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과신대 온라인 기초과정 상시모집

 

과신대 온라인 <기초과정> 이용 안내

구글 클래스룸을 통해 과신대 <기초과정>을
쉽고 편하게 수강할 수 있습니다. 

 

 

■ 수강료: 3만원

■ 강사 : 우종학 교수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과신대 대표) 

■ 영상 시청 기간 : 매월 1일~21일까지 시청 (3주)


■ 강좌 구성 
[1부 과학의 도전] 1강. 과학이란 무엇인가? 2강. 과학의 특성과 한계
[2부 성경 해석] 3강. 창조기사를 어떻게 읽을까? 4강. 성경과 과학 함께 읽기
[3부 무신론의 도전] 5강. 무신론의 도전 6강. 과학과 무신론의 차이
[4부 창조의 스펙트럼] 7강. 창조론의 스펙트럼 8강. 창조론에 대한 바른 시각

[수강신청 바로가기]

 

[등록 안내]

 

■ 수강료 : 3만원 (과신대 정회원, 대학생, 대학원생 1만 5천원)
■ 신청 : 온라인 신청 → 송금 → 신청완료
■ 계좌 :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 영상 시청 방법

(1) 수강신청서를 작성하시고, 수강료를 납부하시면 과신대 사무국에서 문자나 이메일로 안내를 해드립니다. 
(2) 문자를 받으신 후 구글 클래스룸 초대 이메일에 승락을 하시면 바로 강의를 보실 수 있습니다. 
(3) 영상은 한 달 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 입금할 때 납부자명에 본인 성명을 적어주세요.
** 등록비 납부가 확인되면 등록 완료 안내를 문자메세지로 보내드립니다.
** 등록 취소 및 등록비 환불은 불가합니다.

 

(문의 : 070-4320-2123, scitheo.office@gmail.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View vol.38 (2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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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



과신대의 소식을 전하는

과신대 VIEW - 38호





과신대 칼럼

신학 과잉과
과학 과잉


강성훈 교수 
Biological Sciences Department, Eastern Illinois University,
과신대 자문위원

무슨 일이든 현상이든 과학적인 설명을 요구하고, 실은 그 설명이 과학의 모양을 한 유사과학에 근거한 것임에도 과학이라는 단어의 힘에 기대어 온갖 것에 과학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돈벌이를 하려고 하는 현상이 어쩌면 과학의 시대에 대한 반증일 수 있겠다.  (더보기)





7월 사무국 소식 

2020년 상반기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현장 강의가 온라인 강의로 모두 바뀌고 모든 회의가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책 ]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
데이비드 J. 헬펀드 저, 노태복 역, 더퀘스트, 2017
 
글_ 윤세진 (구일고등학교 과학교사, 과신대 실행위원)

과학자는 건전한 회의적 사고, 판단을 미루는 자세, 그리고 올바른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는 에드윈 허블의 말은 단지 과학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더보기)


[과신대 이야기 - Story]
"케노시스 신앙으로 돌아보는 창조 신앙"
: 과신대 핵심과정 <창조의 다양한 관점들> 강의 후기 

글 : 김완식 (과신대 기자단)

질서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종학 대표님께서 강의 중에 말씀하셨던 케노시스(Kenosis), 즉 예수님의 ‘자기비움’일 것입니다.  (더보기)

[과신대 칼럼]
이은, 나, 그리고 어머니.
 
글 : 백경민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조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우리 부부에게는 17개월 된 딸이 있다. 이름은 백이은. 결혼 후 5년 만에 얻은 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40이 넘어서 얻은 첫 자녀라서 그런지 점차 ‘딸 바보’가 되어 가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  (더보기)

[과신대 칼럼]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와 과학의 미래

글 :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코로나19 사태 이후 종교의 미래는 여전히 희미한 불확실성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인류 종말의 시점이 단축되어 도래할 수도 있고, 단기간에 상황이 타개되어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도 있다.  (더보기)

[과신대 칼럼]
Homo sensibilisㅡ"스푸마토Sfumato"
 
글 : 백우인 (과신대 출판팀장)

안개 낀 날엔 세상의 표정을 붙잡을 수가 없다. 옅은 안개가 만드는 광경은 오랜 공백 끝에 나타난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지 시큰둥해하는지  알 수 없던 그대 얼굴 표정이고 시야가 흐릿해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새벽시간이다.  (더보기)

[바이오로고스]
[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10. 다윈 이전,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해석은 어떠했나요?

번역 :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많은 초기의 기독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작품들은 다윈의 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창세기의 해석을 보여줍니다.  (더보기)

[과신대 칼럼]
[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5. 기후변화의 요단강, 티핑 포인트
 
글 : 김진수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많은 과학자가 연구한 미래의 전망은 매우 어둡습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양의 피드백(feedback)이 현재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고, 미래에는 갈수록 더 심각해진다는 예측이 그렇습니다. (더보기)


[과책 ]
<오리진>
데보라 하스마-로렌 하스마 지음,
한국기독과학자회 옮김, IVP, 2015
 
글 : 이혜련 (과신대 기자단)

나는 현재 과신대 주부기자로서 과신대 독서 길잡이 10단계 책을 한 달에 한 권, 순서대로 읽고 있는 중이다. (더보기)


[Coming Soon]

[제21회 콜로퀴움] 안내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 과정신학적 관점

(2020년 7월 6일 온라인 강연)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오랜 시간 과정신학을 연구해 온 장왕식 교수를 통해 자연주의 철학과 기독교 창조론이 어떻게 서로 만나고 화해할 수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해주세요. 
(더보기)




과신대와 뜻을 함께 할 협력교회를 모집합니다. 

과신대는 과학주의 무신론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복음의 변증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위해 건강한 창조신학을 교육하고 연구합니다. 

과신대의 비전과 사역을 지지한다면 과신대와 함께하는 교회로 동참해 주세요. 

과신대는 앞으로도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기독교 교육 컨텐츠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보급하기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지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더보기)

- 과신대를 후원하는 사람들 -


후원이사

곽*엽, 권*렬, 김*수, 노*경, 박*경, 이*민, 조*희

-

교회 및 단체 후원

iOttie Inc, (주) 이어로직코리아,
정*(더처치), 안*성(그루터기교회), 새맘교회, 강*규(사귐의교회),
정*희(신도중앙교회), 권*렬(한우리교회), 걷는교회, 

-

개인 후원

강*은 / 강*주 / 강*진 / 강*혁 / 공*윤 / 곽*화 / 곽*석 / 곽*이 / 구* / 구*희 / 구*규 / 권*준 / 금*범 / 김*석 / 김*아 / 김*운 / 김*수 / 김*주 / 김*희 / 김*수 / 김*원 / 김*호 / 김*림 / 김*옥 / 김*수 / 김*영 / 김*환 / 김*래 / 김*병 / 김*신 / 김*용 / 김*나 / 김*영 / 김*미 / 김*윤 / 김*현 / 김*영 / 김*자 / 김*웅 / 김*중 / 김*지 / 김*식 / 김*국 / 김*의 / 김*정 / 김*환 / 김*상 / 김*평 / 김*호 / 김*준 / 김*형 / 김*철 / 김*완 / 김*수 / 김*도 / 김*주 / 김*준 / 김*경 / 김*수 / 김*신 / 나*현 / 노*현 / 노*경 / 노*균 / 문*호 / 문*실 / 문*석 / 문*영 / 문*식 / 박*철 / 박*훈 / 박*현 / 박*원 / 박*철 / 박*주 / 박*민 / 박*탁 / 박*환 / 박*선 / 박*수 / 박*성 / 박*영 / 박*영 / 박*나 / 박*별 / 박*솔 / 박*철 / 박*경 / 박*규 / 박*주 / 배*혁 / 백*민 / 백*희 / 백*인 / 백*양 / 서* / 서*국 / 서*빈 / 서*진 / 서*숙 / 석*병 / 성*기 / 성*호 / 손*용 / 손*아 / 송*범 / 송*원 / 송*기 / 송*강 / 송*찬 / 송*우 / 송*원 / 신*철 / 신*웅 / 신*주 / 신*호 / 신*영 / 신*철 / 신*철 / 신*성 / 심*주 / 심*준 / 안*혜 / 안*일 / 양*천 / 양*수 / 염*영 / 오*정 / 오* / 오*조 / 오*주 / 오*훈 / 오*일 / 우*미 / 우*학 / 유*선 / 유*호 / 유*상 / 유*원 / 유*희 / 육* / 윤*혜 / 윤*정 / 윤*진 / 윤*석 / 윤*식 / 윤*석 / 윤*구 / 윤*설 / 이*운 / 이*호 / 이*희 / 이*석 / 이*동 / 이*연 / 이*기 / 이*원 / 이*선 / 이*희 / 이*은 / 이*호 / 이*훈 / 이*희 / 이*주 / 이*균 / 이*재 / 이*철 / 이*호 / 이*을 / 이*경 / 이*민 / 이*기 / 이*훈 / 이*형 / 이*민 / 이*준 / 이*재 / 이*재 / 이*경 / 이*정 / 이*학 / 이*현 / 이*수 / 이*현 / 이*모 / 이*복 / 이*우 / 이*후 / 이*원 / 이*진 / 이*찬 / 이*형 / 이*봉 / 이*원 / 이*은 / 이*혜 / 이*우 / 이*호 / 이* / 이*우 / 이*환 / 이*은 / 이*길 / 이*별 / 이*솔 / 이*주 / 이*식 / 이*호 / 이*민 / 이*식 / 이*주 / 이*련 / 이*웅 / 이*규 / 이*정 / 이*평 / 이*희 / 임*민 / 임*택 / 임*진 / 임*영 / 임*재 / 임*웅 / 임*석 / 장*형 / 장*순 / 장*식 / 장*호 / 장*호 / 장*일 / 장*영 / 전*철 / 전*혜 / 전*셉 / 전*진 / 전*권 / 전*경 / 정*경 / 정*권 / 정*활 / 정*희 / 정*화 / 정*희 / 정*혁 / 정*석 / 정*석 / 정*명 / 정*현 / 정* / 정*훈 / 정*재 / 조*종 / 조*옥 / 조*진 / 조*진 / 조*신 / 조*희 / 조*상 / 조*철 / 주*범 / 주*현 / 지*태 / 진*미 / 차*진 / 차*아 / 차*호 / 차*란 / 채*도 / 최*자 / 최*환 / 최*윤 / 최*현 / 최*수 / 최*울 / 최*일 / 최*주 / 최*진 / 최*식 / 최*희 / 최*경 / 최*빈 / 최*구 / 최*모 / 최*만 / 최*원 / 최*환 / 최*나 / 최*진 / 추*상 / 팽*국 / 하*지 / 하*신 / 한*나 / 한*욱 / 한*현 / 허*균 / 허*경 / 허*영 / 허*한 / 홍*기 / 홍*근 / 홍*표 / 황*영 / 황*준 / 황*욱 / 황*현 / 황*미 / 황*혁 /

비정기 후원

고*진 / 곽*희 / 김*한 / 김*수 / 원*선 / 장*순 / 장*정 / 장*아 / 최*현 /

-

** 과학과 신학의 대화 후원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과.신.대 비전>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일반계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 잡힌 대화를 목표로 2가지 비전을 갖습니다.        

1
-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의 결과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내용을
함께 읽어가며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연구합니다.
이를 위해 과학 및 일반학문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2
-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바르게 배우도록 한국교회에 균형 있는
교육을 제공하며 이를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합니다.

<자문위원>

  강상훈 교수 | 베일러대학교 생물학
  권영준 교수 | 연세대학교 물리학
  김근주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김기석 교수 | 성공회대학교 총장
  김기현 목사 | 로고스서원 대표
  김요한 목사 | 새물결플러스 대표
  김익환 교수 |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김정형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근한 교수 | 유타대학교 기계공학부
  박영식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일준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박치욱 교수 | 퍼듀대학교 약학대학
  박화경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박희주 교수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박희규 교수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백경민 교수 | 숭실대학교 정보사회학과
  송수진 교수 | 고려대학교 글로벌경영학과
  신은철 교수 | 카이스트 경영공학부
  신희성 교수 | 인하대학교 수학과
  오세조 목사 | 팔복루터교회
  우종학 교수 |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윤철호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이길연 교수 | 경희대학교 의대, 외과과장
  이문원 교수 | 강원대학교 과학교육학부 명예교수
  이상은 교수 | 서울장신대학교 조직신학
  이정모 관장 | 국립과천과학관
  이현식 목사 | 강남중앙교회
  이택환 목사 | 그소망교회
  임범진 교수 | 연세대학교 의대, 병리학교실
  장왕식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전성민 교수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구약학
  정대권 교수 | 항공대학교 항공전자정보공학
  정삼희 목사 | 신도중앙교회
  정  준  목사 | 더처치
  조성호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차정호 교수 | 대구대학교 화학교육
  최승언 교수 |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
  최종원 교수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서양사
  팽동국 교수 | 제주대 해양시스템공학
  허  균 교수 | 아주대 의과대학 신경과
  현요한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황소현 교수 | 차의과학대학교 병리과/의생명과학과
 
<운영위원>

  우종학 | 대표

  강사은 | 실행위원장
  정대경 | 연구팀장
  윤세진 | 교육팀장
  백우인 | 출판팀장
  이승훈 | 미디어팀장
  이신형 | 북클럽팀장
 
  구형규 | 감사
  김성래 | 감사

  최경환 | 기획실장
  장민혁 | 행정간사
  이슬기 | 미디어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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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소식 202007

2020년 상반기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뭘 한 것보다 안 한 것이 더 많은 시간이 아니었나 합니다.

현장 강의가 온라인 강의로 모두 바뀌고

모든 회의가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상반기에는 세 번의 콜로퀴움을 진행했습니다.

 

19회 뇌과학과 기독교 신앙(김성신)

20회 케노시스 창조론(강태영)

21회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장왕식)

 

 

 작년에 새로 영상 간사님을 영입한 것은

모두 이때를 위함이었나 봅니다.^^

정말 탁월한 선견지명이었습니다.

 

날로 수준이 높아지는 영상을 보면서

과신대가 변하는 시대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상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이테오그램'에 이어

'온라인 북토크' 프로그램도 시작했습니다.

 

과신대 추천도서를 기억하시나요?

궁금한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 

https://www.scitheo.org/140

 

과신대 독서 길라잡이 카드뉴스

- 과신대 독서 길라잡이 - (고화질 이미지 다운로드) ** 과신대에서 제작하는 카드뉴스는 누구나 사용 또는 재배포가 가능합니다. (사용 시 출처를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www.scitheo.org

 

앞으로 매 월 과신대 추천도서를 한 권씩 소개하는

온라인 북토크를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합니다.

 

1회 방송으로는 <창조론 연대기>의

김민석 작가님을 모시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회 방송은 과신대 정회원이신 차수진 박사님과 함께

프랜시스 콜린스의 <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곧 영상이 올라갈 겁니다. 

 

7월 16일(목) 오후 2시에 3회 북토크가 진행됩니다.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김익환 교수님과 함께

존 레녹스의 <최초의 7일>로 방송을 합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하니 꼭 참여해주세요.

 

 

저희 사무국 간사님들의 소식도 간단히 전합니다.

2020년 7월부터 사무국 간사님들의

근무시간이 약간 조정됩니다.

 

최경환 사무국장은 주 35시간 근무이고

주 5일 출근합니다.

장민혁 행정간사님은 20시간 근무이고

2일 출근을 합니다.

이슬기 영상간사님도 20시간 근무이고

주로 재택근무로 영상 촬영과 편집을 맡습니다. 

 

사무국 팀웍이 너무 좋습니다.

좋은 사람과 즐겁게 일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요?^^

 

앞으로 좋은 컨텐츠와 영상으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과신대가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응원과 후원 부탁드립니다.

 


과신대 사역에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회원가입과 후원약정을 통해 정회원이 되실 수 있습니다. 

* 입회신청서 작성 링크: goo.gl/YYP76E

* CMS 후원서 작성 링크: bit.ly/2VLxHa6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신학 과잉과 과학 과잉

출처: http://m.dongascience.donga.com/

 

신학 과잉과 과학 과잉

 

강상훈 교수 (Biological Sciences Department, Eastern Illinois University, 과신대 자문위원)

 

 

우리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식의 얘기는 전혀 새롭지 않아서 누가 굳이 해 주지 않더라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는 사람들도 무척 많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현상이든 과학적인 설명을 요구하고, 실은 그 설명이 과학의 모양을 한 유사과학에 근거한 것임에도 과학이라는 단어의 힘에 기대어 온갖 것에 과학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돈벌이를 하려고 하는 현상이 어쩌면 과학의 시대에 대한 반증일 수 있겠다.

 

실제로 우리의 매일의 삶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과학과 기술 발전의 혜택에서 벗어나서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닥치고 있는 COVID-19 사태는 이 상황을 심화시켜 버렸다. 과학의 시대에서 최소한 대중들에게는 한걸음 정도 빗겨서 있던 생물학을 모든 대중의 관심에 모아들여서 지난 몇 개월간 우리는 바이러스학, 분자생물학, 역학 (epidemology) 등의 분야에 그동안의 모든 시도가 하지 못했던 대중 교육의 훌륭한 성과를 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시류에 편승하려는 세력들에 의한 잡다한 과학의 모양을 쓴 주장들이 난무하는 것도 현실이다. 예를 들어 A 혈액형이 더 잘 걸린다는 주장은 New England Journla of Medicine이라는 저명한 의학 저널에 기반하지만, 그 논문이 사실 2,000명 정도의 샘플 수로 분석하여 의구심이 있었고, 6월 29일 발표된 90만 명의 샘플에 대한 메타분석의 결과로는 혈액형과 관련한 유의미한 결론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https://www.covid19hg.org/results/)

 

출처: http://m.dongascience.donga.com/

 

실제로 이러한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과학 시대의 흐름을 고고히 거부하고 때로는 왜곡하는 대표적인 집단이 있으니,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물론 대부분의 상식적인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합리적인 사고와 실험과 분석의 과정을 통해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학문의 영역으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서 모든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 수혜를 당연히 누린다. 하지만 일부는 그 전제를 완강히 거부하여 수혜는 누리되 받아들이는 것은 선별적으로, 즉 자신의 이익이나 부족하고 왜곡된 이해에 기반하여 수용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부류의 행동 방식을 이미 교회 내에서 많이 보고 있는데, 문자주의자들의 성서에 대한 행태가 실은 ‘선별적 문자주의’라 부를 만하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교회는 그와 동시에 신학 과잉이라고 부를 만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신학적, 내지는 신앙적 해답을 요구하고 그것에 부합하려고 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분명 시대를 살아가는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실은 모든 성도들의 소임이라고 할 만한 일이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COVID-19 이후 기독교와 특히 교회라는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일상(new norm)에 대한 전망과 관련한 책이 거의 매일 발간되는 듯 하고, 관련한 기사나 유튜브의 논의들도 상당한데, 개인적으로 일일이 다 확인하지는 못하지만 대부분이 그냥 개인적인 단상이나 '거룩한 잡담' 수준의 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 세태는 사실 누구도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예측하기 어려운데 이 상황인데,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이 사태를 주도권의 문제로 이해하는 듯하다. 과학의 시대에 과학의 힘으로 어찌하지 못해서 19세기에나 사용할 법한 방법으로 이 pandemic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마치 과학 시대의 약화의 단초라 여기고, 어떤 기회라고 여기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우려가 든다. 

 

이쯤 되면 해결책이라고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얘기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다. 신학 과잉과 과학 만능주의의 근원에는 어쩌면 신학 부재와 과학 몰이해가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서 과신대의 사역이 더욱 중요하고, 무엇보다 일종의 시민의 교양 내지는 성도의 교양에 과신대의 역할이 이 시대의 요구라는 생각이 든다. 과신대의 사역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참여하는 모든 관심이, 특별히 저변을 넓혀가는 데 복무하는 관심과 기대와 노력과 시간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겠다. 우리 모두 화이팅!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Homo sensibilisㅡ"스푸마토Sfumato"

 

모호한 경계에서 경건한 생각을 보았다.(60)

 


안개 낀 날엔 세상의 표정을 붙잡을 수가 없다. 옅은 안개가 만드는 광경은 오랜 공백 끝에 나타난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지 시큰둥해하는지  알 수 없던 그대 얼굴 표정이고 시야가 흐릿해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새벽시간이다. 

먹구름이 짙은 하늘은 장마 때 널어 놓은 빨래의 감촉이다. 첼로의 낮은 선율이 스며들어 있는 공기가 스쳐 지나가면  세상은 마법에 걸려, 또렷했던 사물들의 경계와 경계가 서서히 섞이고 합쳐지면서 뭉개져  흐릿하고 자욱해져서는 결국엔 사라진다. 

앞산과 뒷산이, 건물과 건물이, 도로와 자동차가, 하늘과 지평선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모호해진다. 서로 이질스럽다거나 혹은 생경하진 않더라도 머쓱하고 떠듬거리느라 서로의 곁을 내어주지 못하던 사물들이 서로의 전부를 쥐어준다. 페라스peras, 즉 나와 너,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라는 선을 그어 경계 짓던 것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곳엔 공존만이 머문다. 

수묵화 같은 세상이 펼쳐지는 비 오는 날의 풍경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묵화 속의 세상은  모호해진  사물들이  다양한 색채로만 있으면서  보는 이를 점점 가까이 잡아당겨  그 앞에 세우고 낮은 목소리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 오는 날 세상은 신비의 베일을 두르고서 사물들을  전혀 새롭게 보도록 상상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그곳에서는 딱딱하고 날카로운 것들은 견디지 못하며 분명하고 선명한 것들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습기 머문 날은  쨍쨍하고 선명하고 똑바른 빛들을 대기 중의 수분이나 먼지 입자들이 가차 없이 마구 사방으로 흩어버려서 사물들은 자연스럽게 연기가 공기 중으로 사라지거나 안개에 싸인 듯이 부드러워진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사물에게 있던 색채들의 명료함은 낮아지고 대신에 섬세하고 부드럽게 그러데이션 된다. 그리하여 앞에 있는 것에서 뒤로 갈수록 밝은 톤에서 어두운 톤으로 보이면서 사물들은 경계가 희미해져  아스라한 여운으로 밀려나 보인다.

사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회화에 응용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의미로 스푸마토sfumato기법이라고 불렀다. 레오나르도는 사물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기법을 사용했는데, 흐릿한 윤곽과 그윽한 색상을 통해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와 합쳐지게 하면서 보는 이의  상상력을 꿈틀거리게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자와 빛은 공기중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선이나 경계가 없이 부드럽게 섞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반투명한 유약을 겹겹이 겹쳐 올리는 방식으로 스푸마토 기법을 표현하여 입가와 눈가 같은 특정부위에 서른 차례의 붓질을 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얼굴의 표정은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있다는 것을 관찰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기에  눈과 입의 가장자리를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표현해 놓았다. 

그래서인지 모나리자는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고 꼭 나를 쳐다보고 있는것있는 것 같아 섬뜩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물화에서는 영혼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화가들에게  강조했던 대로  모나리자는 영혼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며  볼 때마다 매번 다르게 보인다.  어느 때는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미소가 슬프게 스며들고 또 그런가 하면 평온하고 신비한 매력이 전해져 온다.

이것일까 저것일까 모호한 것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면서 확실한 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누구라도 이것이 진실이야 혹은 이것만이 진리야. 이것은 확고부동해. 이것은 정확해라고 선포해주기를, 그래서 애매한 것으로부터 놓여나길 바란다. 우리는 O, X 로 선택하는 데에 익숙하고,  맞다 틀리다의 이분법적이고 흑백처럼 선명한 판결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유전형질인가 싶을 정도다.

내가 옳기 때문에 너는 틀려야 하고, 하나가 진실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것이 선이면 저것은 악이다.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를 돌아볼 때에 대립되는 것이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을 초과해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불확정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세계 본연의 모습이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다만 확률적으로만 입자들의 상태를 말할 수 있을 뿐 처음부터 사물을 이루는 기본물질을  우린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물질이 어디에 어떤 빠르기로 어떻게 위치하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도 없다. 선긋기 식의  '확실함'은 사라져야 할 유령이다. 그 유령은 그대와 나를 가파른 비탈길 위에 세워둔다.  

우리들의 이분법은 스푸마토로 희미해지고 사라져야 할 때이다. 사물들의 경계가 사라지듯이, 다양한 주장들의 경계와 입장들의 윤곽선이 확고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은 메마르고 딱딱하지 않을 수 있다. 나와 너의 경계가 없어지는 지점이 두카Dukha 에서 벗어나는 지점이라 했다.

그대와 내가, 너와 내가 뒤섞여들어가듯 흐릿한 경계는 무한한 상상력의 지대가 열리며  마주 보는 시선과 시선이 부드러워진다. 그곳은 비무장지대, 즉 대화의 장이다. 관념의 모험이 시작되는 곳, 'and'가 있는 곳, 우리들의 사유가 중첩되는 곳이다. 우리의 사고에도 스푸마토가 필요하다. 날 선 경계인 변경 말고 뭉개져서 부드럽게 이어지는 섞임과 내어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독선과 편협은 야만의 칼날이 되어 사람과 사람을, 공동체와 공동체를 난도질하며 상처를 입힌다. 그 상태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과도 같아서 내가 이기면 무엇이라도 빼앗을 수 있고 함부로 할 수 있으며 전유할 수 있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확실한'과 '확실함'이  주는 속임수는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우리는 확실함 대신에 모호함 속에서 무언가 추측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고 그리하여 스스로 사물과 사태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고민할 수 있는 것,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 확실함을 얻어 교만에 빠지고 융통성 없는 편협함의 독에 빠지는 것보다 복되고 경건하다고 할 수 있겠다.

모나리자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부드럽게 섞이면서 모호해진 경계선에 있음을 기억에 새겨본다. 나는 모호한 경계에서 경건한 생각을 보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손과 밤의 끝에서는 

박준

까닭 없이 손끝이
상하는 날이 이어졌다

책장을 넘기다 
손에 베인 미인은
아픈데 가렵다고 말했고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고 말했다

여름빛에 소홀했으므로 
우리들의 얼굴이 검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새벽이 오면
내어주지 않던  서로의 곁을 비집고 들어가
쪽잠에 들기도 했다.

 

 

글_ 백우인 (bwooin@naver.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와 과학의 미래

출처: https://www.economist.com/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와 과학의 미래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올해 2월부터 지난 5개월간 코로나19는 이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이 바이러스가 그 어원의 뜻 그대로 ‘왕관’을 쓰고 지금도 기세 등등 정체를 숨긴 채 종횡무진하게 암약하고 있다. 6월 30일 현재 시각 보도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확진자 수는 1천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50만 8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며 세계 최강국을 자랑하던 미국에서 12만 8천여 명이 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어 세계 사망자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K방역이라고 자랑하며 잠시 우쭐했었는데 우리나라 상황도 2차 팬데믹을 예상할 정도로 작은 규모의 집단감염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지속되고 있고, 지금 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폭풍 가운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감염되지 않기 위해 다들 전전긍긍하고 있다. 과학의 일선에 선 전문가들은 국가의 절박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신속하게 백신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효용성에 대한 의심의 시선도 만만치 않다. 이 바이러스가 돌연변이에 능한 RNA 유형이고 이미 변이 된 코로나가 여기저기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게다가 그 백신의 구매비용이 엄청나서 일반 서민이 이것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불안한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20세기 이후 과학이 미세한 바이러스에 이토록 무기력한 적이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황망한 지경에 처해 있다.

 

 

그러면 종교는 어떠한가. 특히 모든 재난을 신적 섭리의 결과로 치부하는 기독교의 경우는 그 사정이 어떠한가. 맨 처음 중국 우한에서 이 바이러스 소식이 ‘우한폐렴’이란 말과 함께 퍼지기 시작할 때 국내의 한 유명 목사는 성급하게 중국 선교를 핍박하던 교회 철거 단장이 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1호 사망자라며 성급한 심판론을 확산시켰다. 이후에 대구 경북 중심으로 신천지 세력이 숙주가 되어 팬데믹의 확산을 주도할 즈음 그 심판의 대상은 신천지 이단종파로 옮겨가는 듯했다. 일부 극단적인 이념주의자들은 문재인 좌파정권에 대한 심판까지 읊조리며 SNS 공간을 달구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방역이 비교적 성공적인 결과로 드러나고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 감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어가면서부터 심판론이 쏙 들어갔다. 논리적으로 추론하면 이들이 지난 역사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적 침략의 오만한 행태에 대한 신적 심판을 얼마든지 떠들 만한 엄청난 사태였음에도 그저 잠잠했다. 일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내에 친일파 기독교인들이 꽤 많을 텐데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일본의 무기력한 대응을 두고 심판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후 신천지 감염 사태가 잦아들면서 일부 교회를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확산되니 신천지 이단종파나 기성 기독교 교회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즈음 수도권 집단감염 사태도 몇몇 교회들이 종종 그 현장으로 언급되면서 신천지 세력과의 비교 우위를 내세우기가 다소 멀쑥해졌다. 이처럼 코로나19의 위용은 과학과 종교의 텃밭을 휘저으며 이단과 정통을 가리지 않고 곳곳을 쑤셔대고 있다. 신실하고 경건한 자와 불경한 불신자의 경계도 의식하지 않고 마치 성령의 포즈를 흉내 내듯 불고 싶은 대로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이 바이러스는 인간의 모사와 모략을 비웃는 기세로 우리 삶의 일상을 집적거리며 침투하고 있다.

 

교회의 공예배가 위험한 감염 현장이 된 이래, 두어 달간 다수의 교회들이 예배를 온라인 화상 예배나 가정예배로 대체했다. 오프라인 예배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생존의 위기의식이 더욱 고조되었다. 뉴 노멀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각종 예언들이 난무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코로나19의 제왕적 패권 기간이 한없이 길어지면 앞으로 교회와 기독교의 미래, 종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한 논의와 대안이 자주 제기되곤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매일 감염자가 속출하면서 죽어가는 현실의 한 복판에서 별스런 위안과 평온을 담보하지 못한다. 맥 놓고 있으면 불안하니까 그냥 이런 얘기 저런 가능성을 떠벌이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부득이한 아우성이라고나 할까.

 

 

태초의 세계종교는 ‘교통 공간’에서 경계가 없었다. 마치 광야나 대양처럼 사위로 열려 있었고, 익명의 타자들이 서로 삼투하고 거래하면서, 또 번역하고 변용하면서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한 담대한 모험과 참신한 탈주의 동력만이 그 에너지로 활기찼다. 그러나 교리의 틀을 갖춰 제도화되면서 종교는 이질적 타자들이 서로 끊어 붙이며 생동하는 존재론적 연금술의 활력을 잃고 자기동일성의 포로로 전락했다. 그 결과 오늘날 종교는 재난을 빌미로 불안을 주입하거나 그 불안을 역이용하여 사람들의 내면을 묶어두는 체제 보전의 메커니즘으로 쇄말화되어간 측면이 없지 않다.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무한과 영원의 세계로 열린 과학적 지성을 억압하고 협소한 교리 체계에 인간의 상상력을 가두려고 한 시도였다. 교회가 그 중세적 오류를 시정하고 회개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는데, 이 땅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그 고렷적 퇴물을 다시 끄집어내 동일한 패턴의 오류를 되풀이하려는 증상을 곧잘 드러낸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종교의 미래는 여전히 희미한 불확실성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인류 종말의 시점이 단축되어 도래할 수도 있고, 단기간에 상황이 타개되어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희미한 안개의 지구촌에 불확실성과 위험의 변수는 더 많아졌고 그 수위도 높아졌다. 코로나 사태로 가려진 지구촌의 더 극심한 재앙에도 눈떠야 한다. 최근 한 보도에 의하면 올해 5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사상 최고치에 도달했다. 동토 시베리아가 펄펄 끓고 있고, 인도양 주변 대륙에 살인적인 메뚜기떼가 창궐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으며, ‘고질라’ 먼지구름이 북중미를 강타하고 있고, 아마존 열대우림은 활활 타오르며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다. 모두 가속화되는 지구온난화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재난이다.

 

종교와 과학은 이러한 전 지구적 재난에 공동보조를 취하며 공동 대응해야 할 때다. 상생의 기치는 늘 옳고 공존의 목표는 늘 희망적이다. 우리는 수백만 년간 이 지구를 지배해온 공룡의 멸종 앞에 겸손해야 한다. 고작 수만 년 역사 속에 숱한 시행착오를 딛고 간신히 문명을 일구어온 것이 우발성에 따라 제공된 자연의 선물, 신적 은총의 선물임을 너무 자주 잊는 건 아닌지 발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코로나19는 그 전위대로 우리에게 경고하러 파견된 하늘의 전령일지 누가 아는가. 점쟁이 노릇하듯, 종교를 일천하게 이용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섣부르게 입에 담지 말자. 금세 망령된 일로 드러난다. 대신 미래로부터 오시는 미지의 하나님을 향해 허름한 가슴, 진지한 지성을 회복하는 쪽으로 가는 게 좋겠다. 애당초 우리는 하나님이 이 만물 가운데 하시는 일의 시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컴컴한 존재 아니었던가.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오리진

 

오리진

데보라 하스마, 로렌 하스마 / 한국기독과학자회 옮김

IVP | 2015년 3월 25일 | 초판 2쇄 | 351쪽 | 17,000원

 

 

나는 현재 과신대 주부기자로서

과신대 독서 길잡이 10단계 책을

한 달에 한 권, 순서대로 읽고 있는 중이다.

 

과연 평범한 주부인 내가

어느 정도까지 소화할 수 있을까

살짝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읽고 있다.

 

지난달에는 [개혁신학 vs 창조과학]을 읽었는데,

기초과정도 두 번 들었고,

앞의 책들을 읽은 뒤에

순차적으로 읽은 터라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음 책은 [과학시대의 도전과 응답]이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기초과정과 일치하기도 하고,

이미 두 번 읽은 터라,

다음 책인 [오리진]에 도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리진을 읽자마자 곧 후회했다.

책의 난이도가 껑충 뛰었기 때문이다.

기초과정을 다시 들어야 하나

살짝 고민을 하면서,

이번에 핵심과정을 신청했는데,

내가 참 교만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반성을 하며 책을 읽게 되었다.

 

과학이 그려낸 우주의 어마어마한 광대함을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스스로 의미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 드는가, 아니면 무의미한 존재라는 느낌이 드는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인 우리의 가치는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193쪽)

 

 

[오리진]은 제목 그대로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먼저 ‘기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창세기’가 생각나고,

지금까지 읽어왔던

창세기의 여러 가지 의견들에 대한 것들이 떠올랐는데,

이 책은 나에게 오히려 반전을 주었다.

 

총 1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자 기원에 관한 흥미로운 주제들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게다가 각 장마다 마지막 부분에

토의할 문제들을 제공해주고 있어서

주일학교 고등부나 청년부에서 다루면

정말 재미있게 토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부인 나에게는 생소한 과학 단어들이

몇 가지 있어서 읽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재미난 상상을 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여러분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만드셨다고 생각하나?

 

정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까 빛이 뿅 생겨나고,

동물들이 있으라 말씀하시니까

동물들이 뿅뿅 생겨나는 장면’을 상상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리셔서

미생물이 진화하고 복잡한 생명체가 되어,

현대 인류 공동의 조상을 지나

마침내 현대 인류까지 기다리셔서

영혼을 불어넣으시는 장면을 상상하는가?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들은 진짜 있었던 최초의 인간일까?

아니면 인간중에서 선택받은 한 쌍의 부부일까,

아니면 인류를 대표하는 집단이었을까?

 

기원이라는 게 이렇게

여러 가지 재미난 질문을 안고 있다.

 

 

나는 기존에 다니던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안고 있었기에

신령한 자매가 아닌, 이상한 자매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오리진]을 읽으며,

내가 질문을 하는 게 정상이었구나.

 

우리는 왜 질문을 할까,

우리는 왜 우리의 기원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할까?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이 책에는 결국 예배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까지 질문하고 있다.

 

넘쳐나는 질문이 교회에서

감당이 안 됐던 분들이라면 이 책을 강추한다.

물론, 처음에는 혼란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 있다.

하지만 과신대 추천도서를 지금까지 읽어본 결과,

이제야 무언가 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나님은 나를 왜 부르셨을까?

인간은 결국 이 지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왜 살아야 할지,

아무 것도 모른 채 공허한 발버둥만 치다가

인생이 종결될 것 같다.

 

그.러.니.

 

[오리진] 읽으세요. 두 번 읽으세요. ^^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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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신앙으로 돌아보는 창조 신앙 (핵심과정 후기)

 

케노시스 신앙으로 돌아보는 창조 신앙

- 과신대 핵심과정 "창조의 다양한 관점들" 강의 후기 -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이자 <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표이신 우종학 교수님께서 ‘창조의 다양한 관점들’이라는 주제로 창조의 다면적 이해와 창조 관점의 발전 과정, 현대 창조론의 스펙트럼과 이슈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셨으며,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창조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과학적 이해를 종합한 건강한 창조신학을 세워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영화 <건축학 개론>이 생각났습니다. 영화는 주인공 승민(이제훈 분)과 서연(수지 분)이 대학교 시절에 서로가 서로의 첫사랑이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다는 풋풋하고 애틋한 로맨스를 그리고 있습니다. 엊그제 나온 영화 같은데 어느덧 10년 가까이 되어가는군요. 승민과 서연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별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서로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상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끝내 마음을 닫아 버린 승민, 오랜 세월이 지나 둘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결국 서로가 각자의 길을 택한다는 스토리로 끝을 맺게 됩니다.

 

 

이번 강의에서 우종학 대표님은 창조의 다양한 관점들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지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해 다양한 관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변함이 없지만 해석하는 입장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는 뜻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오해할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해는 오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비난하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내용 중 제빵사의 비유는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비유에는 무신론자와 크리스천 과학자, 그리고 창조과학자가 나옵니다. 무신론자는 오븐 안에서 빵이 스스로 진화했다고 봅니다. 크리스천 과학자는 무신론자와 같이 빵의 진화는 인정하지만 스스로 진화한 것이 아니고 제빵사가 오븐을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창조과학자는 오븐 자체를 부정합니다. 오븐은 보지 못하고 빵이라는 결과물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빵 하나를 놓고도 이토록 관점이 다른데 천지창조는 오죽할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창조의 관점은 크게 생물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부류와 인정하는 부류로 나누어지며, 생물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부류는 세부적으로 젊은 지구론, 점진적 창조론, 지적설계로 분류되며, 생물진화를 인정하는 부류는 열린 진화, 계획된 진화, 인도된 진화, 지적 설계로 분류가 됩니다. 이중 지적설계는 신이 설계한 자연계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두 부류에 공통적으로 위치하게 됩니다. 참으로 다양한 창조의 관점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바는 이러한 관점들 사이의 편견과 선입견이 오해를 낳고 더 나아가서는 닫힌 마음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영화 <건축학개론>과 같이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가 타인과 같은 존재로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가 되기를 원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셨던 숭고한 예수님의 사랑이 빛이 바라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오히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이러한 다양한 창조의 관점을 두고 갈등과 대립으로 반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혼돈이며 무질서입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인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해석하는 우리의 모습이 혼돈이요 무질서라면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은 이러한 과정이 무질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질서의 모습을 갖출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질서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종학 대표님께서 강의 중에 말씀하셨던 케노시스(Kenosis), 즉 예수님의 자기비움일 것입니다. 전능성을 비우시고, 영원성도 비우시고, 전지하심과 지위까지 비우시면서 우리의 가슴에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신 창조주를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장 7~8절)

 

 

과신대 김완식 기자 (comebyher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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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 나, 그리고 어머니.

  • 삶은 미완성인 것같습니다. 그래서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낳고키우고결혼시키고나면죽고...또....>

    아담 2020.07.04 11:45

 

이은, 나, 그리고 어머니.

 

백경민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조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우리 부부에게는 17개월 된 딸이 있다. 이름은 백이은. 결혼 후 5년 만에 얻은 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40이 넘어서 얻은 첫 자녀라서 그런지 점차 ‘딸 바보’가 되어 가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육아’다. 이은이가 무엇을 보며,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커 가는지를 하루하루 눈에 꼭꼭 담아 두려 하고 있다.

 

이은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돌아보게 되는 것은 나 자신 그리고 나의 부모이다. 어머니는 이은이가 태어나기 딱 1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10년 간 암투병을 하시다가 결국 이겨내지 못하시고 하나님 곁으로 떠나가셨다. 당시 해외에서 일하고 있었던 나는 어머니의 암투병을 함께 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어머니의 마지막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를 보내고 이은이가 찾아왔다. 이은이를 키우면서 그렇게 가정적이지 못하셨던 아버지와 함께 나와 내 동생을 키우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땠을까가 계속 상상이 되었다.

 

 

내가 태어나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을 예전에 어머니와 가본 적이 있었다. 그 집은 부산 어느 달동네였다. 어머니는 장을 보거나 연탄을 나르기 위해 매일 나를 등에 업고 몇 번의 등산을 하셨다고 하셨다. 그 때 나는 그게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다. 아니 그냥 내 귀를 스치는 소리로만 지나갔었다. 하지만 이은이를 재우기 위해 아파트 밖을 매일 서성거리면서 그리고 매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면서 어린 나를 등에 업고 달동네의 가파른 고갯길을 몇 번을 오르셨을 그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작년에 이은이가 태어났을 때 귀에 문제가 있었다. 난청이 발견되어서 조기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귀하게 얻은 딸에게서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 감정이 좀 진정되고 이은이가 무사히 언어 발달을 하게 되면서 나는 나와 어머니가 겪은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무릎이 갑자기 아파서 병원을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내가 암일 가능성이 있으니 암이라면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때 옆에 앉아 있었던 어머니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오열을 하셨다. 물론 다행히 나는 암은 아니어서 살아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때 나는 어머니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내가 아픈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은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통해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 때 어머니는 과연 무슨 심정이었을까를 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다. 살면서 언제가 가장 기뻤냐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두 말 하지 않고 내가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였을 때라고 말씀하셨다. 삼수 끝에 원하던 학교에 입학통지를 인터넷으로 확인하던 그 날 “합격”이라는 문구가 스크린에 뜨자마자 어머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며 그렇게 목놓아 우셨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어머니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사실 그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자녀가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부모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일까를 알기에는 이은이가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은이를 키우면서 나는 어머니의 그 감정을 이해할 날이 오리라 믿는다. 

 

요즈음 나는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를 통해 나를 보고 있고 내 옆에 서있었던 어머니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느꼈던 감정을 한땀한땀 나도 같이 느껴 가면서 인생이 성숙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부모로서의 감정을 다 느꼈을 때 나도 삶의 끝자락에 서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이은이도 한 자녀의 어머니로 느껴갔으면 한다.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날 하늘을 보면서 그렇게 읊조렸던 것 같다. 

 

“엄마. 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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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10. 다윈 이전,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해석은 어떠했나요?

 

다윈 이전,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해석은 어떠했나요?

How was the Genesis account of creation interpreted before Darwin?

 

 

서론

 

많은 사람들은 다윈의 이론이 진화와 6일 창조 개념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흔들 거라고 추측합니다. 사실 창세기 1-2장의 문자적 6일 해석은 1859년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 이전에도 기독교 사상가들이 지지하는 유일한 관점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초기의 기독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작품들은 다윈의 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창세기의 해석을 보여줍니다. 

 

 

초기 기독교 사상

 

고대세계의 위대한 지식 센터 중 하나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3세기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오리게네스는 창조에 대한 초기 기독교 사상의 예를 보여줍니다. 

 

<원리론>과 <켈수스를 논박함>으로 잘 알려진 오리게네스는 기독교 핵심 교리들을 제시하였고, 이교도들의 비난으로부터 그 교리들을 지켜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창조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설명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오리게네스 이전에 창조 이야기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을 옹호한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리게네스의 견해는 그를 따르는 초기 교회 사상사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1]

 

초기 5세기 동안 북아프리카의 주교였던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고백록>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수십 편의 작품을 썼으며, 그 중 몇몇은 창세기 1-2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2]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라는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의 앞 두 장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이해에 맞춰서 쓰여졌다고 주장합니다.[3]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창조 이야기는 더 단순하고 비유적인 형식으로 들려졌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발전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는 생물진화와 양립하는 견해입니다.[4]

 

 

 

후기 기독교 사상

 

역사에서는 창세기 1-2장에 대한 비문자적인 해석이 많습니다. 13세기 저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별히 과학과 종교의 만남에 관심이 많았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과학적 발견 사이에 가능할 수 있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신학대전>에서 그는 창조의 모든 6일이 실제로는 하루를 말하는 게 아니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했었던 이론)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능성을 가지도록 창조하셨다는 견해에 동조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날, 하나님은 실제로는 아니지만 “땅에 나타나기 전에” 밭의 모든 식물들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땅에 식물들이 생겨나기 이전에”, 다시 말해, 잠재적으로…모든 것들은 구별 되지 않고 함께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일하실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세상이 창조될 때 관찰될 수 있는 적당한 질서 때문이었습니다.[5]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 관점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하기 직전인 18세기 말 존 웨슬리의 작업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 성직자이자 감리교 운동의 초기 지도자였던 웨슬리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성경은 청중에 적합한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역사(창세기)에서 이 영감받은 필자는 … 먼저 유대인을 위해 썼습니다. 교회의 유아 시절에 맞게 그의 내러티브를 맞추면서 사물을 그 드러난 지각할 수 있는 모양에 따라 묘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빛에 대한 이후의 발전에 따라 그 겉모양 아래에 놓여 있는 신비를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도록 남겨 두었습니다.[6]

 

웨슬리는 또한 성경은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쓰진 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도록 쓰였다"고 주장했습니다.[7] 

 

19세기 프린스턴 신학교는 보수적인 칼빈주의와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견고하게 수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프린스턴 신학자 B. B. 워필드는 진화를 인간의 기원에 대한 적절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확고한 과학적 연구 결과가 서로 조화로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역사가 마크 놀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경무오성에 대한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리의 가장 현대적인 수호자였던 B. B. 워필드 역시 진화론자였다.”[8]



결론

 

기독교 사상의 역사에서 창세기의 문자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군림하지는 못했습니다. 현대 과학의 발견은 성경에 대한 신뢰를 져버리는 선동으로 여겨져서는 안되고, 성경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도우미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조언을 했습니다.

 

매우 불분명하고 우리의 시야를 훨씬 벗어나는 사안들에서,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믿음을 침해하지 않으 면서도 성경이 매우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서두르지 말 아야 하며, 단호하게 한 입장을 고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만약 진리추구에서 더 많은 진전이 이러한 위치를 전복시키게 된다면, 우리 역시 무너질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의 가르침과 일치하기를 바라면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전투가 될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기를 바라야 합니다.[9]

 


 

[1] Peter C. Bouteneff, Beginnings: Ancient Christian Readings of the Biblical Creation Narratives(Grand Rapids, MI: Baker, 2008).

[2] Gillian Clark, Augustine: The Confession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3] Bishop of Hippo Saint Augustine,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Ancient Christian Writers, no. 41 (New York: Newman Press, 1982).

[4] For a further discussion of Augustine’s perspective on creation, see chapter 6 of Francis Collins’ The Language of God: 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 (New York: Free Press, 2006), as well as chapters 8 and 15 of Alister McGrath’s A Fine-Tuned Universe: The Quest for God in Science and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5] St. Thomas Aquinas, “Question 74: All the Seven Days in Common,” in The Summa Theologica of St. Thomas Aquinas, 2nd ed., trans. Fathers of the English Dominican Province (London: Burns Oates and Washbourne, 1920). Also available online at “Summa Theologica,” New Advent (accessed Oct 21, 2011).

[6] John Wesley, Wesley’s Notes on the Bible (Grand Rapids, MI: Francis Asbury Press, 1987), 22, quoted in Falk, Coming to Peace, 35. Also available online at John Wesley, “John Wesley’s Notes on the Bible,” Wesley Center Online (accessed Oct 21, 2011).

[7] John Wesley, A Survey of the Wisdom of God in the Creation: or, A Compendium of Natural Philosophy, 3rd ed. (London: J. Fry, 1777), 2:463, quoted in Falk, Coming to Peace, 35.

[8 Mark A. Noll and David N. Livingston, eds., B. B. Warfield: Evolution, Science, and Scripture (Grand Rapids: Baker, 2000), 14.

[9] Augustine,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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