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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놈 이후 최대 과학혁명, 커넥톰
승현준 | 커넥톰, 뇌의 지도 | 신상규 역 | 김영사
글_ 최성일 (과신대 정회원)
5년 전 인간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이후, 항상 뇌에 대한 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이 책이 첫 책이었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의 역사를 시간 순서로 잘 설명했고, 현재 뇌과학의 상황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큰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큰 그림은 희망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쉽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희망적인 것은 뇌의 신비를 좀 더 알 수 있게 되고, 정신질환의 근본적 치료법이 열릴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쉬움은 커넥토믹스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는 것이었고(21세기 말이 되어야 뇌의 지도, 즉 커넥톰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커넥톰의 작용 메커니즘을 밝히는 커넥토믹스의 완성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염려가 되는 것은 이 미래의 기술을 믿고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신체를 냉동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은 케빈 켈리의 “통제 불능”을 읽은 후에 가졌던 느낌과 같았습니다. 또한 필자가 이야기 하는 오늘날 컴퓨터의 엄청난 연산능력으로 완성될 커넥토믹스는 19세기의 라플라스의 악마를 연상시켰습니다. 전자현미경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뉴런의 연결 지도가 완성되고, 뉴런들이 각기 어떻게 연결되어 기억, 이해, 감정(사랑) 등등을 일으키는가 하는 알고리즘이 커넥토믹스에 의해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기억을 마음대로 업로드/다운로드할 수 있고, 또 조작도 할 수 있고, 기능을 향상 시킬 수도 있을까요? 과연 사람의 생각, 또는 의식, 또는 영혼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과연 한 사람의 과거의 생각, 현재의 생각, 미래의 생각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의식 또는 영혼이라는 것은 물질에 종속된 것인가요?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2007년 한 사람의 유전자 지도(genome)가 완성이 된 후, 유전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크리스퍼 가위가 발명되어 유전자 조작이 꽤 자유로워져서 유전자 수준에서 질병을 미리 예방하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일반인들인 우리는 이런 과학기술들만으로도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게놈은 커넥톰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머리 밖에도 우주가 있고, 인간의 머리 안에도 그에 못지않은 광대한 우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1입방밀리미터의 뇌 지도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이미지 정보의 양은 1페타바이트(1015 바이트)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커넥톰 수준은 길이가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의 커넥톰을 완성한 정도입니다. 이것만으로도 12년 이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쥐와 고양이, 침팬지를 거쳐 인간의 커넥톰을 완성하려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저자는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 21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인간 커넥톰이 완성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직경 30센티 안에 천억 개의 뉴런(신경세포)으로 되어 있다... 길이 1밀리미터인 예쁜꼬마선충은 300개의 뉴런으로 고작 7000개의 신경계 연결망을 가지지만, 그 지도를 그리는데 12년 이상 걸렸다. 당신의 커넥톰은 1000억 배 이상 크며, 당신 게놈의 염기 수(뉴클레오티드 수)보다 100만 배 정도 많은 연결을 가지고 있다. 커넥톰(뇌의 지도)에 비하면 게놈(유전자 지도)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1입방밀리미터에는 10억 개의 시냅스가 밀집돼있다."(커넥톰, 뇌의 지도, 승현준, 김영사, 12, 22, 95쪽)
저자는 인간의 유전자 지도와 뇌의 지도는 또한 가소성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비록 조작을 할 수는 있지만, 유전자는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고, 뇌의 지도는 성장하면서 뉴런과 뉴런의 연결이 경험과 학습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뇌의 가소성을 기반으로 저자는 커넥토믹스가 완성되면 인간의 사고, 감정, 기억 등등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뇌의 가소성의 4가지 형식인 재가중(reweighting), 재연결(reconnection), 재배선(rewiring), 재생성(regeneration)을 정신 활동에 관여하는 뉴런과 시냅스들의 움직임이라고 설명합니다. 일단 커넥톰이 완성되면 이 네 가지 R을 바탕으로 뉴런들 간의 연결인 커넥토믹스를 파악하여 정신활동을 더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책의 내용이 워낙 전문적이고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세세한 내용 정리는 제 입장에서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까지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자를 21세기의 기계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세 가지 비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저자가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진술이 추측과 기대를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한 인간 커넥톰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하지만, 미래 기술에 대한 추측과 기대라는 불안한 기초 위에 “인체냉동술”, “업로딩” 등에 의한 영원한 젊음, 영생을 얻어서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마치 인류가 당연히 걷게 될 방향으로 단정하는 것 같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좁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 저자는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또 다른 파스칼의 글을 인용하면서 끝내고 있습니다. 그 외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문학의 대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이야기한 인간의 정신의 활동이 뉴런과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와 화학신호들의 상호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 의식의 문제를 추적했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사고 과정에 관여하는 이러한 물리적 메커니즘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의식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모듈 – 예를 들면 할머니 모듈 – 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모듈의 존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통찰이라도 제시할까? 아니면 의식의 본질에 관해서 우리를 여전히 깜깜이 상태로 놓아둘 것인가? 뇌가 뉴런과 신경교(膠)로 구성되었다는 지식이 의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GEB, 471쪽)
수학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무의미한 형식체계로부터 창발하는 인간 자의식을 이해하려고 했던 호프스태터의 관점에서 보자면, 저자는 너무 컴퓨터의 기계적 연산능력을 과신하는 것 같습니다.
파스칼을 상당히 좋아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파스칼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기보다는 일부만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이용하는 것 같아 섭섭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학의 천재였던 파스칼이지만,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느끼며 여생을 살았었을 텐데, 그런 것까지 뇌 속의 전기신호와 화학신호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끝으로, 이 책은 커넥토믹스의 미래를 너무 핑크 빛으로만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활동의 신비에 대해서 더 많이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커넥톰과 커넥토믹스라는 개념을 알기 전에도,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하고,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하고, 책을 읽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의 메커니즘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정확히 나타낼 수 없는 지금도 우리는 아주 멋지게 그런 정신활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커넥톰과 커넥토믹스가 빨리 발전해야겠지만, 커넥토믹스가 없더라도 정신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너무 미래에 치우쳐서 현재의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신경학자로서 자신이 아끼는 분야의 미래를 극한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고 또 그래야 이 분야가 주목을 받고 활성화될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저 자신은 이미 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즐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종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하신 일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몰라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신비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신비한 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뇌피셜적 독후감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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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진화는 "위기에 처한 이론"입니까?
Is evolution a "theory in crisis"?
진화를 반대하는 이들은 종종 진화를 위기에 처한 이론이라 칭하지만, 이는 좋게 말해서 오해일 뿐입니다.
서론
진화 과학의 반대자들은 종종 진화를 "위기에 처한 이론"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일반적인 교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는데, 그들 중 39 퍼센트는 과학자들이 인류는 시간에 따라 진화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반대한다고 믿습니다. 응답자들이 백인 복음주의자들에 한정될 때, 그 숫자는 49 퍼센트까지 올라갑니다. 하지만 믿음은 실제로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과학자들 스스로가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땐, 그들 중 99 퍼센트는 인류는 시간에 따라 진화해오고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진화이론의 핵심 사항인 공통조상 (인간 포함)에 대한 논쟁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생물학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안정된 배경을 제공해줍니다.
그러나 물론 논쟁이 되고 있는 현대 진화이론의 요소들이 있습니다(이것이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이지요). 그러한 논쟁의 한 좋은 예는 2014년 Nature 지에 실린 저명한 논문 "진화이론은 재고를 필요로 합니까?"입니다. 이 논문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심하는 저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시간에 따른 진화적 변화의 복잡하고 다양한 방법들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만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기독교 교파 간의 의견 충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핵심적인 프레임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도 사람들은 세부적인 어떤 부분에 대해 의견을 달리할 수도 있고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내부 논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몇 진화 "분파"를 분류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다윈주의(Neo-Darwinism)
진화 이론 내부에서 불일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용어들이 다양한 그룹에서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과 그것들이 종종 부주의하게 정의된다는 점입니다. "신다윈주의"라는 용어는 100년이 넘도록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이 용어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사용되는 것인지, 혹은 일부 과학자들이 오늘날 변호하는 특정한 포지션을 명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인지 항상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벌써 이 용어를 폐기했습니다.
현재 "신다윈주의"가 사용될 때는 보통 "환원주의적" 혹은 "유전자 중심적" 진화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소소한 적응에서부터 새로운 종의 발달에 이르는 모든 진화적 변화는 단순히 어떤 개체의 DNA 변화로써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에 따른 대립 유전자 빈도 변화"로 표현되곤 합니다 (대립 유전자는 한 유전자의 서로 다른 버전이고, 유전자는 DNA의 특정한 부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대진화는 더 오랜 시간에 걸친 소진화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의 가장 저명한 지지자는 리처드 도킨스인데,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확장된 진화적 종합(Extended Evolutionary Synthesis) vs. 근대적 종합(Modern Synthesis)
오늘날 일부 과학자들은 확장된 진화적 종합(EES)이라 불리며 근래에 지지세를 넓히고 있는 이론을 지지합니다. 그들은 변이가 유전자의 돌연변이로부터 전적으로 비롯되고, 선택은 단지 유전자 빈도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유전자 중심의 발상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대신 어떻게 개체가 환경과 함께 공동 구성과 공동 진화를 거치는지를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유전자 단위가 아닌 개체 단위가 진화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관점에서도 무작위적인 유전자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은 진화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계속해서 하게 되지만, 그 외에 다른 요소들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다른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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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편향: 개체의 배아 발생은 그들의 형태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방식을 어떻게 편향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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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형의 가소성: 개체의 모양과 기능에 유연성을 초래하는 생리학적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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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합한 환경 구성: 개체가 그들의 환경과 분리되어 살지 않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적합한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생존 기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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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외적인 유전: 유전의 일부 측면은 DNA 구성 요소의 수준에서 작용하지 않으며, 예를 들어 DNA packaging에 관여하는 단백질들을 수정하거나 심지어 문화적 진화를 통해 사회적 행동을 전달할 수 있다.
EES 생물학자들은 진화 이론에 대한 이러한 추가가 그 이론 자체의 명칭을 수정할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다른 진화 과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윈 이후 진화 이론에서 일어난 이러한 발전을 포함한 다른 발전들을 포괄하여 광범위하게 “근대적 종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를 선호합니다. 이 명칭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지만, 오늘날 그것을 사용하는 과학자들에게 진화는 단순히 변이와 선택의 일반적인 범주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명칭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 이론에 대한 "확장"보다는 이 명칭 아래에서 이러한 추가적인 요소에 대한 특정 메커니즘에 대해 연구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그룹들 중 어떤 그룹도 공통조상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중대한 변화가 진화 이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조금 바꾸는 데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일반 대중과 더불어 특히 기독교인들이 진화 과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오도되어 온 것 같아 우려하고 있습니다. 진화(공통조상 포함)가 일어났는지 의심하는 생물학 박사 출신의 과학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오도와 오해가 (때때로 선한 의도를 가진) 기독교 지도자들이 수사적 효과를 위해 남용하기 때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진리에 충실해야 하며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야만 합니다. 진화과학은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것이 발견되어지고 있으며, 세부적인 것들에서는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위기에 처한 이론은 아닙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강상훈 교수 (미국 베일러대학교 생물학과, 과신대 자문위원)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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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할까요?
Does modern science make miracles impossible?
하나님은 자연세계에서 한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물리적 세계에서 규칙적인 패턴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 패턴을 벗어나는 방식으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규칙적인 패턴을 과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이나 과정(중력이나 광합성과 같은)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패턴을 벗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통 기적(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이라고 부릅니다.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기적을 믿으며,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기적뿐만 아니라 창조 질서의 규칙적인 패턴에도 관여하신다고 믿습니다.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기적, 표적, 이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 사건은 예언자와 사도들에 의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일어났습니다. 성경의 기적은 단순히 구경꾼의 놀라움만을 위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목적을 위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기적은 신학적인 맥락 안에서 항상 발생합니다.
일부 무신론자들은 불합리한 생각과 기적과 같은 해로운 미신으로부터 사회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과학 자체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기적이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법칙은 불변의 확고한 경험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사실 자체의 본성에서 볼 때, 기적을 반대하는 증거는 경험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가능한 것처럼 도처에 널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무신론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근대 유신론자들 중 일부도 과학은 기적을 반증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를 "비신화화"하려는 시도로 유명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ph Bultmann)은 1961년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전등과 무선을 사용하고 근대 의학과 외과적 발견을 사용하면서, 그와 동시에 신약성서의 영과 기적의 세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기적의 이야기를 제거해버림으로써 불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기독교가 더욱 현대사회의 구미에 부합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흄과 불트만이 옳을까요? "자연법칙"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주류 과학을 수용한다면, 반드시 성경의 기적을 거부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하신 역사
기적은 자연현상이 일상적으로 기능하는 배경에 반하여 발생합니다. 성경은 자연계에서 직접적이고 일상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4:10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그는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신다." 이 구절의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가리키고, 두 번째 부분은 물이 그 자체의 자연적 성질을 통해 흘러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시편 전체의 관점은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것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 사이에서 유동적으로 변합니다. 그러한 이중적인 묘사는 구약성경 전체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패턴을 계승하고 있으며,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보존되고 있음을 명백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히 1:3), 그리고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의 강력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을 묘사할 때, 성경은 자연현상의 규칙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인지에 따라 쉽게 관점을 전환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연적 사건과 초자연적 사건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현대적인 구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자연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Nature is what God does)
중세 시대 기독교 사상가들은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질문들로 씨름을 해오면서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가 생겨났습니다. 자연의 규칙성이 하나님의 보존하심을 나타내는 경우, '변덕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신뢰할만하고 일관적'이라고 기대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의 규칙적인 움직임은 "창조주의 습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자연법칙"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한 신학적인 깨달음은 현대과학이 부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규칙적인 패턴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외에도, 현재 과학의 관점을 무시하는 듯한 기적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다.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에 썩어짐을 당할 과정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예수님이 어떠한 자연적인 방법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가능성은 적어집니다. 오히려 과학은 예수님이 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 그 사건은 하나님의 평범한 섭리와 상관없이 일어났음이 틀림없거나, 그 섭리를 넘어서는 것이었거나, 아니면 그 섭리에 반하는 것이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기적과 진화적 창조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의 진화 생물학자인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Simon Conway Mo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에 놀라지 않지만, 그 기적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에 놀랍니다.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을 찾아온다면 당신은 기적 말고 달리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기원 문제에서 만큼은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기적을 행하셨는지에 따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입장을 달리합니다. 젊은지구론자들은 하나님이 일련의 기적을 통해서 6일 동안 지구와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봅니다. 오랜지구론자들은 주류 과학에서 말하는 창조의 긴 역사를 수용합니다. 그러나 자연세계의 특징적인 부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 긴 역사에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개입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지적설계의 지지자들은 자연법칙은 생명의 발달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성경 속 하나님과 같은 외부의 지적 존재가 개입했다고 호소합니다.
반면,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하나님이 과학적으로 기록될 수 있는 규칙적인 패턴을 이용하여 역사를 통해 창조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기적의 개념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이 우리들의 지식의 틈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채울 수 있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설명은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하나님을 "잘 해명할" 위험이 없습니다. 또한,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맥락이 기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수 백만 년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의 신학적인 목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종합하면, 성경적 증거와 과학적 증거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든 규칙적인 인과관계를 사용하도록 선택하신 하나님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자연법칙은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제한할 수 없습니다.
자연법칙은 단지 인간이 묘사한 자연에서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물리법칙의 창조자요 보존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실 때 그 법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분명히 갖고 계십니다. 기적은 단지 하나님이 평소와 다른 패턴으로 역사하기를 선택하신 경우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기적은 항상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놀랍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이오로고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나라를 증거 하는 기적뿐 아니라, 창조를 보존하기 위한 규칙적인 패턴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가리키는 주류 과학을 모두 수용합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최승언 교수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과 명예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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