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12. 무엇이 하나님을 창조했을까요?

 

무엇이 하나님을 창조했을까요?

What created God?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하는 많은 주장들이 수세기에 걸쳐 제안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한 가지 주장은,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지기 때문에 물질세계 외부에 있는 "첫 번째 원인"이 반드시 있었을 거라는 주장(야기되지 않은 원인, uncaused cause)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중 많은 부분에 대한 응답은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창조하셨습니까?" 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원인을 가진다면, 왜 하나님은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혹은 “하나님의 기원에 대해서는 우리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그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도 과학이 설명하는 원인 체계 안의 또 다른 원인일 뿐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원인 역시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창조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존재(신학자들이 "초월"이라고 부르는)라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헛다리 짚는 격일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근대적 개념은 종종 하나님이 우주의 기원과 도덕 법칙을 위한 설명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계몽주의의 "이신론" 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신론의 하나님은 더 낮은 층에 있는 우리들을 귀찮게 하지 않는, "다락방" 안에 있는 흰 머리의 노인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 신학과 확연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유지자로서 창조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5-17은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하나님은 단순히 우주의 시작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모든 존재에 대한 설명입니다. 매 순간 모든 시간과 공간과 사건이 존재함은 하나님의 유지하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발적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존재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 존재의 원인을 묻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필연적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필연적 존재의 원인을 묻는 것은 파란색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가를 묻는 것과 같이 범주가 잘못된 질문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우주의 시작점(빅뱅)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발견된 것은 이 토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빅뱅"을 시간, 공간 및 물질이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인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실제로 창조주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중할 것을 권합니다. 비록 몇몇 현재의 이론들("다중우주"에 관한 이론들과 같은)이 제안하는 것처럼 우주가 경험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시작점을 가지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주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기독교인으로서 위협당하는 것처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왜 처음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은 그 질문에 답할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세계관은 그 자체가 야기되지 않은 원인을 믿어야만 하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야기되지 않은 원인을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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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11. 무슨 근거로 기독교의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무슨 근거로 기독교의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On what grounds can one claim that the Christian God is the creator?

 

 

진화과학은 많은 종교는 물론 무신론과도 일치합니다. 과학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미세조정(fine-tuning) 같은 몇몇 과학적 증거는 창조주를 가리키지만, 이것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에 비해 더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대략적으로 양립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비합리적이진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역사, 철학 및 다른 이들의 간증에서 비롯된 다양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궁극적으로 성령은 각 사람의 삶에서 예수님과의 관계 안으로 그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역사합니다.

 

 

일치

 

기독교 교리는 우리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대략적으로 양립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우리에게 빅뱅 이론을 상기시키는 방법으로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빅뱅 이론이 창세기 기자가 가졌던 세계관의 일부는 분명히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전능하심, 사랑하심 및 완전하심과 같은 기독교 하나님의 특징 중 많은 것들을 반영하는 우주를 보여줍니다.[1] 예를 들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완전하심은 자연법칙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이 성장하도록 정교하게 조정되고 있습니다. 과학적 관점에서 우주의 이러한 특징은 놀라운 것이며, 더 자세한 설명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생명에 상응하는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기독교의 내러티브에 비추어 볼 때, 우주의 미세조정은 말이 됩니다. 성경은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2]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의미 있는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존재와 일치합니다. 그리고 급진적 이타주의는 진화론적 설명에는 도전이 되지만, 기독교에는 아주 잘 어울립니다. 예를 들어, 왜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그녀의 인생을 보냈을까요? 왜 군인들은 그들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생명을 희생할까요? 이러한 예들은 자신의 창조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와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들어맞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영원한 미스터리는 세상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3] 우리가 과학적인 발견을 하고 그것을 시험할 수 있는 지능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기에 우리가 우리 주변 세상에 대해 과학적 감각을 가질 수 있고 열망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알리스터 맥그라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현실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은 우리가 자연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며, 기독교인이 제공해야만 하는 더 큰 그림과 일치하는 미세조정 같이,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수수께끼이거나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4]

 

유일신 전통의 근본적인 주제 중 다수가 공유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선과 정의는 많은 신앙에서 가치를 지닙니다. 기독교와 다른 신앙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그의 부활에 대한 진리입니다. 진화과학과 예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독교 삼위일체 같은 핵심교리가 충돌할 일은 없습니다.

 

 

합리성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비합리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역사, 철학 및 다른 사람들의 간증에서 비롯된 다양한 비과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궁극적으로 성령께서는 각 사람의 삶에서 예수님과의 관계 안으로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 역사하십니다.

 

 

[1]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성경으로는 시 139:1-18, 사 40:10-31, 욥 40을 보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경으로는 요1 4:16, 시 145:8-9을 보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해서는 삼하 22: 31을 보라. 기독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목록은 성경 전체에 발견되고 많은 구절이 이런 특징을 직접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열거한 구절들은 결코 포괄적인 것이 아니다.

[2] 창 1:26-27.

[3] Albert Einstein, “Physics and Reality,” Journal of the Franklin Institute 221 (1936): 351, quoted in Alister E. McGrath, A Fine-Tuned Universe: The Quest for God in Science and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105.

[4] McGrath, A Fine-Tuned Universe,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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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10. 다윈 이전,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해석은 어떠했나요?

 

다윈 이전,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해석은 어떠했나요?

How was the Genesis account of creation interpreted before Darwin?

 

 

서론

 

많은 사람들은 다윈의 이론이 진화와 6일 창조 개념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흔들 거라고 추측합니다. 사실 창세기 1-2장의 문자적 6일 해석은 1859년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 이전에도 기독교 사상가들이 지지하는 유일한 관점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초기의 기독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작품들은 다윈의 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창세기의 해석을 보여줍니다. 

 

 

초기 기독교 사상

 

고대세계의 위대한 지식 센터 중 하나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3세기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오리게네스는 창조에 대한 초기 기독교 사상의 예를 보여줍니다. 

 

<원리론>과 <켈수스를 논박함>으로 잘 알려진 오리게네스는 기독교 핵심 교리들을 제시하였고, 이교도들의 비난으로부터 그 교리들을 지켜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창조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설명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오리게네스 이전에 창조 이야기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을 옹호한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리게네스의 견해는 그를 따르는 초기 교회 사상사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1]

 

초기 5세기 동안 북아프리카의 주교였던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고백록>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수십 편의 작품을 썼으며, 그 중 몇몇은 창세기 1-2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2]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라는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의 앞 두 장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이해에 맞춰서 쓰여졌다고 주장합니다.[3]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창조 이야기는 더 단순하고 비유적인 형식으로 들려졌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발전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는 생물진화와 양립하는 견해입니다.[4]

 

 

 

후기 기독교 사상

 

역사에서는 창세기 1-2장에 대한 비문자적인 해석이 많습니다. 13세기 저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별히 과학과 종교의 만남에 관심이 많았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과학적 발견 사이에 가능할 수 있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신학대전>에서 그는 창조의 모든 6일이 실제로는 하루를 말하는 게 아니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했었던 이론)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능성을 가지도록 창조하셨다는 견해에 동조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날, 하나님은 실제로는 아니지만 “땅에 나타나기 전에” 밭의 모든 식물들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땅에 식물들이 생겨나기 이전에”, 다시 말해, 잠재적으로…모든 것들은 구별 되지 않고 함께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일하실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세상이 창조될 때 관찰될 수 있는 적당한 질서 때문이었습니다.[5]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 관점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하기 직전인 18세기 말 존 웨슬리의 작업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 성직자이자 감리교 운동의 초기 지도자였던 웨슬리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성경은 청중에 적합한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역사(창세기)에서 이 영감받은 필자는 … 먼저 유대인을 위해 썼습니다. 교회의 유아 시절에 맞게 그의 내러티브를 맞추면서 사물을 그 드러난 지각할 수 있는 모양에 따라 묘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빛에 대한 이후의 발전에 따라 그 겉모양 아래에 놓여 있는 신비를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도록 남겨 두었습니다.[6]

 

웨슬리는 또한 성경은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쓰진 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도록 쓰였다"고 주장했습니다.[7] 

 

19세기 프린스턴 신학교는 보수적인 칼빈주의와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견고하게 수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프린스턴 신학자 B. B. 워필드는 진화를 인간의 기원에 대한 적절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확고한 과학적 연구 결과가 서로 조화로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역사가 마크 놀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경무오성에 대한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리의 가장 현대적인 수호자였던 B. B. 워필드 역시 진화론자였다.”[8]



결론

 

기독교 사상의 역사에서 창세기의 문자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군림하지는 못했습니다. 현대 과학의 발견은 성경에 대한 신뢰를 져버리는 선동으로 여겨져서는 안되고, 성경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도우미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조언을 했습니다.

 

매우 불분명하고 우리의 시야를 훨씬 벗어나는 사안들에서,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믿음을 침해하지 않으 면서도 성경이 매우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서두르지 말 아야 하며, 단호하게 한 입장을 고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만약 진리추구에서 더 많은 진전이 이러한 위치를 전복시키게 된다면, 우리 역시 무너질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의 가르침과 일치하기를 바라면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전투가 될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기를 바라야 합니다.[9]

 


 

[1] Peter C. Bouteneff, Beginnings: Ancient Christian Readings of the Biblical Creation Narratives(Grand Rapids, MI: Baker, 2008).

[2] Gillian Clark, Augustine: The Confession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3] Bishop of Hippo Saint Augustine,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Ancient Christian Writers, no. 41 (New York: Newman Press, 1982).

[4] For a further discussion of Augustine’s perspective on creation, see chapter 6 of Francis Collins’ The Language of God: 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 (New York: Free Press, 2006), as well as chapters 8 and 15 of Alister McGrath’s A Fine-Tuned Universe: The Quest for God in Science and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5] St. Thomas Aquinas, “Question 74: All the Seven Days in Common,” in The Summa Theologica of St. Thomas Aquinas, 2nd ed., trans. Fathers of the English Dominican Province (London: Burns Oates and Washbourne, 1920). Also available online at “Summa Theologica,” New Advent (accessed Oct 21, 2011).

[6] John Wesley, Wesley’s Notes on the Bible (Grand Rapids, MI: Francis Asbury Press, 1987), 22, quoted in Falk, Coming to Peace, 35. Also available online at John Wesley, “John Wesley’s Notes on the Bible,” Wesley Center Online (accessed Oct 21, 2011).

[7] John Wesley, A Survey of the Wisdom of God in the Creation: or, A Compendium of Natural Philosophy, 3rd ed. (London: J. Fry, 1777), 2:463, quoted in Falk, Coming to Peace, 35.

[8 Mark A. Noll and David N. Livingston, eds., B. B. Warfield: Evolution, Science, and Scripture (Grand Rapids: Baker, 2000), 14.

[9] Augustine,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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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9. 화석 기록은 무엇을 보여주나요?

 

화석 기록은 무엇을 보여주나요?
What does the fossil record show?

 

 

화석은 지구 역사의 광대한 기간 동안 생명체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보여주어, 먼 과거를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합니다. 전 세계에 걸쳐 암석층 안에서의 화석 배열은 고도로 질서정연하며, 과도기적 화석들이 풍부합니다. 화석 증거만으로는 모든 생명체가 공통조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지만, 화석 기록은 그 결론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을 상당히 시사합니다). 공통조상을 전제로 하여 과도기 화석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예측은 놀라운 발견을 가져왔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화석 기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해 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화석은 희귀하고, 풍부하며, 다양합니다.

 

화석은 바위, 호박, 타르, 얼음 또는 다른 매질을 통해 보존된 고대 생물들의 흔적입니다. 고생물학자라고 불리는, 화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고대 생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서 살았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사용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래 전에 살았던 생물로부터 화석화된 이빨 또는 뼈가 나온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1600년대에 화석이 체계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자, 그 화석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화석은 생물의 잔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화석이 돌, 즉 뼈나 이빨 또는 껍질이 아닌 주변 암석과 같은 종류의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어떻게 그것들이 지구 깊숙이 매장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알려진 메커니즘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화석은 종종 어떤 현존 생물과도 닮지 않았으며, 그 당시 종은 창조된 이래로 "고정되어"있다거나 변하지 않는다고 널리 믿었기 때문입니다. 멸종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1600년대 후반에, 사실상 화석이 과거 생물의 굳어진 잔재라는 주장이 논쟁에서 이기기 시작했습니다. 존 레이(John Ray)와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와 같은 헌신적인 기독교인들은 화석의 본질과 분포를 기술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초기 크리스천 지질학자들은 먼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화석화는 극도로 희귀한 사건이지만, 화석은 풍부합니다. 어째서 일까요?

 

화석화의 가능성은 지역의 조건과 유기체의 구성에 따라 크게 좌우됩니다. 죽은 이후,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공기에 노출되기 때문에 재빨리 먹히거나 분해됩니다. 화석화되기 위해서는 유기체가 저산소 환경에서 보존되어야만 합니다 (산소는 죽은 유기체를 분해하는 호기성 종속 영양 박테리아가 자랄 수 있게 합니다). 나무 수액에 갇힌 곤충 한 마리; 늪지에 갇힌 철기 시대의 인간; 홍수로 인해 퇴적물에 하류로 휩쓸려 퇴적물에 갇힌 공룡 - 이런 것들은 희귀한 사건이지만, 생명체가 오래 동안 존재해왔고, 또 많은 생물들이 지구 위에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지구 역사의 대부분에 걸친 거대한 화석의 컬렉션을 가지고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오래된 화석은 그린란드에서 발견된 미생물 덩어리인데, 37억 년이나 되었답니다.

 

대부분의 화석은 이빨과 뼈와 같은 단단한 신체 부위를 가진 생물체에서 유래하지만, 많은 다른 종류의 화석도 존재합니다. 빙하 안에 얼려진 매머드는 수천에서 수천만 년 동안 놀랍게도 거의 분해가 되지 않은 채 보존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가끔 공기에 노출되기 전까지 원래의 색을 그대로 간직하는, 자연 그대로의 나뭇잎을 고대의 호수 바닥에 짓눌린 채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예로는 공룡의 피부, 깃털의 자국, 꽃가루, 무척추동물이 기어가거나 구멍을 판 흔적, 조개, 알이 보존된 공룡의 둥지, 그리고 "석화된" (고생물학자는 "광물화된"이라는 단어를 선호합니다) 나무가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심지어 화석화된 공룡 뼈 안에 보존된 연조직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화석이 형성되는 과정을 화석학(taphonomy)이라고 부르며, 고생물학의 흥미로운 연구 분야입니다. 

 

 

퇴적암에 분포된 화석은 고도로 질서정연합니다.

 

화석은 퇴적암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고, 화성암(마그마로 형성된 암석)에서는 드물게 발견되며, 변성암(열과 압력에 의해 변형된 암석)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퇴적암은 광물 및 유기물질이 퇴적되고 궁극적으로는 지층(strata)이라 불리는 층으로 단단하게 합쳐지면서 형성됩니다. 때로는 이러한 현상이 급속하게 발생할 수 있지만, 전형적으로 주목할 만한 층들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수백만 년이 걸립니다. 대부분의 경우, 오래된 지층은 오래되지 않은 지층 밑에서 발견됩니다. 마치 재활용 수거함 안에서 보통 지난 주 신문이 오늘 온 광고지들보다 아래에 놓이는 것처럼 말이지요. 지질학자들은 이를 중첩의 원리(principle of superposition)라고 부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암석층은 기울어지거나 접혀지거나 부서지거나 또는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종종 이러한 결과를 만드는 일련의 사건들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암석의 각 층에 있는 화석은 따라서 그 층들이 형성될 때의 환경에서 살았던 각 종류의 생물 표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층은 읽히고 해석될 수 있는 생명의 역사에 대한 책의 "페이지들"인 것입니다. 

 

화석은 몇 가지 방법으로 놀랍게도 질서 있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다윈의 시대가 오기 훨씬 전, 어떤 종류의 화석이 암석 기둥 내에서 항상 서로 같이 발견된다는 사실이 관찰되었습니다. 즉, 어떤 종류의 생물들은 서로 같이 발견되었고, 다른 종류의 생물들과는 같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삼엽충은 더 낮고 오래된 층에서 발견되었고, 거대 곤충과 양치류는 그보단 덜 오래된 층에서 더 많이 발견되었으며, 공룡은 그보다도 더 오래되지 않은 층에서 더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층에 있는 화석 군의 순서는 각 대륙에 걸쳐서도 장소에 상관없이 매우 일관적입니다. 어떤 한 화석 군이 다른 화석 군으로 대체되는 이런 패턴은 너무 일정하여 동물군 천이의 원리(principle of faunal succession)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동물군 천이는 멸종의 증거(종의 90%까지 손실된 대규모 또는 대량 멸종 사건조차도)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들의 일상적인 출현 증거도 보여줍니다. 두 아이디어는 모두 1800년대에는 놀라운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진화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 조차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들은 모든 화석이 수천 년 전 노아의 홍수 때 퇴적되었다고 믿습니다(창 6-9장). 이 경우가 참이라면, 모든 유형의 화석은 섞여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엽충과 꽃 피는 식물을 같은 층에서 결코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랜드 캐년에서는 공룡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것들이 발견되었지만, 암석 시대에 예상했던 대로, 근처에 있는 Grand Staircase 층군의 높은 층에서 였습니다). 화석 기록은 (다른 지질학적 증거와 마찬가지로) 재앙적이었던 전지구적 홍수 사건이 한 번도 없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홍수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전혀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은 신학적인 역사(theological history)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신학적 목적을 위해 실제 사건(아마도 지역적 홍수 사건)을 굉장히 비유적인 언어로 기술했다는 말입니다. 성경무오성에 헌신된 많은 성경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성경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이유로 홍수지질학을 거부합니다. 

 

화석은 또한 다른 방식으로도 질서를 보여줍니다. 특정 암석층은 그 암석층이 포함하고 있는 화석에 의해서 전세계적으로 식별 가능할뿐 아니라, 암석 기둥의 윗부분으로 갈수록 계통 내의 더 큰 생물체로의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크기의 경향은 계통 내에서만 일어나며, 계통 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포유동물은 위로 올라갈수록 커지지만, 공룡만큼 커지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작은 유기체는 모든 층에 존재하지만, 큰 동물은 바닥 층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젊은지구 홍수지질학과 일치되기 어렵지만, 암석층이 형성되기까지 수백만 년이 걸렸고 생명체가 공통 조상과 관련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예측 수 있는 것들과는 정확히 일치합니다. 

 

과도기 화석은 풍부합니다. 

 

진화 이론에 대한 많은 비판자들은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진화적 전환을 보여주는 "과도기 화석"의 부재를 언급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맞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다른 알려진 두 종 사이에 존재하는 계통에 확실히 해당되는 화석을 찾는 것은 아주 드뭅니다. 왜 그런지 한 비유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족 묘지에서 무덤을 무작위적으로 골랐다면, 그 무덤이 여러분의 직계 조상인 증조 할아버지(여러분의 직계 조상)의 것일 가능성은 낮겠지만, 아마도 먼 친척(즉, 여러분의 가족이긴 하지만 직계 조상은 아닌)의 무덤일 가능성은 꽤 높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화적인 가계도의 "무성함”(bushiness) 때문에, 서로의 직계 조상이 아닌 가까운 관계의 종이 많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과도기적 형태는 극히 희귀한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진화론적으로 "사촌"인 종들이 훨씬 흔합니다. 그 종들은 그러나 가까운 공통 조상을 공유하기 때문에 여전히 과도기적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시조새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시조새는 비조류 공룡에서 조류로의 전환을 나타내지만, 어떤 현생 조류의 직계 조상은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많은 수의 과도기 화석이라 할 만한 것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들은 대부분 소위 "소진화론적" 전환에 주로 해당되지만, 각각의 주요 제안된 진화적 전환에서도 존재합니다. 가끔 과도기 화석의 전체 순서가 알려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요한 전환들의 예는 육지에 적응하는 어류의 많은 계통 중 하나, 공중비행으로 진화하는 초기의 수각류 공룡의 한 계통, 수상 서식지에 적응하는 육상 포유동물, 그리고 인간으로 진화하는 영장류의 한 계통 등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로의 전환입니다.

 

 

전환기에서 땅으로: 바다 생물에서 육지 동물로

 

육지 동물(또는 사지 동물)의 화석은 약 3억 7천만 년 전의 암석에서 처음 나타납니다. 더 오래된 암석에서는 바다 생물만 발견될 뿐입니다. 그러나 1998년, 과학자들은 3억 7천만 년 전의 화석화된 지느러미를 발견했는데, 인간의 손가락 5개와 비슷한 8개의 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느러미는 의심할 여지없이 물고기의 지느러미였습니다. 이는 이 화석이 과도기적 형태의 강력한 증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석 기록을 조사할 때 커다란 성공 사례 중 하나는 물에 적응된 척추 동물과 육지에 적응된 척추 동물 사이에 거의 완벽한 화석화된 전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진화 생물학자 닐 슈빈(Neil Shubin)은 1998년에 발견된 지느러미보다 더 완전한 과도기적 표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과도기적 육지/수중 동물을 품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암석의 정확한 나이를 결정한 후, 그와 그의 팀은 그 나이에 해당하는 북극의 침식된 암석에서 하나의 표본을 찾기 위해 4번의 여름을 보냈습니다.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그들은 아가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를 발견했지만, 그 물고기는 악어 같은 평평한 머리와 얕은 곳에서 동물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강한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표본의 이름은 틱타알릭(Tiktaalik)으로 붙여졌으며, 진화 이론의 예측력을 보여주는 놀라운 예입니다. 

 

화석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줍니다. 

 

가끔 화석의 아름다움과 경이는 진화에 대한 논쟁에서 잊혀집니다. 우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때, 우리가 발견한 모든 새로운 화석은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은 우리 행성 위에서 벌어진 생명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광대하고 복잡한 퍼즐의 작은 조각과도 같은 것이지요. 기독교인들에게 화석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 대해 반추해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바다에 사는 파충류 군인 모사사우르스를 생각해 보지요. 스쿨버스만큼 긴 이 무시무시한 포식자는 2천만 년 동안 바다를 지배했습니다. (참고로 비교해서, 호모 사피엔스는 지상에서 오로지 20만 년 동안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사사우르스와 같은 멸종된 생물의 거대한 수와 다양성, 상이점,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광대한 시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의 세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요?

 

첫째, 그들은 포식과 멸종이 인간이 생겨나기 오래 전인 수백만 년 동안 실재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일부 기독교인이 믿는 것처럼, 포식과 멸종이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생명체(욥 38-41장)의 힘과 포악함에서도 기뻐하시는 창조주에 대한 묘사와 일치하지만, 아마도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관련된 오랜 시간은 하나님이 엄청난 시간을 들여 창조하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참을성이 좋으십니다. 그 오랜 시간에 걸친 셀 수 없이 수많은 종의 출현은 창조가 "단번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속 중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찰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간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영향을 끼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엄청나게 많은 대다수의 생명체가 더 이상 지구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과 씨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존재했었습니다. 평생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서나 인간에게 사용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과 목적을 위해 존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창조하실 수 있으셨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즉, 칼빈의 해석으로 일반계시)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고대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화석은 우리에게 그 방법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고된 일에 대해 과학자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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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8. 진화란 무엇입니까?

 

진화란 무엇입니까?
What is Evolution?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진화는 생명 발달에 관한 과학적 이론이며 기독교 신학과 일치합니다.

 

 

서론

 

“진화”를 정의하기 까다로운 이유는 이 단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일부에서 세계관과 결부시키는 진화와 과학이론으로써의 진화와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관으로써의 진화

 

어떤 이들은 진화를 무신론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진화가 신을 대체한다고 여기거나, 그렇지 않다면 생명의 발달에서 진화가 신의 개입을 배제한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철학적이거나 세계관적 입장이지 (가끔 "진화주의" 아니면 단순히 "자연주의"로 불리기도 합니다), 엄밀한 과학적 입장은 아닙니다.

 

바이오로고스는 진화주의에 반대하고 대신 기독교적 유신론의 세계관을 고수합니다. 우리는 기원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진화적 창조"(evolutionary creation)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믿고 진화가 생명의 발달 기작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설명임을 받아들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이 식물의 생장과 발달을 가능케 하시는 것을 믿지만, 그와 동시에 광합성 이론이 그 과정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설명임을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학이론으로써의 진화

 

일상에서 "이론"(theory)이라 함은 어떤 추측 (이를테면, "난 ...에 대한 '추측' 또는 '짐작'을 해") 같은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맥락에서 "이론"이라 함은 일련의 관찰-혹은 관측-에 대한 실험이나 테스트를 거쳐 잘 검증된 설명을 일컫습니다. 진화이론에 의해 설명되는 관찰들은 주로 화석 기록, 비교 형태학, 생물지리학, 그리고 현재 가장 중요한 유전학으로부터 얻어지고 있습니다. 진화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시도하지 않는 반면, 오로지 첫 생명 이후의 생명체들의 발달과 분화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합니다.

 

진화이론은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공통조상으로부터 오랜 세월(현재 약 40억 년 정도)을 거쳐온 변이와 선택의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변이'는 자손이 부모와 똑같은 복제품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선택'은 그들 중 오직 몇몇 자손들만이 그들의 자손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합니다. '공통조상'이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종이 상호 간 진화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개는 고양이로부터 진화하지 않았고, 인간은 침팬지로부터 진화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대신,  만약 어떤 두 종의 계통을 충분히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두 종이 후손으로 갈라져 나온 같은 “조부모”에 도달할 것이라는 말이지요. 인간과 인간에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의 경우, 이 둘의 공통조상에 다다르려면 30만 세대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과 침팬지의 공통조상은 299,998번째 증조부라는 말입니다!). 과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인간도 침팬지도 아닌 그 고대 집단은 두 그룹으로 나눠졌고, 그 그룹들은 생식적으로 고립되었습니다. (이 말은, 환경적 분리 등의 이유로 각 그룹의 구성원들이 같은 그룹 안에서만 짝을 이루어 번식했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세대가 지나면서 다양한 변이들이 각 그룹 안에서 보존되었습니다. 결국 각 그룹의 특징은 과학자들의 눈에 서로 다른 종이라고 보일 만큼 충분히 달라졌습니다. 진화이론은 어느 두 종의 조상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진화에 관한 논쟁

 

과학계에서는 진화의 이러한 넓은 정의에 관한 논쟁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보통 문외한이거나 사실을 고의로 호도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공통조상에 의해 설명되어지는 관찰 근거는 넘쳐납니다. 물론 새로운 정보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몇몇 세부적인 사항 (이를테면, 종분화는 얼마나 오래전에 일어났는지, 혹은 어떤 종들이 가장 가깝게 연관되어 있는지 등등)을 수정하도록 만들었지만, 절대다수 분야의 과학자들은 핵심 관점을 온전히 지지하고 동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진화이론의 핵심 관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논쟁이나 논란이 없지는 않습니다. 진화 과학자들은 변이 요소가 임의의 유전적 돌연변이에 의해 얼마만큼 설명되는지에 대해 논쟁하며, 다른 선택 방법들이 번식 적합도 보다 어느 정도 중요한지에 대해 논쟁합니다. 과학자들은 진화적 변화가 얼마나 점진적인지, 그리고 자연선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와 같은 주제들에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다양한 세계관에 따른 진화의 다양한 양상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도 굉장히 다른 의견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진화의 총체적인 방향이 있는가?', '진화가 신학에 대해선 얼마나 의미를 가지는가?'와 같은 것들입니다.

 

바이오로고스는 최고의 동시대 과학은 기독교 신학과 일치한다고 믿습니다. 진화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기원에 대한 바이오로고스의 관점을 이 홈페이지 안의 다른 항목들이나 특정 용어를 입력할 수 있는 검색 상자를 이용하여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강상훈 교수 (미국 베일러대학교 생물학과, 과신대 자문위원)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common-questions/what-is-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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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7. 과학지식의 틈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일까요?

  • 과학지식의 틈이 하나님이라고 하는게 위험하다는데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빛이라 한줄로 알고 있습니다.

    문이라고도 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증인 2020.01.08 23:34

 

과학지식의 틈이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일까요?
Are gaps in scientific knowledge evidence for God?

 

 

과학의 모든 분야에는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 있고, 우리들의 이해에도 틈새가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전형적으로 이런 것들을 열린 연구 질문이라고 봅니다. 다른 이들은 종종, 과학이 어떤 사건이 일어난 방법을 설명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에 대한 설명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주장을 "틈새의 신"(god-of-the-gaps) 주장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위험한 이유는 과학이 항상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과학 지식의 틈새가 하나님을 믿는 근거가 된다면, 과학자들이 그 간격을 채우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 틈새의 신보다 더 크십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영역뿐 아니라, 틈새의 영역이 있는 자연세계에서도 항상 일하신다고 믿습니다.

 

 

틈새의 신 정의하기

 

틈새의 신 주장은 과학적 설명에서의 빈 틈을 신의 역사와 그에 따른 신의 존재에 대한 지표 혹은 증거로 사용합니다. 그러한 주장은 과학이 아직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원인 대신 신의 역사를 상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정은 만약 어떤 일이 일어난 이유를 과학이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신이 반드시 그에 대한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역사나 존재에 대해 틈새의 신 주장을 사용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미래의 과학적 발견을 부인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지속적인 발전과 함께 틈새의 신 설명은 종종 자연적인 메커니즘으로 대체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주장이 변명의 도구로 이용될 때, 과학연구는 불필요하게 신에 대한 믿음과 상충될 수 있습니다. 최근의 지적설계 운동은 이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이나 박테리아 편모의 환원불가능한 복잡성과 같은 특정한 지적설계 주장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의해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습니다.

 

 

틈새의 신 설명하기

 

아이작 뉴턴과 피에르 사이몬 드 라플라스의 익숙한 이야기는 틈새의 신 논쟁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뉴턴은 중력을 설명하기 위한 수학 방정식을 고안하여 탁월한 정확도로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하고 예측했습니다. 연필과 종이를 사용하면 태양과 행성 궤도를 매우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성들은 태양뿐 아니라 행성들 상호 간의 중력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가 태양 주위의 궤도에서 화성을 지나칠 때, 화성과 지구 사이에는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중력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이 작은 행성 간 상호작용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 많은 경우에는 일 년에 여러 차례 - 뉴턴은 이러한 중력 섭동이 축적되면 천천히 태양계 질서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런 파괴적인 힘에 대응하기 위해 뉴턴은 하나님께서 가끔 태양계를 조정하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개입하셔야만 할 거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따라서 태양계의 지속적인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정기적인 특별 조치가 필요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뉴턴은 또한 행성들이 모두 태양 주위를 같은 방향과 같은 평면에서 어떻게 돌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중력이론은 태양을 향하여 어떤 각도로 기울어지든지 상관없이 모든 행성의 운동과 완전히 양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발견한 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행성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거의 모든 궤도가 같은 평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행성은 트랙 위에서 달리는 선수처럼 태양 주위를 돕니다. 뉴턴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아하게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6개의 기본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거의 원 궤도를 그리며, 같은 방향으로, 거의 같은 평면에서 돌고 있다. […] 그러나 단순한 기계적 원인이 규칙적인 수많은 움직임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태양, 행성 및 혜성의 가장 아름다운 시스템은 지적이고 강력한 존재의 간섭과 통치로부터만 진행될 수 있다.

Sir Isaac Newton, Isaac Newton’s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comp. and ed. Alexandre Koyre and I. Bernard Cohen, rev. ed.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2).

 

이 두 가지 예에서 - 하나는 행성의 계속되는 운동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움직임의 기원에 관한 것 - 뉴턴은 교과서처럼 틈새의 신 추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많은 설명을 해내기 위해 과학이론을 제안했었고, 그러고도 설명되지 않았던 틈새를 메우기 위해 신을 차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뉴턴이 두 가지 모두에서 틀렸다는 것을 압니다. 행성이 경험하는 중력섭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의 평균 영점으로 균형이 맞춰집니다. 최종 결론은 행성 운동이 극도로 안정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정성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것을 밝혀낸 것은 뉴턴의 이론을 간단하게 응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뉴턴은 그의 직감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든 계산을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행성의 질서정연한 움직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뉴턴은 태양계가 어떻게 스스로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는지 또는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시스템에서 행성운동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순히 천문학이 이 지점까지 발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뉴턴 이후 수십 년 동안 천문학자들은 태양계가 회전하는 물질의 큰 성간 구름으로부터 자연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천천히 회전하는 성간 구름은 그 자체의 중력 아래에서 붕괴되고, 팬케이크와 같은 것으로 평평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토성의 고리는 성간 구름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존재하는 흥미로운 예입니다. 물질은 팬케이크의 평면에서 큰 덩어리들로 모여지게 됩니다. 이 과정이 끝나면 동일한 평면에서 동일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모든 덩어리들의 집합이 존재하게 됩니다 - 마치 우리 태양계처럼 말이지요.

 

과학사에서 그러한 에피소드는 특이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 에피소드들은 아주 일반적이어서 과학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자연현상에 신을 끌어들여서 설명하는 과정을 통칭하기 위해 틈새의 신이라는 문구가 만들어졌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행정부에서 관료를 지낸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사이몬 드 라플라스와 관련된 상황에 의해서 그러한 틈새의 신 추론의 위험이 뉴턴 이후 한 세기 동안 집중 조명되었습니다. 라플라스는 뉴턴의 운동법칙을 정교하게 다듬고 확장했으며,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바라보는 눈을 확대하는 데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인 시대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신의 간섭을 불러들이지 않고도 우주의 역학을 설명하는 폭넓은 텍스트를 쓸 수 있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라플라스는 자신의 이론에서 신의 부재에 관해서 나폴레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라플라스, 그들은 당신이 우주의 시스템에 대하여 이 거대한 책을 썼으며, 창조주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라플라스의 대답은 유명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그 가설이 필요 없습니다." 물론, 신은 여전히 우주의 존재에 대한 가설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뉴턴은 과학적 설명의 결함을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라플라스의 이론은 당시의 유신론적(?) 변증법에 불필요한 타격을 가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엔 위험이 있습니다. 만약 과학지식의 틈새가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으로 사용된다면, 과학이 발전해서 그 부족한 설명의 틈을 메우게 될 땐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신을 향한 포인터: 미세조정과 도덕률

 

'신의 언어'의 첫 번째와 세 번째 챕터에서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자신의 신앙의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신 하나님을 향한 포인터를 언급합니다. 이 포인터 중 하나는 우주의 미세조정입니다. 미세조정은 물리학의 기본법칙이 정교하게 삶에서 균형 잡힌 것처럼 보이는 방식을 나타냅니다. 이 정밀도는 과학이 제공할 수 없는 설명을 요구합니다. 미세조정의 의미에 대한 열띤 논쟁이 있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하나님을 미세조정자로 불러들이는 것이 틈새의 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과학 안에서는 자연법칙의 상세한 특성을 설명하는 어떤 방법도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미세조정 논쟁은 과학을 넘어서서, 과학이 연구하는 세계가 왜 그러한 특성을 가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형이상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콜린스가 언급한 또 다른 포인터는, C. S. 루이스를 따른 도덕률입니다. 도덕률은 인류에 대한 암묵적이고 보편적인 윤리 기준입니다. 콜린스는 도덕률을 중력과 같은 법칙과는 달리 아주 빈번하게 위반되어지는 보편적인 법으로 묘사합니다. 전반적으로 도덕률은 진화의 산물에서 기대되는 행동유형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콜린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타적인 행동은 종종 가장 잘 확립된 다윈의 진화 과정으로부터 기대되는 것을 훌쩍 넘어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틴 노왁과 같은 이론가들에 의해 개발된 수학적 모델은 자연선택이 이타성을 위한 유전자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지만,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와 같은 위대한 성인들의 급진적인 자기희생은 그 모델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기원에 대한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설명도 현재 우리가 관찰하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이 인간의 도덕성을 설명할 수 있거나, 이론물리학이 그러한 완벽한 자연 상수를 설명할 수 있다면, 유신론적 변증법은 어떤 식으로든 신용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강상훈 교수 (미국 베일러대학교 생물학과, 과신대 자문위원)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common-questions/are-gaps-in-scientific-knowledge-evidence-for-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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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6. 진화는 "위기에 처한 이론"입니까?

 

진화는 "위기에 처한 이론"입니까?
Is evolution a "theory in crisis"?



진화를 반대하는 이들은 종종 진화를 위기에 처한 이론이라 칭하지만, 이는 좋게 말해서 오해일 뿐입니다. 

 

 

서론

 

진화 과학의 반대자들은 종종 진화를 "위기에 처한 이론"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일반적인 교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는데, 그들 중 39 퍼센트는 과학자들이 인류는 시간에 따라 진화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반대한다고 믿습니다. 응답자들이 백인 복음주의자들에 한정될 때, 그 숫자는 49 퍼센트까지 올라갑니다. 하지만 믿음은 실제로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과학자들 스스로가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땐, 그들 중 99 퍼센트는 인류는 시간에 따라 진화해오고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진화이론의 핵심 사항인 공통조상 (인간 포함)에 대한 논쟁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생물학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안정된 배경을 제공해줍니다.

 

그러나 물론 논쟁이 되고 있는 현대 진화이론의 요소들이 있습니다(이것이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이지요). 그러한 논쟁의 한 좋은 예는 2014년 Nature 지에 실린 저명한 논문 "진화이론은 재고를 필요로 합니까?"입니다. 이 논문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심하는 저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시간에 따른 진화적 변화의 복잡하고 다양한 방법들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만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기독교 교파 간의 의견 충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핵심적인 프레임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도 사람들은 세부적인 어떤 부분에 대해 의견을 달리할 수도 있고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내부 논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몇 진화 "분파"를 분류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다윈주의(Neo-Darwinism)

 

진화 이론 내부에서 불일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용어들이 다양한 그룹에서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과 그것들이 종종 부주의하게 정의된다는 점입니다. "신다윈주의"라는 용어는 100년이 넘도록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이 용어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사용되는 것인지, 혹은 일부 과학자들이 오늘날 변호하는 특정한 포지션을 명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인지 항상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벌써 이 용어를 폐기했습니다. 

 

현재 "신다윈주의"가 사용될 때는 보통 "환원주의적" 혹은 "유전자 중심적" 진화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소소한 적응에서부터 새로운 종의 발달에 이르는 모든 진화적 변화는 단순히 어떤 개체의 DNA 변화로써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에 따른 대립 유전자 빈도 변화"로 표현되곤 합니다 (대립 유전자는 한 유전자의 서로 다른 버전이고, 유전자는 DNA의 특정한 부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대진화는 더 오랜 시간에 걸친 소진화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의 가장 저명한 지지자는 리처드 도킨스인데,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확장된 진화적 종합(Extended Evolutionary Synthesis) vs. 근대적 종합(Modern Synthesis)

 

오늘날 일부 과학자들은 확장된 진화적 종합(EES)이라 불리며 근래에 지지세를 넓히고 있는 이론을 지지합니다. 그들은 변이가 유전자의 돌연변이로부터 전적으로 비롯되고, 선택은 단지 유전자 빈도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유전자 중심의 발상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대신 어떻게 개체가 환경과 함께 공동 구성과 공동 진화를 거치는지를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유전자 단위가 아닌 개체 단위가 진화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관점에서도 무작위적인 유전자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은 진화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계속해서 하게 되지만, 그 외에 다른 요소들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다른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발생 편향: 개체의 배아 발생은 그들의 형태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방식을 어떻게 편향시키는가.

  2. 표현형의 가소성: 개체의 모양과 기능에 유연성을 초래하는 생리학적 다양성

  3. 적합한 환경 구성: 개체가 그들의 환경과 분리되어 살지 않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적합한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생존 기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4. 유전자 외적인 유전: 유전의 일부 측면은 DNA 구성 요소의 수준에서 작용하지 않으며, 예를 들어 DNA packaging에 관여하는 단백질들을 수정하거나 심지어 문화적 진화를 통해 사회적 행동을 전달할 수 있다.

 

EES 생물학자들은 진화 이론에 대한 이러한 추가가 그 이론 자체의 명칭을 수정할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다른 진화 과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윈 이후 진화 이론에서 일어난 이러한 발전을 포함한 다른 발전들을 포괄하여 광범위하게 “근대적 종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를 선호합니다. 이 명칭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지만, 오늘날 그것을 사용하는 과학자들에게 진화는 단순히 변이와 선택의 일반적인 범주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명칭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 이론에 대한 "확장"보다는 이 명칭 아래에서 이러한 추가적인 요소에 대한 특정 메커니즘에 대해 연구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그룹들 중 어떤 그룹도 공통조상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중대한 변화가 진화 이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조금 바꾸는 데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일반 대중과 더불어 특히 기독교인들이 진화 과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오도되어 온 것 같아 우려하고 있습니다. 진화(공통조상 포함)가 일어났는지 의심하는 생물학 박사 출신의 과학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오도와 오해가 (때때로 선한 의도를 가진) 기독교 지도자들이 수사적 효과를 위해 남용하기 때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진리에 충실해야 하며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야만 합니다. 진화과학은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것이 발견되어지고 있으며, 세부적인 것들에서는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위기에 처한 이론은 아닙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강상훈 교수 (미국 베일러대학교 생물학과, 과신대 자문위원)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common-questions/is-evolution-a-theory-in-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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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5. 현대 과학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할까요?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현대 과학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할까요?

Does modern science make miracles impossible?

 

 

하나님은 자연세계에서 한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물리적 세계에서 규칙적인 패턴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 패턴을 벗어나는 방식으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규칙적인 패턴을 과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이나 과정(중력이나 광합성과 같은)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패턴을 벗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통 기적(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이라고 부릅니다.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기적을 믿으며,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기적뿐만 아니라 창조 질서의 규칙적인 패턴에도 관여하신다고 믿습니다.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기적, 표적, 이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 사건은 예언자와 사도들에 의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일어났습니다. 성경의 기적은 단순히 구경꾼의 놀라움만을 위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목적을 위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기적은 신학적인 맥락 안에서 항상 발생합니다.

 

일부 무신론자들은 불합리한 생각과 기적과 같은 해로운 미신으로부터 사회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과학 자체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기적이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법칙은 불변의 확고한 경험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사실 자체의 본성에서 볼 때, 기적을 반대하는 증거는 경험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가능한 것처럼 도처에 널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무신론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근대 유신론자들 중 일부도 과학은 기적을 반증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를 "비신화화"하려는 시도로 유명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ph Bultmann)은 1961년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전등과 무선을 사용하고 근대 의학과 외과적 발견을 사용하면서, 그와 동시에 신약성서의 영과 기적의 세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기적의 이야기를 제거해버림으로써 불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기독교가 더욱 현대사회의 구미에 부합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흄과 불트만이 옳을까요? "자연법칙"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주류 과학을 수용한다면, 반드시 성경의 기적을 거부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하신 역사

 

기적은 자연현상이 일상적으로 기능하는 배경에 반하여 발생합니다. 성경은 자연계에서 직접적이고 일상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4:10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그는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신다." 이 구절의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가리키고, 두 번째 부분은 물이 그 자체의 자연적 성질을 통해 흘러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시편 전체의 관점은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것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 사이에서 유동적으로 변합니다. 그러한 이중적인 묘사는 구약성경 전체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패턴을 계승하고 있으며,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보존되고 있음을 명백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히 1:3), 그리고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의 강력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을 묘사할 때, 성경은 자연현상의 규칙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인지에 따라 쉽게 관점을 전환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연적 사건과 초자연적 사건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현대적인 구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자연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Nature is what God does)

 

중세 시대 기독교 사상가들은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질문들로 씨름을 해오면서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가 생겨났습니다. 자연의 규칙성이 하나님의 보존하심을 나타내는 경우, '변덕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신뢰할만하고 일관적'이라고 기대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의 규칙적인 움직임은 "창조주의 습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자연법칙"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한 신학적인 깨달음은 현대과학이 부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규칙적인 패턴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외에도, 현재 과학의 관점을 무시하는 듯한 기적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다.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에 썩어짐을 당할 과정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예수님이 어떠한 자연적인 방법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가능성은 적어집니다. 오히려 과학은 예수님이 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 그 사건은 하나님의 평범한 섭리와 상관없이 일어났음이 틀림없거나, 그 섭리를 넘어서는 것이었거나, 아니면 그 섭리에 반하는 것이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기적과 진화적 창조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의 진화 생물학자인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Simon Conway Mo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에 놀라지 않지만, 그 기적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에 놀랍니다.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을 찾아온다면 당신은 기적 말고 달리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기원 문제에서 만큼은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기적을 행하셨는지에 따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입장을 달리합니다. 젊은지구론자들은 하나님이 일련의 기적을 통해서 6일 동안 지구와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봅니다. 오랜지구론자들은 주류 과학에서 말하는 창조의 긴 역사를 수용합니다. 그러나 자연세계의 특징적인 부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 긴 역사에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개입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지적설계의 지지자들은 자연법칙은 생명의 발달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성경 속 하나님과 같은 외부의 지적 존재가 개입했다고 호소합니다.

 

반면,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하나님이 과학적으로 기록될 수 있는 규칙적인 패턴을 이용하여 역사를 통해 창조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기적의 개념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이 우리들의 지식의 틈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채울 수 있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설명은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하나님을 "잘 해명할" 위험이 없습니다. 또한,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맥락이 기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수 백만 년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의 신학적인 목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종합하면, 성경적 증거와 과학적 증거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든 규칙적인 인과관계를 사용하도록 선택하신 하나님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자연법칙은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제한할 수 없습니다.

 

자연법칙은 단지 인간이 묘사한 자연에서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물리법칙의 창조자요 보존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실 때 그 법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분명히 갖고 계십니다. 기적은 단지 하나님이 평소와 다른 패턴으로 역사하기를 선택하신 경우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기적은 항상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놀랍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이오로고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나라를 증거 하는 기적뿐 아니라, 창조를 보존하기 위한 규칙적인 패턴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가리키는 주류 과학을 모두 수용합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최승언 교수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과 명예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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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창세기는 실제 역사일까요?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창세기는 실제 역사일까요?
Is Genesis real history?

 

 

서론

 

남자는 흙으로부터, 여자는 갈비뼈에서. 말하는 뱀. 두 개의 신비한 나무. 거대한 홍수. 언어의 혼란.

 

우리는 이런 이야기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 앞장에서 묘사된 모든 사건이 실제일까요? 창세기는 우리에게 정확한 역사를 제공하는 것일까요?

 

과거의 사건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역사로 고려될 수는 있습니다. 창세기는 과거의 사건, 즉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같은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신학적 역사이며, 어떤 부분을 기술할 때는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 방법(물질적인 용어로)이나 창조에 소요된 시간을 말해주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창세기가 다른 고대 이야기들처럼 생생한 이미지를 사용해 과거의 사건을 기술한 진실한 이야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우리가 답을 알기 원하는 과학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자세히 읽어보면 의미가 명백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서, 해와 달과 별이 없는 세 번의 저녁과 아침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정상적인 날이 아닙니다(비록 텍스트에서는 정상적인 날로 기능하지만, 그것들은 문학적인 의미의 날입니다). 혹은 창세기 2:7을 고려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부터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 안으로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언어는 다소 비유적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은 손이나 폐가 없으신 영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영감과 권위

 

창세기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창조될 때, 그것을 지켜 본 인간은 아무도 없었으며, 하나님이 창세기 저자에게 현상이나 사건을 단순히 베껴 쓰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영감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청중에게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스라엘 저자의 설명을 봅니다. 우리는 창세기 내레이터가 이해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으며, 그래서 우린 그것을 세상의 권위 있고 진실된 이해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과학적 이해에 따라 창조 사건을 재구성하거나 우리의 현대적 세계관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하려고 의도되지는 않았습니다.

 

창세기의 장르와 문학 양식

 

역사를 묻는 것은 곧 장르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종종 사람들이 창세기를 역사로 파악할 때, 그들은 창세기를 다른 문학 장르(예: 신화)나 다른 문학 양식(예: 시)으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들은 창세기를 신화나 시로 파악하는 것을 창세기의 진리 주장을 훼손하거나 희석시킨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는 다양한 장르나 문학적 양식을 통해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가 진리 주장을 전달하는 방법 - 내레이터의 의도가 무엇인지 -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진리 주장을 여러 족보와 함께 주로 내러티브로 제시합니다. 창세기 1-11장은 인류의 기원을 이야기하며, 이는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어집니다. 창세기 12-50장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족 이야기 중에서 의미심장하게 전개된 사건들을 이야기해주며,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배경을 제공합니다. 창조 (1-2장)와 아담과 이브의 최초 불순종 행위(3장)를 포함하는 초기 사건들은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이끄는 인간 이야기의 시작 에피소드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과 고대 세계의 내러티브가 과거 사건과 관련된 진리를 어떻게 제시하는지 연구함으로써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러티브가 실제 사건을 다룰지라도, 그 사건은 신학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기술된 것입니다.

 

 

신학적 목적을 위한 수단

 

고대든 현대든 발생한 사건의 시간 순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진 내러티브는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리얼리티 TV 쇼를 생각해 보세요. 한 에피소드가 촬영되면 수많은 카메라들이 다양한 사건과 대화를 잡아내는 데 사용됩니다. 그런 다음 감독은 쇼의 의도에 맞는 일관된 이야기를 제작하기 위해 원본자료를 선택, 배열 및 편집합니다. 감독이나 관객 모두 최종 작품으로부터 원본자료를 재구성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황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역사적인 설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와 같은 고대의 내러티브도 같은 경우입니다.

 

고대의 저자들은 사건의 세부 사항보다는 사건의 의미에 더욱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내러티브들은 대부분의 현대 역사의 내러티브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만약 그들이 기록한 사건을 명제적 진리 주장으로 축소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내러티브의 모든 부분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고대의 내러티브가 과거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때, 그것은 보통 단순히 과거를 기술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현재를 위한 겁니다. 고대의 내러티브는 실제 사건과 실제 인물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현대의 독자가 기대하는 스타일에 맞췄을 때의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대의 내러티브는 나레이터내레이터 시대의 세상을 기술하고, 그 세상을 설명하며 청중들이 포용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합니다. 내레이터가 청중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쓰일 세부 사항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세계관인 것입니다.

 

사례 연구: 창세기 6-9장의 홍수 사건

 

창세기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에 이러한 접근 방법을 적용해 보도록 합시다. 창세기 6-9장의 노아와 홍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실제로 발생한 재앙적인 지역 홍수 사건에 관한 훨씬 더 오래된 이야기들을 토대로 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오래된 전설은 창세기가 기록된 문화적 배경의 일부였습니다. 영감을 받은 창세기 저자는 죄의 심각성과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고대의 문학 관습을 사용하여 이러한 오래된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어떤 과거의 홍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신학적 요점들을 제공하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하여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모든 부분에서처럼 홍수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물과 그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한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지, 과학이나 자연사의 어떤 사실에 대한 계시가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의 세부사항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의 신학적 요점을 놓쳐버렸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

 

창세기의 내러티브는 갈등과 해결에 초점을 맞춥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목적은 지구 전체에 그의 임재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이고 땅을 정복해야 합니다. 즉 창조계 안에 질서와 결실을 가져와야 하는 것입니다(창 1:2).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창 3) 갈등이 이야기로 들어오게 됩니다. 샬롬은 흩어지고 지구는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심판과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창 6-9) 더 큰 타락이 진행됩니다(창 4-6). 그런 다음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임재를 다시 시작하시기 (언약) 이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려고 시도합니다 (창 11).

 

창세기 1-11장은 인류의 첫 이야기이며 위기로 끝이 납니다. 이 내러티브는 하나님의 처음 목적과 인간의 처지에 대한 진실되고 참된 평가를 내립니다. 창세기 12-50장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나라가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과의 관계를 세우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기 위한 구조를 제공하며, 지상에 세워질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기초를 놓습니다.

 

결론

 

모든 내러티브는 목적과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고대 내러티브의 모음집이며 고대 세계의 문화와 문학 양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지고 합쳐졌습니다. 고대 근동 지역의 내러티브처럼, 창세기의 내러티브는 내레이터가 자신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메시지를 구체화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세부 사항을 제거합니다. 

 

창조 내러티브는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 내러티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영감을 받은 저자가 과거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해석을 내놓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진리를 드러낸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진리는 우리가 그것을 창조의 "분명한 사실"을 재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과거의 사건을 기록했지만(예: 우주와 인류의 창조, 인류 최초의 무죄와 반역),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환기적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유익하게 읽을 수 있지만, 창세기의 원청중과 문화적 맥락에 대해 더 배운다면 신학적 이해는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본문의 관련성과 중요성을 지속해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김기현 연구위원 (로고스서원,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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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How should we interpret the Bible?



서론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성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는지,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했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는지, 어떻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부서지고 죄 많은 백성을 은혜로 구속하시고 양자 삼아주셨는지,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침입하여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는지를 말이죠.

 

성령께서는 기독교 신자들의 마음과 가슴 속에 있는 성경의 "큰 이야기" 속 진리를 증거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해 죄의 확신과 회개 및 믿음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손에 든 모든 사람은 누구나 문화와 교육 수준과 관계없이 성경을 유익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성령께서는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명백한 해석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을 해석해야만 합니다. 해석은 단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지, 어려운 구절을 위한 어떤 특별한 기술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은 우리의 기준과 문화적 기대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가끔 이것들은 성경의 저자가 의도한 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의 기원과 말씀의 전반적인 목적이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조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저자의 의도, 문학적 양식과 관습, 언어 및 원청중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성경의 기원

 

개신교 성경의 66권은 다양한 종류의 문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수 세기 동안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서 세 가지의 다른 언어(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로 쓰였습니다. 구약성경은 약 10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쓰였고 통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약 100년에 걸쳐 쓰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과 신약의 첫 번째 책 사이에는 수백 년의 기간이 존재합니다.

 

많은 글이 1세기경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권위를 가진다고 이해되었지만, 초대교회가 그리스도교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문서들을 분류하고 오늘날의 성경을 구성하는 권위 있는 저서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사용 가능한 성경의 여러 버전과 번역본은 수 세기 동안 다양한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의 연구와 공동작업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

 

성경은 도덕 지침서나 믿어야 할 명제들의 모음집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6-17). (바울은 여기서 구약성경을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신약성경에도 적용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무엇보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15절).

 

 

성경의 저자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요? 그들은 무슨 문학 양식과 관습을 사용했나요?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맨 먼저 우리는 저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가끔 저자들은 무슨 일이 생겼다거나 앞으로 생길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어하고, 가끔은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묘사하고 싶어하기도 하며, 가끔은 또 어떤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지침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가끔 그들은 훈계하거나 명령을 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언어와 문화에는 이러한 종류의 의도를 소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는 이러한 의도를 각기 다른 문학적 양식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문학적 양식들은 특정한 관습이나 규칙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그 문화와 시대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특정하게 깨닫고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또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하면서 문학적 양식과 그 양식에 내재된 관습 모두 우리가 기대하거나 쉽게 깨닫는 것들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 시편, 15세기 일본의 하이쿠, 18세기 영국의 소네트 및 21세기 미국의 랩과 연관된 문학적 양식과 관습은 비록 모두 시로 분류될 수 있지만, 매우 다릅니다.

 

묵시문학처럼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한 일부 문학적 양식은 다른 어떠한 문화권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행시의 구조 같이 성경에 나오는 일부 언어 관습이나 언어유희와 말장난은 번역 과정에서 모호해지거나 손실될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일부 문학적인 관습은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서사시(작은 단위)로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강조를 위해 이중 따옴표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성경을 손에 들고 익숙하지 않은 문학적 양식을 완벽하게 해석하거나 전체의 의미에 기여하는, 익숙하지 않거나 모호한 관습의 중요성을 즉시 깨달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문화와 언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학자와 번역자의 전문성을 따지게 됩니다. 그들은 문학적 양식과 관습에 대한 우리만의 문화적인 기대가 성경 해석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부분을 확인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역사를 분명히 기록하지만, 성경이 사용하는 문학적 양식과 관습은 우리 자신이 언어, 문화 및 시대로부터 역사를 읽어오면서 기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종류의 언어가 사용됩니까?

 

저자의 목적을 파악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문학 양식과 관습을 아는 것 이외에도, 해석 일부는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사소통 중 일부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의사소통은 그저 단어를 정의하는 것만으로는 명시되지 않는 추론을 이끌어내는 청중에게 달려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언어 사용의 많은 부분은 어떤 면에서 비유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수업으로 돌아가서 직설법, 은유법, 과장법, 완곡어법, 제유법, 완서법 및 관용적 표현 등을 배워야 했던 모든 어휘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이러한 모든 종류의 비유법의 많은 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복잡하게 만들어 볼까요? 단어 자체는 비유적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poimen의 주된 의미는 목자, "양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비유적 의미는 "교회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요한복음 10:14에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백성을 위한 그의 사랑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씀하는 은유로써 목자의 첫 번째 의미("문자적" 의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11에서 바울은 목자(두 번째 비유적 의미, "목사")를 포함하는 교회 안에서의 역할들을 열거하지만,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그건 그저 매우 단순한 열거일 뿐입니다).

 

비유적 언어는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문학적 형식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시도 매우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역사도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단순히 어떤 텍스트의 문학 양식에 기초하지 않고 사용되는지에 대해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해석 과정은 복잡하고 다층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청중의 문화적 배경은 어떠했나요?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저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썼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for us) 쓰였지, 우리에게(to us) 쓰인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 규범, 상징 및 성경에 대한 청중의 친숙함은 모두 성경이 쓰이고 이해되는 방식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족장들의 긴 수명은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더 큰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나이는 모두 5의 배수이며, 가끔 7이나 14가 추가되어 수사학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문화적 중요성은 그 예로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문맥을 무시하고 그 우화를 직설적으로 그대로 읽으면, 우리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문화적 틀 안에서 고려될 때,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학자 케네스 베일리에 따르면, 그 유대인의 아들은 유업을 요구하며 수치스럽게 행동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탕진하면서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의 행동은 'kezazah'라고 하는, 단절의 의식을 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마을의 거절과 아버지의 분노 섞인 반대를 동반했을 것입니다. 또한, 탕자는 다음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구걸해야만 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냉대 대신, 사랑과 자비의 환영이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그를 만나기 위해 뛰어나갔습니다. 그 아버지 나이의 남자들, 그리고 중동 문화 속에서 구별된 남자들은 언제나 천천히 위엄 있게 걸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의미심장한 세부묘사인 셈입니다. 뛰어감으로써 아버지는 탕자 덕분에 수치와 굴욕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입 맞추고, 최고의 옷을 입히고, 잔치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래 이 이야기를 중동 청중에게 들려주셨을 때, 그들은 아마도 현대 독자들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원청중과 그 문화에 대한 인식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 그 부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훨씬 더 증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를 어떻게 해석할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의 앞 장들을 읽는 방법에서 강경하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21세기의 아이디어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이오로고스 커뮤니티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앞 장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이러한 다양한 생각을 드러내는 많은 글을 웹사이트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창세기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원청중이 이해했을 것들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창세기의 해석 방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이오로고스는 창세기 앞 장들을 비유적인 언어를 통해 실제 사건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다른 고대 근동의 문헌들이 사건을 묘사했던 방식과 일치합니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창세기가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비록 그 목적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이나 역사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계획을 계시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지만 말이지요.

 

 

결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권위 있게 쓰였음을 믿습니다. 성경이 단순한 문학 작품은 아니지만, 믿음의 독자들에게는 살아 역사하는 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성경 읽기를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한 고급 훈련은 없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우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성경 구절을 가장 잘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크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지식을 얻는 것에 달리지 않다는 사실에서 우린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는 것이지, 성경의 완벽한 해석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성경을 깊게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안에 거하며 창조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과 목적을 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김근주 연구위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과신대 자문위원)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