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3회 콜로퀴움은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라는 주제로 더처치 교회비전센터에서 지난 3월 18일에 진행되었다. 발표자는 숭실대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였고, 대담자는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의 최승언 교수, 사회자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의 우종학 교수였다. 이 날 발표자 이용주 교수는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Ⅱ(새물결플러스/2018) 중 창조론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 세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활동으로 존재하게 된 피조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과학적 진술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강의했다. 1부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봤다. 

 

 

글_ 심기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자연의 사물들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가 직접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야 우리가 알 수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알려주시는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방식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흘러가고 이 세상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려주신 방식에 집중할 때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할 때만 기독교적 신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기독론적 집중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믿는 유일신과 유대교, 이슬람에서 믿는 유일신론은 좀 다르다. 한 하나님이 그냥 하나가 아니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하나님 한 분 안에서 하나의 신성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알려주셨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 세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것이 조직신학이 다루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관계 맺으면서도, 자신과는 구분 짓는 그 독특함에 굉장히 주목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두려운 주님이나 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빠’라고 굉장히 친밀하게 칭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이 아니야(요18장)’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구분 지으셨다. 즉, 나사렛 예수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 꼭 성령이 함께 하신다. 잉태하실 때도 그렇고, 세례 받으실 때도 그렇고 항상 함께 하셨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다 보면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사건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 세 인격들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심층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세 인격들은 하나님의 인격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들이다.”

 

초대교회 혹은 고대 교회 때부터 삼위일체 신앙이 교회 안에 고백되고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는 무슨 뜻인가? Trinity라는 것은 tri + unity이다. 세 분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다는 뜻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힘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관계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인격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라는 신성이 구성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한 분 안에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있어서, 이 인격들이 서로 다른 행동들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안 하시는 분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에 익숙하다 보니 보좌에 앉으시고 높으신 왕의 이미지에 익숙하다. 마치 ‘착한 타노스’의 느낌이다. 앉아서 멀리 계신 느낌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서로서로가 존재하게 해주는 상호의존적인 활동을 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아들이 아닌 인격체가 되고, 아들은 ‘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아버지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하는 활동을 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 가운데 띠로써 연합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사랑의 띠다.’라고 교회는 오래전부터 얘기해왔다.

 

따라서 ‘일체’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사랑의 활동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삼위’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서로서로 구분되는 독립적인 자유로운 활동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상 ‘나와 다른 존재(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활동을 하는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고, 이를 기독교적 용어로는 ‘사랑’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존재와의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관계 가운데 자유롭게 일하신다. 이 자유는 나를 위한 자유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자유다. 따라서 아들은 이 자유를 아버지를 위해 씀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여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한다. 즉, 아들은 자신의 사랑 활동을 아버지를 위해 하고, 아버지도 역시 아들을 위해 이 자유를 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즉, 관계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는 분’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창조해야만 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체로 관계 가운데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셨고, 그 관계는 완벽한 관계였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반드시 만드셔야 했던 것이 아니고, 무한한 자유 속에서 만들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발성을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함”이라고 정의하면, 이 세계의 우발성은 곧 세계를 창조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사람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이용주 교수님


* 이번 달에는 3월 콜로퀴움에서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에 대해 강의해주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삼위일체론과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에 대해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이 | 이용주 교수
인터뷰어 | 우인, 심기주
사진 | 심왕찬
글 | 심기주


Q: 먼저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여러 설명을 하는데,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A이건 판넨베르크의 설명은 아니고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될 때 다 나왔던 질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 이게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신념인데 교회 안에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은 ‘아들은 아버지의 첫 번째 피조물이지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그 후대 분들이 논쟁 과정에서 정리를 이렇게 했어요‘시간 안에서 아버지(성부)가 아들(성자)을 낳으신 게 아니다. 영원 가운데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고백인 거죠. 이 때  ‘영원은 인간이 생각하는 유한한 시간의 선후관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무시간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더 나올 수 있는 것이 “어떻게 성부가 성자를 낳았지?라는 것이죠. 이 의미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요. 아버지는 아들 없이 계시지 않고 아들은 아버지 없이 계시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야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낳아야 아들이 있죠. 그래서 상호의존적입니다. 여기에 성령까지 해서 세 인격들의 작용과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단일한 신성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틀거리입니다.

 


Q: 하나님이 영원 속에 계시다는 게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신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영원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 더 알려주세요.

A하나님의 영원을 시간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현재(presence)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하신다는 거죠. 과거 안에도 현재로 계시고, 현재에도 현재로 계시고, 미래에도 현재로 계시는, 영원히 현재하시는 분인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시간 양태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고, 시공간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설명에 패러데이의 장이론을 매개체로 사용하는데, 흘러가는 시간구조 안에 하나님이 영원으로 내재하신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충족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현재 가운데 계신다면, 이 세계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인과율적 법칙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오는 뭔가 새로움의 장으로서 현재가 존재할 수 있지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 역시 새로움이 밀려 들어 오고 있는 장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이 세계에 새로움이 출연하는 통로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며 성령이신 하나님이 세계 안에 계시면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작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과거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원인과 결과들만으로는 포섭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사건들이 역사 안에 출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Q: 판넨베르크가 패러데이의 장이론을 이용해서 성령의 일하심을 설명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장이론이 조직신학에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적용돼요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입니다우선 페러데이 장이론에 대해 판넨베르크가 설명하는 것을 제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기존 고전물리학에서는 물체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말합니다예를 들어해가 없어도 지구는 존재한다는 것이죠그런데 장이론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물이 에너지 장 위에 있다고 말합니다그리고 에너지가 어떤 특정한 조건 하에 구체화되면 그것이 사물로 나타난다고 말하죠

이것을 삼위일체론에 적용하면 장점이 있는데요우리는 보통 삼위일체론에서 세 인격들이 실체론적으로마치 당구공 세 개가 따로 있듯이세 인격도 각각 따로 있는 것처럼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세 인격이 하나인지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요그런데 장이론을 가지고 보면 세 인격들은 하나의 단일한 신성이 구체화되어 나타내는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패러데이의 장이론은 “성령이 어떻게 피조세계 가운데서 내재해서 일하시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피조세계에 내재해 있으면서 특히 생명의 근원으로서 생명을 촉발시키는 존재죠이 때영이 피조세계에 계시면서 어떻게 창조자로 활동하시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마치 패러데이의 장이 모든 사물들의 근원인 것처럼 하나님의 영도 모든 피조물의 근저에서 기본적으로 작용하신다는 것으로 설명을 해요그래서 ‘그 영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내재하시면서 존재의 근원으로 활동하신다그리고 그 영의 작용을 통해서낮은 수준의 피조물(무기체)로부터 유기체의 진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이 전체 창조의 과정이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으로 가도록하나님이 직접 창조자로 계속 활동하고 계시다’라고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패러데이의 장이론이 쓰인다고 할 수 있죠.

 

 

Q: 많은 성도들이 현대 과학의 성과와 성서의 내용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고 인지부조화 상태에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신학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신학의 문제일 수도 있고, 목회자의 문제이기도 해요가장 큰 문제는 신학과 교회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거기에는 신학자의 나태함이 분명 있을 수 있지만, 목회자의 불성실함도 있다고 봐요. 목회자들이 지적 활동에 대한 고민이 많이 있나요?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 설교강단에서 성도들과 얼마나 공유하고, 교회신앙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어요. 노력은 하시겠지만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에요. 또 다른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자면, 목사후보생들이 쓸데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한다는 거예요. ppt 만들고, 컴퓨터 하고, 노래도 잘해야 하고, 운전도 잘해야 하죠.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생계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무언가 일들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이런 것들을 강요해온 시스템이에요. 따라서 목사후보생들이 신학적 고민, 학문적인 고민을 할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인을 탓하자는 게 아니고, 어느 교단이나 큰 교회들이 후속세대를 기르는데 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개교회 차원에서는 투자를 하지만 전체교회 차원에서 하지 않습니다. 크게 보자면 이런 것들이 먼저 개선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목사후보생들이 좀 더 진지한 신학적 질문을 해서 이것이 책에만 갇혀있지 않고 교회현장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이것이 잘 되지 않아요.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문제입니다. “다들 그렇게 가르쳐서 그런 줄 알았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한국 평신도들이 그렇게 수준이 낮지 않습니다. 전문직인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교회에서 터무니 없는 소리가 오갈 때 이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그냥 입닫고 있어요. 쉽게 말하자면, 창조과학 같은 것을 교사대학에서 한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걸 다 받아들이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만히 있어요. 왜 그럴까요? 담임목사님을 존경해서 그럴 수도 있고, 교회 안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혹은 이야기함으로써 얻는 불편함보다 침묵하면서 얻는 이익이 더 커서일 수도 있고,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에 대해서, 교회 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좀 공론화해서 얘기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많아지면 그런 점도 자연스럽게 개선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오늘날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A: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고, 그 아들의 행위는 성령의 활동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로써 아들과 성령이 함께 아버지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함께 세 인격이 일하시며, 그래서 하나의 단일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구현되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계의 창조주시라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자칫 잘못하면 과학의 최신 성과들을 신학화하는 데에 급급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정작 신학적 내용을 상실할 우려도 있는데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잘 맞추면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현대적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 판넨베르크를 통해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또 과학이 실제 세계에 대한 유일한 해명 방식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적어도 세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 층위, 하나는 생물학적 층위, 하나는 인격적 층위인데 자연과학은 물리적 층위에 대해서 말할 뿐, 나머지 두 층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진화과학 같은 경우는 생물학적 층위에 관심이 있겠으나, 이들도 역시 자칫하면 인격적인 것, 인간의 도덕성, 사회성, 종교성 등(인격적 층위)을 생물학적 층위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근본적으로 강하죠. 따라서 “너무 이 이야기에만 집중 하다보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얘기인 ‘인격체로서 인간이 함께 더불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 낼까’하는 관심을 놓쳐버리고, ‘창조과학을 비판하거나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 것이 마치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제대로 구현하는 듯한 그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지금 그러고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성경은 ‘다윈이 왜 틀렸는지 혹은 아닌지’에 별로 큰 관심이 없어요하나님은 자유롭게 사랑하는 분이고, 관계 안에서 사랑하는 분이 우리를 자기와의 관계 안에 놔 주셨고, 우리를 상호 간의 관계 가운데(인간 간의 관계,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가운데) 서로를 자유롭게 사랑하는 그 사랑의 사귐이 충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고 거기에 부합하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가장 큰 과제일 것 같습니다. 신학의 가장 큰 과제도 그것일 것 같고요


* 정말 친절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인터뷰에 적극 참여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콜로퀴움에서 뵙겠습니다.


* 제13회 과신대 콜로퀴움 안내_ https://www.scitheo.org/317


posted by 과신대 기자단

과신대와 함께 하는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
과신대 사람들



2018년 8월 29일 서울신학대학교 정문 앞 카페 '이유'에서 과신대 자문위원이신 박영식 교수님(서울신대 조직신학)을 만났습니다. 최근에 『창조의 신학』(동연)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그 책의 내용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이 많아 두 번에 나눠서 소개합니다. 

인터뷰어 | 최경환
인터뷰이 | 박영식
사진/글 | 심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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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안녕하세요, 박영식 교수님.


[박영식 교수 (이하 박)]
안녕하세요.


[과] 직신학의 주제가 여러가지인데, 그중에서도 창조에 원래 관심이 있으셨나요?


[박] 창조에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해도 거짓말인  같은데... 모르겠어요. 제가 이전에 야후 블로그를 운영했는데 그때도 제목이 창조, 생명이었거든요. 창조라고 하는 것이 저에겐 이상하게 중요한 주제였고, 독일에서 공부하면서도 창조라는 주제가 막연하게 성서 안에 있는 내용, 옛날 내용이기보다는 실생활에 가깝게 생각되었던 같아요.


[과] (이번에 새로 내신)  앞부분에 그런 부분이 나오더라고요. '성경을 읽거나 기독교 신학을 구성할 구원이나 구속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창조는 오히려 굉장히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도 창세기 1-2장에만 잠깐 반짝이는데, 사실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런 얘기를 하셨던 같아요. 부분을 조금만 설명해주실 있나요?


[박] 저도 항상 우리 한국교회와 관련해서 질문하는 것들이 "타종교는 구원받느냐, 구원은 무엇인가"이고, 설교도 구원에 초점을 놓고 하지 창조를 갖고 설교하는 경우는 이상하게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의외로 성경에 창세기 1-2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요한 주제가 창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성경은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게 되는 책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끝나거든요. 창조의 시작과 창조의 완성이랄까요. ‘창조의 거대한 구도 속에서 성경이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더라도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는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개신교 전통에서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창조를 거의 설교하지 않으니 그런 살리는 필요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봤을 때, 창조를 단지 옛날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고, 마치 우리 책의 서문 같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문이 있고, 1, 2 전개가 때, 서문이 다른 모든 부분을 커버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물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성경 그런 구성에서 읽어볼 있지 않을까,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가장 첫 단계, 출애굽기가 다음 단계, 이렇게 읽어나갈 것이 아니라, 사실 1 안에 성경 전체 하나님의 스토리와 히스토리가 포괄된 구조로 봐도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죠.


실제로 제가 어디가서 창조 설교를 하면 낯설다고 해. 간혹 규모 있는 교회에 가서 창세기 놓고 설교를 하면 이렇게도 설교하시네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고, 많이 낯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그냥 경험상으로도 창조 자체가 구원 이런 것보다 한국 교계에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과신대나 이렇게 과학 대화할 조금 관심이 있지 신학 전반적인 주제로서 관심사는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과]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일단 우리가 창세기부터 시간순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우리의 관심이 온통 그럼 처음에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처음에 뭐가 있었어?” 이런 거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우린 자꾸 실증주의적이고 과학주의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보니까 뭔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거랑 핀트가 맞는 거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아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뭔가요?


[박]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서 풀어야 하는데, 흔히 말하는 창세기 1 이쪽 배경은 바벨론 포로 시기라고 보고, 나라를 잃고 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질문을 던졌을 겁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도 여러 자료들을 활용하잖아요. 영화, 소설 . 마찬가지로 저는 성경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경험 세계 속에서 알고 있던 자료들, 바벨론 창조신화라든지, 이런 것들을 갖고 거죠.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의 없던 창조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고, 성서신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미 이스라엘의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었으나 고백할 있는 폼을 거기서 갖고 오되, 똑같이 갖고 오는 것이 아니라 비틀어서 자기들의 신앙을 거기에 담아서 표현했다는 거에요. 마치 목사님들이 설교할 드라마를 갖고 오면 드라마를 전달해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설교에 이용해서 설교 내용을 전달하는 것처럼 말이죠


창세기 1장이 그런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역사적 상황에서는 우리의 관심사처럼 옛날 옛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바벨론의 포로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질문이 중요한 것이죠.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나오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것이 바로 포로 상황에 있는 자신들의 상황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은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여기서 물이라는 위험을 뜻하는 상징인데, 고대 근동에서, 노아 홍수도 그렇고, 예수님도 위를 걸으셨고, 계시록에 보면 새창조 바다가 사라져버려요.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항상 위험요소였는데, 바로 그런 수면 위에 하나님은 운행하신다는 겁니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활동하고 계신다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이 어둠 가운데서 빛을 비추신다. 이게 인간의 어떤 실존적인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 가운데서 아무것도 전망이 없는, 한치 앞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해 내시고 어둠을 가르시고. 다음에 아무 것도 디딜 없는 실존의 공허함 속에서 디딜 땅을 허락해주시고. 바다를 걷어내고. 디딜 땅을 주시고. 그리고 각각의 삶의 공간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생명을 안에 집어넣잖아요. 이런 역동적인 그림들을 그리면서 우리는 "지금은 이런 어둠 속에 혼돈 속에 공허 속에 있지만 하나님이 결국 새로운 삶의 공간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런 명령까지 주신다"는 것을 있습니다. 삶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창세기 1장의 메시지라는 겁니다 메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성서의 창조의 이야기는 이러한 관점에서 반복되죠. 마치 출애굽의 이야기가 구약에서 계속 출애굽을 회상하면서 '기억하라' 하면서 출애굽의 동기가 반복되듯이 창조의 동기도 구약에 계속 반복됩니다. 시편에도 나오고, 이사야서에도 나오고. 이렇게 창조에 대한 동기를 계속 반복하는 창조와 구원의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하는 겁니다. (지금 한국 교계에서는 )우리는 구원만 얘기하고 창조는 조금 내려놨는데 창조라는 패러다임 속에 사실 구원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으시고 새로운 공간을 열어놓으시고, 그런 관점에서 읽어야 된다고 보고요. 그런 관점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타당하다고 봅니다


성서의 창조의 얘기는 창조의 과거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미래를 지시하는 것이에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미래가 2천년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제 앞으로 펼쳐질 미래라는 거죠. 바로 지금 하나님 때문에 새롭게 열릴, 창조될 미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자꾸 고고학적인 질문 등을 하는데, 그런 쪽으로 가는 성서의 원래적인 의도와는 다르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냐,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냐'의 문제인데요. 어거스틴 이후로 교회 전통에서 무로부터의 창조가 정립되었는데, 또 오늘날 성서학자들이 성서를 보니깐, '땅이 혼돈하고' 등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걸 양자택일 구도로 보는데, 사실 같은 거라고 본거에요. 삶의 관점에서 보면 극심한 혼돈 속에서는 무를 경험하거든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거에요. 자기한테 이상 디딜 땅이 없는 거에요. 자기 존재도 사실 무화가 되고. 자기 존재도 한없이 가엾고 의미 없는 존재로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실존적인 해석이죠. 무에요. 그러나 동시에 혼돈. 혼돈과 무로부터의 창조. 서로 양자택일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 속에서 동일한 체험이고. 어쨌든 성서는 교리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나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중요한 아니라 하나님은 거기서 창조하신다는 거죠. 그런 메시지가 로마서로 가면 죽은 자를 살린다. 없는 있게끔 한다. 그런 역동성과도 연관이 되죠.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연관이 있고,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미래와도 연관이 되는 거죠. 이렇게 사실 창조의 모티브는 과거에 갇혀 있는 아니라 끊임 없이 생동하고 실제론 우리의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로 읽을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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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람들 (12) 박영식 교수 (2)에서 계속.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