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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이야기/과신대 사람들

과신대 사람들 (12) 박영식 교수 (I)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8. 9. 3.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2018년 8월 29일 서울신학대학교 정문 앞 카페 '이유'에서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박영식 교수님(서울신대 조직신학)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창조의 신학』(동연)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그 책의 내용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이 많아 두 번에 나눠서 소개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박영식
사진/글 | 심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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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안녕하세요, 박영식 교수님.


[박영식 교수 (이하 박)]
안녕하세요.


[과] 직신학의 주제가 여러가지인데, 그중에서도 창조에 원래 관심이 있으셨나요?


[박] 창조에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해도 거짓말인  같은데... 모르겠어요. 제가 이전에 야후 블로그를 운영했는데 그때도 제목이 창조, 생명이었거든요. 창조라고 하는 것이 저에겐 이상하게 중요한 주제였고, 독일에서 공부하면서도 창조라는 주제가 막연하게 성서 안에 있는 내용, 옛날 내용이기보다는 실생활에 가깝게 생각되었던 같아요.


[과] (이번에 새로 내신)  앞부분에 그런 부분이 나오더라고요. '성경을 읽거나 기독교 신학을 구성할 구원이나 구속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창조는 오히려 굉장히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도 창세기 1-2장에만 잠깐 반짝이는데, 사실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런 얘기를 하셨던 같아요. 부분을 조금만 설명해주실 있나요?


[박] 저도 항상 우리 한국교회와 관련해서 질문하는 것들이 "타종교는 구원받느냐, 구원은 무엇인가"이고, 설교도 구원에 초점을 놓고 하지 창조를 갖고 설교하는 경우는 이상하게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의외로 성경에 창세기 1-2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요한 주제가 창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성경은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게 되는 책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끝나거든요. 창조의 시작과 창조의 완성이랄까요. ‘창조의 거대한 구도 속에서 성경이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더라도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는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개신교 전통에서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창조를 거의 설교하지 않으니 그런 살리는 필요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봤을 때, 창조를 단지 옛날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고, 마치 우리 책의 서문 같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문이 있고, 1, 2 전개가 때, 서문이 다른 모든 부분을 커버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물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성경 그런 구성에서 읽어볼 있지 않을까,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가장 첫 단계, 출애굽기가 다음 단계, 이렇게 읽어나갈 것이 아니라, 사실 1 안에 성경 전체 하나님의 스토리와 히스토리가 포괄된 구조로 봐도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죠.


실제로 제가 어디가서 창조 설교를 하면 낯설다고 해. 간혹 규모 있는 교회에 가서 창세기 놓고 설교를 하면 이렇게도 설교하시네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고, 많이 낯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그냥 경험상으로도 창조 자체가 구원 이런 것보다 한국 교계에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과신대나 이렇게 과학 대화할 조금 관심이 있지 신학 전반적인 주제로서 관심사는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과]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일단 우리가 창세기부터 시간순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우리의 관심이 온통 그럼 처음에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처음에 뭐가 있었어?” 이런 거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우린 자꾸 실증주의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보니까 뭔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거랑 핀트가 맞는 거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아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뭔가요?


[박]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서 풀어야 하는데, 흔히 말하는 창세기 1 이쪽 배경은 바벨론 포로 시기라고 보고, 나라를 잃고 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질문을 던졌을 겁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도 여러 자료들을 활용하잖아요. 영화, 소설 . 마찬가지로 저는 성경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경험 세계 속에서 알고 있던 자료들, 바벨론 창조신화라든지, 이런 것들을 갖고 거죠.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의 없던 창조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고, 성서신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미 이스라엘의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었으나 고백할 있는 폼을 거기서 갖고 오되, 똑같이 갖고 오는 것이 아니라 비틀어서 자기들의 신앙을 거기에 담아서 표현했다는 거에요. 마치 목사님들이 설교할 드라마를 갖고 오면 드라마를 전달해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설교에 이용해서 설교 내용을 전달하는 것처럼 말이죠


창세기 1장이 그런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역사적 상황에서는 우리의 관심사처럼 옛날 옛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바벨론의 포로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질문이 중요한 것이죠.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나오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것이 바로 포로 상황에 있는 자신들의 상황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은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여기서 물이라는 위험을 뜻하는 상징인데, 고대 근동에서, 노아 홍수도 그렇고, 예수님도 위를 걸으셨고, 계시록에 보면 새창조 바다가 사라져버려요.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항상 위험요소였는데, 바로 그런 수면 위에 하나님은 운행하신다는 겁니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활동하고 계신다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이 어둠 가운데서 빛을 비추신다. 이게 인간의 어떤 실존적인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 가운데서 아무것도 전망이 없는, 한치 앞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해 내시고 어둠을 가르시고. 다음에 아무 것도 디딜 없는 실존의 공허함 속에서 디딜 땅을 허락해주시고. 바다를 걷어내고. 디딜 땅을 주시고. 그리고 각각의 삶의 공간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생명을 안에 집어넣잖아요. 이런 역동적인 그림들을 그리면서 우리는 "지금은 이런 어둠 속에 혼돈 속에 공허 속에 있지만 하나님이 결국 새로운 삶의 공간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런 명령까지 주신다"는 것을 있습니다. 삶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창세기 1장의 메시지라는 겁니다 메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성서의 창조의 이야기는 이러한 관점에서 반복되죠. 마치 출애굽의 이야기가 구약에서 계속 출애굽을 회상하면서 '기억하라' 하면서 출애굽의 동기가 반복되듯이 창조의 동기도 구약에 계속 반복됩니다. 시편에도 나오고, 이사야서에도 나오고. 이렇게 창조에 대한 동기를 계속 반복하는 창조와 구원의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하는 겁니다. (지금 한국 교계에서는 )우리는 구원만 얘기하고 창조는 조금 내려놨는데 창조라는 패러다임 속에 사실 구원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으시고 새로운 공간을 열어놓으시고, 그런 관점에서 읽어야 된다고 보고요. 그런 관점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타당하다고 봅니다


성서의 창조의 얘기는 창조의 과거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미래를 지시하는 것이에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미래가 2천년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제 앞으로 펼쳐질 미래라는 거죠. 바로 지금 하나님 때문에 새롭게 열릴, 창조될 미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자꾸 고고학적인 질문 등을 하는데, 그런 쪽으로 가는 성서의 원래적인 의도와는 다르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냐,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냐'의 문제인데요. 어거스틴 이후로 교회 전통에서 무로부터의 창조가 정립되었는데, 또 오늘날 성서학자들이 성서를 보니깐, '땅이 혼돈하고' 등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걸 양자택일 구도로 보는데, 사실 같은 거라고 본거에요. 삶의 관점에서 보면 극심한 혼돈 속에서는 무를 경험하거든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거에요. 자기한테 이상 디딜 땅이 없는 거에요. 자기 존재도 사실 무화가 되고. 자기 존재도 한없이 가엾고 의미 없는 존재로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실존적인 해석이죠. 무에요. 그러나 동시에 혼돈. 혼돈과 무로부터의 창조. 서로 양자택일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 속에서 동일한 체험이고. 어쨌든 성서는 교리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나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중요한 아니라 하나님은 거기서 창조하신다는 거죠. 그런 메시지가 로마서로 가면 죽은 자를 살린다. 없는 있게끔 한다. 그런 역동성과도 연관이 되죠.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연관이 있고,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미래와도 연관이 되는 거죠. 이렇게 사실 창조의 모티브는 과거에 갇혀 있는 아니라 끊임 없이 생동하고 실제론 우리의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로 읽을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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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람들 (12) 박영식 교수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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