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Q] 4. 창세기 1장을 비유로 읽으면 소설이 되는 거 아닌가요?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며 높은 권위를 부여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막상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하거나 배운 적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을 읽는다는 건 하나님이 우리 귀에 대고 속삭여 주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문자로 기록된 글이며 모든 글은 나름대로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문학적 표현들이 들어 있고 고대 근동의 상식과 세계관이 담겨있습니다. 편평하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지구, 해와 달과 별들이 들어있는 궁창, 궁창 위에 물층, 그리고 그 위에 신의 자리가 있다는 당대의 상식은 창세기 1장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런 고대의 우주관은 성경이 가르치려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 내용들은 단지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을 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창세기 1장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지 말라는 구약학자들의 조언을 들려주면, ‘그럼 창세기 1장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책이 아니고 단지 소설에 불과한가?’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비유나 과장법, 혹은 문학적 표현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오래전에 폐기 처분한 고대 근동의 상식과 우주관도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를 그저 소설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린다면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성경을 소설이나 허구로 읽는 것도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비유는 사실을 허구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화를 들어볼까요? 옆집 친구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온 다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와 대화를 나눕니다.

 

“누가 그러는데 엄마는 내 친엄마가 아니래. 엄마가 나를 낳은 거 맞아?”

“그럼, 친엄마 맞지. 내가 너를 낳았지.”

“진짜로 낳은 거 맞지? 어떻게 낳았어?”

 

잠시 고민하던 엄마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너를 배꼽에서 낳았지. 친엄마 맞단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의심을 거둡니다.

 

도킨스와 창조과학자가 이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도킨스가 먼저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아기는 배꼽에서 나올 수가 없단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이 여인은 너의 친엄마가 아님이 분명하다.” 창조과학자도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도킨스의 말에 흔들리면 안 된단다. 엄마가 너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니? 배꼽으로 너를 낳았다는 말이 믿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엄마를 신뢰하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아기를 낳는 방법일까요? 배꼽의 중요성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는, 내가 너의 친엄마라는 사실입니다.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수준에 맞게 배꼽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썼을 뿐입니다. 배꼽으로 아기를 낳았다는 표현이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해서, 엄마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의심해야 할까요? 반대로 배꼽으로 낳았다는 말을 비유로 이해하면 친엄마라는 사실도 허구로 전락하게 되는 걸까요?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서, 아기가 배꼽에서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친엄마가 맞다는 엄마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고 폐기 처분해야 할까요?

 

창세기 1장이 그렇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히브리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창세기 1장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하였고 그들에게 익숙한 상식과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를 이해하듯,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임을 알려주는 것이 창세기 1장의 목적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우주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고대 근동의 히브리인들에게 누가 창조주이며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비유를 비롯한 다양한 문학적 표현과 더불어 현대 과학과는 맞지 않는 고대 근동의 상식과 세계관이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과 맞지 않는 표현들이 담겨 있다고 해서, 창세기 1장을 허구라고 판단한다면 배꼽 때문에 생모를 버리는 격입니다.

 

비유와 같은 문학적 장치나 고대 근동의 상식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서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과연 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제한된 세계관과 이해를 가진 고대 근동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알려주는 책이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비유 때문에 사실을 버리거나, 혹은 비유를 사실로 여기는 두 가지 실수를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비유는 사실을 허구로 만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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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3회 콜로퀴움은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라는 주제로 더처치 교회비전센터에서 지난 3월 18일에 진행되었다. 발표자는 숭실대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였고, 대담자는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의 최승언 교수, 사회자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의 우종학 교수였다. 이 날 발표자 이용주 교수는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Ⅱ(새물결플러스/2018) 중 창조론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 세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활동으로 존재하게 된 피조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과학적 진술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강의했다. 1부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봤다. 

 

 

글_ 심기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자연의 사물들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가 직접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야 우리가 알 수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알려주시는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방식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흘러가고 이 세상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려주신 방식에 집중할 때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할 때만 기독교적 신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기독론적 집중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믿는 유일신과 유대교, 이슬람에서 믿는 유일신론은 좀 다르다. 한 하나님이 그냥 하나가 아니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하나님 한 분 안에서 하나의 신성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알려주셨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 세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것이 조직신학이 다루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관계 맺으면서도, 자신과는 구분 짓는 그 독특함에 굉장히 주목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두려운 주님이나 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빠’라고 굉장히 친밀하게 칭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이 아니야(요18장)’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구분 지으셨다. 즉, 나사렛 예수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 꼭 성령이 함께 하신다. 잉태하실 때도 그렇고, 세례 받으실 때도 그렇고 항상 함께 하셨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다 보면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사건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 세 인격들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심층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세 인격들은 하나님의 인격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들이다.”

 

초대교회 혹은 고대 교회 때부터 삼위일체 신앙이 교회 안에 고백되고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는 무슨 뜻인가? Trinity라는 것은 tri + unity이다. 세 분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다는 뜻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힘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관계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인격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라는 신성이 구성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한 분 안에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있어서, 이 인격들이 서로 다른 행동들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안 하시는 분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에 익숙하다 보니 보좌에 앉으시고 높으신 왕의 이미지에 익숙하다. 마치 ‘착한 타노스’의 느낌이다. 앉아서 멀리 계신 느낌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서로서로가 존재하게 해주는 상호의존적인 활동을 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아들이 아닌 인격체가 되고, 아들은 ‘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아버지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하는 활동을 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 가운데 띠로써 연합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사랑의 띠다.’라고 교회는 오래전부터 얘기해왔다.

 

따라서 ‘일체’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사랑의 활동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삼위’라는 것은 세 인격들이 서로서로 구분되는 독립적인 자유로운 활동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상 ‘나와 다른 존재(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활동을 하는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고, 이를 기독교적 용어로는 ‘사랑’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존재와의 관계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관계 가운데 자유롭게 일하신다. 이 자유는 나를 위한 자유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자유다. 따라서 아들은 이 자유를 아버지를 위해 씀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여 아버지가 아버지 되게 한다. 즉, 아들은 자신의 사랑 활동을 아버지를 위해 하고, 아버지도 역시 아들을 위해 이 자유를 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즉, 관계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사랑의 사귐 가운데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는 분’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계를 창조해야만 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체로 관계 가운데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셨고, 그 관계는 완벽한 관계였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반드시 만드셔야 했던 것이 아니고, 무한한 자유 속에서 만들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발성을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함”이라고 정의하면, 이 세계의 우발성은 곧 세계를 창조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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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 : 31)

 

이문원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과신대 자문위원)

 

 

성경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 태양, 지구, 달 등 천지들을 만드신 후, 그곳에서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지구환경을 마련하시고 매우 만족해하셨다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태양계를 비롯해서 우주에서 생명현상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주의 지구를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생명체의 존재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지구가 생명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천체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 오직 지구행성에만 인간을 비롯해서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인류의 삶터인 지구가 어떻게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를 지질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지구 크기와 위치의 절묘함

 

우주의 천체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데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의 존재 여부이다. 지구는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액체상태의 물이 풍부한 행성이다. 그래서 지구는 수구(水球)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합할 때도 있다. 지구가 많은 물을 갖게 된 것은 물의 특성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구의 크기와 지구의 위치 등 두 요소이다. 만약 태양계에서 지구 크기 및 위치 중, 어느 하나라도 지금과 다르게 되었다면, 지구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며, 당연히 다양한 생물이 존재할 수 없는 행성이 되었을 것이다.

 

지구의 위치와 크기는 지구가 태양에너지와 지구 내부 에너지를 받으면서 긴 지구 역사를 거쳐 오늘의 모습으로 바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태양계가 형성될 때, 지구가 그 크기와 위치로 정해진 것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절묘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부가 뜨거운 지구 행성

 

지구의 크기는 지구내부에너지 양을 정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태양계의 지구형 행성인 수성, 금성, 지구, 화성중에서 지구는 가장 크다. 지구의 핵 부분은 태양표면 온도 정도로 높으며, 중간 부분인 맨틀은 암석물질이 녹을 정도이다. 뜨거운 지구내부에서 에너지가 지표로 나올 때, 단단한 껍질인 지각판이 움직이면서 지진, 화산, 그리고 속도가 매우 느리지만 높은 산맥과 깊은 해구의 형성과 같은 자연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지구 활동은 생명체들에게는 위협적인 사건이지만,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지구환경이 만들어지는 데 절대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지구에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은 지각판의 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태양계의 여러 행성 중, 지진, 화산 및 조산운동 등과 같은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행성은 지구뿐이다. 지구가 오늘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긴 지구역사 동안 단단한 지구 껍질인 지각판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바다와 육지의 분포를 바꾸고, 그에 따라 해류가 바뀌고, 지역의 기후도 바뀌면서 다양한 생물종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해 왔다.

 

한편 지구내부 에너지는 풍부한 원소와 광물질을 운반할 수 있는 마그마를 만들고 운반하여, 인류에게 산업에 필요한 다양한 광물질을 제공하고 있다. 인류는 마그마가 운반해 온 자원을 이용하여 문명을 발전시켜왔으며, 앞으로도 그 자원을 계속 이용할 것이다. 또한 지각판의 이동은 지구 껍질을 바다와 육지로 나누고, 대륙 위에서 토양의 생성을 돕는다. 토양은 많은 생명체에게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하며, 지구행성에만 있는 물질이다.

 

 

 

생명체를 보호하는 몇 겹의 막

 

지구 생명체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막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 인간은 어떤 막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우리 몸은 피부로 싸여 있으며, 피부는 옷이 덮고 있고, 집이라는 막 속에서 여러 보호를 받고 있다. 집을 나온 인간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 오존층, 자기장 등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막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러한 여러 막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의 생명은 심하게 위협을 받을 것이며, 아마 지구에서 계속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지구 밖에서는 달과 목성과 같은 천체가 지구와 충돌할 수 있는 천체를 막아주는 보호막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지구에 생명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은 지구의 크기와 위치가 정해진 후, 지구가 긴 역사를 거치면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다. 지구는 태양계가 형성될 때, 다른 행성들과 함께 만들어질 때 초기 모습은 오늘날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지구 초기에는 오늘날과 같이 대기, 바다도 그 구성성분이 달랐고, 대륙의 위치와 모양도 달랐다. 물론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지구행성이 태양에너지와 지구 내부 에너지를 받으면서, 긴 시간을 지나며 오늘처럼 지권, 수권, 기권 및 생물권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행성으로 변화해 왔다. 초기 생성이 오늘의 지구 모습으로 변화하는 속도는 일정하지 않았으며, 여러 번의 급변적인 변화가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구에 생명체가 등장하는 시기를 지나면서 지구는 다양한 생명체가 번성할 수 있는 오늘의 모습으로 바뀌며, 가장 후반에 인류가 등장하는 천체로 바뀌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행성의 환경을 이해하는 데는 지구의 크기, 위치 그리고 시간 등의 요소가 서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세 요소는 지구환경을 변화시키는데 서로 영향을 주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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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정대경 박사

 

2017년 초부터 과신대 연구모임에 참여해서 자연과학, 철학, 신학의 다양한 전공 교수님들과 “자유의지,” “뇌과학과 인간” 등에 관한 논문과 책을 같이 읽어왔습니다. 올 3월부터는 1년 반 정도의 커리큘럼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과학과 신학 학제 간 연구 업데이트를 시작합니다.

 

그 일환으로 지난 모임에서 Peter Harrison의 기포드 강연 출판물인 “The Territories of Science and Religion” 챕터 1과 2를 읽고 토론했습니다. 해당 챕터들에서 해리슨은 현대인들이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와 “과학"이라는 개념들이 지금의 방식대로 이해되어온 역사가 길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종교와 과학 사이 갈등이라는 것이 원칙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두 학제 간 갈등이라는 것이 실상 “과학”과 “종교”라는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해리슨은 고대로부터 종교와 과학이라는 개념들이 실제로 어떻게 이해되어 오는가를 탐구합니다.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소위 종교(신학)와 과학(자연철학)이라는 학문적 태도가 고대에도 구분은 되지만, 두 학문적 태도 모두 존중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철학자와 과학자는 신학적 태도를 가지고, 신학자 또한 철학적, 자연과학적 태도를 가지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추구했다는 것이지요. 또한 그렇게 파악된 지식과 이해는 단순히 호기심을 채우는 것을 넘어 인간의 윤리적 태도 또한 고취하는 방향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이번 과신대 연구모임에서는 우종학, 박희주, 신희성, 황소현, 전진권, 장재호, 이성호, 정대경 박사님이 참석하셨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안타까운 지점은 종교현상이라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 텐데 (만약 종교라는 것이 폴 틸리히가 지적하는 방식대로 각 개인의 "궁극적인 관심과 그것에 대한 표현"이라면), 공적인 자리에서 의사 결정 등이 이루어질 때 관련된 정책이나 프로젝트의 종교적 의미 혹은 종교 윤리학 의미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참여가 독려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어와서 그렇겠지요.

 

박사논문을 지도해주셨던 교수님들이 신학자 혹은 신학적 윤리학자의 입장에서 나사 (NASA) 등에서 진행하는 자연과학, 과학기술 프로젝트에 참여해 그 프로젝트들에 관한 윤리적 의미, 신학적 의미 등을 종종 강연하시는 것을 참 부러워했던 적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신대 연구모임이 추후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 학제 간 연구 뿐만 아니라, 공적인 자리에서 자연과학, 과학기술 발전이나 정책결정 등에 있어 신학적, 종교적 의미 등을 풀어낼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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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람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이용주 교수님


* 이번 달에는 3월 콜로퀴움에서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에 대해 강의해주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삼위일체론과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에 대해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이 | 이용주 교수
인터뷰어 | 우인, 심기주
사진 | 심왕찬
글 | 심기주


Q: 먼저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여러 설명을 하는데,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A이건 판넨베르크의 설명은 아니고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될 때 다 나왔던 질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 이게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신념인데 교회 안에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은 ‘아들은 아버지의 첫 번째 피조물이지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그 후대 분들이 논쟁 과정에서 정리를 이렇게 했어요‘시간 안에서 아버지(성부)가 아들(성자)을 낳으신 게 아니다. 영원 가운데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고백인 거죠. 이 때  ‘영원은 인간이 생각하는 유한한 시간의 선후관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무시간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더 나올 수 있는 것이 “어떻게 성부가 성자를 낳았지?라는 것이죠. 이 의미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요. 아버지는 아들 없이 계시지 않고 아들은 아버지 없이 계시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야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낳아야 아들이 있죠. 그래서 상호의존적입니다. 여기에 성령까지 해서 세 인격들의 작용과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단일한 신성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틀거리입니다.

 


Q: 하나님이 영원 속에 계시다는 게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신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영원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 더 알려주세요.

A하나님의 영원을 시간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현재(presence)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하신다는 거죠. 과거 안에도 현재로 계시고, 현재에도 현재로 계시고, 미래에도 현재로 계시는, 영원히 현재하시는 분인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시간 양태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고, 시공간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설명에 패러데이의 장이론을 매개체로 사용하는데, 흘러가는 시간구조 안에 하나님이 영원으로 내재하신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충족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현재 가운데 계신다면, 이 세계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인과율적 법칙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오는 뭔가 새로움의 장으로서 현재가 존재할 수 있지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 역시 새로움이 밀려 들어 오고 있는 장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이 세계에 새로움이 출연하는 통로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며 성령이신 하나님이 세계 안에 계시면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작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과거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원인과 결과들만으로는 포섭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사건들이 역사 안에 출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Q: 판넨베르크가 패러데이의 장이론을 이용해서 성령의 일하심을 설명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장이론이 조직신학에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적용돼요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입니다우선 페러데이 장이론에 대해 판넨베르크가 설명하는 것을 제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기존 고전물리학에서는 물체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말합니다예를 들어해가 없어도 지구는 존재한다는 것이죠그런데 장이론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물이 에너지 장 위에 있다고 말합니다그리고 에너지가 어떤 특정한 조건 하에 구체화되면 그것이 사물로 나타난다고 말하죠

이것을 삼위일체론에 적용하면 장점이 있는데요우리는 보통 삼위일체론에서 세 인격들이 실체론적으로마치 당구공 세 개가 따로 있듯이세 인격도 각각 따로 있는 것처럼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세 인격이 하나인지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요그런데 장이론을 가지고 보면 세 인격들은 하나의 단일한 신성이 구체화되어 나타내는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패러데이의 장이론은 “성령이 어떻게 피조세계 가운데서 내재해서 일하시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피조세계에 내재해 있으면서 특히 생명의 근원으로서 생명을 촉발시키는 존재죠이 때영이 피조세계에 계시면서 어떻게 창조자로 활동하시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마치 패러데이의 장이 모든 사물들의 근원인 것처럼 하나님의 영도 모든 피조물의 근저에서 기본적으로 작용하신다는 것으로 설명을 해요그래서 ‘그 영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내재하시면서 존재의 근원으로 활동하신다그리고 그 영의 작용을 통해서낮은 수준의 피조물(무기체)로부터 유기체의 진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이 전체 창조의 과정이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으로 가도록하나님이 직접 창조자로 계속 활동하고 계시다’라고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패러데이의 장이론이 쓰인다고 할 수 있죠.

 

 

Q: 많은 성도들이 현대 과학의 성과와 성서의 내용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고 인지부조화 상태에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신학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신학의 문제일 수도 있고, 목회자의 문제이기도 해요가장 큰 문제는 신학과 교회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거기에는 신학자의 나태함이 분명 있을 수 있지만, 목회자의 불성실함도 있다고 봐요. 목회자들이 지적 활동에 대한 고민이 많이 있나요?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 설교강단에서 성도들과 얼마나 공유하고, 교회신앙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어요. 노력은 하시겠지만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에요. 또 다른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자면, 목사후보생들이 쓸데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한다는 거예요. ppt 만들고, 컴퓨터 하고, 노래도 잘해야 하고, 운전도 잘해야 하죠.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생계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무언가 일들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이런 것들을 강요해온 시스템이에요. 따라서 목사후보생들이 신학적 고민, 학문적인 고민을 할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인을 탓하자는 게 아니고, 어느 교단이나 큰 교회들이 후속세대를 기르는데 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개교회 차원에서는 투자를 하지만 전체교회 차원에서 하지 않습니다. 크게 보자면 이런 것들이 먼저 개선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목사후보생들이 좀 더 진지한 신학적 질문을 해서 이것이 책에만 갇혀있지 않고 교회현장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이것이 잘 되지 않아요.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문제입니다. “다들 그렇게 가르쳐서 그런 줄 알았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한국 평신도들이 그렇게 수준이 낮지 않습니다. 전문직인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교회에서 터무니 없는 소리가 오갈 때 이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그냥 입닫고 있어요. 쉽게 말하자면, 창조과학 같은 것을 교사대학에서 한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걸 다 받아들이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만히 있어요. 왜 그럴까요? 담임목사님을 존경해서 그럴 수도 있고, 교회 안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혹은 이야기함으로써 얻는 불편함보다 침묵하면서 얻는 이익이 더 커서일 수도 있고,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에 대해서, 교회 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좀 공론화해서 얘기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많아지면 그런 점도 자연스럽게 개선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오늘날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A: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고, 그 아들의 행위는 성령의 활동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로써 아들과 성령이 함께 아버지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함께 세 인격이 일하시며, 그래서 하나의 단일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구현되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계의 창조주시라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자칫 잘못하면 과학의 최신 성과들을 신학화하는 데에 급급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정작 신학적 내용을 상실할 우려도 있는데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잘 맞추면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현대적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 판넨베르크를 통해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또 과학이 실제 세계에 대한 유일한 해명 방식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적어도 세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 층위, 하나는 생물학적 층위, 하나는 인격적 층위인데 자연과학은 물리적 층위에 대해서 말할 뿐, 나머지 두 층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진화과학 같은 경우는 생물학적 층위에 관심이 있겠으나, 이들도 역시 자칫하면 인격적인 것, 인간의 도덕성, 사회성, 종교성 등(인격적 층위)을 생물학적 층위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근본적으로 강하죠. 따라서 “너무 이 이야기에만 집중 하다보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얘기인 ‘인격체로서 인간이 함께 더불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 낼까’하는 관심을 놓쳐버리고, ‘창조과학을 비판하거나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 것이 마치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제대로 구현하는 듯한 그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지금 그러고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성경은 ‘다윈이 왜 틀렸는지 혹은 아닌지’에 별로 큰 관심이 없어요하나님은 자유롭게 사랑하는 분이고, 관계 안에서 사랑하는 분이 우리를 자기와의 관계 안에 놔 주셨고, 우리를 상호 간의 관계 가운데(인간 간의 관계,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가운데) 서로를 자유롭게 사랑하는 그 사랑의 사귐이 충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고 거기에 부합하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가장 큰 과제일 것 같습니다. 신학의 가장 큰 과제도 그것일 것 같고요


* 정말 친절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인터뷰에 적극 참여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콜로퀴움에서 뵙겠습니다.


* 제13회 과신대 콜로퀴움 안내_ https://www.scitheo.org/317


posted by 과신대 기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