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판교 북클럽]

 

글_ 강사은

 

2018년 2월에 시작한 분당/판교 북클럽이 1년을 훌쩍 넘어 새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오리진(IVP)’을 포함하여 총 8권의 책을 발제하고 토론하고 후기를 쓰는 시간으로 가득 채웠는데요. 첫 모임부터 꾸준히 이 모임을 지지하고 함께 하는 멤버들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종학 교수님이 멀리 판교에까지 오셔서 <기초과정 1>을 강의해 주시기도 했고 최근에는 김근주 교수님을 모시고 과신톡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첫 돌을 전후해서 ‘오리진’을 읽는 것은 돌잔치 이벤트처럼 느껴졌습니다. 왜 이 모임을 시작했는지를 되새기고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재점검하는 시간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만년 이내로 지어졌을 리가 없는 증거가 곳곳에 널려 있는 우주와 동식물의 진화 증거는 제 신앙의 지평도 넓혀 주었습니다. 이 과학의 증거들이 아니었다면 문자적인 성서 해석/적용과 경험적인 사실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을 제가 연상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삶’(디트리히 본 회퍼)이 그리스도인의 삶 아니겠습니까? 신이 없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택하고 오롯이 홀로 서서 믿음을 붙들고 있는 삶이죠. 한 마디 더 붙이자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죠.

 

한 달에 한번 모이는 북클럽이지만 단독자의 삶들을 엮어 외롭지 않게 꿋꿋이 서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북클럽이 하고 있다 싶습니다.

 

분당/판교 북클럽에서는 1년에 1회 정도는 과학과 신학에 대한 개론서에 해당하는 책을 선정해서 새로 참여하는 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다음 달에 ‘오리진’의 남은 1/3을 읽고 토론합니다. 1년에 한번 있는 기회가 남아있는 분당/판교 북클럽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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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하나님을 알아가기 가장 좋은 학문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 | 칼 W. 가이버슨, 프랜시스 S. 콜린스 | 새물결플러스 | 2019

 

송성원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이다. 오랜만에 아이들을 일찍 재우는 데 성공하고 아내와 영화를 한 편 봤다. 인터스텔라. 개봉한 지 5년여 지난 영화이고 계속 마음으로는 보고 싶었던 영화지만 육아의 일상에 영화가 비집고 들어오기가 어디 쉬운가. 우주 SF 영화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지만 실제로 일어날 개연성은 없어 보이는 웜홀을 통한 항성 간 여행 이야기다.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내가 영화를 보는 느꼈던 건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혹은 ‘하나님이 이 지구를 얼마나 특별하게 지으셨나.’ 하는 것들이었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토성의 고리,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키는 블랙홀의 놀라운 위용, 지구가 살기 힘들다고 먼 길 떠났건만 발 닿는 곳마다 지구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느끼게 되는 절망 가득한 외계 행성들. 장면 장면마다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이 떠올랐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품이구나.

 

과학은 하나님을 알아가기에 가장 좋은 학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 그 자체를 연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사학, 고고학, 심리학 같은 여타의 학문들은 대부분 인간의 산물들은 연구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미세한 소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반면에 물리, 화학, 생물, 천문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손에 때묻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네 가지 힘, 세상 모든 원소들을 줄 세운 주기율표, DNA로 기록된 디지털화된 정보, 그리고 광대한 우주 그 어느 것도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마저도 저자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제약을 받는데, 자연은 어떤 제약도 없이 오롯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모습 그대로 과거부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때문에 창조주를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그 길은 분명 과학에 있다.

 

교회의 많은 성도들, 특히 목회자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그 분들은 과학과 하나님이 서로를 반대한다고 생각하고, 과학을 배척해야만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젊은 지구 창조론의 아쉬운 점은 이런 데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은 물론 본받을만하다. 하지만 그를 위해 꼭 과학을 저버려야만 했을까. 400여년 전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 시절보다 더 퇴보한 모습이다. 당시 갈릴레이가 주장하는 지동설을 반대했던 교회의 논리는 성경에 따르면 천동설이 옳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의 과학적 근거들이 천동설을 더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학 연구가 더 진행되어 지동설이 더 확실한 과학으로 자리 잡으면 교회는 얼마든지 지동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오랜 우주의 역사를 반대하기 위해 과학적 근거를 들지 않는다. 성경 인물의 나이를 다 더해서 연대를 계산해보면 6000년쯤 된다는 것이 유일한 근거이고, 성경은 무조건 옳아야 하기 때문에 과학이 제시하는 증거들을 다 틀렸다고 말한다.

 

이는 오히려 무신론자가 좋아할만한 논리다.

 

대전제 : 과학과 하나님은 양립할 수 없다. 즉, 과학이 옳다면 하나님은 틀렸다.
소전제 : 과학은 옳다.
결론 : 그러므로 하나님은 틀렸다.

 

이것이 무신론자가 전개하는 연역적 주장이다. 젊은 지구 창조론도 동일한 전제를 세우는 것 같다.

 

대전제 : 과학과 하나님은 양립할 수 없다.
소전제 : 하나님은 옳다.
결론 : 그러므로 과학은 틀려야만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가 왜 무신론자들이 세운 전제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이해하려는 학문이라면 과학도 옳고, 하나님도 옳다는 게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 나 송성원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나는 그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만약 내가 ‘나는 엄마의 난자와 아빠의 정자가 만나 수정하고, 자궁에 착상 후 세포 분열에 분열을 거쳐 신체의 각 부위로 자라나고 열 달 가량 자라다가 산도를 통해 태어났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가?

 

 

나는 전문 과학자가 아니라 이 정도 예시 밖에는 들지 못한다. 반면 세계적인 물리학자 칼 가이버슨과 세계적인 생물학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이 책을 통해서 보다 전문적이고 정교하고 더욱 놀라운 설명을 들려준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오랜 연구를 통해 발견한 과학적인 사실들을 차례차례 설명하고, 그런 과학적 사실들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배척받는 현실에 마음 아파하며, 또 그런 과학적 사실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DNA를 통해서, 암석을 통해서, 우주를 통해서 곳곳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법이 바로 과학인 것 또한 알려준다.

 

전체적으로 ‘자주 묻는 질문’ FAQ의 모음집 같은 형식을 띄고 있어 많은 질문이 등장한다. 질문 하나하나가 한 권의 책으로 엮어야 할 만한 중요한 주제를 품고 있다. 다양한 질문을 한 권의 책에 담으려는 의도인 듯 각각의 답변은 언뜻 요약된 느낌이 든다. 그 때문인지 이 책에는 각주가 많이 달려 있고, 마지막 장에는 더 깊이 생각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을 폭넓게 소개해 주고 있다. 마치 이 책의 독자가 이 한 권으로 만족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바라기는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과학을 버려야 한다는 요즘의 분위기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 과학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변화되면 좋겠다. 그래서 더 많은 학생들이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물리학, 화학을 연구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르네상스 과학 혁명의 시대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창조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과학 연구를 더 열심히 하는 시대가 다시 한 번 찾아왔으면. 돈만 밝히고, 권력을 탐하고, 성적으로 타락하고, 인본주의와 다원주의적인 사상에 매몰되어 가는 시대에 다시 고개를 들고 우리의 창조자에게 시선을 향하는 역할이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서 감당해 냈으면. 과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앞장서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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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적 창조가 가능하다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 | 칼 W. 가이버슨, 프랜시스 S. 콜린스 | 새물결플러스 | 2019

 

구형규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의 원제목은 ‘The language of science and faith’이다. 저자인 프랜시스 콜린스와 칼 가이버스는 과학과 종교가 어떤 관계인지, 과학의 진리와 성경의 진리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기독교인으로 진화를 어떻게 신앙과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책을 기록하였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God)」라는 책을 이미 10년 전에 저술하였다. 이 번 책은 「신의 언어」의 후속 편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전편인 신의 언어에서 저자는 의사이자 유전학자로서 무신론자였다가 신앙을 갖게 된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인류의 기념비적 업적인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일하면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바이오로고스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 후 독자들로부터 받게 된 여러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라는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콜린스는 「신의 언어」에서 다양한 창조론에 대해서 소개하고 설명하였다. 젊은 지구 창조론, 오래된 지구 창조론, 지적 설계론, 유신론적 진화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유신론적 진화론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후속편인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에서는 유신론적 진화(바이오 로고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며 이와 관련된 기독교계 안의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서 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진화가 하나님의 창조 방법이라면 왜 그렇게 평판이 좋지 않는가?’라든지 ‘사회적 다윈주의를 어떻게 봐야하는가?’, ‘진화가 일어났다는 최고의 증거는 무엇인가?’, ‘진화는 정말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있는가?‘, ’대진화에 대한 증가가 있는가?‘ 등에 대한 답변을 명쾌하게 풀어낸다.

 

또한 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서도 답을 한다. 예를 들면 지적설계론자들이 DNA 염기서열의 유사성을 공통조상이 아닌 동일한 DNA패턴을 사용하여 설계하신 창조의 증거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콜린스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답한다.

 

DNA의 세부적인 분석은 그런 결론들이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생명체 안의 게놈은 자신이 의도하는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유전자만 공유하는 게 아니라 부서진 유전자도 공유하기 때문이다(P.64).

 

이러한 답변은 인간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직접 그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과학자로서 연구결과를 통해 설명하니 답변에 더 신뢰가 간다. 콜린스는 기독교계 안에서 제기된 진화에 대한 반론들에 대해 하나하나 답하면서 진화적인 창조(바이오 로고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한다. 또한 민감하고 중요한 부분인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 여러 장을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중 진화의 우연성에 대해 반대적인 시각인 수렴적인 진화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며 케임브리지 대학의 고생물학 교수인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의 견해를 소개한 것으로 의식, 도덕성, 영성을 가능하게 하는 큰 두뇌를 가진 인류가 우연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출현했다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진화의 과정을 계획하셨다고 하는 것이나 진화의 과정을 인도하셨다고는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견해이다. 진화의 단계들이 무작위적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각각의 단계에서는 선호되는 특정한 방향이 있다는 설명이다. 콜린스는 증거가 쌓여감에 따라 이런 통찰을 수용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하며 이러한 견해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책 안에는 생물학 이외에도 물리학과 관련된 내용도 많이 있다. 아마도 물리학자인 칼 가이버슨이 기여한 부분일 것이다. 오래된 지구 연대와 관련된 내용과 인류원리라고 부르는 미세조정에 대한 부분이 그것이다. 지구의 나이가 수 십 억년이고,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것, 방사성 연대측정법은 여러 암석의 나이를 밝히는데 신뢰할 만한 방법이라는 것은 이미 과학계 안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나 과학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러한 부분들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다루는 질문들은 ‘어떻게 우주의 나이가 수 십 억년인지 알 수 있을까?’라든지, ‘빅뱅이론은 믿을 만한가?’, ‘방사성 연대측정법은 믿을 만한가?’, ‘미세조정은 하나님을 가리키는가?’등이다.

 

기독인이며 과학자인 저자들은 자신이 믿는 신앙과 과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둘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풍성하게 이해하는 수단으로 조화롭게 보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가 기독인으로서 과학을 공부하며 던질만한 질문들에 대해서 먼저 고민했던 분들이 친절히 답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궁금한 질문들에 대한 답부터 하나씩 찾아 읽다보면 놀라운 방법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느끼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 과신대 연구팀장을 맡고 계시는 정대경 박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정대경 박사님은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과학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홍대 근처 카페 '산책'에서 짧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터뷰이 | 정대경 박사
인터뷰어 | 최경환, 이진호 

 

 

1. 어떻게 과학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얼마 전에 이정모 관장님도 오셨더라고요. 저도 어려서부터 공룡을 좋아했는데, 보통 이런 관심이 유년기에 그치는데, 중고등학교 때까지도 그 관심이 가더라고요. 한 번은 중학교 때, 저희 교회에서도 창조과학에 대한 강의가 있었는데, 공룡에 대한 질문이 많았던 거죠. 그때 조목조목 질문을 했었는데, 대답이 시원치 않았어요. 아직도 기억나는 답은 “공룡들이 노아의 방주에 탔을 거다. 그 많은 종이. 탔다가 내린 이후에 아마 활동을 하다가 절벽에 떨어져 죽지 않았을까?”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더라고요. 어린 나이에도 그게 납득이 안 되더라고요. 그때는 신앙도 별로 없었고, 그냥 그런가 보다, 묻어 놨다가, 고등학교 때 회심 체험을 하면서 진로를 고민하게 결국 신학대학교까지 가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석사 과정을 하면서 신학적인 고민을 진지하게 했습니다.

 

석사 과정에서 논문을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 중에 테드 피터스(Ted Peters) 교수님이 썼던 Evolution from Creation to New Creation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을 쉽게 풀어서 쓴 책이 『하나님과 진화를 동시에 믿을 수 있는가』(동연, 2015)로 번역됐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신학이 자연과학과 양립 가능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후에 석사 마치고 박사 들어가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2. 이후에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셨나요?

 

저의 신학적 고민은 오래전부터 신정론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사촌 형도 루게릭 비슷한 병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친구도 중학교 때 당뇨 합병으로 죽게 되면서 신정론적인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죠. 그러다가 신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 질문을 연결시켰던 거죠.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립은 잘 안 됩니다.(ㅎㅎ) 여전히 왔다 갔다 합니다. 때로는 이신론으로 갔다가, 몰트만처럼 케노시스로 갔다가, 판넨베르크처럼 결정하는 주체로 갔다가, 어떤 때는 또 결정론으로 확 갔다가 합니다.

 

3. 예전에 저희 과신대 콜로퀴움에서도 강의를 하셨잖아요. 그때 어떤 강의를 하셨는지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제 논문 주제 자체가 ‘생명의 기원과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유기화학 이론에서 무생물에서 생물로 넘어가는 이론을 2장에서 다루고, 이런 자연과학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다룹니다. 자연현상만으로도 생명체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입장이 주류 과학계의 입장인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논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행위(Divine Action)에 대한 이론으로 가장 유명했던 학자들, 예를 들면 폴킹혼, 피콕, 러셀의 하나님의 행위 이론을 다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의 행위 이론으로 생명의 현상을 다루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들의 이론을 생명의 현상에 적용해 보고, 그 한계는 무엇인지 집어 봤습니다.

 

1세대 하나님의 행위 이론가들의 한계는 이 사람들이 너무 물리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지적을 했습니다. 어쩌면 의미나 가치라는 것이 실제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명체가 처음 출현을 할 때부터 인식 작용이라는 것이 같이 출현했다는 입장도 상당히 많거든요. 예를 들면, 훔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나 프란시스코 바레라(Francisco Varela)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의 출현과 함께 인식 행위 그리고 기호현상이라는 것도 같이 출현했다는 것을 고민해 본 논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정리해서 콜로퀴움 때 전달하려고 했는데, 너무 욕심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4. 박사님을 만나면 드리고 싶었던 질문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기적과 기도입니다. 과학신학자로서 기적과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간단하게 대중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기도에 대해서 기독교 전통 내에 두 가지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토미스트 전통인데,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미 결정된 거죠.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두 번째 전통에서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도에 맞춰서 리액션을 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고 사건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설명해 본다면, (기적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일단 대중적인 이해에 따라 소위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행위가 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러한 방식은 없을 거라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자연법칙 내에서, 자연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에서 확률적으로 상당히 불가능한 일들, 예를 들면 사람이 질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사건들이 있잖아요. 생리학적인 설명은 가능한 거니깐요. 그런 방식의 사건은 일어날 수 있다고 봐요. 다만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 자체가 신의 존재나 신이 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직접 데이터로 사용될 수는 없는 거죠. 왜냐하면 여전히 해석이 개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철학적이고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순수하게 우연적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있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실상 기적적인 사건이 우리의 신앙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는 없는 거죠. 다만 그러한 기적들은 가능하다고 결론지으면 될까요?^^

 

 

5. 두 번째 질문은 요즘 국내에서 말도 많고 오해도 많은 유신론적 진화에 대한 것입니다. 역시 알기 쉽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연 과정을 통해서 창조하신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것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입니다. 그런데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진화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 오해되어 왔기 때문인 거 같아요. 진화 과정 자체가 마치 하나님의 행위를 배제하는 것처럼 여겨진 거죠. 그런데 이미 대중적으로 관련 서적들이 많이 나왔듯이, 유신론적 진화라는 것은 진화를 믿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자들이 생명체의 출현이나 자연발생에 대한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데, ‘그 모든 과정의 이면에 하나님이 행위를 하셨다’ 혹은 ‘그 자연 과정을 매개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신론적 진화론입니다.

 

그리고 저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전통신학과도 부합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바질이나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은 그 당시의 자연철학 이론인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을 완전히 받아들인 상태에서 성서를 해석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자연과학을 받아들이는 입장, 이 입장이 전통신학의 한 방법론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전통신학과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고 봅니다.

 

 

6. 과신대 연구모임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연구모임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2017년 4월쯤 본격적으로 모임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때 수학자, 생물학자, 천체물리학자, 신학자, 철학자, 과학신학자, 과학철학자, 이런 식으로 모여서 시작했습니다. 매달 한 번씩 모여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선정해 읽으면서 토론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독서 모임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옥스퍼드, 캠브리지, 시카고, GTU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과학과 신학 연구소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연구소들은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고 그것을 연구한 뒤에 그 결과물로 대중강연을 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는 세속주의와 관련된 연구를 한다거나 생태 환경과 관련된 연구를 하기도 합니다. 3월부터 새로운 커리큘럼을 가지고 과신대 연구모임이 새롭게 시작하는데, 1년 동안은 기존 방식을 벗어나서 연구자들이 과학신학이라는 분야가 어떤 토픽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지 개론적인 수준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을 다룹니다. 과학과 신학의 방법론이라든가, 신학이 실재를 반영할 수 있는 학문인가, 하나님의 행위 이론,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과학과 신학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트랜스휴먼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이런 어젠다 중심으로 1년 정도 다루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내년 중후반부터는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서 그 주제에 대한 심화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학술대회나 포럼 차원에서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대중 형식의 포럼으로 연결하려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신학계에도 기여할 수 있고, 과학철학이나 자연과학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화 파트너는 단순히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난처한 질문과 솔직한 대답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 | 칼 W. 가이버슨, 프랜시스 S. 콜린스 | 새물결플러스 | 2019

 

이신형

 

 

과신대와 새물결플러스의 이벤트로 이 책을 받게 되고서 매우 기뻤다. 신학과 과학과의 긴장관계는 나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에게 언제나 관심사였고, 아직도 여전히 긴장관계 속에서 어떤 것이 옳은 지 고민하게 만드는 이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긴장을 풀어내고자 한다.

 

두 명의 저자는 신학과 과학의 조화를 위해 설립된 바이오로고스 재단의 핵심 인물이다. 저명한 과학자이면서 신앙인이다. 이러한 두 저자의 배경은 신학과 과학의 조화를 설명하기에 매우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바이오로고스 재단은 과신대와 비슷한 목적을 갖고 활동하는 듯이 보여서 더 반가웠다.

 

 

창조론 하면 30여년전, 교회 저녁예배 때 초청되어 온 창조론 이야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연대 교수님이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한 시간 내내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진화론에 대한 비판만 하셨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이에 들으면서, “뭐야? 창조 이야기는 하나도 없네. 진화론을 비판하면 창조가 되는 건가? 창조는 할 이야기가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창조과학으로 이야기되는 창조론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학부에서 지구과학을 전공하다 보니 생긴 지구에 대한 지질학적, 고생물학적 역사 지식은 창조과학으로부터 더욱 멀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갖고 있는 신앙과의 충돌은 미묘하게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신앙이나 공부에 크게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찝찝함이 남는 신앙이라고나 할까.

 

나 같은 사람이 나 혼자 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많은 신앙인들이 나 같은 생각을 많이 하고 있을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신학이 이상한 것 아니야? 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듯하고, 나이 드신 분들은 과학이 좀 이상한데 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물론 아닌 분들도 많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기존에도 있었지만, 이번에 한 권 더 나온 듯하다.

 

 

이 책은 결국 진화로 대표되는 과학과 창조로 대표되는 신학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본다. 지구의 역사와 다윈의 진화론, 하나님의 존재, 아담과 하와로 대표되는 인간, 그리고 빅뱅으로 알려진 우주의 시작까지 다양한 주제를 과학의 관점에서 또 신학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조화시키고자 노력한다.

 

과학적 지식을 꼼꼼하게 그리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그 지식에 신학을 접목시킨다. 진화에 대한 설명과 함께 창조과학의 부족함도 조금씩 짚어 줌으로써 자신들의 논리를 더 탄탄히 만든다. 신학적인 내용도 어려운 내용보다는 실제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안내한다.

 

양자역학은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의 근거가 되고, 빅뱅이론과 우주 초기에 대한 연구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얼마나 섬세하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생명의 진화가 무작위가 아닌 방향성이 있다고 하는 최근의 연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창조를 위해 치밀하게 진화를 인도하셨음을 고백하게 된다.

 

창조과학자들의 진화에 대한 문제제기에도 잘 이야기한다. 열역학제2법칙에 대해선 지구가 닫힌 세계가 아닌 열린 세계이기 때문에 엔트로피가 감소할 수 있는 에너지가 공급되고 있음을 지적하여 진화가 다른 과학이론과 모순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대해서도 다양한 신학적 제안들을 살펴봄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반드시 한 사람이어야만 기독교의 교리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보다 기독교 전통은 창조과학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연의 관찰과 신학을 잘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지구의 역사가 6,00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자연 환경으로 표현되는 일반 계시를 무시하지 않았다. 다윈의 진화론도 발표 당시에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대립하기보다는 오히려 환영받는 분위기도 많이 존재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메커니즘이 밝혀졌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창조과학, 즉 젊은 지구론은 역사도 짧으며 사회적, 종교적으로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리고 그 논란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한 듯이 보인다. 교과과정에 대한 논란 등은 사회로 하여금 기독교를 지성이 없는 종교로 이해하게 만드는데 일조했고, 결과적으로 교회를 사회와 분리시키는데 일조한듯이 보인다. 마치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구분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온 듯한 모습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으로 나아가라 하신다. 세상과 구별된 교회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교회가 옳은 것인가 생각해본다.

 

 

이 책의 백미는 제일 마지막장이다. 창세기 1장을 현대 과학의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풀어낸다. 그럼으로써 성경의 창조와 진화를 조화시킨다. 하나님은 세상을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하셨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성경에서는 이 세상이 창조된 목적을 이야기한다. 그런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보려고 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우리가 자연을 통해 읽은 하나님의 뜻과 성경을 통해 듣는 하나님의 뜻이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기 때문이다. 신학과 과학을 대립시킴으로써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쇠퇴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신학과 과학의 조화를 통해 한걸음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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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강서 북클럽]

 

글_ 심왕찬

 

3월 28일에 서울 강서/구로 북클럽의 첫 모임이 있었습니다.


북클럽 베테랑 1명과 초보 4명이 모여서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의 머리말부터 4장까지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침 모임 장소(카페 거기)를 제공해주시는 백우인 선생님의 생일이어서 백선생님의 맛있는 샌드위치로 저녁을 함께 먹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시작했습니다.

 

 

샌드위치가 예사롭지 않지요? 어제는 특별한 날이어서 평소보다 더 신경을 많이 쓰셨다고 합니다. 북클럽 지기는 저녁을 후회없이 먹기 위해 아침과 점심을 굶고 참석했습니다. ^^ 식사는 소정의 회비를 걷어서 백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첫 모임이니 만큼 북클럽 참여와 인도 경험이 풍부하신 백우인 선생님께서 발제를 해주셨고, 각 장마다 질문과 의견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책 내용을 잘 요약, 설명해주셔서 읽은 내용을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책 내용에 대한 여러 질문과 토론, 창조과학 및 교회의 현주소 등 많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았던 것은, 4장의 내용 중에서, 하나님께서 (빅뱅과 진화를 통해) 창조를 (시작)하신 후에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주에 부여하시고 붙들고 계신 법칙 안에서 끊임없이 자연과 상호작용을 통해 섭리하고 계시며, 인간과 자연에게도 그 안에서 자유를 주셔서 살아갈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모임은 4월 25일(목)에 모여서, 5장부터 마지막 9장까지 각자 돌아가며 1장씩 발제하고 나누기로 했습니다. 북클럽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페이스북 메시지로 저에게 미리 연락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샌드위치 때문에 오셔도 괜찮고, 타 북클럽에서의 참여도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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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페미니즘의 눈을 통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고찰하다.

페미니즘과 기독교 | 강남순 | 동녘 | 2017

 

김영웅

 

 

'결함이 있는 남성', '잘못된 남성', '악을 가져오는 위험한 존재'. 자,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렇다. 놀랍게도, 우리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아내, 우리의 딸,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 10달간 머물렀던 자궁의 주인이자 우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바로 여성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여성에 대한 표현들이 어떤 정신병자에 의한 오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유명한 철학자와 신학자(모두 남성이다), 각각 이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한 여성에 대한 이해였다. 누군가는 세 위인 모두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며 적당히 이해해보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질없는 시도다. 대표적인 종교개혁자였던 마르틴 루터조차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 이후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았고, 또 다른 종교개혁가 존 칼빈도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신의 창조 질서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굳이 수 세기 전에 이미 사라진 위인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펴보면 그 어디나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와 남성 위주로 된 문화 시스템들이 마치 물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소위 ‘자연스럽다’고 하는 많은 법과 규범, 질서와 체제, 그리고 문화를 바라보는 눈이, 사실은 색안경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착용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 색안경이 우리 눈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전혀 이상함을 못 느낄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 숨 쉬듯 자연스러운 가부장적인 제도에 노출되는 우리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와 배제, 차별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우리 눈에 부착된 색안경을 인지하고 뜯어내는 작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이 시대의 키워드를 통해서 말이다.

 

강남순 교수의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나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나 강연 등을 부끄럽게도 여태껏 직접 접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무리가 없는 수준의 책이다. 이 책에는 페미니즘의 간략한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가중시키고 대중화시켜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각인이 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가 페미니즘과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다층적이고도 심층적인 대답을 찬찬히 해나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의외의 상황 파악에 섬뜩할 정도로 놀란 부분이 있다. 가부장주의적인 교육과 가치관의 내면화가 견고해질 대로 견고해져 급기야 일종의 카르텔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익숙해진 존재에는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여성 스스로도 자신의 해방을 위한 페미니즘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지도자를 선택할 때도 여성보다는 남성을 더 지지하고 신뢰하게 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대부분 피해자의 위치에 놓였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해방보다는, 비록 남성 의존적이고 불합리하고 불의하더라도 그 상황이 가져다주는 모종의 안정감에 길들여져 버려 그 상황을 지속하길 원하게 되는,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난 이 부분에서 최근에 읽었던 모세오경 중 민수기 편이 생각났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에게 억눌렸던 노예 체제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하기보다, 광야생활 중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기만 하면 차라리 그 노예 시절이 더 나았다고, 차라리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상황과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인된 노예근성이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오랫동안 이어져온 가부장주의적인 사회체제 속에서 여성들에게 각인된 억압 근성이 여성 평등을 넘어 성, 인종, 사회적 계층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발전에 의외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천부인권설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가 오히려 여성 혐오, 배제, 차별을 합리화시켜 버리고 남성우월주의를 마치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것처럼 만들어버린 인간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으로서 나도 수치를 느낀다. 먼 과거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성 차별은 존 파이퍼 같은 유명한 목사들에 의해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왕성하게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재미난 사실은, 이렇게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여성을 차별하는 기독교 리더들도 자신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서의 근거는 그 자신이나 그가 속하고 자라온 교단이나 전통이 부여한 편향적인 해석에 불과할 뿐 하나님이 직접 지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해석을 진리로 착각하고, 또 전통성이 그것을 진리로 만들어줄 것처럼 여기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분명 반성과 회개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교적 남성 우월주의가 진하게 묻어있는 기독교에 마음과 생각이 물들어있을 것이므로, 이 책을 꼭 한 번쯤은 읽어보길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본인이 은연중 가지고 있을, 여성이 '자연스럽게' 배제된 기독교 신앙이 과연 진정한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과감하게 던져보길 바란다. 강남순 교수도 지적했듯,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양립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선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생각해야 비로소 본 질문에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영점 위치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페미니즘이 어떻게 생성되고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배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용도로도 읽힐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눈과 일체가 되어버린 가부장적인 색안경의 실체를 인지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찰해보며 스스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조금이라도 수정이 가하면서 읽을 때, 아마도 이 책의 저자, 강남순 교수의 목적과 바람이 절반 정도는 성취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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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4. 창세기 1장을 비유로 읽으면 소설이 되는 거 아닌가요?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며 높은 권위를 부여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막상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하거나 배운 적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을 읽는다는 건 하나님이 우리 귀에 대고 속삭여 주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문자로 기록된 글이며 모든 글은 나름대로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문학적 표현들이 들어 있고 고대 근동의 상식과 세계관이 담겨있습니다. 편평하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지구, 해와 달과 별들이 들어있는 궁창, 궁창 위에 물층, 그리고 그 위에 신의 자리가 있다는 당대의 상식은 창세기 1장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런 고대의 우주관은 성경이 가르치려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 내용들은 단지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을 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창세기 1장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지 말라는 구약학자들의 조언을 들려주면, ‘그럼 창세기 1장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책이 아니고 단지 소설에 불과한가?’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비유나 과장법, 혹은 문학적 표현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오래전에 폐기 처분한 고대 근동의 상식과 우주관도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를 그저 소설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린다면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성경을 소설이나 허구로 읽는 것도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비유는 사실을 허구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화를 들어볼까요? 옆집 친구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온 다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와 대화를 나눕니다.

 

“누가 그러는데 엄마는 내 친엄마가 아니래. 엄마가 나를 낳은 거 맞아?”

“그럼, 친엄마 맞지. 내가 너를 낳았지.”

“진짜로 낳은 거 맞지? 어떻게 낳았어?”

 

잠시 고민하던 엄마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너를 배꼽에서 낳았지. 친엄마 맞단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의심을 거둡니다.

 

도킨스와 창조과학자가 이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도킨스가 먼저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아기는 배꼽에서 나올 수가 없단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이 여인은 너의 친엄마가 아님이 분명하다.” 창조과학자도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도킨스의 말에 흔들리면 안 된단다. 엄마가 너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니? 배꼽으로 너를 낳았다는 말이 믿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엄마를 신뢰하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아기를 낳는 방법일까요? 배꼽의 중요성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는, 내가 너의 친엄마라는 사실입니다.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수준에 맞게 배꼽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썼을 뿐입니다. 배꼽으로 아기를 낳았다는 표현이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해서, 엄마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의심해야 할까요? 반대로 배꼽으로 낳았다는 말을 비유로 이해하면 친엄마라는 사실도 허구로 전락하게 되는 걸까요?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서, 아기가 배꼽에서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친엄마가 맞다는 엄마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고 폐기 처분해야 할까요?

 

창세기 1장이 그렇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히브리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창세기 1장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하였고 그들에게 익숙한 상식과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를 이해하듯,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임을 알려주는 것이 창세기 1장의 목적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우주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고대 근동의 히브리인들에게 누가 창조주이며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비유를 비롯한 다양한 문학적 표현과 더불어 현대 과학과는 맞지 않는 고대 근동의 상식과 세계관이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과 맞지 않는 표현들이 담겨 있다고 해서, 창세기 1장을 허구라고 판단한다면 배꼽 때문에 생모를 버리는 격입니다.

 

비유와 같은 문학적 장치나 고대 근동의 상식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서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과연 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제한된 세계관과 이해를 가진 고대 근동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알려주는 책이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비유 때문에 사실을 버리거나, 혹은 비유를 사실로 여기는 두 가지 실수를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비유는 사실을 허구로 만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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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존중과 배려로 다름의 향연을

아담의 역사성 논쟁 | 데니스 O. 라무뤼 외 | 새물결플러스 | 2015

 

김영웅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이나 갈등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인류의 기원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자연스럽게 아담이란 존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자칫 발칙하거나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 의문은 기존에 아무 의심 없이 가지고 있었던 우리들의 믿음과 확신을 재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인류의 기원이 기록되어 있다고 보는 창세기 앞부분을 무언가 놓친 게 있나 스스로 반신반의하며 수없이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그 부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직접 능동적으로 찾아보기도 합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 순간이 기존 교회 안에서 담을 수 없었던 기독교 영역을 처음으로 접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늘 수동적인 자세로 목사를 통한 성경 해석을 주입 받아왔던 분이라면, 아마 이때가 처음으로 교회 안에서 말해주지 않거나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이슈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세상에는 정말 다양하고 다채로운 성경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유일한 진리처럼 믿어왔던 지식이 그저 다양한 해석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더욱 커다란 기독교 세계를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평안히 잠자고만 있던 자신의 신앙이 안일하고 편협했으며, 순수하다고 믿었으나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아담의 의미를 인류의 기원 측면에서만 고민하다가 멈추게 된다면 (물론 이런 고민은 블랙홀과 같아서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멘탈은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채 오히려 전에 없던 활기찬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다행인지도 모르죠) 이러한 고민이 보통 인류의 기원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에게도, 바울에게 그랬듯, 구약 성경만 있었다면 적어도 멘탈이 붕괴되는 고민까진 직면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창세기가 포함된 구약만 있는 게 아니라 신약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예수만 있는 게 아니라 바울도 있습니다. 또한 원죄 개념을 강력히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예정론을 언급한 칼빈도 우리에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는 장로교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 중 단 1% 정도가 장로교라고 하는데 말이지요 (그 중의 절반이 한국에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팩트체크 필요하겠지만요). 이러한 불행 (다행?)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편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조성했으며, 급기야 이는 누군가에겐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골치거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골치거리의 근원은 아담과 예수를 연결시킨 바울의 언급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한 사람’에 대한 부분은 첫 번째 아담 뿐만이 아닌 두 번째 아담이라고 알려진 (실제 “두 번째 아담”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단, “두 번째 사람”이라는 말이 고린도전서 15:47에 나옵니다. 아담이란 뜻이 사람이기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이긴 합니다) 예수의 존재 이유까지도 재고하게 만듭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기원과 그 해결책에 관한 부분이지요 (각각이 아담과 예수를 대변합니다). 이로써 우린 마침내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건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무방비 상태로 돌연히 노출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의미를 인류의 기원 문제와 연결시키다가 얼떨결에 시작된 블랙홀의 끝이 예수의 대속을 향하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특히,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성경 전체를 해석해내는 방법에 익숙한, 복음주의권 (그 중에서도 칼빈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 장로교)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으며 개인의 신앙과 믿음을 구축했던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 아담으로 인한 원죄사건과 그 결과로 인한 인간의 타락, 죄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의 태어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한 구속, 즉 창조-타락-구속의 플롯이 모든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아담의 존재 유무는 자칫 기독교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위험인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복음주의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원죄개념과 죄의 전가를 핵심교리로 여기지 않는 기독교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아담의 역사성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가지지 않겠지요. 그래서 이 글에서 '우리'란 한국 장로교를 포함한 창조-타락-구속 플롯을 받아들이는 복음주의권에 속한 기독교인을 지칭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른 것 같은 참담한 멘붕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린 과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책은 이러한 질문을 이미 던져보고, 그로 인해 인생을 건 치열한 고민을 거쳐 정립된 네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의 입장을 보여줍니다(각 입장을 대표하는 네 명의 학자들은 모두 복음주의자들입니다). 과연 아담은 실제 역사적 인물일까요, 아님 어떤 상징을 나타내기 위한 고대 근동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상 속 인물일까요? 아담은 과연 첫 번째 사람이자 인류의 조상일까요, 아니면 죄가 세상에 들어온 시점의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에 불과할까요? 아담은 과연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그렇듯, 정자와 난자의 수정에 의해 태어난 게 아니라, 정말 초자연적인 방법, 즉 흙으로 빚어지고 유아 단계를 건너뛴 채 곧장 성인으로 만들어졌던 것일까요(de novo creation)?


물론 성경 본문은 이런 질문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혹은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 어떠한 대답도 명확히 내놓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그저 여러 단편적인 성경 구절들과 고대 근동 지역의 과학과 세계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성경 해석과 신앙고백, 그리고 기독교 교리 등에 의거하여 추측할 뿐입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각 시대에 관점들은 모두 정치적이고 어쩌면 폭력적일 수도 있었을 힘의 영향 아래에서 정립되었다는 사실도 우린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이 책 역시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대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력하게 호소하지만, 그 어떤 입장의 해석도 참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결코 한 입장만을 옹호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빨려 들어갈 정도로 탄탄한 논리를 가진 입장이라 해도 해석은 해석일 뿐, 결코 그것이 진리의 자리를 꿰차진 못합니다. 저는 어떠한 해석을 받아들이든 본인의 신앙이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어떠한 입장을 가진다 하더라도 어느 부분에선가는 논리의 모순이나 비약을 감행하거나 무시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입장을 비하하거나 혐오하거나 배제하며 싸움질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밑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네 가지의 입장을 조화롭게 수평적인 관계에서 다루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한 입장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다름이 다름으로 존재할 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단, 어떤 한 입장이 내세우는 힘의 논리에 의해서 다름이 틀림이나 혹은 악으로 규정되고 제거 대상으로 발전하게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자신이 열심히 연구해온 입장을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의 네 가지 해석 모두 논리적 완전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거기엔 자신의 시간과 열정, 다시 말해 자신의 인생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자의 입장이 조목조목 반박되어질 때면 자신의 자아가 마치 부인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감정 섞인 논쟁의 장면을 볼 때면 솔직히 제 삼자이자 독자에 불과한 저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났을 정도였답니다. 이미 논리의 영역을 이탈하여 오감을 가진 인간으로서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책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논쟁도 그 표면상의 이유는 논리와 근거 부족이지만, 사실 그 이면엔 그것들보다 더 큰 문제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자아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논쟁에서 이성만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감정이 섞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논리로 시작, 진행, 결론지어져야 했을 논쟁이 결국엔 비논리를 불러오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건 결국 그들도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대표하는 배릭 교수 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세 학자의 입장에서도 전적인 동의가 되어지진 않았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진화적 창조론'의 대표인 라무뤼 교수의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부분에서, 저는 그의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왜 굳이 역사적 아담이 존재하지 않았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월튼 교수의 '원형적 창조론'에서는 '이것이 맞지만 저것도 틀린 건 아니다'라는 모호한 논리에 그만의 확실한 색깔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굳이 역사적 아담이 존재해야만 하는가?'하는 질문에서 명징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콜린스 교수의 '오랜 지구 창조론'의 입장에서는 '왜 굳이 유신 진화론을 거부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저는 끝내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네 가지 입장과 그들의 논쟁을 모두 지켜본 전직 교수이자 현직 목회자인 그레고리 A. 보이드 목사의 입장이 저로선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역사적 아담이 있든 없든, 우리의 믿음은 안전하다' 라고 압축할 수 있는 그의 입장에서 저는 존중과 배려가 깃든 예수의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린 어느 한 입장을 고르고 그 입장을 변호하는 투사가 되어야만 할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 입장이 연구를 할 필요도 없다거나, 다른 입장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름에 열린 자세를 가지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 길은 결국 교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름을 다름으로 존중해 주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한 입장의 더 탄탄한 논리를 구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놓쳐왔던 건 어쩌면 그런 자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진 각 입장이 서로의 논리적 결함을 찾아 비방하기도 하고 자신의 입장이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하는 단계에 있지만, 언젠가는 다른 해석들이 모두 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채 어떤 입장을 취하든 전적인 개인의 자유에 맡기고 혐오와 배제 대신 존중과 배려의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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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3회 콜로퀴움은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라는 주제로 더처치 교회비전센터에서 지난 3월 18일에 진행되었다. 발표자는 숭실대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였고, 대담자는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의 최승언 교수, 사회자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의 우종학 교수였다. 이 날 발표자 이용주 교수는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Ⅱ(새물결플러스/2018) 중 창조론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 세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활동으로 존재하게 된 피조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과학적 진술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강의했다. 1부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봤다. 

 

 

글_ 심기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자연의 사물들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가 직접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야 우리가 알 수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알려주시는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방식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흘러가고 이 세상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려주신 방식에 집중할 때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할 때만 기독교적 신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기독론적 집중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믿는 유일신과 유대교, 이슬람에서 믿는 유일신론은 좀 다르다. 한 하나님이 그냥 하나가 아니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하나님 한 분 안에서 하나의 신성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알려주셨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 세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것이 조직신학이 다루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관계 맺으면서도, 자신과는 구분 짓는 그 독특함에 굉장히 주목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두려운 주님이나 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빠’라고 굉장히 친밀하게 칭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이 아니야(요18장)’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구분 지으셨다. 즉, 나사렛 예수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 꼭 성령이 함께 하신다. 잉태하실 때도 그렇고, 세례 받으실 때도 그렇고 항상 함께 하셨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다 보면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사건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 세 인격들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심층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세 인격들은 하나님의 인격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들이다.”

 

초대교회 혹은 고대 교회 때부터 삼위일체 신앙이 교회 안에 고백되고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는 무슨 뜻인가? Trinity라는 것은 tri + unity이다. 세 분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다는 뜻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힘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관계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인격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라는 신성이 구성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한 분 안에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있어서, 이 인격들이 서로 다른 행동들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안 하시는 분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에 익숙하다 보니 보좌에 앉으시고 높으신 왕의 이미지에 익숙하다. 마치 ‘착한 타노스’의 느낌이다. 앉아서 멀리 계신 느낌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서로서로가 존재하게 해주는 상호의존적인 활동을 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아들이 아닌 인격체가 되고, 아들은 ‘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아버지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하는 활동을 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 가운데 띠로써 연합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사랑의 띠다.’라고 교회는 오래전부터 얘기해왔다.

 

따라서 ‘일체’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사랑의 활동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삼위’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서로서로 구분되는 독립적인 자유로운 활동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상 ‘나와 다른 존재(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활동을 하는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고, 이를 기독교적 용어로는 ‘사랑’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존재와의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관계 가운데 자유롭게 일하신다. 이 자유는 나를 위한 자유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자유다. 따라서 아들은 이 자유를 아버지를 위해 씀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여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한다. 즉, 아들은 자신의 사랑 활동을 아버지를 위해 하고, 아버지도 역시 아들을 위해 이 자유를 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즉, 관계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는 분’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창조해야만 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체로 관계 가운데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셨고, 그 관계는 완벽한 관계였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반드시 만드셔야 했던 것이 아니고, 무한한 자유 속에서 만들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발성을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함”이라고 정의하면, 이 세계의 우발성은 곧 세계를 창조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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