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잃어버린 일상의 조각을 찾아서

주목할 만한 일상 | 프레드릭 뷰크너 | 비아토르 | 2018


김영웅



내가 만약 신이었다 하더라도 진리처럼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가장 높은 곳이나 가장 빛나는 곳이 아닌 오름직한 곳, 먼지가 끼고 빛이 바래 손님을 맞이할 때면 늘 분주하게 빗자루질과 걸레질을 해야 하는, 평범하고 소소한 우리들의 일상가운데 감추어두었을 것이다.

 

버젓이 존재하지만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존재들의 향연. 뒤돌아보면 또 놓쳐버린 아쉬움으로 가득 찬 기억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 매일 우리들을 찾아오지만, 마치 투명인간처럼 우리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 소중한 시간들. 늘 높고 빛나는 특별함만을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무시나 희생을 당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어 한층 낮은 자세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고 마치 자신의 인생을 재방문하듯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을 발견한 소수의 무리들에게는 항상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 되어주는 삶의 터전. 비록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아무나 볼 수 없고, 또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삶의 조각들. 이는 곧 신비,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일 것이다. 눈이 깊고 겸손한 자들에게 이런 소중한 가치가 먼저 발견되는 이유를 자연의 이치와 신의 섭리에서 찾는 나는 지나친 착각에 빠진 것일까?

 


이 책의 저자 프레드릭 뷰크너는 일상이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목하라고 외친다.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우리들의 삶이 있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 우리들의 현재가 살아 숨 쉬는 곳, ‘지금, 여기의 무대, 즉 우리들의 일상을 알아채고 느끼고 누리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 우리 서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좀 더 예민해지고, 그 사실을 좀 더 의식하고, 그 사실에 좀 더 민감해지십시오!” 그렇다. 우리가 제한된 육신에 갇혀있음에도 영원한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 현장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바로 우리들의 일상이다. 우린 일상을 정직하게 대면함으로써 우리가 한계를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역설적인 해방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그 안에 각인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노래할 수 있다. 뷰크너는 이러한 성경적 신앙이 가리키는 신비, 즉 우리가 흙과 별에서 온 물질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표를 지닌, 거룩한 본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 가장 깊은 신비라고 덧붙인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일상에 주목하는 행위를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비유한다. 렘브란트의 눈으로 보고, 바흐의 귀로 듣고, 외피 아래 무엇이 있든 그것을 꿰뚫어 보는 엑스레이의 눈으로 보십시오!” 그리고 예술과 신앙은 아주 흡사한 목표를 향해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면서, 성경적 신앙은 다른 뭔가를 말하기에 앞서 우리의 일상에서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방식대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시공간이 다름 아닌 우리들의 일상이기에, 그 한 가운데 멍하니 서서 일상을 놓쳐버리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 밖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자라면, 그리고 개인구원론만 강조되고 사적인 복음이 부끄러움 없이 정당화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복음의 공적인 본질을 알아차린 자라면, 일상의 의미를 결코 반복', ‘타성’, 혹은 '장망성'이라는 단어에 종속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와 교차하는 시공간이 바로 우리들의 일상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말이다.


 

세상은 우리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곳이다. 저자는 세상에 주목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목한다는 것, 마음을 쓴다는 것, 눈을 뜨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두는 것을 뜻합니다.” 이어서 가장 으뜸 계명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서 그 둘은 똑같은 일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가까운 이웃의 얼굴을, 하도 자주 보기 때문에 실존에서 배제시켰던 그들의 얼굴을 주목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가장 가까운 이웃을 향해 우리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구체적인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다. 사랑하라는 계명과 같은 거대담론만을 외치는 관념론자들은 그들의 머리는 뜨거울지 몰라도 손과 발은 차가운 법이다. 사랑의 이해와 깨달음이 차가워진 손과 발까지 따뜻한 혈액이 되어 전달되기 위해서도 우린 먼저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상이 소중하고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이유는 거기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뷰크너는 모든 예술 중에서 스토리텔링 예술보다 더 성경적 신앙의 본질에 기본이 되는 것은 없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성경이야말로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적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비단 한 사람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함이 아니다. 뷰크너가 간파했듯, 우린 모두 개성을 가진 독립된 존재이지만, 어떤 차원에서는 결국 우린 모두 같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타인의 내러티브에서 자신의 내러티브를 읽어내는 건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하는 작업이며, 그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DNA를 읽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정말 매혹적인 일이다. 성경을 읽어가는 과정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거대 서사에 감동을 받고 그것이 던져주는 큼직한 메시지에 마음이 움직이는 단계를 지났다면, 이제 나아가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일상이다. 거대 서사를 이루는 것도 결국 작은 일상들이라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나의 작은 일상의 이야기와 성찰, 그리고 그 작은 그릇에 담긴 하나님의 DNA 조각을 읽어내는 소소한 작업은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정직하고 치열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주목할 이유를 잃어버린 나의 일상을 돌아본다. , 우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가는 걸까? 매순간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린 모든 순간을 마치 흐르는 물에 종이배를 떠내려 보내듯 그냥 흘려보내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선 어느새 둔해져버린 알아챔의 근력을 다시 키울 필요가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아무나 사용하지 못하는 힘. 조금은 더 낮은 자세로, 조금은 더 감사한 마음으로, 잠시 멈추어 숨을 가다듬고 창조세계를 바라보자. 그리고 귀 기울여보자. 경이감은 최고의 도우미가 될 것이다.

 

지나갔던 과거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모두 우리 영혼을 내려놓고 안식을 취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를 누리는 일은 현재 나의 작은 일상을, 반복되어 지겨워졌던 그 보잘것없고 누추하기만 한 일상을 낯설고 새롭게 보는 작업이 수반된다. 우리는 이제 선택할 수 있다. 아니, 원래 그럴 수 있었다. 한 장인 것만 같았던 카드는 실은 두 장이었다. 우리는 지나치지 않고 멈출 수 있고, 흘려보내지 않고 경이감에 찬 채 사랑스럽고 겸손한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바라볼 수 있으며, 내려두었던 영혼의 이어폰을 다시 꽂고 귀 기울여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아름다운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마침내 우리도 자연세계의 일부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