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책]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과신책] 학자의 읽기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 이레서원 | 2017

 

김영웅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를 향한 신뢰,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자칫하다간 자신의 신앙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이 자신의 고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느껴지고, 자신만 숨 막히는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난과 훈련의 유익함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는 '욥기'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 가운데, 왜 욥이 고난 받게 되는지를, 욥기의 시작부터 우리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작 불가항력적인 고난을 실제로 받았던 욥은 그 고난이 끝난 이후에도 그 이유를 몰랐다. 다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욥은,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 영적 교만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을 마침내 대면하고 이를 회개하게 된다. 이후 욥은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께선 욥에게 고난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다. 

고난을 겪고 나서, 그 고난이 왜 자신에게 임했는지 정확히 알게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정말 그 직접적인 이유를 우린 알 수 있기나 한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지나고 나서야 그 고난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비로소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극심한 고난 중에서는, 절망 가운데 깊이 빠져 있다가도 간헐적으로 온전한 분별력을 되찾기도 하고, 이내 다시 끔찍한 고통 속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사이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고난됨은 어쩌면 이러한 반복적이고 비생산적인 크고 작은 감정과 고통의 요동과, 그 때문에 늘 정체되어 수렁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우,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이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한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전보다 오히려 더욱더 힘든 내면세계의 혼돈과 붕괴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는 그의 책,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에서, 욥기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로 빚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들 생각의 저변에 깔린 인과응보적인 논리를 물리치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대답만을 하신 사건에서도, 우린 죄와 고난의 인과적인 관계가 항상 성립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난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답답하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모른다"거나 "context-dependent"하다는 것이 가장 '성경적'일지도 모르겠다. 

고난의 원인(Why)을 밝혀내는 것보다는, 어쩌면 그 고난으로부터 무엇을(What) 얻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의 목적은 Why보다는 What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욥의 친구들은 모두 욥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Why)에 중점을 두고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그들은 모두, 순종은 복으로, 죄는 심판으로 인도한다는, 기계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었고, 그 방정식에 하나님을 대입하여 기계적으로 얻은 해와 욥의 상황이 일치하지 않음을 간파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그 친구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What)이 지닌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곧 하나님은 종종 예기치 못한 방식,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신다는 점(What)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해법을 욥의 특수한 사례에 적용하려 했다. 마치 하나님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음일 뿐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방정식에 갇혀 그 규칙대로 움직이는 존재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들은 하나님(What)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목적은 욥이 그분을 알게 되는 데에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것도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닌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말이다. 저자 역시 Why가 아닌 What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광대하고 다양하며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그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쉽게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불가사의한 모든 것까지도 통제하시는 분이시다. 불가사의는 우리의 이해를 넘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광대하고 경이로운 계획 가운데서는, 부당한 일들까지도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하나님은 그 일들까지 사용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심지어는 이전보다 더 낫게 만드시기도 한다. 욥은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런 상황까지도 그분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고난도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과정의 일환일 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한 진리이겠지만, 인간은 불완전하고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창조주인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는다면, 고난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하는 왜(Why)의 질문 대신, 그 고난으로 인해 깨닫게 될 무엇(What)에 좀 더 초점을 둘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하며 과거지향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와 미래까지도 스스로 파괴해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그 고난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그를 향한 신뢰와 소망을 가지고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솔직히 드러내어 귀를 기울여 보자. 적어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욥의 친구들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을 순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또 맞이하게 될 고난에 대한 면역이나 근력도 생겨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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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바울을 이해하기 좋은 길잡이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단숨에 읽는 바울
존 M. G. 바클레이 | 새물결플러스 | 2018

 

김영웅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사탕을 준다고 해서 교회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네 식구였던 우리 집은 전세에 단칸방이었다. 사탕 같은 간식은 내겐 아주 귀했다.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난 그 교회를 계속해서 다니게 되었다(그런데 친구는 얼마 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대로 교회 다니는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가문에서 처음으로 소위 '예수쟁이'가 탄생한 것이었다. 동시에 내겐, 이젠 30년이 넘는, 하나님을 향한 굴곡진 여정의 시작이었다. 사탕 하나로 이 기나긴 여정이 시작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내가 다니던 교회(예장 합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선 성경 퀴즈대회를 자주 했었다. 학교에선 주관식 수학 문제의 답이 대개 '0' 아니면 '1'이었듯, 교회에서 치러진 주관식 성경퀴즈의 답은 십중팔구 '하나님' 아니면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그 범접할 수 없는 이름에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올렸던 이름이 있었으니, 구약에선 '다윗', 신약에선 단연 '바울'이었다.

 

어릴 적 내가 알던 바울에 대한 지식은 아주 단편적이었다. 신약에서 편지를 가장 많이 쓴 사람, 사도행전의 주인공(?),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사울'에서 이름이 바뀌었던(?) 사람. 이제는 이런저런 공부로 인해 이러한 지식이 부정확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땐 혼자 따로 공부하지 않고 그저 교회에서 주워들은 지식이 전부였던 터라, 나의 성경 지식은 그 당시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들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내가 알던 바울은 그 정도가 다였다. 정확하지도 않을뿐더러 단편적이기만 했던 지식의 파편들. 이성적인 이해를 거치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시도하면 불경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냥 무턱대고 믿으라고 강요받았고, 오히려 그것이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라고 배웠던 그 시절. 이는 아마 그 당시 한국 기독교 신앙의 단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씁쓸함이 남는다.

 

바울을 더 정확하고 더 깊게 알고 싶었던 건 솔직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믿었던 나의 기독교 신앙은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서른 후반 즈음에서야 힘겹게 맞이한 가치관의 변화 시기에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어 나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다. 그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를 지나오며 난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순 없겠지만, 이러한 방법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충분히 인생을 다시 보게 만들고 제대로 살아내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성의 영역이 인간이란 존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것은 그 빙산의 일각이라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회개나 거듭남, 그리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하여 마침내 얻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역시 이 빙산의 일각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정확한 지식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을 더욱 풍성히 알고 전할 수 있는 중요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제목부터가 맘에 쏙 들었다. '단숨에 읽는 바울'. 그렇잖아도 이철규 원장님이 작년 엘에이 방문하시며 쓱 건네주셨던 '하나님의 비밀'(그레고리 K. 비일, 벤저민 L. 글래드 공저, 새물결플러스 출판)도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고, 예전에 큰맘 먹고 구매했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저, IVP 출판)도 마찬가지 상태라, 난 이 두 책을 책장에서 볼 때마다 뭔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약 150 페이지의 짧은 이 책으로 이제 겨우 그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두 책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처럼 신학적인 전문지식이 전무한 사람에게 이 책은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바울을 감히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이 책에서 바울의 '역사'와 바울의 '유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울을 읽어나간다. 1부 '역사'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의 바울의 위치와 의미를 읽어낸 뒤, 바울의 편지들과 그것들이 가지는 역사적 정황들을 살펴본다. 이어서 자신을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으로 소개하는 바울과, 유대 전통에 비친 그의 모습을 읽어낸 이후,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 로마 제국에서 가졌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묘사한 이미지와 사람들에게 인식된 이미지들을 비교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바울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는지에 달려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울이 유대인이었고 지성인이었으며, 돈을 버는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니다가 다메섹에서 그가 계시라고 부르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되었고, 예수가 정말 주님이라는 확신을 얻은 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으며, 그 사건을 통해 바울은 그의 삶과 그의 충성심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뀌는 삶의 대전환을 경험했다는 것도 난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바울이 남긴 유산의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남긴 유산은 무수히 다양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장들을 낳았다는 사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만이 아니라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를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아는 바였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이러한 단편적인 바울에 대한 지식은 표면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신학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바울 신학의 다양한 해석이었다. 작년 권연경 교수님께서 참석해주셨던 독서모임에서 '로마서 산책'과 '행위 없는 구원?'을 함께 읽고 직접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끝내 말끔히 풀리지 않았던 부분은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학 문제처럼 문제가 하나 있으면 하나의 답이 존재할 거라는, 다분히 단순 무식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기독교 신학을 무분별하게 접하고 있던 시기라, 내게 있어 '해석'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또 하나의 낯선 세상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2부 '유산'에서 저자는 비록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 바울의 편지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연구했던 여러 신학자들의 해석으로부터 바울의 유산을 찾아낸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서구 교회,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와 칼뱅의 사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 그리고 니체를 비롯한 다수의 철학자들과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왔는지 저자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준다.

 

 

책을 읽고, 바울처럼 파다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쟁을 몰고 다닐 인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사실 바울이 직접 썼다고 인정되는 일곱 편의 서신(더 많은 서신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 이상 일곱 편의 편지를 통해서만 바울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에서도 그는 상반되거나 모호한, 어쩌면 이중적일지도 모르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게다가 바울이 쓴 것은 신학 전문서적이 아니라 어떤 특정 상황에서 어떤 특정 대상을 향해 쓴 편지이기에, 이 편지만을 가지고 바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바울 서신의 저작설에 관한 다툼도 꾸준히 있어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강조하듯, 신학의 문외한인 내게도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고 익히 알려졌던 바울의 사상을 확고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고 그것을 찾으려는 방식보단, 각 시대와 정황에 흐르는 맥락에 합당하게 본문과 꾸준히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가능성을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탐색하는 방식이 더 올바를 것이다. 바울이 끼친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지만, 바울 역시 예수의 복음을 해석한 사람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 사람이기에, 그의 사상이 성경을 읽는 하나의 눈을 열어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복음이거나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늘 염두해야 할 것이다.

 

다시금 바울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혈통적으로 유대인도 아닐뿐더러,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율법을 다 알지도 못하는, 일개 이방인에 불과한 나에게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역할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를 박해했던 그도 부르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인간의 자격이나 가치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이 왜 비유대인들의 세계로 퍼져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여전히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바울이지만, 그의 소명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야훼의 종의 사명처럼 분명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열방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열방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어지는 거대한 선상에 나의 작은 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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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페미니즘과 기독교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페미니즘의 눈을 통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고찰하다.

페미니즘과 기독교 | 강남순 | 동녘 | 2017

 

김영웅

 

 

'결함이 있는 남성', '잘못된 남성', '악을 가져오는 위험한 존재'. 자,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렇다. 놀랍게도, 우리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아내, 우리의 딸,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 10달간 머물렀던 자궁의 주인이자 우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바로 여성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여성에 대한 표현들이 어떤 정신병자에 의한 오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유명한 철학자와 신학자(모두 남성이다), 각각 이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한 여성에 대한 이해였다. 누군가는 세 위인 모두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며 적당히 이해해보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질없는 시도다. 대표적인 종교개혁자였던 마르틴 루터조차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 이후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았고, 또 다른 종교개혁가 존 칼빈도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신의 창조 질서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굳이 수 세기 전에 이미 사라진 위인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펴보면 그 어디나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와 남성 위주로 된 문화 시스템들이 마치 물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소위 ‘자연스럽다’고 하는 많은 법과 규범, 질서와 체제, 그리고 문화를 바라보는 눈이, 사실은 색안경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착용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 색안경이 우리 눈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전혀 이상함을 못 느낄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 숨 쉬듯 자연스러운 가부장적인 제도에 노출되는 우리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와 배제, 차별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우리 눈에 부착된 색안경을 인지하고 뜯어내는 작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이 시대의 키워드를 통해서 말이다.

 

강남순 교수의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나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나 강연 등을 부끄럽게도 여태껏 직접 접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무리가 없는 수준의 책이다. 이 책에는 페미니즘의 간략한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가중시키고 대중화시켜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각인이 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가 페미니즘과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다층적이고도 심층적인 대답을 찬찬히 해나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의외의 상황 파악에 섬뜩할 정도로 놀란 부분이 있다. 가부장주의적인 교육과 가치관의 내면화가 견고해질 대로 견고해져 급기야 일종의 카르텔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익숙해진 존재에는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여성 스스로도 자신의 해방을 위한 페미니즘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지도자를 선택할 때도 여성보다는 남성을 더 지지하고 신뢰하게 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대부분 피해자의 위치에 놓였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해방보다는, 비록 남성 의존적이고 불합리하고 불의하더라도 그 상황이 가져다주는 모종의 안정감에 길들여져 버려 그 상황을 지속하길 원하게 되는,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난 이 부분에서 최근에 읽었던 모세오경 중 민수기 편이 생각났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에게 억눌렸던 노예 체제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하기보다, 광야생활 중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기만 하면 차라리 그 노예 시절이 더 나았다고, 차라리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상황과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인된 노예근성이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오랫동안 이어져온 가부장주의적인 사회체제 속에서 여성들에게 각인된 억압 근성이 여성 평등을 넘어 성, 인종, 사회적 계층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발전에 의외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천부인권설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가 오히려 여성 혐오, 배제, 차별을 합리화시켜 버리고 남성우월주의를 마치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것처럼 만들어버린 인간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으로서 나도 수치를 느낀다. 먼 과거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성 차별은 존 파이퍼 같은 유명한 목사들에 의해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왕성하게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재미난 사실은, 이렇게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여성을 차별하는 기독교 리더들도 자신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서의 근거는 그 자신이나 그가 속하고 자라온 교단이나 전통이 부여한 편향적인 해석에 불과할 뿐 하나님이 직접 지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해석을 진리로 착각하고, 또 전통성이 그것을 진리로 만들어줄 것처럼 여기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분명 반성과 회개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교적 남성 우월주의가 진하게 묻어있는 기독교에 마음과 생각이 물들어있을 것이므로, 이 책을 꼭 한 번쯤은 읽어보길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본인이 은연중 가지고 있을, 여성이 '자연스럽게' 배제된 기독교 신앙이 과연 진정한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과감하게 던져보길 바란다. 강남순 교수도 지적했듯,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양립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선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생각해야 비로소 본 질문에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영점 위치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페미니즘이 어떻게 생성되고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배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용도로도 읽힐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눈과 일체가 되어버린 가부장적인 색안경의 실체를 인지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찰해보며 스스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조금이라도 수정이 가하면서 읽을 때, 아마도 이 책의 저자, 강남순 교수의 목적과 바람이 절반 정도는 성취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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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아담의 역사성 논쟁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존중과 배려로 다름의 향연을

아담의 역사성 논쟁 | 데니스 O. 라무뤼 외 | 새물결플러스 | 2015

 

김영웅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이나 갈등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인류의 기원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자연스럽게 아담이란 존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자칫 발칙하거나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 의문은 기존에 아무 의심 없이 가지고 있었던 우리들의 믿음과 확신을 재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인류의 기원이 기록되어 있다고 보는 창세기 앞부분을 무언가 놓친 게 있나 스스로 반신반의하며 수없이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그 부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직접 능동적으로 찾아보기도 합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 순간이 기존 교회 안에서 담을 수 없었던 기독교 영역을 처음으로 접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늘 수동적인 자세로 목사를 통한 성경 해석을 주입 받아왔던 분이라면, 아마 이때가 처음으로 교회 안에서 말해주지 않거나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이슈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세상에는 정말 다양하고 다채로운 성경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유일한 진리처럼 믿어왔던 지식이 그저 다양한 해석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더욱 커다란 기독교 세계를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평안히 잠자고만 있던 자신의 신앙이 안일하고 편협했으며, 순수하다고 믿었으나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아담의 의미를 인류의 기원 측면에서만 고민하다가 멈추게 된다면 (물론 이런 고민은 블랙홀과 같아서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멘탈은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채 오히려 전에 없던 활기찬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다행인지도 모르죠) 이러한 고민이 보통 인류의 기원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에게도, 바울에게 그랬듯, 구약 성경만 있었다면 적어도 멘탈이 붕괴되는 고민까진 직면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창세기가 포함된 구약만 있는 게 아니라 신약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예수만 있는 게 아니라 바울도 있습니다. 또한 원죄 개념을 강력히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예정론을 언급한 칼빈도 우리에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는 장로교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 중 단 1% 정도가 장로교라고 하는데 말이지요 (그 중의 절반이 한국에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팩트체크 필요하겠지만요). 이러한 불행 (다행?)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편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조성했으며, 급기야 이는 누군가에겐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골치거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골치거리의 근원은 아담과 예수를 연결시킨 바울의 언급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한 사람’에 대한 부분은 첫 번째 아담 뿐만이 아닌 두 번째 아담이라고 알려진 (실제 “두 번째 아담”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단, “두 번째 사람”이라는 말이 고린도전서 15:47에 나옵니다. 아담이란 뜻이 사람이기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이긴 합니다) 예수의 존재 이유까지도 재고하게 만듭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기원과 그 해결책에 관한 부분이지요 (각각이 아담과 예수를 대변합니다). 이로써 우린 마침내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건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무방비 상태로 돌연히 노출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의미를 인류의 기원 문제와 연결시키다가 얼떨결에 시작된 블랙홀의 끝이 예수의 대속을 향하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특히,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성경 전체를 해석해내는 방법에 익숙한, 복음주의권 (그 중에서도 칼빈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 장로교)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으며 개인의 신앙과 믿음을 구축했던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 아담으로 인한 원죄사건과 그 결과로 인한 인간의 타락, 죄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의 태어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한 구속, 즉 창조-타락-구속의 플롯이 모든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아담의 존재 유무는 자칫 기독교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위험인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복음주의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원죄개념과 죄의 전가를 핵심교리로 여기지 않는 기독교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아담의 역사성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가지지 않겠지요. 그래서 이 글에서 '우리'란 한국 장로교를 포함한 창조-타락-구속 플롯을 받아들이는 복음주의권에 속한 기독교인을 지칭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른 것 같은 참담한 멘붕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린 과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책은 이러한 질문을 이미 던져보고, 그로 인해 인생을 건 치열한 고민을 거쳐 정립된 네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의 입장을 보여줍니다(각 입장을 대표하는 네 명의 학자들은 모두 복음주의자들입니다). 과연 아담은 실제 역사적 인물일까요, 아님 어떤 상징을 나타내기 위한 고대 근동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상 속 인물일까요? 아담은 과연 첫 번째 사람이자 인류의 조상일까요, 아니면 죄가 세상에 들어온 시점의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에 불과할까요? 아담은 과연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그렇듯, 정자와 난자의 수정에 의해 태어난 게 아니라, 정말 초자연적인 방법, 즉 흙으로 빚어지고 유아 단계를 건너뛴 채 곧장 성인으로 만들어졌던 것일까요(de novo creation)?


물론 성경 본문은 이런 질문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혹은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 어떠한 대답도 명확히 내놓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그저 여러 단편적인 성경 구절들과 고대 근동 지역의 과학과 세계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성경 해석과 신앙고백, 그리고 기독교 교리 등에 의거하여 추측할 뿐입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각 시대에 관점들은 모두 정치적이고 어쩌면 폭력적일 수도 있었을 힘의 영향 아래에서 정립되었다는 사실도 우린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이 책 역시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대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력하게 호소하지만, 그 어떤 입장의 해석도 참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결코 한 입장만을 옹호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빨려 들어갈 정도로 탄탄한 논리를 가진 입장이라 해도 해석은 해석일 뿐, 결코 그것이 진리의 자리를 꿰차진 못합니다. 저는 어떠한 해석을 받아들이든 본인의 신앙이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어떠한 입장을 가진다 하더라도 어느 부분에선가는 논리의 모순이나 비약을 감행하거나 무시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입장을 비하하거나 혐오하거나 배제하며 싸움질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밑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네 가지의 입장을 조화롭게 수평적인 관계에서 다루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한 입장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다름이 다름으로 존재할 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단, 어떤 한 입장이 내세우는 힘의 논리에 의해서 다름이 틀림이나 혹은 악으로 규정되고 제거 대상으로 발전하게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자신이 열심히 연구해온 입장을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의 네 가지 해석 모두 논리적 완전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거기엔 자신의 시간과 열정, 다시 말해 자신의 인생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자의 입장이 조목조목 반박되어질 때면 자신의 자아가 마치 부인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감정 섞인 논쟁의 장면을 볼 때면 솔직히 제 삼자이자 독자에 불과한 저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났을 정도였답니다. 이미 논리의 영역을 이탈하여 오감을 가진 인간으로서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책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논쟁도 그 표면상의 이유는 논리와 근거 부족이지만, 사실 그 이면엔 그것들보다 더 큰 문제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자아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논쟁에서 이성만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감정이 섞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논리로 시작, 진행, 결론지어져야 했을 논쟁이 결국엔 비논리를 불러오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건 결국 그들도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대표하는 배릭 교수 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세 학자의 입장에서도 전적인 동의가 되어지진 않았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진화적 창조론'의 대표인 라무뤼 교수의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부분에서, 저는 그의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왜 굳이 역사적 아담이 존재하지 않았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월튼 교수의 '원형적 창조론'에서는 '이것이 맞지만 저것도 틀린 건 아니다'라는 모호한 논리에 그만의 확실한 색깔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굳이 역사적 아담이 존재해야만 하는가?'하는 질문에서 명징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콜린스 교수의 '오랜 지구 창조론'의 입장에서는 '왜 굳이 유신 진화론을 거부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저는 끝내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네 가지 입장과 그들의 논쟁을 모두 지켜본 전직 교수이자 현직 목회자인 그레고리 A. 보이드 목사의 입장이 저로선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역사적 아담이 있든 없든, 우리의 믿음은 안전하다' 라고 압축할 수 있는 그의 입장에서 저는 존중과 배려가 깃든 예수의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린 어느 한 입장을 고르고 그 입장을 변호하는 투사가 되어야만 할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 입장이 연구를 할 필요도 없다거나, 다른 입장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름에 열린 자세를 가지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 길은 결국 교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름을 다름으로 존중해 주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한 입장의 더 탄탄한 논리를 구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놓쳐왔던 건 어쩌면 그런 자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진 각 입장이 서로의 논리적 결함을 찾아 비방하기도 하고 자신의 입장이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하는 단계에 있지만, 언젠가는 다른 해석들이 모두 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채 어떤 입장을 취하든 전적인 개인의 자유에 맡기고 혐오와 배제 대신 존중과 배려의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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