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책] 합리화인가, 순수함인가

 

[과신책] 학자의  읽기

 

합리화인가, 순수함인가
엔도 슈사쿠 | 침묵 | 홍성사 | 2003

 

김영웅

 

 

기적이 일어날 거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침묵’이라는 제목으로부터 이야기의 결론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긍정적일 수 없을 결론을 예측하며 난 책을 펼쳤다. 엔도 슈사쿠를 처음 만났다.

 

이 책에서의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을 의미한다. 고난과 역경 한가운데 놓인 하나님의 백성을 기적을 일으켜 구해주는, 영화나 소설 속의 슈퍼 히어로나 마법사 하나님이 아닌, 17세기 일본, 천주교의 박해 중심에서의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시고 묵인하시는 하나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자 죽음도 무릅쓰고 극심한 고통을 담대히 선택한 자신의 백성들 앞에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끝까지 침묵만을 지키셨다.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실화와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소설이다.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포르투갈 신부가 일본에서 박해를 받다가 결국 배교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줄 만큼 소설적인 요소보다는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잘 부각되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로드리고 신부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편지조차도, 덕지덕지 찢어지고 빛바랜 모습으로 어느 박물관엔가 보관되어 있을 법한 기분도 들게 만든다. 그만큼 이 책은 소설이지만 아주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글쓰기로 쓰인 이 책에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은 머리를 통하지 않고도 그저 공감이 된다. 때로는 의심으로,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적의에 가득 찬 채 하나님께 따지고 원망하며 화를 내 본 우리 자신들의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상기시키게 만든다. 이 책은 비록 지금으로부터 4세기나 차이나는 17 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일본이란 낯선 곳에서 벌어진 일을 그려내고 있지만, 21세기 현재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이 여전히 똑부러지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가슴이 한없이 답답해지는 이유는, 바로 시공간과 사건을 초월하여 동일한 결론을 모두 경험하고 그것이 마음속에서 끝내 대답되지 않은 채 치유되지 않은 상처처럼 뿌옇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침묵하심에서 하나님의 동일하심을 찾는 건 신자로서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이야기의 플롯은 예수의 수난 과정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여기엔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 개인적으로 나는 그 의도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의 죽으심 때에도 철저하게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이지 않겠냐는 추측에서 찾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침묵을, 여전히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더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드리고 신부를 예수에 대치시키고, 로드리고 신부를 돈을 받고 판 기치지로를 예수를 은 30냥에 판 유다에 대치시킨다. 또한 관리들에 의해 조롱당하는 장면이나, 감옥을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귀를 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취조당하는 과정에서 오늘 밤 반드시 배교할 것이라는 통역의 말에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키는 것까지도 모두 예수의 수난 과정 중에 있었던 여러 가지 장면들과 겹쳐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읽는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받으셨던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도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닮은 부분이 여럿 있다 하더라도 큰 차이점도 있다.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처럼 극심한 육체적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고, 최후의 죽음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는 끝내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자신의 발로 직접 밟고 배교했다. 마치 예수의 말 그대로 닭 울기 전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박하고도 극단적인 상황을 통하여 엔도 슈사쿠는 우리에게 묻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답은 책의 결말에도 주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열려져 있는 질문인 것이다. 통역이 계속해서 지껄였던 ‘형식적’으로만이라도 배교를 하라는 말이 귓전에 남아 있다. 단지 성화를 밟는 행위가 과연 신앙을 져 버리게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 수 있을까? 로드리고 신부는 기도를 하며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들에게 밟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신부가 들었던 그 음성이 내겐 끝내 소화되지 않을 음식처럼 목에 걸려있다.

 

갈릴레오가 자신이 주장해 온 지동설을 공식적으로는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자기 스스로 구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동설을 거론할 때면 모든 사람이 갈릴레오를 떠올리는 것처럼, 어쩌면 성화를 밟고 배교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여러 신도들의 목숨까지도 살린 로드리고 신부의 행위는 결국 예수 믿는 신앙을 져버린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실제적으로 일본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진 않았을까? 아니면, 신부가 만약 신도들의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과감하게 선택했었다면, 자신 앞을 먼저 간 배교의 스승, 페레이라 신부도 끝내 회개하고 다시 순교하며 신앙을 순수하게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이 책이 전달해 주는 우울함은 그 힘이 무척이나 강력하다. ‘합리화’하는 행위와 ‘순수한’ 신앙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재정의해보는 기회가 된 건 좋은데, 내 안에 남아 있는 이 찝찝함은 어쩐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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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를 읽고

 

이규석 박사 (전남대학교 치의학, 과신대 광주 북클럽 회원)

 

 

태양계, 항성, 은하, 은하군, 은하단, 빅뱅, 우주의 끝……

 

우주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끝없는 확장성과 광대함이었다. 광대한 우주 속의 지구가 너무도 작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은 겸허함을 배우고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을 되살리게 되며, 더 나아가 누군가는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신에 대한 경외심, 누미노제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첨단 과학이론과 정교한 기술들에 밀접하게 엮여서 발전해온 천문학이 과학의 발달에 따라 잊어버렸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다시 일깨우고, 더 나아가 새로운 종교적 체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꽤나 아이러니해 보인다.

 

이런 새로운 종교적 체험은 과학적 지식을 이해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일반인들도 과학적 지식을 쉽게 소개한 과학서적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는 우주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한 책으로서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잘 이끌어내는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우주에 존재하는 다양한 존재 중 가장 기이한 특성을 지닌 블랙홀에 대해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확장성과 광대함이 연상되는 대개의 우주적 존재들과 달리 블랙홀은 끝없는 수축성과 무한소라는 꽤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블랙홀은 부피는 0에 밀도는 무한대라는 마치 수학공식에서나 존재할 법한 기이한 존재이고, 빛조차 가두는 강한 중력으로 시공간을 왜곡시켜 바깥의 우주와 단절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은하의 중심에서 수많은 별들을 거느리는 존재이며, 모든 물질을 탐욕스럽게 삼켜버리는 동시에 우리 은하 전체의 밝기보다 수십배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존재이다. 이런 기이한 특성을 가진 블랙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지의 존재이지만 만물을 창조하신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지기에는 지나치게 독특한, 소위 이단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는 블랙홀이 무엇이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잘 정리한 동시에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졌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다. 덕분에 그동안 미지의 존재로만 여겨져 왔던 블랙홀조차도 우주 속에서 물질이 만들어내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었고, 또 이런 존재를 가능케 하신 창조주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블랙홀에 대한 내용이 아무리 신기하고 놀랍다고 하더라도 건조한 사실의 나열만으로는 신기함과 놀라움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블랙홀에 대한 발견을 가능케 한 기발한 착상들과 그에 따른 연구과정들이 생생히 담겨 있다. 저자가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하고 있고, 동료 과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기에 담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런 내용들은 블랙홀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동시에 과학적 발견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흥미롭고 즐거운 과정인지 잘 보여준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다른 과학과 달리 인위적인 실험이 거의 불가능한 분야인 천문학이 어떤 방식을 통해 연구를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천문학이 정교한 관측과 이론물리학을 이용한 해석과 예측을 통해 새로운 발견과 발전을 거듭해나간다는 내용은 수학적으로 정교한 이론이 아직 부족한 분야인 생명과학에 종사하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무척 흥미롭고 질투 나는 부분이었다. 

 

책의 마무리가 다소 갑작스럽고 딱딱하게 끝나는 점이 조금 아쉽지만 이는 저자가 먼 훗날 자신의 연구성과를 모두 종합하고 과학자로서 살아온 삶을 뒤돌아본 뒤에 적길 원해서 남겨둔 여백이 아닐까 싶다. 더욱 흥미진진한 연구활동을 통해 더 훌륭한 연구성과를 이뤄낸 뒤 멋지게 책을 마무리하시길 응원하며 나 역시 과학자로서 이 책과 같은 멋진 책을 써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보며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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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겸손: 편견과 오만함을 넘어

 

[과신책] 학자의  읽기

 

겸손: 편견과 오만함을 넘어
로완 윌리엄스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복있는사람 | 2015

 

김영웅

 

 

진리처럼 믿어왔던 것들이 하나의 의견에 불과할 수 있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서있던 자리가 치우친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언젠간 그 시간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

 

닫혀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꾹 잠겨있던 녹슨 눈과 거미줄 쳐진 귀가 마침내 열리는 순간, 누군가에겐 자신이 쌓고 지켜왔던 성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인생의 극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기꺼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도 하며, 또 누군가에겐 한동안 놓고 있던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삶을 재조정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대학생 때 교회를 잠시 떠나기까지 다녔던 여러 교회들이 대부분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다시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였다. 내가 배워서 알고 있던 기독교에 관한 모든 정보는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교단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내게는 오직 그곳에서 배워 처음 알게 되었던 지식이 기독교와 교회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전부였다.

 

불행하게도, 별 문제가 없었다. 교회에서는 신앙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으로 통했다 (공부 잘하는 인간이 교회에 결석하지 않고 출석하며, 질문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기까지 하면, 백이면 백 신앙 좋다는 소리 듣는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지금도 그러리라는 데에 오백 원 건다). 그러나 내게도 어느 날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그 일련의 과정이 처음엔 인생의 극소점을 넘어 최소점으로 다가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가 아닌 기회이자 발판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으며, 나중엔 그때를 생각하면서 현재 내 삶의 키를 재조정하는 기억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때였다. 내가 알고 믿었던 것들이 가졌던 찬란한 유일성과 엄숙한 절대성이 깨어지게 된 건. 메커니즘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위치한 지점이 가운데가 아니라 상당히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름 좀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기독교 관련 지식들이 하나의 해석이나 주장에 불과한 게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주 작아졌다.

 

 

미국에 오게 되면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여러 교파가 기독교라는 지붕 아래 존재한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성공회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라고 이해하면 성공회를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설명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내가 읽었던 신학책의 꽤 많은 저자들이 성공회 배경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번에 처음 접한 로완 윌리엄스 또한 성공회 소속 신학자이다. 그는 천 년 전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성 안셀무스 이후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지도자라는 평까지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을 가진 아주 짧지만 묵직한 책을 읽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요소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핵심 요소 네 가지를 친절하게 풀어준다. 자상한 선생님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려주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세례와 성경, 성찬례와 기도, 이 네 가지에 관한 지식은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배워왔던 기본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또 한 번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이 전부가 아니었고, 상당히 편향되어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도 신학적인 요소들이 매일 접하는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 거룩한 백성의 참 의미가 결코 어떤 위력을 행사하며 겉으로 드러난 집단이나, 저기 산속에 따로 존재하는 은둔형 단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죄악과 혼돈이 가득하고 여전히 유혹이 넘쳐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그 세상을 등지는 것도 아니요, 그 세상과 똑같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 세상 속에 존재하되 혐오와 배제와 차별의 유혹을 물리치고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것, 연약하고 불완전한 모습이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나도 용기 내어 몸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 세상 속에 존재하는 죄악과 혼돈을 피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맞서는 것, 그 삶을 기꺼이 끌어안는 것, 모든 사람을 섬기며 모든 사람에게 복이 임하길 간구하는 것, 그러나 위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것, 그래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도움을 구하여 우리가 쓰이는 것, 예언자적인 사명으로 불의와 죄악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 상하좌우의 모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다리를 놓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더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고, 예전엔 몰랐던 많은 숨겨진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간다. 성공회 대주교의 글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모범답안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것 또한 만남의 축복이라 믿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운다는 것은 어느 정상에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만해지지 않기 위함이다. 세상엔 정말 탐험할 것이 많아 교만해진다는 건 곧 옹색함이요 게으름이며, 용기 없음일지도 모른다. 조만간 성공회 교회를 찾아 예배에 직접 참석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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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과신책] 학자의 읽기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 이레서원 | 2017

 

김영웅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를 향한 신뢰,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자칫하다간 자신의 신앙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이 자신의 고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느껴지고, 자신만 숨 막히는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난과 훈련의 유익함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는 '욥기'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 가운데, 왜 욥이 고난 받게 되는지를, 욥기의 시작부터 우리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작 불가항력적인 고난을 실제로 받았던 욥은 그 고난이 끝난 이후에도 그 이유를 몰랐다. 다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욥은,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 영적 교만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을 마침내 대면하고 이를 회개하게 된다. 이후 욥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께선 욥에게 고난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다. 

고난을 겪고 나서, 그 고난이 왜 자신에게 임했는지 정확히 알게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정말 그 직접적인 이유를 우린 알 수 있기나 한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지나고 나서야 그 고난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비로소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극심한 고난 중에서는, 절망 가운데 깊이 빠져 있다가도 간헐적으로 온전한 분별력을 되찾기도 하고, 이내 다시 끔찍한 고통 속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사이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고난됨은 어쩌면 이러한 반복적이고 비생산적인 크고 작은 감정과 고통의 요동과, 그 때문에 늘 정체되어 수렁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우,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이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한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전보다 오히려 더욱더 힘든 내면세계의 혼돈과 붕괴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는 그의 책,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에서, 욥기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로 빚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들 생각의 저변에 깔린 인과응보적인 논리를 물리치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대답만을 하신 사건에서도, 우린 죄와 고난의 인과적인 관계가 항상 성립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난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답답하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모른다"거나 "context-dependent"하다는 것이 가장 '성경적'일지도 모르겠다. 

고난의 원인(Why)을 밝혀내는 것보다는, 어쩌면 그 고난으로부터 무엇을(What) 얻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의 목적은 Why보다는 What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욥의 친구들은 모두 욥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Why)에 중점을 두고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그들은 모두, 순종은 복으로, 죄는 심판으로 인도한다는, 기계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었고, 그 방정식에 하나님을 대입하여 기계적으로 얻은 해와 욥의 상황이 일치하지 않음을 간파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그 친구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What)이 지닌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곧 하나님은 종종 예기치 못한 방식,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신다는 점(What)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해법을 욥의 특수한 사례에 적용하려 했다. 마치 하나님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음일 뿐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방정식에 갇혀 그 규칙대로 움직이는 존재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들은 하나님(What)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목적은 욥이 그분을 알게 되는 데에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것도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닌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말이다. 저자 역시 Why가 아닌 What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광대하고 다양하며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그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쉽게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불가사의한 모든 것까지도 통제하시는 분이시다. 불가사의는 우리의 이해를 넘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광대하고 경이로운 계획 가운데서는, 부당한 일들까지도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하나님은 그 일들까지 사용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심지어는 이전보다 더 낫게 만드시기도 한다. 욥은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런 상황까지도 그분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고난도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과정의 일환일 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한 진리이겠지만, 인간은 불완전하고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창조주인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는다면, 고난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하는 왜(Why)의 질문 대신, 그 고난으로 인해 깨닫게 될 무엇(What)에 좀 더 초점을 둘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하며 과거지향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와 미래까지도 스스로 파괴해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그 고난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그를 향한 신뢰와 소망을 가지고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솔직히 드러내어 귀를 기울여 보자. 적어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욥의 친구들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을 순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또 맞이하게 될 고난에 대한 면역이나 근력도 생겨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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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호모 사피엔스의 귓속말

인간의 타락과 진화 | 윌리엄 T. 카바노프, 제임스 K. A. 스미스 편집| 새물결플러스 | 2019

 

심기주 (과신대 기자단)

 

 

성령이 인도하는 신학적 상상력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열 명의 학자들이 ‘인간이, 인간이 아닌 영장류로부터 출현했다면 이는 인간의 기원과 죄의 기원을 포함한 기독교 신학의 기원에 관한 전통적 설명과 관련해서 어떤 함의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모인 결과이다.

 

이 책이 단순히 기고문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이 학자들이 3년동안 같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또 우정을 나누며 공동체로서 토론해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교회의 한 모습 같달까? 사실 요즘 들어 공동체의 필요성은 많이 느끼는데 비해 예배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이 책에서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신학적 작업은 신실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예배가 필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꽂혔다. ‘우리의 상상력의 근육을 훈련시키고 늘리려면 시간, 즉 쟁점들과 기회들에 대해 심사숙고할 시간, 경청하고 묵상할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실한 상상력을 기르는 데는 성경 이야기의 운율로 상상력에 세례를 베푸는 일이 필요하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목표다.’ (20쪽)

 

즉, 예배에 녹아 있는 성경 이야기로부터 하나님의 영감을 얻고 신학적 상상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집필한 신학자들의 공동체인 ‘골로새 포럼’은 예전적인 예배를 신학적 상상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꼽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전통을 계승하며 신학적 상상력으로 균형을 잡는 모습이 가장 매력적이면서 좋은 부분이었다.

 

전통에 충실한 확장

 

여지껏 과신대에서 인터뷰하고 콜로퀴움에 오셨던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조언해주신 것은 “신학이 과학의 연구결과를 신학화하는 데만 신경 쓰느라 신학 본연의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신학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간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실 여러 글들을 보며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 과학에 맞춰 해석을 계속하는 것은 뭔가 끼워 맞추기 식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서론에서 말하는 매킨타이어의 전통에 대한 정의는 내 고민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전통은 특정한 근본적 동의가 정의되고 재정의되는 주장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되는 주장이다.”

 

이 다음에 나오는 전통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전통’은 성경에 의해 촉진되고 기독교 예배 의식 속에 담겨 있으며 초교파적 신조(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등)로 표현된 보편 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가리킨다. 이는 이미 전통 내부에 표현, 확장, 수정이라는 확대되고 있는 층위들을 지닌 살아 있는 전통(25쪽)’이라는 것이다.’ 전통은 정적이며 고정되어 있어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기독교 전통은 그 속에 역동적인 ‘역사’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 책에서는 전통의 방향성에 충실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확장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 점이 나는 흥미로웠다. 아!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창의적이면서도 깊은 고민과 대화가 가능하다니! 나의 신앙의 길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어떤 움직임이 “전통에 충실한 확장”인지 아니면 전통과는 무관한 것인지를 분별하면서 나아갈 때, 전통은 그저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숨 쉬고 나와 교감하는 유기체가 되는 것이다.

 

 

아담과 호모 사피엔스

 

그렇다. 내가 처음에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돌이켜 보면 원래 나는 성경을 접할 때, 말씀 묵상을 할 때, 그것들이 현실에 잘 와 닿지 않았다. 성경 속의 인물들은 그저 수 천년 전에 있었던 많이 들어봐서 친숙한 외국인들이고, 성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2D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스파이더맨 영화와 오히려 비슷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것은 단지 모든 인류의 책임과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답답하게 하는 요소일 뿐이었지 딱히 내게 와 닿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면서 창세기를 쓴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용의 각각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다각도로 알게 될 때, 창세기는 내게 4D 영화, 아니 ‘실재’로 다가왔다. 아담은 단지 모든 인류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용도가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아담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우리에게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는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가인이 “선을 행할” 수 있고, “죄가 문에 도사리고 앉아” 있을지라도 그가 “죄를” 반드시 잘 다스려야만 한다(창 4: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셨던 말씀은 죄(창세기에서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예)는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인간은 (최소한 처음에는) 죄에 맞서 싸울 수 있다.(187쪽)’

 

특히 아담에서 가인, 라멕을 거쳐 죄가 불덩이처럼 늘어나는 것을 묘사하는 창세기 6장까지, 창세기는 죄가 점점 발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처드 미들턴은 창세기에서 진술한 것처럼 죄가 발달한다는 관점은 초기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서 도덕적인 악이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도덕적, 종교적 의식이 발달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간들은 자신의 양심이 '폭력적인 행동을 금하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충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충고를 무시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치론적인 해석을 피하면서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것은 판넨베르크의 논리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넨베르크는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는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 중간지대로서의 철학을 매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윌리엄 브라운은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 우선, 구약 본문을 '설명'하고, 해당 본문의 신학적 주제를 가지고 과학으로 온다. 그리고 이 주제를, 과학을 통해 세계를 볼 때 관련 있을 법한 측면들과 관련지어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에서 얻은 통찰을 가지고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온다.(147쪽)

 

즉, 어떤 면에서는 각각의 주제를 뽑아 과학과 신학을 넘나 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중간지대를 활용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담과 원죄’, 그리고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도덕적, 종교적 의식 발달’의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것도 이런 중간지대를 거치고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는 원죄 뿐만 아니라, 타락, 죽음 등 다양한 전통과 관련된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신학과 과학의 대화 방식인 것 같다. 이를 활용할 때도, “전통에 충실한 확장”이 또 가능하지 않을까? 전통에 충실하면서, 즉, 기독교의 본질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 사회를 무시하지 않고 현실적인 대안과 조언을 제시해줄 수 있는 기독교의 역동성을 기대해본다.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 4:7b)”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죄의 유혹을 다스리라고 주님이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죄의 발달과정을 곱씹으며 죄에서 떠나라고 외치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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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논리를 넘어서는 은혜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예기치 못한 기쁨
C. S. 루이스 | 홍성사 | 2018

 

김영웅

 

 

기독교 변증가로 잘 알려진 C. S. Lewis의 삶이 온통 기독교적인 색채들, 이를테면 말씀 듣고 읽고 묵상하고 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행위들로 가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허다한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의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그이지만, 실상 그는 목사나 신학자도 아닐 뿐더러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릴 적부터 신앙심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태어나는 시대와 장소를 선택할 수 없었기에 북아일랜드의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을 뿐, 머리가 조금씩 크면서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1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대학으로 복귀한 몇 년 후 그는 유신론자가 되었고, 얼마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회심 이후 그는 끝까지 성공회 신자였다). 루이스가 57세가 되던 해에 (생을 마치기 6년 전) 출판된 이 자서전과도 같은 책은 이러한 그의 신앙의 여정을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들려주는 책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년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약 300페이지 안에 모두 담으려면 많은 내용을 빼야만 한다. 그러는 와중에 중요하다 생각되는 사건들은 강조도 해야 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한 형식으로 잘 짜여있다. 논리정연하면서도 문학적이고 위트가 넘치는 그의 필체는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예기치 못한 기쁨을 선사해 줄 것이다.

 

 

학창 시절의 그는 마치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결코 무난하거나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에 푹 빠져 살아왔는데 (그는 북유럽 신화들을 비롯해 많은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기질은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것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인간이 모인 아무리 작은 집단이라도 거기엔 계급 의식이 물들어있는 법이며, 일반적으로 그 안에선 진실을 은폐하거나 교묘하게 위장하는 방법을 통해 충분히 사교적이면서도 철저히 이기적인 속성을 겸비한 인간들이 지배층으로 군림하기 마련이다. 루이스가 다닌 학교의 분위기가 이 책에선 꽤 자세히 강조되어 있는데, 나에게는 그가 그 시절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는 그 당시 계급적인 학교 체제에 적응하지 못했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진 아버지의 스승이셨던 분에게서 개인지도를 받으며 비로소 안정적으로 학문적 성장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책에서도 여러 번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를 사용하는 것을 봐도 그의 독특한 (이기적으로 보이면서도 남에게 해는 끼치지 않는, 즉 다분히 개인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학습 받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저 그렇게 주어진 모습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게끔 지어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 그는 운동과 수학에 젬병이었으며, 오로지 앉아서 혼자 글을 읽고 쓰고 상상하고, 시간에 맞추어 적당한 산책을 즐기고 일찍 잠드는, 고독한 일상을 좋아했던, 천성적인 학자이자 작가였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종종 그를 예기치 않게 찾아왔고 스스로 ‘기쁨’이라 불렀던 순간을 어른이 되어서도 늘 갈망하곤 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이후에 그는 그 ‘기쁨’을 어떤 하나의 마음 상태로 여기게 된다. 그 ‘기쁨’은 무언가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갈망 비슷한 것이었는데, 모태신앙으로 자라다가 염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무신론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고, 다시 어떤 절대적이며 정신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게 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 ‘기쁨’은 그 자체가 참 기쁨이나 목적이 아니라는 것과, 진정한 가치는 오히려 그 ‘기쁨’이 바라고 가리키고 또 그 ‘기쁨’의 근원이기도 한 대상에 있다는 것을 그는 간파하게 된다. 참 기쁨은 우리 인간을 흥분, 고조시키며 환희로 다가오는 어떠한 감정이나 마음 상태에 있지 않다. 비록 그것이 평상시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경험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의 실체는 참 기쁨의 흔적이며 껍데기일 뿐이다.

 

 

사실 난 논리와 변증에 능한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무척 궁금했다. 그 과정 또한 논리정연하고, 누가 들어도 납득이 될 만한 이유와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기대는 책의 말미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루이스 스스로 자기도 잘 설명할 수 없고 잘 모른다고 써놓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부분에서 실망감을 느꼈었지만 (사실 300 페이지 분량의, 그것도 나와 별 상관없는 개인사를 읽어나가는 건 마냥 흥미진진하진 않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가장 큰 이유는 루이스의 회심 과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금 후 난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무신론자에서 시작해 교회만 다니는 유신론자였다가 철이 좀 들어서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고, 그 과정을 지금까지 납득이 될 만하게 설명한 사람은 간증 사기꾼 빼고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론 그동안에도 많이 생각해봤다), 그건 논리적이지 않았다고 말해야 가장 솔직한 고백이 아닌가 한다. 은혜는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정의했던 ‘기쁨’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파도처럼 우리를 덮쳐오는 감정으로도 나타나고, 어떠한 지적인 깨달음을 얻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로도 나타나며, 아주 가끔씩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들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적과도 같아서 그 일련의 순간들과 사건들은 한결같이 모두 어떤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 바로 절대적인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되어주신 그 존재, 그리고 모든 열방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바로 그 존재,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인 것이다.

 

루이스 덕분에 나도 예기치 못한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이 기쁨에 국한되지 않고 난 내 일상에 일어나는 소소한 기쁨들의 근원을 더욱 앙망한다. 루이스라는 거장 덕분에 불필요한 곁길 하나를 걷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흡족하다. 그의 진솔한 회심기 덕분에 오히려 일방적이면서도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가 별 볼일 없는 내 삶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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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의 신을 넘어서

 

과학과 종교 | 토머스 딕슨 | 교유서가 | 2017

 

 

최경환 (과신대 기획실장)

 

상식적인 과학, 비상식적인 종교?

 

우리는 흔히 과학은 직관적으로 경험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전제를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다. 반면 종교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진화생물학과 양자역학은 사실 일반적인 상식과 정반대다. 인간은 토끼뿐 아니라 당근과도 조상을 공유한다.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는 파동이면서 입자다. “과학은 우리의 감각이 우리를 속이며 기본적인 직관이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우리가 밤하늘을 별을 보면서 거창한 과학 이론을 떠올리거나 과학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감탄과 경이의 언어는 어느 정도 종교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22-23쪽). 과연 어떤 것이 상식적이고 직관적인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토머스 딕슨이 쓴 <과학과 종교>는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기획한 “A Very Short Introduction” 중 하나로 출간됐다. 딕슨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지성사의 맥락 속에서 짧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잘 담아서 저술했다. 과학자나 신학자와 달리 역사학자가 쓴 책이어서 그런지 과학과 종교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관점이 가득하다. 예를 들어,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조장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과연 이 둘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요인들일까? 딕슨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근대국가가 탄생하면서 정치적인 요인이 이 둘을 매개로 갈등을 조장하는 것일 수 있다. 최소한 1920년대 미국의 상황에서는 그랬다. 당시 진화론자들은 기독교와 창조론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불공정하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창조론이 위기에 처했다고 종교집단은 이야기한다(25쪽). 교육에 대한 결정권은 누가 가져야 하며, 어떻게 사회적 영향력, 유권자의 표를 얻을 수 있는지로 논의가 이어지기도 한다. 

 

저자가 과학적 실재론과 반실재론, 신학적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설명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실재론과 반실재론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신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반실재론을 신학에 적용해 보면, 성서의 문자나 우리들의 신앙경험은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신에 대한 모든 명제는 그저 인간의 경험이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들의 언어와 이미지가 불완전한 것이고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므로 그것으로 하나님을 가둬서는 안 된다는 뜻이고, 이것은 기독교 전통 내에서 부정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져 오고 있다. 신의 불가해성과 인간의 인식 한계를 강조하는 견해다. 그런데 이런 입장의 약점은 만약 인간이 신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신의 존재 자체도 의심에 부쳐진다는 것이다(65쪽). 결국, 부정신학과 무신론은 한 끗 차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이런 부정신학을 지지하거나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런 내용이 있다고 소개할 뿐이다.

 

 

틈새의 신을 넘어서

 

특별히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스코틀랜드 복음주의 신학자였던 헨리 드러먼드(Henry Drummond)가 1893년에 보스턴에서 강연한 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이 강연에서 그는 당시 복음주의자들에게 진화를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기적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79쪽). 오히려 진화의 과정 자체가 바로 기적이라고 말한다. 지속적이고, 천천히,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연이 진화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기적이고, 그 결과 사랑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것이 가장 큰 기적이다. 이어서 드러먼드는 틈새의 신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다. 틈새의 신은 자연 현상 가운데 과학이 설명하고 해명할 수 없는 영역을 신앙이나 신의 활동으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에서 신을 찾아야 한다.” 만약 신이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 특별한 개입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고 평범한 자연세계 속에서는 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이란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이 세계에 없다는 말이 된다”(79쪽). 결국, 틈새의 신은 신의 권능과 자리를 계속 축소할 수 밖에 없다. 과학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비록 지금은 틈새가 보인다 할지라도 앞으로는 점점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신의 영역 역시 계속 줄어들 것이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 속에 신의 활동을 가두면 신은 최종적으로 이 세상에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드러먼드는 이렇게 말한다. “이따금씩 기적을 일으키는 오래된 신학의 신보다는 모든 곳에 편재하는 신, 즉 진화의 신이 훨씬 더 대단하다”(80쪽). 신을 인간이 모르는 영역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알고 있는 영역, 즉 과학의 성과와 발견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과학과 종교가 제로섬 게임을 하는 순간 종교는 점점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빼앗길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종교가의 영역과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과학의 어깨 위에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고유한 자리와 역할을 고민하는 것이 신학의 역할일 것이다. 

 

딕슨은 비슷한 맥락에서 근대 과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신의 자리를 고민하게 만든다(81쪽). 뉴턴은 행성과 항성 사이의 거리와 중력을 설명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는 하나님이 이 별들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그런 신은 무능력하거나 불완전한 신에 불과했다. 신이라면 애초에 제대로 작동하는 우주를 만들어야지, 왜 굳이 나중에 신이 개입해야만 제대로 작동하는 우주를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시계를 가끔 수리하고 고치는 시계공은 실력이 별로라는 것이다. 자주 고칠수록 자신의 무능력을 더 드러낼 뿐이다. 기적도 마찬가지다. 신이 이 세상에 개입할수록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근대과학의 선구자들은 모두 신의 권능과 능력을 신뢰했다. 자연이 수학 법칙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신의 권능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들은 신을 기적을 일으키는 변칙자가 아니라 설계자나 법률가로 봤다. 과학이 자연의 현상을 모두 빠짐없이 설명할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신이 자연에서 행동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인가? 적어도 근대과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83쪽).

 

 

 

정치적 속셈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건이 바로 1925년 미국 테네시 주에서 있었던 ‘스코프스 재판’이다. 딕슨은 이 재판에서 문자적인 해석을 옹호하는 창조론 진영 사람들도 일관적으로 문자적 해석을 옹호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믿으면서도 태양이 멈춘 사건은 지구가 자전을 멈춘 것이라고 해석을 하고, 창조의 1일은 24시간으로 보지 않았다. 오랜 지구론을 주장한 것이다. 딕슨은 이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추론한다(149-153쪽). 첫째, 기독교인들조차 창세기를 해석하는 입장이 다양하고 중구난방이다. 통일된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창조론자들은 과학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스코프스 재판에서 창조론자였던 브라이언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지구의 역사가 6000년보다 더 많다고 주장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근거는 과학이었다. 그런데 왜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고 진화론은 수용하지 않은 것일까? 결국 핵심은 인간의 진화에 대한 부분이었다. 인간이 동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과학에 적대적인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학을 상당히 흠모한다. 자기들이 젊은지구론을 옹호하는 근거는 모두 과학의 성과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젊은지구 창조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결과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과학적 증거는 기존 학계나 과학자들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 자료나 근거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당대의 과학 이론을 증오하면서도 그것을 모방하려 했을까? 어쩌면 이 지점은 그들의 정치적 과욕이 개입한 것일 수 있다. 딕슨은 당시 창조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대안적인 과학으로 포장해서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고 말한다(152쪽). 근본주의 계열의 학교에서는 이런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한국에서도 대안학교의 중요한 설립 목적이기도 했다. 



자신의 자리 지키기

 

마지막으로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종교도 과학도 모두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종교는 그렇다고 쳐도 과학도 그래야만 할까? 흔히 사람들은 편견을 조장하는 종교와는 달리 과학은 자연법칙에 근거해 공평한 목소리를 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편견 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까지 동성애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 두 남성 사이의 섹스는 죄악일 뿐만 아니라 사형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면 동성애 남성들의 심리를 연구해 이는 자연적인 행위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런 과학적 접근 방식이 종교와 전통에 얽매이던 구태의연한 관습으로부터 합리적인 진보를 이룬 것일까? 동성애를 도덕의 영역에서 의학의 영역으로 옮겨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더 억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제는 의학적인 기준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 된 것이다. 성은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로운 표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인간의 본성처럼 여겨진다. 이는 동성애가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떤 입장이든 과학의 결과에 기대어 동성애를 설명하려는 태도는 사람의 선택과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 

 

과학이든 종교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정치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을 이를 빌미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도 하고,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지금의 삶에서 돌이키라고 경고하기도 하고, 우리를 깨우치고 격려하기도 한다. 반면, 우리를 혼돈에 빠뜨리고 억압하기도 한다. 과학이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규정하거나 설명하기도 어렵거니와 종교가 과학적 사실관계를 해명하거나 설명하기도 어렵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사회의 공공선과 진보를 위해 노력하고 애쓰면 좋겠지만, 과연 이 둘은 겸손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쩌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다른 영역을 침범하려는 과욕이 이들의 본래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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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바울을 이해하기 좋은 길잡이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단숨에 읽는 바울
존 M. G. 바클레이 | 새물결플러스 | 2018

 

김영웅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사탕을 준다고 해서 교회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네 식구였던 우리 집은 전세에 단칸방이었다. 사탕 같은 간식은 내겐 아주 귀했다.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난 그 교회를 계속해서 다니게 되었다(그런데 친구는 얼마 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대로 교회 다니는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가문에서 처음으로 소위 '예수쟁이'가 탄생한 것이었다. 동시에 내겐, 이젠 30년이 넘는, 하나님을 향한 굴곡진 여정의 시작이었다. 사탕 하나로 이 기나긴 여정이 시작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내가 다니던 교회(예장 합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선 성경 퀴즈대회를 자주 했었다. 학교에선 주관식 수학 문제의 답이 대개 '0' 아니면 '1'이었듯, 교회에서 치러진 주관식 성경퀴즈의 답은 십중팔구 '하나님' 아니면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그 범접할 수 없는 이름에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올렸던 이름이 있었으니, 구약에선 '다윗', 신약에선 단연 '바울'이었다.

 

어릴 적 내가 알던 바울에 대한 지식은 아주 단편적이었다. 신약에서 편지를 가장 많이 쓴 사람, 사도행전의 주인공(?),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사울'에서 이름이 바뀌었던(?) 사람. 이제는 이런저런 공부로 인해 이러한 지식이 부정확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땐 혼자 따로 공부하지 않고 그저 교회에서 주워들은 지식이 전부였던 터라, 나의 성경 지식은 그 당시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들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내가 알던 바울은 그 정도가 다였다. 정확하지도 않을뿐더러 단편적이기만 했던 지식의 파편들. 이성적인 이해를 거치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시도하면 불경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냥 무턱대고 믿으라고 강요받았고, 오히려 그것이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라고 배웠던 그 시절. 이는 아마 그 당시 한국 기독교 신앙의 단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씁쓸함이 남는다.

 

바울을 더 정확하고 더 깊게 알고 싶었던 건 솔직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믿었던 나의 기독교 신앙은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서른 후반 즈음에서야 힘겹게 맞이한 가치관의 변화 시기에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어 나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다. 그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를 지나오며 난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순 없겠지만, 이러한 방법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충분히 인생을 다시 보게 만들고 제대로 살아내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성의 영역이 인간이란 존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것은 그 빙산의 일각이라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회개나 거듭남, 그리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하여 마침내 얻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역시 이 빙산의 일각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정확한 지식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을 더욱 풍성히 알고 전할 수 있는 중요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제목부터가 맘에 쏙 들었다. '단숨에 읽는 바울'. 그렇잖아도 이철규 원장님이 작년 엘에이 방문하시며 쓱 건네주셨던 '하나님의 비밀'(그레고리 K. 비일, 벤저민 L. 글래드 공저, 새물결플러스 출판)도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고, 예전에 큰맘 먹고 구매했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저, IVP 출판)도 마찬가지 상태라, 난 이 두 책을 책장에서 볼 때마다 뭔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약 150 페이지의 짧은 이 책으로 이제 겨우 그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두 책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처럼 신학적인 전문지식이 전무한 사람에게 이 책은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바울을 감히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이 책에서 바울의 '역사'와 바울의 '유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울을 읽어나간다. 1부 '역사'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의 바울의 위치와 의미를 읽어낸 뒤, 바울의 편지들과 그것들이 가지는 역사적 정황들을 살펴본다. 이어서 자신을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으로 소개하는 바울과, 유대 전통에 비친 그의 모습을 읽어낸 이후,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 로마 제국에서 가졌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묘사한 이미지와 사람들에게 인식된 이미지들을 비교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바울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는지에 달려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울이 유대인이었고 지성인이었으며, 돈을 버는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니다가 다메섹에서 그가 계시라고 부르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되었고, 예수가 정말 주님이라는 확신을 얻은 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으며, 그 사건을 통해 바울은 그의 삶과 그의 충성심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뀌는 삶의 대전환을 경험했다는 것도 난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바울이 남긴 유산의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남긴 유산은 무수히 다양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장들을 낳았다는 사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만이 아니라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를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아는 바였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이러한 단편적인 바울에 대한 지식은 표면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신학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바울 신학의 다양한 해석이었다. 작년 권연경 교수님께서 참석해주셨던 독서모임에서 '로마서 산책'과 '행위 없는 구원?'을 함께 읽고 직접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끝내 말끔히 풀리지 않았던 부분은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학 문제처럼 문제가 하나 있으면 하나의 답이 존재할 거라는, 다분히 단순 무식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기독교 신학을 무분별하게 접하고 있던 시기라, 내게 있어 '해석'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또 하나의 낯선 세상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2부 '유산'에서 저자는 비록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 바울의 편지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연구했던 여러 신학자들의 해석으로부터 바울의 유산을 찾아낸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서구 교회,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와 칼뱅의 사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 그리고 니체를 비롯한 다수의 철학자들과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왔는지 저자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준다.

 

 

책을 읽고, 바울처럼 파다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쟁을 몰고 다닐 인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사실 바울이 직접 썼다고 인정되는 일곱 편의 서신(더 많은 서신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 이상 일곱 편의 편지를 통해서만 바울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에서도 그는 상반되거나 모호한, 어쩌면 이중적일지도 모르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게다가 바울이 쓴 것은 신학 전문서적이 아니라 어떤 특정 상황에서 어떤 특정 대상을 향해 쓴 편지이기에, 이 편지만을 가지고 바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바울 서신의 저작설에 관한 다툼도 꾸준히 있어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강조하듯, 신학의 문외한인 내게도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고 익히 알려졌던 바울의 사상을 확고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고 그것을 찾으려는 방식보단, 각 시대와 정황에 흐르는 맥락에 합당하게 본문과 꾸준히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가능성을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탐색하는 방식이 더 올바를 것이다. 바울이 끼친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지만, 바울 역시 예수의 복음을 해석한 사람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 사람이기에, 그의 사상이 성경을 읽는 하나의 눈을 열어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복음이거나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늘 염두해야 할 것이다.

 

다시금 바울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혈통적으로 유대인도 아닐뿐더러,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율법을 다 알지도 못하는, 일개 이방인에 불과한 나에게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역할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를 박해했던 그도 부르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인간의 자격이나 가치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이 왜 비유대인들의 세계로 퍼져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여전히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바울이지만, 그의 소명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야훼의 종의 사명처럼 분명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열방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열방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어지는 거대한 선상에 나의 작은 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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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신의 언어 - 두 세계관의 유쾌한 공존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두 세계관의 유쾌한 공존
신의 언어 | 프랜시스 S. 콜린스 | 김영사 | 2009

 

김영웅

 

 

군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던 나는 그 해 제대를 했다. 2000년도는 내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하나의 작은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2000년도는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인류 역사에서 커다란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진 놀라운 해였다. 세계적으로 10년이 넘게 투자된 Human Genome Project가 완성되던 해였기 때문이다. 그 해엔 네 종류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전체 약 30억 개 길이의 인간 유전체 서열이 모두 밝혀졌음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공개되었다. 우리 몸의 설계도 초안이라 할 수 있는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 지도가 드디어 처음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 유명해진 제임스 왓슨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Human Genome Project를 끝까지 이끌었던 책임자로서 2000년 6월 백악관에서 열렸던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완성을 축하하며 선포하는 감격적인 자리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 옆에 서있던 사람의 이름은 프랜시스 S. 콜린스였다. 그는 이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전문 과학도서도 아니고 신학도서도 아니며 자서전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진솔한 목소리가 곳곳에 잘 침투되어있어 이 모두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책이다. 물리와 화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 Human Genome Project를 이끈 과학자로서,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를 거쳐 나와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살아내며 유신론적 진화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과학과 신앙 사이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커다란 간극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질문하고 답을 해온 선배로서의 프랜시스 콜린스를 우린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논리 정연하면서도 진정성이 여과 없이 드러난 필체는 덤이다.

 

생물학자인 나에게 그의 목소리는 이 분야를 앞서간 그 어느 누구의 목소리보다도 호소력이 있었다. 진지하게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모두를 포함해서, 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그의 진솔한 내러티브는 분명 하나의 빛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어두웠던 부분을 밝혀줄 것이다.

 

 

그가 이끈 프로젝트가 역사상 처음으로 밝혀낸 것은 인간의 모든 염색체의 뼈대가 되는 DNA의 염기서열이다. 그는 이를 감히 ‘신의 언어’라고 표현한다.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이 관여하여 어렵사리 밝혀낸 그 암호와도 같은 염기서열은 분명 현대과학과 지성이 일궈낸 쾌거일진데, 그 프로젝트 리더가 자신의 입으로 그 암호를 ‘과학의 언어’가 아닌, 종교적 색채가 단박에 드러나는 ‘신의 언어’라고 표현했음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우린 과학과 신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다. 제목만 곰곰이 씹어봐도 우린 그 안에서 과학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잡음 없이 공존하며 더욱 풍성하게 서로를 강화시키고 성숙시키며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생물학적 진화를 정의할 때 필수요소인 DNA 변화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진화를 엄연한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 진화의 정교한 메커니즘이 다름 아닌 신의 창조방법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그렇다. ‘유신론적 진화’라는 말이 주는 불완전한 뉘앙스 때문에 책에서 ‘바이오로고스’라 칭하자고 제안까지 하는 그의 관점을, 나도 한 명의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이제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게도 그리스도인이자 과학도로서 하나님을 수호하고자 하는 순진한 마음에 진화라는 단어를 방어적으로 거부했던 때가 있었다. 대학원생 초창기 시절이었다. 어떤 유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 방편으로 생물학자들은 그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다른 종들과의 그것과 얼마나 비슷한지, 또 진화 단계 중 어느 단계에서부터 보존되어 왔는지 비교하여 보여주곤 한다. 이를테면, A라는 유전자는 포유류인 생쥐와 침팬지에서는 비슷한 염기서열로 존재하지만, B라는 유전자는 양서류인 개구리나 어류인 물고기에서부터 존재한다면, A보다는 B가 더 역사적으로 훨씬 더 오래되고 더 기본적인 기능을 한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포유류에서만 중요한 유전자보다는 척추동물 전체에서 중요한 유전자라는 사실이 던지는 의미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난 다른 종과 인간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비교한다는 데에 불편함을 느꼈었다. 비교하는 행위 자체가 진화를 인정하는 기본적인 행위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는 수 없이 비교를 하긴 했지만, 난 그때 뭔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었다. 마치 사탄의 폭력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후미에를 밟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책을 읽고 약 15년 전의 그 찜찜함을 다시 소환해보니 감회가 새롭다. 과학과 신학의 사이에서 어정쩡한 입장으로 당당하지 못하고, 어디서도 말 못할 괴리감을 가슴에 간직한 채 보냈던 그때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 당시 내게 만약 이 책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뭔가 아주 많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엄연한 과학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화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만 하면 알러지 반응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여기거나, 진화나 과학을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거나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다. 과학과 신앙은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으며, 그 유쾌한 공존이야말로 원래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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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이 신에게 도전하다?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 송기원 엮음 | 동아시아 | 2017

 

윤세진(구일고등학교 생명과학 교사)

 

 

2018년 11월 26일 중국 남방과기대 허 젠쿠이(贺建奎) 교수는 유전자 가위 기법을 이용해 에이즈 바이러스(HIV)에 면역력을 가진 쌍둥이 아기인 ‘루루’와 ‘나나’를 얻는 데 성공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이 쌍둥이 아이는 유전자를 교정한 최초의 인간인 셈이다.[1] 이 발표 이후, 과학자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과학 윤리, 유전자 가위 기법, 생명경시 풍조 등에 대한 다양한 논란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전자 가위 기법을 비롯한 최근의 생명공학 기법들의 발달은 생명과학 또는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로 하여금 합성 생물학이라는 새로운 연구 영역을 제시하는 단계까지 진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최근에 합성 생물학이나 유전자 가위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여 관련된 기사들이 국내외에서 많이 쏟아지고 있으며 책도 출판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라는 책은 이 문제를 과학적인 측면에서만 다루지 않고 철학적, 윤리적, 제도적 관점의 논의도 함께 다루고 있다. 과학적 기법만을 다루면 자칫 건조해질 수도 있고, 윤리적, 철학적 측면만 다루면 실제적인 부분에 속하는 과학 영역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편집을 한 느낌이다. 특히 합성 생물학과 관련된 제도적인 측면을 함께 다루어 줌으로써 합성 생물학의 다양한 논의 분야를 전방위적으로 다루고 있는 괜찮은 책이다.

 

 

합성 생물학은 생명체의 기본 구성단위인 유전자 수준부터 직접 설계하고 합성해 하나의 온전한 생명체나 세포 소기관, 단백질들로 구성되어 있는 생체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을 통칭한다.[2] 이러한 합성 생물학에서는 생명체를 이해할 때 모듈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한다. 모듈적인 접근 방법이란 명확히 구별되는 기능을 갖는 모듈들이 네트워크로 조직화되어 기능을 수행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말한다.[3] 합성 생물학의 생물학적 기술의 기반을 살펴보면 근본적으로는 멘델에 의해 시작된 유전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왓슨과 크릭에 의해 DNA의 분자 구조가 밝혀지면서 분자생물학의 출현하였고, 계속해서 발전된 생명 공학과 최근에 급속도로 발전된 유전자 합성 기술의 발전과 그 비용 감소,차세대 염기서열 해독기술의 발전 등이 합성 생물학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기반 기술이라 할 수 있다.[4]

 

합성 생물학이 다루는 범위와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5] 첫째로, 합성생물학을 이용해 지구에 나타난 최초의 생명체 탄생의 비밀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둘째로, 세포를 기계적인 장치의 하나로 인식하여 공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원하는 기능을 가진 세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셋째로는 기존과는 다른 생명체를 만들어 보자는 것으로 지구상에 사는 생명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넷째로는 기존의 DNA 재조합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공학에 대한 개념과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년 허 젠쿠이 교수 논란과도 연관이 있으면서 합성 생물학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기술이 크리스퍼-카스(CRISPR-Cas9) 유전자 가위 기법이다. 이 기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크리스퍼-카스 기법에 사용하는 것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크리스퍼 유전자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잘라낼 유전자 부위를 저장 지정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 부분은 21개 염기쌍으로 구성되어 있다. 21개 염기쌍으로 구성된 DNA 사슬은 생물체 내에서 아주 정확하게, 거의 오류가 없이 특정 유전자 부분을 찾아내는 기능을 한다. 다음으로 카스 9 단백질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찾아낸 특정 유전자를 자르는 가위 역할을 한다. 이 시스템은 세균이 자신에게 침입한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과정을 연구하던 중에 발견된 것이다.

 

크리스퍼 작동 원리 .  출처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4225775/figure/F1/

 

이 책에서는 이런 기법들을 이용하여 합성된 합성 생물체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인 관점을 여러 관점들을 묶어 세 가지의 대비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6] 먼저 기계라는 관점과 생물이라는 관점을 대비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생물체를 기계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은 데카르트에서 완성되었으며, 다윈의 진화론은 사람과 동물의 경계를 확실하게 허무는 계기가 되었다. 합성 생물학의 관점은 생물체를 기계적인 관점으로 보며 사람도 동물과 동일하다는 견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본다. 두번째로는 공학적인 관점과 비공학적 관점의 대비이다. 공학적인 관점은 당연히 기계적인 관점과 연결되는 것이며, 비공학적인 관점은 공학적인 관점에 비판적인 입장을 제시하고 있는 관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지향적 느낌[7](목적을 위한 수단)을 갖는 관점 대 지향적 느낌과 비지향적 느낌[8]의 혼합적인 관점이다. 지향적 느낌은 수단적 관점이 강하고, 그에 비해 두 느낌이 혼합된 부분은 기존에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을 생각할 때 느끼는 전통적인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합성 생물학에 의해 생물이 창조된다고 보는 것은 그것과 동일하게 사람도 창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말한다면, 도덕적 윤리적인 인간도 과학기술을 통해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9] 이에 따라 고민해야 할 중대한 한 가지 문제는 ‘과학기술을 통한 인간 능력의 향상이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 갈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현재 인간의 능력이 바람직한 방향뿐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도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 기술로 인간의 바람직한 부분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바람직하지 않은 쪽의 증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 도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합성 생물학에 의해 인간이 새롭게 만들어진다면, 그 인간의 도덕성까지 우리가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한편, 합성생물학에 대해 종교계는 아직도 무관심한 상태인데, 이는 앞으로 나타나게 될 도덕적 윤리적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의 한계, 생태계 문제, 신과 인간의 재 개념화 등과 같은 문제를 고민하지 않은 채로 기술만 발전하게 된다면, 합성 생물학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쉽지 않다. 이런 문제점들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합성 생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타날 결과의 비예측성에 대한 연구자의 책임, 생물체와 생태계에서 연구자의 책임을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에 따른 후속조치도 각각의 책임에 걸맞도록 명확하게 세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합성 생물학의 연구 또는 발전의 한계를 어디까지로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이다.

 

합성 생물학의 생명체(혹은 생물)에 대한 접근 방법은 환원주의적인 접근이며, 물리 화학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생물체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하는데 부족한 부분이 존재 한다.[10] 그 중의 하나가 “창발성”이라는 개념이다. 물리 화학적인 접근만으로는 생물의 “창발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생물을 기계로 본다면, 또는 생물이 물질이라고 본다면, 또는 생물을 공학적으로 합성할 수 있는 모듈의 네트워크라고 본다면, 이는 ‘생명이 무엇인가?' 라는 각자의 개념을 반영하는 것이며,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어떤 의미에서 현재 합성 생물학은 생물체에 대한 공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으면서, 과학적인 혹은 종교적인 주장을(생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합성 생물학이 생물을 창조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실제로 생물을 창조하기보다는 유전자를 바꿔치기한 것이 아닌가? 일견 합성 생물학이 보여주는 결과는 생물을 새롭게 창조했을 때 나타날 만한 특징들을 보여준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유전자 조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합성 생물학이 달성하고 추구해 온 것은 “생명 시스템 전체를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의 시스템을 이용”할 뿐이다. 따라서 생명을 새롭게 창조하여 신에게 도전하고 있다는 진술은 조금은 과장되고 선정적인 선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던져야 할 질문은 “결국은 생물/생명은 무엇인가?”이다.

 

 


[1]) https://www.sciencetimes.co.kr/?news=중국서-유전자-편집-아기-출산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46352815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18-07607-3

[2]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2017). 송기원 엮음, 18.

[3] 같은 책, 21.

[4] 같은 책, 26~27.

[5] 같은 책, 28~36.

[6] 같은 책, 243~248.

[7] 같은 책, 244.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목적을 성취하도록 우리를 충동하는 느낌.

[8] 같은 책, 244. 어떤 원인의 결과로 발생하지만 뚜렷한 실체를 지향하지 않는 하나의 상태로서의 느낌.

[9] 같은 책, 148.

[10] 이것이 생물학이다(2016). 에른스트 마이어, 바다출판사.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