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톡] 성소수자 정신건강의 이론과 실제

 

온라인 과.신.톡!

성소수자 정신건강의 이론과 실제

 

바야흐로 '혐오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성소수자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는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다'라는 학문적 결정을 공표했으며, 지난 40년간 동성애를 병리화해서는 안된다는 학술적인 증거는 계속 쌓였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노골적으로 성소수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려고 합니다. 

정치적 견해, 종교적 교리로 성소수자를 폄하하기 이전에 오늘날 정신의학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해서 어떤 의학적 진단을 내리고 있으며, 혐오와 배제라는 틀 안에서 겪는 이들의 정신건강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그동안 성소수자의 정신건강에 대한 연구와 강연을 꾸준히 해오신 장창현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번 과신톡 행사는 화상 회의 프로그램 ZOOM으로 진행합니다. 
수강신청자에게는 이메일과 문자로 참여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수강신청 : bit.ly/3h6pPex

 


* 일시_ 2020년 6월 22일(월) 저녁 7-9시
* 대상_ 누구나 (무료 행사)

 

* 진행 순서
7:00-7:10 강사 소개 및 인사
7:10-8:00 강연 "성소수자 정신건강의 이론과 실제"
8:00-9:00 강사와 자유로운 대담

 

* 강사 소개_ 장창현 원장

느티나무의료사협의원, 살림의료사협의원, 원진녹색병원을 주 1, 2일 순회하며 문턱낮은 진료를 하고 있다. 비평 정신의학, 함께하는 의사결정모델, 정신장애인 당사자운동, 성소수자 정신건강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진료를 진행하고 있다.


* 장창현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한국성소수자연구회에서 집필한 <혐오의 시대에 맞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12가지 질문>을 읽고 참여하시면 논의를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책은 아래 링크를 통해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준)

www.lgbtstudies.or.kr

lgbtstudies.or.kr

문의: 070-4320-2123 /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파사데나 북클럽] 성서신학으로 본 과학과 신학의 대화 (구약편 1)

 

장소: 490 E. Walnut St. Pasadena. 풀러신학교 2층 컨퍼런스룸.
시간: 2020년 1월 22일 수요일 저녁 6시 30분 - 9시 30분.
참석자: 신웅길 (leading), 이선주, 전계도, 신폴, 임택규, 박찬민, 이재석, 김영웅, 이상 7명.

 

 

교재 1: Ernst Troeltsch 저, "Religion in History" 중 Chapter1. Historical and Dogmatic Method in Thelology (1898) (신웅길)
교재 2: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Prologue, Introduction, and Chapter 1-5 (Chapter 1-2: 전계도, Chapter 3: 이선주, Chapter 5: 임택규, 나머지: 김영웅)
교재 3: James K. Hoffmeier and Dennis R. Magary, "Do Historical Matters Matter to Faith,?" Chapter 4. These Things Happened: Why a Historical Exodus is Essential for Theology (이동우)

 

 

2018년 여름 첫 모임을 가진 이래 2019년 가을까지 한 달에 한 번씩 '파사데나 장로교회'에서 모인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은 '과학과 신학 (신앙)의 대화'라는 주제로 현재까지 논의된 것들의 기본적인 전체 숲을 훑는 과정이었다. 다른 북클럽보다 뒤늦게 시작한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은 한국 과신대의 흐름과 상황을 파악하고 발을 맞추고자 한국 과신대에서 선정한 필독 도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창조과학의 기원과 역사, 문제점과 한계점 등을 공감하고, 동시에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의견을 나누며 '과학과 신학의 대화 (hereafter, 과신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1년이 지난 2019년 여름까지 매달 성실하게 모임을 지속해왔지만, 참석인원 모두는 그즈음 마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었다. 그동안 모임에서 우리는 각개전투에서 벌어지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창조과학과의 마찰로부터 한숨 쉬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느끼기도 하며, 모두가 같은 페이지에 있다는 공감을 충분히 받아왔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는 창조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치 기독교 신앙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끼는, 즉 주로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의중을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방법만이 아닌 정서적이고 심리학적인 방법으로도 통찰해 보려고 노력했었다. 창조과학의 객관적인 문제점과 한계점을 알려주었을 때의 그들의 상태와 반응을 '의도적 거절'인 것 같다는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내며 활발한 토론이 지속되었지만, 그 활발했던 기간도 1년 남짓의 시간이 지나니 어딘가 모르게 정체의 기미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모임을 지속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속이 그다지 의미가 없을 거라는 암묵적인 결론에도 다다랐었다. 우리에겐 동기부여가 될만한 뭔가 새로운 도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과신대'라는 기초적인 숲을 충분히 관찰했다고 판단했다. 다음 여정은 그 숲 안으로 들어가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고 알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우린 가장 먼저 참석 인원의 전공을 살펴보았다. 성서신학, 조직신학, 생물학, 컴퓨터공학, 주로 이렇게 네 분야였다. 물론 궁금한 타 분야의 외부강사를 초청하는 방법도 가능했지만, 그러기에 앞서 우리 내부의 전공분야를 '과신대'라는 숲 안의 나무로 삼고 살펴보는 게 우선순위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각 분야 당 4개월 안팎에 걸쳐 조금은 깊게 공부해나가자는 의견에 마음이 모아졌다. 그 시작이 2020년 1월이었고, 성서신학이 첫 타자였다.

 

성서신학이라는 나무를 공부하는 여정은 성서의 역사성 문제를 살펴보는 일로 정해졌다. 1월 22일에 있었던 첫 모임에서는 구약성서, 그중에서도 족장시대부터 출애굽, 가나안 정착, 이스라엘 왕조의 황금기,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신앙을 형성하는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부분의 역사성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이 글은 모임 전체를 녹음한 뒤, 그 녹음 파일을 다시 들으며 김영웅이 요약 및 정리한 것이다. 모임은 세 가지 교재 요약을 담당한 각자의 능동적인 참여로 이루어졌으며, 교재 요약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토론도 같이 이루어졌다. 약 3시간가량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되었던 진지하고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교재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 성서신학 여정의 길잡이인 신웅길 교수가 전체 여정을 간략히 소개하며 각 교재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앞으로 4-6개월에 걸쳐 매달 모일 성서신학의 눈으로 본 과신대는 성서 해석에 있어서의 역사성 문제를 다룰 것이다. 첫 모임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재를 다루는데, 첫 번째 교재는 성서해석의 두 가지 방법론 (역사비평적 방법과 교리적 방법)을 비교한다. 저자는 근대 이후로 가장 중요한 성서해석 방법론으로 대두된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이 방법론은 기존 교회에서 사용해온 방법론과 많이 상치된다. 역사성을 따질 성서본문이 많지만, 두 번째 교재를 택한 이유는 가장 먼저 구약에서 족장시대부터 출애굽, 가나안 정착, 왕조, 즉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신앙을 형성하는 사건들에 대한 부분을 다루기 위해서다. 저자는 고고학적인 방법을 기본으로 하여 이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입장이다. 세 번째 교재의 저자는 비록 고고학자이지만, 고고학적인 반박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이 사건들의 역사성이 왜 중요한지 주장한다. 두 번째 교재가 성서의 역사성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이라면, 세 번째 교재는 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며 긍정적인 입장에서 써진 책이다.

 

 

Ernst Troeltsch, Religion in History, Chapter 1. Historical and Dogmatic Method in Thelology (1898) 요약 및 정리.


저자의 기본적인 주장은 성서 해석의 새로운 방법론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교리적 방법을 오래된 방법, 역사비평적 방법을 새로운 방법으로 구분한다. 역사비평적 방법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저자는 교리적 방법론의 단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교리적 방법론은 계시에 대한 강력한 권위를 부여하여 모든 해석의 시작점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역사비평적 방법론이 가져야 할 세 가지 특징적인 원리를 주장한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방법이다.

 

첫 번째, Criticism의 원리: 성서의 "모든" 사건을 "예외 없이" 의심하고, 그 가능성의 정도로써 역사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두 번째, Analogy의 원리: 과거-현재-미래 상관없이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들이 똑같은 원칙과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원리이다. 특수성과 예외는 용납하지 않는다. 세 번째, Correlation의 원리: 모든 종교현상을 포함해서 모든 사건들은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원리이다. 인과관계를 초월하는 사건이나 인물은 용납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세 가지 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신학을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앙의 대상이 사실적 (역사적) 대상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 분리가 옳은지, 두 대상이 하나인지, 아니면 대립되는 것인지, 혹은 양립 가능한 것인지는 토론 대상이 되겠지만, 저자는 둘을 일단 분리한다. 이렇게 분리하여 나타나는 신학 양상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라 볼 수 있다. 기독교 특유한 신학이 아닌 종교로서의 신학을 말한다.

 

저자는 세 가지 원리에 입각하여 교리적 방법론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한다. 성서해석의 시작점이 의심이 아닌 명료한 계시라는 점은 역사비평적 방법론으로 볼 땐 검증 불가능한 시작점일 뿐이다. 이를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작점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의심 없이 100% 명료한 시작점을 전제하기 때문에 첫 번째 원리인 Criticism과 상치된다. 또한 기독교의 독특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두 번째 원리인 Analogy에 상치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인과관계를 초월하는 분이라고 상정하기에 세 번째 원리인 Correlation에도 상치된다. 그러므로 교리적 방법론은 문제가 많고,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성서 해석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학계의 주류는 역사비평적 방법 쪽, 교회는 상대적으로 교리적 방법 쪽에 치우쳐왔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비평적 방법 또한 힘을 많이 잃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방법론 안에서도 여러 가지 수많은 상충된 주장들이 나와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를 정도로 혼돈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학계는 교회의 신앙에 기반해서 연구를 수행하지 않으며, 교회는 학계의 주류 연구 방향을 따르지 않는다. 저자는 앞서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무신론자의 입장인데, 그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계시를 부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서신학 안에서는 교리적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자는 신앙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신앙고백과 상관없이 연구하는 조직신학은 SDL 학회, 신앙고백을 전제로 연구하는 조직신학은 ETS 학회, 현재 이렇게 두 학회로 크게 나눠져 있다. 재미난 것은 똑같은 성서본문을 가지고서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이렇게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는 학문이 아닌 신앙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Prologue: In the Days of King Josiah.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이야기는 기적적인 계시가 아니라 인간 상상력의 뛰어난 결과 (epic saga)다. 성서는 역사기록이 아니라 문학작품으로 읽어야 한다. 모세오경은 유대 요시야 왕의 종교 정화운동 때 쓰였다. 이 책은 고고학적인 입장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성서의 탄생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전설에서 역사를 분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역사'란 고고학적인 검증 결과로만 판정된 결과물로 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파괴가 아닌 탈구축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역사가 무엇인가?" 일지도 모른다. 과연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결과물만이 역사인가, 아니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인가 하는 점이다.

 

실제 사건은 크든 작든 어떻게 해석되든 상관없이, 어쨌거나 사실로써 있긴 있어야 하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그 이후의 해석은 과장, 축소 등등의 수정이 가해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예를 들어, 최소한 예수라는 인간은 실제로 존재했어야 하지 않을까. 물 위로 걷든 기적적으로 치유하든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래야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그래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만약 예수 자체가 허구적 인물이라면 기독교 신앙도 모두 무너져 내리고 허구일 뿐이지 않을까.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Introduction: Archaeology and the Bible.


고고학적인 발굴은 성서의 내러티브가 구체적으로 모두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다. 반대로, 성서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어떤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방법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몇몇 유명한 사건들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고고학은 성서의 역사 재구성에 도움을 준다.

 

고고학적인 발굴의 초기 목적은 창조과학의 초기 목적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내러티브를 기본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고고학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들을 찾기만 하면 될 거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성서의 핵은 이스라엘의 기원과 그들과 하나님과의 지속된 관계를 묘사하는 거대서사에 있다. 다른 고대 근동 신화와는 달리 땅에서의 역사에 굳게 기반을 두며,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주인공이며, 세계의 운명도 그들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게 아니라, J (Yahwist), E (Elohist), D (Deuteronomy), P (Priestly source) 등의 자료들이 합쳐져서 오랜 시간에 걸쳐 편집된 모음집이며, 기원전 7세기 말 요시야 왕 종교개혁 운동 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원과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역사적 환경 아래 써진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성서의 유명한 내러티브들의 역사성이 없다 하더라도 고대 이스라엘이 진실한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다만, 고고학 증거들을 기반으로 하여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여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모세오경 기록 시기를 요시아 왕 때로 보지만, 다른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 귀환 직후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더 늦게, 헬라 왕국 시기로 보기도 한다. 다양한 입장들이 있다. 신구약 중간기, 헬라 왕국 때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신명기적 역사관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 이스라엘의 회복과정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성서의 기록 시기를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Chapter 1: Searching for the Patriarchs.


창세기 팩트 체크 같은 본문이다. 족장들의 긴 수명이나 아브라함의 이동에 대한 고고학적 흔적이 없다. 또한 아람 종족이나 에돔 족속의 존재 증거도 고고학적으로 모호하다. 여러 고고학적 증거와 성서에 기록된 시기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Chapter 2: Did the Exodus Happen?


출애굽기 팩트 체크 같은 본문이다. 이집트 기록과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시기가 상충된다. 여러 고고학적 증거들에 의거하면 출애굽기가 이집트 26 왕조, 기원전 7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오히려 요시야 왕 때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고고학적 증거는 전체의 아주 일부분일 뿐, 전체가 아니기에, 확대 과장된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다시 말해, 저자가 말하는 고고학적 증거라는 것도 결국은 저자가 가지고 있거나 바라는 관점이 투영된 해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만 보면 저자의 필력에 압도되는 면이 있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거의 모든 항목들을 반박하는 책이 있다. Kenneth Kitchen의 책, "On the Reliability of the Old Testament"이다. 즉, 부분적인 자료들로 전체를 해석하는 건 정합성의 문제로 언제나 한계가 있으며, 그 때문에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케 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해석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는 객관적일 수가 없다. 허구와 신학적 의도의 분별은 언제나, 어쩌면 영원히 어려운 일이다.

 

교리적 방법론에서는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나와도 여전히 믿음이라는 이유로 그 객관적인 증거들을 무시하거나 축소시키는데, 증거들이 계속 많이 나오게 되면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궁금하다. 혹시 그래도 계속 믿음이라며,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자료에 무관하게 근본주의적으로 문자에만 의존하여 성서의 역사성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과연 이들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교리적 방법론을 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교리가 과연 완전무결한 것인지, 완벽해서 변경이나 수정이 불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혹이 남는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Chapter 3: The Conquest of Canaan.


가나안 정복에 대한 여호수아서의 내러티브가 고고학적 증거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보여주는 단원이다. 여러 신뢰도가 높은 이집트 자료에 의거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존재가 있기는 있었다. 여리고-아이성-네 개 부족 연합-가나안 정복의 순서가 성서에서 기록하는 순서와 일치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이유는 올브라이트의 해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반대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기원전 1550-1150년의 후기 청동기 시대의 이집트의 자료를 비롯하여, 가장 강력한 증거인 Tell el Amarna letters 점토판은 확실하게 가나안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으며, 가나안 국가들이 이스라엘로부터 침략받았다는 증거가 없다. 가나안 자체는 요새화 될 필요가 없었고, 실제로 병약한 곳들이었으며, 성벽도 없었다. 제국 이집트가 관리하고 있는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복설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가나안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나라가 이집트였다는 점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앞장서서 정복한 가나안이라는 국가들의 배후에는 강대국 이집트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가나안을 치면 이집트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고학적 불일치를 이유로 여호수아서를 새롭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적 변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텍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컨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서는 이스라엘 땅을 중점적으로 기술하지만, 고고학적으로 후기 청동기 시대를 보려면 가나안 경계에서 지중해 동부까지 넓게 봐야 한다. 당시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두 제국이 있었으며, 키프로스나 미케네 같은 강대국들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는 이러한 번영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몰락과 폭동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대격변의 이유 중 하나를 학계에서는 해양 민족이라는 존재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해양민족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가설은 있지만, 아직도 가설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가나안 정복에 대한 하나님의 폭력성을 이해하는 부분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의 해석이 존재한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을 때에도 늘 걸리는 문제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린아이까지 몰살해버리라는 명령이 과연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분과 동일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의혹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약 고고학적인, 비록 파편적인 증거들이지만, 자료들이 옳다면, 가나안 정복은 허구인 셈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늘 고민했던 가나안 정복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폭력성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저자의 단점은 고고학적인 부분적 단서만으로 확대 해석하여 자기가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즉, 저자가 주장하는 역사성은 고고학적인 증거들에 기반한 실제 역사가 아니라, 어쩌면 저자가 원하는 대로 써진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Chapter 4: Who were the Israelites?


앞의 1-3 단원에서는 족장 시대부터 가나안 정복, 즉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역사성을 따져봤다면, 이번 단원에서는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묻고 따져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에 이르는 거대 내러티브에서 찾지만, 과연 그게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을 부인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족이 아니라 원래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일 거라는 가설을 주장한다. 만약 여호수아서의 내러티브가 역사성을 가진다면, 여호수아가 이끌고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농경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광야 2세대들인데, 가나안에 들어와 농경 생활하던 가나안 민족들을 모두 몰살해버리고 난 이후 어떻게 농경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합리적인 질문이 가능해진다.

 

저자는 가나안의 경제적인 불균형 때문에 일부 소수의 반역 소작농들이 산악지대로 옮겨가 평등사회를 만든 게 바로 이스라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대로 경제적으로 착취당한 자나 반역소작농들이 이스라엘의 시작이라면 현재 유대인들은 굉장히 불쾌할 거라 예상된다.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가 흔들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모세와 여호수아에 인도 하에 홍해도 건너고 요단강도 건너고 여리고성도 무너뜨리며 우상을 섬기던 가나안 토착민들을 몰살해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예배하는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어야만 하는데, 그게 아니라 반역 소작농들과 같은 가나안 토착민 중의 일부가 그들의 시작이라고 하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감히 상상도 안 갈 지경이다.

 

농경-유목 생활의 패턴 변화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자료들과 광범위한 산악지대 발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주된 어려움은 타 종족과의 전쟁이 아닌 지형과 환경, 즉 먹고사는 문제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미 외부 유입으로 말미암은 가나안 정복을 허구라고 보는 저자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전쟁이나 정복 따위가 아닌 그야말로 굶주림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문제였다는 주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말을 다시 하면, 초기 이스라엘의 생성은 가나안 문화의 붕괴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고학적인 증거는 가나안 정복이라고 알려진 시기에 산악지대 인구의 갑작스러운 증가를 알려주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모르는 상태다. 그들이 사용하는 토기나 도자기 등의 문양의 차이는 곧 물질문명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들의 분석으로 미루어 보아 그 증가된 인구 집단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지역의 그것들과 다른 문양을 사용했던 증거도 있기 때문에, 어쨌거나 알 수 없는 새로운 집단이 산악지대에 존재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집단이 새로 유입된 사람들인지 원래 가나안에 있던 일부의 사람들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저자는 후자를 주장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전자를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는 돼지 뼈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나름 구별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된다. 코펜하겐 학파를 위주로 한 학자들은 '이스라엘은 없다'라는 주장까지 한다고 한다. 그들은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난 것 한 가지는 비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원을 왈가왈부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도 사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통일되게 알고 있지 않지만, 타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기원과 정체성을 가지고 여러 가설을 세우고 서로 논쟁하는 모습은 어찌 보면 참 기가 막힌 노릇일지도 모른다.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Chapter 5: Memories of a Golden Age?


이 단원에는 다윗과 솔로몬 왕의 황금시대가 실재했는지 고고학적인 증거들로 추정하며 그 역사성을 다시 재검토해보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성서 미니멀리스트들의 입장은 다윗이 아더왕보다 덜 역사적 인물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그만큼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황금시대라고 할만한 화려함과 강성함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특히 솔로몬이 지은 성전 등의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다고 한다. 물론 합리적인 반박은 가능할 것이다. 로마시대 때 전부 파괴되었기 때문에 없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윗 왕국의 실존성을 'House of David'라고 써진 비문을 Tel Dan에서 발굴해서 확인되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뿐 아니라 모압 왕 메샤의 비문에서도 다윗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적어도 다윗이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산악지대에 살고 강대국도 아닌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집트의 속국이었던 가나안 도시들을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었을까? 만에 하나 그랬다 하더라도 왜 기록이 없는 걸까?" 여기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은 후미지고 낙후된 고지대 유목 마을일 뿐이지만, 성서에서처럼 황금시대로 기록된 것은 신명기적 역사관의 반영이며, 신학적인 희망이 담긴 허구라고 말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우린 너무 확신해서 믿어도 안 된다. 언제나 파편적이라 불충분한 자료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거기엔 해석의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처럼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소설을 성서이라고 믿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증거로 추정한 것들을 가설의 합리적 가능성 제시 정도로 끝내야지 그것만이 옳다고 우기면 안 된다.

 

 

James K. Hoffmeier and Dennis R. Magary, Do Historical Matters Matter to Faith? Chapter 4. These Things Happened: Why a Historical Exodus is Essential for Theology  요약 및 정리.


저자는 고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인 방법이 아닌 신학적인 방법으로 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교재 2가 성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다면, 교재 3은 옹호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만약 출애굽의 역사성이 허구라면, 그 이후 기독교 신앙 형성에 중요한 많고 많은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역으로 출애굽의 역사성이 거짓일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허구에 불과한 출애굽으로부터 기인했겠냐고 되물으며 그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출애굽이라는 사건 하나만으로도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여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데, 어찌 그 출애굽 기사가 다 허구일 수 있겠냐고 신학적으로 따지면서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신앙은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은혜로 받았다는 믿음이란 그 실체가 무엇일까. 성서의 역사성이 기반이 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역사성을 인정해야 하고, 또 어디부터는 허구여도 되는 것일까. 성서가 역사책도 아니고 과학책도 아니며 신학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책이라는 합리적인 입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만약 그 신학적 메시지가 순수한 허구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뿌리 채 뽑히진 않을까. 아니면 그런 것들이 아무래도 좋으니 변함없이 굳건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신앙의 근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한 번쯤은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이다.

 

다음 모임은 2월 19일 수요일 저녁 6시 30분에 풀러 신학교 2층 컨퍼런스 룸에서 동일하게 모인다. 주제는 "예수의 역사성"이다. 교재는 새물결플러스 스펙트럼 시리즈 1인 "역사적 예수 논쟁"과 Luke Timothy Johnson 저, "The Real Jesus", 이렇게 두 권이다. 진지하게 관심 있으신 분은 언제든 먼저 연락하시고 참관하셔도 된다.

 

글_ 김영웅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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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살리는 기독교 페미니즘 (백소영)

 

오늘(2월 8일) 분당성공회 교회에서 백소영 교수님 특강이 있었습니다.

 

여성운동의 녹두장군처럼 녹두색을 멋지게 입고 가뿐히 날아오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신앙과 과학처럼 신앙과 페미니즘도 대화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오늘 우리의 북콘서트는 막을 올렸습니다.


“왜 지금 우리는 페미니즘에 눈을 크게 뜨고 있는가?” 지금은 페미니즘 re-boot 시대! 신앙과 과학이 상보적 관계에 있는 것처럼 페미니즘도 신앙과 상보적 관계에 있어 대화를 나눌수록 ‘살고 살리는’ 아름다운 공동체성을 살려낼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강의는 뜨거워졌습니다.

 

 

페미니즘은 우리 공동체의 Text와 Context에 그 동안 배제되었던 여성의 경험, 시각, 의미, 해석을 포함시키는 ‘이념’이고 ‘운동’이라는 강사님의 포문에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명예남성”이 되어 자신도 오천 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소수 지배권력 집단들에 의해 면면하게 형성돼온 ‘가부장제’의 희생물임에도 그 자각이 없이 동일하게 지배 권력에 편승 또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향해 억압의 채찍을 휘두르는 여성에 대한 고찰과 남성의 지배구조에 힘을 보태고 있는 ‘거세된 여성’에 관한 담론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여성을 약자로 보았을 때 자신도 그와 같이 약자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남성 페미니스트, 상황화를 위한 ‘여자되기’의 남성 페미니스트 주제로 페미니즘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래디컬 페미니즘의 경계를 훑어보는 것도 첨예한 주제로 유익했고, 다시 한번 강조되는 교수님의 성경 독법인 ‘경줄’과 ‘위줄’의 개념도 신선한 미드라쉬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보편성’과 ‘초월성’이 담보되는 ‘경줄’입니다. 그러나 잠자는 남성의 갈비뼈로 여성을 만드셨다는 것은 ‘위줄’로 해석을 다시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히브리어는 ‘아담’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것은 바로 남자가 아닌 ‘사람’ 임으로 ‘남성’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셔 ‘여성’을 만드신 것이니, 여성은 ‘남성’의 한 부분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는 해석입니다. 사람을 만드신 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여 만드셨다는 것이 더 정확성은 높은 해석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동안 너는 나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니라’ 그 달콤했던 사랑의 고백이 오류에서 기인했던 것이군요.

 

 

끝나지 않는 질문과 교수님의 열정적인 답변으로 분당 교회는 펄펄 끓는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참석하신 분들 대부분이 젊은 분들, 그것도 남자 청년들이 많은 것을 보고 좀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여성들과의 대화에 그만큼 진지하고자 하는 것이니까요.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저의 훨씬 선배가 되는 딸아이가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하니 감사하고, 이제 딸과 조금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저 개인적으로는 어제 독서모임에 이어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긴긴 질문 끝에 단체 사진을 찍어 오신 분들을 다 담지 못해 좀 아쉬웠습니다ㅠㅠ

 

저희들의 유익함을 위해서는 언제나 문을 열어주시는 분당 성공회 교회에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글_ 김란희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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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판교 북클럽]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진정한 페미니스트 선언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선포하는 것과 같다. 모두가 존귀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에서의 페미니즘은 여성주의 시각으로 성경을 ‘의심하고, 비판하고 재구성하기’가 뜨거운 이슈다. 사회주의 기독교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만큼이나 기존의 페미니즘을 해체의 대상으로 본다. 저자는 ‘재해석 이상의 해석학’의 입장에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저자가 聖經(성경)의 “경”자인 ‘세로실’을 단서로 성경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 경줄 사이사이 사람의 손을 의미하는 ‘위줄’이 가로로 들어가 단단하게 직조된 옷감으로 표현한 것이 매우 흥미롭다. 그렇기 때문에 ‘위줄’의 재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경줄’로서의 메시지는 이어받겠지만 여성 억압적인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전통을 세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시한 읽기이다.

 

페미니즘 시각으로의 성경 읽기는 낯선 것이 아니다. 행간을 풍성하게 채워있는 ‘미드라쉬’의 한 가지인 것이다. 초기 교회 언니 나혜석은 창세기의 창조 명령을 "살아라"라는 존재 명령, 최용신은 "살려라"라는 구원 명령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모임의 구성원들인 남성들은 중산층 시각에서 페미니즘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이 다수였고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몸으로 살아내는 다양한 계층의 워커들이었다. ‘워커’라고 다소 애매한 표현을 쓴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에 따라 일하는 내용도 여성으로 체감되는 ‘억압’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통분모는 ‘직업인’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들 간에도 논의의 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지점이다.

 

‘경줄’과 ‘위줄’로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와 ‘페미니즘으로 성경 읽기’라고 해서 성경의 중요 서사는 달라질 것이 없고 ‘성경 안에서의 여성 리더 찾기’와 같은 것은 관점을 달리 한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읽기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20대 청년세대에서 10% 내외의 우수한 여성들에게 90%의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불편한 시각을 갖는 것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의 필요성이 역설되는 것이 아니냐는 토론과 아무리 가열 차게 독립된 주체로서의 ‘삶’을 주장하던 여성들도 결혼만 하면 ‘남성 중심의 문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리 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어느 쪽이든 불편해지면 또 부당한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 ‘남녀’가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동반의 관계가 서로의 행복을 담보해 주고, 그것이 인류 전체로 확산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행위나 선택의 결과가 아닌 주어진 조건만으로 차별되거나 배제 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곳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숙대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 젠더 여성과 제발 여군에 전입시켜 달라며 눈물을 흘렸던 그 여성 분의 애절함이 오늘 모인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만이라도 ‘존재형태’로 누군가 우리의 공동체에서 배제된다면 충분히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7시 30분에 만나 11까지 담소와 논쟁과 토론과 수다가 섞여 아쉬운 ‘페미니즘 읽기’ 시간을 보냈다. 창가에 핀 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달달한 포도주와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의 옳은 삶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우리 서로는 행복해했다.

 

글_ 김란희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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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판교 북클럽] 커넥톰

 

“정신은 뇌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인가?” 아니면 "영혼과 같은 비물질적 실체에 의존하는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을 생각나게 하는 책입니다.

 

보수적인 (그리고 업데이트되지 않은) 교리 공부를 받은 입장에서 정신을 물리적 사건으로 다루는 신경정신과학을 접하게 되면 영혼-육 이원론 혹은 영-육-혼 삼원론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식의 섣부른 종교재판을 먼저 하려는 습성이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리 경찰관이라도 되는 양 매의 눈으로 자료를 찾다보면 이미 “기독교 사상사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아퀴나스에 기인하는 통전적(또는 일원론적) 흐름”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고 “나의 무지가 곧 과학이나 신학의 한계가 아니다”는 명언이 옳구나~ 하며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게 되지요(음... 누구의 명언인지는 안알려줌).

 

 

커넥톰의 저자 자신은 “영혼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를 하나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과학 대중서를 쓴 저자가 영혼의 존재를 인정 혹은 부정하기 위한 의도로 쓴 말은 아니겠습니다. ‘영혼’은 이원론이나 삼원론 관점에서라면 과학의 대상이 되기 힘들겠고 일원론의 관점에서라면 신경과학의 대상인 ‘정신’ 이상일 수 없거나 신경과학이 다루는 것 그것이 곧 영혼(의 일부라)도 다루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경정신과학이 인간의 정신을 물리적 현상으로 다룬다고 해서 그것이 곧 기독교 전통의 ‘영혼’ 개념을 훼손하거나 부정하려는 시도는 아닌 것이죠. 그런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과학적인 것이겠구요.

 

신경정신과학의 발전은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도와주리라고 기대합니다. 과학이 영혼 또는 영혼의 의미를 어떻게 할까 걱정하기보다는 과학의 연구성과를 신학이 어떻게 정리하고 받아들일까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뇌간에 의해 매개되는 반사작용, 뇌파, fMRI 등을 통해 측정 가능한 범위에서 과학의 대상이 되는 영역이 있고 이것을 표현한 단어 ‘정신’. 이 단어를 ‘한스 큉’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에서 저는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정신’ 역시 진화의 산물임에 대해서도 말이죠.

 

“인간 정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임이 계통발생사적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인간의 뇌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유인원에게서도 그 초기 단계가 일부 나타난다. 따라서 뇌 없이는 정신도 존재할 수 없고 특정 뇌 중추의 활동 없이는 지적 성취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전제하자. 그렇다면 신학적으로 은근슬쩍 넘겨 버려서는 안될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_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분도출판사, 240쪽)

 

‘정신’, ‘의식’, ‘영혼’


비슷한듯 비슷하지 않은듯이 구분되는 이 단어들을 한달동안 마치 기도를 위한 ‘거룩한 단어’로 삼기라도 한듯이 마음에 품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제 뉴런들이 참 고생이 많았습니다. ㅋ~

 

‘영혼’, ‘의식’ 이야기는 이 책 ‘커넥톰’이 다루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겠는데요. 다른 책을 통해서 북클럽에서 다루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아무래도 철학이나 신학의 범주로 넘어가야겠지요.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커넥토믹스’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창조과학처럼 종교적 교리 아래에 두고 판단하려 하거나 지적설계처럼 신경정신과학이 아직까지 밝히지 못한 문제나 확률 계산 같은 복잡성에 비집고 들어가 종교를 주입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유전자 이상이다. 당신은 당신의 커넥톰이다.”

 

한 회원이 이 대목을 읽다가 (조금 과장해서) 대성통곡을 하셨답니다. 유전자는 운명으로 느껴지게 하는 반면 커넥톰은 운명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보여주는데요. 마침 이 글귀가 큰 위로가 되셨다고....... 😭😭😭

 

 

갓 익혀 따끈따끈한 막거리빵을 가져와 주신 분도 계셔서 훨씬 맛있기까지한 독서모임이었습니다. 이 곳을 통해 한번 더 감사드려요~ ❤️

 

  • 과신대 분당/판교 북클럽 다음 모임은 2020년 1월 10일에 있을 예정입니다.

  • 독서 분량은 ‘커넥톰’ 8장~끝까지 되겠습니다.

강사은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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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톡] 살고 살리는, 기독교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기독교와 교회에서는 낯설기만 합니다. 성공회 분당교회에서 과신대와 함게 과신톡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기독교와 페미니즘에 대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백소영 교수님께 허심탄회하게 묻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누구든지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일시: 2020년 2월 8일(토) 오후 2시 

장소: 성공회 분당교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로 255 티에스로드2 빌딩 7층)
https://www.skhbundang.or.kr/180

강사: 백소영 교수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대상: 누구나

 

진행 순서

2:00-3:00 "살고 살리는, 기독교 페미나즘"

3:10-3:50 청중과의 거침없는 대화

3:50-4:00 저자 사인회 및 기념 촬영

 

** 참가신청_ https://bit.ly/361nk6l ** 

 

강사 소개: 백소영 교수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이화여자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기독교학/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B.A., M.A.)했고, 미국 보스턴대학교 신과대학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비교신학으로 박사학위(Th.D.)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2007-13),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2016)를 거쳐 현재는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의 사랑이 義롭기 위하여』(2005), 『엄마 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2009), 개정판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2013,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콘텐츠 전자책 제작지원 도서), 『드라마틱: 예수와 함께 보는 드라마』(2010), 『잉여의 시선에서 본 공공성의 인문학』(책임저자, 2011), 『인터뷰 on 예수』(2011),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2013,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교회를 교회되게』(2014), 『사회적 영성: 세월호 이후에도 ‘삶’은 가능한가』(공저, 2014), 『왜 눈떠야 할까: 신앙을 축제로 이끄는 열여섯 마당』(공저, 2015), 『삶, 그 은총의 바다』(2016), 『버리지 마라, 생명이다』(2017), 『드라마 속 윤, 리』(2017),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2018, 세종우수교양도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대학 강단만이 아니라 교회 및 시민단체 대중특강, 그리고 〈CBS 크리스천 나우〉, 〈C스토리〉, 〈CBS 성경사랑방〉, 〈CBS 아카데미, 숲〉, 〈CGN 크리스천의 문화 읽기〉 등 매체를 통해 기독교적 세계관과 공동체 윤리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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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인천 북클럽] 공명: 창조, 섭리, 그리고 관계성

  • 과거 신학을 철학으로 하려던 토마스 아퀴나스 처럼 이제는 신학을 과학으로 하려는 시도들이 시도되고 있지는 않나 봅니다.

    증인 2020.01.08 23:38

 

모임 일시: 2019.12.9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박영식 교수 연구실
교재: 존 폴킹혼, <과학으로 신학하기> (모시는사람들)

 

 

2019년 마지막 모임을 박영식 교수님 연구실에서 가졌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존 폴킹혼의 <과학으로 신학하기>를 읽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서 다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5장부터 끝까지 읽고 이야기를 나누려 했는데, 실제로는 5장을 자세히 다루고 나머지는 간단하게 언급만 했습니다. 책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고 기억을 더듬어 토론 내용을 정리해봅니다. 

 

1. 폴킹혼의 과학과 신학의 역할, 목적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과학의 관심사는 과정에 있고, 신학의 관심사는 목적과 의미에 있다"(161쪽)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학과 신학은 상호 공명할 수 있고, 경쟁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와 '왜'는 별개의 대답들이지만, 이들이 답을 내는 형식들은 양립하면서 서로 맞아떨어져야 한다." (161쪽)

 

2. 창조론은 시간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기원을 밝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법칙과 규칙 그리고 이론이 가능하게 하는 창조자입니다. 양자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의 법칙을 만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 우주에 'Made in God'이라는 도장이 찍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우주를 관찰하고 연구해서 신의 흔적을 밝히려는 시도가 있다면 그것은 "과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하는 것"입니다.(164쪽) 

 

그러고 보면 신학은 과거에 학문의 여왕으로 자리매김을 했지만 이제는 과학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거 같습니다. 신학은 과학의 결과를 수용하면서 그 내용을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현실이 씁쓸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려는 과학이야말로 과거 신학의 역할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3. 폴킹혼은 많은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이야기하는 '인류학적 원리'를 통해 충분히 신학적인 설명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인류학적 원리를 통해 다중우주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폴킹혼이 보기에 이는 너무 과도한 존재론적 낭비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런 과학적 사변은 오히려 과학정신과 상반된다고 말합니다.(172쪽)

 

 

4. 과학에서 말하는 '우연과 필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폴킹혼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은 신의 섭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유전적 돌연변이가 없다면, 새로운 종들의 출현은 불가능할 것"이고,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실제 비율이 자연선택을 통해서 걸러지고 유지됨으로써 흥미로우리만치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들이 전개"된다고 합니다.(174쪽)

 

창조자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개입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서 피코크가 말한 것처럼 "창조의 역사는 영원 속에 미리 그려진 고정된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과 창조자 모두가 참여하여 조금씩 만들어가는 즉흥곡으로 봐야 한다."(175쪽)

 

그렇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뿐만 아니라 '연속 창조' 혹은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역시 같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발전에 반드시 신의 개입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발전은 "창조자가 창조에 부여하여 내재된 풍부한 결실성을 표출한 새로운 양태들로 이해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176쪽) 이미 완벽하게 만들어진 세계보다 진화하고 있는 세계가 더 멋진 세계일 수 있습니다. 

 

5.  진화론을 통해 창조를 이해하면 신정론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은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피조물의 세계가 지불해야 할 필연적 비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177쪽) 죽음과 탄생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라는 어쩌면 위험한 선물을 통해서 구현되듯이, 이 자연 세계 역시 고통과 기형이라는 피할 수 없는 대가를 통해 더 좋은 세계를 형성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free will defence는  free process defence와 함께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때 그동안에는 흔히 자연현상이라든가 법칙을 거스리는 방식으로 이해해왔는데, 오히려 자연을 완성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열린 성격을 갖도록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이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일단 "자연의 제정자인 신은 틀림없이 자연 과정의 개방적인 기질 안에서 일하시지 그 기질에 반해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184쪽) 초대교회의 교회 오리겐은 "더운 여름에 시원한 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습니다.(185쪽)

 

7. 양자이론이 가져온 새로운 세계 이해는 신학에도 여러 가지 통찰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양자이론은 "원자속 세계에 깊이 들어앉아 있는 관계성의 존재를 입증했다"라고 합니다.(188쪽) 이는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귐으로서의 존재'(being as communion)라는 진리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고 합니다. 사랑의 상호 소통이라 불리는 페리코레시스의 핵심은 상호적 관계성이기 때문입니다. 폴킹혼은 "물리 세계에 대한 과학의 묘사는 이 세계가 삼위일체 신의 창조물이라는 믿음과 눈에 띄게 공명한다"라고 말합니다.(190쪽)

 

8. 폴킹혼의 책을 읽으며 그동안 과신대에서 들었던 내용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다시 한번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되어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좋은 번역으로 새롭게 재탄생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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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인천 북클럽] 계시는 실험노트와 같다.

[부천/인천 북클럽 10월 모임]

 

 

일시: 2019.10.15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박영식 교수 연구실
교재: 존 폴킹혼, <과학으로 신학하기> (모시는사람들)

 

2019년 하반기에 부천 북클럽에서는 존 폴킹혼의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읽을 책은 <과학으로 신학하기>라는 책입니다. 지난 모임에서는 1장 "맥락신학"을 읽고 이야기했습니다.

 

  1. 폴킹혼은 "성서는 이러한 계시를 수반하는 토대적인 만남들에 대한 설명이 기록된 실험노트"라고 말합니다. "계시 자체는 명제적이라기보다 실험적"이라고 말합니다. 계시가 명제가 아니라 실험노트와 같다는 말에 대해서 논의를 길게 했습니다. (39쪽)

  2. 19세기 오므리 무어는 다윈의 진화론이 오히려 신의 섭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진화론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신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창조자로 남아 있지 않고 피조물들이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자연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로 결정하였다"고 생각한 거죠. (42쪽)

  3. 폴킹혼은 판넨베르크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판넨베르크는 "과거와 현재보다 미래가 우선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53쪽), 폴킹혼은 이런 입장을 납득하기 어려웠나 봅니다.

  4. 그러면서 폴킹혼은 아서 피코크의 비유를 빌려, 우주의 역사는 "창조자와 피조물들이 함께 연주하는 멋진 즉흥연주 푸가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54쪽)

  5.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기적을 물리 세계 내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셨던 로버트 러셀 교수님의 의견도 첨언해서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부천 북클럽 모임은 언제나 먹을 것이 넘칩니다. 박영식 교수님께서 늘 간식을 풍성하게 챙겨주시네요~^^

관심 있는 분들은 누구든지 환영입니다.

 

 

  • 다음 모임 시간: 10월 29일(화) 저녁 7시 박영식 교수님 연구실

  • 다음에 나눌 내용: 2장 담론, 3장 시간과 공간, 4장 인격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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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판교 북클럽] 신구약 중간사와 기독교의 기원 탐구

[분당/판교 북클럽 9월모임 후기]

 

박정수, <고대 유대교의 터·무늬> (새물결플러스, 2018)

시간/장소 : 9/29일 금요일 저녁 성공회분당교회

발제: 박철성 님

 

나는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에 공백, 느부갓레살의 예루살렘 패망 후,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났기에, 독립된 나라없는 백성들이 500년간을 유대교 라는 분리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종교를 자리매김해서 초대 기독교에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것이 늘 궁금했다.

 

책의 시작은 앗수르, 바빌론 등의 강압통치를 일삼은 제국의 몰락을 경험한 키루스(고레스)가 페르시아 속국들에게 종교와 관습을 허락하는 "문화정치"로 시작된다. 유대 예루살렘 성전, 바빌론의 마르둑과 이집트의 신들, 그리스의 아폴로 신전제사가 허락되었고 정복민들에게 마치 이전 왕조의 지배가 계속되고 있는 안정감을 주려는듯 그는 바빌론의 후계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강사은 님의 표현처럼 고레스 덕분에 유다가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의 연장선 상에서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귀환이 시작되었으나 이는 그땅에 남아있던 대다수 백성들에게는 또 하나의 갈등의 시작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마치 6.25때 서울이 북한군에게 3일 만에 점령되어 남아 있던 대다수 서울시민들이 서울 수복후 부역자로 몰린 것과 같은 상황이 떠올라 한동안 상심에 잠기었다.

 


초기 귀환 그룹 스룹바벨은 다윗 왕조의 부활을 꿈꾸며 이방인이 되어버린 남은 자들을 부정하다하여 성전 재건에 참여시키지 않았고 이에 반발한 사마리아 이방인(?)과 정치적 독립을 달가워하지 않는 페르시아에 의해 좌절되었다.


20년 후에 (기원전 538년 ~ 515년) 성전재건 목표 수정하여 성전 자치 공동체의 지위에 한정하며 이방인 혼합주의자/동화주의자들을 받아들인 후에 성전이 재건되었고, 에스라 7-10장 성전 완공 후 50년 후 458년 에스라가 종교특사로 파견되며 도시재건과 개혁,성벽건설까지 완성되었다. 


초막절 희생제사 - 에스라의 수문 앞 광장 율법 낭독에서 총회를 주관한 느혜미야 총독과 함께 이스라엘의 종교적 회복을 이루는 모습이 성경에서 정말 감동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치적인 공적인 영역은 제한되었고, 개인적인 종교적인 면의 성과에 머물러서 성전제사와 공통체의 제의적 정결에 집중되었다.

 


정훈재 님이 소개한 <시편 사색, 시편 한 권으로 읽기>처럼 시편 첫 권은 현실 왕조/왕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면 뒷 권으로 갈수록 왕이 없는 식민지 백성의 바램이 묵시적으로 변화한다. 오늘 현실의 시련 앞에서 먼미래에 경험하게 될 구원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표현하게 되고 성전 제사장 세력에서 제외된 에스겔 등에 의해서 교회에서 찬양할때 늘 부르던 "젊은이가 꿈을 꾸고 노인이 환상을 보는" 묵시문학의 태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300 영화로 익숙한 페르시아가 야만이 아닌 나름 관용적인 개방정책으로 헬레니즘 이전에 이미 그리스 문화가 에후드 지역에 가득했고 디아스포라와 함께 이러한 배경이 초대기독교가 널리 확장된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팔레스타인 지명은 로마 통치시절 잦은 유대 봉기를 괘씸하는 여긴 로마황제가 블레셋을 본따 rename 된 것으로 유대인들은 태생부터 싫어 할만한 단어라 하겠다.


모임 뒷 부분은 김자현님이 유엔 회의 중에 구술 문화권의 중동의 외교관들이 상당한 언변이 강하다고 설명을 들었고, 유대교의 미쉬나 완성과 성전 보조직에 한정되었던 레위인들을 사독 가문으로 대표되는 신정정치의 승리자(?) 제사장계급이 파트너로 연합함으로써, 서기관 계급이 태동하는 과정을 살려보았고 외경으로 접하는 마카비 혁명을 다음시간에 고대하며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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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판교 북클럽] 바울 당신은 어찌 그러셨소~

분당 판교 북클럽 8월 모임 후기

 

 

바울! 어찌 이런 일을~

 

유사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이 과학을 엉뚱하게 변곡시킬지라도 성서 문자를 손대는 경우는 못본 것 같은데 바울은 (히브리) 성서 텍스트를 수정해서까지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키는군요. 음... 바울은 적어도 문자주의자는 아니라는?

 

시편 95편에서 40년 광야는 ‘징벌’이었던 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시편에는 없던 “그러므로”(3:10)를 삽입해 징벌이 광야 이후의 것이 되도록 변경해 인용했습니다.

 

——


(히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 3: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히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히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

 

왜? 바울의 유비에 있어 광야 40년은 쉽게 설명해 탄생-삶-죽음 중에서 ‘삶’에 해당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삶’ 자체가 징벌인 것으로 관계지을 수는 없는 노릇인거죠. 암요~

 

히브리서는 시편 95편처럼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나님의 진노로 정의하지 않는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이 “믿지 아니하는 악심”(히 3:12)을 버리지 않으면 임하는 것으로, 굳이 말하자면 40년의 기간이 지나 임하는 것이다. p. 200

 

한 때는 구약성서에도 없는 내용이 신약에서 발견되면 무척 신기해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역시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라 구약에서 밝히지 않았던 것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들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신약에서 그 비밀을 밝힌 것이겠거니.... 식의 생각이었죠.

 

유다서 9절의 모세 시체 쟁탈전이 그런 예입니다.
모세의 시체를 두고 천사와 사탄(?)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다? 아주 흥미롭죠. 뭔가 심오한 뜻이라도 있는 줄 알았었다는..... 저의 흑역사입니다. ㅜㅜ

 

요즘에 와서야 그저 고대인들의 공유하고 있던, 조금 과장해서 고대인의 상상력의 발현이겠거니 하게 됩니다만 이렇게 말하면 상처받으실 분도 있을테니 어떻게 포장을 해야 할까요. ㅠㅠ


(아~ 하지만 나는 루비콘 강을 건너 버렸어~. 아니지~ 성경’쩍’으로 요단강을 건너 버렸어~. 아! 요단강은 죽음을 의미하나? 그럼 다시 루비콘 강으로....)

 

 

피터 앤즈의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은 2가지 관점으로 사도들의 히브리 성서 해석 관점을 이해하자고 합니다. “1. 그리스도 목적적. 2. 교회 목적적” 차원에서 그들은 구약, 즉 히브리 성서를 이해했다는 것이죠. 비록 이것이 사도들의 해석 관점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아닐지라도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고대와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해석 관점을 사도들에게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덜 부자연스럽다고 말이죠. 사도들이 빅뱅, 블랙홀, 진화, 성소수자에 대한 현대 정신의학계의 연구 결과를 알 리가 없죠.


이 지점에서 우리가 속한 종교는 성경교가 아니고 그리스도교(기독교)라는 점을 기억해 봅니다. 적어도 바울의 해석관점이 문자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피터앤즈는 성서 해석이 과학의 산물이라기보다 예술적인 활동(문학적이기도)이고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 공동체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방어할 요새의 관점이 아니라

 

“나는 성경해석을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여정, 우리가 함께 하는 순례길로 보기 원한다. 여행의 길을 가면서 주변의 경치를 즐기다 보면, 보다 많은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럼으로 우리의 해석도 더욱 풍부하게 될 것이다.” p. 232

 

라고 말이죠.

 

분당/판교 북클럽 9월 선정 도서는 신구약 중간사를 다룬 “고대 유대교의 터·무늬”(박정수, 새물결플러스)입니다.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2부까지 읽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p.s. 구운 계란, 찐 고구마로 배불려 주신 김란희님께 감사드립니다. 급히 조문을 가시는 길이셨죠. ❤️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