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콜로퀴움] 신앙의 경줄과 위줄 찾기: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신앙의 경줄과 위줄 찾기
: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한국사회는 최근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도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기독교는 여전히 페미니즘을 두렵고 무서운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전혀 상관이 없고, 더 나아가 완전히 이질적인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와 어떻게 만나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과학과 기독교가 만나는 지점에 대해서도 좋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신대와 페미니즘의 콜라보! 과신대에서 듣는 페미니즘 특강! 기대해주세요~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직접 콜로퀴움 현장에 오실 수 없는 분들, 지방이나 해외에 계신 분들은 생방송으로 콜로퀴움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 전에 미리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10월 22일(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등록비: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5,000원 (청소년은 무료)
* 과신대 정회원은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모두 무료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신앙의 경줄과 위줄 찾기" (백소영 교수)

     휴식(8:20-8:30)  
2부 대담(8:30-9:30) 패널: 백소영, 송수진 교수, 사회: 우종학 교수

 

 

강사 소개

 

백소영 교수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이화여자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기독교학/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B.A., M.A.)했고, 미국 보스턴대학교 신과대학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비교신학으로 박사학위(Th.D.)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2007-13),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2016)를 거쳐 현재는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의 사랑이 義롭기 위하여』(2005), 『엄마 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2009), 개정판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2013,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콘텐츠 전자책 제작지원 도서), 『드라마틱: 예수와 함께 보는 드라마』(2010), 『잉여의 시선에서 본 공공성의 인문학』(책임저자, 2011), 『인터뷰 on 예수』(2011),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2013,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교회를 교회되게』(2014), 『사회적 영성: 세월호 이후에도 ‘삶’은 가능한가』(공저, 2014), 『왜 눈떠야 할까: 신앙을 축제로 이끄는 열여섯 마당』(공저, 2015), 『삶, 그 은총의 바다』(2016), 『버리지 마라, 생명이다』(2017), 『드라마 속 윤, 리』(2017),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2018, 세종우수교양도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대학 강단만이 아니라 교회 및 시민단체 대중특강, 그리고 〈CBS 크리스천 나우〉, 〈C스토리〉, 〈CBS 성경사랑방〉, 〈CBS 아카데미, 숲〉, 〈CGN 크리스천의 문화 읽기〉 등 매체를 통해 기독교적 세계관과 공동체 윤리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패널 소개

 

송수진 교수 (고려대학교 글로벌경영학)

 

P&G에서 마케터로 활동하다가 경영학을 공부하고, 미국 University of Rhode Island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현재는 고려대학교 글로벌경영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세 자녀의 엄마이자 전문 지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각각의 소명을 모두 지켜내고 싶은 대한민국의 흔한 엄마이자 사회인이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죄의 기원과 인류의 타락' 강의 요약

  • 창세기가 쓰여진 당시 이스라엘 상황이 바벨론 포로기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요셉 2019.07.08 13:46
    • 창세기의 저작 연대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전통적으로는 오경의 모세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오랜 연대를 잡기도 하지만, 최근 많은 구약학자들은 구약성서의 최종 편집 연대를 포로기 시대로 잡고 있고, 창세기 역시 당시 바벨론 창조 신화에 대한 대안으로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부분에 대한 해석은 최근에 나온 구약개론 책들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7월 1일 과신대 콜로퀴엄에서 김구원 교수님께서 강연하신 내용을 과신대 정회원이신 송윤강님께서 정리해주셨습니다. 그 내용을 공유합니다. (* 출처: 페이스북 '과학과 신학의 대화')

 

 

송윤강 (과신대 정회원)

1. 원죄 교리의 구약적 배경


원죄 교리란 인류의 최초 조상인 아담이 지은 죄가 후손인 인류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죄의 전가 이론’이라 한다. 장로교 신조 6항은 다음과 같이 원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시조(始祖)가 선악간 택할 자유능(自由能)이 있었는데 시험을 받아 하나님께 범죄한지라 아담으로부터 보통 생육법(生育法)에 의하여 출생하는 모든 인종들이 그의 안에서 그의 범죄에 동참하여 타락하였으니, 사람의 원죄(原罪)와 및 부패한 성품 밖에 범죄할 능(能)이 있는 자가 일부러 짓는 죄도 있은즉 모든 사람이 금세와 내세에 하나님의 공평한 진노와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원죄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원죄가 언급된 창세기가 쓰여진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구약 성경이 완성된 때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다. 아담의 죄의 전가 이론은 포로기의 묵상에서 비롯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포로기 고통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했던 민족이 멸망했다는 것은 죽음 이상의 큰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통의 원인은 죄 때문이라 생각하고 이에 대하여 세 가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입장은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상 중에서 특히 므낫세 왕의 죄를 언급하고 있다.(열왕기 21:10-15, 24:10-15)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의 고통이 조상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애 5:7)

 

‘그들의 죄악을’에 해당하는 ‘아오노테헴’의 원형 ‘아온’은 ‘죄의 형벌’이라는 의미도 있다(욥 13:26). 이처럼 조상 탓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주권, 선하심 조차도 의심하고 있었다.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시편 89:49)

 

그래서 구약의 저자들은 이스라엘이 고통 받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실패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방신을 섬기는 바벨론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이방신이 하나님께 대적하여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다. 여전히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시고, 그의 선하심은 변함이 없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 조상 대대로 쌓인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조상 탓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신앙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입장은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상 탓 할 것 없다. 바로 네가 지은 죄 때문에 벌 받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에스겔 18:2-4). 이렇게 보는 입장 이면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선한 의지, 즉 회개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이 이와 같은 입장을 보인 것은 그가 속했던 닙프르 공동체의 영향이 컸다. 닙프르는 그발 강가 있는 유대인 공동체이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에 유배되어 이 곳에 정착했다(에스겔 1:1). 이 공동체는 바벨론 포로 공동체와 달랐다. 바벨론 포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닙프르 공동체의 이런 상태로는 다시는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역대서에도 찾을 수 있다. 므낫세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므낫세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통틀어 가장 오래 집권한 왕이다. 그리고 므낫세는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야기도 언급되어 있다(대하 33:12-13).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므낫세가 회개하자 다시 왕위에 복귀시켜 주신 것이다.

 

열왕기하 36:12-20을 보면 오히려 형벌 원인을 마지막 왕 시드기야와 당시 종교 지도자와 백성들의 죄에서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 때 이스라엘의 멸망을 명백히 죄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심판보다는 고통을 극복하고 회복하는 비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스겔서 2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의 원인을 더 먼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찾고 있다. 출애굽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에스겔 20:18-23).

 

이처럼 어떤 원인을 좀더 먼 근원으로까지 올라가 찾는 것을 ‘회귀적 결정주의’라 한다. 죄에 대한 책임을 세대 전가의 차원을 넘어 역사의 원점(태고적)까지 올리려는 경향을 말한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역사의 원점이 출애굽이었던 것이다. 아담의 원죄의 후손 전가 사상은 이런 회귀적 결정주의의 영향이다. 에덴과 출애굽 광야 생활을 비교하면 여러 면에서 짝을 이룬다.


에덴에서 선악과 금지명령을 주신 것과 광야에서 율법 준수 명령을 주신 것, 선악과 금지 명령을 어김으로써 에덴에서 추방된 것과 출애굽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40년간의 광야 유배 생활을 한 것 등이다. 이스라엘이 고통의 원인으로 죄의 기원을 광야 시대까지 소급한 이유는 조상들의 죄가 오랫동안 너무나 많이 쌓여서 지금 그들의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극복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에스겔은 인간의 선한 자유의지의 발현은 본인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영이 부어질 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그런데 에스겔은 18장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겔 18:31)


이렇게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스스로 새롭게 하라’고 권하는 것은 이미 쌓인 조상의 죄 때문에 그들 스스로는 어떻게 하든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야 된다고 말한 것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의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원인을 조상의 원죄에서 찾든, 자범죄에서 찾든 공통점은 회복, 즉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즉 구약은 고통의 원인을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에스겔의 입장이 18장에서와 20장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입장은 누구의 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야 예언 본문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포로 생활 중 이스라엘이 받는 고통이 이방 민족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고통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마치 고통받는 의인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이방 땅에 흩뜨려지고 구속 역사에서 사라졌다. 반면에 남 유다는 죄를 짓는 가운데에도 신앙을 지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았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은 포로 생활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그렇게 이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유대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에스겔의 입장을 받아 들이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죄악에 대한 구약의 입장은 ‘판단 유보’라 볼 수 있다.

 

 

2. 죄악의 기원에 대한 창세기의 입장

 

창세기 1장과 2-3장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의견이 병치되고 있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은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있다고 보고 있다.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로 알려져 있지만 성서비평학에서는 1장(제사장 문서; P문서라 부른다)과 2-3장(여호와 문서; J 문서라 부른다)은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하여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체, 신학, 창조 기사의 서술이 다르기 때문이다. P문서에 따르면 악은 창조 이전이전부터 존재한 것처럼 보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1-2)


히브리 문법에서는 1절이 독립 문장이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처럼 2절에 대한 종속절로 해석될 수 있고, 흑암은 악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완벽한 것이었다. 창조 행위 여러 곳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언급이 있고, 7이라는 숫자를 이를 상징한다. 그러나 악의 선재설 주장은 창조자의 주권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J문서에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창조행위는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만족하지 않으신 것 같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8)

 

P문서에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된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창 1:27),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순차적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남자만 창조하시고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의 상징으로 뱀이 등장한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불완전한 창조를 하시고, 악까지 허락하셨는가? 이는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선하시지 않으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악을 ‘선의 결여’나 ‘위장된 선(진짜는 선이다)’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럴 경우 악은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문제점이 있다. 먼저 ‘선의 결여’의 입장에서 3장을 해석하면 선악과 사건은 타락과 죄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율법(선한 것)이 결여된(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과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위장된 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선악과는 인간의 성장을 위한 도구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고 성숙한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러면 뱀도 악의 화신이 아니라 인간의 성숙을 도와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선악과를 도덕적 판단능력과 관련된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 도덕적 판단능력은 왕의 특징이다.

 

P문서에는 인간은 처음부터 왕의 이미지(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로 만들어 진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J문서에서는 불순종으로 왕의 지위를 얻은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성경이 고대 근동신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을 왕적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선악과 금지 명령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도는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도 시험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순종)을 시험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순종했다. 불순종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정의에 반하는 명령에 대하여 반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아담과 이브에게 불순종으로 인하여 주어진 형벌도 따지고 보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닐 수 있다.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을,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주셨지만 이 두 가지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류 번성의 비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이 죄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것이다.

 

구약에는 악의 기원에 대한 상이한 입장이 존재한다. 구약은 어느 한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판단 유보’다.이러한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다양한 견해 성경 속에 나타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이 인생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악에 대한 판단보다는 악에 대한 대응이 구약의 초점이다. 악을 무엇으로 보느냐 에 따라 대응이 달라진다. 악을 주권적 역사로 본다면 악에 대하여 적극적이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그러나 악이 성장 도구라 본다면 고통에 대한 인내, 희생이 필요하다. 또 악이 선의 결여라고 한다면, 순종하는 삶을 살면 고통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이는 신앙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 싸울 때가 있는가 하면, 참을 때가 있고, 순종할 때가 있는 것이다.

 

3. 아담의 죄 전가 이론과 복음의 순전성

 

아담의 원죄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도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교리가 유효한 것인가? 아담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 구속이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고,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십자가의 구속적 효력의 논리적 귀결을 가져오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사실 바울은 유대교 교리에 밝은 유대인 출신으로서 당시 제2성전기 유대인의 성경해석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이 성경해석의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역사적, 문법적 의미보다는 현재 시점 적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사적, 문법적 의미와 현재적 적용의 의미가 서로 일치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만일 일치하지 않으면 현재적 적용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이는 쿰란 공동체의 성경 해석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쿰란 공동체의 성경 해석의 전통은 성경 본문보다는 본문 밖, 즉 성경을 생활에 적용하는 공동체에서 찾았는 것이다. 바울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성경 해석의 목적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지는 사죄의 효력을 밝히기 위한 것에 두었다. 바울은 이 목적을 위해 전통적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과 다른 방법을 적용했다.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죄의 기원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립된 출애굽 광야 시대에 두고 성경을 해석했지만, 이방 선교에 관심 있는 바울은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좀 더 넓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가져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복음의 목적을 달성하기 이하여 당시로서는 창조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유비(analogy)는 성령의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의 성서학자 피터 엔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주장했는데, 이는 성령이 주신 확신이었다.”

 

바울의 유비(아담의 원죄의 후손 전가 교리)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장로교 신조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는 구원의 칭의 개념 설명에 유효하다. 마치 하나님이 법정에서 재판장이 형벌을 사면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기 위해서는 아담의 원죄도 전가되어야 한다. 죄인이 형을 사면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사법적 판결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칭의 개념이 일반적 정의 개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아담의 죄가 내 죄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항의에 대하여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그러나 의의 전가에 대하여는 항의할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다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칭의보다 더 큰 개념이다. 전가(Imputation) 교리의 확립을 위해서 필요한 아담의 역사성에 대하여 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하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아담과 이브가 현생 인류의 조상인가? 인류가 최초 인류 아담 부부에서 비롯되지 않고 진화된 것이라면 죄의 전가 이론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담의 역사성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아담은 최초 인류의 그룹에서 하나님이 주권적인 섭리로 선택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에서도 ‘아담’이라는 명칭이 처음부터 고유명사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4:1까지 보면 ‘아담’ 그 사람’ ‘사람’ 등 여러 가지 표현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 ‘아담’이란 표현이 고유 명사로 확립된 것은 역대서와 누가복음의 족보 언급에서였다. 그런데 이 족보는 출생 기준을 작성된 것이 아니라 선택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다(택한 백성). 이처럼 아담의 대표성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된 것도 이스라엘 민족이 무슨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진화와 아담의 역사성도 함께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장로교 신조에는 ‘아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있는 소위 에큐메니칼 신조인 ‘사도신경’에는 ‘아담’에 대한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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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기원과 인류의 타락

 

죄의 기원과 인류의 타락

 

고인류학, 진화생물학, 유전학 등의 발전은 성서해석과 전통적인 교리에 큰 도전을 주었다. 만약 인간이 진화했다면, 성서에서 말하는 인간의 죄와 타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대근동학과 구약학을 전공한 김구원 교수에게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서부터 타락의 의미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 들어본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의 기원은 무엇이며, 타락에 숨겨진 성서적,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직접 콜로퀴움 현장에 오실 수 없는 분들, 지방이나 해외에 계신 분들은 생방송으로 콜로퀴움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 전에 미리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7월 1일(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죄의 기원과 타락" (김구원 교수)

     휴식(8:20-8:30) 책 증정 이벤트 
2부 대담(8:30-9:30) 과학자와 신학자의 대화 (김구원 교수, 오세조 목사, 최경환 실장)

 

 

강사 소개

김구원 교수 (개신대학교대학원 구약학)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시카고 대학교 고대근동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우가릿 문헌과 사무엘상 본문을 비교문학적으로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이 브릴 출판사의 세계적인 구약 연구 시리즈인 의 145번째 책으로 출판됨으로써 한국인 최초로 이 시리즈의 저자가 되었다. 현재는 서양고대문화사학회 연구이사이며, 개신대학원대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궁금해? 김구원 교수의 구약 꿀팁>, <사무엘상(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등이 있다. 

 

패널 소개

오세조 목사 (팔복루터교회, 루터대학교 강사)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미국 House Research Institute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하다가 귀국해서 루터대학교에서 목회자 과정을 마쳤으며, 목사 안수를 받았다.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에서 박사과정(구약전공)을 수료했으며, 현재 용인에 위치한 팔복루터교회를 담임하며, 루터대학교에서 '신학과 과학', '자연과학의 이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인간은 '창조'할 자격이 있을까?

제14회 과신대 콜로퀴움 요약 및 후기

"유전자 가위가 오려낸 과학과 신앙"

 

글_심기주 기자

사진_심왕찬 팀장

 

이번 제14회 콜로퀴움은 "유전자 가위가 오려낸 과학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지난 4월 29일에 더처치 교회비전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1부 강연 순서에서 발표자는 연세대 생화학과의 송기원 교수님이셨고, 2부 대담 순서에서 대담자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의 방연상 교수님, 사회자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의 우종학 교수님이셨다. 이날 있었던 콜로퀴움을 듣고 1부 강연 요약과 2부 대담의 후기를 써보았다.

 

 

1부 강연 요약

 

 

우리 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에 그 원리가 들어있다. 콩은 콩의 정보를 가지고 있고 팥은 팥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우리 몸의 유전자에는 우리 몸의 정보가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유전자의 정보로 몸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생명체를 3d 프린터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유전자가 담겨 있는 DNA(유전자는 DNA 조각이다.)의 이중나선 구조는 굉장히 안정된 구조이다. 그래서 아마도 진화과정 중에 유전정보 저장을 이중나선 구조로 하기로 채택된 게 아닌가 한다.

 

1990년에 인간 유전체에 있는 약 32억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염기쌍의 서열을 밝히는 목적의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2001년에 인간 유전체 정보 초판을 발표했다. 이때 발표된 내용 중 흥미로운 것은 32억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염기쌍의 서열이 단 2만 3천 여개의 유전자에 담겨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전자 개수는 별로 안되는데 80% 이상이 굉장히 정교하게 스위치 되어 있었다. 

 

여기서, 염기서열을 순서대로 밝히는 것이 한글을 깨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염기서열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 활동을 일으키는지를 밝히는 것은 책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을 깨친 것이랑 책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 순서대로 염기서열을 읽어냈는데 어떤 방식으로 유전 활동을 일으키는지 아직 대부분 밝혀내지 못했다. 전체의 2% 정도 이해했다고 보면 된다.


1970년대에 제한효소가 발견되었다. 제한효소는 DNA 이중나선 분자의 4~6개의 특정 염기서열을 인식하여 그 부분을 절단하는데 이 제한효소를 통해 DNA 재조합 기술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를 인간의 30억 개의 염기서열에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제한효소가 인식하는 6개의 염기서열이 30억 개의 염기서열에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70만 번은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이 제한효소를 인간의 염기서열에 적용하면, 실제로 절단하고 싶은 표적 부위 외에도 70만 번은 더 염기서열을 절단하기 때문에 결국 염기서열을 산산조각 낸다는 말이다.

 

 

합성생물학의 혁신을 일으킨 CRISPR

이후, 제한효소보다 더 정교하게 표적 부위의 염기서열을 인식하는 유전자 가위들이 등장했고, 마침내 2013년, CRISPR라는 유전자 가위가 등장했다. CRISPR는 Cas9 단백질을 이용한 유전자가위인데 21개의 염기서열을 인식해서 유전자의 표적 부위를 절단한다. CRISPR는 기존의 유전자가위보다 월등히 정확하고, 값싸고, 간편했기 때문에 합성생물학의 발전을 급격하게 이루었다.

 

합성생물학은 쉽게 말해서 생명체를 디자인하는 공학이다. 합성생물학은 생명체를 dna라는 소프트웨어가 담긴 기계로 인식한다. 

 

합성생물학과 관련해서 흥미로웠던 것은 화학공정 대신 세균으로 물건을 만드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옷감은 식물에서 온다. 그런데 세균이 섬유를 만들 수 있게 유전자 회로를 디자인해서 섬유를 만들어내고 폰의 겉껍질을 만들어내고, 기존 화학공정에서 만들어냈던 모든 것들을 합성생물학으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2020년까지 chemical industry(화학공정)의 15~10%를 대체하겠다고 예측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특정한 유전자 부분을 편집해서 원하는 형질을 레고처럼 발현하게 하는 biobricks와 같은 것도 실제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2018년 11월 중국 과학자에 의해서 CRISPR가위를 이용한 쌍둥이 여아가 탄생했다. HIV감염을 막기 위해서 CRISPR가위를 썼다고는 하지만 CRISPR가위를 굳이 사용했을 필요가 없었고 충분히 다른 더 검증되고 안전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CRISPR가위가 정확하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CRISPR가위의 인식 오류 가능성, 부작용으로 인한 위험성이 높고, 원하는 곳을 잘라냈을 때 복구하는 시스템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RISPR에 대한 논문이 매주 올라오고 있다.

 

송기원 교수님은 기술의 허용여부를 논하기에는 이미 기술이 인간 배아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기술 적용의 화살이 시위를 떠난 이후에는 다시 돌이킨 과학의 역사가 없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기술의 허용 유무를 따지기보다는 앞으로 이 기술을 어떻게 다룰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 뿐만 아니라 합성생물학은 또한 여러 가지 이슈를 가지고 있다.

 

먼저, 인간에게는 좋게 사용되고 있지만 생태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둘째, 유전자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과연 특정 유전자는 가치 있고, 또 다른 유전자는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셋째, 어디까지가 질환인가? 어떤 유전자 발현까지를 질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과학기술은 공공재이다. 한 나라에서 규제하면 다른 나라로 넘어가서 연구를 하기 때문에 한 나라에서 규제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 과학은 국경을 넘는다.

 

넷째,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생명체를 가지고 마음대로 디자인하고 구현해도 되는 존재인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인간까지 해도 되는 건가? 다른 존재까지도 해야 하는가? 효용이 중요한가, 가치가 중요한가?

 

"생명체에 대해 갖고 있는 경외심 - 종교계는 이렇게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생명과학 기술이 의한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부 대담

 

 

2부 대담에서는 주로 이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본래 과학 연구에서 윤리와 종교적 이슈는 항상 마지막에 뒷북을 쳤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껴서 송기원 교수님의 연구 프로젝트에는 처음부터 방연상 교수님이 함께 참여를 해서 처음부터 연구의 방향성을 신학자와 과학자가 같이 논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 교수님은 생명과학 연구에서 획일화와 계급화의 위험성이 있다면서 윤리성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신학자와 목회자가 처음부터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이 문제에 참여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두 번째는 방연상 교수님의 신학에 대한 견해였다. "신학은 내가 아는 것을 증명하는 것(proof)보다 하나님에 대한 앎을 찾아나가는 것(proving)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과거로 돌아가서 개념화하려고 한다. 우리는 과거의 론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담론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과학은 우리가 과거의 론에 머물러 있는 것을 불편하게 만든다. "

 

 


방 교수님은 다음을 강조하셨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질문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묻기도 전에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과학은 하나님의 수많은 미스터리를 밝힐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가정을 좀 내려놓고 순수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기독교 신앙은 proof가 아니라 proving이다. 우리의 신앙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생물학에서 종의 정의 및 경계를 물어보는 질문에 대해 송 교수님은 "종간 경계가 문제가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고민해야할 때이다. 이제는 배아 상태로 냉동되어 있는 것도 입양하는 시대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종간의 경계도 불분명해지는 것은 물론 이제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까지도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문득 기독교는 여기에 이미 대답을 가지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신앙의 조상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요즘, 이전에 정립해둔 교리로는 설명하기 힘든 질문들이 나올 때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답해야 할까?

 

하나님의 생명 창조와 합성생물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묻는 질문에 대해 방 교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까지도 불러주신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하셨다. "기독교 신앙은 '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애매모호한 것에서 불편한 것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을 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 교수님의 마무리 멘트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 번 중독되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과학은 답을 찾으면 더 많은 질문을 찾게 된다. 항상 질문하는 삶 속에서 살아가기 위하길 바란다. 과학에 대해서도 신앙에 대해서도!"

 

기독교 신앙은 이 신앙과 과학의 문제에 대해서 이미 교리적 대답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다시금 정립해야 할 때가 된 것일까? '기독교는 사회의 문제에 먼저 답을 주고 선도해가야하는데 오히려 사회보다 뒤쳐졌다. 이웃과 겨레는 물론 인류가 겪고 있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지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상상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라는 김형석 교수님의 지적이 나지막히 떠오르는 오늘이다.

posted by 과신대 기자단

"삼위일체 창조자와 그의 피조세계로서의 세계" 강의 후기

이번 13회 콜로퀴움은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라는 주제로 더처치 교회비전센터에서 지난 3월 18일에 진행되었다. 발표자는 숭실대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였고, 대담자는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의 최승언 교수, 사회자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의 우종학 교수였다. 이 날 발표자 이용주 교수는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Ⅱ(새물결플러스/2018) 중 창조론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 세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활동으로 존재하게 된 피조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과학적 진술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강의했다. 1부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봤다. 

 

 

글_ 심기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자연의 사물들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가 직접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야 우리가 알 수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알려주시는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방식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흘러가고 이 세상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려주신 방식에 집중할 때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할 때만 기독교적 신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기독론적 집중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믿는 유일신과 유대교, 이슬람에서 믿는 유일신론은 좀 다르다. 한 하나님이 그냥 하나가 아니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하나님 한 분 안에서 하나의 신성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알려주셨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 세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것이 조직신학이 다루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관계 맺으면서도, 자신과는 구분 짓는 그 독특함에 굉장히 주목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두려운 주님이나 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빠’라고 굉장히 친밀하게 칭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이 아니야(요18장)’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구분 지으셨다. 즉, 나사렛 예수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 꼭 성령이 함께 하신다. 잉태하실 때도 그렇고, 세례 받으실 때도 그렇고 항상 함께 하셨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다 보면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사건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 세 인격들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심층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세 인격들은 하나님의 인격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들이다.”

 

초대교회 혹은 고대 교회 때부터 삼위일체 신앙이 교회 안에 고백되고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는 무슨 뜻인가? Trinity라는 것은 tri + unity이다. 세 분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다는 뜻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힘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관계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인격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라는 신성이 구성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한 분 안에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있어서, 이 인격들이 서로 다른 행동들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안 하시는 분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에 익숙하다 보니 보좌에 앉으시고 높으신 왕의 이미지에 익숙하다. 마치 ‘착한 타노스’의 느낌이다. 앉아서 멀리 계신 느낌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서로서로가 존재하게 해주는 상호의존적인 활동을 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아들이 아닌 인격체가 되고, 아들은 ‘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아버지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하는 활동을 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 가운데 띠로써 연합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사랑의 띠다.’라고 교회는 오래전부터 얘기해왔다.

 

따라서 ‘일체’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사랑의 활동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삼위’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서로서로 구분되는 독립적인 자유로운 활동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상 ‘나와 다른 존재(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활동을 하는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고, 이를 기독교적 용어로는 ‘사랑’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존재와의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관계 가운데 자유롭게 일하신다. 이 자유는 나를 위한 자유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자유다. 따라서 아들은 이 자유를 아버지를 위해 씀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여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한다. 즉, 아들은 자신의 사랑 활동을 아버지를 위해 하고, 아버지도 역시 아들을 위해 이 자유를 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즉, 관계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는 분’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창조해야만 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체로 관계 가운데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셨고, 그 관계는 완벽한 관계였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반드시 만드셔야 했던 것이 아니고, 무한한 자유 속에서 만들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발성을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함”이라고 정의하면, 이 세계의 우발성은 곧 세계를 창조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유전자 가위가 오려낸 과학과 신앙

유전자 가위가 오려낸 과학과 신앙

 

멸종동물 복원, 난치병 치료, 맞춤아기 등 생명과학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한 윤리적, 신학적 문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바이오테러, 우생학적 문제 등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과학계의 빅 이슈인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와 합성생물학은 과학이 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합니다. 이번 과신대 콜로퀴움에서는 현대 생명과학의 이슈와 과학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 그리고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윤리, 철학, 신학의 문제가 무엇인지 다뤄보고자 합니다.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직접 콜로퀴움 현장에 오실 수 없는 분들, 지방이나 해외에 계신 분들은 생방송으로 콜로퀴움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 전에 미리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4월 29일(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합성생물학과 유전자 가위" (송기원 교수)
2부 대담(8:20-9:20) 과학자와 신학자의 대화 (송기원 교수, 방연상 교수, 우종학 교수)

 

강사 소개

송기원 교수 (연세대학교 생화학과)
연세 대학교 생화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미국 코넬 대학교에서 생화학 및 분자 유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 의과 대학의 박사 후 연구원을 거쳐 1996년부터 연세대학교 생명 시스템 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3~2004년 풀브라이트 장학금(Fulbright Scholar)을 받으며 밴더빌트 대학교 화학과 및 사이언스 커뮤니케이션 전공 방문 교수를 지냈고, 2014년부터 연세 대학교 언더우드 국제 대학의 과학 기술 및 정책(Science Technology and Policy) 전공 겸직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50여 편의 SCI 논문을 게재했다. 대통령 소속 국가 생명 윤리 심의 위원회 제5기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생명 과학에 관한 사회적·윤리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연세 대학교에서 ‘과학 기술과 사회’ 포럼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포럼 참여 교수들을 중심으로 2014년 연세 대학교 언더우드 국제 대학 내에 과학 기술 및 정책 전공을 개설하여 전공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생명 과학, 신에게 도전하다』(공저), 『과학은 논쟁이다』(공저)가, 옮긴 책으로는 『미래에서 온 편지』(공역), 『분자 세포 생물학』(공역) 등이 있다. 

 

패널 소개

방연상 교수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연합신학대학원)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와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문화 간 연구Inter-Cultural Studies와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를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생명 과학, 신에게 도전하다』(공저), 『타자를 향한, 타자와 함께하는 선교』, 『우분투』, 『타자와 책임』, 『Ethical Responsibility Beyond Interpretation』이 있고, 옮긴 책으로 『좋은 세계화 나쁜 세계화』(공역)가 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 대담 내용 정리



* 3월 18일에 진행된 제13회 과신대 콜로퀴움은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이용주 교수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1시간 정도의 강의가 끝나고 2부 대담 시간에는 우종학 교수님의 사회로 이용주 교수님과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최승언 교수님께서 패널로 참여해 주셨습니다. 2부 대담 시간에 나왔던 이야기를 손이 가는대로 적어봤습니다. (역시 콜로퀴움의 하이라이트는 대담시간인 것 같습니다.)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면 좋겠지만 강의를 들으며 필기한 내용이라 부정확한 부분도 많고 생략도 많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대담 정리: 최경환 실장



최승언: 판네베르크만큼 현대 과학을 잘 사용한 신학자가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판넨베르크가 복잡계 과학을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더 풍성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종학: 판네베르크가 우발성과 자연법칙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용주: 우발성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필연성도 아닙니다. 판넨베르크는 신플라톤주의의 필연성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신이 왜 세상을 창조했느냐? 창조신앙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신은 이 세계와 인간이 신을 섬기기 위해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이 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 과학에서는 우발성이 어떤 의미인가요?


: 우리는 우연을 상당히 맹목적이고 무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천문학자들은 spontaneou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이 상당히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자연의 법칙들이 상당히 규칙적인 것 같지만, 하나 하나의 개체들은 상당히 우발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자연현상을 우리가 보기에 우연과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 둘이 서로 작용하고, 이 둘을 매개하는 그 무엇이 있을 때, 새로운 것을 발현시킵니다.



: 기독교의 창조론은 유일신론과 다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은 법칙성, 영은 우발성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부분도 한 번 더 설명해 주시죠.


: 아들은 서로 다른 것들이 규칙성 가운데 작용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영원한 아들을 로고스라고 말합니다. 로고스는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철학적 매개를 사용해서 설명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영의 개념도 스토아 철학을 차용합니다.


: 판넨베르크는 영을 장 이론을 통해 설명한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 가시적으로 보이는 물체의 비가시적 근원, 유한한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장처럼 활동하는 영,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유비적인 관계를 설명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에 기초해서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안 받을 수 없습니다.


판넨베르크의 과제이기도 한데, 그는 세상의 혼동과 무질서를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태초에 근원적 혼돈에 대해서 알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일원론을 강조하기 위해 무로부터의 창조를 형성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 전통을 따라갑니다.


신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판넨베르크는 열심히 노력합니다. top-down 방식을 취하지만 과학적인 실재와 공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본적으로 자연의 법칙성을 강조합니다. 우발성은 법칙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을 배타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초월성이라는 것은 설명될 수 없는 뭔가 신기한 것, 법칙성과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은 법칙성과 우발성 가운데 계신다면, 하나님의 내재성이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은 이미 일어난 사건에서 이미 일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초월성은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 자연현상 가운데도 우연성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우리는 영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파악되지 못하기 때문에 희미하게 볼 뿐이죠. 영이신 하나님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사랑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알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우리와 관계맺고 일하고 계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기 초월의 근원입니다. 초월을 공간적으로나 무관계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지만, 스스로 공간과 시간 안에 들어오시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초월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초월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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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넨베르크에게 드리는 질문 4가지



지난 월요일에는 과신대 콜로퀴움을 잘 마쳤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독일의 조직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과 창조론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려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고 온라인으로도 많은 분들이 시청해 주셨습니다. 2부 대담 시간에 우종학 교수님께서 작성하신 질문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 보시죠~



1. 우발성과 자연법칙 -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은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가?


판넨베르크는 신의 자유와 신의 사랑, 두 개의 키워드를 사용해서 창조를 표현합니다. 우주는 반드시 존재해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신이 자신의 내적 필요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창조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즉, 우주의 존재는 우발적이고 우연적입니다. 이것은 신의 자유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된 우주가 단지 신이 자기실현을 위해서 소모적으로 사용하고 버리는 소멸적 특성만 갖는 것도 아닙니다. 만물이 존재하도록 붙들고, 창조된 모든 것이 그 완성된 형태로 나가도록 하는 신의 행위는 바로 사랑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혹은 우발성과 우연성을 제거하여 기계적으로 명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피조물들이 고유한 완성의 형태로 나가도록 보존하고 협력하고 돕는 사랑입니다.


보존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만들어진 창조물의 본성을 잃지 않도록 돕는, 시간의 방향으로 따지자면 과거가 기준이 되는 사랑이고, 섭리는 피조물들이 완성되도록 돕는 미래적 목표를 위한 사랑입니다.



2. 자연법칙과 틈새 찾기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관점은?


"자연 사건들의 우발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규칙성들의 한계를 숙고하면서, 문제를 자연 사건들의 규칙성의 틈새를 찾으려는 방향으로 몰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의 신학은 이 자연 사건들의 틈새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유혹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자연 과정들 속에 담지된 그 틈새들을 메우고 있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세계는 그 자체로 자동적인 것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은 전체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런 틈새들은 자연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언제나 다시금 메워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를 들어 비유기적 과정들로부터 생명이 기원한다는 사실이 물리학적으로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 그런 주장이 미래에도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기본적으로 물리학이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각 새로운 연구 결과가 제시되면, 또한 그에 따른 새로운 문제들이 야기될 것이라는 것뿐이다."


판넨베르크가 틈새의 신 방식의 접근을 비판하는 관점이 흥미롭군요. 심지어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도 무게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과학이 새로운 발견을 하면 새로운 신학적 문제가 대두되겠지요. 생명의 출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란 얘깁니다.



3. 진화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관점은? - 우발성은 이신론적, 기계론적 신관을 오히려 깨트려 주었다.


"다윈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신학과 자연과학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가장 심각한 오류에 속한다.…신학은 (모든 종이 세계의 시작 이래로 변하지 않는다는) 불변이론의 세계관적 전제에 갇혀있었고 인간에 대한 관념론적 과대평가를 통해 눈이 흐릿해져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학에 경고음을 일으킨 것은 다윈의 종의기원설이 일으킨 의문, 곧 창조 속에서 인간이 갖는 특별한 지위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의문이란 바로 신의 목적을 설정하는 목적론적 자연관이 유전과 자연선택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의 우연성에 대한 강조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런 의문을 품게 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유전과 자연선택의 상호작용은 유기체적 생명의 출현이 갖는 목적적합성을 설명해주었다. 목적적합성의 설명은 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에 따르면 오로지 계획하는 이성을 가정할 때만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렇기에 자연선택설은 친구들과 적들 모두에게 유신론적 하나님 표상에 대한 반박으로 보였다. 양측 모두에게 진화의 자연선택설은 종들의 생성에 대해 원칙적으로 단지 기계론적인 설명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이 간과된 것입니다.


"알트너가 지적했던 것처럼 진화의 새로운 세계상은 창조 사건의 역동성을 시간 안에서 열려 있는 과정으로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기계론적인 자연관은 하나님을 기껏해야 이신론적으로 보아 과거 한때의 자연질서의 창시자로 받아들이도록 했고, 자연사건 과정 속에서 계속 창조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진화는 이런 기계론적인 자연관과 이신론적인 신관을 깨트리게 해 주었다는 것이지요.



4. 장이론 - 과학과 신학의 결합인가? 차용인가?


판넨베르크의 입장이 창조과학식으로 물리학과 신학을 직접적으로 결합하려는 건 아닌가? 자연과학과 대화하려는 판넨베르크의 접근이 성령의 내재적 역사를 장이라는 물리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인지, 혹은 과학적 설명과 신학적 설명 사이에 일정 정도 선을 긋고 장과 같은 물리학적 개념을 차용하여 성령의 일하심을 유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불명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장의 개념을 유비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성령을 어떤 에너지 개념으로 물리적 실체로 정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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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이야기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


2019년 첫 콜로퀴움은 20세기 대표적인 신학자로 손꼽히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트의 창조론을 소개받는 강의로 준비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현대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법칙과 원리들, 곧 진화론, 열역학 제2법칙, 인간원리, 상대성이론, 나아가 양자역학에 이르는 과학 이론을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 안으로 통합합니다. 이용주 교수님으로부터 현대 자연과학의 중심 내용을 포괄할 수 있는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을 들어 봅니다.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직접 콜로퀴움 현장에 오실 수 없는 분들, 지방이나 해외에 계신 분들은 생방송으로 콜로퀴움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 전에 미리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3월 18일(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삼위일체 창조자와 그의 피조세계로서의 세계" (이용주 교수)
2부 대담(8:20-9:20) 과학자와 신학자의 대화 (이용주 교수, 최승언 교수)


강사 소개

이용주 교수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연세대학교 신과대학(M.A.)과 대학원(Th.M.),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독일의 마인츠,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튀빙겐대학에서 셸링 철학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신학적, 체계적 해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Dr. Theol.)를 취득하였다. 독일의 De Gruyter 출판사의 TBT 시리즈에서 학위 논문을 출판하였고,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번역한 책으로는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새물결플러스)를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이 있다.


패널 소개

최승언 교수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서울대학교 천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천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 교수로 재직했고, 한국지구과학회 회장(2011) , 서울대학교 과학영재교육원 원장(2001~2006) , 서울대학교 관악영재교육원 원장(2008~2016)을 엮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천문학의 이해>(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을 비롯해 13권의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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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과신대 콜로퀴움 (후속모임) 뒷담화


‘On the road to Damascus(이하 다마스커스)’ 단체 사람들과 함께 과신대 12 콜로퀴움을 다녀왔다. 저번 11 콜로퀴움이 전통적 창조론부터 현대의 창발론까지 창조에 대한 신학적인 내용을 주로 깊게 다뤘다면 이번에는 한국 개신교인들의 창조와 진화 인식에 대한 설문 조사 결과 내용을 다뤘다. 이번 주제가 가볍고 직관적으로 알아들을  있는 부분이 많아서 후속 모임을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후속 모임에서는 먼저 이번 설문 조사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관련해서 코멘트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솔직한 과신대 콜로퀴움 후속모임 뒷담화


심기주



 주제는 단순히 과학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콜로퀴움에서 인상적인 것이 무엇보다도 창조와 진화라는 프레임은 2번이나 범주를 잘못 잡은 것이었다 이야기가 나왔다.  범주를 제대로 설정하지 않으면 대화가 전혀 진전이 없다는 것이다. 창조는 세상의 기원 대한 것이다. 반면 진화는 세상 만물이 어떤 과정 거쳐 생성되었는지를 말한다. 진화가 창조를 반드시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진화가 반드시 무신론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기에 범주 설정부터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당장 오늘 모였던 사람들도 모두 개신교인이었지만 창조의 방법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렸다. 여기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수렴되는 부분은 결국 문제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얼마나 초점을 맞추느냐였다. 하나님의 초월성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면 사실  세계의 현상에 대해 자체적, 논리적으로 설명할  있는 말이 없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학문인데  설명 기제에 우리가 과학적 탐구를 수행할  없는 초월적인 것을 넣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지적도 나왔다. 반면 내재성에만 너무 집중하면 반대로  땅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도, 하지만 주로 자연적인 방법으로 일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건강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먼저 개신교인들끼리 생각이 다르더라도 서로의 신앙을 먼저 인정하고, 비하하지 않고 대화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특히 교회에 과연 터놓고 신앙에 대해 토론할  있는 3 지대가 있는가? 일방적인 주입만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콜로퀴움에서 나온 날카로운 지적은 우리의 공감을 자아내었다. 


다마스커스는 기독교 변증 모임으로서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에서나 시청자 오픈 채팅방에서 페이스북에서 그리고 정기모임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하고  함께 솔직하게 답을 찾아간다. 감사한 것은 신앙에 대한 질문에 목마른 사람들이 꾸준히 오픈채팅방에 들어온다. 그중에는 불가지론자도 있고,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검증해보려는 무신론자도 있고, 새신자도 있고, 교회에서 질문할  없어 여기에서나마 질문하려고 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그 중 크리스천들) 복음이 진리라고 생각하기에 머리가 아플 때도 있고 두려울 때도 있지만 계속 솔직하게 신앙에 대해 질문하고 때론 의심하면서 다시금 신앙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 무엇이 두려운 걸까? 서서히 삶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점점 신앙에서 멀어지다가, 교회를 떠난 친구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자기도 어릴  교회를 다녔다면서 웃으면서 아직도 교회에 희망을 조금은 가지고 있는 친구도 있고, 교회에서 받은 트라우마 때문에 교회 밖에서 신앙을 유지하는 친구도 있다. 가끔씩 마주치는 교인들의 반지성적, 막무가내식 전도에 질려 안티크리스천이  친구도 있다. 이상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교회는 지금 안녕한가? 우리는 과연 복음을 온전히 살아내고 있고 전하고 있는가? 나는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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