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3회 콜로퀴움은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라는 주제로 더처치 교회비전센터에서 지난 3월 18일에 진행되었다. 발표자는 숭실대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였고, 대담자는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의 최승언 교수, 사회자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의 우종학 교수였다. 이 날 발표자 이용주 교수는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Ⅱ(새물결플러스/2018) 중 창조론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 세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활동으로 존재하게 된 피조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과학적 진술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강의했다. 1부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봤다. 

 

 

글_ 심기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자연의 사물들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가 직접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야 우리가 알 수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알려주시는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방식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흘러가고 이 세상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려주신 방식에 집중할 때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할 때만 기독교적 신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기독론적 집중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믿는 유일신과 유대교, 이슬람에서 믿는 유일신론은 좀 다르다. 한 하나님이 그냥 하나가 아니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하나님 한 분 안에서 하나의 신성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알려주셨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 세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것이 조직신학이 다루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관계 맺으면서도, 자신과는 구분 짓는 그 독특함에 굉장히 주목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두려운 주님이나 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빠’라고 굉장히 친밀하게 칭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이 아니야(요18장)’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구분 지으셨다. 즉, 나사렛 예수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 꼭 성령이 함께 하신다. 잉태하실 때도 그렇고, 세례 받으실 때도 그렇고 항상 함께 하셨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다 보면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사건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 세 인격들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심층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세 인격들은 하나님의 인격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들이다.”

 

초대교회 혹은 고대 교회 때부터 삼위일체 신앙이 교회 안에 고백되고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는 무슨 뜻인가? Trinity라는 것은 tri + unity이다. 세 분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다는 뜻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힘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관계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인격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라는 신성이 구성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한 분 안에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있어서, 이 인격들이 서로 다른 행동들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안 하시는 분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에 익숙하다 보니 보좌에 앉으시고 높으신 왕의 이미지에 익숙하다. 마치 ‘착한 타노스’의 느낌이다. 앉아서 멀리 계신 느낌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서로서로가 존재하게 해주는 상호의존적인 활동을 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아들이 아닌 인격체가 되고, 아들은 ‘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아버지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하는 활동을 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 가운데 띠로써 연합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사랑의 띠다.’라고 교회는 오래전부터 얘기해왔다.

 

따라서 ‘일체’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사랑의 활동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삼위’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서로서로 구분되는 독립적인 자유로운 활동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상 ‘나와 다른 존재(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활동을 하는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고, 이를 기독교적 용어로는 ‘사랑’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존재와의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관계 가운데 자유롭게 일하신다. 이 자유는 나를 위한 자유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자유다. 따라서 아들은 이 자유를 아버지를 위해 씀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여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한다. 즉, 아들은 자신의 사랑 활동을 아버지를 위해 하고, 아버지도 역시 아들을 위해 이 자유를 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즉, 관계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는 분’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창조해야만 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체로 관계 가운데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셨고, 그 관계는 완벽한 관계였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반드시 만드셔야 했던 것이 아니고, 무한한 자유 속에서 만들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발성을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함”이라고 정의하면, 이 세계의 우발성은 곧 세계를 창조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 3월 18일에 진행된 제13회 과신대 콜로퀴움은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이용주 교수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1시간 정도의 강의가 끝나고 2부 대담 시간에는 우종학 교수님의 사회로 이용주 교수님과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최승언 교수님께서 패널로 참여해 주셨습니다. 2부 대담 시간에 나왔던 이야기를 손이 가는대로 적어봤습니다. (역시 콜로퀴움의 하이라이트는 대담시간인 것 같습니다.)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면 좋겠지만 강의를 들으며 필기한 내용이라 부정확한 부분도 많고 생략도 많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대담 정리: 최경환 실장



최승언: 판네베르크만큼 현대 과학을 잘 사용한 신학자가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판넨베르크가 복잡계 과학을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더 풍성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종학: 판네베르크가 우발성과 자연법칙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용주: 우발성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필연성도 아닙니다. 판넨베르크는 신플라톤주의의 필연성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신이 왜 세상을 창조했느냐? 창조신앙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신은 이 세계와 인간이 신을 섬기기 위해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이 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 과학에서는 우발성이 어떤 의미인가요?


: 우리는 우연을 상당히 맹목적이고 무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천문학자들은 spontaneou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이 상당히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자연의 법칙들이 상당히 규칙적인 것 같지만, 하나 하나의 개체들은 상당히 우발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자연현상을 우리가 보기에 우연과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 둘이 서로 작용하고, 이 둘을 매개하는 그 무엇이 있을 때, 새로운 것을 발현시킵니다.



: 기독교의 창조론은 유일신론과 다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은 법칙성, 영은 우발성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부분도 한 번 더 설명해 주시죠.


: 아들은 서로 다른 것들이 규칙성 가운데 작용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영원한 아들을 로고스라고 말합니다. 로고스는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철학적 매개를 사용해서 설명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영의 개념도 스토아 철학을 차용합니다.


: 판넨베르크는 영을 장 이론을 통해 설명한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 가시적으로 보이는 물체의 비가시적 근원, 유한한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장처럼 활동하는 영,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유비적인 관계를 설명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에 기초해서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안 받을 수 없습니다.


판넨베르크의 과제이기도 한데, 그는 세상의 혼동과 무질서를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태초에 근원적 혼돈에 대해서 알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일원론을 강조하기 위해 무로부터의 창조를 형성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 전통을 따라갑니다.


신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판넨베르크는 열심히 노력합니다. top-down 방식을 취하지만 과학적인 실재와 공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본적으로 자연의 법칙성을 강조합니다. 우발성은 법칙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을 배타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초월성이라는 것은 설명될 수 없는 뭔가 신기한 것, 법칙성과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은 법칙성과 우발성 가운데 계신다면, 하나님의 내재성이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은 이미 일어난 사건에서 이미 일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초월성은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 자연현상 가운데도 우연성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우리는 영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파악되지 못하기 때문에 희미하게 볼 뿐이죠. 영이신 하나님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사랑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알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우리와 관계맺고 일하고 계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기 초월의 근원입니다. 초월을 공간적으로나 무관계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지만, 스스로 공간과 시간 안에 들어오시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초월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초월이죠.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지난 월요일에는 과신대 콜로퀴움을 잘 마쳤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독일의 조직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과 창조론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려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고 온라인으로도 많은 분들이 시청해 주셨습니다. 2부 대담 시간에 우종학 교수님께서 작성하신 질문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 보시죠~



1. 우발성과 자연법칙 -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은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가?


판넨베르크는 신의 자유와 신의 사랑, 두 개의 키워드를 사용해서 창조를 표현합니다. 우주는 반드시 존재해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신이 자신의 내적 필요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창조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즉, 우주의 존재는 우발적이고 우연적입니다. 이것은 신의 자유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된 우주가 단지 신이 자기실현을 위해서 소모적으로 사용하고 버리는 소멸적 특성만 갖는 것도 아닙니다. 만물이 존재하도록 붙들고, 창조된 모든 것이 그 완성된 형태로 나가도록 하는 신의 행위는 바로 사랑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혹은 우발성과 우연성을 제거하여 기계적으로 명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피조물들이 고유한 완성의 형태로 나가도록 보존하고 협력하고 돕는 사랑입니다.


보존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만들어진 창조물의 본성을 잃지 않도록 돕는, 시간의 방향으로 따지자면 과거가 기준이 되는 사랑이고, 섭리는 피조물들이 완성되도록 돕는 미래적 목표를 위한 사랑입니다.



2. 자연법칙과 틈새 찾기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관점은?


"자연 사건들의 우발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규칙성들의 한계를 숙고하면서, 문제를 자연 사건들의 규칙성의 틈새를 찾으려는 방향으로 몰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의 신학은 이 자연 사건들의 틈새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유혹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자연 과정들 속에 담지된 그 틈새들을 메우고 있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세계는 그 자체로 자동적인 것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은 전체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런 틈새들은 자연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언제나 다시금 메워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를 들어 비유기적 과정들로부터 생명이 기원한다는 사실이 물리학적으로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 그런 주장이 미래에도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기본적으로 물리학이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각 새로운 연구 결과가 제시되면, 또한 그에 따른 새로운 문제들이 야기될 것이라는 것뿐이다."


판넨베르크가 틈새의 신 방식의 접근을 비판하는 관점이 흥미롭군요. 심지어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도 무게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과학이 새로운 발견을 하면 새로운 신학적 문제가 대두되겠지요. 생명의 출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란 얘깁니다.



3. 진화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관점은? - 우발성은 이신론적, 기계론적 신관을 오히려 깨트려 주었다.


"다윈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신학과 자연과학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가장 심각한 오류에 속한다.…신학은 (모든 종이 세계의 시작 이래로 변하지 않는다는) 불변이론의 세계관적 전제에 갇혀있었고 인간에 대한 관념론적 과대평가를 통해 눈이 흐릿해져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학에 경고음을 일으킨 것은 다윈의 종의기원설이 일으킨 의문, 곧 창조 속에서 인간이 갖는 특별한 지위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의문이란 바로 신의 목적을 설정하는 목적론적 자연관이 유전과 자연선택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의 우연성에 대한 강조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런 의문을 품게 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유전과 자연선택의 상호작용은 유기체적 생명의 출현이 갖는 목적적합성을 설명해주었다. 목적적합성의 설명은 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에 따르면 오로지 계획하는 이성을 가정할 때만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렇기에 자연선택설은 친구들과 적들 모두에게 유신론적 하나님 표상에 대한 반박으로 보였다. 양측 모두에게 진화의 자연선택설은 종들의 생성에 대해 원칙적으로 단지 기계론적인 설명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이 간과된 것입니다.


"알트너가 지적했던 것처럼 진화의 새로운 세계상은 창조 사건의 역동성을 시간 안에서 열려 있는 과정으로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기계론적인 자연관은 하나님을 기껏해야 이신론적으로 보아 과거 한때의 자연질서의 창시자로 받아들이도록 했고, 자연사건 과정 속에서 계속 창조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진화는 이런 기계론적인 자연관과 이신론적인 신관을 깨트리게 해 주었다는 것이지요.



4. 장이론 - 과학과 신학의 결합인가? 차용인가?


판넨베르크의 입장이 창조과학식으로 물리학과 신학을 직접적으로 결합하려는 건 아닌가? 자연과학과 대화하려는 판넨베르크의 접근이 성령의 내재적 역사를 장이라는 물리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인지, 혹은 과학적 설명과 신학적 설명 사이에 일정 정도 선을 긋고 장과 같은 물리학적 개념을 차용하여 성령의 일하심을 유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불명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장의 개념을 유비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성령을 어떤 에너지 개념으로 물리적 실체로 정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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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


2019년 첫 콜로퀴움은 20세기 대표적인 신학자로 손꼽히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트의 창조론을 소개받는 강의로 준비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현대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법칙과 원리들, 곧 진화론, 열역학 제2법칙, 인간원리, 상대성이론, 나아가 양자역학에 이르는 과학 이론을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 안으로 통합합니다. 이용주 교수님으로부터 현대 자연과학의 중심 내용을 포괄할 수 있는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을 들어 봅니다.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직접 콜로퀴움 현장에 오실 수 없는 분들, 지방이나 해외에 계신 분들은 생방송으로 콜로퀴움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 전에 미리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3월 18일(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삼위일체 창조자와 그의 피조세계로서의 세계" (이용주 교수)
2부 대담(8:20-9:20) 과학자와 신학자의 대화 (이용주 교수, 최승언 교수)


강사 소개

이용주 교수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연세대학교 신과대학(M.A.)과 대학원(Th.M.),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독일의 마인츠,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튀빙겐대학에서 셸링 철학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신학적, 체계적 해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Dr. Theol.)를 취득하였다. 독일의 De Gruyter 출판사의 TBT 시리즈에서 학위 논문을 출판하였고,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번역한 책으로는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새물결플러스)를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이 있다.


패널 소개

최승언 교수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서울대학교 천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천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 교수로 재직했고, 한국지구과학회 회장(2011) , 서울대학교 과학영재교육원 원장(2001~2006) , 서울대학교 관악영재교육원 원장(2008~2016)을 엮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천문학의 이해>(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을 비롯해 13권의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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