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책] 쉽게 쓴 후성유전학

 

러처드 C. 프랜시스 | 쉽게 쓴 후성유전학 | 김명남 옮김 | 시공사

 

글_ 윤세진 (구일고등학교 과학교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천년에 대한 다양한 기대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여러 분야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것이라는 전망들이 많았었다. 그중에서도 과학 분야는 당연하게 기대를 받는 많은 분야들이 포함되었다. 20세기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중심이 된 물리학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유전자나 유전공학으로 대변되는 생명과학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1)

 

20세기 중반에 왓슨과 크릭에 의한 DNA 구조가 밝혀진 이래로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 생명공학 기술 등이 발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준 것이 사실이다. 유전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수사(修士)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이 완두를 이용한 실험에서 출발하였다. 토마스 모건(Thomas Hunt Morgan)에 의해 염색체 위에 유전자가 존재함이 밝혀졌고, 왓슨과 크릭의 연구 이래로 분자 유전학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였다. 생명공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혜택들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한 윤리적인 문제들도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가타카’나 ‘아일랜드’ 같은 영화는 이런 문제점들을 생각하게 한다.

 

 

대체로 생명공학 기술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유전자와 많이 연관이 되어 있다. 흔히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발표되곤 하는데,2) 이런 발표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전자가 사람의 여러 형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3) 실제로 유전자는 사람이나 다른 생물체의 형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전자는 DNA에 존재하며, 필요한 단백질을 만드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 유전자가 단백질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단백질은 생물체 내에서 다양한 형질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이 그림은 DNA가 단백질을 만드는 주인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기본적으로 이 생각은 옳은 것이다.

 

이렇게 유전자가 생물체의 모든 형질을 결정하는 주인 역할을 한다는 생각은 현대에 부활한 전성설이다.4) 전성설은 19세기까지 번성하다가 후성설이 등장하면서 19세기 중후반부터 쇠퇴하였다. 그러나 DNA에 의해 단백질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전성설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생명공학적인 기법들(최근에 논란이 되는 크리스퍼 기법도 결국은 이런 전제하에서 발전되는 기법이라고 생각한다)은 대체로 전성설의 입장이라고 본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지금까지 후성유전학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 이제부터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후성유전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5) 후성유전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독일이 네덜란드에서 실시했던 식량 봉쇄정책으로 인한 네덜란드 대기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산모의 영양상태가 태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연구하였는데, 태아일 때 기근을 경험하고 태어난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성인이 되었을 때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출처: http://www.p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21

 

후성 유전 현상은 환경이 세포의 변화를 일으키고, 세포라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유전자의 활동을 조정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세포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후성 유전적 조절을 받은 유전자의 특징은 유전자에 메틸기(CH3)가 붙는 것이다. 이런 유전자를 메틸화된 유전자라고 부르며, 이런 유전자는 활동성이 낮아져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세포마다 다르거나 개체마다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유전자가 형질 발현의 중심이 되는 것을 ‘유전자 감독 가설’이라 부르고, 후성 유전적인 형질 발현을 ‘세포 감독 가설’이라고 부른다. 유전자 감독 가설에서는 세포를 조절하는 정보를 유전자가 가지고 있으며, 유전자가 단백질 합성 단계를 통제하여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어 세포 활동을 통제한다. 반면, 세포 감독 가설에서는 유전자는 생화학 분자들로 이루어진 구성원들의 한 구성원이며, 이들의 상호작용을 세포로 본다. 따라서 단백질 합성 단계를 안내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세포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후성 유전적 영향을 미치는 것에는 앞에서 언급한 메틸화 이외에 DNA와 결합하고 있는 히스톤 단백질 변형에 의한 영향, 그리고 RNA에 의한 영향의 세가지를 제시한다. 이런 후성 유전적 현상은 당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후성유전적 영향을 받은 유전자가 자손에게 계속 전달되어 동일한 형질 발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비만 문제, 호르몬 관련 문제, 게놈 각인 문제, X염색체와 관련된 색맹과 관련된 문제, 암과 관련된 문제 등이 후성유전적인 현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후성유전 현상뿐 아니라 다른 동물과 식물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도 설명하고 있다.

 

출처: http://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464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몇가지 있다. 첫째로, 후성유전학에서 강조를 두어야 할 점은 “후성”유전학이라는 점이다. 기존과 같은 유전자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책에서 많은 유전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유전자들은 모두 환경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둘째는, 유전자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대의 전성설이나 근대의 전성설이 모두 후성 유전적 현상에 의해서 잘못된 것이 판명되었지만, DNA구조가 밝혀지면서 다시 전성설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본문 10장 참고). 이는 인간의 직관적인 이해가 전성설에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상과 친숙한 비유들을 제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후성유전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면, 후성유전이 훨씬 설명력이 크고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라마르크가 제시했던(아마도 라마르크 추종자들이 주장했을 수도 있다) 획득형질의 유전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라마르크는 유전자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였으므로 후성유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후성유전이 환경에 의한 유전자에의 영향이라고 볼 때, 살아가는 환경에 의해 변화된 유전자가 자손에게 전달되는 것은 큰 틀에서 라마르크의 언급 또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넷째는, 도킨스는 자신의 유명한 책인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기체는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제시했다.6) 이는 유전자 중심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전자가 중심이기보다는 세포가 중심이고 더 나아가서는 유기체가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유전자는 세포의 환경이나 유기체가 처해 있는 환경에 의해 얼마든지 후성유전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체의 유전 현상을 바라볼 때, 직관적으로는 유전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환경의 영향을 받아 유전자의 발현이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러한 후성유전적 현상은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나올 것이다. 유전자들이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연구와 동시에 유전자에 미치는 후성유전적인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함께 수행한다면 비로소 생물체내에서 일어나는 유전자에 대한 이해가 완성되지 않을까.

 


 

1) 임경순, "과학기술연재1-21세기 과학기술의 전망"  bit.ly/2PKQ0er

2) 비만유전자 bit.ly/3kz4f42, 신경질환의 유전자  bit.ly/2Fcbq1Q,  장수유전자 bit.ly/3kzu6sN, 범죄유전자 bit.ly/2XTLNcA

3) 형질: 대개 생명과학에서 형질이라 하면 유전적 형질을 말하며, 이는 생명체가 지닌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최근에는 형질을 규정하는 요건들이 다양화되어 생김새나 색깔, 크기뿐만 아니라 생리적 특징이나 행동양식의 특징 등도 중요하게 거론된다. bit.ly/3iwjI2U

4) 고전적인 의미에서 전성설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세오.  bit.ly/2DUqyAq

5) 후성 유전학 개념의 시작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세요. bit.ly/3amR01z

6)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이상임 옮김(2006).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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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자의 소명: 리처드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

 

최근에 영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 1934~)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스윈번은 그동안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을 활용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해 왔다.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그 내용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6년에 <Is There a God>이라는 얇은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이 이번에 복있는사람 출판사에서 <신은 존재하는가 - 세계와 우리 존재의 기원과 과정과 목적을 논증하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독교 철학자 책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어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사연이 담긴 책이라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2007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리처드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졸업 논문을 썼는데,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몇몇 종교철학 개론서에서 리처드 스윈번이라는 이름을 접하기는 했지만, 그의 전체적인 사상을 접할 수 없어 어렵게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추억 속에 묻혀 있던 이름이 한참의 시간이 지나 다시 등장하니, 책장 깊숙한 곳에 꽂아 둔 졸업 논문도 오랜만에 찾아서 읽어 보고, 혼자서 히쭉거리며 이불킥도 날렸다.

리처드 스윈번은 이제 85세가 넘은 노학자지만 지금까지도 연구와 집필을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학문적 업적을 쌓고 있는 열정의 철학자다. 1972년부터 교편을 잡았고, 1985년부터 2002년까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기독교 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아마존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니 16권의 책이 나온다.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당대 철학으로 엄밀하게 논증하고 증명한 학술서라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책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나온 <신은 존재하는가>는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좋은 입문서이자 해설서가 될 것이다.

 

처음 스윈번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케이스 M. 파슨스(Keith M. Parsons, 1952~)이 쓴 <God and the Burden of Proof>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철학자 두 명을 소개하고 이들의 변증 방법론을 비교한다.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노터데임대학교의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 1932~)는 '개혁파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기존의 토대주의 인식론과 증거주의를 논파한다. 근대 인식론의 허점과 논리적 결함을 반박하면서 종교적 믿음도 나름의 방식으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논증한다.

반면 리처드 스윈번은 자연신학의 방식, 즉 특별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을 통해 신앙의 합리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연신학은 계몽주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와 기독교 철학자들이 지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종교적 믿음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정합적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어떤 방식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데 더 좋은 전략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있다. 다만 스윈번의 길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오랜 시간 기독교에서 사용한 방식이고, 특히 자연신학 전통이 깊이 남아 있는 영국에서는 여전히 인기 있는 방식이다.

자연신학을 통한 신 존재 증명은 철학사에서 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논리실증주의가 철학계를 뒤흔들면서 기독교 신앙은 옳고 그름을 떠나 아예 '무의미'(nonsense)한 명제로 공격을 받는다. 한동안 기독교 신앙은 지적 토대를 상실하게 되고 자신의 신앙을 변증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스윈번은 1960년대 이후 언어분석철학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구축하기 위해 힘쓴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된 언어분석철학을 활용해 반대로 기독교를 옹호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영미권 여러 기독교 철학자에 의해 시도되었고,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윈번은 유신론의 가정이 과학적 가정과 비슷한 것이라 여기며 개연성(probability)에 근거한 귀납 논증을 활용해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설이 제기될 때, 그 가운데 배경 지식이 확실하고 누적된 증거가 충분한 가설이 가장 좋은 설명이 될 수 있다는 논증이다.

보통 과학철학에서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라고 알려진 방식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 중에서 가장 좋은 설명을 제시하는 이론을 선택하여 진리로 믿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윈번은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는 다양한 논증들, 즉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도덕적 논증이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증거를 수반할 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개연적 명제로 만든다고 말한다. 유신론의 설명력이 다양한 논증이 누적되면서 점점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증거들에 의해 잘 지지되는 가설도 나중에 거짓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또 이렇게 확률이나 개연성에 근거해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게 과연 정당한 것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은 전부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아예 전부를 포기하든지 하는 어떤 절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선택을 강조하는 입장도 때로는 중요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갖게 될 때, 그것이 100% 확실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신뢰성의 정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인가? 스윈번은 자연신학의 후예답게 여러 증거와 증명을 통해 믿음의 신뢰도는 점차 높이는 방식으로 우리 신앙을 만들어 가자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유신론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다른 방식(예를 들면, 유물론이나 인간주의)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물리학과 화학에서 사용하는 공식과 용어를 살펴보면 우주가 굉장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복잡한 방법으로 움직이고 인간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칙은 근사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근사치를 높게 가지고 있어 세상이 어느 정도 규칙성으로 움직인다는 신념 때문이다. 규칙성을 통해 외부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그 규칙성이 인간이 이해하기에 충분히 단순해야만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대상 속에 자연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경향성을 집어넣어 그 자연법칙이 작동하도록 하신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이 대상에게 이런 경향성을 갖고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유신론의 단순성은 합리적 개연성의 정도를 모든 현상에 기대하게끔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존재 사실이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좀 더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이 세상이 꼭 그렇게 존재해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논리적 법칙과 원리를 제공한다. 문제는 과학은 사물의 존재 이유와 인간 존재의 이유를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결국 과학은 어느 지점에 가서 설명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이는 과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설명의 한계 때문이다. 스윈번은 과학이 우주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해 준다 하더라도 우주의 본질과 존재의 이유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인격적 설명이 필요한데 유신론이 바로 이런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유신론은 과학적 설명에 더해 인격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고, 이것이 설명의 힘을 한껏 올려 준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을 소개했다. 스윈번의 논증을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그의 기독교 철학 3부작(<The Coherence of Theism>, <The Existence of God>, <Faith and Reason>)을 봐야 할 것이다. 독특한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한 스윈번의 작업은 많은 이들에게 호감 혹은 반감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오늘날 귀납 논증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려 한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이런 논증이 이성의 영역에 신앙을 어정쩡하게 배치해 이 둘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었다고 논박한다.

그는 <Faith and Reason>에서 "신앙은 증거의 충분성에 비례하고 그 안에서 힘을 얻는다"고 말한 바 있다. 스윈번에 따르면 신앙은 결국 증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신념의 정도는 증거의 정도에 의존한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 신앙이 증거에 비례해야만 하는지를 한번 고려해 볼 문제다. 신앙의 신비를 굳이 과학적 증거와 확률로 모두 치환해야만 신앙의 근거가 마련되는 건 아니다. 별 이유 없이 그냥 믿고 싶어서 믿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이 남긴 업적과 공헌을 몇 가지 언급하고 싶다. 먼저 그는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들)이 자연철학과 과학과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고 은근슬쩍 다른 길로 도망치는 태도에 철퇴를 날린다. 스윈번은 증거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증명의 부담을 기꺼이 떠안으면서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그는 기독교의 합리성을 신앙의 영역으로 환원시키거나 증거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합리성의 기준과 다른 것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그들과 정면 승부를 하면서 기독교의 합리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철학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공정한 법칙과 규칙을 사용해 신앙을 합리적으로 변증할 방법과 길을 닦아 주었다. 또한 그는 어떠한 신념이나 이론도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소박한 실재론의 오류를 피해 간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전적인 신뢰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와 한계 내에서 조금씩 믿음의 개연성을 높여 갈 뿐이다. 때로는 의심하고 때로는 확신하면서 주어진 신념을 성실하게 쌓아 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는 신앙은 맹목적 헌신과 추종으로 이어져 오히려 신앙에 해로울 수 있다. 찬찬히 하나씩 따져 가며 기초를 다지는 신앙이 오히려 흔들리지 않고 오래갈 수 있다. 스윈번에게 배울 수 있는 기독교 철학이란 이런 성실함이다.

 

 

글_ 최경환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장)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출처: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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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7일

 

존 C 레녹스 | 최초의 7일
노동래 역 |
새물결플러스 | 2016

 

 

벌써 과신대 추천도서 10권 중 7번째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 의도는 나처럼 과.포.자(과학을 포기한 자)나, 일반 주부들도 과신대 추천도서를 읽으면 변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면, 과학 때문에 괜히 주눅 들어있던, 숨어있는 정회원들의 활동을 독려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추천도서 앞쪽 5권은 가벼운 접근에서 천천히 전체적인 모양을 다룬다면, 나머지 다섯 권은 (아마도) 깊이 있는 내용들을 다루는 것 같다는 느낌이 앞의 책 ‘오리진’을 읽으며 강하게 들었었고, ‘최초의 7일’을 읽으며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두루뭉술하게 다루었던 창세기 1, 2장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읽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보통 + 사람 + 주부로서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앞의 책들에서 계속 이야기되어온, 과학과 신학은 대립관계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또 앞의 책들에서 잠깐 언급된 갈릴레오의 에피소드를 자세히 밝히고 있어 흥미로웠다. 특이한 점은 책의 1/3 정도가 부록인데, 개인적으로는 부록을 먼저 읽고 난 다음 본문을 읽는 것이 이해에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동유럽의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고려해보기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한국에는 교회가 굉장히 많고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교회에 대한 자잘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본 것이지, 타문화권에서 살았다면 기독교를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해서 고려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독교가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좀 충격적이었다.

 

저자는 총 5장을 할애해서 최초의 7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란 부분은 현대에 지동설이 상식인 것처럼 과거에는 천동설이 상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동설을 믿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 전혀 불편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왜, 과학과 신학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지구가 오래되었다거나 천동설과 지동설의 주장과 믿음이 무슨 관계였다던가 최초의 인류는 어디서 어떻게 발생했다던가 하는 질문들보다 더 위에 있는 질문들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방법을 쓰든, 결국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류를 1초만에 지으셨든, 하루 24시간 x 6일에 걸쳐지으셨든, 하나님은 인류를 지으시고 아름답다 하시며 평안을 누리셨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물론 위의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인 레녹스는 우리의 시점을 과학과 신학의 대결에서 벗어나 우리가 왜 과학과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저명한 천체 물리학자와 창세기의 창조 내러티브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성서를 믿는 것이 원시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견해의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생겨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참으로 원시적인 발상이군요. 설마 그 구절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중략)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시적인 것은 당신이군요.” p.28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레녹스가 참 위트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7일에 관한 의견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텍스트를 비유로 또는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믿는 자신만의 관점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레녹스가 조금 비겁한 사람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7일에 대한 비밀을 알아가며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존중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예전에 젊은지구론 신봉자였고,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은 다 무시했다. 그 다음에는 진화적창조를 믿었고,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을 다 무시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과연 무엇이 중요한가. 나는 왜 책을 읽고 있는가. 하나님이 최초의 7일 동안 창조를 하시며 우리 인간에게 원하신 것은 무엇일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자신의 의견만이 진리인 양 뻣뻣하게 굴지 않고, 오직 우리 주 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만 떳떳하게 서로 마주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의 난이도가 점점 상승해 이 짧은 책을 읽는 데도 많이 힘들었지만, 계속 반복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 날 안개와 같던 것이 걷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다음에 읽을 책을 기대해본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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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해롤드 쿠쉬너 |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 김하범 | 창

 

이신형 (과신대 실행위원)

 

 

내가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과신대에서 과정신학에 관한 콜로퀴움이 있었는데, 강사로 나오신 장왕식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이다. 절판되어서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ebook으로는 계속 판매가 되고 있었다. 그냥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박원순 시장의 사망으로 인해 마음이 많이 흔들렸고 그래서 읽고 있던 책을 놓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아들이 조로증에 걸려 15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깊이 묵상한다. 그리고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고 또한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우리의 잘못이거나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다른 이유로 허락하였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이는 고통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하나님의 뜻에 자꾸 끼워 맞추게 한다. 이는 욥기의 세 친구처럼 고통받은 이를 정죄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착한 사람에게 닥쳐온 고통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은 분, 또는 하나님 당신의 뜻을 위해 우리에게 고통을 야기시키는-심지어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잔인한 분으로 만든다. 위로하는 이는 좋은 목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슬픔과 고통 가운데 그 이야기를 듣는 이는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자책하고 원망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하나님에 대해 전능성을 내려놓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신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꺽고 우리를 인도하지 아니하신다. 다만 우리와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법칙을 깨뜨리지 아니하신다. 다만 그 자연법칙으로 인해 생기는 재앙이 가져오는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꺾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신다. 아니 거스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막을 능력이 있지만 막지 않으시는 잔인한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통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거둬달라는 기도가 의미 없음을 안다. 암 검사를 받고서 좋은 결과가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는 의미가 없다. 이미 검사 결과는 검사하는 순간 정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병을 기적으로 낫게 해 달라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 게 정상이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해서, 정성이 부족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기도한다. 우리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아픔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 고통에 우리도 참여한다. 그리고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준다. 기도가 그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그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고통을 이기고 슬픔을 극복할 능력을 얻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신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박원순 시장의 사망은 나의 마음을 매우 크게 흔들어놓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허락하신 것은 아니라는 통찰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도록 한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막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막지 못하시는 것이 바로 케노시스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신비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보다 더 크게 아파하시고 고통을 더 크게 함께하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기도가 더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한국 기독교는 차별금지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교회가 탄압받는다고 걱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심으로써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신다. 교회는 그런 주님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가? 지금의 교회는 고통을 함께하시는, 고통을 온몸으로 짊어지신 예수님을 머리 삼고 있는가? 교회는 고통을 받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차별받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하시는데, 교회는 교회가 받을 고통을 두려워하며 외면하지 않는가? 아니 오히려 차별을 더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회가 많다. 그리고 코로나 19 감염의 주된 경로로 지목되면서 사역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우리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이 방해받는 모습을 불평하고 탄압받는다고 성토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 19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어려움과 함께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 교회의 예배와 교육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보다 낫다.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실천하는 것이 예배보다 중요하다.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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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다윈의 실험실

 

제임스 코스타 | 다윈의 실험실 | 박선영 역 | 와이즈베리 | 2019

 

윤세진_ 구일고등학교 과학교사, 과신대 실행위원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다윈. 고등학교에서 생명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나 자신도 다윈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한 채로 다윈의 진화론이나 비글호 항해 정도만 아이들에게 가르치곤 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접하면서는 책 표지에 소개된 글에 끌려 읽기 시작했다.

 

"괴짜 박물학자 다윈의 집 뒷마당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실험들"

 

다윈에게 괴짜인 점이 있었을까? 기상천외한 실험들에 무엇이 있을까? 이런 기대들이었다.

 

물론, 이 기대는 첫 장을 넘겨 차례를 살펴보면서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사실 이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그 외의 여러 책이나 논문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다윈이 실시했던 다양하고, 치밀하고, 세세한 실험들 중에서 아주 일부분이 정리된 것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제시한 여러 실험은 자신이 주장하는 진화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되고도 남는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추가적인 다양한 실험도 진화의 증거 실험으로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책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실험과 그 결론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뒷받침하는 실험으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실험들은 자신이 머물던 집과 집 주위의 자연, 친척들과 친구들로부터 얻은 다양한 정보를 기반으로 시작하고 진행되고 결론 내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팀 단위로 연구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겠지만, 다윈이 살던 시절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함께 연구한 경우는 다윈 이외에는 드물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이다. 궁금한 것은 그것을 알 만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든지 질문하는 다윈의 모습이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이 책은 단순히 실험 내용만 제시한 것이 아니다. 다윈은 대체로 실험을 시작하고 진행하면서 친구들이나 자녀들, 동료 과학자들과 실험에 대한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그 실험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자신의 실험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에 대해 무시하려는 자세보다는 스스로 더 철저한 검증을 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철저한 검증을 마친 후 결과에 따라서 겸손히 받아들이기도 하고,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주장하여 관철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즉, 실험 결과와 그에 따른 결론만을 따르는 과학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이러한 태도는 과학자라면 당연히 본받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독특한 점은 다윈의 실험을 다루고 난 뒤에 그중에서 지금도 해 볼만한 실험들을 제시한 것이다. 각 장이 끝나는 곳에 그 장의 대표적인 실험을 해 볼 수 있도록 준비물과 실험 절차를 상세하게 안내해 주고 있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따라 해 볼 만한 실험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 책에 제시된 실험들을 따라 하다 보면 내가 다윈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실험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 실험으로 초창기 다윈이 종의 기원을 저술할 무렵에 실시했던 두 가지 실험 - 따개비 실험과 비둘기 연구 - 이 있다. 따개비 실험은 다윈의 진화론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이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깨닫게 하였고, 선택의 중요성을 알게 했으며, 비둘기 연구로 이어지게 해 주었으며, 진화와 연관된 첫 번째 실험이었다.” 이 두 실험은 특히 다윈에게 실험가 정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윈의 실험으로 제시된 두 번째 실험은 정원 잔디밭에서의 식물에 대한 실험이다. 이 실험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다윈은 생존경쟁의 개념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생태학적 상호 연계성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정원에서 식물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실험을 실시하였으며, 특히 생태적 분업과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근거로 싱클레어의 실험 결과를 인용하였다. 다윈은 정원 잡초 실험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투쟁과 공존이 함께 일어나는 모습을 관찰하였고, 결국은 생태학적, 진화론적 시각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갖게 되었다. 이전까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자연에 대한 생각이 조화였다면, 다윈은 이제 자연 속에서 생물들은 투쟁한다는 관점으로 바뀐 순간이다.

 

벌에 대한 연구는 다윈이 자연선택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벌이 집을 만드는 과정이 벌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특히 호박벌, 멜리포나, 꿀벌 순으로 벌집의 구조가 달라지는 것을 통해서 진화적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뻐꾸기의 탁란, 노예를 사냥하는 개미 등과 같은 동물의 행동도 자연선택에 의한 결과라는 것을 다윈 특유의 관찰을 통해 결론을 지었다.

 

다윈은 다양한 씨앗 실험을 통해 씨앗이 얼마나 먼 곳까지 이동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였으며, 이 실험을 통해 우연적 분산 모델을 제시하였다. 식물뿐 아니라 동물들도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여 다양한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개구리밥이 퍼져나가는 과정을 연구하는 과정을 보면, 연구자들이 어떤 것도 당연시하지 말고 관찰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윈은 기존 생각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그런 과학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철저하게 확인하고 실험하여 그 결과만을 받아들이는 그런 과학자였다.

 

다윈은 꽃과 벌, 새 등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통해 식물의 경우 자가수분보다는 타가수분이 자손 번식에 유리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는 또한 유성 생식이 무성 생식보다 유리하다는 오늘날의 원리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종의 기원을 발간한 후에 시작된 난초 수분 과정에 흥미를 느낀 다윈은 다양한 종류의 난초를 구하여 각각의 수분 과정을 관찰하였다. 난초는 수분 과정과 관련하여 아주 다양한 장치들을 가진 기계 같은 모습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다양하고 복잡한 수분 관련 구조는 지적설계로 설명하기보다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로 설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었다.

 

 

다윈은 또한 동물과 식물의 공통 조상을 찾기 위해 끈끈이주걱, 파리지옥 등의 식충식물을 연구하였다. 이 식물들이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소화는 어떻게 시키는지 등의 연구를 실시하면서 동물과의 공통점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야생 오이를 비롯한 다양한 덩굴식물들을 관찰하고 이들이 물체를 타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자극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었으며, 자엽초에 대한 실험 역시 식물의 운동성을 보여주는 실험이었다. 이러한 여러 식물들에 대한 관찰과 실험과 노력은 동식물의 공통조상에 대한 이해를 하려는 다윈의 목표와 연관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렁이에 대한 실험은 다윈이 지질학 분야에서 처음 흥미를 느꼈던 주제였고, 그 이후 40년 뒤에 마지막 연구 주제가 지렁이였다. 다윈은 지렁이의 소화 과정에 의해 침식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였고,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데 지렁이의 공헌을 밝혔으며, 고대 유적이 침하되는 과정에도 지렁이가 관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생명과학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도 그 영향은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고 분야도 다양하다. 이러한 종의 기원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을 다윈의 실험실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종종 실험 내용이 지루해질 수도 있겠으나, 관찰과 실험에 대한 다윈의 끈기와 지독한 집중력을 책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집중력의 결과가 종의 기원이라는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던 기초가 아니었을까.

 

 

p.s. 책의 분량이 꽤 많고(568쪽) 생명과학과 관련된 내용이 많아서 관련 지식이 부족하면 자칫 어려울 수도 있다. 어려운 용어는 하나씩 차분하게 알아가면서 읽다 보면 다윈의 실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면 종의 기원을 읽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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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

데이비드 J. 헬펀드 저, 노태복 역, 더퀘스트, 2017

 

글_ 윤세진 (구일고등학교 과학교사, 과신대 실행위원)

 

 

과학은 하나의 전공이나 분야가 아니다. 과학은 체계적으로 사고하겠다는 약속이며, 가설을 검증하고 사실을 관찰함으로써 우주를 설명하고 지식을 쌓아가겠다는 맹세다. - 아툴 가완디(Atul Gawande) - (47쪽)

 

요즘 코로나바이러스증후군-19(Covid-19)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언론이나 SNS를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정도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그 덕분에(?) 너도 나도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용어가 익숙해졌고, 어떤 사람은 그 특징이나 증상 등을 웬만한 의사 못지않게 알기도 하고 설명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 나름의 잘못된 대처 방식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1] 삶과 죽음이 달려 있고,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그런지 의사나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보다 더 호소력 있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나마 일반인들의 이러한 것은 애교 수준이다. 요즘에는 가짜 뉴스를 넘어서 사이비 과학이 등장하고 있다. 저자는 사이비 과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런 그릇된 정보 중 일부는 과학으로 가장해 전문용어를 구사하고 회의를 개최하며 학술지까지 발간한다. 일부 집단에서 이렇게 부르면 정치적으로 옳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사이비과학’이라고 명명한다. 겉으로는 과학의 언어와 형식을 표방하지만, 과학의 기본 원리를 뒷받침하는 모든 내용을 거부하는 뚱딴지같은 지식의 집합체를 정의하는 말이다. 이 사이비과학은 오류 가능성에 구애받지 않으며, 진정한 과학 탐구를 추구하는 이들의 사상과 업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23쪽) 

 

과학 기술의 시대에 과학과 기술을 도용하는 이런 사이비 과학은 빨리 사라져야 하지만, 쉽사리 없어지기 어려운 점이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각에 과학은 어렵고 나는 과학을 잘 몰라도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과학을 공부하기 싫어한다. 또한,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도 “과학”을 제대로 배우기보다는 나열된 지식을 배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과학을 잘 이해하지 못하니 과학을 빙자해서 사람들을 속이려는 시도들이 너무 많다. 이런 사이비 과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과학을 제대로 배워 “과학적 소양”[2]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은 과학자로서 일반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다. 특히, 1장의 공원 산책하기에서는 일상적인 삶의 주변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에서 과학적 사고의 필요성과 과학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특히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중대한 문제 - 기후변화 같은 - 를 해결하려면, 낭만적인 접근보다는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렸을 적 가졌던 호기심을 유지하면서 과학적 사고(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장의 과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 견해가 다양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이는 자신이 제시하는 과학에 대한 견해도 일반적인 것이 아닌 자신만의 견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과학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특히 과학을 “진리를 찾는 활동이라기보다는 ‘자연의 반증 가능한 모형을 찾기 위한 체계’라고” 정의하는 것을 통해 과학에서 중요한 점은 포퍼(Karl Popper)에 의해 강조된 비판적인 사고라는 사실을 언급하여 수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차이를 설명해 준다.

 

이후의 장에서는 과학을 좀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여러 사례들을 제시해 주어 “과학적인” 사고를 접하게 해 준다. 아주 큰 숫자를 이해하는 방법(3장)에서는 원자의 크기와 태양계의 크기 등을 다루면서 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 너무 많은 숫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중에 인상적인 것은 시각이 0.02초보다 더 빠른 시간은 직접 지각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사람은 연속적인 시간을 시각이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간격을 뇌에서 메꿔 주며, 이 원리를 이용해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봉투 뒷면에서 발견한 것들(4장)에서는 숫자를 다룰 때 추산(혹은 어림)하는 방법, 즉, 알 수 없는 양을 대략적으로 추산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수를 다룰 때 맥락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어떤 숫자가 제시되는 상황을 알지 못하면, 그 숫자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예를 든 것의 하나가 미국 언론의 식인 상어에 대한 헤드라인 문제이다. 언론에서는 식인 상어 문제로 호들갑을 떨고 있었지만, 정작 저자의 추론에 의하면 식인 상어에 물려 죽는 사람은 연간 100만 명 중 1명도 채 되지 않는다. 반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30분에 두 명, 흡연으로는 130초마다 두 명이 죽는다. 맥락이 없는 숫자는 이렇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프를 보는 방법(5장)에서는 그래프를 과학적으로 그리는 방법과 함께 이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확률과 통계(6장, 7장)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차이(8장)에서는 확률과 통계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을 다루면서 과학적인 측정에서 나타나는 오차와 그에 따른 표준편차, 가우스 분포, 푸아송 분포 등의 개념을 설명한다(사실 이 부분의 개념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상관관계가 있는 두 양에 대해 인과관계로 설명하면 안 된다는 주의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도되는 많은 기사에서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을 대부분 그 둘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고 해석하여 보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자들이 이 책의 8장을 정독했으면 좋겠다.

 

과학의 특징에 대한 재 언급과 그와 관련된 뇌의 특성(패턴을 찾으려는 성향과 그로 인한 문제점), 모형에 대한 설명을 다루는 9장은 또 다른 측면에서 과학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장에서는 프록시라는 개념이 중요시되는데, 이는 측정할 수 없는 어떤 정량적인 데이터가 그 특성이나 측정도구의 한계로 인해 측정할 수 없을 때 그 데이터를 대신 측정할 수 있는 대용물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를 프록시라고 한다(218쪽). 예를 들면 특정한 시기 이전의 고기후에서 산소 동위원소의 비율을 통해 기온을 추정하는 경우이다.

 

과학적 사고 습관의 필요성(10장), 과학이 아닌 것들(11장), 잘못된 정보와 비합리적인 결정의 문제(12장), 우리가 가져야 할 과학적 태도(13장) 등에서는 우리가 접하는 많은 정보들을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여러 자료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책 중간중간에 수학적인 계산 과정이 나와 있어 그 부분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학이 수학의 도움을 받아 자연현상에 대한 이론적 모형을 세우는 것임을 알게 된다면, 그 정도의 수고로움은 필요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얼마 상승하는 위험하다는 것에 대해서 얼음과 물의 밀도를 비교해보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 사실 해수면 상승은 빙하가 녹는 것보다는 기온 상승으로 인한 바닷물의 팽창이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

  2. 우리 뇌는 패턴을 찾도록 진화했지만, 편견 없이 종합적인 데이터를 찾는 데는 미숙하고, 따라서 뇌는 객관적이고 공평한 패턴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패턴을 찾기 때문에 잘못된 패턴을 찾는 경우도 많다는 것.

  3. 과학의 세계는 증명이 관건이 아니다. 그것은 수학과 철학의 몫이다. 흔히 과학은 정확성을 추구하는 정밀한 분야라고 알려져 있지만, 과학은 측정과 설명에 내재적이고 불가피한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으며, 자연계의 모형을 세우고 검증할 그러한 불확실성을 통계를 통해 명시적으로 설명한다”(369). 불확실성을 통계를 통해 명시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과학은 자연이라는 실재에 조금씩 다가가는 하나의 근사(approximation)”[3]라는 말과 통하는 점이 있다. 

과학이라는 활동은 그릇된 생각을 교정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위한 여러 습관과 기법을 개발해냈다.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아마도 회의주의다. 많은 사람들은 회의주의를 꽤 부정적으로 여기지만, 그것이야말로 과학자의 최고의 자질이다. 누군가의 데이터에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 한 측정이 어떤 외부적 효과에 의해 편향됐거나 혼동됐는지를 늘 살피는 것은 과학에서 필수적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모형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 모형을 자연에 관한 더 나은 설명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잠정적인 근사로 인식하는 태도는 훨씬 더 필수적이다. 누군가의 데이터가 그가 세운 모형과 일치하더라도, 그때의 행복감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철저하게 회의적으로 살피는 비평가에 의해 누그러져야 마땅하다. (585쪽)

 

과학자는 건전한 회의적 사고, 판단을 미루는 자세, 그리고 올바른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는 에드윈 허블의 말은 단지 과학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에 어떤 분야에 속하든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지.

 

과학은 어렵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 일상에 많이 들어와 있으며,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내용도 많이 있다. 과학에 좀 더 친해져 보면 어떨까? 아니, 그 이전에,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 보는 시도를 해 보면 어떨까?

 

 


[1] 류충열(2020.04.01) 가짜 뉴스가 코로나 19보다 더 무서운 사회. http://www.hi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994

[2] 과학적 소양이란 개인적인 의사 결정, 사회적 문화적 사건에의 참여, 경제적 생산을 위해 필요한 과학적 개념과 과정에 대한 지식과 이해, 능력 등으로 정의된다. (NRC 저, 서혜애, 오필석, 옹재식 번역(2000). 국가과학교육기준. 서울: 교육과학사)

[3] 우종학(2017).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82쪽. 서울: 새물결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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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카터 핍스 | 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 김영사 | 2016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프로세스를 구축해야 한다. 내용은 적은데 정보만 너무 많은 것이다. 지식의 양은 많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준과 체계는 결여되어 있다. 데이터는 넘치지만 깊은 의미는 빈약하다. ... 인간의 복잡한 게놈을 도표로 만들어서 그럴듯하게 설명하지만, 많은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마약중독이 되어 거리를 배회하는 이유는 설명하지는 못한다. 역사상 가장 부유한 문화에서도 아이들이 버려지는 이유 또한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다. ... 인간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포기됐다. 그리고 진화 혁명가들은 세계가 분화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다시 통합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52쪽)

 

제가 카터 핍스(Carter Phipps)의 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영어 제목: Evolutionaries)를 읽게 된 이유는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습니다. 작년에 학교 아이들과 케빈 켈리의 통제불능을 읽고 토론하며, 강한 인공지능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마음이 많이 답답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집안에 틀어박혀서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를 읽으면서, 인공지능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고민하는 분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했었고요. 그런데 그 다음에 읽게 된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와 유발 하라리의 호모 사피엔스호모데우스(이 두 권은 읽다가 중단했음)를 읽다가 무신론적 유물론이 이제 인간성을 폐기 처분하고 은하철도 999의 철이처럼 우리가 기계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구나 하는 위기의식을 심각하게 느꼈었습니다. 물론 일개 고등학교 교사의 위기의식이었지요. 과신대를 통해서 진화에 대해 이제 막 배우고 있고,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서 성경 해석까지 새롭게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의 싹을 본 것 같은데, 세상은 진화를 이용해 차가운 기계 쪽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 과연 진화를 이렇게 편향적으로만 봐도 되는가 하는 강한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적 가치가 아직 건재함을 느껴보려고 하다가, 그 책에서 루돌프 오토 소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돌프 오토 관련된 포스팅을 읽다가 바로 이 책 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떠오른 카터 핍스의 이미지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균형잡힌 제너럴리스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카터 핍스는 12 세에 칼 세이건의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 반한 후, 그를 영웅시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사회생활용 교회 생활을 하다가 십 대 후반에 “삶의 심오한 의미”를 찾으려고 동양철학과 명상에 심취했었고, 오클라호마 대학을 졸업한 지 2주 후에는 미국을 떠나 동양으로 건너가 10년을 보냈습니다. 귀국 후 미국의 진화 사상가 앤드류 코헨이 시작한 인라이튼 넥스트라는 잡지의 편집장을 20여 년간 맡으면서, 과학자, 미래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성직자, 철학자, 신학자 등등을 인터뷰하였습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그가 인터뷰한 인물들은 존 스튜어트, 하워드 블룸, 엘리자벳 사흐투리스, 레이 커즈와일, 켄 윌버, 바버라 마르크스 후바드, 브라이언 스윔, 마리오 쿠오모, 존 호트 등입니다. 그 외에도 저자는 진화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학술대회에 두루 참여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그가 소개하는 학자들의 이론들도 엄청 많아서 독서력이 일천한 제가 다 소화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게 큰 감명을 주었던 학자들과 그들의 이론들만을 언급한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칼 세이건의 전처 린 마굴리스의 공생 기원설
하워드 블룸의 오픈 엔드적 창조적 지능 이론
제임스 가드너,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복잡성 이론
레이 커즈와일의 신과 진화 개념
진화적 신학자 존 호트의 진화신학
샤르댕의 누스피어 개념
칼 융의 집단 무의식
브라이언 스윔 – 우주의 음유시인, 캘리포니아 통합학 연구소의 우주학자. 우주의 광대함 앞에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는 “전체 관점 보텍스”(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고문 기계) 같은 사람.
스튜어트 브랜든의 초인간주의자들에 대한 충고
제임스 마크 볼드윈의 인간 의식 발달 단계
장 게브서의 인간 의식 발전 단계
클레어 그레이브스의 나선형 동력론
켄 윌버의 4등분법(Kosmos 지도)
찰스 샌더스 퍼스 버트런드 러셀이 미국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미국의 사도"라고 부름. 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 "자연법칙은 변할 수 있는 습관이다."
켄 윌버와 루퍼트 셀드레이크의 '대우주의 습관’
졸탄 토레이의 깨달음
과학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 마이클 다우드
바버라 마르크스 후바드의 에피파니
토머스 베리와 브라이언 스윔의 우주 이야기
앤드류 코헨의 진화적 세계관
깨달음의 두 가지 길 – 라마나 마하르시와 오로빈도 고즈, 영혼의 화살 끝에서 일어나는 진화
필립 클레이턴의 불완전한 신
진 휴스턴과 샤르댕의 진한 우정

 

이 책을 다 읽었을 때의 느낌은 물질뿐 아니라 정신, 문화, 마음, 종교, 영혼 등등 인간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진화의 의미를 심도 있게 취재하는 기자를 좇았다니며, 그 옆에서 위대한 학자들의 진화에 대한 설명을 함께 들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서 성경이 재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이 책을 통해서 그런 소망이 더 밝아진 것 같아 기쁩니다. 카터 핍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사람은 그가 어렸을 때 칼 세이건이고, 어른이 되었을 때 샤르댕입니다. 이 책을 다 읽자마자 저는 샤르댕의 책 5권을 주문하여 읽고 있습니다. 책으로 난 길은 이렇게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가 하는 묘한 감사도 솟아납니다. 물론 절대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인간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선배들이 있고, 책을 통해 그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하기만 합니다.

 

아래 인용문은 그의 균형감각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인용문들입니다.

 

진화적 아이디어가 19세기 과학계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현재의 진화에 근거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여러 가지 결론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하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 분야를 연구하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론이 과학적 원리를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곤 한다. 생명에 대한 철학이 과학적 정보를 수용하는 것과, 과학에 근거해서 아예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다르다. 진화적 세계관은 과학의 발견을 수용하지만 인간 행위 주체(human agency)와 자유의지를 충분히 존중한다....슬픈 것은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침팬지 전문가 제인 구달은 침팬지의 세계에는 인간 세계에 만연한 호전적인 성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구달은 결국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물론 우리가 환원주의적 세계관에만 의존한다면, 즉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유전적인 성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도 없고 또한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도 없다고 한다면, 유전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사촌 격인 침팬지가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는 구달의 발견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결론(침팬지가 호전적이라는 발표는 전쟁을 막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해칠 것이다.)은 그 자체로도 과학적이지 않다.(77~79쪽)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라는 표현은 다윈의 생존과 적응의 원리를 사회 경제적 현실에 적용하는 것인데, 이것은 다윈의 이론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불평등을 정당화할 때 이 표현을 쓰기도 한다 - 내가 돈이 많고 네가 가난한 것 자체가 적자생존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적인 태도와 정책은 후퇴하게 된다..... 스탠퍼드 대학의 생물학자 조안 러프가든(Joan Roughgarden)은 최신 저작인 "친절한 유전자: 다윈의 독설 비평"(The Genial Gene: Deconstructing Darwinian Selfishness)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진화 생물학이 생긴 이후로 다윈주의는 '경쟁'이나 '이기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설명이 정말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따르겠지만, 유명 인사인 옥스퍼드 대학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때 '이기적 유전자'라는 표현을 하면서 러프가든의 설명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도킨스는 당당히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생존의 메커니즘이다. 우리는 로봇 기계와도 같은데, 우리가 유전자라고 부르는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화됐다.’

이런 말들은 유전학자나 천재 과학자들로 하여금 생물적 진화에 대한 대중들의 잘못된 생각들을 해결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그저 마케팅일 뿐이다. (80~81쪽)

에 대한 논쟁은 종종 이런 왜곡 때문에 일어난다. 신무신론자들은 과학, 이성, 합리성 등의 현대적 특징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함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혼란을 양산하는 경향이 있다....이들이 간과한 부분은 종교적 표현이 언제나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전통적 사고방식 안에서도 신을 생각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이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역사에 밀착되어있는 영혼을 자유롭게 해 주고, 배타적인 믿음 체계 - 배타적, 전통적, 신비주의적, 초월적, 다른 세상에 속한 듯한, 의인화된, 독단적인,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노인 같은 신을 믿는 믿음 등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 로부터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

진화와 영성이라는 두 단어는 신의 유전자 또는 믿음의 본능을 찾으려 하고, 종교적 충동의 진화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만나게 됐다. 그런데 이 시대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진화 혁명적 영성은 진화와 영성의 또 다른 합류 지점이 된다. 진화 혁명가들은 진화적 렌즈를 통해 이미 정립된 영성과 종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영성, 새로운 신학, 새로운 신비주의, 새로운 우주학 그리고 진화적 세계관의 표현으로서의 새로운 도덕 등을 직감하고 그것들을 구축해가고 있다. 단순히 진화적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생물학적, 문화적 기원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의 통찰과 관점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인다. 새로운 영성은 전통적인 종교적 유신론과 다르며 진보적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적인, 그러나 종교적이지 않은 다원주의와도 다르다. (291~292쪽)

물질이나 물질주의 안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것처럼, 영혼 안에서 또는 의식, 영혼, 브라만 등만이 진짜인 이상주의 안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다. 오로빈도는 두 번째 현상을 더 위험하고 강력한 망상으로 보았다. (301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구절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잠언 4:27)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이 없는 종교는 맹인과 같다." (아인슈타인)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칼 바르트)

 

 

글_ 최성일 기자 (ultracha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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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vs. 창조과학

 

창조과학은 성경이 20세기의 과학 잡지를 읽을 때와 동일한 정확성을 가진 과학적 진술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다. 헨리 모리스의 논제처럼, “성경은 과학교과서이다”일뿐만 아니라 과학교과서여야 한다. p. 35

 

윤철민 [개혁신학 VS. 창조과학]

CLC | 2013. 5. 30 | 초판발행 | 244쪽 | 13,000원

 

 

저자 윤철민은 서문에서 이 책의 발행 목적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 첫째 단락의 일부를 소개한다.

 

창조신앙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신자들은 과학적 이슈보다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더 관심 있다. 또한 평범한 신자들은 과학이 아니라 성경으로 창조신앙을 공부하길 원한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성경을 사랑하는 신실한 분들에게 창조신앙과 관련된 성경본문을 개혁주의적 시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처음에 제목을 보고, ‘왜 “개혁신학 VS. 보수신학” 이 아니라, “개혁신학 VS, 창조과학”이지?’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개혁신학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의 서문과 첫 문단의 본문 인용구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보수신학은 이미 창조과학과 그 맥을 같이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자랑처럼 ‘우리 교단이 얼마나 보수적인데’라고 떠들고 다닌다. 그 때는 초신자였기에 보수적이지 않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창피했다. 그리고 창조과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도 창피했다.

 

지금 이 책은 과.신.대 추천도서 네 번째 책이다. 아마 처음부터 이 책을 읽었다면 평범한 주부인 나에게는 이 책이 많이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용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론 연대기] - [무신론 기자, 크리스찬 과학자에게 따지다] - [아론의 송아지]를 지나오는 동안 약간의 지식이 쌓였기에,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동안 마치 상식처럼 알고 있던 ‘에덴동산에서는 모두 초식을 했을 것이다.’, ‘휴거’,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동산과 같은 것이다.’ 등등의 지식이 크나큰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 ‘네페쉬’라는 용어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네페쉬는 피를 가지고 있고 호흡을 하는 생물, 즉, 동물과 인간만이 네페쉬이다. 따라서 태초에는 죽음이 없었는데, 식물은 네페쉬가 아니므로 죽는 게 아니다. 인간의 몸 속에 있는 장내 세균의 죽음도 죽음이 아니다, 라는 식의 논리가 네페쉬 교리이다. 이 네페쉬 교리 때문에 재미있는 질문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타락 전에는 육식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까지 간다. 작가는 네페쉬 교리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를 여러 장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전혀 몰라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아주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앞서 ‘아론의 송아지’에서도 잠깐 나왔듯이, 억지스러운 한자풀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여기서는 한자의 근원인 갑골문자까지 다루고 있다. 갑골문과 그것의 변천, 현대에 어떤 뜻으로 쓰이고 있는지 표를 삽입하여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결론은 한자에 창세기가 담겼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원래 그 한자의 갑골문이 무슨 뜻을 품고 있지도 모르는 체, 현대에 나타내고 있는 뜻을 역으로 이용해 한자에 끼워 맞춘다는 것이다. 현대의 내 지식으로 성경의 배경지식을 무시하고 해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바로 이것이 ‘겉보기식 해석’이다.

 

 

개혁주의는 ‘겉보기식 해석’을 탈피하고 ‘속보기식 해석’을 하려는 움직임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의 믿음에 끼워 맞춰 성경을 해석하는 큐티를 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내 상황에 맞추어 성경 말씀을 떠올리며, 그 말씀을 내 행위의 정당성으로 삼고 있었고, 내가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면 기도응답을 받은 것이고,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며, 나에게 나쁜 일이 벌어지면 사단의 농간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니고 무엇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경의 외면이 아닌, 내면을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창조과학적 신앙’이 아닌, ‘창조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방법의 친절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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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

 

윤신영 |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 | 2014 | Mid

 

 

요즘 우리나라나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 Covid 19 바이러스이다.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이 바이러스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한편으로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바이러스가 이렇게 세계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도 있다. 어쨌든, 사람들은 살아가는 여러 일들에 관심을 가지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자신의 필요나 이익, 생존에 직접 관련된 것에는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는 많은 것들이 있다. 특히 언 듯 봐서는 사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 급하게 해결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 나 말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고 있으려니 생각하는 것 등. 그 중에 하나가 환경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환경과 생태에 대한 인간의 책임감을 묵직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다. 책을 처음 접할 때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라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사라져 간다는 것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다루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차례를 훑어보고 나서는 흠.. 이 정도는 어느 만큼은 알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쉽게 읽을 수 있겠군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얼른 손에 잡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리 쉽게 읽어 넘어가는 그런 책이 아니었다. 이 책은 환경의 관점에서 사람들이 생각할 문제를 여러 동물의 입장에서 편지를 쓰는 형식의 독특한 방식으로 써진 책이다. 인간에서 출발해서 박쥐, 꿀벌, 호랑이, 까치, 돼지, 고래, 비둘기, 십자매, 공룡, 버팔로, 사자,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에서 다시 인간에게로. 편지 형식을 띄기는 했지만 아주 상세한 연구 자료를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학자들의 자료도 많이 인용하고 있어서 우리의 현실을 좀 더 가까이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김선숙 박사의 박쥐 연구에 대한 인용이나 꿀벌에 대한 내용에서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한 세세한 상황 제시, 우리나라 호랑이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 인용, 이상임 교수와 최재천, 피오트르 야브윈스키 교수 등의 우리나라 까치 연구 결과 등의 인용은 다른 나라의 연구 결과가 아닌 우리 주위 환경에서의 연구 결과여서 한결 친숙하게 다가온 내용이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박쥐, 꿀벌, 호랑이, 까치를 통해서 서식지 파괴의 심각성을 이야기한다. 2부에서는 돼지와 고래, 비둘기, 십자매, 공룡을 다루면서 육종과 진화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 3부에서는 버펄로, 사자, 네안데르탈인을 통해 경쟁과 협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전체가 3부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속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이 있었다. 첫째로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나 동물 멸종에 대한 내용이다. 까치와 비둘기의 경우에는 나 자신도 까치와 비둘기 숫자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이고 그래서 까치나 비둘기 숫자를 좀 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가면서 까치나 비둘기의 숫자가 필요 이상을 늘어나도록 한 것에는 인간에 의한 서식지의 파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숫자를 늘어나게 했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인간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한편, 꿀벌과 고래는 그 숫자가 급감하고 있는 상황을 보다 명확해졌고, 그에 대한 심각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각 생물을 다루면서 각 생물에게 진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환경보전이나 생태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왜 진화 이야기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진화를 이야기 하는 중요한 이유는 생물에게 있어 진화는 환경에 의한 자연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는 그 속에 살아가는 생물에게 항상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건조한 지역에 사는 생물과 물이 풍부한 지역에 사는 생물은 형태나 생태가 상당히 다르다. 또한 환경 요소도 생물에 의해 변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사람에 의한 화석연료 사용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양을 증가시키는 것이 생물에 의한 환경 요소 변화의 사례가 될 수 있다. 현재의 환경 문제를 무시하고 인간의 필요나 욕심에만 집중해서 살아가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구 생태계 내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주고 있는 셈이다.

 

세 번째로는 동물에 대한, 더 확장하자면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다. 당장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지만, 결국 인간은 모든 동물, 식물, 곰팡이, 세균, 바이러스 등과 생태계 일원을 구성하고 살아간다. 생태계의 유지에서 중요한 것은 다양성과 이를 통한 협력이다. 인간이 인간 자신만의 이익과 필요만을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결국은 인간의 멸종을 초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방지하려면 인간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관점을 벗어나 전 지구적인 생태계를 생각하고 보호하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 약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고 살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정말 필요한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 약하고 가난하고 멸종되어 가는 지구의 생물들을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_ 윤세진 (과신대 교사팀, 구일고등학교 생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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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송아지』를 읽고

 

"시내 산 정상으로 십계명을 받기 위해 올라간 모세가 사십일이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자, 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론을 강요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중략) 우주와 지구의 기원과 관련해 성경의 문자적 표현과는 다른 설명을 제공하는 현대 과학에 대해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창조과학”이라는 것도 결국 아론의 송아지의 현대적 변형일 것이다."

 

 

임택규 | 아론의 송아지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 334쪽 | 16,000원

 

 

“먼저 숲을 보고, 다음에 나무를 보십시오.”

 

과.신.대 [기초과정 1]을 마친 사람이라면 아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문장인지 알 것이다. 기초과정 말미에 우종학 교수님은 책 두 권을 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과.신.대 권장도서 목록 제일 첫 번째 책인 『창조론 연대기』를 통해 먼저 숲을 보고, 그다음 책인 무신론 기자, 크리스찬 과학자에게 따지다를 통해 나무를 보라는 얘기다.

 

처음 과.신.대를 접했을 때는 마구잡이식으로 이 글, 저 글, 이 책, 저 책을 읽어서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과.신.대 추천도서를 순차적으로 읽어가며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창조론 연대기』를 통해서는 과학과 신학은 대립구도가 아니라는 것과, 창조론에 대한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았다. 무신론 기자, 크리스찬 과학자에게 따지다를 읽으며 과학과 신학이 왜 대립구도가 아닌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또,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책, 즉 성경과 자연은 신학과 과학이라는 서로 다른 도구로 읽으면 된다는 것도 알았다.

 

 

『아론의 송아지』에서는 더 나아가 창조과학이 펼치고 있는 여러 주장들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가며 그것이 왜 틀렸는지 알려주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내가 근본주의, 문자주의를 신봉하고 있었던 때라서, 읽으면서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이 저자 왜 이래? 왜 이리 글투가 공격적이지? 싸우자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꾸역꾸역 끝까지 읽었다. 그런데 입장이 바뀐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렇게 유쾌, 상쾌, 통쾌할 수가 없는 책이다.

 

저자인 임택규 님은 성균관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태양력 발전소와 관련한 대규모 송전 시절 프로젝트팀의 엔지니어로 일하고 계신다 (책날개 참고). 본인이 직접 겪은 일화들을 섞어가며 알기 쉽게 과학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창조과학을 제일 처음 접했을 때 유행했던 것이, ‘배 선(船)’자에 얽힌 이야기이다. 노아의 방주에 타고 있던 여덟 명의 사람들을 나타내는 거라고, 현직 한문선생님이 특강시간에 침까지 튀기시며 열렬히 강의를 하셨기 때문에 정말 찰떡같이 믿었다. 그리고 당연히 ‘한자에 담긴 창세기의 발견’이라는 책을 당장 구입했고,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글을 읽을 때쯤에 이 기가 막히게 멋진(?!)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에 보물처럼 갖고 있었다. 그러나『아론의 송아지』를 읽자마자, 너무 창피해서 그 책은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책 내용을 빌리자면, 우선 한국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배 선(船)’ 자의 ‘입 구(口)’자 위에 있는 글자는 ‘여덟 팔(八)’이 아니라, ‘몇 기(几)’자라는 것이다. 전혀 다른 글자인데도 이것이 진리인 것처럼 책으로 출판되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린이용 창조한자 따라 쓰기 워크북이 있을 정도다.

 

 

이 책에서는 이 사안들 외에도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가며 창조과학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명쾌하게 짚어주고 있다. 특히 1부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과학’, 2부는 ‘과학의 눈으로 바라본 신앙’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 서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생각하게 해준다.

 

앞의 두 책 – 창조론 연대기, 무신론 기자 크리스찬 과학자에게 따지다 – 에서 갈증을 느낀 독자라면, 이 책 아론의 송아지를 통해서 쾌감을 맛볼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