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 연대기>를 읽고

“얘들아, 지구 연대를 따져보면 6 천 년밖에 안 된대!”, “사람이랑 공룡이랑 같이 살았었대!” 나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다. 과학으로 성경을 증명할 수 있다니, 진짜 신기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창조과학 특별집회가 열렸다. 설레어서 가슴이 너무 떨렸다. 열심히 강의를 듣는 도중, 한 가지 생각에 꽂혀서 나머지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이 틀렸다고, 그래서 지구 나이는 46억 년이라고 측정한 게 틀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과학적으로’ 증명한다고 한다. 과학이 틀렸다는 걸 과학으로 증명한다고?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김민석 | 창조론 연대기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 375쪽

 

 

김민석 작가는 예전에 <마가복음 뒷조사>를 읽어서 알고 있었다. 참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또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던 차에 남편이 이 책을 권해주었다. 반가운 마음에 첫 장을 펼쳤는데,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사실, 그때는 정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서 한 번에 쭉 읽었는데, 기억나는 건 딱 한 마디였다.

 

“봐봐 ... 저기 저 별들에서 나오는 빛이 우리 눈에 보이려면 ... 그러니까, 10억 광년 떨어진 별이 보인다는 건 ... 그 별빛이 우리 눈에 오기까지 10억 년이 걸린 거잖아.” (p70-71)

 

주인공 중 한 명인 수영이의 대사다.

 

책을 다 읽고 내려놓았는데, 이 대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요즘 웬만한 사람들은 ‘광년’의 개념이 뭔지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간단한 개념이 이상하게도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삭제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다. 그냥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은 것이다. 나는 수영의 대사 때문에 그동안 뇌 한구석에 잠재워 두었던 콩 알만한 과학 지식들을 단편적으로 끌어내게 되었다. 그랬더니 성경이 다시 보였다. 끊임없이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교회에서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는 자매’로 찍히게 되었다.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기도를 더 많이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여기서 더 나가면, ‘진짜 하나님 믿냐?’라는 질문을 받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아무도 풀어주지 못했다.

 

<창조론 연대기>에는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한 수영이 있었고, 유준이 있었다.

 

 

이번에 서평을 쓰려고 다시 책을 찬찬히 읽으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첫째, 신앙과 과학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나도 예전에는 과학자는 모두 무신론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은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둘째, 창조론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6일 천지창조를 믿을 것이다. 하루는 24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나도 처음에는 여기에 의문을 가졌지만, 교회를 다니다 보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계속하면 안 된다고 여겨서 그냥 24시간*6일=144시간에 걸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믿기로 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어느 창조론을 믿든, 다른 사람이 믿는 창조론에 대해서 ‘나만 옳다’라고 여기는 독단적인 태도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걸 주장하는 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셋째, 문자 그대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평소에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내가 읽고 있는 성경의 문자대로만 읽으면 됐지, ‘원래 문자 그대로’가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하나님도 내 처지 다 아시는데라는 생각에 안일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질문하는 나’를 삶에서 지워버리게 되었다. 

 

넷째, 과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였다. 나는 과학과 복음이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여러 가지 질문으로 괴로워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과학적 질문들 때문에 괴로워하며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물리학자가 꿈이었던 온유가 과학과 신앙이 대립된다고 생각해서 꿈을 버린 부분에서 무척 마음이 아팠다.

 

 

유준, 김수영, 박온유, 박건호, 고민희, 박사무엘.

 

이 등장인물들은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갈등하고 있는 사람이다.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슬며시 이 책을 선물해주면 어떨까? 진지한 물음과 더불어 고등학생들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한 가지 팁! 나처럼 안면 기억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등장인물을 한 번에 구분하기 어려우니, 앞 페이지에 나오는 인물소개를 꼼꼼히 읽고 들어가는 걸 권한다.^^

 

이혜련 기자 (1221hannah@hanmail.net)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하나님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는 분입니다.

과신대 사람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이용주 교수님


* 이번 달에는 3월 콜로퀴움에서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에 대해 강의해주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의 이용주 교수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삼위일체론과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에 대해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이 | 이용주 교수
인터뷰어 | 우인, 심기주
사진 | 심왕찬
글 | 심기주


Q: 먼저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여러 설명을 하는데,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A이건 판넨베르크의 설명은 아니고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될 때 다 나왔던 질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 이게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신념인데 교회 안에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은 ‘아들은 아버지의 첫 번째 피조물이지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그 후대 분들이 논쟁 과정에서 정리를 이렇게 했어요‘시간 안에서 아버지(성부)가 아들(성자)을 낳으신 게 아니다. 영원 가운데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고백인 거죠. 이 때  ‘영원은 인간이 생각하는 유한한 시간의 선후관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무시간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더 나올 수 있는 것이 “어떻게 성부가 성자를 낳았지?라는 것이죠. 이 의미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요. 아버지는 아들 없이 계시지 않고 아들은 아버지 없이 계시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야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낳아야 아들이 있죠. 그래서 상호의존적입니다. 여기에 성령까지 해서 세 인격들의 작용과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단일한 신성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틀거리입니다.

 


Q: 하나님이 영원 속에 계시다는 게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신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영원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 더 알려주세요.

A하나님의 영원을 시간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현재(presence)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하신다는 거죠. 과거 안에도 현재로 계시고, 현재에도 현재로 계시고, 미래에도 현재로 계시는, 영원히 현재하시는 분인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시간 양태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고, 시공간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설명에 패러데이의 장이론을 매개체로 사용하는데, 흘러가는 시간구조 안에 하나님이 영원으로 내재하신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충족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현재 가운데 계신다면, 이 세계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인과율적 법칙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오는 뭔가 새로움의 장으로서 현재가 존재할 수 있지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 역시 새로움이 밀려 들어 오고 있는 장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이 세계에 새로움이 출연하는 통로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며 성령이신 하나님이 세계 안에 계시면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작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과거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원인과 결과들만으로는 포섭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사건들이 역사 안에 출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Q: 판넨베르크가 패러데이의 장이론을 이용해서 성령의 일하심을 설명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장이론이 조직신학에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적용돼요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입니다우선 페러데이 장이론에 대해 판넨베르크가 설명하는 것을 제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기존 고전물리학에서는 물체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말합니다예를 들어해가 없어도 지구는 존재한다는 것이죠그런데 장이론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물이 에너지 장 위에 있다고 말합니다그리고 에너지가 어떤 특정한 조건 하에 구체화되면 그것이 사물로 나타난다고 말하죠

이것을 삼위일체론에 적용하면 장점이 있는데요우리는 보통 삼위일체론에서 세 인격들이 실체론적으로마치 당구공 세 개가 따로 있듯이세 인격도 각각 따로 있는 것처럼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세 인격이 하나인지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요그런데 장이론을 가지고 보면 세 인격들은 하나의 단일한 신성이 구체화되어 나타내는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패러데이의 장이론은 “성령이 어떻게 피조세계 가운데서 내재해서 일하시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피조세계에 내재해 있으면서 특히 생명의 근원으로서 생명을 촉발시키는 존재죠이 때영이 피조세계에 계시면서 어떻게 창조자로 활동하시느냐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마치 패러데이의 장이 모든 사물들의 근원인 것처럼 하나님의 영도 모든 피조물의 근저에서 기본적으로 작용하신다는 것으로 설명을 해요그래서 ‘그 영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내재하시면서 존재의 근원으로 활동하신다그리고 그 영의 작용을 통해서낮은 수준의 피조물(무기체)로부터 유기체의 진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이 전체 창조의 과정이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사귐으로 가도록하나님이 직접 창조자로 계속 활동하고 계시다’라고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패러데이의 장이론이 쓰인다고 할 수 있죠.

 

 

Q: 많은 성도들이 현대 과학의 성과와 성서의 내용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고 인지부조화 상태에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신학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신학의 문제일 수도 있고, 목회자의 문제이기도 해요가장 큰 문제는 신학과 교회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거기에는 신학자의 나태함이 분명 있을 수 있지만, 목회자의 불성실함도 있다고 봐요. 목회자들이 지적 활동에 대한 고민이 많이 있나요?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 설교강단에서 성도들과 얼마나 공유하고, 교회신앙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어요. 노력은 하시겠지만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에요. 또 다른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자면, 목사후보생들이 쓸데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한다는 거예요. ppt 만들고, 컴퓨터 하고, 노래도 잘해야 하고, 운전도 잘해야 하죠.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생계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무언가 일들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이런 것들을 강요해온 시스템이에요. 따라서 목사후보생들이 신학적 고민, 학문적인 고민을 할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인을 탓하자는 게 아니고, 어느 교단이나 큰 교회들이 후속세대를 기르는데 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개교회 차원에서는 투자를 하지만 전체교회 차원에서 하지 않습니다. 크게 보자면 이런 것들이 먼저 개선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목사후보생들이 좀 더 진지한 신학적 질문을 해서 이것이 책에만 갇혀있지 않고 교회현장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이것이 잘 되지 않아요.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문제입니다. “다들 그렇게 가르쳐서 그런 줄 알았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한국 평신도들이 그렇게 수준이 낮지 않습니다. 전문직인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교회에서 터무니 없는 소리가 오갈 때 이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그냥 입닫고 있어요. 쉽게 말하자면, 창조과학 같은 것을 교사대학에서 한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걸 다 받아들이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만히 있어요. 왜 그럴까요? 담임목사님을 존경해서 그럴 수도 있고, 교회 안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혹은 이야기함으로써 얻는 불편함보다 침묵하면서 얻는 이익이 더 커서일 수도 있고,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에 대해서, 교회 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좀 공론화해서 얘기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많아지면 그런 점도 자연스럽게 개선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오늘날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A: 기독교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고, 그 아들의 행위는 성령의 활동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로써 아들과 성령이 함께 아버지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함께 세 인격이 일하시며, 그래서 하나의 단일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구현되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계의 창조주시라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과학과 신학의 대화도 자칫 잘못하면 과학의 최신 성과들을 신학화하는 데에 급급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정작 신학적 내용을 상실할 우려도 있는데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잘 맞추면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현대적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 판넨베르크를 통해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또 과학이 실제 세계에 대한 유일한 해명 방식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적어도 세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 층위, 하나는 생물학적 층위, 하나는 인격적 층위인데 자연과학은 물리적 층위에 대해서 말할 뿐, 나머지 두 층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진화과학 같은 경우는 생물학적 층위에 관심이 있겠으나, 이들도 역시 자칫하면 인격적인 것, 인간의 도덕성, 사회성, 종교성 등(인격적 층위)을 생물학적 층위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근본적으로 강하죠. 따라서 “너무 이 이야기에만 집중 하다보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얘기인 ‘인격체로서 인간이 함께 더불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 낼까’하는 관심을 놓쳐버리고, ‘창조과학을 비판하거나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 것이 마치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제대로 구현하는 듯한 그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지금 그러고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성경은 ‘다윈이 왜 틀렸는지 혹은 아닌지’에 별로 큰 관심이 없어요하나님은 자유롭게 사랑하는 분이고, 관계 안에서 사랑하는 분이 우리를 자기와의 관계 안에 놔 주셨고, 우리를 상호 간의 관계 가운데(인간 간의 관계,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가운데) 서로를 자유롭게 사랑하는 그 사랑의 사귐이 충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고 거기에 부합하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가장 큰 과제일 것 같습니다. 신학의 가장 큰 과제도 그것일 것 같고요


* 정말 친절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인터뷰에 적극 참여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콜로퀴움에서 뵙겠습니다.


* 제13회 과신대 콜로퀴움 안내_ https://www.scitheo.org/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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