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과신대 콜로퀴움 후기


명쾌하고 통쾌한 전성민교수의 창조과학 성경해석 비판


글_ 백우인 기자



한여름 더위보다 뜨거운 관심몰이가 되었던 과신대 콜로퀴움 현장(서울대입구역, 더 처치교회5)에 다녀왔다. 주제는 두려워하는 독선과 겸손한 확신-구약학자가 본 창조과학의 성경해석이고 구약학 전성민 교수의 발표였다.

 

성경 해석학의 일반 원리에 비추어본 창조과학자의 성경해석 평가에서 젊은 지구론은 1급 성경해석 2급 과학 이론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소개했다. 주류 과학자가 보기에 자신들의 과학 해석이 성에 안찰 수 있으나 자기들의 성경해석이 제대로 된 것이라는 주장을 들으며 구약학자로서 말도 안 되는 그러한 평가를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전성민 교수는 조용조용 이야기를 끌어나갔으나 깨알 같은 웃음과 함께 창조과학의 성경해석에 대해 5가지로 날카롭게 비판했다.


첫째,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서학적 이해의 부재이며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허상이라고 말했다. 한 예로 태초에(베레시트)’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쓰였으니 문자적으로 히브리어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을 해서 읽고 있으며, 또 원래 태초에는 히브리어에서 한 시점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초기의 기간을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점인지 기간인지를 판단하고 해석해야 한다. 전성민 교수는 문자주의적 해석은 미끄러운 비탈길만큼 위험하다는 말을 통해서 그 위험성을 강조했다.




둘째는 역사성을 무시하는 역설이라고 창조과학의 성경해석을 평가했다. 그들은 성경은 끊임없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에스겔의 환상에서 역사성이 있다고 하는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라고 질문을 해봤을 때, 이 환상을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읽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전반적인 내용들을 사용하셔야 했다. 에스겔의 환상도 그게 뭐지?”라고 생각될 만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 에스겔서에 얼굴이 4개 있는 짐승과 사자 얼굴 위에 사람이 얹혀있는 모습은 하나님의 보좌라고 이해하며 하나님이 통치한다고 이해했고, 이에 더해 이 보좌라는 것에 새로운 것이 있을 때 그것에는 뭔가 더 의미가 있음을 예측할 수 있다. 이렇듯 에스겔의 환상의 내용이 잘 전해지게 하기 위해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주관과 그들의 세계관을 사용하셔야만 했다에스겔서의 내용이 역사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역사적 배경 아래서 봐야 한다. 그러나 창조과학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전성민 교수는 지적한다. 역사 가운데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적 환경 가운데서 말씀하셨고, 더불어 성경본문에는 하나님이 반영하시려는 세계가 있고 하나님이 형성하시려는 세계관이 있다고 부연했다. 성경은 어떠한 특정한 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 가운데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세기의 경우 궁창에 별이 박혀있는 세계관은 그냥 받아주신 것이다. 1:16절에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있고 달이 빛을 낸다고 할 때 오늘날과는 맞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아주신 것이며 그것이 반영하신 세계관인 것이다. 이것은 틀릴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무오하다는 이야기는 성경이 주장하는 바에 한해서 다시 말해 형성하려는 세계관의 진리값에 대해서 무오하다는 것이다. 사용한 세계관을 무오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해석학에서 말하는 성서의 역사적 특수성과 영원한 타당성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셋째, 장르를 구별하지 않는 해석이라고 평가했다. 창조과학회는 창세기를 역사로 보지 않으면 기독교 교리가 설자리를 잃게 된다고 겁을 주며 질문한다. “창세기 1장을 역사적으로 믿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전성민 교수는 장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담과 진담을 구별하지 못하면 대화를 잘 이해할 수 없고 소통이 되지 않는 것처럼 장르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제대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창세기 1장과 2장은 '어떤 장르인가? 역사인가? 신화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양한 입장 즉, ‘역사적 서사혹은 역사적이지만 문자적인 것은 아니다.’ ‘신학적 역사등 다양한 의견을 말하면서 역사라는 단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는 입장에서 장르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신학적 수사를 알지 못하거나 일부러 피하는 해석. 다섯째, 신학적 메시지를 놓치는 비약적 해석으로 평가한다성경에는 비유나 유비뿐만 아니라 과장법도 들어있는데 그런 표현들을 문자적 사실로 보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예컨대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는 언제나 지구이므로 지구가 제일 먼저 생겼다는 해석은 자연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하게 드러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뭐라고 말하든 창세기에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으니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다. 또한 양쪽 끝만 말하지만 모두를 아우르는 표현, 예를 들어 하늘과 땅은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전성민 교수는 창세기 11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지구를 먼저 창조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학적 수사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창세기 1, 2장의 풍성한 신학적 메시지는 하나님 말씀은 전 존재에 영향력을 미치는 실재로 이해해야 하며 창조주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주장 같은 독선적 태도의 밑바탕은 두려움이라고 지적하며,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다는 것은 성경을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는 한편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죄성일 수 있다. 상식적이고 훈련된 해석과정을 밟아야 저자들의 원래 의도에 근접해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해석을 해야 한다. 그 가운데 최선의 결론을 내리고 그마저도 정답은 아닐 수 있다는 겸손한 확신을 강조했다.


차분하고도 스피드한 전 교수의 풍부한 예시와 흡인력 있고 날카로운 지적은 사이다 중의 사이다였다. “흔들리는 나침반은 틀리지 않는다.”는 겸손한 확신으로 우리 과신대 사역이 더욱 확장되길 바라본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