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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책

무오(無誤)에서 무지(無知)로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8. 10. 22.

창조론자들 (로널드 L. 넘버스, 신준호 외 역, 새물결플러스)


서평: 이광형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동 대학원 구약학 Th.M 재학 중, 초원교회 교육 목사)




무오(無誤)에서 무지(無知)로


먼저 이 책의 제목에서 ‘창조론자들’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신앙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사실 이 책의 저자인 로널드 넘버스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기에 책을 읽기 전에는 아마도 창조과학 쪽에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어떤 면에서 틀렸는지 학문적으로 비판하는 책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느 쪽 주장에 대해서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논하려는 것이 아닌 창조론자들이 어떤 신학적 노선 안에서 시작하여 어떤 길을 걸어왔고 이제 거기에 ‘과학’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게 되었는지를 서술하는 일종의 사상사 내지는 그들의 발자취를 기술한 책이다. 로널드가 과학사/의학사 분야의 교수라는 점에서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로널드라는 사람의 철저한 자료조사에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창조론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알고 또 거기에 명확한 근거들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은 원래 근본주의적인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과학을 전공했지만, 창조론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음을 밝힌다. 그러다가 창조과학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젊은 지구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창조과학에서 돌아서게 된 이야기를 밝힌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 자체는 객관적인 서술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창조과학자들이 어떻게 지난 1세기 동안 어떻게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왔는지 또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어떻게 증거를 왜곡하고 조작했는지 그러면서 어떻게 세계 곳곳으로 확장해 나갔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 저자가 반창조과학적인 입장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최근에 SNS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는 우종학 교수를 중심으로 많은 기독교인, 신학생, 목회자들이 창조과학에 대해 다시 재고하게 되고, 그들의 오류에 대해서 알게 되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을 비판할 때, 그들이 성경에 대해 ‘문자주의’ 혹은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도 근본주의자라는 말들이 서슴없이 등장한다. 근본주의 운동은 사실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급진적 자유주의의 신학 사조에 맞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한국에서는 소위 자신들을 개혁주의라고 자처하는 보수 신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는 주로 신학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본주의라는 말이 바로 이 창조론자들(창조과학자들)에게 적용될 뿐만 아니라 이렇게 까지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에 흥미로웠다. (물론 성서해석의 측면에서 당연할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창조과학을 공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 더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과학은 단순히 문자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혹은 근본주의자=문자주의자라는 생각이다.


옥스퍼드의 구약학 교수를 지냈던 제임스 바(James Barr)는 그의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있는데, 근본주의자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은 문자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오성에 있다. 여기서 성서의 무오성이라 함은 성서가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한 치의 오류도 없음을 지키고자 하는 교리다. 실제로 근본주의자들의 성서 해석을 보면 모든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서의 무오성을 지키기 위해 성서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비문자적 해석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오성이지 문자성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창조론자들』 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나도 한 때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이 ‘정확무오’하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한다. 결국 그것은 그들이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창조과학자들이 과학자가 되는 과정 속에서 이들이 바로 안식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은 처음에 미국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전략을 택했으나 후에는 전략 노선을 수정하여 정치적인 압박을 통해 오히려 창조과학을 학교의 공교육에 넣으려고 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은 곧 창조론을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으로 명명하면서 자신들의 방향을 과학의 방향으로 몰고 가려 애썼으며, 과학으로 재포장하려 했다는 것. 게다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창조과학자 버딕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박사 학위가 필요 했는데, 애리조나 대학에서 박사는커녕 석사 학위도 받지 못했고, 결국 실체도 없는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속이게 된다. 이러한 창조과학자들의 역사에서 결국 창조론자들이 걸어온 발자취는 그들이 성서에 대해 확고한 신앙만큼 행위가 따라가지 못하는 거짓된 자들임을 보여주며, 창조과학에 ‘과학’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붙일 수 없는, 적어도 과학에 있어서는 비전문가들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로널드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책의 말미는 증보판에 덧붙여진 내용인데, 지적설계와 창조론자들의 최근 흐름 및 창조과학자들의 세계 지형도까지 안내하고 있다. 더불어 교회 안에 창조론자들이 어떻게 침투하였는지, 또 주요 교단들에게 미친 영향도 소개하고 있으며, 가톨릭과 유대교에게도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흥미를 끌었던 점은 창조론의 세계화 부분에서 ‘한국’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로널드는 아시아에서 특별히 한국인들이 창조과학자들을 위한 발전소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한국창조과학협회’ 이야기까지 상세하게 다룬다. 특히 1990년대로 넘어와서 서울에서만 1500여회의 세미나를 개최했다는 사실에서 한국은 적어도 아시아에 있어서는 “창조론의 수도”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라고 로널드는 평가한다.


창조과학자들의 무서운 점은 그들이 ‘과학’으로 승부가 나지 않아서인지 법률적, 정치적 공세를 폈다는 점이다. 로널드는 미국 여러 주의 공화당원들이 자신들의 공약에 창조론 항목을 추가했고, 창조과학자들은 미국 전역에서 지역 교육위원회의 선거에 출마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필자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 잠깐 떠올랐다. 매 학기 초마다 열리는 신앙 사경회의 선택 특강 시간에 유명한 한국의 창조과학자의 강의가 포함되어 있었던 불과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적어도 장신대의 조직신학 및 성서학의 입장은 그러한 근본주의적 영향과는 매우 거리가 먼데, 어떻게 그들이 신학교 안에까지 들어와 강의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커다란 수치를 느끼면서도 창조론자들의 책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공세는 아니었는가 음모론 아닌 음모론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성서를 근본주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닌데, 가장 무서운 점은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의 신앙이 더 좋아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그들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들의 속내를, 그리고 그들이 지나온 과거를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진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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