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책]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

[과신책] 학자의  읽기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
브레넌 매닝 | 부랑아 복음 | 진흥 | 2002

 

김영웅

 

 

얼마나 오죽했으면 종으로 살게 해 달라는 결단까지 하고 아버지를 다시 찾아왔을까? 한 번 떠난,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집에,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재산을 모두 탕진한 채 부랑아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바는 수많은 글과 책에서 다루어졌지만, 브레넌 매닝의 '부랑아 복음'은 그렇게 부랑아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에 중점을 두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묻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런 몰골을 하게 되었는지,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왜 이제야 돌아왔는지, 가지고 나간 재산은 어떻게 했는지, 혹은 이제 잘못을 제대로 뉘우쳤는지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죄를 고백하고 종으로 살게 해 달라는 아들의 요구에 다음과 같이 종들에게 명령하면서 응답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잔치를 벌였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어떻게 보면 맹목적으로 보이기도 하며, 그래서 더욱 어리석게도 보이는 그 아버지의 사랑. 브레넌 매닝은 이 압도적이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로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의 수혜자라는 것이다!

 

 

이 책은 새로운 무언가를 더 가르쳐 주기보다 이미 배운 것을 다시 일깨워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바를 고스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부랑아'였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시뻘건 죄악에 물든 죄인이었고, 그래서 우리 안의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전적으로 처참하게 타락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이 임했다.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체스터톤이 한 번은 "하나님의 맹렬한 사랑"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저자인 브레드 매닝은 이를 그대로 수용한다. 우리 역시 그러한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하여 이 책을 마주한다면, 이 책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를 건진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은혜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다시 일깨워줄 것이다.

 

돌이켜보자. 우리들 각자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첫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졌다. 급기야 우리들은 아이들을 훈계할 때, 마치 하나님이 착한 아이들만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가르치거나, 집사로서, 장로로서, 또는 목사로서 보여야 합당할 것만 같은 경건한 모습에다가 스스로를 끼어 맞추려고 애를 써야만 하나님께서 더 큰 상을 주시고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리라 은연중 믿게 되었다.

 

우린 말로는 은혜의 복음을 운운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마치 개인적인 경건 훈련과 자기 부인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빚어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살고 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강조점을 두며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눈에 들려고 무언가 더 해내야만 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브레넌은 이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 더 이상 취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우리 중엔 그 어떤 누구도 가치 있는 존재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은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을 우린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는 신들 중 죄인을 사랑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미 알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 어떤 공로도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써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소식이요, 사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좋은 은혜의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 예를 들어 좀 더 경건하거나 좀 더 구제, 봉사, 헌신을 많이 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배타적인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러한 행위에 따라 점수가 매겨져 있는 피라미드 구조의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예수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나라인 것이다.

 

미국에서 유명했던 CCM 가수, 마이클 W. 스미스가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린 우리가 가진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시며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은혜의 복음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우린 그것으로부터 해방받았다. 놀라운 은혜의 달콤한 소리가 자기기만의 필요에서 우리를 구해내었던 것이다. 브레넌은 말한다. 은혜로 산다는 것은 우리 전 생애의 이야기, 곧 인생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다 인정한다는 의미라고 말이다. 우리 삶의 그늘진 면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내 가슴을 묵직하게 툭 때리는 브레넌 자신의 예화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한 때 알코올 중독자였던 브레넌이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당하게 "브레넌이라고 합니다. 저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라고 선언했고, 그때야말로 그가 최고의 해방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주변 사람들의 압력,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 사람들에게 존경받아야 한다는 속박으로부터 바람직하게 독립할 수 있게 해 준다. 누군가를 의식하는 보이지 않고 두려운 구속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함은 곧 타인을 공감하는 진정한 긍휼과 용서를 베풀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우리가 거룩하게 여호와의 공의를 행하는 삶과도 직결된다. 우리 인간은 도긴개긴, 모두 나그네요, 부랑아 인생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공감이 복음으로 해방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더럽고 추악한 모습일 때, 바로 죄인일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여진 존재인 것이다. 모두 은혜의 수혜자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익숙히 알고 있었으나 브레넌 덕분에 다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영적인 사실이 있다. 역시 은혜의 복음에 대해서다.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이 회개에 선행하며, 죄인은 그가 자비를 구하기 전에 먼저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용서는 이미 주어진 것이다. 죄인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완전한 사면이다. 은혜로운 용서인 것이다. 로마서 5:8 말씀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는 말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지하지도 못했을 때"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돌아온 탕자를 먼저 마중 나와 기쁘게 반기며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전적인 은혜란 그렇게 우리를 압도하며 찾아오는 것이다. 반성과 회개는 그 이후에 일어난다. 그리고 그 증거로 우린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이웃사랑으로, 공적인 복음을 표출하는 것이다. 가장 작은 자에게 하는 행동이 예수님께 하는 행동과 같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도 받은 은혜에 다 보답할 수는 없겠지만, 유한한 육을 가지고 유한한 삶을 살게 되는 그 한계를 가지고 최대한 자발적으로 우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며,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인 것이다. 이는 또한 시내산 언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기쁨과 감사함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도 같다. 그때도 은혜가 먼저였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 순종이 따라오는 것이었다. 언제나 은혜가 율법보다 먼저 온다. 율법은 결코 구원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먼저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행하는 우리의 올바른 반응인 것이다. 그 순종을 통해서 우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찾을 수 있다.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파리나 보르도, 리용, 디종 같은 대도시든 아니면 생 레미 같은 작은 마을이든 프랑스에서 부활절을 보내게 되면 건물 벽이나 버스 옆면에 손으로 쓴, 혹은 검은색으로 인쇄되어 내걸린 한 문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사람들이 그 문구를 노래하고 읊조리고 암송하는 것도 듣게 될 것이라고 한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그 문구로 부활절 인사를 나누는 것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문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L'amour de Dieu est folie!" 즉, 하나님의 사랑은 어리석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더 크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더 사랑받기 위해 어떤 공로를 세울 필요가 전혀 없다. 기독교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어떤 경건한 규칙을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두 손을 활짝 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타인을 공감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은혜와 감사에 무감각해져 있거나 냉담해진 분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콧대가 높아진 채 나그네 됨의 정체성을 잊어버린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어떤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끼어 맞추려는 부질없는 노력에 허덕이는 분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고 다시 두 번째의 부르심을 듣는 기적이 일어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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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고스 Common Questions]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과신대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의 허가를 받아 홈페이지에 올라온 Common Questions를 번역해서 소개합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입니다. 이 코너를 통해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https://biologos.org/)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How should we interpret the Bible?



서론

 

바이오로고스에서는 성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는지,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했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는지, 어떻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부서지고 죄 많은 백성을 은혜로 구속하시고 양자 삼아주셨는지,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침입하여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는지를 말이죠.

 

성령께서는 기독교 신자들의 마음과 가슴 속에 있는 성경의 "큰 이야기" 속 진리를 증거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해 죄의 확신과 회개 및 믿음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손에 든 모든 사람은 누구나 문화와 교육 수준과 관계없이 성경을 유익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성령께서는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명백한 해석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을 해석해야만 합니다. 해석은 단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지, 어려운 구절을 위한 어떤 특별한 기술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은 우리의 기준과 문화적 기대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가끔 이것들은 성경의 저자가 의도한 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의 기원과 말씀의 전반적인 목적이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조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저자의 의도, 문학적 양식과 관습, 언어 및 원청중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성경의 기원

 

개신교 성경의 66권은 다양한 종류의 문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수 세기 동안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서 세 가지의 다른 언어(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로 쓰였습니다. 구약성경은 약 10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쓰였고 통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약 100년에 걸쳐 쓰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과 신약의 첫 번째 책 사이에는 수백 년의 기간이 존재합니다.

 

많은 글이 1세기경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권위를 가진다고 이해되었지만, 초대교회가 그리스도교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문서들을 분류하고 오늘날의 성경을 구성하는 권위 있는 저서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사용 가능한 성경의 여러 버전과 번역본은 수 세기 동안 다양한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의 연구와 공동작업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

 

성경은 도덕 지침서나 믿어야 할 명제들의 모음집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6-17). (바울은 여기서 구약성경을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신약성경에도 적용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무엇보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15절).

 

 

성경의 저자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요? 그들은 무슨 문학 양식과 관습을 사용했나요?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맨 먼저 우리는 저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가끔 저자들은 무슨 일이 생겼다거나 앞으로 생길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어하고, 가끔은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묘사하고 싶어하기도 하며, 가끔은 또 어떤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지침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가끔 그들은 훈계하거나 명령을 하고 싶어합니다.

 

모든 언어와 문화에는 이러한 종류의 의도를 소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는 이러한 의도를 각기 다른 문학적 양식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문학적 양식들은 특정한 관습이나 규칙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그 문화와 시대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특정하게 깨닫고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또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하면서 문학적 양식과 그 양식에 내재된 관습 모두 우리가 기대하거나 쉽게 깨닫는 것들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 시편, 15세기 일본의 하이쿠, 18세기 영국의 소네트 및 21세기 미국의 랩과 연관된 문학적 양식과 관습은 비록 모두 시로 분류될 수 있지만, 매우 다릅니다.

 

묵시문학처럼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한 일부 문학적 양식은 다른 어떠한 문화권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행시의 구조 같이 성경에 나오는 일부 언어 관습이나 언어유희와 말장난은 번역 과정에서 모호해지거나 손실될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일부 문학적인 관습은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서사시(작은 단위)로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강조를 위해 이중 따옴표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성경을 손에 들고 익숙하지 않은 문학적 양식을 완벽하게 해석하거나 전체의 의미에 기여하는, 익숙하지 않거나 모호한 관습의 중요성을 즉시 깨달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문화와 언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학자와 번역자의 전문성을 따지게 됩니다. 그들은 문학적 양식과 관습에 대한 우리만의 문화적인 기대가 성경 해석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부분을 확인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역사를 분명히 기록하지만, 성경이 사용하는 문학적 양식과 관습은 우리 자신이 언어, 문화 및 시대로부터 역사를 읽어오면서 기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종류의 언어가 사용됩니까?

 

저자의 목적을 파악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문학 양식과 관습을 아는 것 이외에도, 해석 일부는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사소통 중 일부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의사소통은 그저 단어를 정의하는 것만으로는 명시되지 않는 추론을 이끌어내는 청중에게 달려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언어 사용의 많은 부분은 어떤 면에서 비유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수업으로 돌아가서 직설법, 은유법, 과장법, 완곡어법, 제유법, 완서법 및 관용적 표현 등을 배워야 했던 모든 어휘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이러한 모든 종류의 비유법의 많은 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복잡하게 만들어 볼까요? 단어 자체는 비유적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poimen의 주된 의미는 목자, "양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비유적 의미는 "교회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요한복음 10:14에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백성을 위한 그의 사랑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씀하는 은유로써 목자의 첫 번째 의미("문자적" 의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11에서 바울은 목자(두 번째 비유적 의미, "목사")를 포함하는 교회 안에서의 역할들을 열거하지만,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그건 그저 매우 단순한 열거일 뿐입니다).

 

비유적 언어는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문학적 형식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시도 매우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역사도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단순히 어떤 텍스트의 문학 양식에 기초하지 않고 사용되는지에 대해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해석 과정은 복잡하고 다층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청중의 문화적 배경은 어떠했나요?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저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썼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for us) 쓰였지, 우리에게(to us) 쓰인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 규범, 상징 및 성경에 대한 청중의 친숙함은 모두 성경이 쓰이고 이해되는 방식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족장들의 긴 수명은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더 큰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나이는 모두 5의 배수이며, 가끔 7이나 14가 추가되어 수사학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문화적 중요성은 그 예로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문맥을 무시하고 그 우화를 직설적으로 그대로 읽으면, 우리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문화적 틀 안에서 고려될 때,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학자 케네스 베일리에 따르면, 그 유대인의 아들은 유업을 요구하며 수치스럽게 행동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탕진하면서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의 행동은 'kezazah'라고 하는, 단절의 의식을 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마을의 거절과 아버지의 분노 섞인 반대를 동반했을 것입니다. 또한, 탕자는 다음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구걸해야만 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냉대 대신, 사랑과 자비의 환영이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그를 만나기 위해 뛰어나갔습니다. 그 아버지 나이의 남자들, 그리고 중동 문화 속에서 구별된 남자들은 언제나 천천히 위엄 있게 걸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의미심장한 세부묘사인 셈입니다. 뛰어감으로써 아버지는 탕자 덕분에 수치와 굴욕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입 맞추고, 최고의 옷을 입히고, 잔치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래 이 이야기를 중동 청중에게 들려주셨을 때, 그들은 아마도 현대 독자들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원청중과 그 문화에 대한 인식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 그 부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훨씬 더 증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를 어떻게 해석할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의 앞 장들을 읽는 방법에서 강경하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21세기의 아이디어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이오로고스 커뮤니티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앞 장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이러한 다양한 생각을 드러내는 많은 글을 웹사이트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창세기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원청중이 이해했을 것들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창세기의 해석 방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이오로고스는 창세기 앞 장들을 비유적인 언어를 통해 실제 사건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다른 고대 근동의 문헌들이 사건을 묘사했던 방식과 일치합니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창세기가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비록 그 목적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이나 역사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계획을 계시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지만 말이지요.

 

 

결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권위 있게 쓰였음을 믿습니다. 성경이 단순한 문학 작품은 아니지만, 믿음의 독자들에게는 살아 역사하는 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성경 읽기를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한 고급 훈련은 없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우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성경 구절을 가장 잘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크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지식을 얻는 것에 달리지 않다는 사실에서 우린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는 것이지, 성경의 완벽한 해석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성경을 깊게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안에 거하며 창조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과 목적을 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번역: 김영웅 박사 (미국 City of Hope Staff Scientist, 과신대 정회원)

감수: 김근주 연구위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과신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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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는 바울
존 M. G. 바클레이 | 새물결플러스 | 2018

 

김영웅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사탕을 준다고 해서 교회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네 식구였던 우리 집은 전세에 단칸방이었다. 사탕 같은 간식은 내겐 아주 귀했다.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난 그 교회를 계속해서 다니게 되었다(그런데 친구는 얼마 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대로 교회 다니는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가문에서 처음으로 소위 '예수쟁이'가 탄생한 것이었다. 동시에 내겐, 이젠 30년이 넘는, 하나님을 향한 굴곡진 여정의 시작이었다. 사탕 하나로 이 기나긴 여정이 시작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내가 다니던 교회(예장 합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선 성경 퀴즈대회를 자주 했었다. 학교에선 주관식 수학 문제의 답이 대개 '0' 아니면 '1'이었듯, 교회에서 치러진 주관식 성경퀴즈의 답은 십중팔구 '하나님' 아니면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그 범접할 수 없는 이름에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올렸던 이름이 있었으니, 구약에선 '다윗', 신약에선 단연 '바울'이었다.

 

어릴 적 내가 알던 바울에 대한 지식은 아주 단편적이었다. 신약에서 편지를 가장 많이 쓴 사람, 사도행전의 주인공(?),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사울'에서 이름이 바뀌었던(?) 사람. 이제는 이런저런 공부로 인해 이러한 지식이 부정확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땐 혼자 따로 공부하지 않고 그저 교회에서 주워들은 지식이 전부였던 터라, 나의 성경 지식은 그 당시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들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내가 알던 바울은 그 정도가 다였다. 정확하지도 않을뿐더러 단편적이기만 했던 지식의 파편들. 이성적인 이해를 거치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시도하면 불경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냥 무턱대고 믿으라고 강요받았고, 오히려 그것이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라고 배웠던 그 시절. 이는 아마 그 당시 한국 기독교 신앙의 단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씁쓸함이 남는다.

 

바울을 더 정확하고 더 깊게 알고 싶었던 건 솔직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믿었던 나의 기독교 신앙은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서른 후반 즈음에서야 힘겹게 맞이한 가치관의 변화 시기에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어 나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다. 그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를 지나오며 난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순 없겠지만, 이러한 방법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충분히 인생을 다시 보게 만들고 제대로 살아내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성의 영역이 인간이란 존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것은 그 빙산의 일각이라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회개나 거듭남, 그리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하여 마침내 얻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역시 이 빙산의 일각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정확한 지식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을 더욱 풍성히 알고 전할 수 있는 중요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제목부터가 맘에 쏙 들었다. '단숨에 읽는 바울'. 그렇잖아도 이철규 원장님이 작년 엘에이 방문하시며 쓱 건네주셨던 '하나님의 비밀'(그레고리 K. 비일, 벤저민 L. 글래드 공저, 새물결플러스 출판)도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고, 예전에 큰맘 먹고 구매했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저, IVP 출판)도 마찬가지 상태라, 난 이 두 책을 책장에서 볼 때마다 뭔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약 150 페이지의 짧은 이 책으로 이제 겨우 그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두 책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처럼 신학적인 전문지식이 전무한 사람에게 이 책은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바울을 감히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이 책에서 바울의 '역사'와 바울의 '유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울을 읽어나간다. 1부 '역사'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의 바울의 위치와 의미를 읽어낸 뒤, 바울의 편지들과 그것들이 가지는 역사적 정황들을 살펴본다. 이어서 자신을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으로 소개하는 바울과, 유대 전통에 비친 그의 모습을 읽어낸 이후,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 로마 제국에서 가졌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묘사한 이미지와 사람들에게 인식된 이미지들을 비교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바울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는지에 달려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울이 유대인이었고 지성인이었으며, 돈을 버는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니다가 다메섹에서 그가 계시라고 부르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되었고, 예수가 정말 주님이라는 확신을 얻은 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으며, 그 사건을 통해 바울은 그의 삶과 그의 충성심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뀌는 삶의 대전환을 경험했다는 것도 난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바울이 남긴 유산의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남긴 유산은 무수히 다양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장들을 낳았다는 사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만이 아니라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를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아는 바였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이러한 단편적인 바울에 대한 지식은 표면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신학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바울 신학의 다양한 해석이었다. 작년 권연경 교수님께서 참석해주셨던 독서모임에서 '로마서 산책'과 '행위 없는 구원?'을 함께 읽고 직접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끝내 말끔히 풀리지 않았던 부분은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학 문제처럼 문제가 하나 있으면 하나의 답이 존재할 거라는, 다분히 단순 무식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기독교 신학을 무분별하게 접하고 있던 시기라, 내게 있어 '해석'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또 하나의 낯선 세상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2부 '유산'에서 저자는 비록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 바울의 편지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연구했던 여러 신학자들의 해석으로부터 바울의 유산을 찾아낸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서구 교회,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와 칼뱅의 사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 그리고 니체를 비롯한 다수의 철학자들과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왔는지 저자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준다.

 

 

책을 읽고, 바울처럼 파다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쟁을 몰고 다닐 인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사실 바울이 직접 썼다고 인정되는 일곱 편의 서신(더 많은 서신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 이상 일곱 편의 편지를 통해서만 바울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에서도 그는 상반되거나 모호한, 어쩌면 이중적일지도 모르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게다가 바울이 쓴 것은 신학 전문서적이 아니라 어떤 특정 상황에서 어떤 특정 대상을 향해 쓴 편지이기에, 이 편지만을 가지고 바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바울 서신의 저작설에 관한 다툼도 꾸준히 있어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강조하듯, 신학의 문외한인 내게도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고 익히 알려졌던 바울의 사상을 확고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고 그것을 찾으려는 방식보단, 각 시대와 정황에 흐르는 맥락에 합당하게 본문과 꾸준히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가능성을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탐색하는 방식이 더 올바를 것이다. 바울이 끼친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지만, 바울 역시 예수의 복음을 해석한 사람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 사람이기에, 그의 사상이 성경을 읽는 하나의 눈을 열어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복음이거나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늘 염두해야 할 것이다.

 

다시금 바울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혈통적으로 유대인도 아닐뿐더러,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율법을 다 알지도 못하는, 일개 이방인에 불과한 나에게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역할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를 박해했던 그도 부르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인간의 자격이나 가치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이 왜 비유대인들의 세계로 퍼져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여전히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바울이지만, 그의 소명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야훼의 종의 사명처럼 분명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열방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열방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어지는 거대한 선상에 나의 작은 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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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페미니즘과 기독교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페미니즘의 눈을 통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고찰하다.

페미니즘과 기독교 | 강남순 | 동녘 | 2017

 

김영웅

 

 

'결함이 있는 남성', '잘못된 남성', '악을 가져오는 위험한 존재'. 자,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렇다. 놀랍게도, 우리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아내, 우리의 딸,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 10달간 머물렀던 자궁의 주인이자 우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바로 여성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여성에 대한 표현들이 어떤 정신병자에 의한 오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유명한 철학자와 신학자(모두 남성이다), 각각 이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한 여성에 대한 이해였다. 누군가는 세 위인 모두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며 적당히 이해해보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질없는 시도다. 대표적인 종교개혁자였던 마르틴 루터조차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 이후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았고, 또 다른 종교개혁가 존 칼빈도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신의 창조 질서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굳이 수 세기 전에 이미 사라진 위인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펴보면 그 어디나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와 남성 위주로 된 문화 시스템들이 마치 물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소위 ‘자연스럽다’고 하는 많은 법과 규범, 질서와 체제, 그리고 문화를 바라보는 눈이, 사실은 색안경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착용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 색안경이 우리 눈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전혀 이상함을 못 느낄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 숨 쉬듯 자연스러운 가부장적인 제도에 노출되는 우리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와 배제, 차별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우리 눈에 부착된 색안경을 인지하고 뜯어내는 작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이 시대의 키워드를 통해서 말이다.

 

강남순 교수의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나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나 강연 등을 부끄럽게도 여태껏 직접 접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무리가 없는 수준의 책이다. 이 책에는 페미니즘의 간략한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가중시키고 대중화시켜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각인이 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가 페미니즘과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다층적이고도 심층적인 대답을 찬찬히 해나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의외의 상황 파악에 섬뜩할 정도로 놀란 부분이 있다. 가부장주의적인 교육과 가치관의 내면화가 견고해질 대로 견고해져 급기야 일종의 카르텔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익숙해진 존재에는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여성 스스로도 자신의 해방을 위한 페미니즘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지도자를 선택할 때도 여성보다는 남성을 더 지지하고 신뢰하게 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대부분 피해자의 위치에 놓였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해방보다는, 비록 남성 의존적이고 불합리하고 불의하더라도 그 상황이 가져다주는 모종의 안정감에 길들여져 버려 그 상황을 지속하길 원하게 되는,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난 이 부분에서 최근에 읽었던 모세오경 중 민수기 편이 생각났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에게 억눌렸던 노예 체제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하기보다, 광야생활 중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기만 하면 차라리 그 노예 시절이 더 나았다고, 차라리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상황과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인된 노예근성이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오랫동안 이어져온 가부장주의적인 사회체제 속에서 여성들에게 각인된 억압 근성이 여성 평등을 넘어 성, 인종, 사회적 계층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발전에 의외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천부인권설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가 오히려 여성 혐오, 배제, 차별을 합리화시켜 버리고 남성우월주의를 마치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것처럼 만들어버린 인간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으로서 나도 수치를 느낀다. 먼 과거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성 차별은 존 파이퍼 같은 유명한 목사들에 의해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왕성하게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재미난 사실은, 이렇게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여성을 차별하는 기독교 리더들도 자신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서의 근거는 그 자신이나 그가 속하고 자라온 교단이나 전통이 부여한 편향적인 해석에 불과할 뿐 하나님이 직접 지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해석을 진리로 착각하고, 또 전통성이 그것을 진리로 만들어줄 것처럼 여기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분명 반성과 회개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교적 남성 우월주의가 진하게 묻어있는 기독교에 마음과 생각이 물들어있을 것이므로, 이 책을 꼭 한 번쯤은 읽어보길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본인이 은연중 가지고 있을, 여성이 '자연스럽게' 배제된 기독교 신앙이 과연 진정한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과감하게 던져보길 바란다. 강남순 교수도 지적했듯,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양립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선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생각해야 비로소 본 질문에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영점 위치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페미니즘이 어떻게 생성되고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배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용도로도 읽힐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눈과 일체가 되어버린 가부장적인 색안경의 실체를 인지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찰해보며 스스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조금이라도 수정이 가하면서 읽을 때, 아마도 이 책의 저자, 강남순 교수의 목적과 바람이 절반 정도는 성취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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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아담의 역사성 논쟁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존중과 배려로 다름의 향연을

아담의 역사성 논쟁 | 데니스 O. 라무뤼 외 | 새물결플러스 | 2015

 

김영웅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이나 갈등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인류의 기원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자연스럽게 아담이란 존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자칫 발칙하거나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 의문은 기존에 아무 의심 없이 가지고 있었던 우리들의 믿음과 확신을 재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인류의 기원이 기록되어 있다고 보는 창세기 앞부분을 무언가 놓친 게 있나 스스로 반신반의하며 수없이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그 부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직접 능동적으로 찾아보기도 합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 순간이 기존 교회 안에서 담을 수 없었던 기독교 영역을 처음으로 접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늘 수동적인 자세로 목사를 통한 성경 해석을 주입 받아왔던 분이라면, 아마 이때가 처음으로 교회 안에서 말해주지 않거나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이슈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세상에는 정말 다양하고 다채로운 성경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유일한 진리처럼 믿어왔던 지식이 그저 다양한 해석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더욱 커다란 기독교 세계를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평안히 잠자고만 있던 자신의 신앙이 안일하고 편협했으며, 순수하다고 믿었으나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아담의 의미를 인류의 기원 측면에서만 고민하다가 멈추게 된다면 (물론 이런 고민은 블랙홀과 같아서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멘탈은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채 오히려 전에 없던 활기찬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다행인지도 모르죠) 이러한 고민이 보통 인류의 기원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에게도, 바울에게 그랬듯, 구약 성경만 있었다면 적어도 멘탈이 붕괴되는 고민까진 직면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창세기가 포함된 구약만 있는 게 아니라 신약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예수만 있는 게 아니라 바울도 있습니다. 또한 원죄 개념을 강력히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예정론을 언급한 칼빈도 우리에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는 장로교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 중 단 1% 정도가 장로교라고 하는데 말이지요 (그 중의 절반이 한국에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팩트체크 필요하겠지만요). 이러한 불행 (다행?)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편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조성했으며, 급기야 이는 누군가에겐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골치거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골치거리의 근원은 아담과 예수를 연결시킨 바울의 언급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한 사람’에 대한 부분은 첫 번째 아담 뿐만이 아닌 두 번째 아담이라고 알려진 (실제 “두 번째 아담”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단, “두 번째 사람”이라는 말이 고린도전서 15:47에 나옵니다. 아담이란 뜻이 사람이기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이긴 합니다) 예수의 존재 이유까지도 재고하게 만듭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기원과 그 해결책에 관한 부분이지요 (각각이 아담과 예수를 대변합니다). 이로써 우린 마침내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건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무방비 상태로 돌연히 노출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의미를 인류의 기원 문제와 연결시키다가 얼떨결에 시작된 블랙홀의 끝이 예수의 대속을 향하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특히,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성경 전체를 해석해내는 방법에 익숙한, 복음주의권 (그 중에서도 칼빈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 장로교)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으며 개인의 신앙과 믿음을 구축했던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 아담으로 인한 원죄사건과 그 결과로 인한 인간의 타락, 죄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의 태어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한 구속, 즉 창조-타락-구속의 플롯이 모든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아담의 존재 유무는 자칫 기독교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위험인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복음주의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원죄개념과 죄의 전가를 핵심교리로 여기지 않는 기독교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아담의 역사성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가지지 않겠지요. 그래서 이 글에서 '우리'란 한국 장로교를 포함한 창조-타락-구속 플롯을 받아들이는 복음주의권에 속한 기독교인을 지칭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른 것 같은 참담한 멘붕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린 과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책은 이러한 질문을 이미 던져보고, 그로 인해 인생을 건 치열한 고민을 거쳐 정립된 네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의 입장을 보여줍니다(각 입장을 대표하는 네 명의 학자들은 모두 복음주의자들입니다). 과연 아담은 실제 역사적 인물일까요, 아님 어떤 상징을 나타내기 위한 고대 근동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상 속 인물일까요? 아담은 과연 첫 번째 사람이자 인류의 조상일까요, 아니면 죄가 세상에 들어온 시점의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에 불과할까요? 아담은 과연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그렇듯, 정자와 난자의 수정에 의해 태어난 게 아니라, 정말 초자연적인 방법, 즉 흙으로 빚어지고 유아 단계를 건너뛴 채 곧장 성인으로 만들어졌던 것일까요(de novo creation)?


물론 성경 본문은 이런 질문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혹은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 어떠한 대답도 명확히 내놓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그저 여러 단편적인 성경 구절들과 고대 근동 지역의 과학과 세계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성경 해석과 신앙고백, 그리고 기독교 교리 등에 의거하여 추측할 뿐입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각 시대에 관점들은 모두 정치적이고 어쩌면 폭력적일 수도 있었을 힘의 영향 아래에서 정립되었다는 사실도 우린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이 책 역시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대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력하게 호소하지만, 그 어떤 입장의 해석도 참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결코 한 입장만을 옹호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빨려 들어갈 정도로 탄탄한 논리를 가진 입장이라 해도 해석은 해석일 뿐, 결코 그것이 진리의 자리를 꿰차진 못합니다. 저는 어떠한 해석을 받아들이든 본인의 신앙이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어떠한 입장을 가진다 하더라도 어느 부분에선가는 논리의 모순이나 비약을 감행하거나 무시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입장을 비하하거나 혐오하거나 배제하며 싸움질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밑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네 가지의 입장을 조화롭게 수평적인 관계에서 다루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한 입장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다름이 다름으로 존재할 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단, 어떤 한 입장이 내세우는 힘의 논리에 의해서 다름이 틀림이나 혹은 악으로 규정되고 제거 대상으로 발전하게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자신이 열심히 연구해온 입장을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의 네 가지 해석 모두 논리적 완전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거기엔 자신의 시간과 열정, 다시 말해 자신의 인생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자의 입장이 조목조목 반박되어질 때면 자신의 자아가 마치 부인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감정 섞인 논쟁의 장면을 볼 때면 솔직히 제 삼자이자 독자에 불과한 저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났을 정도였답니다. 이미 논리의 영역을 이탈하여 오감을 가진 인간으로서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책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논쟁도 그 표면상의 이유는 논리와 근거 부족이지만, 사실 그 이면엔 그것들보다 더 큰 문제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자아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논쟁에서 이성만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감정이 섞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논리로 시작, 진행, 결론지어져야 했을 논쟁이 결국엔 비논리를 불러오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건 결국 그들도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대표하는 배릭 교수 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세 학자의 입장에서도 전적인 동의가 되어지진 않았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진화적 창조론'의 대표인 라무뤼 교수의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부분에서, 저는 그의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왜 굳이 역사적 아담이 존재하지 않았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월튼 교수의 '원형적 창조론'에서는 '이것이 맞지만 저것도 틀린 건 아니다'라는 모호한 논리에 그만의 확실한 색깔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굳이 역사적 아담이 존재해야만 하는가?'하는 질문에서 명징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콜린스 교수의 '오랜 지구 창조론'의 입장에서는 '왜 굳이 유신 진화론을 거부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저는 끝내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네 가지 입장과 그들의 논쟁을 모두 지켜본 전직 교수이자 현직 목회자인 그레고리 A. 보이드 목사의 입장이 저로선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역사적 아담이 있든 없든, 우리의 믿음은 안전하다' 라고 압축할 수 있는 그의 입장에서 저는 존중과 배려가 깃든 예수의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린 어느 한 입장을 고르고 그 입장을 변호하는 투사가 되어야만 할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 입장이 연구를 할 필요도 없다거나, 다른 입장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름에 열린 자세를 가지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 길은 결국 교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름을 다름으로 존중해 주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한 입장의 더 탄탄한 논리를 구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놓쳐왔던 건 어쩌면 그런 자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진 각 입장이 서로의 논리적 결함을 찾아 비방하기도 하고 자신의 입장이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하는 단계에 있지만, 언젠가는 다른 해석들이 모두 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채 어떤 입장을 취하든 전적인 개인의 자유에 맡기고 혐오와 배제 대신 존중과 배려의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