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5. 현대 과학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할까요?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현대 과학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할까요?

Does modern science make miracles impossible?

 

 

하나님은 자연세계에서 한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물리적 세계에서 규칙적인 패턴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 패턴을 벗어나는 방식으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규칙적인 패턴을 과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이나 과정(중력이나 광합성과 같은)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패턴을 벗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통 기적(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이라고 부릅니다.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기적을 믿으며,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기적뿐만 아니라 창조 질서의 규칙적인 패턴에도 관여하신다고 믿습니다.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기적, 표적, 이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 사건은 예언자와 사도들에 의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일어났습니다. 성경의 기적은 단순히 구경꾼의 놀라움만을 위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목적을 위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기적은 신학적인 맥락 안에서 항상 발생합니다.

 

일부 무신론자들은 불합리한 생각과 기적과 같은 해로운 미신으로부터 사회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과학 자체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기적이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법칙은 불변의 확고한 경험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사실 자체의 본성에서 볼 때, 기적을 반대하는 증거는 경험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가능한 것처럼 도처에 널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무신론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근대 유신론자들 중 일부도 과학은 기적을 반증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를 "비신화화"하려는 시도로 유명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ph Bultmann)은 1961년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전등과 무선을 사용하고 근대 의학과 외과적 발견을 사용하면서, 그와 동시에 신약성서의 영과 기적의 세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기적의 이야기를 제거해버림으로써 불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기독교가 더욱 현대사회의 구미에 부합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흄과 불트만이 옳을까요? "자연법칙"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주류 과학을 수용한다면, 반드시 성경의 기적을 거부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하신 역사

 

기적은 자연현상이 일상적으로 기능하는 배경에 반하여 발생합니다. 성경은 자연계에서 직접적이고 일상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4:10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그는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신다." 이 구절의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가리키고, 두 번째 부분은 물이 그 자체의 자연적 성질을 통해 흘러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시편 전체의 관점은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것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 사이에서 유동적으로 변합니다. 그러한 이중적인 묘사는 구약성경 전체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패턴을 계승하고 있으며,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보존되고 있음을 명백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히 1:3), 그리고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의 강력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을 묘사할 때, 성경은 자연현상의 규칙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인지에 따라 쉽게 관점을 전환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연적 사건과 초자연적 사건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현대적인 구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자연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Nature is what God does)

 

중세 시대 기독교 사상가들은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질문들로 씨름을 해오면서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가 생겨났습니다. 자연의 규칙성이 하나님의 보존하심을 나타내는 경우, '변덕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신뢰할만하고 일관적'이라고 기대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의 규칙적인 움직임은 "창조주의 습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자연법칙"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한 신학적인 깨달음은 현대과학이 부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규칙적인 패턴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외에도, 현재 과학의 관점을 무시하는 듯한 기적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다.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에 썩어짐을 당할 과정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예수님이 어떠한 자연적인 방법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가능성은 적어집니다. 오히려 과학은 예수님이 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 그 사건은 하나님의 평범한 섭리와 상관없이 일어났음이 틀림없거나, 그 섭리를 넘어서는 것이었거나, 아니면 그 섭리에 반하는 것이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기적과 진화적 창조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의 진화 생물학자인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Simon Conway Mo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에 놀라지 않지만, 그 기적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에 놀랍니다.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을 찾아온다면 당신은 기적 말고 달리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기원 문제에서 만큼은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기적을 행하셨는지에 따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입장을 달리합니다. 젊은지구론자들은 하나님이 일련의 기적을 통해서 6일 동안 지구와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봅니다. 오랜지구론자들은 주류 과학에서 말하는 창조의 긴 역사를 수용합니다. 그러나 자연세계의 특징적인 부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 긴 역사에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개입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지적설계의 지지자들은 자연법칙은 생명의 발달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성경 속 하나님과 같은 외부의 지적 존재가 개입했다고 호소합니다.

 

반면,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하나님이 과학적으로 기록될 수 있는 규칙적인 패턴을 이용하여 역사를 통해 창조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기적의 개념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이 우리들의 지식의 틈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채울 수 있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설명은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하나님을 "잘 해명할" 위험이 없습니다. 또한,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맥락이 기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수 백만 년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의 신학적인 목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종합하면, 성경적 증거와 과학적 증거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든 규칙적인 인과관계를 사용하도록 선택하신 하나님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자연법칙은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제한할 수 없습니다.

 

자연법칙은 단지 인간이 묘사한 자연에서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물리법칙의 창조자요 보존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실 때 그 법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분명히 갖고 계십니다. 기적은 단지 하나님이 평소와 다른 패턴으로 역사하기를 선택하신 경우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기적은 항상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놀랍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이오로고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나라를 증거 하는 기적뿐 아니라, 창조를 보존하기 위한 규칙적인 패턴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가리키는 주류 과학을 모두 수용합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최승언 교수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과 명예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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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How should we interpret the Bible?



서론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성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는지,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했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는지, 어떻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부서지고 죄 많은 백성을 은혜로 구속하시고 양자 삼아주셨는지,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침입하여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는지를 말이죠.

 

성령께서는 기독교 신자들의 마음과 가슴 속에 있는 성경의 "큰 이야기" 속 진리를 증거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해 죄의 확신과 회개 및 믿음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손에 든 모든 사람은 누구나 문화와 교육 수준과 관계없이 성경을 유익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성령께서는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명백한 해석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을 해석해야만 합니다. 해석은 단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지, 어려운 구절을 위한 어떤 특별한 기술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은 우리의 기준과 문화적 기대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가끔 이것들은 성경의 저자가 의도한 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의 기원과 말씀의 전반적인 목적이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조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저자의 의도, 문학적 양식과 관습, 언어 및 원청중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성경의 기원

 

개신교 성경의 66권은 다양한 종류의 문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수 세기 동안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서 세 가지의 다른 언어(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로 쓰였습니다. 구약성경은 약 10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쓰였고 통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약 100년에 걸쳐 쓰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과 신약의 첫 번째 책 사이에는 수백 년의 기간이 존재합니다.

 

많은 글이 1세기경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권위를 가진다고 이해되었지만, 초대교회가 그리스도교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문서들을 분류하고 오늘날의 성경을 구성하는 권위 있는 저서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사용 가능한 성경의 여러 버전과 번역본은 수 세기 동안 다양한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의 연구와 공동작업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

 

성경은 도덕 지침서나 믿어야 할 명제들의 모음집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6-17). (바울은 여기서 구약성경을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신약성경에도 적용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무엇보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15절).

 

 

성경의 저자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요? 그들은 무슨 문학 양식과 관습을 사용했나요?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맨 먼저 우리는 저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가끔 저자들은 무슨 일이 생겼다거나 앞으로 생길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어하고, 가끔은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묘사하고 싶어하기도 하며, 가끔은 또 어떤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지침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가끔 그들은 훈계하거나 명령을 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언어와 문화에는 이러한 종류의 의도를 소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는 이러한 의도를 각기 다른 문학적 양식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문학적 양식들은 특정한 관습이나 규칙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그 문화와 시대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특정하게 깨닫고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또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하면서 문학적 양식과 그 양식에 내재된 관습 모두 우리가 기대하거나 쉽게 깨닫는 것들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 시편, 15세기 일본의 하이쿠, 18세기 영국의 소네트 및 21세기 미국의 랩과 연관된 문학적 양식과 관습은 비록 모두 시로 분류될 수 있지만, 매우 다릅니다.

 

묵시문학처럼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한 일부 문학적 양식은 다른 어떠한 문화권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행시의 구조 같이 성경에 나오는 일부 언어 관습이나 언어유희와 말장난은 번역 과정에서 모호해지거나 손실될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일부 문학적인 관습은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서사시(작은 단위)로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강조를 위해 이중 따옴표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성경을 손에 들고 익숙하지 않은 문학적 양식을 완벽하게 해석하거나 전체의 의미에 기여하는, 익숙하지 않거나 모호한 관습의 중요성을 즉시 깨달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문화와 언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학자와 번역자의 전문성을 따지게 됩니다. 그들은 문학적 양식과 관습에 대한 우리만의 문화적인 기대가 성경 해석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부분을 확인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역사를 분명히 기록하지만, 성경이 사용하는 문학적 양식과 관습은 우리 자신이 언어, 문화 및 시대로부터 역사를 읽어오면서 기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종류의 언어가 사용됩니까?

 

저자의 목적을 파악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문학 양식과 관습을 아는 것 이외에도, 해석 일부는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사소통 중 일부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의사소통은 그저 단어를 정의하는 것만으로는 명시되지 않는 추론을 이끌어내는 청중에게 달려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언어 사용의 많은 부분은 어떤 면에서 비유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수업으로 돌아가서 직설법, 은유법, 과장법, 완곡어법, 제유법, 완서법 및 관용적 표현 등을 배워야 했던 모든 어휘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이러한 모든 종류의 비유법의 많은 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복잡하게 만들어 볼까요? 단어 자체는 비유적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poimen의 주된 의미는 목자, "양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비유적 의미는 "교회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요한복음 10:14에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백성을 위한 그의 사랑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씀하는 은유로써 목자의 첫 번째 의미("문자적" 의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11에서 바울은 목자(두 번째 비유적 의미, "목사")를 포함하는 교회 안에서의 역할들을 열거하지만,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그건 그저 매우 단순한 열거일 뿐입니다).

 

비유적 언어는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문학적 형식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시도 매우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역사도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단순히 어떤 텍스트의 문학 양식에 기초하지 않고 사용되는지에 대해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해석 과정은 복잡하고 다층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청중의 문화적 배경은 어떠했나요?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저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썼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for us) 쓰였지, 우리에게(to us) 쓰인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 규범, 상징 및 성경에 대한 청중의 친숙함은 모두 성경이 쓰이고 이해되는 방식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족장들의 긴 수명은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더 큰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나이는 모두 5의 배수이며, 가끔 7이나 14가 추가되어 수사학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문화적 중요성은 그 예로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문맥을 무시하고 그 우화를 직설적으로 그대로 읽으면, 우리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문화적 틀 안에서 고려될 때,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학자 케네스 베일리에 따르면, 그 유대인의 아들은 유업을 요구하며 수치스럽게 행동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탕진하면서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의 행동은 'kezazah'라고 하는, 단절의 의식을 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마을의 거절과 아버지의 분노 섞인 반대를 동반했을 것입니다. 또한, 탕자는 다음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구걸해야만 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냉대 대신, 사랑과 자비의 환영이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그를 만나기 위해 뛰어나갔습니다. 그 아버지 나이의 남자들, 그리고 중동 문화 속에서 구별된 남자들은 언제나 천천히 위엄 있게 걸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의미심장한 세부묘사인 셈입니다. 뛰어감으로써 아버지는 탕자 덕분에 수치와 굴욕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입 맞추고, 최고의 옷을 입히고, 잔치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래 이 이야기를 중동 청중에게 들려주셨을 때, 그들은 아마도 현대 독자들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원청중과 그 문화에 대한 인식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 그 부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훨씬 더 증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를 어떻게 해석할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의 앞 장들을 읽는 방법에서 강경하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21세기의 아이디어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이오로고스 커뮤니티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앞 장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이러한 다양한 생각을 드러내는 많은 글을 웹사이트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창세기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원청중이 이해했을 것들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창세기의 해석 방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이오로고스는 창세기 앞 장들을 비유적인 언어를 통해 실제 사건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다른 고대 근동의 문헌들이 사건을 묘사했던 방식과 일치합니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창세기가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비록 그 목적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이나 역사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계획을 계시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지만 말이지요.

 

 

결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권위 있게 쓰였음을 믿습니다. 성경이 단순한 문학 작품은 아니지만, 믿음의 독자들에게는 살아 역사하는 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성경 읽기를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한 고급 훈련은 없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우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성경 구절을 가장 잘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크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지식을 얻는 것에 달리지 않다는 사실에서 우린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는 것이지, 성경의 완벽한 해석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성경을 깊게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안에 거하며 창조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과 목적을 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김근주 연구위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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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그리스도인은 왜 진화적 창조를 고려해야 할까요?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그리스도인은 왜 진화적 창조를 고려해야 할까요?

Why should Christians consider evolutionary creation?

 

번역: 김영웅 / 감수: 박희주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 눅 10:27


진화는 성경적 믿음에 비추어 고려해야 할 도전적인 주제입니다. 그래서 종종 그 주제에 대한 의미 있는 토론을 하기보다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편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진화적 창조가 창조주와 우리의 관계 그리고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포함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유익을 준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모든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진화를 공부해야 합니다. 진화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공부입니다. 창조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전달하신 것에 대한 보완적인 계시이며, 하나님은 창조된 질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생명체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그의 영광과 존귀로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자연에서의 규칙적인 패턴은 하나님의 규칙적이고 신실하신 통치하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종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과학적으로 창조과정을 묘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중력법칙이 행성의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진화의 과학적 모델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둘째, 진화적 창조를 고려하는 것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믿음 안에서 제자화하는 것을 포함해 교회와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됩니다. 반진화적 태도는 과학을 추구하거나 믿음을 고수하는 것 사이에서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복음주의 교회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신뢰를 잃어버리는 주요 원인은 사실상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한 모든 증거와 모순되는 반진화적 창조 모델의 주장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진화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복음전도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피전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에 진화 과학을 거절해야만 한다고 듣게 된다면 말이지요. 반면 진화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과정으로 여기고 공부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이 무신론적 세계관을 낳는다는 주장에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화 과학이 하나님이 일하신 과정을 묘사한 것이고 (무신론을 증명하는) 어떤 하나의 세계관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적 진화 과학)을 과학의 일부가 아닌 세속적인 철학으로 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문화는 최신 의사소통 수단을 밝혀낸 새로운 생물의학적인 진보에서부터 기본입자에 대한 발견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기술로 가득 차 있기에,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과학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진화 과학은 현대 생물학에 필수적이기에 교회가 공적 영역에서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진화의 증거와 그것이 지닌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씨름해야만 합니다. 기독교가 이런 논의를 잘 알고 있다면, 줄기세포에 대한 논의라든가 태아, 노인, 장애인을 돌볼 때 DNA 정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이슈와 같은 생명윤리적 토론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최첨단 연구에 전폭적으로 참여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괴롭히기보다는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과학을 지지함으로서, 우리가 창조 질서 속 하나님의 역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통해 창조 질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일을 통해 창조주를 증거하고 창조주를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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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바이오로고스는 진화주의, 지적설계, 창조론과 어떻게 다른가요?

  • 좀 심한 오역이 보이네요.

    번역 내용 중에,
    "진화적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론, 오랜 지구 창조론과는 달리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은 명백하게 기독교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지적설계론은 우주의 지적 원인과 생명 발달의 존재가 시험할 수 있는 과학적 가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부분은 원문에
    "In contrast to EC, YEC, and OEC, Intelligent Design (ID) does not explicitly align itself with Christianity. It claims that the existence of an intelligent cause of the universe and of the development of life is a testable scientific hypothesis." 에 해당하는 영역인데요.

    블래즈 2019.08.08 21:43
  • 이건 제대로 번역하면,

    "명백하게 기독교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 "명시적으로 기독교를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가 되어야하고,

    "우주의 지적 원인과 생명 발달의 존재가" => 우주와 생명발달에 있어서 지적인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 되어야합니다.

    특히 첫번째는 좀 악의적으로 비칠 수 있는 오역인데요... 다른 입장에 대한 소개라고 하더라도 성실하게 번역하고 감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블래즈 2019.08.08 21:52
    •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 실수가 보이네요. 편집부 측에서 말씀해주신대로 수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악의는 전혀 없었습니다. 저의 미숙한 점 때문입니다.

      김영웅 2019.08.12 01:08 DEL
    • 그리고 자기소개를 해주시면 앞으로 과신대 관련 글 번역도 담당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전 완전 처음이라 실수 투성이일 게 분명하거든요. 그런데 댓글 다신 거 보니까 저보다 잘 하실 것 같아요.

      김영웅 2019.08.12 10:24 DEL
  • 귀한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번역 상에 실수나 잘못된 부분은 조금씩 수정해서 더 좋은 번역으로 만들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조언과 지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08.14 11:47 신고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바이오로고스는 진화주의, 지적설계, 창조론과 어떻게 다른가요?

How is BioLogos different from Evolutionism, Intelligent Design, and Creationism?

 

번역: 김영웅 / 감수: 박희주

 

 

바이오로고스는 기원에 대해서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확고히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임을 분명히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땅에서 생명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셨는지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설명으로 진화과학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받아들이지만, 공개 토론에서 번번히 생물학적 진화를 수용한다고 하는 무신론적 세계관, 즉 진화주의(Evolutionism)는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진화주의는 일종의 과학주의로써 모든 실재는 원칙적으로 과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바이오로고스는 과학이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것에 제한되어 있다고 믿으며, 기적과도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 역시 실재의 일부라고 믿습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충실하게 읽는다면, 6천 년에서 1만 년 사이의 나이를 가진 젊은 지구를 받아들일 거라고 합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은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와 공통조상을 공유한다고 보는 견해와 성서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진화가 기독교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지구 창조론(Old Earth Creationism)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46억 년)와 우주의 나이(137억 년)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는 확고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6일간의 창조가 실제로는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는 전형적인 주장입니다. 오랜 지구 창조론은 모든 생명 형태의 공통조상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종종 생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에 새로운 종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창조하셨다는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을 받아들입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공통조상이나 진화를 배제할 경우, 현대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의 과학적 증거들을 거의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이 쓰인 문화적, 신학적 맥락이 창조 이야기에 대한 최선의 해석으로 이끄는 결정적 열쇠라고 믿습니다.

 

진화적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론, 오랜 지구 창조론과는 달리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은 명백하게 기독교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지적설계론은 우주의 지적 원인과 생명 발달의 존재가 시험할 수 있는 과학적 가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지적설계론 논쟁은 종종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과학 이론 중 일부를 지적하면서 지적설계자의 직접적인 행동에 호소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우리의 지적인 하나님이 우주를 설계하셨다고 믿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자연현상을 관장하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 추구를 포기해야 할 과학적이거나 성경적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학적 설명이 우주의 설계자, 창조자 및 유지자로서의 하나님이 하신 역할과 같은 강력한 신학적 이해를 보완해준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구의 나이와 진화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는 모두 합의를 보고 있습니다. 바로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으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온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우리가 DNA의 복잡성이나 돌고래의 아름다움, 아니면 은하수의 광대함을 상상할지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만드신 신성한 예술가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 중심을 높여 함께 찬양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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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적 창조가 가능하다

진화론적 창조가 가능하다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 | 칼 W. 가이버슨, 프랜시스 S. 콜린스 | 새물결플러스 | 2019

 

구형규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의 원제목은 ‘The language of science and faith’이다. 저자인 프랜시스 콜린스와 칼 가이버스는 과학과 종교가 어떤 관계인지, 과학의 진리와 성경의 진리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기독교인으로 진화를 어떻게 신앙과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책을 기록하였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God)」라는 책을 이미 10년 전에 저술하였다. 이 번 책은 「신의 언어」의 후속 편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전편인 신의 언어에서 저자는 의사이자 유전학자로서 무신론자였다가 신앙을 갖게 된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인류의 기념비적 업적인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일하면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바이오로고스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 후 독자들로부터 받게 된 여러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라는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콜린스는 「신의 언어」에서 다양한 창조론에 대해서 소개하고 설명하였다. 젊은 지구 창조론, 오래된 지구 창조론, 지적 설계론, 유신론적 진화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유신론적 진화론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후속편인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에서는 유신론적 진화(바이오 로고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며 이와 관련된 기독교계 안의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서 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진화가 하나님의 창조 방법이라면 왜 그렇게 평판이 좋지 않는가?’라든지 ‘사회적 다윈주의를 어떻게 봐야하는가?’, ‘진화가 일어났다는 최고의 증거는 무엇인가?’, ‘진화는 정말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있는가?‘, ’대진화에 대한 증가가 있는가?‘ 등에 대한 답변을 명쾌하게 풀어낸다.

 

또한 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서도 답을 한다. 예를 들면 지적설계론자들이 DNA 염기서열의 유사성을 공통조상이 아닌 동일한 DNA패턴을 사용하여 설계하신 창조의 증거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콜린스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답한다.

 

DNA의 세부적인 분석은 그런 결론들이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생명체 안의 게놈은 자신이 의도하는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유전자만 공유하는 게 아니라 부서진 유전자도 공유하기 때문이다(P.64).

 

이러한 답변은 인간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직접 그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과학자로서 연구결과를 통해 설명하니 답변에 더 신뢰가 간다. 콜린스는 기독교계 안에서 제기된 진화에 대한 반론들에 대해 하나하나 답하면서 진화적인 창조(바이오 로고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한다. 또한 민감하고 중요한 부분인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 여러 장을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중 진화의 우연성에 대해 반대적인 시각인 수렴적인 진화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며 케임브리지 대학의 고생물학 교수인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의 견해를 소개한 것으로 의식, 도덕성, 영성을 가능하게 하는 큰 두뇌를 가진 인류가 우연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출현했다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진화의 과정을 계획하셨다고 하는 것이나 진화의 과정을 인도하셨다고는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견해이다. 진화의 단계들이 무작위적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각각의 단계에서는 선호되는 특정한 방향이 있다는 설명이다. 콜린스는 증거가 쌓여감에 따라 이런 통찰을 수용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하며 이러한 견해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책 안에는 생물학 이외에도 물리학과 관련된 내용도 많이 있다. 아마도 물리학자인 칼 가이버슨이 기여한 부분일 것이다. 오래된 지구 연대와 관련된 내용과 인류원리라고 부르는 미세조정에 대한 부분이 그것이다. 지구의 나이가 수 십 억년이고,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것, 방사성 연대측정법은 여러 암석의 나이를 밝히는데 신뢰할 만한 방법이라는 것은 이미 과학계 안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나 과학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러한 부분들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다루는 질문들은 ‘어떻게 우주의 나이가 수 십 억년인지 알 수 있을까?’라든지, ‘빅뱅이론은 믿을 만한가?’, ‘방사성 연대측정법은 믿을 만한가?’, ‘미세조정은 하나님을 가리키는가?’등이다.

 

기독인이며 과학자인 저자들은 자신이 믿는 신앙과 과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둘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풍성하게 이해하는 수단으로 조화롭게 보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가 기독인으로서 과학을 공부하며 던질만한 질문들에 대해서 먼저 고민했던 분들이 친절히 답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궁금한 질문들에 대한 답부터 하나씩 찾아 읽다보면 놀라운 방법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느끼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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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하나님의 존재

난처한 질문과 솔직한 대답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 | 칼 W. 가이버슨, 프랜시스 S. 콜린스 | 새물결플러스 | 2019

 

이신형

 

 

과신대와 새물결플러스의 이벤트로 이 책을 받게 되고서 매우 기뻤다. 신학과 과학과의 긴장관계는 나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에게 언제나 관심사였고, 아직도 여전히 긴장관계 속에서 어떤 것이 옳은 지 고민하게 만드는 이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긴장을 풀어내고자 한다.

 

두 명의 저자는 신학과 과학의 조화를 위해 설립된 바이오로고스 재단의 핵심 인물이다. 저명한 과학자이면서 신앙인이다. 이러한 두 저자의 배경은 신학과 과학의 조화를 설명하기에 매우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바이오로고스 재단은 과신대와 비슷한 목적을 갖고 활동하는 듯이 보여서 더 반가웠다.

 

 

창조론 하면 30여년전, 교회 저녁예배 때 초청되어 온 창조론 이야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연대 교수님이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한 시간 내내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진화론에 대한 비판만 하셨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이에 들으면서, “뭐야? 창조 이야기는 하나도 없네. 진화론을 비판하면 창조가 되는 건가? 창조는 할 이야기가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창조과학으로 이야기되는 창조론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학부에서 지구과학을 전공하다 보니 생긴 지구에 대한 지질학적, 고생물학적 역사 지식은 창조과학으로부터 더욱 멀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갖고 있는 신앙과의 충돌은 미묘하게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신앙이나 공부에 크게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찝찝함이 남는 신앙이라고나 할까.

 

나 같은 사람이 나 혼자 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많은 신앙인들이 나 같은 생각을 많이 하고 있을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신학이 이상한 것 아니야? 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듯하고, 나이 드신 분들은 과학이 좀 이상한데 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물론 아닌 분들도 많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기존에도 있었지만, 이번에 한 권 더 나온 듯하다.

 

 

이 책은 결국 진화로 대표되는 과학과 창조로 대표되는 신학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본다. 지구의 역사와 다윈의 진화론, 하나님의 존재, 아담과 하와로 대표되는 인간, 그리고 빅뱅으로 알려진 우주의 시작까지 다양한 주제를 과학의 관점에서 또 신학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조화시키고자 노력한다.

 

과학적 지식을 꼼꼼하게 그리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그 지식에 신학을 접목시킨다. 진화에 대한 설명과 함께 창조과학의 부족함도 조금씩 짚어 줌으로써 자신들의 논리를 더 탄탄히 만든다. 신학적인 내용도 어려운 내용보다는 실제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안내한다.

 

양자역학은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의 근거가 되고, 빅뱅이론과 우주 초기에 대한 연구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얼마나 섬세하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생명의 진화가 무작위가 아닌 방향성이 있다고 하는 최근의 연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창조를 위해 치밀하게 진화를 인도하셨음을 고백하게 된다.

 

창조과학자들의 진화에 대한 문제제기에도 잘 이야기한다. 열역학제2법칙에 대해선 지구가 닫힌 세계가 아닌 열린 세계이기 때문에 엔트로피가 감소할 수 있는 에너지가 공급되고 있음을 지적하여 진화가 다른 과학이론과 모순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대해서도 다양한 신학적 제안들을 살펴봄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반드시 한 사람이어야만 기독교의 교리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보다 기독교 전통은 창조과학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연의 관찰과 신학을 잘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지구의 역사가 6,00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자연 환경으로 표현되는 일반 계시를 무시하지 않았다. 다윈의 진화론도 발표 당시에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대립하기보다는 오히려 환영받는 분위기도 많이 존재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메커니즘이 밝혀졌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창조과학, 즉 젊은 지구론은 역사도 짧으며 사회적, 종교적으로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리고 그 논란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한 듯이 보인다. 교과과정에 대한 논란 등은 사회로 하여금 기독교를 지성이 없는 종교로 이해하게 만드는데 일조했고, 결과적으로 교회를 사회와 분리시키는데 일조한듯이 보인다. 마치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구분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온 듯한 모습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으로 나아가라 하신다. 세상과 구별된 교회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교회가 옳은 것인가 생각해본다.

 

 

이 책의 백미는 제일 마지막장이다. 창세기 1장을 현대 과학의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풀어낸다. 그럼으로써 성경의 창조와 진화를 조화시킨다. 하나님은 세상을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하셨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성경에서는 이 세상이 창조된 목적을 이야기한다. 그런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보려고 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우리가 자연을 통해 읽은 하나님의 뜻과 성경을 통해 듣는 하나님의 뜻이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기 때문이다. 신학과 과학을 대립시킴으로써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쇠퇴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신학과 과학의 조화를 통해 한걸음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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