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과잉과 과학 과잉

출처: http://m.dongascience.donga.com/

 

신학 과잉과 과학 과잉

 

강상훈 교수 (Biological Sciences Department, Eastern Illinois University, 과신대 자문위원)

 

 

우리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식의 얘기는 전혀 새롭지 않아서 누가 굳이 해 주지 않더라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는 사람들도 무척 많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현상이든 과학적인 설명을 요구하고, 실은 그 설명이 과학의 모양을 한 유사과학에 근거한 것임에도 과학이라는 단어의 힘에 기대어 온갖 것에 과학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돈벌이를 하려고 하는 현상이 어쩌면 과학의 시대에 대한 반증일 수 있겠다.

 

실제로 우리의 매일의 삶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과학과 기술 발전의 혜택에서 벗어나서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닥치고 있는 COVID-19 사태는 이 상황을 심화시켜 버렸다. 과학의 시대에서 최소한 대중들에게는 한걸음 정도 빗겨서 있던 생물학을 모든 대중의 관심에 모아들여서 지난 몇 개월간 우리는 바이러스학, 분자생물학, 역학 (epidemology) 등의 분야에 그동안의 모든 시도가 하지 못했던 대중 교육의 훌륭한 성과를 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시류에 편승하려는 세력들에 의한 잡다한 과학의 모양을 쓴 주장들이 난무하는 것도 현실이다. 예를 들어 A 혈액형이 더 잘 걸린다는 주장은 New England Journla of Medicine이라는 저명한 의학 저널에 기반하지만, 그 논문이 사실 2,000명 정도의 샘플 수로 분석하여 의구심이 있었고, 6월 29일 발표된 90만 명의 샘플에 대한 메타분석의 결과로는 혈액형과 관련한 유의미한 결론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https://www.covid19hg.org/res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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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러한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과학 시대의 흐름을 고고히 거부하고 때로는 왜곡하는 대표적인 집단이 있으니,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물론 대부분의 상식적인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합리적인 사고와 실험과 분석의 과정을 통해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학문의 영역으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서 모든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 수혜를 당연히 누린다. 하지만 일부는 그 전제를 완강히 거부하여 수혜는 누리되 받아들이는 것은 선별적으로, 즉 자신의 이익이나 부족하고 왜곡된 이해에 기반하여 수용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부류의 행동 방식을 이미 교회 내에서 많이 보고 있는데, 문자주의자들의 성서에 대한 행태가 실은 ‘선별적 문자주의’라 부를 만하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교회는 그와 동시에 신학 과잉이라고 부를 만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신학적, 내지는 신앙적 해답을 요구하고 그것에 부합하려고 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분명 시대를 살아가는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실은 모든 성도들의 소임이라고 할 만한 일이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COVID-19 이후 기독교와 특히 교회라는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일상(new norm)에 대한 전망과 관련한 책이 거의 매일 발간되는 듯 하고, 관련한 기사나 유튜브의 논의들도 상당한데, 개인적으로 일일이 다 확인하지는 못하지만 대부분이 그냥 개인적인 단상이나 '거룩한 잡담' 수준의 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 세태는 사실 누구도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예측하기 어려운데 이 상황인데,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이 사태를 주도권의 문제로 이해하는 듯하다. 과학의 시대에 과학의 힘으로 어찌하지 못해서 19세기에나 사용할 법한 방법으로 이 pandemic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마치 과학 시대의 약화의 단초라 여기고, 어떤 기회라고 여기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우려가 든다. 

 

이쯤 되면 해결책이라고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얘기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다. 신학 과잉과 과학 만능주의의 근원에는 어쩌면 신학 부재와 과학 몰이해가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서 과신대의 사역이 더욱 중요하고, 무엇보다 일종의 시민의 교양 내지는 성도의 교양에 과신대의 역할이 이 시대의 요구라는 생각이 든다. 과신대의 사역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참여하는 모든 관심이, 특별히 저변을 넓혀가는 데 복무하는 관심과 기대와 노력과 시간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겠다. 우리 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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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sensibilisㅡ"스푸마토Sfumato"

 

모호한 경계에서 경건한 생각을 보았다.(60)

 


안개 낀 날엔 세상의 표정을 붙잡을 수가 없다. 옅은 안개가 만드는 광경은 오랜 공백 끝에 나타난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지 시큰둥해하는지  알 수 없던 그대 얼굴 표정이고 시야가 흐릿해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새벽시간이다. 

먹구름이 짙은 하늘은 장마 때 널어 놓은 빨래의 감촉이다. 첼로의 낮은 선율이 스며들어 있는 공기가 스쳐 지나가면  세상은 마법에 걸려, 또렷했던 사물들의 경계와 경계가 서서히 섞이고 합쳐지면서 뭉개져  흐릿하고 자욱해져서는 결국엔 사라진다. 

앞산과 뒷산이, 건물과 건물이, 도로와 자동차가, 하늘과 지평선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모호해진다. 서로 이질스럽다거나 혹은 생경하진 않더라도 머쓱하고 떠듬거리느라 서로의 곁을 내어주지 못하던 사물들이 서로의 전부를 쥐어준다. 페라스peras, 즉 나와 너,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라는 선을 그어 경계 짓던 것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곳엔 공존만이 머문다. 

수묵화 같은 세상이 펼쳐지는 비 오는 날의 풍경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묵화 속의 세상은  모호해진  사물들이  다양한 색채로만 있으면서  보는 이를 점점 가까이 잡아당겨  그 앞에 세우고 낮은 목소리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 오는 날 세상은 신비의 베일을 두르고서 사물들을  전혀 새롭게 보도록 상상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그곳에서는 딱딱하고 날카로운 것들은 견디지 못하며 분명하고 선명한 것들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습기 머문 날은  쨍쨍하고 선명하고 똑바른 빛들을 대기 중의 수분이나 먼지 입자들이 가차 없이 마구 사방으로 흩어버려서 사물들은 자연스럽게 연기가 공기 중으로 사라지거나 안개에 싸인 듯이 부드러워진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사물에게 있던 색채들의 명료함은 낮아지고 대신에 섬세하고 부드럽게 그러데이션 된다. 그리하여 앞에 있는 것에서 뒤로 갈수록 밝은 톤에서 어두운 톤으로 보이면서 사물들은 경계가 희미해져  아스라한 여운으로 밀려나 보인다.

사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회화에 응용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의미로 스푸마토sfumato기법이라고 불렀다. 레오나르도는 사물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기법을 사용했는데, 흐릿한 윤곽과 그윽한 색상을 통해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와 합쳐지게 하면서 보는 이의  상상력을 꿈틀거리게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자와 빛은 공기중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선이나 경계가 없이 부드럽게 섞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반투명한 유약을 겹겹이 겹쳐 올리는 방식으로 스푸마토 기법을 표현하여 입가와 눈가 같은 특정부위에 서른 차례의 붓질을 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얼굴의 표정은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있다는 것을 관찰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기에  눈과 입의 가장자리를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표현해 놓았다. 

그래서인지 모나리자는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고 꼭 나를 쳐다보고 있는것있는 것 같아 섬뜩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물화에서는 영혼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화가들에게  강조했던 대로  모나리자는 영혼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며  볼 때마다 매번 다르게 보인다.  어느 때는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미소가 슬프게 스며들고 또 그런가 하면 평온하고 신비한 매력이 전해져 온다.

이것일까 저것일까 모호한 것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면서 확실한 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누구라도 이것이 진실이야 혹은 이것만이 진리야. 이것은 확고부동해. 이것은 정확해라고 선포해주기를, 그래서 애매한 것으로부터 놓여나길 바란다. 우리는 O, X 로 선택하는 데에 익숙하고,  맞다 틀리다의 이분법적이고 흑백처럼 선명한 판결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유전형질인가 싶을 정도다.

내가 옳기 때문에 너는 틀려야 하고, 하나가 진실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것이 선이면 저것은 악이다.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를 돌아볼 때에 대립되는 것이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을 초과해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불확정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세계 본연의 모습이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다만 확률적으로만 입자들의 상태를 말할 수 있을 뿐 처음부터 사물을 이루는 기본물질을  우린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물질이 어디에 어떤 빠르기로 어떻게 위치하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도 없다. 선긋기 식의  '확실함'은 사라져야 할 유령이다. 그 유령은 그대와 나를 가파른 비탈길 위에 세워둔다.  

우리들의 이분법은 스푸마토로 희미해지고 사라져야 할 때이다. 사물들의 경계가 사라지듯이, 다양한 주장들의 경계와 입장들의 윤곽선이 확고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은 메마르고 딱딱하지 않을 수 있다. 나와 너의 경계가 없어지는 지점이 두카Dukha 에서 벗어나는 지점이라 했다.

그대와 내가, 너와 내가 뒤섞여들어가듯 흐릿한 경계는 무한한 상상력의 지대가 열리며  마주 보는 시선과 시선이 부드러워진다. 그곳은 비무장지대, 즉 대화의 장이다. 관념의 모험이 시작되는 곳, 'and'가 있는 곳, 우리들의 사유가 중첩되는 곳이다. 우리의 사고에도 스푸마토가 필요하다. 날 선 경계인 변경 말고 뭉개져서 부드럽게 이어지는 섞임과 내어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독선과 편협은 야만의 칼날이 되어 사람과 사람을, 공동체와 공동체를 난도질하며 상처를 입힌다. 그 상태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과도 같아서 내가 이기면 무엇이라도 빼앗을 수 있고 함부로 할 수 있으며 전유할 수 있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확실한'과 '확실함'이  주는 속임수는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우리는 확실함 대신에 모호함 속에서 무언가 추측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고 그리하여 스스로 사물과 사태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고민할 수 있는 것,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 확실함을 얻어 교만에 빠지고 융통성 없는 편협함의 독에 빠지는 것보다 복되고 경건하다고 할 수 있겠다.

모나리자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부드럽게 섞이면서 모호해진 경계선에 있음을 기억에 새겨본다. 나는 모호한 경계에서 경건한 생각을 보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손과 밤의 끝에서는 

박준

까닭 없이 손끝이
상하는 날이 이어졌다

책장을 넘기다 
손에 베인 미인은
아픈데 가렵다고 말했고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고 말했다

여름빛에 소홀했으므로 
우리들의 얼굴이 검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새벽이 오면
내어주지 않던  서로의 곁을 비집고 들어가
쪽잠에 들기도 했다.

 

 

글_ 백우인 (bwoo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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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와 과학의 미래

출처: https://www.economist.com/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와 과학의 미래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올해 2월부터 지난 5개월간 코로나19는 이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이 바이러스가 그 어원의 뜻 그대로 ‘왕관’을 쓰고 지금도 기세 등등 정체를 숨긴 채 종횡무진하게 암약하고 있다. 6월 30일 현재 시각 보도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확진자 수는 1천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50만 8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며 세계 최강국을 자랑하던 미국에서 12만 8천여 명이 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어 세계 사망자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K방역이라고 자랑하며 잠시 우쭐했었는데 우리나라 상황도 2차 팬데믹을 예상할 정도로 작은 규모의 집단감염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지속되고 있고, 지금 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폭풍 가운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감염되지 않기 위해 다들 전전긍긍하고 있다. 과학의 일선에 선 전문가들은 국가의 절박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신속하게 백신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효용성에 대한 의심의 시선도 만만치 않다. 이 바이러스가 돌연변이에 능한 RNA 유형이고 이미 변이 된 코로나가 여기저기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게다가 그 백신의 구매비용이 엄청나서 일반 서민이 이것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불안한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20세기 이후 과학이 미세한 바이러스에 이토록 무기력한 적이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황망한 지경에 처해 있다.

 

 

그러면 종교는 어떠한가. 특히 모든 재난을 신적 섭리의 결과로 치부하는 기독교의 경우는 그 사정이 어떠한가. 맨 처음 중국 우한에서 이 바이러스 소식이 ‘우한폐렴’이란 말과 함께 퍼지기 시작할 때 국내의 한 유명 목사는 성급하게 중국 선교를 핍박하던 교회 철거 단장이 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1호 사망자라며 성급한 심판론을 확산시켰다. 이후에 대구 경북 중심으로 신천지 세력이 숙주가 되어 팬데믹의 확산을 주도할 즈음 그 심판의 대상은 신천지 이단종파로 옮겨가는 듯했다. 일부 극단적인 이념주의자들은 문재인 좌파정권에 대한 심판까지 읊조리며 SNS 공간을 달구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방역이 비교적 성공적인 결과로 드러나고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 감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어가면서부터 심판론이 쏙 들어갔다. 논리적으로 추론하면 이들이 지난 역사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적 침략의 오만한 행태에 대한 신적 심판을 얼마든지 떠들 만한 엄청난 사태였음에도 그저 잠잠했다. 일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내에 친일파 기독교인들이 꽤 많을 텐데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일본의 무기력한 대응을 두고 심판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후 신천지 감염 사태가 잦아들면서 일부 교회를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확산되니 신천지 이단종파나 기성 기독교 교회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즈음 수도권 집단감염 사태도 몇몇 교회들이 종종 그 현장으로 언급되면서 신천지 세력과의 비교 우위를 내세우기가 다소 멀쑥해졌다. 이처럼 코로나19의 위용은 과학과 종교의 텃밭을 휘저으며 이단과 정통을 가리지 않고 곳곳을 쑤셔대고 있다. 신실하고 경건한 자와 불경한 불신자의 경계도 의식하지 않고 마치 성령의 포즈를 흉내 내듯 불고 싶은 대로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이 바이러스는 인간의 모사와 모략을 비웃는 기세로 우리 삶의 일상을 집적거리며 침투하고 있다.

 

교회의 공예배가 위험한 감염 현장이 된 이래, 두어 달간 다수의 교회들이 예배를 온라인 화상 예배나 가정예배로 대체했다. 오프라인 예배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생존의 위기의식이 더욱 고조되었다. 뉴 노멀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각종 예언들이 난무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코로나19의 제왕적 패권 기간이 한없이 길어지면 앞으로 교회와 기독교의 미래, 종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한 논의와 대안이 자주 제기되곤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매일 감염자가 속출하면서 죽어가는 현실의 한 복판에서 별스런 위안과 평온을 담보하지 못한다. 맥 놓고 있으면 불안하니까 그냥 이런 얘기 저런 가능성을 떠벌이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부득이한 아우성이라고나 할까.

 

 

태초의 세계종교는 ‘교통 공간’에서 경계가 없었다. 마치 광야나 대양처럼 사위로 열려 있었고, 익명의 타자들이 서로 삼투하고 거래하면서, 또 번역하고 변용하면서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한 담대한 모험과 참신한 탈주의 동력만이 그 에너지로 활기찼다. 그러나 교리의 틀을 갖춰 제도화되면서 종교는 이질적 타자들이 서로 끊어 붙이며 생동하는 존재론적 연금술의 활력을 잃고 자기동일성의 포로로 전락했다. 그 결과 오늘날 종교는 재난을 빌미로 불안을 주입하거나 그 불안을 역이용하여 사람들의 내면을 묶어두는 체제 보전의 메커니즘으로 쇄말화되어간 측면이 없지 않다.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무한과 영원의 세계로 열린 과학적 지성을 억압하고 협소한 교리 체계에 인간의 상상력을 가두려고 한 시도였다. 교회가 그 중세적 오류를 시정하고 회개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는데, 이 땅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그 고렷적 퇴물을 다시 끄집어내 동일한 패턴의 오류를 되풀이하려는 증상을 곧잘 드러낸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종교의 미래는 여전히 희미한 불확실성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인류 종말의 시점이 단축되어 도래할 수도 있고, 단기간에 상황이 타개되어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희미한 안개의 지구촌에 불확실성과 위험의 변수는 더 많아졌고 그 수위도 높아졌다. 코로나 사태로 가려진 지구촌의 더 극심한 재앙에도 눈떠야 한다. 최근 한 보도에 의하면 올해 5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사상 최고치에 도달했다. 동토 시베리아가 펄펄 끓고 있고, 인도양 주변 대륙에 살인적인 메뚜기떼가 창궐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으며, ‘고질라’ 먼지구름이 북중미를 강타하고 있고, 아마존 열대우림은 활활 타오르며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다. 모두 가속화되는 지구온난화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재난이다.

 

종교와 과학은 이러한 전 지구적 재난에 공동보조를 취하며 공동 대응해야 할 때다. 상생의 기치는 늘 옳고 공존의 목표는 늘 희망적이다. 우리는 수백만 년간 이 지구를 지배해온 공룡의 멸종 앞에 겸손해야 한다. 고작 수만 년 역사 속에 숱한 시행착오를 딛고 간신히 문명을 일구어온 것이 우발성에 따라 제공된 자연의 선물, 신적 은총의 선물임을 너무 자주 잊는 건 아닌지 발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코로나19는 그 전위대로 우리에게 경고하러 파견된 하늘의 전령일지 누가 아는가. 점쟁이 노릇하듯, 종교를 일천하게 이용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섣부르게 입에 담지 말자. 금세 망령된 일로 드러난다. 대신 미래로부터 오시는 미지의 하나님을 향해 허름한 가슴, 진지한 지성을 회복하는 쪽으로 가는 게 좋겠다. 애당초 우리는 하나님이 이 만물 가운데 하시는 일의 시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컴컴한 존재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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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 나, 그리고 어머니.

  • 삶은 미완성인 것같습니다. 그래서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낳고키우고결혼시키고나면죽고...또....>

    아담 2020.07.04 11:45

 

이은, 나, 그리고 어머니.

 

백경민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조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우리 부부에게는 17개월 된 딸이 있다. 이름은 백이은. 결혼 후 5년 만에 얻은 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40이 넘어서 얻은 첫 자녀라서 그런지 점차 ‘딸 바보’가 되어 가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육아’다. 이은이가 무엇을 보며,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커 가는지를 하루하루 눈에 꼭꼭 담아 두려 하고 있다.

 

이은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돌아보게 되는 것은 나 자신 그리고 나의 부모이다. 어머니는 이은이가 태어나기 딱 1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10년 간 암투병을 하시다가 결국 이겨내지 못하시고 하나님 곁으로 떠나가셨다. 당시 해외에서 일하고 있었던 나는 어머니의 암투병을 함께 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어머니의 마지막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를 보내고 이은이가 찾아왔다. 이은이를 키우면서 그렇게 가정적이지 못하셨던 아버지와 함께 나와 내 동생을 키우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땠을까가 계속 상상이 되었다.

 

 

내가 태어나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을 예전에 어머니와 가본 적이 있었다. 그 집은 부산 어느 달동네였다. 어머니는 장을 보거나 연탄을 나르기 위해 매일 나를 등에 업고 몇 번의 등산을 하셨다고 하셨다. 그 때 나는 그게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다. 아니 그냥 내 귀를 스치는 소리로만 지나갔었다. 하지만 이은이를 재우기 위해 아파트 밖을 매일 서성거리면서 그리고 매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면서 어린 나를 등에 업고 달동네의 가파른 고갯길을 몇 번을 오르셨을 그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작년에 이은이가 태어났을 때 귀에 문제가 있었다. 난청이 발견되어서 조기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귀하게 얻은 딸에게서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 감정이 좀 진정되고 이은이가 무사히 언어 발달을 하게 되면서 나는 나와 어머니가 겪은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무릎이 갑자기 아파서 병원을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내가 암일 가능성이 있으니 암이라면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때 옆에 앉아 있었던 어머니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오열을 하셨다. 물론 다행히 나는 암은 아니어서 살아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때 나는 어머니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내가 아픈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은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통해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 때 어머니는 과연 무슨 심정이었을까를 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다. 살면서 언제가 가장 기뻤냐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두 말 하지 않고 내가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였을 때라고 말씀하셨다. 삼수 끝에 원하던 학교에 입학통지를 인터넷으로 확인하던 그 날 “합격”이라는 문구가 스크린에 뜨자마자 어머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며 그렇게 목놓아 우셨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어머니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사실 그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자녀가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부모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일까를 알기에는 이은이가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은이를 키우면서 나는 어머니의 그 감정을 이해할 날이 오리라 믿는다. 

 

요즈음 나는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를 통해 나를 보고 있고 내 옆에 서있었던 어머니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느꼈던 감정을 한땀한땀 나도 같이 느껴 가면서 인생이 성숙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부모로서의 감정을 다 느꼈을 때 나도 삶의 끝자락에 서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이은이도 한 자녀의 어머니로 느껴갔으면 한다.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날 하늘을 보면서 그렇게 읊조렸던 것 같다. 

 

“엄마. 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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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5. 기후변화의 요단강, 티핑 포인트

 

글_ 김진수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이산화탄소 피드백


첫 연재글(352호·2020년 3월호)에서 이산화탄소 이야기를 했지요. 매년 인류가 화석연료 사용과 토지사용 변화로 방출하는 이산화탄소량이 5ppm 이상인데, 약 3ppm 정도는 해양과 육상의 식생(주로 숲)이 흡수하여 대기 중에는 약 2ppm씩 쌓이고 있다고 설명했는데요. 해양과 육상의 식생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 극심한 지구온난화에 시달렸을 것이란 말도 덧붙였습니다. 즉, 지구의 기후시스템 자체가 지구온난화를 완화해주고 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많은 과학자가 연구한 미래의 전망은 매우 어둡습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양의 피드백(feedback)이 현재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고, 미래에는 갈수록 더 심각해진다는 예측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산림에서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해 폭염과 토양 수분 손실 등 건조 현상이 잦아지면 산림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이산화탄소를 예전처럼 흡수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경우 식생으로 흡수되어야 할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더 많이 쌓여 지구온난화는 증폭합니다. 

그뿐 아니라, 해양의 이산화탄소 용해도는 온도와 반비례하기 때문에 지구온난화로 해수면 온도가 올라갈수록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이 늘어납니다. 예를 들면 차가운 탄산음료 안에는 많은 이산화탄소가 녹아(용해) 있는데 상온에 두면 김이 빠지는 것과 같은 원리지요. 따라서 지구온난화로 해양이 따뜻해지면 온난화 진행 속도도 가속화하는 악순환이 예상됩니다.

 

 

메탄 피드백


지구 대기를 오염시켜 온실 효과를 일으키는 온실가스는 이산화탄소 외에도 메탄, 이산화질소, 과불화탄소, 육불화황 등이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다음으로 눈여겨볼 온실가스는 메탄인데, 메탄은 같은 양의 이산화탄소와 비교하면 지구온난화를 28배나 더 일으킨다고 합니다. 다행히 대기에 존재하는 메탄의 농도는 이산화탄소보다 현저하게 낮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메탄은 일반적으로 습지(22%)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외에도 화석연료 및 천연가스(19%), 가축의 되새김질(16%), 쌀을 생산하는 논(12%), 화재(8%), 쓰레기 매립(6%) 등에서 배출됩니다. 자연적 발생뿐 아니라 인위적인 요소가 작용하며 대기 중 메탄가스 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북극 주변의 영구동토층(永久凍土層)입니다. 영구동토층이란 지층의 온도가 연중 0℃ 이하인 부분을 말합니다. 지난 연재에서 얘기했다시피, 북극 일대는 가장 빠르게 지구온난화가 일어나는 지역인데 해빙뿐 아니라 얼어 있던 육지가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그곳엔 다량의 유기물이 지표 아래에 매몰되어 있는데요. 지구온난화로 온도가 상승하면서 지표면에 두껍게 덮여 있던 눈이 녹고 습지가 형성되며, 얼어 있던 미생물들이 토양에서 활성화해 메탄가스를 방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불타는 얼음’이라는 아이러니한 현상인데, 일부 영구동토층이 녹은 지점에 불을 붙이면 가스레인지보다도 잘 타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로 땅속 메탄가스가 타면서 만들어내는 현상인데요. 이렇듯 지구온난화 때문에 극 지역이 녹으면 메탄가스를 통해 양의 피드백을 만들어내고 계속 지구온난화가 가속되기 때문에 현재 학계의 관심은 이곳에 쏠려 있습니다.

 

 

 

기후 티핑 포인트


티핑(tipping)은 ‘균형을 깨뜨리는 것’ ‘갑자기 뒤집히는 점’이란 뜻으로 엄청난 변화가 작은 일들에서 시작될 수 있고 대단히 급속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앞서 언급한 피드백이 처음에는 미미하게 진행되다가 특정 순간 갑자기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하면 이를 ‘기후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30cm 막대자를 책상 위에서 천천히 밀어낼 경우, 무게중심이 되는 자의 15cm지점이 책상을 벗어나는 순간, 자는 툭하고 떨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임계점이 기후 현상에서도 존재한다는 이론이 바로 기후 티핑 포인트입니다. 과거 빙하의 이산화탄소 농도와 온도에 관해 기록된 자료를 보면 급격한 기후변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11,500년 전쯤에 그린란드의 온도가 40년 동안 무려 8℃나 상승한 기록이 있습니다. 

영화 <투모로우>(2004)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전 세계에 빙하기가 닥쳐오는 대재앙 상황을 그려냅니다. 영화에서 북극의 빙하가 다량으로 녹아서 해양의 염도가 낮아지고, 그 결과 난류의 흐름이 끊겨 갑자기 빙하기가 닥쳐올 수 있다는 설정은 고기후 연구에서 발견한 과학적 내용을 배경으로 삼은 것입니다. 아직도 과학자들은 이러한 기후 티핑 포인트가 어느 시점에 생길지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지구 시스템 모형이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도입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불확실성이 매우 큽니다. 하지만 자명한 것은 지금 기후 시스템이 언제 있을지 모르는 기후 임계점, 기후 티핑 포인트를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산화탄소의 수명


국제에너지기구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인류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세계 에너지 소비가 6% 감소함에 따라 이산화탄소 배출도 8% 정도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을 하였습니다. 이는 1930년대 대공황 기간이나 2차 세계대전 끝 무렵보다도 훨씬 큰 폭의 이산화탄소 감소량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국제에너지기구 사무총장은 조기 사망과 경제적 트라우마로 인해 일시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감소하였을 뿐 경제 상황이 회복되면 배출량이 가파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와해되면 그동안 분출하지 못했던 소비심리가 단기간에 증폭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온실가스 배출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산화탄소 문명’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고는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 구조입니다. 한 가지 슬픈 소식을 전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당장 이산화탄소를 줄이면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하시겠지만, 이미 우리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아래 그래프를 보시면 미래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변화를 예측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도 지금처럼 이산화탄소를 계속 배출해서 1,500ppm이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현재는 410ppm 수준입니다.) 늘어난 이산화탄소 중 65%에서 80%는 20년에서 200년 사이에 해양이 흡수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화학적 풍화작용으로 몇 백 년에서 몇 천 년 동안 서서히 줄어든다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수천 년간 계속 대기 중에 남아서 계속 지구온난화를 일으킬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번 코로나19로 인한 일시적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 현상처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인다고 한들 이미 우리가 배출한 이산화탄소 중 일부는 몇 천 년 동안 대기 중에 남아서 계속 지구온난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지구온난화라는 큰 짐을 지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기후변화의 비가역성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산화탄소 농도 미래 전망 결과. (출처: Inman, 2008 Nature Climate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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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4. ‘고작 1℃’여서 문제 없다고?

이미지 출처: https://www.greenqueen.com.hk/

 

글_ 김진수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기후변동과 기후변화


지난 글에서 설명한, 매년 기후의 상태가 변하는 ‘경년변동성’(經年變動性)이 기억나시는지요? 2018년에는 한파와 폭염이 있었습니다. 서울 기준 연 최저기온 -17.8℃, 연 최고기온은 39.6℃를 기록했습니다. 반면 2019년에는 겨울이 별로 춥지 않았고, 여름도 별로 덥지 않았습니다. 2019년 1월 최저기온은 -10.1℃이었고, 여름철 최고기온은 36.8℃이었습니다. 이렇듯 해마다 온도의 변화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것을 ‘기후변동’이라고 합니다. 이와 달리, 기온이나 강수량 등의 ‘평균값’이 한 방향으로 꾸준히 변하는 것을 ‘기후변화’라고 합니다. 

지난 글에서 ‘기후’를 사람이 가진 성격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는데요. 이 기후의 값은 대개 20년에서 30년을 관찰한 평균 날씨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수많은 기후변화 중 하나인 지구온난화는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지구온난화는 지구의 평균 기온이 꾸준히 상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880년에서 2020년, 전 지구 연평균 기온 대비 연도별 연평균 기온과 30년 이동 평균 기후 값. (출처: NASAGISS)

 

위 그래프는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발표한 1880년부터 2020년까지의 지구 연평균기온 도표입니다. 점과 직선으로 연결된 선은 연도별 연평균 기온을 의미하고, 곡선은 30년간의 평균기온인 기후 값을 나타냅니다. 매년 기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경년변동성도 있지만 1970년대부터 뚜렷하게 상승하는 추세를 볼 수 있습니다. 기후 값을 의미하는 곡선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기후 값이 변하는 기후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기온이 점점 오르고 있기 때문에 명백한 지구온난화입니다. 다음 그림(142쪽)은 지구온난화가 공간적으로 어떠한 분포를 가졌는지를 나타냅니다.

이 그림은 대륙별로 1951년부터 1978년 사이의 평균 기온에 견주어 2010년부터 2019년의 평균 기온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보여줍니다. 그림을 보시면 대부분의 지역이 노란색이나 적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범주를 보면 0.2℃ 이상의 온난화가 이뤄진 지역을 진한 색으로 표시했기 때문에 지구 대부분의 지역이 온난화를 겪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같은 바다보다는 육지의 온난화 경향이 뚜렷하고, 남반구보다는 북반구가, 그리고 열대지역보다는 중·고위도 지역에서 온난화 경향이 강합니다. 그중에서도 북극 지역의 온난화가 가장 심한데, 다큐멘터리 <북극의 눈물>이나 언론을 통해서 많이 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고작 1℃만 상승했지만


지구온난화는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배출한 온실가스로 인해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 결과 지구의 평균 기온은 고작 1℃밖에 상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1℃는 체감하기도 어려울 만큼 작은 수치입니다. 하지만 연평균 기온 1℃의 상승은 여름철 폭염 발생 빈도를 145배나 증가시킵니다. 과거에는 매우 드물게 일어나던 폭염 현상은 평균 기온이 상승하면서 더 강하고 빈번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이 관측되었습니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143쪽) 과거(1951년에서 1980년)를 나타내는 청색 선 보다 최근(2005년에서 2015년)의 분포를 나타내는 적색 선이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현재에 가까운 시기일수록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모습입니다. 가로축은 기온과 기후 값의 차이를 표준편차로 나눈 값인데, 최근에는 과거에 비해 높은 기온이 나타날 확률이 증가했음을 나타냅니다. 

 

1951-1978년 연평균 기온 대비 2010-2019년의 연평균 기온 차이.(출처: NASAGISS)

 

특히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한 극한(extreme) 기온 현상이 관측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래 도표의 가로축 기온의 4, 5, 6 강도의 폭염 현상이 과거에는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최근 들어 빈번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매해 여름마다 자주 갱신되고 있는 최고 기온은 자연 변동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들이 평균 기온을 상승시키면서 확률적으로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인재(人災)라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북반구 여름철(6, 7, 8월) 기온의 확률분포. 가로축은 정규화 된 기온, 세로축은 발생 빈도 확률. (출처: Hansen and Sato 2016 Environ. Res. Lett. 11 034009)

 

극한 기온 현상이 빈번히 발생하게 된 이유는 평균기온 상승이 토양을 더 건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여름철 시장에 가면 상인들이 대야에 물을 받아 바닥에 뿌리곤 했습니다. 시멘트 바닥에 물을 끼얹으면 순간적으로 열기가 가라앉는데, 물이 수증기로 증발하면서(기화) 주변의 열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지표 토양에 수분이 있으면 폭염이 오더라도 수분이 기화하면서 기온 상승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균기온 상승으로 토양의 수분이 고갈된 상황에서 여름철 폭염이 발생하면, 기화할 수분이 없기에 폭염은 억제되지 못하고 계속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막 지역은 사막화가 더 가속되기도 합니다.

 

 

북극의 기온이 급상승하는 이유


북극은 주로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기화할 물도 많은데 왜 지구온난화가 가장 극심하게 나타나는 지역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반사율(albedo)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 번 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보고자 합니다. 돋보기로 검은색 색종이를 태웠던 기억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검은색은 태양열을 잘 흡수하기 때문에 돋보기로 빛을 모아주면 쉽게 타지만, 흰색 종이는 쉽게 타지 않습니다. 흰색은 모든 빛을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북극 지역은 주로 해빙(바닷물이 얼어 있는 것)이나 눈이 바다와 육지를 덮고 있어 희게 보입니다. 따라서 많은 양의 태양열이 반사되어 낮은 기온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지구의 이불이라고 할 수 있는 온실가스로 인해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하면, 해빙이나 눈이 녹고 바다와 육지의 표면이 노출됩니다. 바다와 육지 모두 해빙이나 눈보다는 태양열을 잘 흡수하기 때문에 기온이 빠르게 상승하고 그러면 다시 해빙과 눈이 녹습니다. 결과가 다시 원인 제공을 하는 순환이 증폭되는 것을 피드백이라고 합니다. 극심한 건조와 폭염을 증폭시키고 평균기온을 높이는 이런 파괴적인 피드백 작용을 통해 북극 지역의 기온은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폭염, 북극이 녹아내리는 현상 등 지구가 직면한 문제는 나와 별 관계없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건 과학자들이나 정부 당국자들이 할 일이지, 자신의 일상과는 무관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자기계발과 개인 자산 운용 등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듯, 우리와 우리 후세대가 살아가야 하는 터전과 환경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실천과 관심으로 나아가는 변화가 생기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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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신학 대화는 인격신을 논할 수 있는가?

 

과학-신학 대화는 인격신을 논할 수 있는가?

 

장재호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과학과 종교의 대화,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지난 수십 년간 영미권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여러 신학대학에 관련 과목들이 개설되고 있고, 과신대를 중심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퍼져가고 있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여러 생산적인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대화의 난제도 종종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가 창조/진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신의 인격성을 논하는 일입니다. 즉 과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논의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진화 과정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조직신학/종교철학에서 신 존재를 논증하는 데에도 비슷한 난제로 등장합니다. 우주의 근본 원인, 도덕의 근원, 미의 근원을 신으로 간주한다고 해도, 이 신이 인격적 모습을 지닌 야훼 하나님임을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신을 종종 언급했지만, 그가 말한 신이 영원한 가치나 신비의 궁극적 근원을 의미하는 것이지, 구약에 등장하는 인격적인 신의 모습으로 간주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Steven Hawking)은 자연의 비인격적 법칙만으로도 지금의 우주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신론 과학주의자들은 보통 우주가 맹목적이고, 무모하며, 비인격적이라고 봅니다.

 

 

이에 대해 과학신학자 존 호트(John Haught)는 『과학과 신앙(Science and Faith)』 2장에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서도 신의 인격성을 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호트는 우주가 비인격적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주의자들을 향해, 과학이 인격적 신에 대한 믿음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자격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과학을 근거로 인격적 신을 배제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모든 자연 과학이 정의상 신에 대한 어떠한 가정도 제외해야 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학만으로 인격적인 신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진화 과정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호트는 하나님의 인격성이 성경에 어떻게 등장하는지에 주목합니다. 그는 구약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은 언약의 체결과 이행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시고 그것을 이행하시는 내용이 성경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에 주목하며 호트는 우주가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로 보인다는 점에서 접합점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우주가 결코 과학주의가 단언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비인격적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우주의 드라마는 처음부터 인격성의 함양을 약속했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창조적인 결과를 미래에 허용함으로써 그 약속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고 봅니다.

 

과학이 우주를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로 묘사했다면, 신학은 그 드라마를 하나님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미래를 향한 여정으로 읽어냅니다.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돌봄은 그분이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미래를 피조물에게 선사한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트는 하나님이 곧 세계의 미래라고도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는 것보다 더 인격적인 돌봄을 확실히 드러내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온 피조물에게 자신 이상의 존재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심어주는 것보다 더 큰 인격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알게 된 우주는 장대한 역사와 엄청난 규모를 비인격적 표현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 광대한 역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배제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연의 모든 진화 과정을 하나님의 직접 개입으로 설명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지만, 자연을 향한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을 이해하는 신실함 속에서 우리는 구약에 등장한 인격적 하나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광대하고 오랜 세월의 우주 앞에서 인간은 그저 사소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호트와 같이 우주의 시공간적 광대함이 낭비된 시간이 아니라, 생명과 감정이 등장하고, 언약을 체결하고 이행하는 속성을 포함한 모든 의식적인 인격성이 등장하기 위한 드라마의 프롤로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리학, 천문학을 포함한 과학의 새로운 발전은 우리에게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크기의 우주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자연을 거대한 드라마로 이해하는 관점은 세계에 인격적 관심을 갖고 있으며, 세계를 향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시는 신 이해를 제공합니다. 오늘도 아직 끝나지 않은 대 자연의 드라마 속에 인격적으로 함께 하시며, 미래의 약속으로 전 피조물들을 이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한 시대를 넘어 새 시대 앞에서

 

글_ 김상기 교수 (감신대학교 구약학)

 

 

이스라엘은 기나긴 광야 여정을 마치고 이제 요단강 앞에 섰습니다. 그 세월을 버티게 했던 땅이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억제하기 힘든 감동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격하게 흘렀을 것입니다. 아프고 힘들었던 모든 기억들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희망만이 그들의 가슴을 채웁니다. 바로 그들 앞에 모세가 장로들과 함께 서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들의 부모세대부터 그들을 이끌어왔고 그들을 바로 여기까지 인도한 모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특별히 다르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꿈을 일깨우고 꿈을 일궈오며 100세를 훌쩍 넘긴 노인입니다. 자랑스럽고 그지없이 고마운 사람입니다.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숱한 고생을 했던 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심초사 애써왔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지금 그가 그들에게 하는 말은 특별히 더 묵직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좀 더 특별하고 좀 더 기분 좋은 이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모세는 평시 했던 말을 짤막하게 간추려서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라!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게 있다면 요단강을 건넌 후 큰 돌들을 쌓아 비석을 만들고 거기에 그 명령들을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 그들이 맨 처음에 할 일입니다. 그렇게 비석에 새기듯 그 명령들을 마음의 비석에 새기라는 의미가 그 명령에 함축되어 있을 것입니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새겨 오해하는 없도록 하라는 당부로 모세의 말은 끝납니다.

 

말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해석되어야 하는데, 본문이 분명하지 않으면 불필요한 갈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염두에 둔 것은 이런 상황보다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른 실천을 할 수 있도록 말씀이 그렇게 분명하고 정확하게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는 다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이전까지 바른 실천을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고 튼실하게 뿌리내리지 못한 탓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다짐은 이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그 실천에 대한 지속적인 반성과 성찰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이 새겨진 돌비석의 형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는 그렇게 다짐하기에 앞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또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말을 더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생각에 이미 그 효력을 잃은 제사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 내용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헌신을 상징합니다. 무엇을 드리는 것일까요? 제물일까요? 아닙니다. 다른 관심사들로 찢겨지지 않은 온전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우리의 삶을 그렇게 이끌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이 우리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게 생깁니다. 화목제는 바로 이때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누고 즐거워하는 축제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과 화해가 일어나고 다시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힘을 얻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과 병행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예배가 상호작용하며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우리 삶 가운데 기쁨과 평화가 들어서게 합니다.

 

모세의 이 당부는 짤막하지만 그들이 새로운 땅에 들어가서 실현시켜야 할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광야를 건너온 이스라엘에게 건네주는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코로나19의 강을 건너 아직은 잘 알 수 없는 미래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 시대를 전망하며 어떻게 맞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시대의 틀을 만들어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생각들과 교류하는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되새기고 마음에 새김으로 그 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길을 가시며 죽음 이후의 시대를 말씀하십니다. 그의 길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는 십자가 이후를 바라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요단강 앞에서 강 저편을 바라보았던 것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양자는 모두 생명의 땅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공통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사건 이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갈릴리는 어둠과 죽음의 땅으로 불리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속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 빛으로 오셨고 이제 그 땅을 생명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하십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빛을 보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는 그와 함께 ‘죽었던’ 제자들을 죽음의 자리인 예루살렘에서 빛 고을 갈릴리로 다시 불러내십니다. 그들은 쉽게 십자가 사건을 넘을 수 없었지만, 빈무덤에서 생명을 보고 갈릴리로 향할 것입니다. 그들은 빈무덤의 예루살렘을 생명으로 채울 것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그의 증인이 되는 운동을 세계로 확산시키고 세계를 바꾸어가게 됩니다. 예수와 함께 죽음의 강을 건너 생명의 땅에 이른 제자들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가 불러들인 죽음의 늪을 지나 새 시대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습니다. 막연히 새시대이지 어떤 모습이 될지는 매우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또 주님과 함께 제자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들어설 시대는 말씀과 생명으로 꽃 피울 시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요단강과 십자가를 지나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또 동행하실 것입니다.

 

짤막한 코로나19시대의 영향이 곳곳에 남아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장애가 될 수 있을지라도 그 장애가 우리를 포박할 수 없고 생명의 땅으로 향한 우리의 여정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명과 연대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그 사건 속에서 우리는 희망의 근거가 어디 있는지를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요단강 앞의 이스라엘에게 말했던 것처럼 말씀을 지키는 것에 있고 죽음을 건넌 주님을 빛의 땅에서 다시 뵙는 것에 있습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이 땅에서 계속되며 소망을 낳고 사랑을 키우고 믿음을 단단케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화해의 공동체가 자라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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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3. 기후와 성격,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

 

글_ 김진수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날씨는 기분, 기후는 성격


기후변화를 살펴보기에 앞서서, ‘기후’가 무엇인지부터 더 자세히 따져보려 합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기후는 “일정한 지역에서 여러 해에 걸쳐 나타난 기온, 비, 눈, 바람 따위의 평균 상태”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날씨와 기후의 개념을 헷갈려 하는데, 쉽게 얘기하면 날씨는 매일매일의 기상 상태를 가리킵니다. 뉴스 마지막 순서에 나오는 일기 예보의 ‘오늘의 날씨’처럼 말이지요. 이와 달리, 기후는 오랜 시간에 걸쳐 관측한 날씨의 평균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날씨는 ‘기분’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기뻤는데 오늘은 우울할 수 있는 기분처럼, 어제는 맑았는데 오늘은 비가 오듯이 급변하는 게 날씨입니다. 반면 기후는 ‘성격’과 같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과 느긋한 사람이 평소에 생활하는 패턴이 서로 다르듯, 기후가 다른 지역은 기상 상태가 평균적으로 다릅니다. 적도 지역의 열대기후는 주로 따뜻한 날씨를 가지고, 남극이나 북극의 한대기후에서는 날씨가 비교적 추운 것처럼 말이지요. 사람 개개인이 고유한 성격을 가지듯이 지역마다 고유한 기후를 갖습니다. 

그런데 성격이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긴 하지만, 불변하는 특성은 아닙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성격이 자연스럽게 변하기도 하는 것처럼, 기후도 지구상의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하기도 합니다. 단적인 예로, 빙하기와 간빙기만 보더라도 자연적으로 지구가 추워졌다가 따뜻해지기를 반복했던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 기후변동이라고 합니다. 2018년 여름에는 폭염이 극심했지만, 2019년에는 (여름이라 기본적으로 덥긴 했지만) 2018년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해에는 덥고 어떤 해에는 덜 덥기도 한 경년변동성(經年變動性, 10여 년 넘는 기간 동안 해마다 일어나는 자연현상의 변화)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외부강제력’


기후는 자연적으로 변할 수 있지만, 외부 요인에 의해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중생대에 공룡이 멸종했던 이유를 소행성의 충돌로 꼽는데, 이 충돌로 생긴 분진 때문에 지구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자연적인 변화 외의 외부적인 요인을 ‘외부강제력’이라고 합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인류 활동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증가’도 기후를 변화시키는 외부강제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격이 느긋한 사람을 강제로 쳇바퀴 돌아가듯 바쁜 일터에 배치한 이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성격이 조급해졌다면 외부강제력이 성격(기후)을 변화시킨 경우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성격이 매일매일 얼마나 변하고 있는지 잘 감지하지 못하듯이, 매일의 날씨에 비해서 기후도 느리게 변화하기 때문에 피부로 실감하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누군가 작년 이맘때의 날씨와 올해 이맘때의 날씨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다른지 설명하라고 한다면 기억을 더듬어 봐야 합니다. 기후는 삶의 시간적인 규모에 비해서 긴 호흡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기후변화를 시급한 문제로 체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측 자료들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를 들면 한강 결빙 일수의 변화가 그렇습니다. 아래 그래프와 같이 한강 결빙 일수는 관측 이래로 꾸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체감하는 겨울은 여전히 춥지만, 한강을 얼리는 강도의 추위는 많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관측 자료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


많은 과학자들은 공룡이 멸종했던 이유 중 하나로 갑작스런 기후변화를 꼽습니다. 공룡을 비롯한 지구상의 생물들이 환경에 적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과거의 온도가 현재 지구 평균보다 더 높았던 시기도 여러 번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온실가스 증가로 인한 기후변화가 자연적인 기후변동에 비해 빠른 속도로 일어나서 지구상의 생물들이 적응할 시간이 없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자연적인 변동이 아니라 인류 활동으로 인한 인위적인 강제력으로 생태계가 위험에 빠졌다는 점입니다. 

아래 이미지는 ‘지구 위험 한계선’ 평가 그래프입니다. 여러 가지 평가 항목 중 생물 종다양성과 관련된 부분은 고위험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옛말에 ‘성격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평소 안 하던 행동을 갑자기 할 때 주로 쓰는 말입니다. 기후가 갑자기 변하면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말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 챙기기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기 바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다가 중요한 일들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기후변화 문제 역시 우리에겐 그리 급한 문제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가끔 뉴스에서 굶주린 북극곰이 가냘파 보일 때나 산불로 코알라 서식지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고, 큰 문제네’ 하고 잠시 생각하지만 돌아서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대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 고의적으로 망각하거나 회피하곤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 문제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당장 회개하지 않더라도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일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면은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매일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부끄러운 죄의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듯, 기후변화는 더는 숨겨서는 안 되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문제를 적극 파악하고 진실을 직면하며 행동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확산될 수 있는 질병들


앞으로 지구온난화로 인한 여러 문제를 다루겠지만,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전염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에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질병을 소개하면서 이번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말라리아, 뎅기열, 뇌염 등은 주로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질병인데, 지구온난화로 인해 열대 모기의 서식지가 북진함으로써 그 위험성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릅니다. 말라리아의 유행을 막기 위해서는 기온이 16도 이하로 떨어져야 하는데, 지구의 온도가 계속 상승한다면 세계 인구의 65%가 감염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고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이 보고한 적 있습니다. 또한 선(腺)페스트(흑사병)는 쥐에 붙어 있던 벼룩에 물려 감염되는데, 최근 연구에서는 지구온난화가 벼룩의 활동과 흑사병의 발생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콜레라 또한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온도의 상승, 엘니뇨 현상 등의 영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번 코로나19를 보면서도 알 수 있듯이, 빠르게 전파되는 전염병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력을 가지는데 지구온난화로 인해 더 빠르고 넓은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다고 하니 책임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발생시킨 이산화탄소로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 누군가 전염병과 씨름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는 구체적인 자료들과 함께, 현재 지구에서 관측되는 기후변화에 관해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코로나 이후

 

임범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오늘 오전 4시간 동안 근무하는 병원의 코로나 선별진료소 당직을 섰습니다. 의사가 진료하는 것이 무슨 특이한 일이냐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병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임상진료 커리어는 1999년 인턴 수료 이후 중지되었습니다. 코로나19 감염 사태로 인해 20년 만에 진료실에 불려 나온 것입니다. 군의관 시절 사격훈련을 받으면서 군의관이 총을 쏴야 하는 상황이면 그 전쟁이 승산이 있는 전쟁이냐라는 농담을 했는데, 병리학자가 환자 진료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면 우리나라 의료체계에 어지간히 큰 위기가 닥친 것인데 그래도 결말은 해피엔딩에 가까운 듯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굳이 pandemic이라는 무시무시한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이번 코로나19 감염사태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모든 사람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점에서 정말로 100년에 한 번 있을 사건입니다. 거주지 주변에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는 뉴욕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한국에서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형태의 삶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나쁜 예감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 삶에 밀접한 관계를 갖는 두 가지 사회집단도 커다란 변화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료계와 교회입니다.

 

의료계는 질병관리본부를 중심으로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찬사는 의료계가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조금 복잡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언론에도 노출되었지만 의사들(그중에서도 개원의사 중심)의 이권단체인 의사협회는 정부와 질병관리본부의 방역 방침에 격렬하게 반대하였고 그 과정에서 감염 관련 학술단체들과도 갈등을 빚었습니다. 학술단체와 충돌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의사협회의 태도는 의학적/과학적 근거보다는 정치적 손익계산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의사협회가 평소 보건당국과 충돌하던 지점이 원격의료였습니다. 그간 현 의사협회의 집행부는 원격의료가 시행되면 환자들이 원격의료를 행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진 병원으로 직행하기에 동네병원이 무너진다는 이유로 원격의료에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의사협회는 원격의료를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막아왔던 원격의료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봇물 터지듯 시행되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시대에는 동네병원 의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원격의료를 더 활성화해야 할 상황이 되었기에 지금까지의 결사항전의 자세가 엉거주춤 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골적으로 특정 정당을 밀어줬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비례대표 공천에서는 버림 받은 의사협회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흥미롭기도 합니다.

 

 

저의 더 큰 관심은 교회입니다. 교회 역시 큰 변화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교계 언론에는 “공예배를 폐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글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런 류는 주로 보수신학으로 분류되는 신학대학 교수들과 대형교회 목사들이 쓴 글입니다. 한국에서 감염이 어느 정도 억제되어 진정되는 것과 반비례해서 올라오는 글들은 더욱 공격적이고 선동적이 되어 갑니다(저는 이것도 매우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올라온 글은 대구 이외의 지역에서 공예배를 폐쇄하는 것은 예배거부죄라고 주장하고 있네요. 한국교회, 그중에서도 특히 보수신학을 따르는 분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이미 진리를 깨달았고, 가장 순전한 진리를 우리 교단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리에 반대하면 순전한 기독교가 아니다.”

 

개신교 내에 다양한 교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성경해석에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반영하고 이것이 부정적인 일만은 아닙니다. 또 자신이 지지하기로 택한 교단의 교리가 더 우월하다는 신념을 갖는 것도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신앙이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가치판단을 어찌 안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히려 이런 고민이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 교회를 너무 가벼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대화와 토론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배제하는 태도이고, 성경해석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한, 답이 이미 정해진 영역이라고 확장하는 태도입니다. 의학과 과학에 근거해 판단해야 할 예배당 방역 조차도 교리의 범주에 넣고 타협 불가를 외치며 예배 거부 죄를 운운하는 사람들 말입니다(창조과학과 관련해서도 많이 보던 모습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개신교가 많은 질문과 도전을 받게 될 것 같습니다. 그간 한국교회에 유행하던 “예배에 목숨을 걸자”라는 구호가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고, 예배당 출석이 예배의 필수 요건인가?라는 질문이 줄기차게 제기될 것입니다. 예배라는 행위, 설교와 성찬이라는 행위의 가치와 형태에 대한 질문이 나올 것이며 교회의 정체성이 어디서 유래하는가까지 재정립해야 하는 단계가 올 것입니다.

 

아울러 한국 교회에서 사실상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던 ‘성직자’의 권위도 크게 하락할 것입니다. 의료계가 원격진료로 인해 동네의원 경영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온라인 예배, 온라인 설교로 인해 작은 교회들은 더욱 어려운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아예 온라인 목회를 선언하는 목사들이 등장했을 때 기존 교계가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도 궁금합니다.

 

교회내 권위 구조가 흔들린 이번 코로나 19 감염사태가 그간 소외되었던 ‘평신도’들이 자유롭게 고민을 드러내고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매우 보수적인 교단에 속해있는 관계로 자기 교단 조직신학자가 과학에 대해 가진 견해를 단순 참고하는 수준을 넘어 의사결정의 근거로 삼아버리는 청년들을 드물지 않게 보아온 저로서는 이번 사태가 의미 있는 지각변동을 일으켜 주기를 기대합니다. 이 지각변동은 그간 과신대가 해온 노력이 더 수월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리라는 것 역시 기대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