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엘리에저 J. 스턴버그 |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조성숙 역 | 다산사이언스 | 2019년 | 432쪽

 

 

“지금으로부터 150억 년 전, 우주가 생겨났다. 50억 년 전, 지구가 생겨났다. 30억 년 전, 지구에 생명이 출현했다. 5억 년 전, 최초의 신경계가 나타났다. 3백만 년 전, 인류가 출현했다. 2백만 년 전, 인간의 뇌가 도구를 고안하여 노동 생산성을 증가시켰다. 13만 년 전, 인간이 머릿속에서 상상한 사건을 벽에 그리기 시작했다. 50년 전, 인간의 뇌가 최초의 인공 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5년 전, 컴퓨터가 저 혼자서 논리적 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주일 전, 컴퓨터의 지원을 받은 한 인간의 뇌가 《최후의 비밀》에 도달한다.”

 

위 내용은 2002년에 출간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L’ Ultime Secret)』의 거창한 홍보 문구다. 이 소설은 인간의 뇌에 관한 당시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쾌감중추의 비밀을 파헤쳐 나가는 과학 추리소설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인간 탐구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았다. 인간의 뇌와 인공지능 컴퓨터,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이 두 과학기술이 만나 이루어지는 상반된 인간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록트인 신드롬’ 환자로 식물인간 상태인 장 루이 마르탱을 통해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있지만 AI를 사용하며 비약적인 뇌의 발전을 이룬 모습을, 그리고 현명하고 도덕적인 천재 의사가 ‘최후 비밀’을 접하며 절제가 안된 인간의 욕망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를 읽으면서 ‘뇌의 숨겨진 논리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탐구하는 진지한 주제 의식과 흥미를 끄는 추리소설적 구성 때문인지 장르는 다르지만 오래전에 읽었던 베르베르의 이 소설이 생각났다. 뇌의 ‘최후의 비밀’인 쾌락중추 자극기술을 이용한 천재적인 정신과 의사가 인공지능 컴퓨터가 보유한 체스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다시 찾아오는 승리의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하는데, 우리가 몇 년 전에 충격받았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떠올리게 한다. AI와 뇌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20년 전의 소설의 내용은 이제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엘리에저 스턴버그는 30대 초반의 천재적인 신경과 의사이다. 17세 때 이미 철학과 신경과학을 아우르는 첫 저서 『우리는 기계일 뿐인가』를 출간했고, 22세에는 뇌에 결함이 있는 사람의 도덕적 책임이라는 문제의식을 풀어낸 두 번째 책을 저술했다.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는 세 번째 책으로 신경계 질환 환자들을 직접 진료한 사례와 기존의 연구들 또 기술 발전으로 근거가 보강된 이론들을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근본적인 이유’인 뇌의 신경 논리구조(NeuroLogic: The brain’s hidden rationale)를 발견하고 의식과 무의식의 체계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사례 별로 기존 임상 연구의 가설과 최신의 신경과학 연구, 특히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를 통해 일반인의 뇌와 뇌질환자의 뇌가 서로 다르게 활성화되는 부분들의 차이점을 비교 분석한 최신의 연구자료를 통합하여 과거의 개별적 행동 연구를 넘어서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뇌의 논리구조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8장에 걸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이야기로 구성되는 각 장이 뇌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기이한 상담 사례로 시작되며 앞장에서 제시된 문제가 해결되면서 잇따라 제기되는 의문을 연결해서 풀어가는 추리소설과 같은 흥미로운 전개 방식이다.

 

1장은 ‘시각장애인은 꿈속에서 무엇을 보는가?’는 질문으로 의식계와 무의식계가 어떻게 나뉘어 작동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 뇌의 두 시스템이 우리의 지각을 만들어낸다. 무의식계가 패턴을 인식하고 그 패턴을 바탕으로 예측한 다음 지각한 조각들을 끼워 맞출 방법을 추론하고, 의식계가 무의식의 계산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풍부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린다. 모든 감각은 정보의 흐름이다. 시각 경로든 청각 경로든, 아니면 다른 경로든 이 정보를 상황적 맥락에 맞게 해석하고 종합해 세상을 의미 있게 표현하는 것이 뇌의 무의식계에 주어진 과제다. 무의식의 처리과정은 동시에 들어오는 오감의 흐름을 분석하고 비슷한 특정이 없는지 꼼꼼히 조사한 후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추상적 개념을 만들어 낸다. 감각 신호는 처음에는 병렬 경로에서 처리되다가 마지막에 하나의 개념적 네트워크로 통합되고 해석되고 조직된다. 감각들이 합쳐져 세상을 하나로 유연하게 지각한다. 오감의 협업은 의식적 경험을 강화해줄 뿐 아니라 감각 하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백업 시스템까지 만들어준다. 실명하면 다른 감각계가 지각의 빈틈을 메우려 작동하기 시작한다. 뇌는 최선을 다해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을 재건한다. 다른 감각들끼리 결합해 제 기능을 잃은 감각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부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의 뇌는 지각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시각적 환각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감각을 동원해 시야를 재건하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감각을 최대한 사용해 시각이라는 감각에 생긴 빈틈을 채워 넣을 수 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들도 상상하고 꿈을 꾸는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

 

2장에서는 ‘좀비도 차를 몰고 출퇴근할 수 있는가?’ 질문을 던지며 습관, 자기통제와 자동행동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는 뇌가 가진 두 개의 평행 시스템을 이용해 행동을 통제한다. 습관체계와 비습관체계인데 두 시스템은 기억 형태에 따라 강점도 다르고 접근법도 다르다. 행동을 지배할 수 있는 자동 시스템인 습관 체계는 절차 위주이며 프로그래밍이 가능하고 빠르다. 습관과 비습관체계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소위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진다. 어떤 행동을 충분히 많이 연습하면 습관체계에 통제권이 넘어가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하게 되고, 비습관체계는 그 행동에서 해방되어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3장은 ‘상상만으로도 운동 실력이 좋아질 수 있는가?’는 질문으로 의식과 무의식계의 상호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상상으로 하는 심상 훈련이 자극하는 뇌 영역은 실제 신체 동작에 영향을 미치는 뇌 영역과 동일하므로 뇌에서 근육을 연결하는 신경경로가 파괴된 경우가 아니라면 심상훈련으로 그 동작을 수행하는 신경 근육 회로에 습관이 형성되어 회로 기능이 강화될 수 있다. 그리고 신체를 직접 움직일 때와 그 움직임을 상상할 때 쓰는 뇌 영역이 동일하듯이 누군가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에도 똑같은 뇌세포를 사용하는데 행동 실행과 관찰에 모두 반응하는 이 뇌세포를 거울신경(mirror neuron)이라고 부른다. 거울신경은 하품 전염과 관련 있다고 여겨지는데, 무의식적으로 활성화되는 거울신경은 공감 능력을 형성하게 도와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본능적으로 시뮬레이션해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 대한 기본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발달시킨다. 한편,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할 때마다 특정 감정이나 몸의 상태가 그 사건에 대한 기억과 관계를 유지하는 생물학적 잔재를 신경계에 남기는데, 이런 감정적 잔재를 신체표지(somatic marker)라고 부른다. 거울신경이 다른 사람의 경험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처럼 신체표지는 우리 자신의 과거 경험을 시뮬레이션 한다. 이런 감정적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저장되었다가 비슷한 사건과 맞닥뜨리는 순간 등장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직감’이 된다.

 

 

4장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기억할 수 있을까?’는 질문으로 의식계와 무의식계가 어떻게 한 사람의 서사를 써내려 가는가를 다룬다. 뇌의 무의식계는 어떤 사건을 기억해낼 때 자기중심적으로 접근하는데 자신의 자아인식과 일치하는 일은 쉽게 기억하지만 자아인식과 충돌하는 기억이나 감정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기억의 조각이 사라지거나 왜곡되고 자아의 존재감과 안정성이 위협받을 때 거짓기억으로 빈틈을 메우는 ‘말짓기증’이 나타나거나 기억억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의식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뇌는 기저의 논리에 따라 우리의 경험을 해석하고 기억을 암호화하고 개인사를 기억한다. 무의식계는 우리의 인생을 담은 스냅사진 간에 연관성을 만들어내고 각 순간마다 우리의 감정을 관찰해 무엇을 강조할지 결정한다. 빈틈에 가장 설득력 있게 딱 들어맞을 것 같은 기억과 생각의 조각을 찾아내서 가져온다.

 

5장에서는 ‘왜 사람들은 외계인 납치설을 믿는가?’고 질문을 던지며 건강을 잃은 뇌가 왜곡된 서사를 지어내는 경우를 설명한다. 뇌의 무의식계는 나름의 논리를 따르는 단순한 시스템이다. 뇌는 양립 불가능한 자극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의 인식에 통일된 이야기의 틀을 씌워 삶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 내려한다. 그래서 서로 맞지 않는 자극을 조합해 이야기를 만들어 낼 때 뇌는 깊숙이 파묻힌 신념과 성향, 의문점을 끄집어내어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수면마비(sleep paralysis, 가위눌림)와 연관된 외계인 납치 경험, 관자엽 뇌전증을 앓는 환자들이 겪는 과종교증(hyperreligiosity)의 신비한 영적 체험, 뇌의 일시적인 산소 결핍 상태에서 일어나는 임사체험 등이 그 사례이다. 뇌가 건강하면 우리는 교육의 도움을 받아 저장 창고의 지식을 수정하고 넓혀 믿을 만한 정보를 무의식계에 제공할 수 있고, 무의식계는 그런 정보의 안내를 받아 더 합리적이고 현실에 맞는 설명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뇌가 건강하지 않다면 뇌는 날조된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게 되어 우리는 초자연적 경험을 평생 동안 믿게 될 것이다.

 

6장은 ‘조현병 환자에게 환청이 들리는 이유는?’이라는 질문으로 뇌가 자아와 비자아를 구분하지 못할 경우 발생하는 일에 대해 다룬다. 전기물고기가 자신이 보낸 신호와 외부의 전기신호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수반방출이라는 것이 있는데, 인간의 뇌에서도 어떤 명령을 보낼 때마다 그 명령 신호를 복사해서 감각계에 보내고 감각계는 그에 응하여 수반방출을 만들어내어 자신의 신호와 외부의 신호를 구분해낼 수 있게 한다. 수반방출계의 결함으로 조현병 환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인식하는 기능뿐 아니라 자기 생각을 인지하는 기능도 잃어 환청을 듣게 된다.

 

7장에서 ‘최면 살인은 가능한가?’ 질문을 던진다. 최면이든 광고든 잠재의식 메시지이든 외부 암시는 뇌 활동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외부 영향에 지배되는 순간 뇌는 그런 영향을 우리가 자발적 동기라고 믿고 있던 동기와 합쳐버린다. 외부의 무의식적 영향이 행동방식을 어떤 식으로든 바꾼다면 무의식계는 우리가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하도록 도와준다. 뇌의 무의식계는 빈틈을 메우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합리화시키고 매우 비논리적인 상황을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왜 무의식계는 혼란스럽거나 모순된 경험을 억지로 이어 붙이는 해석을 만들어내는가? 이유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지키기 위해서다. 무의식계는 자아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유지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극단적 행동도 일삼는다.

 

8장 ‘다중인격은 똑같은 안경을 공유하지 못한다?’에서는 앞 장들에서 다뤘던 사실들을 ‘해리성 정체감장애’ 즉 ‘다중인격’의 사례에 대입해 총정리해 준다. 뇌의 좌우는 별개로 행동하지 않는다. 좌우의 뇌는 서로의 행동에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면서 어떻게 든 통일된 자아의식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낸다. 뇌는 불안전한 사고와 인식의 빈틈을 메우려는 습성이 있고, 그 빈틈을 메울 때마다 자아의식 유지라는 목적에 충실한다. 무의식계는 개인의 이야기를 인간으로서 갖는 안정된 정체성을 보호하는데 철저히 중점을 둔다. 또한 뇌는 트라우마 기억과 감정으로부터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기억과 감정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려 하고 의식과도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애쓰는데 이런 격리작업을 하다가 도를 넘기도 한다. 이렇게 무의식계가 과도한 격리작업을 한 결과가 ‘해리성 정체감 장애’이며, 이 경우 각각의 정체성에 따라 뇌를 사용하는 부위, 근육을 사용하는 것 등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의식계와 무의식계의 공조에 의존한다. 의식계는 자아의식을 경험하게 해 주며 뇌가 만드는 이야기를 의지를 갖고 정신과 신체를 제어하여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한다. 무의식계는 그런 이야기를 만든다. 무의식계는 단편으로 끊어진 경험 조각들을 끌어와 빈 틈을 메우고 우리의 인생사를 순서대로 배열한다. 무의식계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구축한다. 뇌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조각조각 들어오는 인식을 합리적인 이야기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반복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경험을 쌓고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을 스스로 느끼며 ‘자아’를 만들고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체성을 유지하여 우리가 자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뇌의 신경 로직(NeuroLogic)의 지향점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서두에 언급한 베르베르의 소설 『뇌』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기자로 등장하는 주인공 뤼크레스와 이지도르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인간은 결국… 인간으로 향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의 바탕은 바로 사랑이고… 너무 포괄적일 수도 있고… 또 너무 신파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픈 사랑이란, 용서와 배려, 사람과 사람 간의 신뢰, 에로스적 의미, 집착 등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미이다.”라고 결론적으로 읊조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그의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으로서 인간을 향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가 파악한 인간의 정체성은 사랑이라는 인간 관계성이 바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인공지능과 결합된 최초의 트랜스휴먼인 장 루이 마르탱의 이야기가 아닌 뤼크레스와 이지도르의 사랑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 통속적인 마침으로 많은 독자들은 실망했고 나도 그 독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 점이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의 서평을 쓰면서 20여 년 전 읽었던 소설을 소환한 이유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아쉬운 내용 중 하나가 뇌의 발달과 관련된 사항이다. 인간은 생후 2년 동안 우반구에서 급속 성장이 일어나는데, 이는 감각운동, 감정적 능력과 대인관계 능력의 빠른 발달과 연관되고 감정조절과 애착과 관련된 기본적 구조물을 형성하게 되며, 이런 과정은 모자관계의 애착 형성과 함께 일어난다. 우뇌의 발달은 주로 2세 중반까지 급격하게 이루어지다가 2세 중반이 되면 좌반구의 급속 성장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전전두엽의 본격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처럼 생후 2세 중반까지 아직 유아가 언어로 충분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모든 기억이 내현적 기억(implicit memory)으로 저장되고, 어머니와의 비언어적 의사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을 통해 변연계의 성장, 우뇌 반구의 성장이 충분하게 이루어지게 되면 안정 애착을 형성하게 되어 이후의 대인관계에서도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이다. 이 시기의 내현적 기억과 비언어적 관계성이 이 책에서 스턴버그가 주장하는 뇌의 무의식계의 바탕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실제로 이 시기의 정신적 외상은 유전적 요소와 신경해부학적인 요소들에 영향을 주어 적절한 좌우반구의 통합과 조절을 방해해 병리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인 스턴버그가 주장하는 ‘자아의식’이라는 인간 정체성을 지향하는 뇌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신경 로직’의 가장 중요한 바탕의 하나가 관계성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관계성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사랑-모자관계와 같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잘 밝혀낸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내는 정체성의 서사들은 한편으로 관계성의 서사, 즉 사랑의 이야기로 향하고 있지 않을까 조용히 읊조려 본다.

 

오늘날 뇌에 대한 연구는 인공지능의 본격적인 출현과 더불어 그 잠재적 기능의 극대화라는 실제적 이용이 강조되는 측면이 많다. 그래서 뇌과학와 인공지능의 기술이 이끄는 역사적 특이점에 이르고 있다는 트랜스휴머니즘적 전망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더욱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방향은 창조(또는 진화)의 절정으로 여겨지는 인간의 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의 존재가 우주적 이야기에 통합되는 질문과 시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뇌의 신경 로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이 책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우주적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서 과학과 신학(종교)은 서로의 빈틈 메우기를 경주해야 한다. 우리 뇌의 “NeuroLogic”이 가르치듯이……

 

"Science without religion is lame, religion without science is blind." – Albert Einstein

 

박우민 (woomin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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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우종학,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IVP | 2014. 12. 5 | 개정판 2쇄 | 260쪽 | 13,000원

 

‘에라, 잘 모르겠다. 구원에 관련된 중요한 이슈는 아니잖아!’

물론 이런 태도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지성의 전통을 맛본 사람에게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숙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문제가 직접적으로 구원에 관련된 중요한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창조-진화 논쟁이 수많은 지성인을 신앙의 길에서 몰아내는 심각한 방해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프롤로그 중)

 

 

과학은 나에게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수학을 포기하는 사람을 ‘수포자’라고 부르던데, 수포자는 필연적으로 과포자가 될 수밖에 없다. 과학은 결국 온갖 수학공식들이 난무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포자였으므로 과포자가 되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되었더니, 과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말이 들린다. 솔깃하긴 했지만, 방사선동위원소니 하는 말들이 예사로 등장하는 창조과학 강의는 어렵기만 했다. ‘에라, 모르겠다. 과학은 과학자들이 하라지. 그게 꼭 구원과 관계된 것은 아니잖아? 과학 몰라도 복음은 잘 전할 수 있는데 뭘.’ 이것이 내 입장이었다. 그래서 프롤로그를 읽으며 가슴이 뜨끔했다.

 

교회에서 대대적으로 창조과학 강의를 얼마간 들었다.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뭔가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 크리스천으로서 기본적인 과학지식은 알고 있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강의를 듣던 중, 오직 한 가지 의문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이 강의, 현대과학이 잘못됐다는 것을, 과학을 이용해서 증명하겠다는 건가?’

 

창조과학, 젊은지구론에 대한 강의는 과학의 여러 가지 성과물들을 이용해 현대를 버젓이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 과학이 틀렸다는 것을, 바로 그 과학으로 증명하겠다는 강의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뭔가 오류가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반박할 지식이 없었다.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내가 그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할 말이 아주 많았을 것 같다. 거창하게 구체적인 과학적 지식을 암기해서 논리적 반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흔히 오해하고 있는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진실들 몇 가지만 짚어보면 큰 그림이 그려진다. 이 책은 친절하게 그 과정을 안내해주고 있다.

 

먼저, ‘과학’과 ‘신학’이라는 키워드를 듣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떠올릴만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명한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종교가 과학을 억압한 사례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 당시의 시대상과 얽힌 복잡한 문제였지 결코 종교가 과학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유명한 일화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종교와 과학이 당연히 갈등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은 자연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즉 가치중립적이라는 얘기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의 개념을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진화를 인정하면 크리스천이 아닌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진화는 상태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단어이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화론’은 진화주의, 즉 ‘인간은 신에 의해 즉각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를 통해 자연적으로 생겨났다.’고 가치를 부여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가지 책을 주셨다. 그런데 굳이 두 책을 한쪽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성경은 신학이라는 도구로 읽고 자연은 과학이라는 도구로 읽으면 된다. 성경을 과학이라는 도구로 읽고 자연을 신학이라는 도구로 읽는 것이 굳이 문제가 될까? 될 수도 있다. 특히 유사과학이 성행할 정도로 보통 사람도 웬만한 과학지식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얼토당토않는 과학적 지식으로 성경을 읽어낸다면, 비크리스천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에게조차 외면을 당할 것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고 있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게 현 기독교의 실정이다.

 

성경과 자연은 하나님이 주셨다. 그 두 책을 읽는 도구도 하나님이 주셨다. [무.크.따]는 신학과 과학이라는 도구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안내서이다. 그동안 신학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경험이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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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원역사 논쟁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는 사랑과 연합의 과정

 

제임스 K. 호프마이어 외 2인 | 창세기 원역사 논쟁: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주현규 역 | 새물결플러스 (2020)

 

 

토라의 첫 번째 책이자 정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창세기는 모세 율법의 서론이며, 성경 나머지 부분에 나오는 구속사의 시작이다. 성경은 창조로부터 타락으로, 타락에서 구속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재창조로 나아가는 네 악장(창조-타락-구속-재창조)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이라고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처음의 두 악장을 간략하게 기술함으로써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기초를 놓아주는 것과 아울러 세 번째 악장을 시작한다. 네 번째 악장은 성경의 마지막 두 장(계 21-22장)의 주제인데, 이 두 장에 창조의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계 21:1, 5; 22:1-6).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과 조화롭고 놀라운 관계가 재건되게 되는 새로운 시작과 같다.

 

일반적으로 창세기는 신학적 플롯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창조로부터 바벨탑까지(창세기 1-11장), 족장 이야기들(12-36장, 38장), 요셉 이야기(37, 39-50장). 창세기 1장과 2장의 주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있으며, 또한 세상을 창조하시되 근동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에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으셨다는 선언을 하셨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창세기 3-11장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저지르는 죄와 반역을 강조해 주는 이야기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이 급격한 도덕적 타락을 하고 있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죄가 만연되고 증가하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은 자신이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해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3-11장의 다섯 개 이야기는 타락, 가인, 네피림, 홍수, 바벨탑 이야기이고 각 이야기는 죄-(심판의) 말씀-완화(은혜)-심판이라는 문학적 구조를 통해 첫째, 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강화된다 둘째, 죄에 대한 심판도 역시 증가한다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창조는 이후에 오는 모든 것들의 기초이다. 에덴 동산은 과거에 자신들의 죄 때문에 잃어버린 모든 것들, 그리고 현재 그들이 갈망하는 모든 것들을 상징한다. 타락에 대한 이야기(창 3장)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기록할 뿐만 아니라 심판의 완화, 즉 구원의 복음에 대한 최초의 선포로서의 원시복음(창 3:14-15)을 제시되고 있다. 타락 기록은 구속사의 시작점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거의 모든 내용과 관련이 있다. 창조의 기록은 특히 계시록 21-22장에서 그 메아리를 찾아볼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 동산의 많은 요소들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종말이 최초의 창조의 회복을 내포하고 있다는 신앙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 또 바벨탑 이야기는 오순절 날 방언(외국어)을 말하는 은사가 내린 것에 대한 신약의 기록에 비추어서 흥미롭게 이해될 수도 있다.

 

 

창세기가 처음 기록된 때와 오늘날 우리 사이에는 수천 년의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가 창세기의 저자들과 문화적인 맥락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처럼 어린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고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간됨의 경험을 공유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 고민하기도 한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과 우리는 아주 큰 차이점을 가진 동시에, 삶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을 함께 공유한다. 이 공유 가능한 경험들을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사용했던 문학적인 장르에 대한 이해로 어느 정도나 바꿀 수 있을까?
그들과 우리가 소유한 지식의 간극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우리 문화에도 창세기 1-11장과 비슷한 장르가 존재할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장르의 글일까?

또 창세기 1-11장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쓰인 역사인가?
허구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본문 전체를 아우르는 장르에 대한 이해는 개별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연구가 지난 2000여 년 동안 줄곧 진행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이 논쟁적인 문제들을 상세히 탐구하고 성경을 읽는 개인과 성도 모두 이 논쟁의 주된 화제에 주목하여 더 많은 지식을 얻도록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창세기 1-11장의 장르와 역사성 그리고 그에 따른 성경 해석상의 의미에 대하여 제임스 호프마이어, 고든 웬함, 켄톤 스팍스 세 명의 성경학자들이 작성한 짤막한 논문들로 이 책은 구성되어 있다.

 

James K. Hoffmeier

 

먼저 호프마이어는 그의 논문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 내러티브가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들 및 실제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호프마이어는 고대 독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창세기의 지리학적 단서들과 문학적인 요소들, 그리고 역사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여러 특징을 지목하여 설명을 이어간다. 그는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이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 여러 가지 신화를 빌려온 것이 아니라, 그 신화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정반대의 관점으로 기록되었다는 이해를 기초로 하여 성경의 신학적인 담론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즉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은 권위가 있고 역사적으로도 정확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당대의 오해들과 신화들을 바로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웬함 역시 호프마이어의 주장에 동의하며 창세기를 원형적인 역사로 믿는다. 그러나 웬함은 “원형적인 역사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 기저에 창세기 1-11장을 전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데 주저하게 만드는 암류(undercurrent)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적인 실재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부분이 창세기 1-11장에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를 통해-마치 인상파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실제로 발생했었던 일들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일축한다. 웬함은 창세기를 과거와 연결된 현재를 위해 역사를 해석해놓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스팍스는 창세기의 저자들은 우리가 생각 하는 것처럼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문 “고대 역사 편찬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은 창세기 내러티브가 기술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스팍스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역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역사 문헌 편찬을 위해 널리 사용되던 문학적인 양식들을 채택했지만, 특정 장소와 시대에 발생한 사건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려는 목적은 없었다고 간주한다. 다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성품을 가지셨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 성경 저자들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신학적인 이야기들을 차용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성경 전체의 서론을 형성하는 창세기 1-11장이 하나님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 호프마이어는 창세기 1-11장을 역사적인 사건들이 문자 그대로 기록된 역사적인 내러티브로 이해하고, 웬함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창세기 1-11장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스팍스는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공간과 시대에 실제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어떤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기초로 하는 신학적인 담론을 활용해서 말씀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스팍스의 논리에 따르자면,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실제로 발생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문학적으로 뛰어난 예술가들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교훈하신 것과 아주 흡사하다.

 

Gordon Wenham

 

창세기 1-11장이 역사적 기록인지, 아니면 문학적 양식인지에 관한 물음은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자 마음먹은 독자들에게는 무척 골치 아픈 문제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최첨단 과학 시대의 다양한 분야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구 결과물들과, 수천 년 동안 신앙 공동체 형성의 근간이 되어온 성경 상의 담론이 서로 충돌한다는 전제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문학적인 차원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신학적인 문제로 확장된다. 실제로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동일한 교리를 표방하는 신앙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이라고 할지라도, 창세기 1-11장에 대해서 반드시 한 가지의 동일한 이해와 해석만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과 불일치가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없는 일반 성도들을 자칫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걱정스러운 시선도 있지만, 건전한 신앙생활과 신학적 토대는 “토론”과 “논쟁”의 과정을 통해 입증되고 또 더 견고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도 세 명의 학자들이 밝힌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논평을 통해 확인된다.

 

성경 본문에 대한 “나”의 이해와 더불어 다른 이들의 의견에도 겸손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지닌다면, 창세기 1-11장의 장르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과 깊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물론, 더욱 건설적이고 유의미한 논의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읽기’ 행위는 대개의 경우 저자를 이해하게 된 것만큼이나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여정도 동반한다. 그것은 ‘보는 것’과 ‘보기 원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인식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성경의 이해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저자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초기 교회 시대에 믿음의 선조들과 같은 방식으로 창세기 1-11장을 읽지 못하고 또한 읽지 않는다. 초기 교회 시절의 성경 해석가들은 창세기 1-11 장이 실제로 역사를 반영했는지, 안 했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성경이 사실이라고만 생각했으며, 성경을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인 패러다임 대신에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범주로 다뤘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독자들이 성경을 과학적인 관점으로 읽으려 한다든지, 장르에 관한 질문을 갖는다든지,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원시 역사가 천체 물리학자들과 유전 생물학자들 그리고 고대 근동의 역사를 연구한 역사학자들이 재구성한 역사와 조화를 이루는지 따져본다든지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고대 근동 문헌들이 더 추가적으로 발굴될 것이고 역사적인 연구법과 과학적 지식은 더욱 정교하게 발전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 다른 질문과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할 것이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도 그렇게 계속 바뀌어갈 것이다. 이렇게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을 새로운 통찰력과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다시 탐색하고 재평가하는 과정은 기독교 신앙이 어떤 형태로든지 지성적인 일관성과 설득력을 지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엘리자베스 존슨은 “기독교 신앙이 모든 세대에 호소력 있게 다가가려면 당대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방식들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창세기를 연구하는데 장르와 역사성이라고 하는 주제들은 이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에 속한 많은 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사안들이다. 그러나 그 사안들이 기독교가 하나됨을 저해하는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다. 이런 주제들이 우리의 연합을 깨트리는 자극제가 되거나, 자애로운 사랑 대신에 갈등과 다툼을 조장하게 해서는 안 된다. 창세기 1-11장과 관련해서 직면하게 되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다른 의견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인내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에 대해 한마음으로 의견을 모으고 함께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어도 자비와 사랑을 확장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창세기 1-11장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실제로 원시 역사 시대에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또한 묘사된 그대로 발생했든지 아니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창세기 1-11장은 궁극적으로 모든 기독교인이 뿌리를 내리고 흠모하며 닮아가고자 염원하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실 초기 교회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에 대해 오늘 우리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상이한 관점과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최우선적으로 조성하고자 하신 것은 자애로운 사랑이지 정확함을 기초로 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이 더 옳은지에 대한 열망은 자주 그것이 필요한 목적을 잃게 하곤 한다. 창세기의 첫 부분에 대한 현대적 지성의 탐구적 열정은 그것이 진정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알량한 지식으로 대립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닌 꾸준한 한계의 인식과 겸손이 탐구의 방향이며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성경을 읽고 바르게 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그리스도 안으로 더 많은 연합을 이끄는 행위이다. 오래 전부터 창세기 1장을 펼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7일이나 걸리셨나는 의문이 있다. 순식간의 찰나에 창조하실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적 지성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7일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담겨있는 스스로 낮추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는 이해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한계이다. 창세기 논쟁은 우리 사이의 인식의 차이를 극복해가는 사랑과 연합의 과정이 되어야 하며, 위대한 예술작품의 압도적 감동을 표현하려는 다양한 시도와 같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

 

박우민 (woomin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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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E=mc²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의 일생

 

데이비드 보더니스 | E=mc² -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의 일생 | 김희봉 역 | 웅진지식하우스(2014)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이나 초중고 학생들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과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1명만 꼽아 보라고 하면, 아마도 아인슈타인이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꽤 높을 것이다. 그만큼 아인슈타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자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고 더불어 그가 제시했던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도 이해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고 있는 유명한 이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E=mc2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발견한 공식이다.

 

이 책은 이 공식을 어떻게 유도하는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E=mc2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들을 이야기하고, 그를 통해서 이 식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하는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구성요소인 에너지(E), 질량(m), 빛의 속도(c), 제곱(2), 등호(=) 등과 관련된 여러 과학자의 연구 과정과 논란, 결론 등을 먼저 설명하고 있다. 이런 기초의 이해를 바탕에 두고 아인슈타인에 의해 E=mc2이 태어난 과정을 설명한다. 특히 4부에서는 이 방정식을 이용하여 원자 폭탄이 만들어진 과정을 2차 세계대전의 긴박한 역사적 사실과 각 과학자들의 입장, 각 나라의 상황 등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게 한다.

 

마지막 5부에서는 이 공식이 우리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더불어 이 방정식의 미래를 우주의 진화 과정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또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했던 블랙홀과의 연관성도 이야기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은 언듯 보면 정확하고, 불변하며, 객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학의 특성 중 하나는 변화 가능성(혹은 과학지식의 잠정성)이다. 물론 아침에 비가 내리다가 점심 때가 되면 날이 개는 것과 같이 수시로 날씨가 변화하는 그런 변화는 아니다. 이것은 많은 과학자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전의 과학적 사실이나 이론 등이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 지식이 변화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도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대한 간략한 한 편의 과학사를 볼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원자에 대한 개념의 변화나 빛의 성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과학자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고뇌하고, 갈등하면서 선택을 하는... 그래서 과학자의 삶도 우리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과학도 우리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가끔은 과학적 지식과 우리의 삶이 별로 관계없는 듯 보이고, 종종 과학 지식은 너무 어려워서 그냥 과학자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불리는 요즘처럼 과학에 관심을 갖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갖추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멀어 보이는 과학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 한번쯤 과학자들이 어떤 연구를 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건 어떨까? 그러기 위해 이 책이 하나의 본보기 같은 역할을 해 줄 수도 있겠다.

 

윤세진_ 과신대 교사팀, 구일고등학교 생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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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연대기>를 읽고

“얘들아, 지구 연대를 따져보면 6 천 년밖에 안 된대!”, “사람이랑 공룡이랑 같이 살았었대!” 나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다. 과학으로 성경을 증명할 수 있다니, 진짜 신기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창조과학 특별집회가 열렸다. 설레어서 가슴이 너무 떨렸다. 열심히 강의를 듣는 도중, 한 가지 생각에 꽂혀서 나머지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이 틀렸다고, 그래서 지구 나이는 46억 년이라고 측정한 게 틀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과학적으로’ 증명한다고 한다. 과학이 틀렸다는 걸 과학으로 증명한다고?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김민석 | 창조론 연대기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 375쪽

 

 

김민석 작가는 예전에 <마가복음 뒷조사>를 읽어서 알고 있었다. 참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또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던 차에 남편이 이 책을 권해주었다. 반가운 마음에 첫 장을 펼쳤는데,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사실, 그때는 정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서 한 번에 쭉 읽었는데, 기억나는 건 딱 한 마디였다.

 

“봐봐 ... 저기 저 별들에서 나오는 빛이 우리 눈에 보이려면 ... 그러니까, 10억 광년 떨어진 별이 보인다는 건 ... 그 별빛이 우리 눈에 오기까지 10억 년이 걸린 거잖아.” (p70-71)

 

주인공 중 한 명인 수영이의 대사다.

 

책을 다 읽고 내려놓았는데, 이 대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요즘 웬만한 사람들은 ‘광년’의 개념이 뭔지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간단한 개념이 이상하게도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삭제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다. 그냥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은 것이다. 나는 수영의 대사 때문에 그동안 뇌 한구석에 잠재워 두었던 콩 알만한 과학 지식들을 단편적으로 끌어내게 되었다. 그랬더니 성경이 다시 보였다. 끊임없이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교회에서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는 자매’로 찍히게 되었다.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기도를 더 많이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여기서 더 나가면, ‘진짜 하나님 믿냐?’라는 질문을 받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아무도 풀어주지 못했다.

 

<창조론 연대기>에는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한 수영이 있었고, 유준이 있었다.

 

 

이번에 서평을 쓰려고 다시 책을 찬찬히 읽으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첫째, 신앙과 과학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나도 예전에는 과학자는 모두 무신론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은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둘째, 창조론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6일 천지창조를 믿을 것이다. 하루는 24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나도 처음에는 여기에 의문을 가졌지만, 교회를 다니다 보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계속하면 안 된다고 여겨서 그냥 24시간*6일=144시간에 걸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믿기로 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어느 창조론을 믿든, 다른 사람이 믿는 창조론에 대해서 ‘나만 옳다’라고 여기는 독단적인 태도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걸 주장하는 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셋째, 문자 그대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평소에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내가 읽고 있는 성경의 문자대로만 읽으면 됐지, ‘원래 문자 그대로’가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하나님도 내 처지 다 아시는데라는 생각에 안일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질문하는 나’를 삶에서 지워버리게 되었다. 

 

넷째, 과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였다. 나는 과학과 복음이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여러 가지 질문으로 괴로워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과학적 질문들 때문에 괴로워하며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물리학자가 꿈이었던 온유가 과학과 신앙이 대립된다고 생각해서 꿈을 버린 부분에서 무척 마음이 아팠다.

 

 

유준, 김수영, 박온유, 박건호, 고민희, 박사무엘.

 

이 등장인물들은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갈등하고 있는 사람이다.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슬며시 이 책을 선물해주면 어떨까? 진지한 물음과 더불어 고등학생들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한 가지 팁! 나처럼 안면 기억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등장인물을 한 번에 구분하기 어려우니, 앞 페이지에 나오는 인물소개를 꼼꼼히 읽고 들어가는 걸 권한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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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실험 100

 

메리 그리빈 & 존 그리빈 |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실험 100 | 오수원 역 | 예문아카이브 (2017)

 

요즘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이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다가 사망자가 나오고 나에게도 바이러스가 감염될 수 있다고 생각 하지만, 현대는 의학과 생물학의 발전으로 인해 질병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향상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도 잘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의학이나 생물학이 발전하기 이전에는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술에 의지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질병이 초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의학과 생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조금씩 극복되었다.

 

질병을 고치게 된 것 이외에도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과학 기술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과학의 발전은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갈릴레이, 뉴턴 등으로 대표되는 과학혁명을 이끈 사람들에 의해 근대 과학이 발전하고, 이 후 많은 과학자들의 헌신적인 실험과 연구 결과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과학의 발전을 이루었다.

 

과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측면이 여럿 있지만, 과학혁명을 가져오게 한 결정적인 측면이 바로 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과학적 지식은 사변적인 생각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이 생활 속의 경험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갈릴레이나 뉴턴에 의해 부정되기 전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곤 하였다. 과학을 이러한 사변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 것이 실험이었다.

 

 

이 책에는 천문학자이자 작가인 존 그리빈과 과학 교사인 메리 그리빈에 의해 선택된 100가지 과학 실험이 설명되어 있다.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는 실험 중에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실험을 100개 선정하여 그 실험의 간략한 내용과 과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그중에는 유레카로 유명한 아르키메데스 실험, 혈액순환을 알아낸 윌리엄 하비 실험, 광속을 계산한 뢰머 실험, 천왕성을 발견한 허셜, 인류 최초의 백신을 만든 제너,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에 대한 실험, 뢴트겐의 엑스선 실험, DNA 구조 발견 등 물리, 화학, 생명공학, 천문학 등과 관련된 실험이 있으며, 과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기술에 대한 몇 가지 실험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한 어떤 실험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것도 있지만, 다른 것은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 내용의 실험도 있다. 그럼에도 과학에서 많은 실험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없었던 많은 내용을 알아내고 그 결과 우주와 물질과 생물을 포함하는 자연 세계의 경이로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실험을 제시하는 가운데 과학자들에 대한 설명이나 그들이 직접 진술한 내용을 통하여 과학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서론에서는 윌리엄 길버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실험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여기 표명한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또 나의 역설(paradoxes)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수많은 실험과 발견만큼은 주목하시라… 우리는 이 실험과 발견들을 캐냈고, 엄청난 노고와 큰돈을 들여 밤잠을 설쳐가며 이들을 입증했다. 여러분은 우리가 제공하는 실험과 발견을 즐겁게 이용하시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더 좋은 목적에 이들을 가져다 사용하시라… 우리가 제시한 많은 추론과 가설은 필시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견해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우리의 추론과 가설들이 증명을 통해 권위를 얻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만든 많은 추론과 가설은 필시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견해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 윌리엄 길버트

 

하지만 추론과 가설은 “증명(실험)을 통해 권위”를 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명제, 실험과 일치하지 않는 법칙은 틀린 것이다. 길버트의 이 말을 요약하자면, 실험 결과와 일치하는 이론이나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며, 우리는 이론이나 법칙에 대해 실험으로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 인체 해부에 지대한 공헌을 한 베살리우스 실험에서 저자들은 베살리우스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는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서서(말 그대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실제 증거뿐 아니라 상상력을 이용한 해부를 통해 밝혀진 내용을 강의한 당시 해부학 교수들과 다르게 그는 직접 해부를 시행하면서 진행 상황을 학생들에게 말로 설명했을 뿐 아니라, 직접 보게 함으로써 인체에 대한 지식을 심화하고 발전시켰다. 베살리우스는 인체 해부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켰고, 고대인(갈레노스)의 이른바 우월한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증거와 자기만의 실험을 통한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 갈릴레오의 연구에 영감을 받은 선구적 과학자였으며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창립을 돕기도 했던 보일은 세계를 탐구할 때 “설사 거기서 얻은 정보가 기존 생각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실제로 얻게 된 경험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과학자가 실험 결과를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4. 17세기 중반에는 생명체를 닮은 이 특이한 암석들이 뭔가 미지의 과정으로 뒤틀린 암석 조각이 생명체처럼 보이도록 변형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훅은 현미경으로 연구한 증거를 통해 화석이 변형된 암석 조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변형된 암석 조각이라고 하기에는 화석의 세부구조가 생명체의 모양과 지나치게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암모나이트라 불리는 화석이 “특정 갑각류의 껍질로, 대홍수나 범람 또는 지진이나 다른 유사한 수단에 의해 해당 지역으로 옮겨진 후 그곳에서 진흙이나 점토 또는 석화를 일으키는 물로 가득 차게 된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설명했다. “눌리우스 인 베르바Nullius in Verba”(어떤 말이건 의심하라)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처음부터 왕립학회의 과학자들은 과학적 발견에 대한 풍문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검증하기 위해 실험을 수행했다. 로버트 훅은 학회 초창기 이런 실험을 행했던 인물이었다.

 

5. 뉴턴은 1704년에 출간된 《광학Opticks》이라는 이 책에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견해를 요약해 놓았다. 그중에 한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석이란 실험과 관찰을 시행하고, 귀납법을 통해 일반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며, 실험이나 다른 확실한 진리가 아닌 그 어떤 이의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6. 와트는 ‘순수’과학과 ‘실용’과학 사이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실험과학자이자 발명가의 원형을 제공했다. 영국의 화학자였던 험프리 데이비가 와트에 대해 기술한 내용을 살펴보자.

 

제임스 와트를 위대한 기계공으로만 간주하는 사람은 그의 본질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와트는 기계를 발명하고 제작하는 능력뿐 아니라 자연철학자이자 화학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명품들은 그가 화학과 자연철학에 관한 심오한 지식의 소유자라는 것, 독창적이고 특별한 천재성으로 과학 지식을 융합해 실용적으로 응용하는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7. 최초의 백신을 만든 제너의 이야기가 전하는 중요한 교훈은 그가 천연두 예방을 위해 사람들에게 우두 접종을 해줬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일을 실행했던 사람들은 제너 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제너의 차이는 제너가 실험을 통해 사람이 천연두에 대한 면역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충분한 수의 피험자들을 통해 되풀이해서 그 사실을 확증했다는 것이다.

 

8. ‘푸아송 광점Poisson’s spot’이라 불리는 파동 가설의 예측을 증명한 실험은 특정 이론의 오류를 입증할 목적으로 실행한 실험이 오히려 그 정당성을 입증해낸 최고의 사례 중 하나다. 프레넬은 공모전에서 상을 탔고 빛의 파동 이론도 확립됐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뉴턴조차도 항상 옳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9. 어떤 실험의 의의는 처음엔 널리 평가받지 못한다. 주목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실험이 행해지던 당시에 팽배해 있는 사유의 틀과 잘 맞지 않기 때문이거나 또는 둘 다이기 때문이다.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이 실시했던 완두콩 유전 연구가 바로 그런 경우다. 멘델의 연구가 지닌, 시대를 뛰어넘는 탁월함은 그의 생물학 연구 접근법이 마치 물리학자의 접근법과 같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동일한 실험을 되풀이하고 실험 내용을 늘 상세히 기록해두며, 관찰한 바를 분석하기 위해 본격적인 통계적 검증 방법을 적용하는 접근법을 쓴 것이다.

 

10. 밀리컨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반대하기 위한 실험을 한 후에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결과를 얻고나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실험을 통해 배우고 변화하고 때로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면서 지난 10년을 보냈다. 애초부터 실험의 목적은 실험을 통해 (온도, 파장, 전압의 세기 등을 조절해가며) 광전자가 방출하는 에너지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에너지를 이 일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1914년 현재, 실험을 통해 내가 밝혀낸 것은 애초에 예상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사실이었다. 작은 실험적 오류를 인정하는 한, 결국 나의 실험 연구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이 타당하다는 실험 증거를 최초로 제시한 연구가 됐다.

 

11. 1919년 일식을 관측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검증한 유명한 실험은 과학적 방법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새로운 사상(이 경우 일반 상대성 이론)은 가설을 제시하고, 가설은 실험으로 검증된다. 실험의 검증을 통과한 가설이나 예측은 훌륭한 과학 이론으로 정립된다.

 

12. 비타민 B12 구조 발견으로 노벨상 수상한 호지킨은 노벨상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모든 결정 구조 문제를 엑스선 결정 분석으로 해결할 수 있다거나 모든 결정 구조가 풀기 쉽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제 인생의 시간 중에는 결정 구조를 풀어낸 시간보다 풀어내지 못한 시간이 훨씬 더 깁니다. 인슐린을 엑스선 결정법으로 분석하기 위한 저희의 노력을 예로 들면서, 엑스선결정학이 극복해야 할 난제들 중 일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과학에서의 실험은 이론이나 법칙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소들 중 하나다.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 많은 실험들이 흥미롭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또한 앞으로 많은 자연 현상들이 사람들의 상상력과 끈기를 통해 발견되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과학 실험앞에 과감하게 도전해보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이 책의 실험들은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윤세진 (과신대 교사팀, 구일고등학교 생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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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갈 길을 가 보자!

  • 와우 저도 이같은 고민을 하고 이곳에 찾아왔는데
    좋은 정보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창조가 단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닌 창조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으로 보고있네요. 혹은 재창조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싶습니다.
    저에게도 희망이 생깁니다.

    증인 2020.01.08 23:24

 

김정형 | 창조론-과학시대 창조신앙 | 새물결플러스 | 2019

 

전희경 (과신대 교사팀)

 

 

창조론에 대하여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서 밴쿠버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에서 3년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과학자와 신학자의 자리가 아니라 과학 교사의 자리에서 저의 역할을 잘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올해 8월 한국에 귀국했습니다. 한국의 학교와 교회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과학교육과 교회교육을 하겠다는 사명을 안고 말이죠.


3년 만에 귀국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모습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양극단으로 심하게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교회 역시 양극단으로 나뉜 채, 말씀 안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세상과 담을 쌓고, 교회만을 위한 사역을 강화하는 전략을 취하는 듯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름 생존하려고 저항과 평안을 오가며 균형을 잡으려고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내 몸과 맘이 유학생활 때와는 또 다른 힘듦으로 고생을 하고 있구나… 이것은 한국 생활 재적응 중이겠지… 인생은 늘 적응이구나…’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교회의 선배, 후배, 친구들이 한 사람씩 저에게 찾아와 물어봅니다. 공부하고 온 것이 무엇이며,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과학교육을 해야 하는지, 교회에서 궁금하고 답답했던 것, 교회의 문제점도 주저리 이야기합니다. 다들 나름 훌륭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인데, 순수하면서도 묵직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3년 만에 만난 우리의 교회는 너무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변함없음’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더군요. 그리고 교회의 주일학교와 사역자님들의 ‘창조론’에 대한 이분법적인 프레임과 ‘타락-구속’의 강조는 여전했으며, 그 벽의 두께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두껍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 아자 아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갈 길을 가 보자.’

 

2020년에는 교회에서 중등부 교사와 교육위원회로 봉사하기로 했습니다. 중등부 담당 목사님과 선생님들이 ‘창조론’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물어도 보고 도움도 요청하셨습니다. 전 뭐가 신이 나는지 블라블라 저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괜스레 조심스러워도 합니다. 교회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걸까요? 이런 변화의 바람을 기대하면서도 의심스러워할 때 김정형 교수님의 <창조론-과학시대 창조신앙>을 알게 되었고, 읽게 됐습니다.

 

 

먼저 이 책의 저자가 한국인 신학자라서 좋았습니다. 북미와 유럽의 유명한 신학자의 책이 아닌 한국인 신학자의 책이라서 반가웠습니다. 한국교회의 문화를 알고 한국 신학적 시각에서 풀어내는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책의 저자 김정형 교수는 <창조론- 과학시대 창조신앙>에서 창조론에 대한 용어들을 먼저 정리하고, 자신이 창조론에 대해 풀어나갈 이야기가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출발함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 책은 ‘창조-진화의 논쟁’이나 ‘창조의 기원과 시기’를 말하는 창조론이 아님을 말하였다. ‘창조론’을 ‘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 표현하고, 이는 조직신학의 한 범주라고 말합니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견해라든가 창조의 기원과 방식에 관한 창조론은 ‘창조설(Creation)’이라 명명하고, 이를 신학 교리인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과 구분합니다. 창조론은 엄연한 신학이기에 창조론과 창조설은 논하는 범주가 다름을 강조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창조론이라고 하면 창조설, 특히 창조과학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오해를 지적하고, 창조론의 신학적 의미가 축소되거나 생략되고 있는 교회 현실을 안타까워합니다.


“창조론은 창조-계속 창조-새 창조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창조론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과거에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셨고, 현재도 살아계셔서 다스리고 계시며,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상을 새 하늘 새 땅으로 새 창조 하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과거에 한 번에 이룬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역사하시고 미래에도 역사하시고 완성될 큰 프로젝트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과학혁명의 시대를 거치고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교회는 고대 근동의 과학관을 가지고 성서를 해석하는 창조설을 붙잡기보다 기독교 정통주의 창조 신학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현대과학이론은 포용하고 현대과학주의는 비판하면서 기독교 창조신학을 더 풍성하게 정립해 나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는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말하는 ‘창조-타락-약속-십자가-미션-심판-새 창조’라는 7막의 드라마 성경 이야기와 김홍전 목사님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 통합의 깨달음이 저는 기뻤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시대를 따라, 시대를 거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드러나게 하시고, 풍성하게 알게 하신다는 것 말이죠. 창조론을 창조 프로젝트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으로 그려낸 김정형 교수님의 신학적 통찰이 놀라웠으며 큰 울림을 줬습니다. 


이 책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부분은 과학이론, 진화이론, 생물과학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과학 이론을 신학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과학책을 과학적 사고로 읽어 내려가듯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이론에 대하여, 진화이론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무관심하지 말고 제대로 보자는 것이죠. 이 과학이론들의 내용이 무엇이며, 과연 이 이론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반하는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생물학 책을 만났고,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말하는 진화이론을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도 현대 과학이론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화이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반대하는 것도,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화이론은 생명의 적응과 변화, 그리고 다양성을 말하는 과학이론일 뿐입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창조론에 대한 통찰과 재미에 빠져 있다가도 머리 한 구석으로는 계속 한국교회 현실을 생각했습니다. 창조 신학은커녕 창조연대와 창조 방식에 집착하는 교회, 창조설(창조과학)이 전부이고 다른 의견은 위험한 견해로 보고 있는 현실 말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에서 그동안 창조과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현대 과학에 무관심해진 것이 결국 창조론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의 창조론 교육은 눈높이 교육이 필요합니다. 창조론에 대한 오해와 이해의 측면에서 교회 내의 세대 간 특징에 맞게 눈높이 교육이 실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략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창조설을 주장하기보다는 다양한 창조설이 있다는 것을 알기고, 진화 이론과 진화주의 구분하고, 과학과 신학에 관심 갖기 정도의 학습목표를 잡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시간은 오래 걸린다는 것을 미리 각오하고 말이죠. 그래도 천천히 그리고 재미있게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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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음의 과학

  • 무신론자로 살기위해서는 상당한 신학적 지식이 있어야 가능한가봅니다.
    신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는 본능을 구별하고 그것을 억제하거나 인식하려고 한다니 영국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신학적 식견이 대체로 높은게 아닌가 보여질때도 있습니다.

    반기독교적인 사람으로 인해 오히려 기독교내의 부패가 보여지고 도려질 수 있다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서두였습니다!.

    한가지 의문점은 리처드 도킨스가 제시하는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신학에서 제시하는 자유의지라는 개념하고 상반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문명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아직 정립이 되지 않았습니다.

    증인 2020.01.09 00:00
    • 비꼼과 현학적 언어의 교란.

      궁금 합니다 2020.01.26 20:26 DEL
  • 1.고대인들에게 사실/역사/과학의 의미는 분명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만약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고대의 메시지를 사실/허구의 이분법으로 구분한다면 그 역시 시대착오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고대인은 사실,역사,과학을 인지하는데 어떻게 다른지요?

    그러므로 고대 메시지를 사실/허구로 구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맥락을 이해하란 의미로 들립니다만,

    도킨스가 주장하는 것은 고대의 메시지(추상적)를 사실/허구로 나누는 이분법이 아닌..
    고대의 사건을 사실과 허구로 구별한 것으로 이해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고대의 메시지와 고대사건의 사실관계는 정확히 다른 말입니다.

    역사를 인식하는 것도 사실을 근거로 이해 해야만 옳바른 인식이며 신뢰 할 만한 메세지를 얻는게 아닐까요?

    궁금 합니다 2020.01.25 10:16
  • 2.결국 무신론자도 결단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이 문구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궁금 합니다2 2020.01.25 10:19
  • 2. 결국 무신론자도 결단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무신론자의 신념과 결단은 팩트에 의한 신뢰를 의미하는데 종교인은 어떤 의미의 증명을 말하는 겁니까?

    이렇게 무신론자들의 글을 호도한다면 글쓴이의 8번째 글

    (만약 종교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다면, 어쩌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종교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신의 흔적이지 않을까? )

    위 님의 글을..
    유신론자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애처롭게 만들어 내려는 걸 증명한다고 한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궁금합니다 2 2020.01.25 12:24
  • 3. 이 판단의 근거가 인지부조화의 전형 같이 느껴집니다.
    객관적 사건을 다루지 않고 추상적 판단으로 넘아가는..
    특히 '부활'이란 사건입니까?
    아니면 비유 입니까?

    믿음이 신념이 된다..

    '믿음'이란 단어의 의미를 '인정'함이 아니라 '바램'의 의미로받아들인다면 증명할 필요도 없으며 신념이 되어서도 안되겠죠.

    궁금합니다 3 2020.01.25 12:29
  • 5. 종교의 해로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태도와 결정보다
    새로운 시대에는 합리적 공리성을 다루는 것이종교보다 인간에게 더 이로울 수 있지 않을까요?

    종교 지도자 분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정치적 판단까지도 하시겠지만..

    궁금합니다 5 2020.01.25 15:30
  • 6.물론 정확한 팩트 체크와 증거에 기반해서 신념 체계를 확립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신념이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팩트체크, 증거외에 구성되어지는 예는 직관의 정언명령에 따라 구성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인지요?
    그리고 증거주의 비판론과 성서의 사건 사실관계를 따져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인식 됩니다.

    궁금합니다 6 2020.01.25 15:43
  • 7.도킨스와 데닛은 과학은 전통적인 진리대응론에 상응하지만, 종교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킨스와 데닛은 지독한 근대적 합리주의 체계 속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현 세대들이 근대적 합리주의 체계의 사고를 갖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현대사회 아닌가요?

    궁금합니다 7 2020.01.25 16:01
  • 8.정부를 열렬히 비판하는 사람도 세금은 꼬박꼬박 내고...

    히친스 대담중에..
    잘못된 예시가 아닐까 합니다.

    비판은 하지만 우리가 정한 조세법을 지키는 것이 '인지 부조화'라니...

    그리고 종교란 진리인데 왜 종교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야 하는 건가요?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 아닌가요?

    글솜씨는 많은 교육에서 나올 수 있겠지만 글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흐트리는 방식은 옳은 글쓰기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글 쓰신 분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궁금합니다 8 2020.01.25 16:10

 

적을 통해 배우는 신앙

리처드 도킨스 외 | 신 없음의 과학 | 김영사 | 2019

 

글_ 최경환

 

 

이런 책을 읽을 때에는 마음을 열고 읽을 필요가 있다. 메롤드 웨스트팔이라는 기독교 철학자는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를 기독교를 위한 예언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기독교를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기독교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부패하고 썩은 것을 도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성서 안에도 예언자적 전통은 기존 야훼 신앙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무신론의 수호자 4명에게서 우리는 기독교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을 경청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네 명의 학자들은 자신의 책이 출간된 이후 다양한 토론과 논쟁의 자리에 참여했고, 그 이후 어느 정도 자신의 입장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결과물이다. 책 내용을 요약하기보다는 읽으면서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간단하게 소개하려 한다.  

 

  1. 의미가 중요하다는 변명

    저자들은 흔히 신학자들은 사실에 관심이 없고, 그 의미에 관심을 둔다고 말한다. 즉, 성서해석이나 교리를 해석할 때, 그들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그저 상징이나 의미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신학자들의 변명이다. 그러면서 일반 성도들에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믿으라고 강요한다.

    예를 들어, 연옥 교리를 말할 때, <가톨릭 백과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곧장 간다면 우리가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는 하늘나라로 곧장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연옥이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상으로 증명 끝” (46쪽)

    신학적 의미가 중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이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부활은 역사적/실증적/과학적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신학적 의미가 중요하다고 할 때, 그것은 기독교 교리나 진리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신학자들은 종종 기독교의 진리가 과학적 입증 방식에 따라 증명되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기독교는 원래 있지도 않은 사실 위에 온갖 화려한 건물은 지은 것인가? 

    하지만 일반적인 역사학에서도 근대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은 이미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고대인들에게 사실/역사/과학의 의미는 분명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만약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고대의 메시지를 사실/허구의 이분법으로 구분한다면 그 역시 시대착오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2. 무신론자도 믿음이 필요하다?

    도킨스는 무신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의 신념 역시 결단과 지적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창조주나 지적 설계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런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고 말한다. (57쪽)

    결국 무신론자도 결단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3. 신앙의 이중장부

    저자들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이중적으로 사고한다. 스스로 믿음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늘 기도한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행동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한다. 상당히 모순적이다.

    그러면서 믿음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활 사건이 대표적이다. 기독교인들은 부활이 완전히 객관적인 사실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믿음이고 신념이라고 말한다. 마치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4. 비겁한 신학자들

    “여기 있는 모든 분이 제리 폴웰 같은 쉬운 표적을 겨냥하고, 학식 높은 신학 교수들은 못 본 체한다는 비난을 받아왔어요. 다른 분들은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느끼는 점은 학식 높은 신학 교수들이 자기들끼리나 지식인에게 하는 말과 신도들에게 하는 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신도들에게는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106쪽)

    “네. 그런데 학식 있는 신학자들이 목사나 전도사에게 말하면, 목사들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겁니다.” (107쪽).

    이건 그냥 뼈 아프게 듣자!!

  5. 종교의 해로움

    네 명의 학자들이 동일하게 지적한 것은 “종교의 해로움”이다. 예를 들어, 점성술은 종교와 비슷하게 미신적 사고를 조장 하지만, 적어도 종교처럼 해롭지는 않기 때문에 폐기시킬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156쪽) 하지만 종교는 세속적 기준으로 봐도 해롭다.

    종교인들이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해롭지 않을 수도 있다. 신앙을 온전히 사적 영역에 가두고, 공적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세속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세상에 해로운 것이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인들을 그렇지 못하다. 자살 폭탄 테러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사회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는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만약 종교가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서 해롭지 않으면 되는 걸까? 반대로 종교가 세속적인 기준으로도 이롭고 유익하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종교가 해롭다는 이들의 주장은 그동안 종교가 공공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로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공공신학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공공선과 인간의 번영에 기여하는 종교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미로슬라브 볼프의 <인간의 번영>을 참고

    하지만 또 다시, 이들의 주장이 정확한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말 이들의 말처럼 종교는 인류 역사에서 해롭기만 했는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 역시 종교가 서구 역사에서 얼마나 잔인한 전쟁을 많이 일으켰으며 해로웠는지를 지적한다. 이에 대해 월터스토프는 과연 종교가 해롭기만 했냐고 반문한다. 30년 전쟁을 통해 관용과 배려의 정신을 서구 역사에 심어 놓은 것이 바로 기독교였고, 미국의 인권운동과 해방운동에도 기독교는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이(심지어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인민을 학살하고 폭력적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어쩌면 종교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거나 과도한 정치적 열망이 타자에게 강요될 때,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1990년 이후 비판이론가였던 하버마스가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세속 사회에 종교의 귀환을 요청한 이유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공론장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했던 하버마스는 왜 다시 종교를 소환한 것일까?

  6. 증거주의

    도킨스는 “자기가 어떤 것을 증거 없이 믿는다는 이유로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며 산다면 너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라고 말한다. (157쪽)

    증거주의(evidentialism)에 입각해서 지식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 같지만, 또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지식이 확보되지 않는다. 증거주의 인식론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비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개혁주의 인식론을 통해 증거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 나온 <그리스도인을 위한 서양 철학 이야기>를 참고하면 좋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대부분은 정확한 증거에 기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습관에 의해서, 누군가의 권위에 의해서, 혹은 막연히 ‘그냥’ 믿으며 살아간다. 물론 정확한 팩트 체크와 증거에 기반해서 신념 체계를 확립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신념이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7. 실용주의 진리관

    도킨스와 데닛은 모두 종교와 예술을 실용적인 가치 체계로 인정한다. 즉 그것이 실재 세계와 대응하는 진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관계나 어떤 기능을 수행하면 된다는 식이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환상적입니다.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이야기죠! 믿지 않아도 모든 대목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186쪽)

    이는 리처드 로티의 실용주의적 종교관과 유사해 보인다. 다만 로티와 다른 점은, 로티는 우리가 그동안 진리라고 여긴 모든 것들도 동일하게 실용적인 기능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과학이나 종교나 예술이나 모두 동일한 레벨이라고 말한다는 것이고, 도킨스와 데닛은 과학은 전통적인 진리대응론에 상응하지만, 종교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킨스와 데닛은 지독한 근대적 합리주의 체계 속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8. 결론

    궁극적으로 네 명의 학자가 종교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그것의 해악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똑 같이 나쁜 것이다. 종교의 해악성에 있어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사실의 차원에서는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정도의 차이는 없다. 모든 종교는 이성보다 믿음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성과 믿음이 늘 양립불가능한 것이지 물을 수 있다. 히친스도 인정하듯 모든 사람은 인지부조화 속에서 살아간다. 정부를 열렬히 비판하는 사람도 세금은 꼬박꼬박 내고, 자식은 공립학교에 보낸다. 말로는 자신이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따라 산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복잡하고 선명하지 못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헷갈려한다. 이것을 자아의 분열이라고 할 수도 있고, 복수적 자아라고 할 수도 있다. 이념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분열되고 다른 판단을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오랜 시간 인간은 신을 믿고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살아왔다. 어떤 철저한 근대인도 그 습속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우리의 몸속에는 종교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치 맹장을 떼낸 사람이라도 할지라도 그 상흔은 남아있는 것처럼. 서구 사회에서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근본주의 종교가 증가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저자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과학적 세계관이 증가하면 할수록 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자리를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게 자리를 지킬 것이다. 어떤 이는 종교가 최후의 발악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종교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다면, 어쩌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종교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신의 흔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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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과신책] 학자의  읽기

 

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엔도 슈사쿠 | 침묵의 소리 | 김승철 역 | 동연 | 2016

 

김영웅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의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침묵 가운데서도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침묵’은 ‘침묵의 소리’로 다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침묵’을 오독했던 독자 중 하나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침묵’을 ‘침묵’으로만 읽었던 많은 독자들 덕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묵의 소리’는 ‘침묵’에 해제를 붙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침묵’에 대한 오독이 엔도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독 덕분에 우리들은 엔도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좀 더 친밀하고 좀 더 친절하게 말이다. 나도 그랬다. ‘침묵의 소리’를 읽으며 ‘침묵’ 너머에 있는 엔도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침묵'을 읽을 때에는 못 느꼈던 것들이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엔도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사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침묵’을 집필하게 되었던 이유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인생과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전해지지 않았던 (침묵했던) 엔도가 내겐 비로소 전해졌다 (소리로 들려졌다).

 

 

그는 토종 일본인이면서도 서양에서 전해져 온 기독교 (가톨릭)를 받아들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스스로도, ‘어릴 적부터의 기독교는 자신이 믿지도 않은 세계에 자신의 몸이 내던져진 사람이 겪는 이문화 체험’이라고 고백한다. 엔도에게 기독교는 그만큼 이질적인 문화였고, 그 속에서 그는 혼란스러웠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자인 김승철 교수 역시 서문에서, 엔도에게는 어릴 적 자신이 받았던 세례에서부터 ‘기독교가 일본에서 자란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 늘 그를 따라다니던 물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엔도는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일본인인 자신의 몸에 맞는 신앙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결심이 마침내 소설가 엔도를 탄생시켰다고 역자는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실로 소설 ‘침묵’은 엔도의 삶 전체가 녹아 있는 책인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로부터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히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판 경우에는 아예 누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배교한 기리시단들을 한데 모여 살게 했던 기리시단 주거지에서 20년에 걸쳐 간수로 일했던 어느 하급 무사가 남긴 일기 형식의 문서이다. 엔도는 이 실제 문서를 약 10분의 1 정도로 줄이면서 발췌해서 고쳐 쓰는 방식으로 ‘관리인의 일기’를 작성하였고, 이를 ‘침묵’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게 해두었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 번역판을 읽은 나에게 ‘침묵’의 마지막은, 끝내 배교한 로드리고 신부와 이미 배교했던 페레이라 신부를 향하여, 그리고 끊임없이 간교함과 성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던 기치지로를 향하여 결코 좋지 못한 시선을 줄 수밖에 없게 해 주었었다. 이는 반대급부로, 끝가지 후미에를 밟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낌없이 버린 순교자들을 향한 시선을, 마음 아프지만, 옹호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침묵이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마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도 나는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샌가 배신이냐 죽음이냐의 문제가 신앙을 버리느냐 지키느냐의 문제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자 김승철 교수가 직접 해제 및 번역과 주해를 한, 이 책에 수록된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를 읽고 난 후, 난 비로소 의문이 해소될 수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강한 자들의 입장이 옹호되는 반면,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으며 배교하여 목숨을 건진 약한 자들의 입장이 멸시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나는 비로소 해방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기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하고 다른 이들에게 포교 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간교함을 얼굴에 써놓은 듯한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예전과는 달리 로드리고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일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의 회복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침묵의 소리'의 도입부에서 엔도는 나가사키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 안에서 동판에 새겨진 후미에를 만나고 그 나무틀에 남아있던 수많은 검은 발자국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믿는 것을 발로 밟았을 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약자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침묵'의 주인공으로서 담대하게 순교한 강자가 아닌 끝내 배교한 약자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침묵의 소리' 책 안에는 엔도의 다른 단편 소설들이 몇 개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아버지의 종교, 어머니의 종교'에서는 엔도는 가쿠레 기리시단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들의 시작은 순교가 아닌 배교였다. 그들의 신앙은 승리자의 신앙이 아니라 실패자의 신앙이었다. 그들 신앙의 출발점은 자신들이 배교자, 약자라는 자각이었으며, 그 어두운 출발점이 그들의 신앙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신앙이, '어머니 되시는 분'이란 단편 소설에서 말하듯이, 오랜 시간을 비밀리에 거쳐 오면서 불교나 다른 종교, 심지어는 토속적인 미신까지 뒤섞여 있는 종교로 변질되었지만, 그들의 아픔과 회한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단번에 이교도나 이단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엔도가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침묵'을 썼다는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다. 때문에 '침묵'을 읽고 난 후 느꼈던 찝찝함은 말끔히 해소가 되었다. 예수의 예언대로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엔도의 표현대로라면, 가쿠레 기리시단의 조상들처럼 후미에를 밟았던 셈이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그 세 번의 부인함으로 인해 예수께 질책을 당하거나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을 체험한 지도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 페레이라나 로드리고, 그리고 간교한 기치지로라고 해서 그들의 배교 행위 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며 그 영향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았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엔도는 말한다. 자신 역시 페레이라이고 로드리고이며, 또 기치지로라고. 자신 속의 여러 인격을 각각 독립시켜 그것을 작중 인물로 그려나갔던 것이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의 차이로 인해 다행히(?) 나는 고문과 죽음이 문턱에 와 있는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을 뿐, 일상 속에서는 밥 먹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매일 배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이다. 가쿠레 기리시단은 일 년에 한 번씩 후미에를 밟는 행위를 지속해야 했지만, 그 행위 이외에는 비밀리에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머리와 입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말하고 가끔은 마음까지 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이 관성에 의해 나만의 가치관에 의해 나를 움직인다. 마치 기계 돌리듯 말이다.

 

물론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겠지만,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통해, 약자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신앙 지키기는 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단지 신은 침묵한다는 메시지나, 침묵 속에서도 말한다는 메시지를 넘어서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종합해 볼 때, 아니 내가 만난 엔도를 느껴볼 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나 늘 잊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스스로 곱씹게 만들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결국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 가운데 침묵하시든지 침묵하지 않으시든지,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게 된 것이다. 엔도를 통해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약한 페레이라, 로드리고, 기치지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순간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분이 침묵하시든 침묵으로 말씀하시든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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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승현준 | 커넥톰, 뇌의 지도 | 신상규 역 | 김영사

 

글_ 최성일 (과신대 정회원)

 

 

5년 전 인간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이후, 항상 뇌에 대한 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이 책이 첫 책이었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의 역사를 시간 순서로 잘 설명했고, 현재 뇌과학의 상황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큰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큰 그림은 희망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쉽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희망적인 것은 뇌의 신비를 좀 더 알 수 있게 되고, 정신질환의 근본적 치료법이 열릴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쉬움은 커넥토믹스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는 것이었고(21세기 말이 되어야 뇌의 지도, 즉 커넥톰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커넥톰의 작용 메커니즘을 밝히는 커넥토믹스의 완성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염려가 되는 것은 이 미래의 기술을 믿고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신체를 냉동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은 케빈 켈리의 “통제 불능”을 읽은 후에 가졌던 느낌과 같았습니다. 또한 필자가 이야기 하는 오늘날 컴퓨터의 엄청난 연산능력으로 완성될 커넥토믹스는 19세기의 라플라스의 악마를 연상시켰습니다. 전자현미경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뉴런의 연결 지도가 완성되고, 뉴런들이 각기 어떻게 연결되어 기억, 이해, 감정(사랑) 등등을 일으키는가 하는 알고리즘이 커넥토믹스에 의해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기억을 마음대로 업로드/다운로드할 수 있고, 또 조작도 할 수 있고, 기능을 향상 시킬 수도 있을까요? 과연 사람의 생각, 또는 의식, 또는 영혼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과연 한 사람의 과거의 생각, 현재의 생각, 미래의 생각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의식 또는 영혼이라는 것은 물질에 종속된 것인가요?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2007년 한 사람의 유전자 지도(genome)가 완성이 된 후, 유전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크리스퍼 가위가 발명되어 유전자 조작이 꽤 자유로워져서 유전자 수준에서 질병을 미리 예방하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일반인들인 우리는 이런 과학기술들만으로도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게놈은 커넥톰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머리 밖에도 우주가 있고, 인간의 머리 안에도 그에 못지않은 광대한 우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1입방밀리미터의 뇌 지도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이미지 정보의 양은 1페타바이트(1015 바이트)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커넥톰 수준은 길이가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의 커넥톰을 완성한 정도입니다. 이것만으로도 12년 이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쥐와 고양이, 침팬지를 거쳐 인간의 커넥톰을 완성하려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저자는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 21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인간 커넥톰이 완성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직경 30센티 안에 천억 개의 뉴런(신경세포)으로 되어 있다... 길이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은 300개의 뉴런으로 고작 7000개의 신경계 연결망을 가지지만, 그 지도를 그리는데 12년 이상 걸렸다. 당신의 커넥톰은 1000억 배 이상 크며, 당신 게놈의 염기 수(뉴클레오티드 수)보다 100만 배 정도 많은 연결을 가지고 있다. 커넥톰(뇌의 지도)에 비하면 게놈(유전자 지도)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1입방밀리미터에는 10억 개의 시냅스가 밀집돼있다."(커넥톰, 뇌의 지도, 승현준, 김영사, 12, 22, 95쪽)

 

저자는 인간의 유전자 지도와 뇌의 지도는 또한 가소성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비록 조작을 할 수는 있지만, 유전자는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고, 뇌의 지도는 성장하면서 뉴런과 뉴런의 연결이 경험과 학습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뇌의 가소성을 기반으로 저자는 커넥토믹스가 완성되면 인간의 사고, 감정, 기억 등등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뇌의 가소성의 4가지 형식인 재가중(reweighting), 재연결(reconnection), 재배선(rewiring), 재생성(regeneration)을 정신 활동에 관여하는 뉴런과 시냅스들의 움직임이라고 설명합니다. 일단 커넥톰이 완성되면 이 네 가지 R을 바탕으로 뉴런들 간의 연결인 커넥토믹스를 파악하여 정신활동을 더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책의 내용이 워낙 전문적이고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세세한 내용 정리는 제 입장에서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까지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자를 21세기의 기계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세 가지 비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저자가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진술이 추측과 기대를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한 인간 커넥톰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하지만, 미래 기술에 대한 추측과 기대라는 불안한 기초 위에 “인체냉동술”, “업로딩” 등에 의한 영원한 젊음, 영생을 얻어서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마치 인류가 당연히 걷게 될 방향으로 단정하는 것 같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좁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 저자는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또 다른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끝내고 있습니다. 그 외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문학의 대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이야기한 인간의 정신의 활동이 뉴런과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와 화학신호들의 상호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 의식의 문제를 추적했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사고 과정에 관여하는 이러한 물리적 메커니즘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의식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모듈 – 예를 들면 할머니 모듈 – 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모듈의 존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통찰이라도 제시할까? 아니면 의식의 본질에 관해서 우리를 여전히 깜깜이 상태로 놓아둘 것인가? 뇌가 뉴런과 신경교(膠)로 구성되었다는 지식이 의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GEB, 471쪽)

 

수학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무의미한 형식체계로부터 창발하는 인간 자의식을 이해하려고 했던 호프스태터의 관점에서 보자면, 저자는 너무 컴퓨터의 기계적 연산능력을 과신하는 것 같습니다.

 

파스칼을 상당히 좋아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파스칼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기보다는 일부만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이용하는 것 같아 섭섭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학의 천재였던 파스칼이지만,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느끼며 여생을 살았었을 텐데, 그런 것까지 뇌 속의 전기신호와 화학신호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끝으로, 이 책은 커넥토믹스의 미래를 너무 핑크 빛으로만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활동의 신비에 대해서 더 많이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커넥톰과 커넥토믹스라는 개념을 알기 전에도,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하고,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하고, 책을 읽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의 메커니즘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정확히 나타낼 수 없는 지금도 우리는 아주 멋지게 그런 정신활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커넥톰과 커넥토믹스가 빨리 발전해야겠지만, 커넥토믹스가 없더라도 정신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너무 미래에 치우쳐서 현재의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신경학자로서 자신이 아끼는 분야의 미래를 극한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고 또 그래야 이 분야가 주목을 받고 활성화될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저 자신은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즐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종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하신 일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몰라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신비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신비한 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뇌피셜적 독후감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