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과신책] 학자의  읽기

 

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엔도 슈사쿠 | 침묵의 소리 | 김승철 역 | 동연 | 2016

 

김영웅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의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침묵 가운데서도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침묵’은 ‘침묵의 소리’로 다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침묵’을 오독했던 독자 중 하나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침묵’을 ‘침묵’으로만 읽었던 많은 독자들 덕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묵의 소리’는 ‘침묵’에 해제를 붙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침묵’에 대한 오독이 엔도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독 덕분에 우리들은 엔도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좀 더 친밀하고 좀 더 친절하게 말이다. 나도 그랬다. ‘침묵의 소리’를 읽으며 ‘침묵’ 너머에 있는 엔도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침묵'을 읽을 때에는 못 느꼈던 것들이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엔도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사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침묵’을 집필하게 되었던 이유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인생과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전해지지 않았던 (침묵했던) 엔도가 내겐 비로소 전해졌다 (소리로 들려졌다).

 

 

그는 토종 일본인이면서도 서양에서 전해져 온 기독교 (가톨릭)를 받아들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스스로도, ‘어릴 적부터의 기독교는 자신이 믿지도 않은 세계에 자신의 몸이 내던져진 사람이 겪는 이문화 체험’이라고 고백한다. 엔도에게 기독교는 그만큼 이질적인 문화였고, 그 속에서 그는 혼란스러웠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자인 김승철 교수 역시 서문에서, 엔도에게는 어릴 적 자신이 받았던 세례에서부터 ‘기독교가 일본에서 자란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 늘 그를 따라다니던 물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엔도는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일본인인 자신의 몸에 맞는 신앙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결심이 마침내 소설가 엔도를 탄생시켰다고 역자는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실로 소설 ‘침묵’은 엔도의 삶 전체가 녹아 있는 책인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로부터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히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판 경우에는 아예 누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배교한 기리시단들을 한데 모여 살게 했던 기리시단 주거지에서 20년에 걸쳐 간수로 일했던 어느 하급 무사가 남긴 일기 형식의 문서이다. 엔도는 이 실제 문서를 약 10분의 1 정도로 줄이면서 발췌해서 고쳐 쓰는 방식으로 ‘관리인의 일기’를 작성하였고, 이를 ‘침묵’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게 해두었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 번역판을 읽은 나에게 ‘침묵’의 마지막은, 끝내 배교한 로드리고 신부와 이미 배교했던 페레이라 신부를 향하여, 그리고 끊임없이 간교함과 성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던 기치지로를 향하여 결코 좋지 못한 시선을 줄 수밖에 없게 해 주었었다. 이는 반대급부로, 끝가지 후미에를 밟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낌없이 버린 순교자들을 향한 시선을, 마음 아프지만, 옹호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침묵이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마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도 나는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샌가 배신이냐 죽음이냐의 문제가 신앙을 버리느냐 지키느냐의 문제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자 김승철 교수가 직접 해제 및 번역과 주해를 한, 이 책에 수록된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를 읽고 난 후, 난 비로소 의문이 해소될 수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강한 자들의 입장이 옹호되는 반면,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으며 배교하여 목숨을 건진 약한 자들의 입장이 멸시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나는 비로소 해방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기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하고 다른 이들에게 포교 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간교함을 얼굴에 써놓은 듯한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예전과는 달리 로드리고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일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의 회복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침묵의 소리'의 도입부에서 엔도는 나가사키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 안에서 동판에 새겨진 후미에를 만나고 그 나무틀에 남아있던 수많은 검은 발자국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믿는 것을 발로 밟았을 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약자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침묵'의 주인공으로서 담대하게 순교한 강자가 아닌 끝내 배교한 약자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침묵의 소리' 책 안에는 엔도의 다른 단편 소설들이 몇 개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아버지의 종교, 어머니의 종교'에서는 엔도는 가쿠레 기리시단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들의 시작은 순교가 아닌 배교였다. 그들의 신앙은 승리자의 신앙이 아니라 실패자의 신앙이었다. 그들 신앙의 출발점은 자신들이 배교자, 약자라는 자각이었으며, 그 어두운 출발점이 그들의 신앙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신앙이, '어머니 되시는 분'이란 단편 소설에서 말하듯이, 오랜 시간을 비밀리에 거쳐 오면서 불교나 다른 종교, 심지어는 토속적인 미신까지 뒤섞여 있는 종교로 변질되었지만, 그들의 아픔과 회한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단번에 이교도나 이단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엔도가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침묵'을 썼다는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다. 때문에 '침묵'을 읽고 난 후 느꼈던 찝찝함은 말끔히 해소가 되었다. 예수의 예언대로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엔도의 표현대로라면, 가쿠레 기리시단의 조상들처럼 후미에를 밟았던 셈이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그 세 번의 부인함으로 인해 예수께 질책을 당하거나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을 체험한 지도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 페레이라나 로드리고, 그리고 간교한 기치지로라고 해서 그들의 배교 행위 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며 그 영향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았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엔도는 말한다. 자신 역시 페레이라이고 로드리고이며, 또 기치지로라고. 자신 속의 여러 인격을 각각 독립시켜 그것을 작중 인물로 그려나갔던 것이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의 차이로 인해 다행히(?) 나는 고문과 죽음이 문턱에 와 있는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을 뿐, 일상 속에서는 밥 먹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매일 배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이다. 가쿠레 기리시단은 일 년에 한 번씩 후미에를 밟는 행위를 지속해야 했지만, 그 행위 이외에는 비밀리에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머리와 입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말하고 가끔은 마음까지 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이 관성에 의해 나만의 가치관에 의해 나를 움직인다. 마치 기계 돌리듯 말이다.

 

물론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겠지만,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통해, 약자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신앙 지키기는 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단지 신은 침묵한다는 메시지나, 침묵 속에서도 말한다는 메시지를 넘어서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종합해 볼 때, 아니 내가 만난 엔도를 느껴볼 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나 늘 잊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스스로 곱씹게 만들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결국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 가운데 침묵하시든지 침묵하지 않으시든지,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게 된 것이다. 엔도를 통해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약한 페레이라, 로드리고, 기치지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순간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분이 침묵하시든 침묵으로 말씀하시든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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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승현준 | 커넥톰, 뇌의 지도 | 신상규 역 | 김영사

 

글_ 최성일 (과신대 정회원)

 

 

5년 전 인간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이후, 항상 뇌에 대한 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이 책이 첫 책이었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의 역사를 시간 순서로 잘 설명했고, 현재 뇌과학의 상황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큰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큰 그림은 희망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쉽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희망적인 것은 뇌의 신비를 좀 더 알 수 있게 되고, 정신질환의 근본적 치료법이 열릴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쉬움은 커넥토믹스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는 것이었고(21세기 말이 되어야 뇌의 지도, 즉 커넥톰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커넥톰의 작용 메커니즘을 밝히는 커넥토믹스의 완성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염려가 되는 것은 이 미래의 기술을 믿고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신체를 냉동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은 케빈 켈리의 “통제 불능”을 읽은 후에 가졌던 느낌과 같았습니다. 또한 필자가 이야기 하는 오늘날 컴퓨터의 엄청난 연산능력으로 완성될 커넥토믹스는 19세기의 라플라스의 악마를 연상시켰습니다. 전자현미경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뉴런의 연결 지도가 완성되고, 뉴런들이 각기 어떻게 연결되어 기억, 이해, 감정(사랑) 등등을 일으키는가 하는 알고리즘이 커넥토믹스에 의해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기억을 마음대로 업로드/다운로드할 수 있고, 또 조작도 할 수 있고, 기능을 향상 시킬 수도 있을까요? 과연 사람의 생각, 또는 의식, 또는 영혼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과연 한 사람의 과거의 생각, 현재의 생각, 미래의 생각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의식 또는 영혼이라는 것은 물질에 종속된 것인가요?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2007년 한 사람의 유전자 지도(genome)가 완성이 된 후, 유전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크리스퍼 가위가 발명되어 유전자 조작이 꽤 자유로워져서 유전자 수준에서 질병을 미리 예방하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일반인들인 우리는 이런 과학기술들만으로도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게놈은 커넥톰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머리 밖에도 우주가 있고, 인간의 머리 안에도 그에 못지않은 광대한 우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1입방밀리미터의 뇌 지도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이미지 정보의 양은 1페타바이트(1015 바이트)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커넥톰 수준은 길이가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의 커넥톰을 완성한 정도입니다. 이것만으로도 12년 이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쥐와 고양이, 침팬지를 거쳐 인간의 커넥톰을 완성하려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저자는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 21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인간 커넥톰이 완성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직경 30센티 안에 천억 개의 뉴런(신경세포)으로 되어 있다... 길이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은 300개의 뉴런으로 고작 7000개의 신경계 연결망을 가지지만, 그 지도를 그리는데 12년 이상 걸렸다. 당신의 커넥톰은 1000억 배 이상 크며, 당신 게놈의 염기 수(뉴클레오티드 수)보다 100만 배 정도 많은 연결을 가지고 있다. 커넥톰(뇌의 지도)에 비하면 게놈(유전자 지도)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1입방밀리미터에는 10억 개의 시냅스가 밀집돼있다."(커넥톰, 뇌의 지도, 승현준, 김영사, 12, 22, 95쪽)

 

저자는 인간의 유전자 지도와 뇌의 지도는 또한 가소성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비록 조작을 할 수는 있지만, 유전자는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고, 뇌의 지도는 성장하면서 뉴런과 뉴런의 연결이 경험과 학습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뇌의 가소성을 기반으로 저자는 커넥토믹스가 완성되면 인간의 사고, 감정, 기억 등등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뇌의 가소성의 4가지 형식인 재가중(reweighting), 재연결(reconnection), 재배선(rewiring), 재생성(regeneration)을 정신 활동에 관여하는 뉴런과 시냅스들의 움직임이라고 설명합니다. 일단 커넥톰이 완성되면 이 네 가지 R을 바탕으로 뉴런들 간의 연결인 커넥토믹스를 파악하여 정신활동을 더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책의 내용이 워낙 전문적이고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세세한 내용 정리는 제 입장에서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까지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자를 21세기의 기계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세 가지 비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저자가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진술이 추측과 기대를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한 인간 커넥톰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하지만, 미래 기술에 대한 추측과 기대라는 불안한 기초 위에 “인체냉동술”, “업로딩” 등에 의한 영원한 젊음, 영생을 얻어서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마치 인류가 당연히 걷게 될 방향으로 단정하는 것 같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좁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 저자는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또 다른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끝내고 있습니다. 그 외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문학의 대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이야기한 인간의 정신의 활동이 뉴런과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와 화학신호들의 상호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 의식의 문제를 추적했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사고 과정에 관여하는 이러한 물리적 메커니즘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의식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모듈 – 예를 들면 할머니 모듈 – 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모듈의 존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통찰이라도 제시할까? 아니면 의식의 본질에 관해서 우리를 여전히 깜깜이 상태로 놓아둘 것인가? 뇌가 뉴런과 신경교(膠)로 구성되었다는 지식이 의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GEB, 471쪽)

 

수학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무의미한 형식체계로부터 창발하는 인간 자의식을 이해하려고 했던 호프스태터의 관점에서 보자면, 저자는 너무 컴퓨터의 기계적 연산능력을 과신하는 것 같습니다.

 

파스칼을 상당히 좋아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파스칼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기보다는 일부만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이용하는 것 같아 섭섭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학의 천재였던 파스칼이지만,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느끼며 여생을 살았었을 텐데, 그런 것까지 뇌 속의 전기신호와 화학신호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끝으로, 이 책은 커넥토믹스의 미래를 너무 핑크 빛으로만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활동의 신비에 대해서 더 많이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커넥톰과 커넥토믹스라는 개념을 알기 전에도,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하고,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하고, 책을 읽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의 메커니즘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정확히 나타낼 수 없는 지금도 우리는 아주 멋지게 그런 정신활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커넥톰과 커넥토믹스가 빨리 발전해야겠지만, 커넥토믹스가 없더라도 정신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너무 미래에 치우쳐서 현재의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신경학자로서 자신이 아끼는 분야의 미래를 극한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고 또 그래야 이 분야가 주목을 받고 활성화될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저 자신은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즐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종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하신 일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몰라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신비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신비한 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뇌피셜적 독후감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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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

[과신책] 학자의  읽기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
브레넌 매닝 | 부랑아 복음 | 진흥 | 2002

 

김영웅

 

 

얼마나 오죽했으면 종으로 살게 해 달라는 결단까지 하고 아버지를 다시 찾아왔을까? 한 번 떠난,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집에,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재산을 모두 탕진한 채 부랑아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바는 수많은 글과 책에서 다루어졌지만, 브레넌 매닝의 '부랑아 복음'은 그렇게 부랑아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에 중점을 두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묻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런 몰골을 하게 되었는지,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왜 이제야 돌아왔는지, 가지고 나간 재산은 어떻게 했는지, 혹은 이제 잘못을 제대로 뉘우쳤는지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죄를 고백하고 종으로 살게 해 달라는 아들의 요구에 다음과 같이 종들에게 명령하면서 응답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잔치를 벌였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어떻게 보면 맹목적으로 보이기도 하며, 그래서 더욱 어리석게도 보이는 그 아버지의 사랑. 브레넌 매닝은 이 압도적이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로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의 수혜자라는 것이다!

 

 

이 책은 새로운 무언가를 더 가르쳐 주기보다 이미 배운 것을 다시 일깨워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바를 고스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부랑아'였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시뻘건 죄악에 물든 죄인이었고, 그래서 우리 안의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전적으로 처참하게 타락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이 임했다.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체스터톤이 한 번은 "하나님의 맹렬한 사랑"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저자인 브레드 매닝은 이를 그대로 수용한다. 우리 역시 그러한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하여 이 책을 마주한다면, 이 책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를 건진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은혜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다시 일깨워줄 것이다.

 

돌이켜보자. 우리들 각자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첫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졌다. 급기야 우리들은 아이들을 훈계할 때, 마치 하나님이 착한 아이들만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가르치거나, 집사로서, 장로로서, 또는 목사로서 보여야 합당할 것만 같은 경건한 모습에다가 스스로를 끼어 맞추려고 애를 써야만 하나님께서 더 큰 상을 주시고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리라 은연중 믿게 되었다.

 

우린 말로는 은혜의 복음을 운운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마치 개인적인 경건 훈련과 자기 부인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빚어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살고 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강조점을 두며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눈에 들려고 무언가 더 해내야만 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브레넌은 이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 더 이상 취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우리 중엔 그 어떤 누구도 가치 있는 존재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은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을 우린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는 신들 중 죄인을 사랑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미 알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 어떤 공로도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써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소식이요, 사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좋은 은혜의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 예를 들어 좀 더 경건하거나 좀 더 구제, 봉사, 헌신을 많이 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배타적인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러한 행위에 따라 점수가 매겨져 있는 피라미드 구조의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예수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나라인 것이다.

 

미국에서 유명했던 CCM 가수, 마이클 W. 스미스가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린 우리가 가진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시며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은혜의 복음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우린 그것으로부터 해방받았다. 놀라운 은혜의 달콤한 소리가 자기기만의 필요에서 우리를 구해내었던 것이다. 브레넌은 말한다. 은혜로 산다는 것은 우리 전 생애의 이야기, 곧 인생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다 인정한다는 의미라고 말이다. 우리 삶의 그늘진 면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내 가슴을 묵직하게 툭 때리는 브레넌 자신의 예화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한 때 알코올 중독자였던 브레넌이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당하게 "브레넌이라고 합니다. 저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라고 선언했고, 그때야말로 그가 최고의 해방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주변 사람들의 압력,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 사람들에게 존경받아야 한다는 속박으로부터 바람직하게 독립할 수 있게 해 준다. 누군가를 의식하는 보이지 않고 두려운 구속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함은 곧 타인을 공감하는 진정한 긍휼과 용서를 베풀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우리가 거룩하게 여호와의 공의를 행하는 삶과도 직결된다. 우리 인간은 도긴개긴, 모두 나그네요, 부랑아 인생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공감이 복음으로 해방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더럽고 추악한 모습일 때, 바로 죄인일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여진 존재인 것이다. 모두 은혜의 수혜자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익숙히 알고 있었으나 브레넌 덕분에 다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영적인 사실이 있다. 역시 은혜의 복음에 대해서다.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이 회개에 선행하며, 죄인은 그가 자비를 구하기 전에 먼저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용서는 이미 주어진 것이다. 죄인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완전한 사면이다. 은혜로운 용서인 것이다. 로마서 5:8 말씀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는 말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지하지도 못했을 때"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돌아온 탕자를 먼저 마중 나와 기쁘게 반기며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전적인 은혜란 그렇게 우리를 압도하며 찾아오는 것이다. 반성과 회개는 그 이후에 일어난다. 그리고 그 증거로 우린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이웃사랑으로, 공적인 복음을 표출하는 것이다. 가장 작은 자에게 하는 행동이 예수님께 하는 행동과 같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도 받은 은혜에 다 보답할 수는 없겠지만, 유한한 육을 가지고 유한한 삶을 살게 되는 그 한계를 가지고 최대한 자발적으로 우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며,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인 것이다. 이는 또한 시내산 언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기쁨과 감사함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도 같다. 그때도 은혜가 먼저였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 순종이 따라오는 것이었다. 언제나 은혜가 율법보다 먼저 온다. 율법은 결코 구원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먼저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행하는 우리의 올바른 반응인 것이다. 그 순종을 통해서 우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찾을 수 있다.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파리나 보르도, 리용, 디종 같은 대도시든 아니면 생 레미 같은 작은 마을이든 프랑스에서 부활절을 보내게 되면 건물 벽이나 버스 옆면에 손으로 쓴, 혹은 검은색으로 인쇄되어 내걸린 한 문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사람들이 그 문구를 노래하고 읊조리고 암송하는 것도 듣게 될 것이라고 한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그 문구로 부활절 인사를 나누는 것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문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L'amour de Dieu est folie!" 즉, 하나님의 사랑은 어리석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더 크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더 사랑받기 위해 어떤 공로를 세울 필요가 전혀 없다. 기독교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어떤 경건한 규칙을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두 손을 활짝 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타인을 공감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은혜와 감사에 무감각해져 있거나 냉담해진 분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콧대가 높아진 채 나그네 됨의 정체성을 잊어버린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어떤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끼어 맞추려는 부질없는 노력에 허덕이는 분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고 다시 두 번째의 부르심을 듣는 기적이 일어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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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질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존재했는가 | C. 존 콜린스 | 김광만 역 | 새물결플러스 | 2019

 

최승주 (과신대 정회원)

 

 

이 책은 교회 역사 대부분에 걸쳐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왔던 창세기의 등장인물과 존재들-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생명을 알게 하는 나무 등-에 대해서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진짜 존재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소개한다. 책을 지은 C. 존 콜린스는 구약학 교수답게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대할 때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읽는 것을 조심하면서도 동시에 역사적 핵심을 발견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구약의 본문들뿐만 아니라 신약 그리고 구약을 읽는 또 하나의 방식인 외경의 본문들, 그리고 질문에 대한 여러 신학자의 입장을 친절하게 나열하면서 소개한다.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성서에서 아담과 하와를 다루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의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설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1. 책 내용 및 주요 포인트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 중 나에게 훅 들어온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 보았다.

 

1)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 대한 신학자들의 여러 의견이 있다.

 

만약 이 책을 3~4년 전에 접했다면 ‘맙소사’, ‘말도 안돼’, ‘저자는 이단 아닌가?’ 등등의 생각을 먼저 했을 것 같다. 다행히(??) 몇 해 전 과신대를 알게 되면서 미시적 수준의 지각변동을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터라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수긍이 갔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관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이다(59p). 그렇다면 왜 한국 교회 안에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한 나는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합동측 교단에서 조신(??)하게 자라서 질문하거나 토를 다는 것이 불신앙으로 비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어서이거나, 아니면 내가 성장하던 당시에는 이런 신학적 논의가 지금보다는 덜 활발해서였을 수도 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의미하는 바는?

 

주일학교에서 배우기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의 눈코입을 진흙으로 붙여 주셨다고 했다. 저자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담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실존성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 실재성을 옹호하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담긴 고통과 고난의 문제라고 주장한다(76p). 이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빌리자면 “학자들의 노력이 그런 질문들을 공평하게 다루는 데 실패했다”라고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눈코입을 닮았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성화에서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인간을 위해 오실 거고 온 인류가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데 확인된 우주의 크기만 해도 138억 광년만큼 큰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꼭 지구에 오실까? 꼭 인간에게만 오실까? 그럴 리 없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여기에서는 외현적)을 닮아 특별하다는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제한하는 생각일 수 있겠다.

 

3) 창세기와 과학의 조화? 일치주의는 주의할 것

 

역시나 대부분의 교회 역사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의 과정, 아담 가족이 살았던 시대 등을 과학적(또는 역사적) 설명과 일치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이러한 시도는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전도의 전략으로 사용되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소개하면서 일치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이에 즉각 반대하는 반일치주의도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나리오를 살피는 것이 여러 가지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결코 성서의 주요 스토리라인을 깨는 일이 아님을 알려준다.

 

 

2. 그래도 남는 질문?

 

1) 어디까지가 내러티브이고, 누가 정하는가?

 

창 1~11장은 그렇다 하자. 12장에서 등장하는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복으로 부르신 사건은 신화라고는 볼 수 없을까? 새로운 아담인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라는데(69p)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노아의 홍수는 상징적, 비유적 표현일까 역사적 사실일까?

 

2) 관습적으로 사용했던 복음에 대한 설명이 흔들리는 건 아닐까?

 

기독교는 오랫동안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관습적으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죄는 언제 들어왔을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고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믿어 왔는데, 이것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죄는 언제 들어왔을까? 인간에게 죄의 DNA가 작동할 가능성이 있도록 창조 때 이미 허가를 내주신 걸까? 저자 역시 “뱀의 말로써 표현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어떻게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죄로 인한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것도 포함하는 것이라면 역사적 시점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3) 책의 마지막 결론-슬퍼하는 법

 

한 권의 책에서 가장 궁금한 부분은 저자가 아담과 하와가 실존했을까에 대한 논문을 맺는 방식이다. 저자의 결론은 ‘슬퍼하는 법’이라는 세 페이지에 담겨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화를 소개하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담겨 있고, 죽음이라는 침입자를 추방하시고 회복과 최종적인 복을 주신다는 확신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 위로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월호 사건, 하나님을 잘 믿는 친구의 과로사,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구의 암으로 인한 죽음... 물론 하나님은 나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실 필요는 없을 테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그 질문에 답을 캐기보다 죽음 앞에 함께 슬퍼하고,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찌글어짐에 함께 애통해하는 것일 뿐이다.

 

 

3. 나에게 과신대란 무엇인가?

 

서평을 마무리하며 나에게 과신대가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과신대를 만나면서 나는 자유함을 얻었다. 궁금해 하고 질문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그리고 질문해야 하는구나... 과신대를 통해 과학자도 신학자도 아닌 내가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를 풀고 있는 중이다.

 

25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손에 합동측 목사이신 아버지가 “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라는 책을 쥐어 주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과학으로도 증명된다는 근사한(??) 사실을 딸에게 알려주고 싶었을거다. (나라도..) 그래서 나는 창조하신 세계를 들여다보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 생물학도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한국교회는 젊은지구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회에게 많은 기회를 주던 때, 믿음이 좋은(??) 나는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우면서도 이는 시험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주문을 외웠다. 결국 이원론적인 전략을 취한 나는 내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펜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과신대를 만나며 드는 생각은 지금이라도 질문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또한 세 자녀를 기독대안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로서 아직도 한국교회와 기독학교에 남아있는 일치주의에 대한 문제를 꾸준히 지적하고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지면을 빌어 과신대와 우종학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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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합리화인가, 순수함인가

 

[과신책] 학자의  읽기

 

합리화인가, 순수함인가
엔도 슈사쿠 | 침묵 | 홍성사 | 2003

 

김영웅

 

 

기적이 일어날 거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침묵’이라는 제목으로부터 이야기의 결론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긍정적일 수 없을 결론을 예측하며 난 책을 펼쳤다. 엔도 슈사쿠를 처음 만났다.

 

이 책에서의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을 의미한다. 고난과 역경 한가운데 놓인 하나님의 백성을 기적을 일으켜 구해주는, 영화나 소설 속의 슈퍼 히어로나 마법사 하나님이 아닌, 17세기 일본, 천주교의 박해 중심에서의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시고 묵인하시는 하나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자 죽음도 무릅쓰고 극심한 고통을 담대히 선택한 자신의 백성들 앞에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끝까지 침묵만을 지키셨다.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실화와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소설이다.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포르투갈 신부가 일본에서 박해를 받다가 결국 배교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줄 만큼 소설적인 요소보다는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잘 부각되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로드리고 신부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편지조차도, 덕지덕지 찢어지고 빛바랜 모습으로 어느 박물관엔가 보관되어 있을 법한 기분도 들게 만든다. 그만큼 이 책은 소설이지만 아주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글쓰기로 쓰인 이 책에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은 머리를 통하지 않고도 그저 공감이 된다. 때로는 의심으로,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적의에 가득 찬 채 하나님께 따지고 원망하며 화를 내 본 우리 자신들의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상기시키게 만든다. 이 책은 비록 지금으로부터 4세기나 차이나는 17 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일본이란 낯선 곳에서 벌어진 일을 그려내고 있지만, 21세기 현재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이 여전히 똑부러지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가슴이 한없이 답답해지는 이유는, 바로 시공간과 사건을 초월하여 동일한 결론을 모두 경험하고 그것이 마음속에서 끝내 대답되지 않은 채 치유되지 않은 상처처럼 뿌옇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침묵하심에서 하나님의 동일하심을 찾는 건 신자로서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이야기의 플롯은 예수의 수난 과정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여기엔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 개인적으로 나는 그 의도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의 죽으심 때에도 철저하게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이지 않겠냐는 추측에서 찾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침묵을, 여전히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더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드리고 신부를 예수에 대치시키고, 로드리고 신부를 돈을 받고 판 기치지로를 예수를 은 30냥에 판 유다에 대치시킨다. 또한 관리들에 의해 조롱당하는 장면이나, 감옥을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귀를 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취조당하는 과정에서 오늘 밤 반드시 배교할 것이라는 통역의 말에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키는 것까지도 모두 예수의 수난 과정 중에 있었던 여러 가지 장면들과 겹쳐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읽는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받으셨던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도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닮은 부분이 여럿 있다 하더라도 큰 차이점도 있다.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처럼 극심한 육체적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고, 최후의 죽음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는 끝내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자신의 발로 직접 밟고 배교했다. 마치 예수의 말 그대로 닭 울기 전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박하고도 극단적인 상황을 통하여 엔도 슈사쿠는 우리에게 묻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답은 책의 결말에도 주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열려져 있는 질문인 것이다. 통역이 계속해서 지껄였던 ‘형식적’으로만이라도 배교를 하라는 말이 귓전에 남아 있다. 단지 성화를 밟는 행위가 과연 신앙을 져 버리게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 수 있을까? 로드리고 신부는 기도를 하며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들에게 밟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신부가 들었던 그 음성이 내겐 끝내 소화되지 않을 음식처럼 목에 걸려있다.

 

갈릴레오가 자신이 주장해 온 지동설을 공식적으로는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자기 스스로 구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동설을 거론할 때면 모든 사람이 갈릴레오를 떠올리는 것처럼, 어쩌면 성화를 밟고 배교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여러 신도들의 목숨까지도 살린 로드리고 신부의 행위는 결국 예수 믿는 신앙을 져버린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실제적으로 일본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진 않았을까? 아니면, 신부가 만약 신도들의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과감하게 선택했었다면, 자신 앞을 먼저 간 배교의 스승, 페레이라 신부도 끝내 회개하고 다시 순교하며 신앙을 순수하게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이 책이 전달해 주는 우울함은 그 힘이 무척이나 강력하다. ‘합리화’하는 행위와 ‘순수한’ 신앙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재정의해보는 기회가 된 건 좋은데, 내 안에 남아 있는 이 찝찝함은 어쩐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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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를 읽고

 

이규석 박사 (전남대학교 치의학, 과신대 광주 북클럽 회원)

 

 

태양계, 항성, 은하, 은하군, 은하단, 빅뱅, 우주의 끝……

 

우주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끝없는 확장성과 광대함이었다. 광대한 우주 속의 지구가 너무도 작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은 겸허함을 배우고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을 되살리게 되며, 더 나아가 누군가는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신에 대한 경외심, 누미노제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첨단 과학이론과 정교한 기술들에 밀접하게 엮여서 발전해온 천문학이 과학의 발달에 따라 잊어버렸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다시 일깨우고, 더 나아가 새로운 종교적 체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꽤나 아이러니해 보인다.

 

이런 새로운 종교적 체험은 과학적 지식을 이해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일반인들도 과학적 지식을 쉽게 소개한 과학서적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는 우주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한 책으로서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잘 이끌어내는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우주에 존재하는 다양한 존재 중 가장 기이한 특성을 지닌 블랙홀에 대해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확장성과 광대함이 연상되는 대개의 우주적 존재들과 달리 블랙홀은 끝없는 수축성과 무한소라는 꽤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블랙홀은 부피는 0에 밀도는 무한대라는 마치 수학공식에서나 존재할 법한 기이한 존재이고, 빛조차 가두는 강한 중력으로 시공간을 왜곡시켜 바깥의 우주와 단절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은하의 중심에서 수많은 별들을 거느리는 존재이며, 모든 물질을 탐욕스럽게 삼켜버리는 동시에 우리 은하 전체의 밝기보다 수십배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존재이다. 이런 기이한 특성을 가진 블랙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지의 존재이지만 만물을 창조하신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지기에는 지나치게 독특한, 소위 이단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는 블랙홀이 무엇이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잘 정리한 동시에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졌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다. 덕분에 그동안 미지의 존재로만 여겨져 왔던 블랙홀조차도 우주 속에서 물질이 만들어내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었고, 또 이런 존재를 가능케 하신 창조주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블랙홀에 대한 내용이 아무리 신기하고 놀랍다고 하더라도 건조한 사실의 나열만으로는 신기함과 놀라움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블랙홀에 대한 발견을 가능케 한 기발한 착상들과 그에 따른 연구과정들이 생생히 담겨 있다. 저자가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하고 있고, 동료 과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기에 담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런 내용들은 블랙홀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동시에 과학적 발견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흥미롭고 즐거운 과정인지 잘 보여준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다른 과학과 달리 인위적인 실험이 거의 불가능한 분야인 천문학이 어떤 방식을 통해 연구를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천문학이 정교한 관측과 이론물리학을 이용한 해석과 예측을 통해 새로운 발견과 발전을 거듭해나간다는 내용은 수학적으로 정교한 이론이 아직 부족한 분야인 생명과학에 종사하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무척 흥미롭고 질투 나는 부분이었다. 

 

책의 마무리가 다소 갑작스럽고 딱딱하게 끝나는 점이 조금 아쉽지만 이는 저자가 먼 훗날 자신의 연구성과를 모두 종합하고 과학자로서 살아온 삶을 뒤돌아본 뒤에 적길 원해서 남겨둔 여백이 아닐까 싶다. 더욱 흥미진진한 연구활동을 통해 더 훌륭한 연구성과를 이뤄낸 뒤 멋지게 책을 마무리하시길 응원하며 나 역시 과학자로서 이 책과 같은 멋진 책을 써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보며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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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겸손: 편견과 오만함을 넘어

 

[과신책] 학자의  읽기

 

겸손: 편견과 오만함을 넘어
로완 윌리엄스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복있는사람 | 2015

 

김영웅

 

 

진리처럼 믿어왔던 것들이 하나의 의견에 불과할 수 있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서있던 자리가 치우친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언젠간 그 시간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

 

닫혀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꾹 잠겨있던 녹슨 눈과 거미줄 쳐진 귀가 마침내 열리는 순간, 누군가에겐 자신이 쌓고 지켜왔던 성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인생의 극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기꺼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도 하며, 또 누군가에겐 한동안 놓고 있던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삶을 재조정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대학생 때 교회를 잠시 떠나기까지 다녔던 여러 교회들이 대부분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다시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였다. 내가 배워서 알고 있던 기독교에 관한 모든 정보는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교단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내게는 오직 그곳에서 배워 처음 알게 되었던 지식이 기독교와 교회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전부였다.

 

불행하게도, 별 문제가 없었다. 교회에서는 신앙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으로 통했다 (공부 잘하는 인간이 교회에 결석하지 않고 출석하며, 질문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기까지 하면, 백이면 백 신앙 좋다는 소리 듣는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지금도 그러리라는 데에 오백 원 건다). 그러나 내게도 어느 날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그 일련의 과정이 처음엔 인생의 극소점을 넘어 최소점으로 다가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가 아닌 기회이자 발판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으며, 나중엔 그때를 생각하면서 현재 내 삶의 키를 재조정하는 기억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때였다. 내가 알고 믿었던 것들이 가졌던 찬란한 유일성과 엄숙한 절대성이 깨어지게 된 건. 메커니즘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위치한 지점이 가운데가 아니라 상당히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름 좀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기독교 관련 지식들이 하나의 해석이나 주장에 불과한 게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주 작아졌다.

 

 

미국에 오게 되면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여러 교파가 기독교라는 지붕 아래 존재한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성공회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라고 이해하면 성공회를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설명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내가 읽었던 신학책의 꽤 많은 저자들이 성공회 배경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번에 처음 접한 로완 윌리엄스 또한 성공회 소속 신학자이다. 그는 천 년 전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성 안셀무스 이후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지도자라는 평까지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을 가진 아주 짧지만 묵직한 책을 읽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요소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핵심 요소 네 가지를 친절하게 풀어준다. 자상한 선생님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려주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세례와 성경, 성찬례와 기도, 이 네 가지에 관한 지식은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배워왔던 기본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또 한 번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이 전부가 아니었고, 상당히 편향되어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도 신학적인 요소들이 매일 접하는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 거룩한 백성의 참 의미가 결코 어떤 위력을 행사하며 겉으로 드러난 집단이나, 저기 산속에 따로 존재하는 은둔형 단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죄악과 혼돈이 가득하고 여전히 유혹이 넘쳐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그 세상을 등지는 것도 아니요, 그 세상과 똑같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 세상 속에 존재하되 혐오와 배제와 차별의 유혹을 물리치고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것, 연약하고 불완전한 모습이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나도 용기 내어 몸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 세상 속에 존재하는 죄악과 혼돈을 피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맞서는 것, 그 삶을 기꺼이 끌어안는 것, 모든 사람을 섬기며 모든 사람에게 복이 임하길 간구하는 것, 그러나 위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것, 그래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도움을 구하여 우리가 쓰이는 것, 예언자적인 사명으로 불의와 죄악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 상하좌우의 모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다리를 놓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더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고, 예전엔 몰랐던 많은 숨겨진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간다. 성공회 대주교의 글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모범답안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것 또한 만남의 축복이라 믿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운다는 것은 어느 정상에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만해지지 않기 위함이다. 세상엔 정말 탐험할 것이 많아 교만해진다는 건 곧 옹색함이요 게으름이며, 용기 없음일지도 모른다. 조만간 성공회 교회를 찾아 예배에 직접 참석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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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과신책] 학자의 읽기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 이레서원 | 2017

 

김영웅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를 향한 신뢰,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자칫하다간 자신의 신앙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이 자신의 고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느껴지고, 자신만 숨 막히는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난과 훈련의 유익함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는 '욥기'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 가운데, 왜 욥이 고난 받게 되는지를, 욥기의 시작부터 우리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작 불가항력적인 고난을 실제로 받았던 욥은 그 고난이 끝난 이후에도 그 이유를 몰랐다. 다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욥은,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 영적 교만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을 마침내 대면하고 이를 회개하게 된다. 이후 욥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께선 욥에게 고난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다. 

고난을 겪고 나서, 그 고난이 왜 자신에게 임했는지 정확히 알게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정말 그 직접적인 이유를 우린 알 수 있기나 한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지나고 나서야 그 고난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비로소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극심한 고난 중에서는, 절망 가운데 깊이 빠져 있다가도 간헐적으로 온전한 분별력을 되찾기도 하고, 이내 다시 끔찍한 고통 속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사이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고난됨은 어쩌면 이러한 반복적이고 비생산적인 크고 작은 감정과 고통의 요동과, 그 때문에 늘 정체되어 수렁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우,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이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한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전보다 오히려 더욱더 힘든 내면세계의 혼돈과 붕괴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는 그의 책,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에서, 욥기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로 빚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들 생각의 저변에 깔린 인과응보적인 논리를 물리치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대답만을 하신 사건에서도, 우린 죄와 고난의 인과적인 관계가 항상 성립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난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답답하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모른다"거나 "context-dependent"하다는 것이 가장 '성경적'일지도 모르겠다. 

고난의 원인(Why)을 밝혀내는 것보다는, 어쩌면 그 고난으로부터 무엇을(What) 얻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의 목적은 Why보다는 What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욥의 친구들은 모두 욥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Why)에 중점을 두고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그들은 모두, 순종은 복으로, 죄는 심판으로 인도한다는, 기계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었고, 그 방정식에 하나님을 대입하여 기계적으로 얻은 해와 욥의 상황이 일치하지 않음을 간파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그 친구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What)이 지닌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곧 하나님은 종종 예기치 못한 방식,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신다는 점(What)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해법을 욥의 특수한 사례에 적용하려 했다. 마치 하나님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음일 뿐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방정식에 갇혀 그 규칙대로 움직이는 존재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들은 하나님(What)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목적은 욥이 그분을 알게 되는 데에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것도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닌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말이다. 저자 역시 Why가 아닌 What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광대하고 다양하며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그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쉽게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불가사의한 모든 것까지도 통제하시는 분이시다. 불가사의는 우리의 이해를 넘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광대하고 경이로운 계획 가운데서는, 부당한 일들까지도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하나님은 그 일들까지 사용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심지어는 이전보다 더 낫게 만드시기도 한다. 욥은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런 상황까지도 그분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고난도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과정의 일환일 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한 진리이겠지만, 인간은 불완전하고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창조주인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는다면, 고난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하는 왜(Why)의 질문 대신, 그 고난으로 인해 깨닫게 될 무엇(What)에 좀 더 초점을 둘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하며 과거지향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와 미래까지도 스스로 파괴해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그 고난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그를 향한 신뢰와 소망을 가지고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솔직히 드러내어 귀를 기울여 보자. 적어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욥의 친구들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을 순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또 맞이하게 될 고난에 대한 면역이나 근력도 생겨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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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호모 사피엔스의 귓속말

인간의 타락과 진화 | 윌리엄 T. 카바노프, 제임스 K. A. 스미스 편집| 새물결플러스 | 2019

 

심기주 (과신대 기자단)

 

 

성령이 인도하는 신학적 상상력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열 명의 학자들이 ‘인간이, 인간이 아닌 영장류로부터 출현했다면 이는 인간의 기원과 죄의 기원을 포함한 기독교 신학의 기원에 관한 전통적 설명과 관련해서 어떤 함의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모인 결과이다.

 

이 책이 단순히 기고문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이 학자들이 3년동안 같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또 우정을 나누며 공동체로서 토론해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교회의 한 모습 같달까? 사실 요즘 들어 공동체의 필요성은 많이 느끼는데 비해 예배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이 책에서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신학적 작업은 신실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예배가 필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꽂혔다. ‘우리의 상상력의 근육을 훈련시키고 늘리려면 시간, 즉 쟁점들과 기회들에 대해 심사숙고할 시간, 경청하고 묵상할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실한 상상력을 기르는 데는 성경 이야기의 운율로 상상력에 세례를 베푸는 일이 필요하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목표다.’ (20쪽)

 

즉, 예배에 녹아 있는 성경 이야기로부터 하나님의 영감을 얻고 신학적 상상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집필한 신학자들의 공동체인 ‘골로새 포럼’은 예전적인 예배를 신학적 상상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꼽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전통을 계승하며 신학적 상상력으로 균형을 잡는 모습이 가장 매력적이면서 좋은 부분이었다.

 

전통에 충실한 확장

 

여지껏 과신대에서 인터뷰하고 콜로퀴움에 오셨던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조언해주신 것은 “신학이 과학의 연구결과를 신학화하는 데만 신경 쓰느라 신학 본연의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신학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간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실 여러 글들을 보며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 과학에 맞춰 해석을 계속하는 것은 뭔가 끼워 맞추기 식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서론에서 말하는 매킨타이어의 전통에 대한 정의는 내 고민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전통은 특정한 근본적 동의가 정의되고 재정의되는 주장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되는 주장이다.”

 

이 다음에 나오는 전통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전통’은 성경에 의해 촉진되고 기독교 예배 의식 속에 담겨 있으며 초교파적 신조(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등)로 표현된 보편 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가리킨다. 이는 이미 전통 내부에 표현, 확장, 수정이라는 확대되고 있는 층위들을 지닌 살아 있는 전통(25쪽)’이라는 것이다.’ 전통은 정적이며 고정되어 있어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기독교 전통은 그 속에 역동적인 ‘역사’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 책에서는 전통의 방향성에 충실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확장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 점이 나는 흥미로웠다. 아!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창의적이면서도 깊은 고민과 대화가 가능하다니! 나의 신앙의 길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어떤 움직임이 “전통에 충실한 확장”인지 아니면 전통과는 무관한 것인지를 분별하면서 나아갈 때, 전통은 그저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숨 쉬고 나와 교감하는 유기체가 되는 것이다.

 

 

아담과 호모 사피엔스

 

그렇다. 내가 처음에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돌이켜 보면 원래 나는 성경을 접할 때, 말씀 묵상을 할 때, 그것들이 현실에 잘 와 닿지 않았다. 성경 속의 인물들은 그저 수 천년 전에 있었던 많이 들어봐서 친숙한 외국인들이고, 성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2D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스파이더맨 영화와 오히려 비슷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것은 단지 모든 인류의 책임과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답답하게 하는 요소일 뿐이었지 딱히 내게 와 닿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면서 창세기를 쓴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용의 각각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다각도로 알게 될 때, 창세기는 내게 4D 영화, 아니 ‘실재’로 다가왔다. 아담은 단지 모든 인류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용도가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아담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우리에게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는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가인이 “선을 행할” 수 있고, “죄가 문에 도사리고 앉아” 있을지라도 그가 “죄를” 반드시 잘 다스려야만 한다(창 4: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셨던 말씀은 죄(창세기에서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예)는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인간은 (최소한 처음에는) 죄에 맞서 싸울 수 있다.(187쪽)’

 

특히 아담에서 가인, 라멕을 거쳐 죄가 불덩이처럼 늘어나는 것을 묘사하는 창세기 6장까지, 창세기는 죄가 점점 발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처드 미들턴은 창세기에서 진술한 것처럼 죄가 발달한다는 관점은 초기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서 도덕적인 악이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도덕적, 종교적 의식이 발달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간들은 자신의 양심이 '폭력적인 행동을 금하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충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충고를 무시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치론적인 해석을 피하면서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것은 판넨베르크의 논리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넨베르크는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는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 중간지대로서의 철학을 매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윌리엄 브라운은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 우선, 구약 본문을 '설명'하고, 해당 본문의 신학적 주제를 가지고 과학으로 온다. 그리고 이 주제를, 과학을 통해 세계를 볼 때 관련 있을 법한 측면들과 관련지어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에서 얻은 통찰을 가지고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온다.(147쪽)

 

즉, 어떤 면에서는 각각의 주제를 뽑아 과학과 신학을 넘나 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중간지대를 활용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담과 원죄’, 그리고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도덕적, 종교적 의식 발달’의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것도 이런 중간지대를 거치고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는 원죄 뿐만 아니라, 타락, 죽음 등 다양한 전통과 관련된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신학과 과학의 대화 방식인 것 같다. 이를 활용할 때도, “전통에 충실한 확장”이 또 가능하지 않을까? 전통에 충실하면서, 즉, 기독교의 본질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 사회를 무시하지 않고 현실적인 대안과 조언을 제시해줄 수 있는 기독교의 역동성을 기대해본다.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 4:7b)”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죄의 유혹을 다스리라고 주님이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죄의 발달과정을 곱씹으며 죄에서 떠나라고 외치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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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논리를 넘어서는 은혜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예기치 못한 기쁨
C. S. 루이스 | 홍성사 | 2018

 

김영웅

 

 

기독교 변증가로 잘 알려진 C. S. Lewis의 삶이 온통 기독교적인 색채들, 이를테면 말씀 듣고 읽고 묵상하고 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행위들로 가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허다한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의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그이지만, 실상 그는 목사나 신학자도 아닐 뿐더러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릴 적부터 신앙심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태어나는 시대와 장소를 선택할 수 없었기에 북아일랜드의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을 뿐, 머리가 조금씩 크면서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1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대학으로 복귀한 몇 년 후 그는 유신론자가 되었고, 얼마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회심 이후 그는 끝까지 성공회 신자였다). 루이스가 57세가 되던 해에 (생을 마치기 6년 전) 출판된 이 자서전과도 같은 책은 이러한 그의 신앙의 여정을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들려주는 책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년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약 300페이지 안에 모두 담으려면 많은 내용을 빼야만 한다. 그러는 와중에 중요하다 생각되는 사건들은 강조도 해야 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한 형식으로 잘 짜여있다. 논리정연하면서도 문학적이고 위트가 넘치는 그의 필체는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예기치 못한 기쁨을 선사해 줄 것이다.

 

 

학창 시절의 그는 마치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결코 무난하거나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에 푹 빠져 살아왔는데 (그는 북유럽 신화들을 비롯해 많은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기질은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것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인간이 모인 아무리 작은 집단이라도 거기엔 계급 의식이 물들어있는 법이며, 일반적으로 그 안에선 진실을 은폐하거나 교묘하게 위장하는 방법을 통해 충분히 사교적이면서도 철저히 이기적인 속성을 겸비한 인간들이 지배층으로 군림하기 마련이다. 루이스가 다닌 학교의 분위기가 이 책에선 꽤 자세히 강조되어 있는데, 나에게는 그가 그 시절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는 그 당시 계급적인 학교 체제에 적응하지 못했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진 아버지의 스승이셨던 분에게서 개인지도를 받으며 비로소 안정적으로 학문적 성장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책에서도 여러 번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를 사용하는 것을 봐도 그의 독특한 (이기적으로 보이면서도 남에게 해는 끼치지 않는, 즉 다분히 개인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학습 받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저 그렇게 주어진 모습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게끔 지어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 그는 운동과 수학에 젬병이었으며, 오로지 앉아서 혼자 글을 읽고 쓰고 상상하고, 시간에 맞추어 적당한 산책을 즐기고 일찍 잠드는, 고독한 일상을 좋아했던, 천성적인 학자이자 작가였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종종 그를 예기치 않게 찾아왔고 스스로 ‘기쁨’이라 불렀던 순간을 어른이 되어서도 늘 갈망하곤 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이후에 그는 그 ‘기쁨’을 어떤 하나의 마음 상태로 여기게 된다. 그 ‘기쁨’은 무언가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갈망 비슷한 것이었는데, 모태신앙으로 자라다가 염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무신론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고, 다시 어떤 절대적이며 정신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게 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 ‘기쁨’은 그 자체가 참 기쁨이나 목적이 아니라는 것과, 진정한 가치는 오히려 그 ‘기쁨’이 바라고 가리키고 또 그 ‘기쁨’의 근원이기도 한 대상에 있다는 것을 그는 간파하게 된다. 참 기쁨은 우리 인간을 흥분, 고조시키며 환희로 다가오는 어떠한 감정이나 마음 상태에 있지 않다. 비록 그것이 평상시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경험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의 실체는 참 기쁨의 흔적이며 껍데기일 뿐이다.

 

 

사실 난 논리와 변증에 능한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무척 궁금했다. 그 과정 또한 논리정연하고, 누가 들어도 납득이 될 만한 이유와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기대는 책의 말미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루이스 스스로 자기도 잘 설명할 수 없고 잘 모른다고 써놓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부분에서 실망감을 느꼈었지만 (사실 300 페이지 분량의, 그것도 나와 별 상관없는 개인사를 읽어나가는 건 마냥 흥미진진하진 않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가장 큰 이유는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금 후 난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무신론자에서 시작해 교회만 다니는 유신론자였다가 철이 좀 들어서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고, 그 과정을 지금까지 납득이 될 만하게 설명한 사람은 간증 사기꾼 빼고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론 그동안에도 많이 생각해봤다), 그건 논리적이지 않았다고 말해야 가장 솔직한 고백이 아닌가 한다. 은혜는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정의했던 ‘기쁨’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파도처럼 우리를 덮쳐오는 감정으로도 나타나고, 어떠한 지적인 깨달음을 얻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로도 나타나며, 아주 가끔씩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들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적과도 같아서 그 일련의 순간들과 사건들은 한결같이 모두 어떤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 바로 절대적인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되어주신 그 존재, 그리고 모든 열방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바로 그 존재,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인 것이다.

 

루이스 덕분에 나도 예기치 못한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이 기쁨에 국한되지 않고 난 내 일상에 일어나는 소소한 기쁨들의 근원을 더욱 앙망한다. 루이스라는 거장 덕분에 불필요한 곁길 하나를 걷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흡족하다. 그의 진솔한 회심기 덕분에 오히려 일방적이면서도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가 별 볼일 없는 내 삶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것 같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