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페미니즘의 눈을 통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고찰하다.

페미니즘과 기독교 | 강남순 | 동녘 | 2017

 

김영웅

 

 

'결함이 있는 남성', '잘못된 남성', '악을 가져오는 위험한 존재'. 자,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렇다. 놀랍게도, 우리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아내, 우리의 딸,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 10달간 머물렀던 자궁의 주인이자 우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바로 여성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여성에 대한 표현들이 어떤 정신병자에 의한 오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유명한 철학자와 신학자(모두 남성이다), 각각 이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한 여성에 대한 이해였다. 누군가는 세 위인 모두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며 적당히 이해해보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질없는 시도다. 대표적인 종교개혁자였던 마르틴 루터조차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 이후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았고, 또 다른 종교개혁가 존 칼빈도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신의 창조 질서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굳이 수 세기 전에 이미 사라진 위인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펴보면 그 어디나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와 남성 위주로 된 문화 시스템들이 마치 물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소위 ‘자연스럽다’고 하는 많은 법과 규범, 질서와 체제, 그리고 문화를 바라보는 눈이, 사실은 색안경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착용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 색안경이 우리 눈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전혀 이상함을 못 느낄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 숨 쉬듯 자연스러운 가부장적인 제도에 노출되는 우리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와 배제, 차별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우리 눈에 부착된 색안경을 인지하고 뜯어내는 작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이 시대의 키워드를 통해서 말이다.

 

강남순 교수의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나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나 강연 등을 부끄럽게도 여태껏 직접 접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무리가 없는 수준의 책이다. 이 책에는 페미니즘의 간략한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가중시키고 대중화시켜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각인이 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가 페미니즘과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다층적이고도 심층적인 대답을 찬찬히 해나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의외의 상황 파악에 섬뜩할 정도로 놀란 부분이 있다. 가부장주의적인 교육과 가치관의 내면화가 견고해질 대로 견고해져 급기야 일종의 카르텔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익숙해진 존재에는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여성 스스로도 자신의 해방을 위한 페미니즘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지도자를 선택할 때도 여성보다는 남성을 더 지지하고 신뢰하게 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대부분 피해자의 위치에 놓였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해방보다는, 비록 남성 의존적이고 불합리하고 불의하더라도 그 상황이 가져다주는 모종의 안정감에 길들여져 버려 그 상황을 지속하길 원하게 되는,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난 이 부분에서 최근에 읽었던 모세오경 중 민수기 편이 생각났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에게 억눌렸던 노예 체제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하기보다, 광야생활 중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기만 하면 차라리 그 노예 시절이 더 나았다고, 차라리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상황과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인된 노예근성이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오랫동안 이어져온 가부장주의적인 사회체제 속에서 여성들에게 각인된 억압 근성이 여성 평등을 넘어 성, 인종, 사회적 계층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발전에 의외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천부인권설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가 오히려 여성 혐오, 배제, 차별을 합리화시켜 버리고 남성우월주의를 마치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것처럼 만들어버린 인간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으로서 나도 수치를 느낀다. 먼 과거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성 차별은 존 파이퍼 같은 유명한 목사들에 의해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왕성하게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재미난 사실은, 이렇게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여성을 차별하는 기독교 리더들도 자신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서의 근거는 그 자신이나 그가 속하고 자라온 교단이나 전통이 부여한 편향적인 해석에 불과할 뿐 하나님이 직접 지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해석을 진리로 착각하고, 또 전통성이 그것을 진리로 만들어줄 것처럼 여기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분명 반성과 회개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교적 남성 우월주의가 진하게 묻어있는 기독교에 마음과 생각이 물들어있을 것이므로, 이 책을 꼭 한 번쯤은 읽어보길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본인이 은연중 가지고 있을, 여성이 '자연스럽게' 배제된 기독교 신앙이 과연 진정한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과감하게 던져보길 바란다. 강남순 교수도 지적했듯,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양립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선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생각해야 비로소 본 질문에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영점 위치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페미니즘이 어떻게 생성되고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배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용도로도 읽힐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눈과 일체가 되어버린 가부장적인 색안경의 실체를 인지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찰해보며 스스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조금이라도 수정이 가하면서 읽을 때, 아마도 이 책의 저자, 강남순 교수의 목적과 바람이 절반 정도는 성취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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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존중과 배려로 다름의 향연을

아담의 역사성 논쟁 | 데니스 O. 라무뤼 외 | 새물결플러스 | 2015

 

김영웅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이나 갈등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인류의 기원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자연스럽게 아담이란 존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자칫 발칙하거나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 의문은 기존에 아무 의심 없이 가지고 있었던 우리들의 믿음과 확신을 재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인류의 기원이 기록되어 있다고 보는 창세기 앞부분을 무언가 놓친 게 있나 스스로 반신반의하며 수없이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그 부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직접 능동적으로 찾아보기도 합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 순간이 기존 교회 안에서 담을 수 없었던 기독교 영역을 처음으로 접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늘 수동적인 자세로 목사를 통한 성경 해석을 주입 받아왔던 분이라면, 아마 이때가 처음으로 교회 안에서 말해주지 않거나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이슈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세상에는 정말 다양하고 다채로운 성경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유일한 진리처럼 믿어왔던 지식이 그저 다양한 해석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더욱 커다란 기독교 세계를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평안히 잠자고만 있던 자신의 신앙이 안일하고 편협했으며, 순수하다고 믿었으나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아담의 의미를 인류의 기원 측면에서만 고민하다가 멈추게 된다면 (물론 이런 고민은 블랙홀과 같아서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멘탈은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채 오히려 전에 없던 활기찬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다행인지도 모르죠) 이러한 고민이 보통 인류의 기원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에게도, 바울에게 그랬듯, 구약 성경만 있었다면 적어도 멘탈이 붕괴되는 고민까진 직면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창세기가 포함된 구약만 있는 게 아니라 신약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예수만 있는 게 아니라 바울도 있습니다. 또한 원죄 개념을 강력히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예정론을 언급한 칼빈도 우리에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는 장로교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 중 단 1% 정도가 장로교라고 하는데 말이지요 (그 중의 절반이 한국에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팩트체크 필요하겠지만요). 이러한 불행 (다행?)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편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조성했으며, 급기야 이는 누군가에겐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골치거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골치거리의 근원은 아담과 예수를 연결시킨 바울의 언급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한 사람’에 대한 부분은 첫 번째 아담 뿐만이 아닌 두 번째 아담이라고 알려진 (실제 “두 번째 아담”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단, “두 번째 사람”이라는 말이 고린도전서 15:47에 나옵니다. 아담이란 뜻이 사람이기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이긴 합니다) 예수의 존재 이유까지도 재고하게 만듭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기원과 그 해결책에 관한 부분이지요 (각각이 아담과 예수를 대변합니다). 이로써 우린 마침내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건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무방비 상태로 돌연히 노출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의미를 인류의 기원 문제와 연결시키다가 얼떨결에 시작된 블랙홀의 끝이 예수의 대속을 향하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특히,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성경 전체를 해석해내는 방법에 익숙한, 복음주의권 (그 중에서도 칼빈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 장로교)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으며 개인의 신앙과 믿음을 구축했던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 아담으로 인한 원죄사건과 그 결과로 인한 인간의 타락, 죄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의 태어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한 구속, 즉 창조-타락-구속의 플롯이 모든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아담의 존재 유무는 자칫 기독교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위험인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복음주의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원죄개념과 죄의 전가를 핵심교리로 여기지 않는 기독교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아담의 역사성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가지지 않겠지요. 그래서 이 글에서 '우리'란 한국 장로교를 포함한 창조-타락-구속 플롯을 받아들이는 복음주의권에 속한 기독교인을 지칭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른 것 같은 참담한 멘붕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린 과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책은 이러한 질문을 이미 던져보고, 그로 인해 인생을 건 치열한 고민을 거쳐 정립된 네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의 입장을 보여줍니다(각 입장을 대표하는 네 명의 학자들은 모두 복음주의자들입니다). 과연 아담은 실제 역사적 인물일까요, 아님 어떤 상징을 나타내기 위한 고대 근동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상 속 인물일까요? 아담은 과연 첫 번째 사람이자 인류의 조상일까요, 아니면 죄가 세상에 들어온 시점의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에 불과할까요? 아담은 과연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그렇듯, 정자와 난자의 수정에 의해 태어난 게 아니라, 정말 초자연적인 방법, 즉 흙으로 빚어지고 유아 단계를 건너뛴 채 곧장 성인으로 만들어졌던 것일까요(de novo creation)?


물론 성경 본문은 이런 질문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혹은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 어떠한 대답도 명확히 내놓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그저 여러 단편적인 성경 구절들과 고대 근동 지역의 과학과 세계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성경 해석과 신앙고백, 그리고 기독교 교리 등에 의거하여 추측할 뿐입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각 시대에 관점들은 모두 정치적이고 어쩌면 폭력적일 수도 있었을 힘의 영향 아래에서 정립되었다는 사실도 우린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이 책 역시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대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력하게 호소하지만, 그 어떤 입장의 해석도 참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결코 한 입장만을 옹호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빨려 들어갈 정도로 탄탄한 논리를 가진 입장이라 해도 해석은 해석일 뿐, 결코 그것이 진리의 자리를 꿰차진 못합니다. 저는 어떠한 해석을 받아들이든 본인의 신앙이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어떠한 입장을 가진다 하더라도 어느 부분에선가는 논리의 모순이나 비약을 감행하거나 무시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입장을 비하하거나 혐오하거나 배제하며 싸움질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밑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네 가지의 입장을 조화롭게 수평적인 관계에서 다루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한 입장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다름이 다름으로 존재할 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단, 어떤 한 입장이 내세우는 힘의 논리에 의해서 다름이 틀림이나 혹은 악으로 규정되고 제거 대상으로 발전하게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자신이 열심히 연구해온 입장을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의 네 가지 해석 모두 논리적 완전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거기엔 자신의 시간과 열정, 다시 말해 자신의 인생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자의 입장이 조목조목 반박되어질 때면 자신의 자아가 마치 부인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감정 섞인 논쟁의 장면을 볼 때면 솔직히 제 삼자이자 독자에 불과한 저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났을 정도였답니다. 이미 논리의 영역을 이탈하여 오감을 가진 인간으로서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책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논쟁도 그 표면상의 이유는 논리와 근거 부족이지만, 사실 그 이면엔 그것들보다 더 큰 문제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자아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논쟁에서 이성만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감정이 섞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논리로 시작, 진행, 결론지어져야 했을 논쟁이 결국엔 비논리를 불러오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건 결국 그들도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대표하는 배릭 교수 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세 학자의 입장에서도 전적인 동의가 되어지진 않았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진화적 창조론'의 대표인 라무뤼 교수의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부분에서, 저는 그의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왜 굳이 역사적 아담이 존재하지 않았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월튼 교수의 '원형적 창조론'에서는 '이것이 맞지만 저것도 틀린 건 아니다'라는 모호한 논리에 그만의 확실한 색깔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굳이 역사적 아담이 존재해야만 하는가?'하는 질문에서 명징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콜린스 교수의 '오랜 지구 창조론'의 입장에서는 '왜 굳이 유신 진화론을 거부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저는 끝내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네 가지 입장과 그들의 논쟁을 모두 지켜본 전직 교수이자 현직 목회자인 그레고리 A. 보이드 목사의 입장이 저로선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역사적 아담이 있든 없든, 우리의 믿음은 안전하다' 라고 압축할 수 있는 그의 입장에서 저는 존중과 배려가 깃든 예수의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린 어느 한 입장을 고르고 그 입장을 변호하는 투사가 되어야만 할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 입장이 연구를 할 필요도 없다거나, 다른 입장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름에 열린 자세를 가지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 길은 결국 교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름을 다름으로 존중해 주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한 입장의 더 탄탄한 논리를 구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놓쳐왔던 건 어쩌면 그런 자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진 각 입장이 서로의 논리적 결함을 찾아 비방하기도 하고 자신의 입장이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하는 단계에 있지만, 언젠가는 다른 해석들이 모두 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채 어떤 입장을 취하든 전적인 개인의 자유에 맡기고 혐오와 배제 대신 존중과 배려의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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