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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



과신대의 소식을 전하는

과신대 VIEW - 21호

과신대 칼럼
" 온교육으로서의 과학적 소양 "
최승언 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

지금 할 수 있는 온교육과 관련된 과학교육 중의 하나는 합리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를 모두 할 수 있는, 교사 주도와 학생 주도가 함께하는, 학생 개인 학습과 학생간의 협업 학습이 모두 이루어지는, 과학 지식과 탐구활동 이와 서로 연결되는 과학적 태도 및 과학의 본성이 모두 다루어지는, 그리고 과학 글쓰기와 말하기, 듣기와 읽기가 동반되는, 이러한 모든 것과 함께하여 개인적인 과학 이슈 혹은 사회적인 과학 이슈에 대한 의사 결정 및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 실천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과학적 소양을 이루는 교육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적 소양을 이루는 과학교육은 아마도 현재 개신교 교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창조과학의 문제를 해결해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교육이 미래를 살아 내게 하는 역량들을 가지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더보기)

[과신Q]
매월 우종학 교수님께서 과학과 신학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골라
[과신Q]라는 제목으로 연재해주십니다.
교회에서 혹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과신Q]를 주목해 주세요.


(2)
과학자가 부활을 믿을 수 있나요?


(글보기)

[북클럽 소식 - Book Club]

Coming Soon!
[과신Talk] 창세기와 복음의 공공성


2019.2.26 (화) 저녁 7:30 / 성공회 분당교회

복음의 목적은 개인 구원이나 도덕적인 감화에 있지 않습니다. 복음의 공공성은 복음의 본질입니다. 김근주 교수님을 모시고 창세기 속에 담겨 있는 복음의 공공성을 살펴보는 특강을 준비했습니다.  (더보기)

Coming Soon!
[과신Talk] 공룡, 어디까지 알고있니?

2019.2.19 (화) 저녁 7:30 /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과신대에서 겨울방학을 맞이한 자녀들에게 최고의 강연을 준비했습니다. 스스로를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로 소개하는 서울시립과학관 이정모 관장님께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들을 수 있는 재미있는 공룡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더보기)


[과학자의 읽기]

김영웅 박사님의 서평을 연재합니다.
과학자가 읽은 신학책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낯섦'을 환대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기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김동문 | 선율 | 2018

(글보기)


[과신대 이야기 - Story]
<성경, 바위, 시간> 출간기념 포럼

순교할 각오로 공부합시다! (백우인 기자)

송인규 소장님 역시 목회자들이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피를 쏟는 한이 있더라도 공부를 해야 진리를 수호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아주 자세히까지는 모르더라도, 기본적인 내용은 알아야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또, 죽도록 기도하자는 말은 하지만 죽도록 공부하자는 말은 안 한다. 순교할 각오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슈가 있다면 최소한 어떤 논의가 진행되는지는 알아야 하고, 그 분야에 전문가 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이슈들은 공부를 해야 제대로 된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순교할 각오로 공부해야 한다는 말에 청중석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진심으로 하시는 이야기였다. 목회자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향한 호소였다.


(더보기)
제 1회 과신대 청소년 캠프

지난 2/9 (토)에 열린 과신대 청소년 캠프의 생생한 후기입니다. 청소년 캠프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하시다면? 아래를 클릭해주세요!

(더보기)

[과신대 Book Story - 신간 & 서평 소개]
데이비스 영, 랠프 스티얼리 <성경, 바위, 시간> (IVP, 2019)

서평 | 박종범

특별히 나는 이번 신간 속 보수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두 저자, ‘데이비스 영’과 ‘랠프 스티얼리’ 박사가 진실한 신앙 위에서 창조를 위한 지구 연대 논쟁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이후 논의될 내용을 제하더라도, “보수적인 신앙이 곧 창조과학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이지만 신학적 편견에 의해 쉽게 무시되던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더보기)

Coming Soon!
<과신대 기초과정 II> 4기 모집

2019.2.25 (월) 저녁 7:15 부터 (6주, 6회) / 더처치 비전센터 6층

과학과 신학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을 공부할 수 있는 <기초과정 II> 4기를 모집합니다. <기초과정 II>는 <기초과정 I> 수료자만 신청 가능하며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대한 심화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주간 과신대 자문위원 교수님들과 함께 공부하는 집중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6주 과정을 수강하고 과제를 성실히 제출한 분들에게는 수료증을 수여합니다.  (더보기)




과신대와 뜻을 함께 할 협력교회를 모집합니다. 

과신대는 과학주의 무신론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복음의 변증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위해 건강한 창조신학을 교육하고 연구합니다. 

과신대의 비전과 사역을 지지한다면 과신대와 함께하는 교회로 동참해 주세요. 

과신대는 앞으로도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기독교 교육 컨텐츠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보급하기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지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더보기)


 

<과.신.대 비전>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일반계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 잡힌 대화를 목표로 2가지 비전을 갖습니다.        

1
-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의 결과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내용을
함께 읽어가며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연구합니다.
이를 위해 과학 및 일반학문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2
-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바르게 배우도록 한국교회에 균형 있는
교육을 제공하며 이를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합니다.

<자문위원>

  강상훈 교수 | 베일러대학교 생물학
  권영준 교수 | 연세대학교 물리학
  김근주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김기석 교수 | 성공회대학교 총장
  김기현 목사 | 로고스서원 대표
  김요한 목사 | 새물결플러스 대표
  김익환 교수 |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박근한 교수 | 유타대학교 기계공학부
  박영식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일준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박치욱 교수 | 퍼듀대학교 약학대학
  박화경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박희주 교수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신은철 교수 | 카이스트 경영공학부
  신희성 교수 | 인하대학교 수학과
  윤철호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이길연 교수 | 경희대학교 의대, 외과과장
  이문원 교수 | 강원대학교 과학교육학부 명예교수
  이상희 교수 | 캘리포니아대학교 인류학과
  이정모 관장 | 서울시립과학관
  이택환 목사 | 그소망교회
  임범진 교수 | 연세대학교 의대, 병리학교실
  정대권 교수 | 항공대학교 항공전자정보공학
  조성호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최승언 교수 |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
  팽동국 교수 | 제주대 해양시스템공학
  허  균 교수 | 아주대 의과대학 신경과
  현요한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운영위원>

  우종학 | 대표

  장현일 | 총무이사
  정대경 | 연구팀장
  윤세진 | 교육팀장
  백우인 | 출판팀장
  강사은 | 북클럽팀장
  심왕찬 | 미디어팀장

  구형규 | 감사
  김성래 | 감사

  최경환 | 기획실장
  이진호 | 행정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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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성경, 바위, 시간> 북토크 후기


백우인 기자



입김이 뿌옇게 연기처럼 흩어지고 체감 온도가 상당히 낮은 저녁 시간... 사람들의 발걸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해진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것처럼 한 방향으로 모아져 있었다. 혹시 “거기?” “홍대 프리스타일?” “7시 반?” “「성경, 바위, 시간」 북 콘서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140여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모였다. 일찍 오신 분들을 위해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맛있는 수제 쿠키까지 준비해 주신 배려에 감사하며 조금이라도 더 잘 들으려고 집중하는 청중과 조금이라도 더 전달해 주고자 하는 강연자분들의 열정 앞에 추위도 물러갔다.


「성경, 바위.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오랜 세월의 역사를 품고 있는 지질학적 관점에서 말하면서 창조를 변증하기 위한 지질학적인 접근과 해석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한 반면에 어떻게 미끄러진 길을 가게 되어 이상한 창조과학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두꺼워서 대략적으로만 훑어보고 가서 송인규 소장님, 박희주 교수님, 우종학 교수님의 발표를 열심히 메모하면서 들었다. 미국 칼빈대학교(Calvin College) 지질학자 데이비스 영과 랠프 스티얼리가 쓴 「성경, 바위, 시간」은 지질학적 연구 성과물 중 방사성동위원소의 반감기 계산을 통해 최소한 지구 나이가 6000년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해 저자들은 하나님이 6000년 전 즉시적으로 지구를 창조했다는 해석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잘못된 이론에 근거해 교육받고 자란 청소년들이 훗날 지질학적 이론을 접할 때, 자칫하면 교회와 창조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지적과 함께 "기독교 청소년의 영적 건강과 관련된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젊은 지구론을 옹호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자분자분 말씀하시는데 듣고 있으면 시원해지는 박희주 교수님 발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300~400년 전까지만 해도 과학은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변증 도구였고 과학적 발견과 성경 기록을 결합한 '성서 지질학'이라는 분야가 나오게 되었다. 성서 지질학이 이론화된 사례로 크게 3가지-홍 소설, 수성론, 격변설-를 들 수 있다. '홍수설'은 잇따라 발견되는 화석이 노아의 홍수 때 만들어진 것이라며 이 화석이야말로 노아의 홍수의 증거라고 믿었다.


'수성론'水成論은 천지창조 때 지구 전체가 물로 덮여 있다가 후퇴하면서 땅과 바다로 구분되고 육지가 침식과 침강이 일어나 바닷속으로 내려가 퇴적암을 형성했다는 이론이며 성경 내용과 잘 맞아떨어져 홍수설을 대체했다. '격변설'은 지층 위치에 따라 퇴적층이 생성되는 시기와 화석도 다르며 시간적인 간격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성론을 대체했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성경 기록을 조화하려는 노력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새로운 이론이 생겨나고 새로운 발견이 계속되면서 기존 가설은 폐기되거나 수정되는 반복되는 과정을 겪었다. 창조과학자 대다수는 종교적 동기 즉 문자적 해석을 고집하며 문자적인 확실성에 대한 추구에 집착하여 독단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성경적 관점은 송인규 소장님께서 발표해 주셨는데, 요약하면 성경의 역사성을 받아들이되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역사성은 말하지만 창조 순서와 창조 방법은 말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지질학적 관점은 우종학 교수님께서 발표하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법'에 대한 소개인데, 우라늄이나 스트론튬 같은 방사성원소들이 일정한 반감기를 지닌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지구 나이를 계산하는 방법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이 측정법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퇴적층에 마그마의 관입 후에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퇴적층이 쌓인 지질구조가 보여주는 긴 시간의 흔적도 인정하지 않는다.



삼인삼색의 발표가 끝나고 2부 대담 시간은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과학이 발전하면 성경해석도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송인규 소장님은 비구원적이고 자연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과학적 사실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설교시간에 과학적인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목회자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우종학 교수님은 잘 모르는 분야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원칙이며 목회자들이 신학적 깊이가 있더라도 과학을 잘 모른다면 그것에 대해 일단 아는 척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했다. 과학에 대해 아예 침묵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일반 상식 수준의 과학 정도는 충분히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송인규 소장님 역시 목회자들이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피를 쏟는 한이 있더라도 공부를 해야 진리를 수호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아주 자세히까지는 모르더라도, 기본적인 내용은 알아야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또, 죽도록 기도하자는 말은 하지만 죽도록 공부하자는 말은 안 한다. 순교할 각오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슈가 있다면 최소한 어떤 논의가 진행되는지는 알아야 하고, 그 분야에 전문가 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이슈들은 공부를 해야 제대로 된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순교할 각오로 공부해야 한다는 말에 청중석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진심으로 하시는 이야기였다. 목회자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향한 호소였다.


과신대 정회원들에게 선물로 증정된 「성경. 바위. 시간」을 만져보면서 여기저기 “순교할 각오”로 읽어보자고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700여 페이지 분량을 혼자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과신대 남부 북클럽 2월 모임에 참여하시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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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드.디.어

제1회 과신대 청소년 캠프가 시작됩니다.

자, 들어오시죠~








1교시 수업은 정승화, 김예지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셨습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재판을 통해

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직접 판결문을 작성해서

상황극을 연출하고 

핸드폰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이 너무나 글을 잘 써서

선생님께서 깜짝 놀랬다고 하네요.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동안

부모님들도 418호에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박영식 교수님은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이지은 선생님은 

"자녀와 대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강의해 주셨습니다.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표정 보면 아시겠죠?^^




뭐니뭐니 해도 먹는 게 최고죠.

점심은 진달래로 먹고

간식으로는 햄버거와 콜라로~


역쉬 잘 먹더군요.

햄버거 두 개는 거뜬히~^^





2교시는 구형규, 백우인, 서광 선생님께서

"잃어버린 화석을 찾아서" 수업을

진행해 주셨습니다. 

화석이 어떻게 생기는지 강의를 듣고

직접 손가락 화석을 만드는

실습을 했습니다. 

뒤에서 섬겨주신 자원봉사자들에게도 감사~






공부만 할 수는 없죠.

서광 선생님께서 공동체 게임을 준비해 주셨는데

정말 전문 MC가 따로 없더군요.

재미있고 유익한 게임으로

즐겁게 한바탕 놀았습니다. 

마지막 게임은 매듭 풀기로 훈훈하게..^^






3교시는 차수진, 윤세진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인류의 뿌리를 탐구해 볼까?"

네, 진화론에 대한 강의입니다. 

어떤 내용일지 너무나 궁금하시죠?


차수진 박사님께서 진화론에 대한 내용을

아주 쉽고 재미있게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윤세진 선생님께서 

깜징어라는 가상 동물의 계통수를 그리는 활동을 했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이 다 끝났지만

감동과 여운은 길게 남습니다.

멀리 제주도에서 온 학생도 있고

청주에서 온가족이 올라온 분도 계셨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고 다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모두들 만족한 표정입니다.


수고하신 선생님, 자원봉사자 여러분

좋은 장소를 대여해 준 NPOpia

그리고 끝까지 함께 해주신 부모님들께

진신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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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보수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은 과학적 합리성을 부정할까?”

성경, 바위, 시간 | 데이비스 영, 랠프 스티얼리 | IVP | 2018


박종범



이번 서평을 준비하며 올해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직면한 학문적 결핍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난 4년간의 신학대학교 재학 중, 나는 성서의 창조를 믿으면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라는 수업을 통해 알게 된 브라이언 그린을 통해 쿼크나 힉스, 초끈 이론이나 M 이론 등의 양자역학의 영역에 조그마한 관심을 가져왔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학문적 관심은 아니었다. 합리적인 신학도이자 신앙인으로 보이기 위해서 양자역학자들의 이론을 우주론에 대입해보기도 하고, 알리스터 맥그래스 같은 저명한 신학자의 저서를 쌓아두고 읽으며 그들의 신학적 작업이 나와 동일하다는 것처럼 포장하기도 했다.


서평의 첫 단락부터 자기반성을 하는 이유는, 나의 신학적 무지함으로 인해 젊은 지구 창조론은 성서를 절대 무오로 믿는 이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라는 그동안의 오만함을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나는 창조에 관해 이렇게 생각해왔다. “창조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믿으며, 창조에 대한 탐구는 합리적으로 열려있다.” 이 말은 스스로에게 창조 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안정감을 갖게 했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던 젊은 지구 창조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합리적 신학도의 이미지를 굳히기 위한 것이었고, 나의 성서 이해는 현대의 과학적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일말의 우월의식이었다. 이 자리를 통해 성서를 하나님의 무류한 말씀이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사과를 드리고 싶다.


특별히 나는 이번 신간 속 보수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두 저자, ‘데이비스 영랠프 스티얼리박사가 진실한 신앙 위에서 창조를 위한 지구 연대 논쟁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이후 논의될 내용을 제하더라도, “보수적인 신앙이 곧 창조과학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이지만 신학적 편견에 의해 쉽게 무시되던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을 통해 변화된 스스로의 소감은 이 정도로 하고, 지금부터는 <성경 바위 시간> 속 살펴볼 만한 포인트들을 각 장마다 간략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1부는 역사적 관점을 통해 보는 지구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 위해 각 시기별로 지질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논쟁이 함께 담겨있다. 특별히 현대 지질학이 출현한 이후 지질학과 성서(성경) 사이의 간극은 더욱 분명해져갔다. 이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두 세기 전부터 영미-유럽권 교회들에서 논의되던 내용이었음을 확인하면서 배우는 점이 크다. 오늘 우리가 치열하게 젊은 지구 창조론의 망령과 논증하는 것이 이전부터도 이어졌다는 사실은 지긋지긋함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를 바로 이해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으로 본다면 우리 세대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을 기대하게 된다.


따라오는 2부는 성경적 관점을 통해 보는 지구의 태고성이다. 1부의 마지막 소제목이 지구의 태고성이었고, 그 내용이 20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연구인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2부에서 지구의 태고성을 성경, 성서적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질학의 역사성에 비춰서 상호 비교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성서 해석은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성서의 본연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성서 해석이 모든 부분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비는 과학과 문화적으로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이번 장의 마지막과 함께 독자의 머릿속에는 분명히 떠오를 것 같다. 그 생각은 보수적 신앙의 그리스도인이나 성서 해석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나 동일할 것으로 판단된다.


성서와 역사 속에서 잠시 잊힌 부분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들은 지질학 박사이자 교수라는 점이다. 3부의 목차를 읽자마자 이전까지는 개론이고, 이제부터 본격 강의 시작인가?”하고 스스로 묻게 되었다. 쉽게 말해, 지구과학 이후에는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정보를 얻던 지질학의 소재들과 용어들이 이번 장에는 즐비하게 등장한다. 이번 장의 마지막 부분이 방사성 연대 측정에 관한 이야기들이기에 이번 장이 흥미와 당혹감을 오가는 기분을 독자들에게 선사해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지질학이나 인접 학문을 연구하거나 관련직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을 제외한) 우리가 이 기회가 아니면 창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들 가운데 지질학이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을 따로 찾기에는 제한 사항이 있다. 이번 장이 책에서 가장 두꺼운 부분을 차지하며 다소 생소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창조에 대한 관심이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로만 구성된다면 이것 또한 창조를 이해하는 시선을 가둬버리는 제약이 될 것이다. 지질학을 이해하는 쉬운 길은 이 책을 읽었지만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 다만 쉬운 길은 모르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지질학자들이 미시간 분지와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통해 지구의 역사를 탐구하고 탐험하는 이 이야기들이 다른 대륙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생각의 여지와 즐거움을 주는 것은 참 특별한 경험이다. (책에 있는 이 지역들의 사진을 보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서 모 포털 사이트를 통해서 찾아보았는데, 컬러로 보니 자연의 광대함과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이가 다른 곳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4철학적 관점이다. 사실 지구의 태고성을 탐구하는 일에 철학적 개념이 사용된다는 것에 놀라움이 있었다. 사실 역사적-성경적-지질학적 관점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기본적인 이해는 있었기에 저자들이 주는 정보들을 습득해서 나의 지식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4부에서 이야기하는 철학적 관점은 들어봤지만 이 개념이 이렇게 적용될 수 있어?”라고 스스로 되 물으며 쉽사리 책장을 넘기지 못한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철학은 어렵다라는 스스로의 성급한 결론이 다양한 분야에서 철학의 개념이 이미 적용되고 있음을 놓친 것 같다. 비록 철학적 관점에 대한 오해로 4부의 시작을 열었지만, 읽어가면서 이번 장이 왜 마지막에 위치하였는지 깨달으며 마치게 되었다. 이 책의 곳곳에서 이미 젊은 지구 창조론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4부에서는 이를 보다 분명히 지적하면서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 가능한 지질학적 증거의 총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 책의 주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지질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입문서로 쓰기에 적절하다. 뻔한 말일 수 있지만, 이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될 독자들은 단순히 지질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만 이 책을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창조에 대한 이해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과학과 멀리 있지 않음을 알고 싶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가까이하고자 하는 노력들 가운데 이 책을 집게 된 이들에게 해답은 아니더라도 해답으로 향하게 하는 성서와 더불어읽을 만한 책으로 적극 추천한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에는 양승훈 교수의 해설이 담겨 있는데, 이 책을 정독하기 전 예습을 위해서나, 읽고서도 여전히 남는 의문들을 정리할 때, 핵심적인 부분들을 다시 생각하고자 할 때도 참 유익하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에 대한 고민이 양승훈 교수에게도 동일하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해설 속에서 묘한 동질감과 더불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지혜 또한 얻어 갈 수 있다.


성서를 해석하는 시선과 신앙이 다르듯 창조를 이해하는 견해들이 다름을 더욱 분명히 깨닫는 오늘날이다. 분명한 점은 이 책을 읽고서 하나님의 창조가, 그리고 이 지구가 우리의 단순한 셈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드는 분들에게나, 앞서 말한 눈가리개를 여전히 벗길 거부하는 분들에게나 이 땅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 이 땅은 하나님의 창조의 땅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들이 창조의 땅을 설명하고자 자신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신앙하는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왔던 과학, 특별히 지질학의 발견을 무시하거나 하대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은 신학을 전공하는 나에게나 신앙 안의 지체들에게는 어려운 부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의 어떠함을 떠나 성서 고유의 가치와 전통을 존중함이 훼손될 것을 항상 염려하고 경계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염원을 가지고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고 이 신앙을 후대에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우리의 이 마음과 이 태도는 충분히 존중받고 앞으로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인도하고 계신다는 신앙처럼,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창조의 세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성서뿐만 아니라 창조의 세계,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또한 이 땅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의 수고는 성서 해석을 위해, 그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힘쓰는 우리의 최선만큼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단순히 젊은 지구 창조론의 카운트 어택(반격) 정도로 그치지 않길 바란다. 창조하신 이를 알기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 창조하신 이가 만드신 땅에 대해 무지하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성경 바위 시간>을 통해 이 땅에 있는 모든 현상, 특별히 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최선이 하나님을 열망하는 우리의 신앙만큼 자라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도한다.


창조의 땅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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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낯섦'을 환대하며 하나님 알아가기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김동문 | 선율 | 2018


김영웅



성경은 모든 답을 알려주는 마법 책이 아닐 뿐더러, 인간의 성공과 번영을 위한 참고서도, 또 자기계발서도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 사이에 생긴 관계의 단절, 그 단절로 인한 결과, 그리고 그 불가항력적인 결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 회복의 메시지가 담긴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목적은, 김근주 교수의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에서도 강조되듯,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가 참이라면,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도 참이다.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안위와 유익만을 위해 보험이나 부적 같은 용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무늬만)도 이 세상엔 적지 않지만, 만약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은혜 아닌가!),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하나 생기게 된다. '어떡해야 성경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가?'

 

성경 읽는 방법에 대한 책과 강연은 이미 넘치도록 많다. 그러나 여기, '성경을 낯설게 읽어보기'를 권하는 특이한 책이 있다. 책의 부제라고 할 수 있는 '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이 책은 벌써 내 주의를 충분히 끌었지만, 책을 열어 프롤로그에 쓰인 '낯설게 만나는 성경'이라는 제목을 읽었을 땐, 이미 내 마음은 이 책에 대한 기대로 충만해졌다. 어제 밤, 아니 오늘 새벽,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될 만큼 또렷한 정신으로 난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림과 글이 절묘하게 어울려,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었고, 읽는 이에게 지루함을 줄 틈도 제공하지 않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으며, 가능한 천천히 읽으려 해도 자꾸만 책장이 넘어갈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한 흡입력을 가진 책이었다. 높은 곳에 서서 함부로 결론을 지은 뒤 낮은 곳에 위치한 독자에게 교훈이나 지침을 던져주려 하지 않았으며,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 볼 수 있도록 독자의 자리로 내려와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책이었다. 책의 부제에 포함된 '낮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미 저자가 책을 구성한 의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저자와 독자가 함께 읽는 책. 아마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는 누구라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오랜 기간 중동 선교사로서 그들의 낮은 자리의 삶을 직접 함께 하며 살아낸 저자의 일상의 호흡이 배여 있는 책이다. 낯설게 성경을 읽어보자는 그의 바람은 성경이 주어졌던 '그때 그곳'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자는 의미를 내포한다. 성경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성경은 '그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쓰였던 책이기에, 현재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관점은 성경이 처음 주어졌던 독자들이 이해했던 관점과 똑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오류가 없을 거라는 논리의 비약으로 이루어진 오류로부터도 벗어나야 하며, 한낱 개인의 위로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용도로 성경을 읽는 사적인 복음의 관점으로부터도 벗어나야만 한다. '그때 그곳'의 관점에 대한 이해는 시간과 공간과 문화가 다른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런 낯섦을 거부하지 않고 환대할 때, 우리의 성경 이해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인 김동문 선교사의 겸손한 도움으로 이러한 여정에 뒤늦게나마 발을 내디딜 수 있어 난 참 다행이다. 선교사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 만화책을 이루고 있는 총 18개 짧은 꼭지의 공통분모는 '낮은 자의 하나님'이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낮은 자의 하나님'을 이해해 보며 '낯설게 성경을 읽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다. 교회에서 익숙하게 수없이 많이 들어왔던 성경 본문만이 아니라 그다지 설교 본문으로 많이 사용되지 않은 부분까지 고루 담겨 있는데, 때로는 허를 찔린 듯한 기분으로, 때로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으로 난 감탄과 함께 각 꼭지를 읽어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인간은 고대 근동 신화에서 소개되는 것처럼 신을 대신하여 일하도록 지음 받은 노예 같은 존재가 아닌,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져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임무를 부여 받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 난 이 사실 덕분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할 수 있었고, 기독교의 구별됨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아브라함과 소돔고모라의 나그네를 대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환대 vs. 천대)을 대비하는 부분에서 난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배제와 혐오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방법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신앙의 완전체 이미지로 알려진 이삭 이면에 있는 아픔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아픔도 아브라함 입장이나 설교자 입장이 아닌 이삭과 하나님의 입장에서 신선하게(낯설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생활에서 새로운 거룩함을 알려주신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성막의 실체(민낯)와 그 안에서 마치 3D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낮은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겼던 제사장의 고군분투했던 삶도 저자가 제공하는 그때 그곳의 현실적인 해설 덕분에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외에도 짧지만 많은 이야기들이 재치 있는(때론 폭소를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림과 함께 책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마도 책을 책장에 꽂아놓지 않고 나처럼 책상 위에 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또 읽고 싶어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말한다. 독자들이 "무엇보다 하나님은 힘 있고 권세 있고 풍족한 이들보다 나그네, 이방인, 여성, 노동자, 마이너리티, 상처 받은 사람, 연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 등 낮은 자에게 온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이 책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고 말이다. 저자의 바람은 적어도 나에겐 성취되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낯설게 읽는 성경 읽기 방법이 이 책을 통해 시작되어, 몰랐거나 희미하게 알았던 하나님을 밝고 선명하게 알아가는 또 다른 시작이 되었음을 믿는다. 신약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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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2. 과학자가 부활을 믿을 수 있나요?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과학자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데 부활을 믿는다면 과학자로서 지적성실성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럴까요? 과학자가 부활을 믿으면 안 된다는 태도 자체가 어찌 보면 상당히 종교적인 듯합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창조를 믿는 신앙, 그리고 예수의 성육신을 믿는 신앙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구성합니다. 물론 부활에 관해서 다양한 형태의 믿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니 복음서는 소설이다, 예수는 사실 죽은 게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다, 예수의 부활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제자 공동체가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등등 말입니다.

 

분명한 점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진술이 모든 세부사항에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세부적인 불일치의 경향은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빈 무덤과 그 공동체의 경험과 진술, 그리고 순교로 이어지는 부활의 믿음에 대한 헌신은 부활의 역사성을 매우 강하게 제시합니다.

 

이 글에서 부활의 증거를 제시하거나 과학적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논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으로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걸까요?



부활이 가능한지 과학으로 밝힐 수 없다는 점은 아마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물론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단한 사람이 깨어나서 의사들을 당황케 하는 일이 어쩌다 일어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건 일상적인 경험이고 과학적 결론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생물이 됩니다.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이 과학의 시각입니다. 생물은 무생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생물학의 결론입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던 전근대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발생성을 믿었습니다. 가령, 창문을 꼭꼭 닫아 둔 집안에서 초파리가 생기는 걸 보면 초파리는 자연적으로 생겨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바로,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연한다는 자연발생설입니다. 하지만 생명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연발생설은 폐기되었습니다. 초파리는 마구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생명체인 초파리가 알을 낳아야 그 알에서부터 초파리들이 생겨납니다. 돌들이 갑자기 생명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무생물에서부터 생명체가 만들어 질 수는 없다는 현대 생명과학의 결론은 자연발생성을 폐기시켰습니다.

 

그런데 같은 잣대를 지구 최초의 생명체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과연, 지구에서 첫 생명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지구 최초의 생명체는 자연발생설을 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46억 년 전 지구가 생성될 때는 생명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 억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생명체가 지구에 등장하고 그 이후 생명체들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그 시점은 대략 38억 년 즈음입니다. 무생물의 시대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한 이 과정을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오래 전 과거의 지구의 자연환경과 조건은 지금과는 매우 다르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점은 무생물의 시대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즉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현했다고 과학자들이 믿는다는 점입니다.


제가 왜 믿는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것은 최초의 생명체가 어떻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지 과학으로 엄밀히 밝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과서에도 언급되는 밀러의 실험으로 밝힌 내용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무생물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되려면 빅뱅이 서너 번은 일어나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생명과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생명체는 지구에서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계에서 유입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자연발생으로 생명체의 출현을 설명하기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외계유입설을 주장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구 밖 어느 우주, 어느 행성에서 생명체가 출현했다고 해도 그 생명체는 자연발생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생명체는 어떻게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했는지 여전히 과학으로 밝혀야 합니다. 외계유입설은 생명의 출현에 대해 밝혀야 할 숙제를 지구 밖으로 떠넘긴 셈입니다.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발생한 과정을 과학으로 밝힐 수 없으니 창조주가 기적적으로 만든 것이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견해는 간격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허망한 주장이 되기 쉽습니다. 저는 다만, 과학자들이 무생물에서 생명이 탄생했다고 믿는다는 점, 그리고 생명의 출현 과정을 과학으로 잘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역사에서 무생물과 생물의 시대를 나누고, 그 사이에 생명이 출현했다고 받아들인다는 점을 지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과학은 자연발생설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지구에서 첫 생명체가 탄생한 과정은 현대과학의 자연발생설과 배치된다는 점을 짚어내는 것입니다.

 


부활은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개념과 비슷합니다. 도대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는가를 묻는 우리는 동일하게, 도대체 어떻게 무생물 시대에 생물이 출현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최초의 생명체가 무생물에서 탄생했다고 과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부활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믿음 모두,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지만, 그리고 생명은 자연발생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결론에 위배되는 듯하지만, 여전히 과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 누구도 수십억 년 전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한 과정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그 전후의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서 무생물에서 생명이 생겨났다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전과 부활 이후의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부활은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과학으로 입증된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과학으로 입증되면 지식이 되어버리고 지식은 그저 이해하고 동의하면 됩니다. 우리는 과학으로 증명되어야만 진리라는 계몽주의의 산물인 증거주의에 깊이 매몰되어 있습니다.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건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많은 경험적 증거를 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거나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내의 사랑을 믿습니다. 사랑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건, 무생물이 된 죽은 몸이 다시 생명체가 될 수 있는가를 과학적으로 논쟁하고 탐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육신한 예수와 그의 대속과 부활을 믿는 건 바로 사랑때문입니다.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통치를 회복시키는 그 원대한 구속의 계획에 감격하고 거기에 참여하고 그 일부가 되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단지 과학적 혹은 철학적 논쟁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내어 걸고 예수가 걸어간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헌신과 희생을 끌어냅니다. 예수의 도, 그 고난과 희생의 길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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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교육으로서의 과학적 소양

  

최승언(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에 대하여 누구나 한 마디씩 할 수 있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정치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져 왔다. 더구나 우리 학생들은 이렇게 바뀌는 교육정책에 따라서 움직여 왔다. 교육정책의 대부분은 대학입시와 맞물려 있으면서 학생들의 학습량과 사교육 경감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생은 바뀐 교육정책에 대하여 혼란을 거듭했고, 이에 따른 사교육 시장은 팽창하기만 했다. 교육부나 시도 교육청이 아무리 좋은 교육정책 아이디어를 가지고 실현해 보려 해도, 공교육은 무시당하기 일 수였고, 많은 학생들은 오히려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평준화 교육을 보완하기 위한 영재교육, 세계 과학 인재들의 만남의 장인 올림피아드가 오히려 그 본연의 목적을 잃은 채 특목고를 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은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교육은 정시모집을 위해서는 수능에 맞추어져 있고, 수시모집을 위해서는 방과 후 활동 혹은 학교 밖 활동을 포함하여 학생종합생활기록부에 좋은 기록을 위하여 학교 안에서의 모든 시험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교육으로 내몰린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정말 전인적인 인간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강한 시민으로서 성장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못하더라도 대학교에 진학하여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학문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있는 수학 능력 혹은 역량이라도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하여 부정적인 답을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 역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기우였으면 좋겠다. 



교육 현장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보통 학교에서 과학실험을 한다고 하자. 과학교사는 학생들이 과학실험을 잘 수행하기 위해 과학실로 학생들을 오게 한다. 학생들은 모두 실험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4, 5명이 한 실험대에 앉아서 교사의 지도 하에 과학실험을 수행한다. 물론 교사는 이 과학 실험을 왜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결과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모두 알려 준다. 학생들 앞에는 실험보고서 양식이 주어져 있어 실험 결과와 그래프를 양식에 주어진 대로 기록하면 된다. 양식이 제공하는 질문에 대하여 실험 결과를 보고 답하면 되는데, 대부분 실험하기도 전에 교과서의 내용을 보고 적거나 선행학습이 되어 있기에 정답 적기에 여념이 없다. 실험 결과도 이웃 실험대의 결과와 다르면 교과서를 보고 자료를 베끼기 일 수다. 이것이 교육 현장의 모습이다. 교사의 주도와 학생의 주도를 각각 어떻게 바꾸어야 이러한 과학 실험 교육이 참과학 교육이 될까? 위에 제시한 과학 실험은 대학 입시를 위한 과학 수험 준비를 위해서도, 과학과 관련된 역량을 위해서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사교육 기관에서는 어떻게 할까? 잘은 모르지만 매우 잘 정리된, 시험을 잘 볼 수 있게 준비된 그 무엇을 제공하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형태의 제공은 공교육 기관에서도 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인가?


사람의 마음은 아주 간단히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열린 마음은 발산적 사고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발산적 사고를 통해 창의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 긍정적이다. 닫힌 마음은 수렴적 사고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수렴적 사고를 통해 비판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비판적이기에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는 합리적인 사고와 연결되어 있다. 합리적인 사고 질서를 만들어 내지만, 창의적인 사고는 우발적이고, 무질서한 면이 있다. 그런데 교수/학습에서도 교사가 주도하는 학습이 있는가 하면, 학생이 주도하는 학습이 있다. 현재의 교수/학습 경향은 교사 주도에서 학생 주도로 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학생의 배움과 관련된 학습에 대하여 교사 주도와 학생 주도 수업 모두 다 장단점이 있다. 공부를 위해서도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에 모두에 의해 발해지는 모든 사고 역량이 다 필요하다. 우리는 긍정은 수용하면서도 부정은 수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긍정과 부정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이 하나의 무엇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교육에서도 이 모두가 모이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육에 대하여 어떤 세계관을 가지면 건강할까? 건강하다는 표현은 바람직하다는 표현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표현이라 생각된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이에 대한 실천이 행동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변의 상황이 대학입시에만 집중되어 있어도,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행동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이는 학생본인 뿐만 아니라 학부형들도 가져야할 세계관인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모두 복잡계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예를 들어 한글의 자음, 모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자음과 모음이 글자를 만들어 소리를 나타내고, 글자가 모여 단어를 만들어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어 중요한 뜻을 만들고, 문장들이 모여 시, 수필, 소설, 과학 논문 등이 써져 어떤 중요한 기록물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이 기록물은 글자와 소리와의 연결이 임계가 되어 단어와 문장의 창발에 의한 소산물일 것이다. 이러한 복잡계의 개념은 여러 분야에 응용되어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을, 최무영 교수는 온문화를, 김명용 전 총장은 온신학을, 나는 온교육을 교육에서 창발될 건강한 세계관으로 주장한다. 



온교육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면, 교육에서 회자되는 여러 교육 정책들에서 써지는 가장 낮은 교육 개념들을 낱교육이라 칭하고, 이러한 낱교육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합쳐져 조금 더 큰 열교육을 이루고, 이렇게 이루어지는 열교육은 낱교육들이 가지고 있는 각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합일 뿐만 아니라 합을 뛰어 넘는 새로운 교육적 의미를 창발하게 된다. 이러한 열교육은 각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포텐샬 혹은 자본 그리고 학습 내용에 따라 모두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열교육들이 각 학생들에게 customizing 되어져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열교육들이 모여 창발된 온교육을 이룰 것이다. 어쩌면 이 온교육은 국가 교육과정과는 다른 미국에 제시한 교육표준에 해당할 지도 모른다. 온교육으로 실천되는 교육 현장은 어쩌면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철학, 심리, 사회, 문화, 역사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마다 다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온교육은 매우 추상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이 세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 대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온교육과 관련된 과학교육 중의 하나는 합리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를 모두 할 수 있는, 교사 주도와 학생 주도가 함께하는, 학생 개인 학습과 학생 간의 협업 학습이 모두 이루어지는, 과학 지식과 탐구 활동, 이와 서로 연결되는 과학적 태도 및 과학의 본성이 모두 다루어지는, 그리고 과학 글쓰기와 말하기, 듣기와 읽기가 동반되는, 이러한 모든 것과 함께하여 개인적인 과학 이슈 혹은 사회적인 과학 이슈에 대한 의사 결정 및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 실천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과학적 소양을 이루는 교육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적 소양을 이루는 과학 교육은 아마도 현재 개신교 교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창조과학의 문제를 해결해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 교육이 미래를 살아 내게 하는 역량들을 가지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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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파사데나 과신대 북클럽 모임 후기

아주 명쾌한 진화론 수업 | 장수철, 이재성 | 휴머니스트 | 2018


김영웅 박사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창조세계, 즉 인간을 포함한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것도 응당 포함된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할 때, 성경이라는 책과 자연이라는 책을 각각 신학과 과학이라는 언어로 풀어낸 인간이 두 책 모두의 저자인, 한 분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은 반드시 모순이 없고 조화로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사가 증명하듯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일부 신학자를 포함한 지식인들은 과학의 발달이 기독교 신앙을 위협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하나님을 보호하고자 (어찌 인간이 하나님을?!) 자명한 과학적 사실까지 부인하기에 이르렀고, 자칭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실은 과학이라 부를 수도 없는 유사과학 (창조과학)을 내놓아 그들의 문자적인 성경 해석을 옹호하고 고수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의 기원과 인류의 기원, 그리고 우주의 탄생 등을 설명하려는, 여러 분야에서 독립적으로 연구된 순수한 과학 결과와 정립된 이론을 ‘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서 마치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처럼 누명을 씌웠다. 과학을 이용해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하여 자신들의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고집하려고 했으나, 정작 그들이 잡았던 것은 과학이 아닌, 맹목적인 믿음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거짓 정치였다. 합리적인 논리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증거가 전무한, 그저 ‘거룩한’ 말들의 장난으로 위장한 가짜 과학이었다. 그들은 자칭 순수했던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이 타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심각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 의해 결국엔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이 옳다고 증명되었을 때도 그들이 두려워하던 일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지동설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에 반하는듯한 성경본문을 문학적으로 읽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문자적 해석에 갇히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거나 대적하는 행태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런 일련의 수정된 성경해석이 더 이상 불경스럽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이런 시대에 창조과학을 위시한 문자적 성경해석을 또 다시 들고나와 논쟁거리로 삼는 일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거나 우린 이런 웃픈 현실을 마주하고 있으며, 이런 오래된 갈등을 해결해야만 하는 일은 시대적 사명이 되었고, 누군가는 이러한 숙명을 앞장서서 짊어져야 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대화가 단지 학문적인 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개인의 기독교 신앙과 주류 성경해석의 수정 등이 모두 관련된 문제임을 이해할 때, 이 대화의 중요성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제는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장수철과 이재성이 함께 쓴 '아주 명쾌한 진화론 수업'이라는 책으로 두 달 만에 모였다. 작년 늦여름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주로 유사과학인 창조과학의 역사와 문제점을 이해하고 함께 관련 서적을 읽으며 토론하는 방식으로 이어져왔다.



진화에 대한 오해가 난무한 보수기독교 상황을 감안할 때, 제대로 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선 진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 같은 생물학자에게는 학부 때나 대학원생 시절에 배웠던 것을 간추린 내용에 불과했지만, 현직 신학자와 목회자에게는 의미가 달랐을 것이다. 비록 디엔에이의 변이 메커니즘 같은 구체적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진화의 정의와 성질을 이해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다. 적어도 진화에 대한 오해에선 해방되었으리라 믿는다.


먼저 책을 잘 정리해주신 문순옥 박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어제 토론 시간에 나왔던 내용들이 몇 있는데, 중요한 것 하나는 우리 모임의 방향에 대한 부분이었다. 창조과학자들의 오류와 문제점을 밝히고 대항하는 차원에 머물지 말고, 진영을 가리지 않고 과학을 사실로 인정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모두가 관심을 가질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을 더 깊고 넓게 이야기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인간이 흙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단순한 구조를 가진 단세포 동물부터 시작해서 오랜 시간 동안 유전자 변이와 환경의 변화에도 적응하여 살아남으며 진화를 거듭해온 결과 중 하나라는 진화론의 설명을 받아들일 때, 과연 아담의 기원과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원죄라 불리는 사건의 의미, 그것에 대한 바울의 해석 등등의 재해석은 필히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엔 성경해석 문제로 수렴된다고 보기에 신학자들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의 부인할 수 없는 결과들을 가지고 어떻게 기본적인 기독교의 진리와 가르침을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하나님 말씀이라 믿는 성경을 다시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과신대의 최종지향점이 될 것이다.


과신대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창조과학자들이 아니다. 변화하는 (주로 과학 덕분에) 시대에 대응하여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변하지 않는 성경을 통해 어떡하면 바로 알아가느냐 하는 고민이다. 하나님도 성경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바뀔 수 있는 부분은 ‘해석’일 것이다. 좀 더 치열하게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깊어지고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 달 모임은 이상희 교수님의 ‘인류의 기원’을 함께 읽고 나누기로 했다. 마침 흔쾌히 초대에 응해주신 이상희 교수님의 배려로 이 모임은 저자직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2월 21일 목요일 저녁 7시 파사데나 장로교회 2층 도서실에서 모일 예정이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환영한다. 드디어 인간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아마 보수쪽에선 가장 마지노선에 있는 이슈가 아닌가 한다. 참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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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김응빈 외 지음 | 송기원 엮음 | 동아시아 | 2017


정훈재 박사 (LG전자 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2010년 5월 미국의 저명한 생물학자 크레이그 벤터(Craig Ven ter)는 ‘화학적 합성 유전체에 의해 제어되는 세균 세포의 창조’라는 제목의 논문을 <사이언스>에 발표합니다. 이 논문은 합성된 유전체 정보에 의해 유지되는 생명체를 새롭게 만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대상은 '미코플라스마 미코이데스'라고 하는 동물의 장 속에 기생하는 세균이었습니다. 이 세균은 가장 적은 수의 유전자 수 (약 530개 정도)를 가지고 있고, 100만 쌍의 DNA를 유전 정보로 갖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생명체라고 합니다. 크레이그 벤터의 연구팀은 유전자 데이터 베이스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 세균의 모든 유전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한 뒤 다른 종의 세균에 이식시킵니다. 그 종이 갖고 있던 원래의 유전체는 미리 제거된 상태였습니다. 이 다른 종의 세균 세포는 인간이 합성한 유전체만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 세균은 자기 복제에 의한 재생산과 대사 등 정상적인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크레이그 벤터는 이를 Syn 1.0이라 호칭하고, 자신들이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했다고 선언합니다. 이어서 2016년 3월 크레이그 벤터의 연구팀은 Syn 1.0 유전체의 크기를 반으로 줄이고 유전자를 채 500개도 갖지 않은 생명체 Syn 2.0을 만들었다고 <사이언스>에 발표합니다. 즉 이 생명체는 지구상에 생존하고 있는 생명체 중 유전자 수가 가장 적은 생명체로 자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이끈 크레이그 벤터 박사는 2003년도에 종료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생물학자로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이란 새로운 개념을 처음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인공 유전체를 합성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유전체 조작이 가능해진 것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에 의해 유전체를 조작하는 것이 정확하고 빠르면서 비용도 저렴해졌기 때문이라 합니다.


과학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세분화되면서 많은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합성생물학도 아직 뚜렷하게 정립된 개념은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 생명윤리 연구자문위원회에서 정의한 합성생물학이란 ‘기존 생명체를 모방하거나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 생명체를 제작 및 합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의 제작 및 합성의 개념을 생명체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분야의 기술은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크레이그 벤터 박사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세균 세포의 창조’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동안 종교의 영역이었던 ‘생명의 창조’라는 개념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고 온 셈입니다. 그의 세균 세포 합성을 ‘창조’라 호칭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의 연구가 보여준 것은 이전에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아닐지라도 ‘점진적인 창조’도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대상도 세균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점차 복잡한 생명체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멸종 동물을 재생하거나 인간 유전체를 합성해 작동 방식을 실험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기존의 생명체에서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이 새로운 생명체를 설계하고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 보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명과학 발전은 우리의 삶과 사회기반 및 가치관 자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혁명에 가까운 변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어 보입니다. 정부는 연구를 장려하면서도 그와 수반되는 시스템 구축에는 매우 취약한 방식을 선택했다 합니다. NGO들은 과학적 내용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 없이 반대하는 입장을 택했으며, 연구 결과에 수반되는 좀 더 근본적인 사회 변화 등은 등한시한 채 주로 ‘먹어서 안전한가’ 등 단순하고 소모적 문제에 머물러 있습니다. 종교계는 생명 과학의 발전에 관심이 없으며, 변화의 내용과 속도를 불감한 채 마치 중세와 비슷하게 여전히 과학과의 담쌓기가 종교를 지켜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이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변화하고 있는 생명과학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중에게 전달하고 지켜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시작합니다.



이 책은 다섯 명의 저자의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공학을 공부한 두 명의 과학자와 정책을 공부한 사회과학자, 철학과 윤리학을 공부한 두 명의 신학자가 모여 2015년부터 ‘합성 생물학’과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에 대해서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을 모집해서 공부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연세대의 교수/연구원이며 연세대 과학기술정책전공 소속이기도 합니다.


저자들은 각각의 과학적 내용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공부하면서 다른 전공 기반의 다른 시각에서 느꼈던 문제의식을 정리하여 이 책에 담았습니다. 저자들은 이 책에 ‘과학적인 내용의 설명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일반 과학 서적과 달리, 과학 지식에 이어 거버넌스 시스템이나 이런 과학적 변화를 수용하는 가치관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합성생물학에 대해서 우연히 알게 되었고, 찾아보다 보니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이 나온 건 2017년 4월로 벌써 1년 반이나 지났습니다. 책 표지 하단에 ‘질주하는 생명과학의 혁명을 99%의 사람들은 눈치조차 못 채고 있다!’고 쓰여있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생명과학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전공 때문인지, 실제로 저도 이러한 책이 나온 지 1년 반이 되도록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이슈를 던지는 책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이 책은 전혀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설계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시장 자본주의의 힘은 이 새로운 과학기술을 극한까지 밀어붙일 가능성이 큽니다. 적절한 정책적 대응이 전체 사회의 컨센서스에 기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 끝에 도달할 모습에 대해 얼마나 낙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제기하는 이슈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좀 더 경청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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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그동안 페이스북을 통해 다양한 서평을 써온 김영웅 박사님의 글을 연재합니다. 과학자가 읽은 신학책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심을 환대하기

확신의 죄 | 피터 엔즈 | 이지혜 역 | 비아토르 | 2018


김영웅[각주:1]



007에게 살인면허가 있다면, 과학자에겐 '의심면허'가 있다. 과학자들에겐 의심하는 행위가 공식적으로 허락된다. 과학자는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하며, 그 의심에 묻고 답을 해야만 하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다. 호기심이라는 멋쩍은 단어로 과학자를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자연 현상 이면에 놓인,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들을 하나씩 밝혀내는 과학자들에게 의심은 호기심과 맞먹을 정도로, 아니 어쩌면 호기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호기심은 의심으로 치열하게 진화할 때만이 그 빛을 발한다.


의심은 예고도 없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도 찾아간다. 사소하고 우연한 일상의 조각들도 모두 의심의 통로가 될 수 있기에, 우린 달갑지 않은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이 손님의 방문을 결코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과학자이면서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의심은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인 셈이다.


의심의 방문에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권 밖에 없다. 하나는, 주무시지도 않고 성실하신 의심'님'의 공격을 혼신의 힘을 다해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외부로부터의 모든 공급이 차단된 채 안에서 곪거나 굶어서 자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불청객을 오히려 환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의 단점은 무너지는 것이 결국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버티는 동안은 자신이 견고하게 쌓아왔던 믿음의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전사로서 명예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끝은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처절한 인지부조화와 복합적인 합리화로 가득 찬 위선적인 자기기만, 그리고 파멸이다. 이 결말은 이 책의 저자, 피터 엔즈가 정의하는 '확신의 죄'의 열매가 아닐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오늘날 많은 목사들의 진공 포장된 설교와는 너무도 다른 현실세계를 경험하면서 의심의 순간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반석과도 같았던 안전지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크레바스 바로 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의심의 씨가 우리 마음 밭에 싹을 틔우고 속수무책으로 자라나면서 그 동안 믿어왔고 확신해왔던 세계는 소리 없이 은밀히 함몰하기 시작하고, 이는 곧 내면세계의 비가역적 붕괴를 가져온다. 이 부분에서 피터 엔즈는 말한다. 퓨즈가 끊어지고 믿음이 멈추는, 이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실상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이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순간들을 통과하도록 묵묵히 인도하신다고. 아멘. 그렇다. 과학자에게 자양분이기도 한 의심은 신앙생활에서도 적이 아니라 주요 요소이며, 의심과 신뢰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우린 비로소 예수를 닮는 삶을 현실에서 일상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믿음과 의심, 그리고 알고자 하지 않는 지혜로움에 대한 책이다." 그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의 시작이요 과정이자 끝"이라고 한다. 그는 확신을 추구하고 고수하는 신앙생활의 위험을 간파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믿음은 올바른 생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역설하는데, 그는 이를 '확신의 죄'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태도가 '죄'인 이유는, 우리가 확신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실재이신 하나님을 지적인 영역에만 가두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우상 숭배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는지에 대해선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불청객, 의심을 환대하면서 말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부분이라 쓰고 '모든'이라 읽는다)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신앙을 가지게 된 건 사실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직관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이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어 회심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단 하나라도 존재했었다면, 그 많은 전도와 선교 프로그램들은 모두 퇴색되어 버렸을 것이다. 믿음이 생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며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연습을 하는 우리들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신비’ 이외에 적당한 단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신비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자 예수를 닮는 삶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내는 과정 또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뢰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이성이 우리를 배신해도 그대로 남아있는 신뢰. 그것은 결코 의심하지 않고 확신에만 가득 찬 믿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확신에 찬 신앙, 과학처럼 앞뒤가 딱딱 떨어지는 깔끔한 신앙,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은 우리 자아에게 모든 통제권을 재부여해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역했던 죄인의 옛 자아가 적절히 타협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타인들에게 가치를 두지 않는 나르시시즘으로 살아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유 있고 인자하며 친절한, 모든 일상이 그저 아름다운 동화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신앙인들은 스스로 회심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비겁하거나 정의롭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가 책에서 예로 드는 것처럼, 시편과 전도서, 그리고 욥기에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어쩌면 당돌하고 불경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 구약 기자들의 솔직한 고백들이 많이 담겨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무사안일, 안빈낙도는 기도제목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구약 기자들이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나서도 결국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으로 돌아간 것을 볼 때,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피터 엔즈가 말한 것처럼 “어쨌거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신뢰하는 삶이란 흔들리지 않는 독단적 확신을 넘어, 우리 삶에 지속되는 신비와 불확실성을 정상적인 신앙의 일부로 포용하여, 확신이 사라졌을 때에도 확실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만끽하며, 우리의 이성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함으로 우리의 통제권을 일체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한 신뢰는 우리의 지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길들일 것이고, 의심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은 하나님이 보내신 신성한 손님이 될 것이다.


과학에서 의심하듯, 신앙생활에서도 마음껏 의심하자. 의심하길 두려워하지 말자.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듯, 먼저 배운 지식에 갇혀 하나님을 그 지식에만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용기 내어 의심하고 묻고 답을 해나가자. 이 모든 과정이 곧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아름다운 여정이 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더욱 커질 것이다.



  1.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미국 City of Hope에서 Staff Scientist로 일하고, 과신대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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