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도 질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존재했는가 | C. 존 콜린스 | 김광만 역 | 새물결플러스 | 2019

 

최승주 (과신대 정회원)

 

 

이 책은 교회 역사 대부분에 걸쳐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왔던 창세기의 등장인물과 존재들-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생명을 알게 하는 나무 등-에 대해서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진짜 존재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소개한다. 책을 지은 C. 존 콜린스는 구약학 교수답게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대할 때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읽는 것을 조심하면서도 동시에 역사적 핵심을 발견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구약의 본문들뿐만 아니라 신약 그리고 구약을 읽는 또 하나의 방식인 외경의 본문들, 그리고 질문에 대한 여러 신학자의 입장을 친절하게 나열하면서 소개한다.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성서에서 아담과 하와를 다루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의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설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1. 책 내용 및 주요 포인트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 중 나에게 훅 들어온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 보았다.

 

1)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 대한 신학자들의 여러 의견이 있다.

 

만약 이 책을 3~4년 전에 접했다면 ‘맙소사’, ‘말도 안돼’, ‘저자는 이단 아닌가?’ 등등의 생각을 먼저 했을 것 같다. 다행히(??) 몇 해 전 과신대를 알게 되면서 미시적 수준의 지각변동을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터라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수긍이 갔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관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이다(59p). 그렇다면 왜 한국 교회 안에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한 나는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합동측 교단에서 조신(??)하게 자라서 질문하거나 토를 다는 것이 불신앙으로 비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어서이거나, 아니면 내가 성장하던 당시에는 이런 신학적 논의가 지금보다는 덜 활발해서였을 수도 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의미하는 바는?

 

주일학교에서 배우기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의 눈코입을 진흙으로 붙여 주셨다고 했다. 저자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담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실존성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 실재성을 옹호하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담긴 고통과 고난의 문제라고 주장한다(76p). 이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빌리자면 “학자들의 노력이 그런 질문들을 공평하게 다루는 데 실패했다”라고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눈코입을 닮았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성화에서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인간을 위해 오실 거고 온 인류가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데 확인된 우주의 크기만 해도 138억 광년만큼 큰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꼭 지구에 오실까? 꼭 인간에게만 오실까? 그럴 리 없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여기에서는 외현적)을 닮아 특별하다는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제한하는 생각일 수 있겠다.

 

3) 창세기와 과학의 조화? 일치주의는 주의할 것

 

역시나 대부분의 교회 역사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의 과정, 아담 가족이 살았던 시대 등을 과학적(또는 역사적) 설명과 일치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이러한 시도는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전도의 전략으로 사용되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소개하면서 일치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이에 즉각 반대하는 반일치주의도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나리오를 살피는 것이 여러 가지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결코 성서의 주요 스토리라인을 깨는 일이 아님을 알려준다.

 

 

2. 그래도 남는 질문?

 

1) 어디까지가 내러티브이고, 누가 정하는가?

 

창 1~11장은 그렇다 하자. 12장에서 등장하는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복으로 부르신 사건은 신화라고는 볼 수 없을까? 새로운 아담인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라는데(69p)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노아의 홍수는 상징적, 비유적 표현일까 역사적 사실일까?

 

2) 관습적으로 사용했던 복음에 대한 설명이 흔들리는 건 아닐까?

 

기독교는 오랫동안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관습적으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죄는 언제 들어왔을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고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믿어 왔는데, 이것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죄는 언제 들어왔을까? 인간에게 죄의 DNA가 작동할 가능성이 있도록 창조 때 이미 허가를 내주신 걸까? 저자 역시 “뱀의 말로써 표현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어떻게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죄로 인한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것도 포함하는 것이라면 역사적 시점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3) 책의 마지막 결론-슬퍼하는 법

 

한 권의 책에서 가장 궁금한 부분은 저자가 아담과 하와가 실존했을까에 대한 논문을 맺는 방식이다. 저자의 결론은 ‘슬퍼하는 법’이라는 세 페이지에 담겨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화를 소개하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담겨 있고, 죽음이라는 침입자를 추방하시고 회복과 최종적인 복을 주신다는 확신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 위로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월호 사건, 하나님을 잘 믿는 친구의 과로사,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구의 암으로 인한 죽음... 물론 하나님은 나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실 필요는 없을 테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그 질문에 답을 캐기보다 죽음 앞에 함께 슬퍼하고,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찌글어짐에 함께 애통해하는 것일 뿐이다.

 

 

3. 나에게 과신대란 무엇인가?

 

서평을 마무리하며 나에게 과신대가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과신대를 만나면서 나는 자유함을 얻었다. 궁금해 하고 질문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그리고 질문해야 하는구나... 과신대를 통해 과학자도 신학자도 아닌 내가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를 풀고 있는 중이다.

 

25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손에 합동측 목사이신 아버지가 “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라는 책을 쥐어 주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과학으로도 증명된다는 근사한(??) 사실을 딸에게 알려주고 싶었을거다. (나라도..) 그래서 나는 창조하신 세계를 들여다보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 생물학도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한국교회는 젊은지구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회에게 많은 기회를 주던 때, 믿음이 좋은(??) 나는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우면서도 이는 시험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주문을 외웠다. 결국 이원론적인 전략을 취한 나는 내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펜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과신대를 만나며 드는 생각은 지금이라도 질문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또한 세 자녀를 기독대안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로서 아직도 한국교회와 기독학교에 남아있는 일치주의에 대한 문제를 꾸준히 지적하고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지면을 빌어 과신대와 우종학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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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2. "이산화탄소" 도대체 누구냐, 넌?

  • 지구온난화가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고 저도 처음 접했을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게 벌써 20년도 더 된 기억인데 그 이후 우리가 얼마만큼 노력하고 인지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요즘 작은 실천이지만 플라스틱 줄이기 운동의 하니인 텀블러나 개인컵 사용은 많이 보급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며 계속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좋은글 응원합니다~

    김현호 2019.10.28 23:05
    • 댓글 감사합니다. 저희 과신대에서도 소소하지만 의미있는 실천을 하나씩 만들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산화탄소" 도대체 누구냐, 넌?

 

김진수 (에딘버러대학교 지구과학부 박사 후 연구원)

 

 

이산화탄소.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많이들 들어보셨겠지만, 막상 어떠한 원리로 어떻게 지구온난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번 순서에서는 이산화탄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0.04% 이산화탄소

 

이산화탄소(CO2)는 용어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탄소 원자(C) 하나에 산소 원자 2개 (O2)가 결합한 화학물질입니다. 전 지구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평균 농도는 약 400ppm인데, ppm(parts per million)은 전체 양 중 100만 분의 몇을 차지하는가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위입니다. 즉, 100만 분의 400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에게 익숙한 %로 표현하자면 0.04%입니다. 전체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0.04%. 매우 작은 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양을 무게로 환산해보면 약 850기가톤 (기가톤 = 10억 톤)이나 됩니다.

 

 

비닐하우스와 이불의 원리

 

0.04%의 이산화탄소가 도대체 공기 중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이산화탄소는 대표적인 온실가스 (greenhouse gas)라고 알려졌습니다. 온실 또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비닐하우스에서는 별다른 장치 없이 투명한 비닐 막 하나로 내부 온도를 효과적으로 올려서 각종 채소를 재배할 수 있습니다. 비닐은 태양 빛(가시광선)을 투과시켜 내부까지 잘 들어오게 해 주지만, 실온에서 모든 물건이 내는 적외선 영역에서는 불투명해서 나가는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잡아주게 됩니다. 즉 들어오는 에너지에 비해 나가는 에너지는 적어서 내부 온도를 높이게 해줍니다. 온실가스는 이러한 원리로 지구 대류권 대기의 온도를 높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이불에 들어가서 잠시 있다 보면 점점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불 자체가 따뜻해서가 아니라 (이불 자체가 처음부터 온도가 높았던 것이 아니라) 이불을 덮고 있는 우리의 체온이 이불 안에 갇혀있는 공기를 데우는 것입니다. 이불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더 따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실가스도 이불의 원리와 같습니다. 대류권에서 만들어지는 적외선이 곧장 우주로 나간다면 온실효과가 없겠지만, 나가던 적외선이 온실가스와 반응하여 일부가 우주로 가지 못하고 대류권을 데우는 효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18세기 산업혁명 이전에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280ppm이었는데, 현재는 400ppm이니까 약 43% 늘어났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매년 2ppm (43억 톤)씩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추세는 인류활동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화석연료(석유, 석탄) 사용과 토지사용 변화(숲을 농업 또는 다른 용도로 변환)가 대표적인 원인입니다.

 

 

위의 그래프는 지난 80만 년의 이산화탄소 기록입니다. 남극에 매년 눈이 쌓일 때 그 당시의 공기를 머금고 쌓이게 되는데, 80만 년 동안 눈이 쌓인 곳을 찾아서 얼음 기둥을 시추하여 분석한 결과입니다. 80만 년 동안 가장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았던 시기의 기록은 300ppm 정도인데, 현재는 400ppm이 넘었습니다. 물론 자연적인 변동으로 적게는 200ppm, 많게는 300ppm 구간을 오르락내리락하였지만, 최근 관측된 400ppm이라는 숫자는 자연적인 변동으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해 보입니다. 즉, 인류 활동에 의한 이산화탄소 방출 때문에 최근 급격한 이산화탄소 농도 상승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1958년부터 최근까지 정확하게 관측한 이산화탄소 그래프입니다. 단 한 번도 감소한 적 없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월간 이산화탄소 농도를 나타내는 빨간 점들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변동하는 것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매년 5월경에 가장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고 9월경에 가장 낮은 계절적 변동이 매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북반구에 자리하고 있는 숲들이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배출하는 양의 일부는 흡수하고 있지만, 이산화탄소 농도의 뚜렷한 추세를 억제할 정도는 아니므로 여전히 매년 이산화탄소 농도는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류가 화석연료 사용과 토지사용 변화로 방출하고 있는 이산화탄소는 최근 10년 기준 매년 5ppm 이상입니다. 나머지 3ppm 정도는 해양과 육상의 식생(주로 숲)이 흡수하여 대기 중에는 약 2ppm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해양과 식생이 매년 3ppm 정도를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 극심한 지구온난화에 시달렸을지도 모릅니다.

 

기후 파업 등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인류는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전기 사용 및 난방 (25%), 토지사용 변화 (24%), 산업 (21%), 교통 (14%), 건축 (6%) 등에서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 칼을 대어 빨리 줄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편의를 포기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또는 경제적인 손해를 보면서까지 줄여야 한다는 데에 사람들이 동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는 느리기만 합니다.

 

계속 증가할 이산화탄소

 

특별한 제제가 없는 한 이산화탄소 배출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총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전 세계 7위, 인구당 배출량은 3위를 차지하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개인이 텀블러를 사용하고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사회 전반적인 구조적 변화 없이는 당장에 이산화탄소 배출을 혁신적으로 줄이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활동 때문에 43% 늘어난 이산화탄소와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지구의 기후가 변해왔지만 앞으로가 더 큰 문제입니다. 매년 2ppm씩 쌓이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언제까지나 해양과 식생이 3ppm씩 흡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연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해양과 식생이 어느 정도 저장고 역할을 하고 있지만, 기후변화 때문에 이산화탄소 흡수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과학자들은 양의 되먹임 (피드백) 작용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지구온난화 – 흡수 능력 상실 –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더 쌓임 – 더 쌓인 이산화탄소가 추가적인 지구온난화 야기> 이러한 형태로 결과가 다시 원인에 영향을 미쳐서 더 급진적인 지구온난화가 야기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산화탄소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편의를 제공합니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있습니다. 현재의 편의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기후변화나 수십 년 뒤에 일어날 지구온난화에 대한 위험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현재의 편의를 위해 고의적으로 망각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오늘날 예수님께 드린다면 어떤 대답을 듣게 될지 상상해봅니다. 자기 이기심과 욕망을 뛰어넘는 신앙과 이 세상 질서와는 매우 다른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것이 요구될 때, 지구온난화를 줄이기 위한 우리의 고민도 더욱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욕적으로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편의가 가져올 대가를 인지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대해서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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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그리스도인은 왜 진화적 창조를 고려해야 할까요?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그리스도인은 왜 진화적 창조를 고려해야 할까요?

Why should Christians consider evolutionary creation?

 

번역: 김영웅 / 감수: 박희주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 눅 10:27


진화는 성경적 믿음에 비추어 고려해야 할 도전적인 주제입니다. 그래서 종종 그 주제에 대한 의미 있는 토론을 하기보다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편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진화적 창조가 창조주와 우리의 관계 그리고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포함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유익을 준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모든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진화를 공부해야 합니다. 진화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공부입니다. 창조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전달하신 것에 대한 보완적인 계시이며, 하나님은 창조된 질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생명체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그의 영광과 존귀로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자연에서의 규칙적인 패턴은 하나님의 규칙적이고 신실하신 통치하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종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과학적으로 창조과정을 묘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중력법칙이 행성의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진화의 과학적 모델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둘째, 진화적 창조를 고려하는 것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믿음 안에서 제자화하는 것을 포함해 교회와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됩니다. 반진화적 태도는 과학을 추구하거나 믿음을 고수하는 것 사이에서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복음주의 교회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신뢰를 잃어버리는 주요 원인은 사실상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한 모든 증거와 모순되는 반진화적 창조 모델의 주장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진화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복음전도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피전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에 진화 과학을 거절해야만 한다고 듣게 된다면 말이지요. 반면 진화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과정으로 여기고 공부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이 무신론적 세계관을 낳는다는 주장에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화 과학이 하나님이 일하신 과정을 묘사한 것이고 (무신론을 증명하는) 어떤 하나의 세계관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적 진화 과학)을 과학의 일부가 아닌 세속적인 철학으로 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문화는 최신 의사소통 수단을 밝혀낸 새로운 생물의학적인 진보에서부터 기본입자에 대한 발견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기술로 가득 차 있기에,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과학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진화 과학은 현대 생물학에 필수적이기에 교회가 공적 영역에서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진화의 증거와 그것이 지닌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씨름해야만 합니다. 기독교가 이런 논의를 잘 알고 있다면, 줄기세포에 대한 논의라든가 태아, 노인, 장애인을 돌볼 때 DNA 정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이슈와 같은 생명윤리적 토론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최첨단 연구에 전폭적으로 참여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괴롭히기보다는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과학을 지지함으로서, 우리가 창조 질서 속 하나님의 역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통해 창조 질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일을 통해 창조주를 증거하고 창조주를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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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판교 북클럽 7월 모임 후기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북클럽]

 

| 강사은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일시 : 2019년 7월 19일(금) 오후 7시
장소 : 성공회 분당교회(https://www.skhbundang.or.kr/)
책 : 피터앤즈의 ‘성경 영감설’

 

 

— 굽먹이냐 삶먹이냐.

 

부먹/찍먹보다 더 유서 깊은 논쟁이 성서 번역에서의 굽먹/삶먹 논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유월절에 관한 율법에서 (히브리어 원문 상)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는 ‘구워’ 먹을 것을, 신명기, 역대하에서는 ‘삶아’ 먹을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런 다양성이 NIV에서 ‘구워’ 먹는 것으로 통일된 것은 그 나름의 ‘번역철학’에 기인한 것이었군요.

 

“출 12:12-13(“...그 고기를….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와 신 16:5-7(“... 그 고기를 구워먹고…”)에서 출애굽기의 강조점은 아주 분명하지만 신명기의 경우 히브리어 원문에서 ‘삶아서[베잇-쉰-라멛] 먹고’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NIV 신명기의 구절이 ‘삶다’의 의미가 아니라 ‘굽다’의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르지만 NIV가 이렇게 다룬 이유는 동일한 법이 서로 모순되게 진술되었을 리가 없다는 성경관에 근거한 ‘번역철학’을 반영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언어적 사실을 숨겨서는 안된다. 대하 35:13절도 ‘삶아’인데 NIV는 ‘굽고’로 번역되었다.”(pp. 127-128 요약)

 

뭐 그렇다고 저자 피터앤즈가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강조를 하지는 않습니다. 원어를 공부하면 뭐하겠습니까? 번역을 하겠지요. “번역은 반역이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저는 이 말 보다는 “번역은 창작이다”를 더 좋아하긴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된 인간의 책 성서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66권 정경이 완성된 것은 약 4세기경입니다. 확정된 성서 목록은 367년 아타나시우스 서간에 처음으로 등장하죠. 성서가 ‘하나님의 책’이라고 강조되었던 비중에 비해 ‘인간의 책’이라는 점은 거의 강조되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요. 지난 150년간 고대 근동 문헌들의 발견은 성서를 새로 보게 합니다. 저자는 “성서는 역사적 산물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둘은 한쪽만 선택할 수 있거나 충돌되는 사실이 아니며 이에 대한 성육신 유비를 통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은 정경 형성사에서 보듯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인정한 전통을 따르기 때문이죠. 성서는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전 인류에게도 가치있는 고전이겠습니다.

 

— 오늘날 우리에게 구약은, 성서는

 

다신교적 환경에서 이스라엘을 이끈 신은 제국의 신이 아닌 사회적 약자인 노예들의 신이었습니다. 인간을 노예가 아닌 존귀한 자로,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여긴 것은 당시 사회상에서는 아주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성서가 쓰여진 시대의 메시지가 그러할진대 노예 제도의 정당성 제공을 위해, 여성 인권 차별의 근거와 성소수자를 배제하기 위한 용도로 성서가 이용되는 것을 정경 66권이 이미 완성되고 인쇄술과 휴대용 전자기기의 발달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시대에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구약성경의 권위 혹은 규범성에 대해 숙고할 때 성경의 성육신적 차원을 떼어놓아서는 안된다. 구약성경은 우리가 따라야 할 규칙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성경의 성육신적 요소는 오늘까지 지속된다. 각 세대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 세대가 살고 있는 세계와 복음이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고민하면서 복음의 메시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 ‘무대 뒤의 하나님’

 

구약성서 안의 제각기 다른 하나님에 대한 묘사들은 다양한 색깔과 질감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초상화를 이루는 것과도 같은데요. 한편, 인간의 책이기도 한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과 ‘무대 뒤의 하나님’ 즉 실재의 하나님에 대한 구분된 이해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 성서를 가까이 하는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교만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겠습니다.

 

— 작은 소회

 

이번 모임에서 어떤 분은 삶은 옥수수로 입맛을 돋궈 주셔서, 어떤 분은 미국 출장 후 집에 짐만 풀어 놓고 바로 참석해 주셔서 감동이었습니다. 먹거리를 장만하고 챙기는 것, 출장으로 피곤한 몸으로 참석하는 것 모두 만만치 않은 일인데 말이죠. ^^

 

— 다음 모임 안내

 

다음 모임은 8월 23일(금) 저녁 7:30분에 피터 앤즈의 ‘성서 영감설’ 4장~끝까지 함께 읽고 토론하게 됩니다.
분당/판교 지역에서 정기/비정기적으로 참석하실 분을 언제든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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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바이오로고스는 진화주의, 지적설계, 창조론과 어떻게 다른가요?

  • 좀 심한 오역이 보이네요.

    번역 내용 중에,
    "진화적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론, 오랜 지구 창조론과는 달리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은 명백하게 기독교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지적설계론은 우주의 지적 원인과 생명 발달의 존재가 시험할 수 있는 과학적 가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부분은 원문에
    "In contrast to EC, YEC, and OEC, Intelligent Design (ID) does not explicitly align itself with Christianity. It claims that the existence of an intelligent cause of the universe and of the development of life is a testable scientific hypothesis." 에 해당하는 영역인데요.

    블래즈 2019.08.08 21:43
  • 이건 제대로 번역하면,

    "명백하게 기독교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 "명시적으로 기독교를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가 되어야하고,

    "우주의 지적 원인과 생명 발달의 존재가" => 우주와 생명발달에 있어서 지적인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 되어야합니다.

    특히 첫번째는 좀 악의적으로 비칠 수 있는 오역인데요... 다른 입장에 대한 소개라고 하더라도 성실하게 번역하고 감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블래즈 2019.08.08 21:52
    •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 실수가 보이네요. 편집부 측에서 말씀해주신대로 수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악의는 전혀 없었습니다. 저의 미숙한 점 때문입니다.

      김영웅 2019.08.12 01:08 DEL
    • 그리고 자기소개를 해주시면 앞으로 과신대 관련 글 번역도 담당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전 완전 처음이라 실수 투성이일 게 분명하거든요. 그런데 댓글 다신 거 보니까 저보다 잘 하실 것 같아요.

      김영웅 2019.08.12 10:24 DEL
  • 귀한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번역 상에 실수나 잘못된 부분은 조금씩 수정해서 더 좋은 번역으로 만들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조언과 지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08.14 11:47 신고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바이오로고스는 진화주의, 지적설계, 창조론과 어떻게 다른가요?

How is BioLogos different from Evolutionism, Intelligent Design, and Creationism?

 

번역: 김영웅 / 감수: 박희주

 

 

바이오로고스는 기원에 대해서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확고히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임을 분명히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땅에서 생명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셨는지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설명으로 진화과학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받아들이지만, 공개 토론에서 번번히 생물학적 진화를 수용한다고 하는 무신론적 세계관, 즉 진화주의(Evolutionism)는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진화주의는 일종의 과학주의로써 모든 실재는 원칙적으로 과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바이오로고스는 과학이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것에 제한되어 있다고 믿으며, 기적과도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 역시 실재의 일부라고 믿습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충실하게 읽는다면, 6천 년에서 1만 년 사이의 나이를 가진 젊은 지구를 받아들일 거라고 합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은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와 공통조상을 공유한다고 보는 견해와 성서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진화가 기독교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지구 창조론(Old Earth Creationism)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46억 년)와 우주의 나이(137억 년)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는 확고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6일간의 창조가 실제로는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는 전형적인 주장입니다. 오랜 지구 창조론은 모든 생명 형태의 공통조상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종종 생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에 새로운 종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창조하셨다는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을 받아들입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공통조상이나 진화를 배제할 경우, 현대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의 과학적 증거들을 거의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이 쓰인 문화적, 신학적 맥락이 창조 이야기에 대한 최선의 해석으로 이끄는 결정적 열쇠라고 믿습니다.

 

진화적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론, 오랜 지구 창조론과는 달리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은 명백하게 기독교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지적설계론은 우주의 지적 원인과 생명 발달의 존재가 시험할 수 있는 과학적 가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지적설계론 논쟁은 종종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과학 이론 중 일부를 지적하면서 지적설계자의 직접적인 행동에 호소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우리의 지적인 하나님이 우주를 설계하셨다고 믿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자연현상을 관장하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 추구를 포기해야 할 과학적이거나 성경적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학적 설명이 우주의 설계자, 창조자 및 유지자로서의 하나님이 하신 역할과 같은 강력한 신학적 이해를 보완해준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구의 나이와 진화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는 모두 합의를 보고 있습니다. 바로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으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온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우리가 DNA의 복잡성이나 돌고래의 아름다움, 아니면 은하수의 광대함을 상상할지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만드신 신성한 예술가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 중심을 높여 함께 찬양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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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청소년 캠프를 마치며

 

7월 20일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을 졸이며 캠프를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비는 조금만 내려서

캠프를 진행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이번 캠프는 지난겨울 캠프보다

등록인원이 적어서 살짝 걱정을 했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셔서

알차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김정형 목사님의 설교와 기도로

캠프의 공식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다들 오늘 어떤 것을 배우고  경험하게 될지

기대에 찬 모습이네요.

 

 

 1교시는 "갈릴레이, 다시 법정에 서다"라는 수업입니다.

천동설과 지동설 사이의 갈등에서

갈릴레이는 어떻게 과학과 신앙의 갈등을

해결했는지 배웠습니다. 

 

학생들이 직접 피고측 변호인과 원고측 변호인이 되어

갈릴레이의 입장과 교회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판결이 나왔을지 궁금하네요.

 

 

학생들이 1교시 수업을 들을 동안

선생님들은 김정형 교수님의 특강을 들었습니다. 

창조설과 창조론의 차이을 배우고

다양한 창조론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창조신앙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네요.

 

 

2교시 수업은 "잃어버린 화석을 찾아서"였습니다. 

중간 화석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와

어떻게 중간화석을 발견할 수 있는지 배웠습니다. 

 

그리고 직접 손가락 화석을 만드는 실험도 해봤습니다.

몰드와 캐스트, 기억하시나요?

 

 

마지막 3교시에는 백우인 목사님께서

성경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성경은 Why?를 말해주고

과학은 How?를 말해준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네요.

 

이렇게 제2회 과신대 청소년 캠프가 끝났습니다. 

너무 짧아서 아쉬웠는데,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선생님도 더 이야기 나누고 더 놀고 싶은데

너무 금방 끝나 아쉬웠습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다음에 또 만나요~^^

 

모두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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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호모 사피엔스의 귓속말

인간의 타락과 진화 | 윌리엄 T. 카바노프, 제임스 K. A. 스미스 편집| 새물결플러스 | 2019

 

심기주 (과신대 기자단)

 

 

성령이 인도하는 신학적 상상력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열 명의 학자들이 ‘인간이, 인간이 아닌 영장류로부터 출현했다면 이는 인간의 기원과 죄의 기원을 포함한 기독교 신학의 기원에 관한 전통적 설명과 관련해서 어떤 함의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모인 결과이다.

 

이 책이 단순히 기고문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이 학자들이 3년동안 같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또 우정을 나누며 공동체로서 토론해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교회의 한 모습 같달까? 사실 요즘 들어 공동체의 필요성은 많이 느끼는데 비해 예배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이 책에서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신학적 작업은 신실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예배가 필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꽂혔다. ‘우리의 상상력의 근육을 훈련시키고 늘리려면 시간, 즉 쟁점들과 기회들에 대해 심사숙고할 시간, 경청하고 묵상할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실한 상상력을 기르는 데는 성경 이야기의 운율로 상상력에 세례를 베푸는 일이 필요하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목표다.’ (20쪽)

 

즉, 예배에 녹아 있는 성경 이야기로부터 하나님의 영감을 얻고 신학적 상상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집필한 신학자들의 공동체인 ‘골로새 포럼’은 예전적인 예배를 신학적 상상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꼽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전통을 계승하며 신학적 상상력으로 균형을 잡는 모습이 가장 매력적이면서 좋은 부분이었다.

 

전통에 충실한 확장

 

여지껏 과신대에서 인터뷰하고 콜로퀴움에 오셨던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조언해주신 것은 “신학이 과학의 연구결과를 신학화하는 데만 신경 쓰느라 신학 본연의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신학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간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실 여러 글들을 보며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 과학에 맞춰 해석을 계속하는 것은 뭔가 끼워 맞추기 식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서론에서 말하는 매킨타이어의 전통에 대한 정의는 내 고민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전통은 특정한 근본적 동의가 정의되고 재정의되는 주장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되는 주장이다.”

 

이 다음에 나오는 전통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전통’은 성경에 의해 촉진되고 기독교 예배 의식 속에 담겨 있으며 초교파적 신조(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등)로 표현된 보편 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가리킨다. 이는 이미 전통 내부에 표현, 확장, 수정이라는 확대되고 있는 층위들을 지닌 살아 있는 전통(25쪽)’이라는 것이다.’ 전통은 정적이며 고정되어 있어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기독교 전통은 그 속에 역동적인 ‘역사’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 책에서는 전통의 방향성에 충실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확장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 점이 나는 흥미로웠다. 아!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창의적이면서도 깊은 고민과 대화가 가능하다니! 나의 신앙의 길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어떤 움직임이 “전통에 충실한 확장”인지 아니면 전통과는 무관한 것인지를 분별하면서 나아갈 때, 전통은 그저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숨 쉬고 나와 교감하는 유기체가 되는 것이다.

 

 

아담과 호모 사피엔스

 

그렇다. 내가 처음에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돌이켜 보면 원래 나는 성경을 접할 때, 말씀 묵상을 할 때, 그것들이 현실에 잘 와 닿지 않았다. 성경 속의 인물들은 그저 수 천년 전에 있었던 많이 들어봐서 친숙한 외국인들이고, 성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2D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스파이더맨 영화와 오히려 비슷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것은 단지 모든 인류의 책임과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답답하게 하는 요소일 뿐이었지 딱히 내게 와 닿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면서 창세기를 쓴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용의 각각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다각도로 알게 될 때, 창세기는 내게 4D 영화, 아니 ‘실재’로 다가왔다. 아담은 단지 모든 인류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용도가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아담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우리에게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는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가인이 “선을 행할” 수 있고, “죄가 문에 도사리고 앉아” 있을지라도 그가 “죄를” 반드시 잘 다스려야만 한다(창 4: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셨던 말씀은 죄(창세기에서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예)는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인간은 (최소한 처음에는) 죄에 맞서 싸울 수 있다.(187쪽)’

 

특히 아담에서 가인, 라멕을 거쳐 죄가 불덩이처럼 늘어나는 것을 묘사하는 창세기 6장까지, 창세기는 죄가 점점 발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처드 미들턴은 창세기에서 진술한 것처럼 죄가 발달한다는 관점은 초기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서 도덕적인 악이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도덕적, 종교적 의식이 발달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간들은 자신의 양심이 '폭력적인 행동을 금하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충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충고를 무시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치론적인 해석을 피하면서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것은 판넨베르크의 논리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넨베르크는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는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 중간지대로서의 철학을 매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윌리엄 브라운은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 우선, 구약 본문을 '설명'하고, 해당 본문의 신학적 주제를 가지고 과학으로 온다. 그리고 이 주제를, 과학을 통해 세계를 볼 때 관련 있을 법한 측면들과 관련지어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에서 얻은 통찰을 가지고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온다.(147쪽)

 

즉, 어떤 면에서는 각각의 주제를 뽑아 과학과 신학을 넘나 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중간지대를 활용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담과 원죄’, 그리고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도덕적, 종교적 의식 발달’의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것도 이런 중간지대를 거치고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는 원죄 뿐만 아니라, 타락, 죽음 등 다양한 전통과 관련된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신학과 과학의 대화 방식인 것 같다. 이를 활용할 때도, “전통에 충실한 확장”이 또 가능하지 않을까? 전통에 충실하면서, 즉, 기독교의 본질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 사회를 무시하지 않고 현실적인 대안과 조언을 제시해줄 수 있는 기독교의 역동성을 기대해본다.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 4:7b)”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죄의 유혹을 다스리라고 주님이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죄의 발달과정을 곱씹으며 죄에서 떠나라고 외치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posted by 과신대 기자단

부천북클럽 <신 인간 과학> 2부 생명

 

글_ 최경환

 

박영식 교수님 연구실에서 <신 인간 과학> 2부 “생명”을 함께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맘 편히 이야기하며 질문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함께 나눈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올립니다.

 

1. 신학은 항상 '성서 적합성'과 '현실 적합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과 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명’을 같은 수준에서 생각해야 하는가? 부활은 생물학적 죽음의 극복인가? 예수는 생명을 주러 왔다고 했을 때, 그건 생물학적 생명을 말하는 건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건 또 뭔가?

 

3. 우리는 흔히 창조라고 하면,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있는 것 중에서 뭔가를 나누기도 하고, 분류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둠'을 만드셨는가? 하나님이 '물'을 만드셨는가? 아니다. 있는 것 중에서 가르고, 나누고, 모으시면서 창조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해해야 하나님의 창조를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있은 것 중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막고, 보호하는 것도 창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창조에 대해서 은연중에 어떤 선입견을 갖기고 있는 것 같다.

 

4. 즉각적 섭리가 아니라 시간적이고 매개적인 섭리로 이해해야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초등학생에게 엄청난 지식을 집어 넣을 때, 그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질병을 갑자기(순식간에) 치료한다고 했을 때, 과연 몸에 어떤 무리가 생기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오랜 역사를 통해서 진화를 일으키시고 느리게 창조하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 우주의 진화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담아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신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치유 활동을 하시는데, 우리 생각으로는 뭔가 빨리 진행되면 좋겠지만, 오히려 그게 병일 수도 있다.

 

5. '하나님에게는 우연이 없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늘날 물리 세계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다. 어쩌면 우연이야말로 실재고, 우리는 그걸로 필연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자연법칙이라는 것도 결국 우연의 사건이다. 우연 속에서 리듬을 만든 것이다. 사건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든 것이다. 자연의 습관이 자연법칙이다.

 

6. 신학적 의미에서 '죄'를 자연과학적으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폭력'이지 않을까? 하나님의 자유는 나의 자유가 아니라 상대방을 자유케 하는 자유이지 않을까?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은 상대방에서 힘을 주는 전능이다.

 

 

부천 북클럽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참여해 주세요.

 

  • 다음 모임: 5월 28일 저녁 7시
  •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100주년기념관 8층 박영식 교수 연구실
  • 읽을 책: <신 인간 과학> 3부 인간
  • 문의: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기초과정II>를 마치며

 

최성일 (신일고등학교 영어교사)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편 8편 1절, 3~5절)

 

 

저는 작년 페북에서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를 알게 된 후, 곧바로 기초과정 1과 2를 연이어 들었습니다. 올해 1월부터 4월까지는 온통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에 파묻혀 살았던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서울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지 올해 30년인데, 약 5년 전부터 아이들에게 복음을 본격적으로 전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들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중 하나가 “진화론”의 문제였습니다.

 

2017년 고3 어느 수업 시간에 진화론을 비판했다가 공부 잘하는 학생들 두 명이 찾아와 항의하였고, 작년에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다가 “선생님도 그런 책 읽으세요? 그거 진화론이에요.”라는 말을 교회에 착실히 다니는 한 학생으로부터 듣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교육현장에서 진화론은 신앙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에 대해 고민하던 중, 교회 전도사님의 설교를 통해 페북 모임을 알게 되고, 이 순간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쉽지만은 않았던 기초과정 1, 2를 너무나 재밌게 듣게 된 이유는 현장에서 고민하던 바로 그 고민을 함께하는 선배님들과 동지들이 매우 많고, 또 열정 또한 매우 뜨겁다는 것, 그리고 진화론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을 통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오해와 진실을 바르게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 모임을 만드신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교수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구약학 교수이신 김근주 목사님,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과 김정형 교수님,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과 박영식 교수님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강사진으로부터 “현대 과학을 품는 창조신앙(김정형 교수)”, “성경해석과 과학(김근주 교수)”, “과학주의 무신론(박영식 교수)”, “창조론의 스펙트럼(우종학 교수)” 등의 강의를 들으며, 20명에 가까운 4기 기초과정2 참석자들은 정성껏 발제하고 뜨겁게 토론하며, 과학과 신학의 관계 회복과 바른 신앙 정립을 위해 늦은 밤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주교재인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우종학)과 <오리진>(하스마)과 과제 교재인 <창조기사 논쟁>(해밀턴),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이안 바버), <신 없는 사람들>(맥그라스), 참고 도서인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우종학) 등등을 읽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발제도 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의 새로운 무신론 과학자들의 논리가 여지없이 격파되는 것을 보았고, 그들의 허상을 확실히 “과학적, 신학적”으로 확인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얻었던 가장 귀중한 세 가지 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책이 성경과 자연이라는 것, 둘째로 이 둘은 원저자가 같으므로 모순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셋째로 신학은 성경의 진리에 대한 영원한 근사요, 과학은 자연이라는 실재에 대한 영원한 근사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원리를 통해 과학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고, 오히려 과학이야 말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신실함을 구체적으로 더욱 깊이 맛볼 수 있는 수단이며, 학교 현장의 아이들에게 매우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귀중한 통로임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와 자신의 성경 해석 간의 영원한 간극이 있음을 알고, 항상 겸손해야 하며,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제는 어떤 학생에게도 과학이 지겹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매우 황홀한 공부이며, 절대로 신앙의 적이 아니라 매우 소중한 동반자임과 신앙이라는 것이 막무가내식의 권위주의적 강요가 아님을 설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는 과학과 신학과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서 화이트헤드의 체계적 융합론에 매료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와 과학이 서로 조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답답한 현재 기독교회의 숨통을 열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완전한 패러다임의 이동과 천사가 끌고 다니는 행성들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온 우주에 동일하게 작동하는 중력의 법칙으로 행성들이 움직인다는 패러다임의 이동이 수 백 년에 걸쳐 일어났듯이, 진화론도 하나님의 창조 방법임을 교회가 인정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패러다임 쉬프트를 통해서 잘못된 성경해석이 바로 잡히게 되고, 이것을 통해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기독교계의 관행들과 제도들이 사라지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생명공학의 현기증 나는 발전 속도에 비해 너무나도 느리고, 심지어 역주행하는 기독교회는 이대로 가면 복음을 전할 힘을 잃는 것은 물론 복음을 가로막는 애물단지가 될 것입니다. 지금도 이미 많은 과학자들과 과학자 지망생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심지어 어린 학생들도 비과학적이고 권위적인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차세대들에게 우주와 인간을 설명하는 과학도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영역이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는 또 하나의 영역임을 알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최후의 질문은 “과연 인간은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만일 기성세대인 우리가 하나님의 또 하나의 책인 자연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배척만 한다면, 우리는 차세대들에게 온전한 복음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는 복음의 진보를 위해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성세대는 과학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장대한 계획과 사랑과 신실하심을 적극 수용하고, 그 속에 포함된 함의를 일상에 적용하여 과학기술 문명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합니다.

 

과학과 신학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없을 것이며, 인간의 무절제한 욕심으로 인해 더 크고 근원적인 빈부격차가 생겨날 것입니다. 진화주의를 포함한 근현대의 과학주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한 기독교회에서 가장 무리 없이 인정하는 대표적 변신론가인 C.S. Lewis가 평생을 두고 싸웠던 대상입니다. 138억년에 걸친 장구한 세월 속에 깨알같이 들어박혀 있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을 우리가 최대한 있는 그대로 향유하며 후손들에게 전해주려면, 우리는 과학을 과학주의로부터 구해내고 신학을 고루한 근본주의적 문자주의에서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더욱 많은 분들이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참여하여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권의 책을 자세히 설명하시고 풀어주시고 융합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며, 인간으로 태어난 그 즐거움을 함께 만끽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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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교사 모임을 기대해 주세요!

매월 과신대 교사 모임을 진행하는데

지난 4월 27일에는 백우인 팀장님께서 운영하시는

카페 '거기'에서 모였습니다. 

백우인 팀장님께서 만들어주신 맛있는 

수제 샌드위치를 거하게 먹고

앞으로 교사팀이 해야 할 일들을 논의했습니다.

(정신없이 먹느라 정작 사진을 못 찍었네요.^^;;)

 

특별히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이번에 IVP에서 새로 나온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를 

교사들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소명중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시는

선생님께서 새로 참여해 주셔서

함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올해 과신대 교사팀의 목표는

두 번의 청소년 캠프를 더 진행하고

캠프에서 사용할 교재를 집필하는 것입니다.

 

학교 일과 교회일로 다들 바쁜 와중에

과신대 청소년 캠프를 위해 헌신하시는

교사분들의 열정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뿜뿜!!

 

우종학 교수님께서 쓰신 <무.크.따>를 바탕으로

청소년들이 쉽게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배울 수 있도록 집필하려고 합니다.

많은 응원과 지지 부탁드립니다.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은

언제든지 모임에 함께 참여할 수 있으니

저희 사무국으로 연락 주세요.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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