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책] 파란하늘 빨간지구

 

조천호 | 파란하늘 빨간지구 | 동아시아

 

글_ 윤세진 (구일고등학교 과학교사)

 

 

2004년에 개봉된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는 재난영화 중에서도 상당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제작된 영화이다. 급격한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북극의 해수 밀도가 낮아지고, 그 때문에 전 세계의 해류 순환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표층수가 심층수로 하강하는 작용이 멈추게 된다. 이로 인해 해류 순환이 중단되면서 적도와 극 사이의 에너지 교환이 중단되고 결국은 전 세계가 급격하게 빙하기로 접어든다는 줄거리이다.

 

그림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hermohaline_circulation (책 100쪽 참고)

 

영화가 개봉될 당시에 사람들에게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를 주기도 했지만, 영화니까 좀 과장된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만일 이 영화가 과장된 거 아니냐는 의견이 있는 사람들은 조천호 교수의 책 “파란하늘 빨간지구“를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조천호 교수는 국립기상과학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기후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에 접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기후위기에 대한 많은 기고 활동을 하였으며 그 결과를 모아 이번 책을 썼다. 그 결과로 이 책은 기후 위기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지구의 탄생으로부터 인간의 탄생까지의 간략한 지구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인간이 지구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지구의 일부분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결국 인간의 활동은 지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하자는 저자의 생각을 볼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역사가 기후 변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을 통해 기후가 역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현대는 지질학적으로 신생대의 홀로세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활동에 의한 인류세(Anthropocene)의 도래를 다루어 지구의 기후 변화와 인류 역사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류세는 인간 활동이 특히 생태계와 기후에 중대한 환경적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20 세기 중반 이후 현재까지를 말한다.

 

<인류세에 대한 참고자료>

1. https://www.sciencetimes.co.kr/news/홀로세-가고-인류세-올까/

2. https://ko.wikipedia.org/wiki/인류세

3. 인류세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들에 대한 연구 논문: 김지성, 남욱현, 임현수(2016)가 정리한 “인류세(Anthropocene)의 시점과 의미”(http://jgsk.or.kr/xml/06438/06438.pdf)

 

 

그다음으로는 인류에 의해 증가된 온실 가스에 의해 발생하는 극한 날씨(폭설과 폭염, 태풍의 증가 등)의 일상화를 다룬다. 특히 현재 발생하고 있는 온난화에 의한 이상 기후 현상은 이미 30-40년 전에 대기 중에 발생한 온실 가스에 의한 것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는 현재 기후 위기 현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함과 아울러, 지금 이에 대한 대책을 “실행“하지 않으면, 미래세대는 현재보다 더한 기후 위기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다.

 

다음으로 다루는 것은 기후 문제는 다양한 문제들과 연동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후 위기와 관련된 것으로 인구 증가 문제, 물 부족 문제, 식량문제, 생태계 파괴 문제, 급작스런 기후 변화 문제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이 문제들은 각자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에 놓여있다. 따라서 기후 변화에 대한 해결책도 단순한 대중적 요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 다양한 관점에서 기후 위기 문제를 바라보고 그 해결책을 찾아야 비로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것은 기후 변화 또는 기후 위기를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학적 소양이 필요함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기후 위기에 대한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수행하는 정당한 비판은 과학의 특성상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기후 위기에 대한 부정론자들이 과학적인 근거가 없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과학적인 활동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일상에서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로, 내가 모르는 과학과 관련된 의견을 청취할 경우에는 그 근거가 과학적인지를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반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이름만 따라갈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과학적인 사고와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과학은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부단히 다양한 증거를 찾고 그 증거들이 보여주는 일관성을 바탕으로 과학이 이루어짐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자주 언급하는 것이 이산화탄소를 필두로 하는 온실 가스로 인한 지구의 온난화이다. 산업혁명 이래로 꾸준하게 증가하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아주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특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러 자연재해들(폭염, 폭설, 태풍, 기근 등)의 발생 빈도와 발생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 것이 결국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때문이라는 경고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림출처: https://bit.ly/2RqyqNJ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기후 위기를 초래하는 여러 요소들을 발생시킨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이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에 의한 피해는 선진국이 받는 것이 아니라 저개발국가에서 받게 되는 모순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기후 위기에 대한 책임을 선진국이 나서서 해결하려는 자세를 촉구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기후 위기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 조차 부족한 상황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온도 상승의 경우에는 지구 평균 기온을 웃돌고 있는 상황이다.

 

기후 변화 혹은 기후 위기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논의되기 때문에,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이 기후 위기는 이미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1980년대 대기 중에 방출된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실화 효과가 쌓여 현재 기후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저자의 경고는 아주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기후 변화로 인한 물 부족과 식량부족 문제가 정치적인 지형을 바꾼 여러 사례를 통해 기후 변화가 우리 일상의 문제에 실제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2도 이내로 안정시키자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 이후 기후 변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2018년 IPCC에서는 2도도 위험하니 1.5도로 제한해야 극단적인 기후 변화를 피할 수 있다고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2040년 경에 지구 평균 온도는 1.5도 상승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온도가 이 한계를 넘어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상태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전방위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래 그림은 지구의 현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두 개의 미래를 나타낸 것이다. 만일 현재 지구 상태에서 온실 가스가 계속 방출된다면, 지구는 빠져나올 수 없는 “찜통 계곡”에 빠지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온실 가스 배출을 줄여 안정된 지구로 가야 한다. 이에 대한 책임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그림 출처 : https://www.pnas.org/content/115/33/8252 (책 121쪽 참고)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View vol.40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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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



과신대의 소식을 전하는

과신대 VIEW - 40호





과신대 칼럼

메노키오와 갈릴레오,
교회 권위의 위기


최종원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과신대 자문위원)

17세기 유럽 교회가 겪은 위기는 교회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져 내리면서 생긴 권위의 위기이기도 하다. 교회 자체적으로 반복되는 윤리적 위기와 함께 과학 발전이 던지는 신학의 위기도 있다. (더보기)


[과신대 사무국 소식]

이번달에는 과신대에 무슨일이?! 
사무국 소식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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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이야기 - Story]
[김영순 교수 인터뷰]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다문화 인문학

인터뷰 : 백우인 (과신대 출판팀장)

다문화융합연구소는 7월 7일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다문화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콜로퀴움을 개최했고, 7월 17일에는 <다문화사회와  다종교 교육포럼>이 개최되었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과학과 신학만의 대화에만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관계와 대화의 장은 사회 전반의 주도적인 이슈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며, 다양한 분야가 서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더보기)
과신대 온라인 북클럽
“코로나19와 하나님” 후기
(박영식 교수 진행)

글 : 이준봉 (과신대 기자단)

지난 8월 19일과 26일, 2주간 과신대 온라인 북클럽이 진행되었습니다. 북클럽에서 다루었던 책은 『하나님과 팬데믹』 (톰 라이트 지음, 비아토르, 2020)과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 (월터 브루그만 지음, IVP, 2020)라는 책이었습니다. 본 지면에서는 1부에서 다루어진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언급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더보기)

[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기후를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을까?"

글_ 김진수  
(과신대 정회원,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선임연구원)

지구공학이나 이산화탄소 포집과 같은 기술로 이산화탄소 농도를 산업혁명 이전 수준으로 되돌린다고 해도, 지구의 기후가 예전 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습니다.  (더보기)

[Coming Soon]

[랜선 북클럽] 샤르댕 모임 안내

온라인 중심의 “랜선 북클럽 샤르댕”을 시작합니다. 9월 모임은 9월 21일(월) 오후 7시 30분에 역시 Zoom meeting으로 모입니다.

이번에는 루터교 오세조 목사님이 샤르댕의 대표 저서 "인간현상"에 대해서 발제해 주십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해주세요. 
(더보기)


[과]
<쉽게 쓴 후성유전학>
러처드 C. 프랜시스 | 김명남 옮김 | 시공사
 
글_ 윤세진 
(과신대 교사팀장, 구일고등학교 과학교사)

20세기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중심이 된 물리학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유전자나 유전공학으로 대변되는 생명과학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더보기)


[과]
<미움 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게 지음
전경아 역 | 인플루엔셜 | 2014
 
글_ 최성일 (과신대 기자단)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공공신학과 함께 인류 사회에 큰 등불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것이 제 소견이자 바람입니다.  (더보기)


[과책 ]
"진리는 간단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신의 언어> 서평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 이창신 옮김
김영사 | 2018
 
글 : 이혜련 (과신대 기자단)

나는 늘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실까?’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교회에서 흔히 듣는 대답은 기도하면 성경으로, 환경으로, 자연스럽게 알려주신다는 거였다. 성경을 읽어도 모르겠어서 항상 기드온처럼 증거를 요구하는 기도를 많이 했다. 그런데 콜린스는 DNA가 바로 ‘신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부분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되었다. (더보기)


[바이오로고스]
[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12. 무엇이 하나님을 창조했을까요?

번역 :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하는 많은 주장들이 수세기에 걸쳐 제안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한 가지 주장은,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지기 때문에 물질세계 외부에 있는 "첫 번째 원인"이 반드시 있었을 거라는 주장(야기되지 않은 원인, uncaused cause)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중 많은 부분에 대한 응답은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창조하셨습니까?" 입니다. (더보기)



과신대와 뜻을 함께 할 협력교회를 모집합니다. 

과신대는 과학주의 무신론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복음의 변증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위해 건강한 창조신학을 교육하고 연구합니다. 

과신대의 비전과 사역을 지지한다면 과신대와 함께하는 교회로 동참해 주세요. 

과신대는 앞으로도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기독교 교육 컨텐츠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보급하기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지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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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기 후원

 김*수

-

** 과학과 신학의 대화 후원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과.신.대 비전>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일반계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 잡힌 대화를 목표로 2가지 비전을 갖습니다.        

1
-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의 결과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내용을
함께 읽어가며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연구합니다.
이를 위해 과학 및 일반학문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2
-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바르게 배우도록 한국교회에 균형 있는
교육을 제공하며 이를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합니다.

<자문위원>

  강상훈 교수 | 베일러대학교 생물학
  권영준 교수 | 연세대학교 물리학
  김근주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김기석 교수 | 성공회대학교 총장
  김기현 목사 | 로고스서원 대표
  김성신 교수 | 한양대학교 심리뇌과학부
  김요한 목사 | 새물결플러스 대표
  김익환 교수 |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김정형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근한 교수 | 유타대학교 기계공학부
  박영식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일준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박치욱 교수 | 퍼듀대학교 약학대학
  박화경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박희주 교수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박희규 교수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백경민 교수 | 숭실대학교 정보사회학과
  송수진 교수 | 고려대학교 글로벌경영학과
  신은철 교수 | 카이스트 경영공학부
  신희성 교수 | 인하대학교 수학과
  오세조 목사 | 팔복루터교회
  우종학 교수 |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윤철호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이길연 교수 | 경희대학교 의대, 외과과장
  이문원 교수 | 강원대학교 과학교육학부 명예교수
  이상은 교수 | 서울장신대학교 조직신학
  이정모 관장 | 국립과천과학관
  이현식 목사 | 강남중앙교회
  이택환 목사 | 그소망교회
  임범진 교수 | 연세대학교 의대, 병리학교실
  장왕식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전성민 교수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구약학
  정대권 교수 | 항공대학교 항공전자정보공학
  정삼희 목사 | 신도중앙교회
  정  준  목사 | 더처치
  조성호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차정호 교수 | 대구대학교 화학교육
  최승언 교수 |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
  최종원 교수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서양사
  팽동국 교수 | 제주대 해양시스템공학
  허  균 교수 | 아주대 의과대학 신경과
  현요한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황소현 교수 | 차의과학대학교 병리과/의생명과학과
<운영위원>

  우종학 | 대표

  강사은 | 실행위원장
  정대경 | 연구팀장
  윤세진 | 교육팀장
  백우인 | 출판팀장
  이승훈 | 미디어팀장
  이신형 | 북클럽팀장
 
  구형규 | 감사
  김성래 | 감사

  최경환 | 기획실장
  장민혁 | 행정간사
  이슬기 | 미디어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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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 소식 202009

 

1. 비대면 온라인 강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매번 50명 이상이 참석해서

열띤 강의와 대담을 나누던

콜로퀴움의 현장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예기치 못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도 있습니다.

 

이제 자리를 어느 정도 잡은

과신대 <기초과정>과 <핵심과정>은

입소문을 타고 꾸준하게

신청을 해주고 있습니다.

 

지역북클럽 모임과 교사 모임도

온라인으로 꾸준하게 모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 사무국에서도 유튜브 라이브 방송으로

과신대 필독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과신대 유뷰트는

강연 녹화 영상을 업로드하거나

홍보 영상을 올리는 용도로 많이 사용했는데,

앞으로는 사무국 소식도 유튜브로 올리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현재 구독자가 약 2,500명 정도인데,

1만명을 목표로 한 번 달려보겠습니다.^^

 

인스타그램도 꾸준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팔로워는 600명 정도 됩니다.

장민혁 간사님께서 과신대의 강연이나

책 속 명언을 편집해서 카드뉴스로 만드는데

내용이 아주 상당히 좋습니다.

인스타그램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겠습니다. 

 

* 과신대 유튜브: bit.ly/35ixWkJ

* 과신대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scitheo_official/

 

 

3. 매월 월말 정산을 하면서

과신대 정회원들의 후원에 절로 감사의 기도가 나옵니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매주 한 두 분씩 정회원으로

등록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한국교회가 여러 모양으로 욕을 먹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기초를 닦아야 할 때인 거 같습니다.

성서를 새롭게 읽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두려움 없이 타자를 품을 수 있을 때

교회는 다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과신대도 미약하지만

새로운 기독교를 세우기 위한 노력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함께 동역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한1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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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12. 무엇이 하나님을 창조했을까요?

 

무엇이 하나님을 창조했을까요?

What created God?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하는 많은 주장들이 수세기에 걸쳐 제안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한 가지 주장은,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지기 때문에 물질세계 외부에 있는 "첫 번째 원인"이 반드시 있었을 거라는 주장(야기되지 않은 원인, uncaused cause)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중 많은 부분에 대한 응답은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창조하셨습니까?" 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원인을 가진다면, 왜 하나님은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혹은 “하나님의 기원에 대해서는 우리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그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도 과학이 설명하는 원인 체계 안의 또 다른 원인일 뿐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원인 역시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창조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존재(신학자들이 "초월"이라고 부르는)라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헛다리 짚는 격일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근대적 개념은 종종 하나님이 우주의 기원과 도덕 법칙을 위한 설명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계몽주의의 "이신론" 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신론의 하나님은 더 낮은 층에 있는 우리들을 귀찮게 하지 않는, "다락방" 안에 있는 흰 머리의 노인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 신학과 확연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유지자로서 창조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5-17은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하나님은 단순히 우주의 시작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모든 존재에 대한 설명입니다. 매 순간 모든 시간과 공간과 사건이 존재함은 하나님의 유지하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발적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존재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 존재의 원인을 묻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필연적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필연적 존재의 원인을 묻는 것은 파란색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가를 묻는 것과 같이 범주가 잘못된 질문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우주의 시작점(빅뱅)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발견된 것은 이 토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빅뱅"을 시간, 공간 및 물질이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인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실제로 창조주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중할 것을 권합니다. 비록 몇몇 현재의 이론들("다중우주"에 관한 이론들과 같은)이 제안하는 것처럼 우주가 경험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시작점을 가지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주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기독교인으로서 위협당하는 것처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왜 처음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은 그 질문에 답할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세계관은 그 자체가 야기되지 않은 원인을 믿어야만 하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야기되지 않은 원인을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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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 북클럽 샤르댕 모임 안내

 

글_ 강사은 (과신대 실행위원장)

 

 

온라인 중심의 “랜선 북클럽 샤르댕”을 시작합니다.

 

모임을 인도해 주실 분은 '루터교 팔복교회'의 오세조 목사님과 '성공회 제자교회'의 박상용 부제님입니다.

 

고심 끝에 과학과 신학을 두루 걸친 인물 중 ‘샤르댕’의 이름을 빌려서 북클럽명을 정하게 되었는데요. 이름을 정한 김에 샤르댕이 누구인지를 다뤄보아야 할 것 같아서 만화 "샤르댕 인간현상"을 기본서로 2회에 걸쳐 '1. 샤르댕은 누구인가?' '2. 샤르댕의 대표작'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발제는 오세조 목사님께서 해주셨습니다.

 

2번(8월, 9월이나 10월)에 걸쳐서 “샤르댕”에 대한 소개 시간 정도를 갖고, 다음 책은 리처드 스윈번의 “신은 존재하는가”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이 책은 성공회 박상용 부제님께서 다뤄 주시겠습니다.

 

 

8월 모임에서는 루터교 오세조 목사님의 찰진 발제 덕분에 샤르댕에 대한 이해를 높인 시간이었습니다.

 

샤르댕은 예수회 신부, 고생물학자, 진화철학자로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다르게 말하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과학과 신학의 균형을 잘 잡은 인물이다 싶습니다.

 

빅뱅이 우주 모델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기 전부터 빅뱅으로 시작하는 우주를 받아들인 과감함도 놀라웠습니다. 진화와 원죄에 대한 생각을 다듬어 "교리를 더욱 실제적이고 보편적이고 '우주진화론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아직 고만고만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만 둘러보면 사고의 폭은 이렇게 넓고 다양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9월 모임은 9월 21일(월) 오후 7시 30분에 역시 Zoom meeting으로 모입니다.

 

이번에는 루터교 오세조 목사님이 샤르댕의 대표 저서 "인간현상"에 대해서 발제해 주십니다. 

 

랜선 북클럽 샤르댕은 지역에 관계없이 어디에서나 참여 가능한 온라인 모임입니다. 온라인 멤버로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페이스북 과학과 신학의 대화 페이지나 클럽에 댓글이나 메신저로 알려 주시면 단톡방에서 함께 소통하고 주제와 책 선정에 참여하실 수 있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희귀한 교파에 속하신 분들로부터 거침없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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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7. 기후를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을까?

 

글_ 김진수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비가역’(非可逆)의 사전적 의미는 ‘변화를 일으킨 물질이 본디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입니다. 예를 들면, 길바닥에 쏟은 물은 다시 주워 담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지구공학이나 이산화탄소 포집과 같은 기술로 이산화탄소 농도를 산업혁명 이전 수준으로 되돌린다고 해도, 지구의 기후가 예전 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습니다.

온도 상승의 지연효과

일반적으로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 지구의 온도는 올라가고, 이산화탄소 농도가 감소하면 지구의 온도는 내려갑니다. 하지만 기후과학자들은 단순히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춘다고 해서 지구의 온도가 빠르게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온도 상승의 지연효과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루 중 온도가 가장 높은 시간이 햇빛(태양열)이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정오가 아니라, 오후 2시부터 4시 사이인 현상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래 그림과 같이 정오와 한낮에는 해가 머리 위에서 비추기 때문에 작은 면적에 많은 태양에너지가 모이지만, 해의 위치가 내려오면 햇빛이 비스듬하게 비추게 되면서 단위 면적당 들어오는 태양에너지의 양은 적어집니다. 실생활에서 손전등을 비스듬하게 비추면 넓은 면적을 비추게 되지만 빛의 세기가 약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저위도 지역보다 극지방이 더 추운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극지방은 햇빛이 비스듬하게 들어와서 작은 양의 태양에너지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계절이 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양이 북반구를 수직으로 비추는 계절엔 북반구가 더운 반면 남반구는 춥습니다. 반대로 태양이 북반구를 비스듬히 비추고 남반구에 햇빛을 수직으로 내리쬐면 북반구는 추워집니다.
 

(일러스트: 이예은)


들어오는 태양에너지의 양만 생각하면 정오의 온도가 가장 높을 텐데, 어째서 정오를 지난 오후의 온도가 가장 높을까요? 온도는 들어오는 에너지와 나가는 에너지의 차이에 의해 변화량이 결정됩니다. 지면으로 들어오는 태양에너지가 정오에 최대라고 하더라도 지면을 식히며 지면이 방출하는 에너지 양은 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흔히 ‘땅이 데워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현상을 엄밀히 말하면 정오가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해가 중천에 있으므로 들어오는 에너지의 양이 많은데, 지면을 식히는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지면의 온도는 계속 오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태양열보다 지면에서 방출하는 에너지가 커지는 시점부터 지면의 온도는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비슷한 효과로 자정이 아니라 동이 트기 전, 즉 태양열이 들어오기 직전까지 지면은 계속 에너지를 잃어 하루 중 가장 낮은 온도가 됩니다.

지구온난화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산화탄소 농도를 줄인다고 해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연효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구의 3분의 2는 바다가 차지하고 있는데, 바다는 육지보다 열용량이 커서 더 많은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고 지구의 높은 평균 온도는 서서히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도가 천천히 감소하는 동안, 폭염이나 다른 기상이변 현상도 발생할 것이고, 지구의 평균 온도를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비가역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 산업구조상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배출량을 늘리지 않는 것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코로나19가 확산되고 봉쇄 조치를 한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경제적 피해가 일어나자, 각국 정부가 봉쇄를 풀고 여행 제한을 완화하는 걸 보면서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전 세계 국가들이 경제우선주의의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습니다.

 


나비효과

나비효과라는 말은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1972년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텍사스에서 토네이도가 일어날까?”(Does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s in Brazil set off a tornado in Texas?)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로렌츠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날씨를 예측할 때, 입력값이 0.50617이었지만 소수점을 일부 생략하고 간소화하여 0.506을 입력했더니 완전히 다른 날씨가 예측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다른 기상학자가 갈매기 날갯짓 한 번으로 날씨가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첨언하였고, 로렌츠는 갈매기보다는 나비의 날갯짓이 연구 결과를 조금 더 극적으로 보여주리라 생각해서 이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 역시 미래의 기후를 예측하기 위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자주 사용하는데, 10-14 정도로 아주 작은 값을 관측값에 더해서 시뮬레이션을 하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곤 합니다. 이 정도로 작은 값은 관측기기로 측정하기도 불가능한 값이고, 언제라도 생길 수 있는 오차입니다. 따라서 나비효과는 작은 변화일지라도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도미노처럼 큰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기후 시스템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예측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나비효과처럼 작은 차이에도 큰 변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작은 변화로 시작된 일들은 도미노처럼 연쇄반응이 일어나 어느 순간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조차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추면 지구의 기온이 낮아지고 북극온난화와 같은 연쇄적인 증폭 현상을 막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북극온난화로 인해 죽은 북극곰은 다시 살아돌아오지 않습니다.

 


해수면 상승, 산불, 이상 기온

지구온난화가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 중 가장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현상은 해수면 상승입니다. 가장 자명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 아니라, 전 세계 인구 중 약 30%, 즉 24억 명이 해안가에 거주하기 때문에 그만큼 영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열대 지역의 투발루나 몰디브 등도 육지가 물에 잠기면서 기후난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해수면은 왜 상승하는 걸까요?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면서 바닷물 온도가 상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열팽창, 남극 및 그린란드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해수면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2100년에는 해수면이 약 1-2m 정도 상승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때엔 많은 지역이 침수될 뿐 아니라 태풍, 폭풍해일, 쓰나미 등이 올 때 더 높을 파도로 오기 때문에 그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고, 농경지로 바닷물이 넘어오는 등 사회 경제적으로 큰 피해가 예상됩니다.

지구온난화와 동반되는 해수면 상승과 피해 역시 비가역적입니다. 먼 미래에 이산화탄소 농도를 줄이고 지구 온도를 낮춘다고 하더라도, 해수면의 높이는 하강하지 않고 계속 상승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바다의 평균 수심은 약 3,700m인데 바다 깊은 곳에서는 계속 열팽창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지난 겨울 호주는 역대 최악의 산불을 겪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속적인 지구온난화로 인한 온도 상승과 빈번한 가뭄을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올 여름에는 시베리아의 온도가 30°C 이상을 웃돌면서 툰드라라고 불리는 영구동토층에서 많은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이 역시 지구온난화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타버린 산림이나 방출된 이산화탄소는 지구 온도를 낮춘다고 해서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지구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멈추어야 한다고, 그래야 살 수 있다고.


성경의 많은 이야기도 비가역적인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범죄하고 다시 회개하는 과정에서도 전쟁에서 희생당하거나 심판받아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오진 못합니다. 하지만 과거 경험을 통해서 ‘범죄의 결말’을 배웠음에도 또 범죄하고 다시 대가를 치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대체 왜 또 저러나’ 답답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산화탄소 사용과 배출을 생각하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출처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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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받을 용기와 인간이해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와 아들러의 “인간 이해”를 읽고

 

 

모든 것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겨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나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재림하시고, 심판하시는 모든 것들이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학과 신학의 대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우리가 다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조직신학에서의 마지막 연구 분야가 “인간론”이라는 말을 언뜻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론”은 개인적으로 현재 가장 관심이 많이 가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엄청난 의미로 다가오고 있고, 그래서 인간을 본연의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사로서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성서학자인 우찌무라 간조 선생께서 “한 사람을 알려면, 전 인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했을 때,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큰 부담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의 스승은 단 한 분 하나님이다”는 성경 구절을 통해 “인간은 인간을 가르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이 교사가 할 일이겠구나”라는 나름대로의 교육(개똥)철학을 갖게 되어, 여전히 무지 가운데 있지만,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맛보며,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 맛을 공유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과신대에 발을 들인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였습니다. 그동안 과학과 신학의 훌륭한 전문가들로부터 양질의 강의를 들어서 많이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학교 현장에서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과 자주 상담하면서 심리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 첫 책이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이었고, 두 번째 책이 아들러의 “인간 이해”였습니다.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는 1956년 교토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부터 철학에 뜻을 두고, 교토대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1989년부터는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아들러 심리학에 관해 왕성한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한 학자이며, 현재 일본 아들러 심리학회가 인정한 카운슬러이자 고문입니다. 이 책의 공저자인 고가 후미타케는 20세 말에 아들러 심리학의 상식을 뒤엎는 사상에 큰 충격을 받고, 기시미 이치로 선생을 끈질기게 찾아가 문답식으로 아들러 심리학을 배운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점이 바로 철학자와 청년 간의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런 논쟁을 읽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의 각 현안별로 이런 대화 문화가 꽃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 이해”의 저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1870년 2월 오스트리아 빈 근교에서 태어나 1937년에 작고한 빈 정신분석학의 거장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어 알려진 프로이트, 그리고, 칼 융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위의 “미움받을 용기”가 출간된 2014년부터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학자입니다. 저는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대해서는 주워들은 것만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프로이트, 융, 아들러를 비교해서 연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만, 아들러의 심리학이 가장 인간적이고 제게 큰 도움이 된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들러가 학교 교육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22개의 아동 병원을 운영하면서 아동 교육과 치료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아들러가 겸손과 실천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이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직접 그런 상황을 겪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러는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형이 매우 명민했던 반면, 자신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허약 체질이었고, 밑의 남동생이 어려서 죽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안팎의 고통을 잘 이겨낸 아들러가 인간 이해의 최고 적임자는 “참회하는 죄인”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이와 같은 철저한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라는 말이 있어서, 개인적인 느낌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보다, 이 두 권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아래와 같이 초서하여 보았습니다. 괄호는 쪽수입니다.

 

“미움받을 용기”의 키워드

 

  • 프로이트의 트라우마를 부정하는 아들러의 목적론(37)

  • 현재의 불행한 상태는 자신의 선택의 결과이다(54-57)

  • 용기의 심리학: 자유를 선택하여 미움받을 용기, 변화하겠다는 용기(63)

  •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105-106)

  • 나는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된다(120-123)

  • 아들러 개인심리학의 행동 목표: 자립할 것, 사회와 조화를 이룰 것(126)

  • 아들러 개인심리학의 심리적 목표: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126)

  • 과제 분리,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163)

  •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177)

  • 인정받기를 바라지 말라(177)

  • 자유란 미움을 받는 것이다(186-187)

  • 공동체 의식/감각을 가져라(217-218)

  • 인간관계는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이다. 남을 칭찬하려고도, 남에게 칭찬받으려고도 하지 말라(227-228)

  •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가라(251)

  •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여 자기를 수용하라(261)

  • 인간의 최대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287)

  • 인생은 선이 아니라 점의 연속이다.(300-301)

  •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319)

 

아들러의 “인간 이해” 키워드

 

  • 인간 이해의 근본적 문제들은 지나친 교만과 자만심을 가지고 접근하면 안 된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인간 이해는 겸손하게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15)

  •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인지도 모른다.(25)

  • 열악한 오늘날의 교육 현실에서 진정한 인간 이해는 오직 “참회하는 죄인”에게만 가능하다.(26-28)

  • 생명이 없는 자연의 움직임과 인간의 정신활동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를 둘러싼 쟁점이 등장한다. ‘인간 공동생활의 논리’라든가 ‘절대적 진리’라는 우리의 개념은 부분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개념들과 일치한다.(42-43)

  • (인간은 물질적 존재 상태를 부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가족을 넘어 그의 동료, 민족, 인류, 동물이나 식물, 생명이 없는 존재들, 온 우주에 이르기까지 확대될 수도 있다.(62)

  • 리가 마치 다른 사람인 듯 행동하고 느끼는 이 능력의 원천은 우리에게 내재된 공동체 의식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우주적 감정이며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전 우주와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특성이다.(83)

  • 누군가에게 최대한의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된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권위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격)(85)

  • 태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주의력 결핍이나 관심 부족 상황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주의력 결핍은 동료 인간에 대한 관심 부족이 원인이다.(126)

  • 우리는 오로지 경험적 사실에 의한 확증된 길을 걸을 뿐이며 우리가 꿈을 통해 발견한 사실들이 다른 관찰 결과에서도 입증되고 확인될 때만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140)

  • 여성의 열등함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181)

  • 모든 행동과 표현 양식은 공통의 한 점을 향해 모아진 것이며, 그가 어느 지점에서 움직이든 간에 그의 목표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인식할 수 있다.(203)

  • 인간의 성격은 우리에게 있어서 도덕적인 판단 근거가 될 수 없고, 그 사람이 자신의 주위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또 어떤 연관성 속에 처해 있는가 하는 사회적 인식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232)

  • 삶의 기쁨이란 삶의 진정한 조건을 긍정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254)

  • 이렇게 해서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인류가 이미 섬뜩하리만큼 확실하게 예감했던 관점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성경책에도 나와 있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도다”라는 구절이다.(256)

  • 단지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종교적 욕구의 만족을 그릇된 방법으로 추구하는 현상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신과 닮으려는 노력의 흔적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다.(263)

  •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면 누구나 동등하다는 법칙(Gesetz der Gleichheit alles dessen, was Menschenantlitz tragt)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274)

  • 개개인을 공동체와 연결시켜 주는 연대감을 통해서만 사람들의 불안은 제거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불안 없이 생을 통과해 갈 수 있다.(291)

  • 인간 이해를 위한 세 가지 삶의 과제: 사회적 과제(나와 너의 관계의 문제), 직업의 문제, 사랑과 결혼의 문제. 한 사람이 이 세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그 방법과 그가 저지르는 과오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로부터 우리는 그의 개성, 인격, 삶의 방식에 관한 결론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우리의 인간 이해에 대한 자료를 얻고 활용하게 될 것이다.(294)

  •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타인과 완전히 똑같이, 평등하게 느끼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진보를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를 도와 심각한 오류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320)

  • 권위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인가...... 그 밖에도 저절로 인정받을 수 있는 권위가 아니라면 권위는 강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교는 모든 아이가 자신의 정신적 발달 단계에서 만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학교는 아이들에게 유리한 정신적 발달의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어떤 학교를 좋은 학교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학교는 정신기관의 발달 조건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학교만이 비로소 “사회적 학교”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356)

  • 이렇게 유아기 때부터 시작된 열등감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우월감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것들은 사소한 형태로는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형제들 간의 경쟁이나 학교에서 벌어지는 점수 경쟁으로 나타나지만, 범위를 넓혀 보면 인간 삶의 크고 작은 모든 권력관계 속에 나타난다. 심지어 가장 평등해야 할 친구나 연인 관계, 부부 간에도 우위(권력)를 차지하고자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기 때문에 인간은 따뜻한 동지애를 잃어버리고 서로에게 높은 담을 둘러치며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마음의 병을 앓게 된다. 그로부터 연유한 갈등과 고통은 좀처럼 극복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그것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그것과 씨름하게 된다.(367, 역자 홍혜경 님의 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두 등불, 공공신학과 개인심리학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에 나오는 키워드들이 다 아들러의 “인간 이해”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시미 이치로는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들과 철학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여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심리철학을 아주 잘게 부수고 잘 소화시켜서, 세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독자의 입술에 조금씩 흘려서 먹이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는 상식에 반대되는 충격적인 주장들이 있어서 가끔 싸리에 걸리기도 했었지만, 저의 경우는 잘 삼켜서 정신발달에 큰 영양분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러의 심리철학을 이 책을 통해서 쭉 들으면서, 저는 이상하게 이분이 성경 강해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항상 받았습니다. 아들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네 가지 키워드는 공동체 의식, 열등감, 우월(인정)욕구, 허영심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공동체 의식은 우주적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어서, 마침 공부하고 있던 삐에르 떼야르 드 샤르댕(1881~1955)과 아는 사이였나 라고 반문했을 정도였습니다.

 

포스트 코로나는 이전과 절대 같을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바일 것입니다. 때마침 공공신학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공공신학과 함께 인류 사회에 큰 등불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것이 제 소견이자 바람입니다. 인간이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수 있는 존재가 된 인류세에 우리가 우주적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인간과 우주를 잘 보전하고 가꾸어 나가면 참 좋겠습니다. 아들러가 강조한 “참회하는 죄인”으로서, 우리 마음속의 열등감이라는 지옥의 불꽃을 잘 제어하고, 허영심이라는 악덕의 바람을 최대한 빼고, 삶과의 현실적인 연대감을 회복하여서, 진실로 “남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고, 남들에게 주는 것이 남들로부터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 매일매일의 삶의 원리가 되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어 봅니다. 

 

 

글_ 최성일 기자 (ultracha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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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간단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영적 진실이라는 순수한 물이 인간이라 불리는 녹슨 그릇에 담기는 탓에 때로는 종교의 근간이 심각하게 왜곡된다 해도 그리 놀랄 건 없다. 인간 개개인의 행동이나 종교 단체의 행동을 보고 신앙을 평가하지 말라. 그보다는 신앙이 제시하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적 진실을 보고 신앙을 평가하라. - ‘과학자들을 향한 간곡한 부탁’ 중에서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창신 옮김 [신의 언어]

김영사 | 2018. 8. 20 | 1판 11쇄 발행 | 323쪽 | 14,000원

 

 

처음 이 책을 마주했을 때, 너무 어려운 책으로 보여서(과신대 추천도서 뒤쪽에 있으므로)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까 경직된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 그러나 내 걱정이 무색하게 콜린스는 자신의 경험으로 편안하게 책을 시작한다.

콜린스는 대학 시절에는 열렬한 무신론자였으나, 유전학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달은 후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부터 종교적 신념의 진정한 힘을 주목하게 되었다. 최첨단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인 동시에 하나님과 성경을 믿는 독실한 신앙인인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총지휘하여, 10년 만인 2003년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31억 개의 유전자 서열을 모두 밝히는 게놈 지도를 완성했다. (책날개 참고)

 

이 책은 그의 삶과 함께 유전자 서열이 어떻게 밝혀지는지, 그가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는지 함께 줄거리를 갖고 펼쳐지기 때문에 마치 소설을 읽듯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구성은 크게 1. 과학과 신앙의 간극, 2. 인간 존재에 관한 심오한 질문들, 3. 과학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믿음,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늘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실까?’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교회에서 흔히 듣는 대답은 기도하면 성경으로, 환경으로, 자연스럽게 알려주신다는 거였다. 성경을 읽어도 모르겠어서 항상 기드온처럼 증거를 요구하는 기도를 많이 했다. 그런데 콜린스는 DNA가 바로 ‘신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부분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되었다.

 

2장에서 빅뱅부터 시작해 게놈해석까지 마치 지구의 역사를 풀어내듯 이야기하며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다. 과학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으로 이어지는 이 장을 읽으며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글자를 붙여놓으면 자연스럽게 대립구도를 떠올리게 되는 게 현재 우리나라의 기독교 실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DNA를 통하여 어떻게 인간에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콜린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종교와 과학은 대립구도가 아닌, 협력구도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친절하게도 3장은 그동안 과신대 추천도서를 읽으면서도 헷갈려왔던 많은 것들을 정리할 수 있게 안내를 해주고 있다. ‘불가지론’이라는 말의 유래, (이 장에서는 ‘불가지론자는 그럴 듯해 보이는 무신론자일 뿐이고, 무신론자는 공격적으로 보이는 불가지론자일 뿐입니다’라는 말이 매우 재미있었다.), ‘창조론자’라는 단어에 대한 견해, 지적설계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등이 그것이다. 특히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단어가 늘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 책을 읽으며 자세히 알게 되었다. 또,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지적설계론이 결국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영역에 초자연적 존재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상정하는 일종의 ‘빈틈을 메우는 신’ 이론이라는 것이다. 앞서 과신대 추천도서를 쭉 읽어온 사람이라면 이 ‘틈새의 신’ 이론이 결국은 몰락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지적설계가 신으로 채우려 했던 진화의 빈틈을 신이 아닌 과학의 진보가 채웠다. 신의 역할을 이처럼 제한적이고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지적 설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앙에 심각한 해를 입히고 있다 (p.197)

 

콜린스는 마지막으로 ‘바이오로고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바이오로고스를 단지 어떤 단체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콜린스는 ‘유신론적 진화에 바이오로고스라는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하고 말하고 있다. 또, ‘지적설계와 달리 바이오로고스는 스스로를 과학적 이론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진실은 단지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영적인 논리로만 증명될 뿐이다(p.206)’라고 말한다.

 

이 책을 쭉 읽으며 내가 깨달은 것은 콜린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 서로 사랑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며 경이로움에 빠져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면 겸허해지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의 희망사항도 그렇다. 현재 전세계가 코로나19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신의 언어’를 읽으며 바로 지금, 여기, 나,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해본다.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걸까? 아마도 ‘서로 사랑하라’가 아닐까? 이 책에서 배운 대로, 진리는 간단하다. 오컴의 면도날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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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온라인 북클럽 “코로나19와 하나님”

 

“코로나19와 하나님”

 

 

지난 8월 19일과 26일, 2주간 과신대 온라인 북클럽이 진행되었습니다. 북클럽에서 다루었던 책은 『하나님과 팬데믹』 (톰 라이트 지음, 비아토르, 2020)과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 (월터 브루그만 지음, IVP, 2020)라는 책이었습니다. 북클럽에서 대담을 나누어주신 분은 박영식 교수님(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과신대 자문위원)이셨습니다. 각각의 북클럽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진행되었는데, 1부는 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 및 정리를, 2부는 참여자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질문,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본 지면에서는 1부에서 다루어진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언급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박영식 교수님께서 총 5장으로 구성된 톰 라이트의 『하나님과 팬데믹』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주셨습니다. 우선 재난과 고대철학의 입장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스토아학파는 숙명을, 에피쿠로스학파는 우연을, 플라톤학파는 초월을 주장합니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입장들 사이에서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기독교적인 질문은 ‘왜’가 아닌 ‘무엇’을 물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전체적인 책 내용을 이끌어갑니다. 그동안 재난은 죄에 대한 징벌로 인식되어 온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논리에 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톰 라이트는 반드시 죄의 대가로만 재난이 일어나지는 않음을 환기합니다. 대표적으로 욥과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요9:1-3)를 거론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죄에 대한 징벌로 고난당한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자들이었습니다.

 

톰 라이트는 팬데믹 상황에서 종말에 관한 음모론도 경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기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간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톰 라이트는 코로나19 사태를 예수님과 나사로 일화와 연관시켜 보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죽음이 죄에 대한 결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눈물을 흘릴 뿐이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결정론적이지만은 않으며, 속죄가 인과응보적 개념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누군가가 아픔과 고통스러움이 단지 ‘죄’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재난을 해석하기보다 교회의 역할에 더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신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곧 교회의 신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는 곧 성령의 신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기독교인은 애통하는 자가 되어서 세상을 향해 섬기는 봉사를 해야 하며, 나아가 창조 세계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고 톰 라이트는 단언합니다.

 

 

한 주 뒤에는 월터 브루그만의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경 본문 해석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특징을 가집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구약학자답게 구약성경 본문을 분석하면서 코로나19를 조명합니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전염병이 나타나는 배경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첫째는 언약의 집행 방식, 둘째는 하나님의 권능의 현현, 셋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브루그만은 전염병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비를 나타내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박영식 교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언급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은 결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징벌하기 위한 도구로만 인식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홍수 뒤에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심판을 내리지 않겠다는 자비의 모습을 함께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브루그만은 기도와 권력 혹은 기도와 마술이 혼합되는 일을 주의해야 한다고 환기합니다. 또한, 기도 자체를 신앙하지 말고 기도를 통한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동일한 선상에서 현재의 한국교회가 기도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외치는 주먹구구식 신앙지상주의(fidelism)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브루그만은 코로나19 시대에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신자의 자기중심적이었던 삶은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하며,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박영식 교수님은 뉴노멀의 시대에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코로나19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없었는지 성찰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현재에 대한 탄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은 동시에 필요합니다. 이는 십자가의 부활을 신뢰할 때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코로나19와 하나님”을 논하는 두 권의 책을 살펴보았습니다. 본 북클럽에서 참여자들은 책의 내용을 인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영식 교수님의 해설을 통해 새롭게 생각할 거리와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이 세상에 지속하는 한, 관련된 논의는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앞으로 이와 관련된 연구와 담론이 발전되기를 기대하며 여러분도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준봉 기자 (joonbong96@s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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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노키오와 갈릴레오, 교회 권위의 위기

 

메노키오와 갈릴레오, 교회 권위의 위기

 

글_ 최종원 교수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과신대 자문위원)

 

 

1582년 이탈리아의 프리울리 지역에서 작은 방앗간을 하고 있던 메노키오는 이단 혐의로 고발되었다. 고발 당시 51세였던 그는 흙, 공기, 물, 불이 뒤섞인 혼돈의 상황에서 마치 치즈에서 구더기가 나오듯이 물질이 생성되었다는 우주론과 창조론을 주장했다.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이단 심문관에게 고문을 당한 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여 얼마간의 옥살이를 한 후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메노키오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십 수년이 지난 1599년 추기경 산타 세베리나는 메노키오를 ‘무신론자이자 상습범’으로 규정하고 재조사를 명했다. 세베리나는 메노키오의 사안이 심각하고 중대하므로 엄중하게 처벌해 본보기를 삼아야 한다는 것이 교황의 확고한 의지라고 밝혔다. 결국 메노키오는 16세기의 끝자락인 1599년 11월과 12월 사이 어느 날, 이단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며 그의 사상에 영향을 준 배후를 묻는 질문에 끝끝내 “오직 저 스스로 읽었을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이탈리아 역사학자 카를로 진즈부르그(Carlo Ginzburg)는 1976년 이 재판에 대한 기록을 《치즈와 구더기》라는 책으로 남겨 그의 삶을 역사 속에서 복원하였다.

 

메노키오보다 약 30년 후에 프리울리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46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피사에서 갈릴레오(1564-1642)가 출생했다. 그는 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 즉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순환한다’는 천동설을 배격했다. 그는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와의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1615년 교황청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오의 주장이 트리엔트 공의회의 주장에 배치되며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혐의를 씌운다. 흥미롭게도 이는 메노키오 재판에 적용된 혐의와 동일하다.

 

그 후 10여 년 넘게 평온한 일상을 누리던 갈릴레오는 1630년 《두 가지 주요 태양계 구조설에 관한 대화》를 저술하여 다시 한 번 천동설을 비판하고 지동설을 옹호했다. 1633년 교황청은 다시 갈릴레오를 이단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 후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갈릴레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이 말을 지어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긴 하다).

 

 

약 30년의 간격을 두고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았던 두 이탈리아인의 삶,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민중과 당대 엘리트 과학자라는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요소가 적지 않다. 신분이나 사회적 명성 등을 비추어볼 때 동시대 같은 공간에 살았다 하더라도 동선이 겹치기 쉽지 않았을 이들을 하나로 엮어 주는 공간은 종교재판소이다. 그 공통된 내용은 당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생성된 새로운 사상과 과학의 주장에 대한 교회의 탄압이다. 갈릴레오는 그렇다 쳐도 일개 지방의 방앗간지기에 불과한 메노키오의 주장에 대해 교황청이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삶과 주장이 개인의 돌출적인 주장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종교개혁을 통해 독점적인 지위를 상실한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사고와 과학 발전의 도전으로 권위의 위기를 겪는다. 그 결과, 가톨릭교회는 제도 교회의 전통뿐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재해석한다. 흔히 보수 프로테스탄트가 독점한 것으로 비춰지는 성경 영감설에 대한 본격적인 신학적 담론이 다름 아닌 이 시기 가톨릭교회로부터 비롯되었다. 스페인의 도미니크회 수사 멜키오르 카노(1509-1560)는 성경의 축자영감설 혹은 완전영감설을 주장했다. 역시 도미니크회 수사인 도밍고 바네즈(1528-1604)도 성령께서 성경의 모든 내용을 감동하셨을 뿐 아니라, 글자 한 자 한 자까지도 말씀하시고 암시하셨다고 주장했다.

 

17세기 유럽 교회가 겪은 위기는 교회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져 내리면서 생긴 권위의 위기이기도 하다. 교회 자체적으로 반복되는 윤리적 위기와 함께 과학 발전이 던지는 신학의 위기도 있다. 메노키오나 갈릴레오를 대했던 교황청의 태도는 그 시대 종교의 과학에 대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7세기 근대과학의 공세 앞에 가톨릭교회 역시 성경의 무오설과 교회의 전통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천동설을 방어하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종교의 인식 범위 안에서 과학을 수용하겠다는 지극히 편협한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이 권위의 위기를 오롯하게 21세기 한국 교회가 경험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반지성주의와 유사지성주의로 드러나는 것 같다. 반지성주의는 다른 학문 분야의 정합성을 추구하는 시도를 포기하고 기존의 신앙고백적 입장만을 강화하는 것이다. 유사지성주의는 적극적으로 교리와 과학이 정합성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창조과학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도전받을수록 더 확고한 것에 집착한다. 간편하게 ‘진리 대 비진리’ 구도를 만든다. ‘창조 대 진화’라는 이 구도는 ‘신앙 대 불신앙’이라는 구도로 손쉽게 치환된다.

 

21세기 한국 교회 현장에서 창조와 진화와 관련해 다른 목소리를 내면 ‘성경을 믿지 않는다. 진화론자다’라는 식의 규정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을 수 있는 것으로, 논리로 설명해 낼 수 없는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가정한다. 신비가 인간의 이해로 다 설명될 수 있다면 그건 신비가 아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당면한 과학의 도전으로 인한 위기를 교리에 대한 강조나 유사 과학 신봉으로 도피하는 것은, 진지해 보이긴 하나 어설픈 대응이다.

 

한국 교회의 창조-진화 관련 논쟁은 성경해석 방법이나, 신학 혹은 과학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권위와 권력과 관계된 문제이다. 교회나 신학계에서 창조-진화 논쟁을 제기하는 데에는 신학의 권위에 대한 위기의식과 더불어 신적인 교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주로 권위의 위기를 겪는 보수 신학과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진화론을 반박하고 창조과학을 묵인하거나 옹호하는 데서 그 성격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자신들이 설정한 신학적 틀 안에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눈을 막고 귀를 닫는 것은 지적인 오만이자 태만이다. 종교에 초월의 영역이 개입된다고 해서 맹목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과학의 문제를 접근하는데 수용할 수 없는 선을 미리 설정해 놓고 토론하면 의미 있는 논의를 끌어낼 수 없다. 아카데믹한 논쟁의 기초는 오류의 가능성에 대한 개방성과 열린 결론이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학문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