 다시 읽고 예수를 다시 이해하려고 할 때,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면모가 부각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신론과 유신론 같은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그 관점이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결과물처럼 그저 가장 강력한 거대담론으로 자리매김하여 사람들에게 강제성을 부여하는 역할만을 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의 본질은 오히려 흐려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독교인들이 일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며 만들어내는, 작지만 겸손한 내러티브들이 이곳저곳에서 꽃 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필요한 기독교 세계관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도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면서 단지 착하게 살라 거나 서로 사랑하라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표층적인 메시지 ('메시지'라 쓰고 '메아리'라고 읽는다)에 머물지 않고, 한 사람의 세계관을 재건할 수 있는 심층적인 메시지에 초점이 맞춰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전환 이야말로 어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born again (거듭남)’이 아닐까.



  1.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미국 City of Hope에서 Staff Scientist로 일하고, 과신대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책] 그동안 페이스북을 통해 다양한 서평을 써온 김영웅 박사님의 글을 연재합니다. 학자가 읽은 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공적이다.

복음의 공공성 | 김근주 | 비아토르 | 2017


김영웅[각주:1]


서론에서부터 김근주 교수는 만약 기독교인들이 정치와 구별하여 개인의 영적 문제에 치중하는 것을 옳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견해라고 명료하게 밝힌다. 특히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마치 영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과 다름 없는 한국 교회의 분위기는 이를 잘 뒷받침하는 듯하다.


정치 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만을 마치 복음의 전부인 듯 부각시켜, 다른 것들은 모두 영적이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 그 동안 많은 교회는 복음을 사적인 영역에 가두었고, 교인들에게는 바울의 칭의 개념만을 강조하여 개인구원론을 복음의 전부인 것마냥 가르쳐왔다. 그러나 바울의 칭의 개념은 바울이 읽고 묵상하며 깨달은 성경 말씀이 배경이 되었고, 그 성경은 신약이 아닌 구약이었다는 점을 우린 간과해선 안 된다.


또한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루면서 하나님나라를 전하는 책이다. 예수님이 어릴 적 공부하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으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과 하신 논쟁의 근거 역시 신약이 아닌 구약이었다. 예수님은 모든 구약이 말하는 약속의 성취셨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나라의 본체셨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수님을 다룬 사복음서나 바울이 쓴 서신들 모두 구약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을 이해하지 않은 채 복음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김근주 교수는 토로한다. 이 책의 부제가 '구약으로 읽는 복음의 본질'이라는 것이 명징하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책이 던지고 있는, 표지에도 적힌 큰 질문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제한되는가?" 복음의 공공성은 복음의 또 다른 부분 정도가 아니라, 복음의 핵심이며 본질이라는 사실을 이 책 '복음의 공공성'은 말하고 있다.



평안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불의가 판을 치며,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사회와 국가에서 나 혼자 평안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복음은 결코 개인적인 마음의 평안함만을 가지도록 요구하거나, 윤리적이고 경건한 마음가짐만 강조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한마디로 복음의 목적은 개인의 구원이나 해탈에 있지 않다. 오히려, 예수의 탄생과 죽음이 로마와 유대인들의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듯이, 복음은 정치적으로 사회와 국가를 이루는 구조적인 악과 사탄의 체제에 예수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며, 그곳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복음의 시작과 목적과 방향, 모두가 공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 시대에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 온 나라와 열방들, 그리고 창조 세계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앞서 경험하는 것이다. 즉 복음의 공공성은 창조 질서와 직접 연결이 되어있는 복음의 본질 중 하나이며, 이는 곧 구약의 복음이 지속해서 말하는 바와 일치한다. 저자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들이 구약을 무시한 채 신약만을 복음의 전부로 배우거나 이해해왔기에 비역사적인 개인 교훈집이나 경건 도서로 전락해 버린 것이라며 울분을 토한다.


또한 복음의 공공성은,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을 통해 발현되는 증거인,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과도 곧장 연결된다. 남에게로 향하는 삶,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이웃 사랑, 나를 넘어서 열방을 위해 쓰임 받는 삶, 하나님을 닮는 거룩한 삶,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개념이 바로 복음의 공공성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사적인 복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번영 신학보다도 더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원죄의 흔적이 만들어낸 거짓 묻은 복음일지도 모른다. 톰 라이트가 말한 빈 망토와도 같은 복음의 변질과 왜곡, 바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다.


보수, 진보를 떠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겨 듣는 말씀인 마태복음 6장 33절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에서의 '의'가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을 불러 명령하셨던 정의와 공의를 현실 세계를 살면서 구하는 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린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는 삶이 사적인 복음보다는 공적인 복음에 무게중심을 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더 이상 이 구절이 개인의 윤리와 경건을 요구하는 말씀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근주 교수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의 의미 자체가 단수가 아닌 복수,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이라는 근거를 들며, 우리 신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길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적일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출발부터가 공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타락이 기술된 창세기 3장에서도 김근주 교수는 복음의 공공성을 찾는다. 뱀의 유혹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기애를 충동질하여 함께 해야 할 사람들과 창조물들과의 관계를 파괴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공동체의 삶, 즉 공적인 삶을 무너뜨린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자기 유익에 따라 선악을 마음대로 판단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사리사욕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버렸으며, 이는 곧 공적 삶의 파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공적 삶을 지향했고, 인간의 죄는 그 공적 삶을 파괴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에서 말하는 사탄의 실체와 그의 목적과 패턴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창세기를 훑어가며 공적인 복음의 속성을 들춰낸다. 하나님의 선교, 복음의 시작인 아브라함의 선택과 부르심은 아브라함 가문만이 아닌 열방이 복을 받기 위함임을 볼 때도 우린 복음의 시작부터가 사적인 유익의 충족이 아닌 공적인 속성을 띠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창조-타락-새창조의 맥락이 모두 복음의 공공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복음의 반대말은 사리사욕일지도 모르겠다.


아브라함 뿐만이 아닌 창세기 후반부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 속에서도,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삶을 가르치는 레위기 19장에서도, 구조적인 조정으로써 가난의 대물림을 없애며 온갖 질곡와 멍에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선포를 의미하는 희년법이 설명되는 레위기 25장에서도,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와 그일라 전투에서도, 우상숭배가 보여졌던 구약 여러 본문에서도, 그리고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기록된 역사서에서도, 마지막으로 이사야를 중심으로 여러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회개를 선포했던 여러 예언서에서도, 김근주 교수는 공적인 복음의 본질을 낱낱이 파헤쳐 우리에게 조근조근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공적인 속성을 가지는 복음이 신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배경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이렇게 저자의 구약을 죽 훑어가며 들춰내는 팩트 체크를 통해 우린 복음의 공공성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고, 그 동안 사리사욕을 위해 복음을 내면화하기에 급급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해준다.



책을 읽어오며 수 차례, 아니 수십 차례 저자의 숨막히는 구약 해설을 통해 압도당한 독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에 이르러, 공적 복음의 본질이 '이웃 사랑'으로 압축된다는 사실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그랬듯 말이다.


하나님나라가 어떤 곳인지 이 책을 읽고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이웃 사랑이라는 의미가 이젠 다르게 다가온다. 다분히 막연했던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 어떤 것인지 좀 더 선명해졌다. 죄와 사탄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상숭배의 숨은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 무엇인지도 좀 더 명확해졌다. 그 동안 이 책 저 책 읽어오며 산재되어있던 지식의 파편들이 복음의 공공성이란 개념에 의해 하나로 모아지는 느낌이다. 김근주 교수의 이 책 '복음의 공공성'을 보수와 진보를 떠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이 책을 통하여 숨겨졌고 잊혀졌던 복음의 본질을 뒤늦게나마 발견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나라 공동체가 곳곳에서 회복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한다.



  1.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미국 City of Hope에서 Staff Scientist로 일하고, 과신대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나의 조그만 틀이 부서질 때

박영식, 『창조의 신학』 (동연, 2018)


어진성 (인천대학교 화학과 학부생)



뇌과학자 정재승 씨가  열두 발자국이란 책이 있습니다.  책을 어느 유투버가 소개하면서 정재승 씨에 대해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과학이 재미있다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통하여서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 학부생이고, 신학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교회 청년으로서 <창조의 신학>에 대 평을 감히 내리자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책은 신학자와 과학자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돌아보고, 공동체의 삶을 돌아보고, 한국 교회의 삶을 돌아보라는 지혜가 담긴 편지입니다.


저는  책을 보고 '어느 이론이 현실에 더욱 적합하다, 누구의 이론이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의 선배들의 이야기와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위로와 지혜가 숨겨져있다고 느꼈습니다주제에 따라 고대 철학과 종교적 이념에서부터 현대 신학자들의 다양한 이론까지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시대와 역사에 따라 대립되는 이론들의 다툼과 화해,  역사들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견문과 태도를 때로는 진득하게 때로는 물음표를 던져주며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우리에게 생각할  있도록 기다려줍니다. 책을 덮고, 잠시 눈을 감기도 하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를 선사합니다.
 


사실 저는 교회 청년부에서 창조과학에 대한 간단한 발표를 준비하면서 이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처음에는 만화로 된 <창조론 연대기> 그리고 나서 <아론의 송아지>,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과 같은 책들에 바탕으로 발표를 준비하던 차에 과신대 모임에서 <창조의 신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비슷한 내용들이 있을 거라 생각을 했고, 처음엔 어디   읽어보자는 거만한 마음으로 책을 접하게 되었죠. 그런데 책뿐만 아니라 교수님과의 모임을 통해서 챕터를 쓰게  배경들에 대해서도 듣고, 과학에 대해 고민하는 젊은 호기심들을 느끼며,  책이 점점  인간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기독 청년으로써 무신론자들을 대하는 교수님의 지식과 지식을 전달하는 자세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이것이 무조건 맞다, 그것은 절대 아니다. 상대를 하지 말아라, 그냥 피해라'라는 극단적인 조언들을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젊은 지구론도 그렇게 잠깐 받아들이기도 했었죠. 하지만 창조론에 대해  알아가며 치우치지 않으려 많이 노력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선 아직 그러한 변화에 대한 반응과 민감함이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은 2가지입니다. “똑똑할수록 겸손해진다.” “지나가던 나그네의 옷을 벗기게 한 것은 태양이었다.”라는 것을요. 여러 자기계발 SNS 페이지들에 올린 영상들을 접하면서 어중간한 지식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그랬고요.  책은 나보다 똑똑한 사람의 겸손함을 적나라하게 시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놓친 부분들을 상기시키고, 대립되는 주장에 아킬레스건들을 정확히 건드리며 고민하게 만들죠. 대립이 아니라 대화였습니다.
 


<창조의 신학>은 대화를 담은 책입니다. 과거와의 대화, 현재와의 대화, 창조의 하나님과의 대화, 대립과의 대화다양한 매개체들과의 대화를 통해 제가 아는 하나님의 영역이 훨씬  넓어지게 되었고, 전지전능함을  느낄  있었고,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악이 무엇인지를 다룬 8장에서 교수님은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소개하고 함께 비추어보며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들을 던져주십니다. 9장에서는 악을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들을 통해 나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삶 속에 모신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는 그분을 몰라뵈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봤습니다. 하나님을 선포할 때조차도 하나님을 시간에 가두고,  옛날 과거의 사건에 가두었던 지난날이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배워나갈수록 신학이란 학문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문득 친구 사역자들이 ‘신학을 배우는 것이 좋다‘라고 얘기하는  보곤 했는데,  책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식견이 평신도로서 얼마나 좁았는지를 느낄  있었습니다. 치열한 고민과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신학을 읽으며,  스스로 신학을 학문적으로 낮게 봤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성경의 처음 이야기하는 창조는 단지 구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삶 속에서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은 삶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며, 평화를 약속한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을 가둬두고 믿었던 나의 조그만 틀이 부서졌습니다.  마음 깊은  잔해들과 함께  책은 에필로그를 마칩니다일과 휴식의 조화를 이루며, 끊임없이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기억하고, 가슴에 새길 것입니다. 이전 것을 버리고, 창조의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프롤로그를 써 내려갈 것입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언제라도 기꺼이 새롭게 숙고하기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 (존 H. 월튼, 김광남 역, 새물결플러스)


서평 | 백우인 (과신대 교육/출판이사)



시대의 변화는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변하기도 하고 엄청난 해일이 돌을 산산조각 내는 대격변이기도 하다. 생명과학의 기술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간의 사유가 쉽게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논쟁들 가운데 하나는 성서와 과학과 인간의 기원과의 관계가 아닐까?


월튼은 성서 자체는 변하지 않을 지라도 오늘날 성서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훨씬 더 역동적이며 그로 인해 나타나는 신학이 계속적인 재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성서 해석자이자 신학자로서 신학적 전통이 중요하지만 해석과 해석의 도구로 삼고 있는 해석학조차 시대를 따라 변해왔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통찰과 정보는 어느 때라도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은 150년 동안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진화론은 발전의 시작이었고, 유전학의 발전은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비교함으로서 인류의 공통 조상을 찾고, 21세기 초 인간 유전체의 정보를 읽어내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 생명과학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진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직접 유전체를 합성하여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포스트게놈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의 진화 역사는 어떨까? 수 백 만년 동안 계속 되어온 인류의 진화 역사에는 커다란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은 직선이 아니라 꼬불꼬불한 발자취를 보여준다. 진화의 역사의 방향에 정답은 없다. 이상희 박사는인류의 기원에서 “진화에 유익한 형질, 적응에 유리한 형질은 우연의 작품이다. 우연히 이루어진 환경의 변화 속에서 마침 우연히 생겨난 형질이 유익했고 유익한 형질을 가지고 있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겼을 뿐이다. 어느 한 때 유익하다고 영원히 유익하지 않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때 적합한 선택을 해서 앞으로 나아갔던 것뿐이다.” 라고 말한다. 


월튼의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는 인간 기원 문제로 고민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인지부조화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그는 인간의 기원에 관한 현재의 합의에 의해 제기되는 위협은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의 원칙에 의거한 과학의 합의가 의심스러울 경우 이를 맹목적으로 수용해서도 안 되지만 과학의 결론들이 성서의 믿음에 어떤 위협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대 문서로서 또한 경전으로서의 성서에 대한 면밀한 읽기를 수행하면서 창세기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제로는 경전 전체를 고려한다. 성서에 대한 충실한 읽기를 통해 이런 읽기들이 과거의 몇 가지 전통적 읽기와 얼마 간 다를 수 있지만 그 다름 또한  본문 안에서 지지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최근의 과학적 발견 중 어떤 것은 우리가 고대 근동이라는 상황 속에서 발견하는 것과도 양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성서와 과학이 인간의 기원에 관해 상호 배타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현재의 과학적 합의는 인간이 다른 종들과 공통 조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물질적(계통 발생적) 연속성이라는 증거에 기초한 주장으로 성서 본문에 대한 면밀한 읽기와 신학적 연구는 그것들이 이런 물질적 연속성과 공통 조상을 감안하고 있음을 지적해왔다고 말한다. 창세기를 고대 근동의 문헌으로 신중하게 읽는 일은 공통혈통과 본질적으로 충돌하지 않는 역사 또는 인간 게놈을 통해 관찰 할 수 있는 역사로부터 얻어지고 또한 그것으로부터 추론되는 주석적 결론과 신학적 확언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월튼은 성서의 내용을 그 문화적 상황이나 현대의 과학과 일치시키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며, 고대 세계의 문헌으로부터 나온 정보나 과학적 탐구를 통해 얻은 통찰이 우리로 하여금 성서로 돌아가 우리의 해석을 재고하도록 적절하게 자극할 수도 있음을 주장한다.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는 성서본문은 전통으로부터 나름의 자율성을 지녀야하고 언제라도 기꺼이 성서 본문으로 돌아가 이를 새롭게 숙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서의 권위에 관한 견고한 확신과 성서의 해석 위에 세워진 전통을 바탕으로 작업하지만 신학적 틀 내부에서는 성서본문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월튼은 이 책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 에서 창세기 서두를 읽을 때 두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째, 창세기를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즉 과학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둘째,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공통 바탕을 둔 고대의 문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두 가지 기초적인 사항을 외면하고 창세기를 읽은 결과, 고대 근동 문화와 세계관의 기반 위에 쓰인 성서의 이야기를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문자적으로 오독하는 우를 범한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소위 젊은 지구 창조론으로 대표되는 창조과학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창세기는 고대 문서이다. 성서의 권위는 불가피하게 저자의 의도와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창세기를 읽을 때 고대문서를 읽는 것이며 따라서 고대 세계에서 적절했던 가정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해야한다. 고대인들이 어떻게 사고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소통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월튼에 따르면, 창세기 1장이 말하는 기원 이야기는 물질적 우주보다 질서, 기능, 역할 등과 연관되어 있다. 창세기 2장은 에덴동산으로 알려진 성소라는 지구의 중심의 설립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담과 하와는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이며  모든 인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리에 세워 질서의 중심이 되려는 죄를 짓는다. 말하자면, 창세기 3장은 최초의 죄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질서가 잡히는 과정 중에 있는 세상 속으로(죄에 의해 초래된) 비질서가 잠식해 들어오는 일에 관한 이야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아 선발된 문자적 의미에서 최초의 인류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운명을 테스트할 대표자로서 선발된 원형적 존재이며, 또 아담이 원형적 존재일 때만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의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원형적 존재로서 온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창조론자들 (로널드 L. 넘버스, 신준호 외 역, 새물결플러스)


서평: 이광형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동 대학원 구약학 Th.M 재학 중, 초원교회 교육 목사)




무오(無誤)에서 무지(無知)로


먼저 이 책의 제목에서 ‘창조론자들’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신앙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사실 이 책의 저자인 로널드 넘버스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기에 책을 읽기 전에는 아마도 창조과학 쪽에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어떤 면에서 틀렸는지 학문적으로 비판하는 책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느 쪽 주장에 대해서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논하려는 것이 아닌 창조론자들이 어떤 신학적 노선 안에서 시작하여 어떤 길을 걸어왔고 이제 거기에 ‘과학’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게 되었는지를 서술하는 일종의 사상사 내지는 그들의 발자취를 기술한 책이다. 로널드가 과학사/의학사 분야의 교수라는 점에서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로널드라는 사람의 철저한 자료조사에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창조론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알고 또 거기에 명확한 근거들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은 원래 근본주의적인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과학을 전공했지만, 창조론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음을 밝힌다. 그러다가 창조과학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젊은 지구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창조과학에서 돌아서게 된 이야기를 밝힌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 자체는 객관적인 서술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창조과학자들이 어떻게 지난 1세기 동안 어떻게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왔는지 또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어떻게 증거를 왜곡하고 조작했는지 그러면서 어떻게 세계 곳곳으로 확장해 나갔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 저자가 반창조과학적인 입장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최근에 SNS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는 우종학 교수를 중심으로 많은 기독교인, 신학생, 목회자들이 창조과학에 대해 다시 재고하게 되고, 그들의 오류에 대해서 알게 되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을 비판할 때, 그들이 성경에 대해 ‘문자주의’ 혹은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도 근본주의자라는 말들이 서슴없이 등장한다. 근본주의 운동은 사실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급진적 자유주의의 신학 사조에 맞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한국에서는 소위 자신들을 개혁주의라고 자처하는 보수 신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는 주로 신학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본주의라는 말이 바로 이 창조론자들(창조과학자들)에게 적용될 뿐만 아니라 이렇게 까지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에 흥미로웠다. (물론 성서해석의 측면에서 당연할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창조과학을 공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 더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과학은 단순히 문자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혹은 근본주의자=문자주의자라는 생각이다.


옥스퍼드의 구약학 교수를 지냈던 제임스 바(James Barr)는 그의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있는데, 근본주의자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은 문자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오성에 있다. 여기서 성서의 무오성이라 함은 성서가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한 치의 오류도 없음을 지키고자 하는 교리다. 실제로 근본주의자들의 성서 해석을 보면 모든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서의 무오성을 지키기 위해 성서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비문자적 해석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오성이지 문자성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창조론자들』 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나도 한 때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이 ‘정확무오’하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한다. 결국 그것은 그들이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창조과학자들이 과학자가 되는 과정 속에서 이들이 바로 안식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은 처음에 미국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전략을 택했으나 후에는 전략 노선을 수정하여 정치적인 압박을 통해 오히려 창조과학을 학교의 공교육에 넣으려고 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은 곧 창조론을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으로 명명하면서 자신들의 방향을 과학의 방향으로 몰고 가려 애썼으며, 과학으로 재포장하려 했다는 것. 게다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창조과학자 버딕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박사 학위가 필요 했는데, 애리조나 대학에서 박사는커녕 석사 학위도 받지 못했고, 결국 실체도 없는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속이게 된다. 이러한 창조과학자들의 역사에서 결국 창조론자들이 걸어온 발자취는 그들이 성서에 대해 확고한 신앙만큼 행위가 따라가지 못하는 거짓된 자들임을 보여주며, 창조과학에 ‘과학’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붙일 수 없는, 적어도 과학에 있어서는 비전문가들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로널드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책의 말미는 증보판에 덧붙여진 내용인데, 지적설계와 창조론자들의 최근 흐름 및 창조과학자들의 세계 지형도까지 안내하고 있다. 더불어 교회 안에 창조론자들이 어떻게 침투하였는지, 또 주요 교단들에게 미친 영향도 소개하고 있으며, 가톨릭과 유대교에게도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흥미를 끌었던 점은 창조론의 세계화 부분에서 ‘한국’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로널드는 아시아에서 특별히 한국인들이 창조과학자들을 위한 발전소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한국창조과학협회’ 이야기까지 상세하게 다룬다. 특히 1990년대로 넘어와서 서울에서만 1500여회의 세미나를 개최했다는 사실에서 한국은 적어도 아시아에 있어서는 “창조론의 수도”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라고 로널드는 평가한다.


창조과학자들의 무서운 점은 그들이 ‘과학’으로 승부가 나지 않아서인지 법률적, 정치적 공세를 폈다는 점이다. 로널드는 미국 여러 주의 공화당원들이 자신들의 공약에 창조론 항목을 추가했고, 창조과학자들은 미국 전역에서 지역 교육위원회의 선거에 출마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필자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 잠깐 떠올랐다. 매 학기 초마다 열리는 신앙 사경회의 선택 특강 시간에 유명한 한국의 창조과학자의 강의가 포함되어 있었던 불과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적어도 장신대의 조직신학 및 성서학의 입장은 그러한 근본주의적 영향과는 매우 거리가 먼데, 어떻게 그들이 신학교 안에까지 들어와 강의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커다란 수치를 느끼면서도 창조론자들의 책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공세는 아니었는가 음모론 아닌 음모론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성서를 근본주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닌데, 가장 무서운 점은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의 신앙이 더 좋아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그들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들의 속내를, 그리고 그들이 지나온 과거를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진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