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엘리에저 J. 스턴버그 |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조성숙 역 | 다산사이언스 | 2019년 | 432쪽

 

 

“지금으로부터 150억 년 전, 우주가 생겨났다. 50억 년 전, 지구가 생겨났다. 30억 년 전, 지구에 생명이 출현했다. 5억 년 전, 최초의 신경계가 나타났다. 3백만 년 전, 인류가 출현했다. 2백만 년 전, 인간의 뇌가 도구를 고안하여 노동 생산성을 증가시켰다. 13만 년 전, 인간이 머릿속에서 상상한 사건을 벽에 그리기 시작했다. 50년 전, 인간의 뇌가 최초의 인공 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5년 전, 컴퓨터가 저 혼자서 논리적 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주일 전, 컴퓨터의 지원을 받은 한 인간의 뇌가 《최후의 비밀》에 도달한다.”

 

위 내용은 2002년에 출간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L’ Ultime Secret)』의 거창한 홍보 문구다. 이 소설은 인간의 뇌에 관한 당시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쾌감중추의 비밀을 파헤쳐 나가는 과학 추리소설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인간 탐구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았다. 인간의 뇌와 인공지능 컴퓨터,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이 두 과학기술이 만나 이루어지는 상반된 인간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록트인 신드롬’ 환자로 식물인간 상태인 장 루이 마르탱을 통해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있지만 AI를 사용하며 비약적인 뇌의 발전을 이룬 모습을, 그리고 현명하고 도덕적인 천재 의사가 ‘최후 비밀’을 접하며 절제가 안된 인간의 욕망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를 읽으면서 ‘뇌의 숨겨진 논리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탐구하는 진지한 주제 의식과 흥미를 끄는 추리소설적 구성 때문인지 장르는 다르지만 오래전에 읽었던 베르베르의 이 소설이 생각났다. 뇌의 ‘최후의 비밀’인 쾌락중추 자극기술을 이용한 천재적인 정신과 의사가 인공지능 컴퓨터가 보유한 체스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다시 찾아오는 승리의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하는데, 우리가 몇 년 전에 충격받았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떠올리게 한다. AI와 뇌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20년 전의 소설의 내용은 이제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엘리에저 스턴버그는 30대 초반의 천재적인 신경과 의사이다. 17세 때 이미 철학과 신경과학을 아우르는 첫 저서 『우리는 기계일 뿐인가』를 출간했고, 22세에는 뇌에 결함이 있는 사람의 도덕적 책임이라는 문제의식을 풀어낸 두 번째 책을 저술했다.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는 세 번째 책으로 신경계 질환 환자들을 직접 진료한 사례와 기존의 연구들 또 기술 발전으로 근거가 보강된 이론들을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근본적인 이유’인 뇌의 신경 논리구조(NeuroLogic: The brain’s hidden rationale)를 발견하고 의식과 무의식의 체계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사례 별로 기존 임상 연구의 가설과 최신의 신경과학 연구, 특히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를 통해 일반인의 뇌와 뇌질환자의 뇌가 서로 다르게 활성화되는 부분들의 차이점을 비교 분석한 최신의 연구자료를 통합하여 과거의 개별적 행동 연구를 넘어서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뇌의 논리구조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8장에 걸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이야기로 구성되는 각 장이 뇌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기이한 상담 사례로 시작되며 앞장에서 제시된 문제가 해결되면서 잇따라 제기되는 의문을 연결해서 풀어가는 추리소설과 같은 흥미로운 전개 방식이다.

 

1장은 ‘시각장애인은 꿈속에서 무엇을 보는가?’는 질문으로 의식계와 무의식계가 어떻게 나뉘어 작동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 뇌의 두 시스템이 우리의 지각을 만들어낸다. 무의식계가 패턴을 인식하고 그 패턴을 바탕으로 예측한 다음 지각한 조각들을 끼워 맞출 방법을 추론하고, 의식계가 무의식의 계산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풍부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린다. 모든 감각은 정보의 흐름이다. 시각 경로든 청각 경로든, 아니면 다른 경로든 이 정보를 상황적 맥락에 맞게 해석하고 종합해 세상을 의미 있게 표현하는 것이 뇌의 무의식계에 주어진 과제다. 무의식의 처리과정은 동시에 들어오는 오감의 흐름을 분석하고 비슷한 특정이 없는지 꼼꼼히 조사한 후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추상적 개념을 만들어 낸다. 감각 신호는 처음에는 병렬 경로에서 처리되다가 마지막에 하나의 개념적 네트워크로 통합되고 해석되고 조직된다. 감각들이 합쳐져 세상을 하나로 유연하게 지각한다. 오감의 협업은 의식적 경험을 강화해줄 뿐 아니라 감각 하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백업 시스템까지 만들어준다. 실명하면 다른 감각계가 지각의 빈틈을 메우려 작동하기 시작한다. 뇌는 최선을 다해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을 재건한다. 다른 감각들끼리 결합해 제 기능을 잃은 감각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부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의 뇌는 지각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시각적 환각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감각을 동원해 시야를 재건하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감각을 최대한 사용해 시각이라는 감각에 생긴 빈틈을 채워 넣을 수 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들도 상상하고 꿈을 꾸는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

 

2장에서는 ‘좀비도 차를 몰고 출퇴근할 수 있는가?’ 질문을 던지며 습관, 자기통제와 자동행동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는 뇌가 가진 두 개의 평행 시스템을 이용해 행동을 통제한다. 습관체계와 비습관체계인데 두 시스템은 기억 형태에 따라 강점도 다르고 접근법도 다르다. 행동을 지배할 수 있는 자동 시스템인 습관 체계는 절차 위주이며 프로그래밍이 가능하고 빠르다. 습관과 비습관체계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소위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진다. 어떤 행동을 충분히 많이 연습하면 습관체계에 통제권이 넘어가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하게 되고, 비습관체계는 그 행동에서 해방되어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3장은 ‘상상만으로도 운동 실력이 좋아질 수 있는가?’는 질문으로 의식과 무의식계의 상호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상상으로 하는 심상 훈련이 자극하는 뇌 영역은 실제 신체 동작에 영향을 미치는 뇌 영역과 동일하므로 뇌에서 근육을 연결하는 신경경로가 파괴된 경우가 아니라면 심상훈련으로 그 동작을 수행하는 신경 근육 회로에 습관이 형성되어 회로 기능이 강화될 수 있다. 그리고 신체를 직접 움직일 때와 그 움직임을 상상할 때 쓰는 뇌 영역이 동일하듯이 누군가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에도 똑같은 뇌세포를 사용하는데 행동 실행과 관찰에 모두 반응하는 이 뇌세포를 거울신경(mirror neuron)이라고 부른다. 거울신경은 하품 전염과 관련 있다고 여겨지는데, 무의식적으로 활성화되는 거울신경은 공감 능력을 형성하게 도와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본능적으로 시뮬레이션해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 대한 기본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발달시킨다. 한편,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할 때마다 특정 감정이나 몸의 상태가 그 사건에 대한 기억과 관계를 유지하는 생물학적 잔재를 신경계에 남기는데, 이런 감정적 잔재를 신체표지(somatic marker)라고 부른다. 거울신경이 다른 사람의 경험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처럼 신체표지는 우리 자신의 과거 경험을 시뮬레이션 한다. 이런 감정적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저장되었다가 비슷한 사건과 맞닥뜨리는 순간 등장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직감’이 된다.

 

 

4장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기억할 수 있을까?’는 질문으로 의식계와 무의식계가 어떻게 한 사람의 서사를 써내려 가는가를 다룬다. 뇌의 무의식계는 어떤 사건을 기억해낼 때 자기중심적으로 접근하는데 자신의 자아인식과 일치하는 일은 쉽게 기억하지만 자아인식과 충돌하는 기억이나 감정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기억의 조각이 사라지거나 왜곡되고 자아의 존재감과 안정성이 위협받을 때 거짓기억으로 빈틈을 메우는 ‘말짓기증’이 나타나거나 기억억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의식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뇌는 기저의 논리에 따라 우리의 경험을 해석하고 기억을 암호화하고 개인사를 기억한다. 무의식계는 우리의 인생을 담은 스냅사진 간에 연관성을 만들어내고 각 순간마다 우리의 감정을 관찰해 무엇을 강조할지 결정한다. 빈틈에 가장 설득력 있게 딱 들어맞을 것 같은 기억과 생각의 조각을 찾아내서 가져온다.

 

5장에서는 ‘왜 사람들은 외계인 납치설을 믿는가?’고 질문을 던지며 건강을 잃은 뇌가 왜곡된 서사를 지어내는 경우를 설명한다. 뇌의 무의식계는 나름의 논리를 따르는 단순한 시스템이다. 뇌는 양립 불가능한 자극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의 인식에 통일된 이야기의 틀을 씌워 삶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 내려한다. 그래서 서로 맞지 않는 자극을 조합해 이야기를 만들어 낼 때 뇌는 깊숙이 파묻힌 신념과 성향, 의문점을 끄집어내어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수면마비(sleep paralysis, 가위눌림)와 연관된 외계인 납치 경험, 관자엽 뇌전증을 앓는 환자들이 겪는 과종교증(hyperreligiosity)의 신비한 영적 체험, 뇌의 일시적인 산소 결핍 상태에서 일어나는 임사체험 등이 그 사례이다. 뇌가 건강하면 우리는 교육의 도움을 받아 저장 창고의 지식을 수정하고 넓혀 믿을 만한 정보를 무의식계에 제공할 수 있고, 무의식계는 그런 정보의 안내를 받아 더 합리적이고 현실에 맞는 설명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뇌가 건강하지 않다면 뇌는 날조된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게 되어 우리는 초자연적 경험을 평생 동안 믿게 될 것이다.

 

6장은 ‘조현병 환자에게 환청이 들리는 이유는?’이라는 질문으로 뇌가 자아와 비자아를 구분하지 못할 경우 발생하는 일에 대해 다룬다. 전기물고기가 자신이 보낸 신호와 외부의 전기신호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수반방출이라는 것이 있는데, 인간의 뇌에서도 어떤 명령을 보낼 때마다 그 명령 신호를 복사해서 감각계에 보내고 감각계는 그에 응하여 수반방출을 만들어내어 자신의 신호와 외부의 신호를 구분해낼 수 있게 한다. 수반방출계의 결함으로 조현병 환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인식하는 기능뿐 아니라 자기 생각을 인지하는 기능도 잃어 환청을 듣게 된다.

 

7장에서 ‘최면 살인은 가능한가?’ 질문을 던진다. 최면이든 광고든 잠재의식 메시지이든 외부 암시는 뇌 활동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외부 영향에 지배되는 순간 뇌는 그런 영향을 우리가 자발적 동기라고 믿고 있던 동기와 합쳐버린다. 외부의 무의식적 영향이 행동방식을 어떤 식으로든 바꾼다면 무의식계는 우리가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하도록 도와준다. 뇌의 무의식계는 빈틈을 메우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합리화시키고 매우 비논리적인 상황을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왜 무의식계는 혼란스럽거나 모순된 경험을 억지로 이어 붙이는 해석을 만들어내는가? 이유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지키기 위해서다. 무의식계는 자아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유지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극단적 행동도 일삼는다.

 

8장 ‘다중인격은 똑같은 안경을 공유하지 못한다?’에서는 앞 장들에서 다뤘던 사실들을 ‘해리성 정체감장애’ 즉 ‘다중인격’의 사례에 대입해 총정리해 준다. 뇌의 좌우는 별개로 행동하지 않는다. 좌우의 뇌는 서로의 행동에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면서 어떻게 든 통일된 자아의식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낸다. 뇌는 불안전한 사고와 인식의 빈틈을 메우려는 습성이 있고, 그 빈틈을 메울 때마다 자아의식 유지라는 목적에 충실한다. 무의식계는 개인의 이야기를 인간으로서 갖는 안정된 정체성을 보호하는데 철저히 중점을 둔다. 또한 뇌는 트라우마 기억과 감정으로부터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기억과 감정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려 하고 의식과도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애쓰는데 이런 격리작업을 하다가 도를 넘기도 한다. 이렇게 무의식계가 과도한 격리작업을 한 결과가 ‘해리성 정체감 장애’이며, 이 경우 각각의 정체성에 따라 뇌를 사용하는 부위, 근육을 사용하는 것 등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의식계와 무의식계의 공조에 의존한다. 의식계는 자아의식을 경험하게 해 주며 뇌가 만드는 이야기를 의지를 갖고 정신과 신체를 제어하여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한다. 무의식계는 그런 이야기를 만든다. 무의식계는 단편으로 끊어진 경험 조각들을 끌어와 빈 틈을 메우고 우리의 인생사를 순서대로 배열한다. 무의식계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구축한다. 뇌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조각조각 들어오는 인식을 합리적인 이야기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반복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경험을 쌓고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을 스스로 느끼며 ‘자아’를 만들고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체성을 유지하여 우리가 자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뇌의 신경 로직(NeuroLogic)의 지향점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서두에 언급한 베르베르의 소설 『뇌』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기자로 등장하는 주인공 뤼크레스와 이지도르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인간은 결국… 인간으로 향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의 바탕은 바로 사랑이고… 너무 포괄적일 수도 있고… 또 너무 신파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픈 사랑이란, 용서와 배려, 사람과 사람 간의 신뢰, 에로스적 의미, 집착 등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미이다.”라고 결론적으로 읊조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그의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으로서 인간을 향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가 파악한 인간의 정체성은 사랑이라는 인간 관계성이 바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인공지능과 결합된 최초의 트랜스휴먼인 장 루이 마르탱의 이야기가 아닌 뤼크레스와 이지도르의 사랑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 통속적인 마침으로 많은 독자들은 실망했고 나도 그 독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 점이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의 서평을 쓰면서 20여 년 전 읽었던 소설을 소환한 이유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아쉬운 내용 중 하나가 뇌의 발달과 관련된 사항이다. 인간은 생후 2년 동안 우반구에서 급속 성장이 일어나는데, 이는 감각운동, 감정적 능력과 대인관계 능력의 빠른 발달과 연관되고 감정조절과 애착과 관련된 기본적 구조물을 형성하게 되며, 이런 과정은 모자관계의 애착 형성과 함께 일어난다. 우뇌의 발달은 주로 2세 중반까지 급격하게 이루어지다가 2세 중반이 되면 좌반구의 급속 성장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전전두엽의 본격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처럼 생후 2세 중반까지 아직 유아가 언어로 충분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모든 기억이 내현적 기억(implicit memory)으로 저장되고, 어머니와의 비언어적 의사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을 통해 변연계의 성장, 우뇌 반구의 성장이 충분하게 이루어지게 되면 안정 애착을 형성하게 되어 이후의 대인관계에서도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이다. 이 시기의 내현적 기억과 비언어적 관계성이 이 책에서 스턴버그가 주장하는 뇌의 무의식계의 바탕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실제로 이 시기의 정신적 외상은 유전적 요소와 신경해부학적인 요소들에 영향을 주어 적절한 좌우반구의 통합과 조절을 방해해 병리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인 스턴버그가 주장하는 ‘자아의식’이라는 인간 정체성을 지향하는 뇌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신경 로직’의 가장 중요한 바탕의 하나가 관계성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관계성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사랑-모자관계와 같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잘 밝혀낸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내는 정체성의 서사들은 한편으로 관계성의 서사, 즉 사랑의 이야기로 향하고 있지 않을까 조용히 읊조려 본다.

 

오늘날 뇌에 대한 연구는 인공지능의 본격적인 출현과 더불어 그 잠재적 기능의 극대화라는 실제적 이용이 강조되는 측면이 많다. 그래서 뇌과학와 인공지능의 기술이 이끄는 역사적 특이점에 이르고 있다는 트랜스휴머니즘적 전망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더욱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방향은 창조(또는 진화)의 절정으로 여겨지는 인간의 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의 존재가 우주적 이야기에 통합되는 질문과 시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뇌의 신경 로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이 책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우주적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서 과학과 신학(종교)은 서로의 빈틈 메우기를 경주해야 한다. 우리 뇌의 “NeuroLogic”이 가르치듯이……

 

"Science without religion is lame, religion without science is blind." – Albert Einstein

 

박우민 (woomin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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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나는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 다.

 

우리의 존재방식ㅡ"걷기의 무렵"



걷는다는 것,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늘 걸었는데 문득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으면서 한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내 몸의 움직임과 발걸음이 경이롭게 여겨진다.

등과 허리를 펴고 머리를 곧게 세우고 다리를 뻗어 똑바로 걷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됐을까? 우아하고 세련되고 아름답기까지 한 그대의 걷는 동작을 보라.

도구를 이용하기 때문에 인간이듯이 두 발로 걷기때문에 인간이라 할 수 있다. 페북을 열심히 하고 있고 산책로를 걷고 있는 그대와 나는 인간임을 확인 중인 셈이다. 혹시 그대의 발이 곰 발바닥 같이 못생겼다고 불만이 있었다면 다시 한번 꼼꼼하게 들여다보길 바란다.

엄지발가락이 다른 발가락보다 더 크고 나머지 네 발가락과 나란하게 평행을 이루면서 앞을 향해 있는 그대의 발은 못생겼든  크든 작든 상관없이 걷기에 적합한 모양과 기능을 갖추고 있으니 불평할 일이 아니다. 딱 그 발이어야 우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걷다 보면 마음의 속도가 걸음의 속도를 따라간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노라면 서로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가 된다. 팔이 스치고  가끔씩 손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마음의 경계선은  뭉개진다. 

바람이 불어와  가까이에 있는 그대의 향기가 전해오면 막 세수하고 나왔을 때의 비누냄새처럼 싱그럽다. 한참을 걷다 보면 두 발이 걷고 있는지 생각이 걷고 있는지 이야기들이 걷고 있는지 분간이 안 되기 시작한다. 

몸은 그대와 내가 유쾌하게 웃는 소리에 잘잘하게 몸서리치며 진동하는 공기들만큼 계속 가벼워져 간다. 걸으면서 가끔씩 바라보는 그대의 옆모습이 붉어져 있는 것은 저녁노을에 물들었기 때문이겠지. 내가 반짝 빛나 보이는 건 한강을 가로지른 다리에  장식된 골드빛 조명이 내 눈에 가득 들어와 있어서였겠지. 

우린 그렇게 걸으면서 문득문득 서로가 멋쪄보일 때와 만나기도 한다. 그대 걸음이 나보다 몇 걸음 더 앞서 가고 있을 때 성큼성큼 따라가는 것은 그대의 말소리를 듣고 싶은 이유이며 그대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고 싶은 이유이다.

보폭을 맞춰 바짝 다가서는 것은 그대의 영혼과 닮아진 얼굴을 하고 싶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대가 조금만 천천히 걸어준다면 나는 앙증맞게 움이 트는 잎사귀를 감상하고 보라색 제비꽃의 향기를 맡고 그리고 가지를 흔들어 그대에게  매화비가 내리게 할 수도 있으리라. 

 

 

그대와 내가 혼자서 걷는 시간은 우리의 존재와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 인류는 존재증명의 한 방법으로 걷기를 했다. 걷는 행위는 고인류학자들이 인간의 특징으로 손꼽는 것 중의 하나이다. 호모 에렉투스인 그대와 나는 진정한 호모사피엔스다. 

존재증명을 너머 걷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인류는 손이 자유로워져 "함께"에 적합한 인간이 되었다.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함께 살게 되었으니 혼자 걷는 그대의 손이 허전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걷는 것은 내가 속한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세계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거리를 두어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시간이다. 대나무처럼 비워내고 또 비워내서 곧게 서는 시간이고 적당한 거리에 홀로 있으면서 도토리처럼 채워지는 시간이다.

혼자 있는 것이 외롭지 않은 것은 가끔씩 마주 지나가는 사람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다. 혼자서 걷는 그대와 나는 조금만 가볍게 '소외"에 우리를 내어주기로 하자. 그러면  한결 사분사분  사유의 세상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대와 나는 걷다보면 무한한 가능성처럼 끝도 없이 펼쳐지고 열린 길을 만난다. 그 길은 우리 앞에 결코 한계란 없는 무한한 가능성들로 가득한 세상이고  그 가능성의 세상을 목도한 우리에게 두려움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2000년 동안이나 견고한 뿌리로 굳건하게 서 있는 바오밥나무의 여여如如함을 알고 있는 그대와 나는 가슴을 더욱 활짝 펴고 담대한 걸음이 된다.

봄의 무렵은 걷기의 무렵이다. 해 질 녘, 개와 늑대의 시간은 그대와 사뿐걸음으로 수다하고 싶어 진다. 노을의 때에 혼자서 걸어야 한다면 나는 하이데거가 되고 루소가 되고 칸트가 되어 보고 싶다.  그대와 나는 걷는 존재 호모 에렉투스다.

 



먼 길

 

이재무

이 세상 가장 먼 길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몸속 유숙하던 그 많은,
허황된 것들로
때로 황홀했고 때로 괴로웠다
어느날 문득 내게로 돌아가는 날
길의 초입에서 서서 나는 또,
태어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분홍빛 설렘과 푸른 두려움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 괜시리
주먹 폈다 쥐었다 하고 있을 것이다

 

백우인 기자 (bwooin@naver.com)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내가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우종학,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IVP | 2014. 12. 5 | 개정판 2쇄 | 260쪽 | 13,000원

 

‘에라, 잘 모르겠다. 구원에 관련된 중요한 이슈는 아니잖아!’

물론 이런 태도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지성의 전통을 맛본 사람에게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숙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문제가 직접적으로 구원에 관련된 중요한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창조-진화 논쟁이 수많은 지성인을 신앙의 길에서 몰아내는 심각한 방해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프롤로그 중)

 

 

과학은 나에게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수학을 포기하는 사람을 ‘수포자’라고 부르던데, 수포자는 필연적으로 과포자가 될 수밖에 없다. 과학은 결국 온갖 수학공식들이 난무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포자였으므로 과포자가 되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되었더니, 과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말이 들린다. 솔깃하긴 했지만, 방사선동위원소니 하는 말들이 예사로 등장하는 창조과학 강의는 어렵기만 했다. ‘에라, 모르겠다. 과학은 과학자들이 하라지. 그게 꼭 구원과 관계된 것은 아니잖아? 과학 몰라도 복음은 잘 전할 수 있는데 뭘.’ 이것이 내 입장이었다. 그래서 프롤로그를 읽으며 가슴이 뜨끔했다.

 

교회에서 대대적으로 창조과학 강의를 얼마간 들었다.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뭔가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 크리스천으로서 기본적인 과학지식은 알고 있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강의를 듣던 중, 오직 한 가지 의문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이 강의, 현대과학이 잘못됐다는 것을, 과학을 이용해서 증명하겠다는 건가?’

 

창조과학, 젊은지구론에 대한 강의는 과학의 여러 가지 성과물들을 이용해 현대를 버젓이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 과학이 틀렸다는 것을, 바로 그 과학으로 증명하겠다는 강의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뭔가 오류가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반박할 지식이 없었다.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내가 그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할 말이 아주 많았을 것 같다. 거창하게 구체적인 과학적 지식을 암기해서 논리적 반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흔히 오해하고 있는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진실들 몇 가지만 짚어보면 큰 그림이 그려진다. 이 책은 친절하게 그 과정을 안내해주고 있다.

 

먼저, ‘과학’과 ‘신학’이라는 키워드를 듣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떠올릴만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명한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종교가 과학을 억압한 사례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 당시의 시대상과 얽힌 복잡한 문제였지 결코 종교가 과학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유명한 일화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종교와 과학이 당연히 갈등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은 자연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즉 가치중립적이라는 얘기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의 개념을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진화를 인정하면 크리스천이 아닌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진화는 상태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단어이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화론’은 진화주의, 즉 ‘인간은 신에 의해 즉각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를 통해 자연적으로 생겨났다.’고 가치를 부여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가지 책을 주셨다. 그런데 굳이 두 책을 한쪽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성경은 신학이라는 도구로 읽고 자연은 과학이라는 도구로 읽으면 된다. 성경을 과학이라는 도구로 읽고 자연을 신학이라는 도구로 읽는 것이 굳이 문제가 될까? 될 수도 있다. 특히 유사과학이 성행할 정도로 보통 사람도 웬만한 과학지식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얼토당토않는 과학적 지식으로 성경을 읽어낸다면, 비크리스천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에게조차 외면을 당할 것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고 있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게 현 기독교의 실정이다.

 

성경과 자연은 하나님이 주셨다. 그 두 책을 읽는 도구도 하나님이 주셨다. [무.크.따]는 신학과 과학이라는 도구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안내서이다. 그동안 신학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경험이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겁나” 가슴에 와 닿았던 『창세기와 성경해석』

 

과신대 핵심과정 "창세기와 성경해석"(김근주 교수)을 듣고

 

 

이번 과신대 핵심 강의가 뜻하지 않게 오프라인 강의에서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아쉬움 가득한 건 모두가 같은 마음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김근주 교수님의 강의는 정말 유익했고 “겁나” 가슴에 와 닿았던, 명불허전(名不虛傳) 그 자체였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김근주 교수님은 성경이 어떤 책이며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해 창세기를 중심으로 신구약을 관통하는 해석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이번 강의를 진행해 주셨습니다.

 

『창세기와 성경해석』 이라는 주제 하에 2개 강의로 나누어서 진행해 주셨는데요. 첫 번째 강의인 ‘창세기는 어떤 책인가?’에서는 성경을 ‘정확과 무오’의 관점으로 보는 게 맞는지, ‘문자나 문맥’을 충분히 고려해서 보면 옳게 보는 것인지, 과연 성경 본문을 보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였고, 두 번째 강의인 ‘창세기 1, 2장 해석’에서는 ‘창조 기사 논쟁(새물결플러스)’에 나오는 신학자 5명의 창세기 1, 2장에 대한 해석 방법을 개략적으로 설명함과 아울러 욥기, 시편, 이사야, 아모스 등 구약 본문에서 창조 신앙을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와 외경 ‘마카베오서’에 나오는 창조는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마음에 많이 와 닿았고 같이 나누고 싶은 세 가지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성경은 어떤 책인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말씀대로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으로 텍스트나 문맥의 무오류성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어떻게 변화되느냐, 어떻게 실천적인 삶으로 나아가느냐와 직접적 연관이 있다는 말씀에 많은 공감을 하였습니다. 성경의 무오류성을 강조하여 텍스트나 문맥을 해석하게 되면 천동설이나 인종차별주의와 같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요, 루터가 여호수아서 내용을 근거로 태양이 돈다고 생각하여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한 일이나, 창세기의 ‘흩어짐’을 근거로 인종 차별(분리)로 까지 이어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가 그 예가 되겠습니다. 성경 읽기의 모든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깨닫는 것이며, 이 깨달음은 그 읽는 자를 바로 잡으며 자라가게 하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는 말씀은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습니다.

 

 

경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야 하는가?

 

성경은 그 당시의 문화와 세계관과 그리고 우주관에 기초하여 기록된 것으로서 현재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요, 문화와 세계관, 우주관은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며 그 전달 수단에 담겨진 내용 즉 본질을 보는 것이 올바른 성경해석 및 성경을 보는 기준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예로써, 여성을 성폭행했으면 했으면 함께 살아야 된다는 신명기의 내용은 인권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는 전달 수단이지 목적으로 보면 잘못된 해석이 되겠습니다. 전달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여 이를 현재에도 적용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은 고대 이스라엘의 우주관과 세계관에 기반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의 조화로운 창조를 전달하는 책으로서 그 당시의 우주관과 세계관은 전달 수단이 되겠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올바르고 본질적인 해석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올바른 창조신앙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창조신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의 부르심을 받은 인류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것이라는 말씀은 과거 시제에 머물러 있던 저의 창조신앙에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창세기는 바벨론 포로기의 끝자락인 절망적인 상황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며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해 쓰인 책이며, 아모스는 창조신앙의 의미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책으로서 천재지변인 지진을 배경으로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욥기에서는 뜬금없이 창조신앙이 등장하지만 이것이 바로 의인이 고난을 대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을 시와 노래로 표현한다면 시편 8편이 될 텐데요, 이러한 시편의 전체적인 개념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주체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외경 마카베오서에 보면 순교하는 아들을 향해 ‘무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신앙이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신앙은 과학적인 설명을 하려는게 아니라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눈 앞에 있는 세계 너머를 바라보고 돌파하게 만들며 꿈꿀 수 없는 시대에 꿈을 꾸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에서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과신대 기초과정Ⅱ에서 김근주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번 강의가 핵심강의라서 그런지 온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느낌이 있었고 마음에 와 닿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읽게 된 ‘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라는 책을 통해 30년이 넘도록 ‘젊은 지구론’에 대해 마음 속 옹호자였던 저에게 과신대 강의는 어찌 보면 제 신앙의 근간을 다시 세우는 작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불편함과 마주해야 하고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될 제 자신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는 호세아의 말씀이 가슴에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강의도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_ 김완식 기자 (comebyher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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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View vol.34 (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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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



과신대의 소식을 전하는

과신대 VIEW - 34호


과신대 칼럼

 Homo amans -  
180만 년 전부터 준비된 사랑의 능력자


백우인
과신대 출판팀장



터키 북동쪽,  조지아 드마니시에서 180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가 다 빠진 채로 살다 죽은 흔적이 보이고 머리뼈의 봉합 상태로 추정했을 때 노인이라고 한다.  빙하기였고 먹을 것이 부족했을 환경에서 노인이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더보기)


지난 2월에는 과신대에 어떤일이?
과신대 사무국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 )

▶︎▶︎ 사무국 소식 보러가기

소소한 사무국 소식을
정회원 여러분에게 전달해 드립니다.


 과신대 사무국 이야기 

과신대 사무국에선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과책 ]
<창조론 연대기>를 읽고
 
글 : 이혜련 기자

어느 날, 교회에서 창조과학 특별집회가 열렸다. 설레어서 가슴이 너무 떨렸다. 열심히 강의를 듣는 도중, 한 가지 생각에 꽂혀서 나머지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이 틀렸다고, 그래서 지구 나이는 46억 년이라고 측정한 게 틀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과학적으로’ 증명한다고 한다. 과학이 틀렸다는 걸 과학으로 증명한다고?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더보기)


[Coming Soon]

<2020 과신대 핵심과정> 안내

성경과 신학, 과학, 그리고 윤리를 포함한 주요 내용을 배울 수 있는 새로운 교육과정이 2020년 3월에 열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해주세요. (더보기)


[북클럽 이야기  ]
[과신톡] 살고 살리는 기독교 페미니즘
(백소영 교수 초청)
 
글 : 김란희, 분당/ 판교 북클럽 

신앙과 과학이 상보적 관계에 있는 것처럼 페미니즘도 신앙과 상보적 관계에 있어 대화를 나눌수록 ‘살고 살리는’ 아름다운 공동체성을 살려낼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강의는 뜨거워졌습니다. (더보기)

[과책 ]
E=mc²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의 일생
 
글 : 윤세진, 과신대 교사팀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이나 초중고 학생들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과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1명만 꼽아 보라고 하면, 아마도 아인슈타인이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꽤 높을 것이다. (더보기)


[과신대 이야기 - Story]
[교사모임]
"창조와 영성" 조성호 교수 특강 후기

글 : 최성일 기자

조성호 교수님은 구약에서부터 21세기까지의 영성 개념의 발전에 대해서 최대한 어렵지 않게 자세히 하나님의 창조와 영성의 관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강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더보기)

[북클럽 이야기  ]

성서신학으로 본
과학과 신학의 대화 (구약편 1)
 
글 김영웅, 파시데나 북클럽 

성서신학이라는 나무를 공부하는 여정은 성서의 역사성 문제를 살펴보는 일로 정해졌다. 1월 22일에 있었던 첫 모임에서는 구약성서, 그중에서도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신앙을 형성하는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부분의 역사성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더보기)



과신대와 뜻을 함께 할 협력교회를 모집합니다. 

과신대는 과학주의 무신론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복음의 변증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위해 건강한 창조신학을 교육하고 연구합니다. 

과신대의 비전과 사역을 지지한다면 과신대와 함께하는 교회로 동참해 주세요. 

과신대는 앞으로도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기독교 교육 컨텐츠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보급하기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지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더보기)


 

<과.신.대 비전>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일반계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 잡힌 대화를 목표로 2가지 비전을 갖습니다.        

1
-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의 결과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내용을
함께 읽어가며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연구합니다.
이를 위해 과학 및 일반학문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2
-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바르게 배우도록 한국교회에 균형 있는
교육을 제공하며 이를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합니다.

<자문위원>

  강상훈 교수 | 베일러대학교 생물학
  권영준 교수 | 연세대학교 물리학
  김근주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김기석 교수 | 성공회대학교 총장
  김기현 목사 | 로고스서원 대표
  김요한 목사 | 새물결플러스 대표
  김익환 교수 |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김정형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근한 교수 | 유타대학교 기계공학부
  박영식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일준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박치욱 교수 | 퍼듀대학교 약학대학
  박화경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박희주 교수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박희규 교수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백경민 교수 | 숭실대학교 정보사회학과
  송수진 교수 | 고려대학교 글로벌경영학과
  신은철 교수 | 카이스트 경영공학부
  신희성 교수 | 인하대학교 수학과
  오세조 목사 | 팔복루터교회
  우종학 교수 | 서울대학교 천체물리학과
  윤철호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이길연 교수 | 경희대학교 의대, 외과과장
  이문원 교수 | 강원대학교 과학교육학부 명예교수
  이상희 교수 | 캘리포니아대학교 인류학과
  이상은 교수 | 서울장신대학교 조직신학
  이정모 관장 | 서울시립과학관
  이현식 목사 | 강남중앙교회
  이택환 목사 | 그소망교회
  임범진 교수 | 연세대학교 의대, 병리학교실
  장왕식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정대권 교수 | 항공대학교 항공전자정보공학
  정삼희 목사 | 신도중앙교회
  정  준  목사 | 더처치
  조성호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차정호 교수 | 대구대학교 화학교육
  최승언 교수 |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
  팽동국 교수 | 제주대 해양시스템공학
  허  균 교수 | 아주대 의과대학 신경과
  현요한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황소현 교수 | 차의과학대학교 병리과/의생명과학과
 
<운영위원>

  우종학 | 대표

  장현일 | 총무이사
  정대경 | 연구팀장
  윤세진 | 교육팀장
  백우인 | 출판팀장
  강사은 | 북클럽팀장
 

  구형규 | 감사
  김성래 | 감사

  최경환 | 기획실장
  장민혁 | 행정간사
  이슬기 | 미디어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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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 소식 202003

 

과신대 북클럽에서 기획하고 사무국에서 지원하는

"과신톡" 행사가 지난 2월 8일

성공회 분당교회에서 진행됐습니다.

 

백소영 교수님께서

"살고 살리는 기독교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셨는데,

많은 분들이 참여해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으로 과신대 북클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과신톡 행사를

준비해 보려고 합니다.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과신대 강의를 들을 수 있길 기대합니다. 

 

* 과신톡 모임 후기: https://www.scitheo.org/499

 

 

지난 2월 10일에는

2020년 과신대 대의원 총회가 있었습니다.

총회라고 하면 다소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이번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하고 유쾌했습니다.

 

사무국에서는 장소 섭외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전화위복이 되어

총회가 파티로 변하는

놀라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대의원 총회는 2019년 사역을 평가하고

2020년 사업계획을 검토하는 자리이지만,

다들 과신대 발전을 위해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너무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과신대에 영상 간사님이 들어오면서

갑자기 과신대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글이나 이미지로만

과신대 소식을 전하고 홍보를 했었는데,

이제는 영상을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과신대에서 정성껏 준비한 "핵심과정"을

진행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영상 간사님의 수고로

온라인 수강이 가능해졌습니다. 

 

지난 3월 2일(월)에는 장신대학교 앞

예찬 스페이스를 통째로 빌려

1강과 2강 강의 영상을 촬영했습니다.

김근주 교수님께서 4시간 동안

청중도 없는 상황에서 열강을 해주셨습니다. 

 

강의 영상은 수강자들에게

매주 금요일에 이메일로 전달해드립니다.

기대해주세요~

 

 

과신대 기자단의 활약으로

좋은 글과 기사들이 과신대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되고 있습니다.

좋은 콘텐츠가 계속 쌓여서

이곳이 과학과 신학에 대한

물 창고가 되길 기대합니다.  

 

* [서평] 창조론 연대기 (이혜련 기자) : https://www.scitheo.org/502

* [서평] 창세기 원역사 논쟁 (박우민 기자): https://www.scitheo.org/507

* [칼럼] Homo amans (백우인 기자): https://www.scitheo.org/504

* [후기] 창조와 영성 (최성일 기자): https://www.scitheo.org/501

 

 

마지막으로 과신대를 위해 잠시 기도해주세요.

 

1. 자비하신 하나님, 그동안 저희들이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저희들의 욕심과 탐용으로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자연을 파괴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내리셔서 생명과 은총이 가득한 곳으로 다시 창조해주시고 저희들을 다시 새롭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현재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여 주시고, 서로 힘을 모으고 합해서 이 위기를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2. 사랑의 예수님, 과신대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많은 이들에게 잘 전달하고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억누르고 힘들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전하는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다음 세대를 세우고 살리는 기관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3. 능력의 성령님, 과신대가 좋은 일을 바르고 정직하게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교회뿐 아니라 사회의 각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시옵소서. 과신대를 돕는 손길과 후원자들이 늘어나도록 도와주시고, 많은 이들을 선한 길로 이끌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창세기 원역사 논쟁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는 사랑과 연합의 과정

 

제임스 K. 호프마이어 외 2인 | 창세기 원역사 논쟁: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주현규 역 | 새물결플러스 (2020)

 

 

토라의 첫 번째 책이자 정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창세기는 모세 율법의 서론이며, 성경 나머지 부분에 나오는 구속사의 시작이다. 성경은 창조로부터 타락으로, 타락에서 구속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재창조로 나아가는 네 악장(창조-타락-구속-재창조)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이라고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처음의 두 악장을 간략하게 기술함으로써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기초를 놓아주는 것과 아울러 세 번째 악장을 시작한다. 네 번째 악장은 성경의 마지막 두 장(계 21-22장)의 주제인데, 이 두 장에 창조의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계 21:1, 5; 22:1-6).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과 조화롭고 놀라운 관계가 재건되게 되는 새로운 시작과 같다.

 

일반적으로 창세기는 신학적 플롯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창조로부터 바벨탑까지(창세기 1-11장), 족장 이야기들(12-36장, 38장), 요셉 이야기(37, 39-50장). 창세기 1장과 2장의 주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있으며, 또한 세상을 창조하시되 근동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에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으셨다는 선언을 하셨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창세기 3-11장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저지르는 죄와 반역을 강조해 주는 이야기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이 급격한 도덕적 타락을 하고 있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죄가 만연되고 증가하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은 자신이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해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3-11장의 다섯 개 이야기는 타락, 가인, 네피림, 홍수, 바벨탑 이야기이고 각 이야기는 죄-(심판의) 말씀-완화(은혜)-심판이라는 문학적 구조를 통해 첫째, 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강화된다 둘째, 죄에 대한 심판도 역시 증가한다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창조는 이후에 오는 모든 것들의 기초이다. 에덴 동산은 과거에 자신들의 죄 때문에 잃어버린 모든 것들, 그리고 현재 그들이 갈망하는 모든 것들을 상징한다. 타락에 대한 이야기(창 3장)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기록할 뿐만 아니라 심판의 완화, 즉 구원의 복음에 대한 최초의 선포로서의 원시복음(창 3:14-15)을 제시되고 있다. 타락 기록은 구속사의 시작점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거의 모든 내용과 관련이 있다. 창조의 기록은 특히 계시록 21-22장에서 그 메아리를 찾아볼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 동산의 많은 요소들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종말이 최초의 창조의 회복을 내포하고 있다는 신앙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 또 바벨탑 이야기는 오순절 날 방언(외국어)을 말하는 은사가 내린 것에 대한 신약의 기록에 비추어서 흥미롭게 이해될 수도 있다.

 

 

창세기가 처음 기록된 때와 오늘날 우리 사이에는 수천 년의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가 창세기의 저자들과 문화적인 맥락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처럼 어린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고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간됨의 경험을 공유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 고민하기도 한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과 우리는 아주 큰 차이점을 가진 동시에, 삶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을 함께 공유한다. 이 공유 가능한 경험들을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사용했던 문학적인 장르에 대한 이해로 어느 정도나 바꿀 수 있을까?
그들과 우리가 소유한 지식의 간극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우리 문화에도 창세기 1-11장과 비슷한 장르가 존재할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장르의 글일까?

또 창세기 1-11장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쓰인 역사인가?
허구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본문 전체를 아우르는 장르에 대한 이해는 개별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연구가 지난 2000여 년 동안 줄곧 진행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이 논쟁적인 문제들을 상세히 탐구하고 성경을 읽는 개인과 성도 모두 이 논쟁의 주된 화제에 주목하여 더 많은 지식을 얻도록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창세기 1-11장의 장르와 역사성 그리고 그에 따른 성경 해석상의 의미에 대하여 제임스 호프마이어, 고든 웬함, 켄톤 스팍스 세 명의 성경학자들이 작성한 짤막한 논문들로 이 책은 구성되어 있다.

 

James K. Hoffmeier

 

먼저 호프마이어는 그의 논문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 내러티브가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들 및 실제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호프마이어는 고대 독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창세기의 지리학적 단서들과 문학적인 요소들, 그리고 역사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여러 특징을 지목하여 설명을 이어간다. 그는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이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 여러 가지 신화를 빌려온 것이 아니라, 그 신화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정반대의 관점으로 기록되었다는 이해를 기초로 하여 성경의 신학적인 담론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즉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은 권위가 있고 역사적으로도 정확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당대의 오해들과 신화들을 바로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웬함 역시 호프마이어의 주장에 동의하며 창세기를 원형적인 역사로 믿는다. 그러나 웬함은 “원형적인 역사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 기저에 창세기 1-11장을 전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데 주저하게 만드는 암류(undercurrent)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적인 실재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부분이 창세기 1-11장에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를 통해-마치 인상파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실제로 발생했었던 일들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일축한다. 웬함은 창세기를 과거와 연결된 현재를 위해 역사를 해석해놓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스팍스는 창세기의 저자들은 우리가 생각 하는 것처럼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문 “고대 역사 편찬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은 창세기 내러티브가 기술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스팍스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역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역사 문헌 편찬을 위해 널리 사용되던 문학적인 양식들을 채택했지만, 특정 장소와 시대에 발생한 사건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려는 목적은 없었다고 간주한다. 다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성품을 가지셨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 성경 저자들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신학적인 이야기들을 차용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성경 전체의 서론을 형성하는 창세기 1-11장이 하나님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 호프마이어는 창세기 1-11장을 역사적인 사건들이 문자 그대로 기록된 역사적인 내러티브로 이해하고, 웬함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창세기 1-11장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스팍스는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공간과 시대에 실제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어떤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기초로 하는 신학적인 담론을 활용해서 말씀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스팍스의 논리에 따르자면,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실제로 발생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문학적으로 뛰어난 예술가들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교훈하신 것과 아주 흡사하다.

 

Gordon Wenham

 

창세기 1-11장이 역사적 기록인지, 아니면 문학적 양식인지에 관한 물음은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자 마음먹은 독자들에게는 무척 골치 아픈 문제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최첨단 과학 시대의 다양한 분야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구 결과물들과, 수천 년 동안 신앙 공동체 형성의 근간이 되어온 성경 상의 담론이 서로 충돌한다는 전제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문학적인 차원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신학적인 문제로 확장된다. 실제로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동일한 교리를 표방하는 신앙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이라고 할지라도, 창세기 1-11장에 대해서 반드시 한 가지의 동일한 이해와 해석만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과 불일치가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없는 일반 성도들을 자칫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걱정스러운 시선도 있지만, 건전한 신앙생활과 신학적 토대는 “토론”과 “논쟁”의 과정을 통해 입증되고 또 더 견고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도 세 명의 학자들이 밝힌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논평을 통해 확인된다.

 

성경 본문에 대한 “나”의 이해와 더불어 다른 이들의 의견에도 겸손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지닌다면, 창세기 1-11장의 장르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과 깊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물론, 더욱 건설적이고 유의미한 논의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읽기’ 행위는 대개의 경우 저자를 이해하게 된 것만큼이나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여정도 동반한다. 그것은 ‘보는 것’과 ‘보기 원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인식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성경의 이해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저자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초기 교회 시대에 믿음의 선조들과 같은 방식으로 창세기 1-11장을 읽지 못하고 또한 읽지 않는다. 초기 교회 시절의 성경 해석가들은 창세기 1-11 장이 실제로 역사를 반영했는지, 안 했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성경이 사실이라고만 생각했으며, 성경을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인 패러다임 대신에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범주로 다뤘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독자들이 성경을 과학적인 관점으로 읽으려 한다든지, 장르에 관한 질문을 갖는다든지,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원시 역사가 천체 물리학자들과 유전 생물학자들 그리고 고대 근동의 역사를 연구한 역사학자들이 재구성한 역사와 조화를 이루는지 따져본다든지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고대 근동 문헌들이 더 추가적으로 발굴될 것이고 역사적인 연구법과 과학적 지식은 더욱 정교하게 발전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 다른 질문과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할 것이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도 그렇게 계속 바뀌어갈 것이다. 이렇게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을 새로운 통찰력과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다시 탐색하고 재평가하는 과정은 기독교 신앙이 어떤 형태로든지 지성적인 일관성과 설득력을 지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엘리자베스 존슨은 “기독교 신앙이 모든 세대에 호소력 있게 다가가려면 당대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방식들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창세기를 연구하는데 장르와 역사성이라고 하는 주제들은 이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에 속한 많은 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사안들이다. 그러나 그 사안들이 기독교가 하나됨을 저해하는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다. 이런 주제들이 우리의 연합을 깨트리는 자극제가 되거나, 자애로운 사랑 대신에 갈등과 다툼을 조장하게 해서는 안 된다. 창세기 1-11장과 관련해서 직면하게 되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다른 의견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인내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에 대해 한마음으로 의견을 모으고 함께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어도 자비와 사랑을 확장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창세기 1-11장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실제로 원시 역사 시대에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또한 묘사된 그대로 발생했든지 아니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창세기 1-11장은 궁극적으로 모든 기독교인이 뿌리를 내리고 흠모하며 닮아가고자 염원하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실 초기 교회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에 대해 오늘 우리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상이한 관점과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최우선적으로 조성하고자 하신 것은 자애로운 사랑이지 정확함을 기초로 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이 더 옳은지에 대한 열망은 자주 그것이 필요한 목적을 잃게 하곤 한다. 창세기의 첫 부분에 대한 현대적 지성의 탐구적 열정은 그것이 진정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알량한 지식으로 대립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닌 꾸준한 한계의 인식과 겸손이 탐구의 방향이며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성경을 읽고 바르게 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그리스도 안으로 더 많은 연합을 이끄는 행위이다. 오래 전부터 창세기 1장을 펼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7일이나 걸리셨나는 의문이 있다. 순식간의 찰나에 창조하실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적 지성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7일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담겨있는 스스로 낮추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는 이해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한계이다. 창세기 논쟁은 우리 사이의 인식의 차이를 극복해가는 사랑과 연합의 과정이 되어야 하며, 위대한 예술작품의 압도적 감동을 표현하려는 다양한 시도와 같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

 

박우민 (woomin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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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E=mc²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의 일생

 

데이비드 보더니스 | E=mc² -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의 일생 | 김희봉 역 | 웅진지식하우스(2014)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이나 초중고 학생들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과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1명만 꼽아 보라고 하면, 아마도 아인슈타인이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꽤 높을 것이다. 그만큼 아인슈타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자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고 더불어 그가 제시했던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도 이해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고 있는 유명한 이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E=mc2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발견한 공식이다.

 

이 책은 이 공식을 어떻게 유도하는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E=mc2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들을 이야기하고, 그를 통해서 이 식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하는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구성요소인 에너지(E), 질량(m), 빛의 속도(c), 제곱(2), 등호(=) 등과 관련된 여러 과학자의 연구 과정과 논란, 결론 등을 먼저 설명하고 있다. 이런 기초의 이해를 바탕에 두고 아인슈타인에 의해 E=mc2이 태어난 과정을 설명한다. 특히 4부에서는 이 방정식을 이용하여 원자 폭탄이 만들어진 과정을 2차 세계대전의 긴박한 역사적 사실과 각 과학자들의 입장, 각 나라의 상황 등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게 한다.

 

마지막 5부에서는 이 공식이 우리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더불어 이 방정식의 미래를 우주의 진화 과정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또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했던 블랙홀과의 연관성도 이야기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은 언듯 보면 정확하고, 불변하며, 객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학의 특성 중 하나는 변화 가능성(혹은 과학지식의 잠정성)이다. 물론 아침에 비가 내리다가 점심 때가 되면 날이 개는 것과 같이 수시로 날씨가 변화하는 그런 변화는 아니다. 이것은 많은 과학자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전의 과학적 사실이나 이론 등이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 지식이 변화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도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대한 간략한 한 편의 과학사를 볼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원자에 대한 개념의 변화나 빛의 성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과학자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고뇌하고, 갈등하면서 선택을 하는... 그래서 과학자의 삶도 우리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과학도 우리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가끔은 과학적 지식과 우리의 삶이 별로 관계없는 듯 보이고, 종종 과학 지식은 너무 어려워서 그냥 과학자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불리는 요즘처럼 과학에 관심을 갖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갖추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멀어 보이는 과학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 한번쯤 과학자들이 어떤 연구를 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건 어떨까? 그러기 위해 이 책이 하나의 본보기 같은 역할을 해 줄 수도 있겠다.

 

윤세진_ 과신대 교사팀, 구일고등학교 생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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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온라인 기초과정 안내

 

과신대 온라인 <기초과정> 이용 안내

과신대 <기초과정>이 Gnowbe 글로벌 마이크로러닝 플랫폼을 통해

어디에서든 더 쉽게 만나고, 더 재미있게 학습하게 되었습니다.

 

 

[기초과정 개요]

 

■ 수강료: 3만원

■ 강사 : 우종학 교수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과신대 대표) 
■ 강좌 구성 
[1부. 과학의 도전] 1강. 도입 / 2강. 과학이란 무엇인가? / 3강. 과학에 대한 건강한 시각 
[2부 성경해석] 4강. 창조기사를 어떻게 읽을까? / 5강. 성경과 과학 함께 읽기 
[3부. 무신론의 도전] 6강. 무신론의 도전 / 7강. 과학주의 무신론 / 8강. 과학과 무신론의 차이 / 9강. 기적적 창조와 자연적 창조 
[4부. 창조론의 스펙트럼] 10강. 다양한 창조 / 11강. 진화와 진화주의 / 12강. 창조론에 대한 바른 시각 

■ 등록 : 상시 모집 
■ 영상 시청 기간 : 한 번 신청하시면 기간에 제한없이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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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amans: 180만 년 전부터 준비된 사랑의 능력자

 

Homo amans ㅡ  180만 년 전부터 준비된 사랑의 능력자 



터키 북동쪽,  조지아 드마니시에서 180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가 다 빠진 채로 살다 죽은 흔적이 보이고 머리뼈의 봉합 상태로 추정했을 때 노인이라고 한다.  빙하기였고 먹을 것이 부족했을 환경에서 노인이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보통의 젊은이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데 노인이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의 흔적을 보는 것이다. 180만 년 전부터 우리 인류는 나 아닌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남을 위해 손해를 보거나 목숨을 거는사람들 이야기,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이야기를 간혹 접한다. 내가 아닌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이기심의 발로일까? 자발적인 이타심에 의한 것일까?  어떻게 가능하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개미와 벌과 같은 동물 사회에서 찾았는데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미는 하나의 여왕개미가 공동체의 생식을 책임진다. 개미와 벌은 모두 암컷인  여왕개미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유전자가 똑같은 클론 clone이기 때문에  개체들  사이에 구분이 없다. 수많은  '나' 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것이다. 

그 공동체들의 삶은  오로지  여왕 개미가 낳은 아기를 양육하기 위해 살신성인한다. 개체 하나가 죽어도 그 유전자는 계속 내동료들 안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유전자의 입장에서 나의 희생은 억울하지 않다.  

개체를 무시하고 오로지 유전자만 고려한다면 개미의  살신성인과 같은 협동 생활은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이다. 사회 생물학자인 윌슨이 말하려는 것은 이타심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윌리엄 해밀턴은 이타적인 행위가 사실은 자신에게 유익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해밀턴 법칙으로 설명해 냈다.


rB > C 
(B;수혜자가 받는이익/r; 수여자와  수혜자 간의 촌수/   이것을  곱한 값이,  C;수여자가 치르는 대가) 


수여자보다  수혜자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촌수의  곱이 더 클 때 이타적인  행위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식이다.

이 공식을 보면 확률적으로 형제는 나와 유전자가 50% 일치하고 사촌은 12.5% 일치한다. 그러므로  같은 값의 대가와 이익이 기대된다면 두 명의 형제와 여덟 명의 사촌이 맞먹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내가 죽는 대신 형제 두명 혹은 사촌 여덟 명을 살릴 수 있다면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같은 양의 유전자가 살아남으니까 결코 손해 보는  죽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공식을 보면서 도킨스와 같은 사람들은, 개인은 유전자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유전자 제일주의다.  성인 남자가 가족의 일원이 되고 가정을 보살피고 보호하고 돕는 것 등의 행동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의 복지, 즉  남자 자신의 유전자를 위해서일 뿐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면 모르는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 행위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유전자 제일주의만 말하는 그들은  단지  기나긴 세월동안 친족 사회에서 살아온 인류가 습관적으로 해 오던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협동이 그렇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인간 개인이 마치 개미처럼 클론도 아니고 혈연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인류가  다  유전자로만  맺어져 있는 관계인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관계들을 보면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가족처럼 여기고 남과 맺은 관계 속에서 누나, 형님, 동생,  이모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가족은 혈연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가지 각색의 사회관계,  즉 모두 가족의 틀 안에서 오랫동안 형성하고 만들어 온 사회관계이며  핏줄로 연결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거대하다. 

그러면  인류는  어떻게 해서 서로 돕게 됐을까? 남에게 이타성을 드러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류가  작고 약하다는 점을 이유로 꼽는다. 

그들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빙하기를 겪는 동안 빙하기가 똑같은 기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기도 하고 건조하기도 하고 비가 계속 쏟아지기도 했다. 따라서 변덕스러운 기후에 맞춰 동식물들과 환경도 변하고 지형들도  변했다. 

변덕스럽게 달라지는 환경에 적응하기위해 인류는 강해지는 대신 정보력에 의존해 살아남는  유연한 전략을 택했다. 예컨대 인류는  환경을 잘 살피며 과거의 경험에서 정보와 지혜를 얻어 그것에  의존해 살아남는 전략을 발전시켰고 진화시켰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노인들은 이런 정보력의 원천이었고 그들을 존중하고 도왔을 것이고 그러다가 좀 더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협력과 이타심을 갖게 되는 놀라운 능력이 생겼다. 남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모르는 남과 나누고 남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과 연대하며 그들과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되었다.  

이타적인 삶을 살 수있는 사랑 유전자가 창발된 것일까?  어쨌든 인류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과 섬김과 사랑을 베풀 능력이 180만 년 전부터 생겼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대와 나는 자연과 환경도 그곳에 함께 살고 있는 나무도 새도 풀 한 포기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대와 나는 180만 년 전부터 이런 사랑을 하는  능력자, 곧 호모 아망스 Homo amans이다.

 

글_ 백우인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