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나는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 다.

 

우리의 존재방식ㅡ"걷기의 무렵"



걷는다는 것,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늘 걸었는데 문득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으면서 한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내 몸의 움직임과 발걸음이 경이롭게 여겨진다.

등과 허리를 펴고 머리를 곧게 세우고 다리를 뻗어 똑바로 걷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됐을까? 우아하고 세련되고 아름답기까지 한 그대의 걷는 동작을 보라.

도구를 이용하기 때문에 인간이듯이 두 발로 걷기때문에 인간이라 할 수 있다. 페북을 열심히 하고 있고 산책로를 걷고 있는 그대와 나는 인간임을 확인 중인 셈이다. 혹시 그대의 발이 곰 발바닥 같이 못생겼다고 불만이 있었다면 다시 한번 꼼꼼하게 들여다보길 바란다.

엄지발가락이 다른 발가락보다 더 크고 나머지 네 발가락과 나란하게 평행을 이루면서 앞을 향해 있는 그대의 발은 못생겼든  크든 작든 상관없이 걷기에 적합한 모양과 기능을 갖추고 있으니 불평할 일이 아니다. 딱 그 발이어야 우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걷다 보면 마음의 속도가 걸음의 속도를 따라간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노라면 서로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가 된다. 팔이 스치고  가끔씩 손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마음의 경계선은  뭉개진다. 

바람이 불어와  가까이에 있는 그대의 향기가 전해오면 막 세수하고 나왔을 때의 비누냄새처럼 싱그럽다. 한참을 걷다 보면 두 발이 걷고 있는지 생각이 걷고 있는지 이야기들이 걷고 있는지 분간이 안 되기 시작한다. 

몸은 그대와 내가 유쾌하게 웃는 소리에 잘잘하게 몸서리치며 진동하는 공기들만큼 계속 가벼워져 간다. 걸으면서 가끔씩 바라보는 그대의 옆모습이 붉어져 있는 것은 저녁노을에 물들었기 때문이겠지. 내가 반짝 빛나 보이는 건 한강을 가로지른 다리에  장식된 골드빛 조명이 내 눈에 가득 들어와 있어서였겠지. 

우린 그렇게 걸으면서 문득문득 서로가 멋쪄보일 때와 만나기도 한다. 그대 걸음이 나보다 몇 걸음 더 앞서 가고 있을 때 성큼성큼 따라가는 것은 그대의 말소리를 듣고 싶은 이유이며 그대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고 싶은 이유이다.

보폭을 맞춰 바짝 다가서는 것은 그대의 영혼과 닮아진 얼굴을 하고 싶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대가 조금만 천천히 걸어준다면 나는 앙증맞게 움이 트는 잎사귀를 감상하고 보라색 제비꽃의 향기를 맡고 그리고 가지를 흔들어 그대에게  매화비가 내리게 할 수도 있으리라. 

 

 

그대와 내가 혼자서 걷는 시간은 우리의 존재와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 인류는 존재증명의 한 방법으로 걷기를 했다. 걷는 행위는 고인류학자들이 인간의 특징으로 손꼽는 것 중의 하나이다. 호모 에렉투스인 그대와 나는 진정한 호모사피엔스다. 

존재증명을 너머 걷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인류는 손이 자유로워져 "함께"에 적합한 인간이 되었다.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함께 살게 되었으니 혼자 걷는 그대의 손이 허전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걷는 것은 내가 속한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세계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거리를 두어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시간이다. 대나무처럼 비워내고 또 비워내서 곧게 서는 시간이고 적당한 거리에 홀로 있으면서 도토리처럼 채워지는 시간이다.

혼자 있는 것이 외롭지 않은 것은 가끔씩 마주 지나가는 사람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다. 혼자서 걷는 그대와 나는 조금만 가볍게 '소외"에 우리를 내어주기로 하자. 그러면  한결 사분사분  사유의 세상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대와 나는 걷다보면 무한한 가능성처럼 끝도 없이 펼쳐지고 열린 길을 만난다. 그 길은 우리 앞에 결코 한계란 없는 무한한 가능성들로 가득한 세상이고  그 가능성의 세상을 목도한 우리에게 두려움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2000년 동안이나 견고한 뿌리로 굳건하게 서 있는 바오밥나무의 여여如如함을 알고 있는 그대와 나는 가슴을 더욱 활짝 펴고 담대한 걸음이 된다.

봄의 무렵은 걷기의 무렵이다. 해 질 녘, 개와 늑대의 시간은 그대와 사뿐걸음으로 수다하고 싶어 진다. 노을의 때에 혼자서 걸어야 한다면 나는 하이데거가 되고 루소가 되고 칸트가 되어 보고 싶다.  그대와 나는 걷는 존재 호모 에렉투스다.

 



먼 길

 

이재무

이 세상 가장 먼 길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몸속 유숙하던 그 많은,
허황된 것들로
때로 황홀했고 때로 괴로웠다
어느날 문득 내게로 돌아가는 날
길의 초입에서 서서 나는 또,
태어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분홍빛 설렘과 푸른 두려움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 괜시리
주먹 폈다 쥐었다 하고 있을 것이다

 

백우인 기자 (bwoo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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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amans: 180만 년 전부터 준비된 사랑의 능력자

 

Homo amans ㅡ  180만 년 전부터 준비된 사랑의 능력자 



터키 북동쪽,  조지아 드마니시에서 180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가 다 빠진 채로 살다 죽은 흔적이 보이고 머리뼈의 봉합 상태로 추정했을 때 노인이라고 한다.  빙하기였고 먹을 것이 부족했을 환경에서 노인이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보통의 젊은이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데 노인이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의 흔적을 보는 것이다. 180만 년 전부터 우리 인류는 나 아닌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남을 위해 손해를 보거나 목숨을 거는사람들 이야기,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이야기를 간혹 접한다. 내가 아닌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이기심의 발로일까? 자발적인 이타심에 의한 것일까?  어떻게 가능하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개미와 벌과 같은 동물 사회에서 찾았는데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미는 하나의 여왕개미가 공동체의 생식을 책임진다. 개미와 벌은 모두 암컷인  여왕개미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유전자가 똑같은 클론 clone이기 때문에  개체들  사이에 구분이 없다. 수많은  '나' 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것이다. 

그 공동체들의 삶은  오로지  여왕 개미가 낳은 아기를 양육하기 위해 살신성인한다. 개체 하나가 죽어도 그 유전자는 계속 내동료들 안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유전자의 입장에서 나의 희생은 억울하지 않다.  

개체를 무시하고 오로지 유전자만 고려한다면 개미의  살신성인과 같은 협동 생활은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이다. 사회 생물학자인 윌슨이 말하려는 것은 이타심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윌리엄 해밀턴은 이타적인 행위가 사실은 자신에게 유익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해밀턴 법칙으로 설명해 냈다.


rB > C 
(B;수혜자가 받는이익/r; 수여자와  수혜자 간의 촌수/   이것을  곱한 값이,  C;수여자가 치르는 대가) 


수여자보다  수혜자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촌수의  곱이 더 클 때 이타적인  행위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식이다.

이 공식을 보면 확률적으로 형제는 나와 유전자가 50% 일치하고 사촌은 12.5% 일치한다. 그러므로  같은 값의 대가와 이익이 기대된다면 두 명의 형제와 여덟 명의 사촌이 맞먹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내가 죽는 대신 형제 두명 혹은 사촌 여덟 명을 살릴 수 있다면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같은 양의 유전자가 살아남으니까 결코 손해 보는  죽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공식을 보면서 도킨스와 같은 사람들은, 개인은 유전자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유전자 제일주의다.  성인 남자가 가족의 일원이 되고 가정을 보살피고 보호하고 돕는 것 등의 행동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의 복지, 즉  남자 자신의 유전자를 위해서일 뿐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면 모르는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 행위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유전자 제일주의만 말하는 그들은  단지  기나긴 세월동안 친족 사회에서 살아온 인류가 습관적으로 해 오던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협동이 그렇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인간 개인이 마치 개미처럼 클론도 아니고 혈연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인류가  다  유전자로만  맺어져 있는 관계인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관계들을 보면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가족처럼 여기고 남과 맺은 관계 속에서 누나, 형님, 동생,  이모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가족은 혈연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가지 각색의 사회관계,  즉 모두 가족의 틀 안에서 오랫동안 형성하고 만들어 온 사회관계이며  핏줄로 연결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거대하다. 

그러면  인류는  어떻게 해서 서로 돕게 됐을까? 남에게 이타성을 드러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류가  작고 약하다는 점을 이유로 꼽는다. 

그들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빙하기를 겪는 동안 빙하기가 똑같은 기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기도 하고 건조하기도 하고 비가 계속 쏟아지기도 했다. 따라서 변덕스러운 기후에 맞춰 동식물들과 환경도 변하고 지형들도  변했다. 

변덕스럽게 달라지는 환경에 적응하기위해 인류는 강해지는 대신 정보력에 의존해 살아남는  유연한 전략을 택했다. 예컨대 인류는  환경을 잘 살피며 과거의 경험에서 정보와 지혜를 얻어 그것에  의존해 살아남는 전략을 발전시켰고 진화시켰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노인들은 이런 정보력의 원천이었고 그들을 존중하고 도왔을 것이고 그러다가 좀 더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협력과 이타심을 갖게 되는 놀라운 능력이 생겼다. 남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모르는 남과 나누고 남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과 연대하며 그들과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되었다.  

이타적인 삶을 살 수있는 사랑 유전자가 창발된 것일까?  어쨌든 인류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과 섬김과 사랑을 베풀 능력이 180만 년 전부터 생겼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대와 나는 자연과 환경도 그곳에 함께 살고 있는 나무도 새도 풀 한 포기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대와 나는 180만 년 전부터 이런 사랑을 하는  능력자, 곧 호모 아망스 Homo amans이다.

 

글_ 백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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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가운데 일치

  • 강선생님, 수고 많으시겠습니다~! 홧팅~!!!

    휘페르테스 2020.02.12 08:18

 

안녕하세요. 과신대뷰 회원 여러분. 

2020년에 과신대 운영위원장으로 섬기게 된 강사은입니다. 2017년 가을에 우종학 교수님의 강의와 과도기(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북콘서트를 매개로 과신대와의 만남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전히 새내기 같은 제게 주어진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었습니다. 지면을 통해 과신대뷰 회원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양성 가운데 일치”

 

이 말을 최근 몇 년 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다양성을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렌즈를 통해 보는 즐거움은 처음부터 내 안의 생명을 흥분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른바 세상 문화, 세상 학문과 불일치하는 영역이라야 성스러움이 드러난다는 식의 표현에 익숙했던 과거를 뒤로 하게 할 만한 경험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진화의 시간을 지나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나 자신을 겸손하게 돌아보게 하는 계기였습니다. 마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경험이랄까요.  

성서도 여러 면에서 다양성을 띠고 있지요. 성서(Bible)라는 말의 어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뜻이 ‘책들’인 것에서부터 그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복음서가 하나가 아니라 넷이나 되는 것도 역시 다양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신대에 속한 사람들도 지역, 직업, 교단, 신앙 경험, 젠더, 은사, 처한 상황, 관심사, 보수와 진보 등의 차이를 갖고 있음을 봅니다.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아름다운 무지개 빛으로 드러나듯이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과해 드러나는 아름다운 결과들을 보고 있고 계속 보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에 대한 말씀처럼 우리는 서로 다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앙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서로의 은사가 다르고 역할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지만 이 시대에 주어진 사명에 정직하고 충실하게 따르고자 하는 열심으로 만나게 된 것이겠지요.

지난 몇 년간 과신대는 정회원, 자문 위원, 강사 등 여러 방법으로 후원해 주신 분들의 도움으로 사무국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연중에 다수의 콜로퀴움과 포럼, 기초과정과 핵심과정을 기획하고 진행해 내며 한국 기독교 내에서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 지역의 자발적인 북클럽 모임 역시 과신대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수도권에 집중된 과신대의 위상을 언젠가 전국에 선보일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운영위원회에 속한 실행위원들께도 이곳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자원해 봉사해 주시는 그 손길의 아름다움을 우리 주님이 축복해 주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과신대뷰를 통해서 공감하고 기도해 주시는 여러 회원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주변의 많은 분들께 과신대를 알리시거나 이 사역을 아는 한 사람의 역할을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2020년 한 해. 과신대와 함께 “다양성 가운데의 일치”를 경험하게 되기를 소망하며 이만 글을 맺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사은 (2020년 과신대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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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나는 표면장력surface tension이다.

  • 두통때문에 고생하셨군요~ 두통이 사라지기까지 몸을 동그랐게 말고 힘든 밤을 지내셨네요 ㅜㅜ 어려울 때일수록 표면장력처럼 우리 모두가 가깝게 뭉쳐서 살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온도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겨내면 참 좋겠습니다.

    휘페르테스 2020.02.05 11:06
  • 움츠림 하나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글이 나올 수 있군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김완식 2020.02.05 11:39

 

거리에 공기가 냉랭하고 쌀쌀맞다. 목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손도 동그랗게 꼭 쥐고 호호거리면서 걷게 된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부서뜨릴 것 같고 내 몸의 사방을 날카로운 가시들로 찌르는 것 같다. 추위가 내게 통증을 유발한다. 무참히 냉기가 엄습해 올 때,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할 수만 있다면 동그랗게 말아서 데굴데굴 굴러가고 싶어진다.

 

사랑의 기원에서 플라톤은 우리의 몸은 앞뒤로 똑같은 형상이 등끼리 맞붙어 있었다고 한다. 팔 네 개, 다리 네 개로 걷다가 빨리 가야 하면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굴러다녔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겨울엔 모두 이렇게 굴러다니면 좋겠다 싶다. 추울 때 몸을 움츠리는 것은 표면적을 줄여서 열을 최대한 덜 빼앗기려는 시도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리지만 거기엔 우리 몸이 생명에 집중하게 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추위라는 통증으로부터 우리 생명을 지키기 위해 우린 저절로 몸을 동그랗게 만든다. 생명의 구심점인 심장을 향해 우리 몸의 기관들이 일제히 모여드는 것이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것은 태양의 중심 온도보다도 더 뜨거운 생명의 시작이자 생명의 의지인 심장에 가까워져 소진된 생명을 주입받으려는 몸짓이다.

 

내게 두통이 주는 통증은 그 어느때 보다 더 강렬하게 아니 맹렬하게 나를 심장으로 파고들게 한다. 경험한 통증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두통이다. 응급실에서 고통을 호소할 때 1부터 5까지 등급을 나눠서는 얼마만큼 아픈지 숫자로 말하라고 했었다.

 

몸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고통에 아우성치는 그 처절한 아비귀환의 순간을 5로 표현하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그당시 병원에서의 나는 생명체가 아니라 기계였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얼굴을 가슴쪽에 파묻고 팔로 무릎을 감싸 동그랗게 움츠리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은 늘어진 엿가닥처럼 아주아주 천천히 흐르고 그렇게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백야를 맞고 수척한 새벽을 맞이할 때 쯤, 밤새 생명을 살게 하려는 몸부림이 승리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의 몸은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을 희망하기에 밤새 끌어안은 건 생명의 의지였다.

 

우리의 기억은 몸과 마음이 힘들 때, 놀랍고 신비하게도 가장 행복하고 좋았던 때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회복하고 돌아오게 한다. 그대와 나는 엄마의 양수에서 탯줄로 연결되어 280일을 사는동안 우리의 몸을 동그랗게 말고 지냈었다. 그 공간과 그 시간이 우리 삶에서 가장 안전하며 온전히 의존적이며 오직 생명의 의지 자체였던 때였다는걸 기억하는 걸까?

 

몸을 동그랗게 마는것은, 엄마와 연결되어 사랑 안에서 동그랗게 유영하던 그때로 우린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닐까? 따뜻하고 충만하고 넓고 아늑한 우주, 함께 호흡하며 엄마의 심장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지내던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샬롬의 시공간. 그대와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건 아닐까?

 

 

몸을 동그랗게 마는 것은 표면장력을 극대화 시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몸짓이다. 추위에 몸을 움츠리는 것, 두통으로 몸을 동그랗게 마는 것, 외로울 때 어깨를 감싸며 점점점 영혼 안으로 수축하는 것, 두려움으로 그대 품 속으로 파고드는 것,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대와 나의 생명을 향한 표면장력이다. 표면장력은 우리의 생명의 의지만큼 크다.

 

백우인 팀장 (bwoo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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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운동에 동참해주세요.

 

지난 1월 21일에는 과신대 운영위가 모여서 2019년 한 해 사역을 돌아보고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올해 새롭게 시작할 일들로 벅찬 느낌도 들고 재정부담으로 염려도 됩니다.

 

과신대가 대학이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다는 건 벌써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과학이라는 말이 들어가니 딱딱하고 어렵고 뭔가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는 느낌을 준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중요한 것 같긴 한데 선교만큼 중요할까, 모든 교인이 관심이 가져야 할 일일까,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많답니다.

 

아닙니다. 과신대 운동은 한국사회라는 지형에 사는 교인들이 함께 관심을 갖고 동참해야 합니다. 왜일까요?

 

1. 과신대 운동은 창조신앙을 바로 세우는 운동입니다. 창조신앙은 구속신앙과 더불어 함께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신앙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고백과 신앙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창조주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으면 예수는 그저 우리 주변의 훌륭한 한 성인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2. 창조신앙을 바르게 세운다는 것은 창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창조세계로부터 도전과 감동과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시편 19편 기자의 고백처럼 창조세계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과는 또 다른 시각에서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 신앙이 풍성해집니다. 창조를 놓치면 우리 신앙은 반쪽짜리가 되기 쉽습니다.

 

3. 과신대 운동은 교회교육과 매우 밀접하게 이어집니다. 특히 주일학교 교육이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우주와 지구, 그리고 생명의 역사를 배우고 온 아이들이 교회에 가서 과학은 거짓이라고 배운다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 많은 아이들이 지금 현재 과학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과신대 운동은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창조신앙을 바르게 세우도록 교육하는 운동입니다.

 

4. 21세기 선교의 최전선이 과학과 종교가 부딪히는 현장입니다. 제3세계나 미전도 종족들에게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후기 기독교 사회 색깔이 짙어지는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과학이 고도로 발전되고 정보가 빠르고 쉽게 유통되는 21세기에, 선교의 또 다른 최전선은 바로 과학과 기독교가 부딪히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장입니다.

 

과학이 무신론의 증거라고 오해하는 시대에 어떻게 과학과 무신론을 구별하고 과학과 신앙이 함께 갈 수 있을지 답해야 합니다. 도대체 어느 교회 혹은 어느 단체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사람을 키우며 사역하고 있습니까?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과신대 운동에 함께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5. 과신대 운동은 지성운동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자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반지성과 맹목적 신앙 태도를 건강하게 바꾸어야 합니다. 과학과 신앙을 함께 고민하는 일은 성경을 보는 시각을 넓고 건강하게 세워주고 질문하는 신앙으로 든든히 세워주는 밑거름이 됩니다. 교회개혁을 위해 신학교육, 인문교육, 사회적 이슈 다루기, 출판 등으로 다양하게 사역하는 단체들과 맥을 같이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과신대는 신앙과 과학을 주제로 하지만 다른 단체와 연대하게 됩니다.

 

6. 2020년 새해입니다. 과신대 운동에 동참해 주시기를 권고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 자발적으로 사역을 맡아 주시면 됩니다. 기자도 할 수 있고 모임에 자봉도 할 수 있습니다. 운영위에 함께 들어오실 수도 있고, 글을 써주실 수도 있고 책을 리뷰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만들어하셔도 됩니다.

 

7. 정기후원 동참해 주십시요. 한 달에 만원 이상입니다. 조금 더 힘을 써서 몇만 원 하셔도 되고 정말 이 사역에 큰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이 드시면 십만 원 이상 하셔도 좋습니다. 가치에 동의한다면 주머니를 열어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대학생들은 한 달에 오천 원입니다. 까페라떼 한 잔 줄이면 됩니다.

 

8. 올해 사무국 간사 (모두 파트타임) 3명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반기부터는 꼭 한분이라도 풀타임으로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과신대 재정 쉽지 않습니다 인건비와 고정비용 나가면 과신대 콜로퀴움 등 행사 적자도 메꾸기 어려울 수 있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9. 후원방법이 까다로워서 못하셨던 분들은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메시지로 이름과 전화번호 남겨주시면 사무국에서 전화해서 자동이체 등 친절히 자세히 안내해 드릴수 있습니다.

 

  • 이메일: scitheo.office@gmail.com

  • 과신대 사무국: 070-4320-2123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페북 메시지로 주셔도 됩니다.

  • 다들 교회와 단체들에 십일조 이상으로 헌금을 하니 사실 종교단체 기부금은 매년 세액공제 금액이 남지요. 혹시 기부금 영수증 필요 없는 분들은 직접 과신대 계좌로 후원하셔도 됩니다.

  • 신한은행 100-032-022282 과학과신학의대화

 

저에게 메시지 주셔도 좋습니다. 제 강의나 책으로 도움을 받으신 분들, 주일학교 교육 제대로 준비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과학이 선교의 최전선이라고 동의하는 분들, 무신론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이 필요하다고 보는 분들, 우주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가 가려져 있어 안타까운 분들, 그리고 제가 열심히 뛰는 게 안쓰러운 분들 모두 모두 과신대 운동에 동참해 주시기를 권합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표 우종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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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칼럼] 태동기가 마무리되는 해가 되길

태동기가 마무리되는 해가 되길

 

 

2020년 새해가 불쑥 다가왔습니다. 2017년 초에 단체 등록을 마치고 태어난 과신대도 이제 4년 차를 맞습니다. 한 해를 보내며 과신대 사역을 돌아보니 물심양면으로 이 사역에 함께한 과신대 정회원들과 후원자들이 생각납니다. 자문위원으로 섬겨주신 분들, 실행위원회에서 직접 몸으로 뛰어 주신 분들, 그리고 사무국 간사님들의 수고도 떠오릅니다.

 

2017년 여름, 과신대 사역을 위한 정기 후원 공지를 처음 올리면서, 우선 3년 동안 후원해 주시고 과신대가 잘 세워질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모양새를 갖춰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2년 반 동안 사무국도 생기고 다양한 사역들도 시도해 오면서 과신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함께 뛰고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2020년은 과신대의 태동기를 마무리 짓는 해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과신대 사무국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교육 프로그램들이 실속 있게 운영되고 연구모임도 활성화되고 북클럽들을 통해 네크워크와 지역거점이 생기고 온라인 사역들이 활발하게 시작되는 해가 되리라 기대하며 무엇보다 정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먼저 실행위원회와 사무국에 변화가 있습니다. 과신대 사역은 교사팀, 출판팀, 북클럽팀, 과신대 기자단, 연구모임 등등 여러 팀으로 구성되어 모임들을 갖습니다. 직장이 있지만 자원해서 사역을 맡으신 분들의 섬김으로 교육과 연구 사역들을 해오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 팀들을 총괄하고 사무국을 지휘하고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실행위원장입니다. 장현일 선생님께서 지난 2년 반 동안 실행위원장을 맡아 수고해 주셨습니다. 사무국을 처음 만들어 맨땅에 집을 짓듯 하나하나 구조를 만들어가야 했는데 정말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새해에는 북클럽 모임을 열심히 섬겨주시고 인터넷 사역을 맡아주셨던 강사은 선생님께서 새롭게 실행위원장으로 섬겨주십니다. 강 위원장께서는 가족 사랑도 지극하신 분인데, 과신대 사역에 깊이 동감하고 함께 사역하는 동지십니다.

 

사무국에는 2년 반 동안 행정과 회계, 그리고 영상 업무까지 담당하던 이진호 간사가 사직하고 자신의 대학원 연구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현재까지 최장의 경력을 가진 간사라 많은 분들이 아쉬워합니다. 그러나 정회원으로 앞으로도 함께 과신대 사역을 해나갈 것입니다. 후임으로는 장민혁 간사를 뽑았습니다. 조기졸업을 앞두고 있는 학생 신분이지만 나이에 비해 성숙한 모습으로 책임감 있게 행정간사 업무를 잘 감당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1월부터 월요일과 목요일에 출근하여 사무국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도록 힘을 쏟을 것입니다. 한 분 더 소개합니다. 영상 간사로 함께 일하게 된 이슬기 간사입니다. 아직은 근무시간이 짧고 주로 재택근무로 영상 업무를 담당하실 예정이지만 앞으로 영상 사역을 중점적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라 큰 기대가 됩니다. 정회원들과 직접 만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격려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무국은 최경환 실장을 중심으로 행정, 사무, 회계, 회원 관리 등의 기본 업무를 수행하고 콜로퀴움 등 행사를 실행하는 역할을 합니다. 종로 쪽에 가실 일이 있는 분들은 낙원상가에 있는 과신대 사무실에 방문해서 간사들을 격려해 주셔도 좋겠다 싶습니다. 점심을 사주시면 더 좋아할 것입니다.

 

한 달에 한번 발간되는 과신대뷰의 구독자도 많이 늘었답니다. 과신대 홈페이지에 쌓이는 글과 자료들이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고 하루 방문자가 꽤나 증가했다는 소식입니다. 과학과 신앙에 관한 자료를 찾을 때 과신대 홈페이지가 아카이브 기능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조금씩 이루어지는 듯 해 뿌듯합니다. 앞으로는 동영상 자료들을 제작하여 유튜브를 많이 보는 청소년들과 노년층의 자료 접근성을 높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새해의 변화 중 하나는 바로 기초과정 2입니다. 지난 2년 반 동안 5기까지 진행된 과신대 기초과정2는 6번의 세미나로 이루어진 만만치 않은 교육 과정입니다. 과신대 정예 멤버를 기르는 과정이라고나 할까요. 보통 20명이 수강해서 10명이 수료합니다. 수료율이 낮은 이유는 여러 책을 읽고 서평을 내야 하는 등 보고서가 만만치 않고 대학원식 세미나로 진행되는 6주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세미나보다는 강의 위주로 과학과 신앙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주셨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어가며 세미나를 따라가기 어려운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을 위해 보다 접근성이 높은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8-10번의 강의로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기초과정 1에서 4시간 강의를 들었다면 기초과정2에서는 각 분야 전공자인 교수들께 심도 있는 강의를 듣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서학, 신학, 과학, 과학철학, 과학신학, 윤리와 환경 등의 분야를 포괄하는 짜임새 있는 커리큘럼을 준비 중이고 3월에 개강할 예정입니다. 서울뿐만 아니라 거점 지역에 모여서 함께 온라인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방법도 모색 중입니다. 많은 조언과 관심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신학교나 단체에서도 제공할 수 없는 최상의 커리큘럼으로 제공되는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2020년 콜로퀴움은 벌써 기획이 끝났습니다. 과학과 신학, 철학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을 모시고 깊이 배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제의 과신톡과 북콘서트도 진행될 예정이며 온라인 북클럽 모임도 기획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2020년에 참 할 일이 많습니다.

 

 

새해가 시작하는 시점에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과신대 사역은 여러분의 참여와 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관심 분야에 적극 참여해 주시고 시간이 되시면 자원봉사로 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사무국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려면 풀타임 간사가 꼭 필요합니다. 지난 3년 가까이 과신대를 후원해 주신 분들께 큰 감사를 드리면서 앞으로도 더 큰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올해부터는 월별 수입지 출상 황도 정회원들께 투명하게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지금보다 30-40% 재정 후원이 늘어야 사무국이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주변에도 많이 알려주시고 후원을 독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2020년은 과신대 태동기를 마무리하는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무국도 자리 잡고 교육과 연구 프로그램도 형태를 갖추고 재정 후원도 안정되어 과신대 사역이 흔들림 없이 굴러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2021년부터 5년간은 과신대의 성장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후원자도 두세 배, 아니 다섯 배 이상 늘어나고 한국교회를 섬기는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단체로 성장하는 기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2026년부터 5년간은 과신대의 사역들이 많은 열매를 맺는 수확기가 되어 2030년쯤 되면 과신대 사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에서 과학과 신앙 문제가 사라지면 참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과신대도 기쁜 마음으로 해체할 수 있겠지요. 물론 한국교회 상황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고 과신대는 조금 더 오래 사역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정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왜 과신대를 후원하십니까? 왜 과신대 사역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들 분명 그 답을 갖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아직 관심을 다른데 돌리기는 이릅니다. 팍팍한 우리 일상이지만 조금 더 힘을 내서 봉사하고 후원하고 과신대가 2020년에도 필요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올 한 해 여러분의 삶과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20년 1월 1일

과신대 대표 우종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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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철학과 인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글_ 김남호 (울산대학교 철학과)

 

 

과학과 철학은 더 만나야 한다. 카오스 재단이나 EBS 프로그램 '통찰'의 멋진 과학 강연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철학자들은 과학을 잘 모르고, 과학자들은 철학을 잘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논문을 쓰는 철학자들의 경우 필요하면 과학적 지식을 잘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세계 철학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철학자들은 과학자였다. 이는 과학도 하고 철학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최고 정점에서 과학이 답할 수 있는 문제 영역의 한계를 나름대로 인식했고, 그 한계 인식에서 철학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흄, 라이프니츠, 파스칼, 칸트, 현대의 심리철학 전문가 등이 그런 예이다.

 

데카르트가 실체로서의 영혼을 증명하려 한 철학자로 오늘날 웃음거리가 되고 있지만, 데카르트는 그 당시 최첨단 과학인 생리학의 최전방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알 수 있었고 영혼 개념을 도입해서 보다 합리적인 인간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영혼 개념은 형이상학 내에서 그 설득력을 잃었지만, 그의 시도는 철학과 과학의 건전한 관계 맺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과학자들의 강연을 보면 우선 많은 경우 인문학과 철학을 구분하지 못한다. 소위 인문학 강연을 하는 사람들조차 이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하므로 과학자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철학philosophy과 인문학humanitas은 그 뿌리가 애초부터 다르다. 철학은 플라톤을, 인문학은 이소크라테스를 뿌리로 둔다. 전자는 주장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로고스를 특징으로, 후자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교양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철학과 인문학은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철학은 행정상의 이유로 인문학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두 분야는 여전히 다르며, 엄연히 다른 두 분야가 혼동되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철학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고전 작품이나 영화 등을 감상하고 그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나누는 정도의 활동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지만 철학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오직 과학만이 진리를 탐구하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이는 명백히 오해이며, 이 오해는 과학과 철학의 이분화를 낳는 폐해의 근원이다.

 

철학은 그 출발부터 지금까지 객관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활동이다. 신화에서 왜 철학이 갈라져 나올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라! 비록 물리학, 화학, 사회학 등이 철학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여전히 철학은 이 개별 과학들이 일차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자유의지', '인격', '인과성' 같은 개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과학은 윤리적인 문제들을 일차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예로 들면, 이는 형이상학의 대표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곧 과학이 전혀 기여할 수 없는 문제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양자역학이나 신경과학은 철학자에게 실재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제공해주며, 이를 무시하고는 경쟁력 있는 형이상학 이론이 될 수 없다(베르그송의 앨랑 비탈 개념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비결정성에 대해 물리학자가 설명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비결정성이 곧 의지의 자유를 보장해주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유에 대한 개념 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행위 주체의 통제력이 자유로운 행위의 전제 조건이라고 한다면, '행위 주체', '통제력' 등이 규정되어야 한다. 왜? 과학은 '행위 주체'를 그 탐구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관찰되지 않는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따라서 '행위주체'라는 개념은 허구이다."라는 주장을 물리학자가 한다고 해도 이 주장의 진위 여부는 실험이나 기존의 물리 법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추론되는 명제가 아니다. 즉, 이 명제는 형이상학적인 명제(선험 명제)이지 과학적 명제가 아닌 것이다.

 

 

철학의 분과인 형이상학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추구한다. 어떻게 보면 과학에게 철학은 아버지인 셈이다. 로고스 혁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싫든 좋든 아버지를 닮을 수 밖에 없다. 철학과 과학, 이 둘은 같은 주제에 대해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문제는 각자가 맡을 수 있는 문제의 영역이 무엇인가,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영역 배분의 문제일 것이다. 과학자들은 가령, 벤야민 리벳 실험 같은 경우, 실험을 하지만, 그 실험의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개념들을 규정해야 하며, 개념들을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근거 역시 필요하다. 이런 작업은 철학자들이 맡고 있다. 리벳 실험의 결과가 곧 "우리에게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결론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 결론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 '자유의지가 있다' 등과 같은 개념 및 표현에 대한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신경과학자 가자니가가 "윤리적인 뇌"에서 '자유의지'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이 철학자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언급하는 부분을 눈여겨보라.

 

과학적 지식을 우리가 습득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혹은 다루지 않아도 되는 문제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 개념 규정, 객관적 기준의 문제(가령, 과학과 비과학의 기준, 동일성의 기준 등), 윤리적 문제, 추론의 타당성 검토 등이 그 영역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윤리학자이자 정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이 책은 단순한 인문학 도서가 아니다. 비록 입문서의 성격이 있지만, 도덕적 옳고 그름의 객관적 기준을 탐구하는 철학 도서이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문학과 철학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이 우리 현실이다.

 

철학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재 바로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과학이 맡을 수 없는 문제 영역을 철학이 감당하는 것이 옳고, 철학의 문제 영역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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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2. "이산화탄소" 도대체 누구냐, 넌?

  • 지구온난화가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고 저도 처음 접했을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게 벌써 20년도 더 된 기억인데 그 이후 우리가 얼마만큼 노력하고 인지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요즘 작은 실천이지만 플라스틱 줄이기 운동의 하니인 텀블러나 개인컵 사용은 많이 보급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며 계속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좋은글 응원합니다~

    김현호 2019.10.28 23:05
    • 댓글 감사합니다. 저희 과신대에서도 소소하지만 의미있는 실천을 하나씩 만들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산화탄소" 도대체 누구냐, 넌?

 

김진수 (에딘버러대학교 지구과학부 박사 후 연구원)

 

 

이산화탄소.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많이들 들어보셨겠지만, 막상 어떠한 원리로 어떻게 지구온난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번 순서에서는 이산화탄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0.04% 이산화탄소

 

이산화탄소(CO2)는 용어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탄소 원자(C) 하나에 산소 원자 2개 (O2)가 결합한 화학물질입니다. 전 지구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평균 농도는 약 400ppm인데, ppm(parts per million)은 전체 양 중 100만 분의 몇을 차지하는가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위입니다. 즉, 100만 분의 400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에게 익숙한 %로 표현하자면 0.04%입니다. 전체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0.04%. 매우 작은 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양을 무게로 환산해보면 약 850기가톤 (기가톤 = 10억 톤)이나 됩니다.

 

 

비닐하우스와 이불의 원리

 

0.04%의 이산화탄소가 도대체 공기 중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이산화탄소는 대표적인 온실가스 (greenhouse gas)라고 알려졌습니다. 온실 또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비닐하우스에서는 별다른 장치 없이 투명한 비닐 막 하나로 내부 온도를 효과적으로 올려서 각종 채소를 재배할 수 있습니다. 비닐은 태양 빛(가시광선)을 투과시켜 내부까지 잘 들어오게 해 주지만, 실온에서 모든 물건이 내는 적외선 영역에서는 불투명해서 나가는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잡아주게 됩니다. 즉 들어오는 에너지에 비해 나가는 에너지는 적어서 내부 온도를 높이게 해줍니다. 온실가스는 이러한 원리로 지구 대류권 대기의 온도를 높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이불에 들어가서 잠시 있다 보면 점점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불 자체가 따뜻해서가 아니라 (이불 자체가 처음부터 온도가 높았던 것이 아니라) 이불을 덮고 있는 우리의 체온이 이불 안에 갇혀있는 공기를 데우는 것입니다. 이불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더 따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실가스도 이불의 원리와 같습니다. 대류권에서 만들어지는 적외선이 곧장 우주로 나간다면 온실효과가 없겠지만, 나가던 적외선이 온실가스와 반응하여 일부가 우주로 가지 못하고 대류권을 데우는 효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18세기 산업혁명 이전에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280ppm이었는데, 현재는 400ppm이니까 약 43% 늘어났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매년 2ppm (43억 톤)씩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추세는 인류활동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화석연료(석유, 석탄) 사용과 토지사용 변화(숲을 농업 또는 다른 용도로 변환)가 대표적인 원인입니다.

 

 

위의 그래프는 지난 80만 년의 이산화탄소 기록입니다. 남극에 매년 눈이 쌓일 때 그 당시의 공기를 머금고 쌓이게 되는데, 80만 년 동안 눈이 쌓인 곳을 찾아서 얼음 기둥을 시추하여 분석한 결과입니다. 80만 년 동안 가장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았던 시기의 기록은 300ppm 정도인데, 현재는 400ppm이 넘었습니다. 물론 자연적인 변동으로 적게는 200ppm, 많게는 300ppm 구간을 오르락내리락하였지만, 최근 관측된 400ppm이라는 숫자는 자연적인 변동으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해 보입니다. 즉, 인류 활동에 의한 이산화탄소 방출 때문에 최근 급격한 이산화탄소 농도 상승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1958년부터 최근까지 정확하게 관측한 이산화탄소 그래프입니다. 단 한 번도 감소한 적 없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월간 이산화탄소 농도를 나타내는 빨간 점들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변동하는 것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매년 5월경에 가장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고 9월경에 가장 낮은 계절적 변동이 매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북반구에 자리하고 있는 숲들이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배출하는 양의 일부는 흡수하고 있지만, 이산화탄소 농도의 뚜렷한 추세를 억제할 정도는 아니므로 여전히 매년 이산화탄소 농도는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류가 화석연료 사용과 토지사용 변화로 방출하고 있는 이산화탄소는 최근 10년 기준 매년 5ppm 이상입니다. 나머지 3ppm 정도는 해양과 육상의 식생(주로 숲)이 흡수하여 대기 중에는 약 2ppm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해양과 식생이 매년 3ppm 정도를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 극심한 지구온난화에 시달렸을지도 모릅니다.

 

기후 파업 등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인류는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전기 사용 및 난방 (25%), 토지사용 변화 (24%), 산업 (21%), 교통 (14%), 건축 (6%) 등에서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 칼을 대어 빨리 줄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편의를 포기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또는 경제적인 손해를 보면서까지 줄여야 한다는 데에 사람들이 동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는 느리기만 합니다.

 

계속 증가할 이산화탄소

 

특별한 제제가 없는 한 이산화탄소 배출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총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전 세계 7위, 인구당 배출량은 3위를 차지하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개인이 텀블러를 사용하고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사회 전반적인 구조적 변화 없이는 당장에 이산화탄소 배출을 혁신적으로 줄이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활동 때문에 43% 늘어난 이산화탄소와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지구의 기후가 변해왔지만 앞으로가 더 큰 문제입니다. 매년 2ppm씩 쌓이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언제까지나 해양과 식생이 3ppm씩 흡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연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해양과 식생이 어느 정도 저장고 역할을 하고 있지만, 기후변화 때문에 이산화탄소 흡수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과학자들은 양의 되먹임 (피드백) 작용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지구온난화 – 흡수 능력 상실 –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더 쌓임 – 더 쌓인 이산화탄소가 추가적인 지구온난화 야기> 이러한 형태로 결과가 다시 원인에 영향을 미쳐서 더 급진적인 지구온난화가 야기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산화탄소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편의를 제공합니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있습니다. 현재의 편의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기후변화나 수십 년 뒤에 일어날 지구온난화에 대한 위험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현재의 편의를 위해 고의적으로 망각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오늘날 예수님께 드린다면 어떤 대답을 듣게 될지 상상해봅니다. 자기 이기심과 욕망을 뛰어넘는 신앙과 이 세상 질서와는 매우 다른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것이 요구될 때, 지구온난화를 줄이기 위한 우리의 고민도 더욱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욕적으로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편의가 가져올 대가를 인지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대해서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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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은 이신론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 음.. 제 생각에 너무 멀리가신 것 같습니다만..
    창조과학회에서도 해가 멈춘 것 뒤로간 것, 바다가 잠잠케된것, 홍해가 갈라진 것,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자연에 변화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을 알고 계실겁니다(참고로 저는 창조과학회와 관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만드시고 운영하시는 것은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알고 믿고있는 내용일겁니다 ^^; 이런 전지전능하신 분이 우리를 한 점으로 창조 하실 수도 있으셨다면 우리를 지금의 모습으로도 창조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창조고학회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혹 하는 마음이 들엇지만 이내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구요 하나님을 과학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1리터 비이커로 바닷물을 측정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다고 생각했거든요 ^^& 1리터의 비이커는 과학입니다 그 비이커로 하나님을... ㅎㅎ
    왜 창조과학회를 비판적으로 생각하시는지... 물론 창조과학회가 비과학적인 부분으로 이야기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세상사람들이 보면 같은편끼리 열심히 싸우는 것처럼 보일까봐 조심스럽습니다...ㅠㅠ 하나님이 주신 비이커로 열심히 바닷울을 해이면서 하나님의 광대하심, 위대하심, 전지전능하심을 느끼는 것은 정말 기쁜일이지만 그 비이커로 너네가 맞는이 내가 맞는니 하는 것은 좀.....^^;
    짧은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

    여호수아유석 2019.10.29 09:25
  • 궤변그만하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의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당신이 신적개입의 영역을 남겨두는 겸손해보이는 논리를 펴도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데에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그 당시 결정론적 세계관이 무슨 여지없는 교만한 사상처럼 비유하시는데 잘못알고 계신겁니다 뉴턴시대 결정론적 사고관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찬양하는 세계관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이해가 안되시죠? 참 어디서부터 말해줘야할지... 설명해주기도 어렵네요
    당신은 상당히 유신론적 합리적과학을 얘기하고 있는것 같지만 뼛속까지 유물론자 느낌나네요
    이말이 과하고 기분상하시면 진짜 지금부터라도 각성하고 겸손하게 제대로 공부해보세요
    창조의 영역을 남겨두며 은근슬쩍 하나님을 찬양하는듯한 그런태도는 칸트의 자연신론보다도 멋있어보이지 않네요
    당신이 무슨말을 하고있는지... 좀 아시려면
    포스트모던에 대해서 더 공부하세요

    배성목 2020.01.15 00:58

 

창조과학은 이신론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글_임택규

 

제가 현재 근무하는 직장은 전력회사입니다. 캘리포니아에는 3개의 전력회사가 있는데, 제가 일하는 회사는 캘리포니아 중부에서 남부에 이르는 130,000 평방킬로미터의 광할한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의 넓이가 100,210 평방킬로미터이니까, 대한민국 국토보다 약간 더 넓은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캘리포니아주에 2개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샌디에고라는 도시의 바로 북쪽인 샌 오노프레라는 곳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는 몇 년 전에 폐쇄를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가동되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단 하나의 원전인 디아블로 캐년 발전소는 주정부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원전 가동 허가가 만료되는 2025년까지 완전히 폐쇄될 예정입니다.

 

강화된 환경규제에 맞춰서 태평양 해안가에 있는 많은 화력발전소들도 차례로 폐쇄되고 있고 그로 인한 전력 생산의 감소는 풍력이나 태양에너지같은 무공해 재생에너지를 통한 발전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저는 새로 개발되는 태양력 발전소에 송전시설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에 있는 모하비 사막은120,000 평방킬로미터를 넘어서는 광활한 면적에, 여름 최고 기온이 섭씨 54도에 달하며, 연간강수량은 250 밀리미터 미만입니다.  우리나라의 연평균 강수량이 약 1,250 밀리미터 정도이므로, 이렇듯 건조한 기후와 엄청난 일조량을 가지고 있는 모하비 사막은 정말 태양력 발전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태양력 발전소가 잘 찍혀 있습니다. 

 

 

사진 윗쪽 부분에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세 군데의 발전소는 태양광 발전소로 오해하기 쉽지만 태양열을 사용하는 발전소입니다. 거울이 반사시킨 태양빛을 집광타워에서 모아서 그 열로 물을 끓여서 터빈을 돌려서 전기를 생산합니다. 사진 아랫 부분 중앙에 크게 보이는 발전소는 햇빛을 잘 흡수하는 검은색을 띄기 때문에 태양열 발전소로 오해하기 쉬우나 저런 형태의 검은색 패널을 가진 발전소가 태양광을 이용하는 발전소입니다. 태양에서 복사된 빛 입자가 패널 표면에 닿으면 그 에너지를 흡수한 전자가 방출되는 현상을 이용해서 전력을 생산하는 형식입니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발표한 광전현상을 이용한 발전 형태입니다. 

  

이러한 발전소들은 당연히 송전시설을 필요로 합니다. 수십 마일 때로는 수백 마일에 달하는 송전시설 및 변전시설들 없으면 당연히 생산한 전력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지 이러한 발전소, 송전시설, 혹은 변전시설이 완공이 되면 그때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떠한 시설물(Asset)이 완공된다는 것은 그 시점부터 그 시설물은 공학적인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경제학적으로는 그 시점부터 재화를 창줄할 수 있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어떤 시설물의 건설을 완성한다는 것,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을 달성한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준공과 더불어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부정적인 현상도 있습니다. 바로 감가상각(Depreciation)이 시작된다는 것 입니다. 완공된 시설물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점 노후가 진행되고 잔존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보관하고 보수하며, 때로는 시설물의 이 부분 저 부분을 신품으로 교체해주지 않는다면 곧 그 시설물은 기능을 제대로 발현할 수가 없게 되버립니다.

 

 

근대과학이 태동하면서 이신론(Deism)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이신론적 신관은 과학적 결정론에 힘입어서 태동했습니다. 인류가 자연이 운행되는 법칙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면 인류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결정론이 발생했던 것 입니다. 이러한 결정론 속에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개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는 더 이상 요청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기적들은 우리의 정확한 계산을 틀리게 하는 귀찮은 변수에 불과하게 된 것이지요. 

 

자연을 기계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계의 구동원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기계가 미래의 어떤 시점에 어떻게 작동할 지를 충분히 계산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 기계가 우리 계산과 다르게 작동을 한다면 그러한 오작동은 자칫하면 대형 사고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설치하셨던 이 법적인 질서에 의해서 정교하게 작동하는 자연이라는 기계가 갑자기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확한 계산에 의한 예측을 빗나가게해서 끔찍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오작동의 변수일 뿐입니다. 이러듯 이신론적인 세계관 속에서는 하나님의 기적 혹은 능동적인 개입마저도 거부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신론은 근대적 의미에서 무신론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신론이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으로까지 연결되어 있지요. 이러한 이신론 혹은 무신론적 세계관은 현장에서 구조물을 축조하고 그것을 통해서 편익과 재화를 창출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엔지니어인 저에게는 굉장히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준공된 후에도 적절한 관리를 통해서만 시설물의 가치와 성능이 유지된다는 점을 매일매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회에서 진화론이 이신론적이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저에겐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이지요. 진화론은 물론 과학이론에 불과하지만 저는 그 속에 무한한 신적 개입(Divine Intervention)의 여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 개입하시고 피조물들을 보살피시며 사랑으로 다스리셔서 풍성케 하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섭리를 우리가 통찰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6천여년 전, 6일 창조 이후에 자연계에 아무런 개입이 없으셔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제겐 이신론적으로 느껴집니다. 만약 창조 이후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이 자연에 아무런 개입이 없으셨다면 이 자연은 과연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네 진입로를 재포장하고, 골목길에 설치된 가로등을 재정비하는 구청 토목과 직원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기후변화 제국의 프로테스탄트] 1. 삶에서의 회심, 기후변화와 맞서다

  • 자녀들에게 충분히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수 있게 끝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기대됩니다 ^^

    jam5 2019.09.25 17:45
  • 기후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글 감사합니다. 크리스천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겠습니다. 이후의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CoreaArt 2019.09.25 19:16
  • 고등학교때부터 한 길만을 걸어온 김박사의 건투를 빕니다

    라임오렌지 2019.09.25 23:14
  • 저도 기사로 스웨덴 소녀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는 했었는데요, 좋은 칼럼 등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챙겨보겠습니다^^

    2050 2019.09.26 07:55
  • 기후문제는 과학교육계에서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과학교육의 트랜드가 교과서에서 교실밖인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후 문제는 몇 사람의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동의와 행동 변화가 함꼐 동반되어야 하는 문제인 동시에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주는 직접적인 이슈입니다.

    현장 과학 선생님들이 이것에 대한 중요성은 알지만 학술적이고, 이론적 기반이 부족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참고가 될만한 좋은 내용 기대하겠습니다.

    준이네 2019.09.26 09:53

 

삶에서의 회심, 기후변화와 맞서다

 

김진수 (에딘버러대학교 지구과학부 박사후연구원)

 

 

1529년 슈파이어 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마틴 루터의 지지자들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루터파 제후들과 자유도시 대표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항의하는 문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제국회의와 황제에게 맞선 이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 혹은 저항하는 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르며 신교도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로 굳어졌습니다.

 

500여 년 전에 제국과 황제에 맞선 이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신앙을 물려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집단’이기도 하지만 한 ‘개인’이기도 한 그들은 살해 위협 등 신변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항의하며 개신교회를 세웠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담대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들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면죄부로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확신, 개혁이 필요하다는 확신, 자신이 그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는 확신 말입니다. 저는 이 확신이 필요한 영역이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기후변화에 대해서입니다.

 

 

안녕하세요? [기후변화 제국의 프로테스탄트]를 연재하게 된 김진수라고 합니다. 저는 지난 2월에 포항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딘버러 대학교로 옮겨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전 세계에서 ‘기후 파업 (climate strike)’ 운동이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 (Greta Thunberg)가 지난해 8월 ‘등교 거부’ 시위를 시작해 유럽 및 세계로 이 운동을 확산시켰습니다. 청소년들이 본인들의 미래를 위해서 학교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기후변화로 인하여 지구가 망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밝은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이 소녀는 환경 파괴에 침묵하고 기후변화 대응에 미온적인 주류 정치인들과 어른들에게 반항하는 의미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등교거부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작년 12월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는 기득권층을 겨냥한 연설에서 “당신들은 자녀를 사랑한다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녀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라고 발언하였고, 지난 9월 23일에는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 3분 연설에서 “생태계 전체가 무너지고 있는데 각국 정치지도자들은 영구적 경제성장과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다.”“당신들은 우리 젊은 세대를 실망시켰고, 우리는 당신들의 배신을 깨닫기 시작했다. 미래 세대의 눈이 당신들을 향해 있다. 만약 우리를 실망시키는 쪽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질타하였습니다.

 

이 소녀에게는 ‘확신’이 있어 보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미래’가 없다는 확신, 개혁이 필요하다는 확신 말입니다. 저는 기후변화 과학자이자 신앙인으로서 [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세기 1장)라고 하셨지 파괴하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분별한 개발과 무책임한 발전으로 더욱 강력해진 자연재해(사실상 인재 人災)를 연거푸 경험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 (로마서 6장)인 것처럼, 인류활동으로 인해 지구에는 사망의 그림자가 길게 늘여져 있다고 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피 값 주고 사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해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야고보서 2장)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이 땅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그의 청지기라면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응하여 어떤 믿음과 행동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확신’과 함께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레타가 경고한 것처럼, 이대로 문제를 방치했다가는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가 살았던 지구를 물려주기는커녕 지옥 같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인격적인 회심을 요구하실 때에, 우리가 당연시하고 살아왔던 삶의 패턴 하나하나까지도 ‘회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 청년처럼 고민하다가 망설일 수도 있고, 삭개오처럼 자발적으로 본인의 삶을 180도 바꾸는 결단과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기후변화 과학의 최신 연구 결과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드리고, 우리가 과연 어떤 행동들을 할 수 있는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